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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려사절요 제31권 신우2

장안봉(微山) 2013. 5. 28. 23:00

고려사절요 제31   

 

 

 신우 2(辛禑二)

 

 

경신 신우 6(1380), 대명 홍무 13 

 

 

○ 봄 정월에 유모 장씨를 베어 머리를 서울에 전하였다.

○ 명덕태후(明德太后) 홍씨(洪氏)가 훙()하였다. 전날 저녁에 태후가 우의 손을 잡고 이르기를, “우리나라가 대를 전한 것이 장장 5백 년이나 되어간다. 대개 임금들이 신하의 말을 듣지 않는 이가 많은데, 원하건대 왕은 대의를 의논하거나 대사를 결정할 때에 반드시 시중 경복흥ㆍ이인임과 판삼사 최영 및 기타 여러 재상에게 물어서 하고, 조심하여 감정에 움직여서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하지 말라. 또 임금의 거둥을 반드시 사관이 기록하니, 자주 교외에 나가서 놀거나 구경하는 것을 일삼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 우가 남산(男山)에서 말을 타고 달렸다.

2월에 이무방ㆍ배언이 등주(登州)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무방 등이 요동에 이르니, 도사(都司)가 명나라 조정에 아뢰었다. 황제가 이르기를, “조공하는 것이 약속과 같지 않으니, 반드시 전의 약속과 같이 하여야 와서 조공하는 것을 허락하겠다." 하였다.

○ 북원이 예부 상서 시라문(時刺問), 직성사인(直省舍人) 대도려(大都閭)를 보내어 우를 책봉해서 태위(太尉)로 삼았다.

○ 대사헌 우현보 등이 목인길(睦仁吉)이 몰래 다른 뜻을 품었다고 모함하여 탄핵하였으므로, 관직을 삭탈하고 집을 적몰하여 귀양보냈다.

○ 왜적이 영선현(永善縣)을 침범하고, 또 보성군을 침범하여 부유현(富有縣)으로 들어갔다.

3월에 왜적이 순천 송광사(松廣寺)를 침범하였다.

○ 이인임ㆍ임견미는 시중 경복흥이 청렴하고 정직한 것을 꺼리며, 술을 즐기고 일을 보지 않는다고 트집잡아 우에게 참소해서 청주에 귀양보내고, 또 복흥과 친한 문하평리 설사덕(薛師德), 밀직부사 표덕린, 판서 정용수(鄭龍壽)ㆍ이을경(李乙卿)ㆍ왕백(王伯), 중랑장 나흥준(羅興俊)에게 곤장을 때려서 귀양보냈는데, 사덕과 을경은 길에서 죽었다.

○ 우가 교외에 나가서 사냥하는데, 최영 등이 짐승을 몰아 앞으로 나오면 우가 쏘았다.

○ 밀직부사 문천식을 북원에 보내어 절일을 하례하고, 책명(冊命)을 사례하게 하였다.

○ 왜적이 광주(光州)와 능성(綾城)ㆍ화순(和順) 두 현을 침범하니, 원수 최공철(崔公哲)ㆍ김용휘(金用輝)ㆍ이원계(李元桂)ㆍ김사혁(金斯革)ㆍ정지(鄭地)ㆍ오언(吳彦)ㆍ민백훤(閔伯萱)ㆍ왕승보(王承寶)ㆍ도흥(都興)을 보내어 막았다.

○ 윤환(尹桓)을 문하시중으로 삼았다.

○ 여름 4월에 숭경윤(崇敬尹) 주의(周誼)를 요동에 보내어 자문(咨文)을 전하기를, “소방이 대국을 섬기는 예가 잘못된 적이 없어서 천자께서 걱정하고 불쌍히 여기시는 은혜를 입어, 특별히 조서를 내리시어 3년에 한 번씩 조빙(朝聘)하도록 허락하였는데, 근년 이래로 조공이 통하지 못하는 것은 손 내시(孫內侍)가 죽은 것과 김의(金義)의 반역 사건으로 인한 것입니다. 손 내시를 본국이 만일 해쳤다면 당연히 연원사(延院使) 일행을 해칠 것이지, 어찌 그 사람에게만 그쳤겠습니까. 김의는 오랑캐의 땅으로 도망하여 들어가 감히 환국하지 못하니, 본국에서 그 일에 간여하지 않은 것은 여러 사람이 다 같이 아는 바입니다. 이같은 사정을 상달하지 못하여 억울함을 펼 수가 없으니, 자세히 살펴서 특별히 명백하게 밝혀, 소방으로 하여금 다시 본래 내리신 조서의 뜻에 따라 배신(陪臣)의 입조(入朝)를 허용하여 대대로 자손으로 하여금 영구히 신첩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의가 요동에 이르자 도사가 아뢰니, 황제가 의를 잡아서 남경에 오도록 명령하였다.

○ 최영에게 해도 도통사(海道都統使)를 겸하게 하였다. 영이 우에게 아뢰기를, “신이 일을 맡은 것이 이미 많은데, 또 해도를 도통(都統)하면 신이 감당하지 못할 듯합니다. , 지금 전함이 겨우 1백 척밖에 안 되며, 수졸이 겨우 3천 명입니다. 만일 군사를 출동시킨다면 1만 명은 써야 하겠는데, 창고가 모두 비었으니 어떻게 공급한단 말입니까." 하였다. 우가 이르기를, “방비하고 막는 일이 급하므로 부득이 경으로 겸하게 하는 것이니, 굳이 사양하지 말라. 또 우리나라의 군수(軍需)로써 1만여 명의 군사를 먹이기가 참으로 어려우니, 경은 3천 명의 군사를 써서 한명이 백명을 감당하게 하라." 하였다. 영이 아뢰기를, “신이 이미 늙어서 제때에 배알하지 못하는데, 이제 다행히 나와 뵈었으니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조심하고 공경하고 두려워하소서. 백성의 편안하고 위태한 것이 모두 주상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우가 영의 공을 녹()하여 철권(鐵券)을 내려주었다.

5월에 우가 석전(石戰) 놀이를 구경하려 하니, 지신사(知申事) 이존성(李存性)이 간하기를, “이것은 주상께서 보실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우가 싫어하여 어린 놈들을 시켜서 존성을 구타하였는데, 존성이 빨리 나가니, 우가 탄환을 가지고 쏘았다. 나라 풍속에, 단오 때가 되면 시정의 무뢰배들이 큰 거리에서 떼를 지어 왼편 오른편으로 나누어 기왓장과 돌을 들고 서로 치거나, 뒤섞여 짧은 몽둥이를 가지고 승부를 결정하기도 했는데, 그것을 석전이라 한다.

○ 왜적이 결성(結城)ㆍ홍주(洪州)를 침범하였다.

○ 사헌부가 상소하기를, “우리 역대 선왕께서는 모두 서연(書筵)을 베풀고 도리를 강론해서, 기질을 함양하고 덕성을 훈도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던 처음에는 날마다 서연을 열어 온 나라가 기뻐하였는데, 근래에는 강독하는 것을 전폐하셔서 안팎의 신민들이 실망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다시 서연을 열어서 날마다 노성한 대신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도리를 강론하소서. 보평(報平)의 예는 정사를 결재하고 명령을 펴는 것이며, 실로 조종(祖宗)의 정해진 법이어서 선대의 군왕께서 삼가 받들어 행한 것인데, 근자에 폐지하고 행하지 않으니, 조종의 좋은 법에 결함이될 뿐만 아니라, 군국(軍國)의 기무(機務)를 정체하게 함이 많으니, 전하는 이제부터 보평의 예를 폐하지 마옵소서. 각령(各領)의 원장(員將)들은 오로지 숙위(宿衛)와 방어를 위하여 설치한 것인데, 근래에는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을 따지지 않고 모두 녹을 주기 때문에, 혹 하는 일 없이 녹만 먹어서 숙위를 허약하게 하기도 하니, 이제부터는 근태(勤怠)를 조사하여 녹을 주소서.

조회는 나라의 큰일이기 때문에, 비와 눈이 내리거나 큰 연고가 있을 때 이외에는 조회를 정지한 일이 없었는데, 근래에는 매양 조회를 정파(停罷)하므로, 상국의 사신을 맞고 보내는 부득이한 조회가 있어도 백관이 반열(班列)할 차례를 알지 못하여 항오(行俉)가 어지럽고 차서(次序)를 잃어서 조정의 반열이 엄숙하지 못하오니, 이제부터는 한 달에 두 아일(衙日)만은 조회를 정지하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무릇 사형은 반드시 3번 복심하여 아뢰어 왕과 신하가 함께 의논하여 결단하는 것이 선왕조의 고정된 법인데, 지금 안팎의 관리들이 사형을 판결할 때에 모두 아뢰어 들리게 하지 않고 마음대로 결정하여, 마침내 죄 없이 목숨을 잃어 천지의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니, 이제부터는 안팎의 사형을 결정하는 데는 맡은 관리가 도당(都堂)에 자세히 보고해서 의논하여 아뢰게 하소서." 하니, 우가 받아들였다.

○ 이문화(李文和) 33명과 명경(明經) 6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왜적을 막지 못했기 때문에 전라도 조전원수 최공철, 양광도 도순문사 안익(安翊)에게 곤장을 쳐서 귀양보내고, 도진무(都鎭撫) 2명을 베었다.

6월에 우가 미행(微行)해서 대장간에 이르러 쇠를 단련하는 제구를 빼앗아서 궁중에 대장간을 설치하였다. 그 주인이 달려와 최영에게 고하므로, 영이 그 사람을 가두고 궁궐에 나아가 대장간을 설치하지 말기를 청하니, 우가 노하여 근신에게 명해서 그 주인을 구타하였다.

○ 왜적이 정읍현(井邑縣)에 침범하니 원수 지용기(池湧奇)가 쳤다.

○ 우가 비로소 보평청(報平廳)에 나와서 정사를 듣고 재상에게 이르기를, “매월 2일과 16일에 각사(各司)의 장은 친히 맡은 바 직무를 아뢰라. 내가 능하고 능하지 못한 것을 고과(考課)하겠다." 하고, 또 찬성사 홍영통(洪永通)에게 이르기를, “늙은 사람을 임용한 것은 좋은 계책을 듣고자 함인데, 경이 내 곁에 있으면서 어찌 말 한마디도 없는가." 하니, 영통이 쩔쩔 매면서 대답하지 못하였다.

○ 근신전(謹身殿)에 벼락이 쳤으므로, 황제가 조서를 내려 천하에 사()하였다.

○ 우가 임치(?) 등 어린 놈들을 거느리고 남산(男山)에서 말을 타고 달렸다.

○ 경성에 흉년이 들었다.

○ 가을 7월 신묘일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하늘에 뻗쳤다.

○ 우가 생일에 이죄(二罪) 이하의 죄를 용서하였다.

○ 전라도 원수 지용기(池湧奇)가 왜적과 명량향(鳴良鄕)에서 싸워 사로잡힌 사람 1백여 명을 탈환하였다.

○ 전법판서 권계용(權季容)을 양광ㆍ전라도 찰리사(察理使)로 삼고, 전 판전농사(判典農事) 황희석(黃希碩)을 체복사(體覆使)로 삼았다.

○ 왜적이 서주(西州)를 침범하고, 또 부여ㆍ정산(定山)ㆍ운제(雲梯)ㆍ고산(高山)ㆍ유성(儒城) 등의 현을 침범하고 마침내 계룡산으로 들어갔다. 이때에 부녀와 아이들이 적을 피하여 산으로 올랐다가 많은 해를 입었다. 양광도 원수 김사혁(金斯革)이 쳐서 쫓으니, 왜적이 드디어 청양(靑陽)ㆍ신풍(?)ㆍ홍산(鴻山)을 노략질하고 갔다.

○ 북원이 사신을 보내어 사()를 반포하였다.

○ 왜적이 옥주(沃州)ㆍ금주(錦州)를 침범하고, 또 함열(咸悅)ㆍ풍제(?) 등의 현을 침범하였다.

○ 우가 어린놈들에게 후원에 구덩이를 파게 해 놓고, 지신사 이존성(李存性)을 속여 빠지게 하였다. 날마다 이런 놀이로 오락을 삼았다.

○ 우가 나가서 사냥하고자 하니, 이인임ㆍ최영 등이 말렸다. 우가 이르기를, “내가 본래 매와 개를 좋아하지 않는데, 실상은 여러 재상들이 인도한 것이다. 또 경 등이 사냥을 좋아하는데, 곡식밭을 밟지 않고 날아다닐 수 있는가." 하였다.

8월에 해도 원수(海道元帥) 나세(羅世)ㆍ심덕부(沈德符)ㆍ최무선(崔茂宣)을 보내어 전함 1백 척으로 왜적을 쫓아 잡았다.

○ 우가 성 남쪽에서 사냥을 무려 6일 동안이나 하였는데, 환관 이득분(李得芬)ㆍ김실(金實)을 수성원수(守城元帥)로 삼고, 친히 활과 화살을 차고 매[]를 받쳐들고 나가서, 환관과 어린놈들로 하여금 오랑캐 노래를 부르고 오랑캐 피리를 불며 거문고를 타고 북을 치며 따르게 하였다. 지신사 이존성이 홀로 활과 화살을 차지 않으니, 우가 노하여 벌을 주었다.

○ 우의 아들 창()이 태어나니, 일죄(一罪) 이하의 죄를 용서하였다.

○ 왜적이 공주를 침범하니, 김사혁이 쳐서 쫓았다.

○ 왜적의 배 5척이 진포(鎭浦) 어귀에 들어와 큰 밧줄로 서로 잡아매고 군사를 나누어 지키다가, 드디어 해안으로 올라 각 주()ㆍ군()으로 흩어져 들어가서 마음대로 불사르고 노략질하니, 시체가 산과 들에 덮이고, 곡식을 그 배에 운반하느라고 땅에 쏟아진 쌀이 한 자 부피나 되었다. 나세(羅世)ㆍ심덕부ㆍ최무선 등이 진포에 이르러, 무선이 처음으로 만든 화포(火砲)를 써서 그 배를 불태우니, 연기와 화염이 하늘에 넘쳤다. 왜적이 거의 다 타죽었고, 바다에 빠져 죽은 자도 또한 많았다. 왜적이 포로로 잡은 자녀를 모조리 죽여 시체가 산같이 쌓여서, 지나는 곳마다 피의 물결이었으며, 3 30여 명만이 탈출하여 왔다. 죽음을 벗어난 적은 옥주(沃州)로 달아나서, 육지에 있던 적과 합세하여 이산(利山)ㆍ영동(永同)현을 불태웠다.

○ 우가 골목에 나가 놀면서 개를 쏘았다. 이로부터 날마다 닭과 개를 쏘는 짓을 일삼으니, 성 안의 닭과 개가 거의 다 없어졌다.

○ 김사혁이 임주(林州)에서 왜적을 쫓아 46급을 잡아서 베었다.

○ 왜적이 황간(黃澗)ㆍ어모(禦侮) 두 현을 불사르고, 또 중모(中牟)ㆍ화령(化寧)ㆍ공성(功城)ㆍ청리(靑利) 등의 현을 침범하여, 마침내 상주를 불태웠다.

○ 나세ㆍ최무선ㆍ심덕부 등이 돌아오니, 우가 각각 금 50냥을 내려 주고, 비장 정용(鄭龍)ㆍ윤송(尹松)ㆍ최칠석(崔七夕) 등에게는 각각 은 50냥을 내려 주었다.

○ 왜적이 선주(善州)를 불살랐다. 처음에 적이 상주에 있는데, 전라도 원수 지용기 휘하의 배검(裵儉)이 가서 적을 정탐하기를 자청하므로, 여러 원수가 허락하였다. 검이 이르니 적이 죽이려 하였다. 검이 말하기를, “천하에 사자(使者)를 죽이는 나라는 없다. 우리나라의 여러 장수가 정병(精兵)을 수없이 거느리고 있으니 싸우면 반드시 이길 것이나, 너희 무리를 다 죽이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너희들이 한 고을을 차지하고 살면 어떠한가." 하였다. 적이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를 속이는 것이다. 너희 나라에서 참으로 우리를 살려 주려고 한다면, 왜 우리 배를 빼앗았는가. 우리도 잘 알고 있다." 하고 검에게 술을 주고 마침내 무장한 기병으로 호위하여 보냈다. 적이 2, 3세 된 계집아이를 잡아서 머리를 깎고 배를 갈라 깨끗이 씻은 다음 쌀과 술을 함께 차려 놓고 하늘에 제사지내는데, 적이 좌우로 나뉘어 풍악을 울리며 늘어서서 절하였다. 제사가 끝나자 그 쌀을 나누어 쥐고, 술 석 잔을 마시고, 그 아이를 불태웠는데, 창자루가 홀연히 꺾어지니 점치는 자가 말하기를, “우리가 여기에 머무르면 반드시 패할 것이다." 하여, 곧 군사를 끌고 선주로 달아났다.

○ 사신을 보내어 양광도ㆍ서해도에서 병사를 징발하였다.

○ 왜적이 경산부(京山府)를 침범하였다.

○ 우리 태조[我太祖 이성계]를 양광ㆍ전라ㆍ경상도 도순찰사로 삼고, 찬성사 변안열(邊安烈)을 체찰사로 삼아서 부()가 되게 하고, 우인열ㆍ도길부ㆍ박임종ㆍ홍인계ㆍ임성미ㆍ이원계를 원수로 삼아, 모두 태조의 절제를 받게 하였다. 군사가 장단(長湍)에 이르니 흰 무지개가 해를 꿰었는데, 점치는 자가 말하기를, “승전할 징조다." 하였다. 왜적이 진포에서 패한 뒤로 군ㆍ현을 쳐서 함락시키고 살육과 약탈을 멋대로 하여 왜적의 기세는 더욱 치성해지고, 3() 연해의 땅은 쓸쓸하게 텅 비었다. 왜란이 있은 이래로 이같이 참혹한 일은 없었다.

○ 왜적이 사근내역(沙斤乃驛)에 둔을 쳤는데, 원수 배극렴(裵克廉)ㆍ김용휘(金用輝)ㆍ지용기(池湧奇)ㆍ오언(吳彦)ㆍ정지(鄭地)ㆍ박수경(朴修敬)ㆍ배언(裵彦)ㆍ도흥(都興)ㆍ하을지(河乙沚)가 공격하였으나 패전하여 수경과 배언이 죽고, 죽은 장교와 군사가 5백여 명이나 되었다. 왜적이 드디어 함양(咸陽)을 도륙하였다.

9월에 우가 여러 어린놈들을 데리고 후원에서 말을 달리며, 혹 자기 손으로 밧줄을 날리어 말을 옭기도 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다.

○ 우가 궁전 위에 올라가 기왓장과 조약돌을 가지고 사람을 치고, 또 후원에 들어가서 상호군 문달한(文達漢), 지신사 이존성과 활쏘기를 익히면서 존성의 갓을 벗기어 과녁을 만들었다.

○ 밀직부사 배극렴을 경상도 도순문사로 삼았다.

○ 왜적이 남원산성을 쳐서 이기지 못하고 물러가 운봉현(雲峯縣)을 불사르고, 인월역(引月驛)에 둔을 치고는 소문을 퍼뜨리기를, “장차 광주의 금성(金城 전남 담양(潭陽))에서 말을 먹여 북으로 올라가겠다." 하니, 안팎이 크게 진동하였다.

○ 우가 밤에 환관들과 함께 밀직사사 유수(柳遂)의 집에 이르러 그 딸을 찾았다. 수가 아뢰기를, “신에게 딸이 있는 것은 국인이 모두 아는 바인데, 만일 빙례(聘禮)를 행하신다면 신이 감히 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날 밤 우가 그 집에 5번이나 갔으나 마침내 얻지 못하였다.

○ 우리 태조가 변안열 등과 함께 남원에 이르니, 배극렴 등이 와서 길에서 배알하며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적이 험한 곳에 의지하고 있으니, 나오는 것을 기다려서 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태조가 개연(慨然)히 말하기를, “군사를 일으켜 적을 치면서 적을 보지 못한 것이 한이거늘, 이제 적을 만났는데도 치지 않는 것이 옳으냐." 하고, 드디어 여러 장수의 부서를 정하고서 밝아 오는 아침에 맹세하고, 동으로 운봉(雲峯 전북 남원)을 넘어 적과의 거리가 수십 리쯤 되는 황산(荒山) 서북에 이르러 정산봉(鼎山峯)에 올랐다. 태조가 길 오른편의 험한 지름길을 보고 말하기를, “적이 반드시 이 길로 나와 우리 배후를 습격할 것이다. 내가 이 길로 나가겠다." 하였다. 여러 장수는 모두 평탄한 길로 나갔는데, 적의 기세가 매우 날쌘 것을 바라보고 싸우지 않고 퇴각하였는데, 해는 벌써 기울었다.

태조가 험한 길에 들어서니, 과연 적의 기예(奇銳) 부대가 튀어나왔다. 태조가 대우전(大羽箭) 20개를 쏘고 계속하여 유엽전(柳葉箭) 50여 발이나 쏘아 모두 그 얼굴을 맞히니, 활시위 소리에 따라 죽지 않는 자가 없었다. 모두 세 번을 만나 무찔러 섬멸하였다. 또 땅이 진흙탕이어서 저편과 우리가 모두 그 속에 빠져 서로 엎치락뒤치락하였는데, 나와서 보니 죽은 것은 모두 적이고, 우리 군사는 한 사람도 상하지 않았다.

적이 산에 웅거하고 굳게 지키니, 태조가 군사를 지휘하여 요해처에 나누어 웅거하게 하고, 휘하 이대중(李大中) 10여 명을 시켜서 도전하였다. 태조가 올려치니 적이 죽을 힘을 다하여 충돌하므로, 우리 군사가 뿔뿔이 쫓겨 내려왔다. 태조가 장사(將士)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말고삐를 단단히 잡아서 말이 넘어지지 않게 하라." 하였다. 조금 뒤에 태조가 다시 나팔을 불게 하여 군사를 정돈하고, 개미처럼 기어올라 적진에 충돌하였다. 적장 한 사람이 창을 끌고 곧장 태조의 뒤로 달려와 매우 위급하였는데, 부하 장수 이두란(李豆蘭)이 말을 타고 달려오며 크게 소리치기를, “영공(令公), 뒤를 보시오. 영공, 뒤를 보시오." 하였으나, 태조가 미처 보지 못하므로 두란이 쏘아 죽였다. 태조는 말이 화살에 맞아 거꾸러지면 바꿔 타고, 또 맞아서 거꾸러지면 또 바꿔 탔으며, 나는 화살이 태조의 왼편 다리를 맞혔으나 태조가 화살을 빼어 버리고 더욱 용감하게 싸우자 군사들은 태조가 부상한 것을 알지 못했다. 적이 태조를 두어 겹으로 포위하였으나, 태조가 기병 두어 사람과 함께 포위를 뚫고 나왔다. 적과 또 충돌하여 태조가 선 자리에서 8명을 죽이니, 적이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태조가 하늘의 해를 가리켜 맹세하고, 좌우를 지휘하여 말하기를, “겁나는 사람은 물러가라. 나는 적에게 죽겠다." 하니, 장사들이 감동하고 분발하여 용기가 백백해서 사람마다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 적은 박혀 있는듯이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이 겨우 15, 16세 가량 되어 보이는 한 적장은, 얼굴이 단정하고 고우며 빠르고 날래기가 비할 데 없었다. 백마를 타고 창을 휘두르며 달려와서 충돌하니, 향하는 곳마다 쫓기고 쓰러져 감히 당할 자가 없었다. 우리 군사들이 아기발도(阿只拔都)라고 부르며 다투어 피하였다. 태조가 그 용맹하고 날쌤을 애석하게 여겨 두란에게 생포하라고 명령하였다. 두란이 여쭈어 말하기를, “만일 생포하려면 반드시 사람을 상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 사람이 얼굴까지 갑옷을 입어서 쏠 만한 틈이 없었다.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투구의 꼭지를 쏠 터이니, 투구가 떨어지거든 네가 곧 쏘아라." 하고, 드디어 말을 달려나가며 쏘니, 바로 투구 꼭지를 맞히었다. 투구 끈이 끊어져서 기울어지자, 그 자가 급히 바로 썼다. 태조가 곧 쏘아서 또 꼭지를 맞히니, 투구가 드디어 떨어졌다. 두란이 곧 쏘아 죽이니, 그제서야 적의 기운이 꺾였다.

태조가 몸을 뽑아 쳐들어가니, 적의 정예 부대가 거의 다 죽었다. 적의 통곡하는 소리는 마치 수만 마리의 소가 우는 것 같았으며,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오르니, 여러 군사가 승승하여 달려 오르며 북 치고 고함치는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다. 사면으로 공격하여 드디어 크게 깨뜨리니, 냇물이 온통 붉어져 6, 7일 간이나 빛이 변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마시지를 못하고, 모두 그릇에 담아 오래 가라앉힌 뒤에야 마실 수 있었다. 노획한 말이 1 6백여 필이며 병기는 무수하였다.

처음에는 적이 우리의 10배였는데, 겨우 70여 명이 지리산으로 달아났다. 태조가 말하기를, “천하에 적을 전멸시키는 나라는 없다." 하고 마침내 끝까지 쫓지 않고 퇴진하여 크게 군악을 울리고 나희(?)를 베푸니, 군사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는데, 수급을 바친 것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제장들이 싸우지 않은 죄를 다스릴까 두려워하여, 피가 나도록 머리를 조아려 땅에 부딪치며 살려 주기를 빌었다. 태조가 말하기를, “조정의 처분에 맡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적의 용맹한 자는 거의 다 죽었다." 하였다. 그때 사로잡혔던 자가 적진으로부터 돌아와서 말하기를, “아기발도가 태조의 포진(布陣)이 정제한 것을 바라보고 그 부하에게 말하기를, '이 군사의 기세를 보니 지난날의 여러 장수와 비교가 안 된다. 오늘의 일은 너희들이 각자 조심하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일찍이 아기발도는 그 섬에서 오지 않으려 하였으나, 여러 왜적들이 그의 용맹에 감복하여 주장을 삼으려고 굳이 청하여 왔다. 여러 적의 괴수들도 매양 그를 볼 때에 반드시 꿇어 엎드렸으며, 군중이 그의 호령에 따라서 모두 진퇴하였다.

이번의 행군에서 군사의 장막 기둥을 모두 대나무로 바꾸었는데, 태조가 말하기를, “대가 나무보다 가벼워서 멀리 운반하기에 편하기는 하나, 역시 민가에서 심은 것이지, 내가 싸 가지고 온 그 전 물건은 아니다. 묵은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고 가져가면 족하다." 하니, 군사들이 탄복하여 모두 버렸다. 태조는 이같이 이르는 곳마다 추호도 백성을 범하지 않았다. 동녕(東寧)의 싸움에서 태조가 그 장수 처명(處明)을 사로잡아 죽이지 않았는데, 처명이 은혜에 감복하여 태조에게 맞은 화살 흔적을 볼 때마다 반드시 목이 메어 눈물을 흘렸다. 항상 좌우에서 시종했는데, 이번 싸움에도 처명이 말 앞에서 힘껏 싸워 공을 세우니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 청원부원군 경복흥이 청주에서 졸하니, 시호를 정렬공(貞烈公)이라 하였다.

○ 겨울 10월에 주의(周誼)가 돌아왔다. 일찍이 주의가 남경에 있을 때에 글을 도당에 부쳤는데, “의가 들어가 뵈오니, 황제가 의를 묶어서 천계사(天界寺)에 가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수일 후에 환관인 고려 사람 상보감 승(尙寶監丞) 최안(崔安)이 와서 그 사유를 묻기에 의가 대답하기를, '모든 조정에서 요구하는 것을 약속과 같이 하지 못한 것은, 우리 작은 나라가 땅은 좁고 백성은 드물고 산물이 적어서 마련해 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성은이 바다처럼 넓고 봄처럼 생육하여 만방이 모두 편안한데, 만일 우리 작은 나라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면 비록 의() 한 사람을 베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환관이 드디어 들어가 의의 말을 아뢰니, 다음날 황제가 의를 불러 어찰(御札)을 의에게 보이기를, '동이(東夷)가 경박하고 간사한 짓을 잘하여 왔다갔다하며 독()을 부리니, 과연 이것이 편안하기를 구하는 것이냐. 장래에 반드시 화를 심고자 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의가 대답하기를, '소방(小邦)이 어찌 감히 독을 부리겠습니까. 조공을 약속과 같이 못한 것은, 충성이 지극지 못해서가 아니라, 실로 백성이 가난하여 물건이 갖추어지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였습니다.

황제가 성내어 다시 의에게 어찰을 보이기를, '지난날에 그 임금을 죽였으므로, 중국이 이미 국교를 끊는다는 조칙을 내려 이르기를, 고려가 산과 바다로 막히어 교화가 미치기 어려우니 저들 멋대로 하게 하라 하였는데, 너희가 여러 가지로 속이면서 자주 와서 통속(統屬)되기를 원하였다. 공물을 약속할 때에 우선 상공(常貢)의 예()를 정하여 시험을 하였는데 도리어 약속을 따르지 않으니, 과연 통속을 원하는 것이냐. 아니면 간사한 본색이냐.' 하고는, 이에 교위(校尉)에 명하여 의를 끌어내어 그대로 감금하게 하였습니다. 그 이튿날 다시 최안을 보내어 의에게 이르기를, '네가 이미 여기에 왔으니, 반드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네가 통사(通事)를 시켜 먼저 돌아가서 공물을 전의 약속과 같이 가져오게 하라.' 하고, 다시 의에게 이르기를, '전에 요구한 말 1천 필 중의 약간을 이미 바쳤으니, 이제 두 번째 가져오는 것과 합하여 1천 필이 되게 하고, 명년에는 금 1백 근ㆍ은 5천 냥ㆍ베 5천 필ㆍ말 1백 필을 해마다 조공하는 상례로 삼으면, 너희 동이가 사신과 내사(內使)를 죽인 죄를 용서하겠다,' 하였습니다. 황제의 명령이 이와 같으므로 의가 감히 전달하는 것이니, 여러 상국(相國)은 생각하소서." 하였다.

○ 우가 임치 등을 거느리고 골목에 나가 작대기로 참새를 잡아서 담 밑에서 구워 먹었다.

○ 우리 태조가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오니, 최영이 백관을 거느리고 채붕(彩棚)과 갖은 놀이를 베풀어 천수사(天壽寺)의 문 앞에서 맞았다. 태조가 바라보고 말에서 내려 빨리 걸어 나가서 재배하니, 최영이 역시 재배하고 앞으로 나와 태조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공이 아니면 누가 능히 그렇게 하겠소." 하였다. 태조가 사례하여 말하기를, “삼가 명공(明公)의 지휘를 받들어 다행히 승첩을 얻은 것이지, 내가 무슨 공이 있겠소. 이제 도적의 형세가 이미 꺾였으니, 만일 다시 창궐한다면 내가 마땅히 책망을 받으오리다." 하였다. 영이 말하기를, “공이여, 공이여, 삼한(三韓)을 재생시킨 것이 이 한 번 싸움에 있었으니, 공이 아니었던들 나라가 장차 무엇을 믿겠소." 하였다. 태조가 감히 당할 수 없다고 겸양하였다. 우가 태조와 변안열에게 각각 금 50냥을 주고, 왕복명(王福命) 이하의 제장에게는 각각 은 50냥을 주었다. 모두 사양하면서, “장수가 적을 죽이는 것은 직책이니 신이 어찌 감히 받으오리까." 하였다. 태조의 위명이 더욱 두드러지니, 왜적이 우리나라 사람을 사로잡으면 반드시 이 만호(李萬戶)가 지금 어느 곳에 있느냐고 물어서 틈을 엿보아 들어와서 침범하였다.

○ 왜적이 김해부를 불태웠다.

11월에 좌사의(左司議) 백군녕(白君寧) 등이 상소하기를, “전하가 날마다 못된 아이들을 데리고서 의장(儀仗)과 호위를 버리고 거리에 나아가 놀므로, 길가는 사람들이 용안을 보아도 알지 못하고 무뢰배 소년이라 하여 길을 범하는 자까지 있으니, 대신 백관을 비롯하여 서민에 이르기까지 실망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말을 달리고 칼을 쓰는 것은 필부의 용맹인데, 전하는 무엇 하려고 배우십니까. () 나라 창읍왕(昌邑王)이 말달리고 사냥하기를 좋아하여, 왕길(王吉)의 간함을 듣지 않고 황제가 된 뒤에도 그 행실을 고치지 않으니, 하후승(夏侯勝)이 간하기를, '임금이 임금 노릇을 못하면 그 벌로 날씨가 항상 흐립니다.' 하였으나, 여전히 듣지 않다가 필경은 쫓겨나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이제 초겨울 이래로 달을 연하여 날씨가 흐리고 비가 내리니, 하늘이 경고하는 것이 어찌 분명하지 않습니까. 허물을 고쳐 못된 아이들과 친하지 말고, 날마다 경연(經筵)을 열어서 노성한 대신과 함께 정치하는 도리를 강론하고, 만일 거둥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의장을 갖추고 길을 깨끗이 한 뒤에 행차하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우가 듣지 않았다.

12월에 우가 황병사동(黃丙沙洞)에 나가 놀다가 미녀를 만나, 민가에 끌고 들어가서 간음하였다.

○ 문하찬성사 권중화(權仲和)와 예의판서 이해(李海)를 남경으로 보내어, 3백 냥, 1천 냥, 4 50, 4 5백 필을 바치고, 시호와 습위(襲位)를 청하였다.

○ 우가 이인임의 생일에 그의 집에 가서 풍악을 갖추어 밤까지 취하도록 마시고, 2필을 주었다.

○ 사헌부가 왕에게 거리에 나가 노는 것을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고려사절요 제31   

 

 

 신우 2(辛禑二)

 

 

신유 신우 7(1381), 대명 홍무 14 

 

 

○ 봄 2월에 이인임을 문하시중으로, 최영을 수시중(守侍中)으로 삼았다.

○ 왜적이 영해부(寧海府 경북 영덕(盈德)를 불태웠다.

○ 사신을 보내어 경상ㆍ전라도의 주린 백성을 진휼하였다.

3월에 우()가 동쪽 교외에서 화렵(火獵)을 하고, 호곶(壺串)에 머물면서 말을 많이 풀어 놓고 손수 새끼를 던져 옭았다.

○ 권중화가 요동에 이르니, 도사(都司)가 조공하는 물건이 정량에 차지 않는다 하여 물리쳤다.

○ 문하평리 나세(羅世)를 동강(東江) 도원수로, 황상(黃裳)을 서강(西江) 도원수로 삼고, 강 연안의 요소에 모두 원수를 두어 왜적을 방비하였는데, 모두 열 다섯 곳이었다.

○ 왜적이 강릉도(江陵道)를 침범하니, 첨서밀직(簽書密直) 남좌시(南佐時)와 밀직부사 권현룡(權玄龍)을 보내어 쳤다. 이때에 강릉도에 크게 흉년이 들어 방비가 매우 소홀하였으므로 동지밀직 이숭(李崇)을 보내어, 교주도(交州道) 군사를 거느리고 돕게 했다.

○ 우가 나가 놀려고 하니, 최영이 간하기를, “지금 흉년이 거듭 들어 백성들이 살 수가 없는데다 농사일이 한참 바쁘니, 너무 놀러 다녀서 백성을 괴롭혀서는 안 됩니다." 하니, 우가 이르기를, “우리 선조부 충숙왕(忠肅王)도 다니며 놀기를 좋아하였는데, 내가 나가 노는 것만 불가한가." 하였다. 최영이 말하기를, “선왕 때에는 백성이 편안하고 풍년이 들었으니 돌아다니며 놀아도 해롭지 않았지마는, 오늘 노는 것은 불가한 줄로 아옵니다." 하니, 우가 옳게 여겼다.

○ 최영이 바닷가에 있는 주ㆍ군에 3년간의 조세를 감면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하였다.

○ 왜적이 송생(松生)ㆍ울진(蔚珍)ㆍ삼척(三陟)ㆍ평해(平海)ㆍ영해(寧海)ㆍ영덕(盈德) 등지를 침범하고 드디어 삼척현을 불태웠다.

○ 수창궁(壽昌宮)을 다시 건립하였다.

○ 환자(宦者) 이득분(李得芬)을 계림(鷄林)으로, 전 동지밀직 목충(睦忠)을 안동(安東)으로 귀양보냈다. 득분의 집을 적몰하고, 또 그의 양자[假子]인 환자 정난봉(鄭鸞鳳) 20명을 축출하였다. 득분은 탐욕스러워 뇌물을 받고 남의 토지를 빼앗으며, 또 목충(睦忠)과 함께 이인임과 최영을 헐뜯었기 때문이다.

○ 대사헌 안종원(安宗源) 등이 아뢰기를, “옛날부터 환관이 권세를 마음대로 하면 반드시 나라를 그르치기 때문에, 우리 조종(祖宗)께서는 신하 중에 덕행이 있는 자를 가려 좌우에서 모시게 하고, 환관은 23명에 불과하여 궁중의 청소에 대비할 뿐이요, 문무의 관작을 준 적은 없었습니다. 선왕께서 즉위하시던 처음에도 예전 제도를 따랐는데, 그 뒤에 환자들이 연줄을 얻어 틈을 타서 용사하고 널리 붕당을 세워서, 마침내는 만생(萬生)의 화까지 있었으니 얼마나 탄식할 일입니까. 전하 대에 이르러서 이득분이 다만 선대의 조그만 공로로 벼슬이 찬성에까지 이르러, 권세를 부려서 뇌물을 받고 조정의 신하들을 참소하며 헐뜯으니, 안팎의 신하와 백성들 중에 이를 갈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다행히 전하의 총명하신 결단으로 멀리 외방에 귀양보내기는 하였으나, 그 도당이 아직도 많아서 분에 넘치는 관작을 받아 공연히 녹봉만 허비하고 국가에 도움됨이 없으니, 실상 장래에 화가 될까 크게 염려됩니다. 조종의 옛 제도에 따라 영민한 자를 가려 10명을 넘지 않게 해서 궁내의 심부름에 대비하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파하여 내채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 여름 4월에 우가 미행하여 도보로 관등(觀燈)하고자 말에서 내리어, 말 모는 종에게 말을 끌고 물러가도록 하였다. 종이 조금 느려 우가 채찍으로 말을 갈겼더니, 말이 뒷굽으로 차서 우의 얼굴을 상하게 하였다. 사헌부에서 내승별감(內乘別監) 변벌개(邊伐介) 등이 말을 맡고 있으면서 말을 훈련시키지 못하였고, 또 때아닌 때에 말을 내었다 하여 죄주기를 청하니, 변벌개 등 5명을 곤장을 때려 귀양보냈다. 이에 내승(內乘)이 사헌부를 두려워하여 감히 때아닌 때에 말을 내지 못하였으므로 우가 자주 남의 말을 빼앗아 타고 나아가 놀았다. 이에 예궐(詣闕)한 자는 모두 말을 숨겼다.

○ 전민변위도감(田民辨僞都監)을 두었다.

○ 왜적이 지리산에서 도망하여 무등산으로 들어가 규봉사(圭峯寺) 바윗돌 사이에 목책(木柵)을 세웠는데, 삼면이 절벽이고 벼랑을 따라 작은 비탈길만 있어 겨우 한 사람이 통행할 수 있었다. 전라도 도순문사 이을진(李乙珍)이 결사대 1백 명을 모집하여 높은 곳에 올라 돌을 굴려 내리고 불화살을 쏘아 목책을 불사르니, 적이 궁지에 빠져 벼랑에서 떨어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고, 나머지 적은 바다로 달아나서 작은 배를 훔쳐 타고 도망하였다. 전 소윤(少尹) 나공언(羅公彦)이 빠른 배로 추격하여 모두 죽이고, 13명을 생포하였다.

5월에 왜적이 이산수(伊山戍)를 침범하니, 양광도 도순문사 오언(吳彦)이 싸워 물리치고, 사로잡은 적 9급을 베었다.

○ 계림(鷄林) 원수 윤호(尹虎)가 왜적 10여 급을 베었다.

○ 경도(京都)에 있는 한 여승이 미륵보살이라 자칭하니, 사람들이 모두 믿고 다투어 쌀과 베를 보시하므로, 사헌부에서 곤장을 때려 귀양보냈다.

○ 안동 병마사 정남진(鄭南晉)이 왜적을 쳐서 16급을 베었다. 왜적이 또 영해부(寧海府)를 침범하였다.

○ 경상도 고령군(高靈郡)에 흉년이 들어서, 버린 아이가 길에 가득하고, 굶어 죽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6월에 왜적이 비인현(庇仁縣)을 침범하고, 또 영주(永州)를 불태웠다.

○ 왜선 50척이 김해부를 침범하여 산성을 포위하니, 원수 남질(南秩)이 쳐서 물리쳤다. 남질이 또 영해ㆍ울주(蔚州)ㆍ양주(梁州)ㆍ언양(彦陽) 등처에서 다섯번 싸워 8급을 베었다.

○ 전 밀직사 지용기를 전라ㆍ경상도의 조전원수로 삼았다.

○ 지문하부사상의 이인(?)이 졸하였다.

○ 왜적이 울진현을 침범하니, 권현룡(權玄龍)이 싸워 물리치고, 20급을 베고 말 70필을 노획했다.

○ 우가 술에 취하여 용수산(龍首山)에서 말을 달리다가 말에서 떨어져 떠메어 돌아오니, 최영이 울며 간하기를, “충혜왕(忠惠王)이 호색하였으나 반드시 밤에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게 하였고, 충숙왕(忠肅王)이 놀기를 좋아하였으나 반드시 제때에 놀아서 백성의 원망이 없게 하였는데, 지금 전하는 놀고 장난하기를 절도없이 하여 말에서 떨어져 몸을 상하게까지 되어도 신등이 재상으로 있으면서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사람들을 대하겠습니까." 하니, 우가 말하기를, “이제부터 고치겠다." 하였다.

○ 가을 7월에 왜적이 김해부를 침범하였다.

○ 우의 생일이므로 일죄(一罪) 이하를 사하였다.

○ 우가 여러 기생들을 궁중에 모아 놓고 밤새도록 놀이를 하였는데, 이로부터 안 노는 날이 없었다.

○ 왜적이 고성현(固城縣)을 침범하니, 남질이 싸워 8급을 베었다.

9월에 왜적이 서주(瑞州)를 침범하였다.

○ 겨울 10 1일 임자에 일식이 있었다.

○ 우가 밤에 환관을 데리고 궁 담을 넘어서 나갔다. 숙직하는 신하들이 우의 간 곳을 알지 못하여 크게 놀랐는데, 한참 만에 돌아왔다.

○ 왜적이 임하현(臨河縣)을 침범하였다.

○ 임신일에 혜성(慧星)이 보였는데, 15일 만에 없어졌다.

○ 문하평리 김유를 남경에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였다.

○ 왜적이 반남현 (潘南縣 전남 나주)을 침범하니, 원수 지용기와 이을진이 적과 싸워 물리치고, 배 한 척을 잡아서 불태우고 9급을 베었는데, 물에 빠져 죽은 적도 많았다.

11월에 밀직사 이해(李海)를 남경에 보내어 말 9 33필을 바쳤다.

○ 왜적이 보령현(保寧縣)을 침범하고, 또 밀성현(密城縣)을 침범하였다.

○ 정주(靜州 평북 의주(義州)) 아전 구한석(丘閑石)ㆍ원익(元益)ㆍ이송수(李松守) 등이 반역하여 저쪽 땅으로 들어가서 어리석은 백성을 꾀어 둔을 치고 도적이 되어 창주(昌州 평북 창성(昌城))를 침범하였다.

○ 우가 밤에 여리(閭里)에 돌아다니며 놀다가 길에서 순라하는 관원을 만나 쫓아가며 쏘았다. 이후부터 매일 새벽까지 돌아다니며 노는 것이 예()가 되었다.

12월에 근비(謹妃)의 생일이라 하여 이죄(二罪) 이하를 사하였다.

○ 김유와 이해가 요동에 이르렀으나, 받아들이지 아니하므로 그대로 돌아왔다.

 

 

   

 

 

 

 

 고려사절요 제31   

 

 

 신우 2(辛禑二)

 

 

임술 신우 8(1382), 대명 홍무 15 

 

 

○ 봄 정월에 전 판사 김극공(金克恭)의 사지를 찢어 여러 도에 돌리고, 그 가산과 처자를 적몰하였으며, 전교부령(典校副令) 정구(鄭矩)와 판사 장자충(張子忠)을 먼 곳으로 귀양보냈다. 이전에 이인임의 사위 강서(姜筮)의 집에 던져진 익명서에, “왕의 즉위에 의심나는 것이 없지 않으며, 또 매우 무도하므로, 조민수ㆍ임견미ㆍ염흥방ㆍ도길부ㆍ문달한 등이 이인임과 최영을 없애고 정창군(定昌君) ()를 세워 왕을 삼으려 한다." 하였다. 김극공이 듣고 다른 사람에게 얘기했는데, 그 사람이 임견미에게 고하였다. 견미는 김극공이 한 짓이라 생각하고 잡아서 국문하니, 김극공이 매에 못이겨 거짓 자복하였다. 옥관이 김극공에게 글자를 쓰게 하여 보니, 익명서와 필적이 다르므로 이인임이 자못 의심하였으나, 임견미가 기어이 극공에게 죄를 가하려 하므로, 옥관이 감히 분명하게 밝히지 못하고 드디어 죽였다. 장자충은 김극공의 말을 듣고도 나라에 고하지 않고 사사로 정창군에게 고하였고, 정구는 극공의 사위이므로 모두 귀양보냈다.

○ 요동 호발도(胡拔都)가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몰래 압록강을 건너 돌연 의주(義州)에 이르러 상만호(上萬戶) 장여(張侶)의 집을 포위하였다. 장여가 아들 장사길(張思吉)ㆍ장사충(張思?)과 더불어 힘껏 싸우다가, 장여는 창에 찔리고 두 아들은 화살에 맞았다. 호발도가 장여의 재물과 말 15필을 빼앗아 가니, 부만호 최원지(崔元沚)가 추격하여 20여 급을 베었다. 장여는 활 쏘고 말 타는 것이 능하였는데, 권문세가에 뇌물을 바쳐 만호가 되었다. 성질이 탐욕스럽고 무식하여 인심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적에게 경시당한 것이다.

○ 경상ㆍ전라ㆍ강릉도의 주린 백성을 진휼하였다.

2월에 문하평리 한방언(韓邦彦)을 서북면 도체찰사 겸 안주도 상원수로 삼고, 전 지문하사 상의 김용휘(金用輝)를 도안무사(都按撫使) 겸 부원수로 삼아, 정요위(定遼衛)의 군대를 방비하게 하였다.

○ 판서운관사 장보지(張補之) 등이 글을 올려, 변괴가 자주 일어나니 도읍을 옮겨 재앙을 막기를 청하였다. 우가 그 글을 도당에 내렸으나, 이인임이 불가하다고 고집하여 마침내 중지하였다.

○ 노씨(盧氏)를 봉하여 의비(毅妃)로 삼고, 아비 영수(英壽)를 대호군으로 삼았다. 노씨는 본래 근비의 궁인(宮人) 석비(釋婢)인데, 우가 매우 총애하였다.

○ 왜적이 임주(林州)를 침범하니 도순문사 오언(吳彦)이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 계해일에 하늘에서 곡식이 내렸는데 검은 기장ㆍ팥ㆍ모밀 같은 것이 있었다. 우가 일관(日官)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흉년이 겹쳐들어 사람이 장차 서로 잡아먹을 징조입니다." 하였다.

○ 반전색(盤纏色 여비 조달을 맡은 관청)을 두어서 대소 문ㆍ무 관리로 하여금 마필(馬匹)ㆍ저포(紵布)ㆍ마포를 차등에 따라 내게 하여 명 나라의 세공(歲貢)에 대비하였다.

○ 아들 창()이 병이 있으므로 이죄(二罪) 이하를 사하였다.

○ 갑술일에 해 속에 크기가 계란만한 흑자(黑子)가 있었는데, 사흘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 사삿집 종 무적(無敵)이 미륵의 화신이라고 자칭하다가 참형을 당하였다.

○ 해양(海陽 평북 길주(吉州) 만호 김동불화(金同不花)가 그 아들 부야개(夫耶介)를 보내어 볼모로 삼았다.

○ 윤달에 왜적이 임주(林州)ㆍ부여(扶餘)ㆍ석성(石城)을 침범하였다.

○ 우가 남교(南郊)에서 사냥하고, 또 동교(東郊)에서 사냥하였는데, 항상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사관이 감히 나의 과실을 기록한다니, 만일 보기만 하면 내가 반드시 죽이겠다." 하였기 때문에, 사관이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였다.

○ 김동불화가 제 관할 백성을 데리고 와서 항복하니, 독로올(禿魯兀 함남 단천(端川)의 땅에 살게 하였다.

○ 일본이 포로가 된 우리 백성 1 50명을 돌려보냈다.

3월에 왜적이 평해(平海)ㆍ삼척ㆍ울진ㆍ우계(羽溪) 등의 현()을 침범하였다.

○ 곡성 부원군 염제신(廉悌臣)이 졸하였다.

○ 왜적이 영월ㆍ예안ㆍ영주ㆍ순흥ㆍ보주ㆍ안동을 침범하였다.

○ 여름 4월에 사헌부에서 경상도 도순문사 남질이 왜적을 막지 못하였다고 탄핵하여, 도당에 내리어 의논하였으나, 이인임이 질과 좋은 사이여서 의령현(宜寧縣)에 안치시키기만 하였다.

○ 양수척(楊水尺)의 무리들이 떼를 지어 왜적 행세를 하며 영월군을 침범하여 관사와 민가를 불태우니, 판밀직 임성미(林成味) 등을 보내어 쫓아 잡아서 남녀 50여명과 말 2백여 필을 노획하였다.

○ 문하찬성사 김유(金庾), 문하평리 홍상재(洪尙載), 지밀직 김보생(金寶生), 동지밀직 정몽주(鄭夢周), 밀직부사 이해(李海), 예의판서 배행검(裵行儉)을 남경에 보내어, 세공으로 금 1백근ㆍ은 1만 냥ㆍ베 1만 필ㆍ말 1천 필을 바쳤다.

○ 강릉도 상원수 조인벽(趙仁璧)과 부원수 권현룡(權玄龍)이 왜적과 싸워 머리 30급을 베었다.

○ 서해도 안렴사 이무(李茂)가 잡은 양수척 30여 명과 말 1백 필을 바치고 여러 도의 안렴사와 수령도 각각 잡은 양수척과 말을 바치니, 순군옥에 내리어 국문해서 그 주모자를 베고, 처자와 마필을 몰수하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다. 양수척을 여러 고을에 나누어 두고 평민보다 차등있는 역사를 시켰는데, 명령을 좇지 않는 자가 있으면 베었다.

○ 전 평리 양백익(梁伯益)을 먼 곳으로 귀양보냈다. 일찍이 충혜왕(忠惠王)의 아들 석기 (釋器)가 민가의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그 아들이 양백익의 전장(田莊)에 숨어 있었다. 일이 발각되어 양백익은 귀양보내고, 석기의 아들은 머리를 깎아 계룡산으로 보냈으나, 비밀리에 아전을 시켜 도중에서 죽였다.

○ 왜적이 죽령을 넘어서 단양군을 침범하니, 원수 변안열(邊安烈)ㆍ한방언(韓邦彦) 등이 쳐서 깨뜨려, 80여 급을 베고 말 2백여 필을 노획했다.

5월에 경상도 합주(陜州)에 사노(私奴) 한 명이 있었는데, 검대장군(劍大將軍)이라 자칭하고, 그 부하 1명은 초군장군(抄軍將軍)이라 일컫고, 1명은 산군장군(散軍將軍)이라 일컬으며, 무리를 모아서 떼를 지어 다니며 노략질하고, 그곳의 상전과 수령을 죽이고 난을 일으키려 하므로, 안림사 안경공(安景恭)이 잡아서 베었다.

○ 요망한 백성 이금(伊金)을 베었다. 이금은 고성 백성인데, 미륵불이라 자칭하고 여러 사람을 속이기를, “나는 석가불을 강림하게 할 수 있다. 다른 귀신에 기도하고 제사지내는 자, 마소의 고기를 먹는 자, 재물을 남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만일 내 말을 믿지 않으면 3월에 해와 달에 빛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가 술법을 부리면 풀에 푸른 꽃이 피기도 하고, 나무에 곡식 열매가 열리기도 하며, 한 번 심어서 두 번 베게 할 수 있다." 하였다. 우매한 백성들이 믿고 다투어 쌀ㆍ비단ㆍ금은을 보시하고, 소와 말이 죽어도 버리고 먹지 않으며, 재물이 있는 자는 모두 남에게 주었다.

이금이 또 말하기를, “내가 명령하여 산천 귀신을 모두 일본에 보내면, 왜적을 쉽게 사로잡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무당들이 더욱 공경하고 믿어서, 성황당과 사묘(祠廟)의 신위를 철거하고 이금을 부처같이 공경하여 복을 빌었다. 무뢰배들이 따라서 한패가 되어 제자라 자칭하고 여러 사람들을 속였는데, 이르는 고을의 수령 중에는 나와서 영접하여 상등 사관에 유숙시키는 자도 있었다. 청주 목사 권화(權和)가 꾀어서 오게 하여 그 괴수 5명을 묶어 가두니, 이에 도당에서 여러 도에 이첩(移牒)하여 모두 잡아서 베었다. 전 판사 양원격(楊元格)은 본래 그의 말을 신봉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도망하여 숨었으나, 끝까지 수색하여 잡아서 곤장을 때려 귀양보냈는데, 귀양가다 길에서 죽었다.

○ 유양(柳亮)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왜적이 영춘현(永春縣)을 침범하였다.

○ 변안열(邊安烈)ㆍ한방언(韓邦彦) 등이 안동에서 왜적을 쳐서, 30여 급을 베고 말 60필을 노획했다.

○ 왜적이 또 회양부(淮陽府)를 침범하였다.

6월에 우가 상승(尙乘)의 집에 가서 말을 사열하고, 또 노영수(盧英壽)의 집에 갔다. 그 뒤로부터 상승과 노영수ㆍ이인임의 집에 가지 않는 날이 없고, 그 밖에 가는 곳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

○ 김유(金庾) 등이 요동에 갔으나,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돌아왔다.

○ 간관 정리(鄭釐)ㆍ박의중(朴宜中) 등이 상소하기를, “근년에 와서 왜적이 날로 성하여, 깊이 들어와서 도적질하며, 인민을 죽이고 노략질하며 가옥을 불태우고 헐어서 주ㆍ군이 조잔(凋殘)해지고 전야(田野)가 황폐해졌습니다. 더구나 수재와 한재까지 겹쳐서 흉년이 거듭 들어 굶주려 죽는 사람이 연이어지고, 창고가 비어서 용도도 부족합니다. 또 좀도둑이 일어나 사사로이 서로 죽이니, 인민은 흩어지고 부자(夫子)도 상존(相存)하지 못합니다. 화란(禍亂)의 지극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는데, 하물며 상국(上國)에서 우호를 맺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가까운 국경에 군사를 주둔시켜 틈을 엿보고 있는 때임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또 더군다나 천재(天災)ㆍ인요(人妖)ㆍ지괴(地怪)와 조수(鳥獸)ㆍ천어(泉魚)의 이변이 겹쳐 견고(譴告)를 보이니, 온 나라 백성 중에 근심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참으로 마땅히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안일한 생각을 가지지 말고, 널리 여론을 받아들여 치안을 도모하고 변괴를 없애는 데 하루라도 게을리하고, 한 가지 일이라도 소홀히 하여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하물며 급하지 않은 공사를 일으키며, 이목(耳目)의 즐거움을 탐하여 마음에 하고 싶은 대로 자행해서 유흥과 오락을 일삼아 게으르고 거만해서야 되겠습니까. 원하건대 주색과 가무의 즐거움을 파하시고, 매와 개로 사냥하는 유희를 끊어버리며, 성인의 말씀을 무시하지 말고, 충성하고 곧은 사람을 거스르지 말며, 덕이 있는 기로(耆老)를 멀리하지 말고, 못된 아이들을 가까이하지 말며,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안일한 것을 경계하며, 참소를 멀리하고 간하는 것을 들으며, 어진 사람을 임용하고 간사한 사람을 버리며, 밤낮으로 부지런하며, 공손하고 조심하여, 항상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의 일에 부지런하기를 힘쓴다면, 대업(大業)을 길이 보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사헌부에서도 간하였으나, 모두 회답이 없었다.

○ 왜적이 경산ㆍ대구ㆍ화원(花園)ㆍ계림(鷄林) 등처를 침범하고, 또 통구현(通溝縣)을 침범하였다.

○ 전법판서 조준(趙浚)을 경상도 체복사(體覆使)로 삼았다. 이때는 왜적의 침범이 매우 강성하여, 각 고을이 소란해서 백성들이 모두 산골로 도망하였으며, 나라에 기강이 없고, 장수들은 둘러서서 보기만 하고 싸우지 않으니, 적세는 날마다 성하여졌다. 조준이 오자 호령이 엄하고 밝으므로, 장수들이 몹시 두려워하여 잇달아 전승하니, 도민(道民)들이 그 덕택으로 조금 편안해졌다.

이보다 먼저, 수성(守城) 사람 조희삼(趙希參)이 그 어머니를 부축하여 모시고 경산부(京山府)의 성에서 왜적을 피하려고 발길이 낙동강에 이르렀는데, 배가 없어서 건너지 못하였다. 적이 쫓아오자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나는 늙고 병들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 너는 말을 달리어 화를 면하라." 하였다. 조희삼이 말하기를. "어머니가 계신데 제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고, 어머니와 함께 밭 속에 숨었다. 적이 그 어머니를 칼로 치려 하자, 희삼이 몸으로 어머니를 가리어 적에게 해를 당하고 어머니는 죽음을 면하였다.

경산부 사람 배중선(裵仲善)의 딸이 아이를 업고 왜적에게 쫓기다가 소야강(所耶江)에 이르렀는데 강물이 한참 불어 있었다. 그 여자가 벗어나지 못할 것을 깨닫고 물속으로 뛰어들어가니, 적이 강 언덕에 이르러 활을 당기며 말하기를, “네가 나오면 죽음을 면할 수 있다." 하였으나, 여자가 말하기를, “나는 선비의 딸이다. 일찍이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죽을지언정 네놈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 하였다. 적이 활을 쏘아서 그 아이를 맞히고, 적이 활을 당기며 또 전과 같이 말하였으나, 끝내 나오지 않고 해를 당하였다.

영산(靈山) 사람 낭장 신사천(辛斯?)의 딸은 나이 16세였는데, 왜적에게 쫓기어 아비를 따라 강에 이르러 배를 타고 건너려 할 때에 적이 갑자기 이르러 배에 탄 사람을 거의 다 죽이고, 그 아버지도 해를 입었다. 한 도적이 그 여자를 잡아 배에서 끌어내리니, 여자가 말하기를, “네가 내 아버지를 죽였으니 불공대천의 원수다. 죽을지언정 네놈을 따르지 않겠다." 하고, 드디어 적의 목을 쥐고 차서 거꾸러뜨리니, 적이 노하여 그 여자를 죽였다. 조준이 그 일을 진달하고 아뢰기를, “세 사람의 절개와 효도가 이와 같으니, 그 문()에 정표(旌表)하여 후세 사람을 권면하소서." 하니, 드디어 비석을 세우고 그 일을 기록하였다.

○ 이인임을 영문하부사로, 최영을 영삼사사로, 홍영통(洪永通)을 문하시중으로, 이자송(李子松)을 수문하시중으로 삼았다.

○ 가을 7월에 우리 태조를 동북면 도지휘사로 삼았으니, 이때에 호발도가 동북면 백성을 침범하였는데, 태조는 일찍부터 대대로 그 도의 군무를 관활하여 평소에 위신이 드러났으므로 보내어 위무(慰撫)한 것이었다.

○ 정당문학 정공권(鄭公權)이 졸하였다.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며 삼가고 두터웠으며, 정도로써 관직을 수행하였다. 이때에 가묘의 제도가 폐지되었는데, 공권은 제기를 별실에 간직하여 두고, 제삿날을 당하면 반드시 손수 씻어서 제물을 극히 정결하게 하였다. 간신이 권세 부리는 것을 미워하여 항상 분히 여기고 한탄하더니, 마침내 등창을 앓아서 죽었다.

○ 경성에 기근이 들어, 베 한 필 값이 쌀 서너 되 값이었다.

○ 황제가 운남(雲南)을 평정하고, 양왕(梁王)의 가속을 제주(濟州)에 안치하였다. 우가 밀직사사 유번(柳藩)을 경성에 보내서 표를 올려 하례하였다.

8월 무자일에 혜성이 보였다.

○ 한양(漢陽)에 도읍을 옮기기로 의논하고 정하니, 간관이 상소하여 말렸으나 듣지 않고 드디어 한양으로 옮겼다. 경성은 시중 이자송에게 명하여 머물러 있으면서 지키게 하고, 이임ㆍ이인임ㆍ임견미ㆍ염흥방 등이 수행하였다. 모두 종을 보내어 여기저기에서 떼를 지어 백성의 토지와 집을 한없이 빼앗았다.

○ 겨울 10월에 왜적이 남원군을 침범하고, 또 왜선 50척이 진포(鎭浦)에 들어왔다. 해도원수 정지(鄭地)가 치니 달아났는데, 군산도(群山島)까지 쫓아 배 4척을 노획했다.

11월에 대사헌 노숭(盧嵩) 등이 상소하기를, “근일에 전하가 나가 노는데, 입직(入直)한 이덕시(李德時)가 백관ㆍ유사에게 고하지 않았고, 내승(內乘) 김천수(金天守) 등이 훈련되지 않은 말을 내어서 넘어지고 미끄러지게 하였으니, 그 죄를 국문하소서." 하였다. 홍영통(洪永通)ㆍ이자송 등도 아뢰기를, “전하가 취하기만 하면 말을 달리므로, 신등이 항상 마음에 위태하고 두렵게 여겼었는데, 이제 과연 넘어지고 미끄러져서 귀하신 몸을 상하였으니, 이제부터는 구중궁궐에 가만히 계시어, 사냥을 경계하고 주색을 삼가서 혹시라도 가볍게 움직이지 마소서." 하니, 우가 좋아하지 않았다.

○ 동직밀직사사 정몽주와 판도판서 조반(?)을 남경에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고, 진정표(陳情表)를 올려 시호와 승습(承襲)을 청하였다.

○ 조민수를 수시중으로, 이색을 판삼사사로 삼았는데, 이색은 병을 핑계대고 일을 보지 않았다.

○ 천재지변이 여러 번 일어나므로, 가벼운 죄는 사하였다.

12월에 조민수에게 명하여 송경(松京)을 지키게 하였다.

○ 우가 교외에서 사냥하였는데,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신하들이 우의 간 곳을 몰랐는데, 밤이 깊어서야 돌아왔다.

출처 : ▒ 한 산 草 堂 ▒
글쓴이 : 천하한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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