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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려사절요 제33권 신우4

장안봉(微山) 2013. 5. 28. 22:59

고려사절요 제33   

 

 

 신우 4(辛禑四)

 

 

무진 신우 14(1388), 대명 홍무 21 

 

 

○ 봄 정월 초하루 병자일에 염흥방(廉興邦)이 우에게 현상금을 걸고 급히 조반(?)을 잡으라는 영을 내리도록 권하였다. 정자교(鄭子喬)가 조반을 붙잡아서 순군옥에 가두었다. 이때에 흥방이 순군 상만호(上萬戶)로 있었는데, 흥방과 도만호 왕복해ㆍ부만호 도길부ㆍ이광보(李光甫)ㆍ위관(委官) 윤진(尹珍)ㆍ강회백(姜淮伯)이 대간(臺諫)ㆍ전법(典法)과 함께 신문하였다. 조반이 말하기를, 6, 7명의 탐욕스런 재상들이 사방에 종을 풀어 남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고, 백성들을 모질게 해치니 이들은 큰 도적이다. 지금 이광(李光)을 벤 것은 오직 국가를 도와 인민의 적을 제거하려 하는 것뿐인데, 어째서 반란을 꾀했다고 하는가." 하였다. 종일토록 고문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흥방은 기어이 조반을 허위자백시키려고 매우 참혹하게 치죄(治罪)하였다. 조반은 꾸짖고 욕하며 조금도 굽히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국적인 너희들을 죽이고자 하는 사람이고, 너는 나와 서로 송사하는 사람인데 어째서 나를 국문하느냐." 하였다. 흥방은 더욱 노하여 사람을 시켜 마구 그 입을 치게 하였다. 복해는 졸면서 듣지 못하는 체하였고, 나머지 사람들도 감히 어찌하지 못하였으나, 오직 좌사의 김약채(金若采)만이 불가하다 하여 고문을 그치게 하였다.

경진일에 신우가 최영의 집에 가서 좌우를 물리치고 한참 동안 같이 이야기를 하였는데, 대개 조반의 옥사를 의논한 것이었다. 이날 흥방은 다시 반을 국문하려고 순군에 이르러 옥간과 대간을 청하였으나 모두 나오지 않았다.

임오일에 우()가 반과 그 어미와 아내를 석방하라고 명하고, 또 의약(醫藥)과 갖옷[?]을 주고, 영을 내리기를, “재상들이 이미 부자가 되었으니 녹을 주는 것을 정지하고 우선 먹을 것이 없는 군대에 나누어 주라." 하고, 드디어 흥방을 순군옥에 가두었다. 국인(國人)이 모두 기뻐하며 말하기를, “우리 임금님은 명철하시다." 하였다.

○ 계미일에 우가 최영과 우리 태조에게 명하여 군사를 풀어 숙위(宿衛)하게 하고, 영삼사사 임견미와 찬성사 도길부를 옥에 가두도록 하였다. 사자가 견미에 집에 이르니, 견미는 명을 거역하고 노한 목소리로 사자에게 말하기를, 7일마다 녹을 주는 것은 옛 제도이다. 지금 까닭없이 폐지하니 어찌 임금의 도리인가. 옛날부터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은 신하가 있다." 하고, 드디어 난을 일으키려고 사람을 시켜 달려가 그 무리에게 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말을 탄 갑사(甲士)들이 이미 길을 막아 나가지 못하고 되돌아 와서 견미에게 고하였다. 견미의 집이 남산(男山) 북쪽에 있었는데 조금 뒤에 남산을 쳐다보니 기병(騎兵)이 이미 대열을 이루었다. 견미는 매우 놀라 저항을 포기하고 체포되었는데 탄식하기를, “광평군(廣平君)이 나를 그르치었다." 하였다. 이에 앞서 견미의 흥방이 최영이 맑고 정직하며, 또 중요한 병권을 쥐고 있음을 꺼리어 항상 해치려 하였으나, 이인임이 굳이 말렸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순군이 흥방 등의 죄를 철저히 조사하지 않으니, 우가 크게 노하여 전 평리 왕안덕을 도만호로, 지문하(知門下) 이거인(李居仁)을 상만호로, 우리 공정왕(恭靖王)을 부만호로 삼아서 다시 국문하도록 명하였다. 밀직부사 임치(?)는 강제로 자기 집에 돌려보내고, 찬성사 왕복해는 성()을 주어 아들을 삼았으므로 의심하지 않고, 군사를 거느리고 최영과 함께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이날 밤에 복해가 다른 뜻이 있어서 돌격 기마대 수십 명을 거느리고 궁성(宮城)을 순찰한다는 핑계로 최영의 군영으로 달려 들어갔다. 영이 갑옷을 입고 호상에 걸터앉아 부하 장수들을 지휘하여 눈을 부치지 않으니 복해가 해치지 못하였다.

을유일에 우시중(右侍中) 이성림(李成林), 대사헌 염정수(廉廷秀), 지밀직(知密直) 김영진(金永珍)ㆍ복해ㆍ치()를 순군옥에 가두었다.

병술일에 흥방ㆍ견미ㆍ길부ㆍ성림ㆍ정수ㆍ복해ㆍ영진ㆍ치를 처형하고, 또 그 족당(族黨) 찬성사 김용휘(金用輝), 삼사우사 이존성(李存性), 판개성(判開城) 임제미(林齊味), 밀직 홍징(洪徵)ㆍ임헌(任憲)ㆍ박인귀(朴仁貴)ㆍ반덕해(潘德海)ㆍ이희번(李希蕃), 개성 윤 정각(鄭慤), 전법판서 이송(?), 우시중 반익순(潘益淳), 우사의 신권(辛權), 대호군 신봉생(辛鳳生), 집의 이미생(李美生), 좌랑 홍상연(洪尙淵), 판내부시사(判內府寺事) 김만흥(金萬興) 등을 베고, 드디어 견미 등의 집을 적몰하였다. 이에 여러 도에 찰방(察訪)을 나누어 보내어 빼앗겼던 토지와 노비를 조사하여 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존성은 인임의 종손으로 처음에는 인임의 하는 짓을 본받았으나 뒤에는 자못 뉘우쳤다. 서경 윤(西京尹)으로 있을 때에는 치적이 제일이어서 백성들이 추모(追慕)하였다. 임헌은 집에는 한 섬의 저축도 없으므로 옥관이 면죄시키려 하였으나, 영이 임헌이 흥방의 세력을 빙자하여 대사헌이 되어도 곧은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여, 드디어 베니, 당시 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겼다. 만흥은 견미의 가신(家臣)으로 탐욕스럽고 포학하며, 간사하고 교활하여 토지와 노비에 관한 사무를 전담하였다. 과거에 인임이 정권을 잡으려고 꾀하여 신우를 세우니, 한 나라의 권세가 그 손아귀 안에 있었고, 그 도당들이 이리저리 엉켰는데 견미는 그 심복이 되었다. 문신들을 미워하여 추방한 것이 매우 많았으니 흥방도 역시 그 속에 끼어 있었다. 뒤에 견미는 흥방이 세가대족(世家大族)이라 하여 혼인하기를 청하였다. 흥방도 역시 전날 귀양갔던 것을 징계하여 몸을 보존하려고 꾀하여 오직 인임과 견미의 말만을 좇았다. 이에 흥방의 동모형(同母兄) 이성림(李成林)을 시중(侍中)으로 삼으니 권간(權奸)의 도당이 양부(兩府)에 깔려 있고, 안팎의 요직은 그들의 사당(私黨) 아닌 것이 없어서 권세를 잡아 마음대로 방자하게 관작을 팔고, 남의 전토를 빼앗아 산과 들을 모두 점령하며, 남의 노비를 뺏은 것이 천 백으로 떼를 이루었으니, 주현(州縣)ㆍ진역(津驛)ㆍ능침(陵寢)ㆍ궁고(宮庫)의 밭이 모두 침탈을 당하였다. 주인을 배반한 노예와 부세(賦稅)를 도피한 백성들이 저자같이 모여 들어서 안렴사와 수령이 감히 징발하지 못하였다. 백성은 이산하고, 도적은 성하여 공()과 사()의 재물이 고갈되었다. 그러나 최영과 우리 태조가 그들의 행위에 분격하여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우()를 인도하여 그들을 제거하니, 국인(國人)이 크게 기뻐하여 길에서 노래하고 춤추었다.

○ 최영을 문하시중으로, 우리 태조를 수문하시중으로, 이색을 판삼사사로, 우현보ㆍ윤진ㆍ안종원을 문하찬성사로, 문달한(文達漢)ㆍ송광미(宋光美)ㆍ안소(安沼)를 문하평리로, 성석린(成石璘)을 정당문학으로, 왕흥을 지문하사로, 인원보(印原寶)를 판밀직사사로 삼았다.

○ 밀직사사 조임(趙琳)을 남경에 보내어 조회를 청하기로 하였는데, 조임이 요동에 이르러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 계사일에 서성군(瑞城君) 염국보(廉國寶), 동지밀직 염치중(廉致中), 전 지밀직 전빈(全彬), 밀직부사 안사조(安思祖), 밀직제학 박중용(朴仲容), 전 법판서 김을정(金乙鼎), 대호군 김함(金涵)ㆍ신정(辛靖), 성균좨주(成均祭酒) 윤전(尹琠), 사헌장령 김조(金肇), 호군 최지(崔遲)ㆍ임맹양(林孟陽), 사복정 감성단(甘成旦), 전 강릉 부사 도희경(都希慶), 환자 조원길(趙元吉) 50여 명을 베었는데, 이는 모두 처형당한 임견미 등의 족당(族黨)이었다.

○ 갑오일에 비로소 백관의 녹을 주었다.

○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여 견미의 무리가 빼앗아 점유하였던 토지와 노비를 조사하고, 안무사를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어 견미 등의 가신과 사나운 종을 잡아서 무려 천여 명이나 베고, 재산도 모두 몰수하였다. 성림의 당인 서규(徐規)가 이천(利川)에 있었는데, 안집(安集)ㆍ이안생(李安生)이 잡으려 하니, 규가 도망갔다. 안생이 그의 아내가 아름다운 것을 보고 마침내 간통한 뒤에 그의 아내를 시켜 규를 유인하여 오게 하고, 안생이 잡아 죽였다. 뒤에 일이 발각되어 안생을 베고, 그 아내는 전객시(典客寺)에 붙여서 종으로 만들었다.

○ 종실(宗室)ㆍ기로(耆老)ㆍ대간(臺諫)ㆍ육조(六曹)를 시켜 문무(文武) 현량(賢良)을 천거하게 하였다.

○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 이인임을 경산부(京山府)에 안치하고, 전 문하평리 이인민(李仁敏)을 계림부(?林府)에 귀양보내어 봉화대(烽火臺) 군사에 배치하고, 대호군 이환(?)과 진사 도유(都兪)를 곤장을 쳐서 변방으로 귀양보냈다. 인임이 권세를 잡은 지가 오래되었고, 부드러운 태도로 아첨하여 남의 비위를 맞추니, 문객들이 뜰에 가득하여 각각 자신을 특별히 후대한다고 여겼다. 충성하고 어진 사람을 모함하고 죄 없는 사람을 살육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고양이[李猫]'에 비유하였다. 최영은 인임이 자기를 두둔하여 준 것을 은덕으로 생각하여 우에게 아뢰기를 "인임이 계책을 결정하고 대국을 섬기어 국가를 안정시켰으니 공이 허물을 덮을 만합니다." 하여 마침내 그 자제까지 모두 용서하였다. 국인(國人)이 탄식하기를, “임()ㆍ염()의 옥사에 큰 도적이 그물에서 빠졌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정직한 최공이 사사로운 정으로 늙은 도적을 살렸다." 하였다. (?)은 인임의 얼자(?)인데 임견미의 사위였으며, ()는 도길부의 아들로서 우인열(禹仁烈)의 사위였다. 최영은 본래 인열과 친하였으므로 유도 죽음을 면하였다. 또 전 찬성사 박형(朴形)을 각산수(角山戍), 지신사 권집경(權執經)을 안동(安東)으로, 우대언 이직(李稷)을 전주로 귀양보냈다. 형은 중용의 아비이고, 집경은 인임의 첩의 사위이며, 직은 인민(仁敏)의 아들이었다. 과거에 이인복(李仁復)이 인임과 인민의 사람됨이 미워서 말하기를, “나라를 결딴내고 집안을 망칠 자는 반드시 이 두 아우다." 하였는데, 그 손자 존성(存性)이 과연 연좌되었다.

2월에 우가 견미ㆍ흥방 등의 악기를 화원에서 점검하니 악기 연주하는 소리가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

○ 안숙노(安叔老)의 딸을 봉하여 현비(賢妃), 소매향(小梅香)을 화순옹주(和順翁主), 연쌍비(燕雙飛)를 명순옹주(明順翁主)로 삼았다. 이날 우리 태조와 최영이 정방에 들어갔다. 영이 임견미ㆍ염흥방이 쓴 사람들을 모두 내쫓으니 태조가 말하기를, “임견미ㆍ염흥방이 정권을 잡은 지 오래되어 사대부들이 모두 그들이 등용한 사람이니, 이제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않음을 따질 뿐이다. 어찌 그 과거를 허물할 수 있는가." 하였으나 영이 듣지 않았다.

○ 우가 동강에 가서 봉천선(奉天船)을 타고 음악을 연주하며, 유숙하고는 연쌍비에게 말 두 필을 주고, 또 기생 15명에게 각각 말 한 필씩을 주었다.

○ 최영이 여러 재상과 함께 정요위(定遼衛)를 칠까, 화친을 청할까의 가부를 의논하니, 모두 화친하자는 의논을 따랐다. 이때 요동 도사가 이사경(李思敬) 등을 보내어 압록강을 건너 방을 붙이기를, “호부가 황제의 명을 받드노라. 철령(鐵嶺) 이북ㆍ이동ㆍ이서는 원래 개원(開原)의 관할이니 여기에 속해 있던 군민(軍民)ㆍ한인(漢人)ㆍ여진ㆍ달달ㆍ고려는 종전과 같이 요동에 속한다."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의논이 있었다.

○ 설장수(?長壽)가 남경으로부터 돌아와서 구두로 황제의 명을 전하기를, “고려가 짐의 약속을 듣기를 원하므로 해마다 말을 조공하게 하였더니 바친 말이 아무데도 소용이 없고, 또 어렵다고 호소하므로 내가 명령하기를 세공(歲貢)은 하지 말고 3년에 종마(種馬) 50필씩만 바치라 하였는데, 가져온 말이 또 소용이 없어서 뒤에 5천 필을 사왔으며, 또 모두 약하고 작아서 우리 말 한 필 값이면 그 말 두세 마리는 살 수 있었고, 지금 또 의관(衣冠)을 고친 사례로 말을 가져왔는데, 발굽이 거칠고, 엉덩이 살만 풍만하였다. 기왕 바치는 것이라면 어찌 이렇게까지 하는가. 이것은 반드시 사신이 오다가 서경(西京)에 이르러 팔아 바꿔서 온 것이다. 이미 장자온을 금의위(錦衣衛)에 가두었으니, 해가 지난 뒤에 죄를 주겠다. 네가 돌아가서 집정 대신에게 고하라. 짐이 이미 통상을 허락하였는데, 그대들 편에서는 도리어 분명한 증명서를 가지고 와서 무역하게 하지 않고, 은밀히 사람을 시켜 대창(大倉)에 와서, 우리가 군사를 일으키는지 배를 만들고 있는지를 엿보고, 가서 소식을 알려주는 우리편 사람에게 중한 상을 주니, 이것은 거리에 노는 어린아이의 소견이다. 지금부터는 조심하여 이와 같은 짓을 하지 말고, 또 사신을 보내지 말라. 철령(鐵嶺) 이북은 원래 원 나라에 속하였으니 모두 요동에 귀속시키고, 개원ㆍ심양ㆍ신주(信州) 등처의 군사와 백성은 생업을 회복하도록 들어주라" 하였다. 황제가 또 약재를 주었다.

○ 여러 도의 양반ㆍ백성ㆍ향리(鄕吏)ㆍ역리(驛吏)의 적()을 만들어 군대로 삼아 일이 없으면 농사에 힘쓰고 일이 있으면 징발하게 하였다.

5도의 성을 수축하라 명하고, 여러 원수를 서북의 변방에 보내어 불의의 변에 방비하게 하였다.

○ 최영이 백관을 모아서 철령 이북을 명 나라에바칠 것인가의 가부를 의논하니, 모두 불가하다 하였다.

○ 우가 최영과 함께 비밀리에 요동을 치기를 의논하였다.

○ 경성 방리(坊里)의 군사를 징발하여 한양(漢陽)의 중흥성(重興城)을 수축하였다.

○ 원주 목사 서신(徐信)을 베었는데, 이성림의 동서였다. 우리 태조가 사람을 시켜 최영에게 말하기를, “죄의 괴수가 이미 멸족되고 흉한 무리가 이미 제거되었으니, 지금부터는 형벌과 살육을 그치고 포용하는 명을 반포함이 마땅하다." 하였으나, 영이 듣지 않았다.

○ 우가 복해(福海)의 준마(駿馬)를 가져다 타며 이르기를, “잘 놀라지는 않는가." 하였다. 판도판서 송빈(宋贇)이 앞으로 나와 아뢰기를, “복해도 부리기 어려워하였습니다." 하였다. 우가 노하여 이르기를, “네가 나에게 적의 말을 취했다고 그러느냐." 하고, 마침내 죽였다.

○ 순군(巡軍)이 견미ㆍ익순ㆍ흥방ㆍ길부의 아내를 고문하고 재산을 내놓으라고 독촉하여 모두 옥중에서 죽었다. 뒤에 성림ㆍ복해ㆍ존성ㆍ영진ㆍ임치ㆍ신권ㆍ손중흥 등의 처를 임진강에 던져 죽였다. 이에 처형당한 자의 자손을 빠짐없이 잡아 죽였는데, 포대기 속에 있는 어린 것까지 모두 강에 던지니, 숨어서 면한 자가 거의 없었고, 그 아내와 딸로 관비(官婢)에 몰입(沒入)된 자가 30여 명이나 되었다.

○ 정당문학 곽추(郭樞)를 남경에 보내어 약재를 하사한 것을 사례하고, 밀직제학 박의중(朴宜中)은 철령 이북을 돌려 주기를 청하였다.

3월에 우가 호곶(壺串)에 있어 기린선(麒麟船)ㆍ봉천선 등의 배를 타고 갖은 잡된 놀이를 하였다. 칼을 잡고 좌우를 물리치고 홀로 배 가운데 앉아서 밤이 새도록 자지 않고 이르기를, “부왕(父王)께서 밤에 자다가 시해되었으니 내가 이를 매우 경계한다." 하였다.

○ 우가 최영의 딸을 맞아들였다. 처음에 우가 최영의 딸을 들이고자 사람을 시켜 말하니, 영이 불가하다고 여겨 이뢰기를, “신의 딸이 못생겼고, 또 정실 소생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측실(側室)에 두고 있으니 지존(至尊)의 배필이 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반드시 들이고자 하신다면 노신이 머리를 깎고 산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하고 울며 굳이 거절하였다. 부하 정승가(鄭承可)ㆍ안소(安沼) 등이 우의 뜻에 영합하여 마침내 영의 뜻을 꺾었다. 이날 우가 상의(尙衣)에서 옷을 늦게 바쳤다 하여 별감 강의(康義)와 원윤해(元允海)를 베었다.

○ 전 전리판서 허금(許錦)이 졸하였다. 허금은 젊어서부터 병이 있어 벼슬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재물을 털어 약을 지어 병이 있는 자는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친히 가서 문병하고 약을 주어서 살린 것이 대단히 많았다. 불법을 좋아하지 않았다.

○ 연안(延安) 부사 유극서(柳克恕)와 환자 김실(金實)을 베었다. 극서는 견미의 문객인데, 또 이존성의 말을 듣고 몰래 김실을 옥에서 도망가게 하였었다.

○ 최씨를 봉하여 영비(寧妃), 또 신아(申雅)의 딸을 봉하여 정비(正妃), 왕흥(王興)의 딸을 선비(善妃)로 삼았다. 이근비(李謹妃)로부터 이하 최영비(崔寧妃)ㆍ노의비(盧毅妃)ㆍ최숙비(崔淑妃)ㆍ강안비(姜安妃)ㆍ신정비(申正妃)ㆍ조덕비(趙德妃)ㆍ왕선비(王善妃)ㆍ안현비(安賢妃)와 소매향ㆍ연쌍비ㆍ칠점선(七點仙) 등 세 옹주(翁主)의 여러 궁에 공급하려는 물품은 창고가 모두 비었으므로 미리 3년 동안의 공세(貢稅)를 징수하였으나 부족하여 또 가외로 더 거두니 그 폐단이 극도에 달하였다.

○ 첨서밀직 하륜(河崙)을 양주(襄州), 밀직부사 박가흥(朴可興)을 순천(順天)으로, 첨서밀직 이숭인(李崇仁)을 통주(通州)로 곤장을 쳐서 귀양보냈는데, 인임의 인척이었기 때문이다.

○ 공산(公山)부원군 이자송(李子松)을 죽였다. 처음에 최영이 우에게 권하여 요동을 치려 하니, 자송이 영의 집에 가서 불가하다고 온 힘을 다해 말하였다. 영이 그를 견미와 당()을 지어 붙었다 하여 곤장 1 7대를 쳐서 전라도 내상(內廂)으로 귀양보내기로 하였다가 조금 뒤에 죽였다. 자송이 청렴하므로 나라 사람들이 다시 정승이 되기를 바랐는데, 그가 죽자 듣는 사람들이 슬피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서북면 도안무사 최원지(崔元沚)가 보고하기를, “요동 도사가 지휘(指揮) 두 사람을 보내어 군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강계에 이르러 철령위(鐵嶺衛)를 세우려 하여 요동(遼東)에서 철령에 이르기까지 역참(驛站) 70군데를 두었다." 하였다. 우가 동강에서 돌아오다가 말 위에서 울며 이르기를, “군신들이 요동을 치려는 나의 계책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이 되게 하였다." 하고, 드디어 팔도의 군사를 징집하였다.

○ 최영이 동교(東郊)에서 군사를 사열하였다.

○ 대명(大明)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에서 요동 백호(百戶) 왕득명(王得明)을 보내와서 철령위 설치를 통고하였다. 우가 병을 칭탁하고 백관에게 명하여 교외에서 맞이하게 하였다. 판삼사사 이색(李穡)이 백관을 거느리고 득명에게 나아가서, 돌아가 황제께 잘 아뢰어 주기를 요청하였다. 득명이 말하기를, “천자의 처분에 달려 있는 것이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요." 하였다. 최영이 노하여 우에게 아뢰고, 요동 군사로서 방문(榜文)을 가지고 양계(兩界)에 이른 자를 죽이니, 죽은 자가 모두 21명이나 되었다. 이사경(李思敬) 5명만을 그 지방에 머물러 두고 단속하게 했다.

○ 경자일에 우가 경내의 죄인을 용서하고, 드디어 서해도로 가는데 영비(寧妃)와 최영이 따랐다. 세자와 여러 비를 한양산성에 옮기고, 찬성사 우현보에게 명하여 경성에 머물러 지키게 하고, 서쪽으로 해주 백사정(百沙亭)에서 사냥한다고 일컬었는데, 실상은 요동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이때 전라ㆍ경상도는 왜적의 소굴이 되고, 서북면은 땅이 분할되어 빼앗길 염려가 있으며, 경기ㆍ교주ㆍ양광도는 성을 수축하기에 피곤하고, 서해도와 평양은 사신을 영접하기에 지쳤는데, 게다가 군사를 징발하니, 8도가 소요하고 백성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어 안팎에서 원망하였다.

○ 여름 4 1일 을사일에 우가 봉주(鳳州)에 머물면서 최영과 우리 태조를 불러 이르기를, “요양(遼陽)을 치려 하니 경 등은 힘을 다하여야 한다." 하였다. 태조가 이뢰기를, “지금 군사를 내는 데에 4가지 불가한 것이 있으니,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거슬리는 것이 첫 번째 불가한 것이요, 여름에 군사를 출동시키는 것이 두 번째 불가한 것이요, 온 나라가 멀리 정벌을 하면 왜적이 빈틈을 타서 침입할 것이니 세 번째 불가한 것이요, 때가 무덥고 비가 오는 시기라서 활에 아교가 녹아 풀어지는 것과 대군이 전염병에 걸릴 것이 네 번째 불가한 것입니다." 하니, 우가 그럴듯하게 여겼다. 태조가 물러나와 최영에게 말하기를, “그리하겠소." 하였다. 밤에 최영이 다시 들어가 아뢰기를, “원컨대 다른 말을 받아들이지 마소서." 하였다. 다음날 우가 태조를 불러 이르기를, “이미 군사를 일으켰으니 중지할 수는 없다." 하자, 태조가 아뢰기를, “반드시 큰 계책을 성취하려거든 대가를 서경(西京)에 머물러두고 가을을 기다려 군사를 내면 곡식이 들에 널려 있어 대군의 양식을 충족할 수 있으니, 북을 울리며 전진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출병할 때가 아니니 비록 요동 한 성을 함락시킨다 하더라도 한창 비가 와서 군사가 전진할 수 없으니 군사가 태만해지고, 양식이 떨어지면 화만 초래할 뿐입니다." 하였다. 우가 이르기를, “경은 이자송을 보지 못하였는가." 하였다. 태조가 아뢰기를, “자송은 비록 죽었으나 아름다운 이름이 후세에 전하지마는, 신등은 비록 살아있으나 이미 실책을 하게 되었으니 무슨 소용입니까." 하였으나, 우는 듣지 않았다. 태조가 물러나와 눈물을 흘리면서 우니, 부하 장사들이 말하기를, “왜 그렇게 슬퍼하십니까." 하였다. 태조가 말하기를, “백성들의 화()가 이제부터 시작이다." 하였다.

○ 정미일에 우가 평양에 머물면서 여러 도의 군사를 독촉하고 징집하여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만드는 데에 대호군 배구(裵矩)에게 감독하게 하고, 임견미ㆍ염흥방 등의 가재를 배로 서경에 운반하여 군사의 상()에 충당하기로 하며, 또 도성 안팎의 중들을 징발하여 군사로 만들었다. 병진일에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임명하고,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조민수(曹敏修)를 좌군도통사로 삼아 서경 도원수 심덕부와 부원수 이무(李茂), 양광도 도원수 왕안덕, 부원수 이승원(李承源), 경상도 상원수 박위(?), 전라도 부원수 최운해(崔雲海), 계림(?) 원수 경의(慶儀), 안동(安東) 원수 최단(崔鄲), 조전원수 최공철(崔公哲), 팔도도통사조전원수 조희고(趙希古)ㆍ안경(安慶)ㆍ왕빈(王賓)을 예속시켰다. 우리 태조를 우군도통사로 삼아서 안주도 도원수 정지(鄭地)와 상원수 지용기(池湧寄), 부원수 황보림(皇甫琳), 동북면 부원수 이빈(李彬), 강원도 부원수 구성노(具成老), 조전원수 윤호(尹虎)ㆍ배극렴(裵克廉)ㆍ박영충ㆍ이화(李和)ㆍ이두란(李豆蘭)ㆍ김상(金賞)ㆍ윤사덕(尹師德)ㆍ경보(慶補)와 팔도도통사 조전원수 이원계(李元桂)ㆍ이을진(李乙珍)ㆍ김천장(金天莊)을 예속시켰다. 좌우군이 모두 3 8 8 30명이고, 심부름꾼이 1 1 6백 명이었다.

○ 정사일에 우가 봉천선(奉天船) 도원수 동지밀직 이광보(李光甫)에게 명하여 돌아가 개경(開京)과 서강(西江)에 주둔하여 왜적을 방비하게 했다.

○ 경신일에 우가 대동강에 가서 온갖 놀이를 베풀고, 온종일 호악(胡樂)을 연주하였다. 순군만호부 지인(知印)이 왕명을 위조하여 군사 10명을 놓아주었으므로 목을 베어 조리돌리었다.

○ 신유일에 좌우군도통사가 군사를 출발시키려 하는데, 우가 술에 취하여 날이 늦도록 일어나지 않으므로 하직하지 못하였다. 우는 술이 깨자 석포(石浦)에서 뱃놀이를 하고, 저녁에 돌아와서 여러 원수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옷과 갑주(?)와 궁검(弓劍)과 말을 차등 있게 주고는 새벽까지 호악을 연주하였다.

○ 임술일에 조민수는 좌군을 거느리고, 우리 태조는 우군을 거느리고 평양을 출발하면서 군사를 10만이라 군호(軍號)하였다.

계해일에 영이 우에게 아뢰기를, “지금 대군이 길에서 만일 한 달간이나 지체한다면 큰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니 신이 가서 독려하겠습니다." 하였다. 우가 이르기를, “경이 가면 누구와 함께 정사를 하겠는가." 하였다. 영이 굳이 청하니, 우가 이르기를, “그렇다면 나도 가겠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성(泥城)으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근자에 내가 요동에 갔었는데 요동 군사가 모두 오랑캐를 치러 가고 성중에는 다만 지휘하는 자 한 명이 있을 뿐이니, 만일 대군이 이르면 싸우지 않고 항복을 받을 것입니다." 하였다. 영이 크게 기뻐하여 물건을 후하게 주었다.

○ 갑자일에 우가 대동강 부벽루에서 호악(胡樂)을 울리고 직접 호적(胡笛)을 불었다. 말 먹이는 사람이 벌벗고 강에서 말을 씻기니, 우가 보고 임금을 업신여긴다 하여 베었다. 이때부터 항상 대동강에 가서 즐기며 돌아오는 것을 잊었다.

○ 을축일에 홍무 연호를 정지하고 백성들에게 다시 호복(胡服)을 입게 하였다.

○ 왜적이 초도(椒島)에 들어왔다. 이때 경성의 장정들이 모두 종군(從軍)하고, 오직 노약자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밤마다 봉화가 여러 번 오르는데 경성이 텅 비었으니, 인심이 위태롭고 두려워하여 조석으로 안심할 수가 없었다.

○ 우가 사냥하려고 나가면서 말 한 필을 끌어내어 베며 이르기를, “이 말이 자주 나를 놀라게 하였다." 하였다. 또 길에서 도망하는 군사 2명을 보고 즉시 명하여 베었다. 우의 음란과 살육이 날로 심해졌다.

○ 무진일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 문달한ㆍ김종연(金宗衍)ㆍ정승가와 환자(宦者) 조순(曹恂)ㆍ김완(金完)을 보내어 좌우도통사와 여러 장수에게 금은으로 만든 술그릇을 주고, 도진무(都鎭撫)에게는 모두 옷을 주도록 하였다.

5 1일 갑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 우가 대동강에서 마음껏 즐기고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우는 나가 놀 때마다 호악을 연주하고, 광대를 시켜서 갖은 놀이를 벌였으며, 최영은 날마다 군사를 거느리고 출입하며 피리를 불었다. 왕과 신하가 음란하니 백성들이 원망하고 탄식하였다.

○ 왜선 80여 척이 와서 진포(鎭浦)에 정박하고 가까운 여러 고을을 침범하였다. 우가 상호군 진여의(陳汝宜)를 전라도ㆍ양광도로 보내어 병을 핑계대고 북쪽 정벌에 나가지 않거나, 자제와 노예로 대행시킨 자는 모두 왜적을 막게 하고, 피하는 자는 군법으로 처단하고 그 재산을 적몰하게 하였다.

○ 우가 영비와 함께 부벽루에 가서 활을 쏘기도 하고, 격구를 하기도 하다가, 말 기르는 사람을 죽이려 하니, 최영이 죽이지 말라고 청하였다. 우가 이르기를, “당신은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면서 왜 나에게는 금하는가." 하였다. 영이 아뢰기를, “신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부득이하여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우가 좌우에 눈짓하여 마침내 말 기르는 사람을 베었다.

○ 경진일에 좌우군이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威化島)에 둔을 쳤는데, 도망하는 군사가 길에 이어져서 끊어지지 않았다. 우가 곳곳에서 베도록 명령하였으나 그치게 하지는 못하였다.

○ 최영이 우에게 청하기를, “전하는 서울로 돌아가시고, 노신이 여기서 장수들을 지휘하겠습니다." 하였다. 우가 이르기를, “선왕께서 해를 당한 것은 경이 남정(南征)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어찌 감히 하루라도 경과 함께 있지 않을 수 있는가." 하였다.

○ 갑신일에 대동강 물이 붉어졌다.

○ 이성(泥城) 원수 홍인계(洪仁桂)와 강계(江界) 원수 이억(?)이 먼저 요동 지경에 들어가서 죽이고 노략하여 돌아오니, 우가 기뻐하여 금정아(金頂兒)와 무늬 있는 비단을 내려 주었다.

○ 병술일에 좌우군 도통사가 아뢰기를, “신등이 뗏목을 타고 압록강을 건너니, 앞에 큰 내가 있는데 비가 내려 물이 넘쳐 첫째 여울에서 휩쓸려서 빠진 자가 수백 명이요, 둘째 여울은 더욱 깊어 섬 가운데에 머물러 둔을 치는 것은 한갓 양식을 허비할 뿐입니다. 여기서 요동성에 이르는 사이에 큰 내가 많아서 무사히 건널 것 같지 않습니다. 근일에 불편한 상황을 조목조목 기록하여 도평의(都評議)의 지인(知印) 박순(朴淳)에게 부쳐 아뢰었는데, 아직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황송합니다. 그러나 큰 일을 당하여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으면 이것은 불충(不忠)입니다. 어찌 감히 부월(?)을 피하여 묵묵히 있겠습니까.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나라를 보전하는 도리인데, 우리 나라가 삼한(三韓)을 통일한 이래로 부지런히 대국을 섬겼고, 현릉(玄陵)께서 대명(大明)에 복종하고 섬겨 그 표문에 이르기를, '자손 만대가 되도록 길이 신첩(臣妾)이 되겠다.' 하였으니, 그 정성이 지극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선왕의 뜻을 이어서 해마다 조공 바치는 물건을 한결같이 조서대로 하니, 이에 특별히 고명(誥命)을 내려 현릉의 시호를 주며 전하의 작위를 책봉하였으니 이것은 종사(宗社)의 복이요, 전하의 거룩한 덕입니다. 이제 유지휘(劉指揮)가 군사를 거느리고 위()를 설치한다는 말을 듣고 밀직제학 박의중(朴宜中)을 시켜서 표문을 받들어 진달하였으니 대단히 좋은 계책인데, 지금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갑자기 큰 나라를 범하는 것은 종사와 생민의 복이 아닙니다. 하물며 지금 무덥고 장마가 져서 활이 풀리고 갑옷이 무거워 군사와 말이 함께 지쳤으니, 몰아서 견고한 성 밑에 다다르면 싸워도 반드시 이기지 못 하고 쳐도 반드시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이때를 당하여 군량이 공급되지 못하고 진퇴가 곤란하게 되면 장차 어떻게 대처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회군을 명령하여 삼한 백성의 기대에 맞추소서." 하였으나, 우와 최영은 듣지 않고 환자 김완(金完)을 보내어 빨리 진군하라고 독촉하였는데, 군중에서 완을 머물러 두고 보내지 않았다. 최영이 오랑캐 군사와 함께 요동을 협공하려고 배후(裵厚)를 원 나라에 보냈다. 그때 망한 원 나라의 남은 종자는 사막으로 도망가 헛칭호만 일컫고 있었는데, 최영이 그들의 응원을 받으려 하였으니, 그 계책이 허술하기가 이와 같았다.

○ 양광도 안렴사 전리(田理)가 보고하기를, “왜적이 도내 40여 군을 침범하였는데 지키는 군사의 수가 적고 약하여 사람 없는 지역을 밟는 듯합니다." 하였다. 이에 원수 도흥(都興) ? 김주(金湊) ? 조준(趙浚) ? 곽선(郭璇) ? 김종연(金宗衍) 등을 보내어 막고, 한양에 있는 여러 비()를 모두 개경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 을미일에 우가 성주(成州) 온천에 갔다. 좌우군 도통사가 최영에게 사람을 보내어 빨리 군사를 돌이키도록 허락하기를 청하였으나, 최영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군중에서 헛소문이 돌기를, “태조가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동북면으로 향하려고 이미 말에 올랐다." 하였다. 군중이 흉흉하였는데, 민수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단기(單騎)로 태조에게 달려가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공이 떠나면 우리들은 어디로 가란 말인가." 하였다.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어디로 간단 말인가. 공은 이렇게 하지 말라." 하고, 태조가 여러 장수에게 말하기를, “만일 상국의 지경을 범하여 천자께 죄를 얻으면 종사와 생민에게 화가 곧 이를 것이다. 내가 순()과 역()으로써 글을 올려 회군하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살피지 못하고, 영이 또 늙고 어두워 듣지 않으니, 어찌 그대들과 함께 들어가서 왕을 뵙고 친히 화와 복을 진달하고 왕 옆의 악한 사람(최영)을 제거하여 생령을 편안히 하지 않으랴."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 동방 사직의 안위가 공의 한 몸에 달려있으니 감히 명령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군사를 돌이켜 압록강을 건너는데 태조가 백마를 타고 붉은 활과 백우전(白羽箭)을 메고 강 건너에 서서 군사가 다 건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군중에서 바라보고 서로 말하기를, “예부터 이와 같은 사람이 있지 않았고, 지금 이후로도 어찌 다시 이런 사람이 있을까." 하였다. 이때 장마가 며칠이 되어도 물이 넘치지 않았는데 군사가 건너고 나자, 큰물이 갑자기 닥쳐 온 섬이 잠기므로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이때 동요(童謠), '목자득국(木子得國).'이란 말이 있어 군사와 백성이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모두 노래하였다.

정유일에 조전사(漕轉使) 최유경(崔有慶)이 달려가 우에게 고하였다. 이날 밤에 우리 공정왕(恭靖王)이 그 형 방우(芳雨)와 이두란의 아들 화상(和尙), 상호군 유용생(柳龍生), 최고시첩목아(崔高時帖木兒)와 함께 우()가 있는 성주(成州)에서 태조의 군중으로 달려왔다.

무술일에 우가 대군이 이미 안주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달려 돌아와 밤에 자주(慈州) 이성(泥城)에 이르러 영을 내리기를, “정벌하러 갔던 여러 장수가 제 마음대로 회군하였으니, 너희 대ㆍ소 군민들은 마음을 다하여 막으면 반드시 크게 상을 주겠다." 하였다. 회군하는 여러 장수들이 급히 추격하기를 청하였다. 태조가 말하기를, “빨리 가면 반드시 싸울 터이니 사람을 많이 죽이게 된다." 하고, 매번 군사를 경계하기를, “너희들이 만일 승여(乘輿)를 범하면 내가 너희를 용서하지 않겠다. 백성의 오이 한 개라도 빼앗으면 역시 죄를 받을 것이다." 하고, 길가에서 사냥을 하며 일부러 행군을 늦추게 하였다.

기해일에 우가 평양에 이르러 재물과 보화를 거두어서 대동강을 건너 밤에 중화군(中和郡)에 닿았다.

신축일에 우가 길에서 모든 군사가 이미 가까이 왔다는 말을 듣고 사잇길을 따라 빨리 달려 기탄(岐灘)에 이르렀다. 이튿날 아침에 서울에 돌아와 화원으로 들어가니, 따르는 자가 겨우 50여 기()였다. 서경에서 경성에 이르는 동안에 우를 따르던 신하와 백성들이 술과 음료를 가지고 대군을 맞이하는 자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최영이 막아 싸우고자 백관에 명하여 병기를 가지고 호위하게 하였다.

6월 초하루 계묘일에 모든 군사가 근교(近郊)에 와서 둔을 치고 왕에게 올리는 글을 김완에게 주었는데, “우리 현릉께서 지성으로 대국을 섬겨, 천자가 일찍이 우리를 공격할 뜻이 없는데, 지금 영이 총재가 되어서 조종(祖宗) 이래로 대국을 섬기는 뜻을 생각하지 않고 먼저 대군을 몰아 상국을 범하려고 하여 무더운 여름에 군사를 움직이니, 삼한이 농기(農期)를 잃고, 왜놈들이 빈틈을 타서 깊이 들어와 침범하여 우리 인민을 죽이고 우리 창고를 불태웠습니다. 게다가 한양에 천도하여 중외가 소요하니, 지금 영을 제거하지 않으면 반드시 종사(宗社)를 전복시킬 것입니다." 하였다. 이튿날 우가 진평중(陳平仲)을 보내어 여러 장수에게 전교(傳敎)하기를, “명을 받아 국경을 나갔다가 이미 절제(節制)를 어기고 군사를 일으켜 대궐로 향하고, 또 강상(綱常)을 범하여 이런 분란의 조짐을 부른 것은 진실로 부덕한 나 때문이다. 그러나 군신의 대의는 실상 고금을 통한 의리이다. 경이 글 읽기를 좋아하니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하리오. 하물며 또 강토는 조종에게서 받았으니 어찌 쉽게 남(명 나라)에게 줄 수 있는가. 군사를 일으켜 막는 것이 낫겠다 하여 여러 사람에게 모의하니, 모두들 가하다 하였는데, 이제 어찌 감히 어기는가. 비록 최영을 지목하여 핑계하였지만 영이 내 몸을 호위하는 것은 경들이 아는 것이요, 우리 왕실을 위하여 수고하는 일 역시 경들이 알고 있는 것이다. 교서(敎書)가 이르는 날에 완미(頑迷)한 것을 고집하지 말 것이며, 잘못을 고치는 데에 인색하지 말고 함께 부귀를 보존하여 시종(始終)을 도모하기를 내가 진실로 바라노니,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였다. 또 설장수를 보내어 군사 앞에 나가서 장수들에게 술을 주고 그 뜻을 알아보려 하였다. 모든 장수들이 나와서 도성 문 밖에 둔을 쳤다. 동북면 백성들과 여진(女眞)사람으로 본래 종군하지 않았던 자들이 태조의 회군하는 것을 듣고 앞다투어 떨쳐 일어나 서로 모여 밤낮으로 달려오는 자가 천여 명이나 되었다. 우가 이에 창고의 금과 비단을 내어 군사를 모집하여 수십 명을 얻었는데, 모두 창고에 속한 노예와 시정잡배들이었다. 여러 도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들어와 원조하게 하고, 수레를 모아 골목 입구를 막고, 민수 등의 관작을 삭탈하고, 최영을 문하좌시중으로, 우현보를 우시중으로 삼고, 송광미를 찬성사로, 안소를 평리로, 우홍수를 대사헌으로, 정승가를 응양군 상호군으 로, 조규(趙珪)를 밀직부사로, 김약채(金若采)를 지신사로 삼아서 거리에 방을 붙이기를, “민수 등 여러 장수를 잡는 자는 관가나 사가의 노예를 불문하고 크게 벼슬과 상을 주겠다." 했다.

을사일에 우리 태조가 숭인문(崇仁門) 밖 산대암(山臺巖)에 둔을 치고, 유만수(柳曼殊)를 보내어 숭인문으로 들어가게 하고, 좌군은 선의문(宣義門)으로 들어가게 하였는데, 최영이 막아 싸워 모두 물리쳤다.

과거에 태조가 만수를 보내면서 좌우에게 말하기를, “만수는 눈이 크고 광채가 없으니 담이 작은 사람이다. 가면 반드시 패하여 달아날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이때 태조가 말을 들에 풀어놓았다. 만수가 쫓겨 돌아오자 좌우에서 이뢰니, 태조가 대답도 않고 그대로 장막 안에 누워 있었다. 좌우에서 두세 번 아뢴 연후에야 천천히 일어나서 식사를 하고, 말을 몰고 와서 안장을 얹고 군사를 정돈하였다. 출발하려 할 때에 작은 소나무가 백 보쯤 되는 곳에 있었는데, 태조가 소나무를 쏘아 이길 조짐을 점쳐서 군사의 마음을 모으려고 하여 드디어 쏘니, 한 화살에 꺾어졌다. 여러 군사가 모두 하례하고 진무(鎭撫) 이언출(李彦出)이 꿇어앉아 말하기를, “우리 영공(令公)을 모시고 가면 어딘들 못 가겠습니까." 하였다. 태조가 숭인문으로 성에 들어가 좌군과 나란히 양쪽에서 나아가니, 도성의 남녀들이 다투어 술과 음료를 가지고 군사를 맞아 위로하며, 왕이 막아놓은 수레를 끌어내어 길을 열었다. 노약한 자는 성에 올라가서 바라보고 환호성을 올리며 매우 좋아하였다. 민수가 검은 큰 기를 세우고 영의서(永義署) 다리에 이르렀는데, 최영의 군사에게 쫓기었다. 조금 뒤에 태조가 황룡을 그린 큰 기를 세우고 선죽교(善竹橋)를 거쳐 남산(男山)에 오르니, 먼지가 하늘을 덮고 북소리가 땅을 진동하였다. 영의 휘하 안소(安沼)가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남산에 웅거하였다가 기를 바라보고 무너져 달아났다. 최영이 형세가 궁한 것을 알고 화원으로 달려 돌아와서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문지기를 창으로 콱 찌르고 들어갔다. 태조가 드디어 암방사(巖房寺) 북쪽 고개에 올라 큰 나팔을 한 차례 부니, 군사가 화원을 수백 겹으로 포위하고 최영을 내놓으라고 크게 외쳤다. 정벌할 때마다 장수들은 나팔을 쓰지 않았는데, 태조만이 말 앞에서 나팔을 불게 하였기 때문에 도성 사람들이 나팔 소리를 듣고 태조의 군사가 이미 이른 것을 모두 기뻐하였다. 우가 영비와 최영과 함께 팔각전(八角殿)에 있었는데, 최영이 나가려 하지 않았다. 나팔장이 송안(宋安)이 담에 올라 나팔을 한 번 불자, 군사들이 일시에 담을 무너뜨리고 뜰로 모여들어 곽충보(郭忠輔) 3, 4명이 곧장 대궐 안으로 들어가서 최영을 찾았다. 우가 영의 손을 잡고 울며 이별하니, 영이 두 번 절하고 충보를 따라 나왔다. 태조가 최영에게 말하기를, “이러한 사변이 나의 본심은 아니오. 그러나 국가가 편안하지 못하고 백성들이 피곤하여 원망이 하늘에 사무쳤기 때문에 부득이한 일이니 잘 가시오, 잘 가시오." 하고, 서로 대하여 울고, 드디어 영을 고봉 현(高峰縣)에 귀양보냈다.

처음에 최영이 영을 내리어 정벌에 나간 장수들의 처자를 가두려 하였으나, 뒤에 일이 급박하여 실행하지 못하였다. 이인임(李仁任)이 일찍이 말하기를, “이판삼사(李判三司)가 나라의 주인이 될 것이라." 하였는데, 영이 듣고 매우 노하였으나 감히 말은 못하였다. 이때가 되어 탄식하기를, “인임의 말이 참으로 옳다." 하였다. 광미ㆍ소ㆍ규ㆍ승가 등은 도망가 숨었다. 두 도통사와 36명의원수들이 대궐에 나아가 절하여 사례하고, 군사를 궐문 밖으로 돌리었다. 이에 앞서 잠저(潛邸) 동네에 동요가 있어 이르기를, “서경성 밖의 불빛이요, 안주성 밖의 연기 빛이라. 그 사이에 왕래하는 이원수, 원하건대 백성을 구제하소."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이런 변이 있었다.

○ 다시 홍무(洪武) 연호를 시행하고, 명 나라 의복을 입고, 호복(胡服)을 금하며, 우현보를 파면하고, 조민수를 좌시중으로, 우리 태조를 우시중으로, 조준을 첨서밀직삼사 겸 대사헌으로 삼고, 여러 장수를 모두 복직시켰다. 이때 명 나라 조정에서 본국에 출병하는 변고를 듣고 황제께 글을 올려 고려를 치기를 청하니, 황제가 종묘에 점을 치려고 재계(齋戒)를 하는 중이었는데, 마침 본국의 사자가 이르니 곧 재계를 그만두었다.

○ 장수들이 성에 들어가 흥국사(興國寺)에서 회의하고, 여러 도에서 성을 쌓는 것과 징병하는 것을 파하고, 안소와 정승가를 잡아서 순군옥에 가두었다. 전 교부령 윤소종(尹紹宗)이 군사 앞에 나와 정지(鄭地)를 통하여 우리 태조를 보기를 청하고 〈곽광전(?光傳)〉을 드리었다. 태조가 조인옥(趙仁沃)에게 읽게 하고 들으니, 인옥이 극력 다시 왕씨를 세우자는 의논을 말했다.

○ 정미일에 장수들이 성에 들어가 지장사(地藏寺)에서 회의하여 최영을 합포(合浦)에 옮겨 귀양보내고, 송광미를 원주로, 안소를 안변(安邊)으로, 정승가를 영해(寧海), 판밀직 인원보(印原寶)를 함창(咸昌)으로, 동지밀직 안주(安柱)를 봉주(鳳州), 지밀직 정희계(鄭 熙啓)를 음죽(陰竹)으로 귀양보냈다.

○ 사헌부가 환자 조순ㆍ조복선(曹福善)ㆍ윤상(尹祥), 전 지신사 김약채의 죄를 탄핵하여 모두 먼 고을에 귀양보냈다.

○ 무신일에 우가 환자 80여명과 함께 갑옷을 입고 우리 태조와 조민수ㆍ변안열의 집에 달려 갔으나 모두 문 밖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집에 있지 않으므로 해치지 못하고 돌아왔다. 기유일에 제장들이 숭인문에서 회의하고, 이화(李和)ㆍ조인벽(趙仁璧)ㆍ심덕부ㆍ왕안덕을 시켜 대궐에 나아가 궁중의 병기와 안장 달린 말을 모조리 내어 놓기를 청하였다.

경술일에 우를 강화로 추방하였다. 처음에 모든 장수들이 영비를 내쫓기를 청하니 우가 이르기를, “만일 영비를 내쫓는다면 나도 함께 나가겠다." 하였다. 이에 여러 원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대궐을 지키면서 강화로 나가기를 청하였다. 우가 할 수 없이 나와서 채찍을 잡고 안장에 걸터앉으며 이르기를, “해가 이미 저물었구나." 하니, 측근들이 꿇어 엎드려 울면서 응답하는 자가 없었다. 드디어 영비ㆍ연쌍비와 함께 회빈문(會賓門)을 나와서 강화로 향하였다. 백관(百官)이 전국보(傳國寶)를 받들어 정비(定妃)에게 바쳤다.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진() 나라의 정()과 진() 나라의 예()에 대한 일은 애매모호하지만, 여씨(呂氏)가 다른 사람의 아들을 세워서 혜제(惠帝)의 후사(後嗣)로 삼은 데 이르러서는 주문공(朱文公)이 곧은 붓으로 특별히 써서 조금도 용서가 없었으니, 그 천하 후세의 경계를 삼은 것이 엄하였다. 공민왕이 일찍이 아들이 없는 것을 근심하였으니, 마땅히 종실의 어진 자를 구하여 후사(後嗣)를 삼아야 할 것인데, 신돈의 자식을 취하여 몰래 궁중에서 길러 죽은 뒤의 계책을 하였다가 마침내 자기 몸도 보전하지 못하였고, 우도 음란하고 포학하여 몸이 망하고 왕실이 무너졌으니, 우는 진실로 말할 것도 없지마는 공민왕은 또한 홀로 무슨 마음이었던가." 하였다.

신해일에 조민수가 정비의 전교로 우의 아들 창()을 세웠다. 태조가 회군할 때에 민수와 의논하기를, “다시 왕씨의 후손을 세우자." 하였다. 민수 또한 그렇게 여겼었는데 이날에 이르러 태조가 왕씨를 가려 세우려 하니, 민수가 인임이 자기를 천거해 준 은혜를 생각하여 인임의 외형제(外兄弟)인 이임(李琳)의 딸 근비(謹妃)의 소생인 창을 세우기를 꾀하나, 장수들이 자기 뜻을 어기고 왕씨를 세울까 두려워하여 한산군 이색(李穡)이 당시의 명유(名儒)이므로 그 말을 빙자하고자 비밀리에 색에게 물었다. 색 또한 창을 세우고자 하여 "당연히 전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 하였다. 태조가 민수에게 말하기를, “회군할 때에 한 말은 어찌 된 것인가." 하니, 민수가 얼굴을 붉히며 말하기를, “원자를 세우는 것은 한산군(韓山君 이색)이 이미 계책을 정하였으니 어떻게 어길 수 있는가." 하고, 드디어 창을 세었는데 나이 9세였다.

○ 창이 어머니 이씨를 높여 왕대비로 삼았다.

○ 민수가 창에게 아뢰어 이인임과 이숭인을 불렀는데, 인임은 이미 죽은 뒤였다. 나라 사람들이 처음에 인임을 부른다는 소문을 듣고 다시 나라 정사를 어지럽히고, 또 백성의 재물을 빼앗는 문을 열어 놓을까 두려워하였는데, 조금 뒤에 인임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모두 기뻐하기를, “사람이 주벌하지 못하니 하늘이 죽였다." 하였다.

○ 조민수를 양광ㆍ전라ㆍ경상ㆍ서해ㆍ교주도 도통사로, 우리 태조를 동북면ㆍ삭방ㆍ강릉도 도통사로 삼았다.

○ 박의중이 남경에서 돌아왔다. 예부(禮部)가 황제의 명을 받들어 자문(咨文)을 보내기를, “표문에 이르기를, ‘철령(鐵嶺)의 인호(人戶)에 대한 일은 조종(祖宗) 이래로 문주(文州)ㆍ화주(和州)ㆍ고주(高州)ㆍ정주(定州) 등 고을이 본래 고려에 예속되어 있었다’ 하였으니, 왕의 말대로 하면 그 땅이 고려에 예속되어야 마땅하나, 이치와 사세로 말하면 그 몇 고을의 땅을 지난날에는 원 나라에서 통치하였으니, 지금 요동에 예속되어야 마땅하고, 고려의 말하는 것을 경솔히 믿을 수 없으니, 반드시 끝까지 살피고야 말겠다. 또 고려는 큰 바다로 막히고 압록강으로 한계하여, 일찍이 옛날에는 따로 나라를 이루었으나, 중국의 역대 조정의 정벌을 자주 입은 것은 분쟁의 단서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지난날에 역신(逆臣)이 왕을 죽였으므로 짐이 절교를 명하였는데, 저들이 사람을 보내 약속을 따르기를 청하였다. 여러 번을 윤허하지 않고, 자주 청하여 마지않은 뒤에야 세공을 요구하여 성의를 표하게 하고, 교통을 허락하였다. 저들이 조공한다고 하였으나 해마다 올리는 공물이 약속과 같지 않았고, 얼마 후에는 사람을 보내서 어렵다고 호소하였다. 그 어렵다고 호소하는 것을 받아들여, 전일에 정한 공물을 깎아버리고 다만 해마다 종마(種馬) 50필을 바치되 모두 순종으로 하라고 하였다. 이 조공물은 그전 공물에 비교하면 만분, 백분의 일뿐인데, 그 가져오는 것을 보면 모두 윗사람에게 바치는 물건이 못 되며, 모두가 노둔하고 저급한 짐승이었다. 이것이 상국을 첫 번째로 무시한 것이요, 표문에 사은(謝恩)한다 하면서 예물로 보낸 말이 왔는데 모두 얼룩진 잡색이어서 행상하는 사람들도 쓰지 않는 것이니, 두 번째로 무시한 것이요, 때로는 간혹 사람을 보내어 몰래 온()ㆍ태()ㆍ항()ㆍ소()ㆍ송() 등 제주의 백성들을 꾀어 비밀리에 사세를 엿보다가 발각되었으니, 세 번째로 무시한 것이요, 짐이 일찍이 여러 사신에게 이르기를, '이런 간계를 꾸미지 말고 백성의 생업을 금하지 말라.'고 하였다. 백성들이 수륙으로 공공연히 왕래하면서 무역을 하도록 허락했으니 무슨 일인들 되지 않으며, 무슨 기밀인들 얻지 못하겠는가. 몰래 간사한 꾀를 내어 백성을 유인하여, 그들이 금백(金帛)에 속아 망령되이 사세를 말하게 함으로써 공연히 소인에게 속임을 당했으니 이는 어리석은 짓이니 네 번째로 무시한 것이요, 홍무 20년 봄에 짐이 면포와 비단을 요동(遼東)에 가져다 두고 고려와 말을 무역하여 오랑캐를 치게 하였는데, 저 배신(陪臣)들이 모두 나쁜 말을 가지고 와서 바꾸었다. 값으로 치면 본국의 말 한 마리 값으로 두세 마리는 살 수 있는데, 이제 본국 말 두세 마리의 값으로 한 마리를 바꾸어도 너무 노둔하여 마침내 짐에게 소용이 되지 않았으니, 다섯 번째로 무시한 것이다. 아아, 고려의 땅이 삼면은 바다로 싸이고, 일면은 산을 지고 있어 주위가 수천리니, 그 가운데 어찌 어질고 지혜 있는 사람이 없으랴. 서로 왕래하는 데 있어서 이편에서 성의로 사귀면 저편에서 거짓으로 합하고, 장차 국교를 파하려고 하면 저들이 또 공손한 말로 청하니, 이러한 행위가 짐은 무슨 마음인지 알 수 없도다.

또 짐이 역대의 조정이 고려를 정벌한 것을 보면, () 나라는 네 차례를 쳤는데, 자주 국경을 침범하기 때문에 쳐서 멸하였고, () 나라는 두 차례를 쳤는데 은밀히 두 마음을 품고 오() 나라와 우호를 통하기 때문에 그 도성을 도륙하였고, () 나라는 한 차례를 쳤는데 모욕하고 교만하여 예가 없기 때문에 그 궁실을 불사르고, 남녀 5만을 사로잡아 노예를 만들었고, () 나라는 두 차례를 쳤는데 요서(遼西)를 침범하고 속국으로서의 예를 빠뜨렸기 때문에 쳐서 항복을 받았고, 당 나라는 네 차례를 정벌하였는데 왕을 죽이고 형제가 서로 왕위를 다투기 때문에 그 땅을 평정하여 아홉군데의 도독부(都督府)를 두었고, () 나라는 네 차례를 토벌하였는데 왕을 죽이고 아울러 반복이 많으며 침범하여 난을 꾸몄기 때문에 그 궁실을 불사르고, 난신 강조(康兆) 등 수만 명을 베었고, () 나라는 한 차례를 쳤는데 사신을 죽였기 때문에 그 백성을 도륙하였고, 원 나라는 다섯 차례를 토벌하였는데 도망한 사람을 받아들이고, 사자와 조정에서 보낸 관리를 죽였기 때문에 군사를 일으켜 쳤으며, 그 왕이 탐라(耽羅)로 도망갔으므로 잡아 죽였다. 그 분쟁의 단서를 따져 보면 모두 고려가 자초한 것이요, 중국의 제왕이 병탄을 좋아하고 토지를 욕심낸 것은 아니다. 지금 철령의 땅은 왕의 나라에서 할말이 있겠지마는, 탐라의 섬은 옛적에 원 세조가 말을 기르던 장소이다. 지금 원 나라 자손으로 짐에게 귀순한 자가 매우 많으니, 짐이 반드시 원 나라의 자손을 끊지 않으려 한다. 여러 왕을 섬 가운데 두고 군사 수만으로 지키면서, 양절(兩浙)에서 양식을 공급해 주어 원 나라의 후사를 보존하여 원 나라 자손으로 하여금 바다 가운데에서 편안히 살게 하면 어찌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공민왕 때부터 사신으로 가는 자가 금은과 토산물을 많이 싸가지고 가서 채색 비단과 가벼운 보화를 샀다. 비록 유식한 자라도 권세있는 자의 부탁을 못 이겨 개인의 짐이 조공으로 바치는 물건의 10분의 9를 차지하였다. 중국에서 말하기를, “고려 사람들은 사대(事大)를 빙자하여 무역을 하려고 온다." 하였다. 임견미와 염흥방이 집권하니, 그 폐단이 더욱 심하였다. 그러나 박의중(朴宜中)의 행장에는 한 물건도 없었다. 요동에서 호송하는 진무(鎭撫) 서현(徐顯)이 베를 요구하자 의중이 주머니를 털어 보이고 입고 있던 모시 옷을 벗어 주었다. 현이 그 청렴을 칭찬하고 예부에 보고하자 황제가 불러 보고 후하게 대접하였고, 또 예부에 명하여 회동관(會同館)에서 잔치하는데 전원(前元)의 평장원사(平章院使)의 위에 앉게 하고, 드디어 철령에 위()를 설치하는 의논을 중지하였다.

○조민수와 우리 태조에게 충근(忠勤)ㆍ양절(亮節)ㆍ선위(宣威)ㆍ동덕(同德)ㆍ안사(安社)ㆍ공신의 호를 주고, 장사길(張思吉)을 밀직부사로 삼았다. 사길은 의주(義州) 사람인데, 의주는 땅이 요동과 접하여 왕래가 서로 잇달았다. 사길은 그 지방 사람으로 아비를 대신해서 만호가 되어 정상을 모두 알고 있으므로 특별히 포장(?)하여 변방 사람을 위로하였다.

○ 왜적이 전주를 침범하여 관사를 불태우고, 또 김제(金堤)ㆍ만경(萬頃)ㆍ인의(仁義) 등의 현을 침범하였다.

○ 우리 태조가 병으로 사퇴하려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창()이 즉위하였으므로 국내에 사면령을 내리고, 편민사의(便民事宜)를 반포하였다.

○ 가을 7월에 왜적이 광주(光州)를 함락시키니 양광ㆍ전라ㆍ경상도 도체찰사 황보림(皇甫琳)과 양광도 부원수 도흥(都興), 전라도 부원수 김종연, 경상도 부원수 구성로(具成老) 등에게 명하여 구원하게 하였다.

○ 일본 국사(國師) 묘파(?)와 관서성 탐제(關西省探題) 원요준(源了俊)이 사람을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포로로 잡혀간 우리 백성 2 50명을 돌려보내고, 이어서 장경(藏經)을 구하였다.

○ 압록강 서쪽의 초적(草賊)들이 의주 청수구자(靑水口子)를 침범하였다.

○ 최영을 잡아와서 순군옥에 가두고 요동 정벌의 죄를 국문하였다.

○ 대사헌 조준(趙浚)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전제(田制)를 바로잡아 국용(國用)을 풍족하게 하고, 민생을 후하게 하며, 인재를 가려 기강을 진작시키고, 정령(政令)을 거행하는 것은 오늘날의 당연한 급선무입니다. 나라의 운수가 길고 짧은 것은 민생의 괴롭고 즐거움에 달려 있고, 민생의 괴롭고 즐거움은 전제(田制)의 고르고 고르지 못한 데 달려 있습니다. 문왕ㆍ무왕ㆍ주공이 정전(井田)을 제정하여 백성을 길렀기 때문에 주 나라가 천하를 차지한 것이 8백여 년이었고, 한 나라가 전세(田稅)를 헐하게 하였기 때문에 천하를 차지한 것이 4백여 년이었으며, 당 나라가 백성의 토지를 고르게 나누었기 때문에 천하를 차지한 것이 거의 3백 년이었고, () 나라는 정전을 철폐하였기 때문에 천하를 얻은 지 2대만에 망하였습니다. 신라 말기에도 토지를 고르게 나누지 못하고 부세(賦稅)가 무거웠으므로 도적이 떼지어 일어났습니다. 태조께서 일어나 즉위한 지 34일 만에 여러 신하를 접견하고 개연(慨然)히 탄식하기를, '근세(近世)에 전세(田稅)를 너무 심하게 받아 1(一頃)당 받는 조세가 6섬에 이르러 백성이 살 수가 없으니, 내가 매우 불쌍히 여긴다. 이제부터는 마땅히 십일(什一)의 제도를 사용하여 밭 1(一負)에 벼 서되[三升]를 내게 하라.' 하고, 마침내 백성에게 3년간의 조세(租稅)를 감면하였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3국이 솥발처럼 대치하고, 영웅들이 승부를 다투어 재정의 용도가 급하였으나, 우리 태조께서는 전공(戰功)을 뒤로하고 백성 구제하는 일을 먼저 하였으니, 곧 천지가 만물을 생육(生育)하는 마음이요, ()ㆍ순()ㆍ문왕(文王)ㆍ무왕(武王)의 인정(仁政)입니다.

삼한이 통일되자 곧 전제(田制)를 바로잡아 신하와 백성에게 나누어 주되, 백관은 그 품질(品秩)에 따라 주어서 본인이 죽은 뒤에는 회수하고, ()의 군사는 20세에 서울로 들여서 60세가 되면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사대부로서 전지를 받은 자가 죄를 지으면 회수하니, 사람마다 자중하여 감히 법을 범하지 못하여 예의가 일어나고 풍속이 아름다워졌습니다. ()ㆍ위()의 군사와 주()ㆍ군()ㆍ진()ㆍ역()의 아전이 각각 그 전지의 소출을 먹고 그 땅에 정착하여 생업을 편안히 하니, 나라가 부강해졌습니다. 비록 천하를 호시탐탐 노리는 요 나라와 금 나라가 우리와 땅을 접하고 있어도 감히 침노하여 덤비지 못한 것은, 우리 태조께서 삼한의 땅을 나누어 신하와 백성들과 함께 그 녹을 누리고 그 생업을 후하게 하며, 그 마음을 결속시켜 국가 천만 대의 원기(元氣)가 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한인(閑人)이니, 공음(功蔭)이니, 투화(投化), 입진(入鎭)이니, 가급(加給)이니, 보급(補給)이니, 등과(登科), 별사(別賜)니 하는 명칭이 대()마다 증가하여 토지를 담당하는 관원이 번쇄(?)한 것을 견딜 수 없고, 토지를 주고 토지를 회수하는 법이 점점 무너져 해이하게 되었습니다. 간사하고 교활한 무리가 틈을 타서 속이고 숨기는 것이 한이 없어서 이미 벼슬한 자 시집간 자도 오히려 한인전에서 나오는 수입을 그대로 먹고, 군대에 나가지 않은 자도 속여서 군전(軍田)을 받으며, 아비가 토지를 몰래 가지고 있다가 사사로이 그 자식에게 물려주고, 자식은 몰래 토지를 가로채어 나라에 돌려주지 아니하여 이미 역분전(役分田)을 받고 또 한인전(閑人田)을 받았으며, 또 군전(軍田)을 받았습니다. 토지를 주고 받는 관원은 그것이 현재의 관리로서 역분전을 받아야 할 사람인가, 그 자신이 과연 부병(府兵)인가, 그 아비가 과연 변진(邊鎭)에서 수자리서는가, 그 할아비가 과연 다른 나라로부터 귀순한 사람인가를 묻지 않습니다.

조종(祖宗)의 토지를 주고 회수하는 법이 무너지고, 겸병(兼幷)하는 문이 한 번 열리니, 재상이 되면 당연히 밭 3백 결()을 받을 자가 일찍이 송곳 세울 만한 땅도 받을 곳이 없고, 재상이 되어서 녹 3 60석을 받을 자가 오히려 20석도 차지하지 못합니다. 군사라는 것은 왕실을 호위하고 외적을 방비하는 것이며 그 옷과 양식과 기계가 모두 밭에서 나오는 것인데, 국가에서 기름진 땅을 떼어 42도부(都府)의 갑사(甲士) 10만여 명에게 녹으로 주었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병사를 기를 비용이 없습니다. 조종조의 법은 곧 삼대(三代) 때에 농업에 군사를 붙여두었던 뜻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군사와 토지제도가 모두 엉망이 되어 매양 급한 때를 당하면 농민을 징집해서 군대에 보충하기 때문에 군사가 약하여져 적의 먹이가 되고, 농민들의 양식을 쪼개어 군사를 기르기 때문에 호구가 줄어들어 고을이 망합니다. 조종께서 지극히 공정하게 나누어준 토지를 한 집안 부자간의 사유물로 삼아서, 한 번도 문을 나와 조정에서 벼슬하지 않은 자와, 한 번도 군문(軍門)에 발을 들여 놓지 않은 자가 비단옷과 쌀밥으로 하는 일도 없이 복을 누리며 공후(公侯)를 멸시하는데, 개국 공신의 후손과 밤낮으로 왕을 모시는 신하와, 여러 번 싸워 힘을 바친 장사(將士)는 도리어 1 ()의 토지나 송곳 세울 정도의 경작지조차 얻지 못해 그 부모와 처자를 봉양하지 못하니, 어떻게 충의를 권하고 일을 책임지우며 전공(戰功)을 장려하고 외적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안으로 판도사(版圖司)ㆍ전법사(典法司), 밖으로 수령(守令)ㆍ염사(廉使)가 그 본직을 저버리고 날마다 추위와 더위를 무릅쓰고 땀을 흘리고 붓을 불어 가며 토지 송사만 판결하느라, 문권을 상고하고 증거를 조사하며, 전호(佃戶)를 신문하고 고로(故老)에게 묻고 있습니다. 그 죄에 관련된 자가 옥에 가득하고 뜰에 가득하여 농사를 폐지하고 판결을 기다리니, 두어 달 밀린 문안(文案)이 산같이 쌓이고 1묘의 다툼이 수십 년간 계속되어, 침식을 잊고 판결하기에 여념이 없는 것은 사전(私田)이 다툼의 실마리가 되어 송사가 번잡하기 때문입니다. 자식은 부모에 대하여 1()의 요구라도 혹시 자신의 뜻에 맞지 않으면 오히려 원한을 품고 길가는 사람 보듯 하며, 심한 자는 상복을 벗자마자 그 시병(侍病)하던 노비를 때리며 그가 받은 토지의 공문서를 요구합니다. 부모에게 대하여도 이러한데 하물며 형제간이야 어떻겠습니까. 이것은 사전 때문에 인륜이 금수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조정 사대부들이 겉으로는 서로 좋아하는 체하나 속마음으로는 서로 시기하여 암암리에 중상하기까지 하니 이것은 사전으로 함정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근년에는 겸병(兼幷)하는 일이 더욱 심해져서, 간악하고 흉한 도당들이 주()에 걸치고 군()을 포괄하여, 산과 내를 경계(境界)로 삼고서 모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토지라 하며, 서로 훔치고 서로 빼앗아 1()의 주인이 5, 6명이 되고, 1년에 도조 받는 회수가 8, 9차에 이릅니다. 위로는 어분전(御分田)으로부터 종실ㆍ공신ㆍ조정ㆍ문무관의 토지와, 외역(外役)ㆍ진()ㆍ역()ㆍ원()ㆍ관()의 토지와, 남이 여러 대 동안 심은 뽕나무와 지은 집에 이르기까지 모두 빼앗아 차지하니, 호소할 곳 없는 불쌍한 백성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개천과 구덩이에 빠져 죽을 뿐입니다. 조종께서 토지를 나누어 신하와 백성의 생업을 후하게 한 것이 끝내는 신하와 백성을 해치게 할 뿐이니, 이것은 사전이 난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토지를 겸병하는 집안의 도조를 거두는 무리가 병마사니, 부사(副使), 판관이니 일컫기도 하고 별좌(別坐)라 일컫기도 하는데, 따르는 자 수십 명이 말 수십 필을 타고 다니면서 수령을 능멸하고, 안렴사를 꺾고, 음식을 진탕 먹으며 주막집에서 돈을 흥청망청 씁니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떼를 지어 횡행하며 방종 포학하고 침탈 노략하는 짓이 도적보다 몇 배나 심하여 외방(外方)이 이때문에 피폐해집니다. 전호(佃戶)의 집에 들어가서는 사람은 술과 밥을 배불리 먹고, 말은 곡식을 실컷 먹고, 햅쌀을 먼저 바치게 하며 면화ㆍ삼ㆍ여비ㆍ개암ㆍ밤ㆍ대추ㆍ육포(肉脯) 등을 강제로 팔게 해서 거두는 것이 조() 10배는 되어 조를 바치기 전에 재산이 다 없어지고 맙니다. 실지로 토지의 수확량을 조사할 때에는 부()와 결()의 고하(高下)를 마음대로 하여, 한 결의 토지를 3, 4결로 정하고, 큰 말로 벼를 거두어 한 섬 거두는 것을 두 섬 거두어들여 그 수량을 채웁니다.

조종께서 백성에게 취하는 것은 10분의 1에 그쳤는데, 지금 사가(私家)에서 백성에게 취하는 것은 열배 천배나 되니, 하늘에 계신 조종의 영령을 어찌 대하며 국가의 인정(仁政)이 어찌 되겠습니까. 토지는 백성을 기르는 것인데 도리어 백성을 해치니, 어찌 슬프지 않습니까. 백성이 사전(私田)의 조세를 낼 때에 다른 사람에게 빌려서 충당하는데 그 빚은 아내를 팔고 자식을 팔아도 갚을 수 없고, 부모가 굶주리고 떨어도 봉양할 수 없으니, 원통하게 부르짖는 소리가 위로 하늘까지 통하여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여 수재와 한재를 불러일으키게 하였으니, 호구(戶口)가 이때문에 비게 되었으며, 왜놈들이 이때문에 깊숙이 들어와 천리에 시체가 뒹굴어도 막을 자가 없습니다. 탐욕스럽고 욕심 많다는 소문이 중국에까지 퍼져 사직과 종묘가 알을 포개 놓은 것보다 위태합니다. 신등은 원하건대, 태조께서 지극히 공정하게 토지를 나누어 주신 법을 준수하고, 후인이 사사로이 주고받아 겸병하는 폐단을 고쳐, 선비도 아니고 군사도 아니고 나랏일을 맡은 자가 아니면 토지를 주지 말 것이며, 죽을 때까지 사사로이 주고받고 하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한계를 세워, 백성으로 하여금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여 국가의 재용을 족하게 하고 민생을 후하게 하며, 조정 신하를 우대하고 군사를 넉넉하게 길러 주십시오. 그러면 나라가 부유하고 군사가 강하여 예의가 일어나고 염치가 행해지며, 인륜이 밝아지고 송사가 없어져 사직의 기초가 반석같이 편안하고 태산같이 튼튼하며, 국가의 위엄이 뇌성처럼 진동하고 불꽃처럼 치성하여, 비록 외적의 침노가 있더라도 그 외적은 장차 저절로 시들고 무너질 것입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나라에 3년간 먹을 비축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꼴이 아니다.' 하였는데, 근자에 서북으로 행차한 것이 겨우 두어 달뿐인데도 오히려 공사(公私)가 지탱하지 못하고 상하가 함께 곤궁하니, 만일 2, 3년간 수재와 한재가 생긴다면 어떻게 진휼할 것이며, 많은 군사의 양식과 비용은 어떻게 충당할 것입니까. 하물며 지금 도성 안팎의 창고가 일시에 모두 비어서 군국(軍國)의 수용이 나올 곳이 없는데, 변방의 근심은 예측할 수가 없으니 만일 창졸간에 변이 생기면 집집마다 거두기도 어렵습니다. 지금 양전(量田)할 때를 당해서 일정한 수()를 정하여 토지를 주기 전에 3년으로 한정하고 임시로 국가에서 거두어들인다면 군국의 수용을 충당할 수 있으며, 관원의 녹봉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안렴사(按廉使)의 직책은 건국 초기의 절도사(節度使)로서 군사와 백성을 총괄하고 한 지방을 도맡으므로, 수령은 직책을 받들어 백성들의 생업을 편안히 하고, 방진(方鎭)은 두려워하고 복종하여 힘껏 싸워서 지킨다면 권력은 한 곳으로 돌아갈 것이며, 사람들은 다른 바람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백성이 안렴사를 한 방면의 통찰(統察)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적이 주()ㆍ군()을 공파(攻破)해도 방진(方鎭)은 거리낌이 없이 군사를 끼고 위엄만 기르며,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고 싸우지 않으니, 적의 기세가 날마다 더욱 치성해집니다. 수령은 제멋대로 방자하여 공공연하게 뇌물을 주고 받으며, 음악과 여색에 빠져서 백성이 도탄(塗炭)에 빠져도 구휼하지 않습니다. 안렴사가 된 자가 문서에 있는 수량과 실제 전곡(錢穀)의 차이만을 구구하게 따져 출척(黜陟)과 상벌의 법을 엄하게 하여 군민(軍民)의 행정을 진작시키지 못하는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안렴을 맡은 사람이 모두 정순(正順)ㆍ봉순(奉順)의 관원이고, 방진ㆍ부윤(府尹)ㆍ주목(州牧)ㆍ도호(都護)는 양부(兩部)의 대신과 봉익(奉翊)의 고관이기 때문에 대체로 왕명으로 받은 직책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품계가 낮다는 소소한 절차만 혐의를 삼아 기강을 떨치지 못하니 국사를 그르침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신들이 원하건대, 조종께서 양부(兩府)에서 안렴사를 보내도록 정한 법을 본받고, 당나라에서 대신을 절도사로 보내던 고사(故事)를 모방하여, 양부에서 청렴하고 위엄 있고 사무에 밝은 자를 가려 도안렴출척대사(都按廉黜陟大使)로 삼아서, 주ㆍ군을 순찰하여 전야(田野)가 개간되고, 호구가 증가되며, 송사가 적어지고, 부역이 고르며, 학교가 일어난 것 등을 가지고 수령을 출척(黜陟)하고, 방진(方鎭)을 순찰하여 호령이 엄하고 군기(軍器)가 정비되며, 병졸이 훈련되고, 둔전(屯田)이 정돈되며, 해구(海寇)가 종식된 것 등을 가지고 상벌을 행하되, 군관이 싸움에 패하여 한 주ㆍ군을 함몰하게 하였거나, 탐욕스럽고 더러워서 뇌물을 받은 수령은 목을 베며, 그 다음 죄를 지은 자는 관직을 파면하여 죄를 의논하고, 그 다음 죄를 지은 자는 벌을 논하되 공무는 행하도록 하여 기강을 진작하고, 3년을 체임(遞任)하는 동안에 도안렴의 견책을 받지 않은 수령은 곧 서울의 벼슬을 제수하고, 도안렴사는 대성(臺省)으로 하여금 천거하게 하여 내어 보내되, 원수(元帥) 이하가 모두 교외에 나와 영접하고, 참알(參謁)할 때에 앉는 것을 허락하지 말며, 5품ㆍ6품으로 염사(廉使)가 된 자도 1년 만에 서로 교대하는 기한과 출척하고 고과(考課)하는 법은 도안렴사와 같게 하여 고정된 예를 만들지 말 것이며, 도안렴으로 주ㆍ군과 방진 수령을 출척하지 못하는 자는 사헌부에서 아뢰어 그의 직책을 파면하여 통절히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수령이란 백성의 편안하고 괴로운 일을 살피며, 옥사와 송사를 결단하고 부역을 고르게 하여 이 백성의 부모노릇을 하는 것이 그 직책입니다. 순문사와 안렴사가 주ㆍ군에서 군사를 징발할 때에 그 수령에게 책임을 지우면 호수(戶數)의 많고 적은 것과, 정부(丁夫)의 튼튼하고 약한 것을 수령이 잘 알 것이니 반드시 정예 군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순문사와 안렴사가 매양 군사를 징발할 때면 수령들은 자기 고을을 사사로이 할까 염려하여, 남군(南郡)의 군사를 징발하려 하면 반드시 북군의 수령에게 명하고, 북군(北郡)의 수령은 남군에 가게 합니다. 북군의 수령이 남군에 가면 듣고 보는 것이 생소하기 때문에 속을까 두려워하여 먼저 때리기부터 합니다. 북군의 군사를 징발하라는 통첩이 남군에 이르면 남군의 수령은 옷소매를 떨치고 일어서서 곧 북군으로 가서 수레에서 내리기도 전에 먼저 사람부터 형벌을 주며 그들의 부모를 가두고 처자를 때립니다. 군사의 징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호구를 점검하는 것과 군수품을 운송하는 데에도 가지가지로 징토(徵討)하고 독촉하는 것이 끝이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두 고을이 서로 원망하여 마침내는 원수가 되어 서로 보복하니,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딜 수 없어서 호구가 비게 됩니다. 왕의 뜻을 받아서 아래로 유포하고 교화를 선양하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원하건대, 수령은 지경 밖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마시어 자기 고을만을 다스리게 할 것이며, 그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는 자는 안렴사가 곧 파직시켜 내치고 조정에 보고하여 그 결원을 보충하게 하소서.

선왕이 순문사ㆍ안렴사 이외에는 사신을 지방에 파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그 신중한 뜻을 볼 수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이후로 사신의 파견이 번다하여 수fp가 연이어져서 역마를 타는 자가 한 필만 쓰라는 명령을 거짓으로 고쳐서 8, 9필에 이르고, 한 명의 사신을 모시는 자가 수십 명이나 되며, 게다가 순문사ㆍ안렴사의 차사(差使), 여러 원수가 파견하는 사람이 또한 모두 역마를 타고 주ㆍ군에 횡행하며, ()과 역()에 돌아다닙니다. 이런 문이 한 번 열리니, 무리를 이루고 말을 사랑하는 자들의 왕래와, 서울과 지방의 한가로운 자들의 사사로운 행차가 삼대와 좁쌀같이 많은데, 교대로 들락거리며 공공연하게 국고의 공급을 받으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니, 쇠잔한 고을과 파괴된 역()의 아전들은 풀이 죽어서 손을 맞잡고 호소할 곳이 없습니다. 한정이 있는 공급비용으로 끝도 없는 사객(使客)을 접대하니 주ㆍ군이 피폐해지고 역의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합니다. 원컨대, 이제부터는 주군의 여러 사무 일체를 순문사와 안렴사에게 맡겨 그 책임을 지우고, 번잡한 사신을 파견하지 마소서. 조정의 문자는 모두 현령(懸鈴)으로 전달하고, 군정(軍情)으로 긴급한 중대사가 아니면 역마를 주지 말 것이며, 역마를 탄 자가 아니면 여러 고을과 각 역()에 들어가서 공급을 받지 못하게 하고, 어기는 자는 주인과 손을 모두 파직하여 서용(敍用)하지 말 것이며, 각도의 순문사와 안렴사로 하여금 한결같이 조정의 이 제도를 본받아서 감히 어기지 못하게 하고, 어기는 자는 엄격하게 다스리소서." 하였다. 간관 이행(李行), 판도판서 황순상(黃順常), 전법판서 조인옥(趙仁沃)도 잇달아 글을 올려 사전(私田)을 개혁 하기를 청하였다.

○ 정당문학 설장수에게 우()가 손위(遜位)하는 표문을 가지고 남경으로 가게 했다.

○ 조민수가 이인임을 예장(禮葬)하고, 사신을 보내어 조상하며, 만장을 지어주고 치제(致祭)하며, 추증(追贈)하기를 청하니, 전의(典儀)들이 어렵게 여겨 병을 핑계대고 나오지 않았다. 부령(副令) 공부(孔俯)가 개연(慨然)히 말하기를, “내가 광평(廣平)의 시호를 의논하지 않으면 누가 감히 하겠는가." 하고, 홀로 전의(典儀)에 이르러 시호를 의논하기를, '황류(荒繆)'라 하였다. 이숭인ㆍ강회백ㆍ하륜 등이 반대하고 욕하니, 부가 농담이라고 대답하였다. 그 뒤에 대간(臺諫)에서 이인임의 죄를 의논하였는데, 그것은 공부가 발론한 것이었다.

○ 최영을 충주로 귀양보내고, 정승가를 베고, 조규(趙珪)를 각산(角山)으로, 조림(趙琳)을 풍주(?)로 귀양보내고, 또 안소ㆍ송광미ㆍ인원보를 귀양간 곳에서 베었다.

○ 조민수를 창녕현에 귀양보냈다. 민수는 임견미ㆍ염흥방이 처형을 받을 때에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백성에게서 빼앗은 밭을 모두 그 주인에게 돌려 주었었는데, 다시 득세하자 차츰차츰 도로 빼앗아 다시 탐하는 버릇을 부려 사전(私田)을 개혁하는 것을 저해하므로 대사헌 조준이 논핵하여 쫓아내었다.

8월에 이색을 문하시중으로, 우리 태조를 수시중으로 삼았다.

○ 서연(書筵)을 열고 또 사헌부ㆍ중방(重房)ㆍ사관(史官)을 시켜서 한 사람씩 교대로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 이광보를 옥에 가두었다. 광보는 본래 시정의 무뢰배인데 우()가 동강에서 유희를 즐기며 돌아갈 줄 몰랐으나, 광보는 우가 하고 싶어하는 대로 뜻을 맞추었다. 우가 크게 기뻐하여 조석으로 곁을 떠나지 않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옥에 가두고 곤장을 쳐서 죽였다.

○ 좌사의 이행 등이 상소하기를, “명기(名器)는 국가에서 어진 이를 기르고 선비를 대접하는 것으로, 벼슬을 설치하고 직책을 나누는 것에는 본래 정한 제도가 있으며, 전형하여 선출하고 가려서 쓰는 것은 이미 이루어진 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특별한 재주나 훌륭한 공적이 있고 나서야 등용하였는데, 권신이 정사를 제 마음대로 한 이래로 오로지 뇌물로만 벼슬을 얻게 되고, 비답 교지가 내리기도 전에 아무개가 아무 벼슬을 한다 하고 거리에 떠들썩하게 전해져 명분이 흐려지니, 조종이 어진 이를 높여서 녹을 중하게 주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근자에 첨설(添設)한 벼슬은 수레로도 실을 수 없을 만큼 많아서, 농사하는 늙은이와 나무하는 아이들도 그것을 진흙같이 천하게 여깁니다. 이때문에 선비는 몸을 돌보지 않고 곧은 말을 하는 절개가 없으며, 무사는 의를 따라서 죽음으로 지키려는 마음이 없게 되었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는 맑고 깨끗하게 마음을 다스려 공()으로써 사()를 없애고, 주의(注擬)하며 선택할 때를 당하면 혹시 악덕(惡德)한 인물이나 사사로이 가까운 사람에게 미침이 있을까 유념하여, 두세 명의 대신과 함께 그 공적을 상고하고 그 덕행을 살핀 연후에 벼슬을 제수하면, 아첨하는 무리가 발을 붙일 곳이 없을 것입니다. 또 첨설한 벼슬은 본래 부득이하여 한 것이니 군공(軍功)을 제외하고는 일체 금지하소서." 하였다.

○ 정지를 양광ㆍ전라ㆍ경상도 도지휘사로 삼았다. 이때에 왜적이 3도를 침범하여 가을까지 백성을 도륙하고 민가를 불사르며 죽이고 노략질하였으나, 가는 곳마다 장수와 수령 중에 막는 자가 없었는데, 정지의 위엄과 명성이 왜적이 두려워하기에 충분하므로 김백흥(金伯興)ㆍ김용균(金用均) 등과 함께 가서 치도록 명하였다. 또 자혜 윤(慈惠尹) 조언(曹彦)과 밀직부사 최칠석(崔七夕)ㆍ장사길(張思吉), 화녕 윤(和寧尹) 정요(鄭曜)를 보내어 왜적을 막았다.

○ 사헌부가 분경(奔競)의 금지를 청하였다.

○ 왜적이 거제(巨濟)를 침략하니 진무 한원철(韓元哲)이 왜선 1척을 잡아서 18명의 수급을 베었다.

○ 여러 도의 안렴사의 명칭을 고쳐서 도관찰출척사로 삼아 교서(敎書)와 부월(?)을 주어 보냈다. 모두 대간에서 천거한 사람을 썼는데, 양광도는 정당문학 성석린이요, 경상도는 전 평양 윤 장하(張夏), 전라도는 전 밀직부사 최유경이요, 교주ㆍ강릉도는 전 밀직상의 김사형(金士衡)이요, 서해도는 밀직제학 조운흘(趙云?)이었다. 각각 부사(副使)ㆍ판관을 스스로 천거하게 하여 토지를 다시 측량하게 하였다.

○ 왜적이 연산현(連山縣) 개태사(開泰寺)를 침범하였다.

○ 비로소 전선법(銓選法)을 회복하였다. 예전 제도에 문ㆍ무관의 전선을 이부(吏部)와 병부(兵部)에서 나누어 맡아 부위(府衛)는 대정(隊正) 이상, 여러 관사(官司) 9품 이상, 또는 부사(府使)ㆍ서도(胥徒)는 모두 연월을 적어 내고 공과를 기록하여 연말마다 벼슬을 올리고 내리게 하였는데, 이것을 도목정(都目政)이라 하였다. 우가 어려서 즉위한 뒤부터 권신과 간신이 정권을 차지하여 친족과 인척을 사사로이 벼슬시키고, 뇌물을 탐하여 관직이 전부 사문(私門)에서 나와 도목정이 폐지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그 공로를 추록(追錄)하니 벼슬하는 자가 크게 기뻐하였다.

○ 대사헌 조준이 시무(時務)를 진술하여 아뢰기를,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가 개국하던 처음에 벼슬을 설치하고 직책을 나누어 재상을 두어서 6()를 통솔하고, ()ㆍ시()ㆍ창()ㆍ고()를 두어서 6부를 뒷받침하게 하였으니 대단히 좋은 제도였습니다. 법이 오래되니 폐단이 생겨, 인사를 담당한 자가 인물을 선발할 줄을 몰라, 관직이 문란해졌으며, 군부(軍簿)를 맡은 자가 군대의 정원을 알지 못하여 무비(武備)가 해이해졌습니다. 호구가 늘고 주는 것과, 전곡의 많고 적은 것과, 옥사와 송사에 질서가 없는 것과, 도적이 다스려지지 않는 것에 이르러서도 판도사(版圖司)와 전법사(典法司)의 관리가 된 자가 어떻게 할지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예의사(禮儀司)는 예()에 대하여 전공사(典工司)는 주관 업무에 대하여 과연 각각 그 직책을 수행하였습니까. 대개 6부는 백관의 근본이요, 정사가 나오는 곳입니다. 근본이 어지러운데 어찌 정사가 잘 다스려지겠습니까. 이에 백료(百僚)와 여러 부서가 해체되어 흩어지고, 통솔이 없어져 여러 가지 일에 힘쓰지 않아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어졌습니다. 비록 임금과 재상이 근심하고 부지런하나 정사가 잘 거행됨은 역시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원하건대, 6()의 일을 6()에 돌리어, 각 관사(官司) 6부에 나누어 소속시키고, 재신(宰臣)은 시중(侍中) 이하가 차례로 판사사, 밀직 또는 차례로 겸판서(兼判書)가 되어 위에서 벼리를 잡게 하고, 봉익(奉翊) 6부 판서로 삼아서, 여러 낭관(郞官)과 소속된 관사(官司)를 거느려 각각 그 직책을 가지고 밑에서 명령을 듣게 하여 큰 일은 6부의 낭관이, 작은 일은 여섯 색장(色掌)이 맡아 때때로 위의 명령을 받들어 공문을 발송하여 행하게 하소서. 이렇게 하면, 간략함으로 번다함을 제어하고, 낮음으로 높은 사람을 받들며, 위와 아래가 서로 연결되고, 크고 작은 것이 서로 체계가 잡혀 벼리를 들면, 그물 눈이 벌어지고 옷깃을 추켜들면 옷이 바로 잡히는 것과 같아서, 왕과 정승은 위에서 편안하고, 모든 관리들은 아래에서 분주하여 교령이 쉽게 행하여지고, 정사가 쉽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왕의 직책은 재상과 의논하는 것뿐이요, 재상의 직책은 군자를 등용하고 소인을 물리쳐서 백관을 바르게 하는 것뿐이니, 적임자로 재상을 삼으면 천하도 다스려지거든, 하물며 한 나라의 정치이겠습니까. 본국의 제도에 중서(中書)의 영()이니, 시중이니, 평장이니, 참정이니, 정당(政堂)이니 하는 다섯 가지는 하늘의 오성(五星)을 본뜬 것이요, 추밀(樞密)의 일곱 관직은 하늘의 북두칠성을 본뜬 것입니다. 재상과 추밀이 합좌(合坐)하는 것은 원 나라를 섬기던 초기에 시작되었는데, 근대에 이르러서는 도당(都堂)에 앉아서 국정에 참여하는 자가 6070명이나 되니 이렇듯 관직이 넘침은 옛날에는 없던 일입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도()를 논하고 나라를 경륜(經綸)하여 음양(陰陽)을 섭리(燮理)하고, 몸을 바르게 하여 백관을 바르게 할 만한 사람이 아니거나, 청백하고 충성되며, 곧고 악한 것을 미워하고 어진 것을 좋아하며, 나라만 알고 자신을 잊는 사람이 아니거나, 싸우면 이기고 공격하면 취하여 용맹이 삼군(三軍)의 으뜸이 되고 위엄이 다른 나라에 가해질 만한 사람이 아니거든, 양부(兩府)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한나라의 광무제(光武帝)는 넓은 천하와 사해의 부유로도 관리의 수를 줄여 10명을 둘 곳에 1명을 두어서 중흥(中興)의 다스림을 이루었으니, 모든 급하지 않은 관원과 잡되고 쓸데없는 아전은 모두 제거하여, 조종께서 하늘을 대신하여 벼슬을 설치한 옛법을 회복하여 거룩한 조정의 유신(維新)하는 교화(敎化)를 보이소서. 6() 7()은 본래 판사(判事)가 없었습니다, 근래에는 또 통헌(通憲)ㆍ봉익(奉翊)의 품계들이 친히 일을 보지 않고, 직무를 폐하고서 녹만 허비하니, 원컨대 이제부터는 통헌ㆍ봉익의 품계에 오른 자 중에 만일 재간이 있는 자가 있거든 그 계급을 내려서 그 직책을 직접 수행하게 하고, 새로 제수하는 자에게는 봉익ㆍ통헌의 품계를 주지 마소서.

《춘추(春秋)》에, '천자가 잉숙(仍叔)의 아들을 노() 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공자께서 주 나라에서 부형의 연고로 그 어리고 약한 자제를 벼슬시켜 녹을 허비하고 관직을 헛되이 한 것을 슬퍼한 것입니다. 우리 문종(文宗) 38년의 정치가 태평성대(太平盛代)를 이룬 것은 모두 노성(老成)한 사람을 등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원컨대, 이제부터는 공경(公卿)ㆍ사대부의 어린 자제는 동반(東班) 9품 이상의 벼슬을 제수하지 말고, 혹시 속여서 받은 자가 있으면 그 부형에게 죄를 주소서. 규정(糾正)은 직책이 백관을 살펴서 왕의 귀와 눈이 되고, 모든 제사와 조회로부터 전곡과 출납에 이르기까지 모두 감찰 단속하는 것이니 품계는 낮아도 책임은 중합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대간에서 천거하게 하여 그 직책을 주되 그 품계를 정언(正言)의 다음으로 올려서 기강(紀綱)을 떨치게 하소서. 수령은 백성을 가까이하는 직책이니 임명을 신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일에 제수하는 수령은 사림(士林)이 알지 못하는 자가 간혹 있으니,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각사(各司)의 높은 품직을 역임하여 명망이 있는 자가 아니거나, 서울과 지방에서 역임하여 공적이 있는 자가 아니거든 제수하지 말며, 사냥하고 잔치하는 일은 일체 금지하소서.

감무(監務)와 현령(縣令)도 직책이 백성을 가까이 하는 것인데 근세에는 벼슬이 권문세가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으므로 사람들이 그 벼슬 하기를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부사(府史)와 서리(胥吏) 같은 불학무식(不學無識)한 무리들에게 제수하여 백성에게 해독을 끼치게 되니,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대간ㆍ6조가 천거한 재능있는 사람을 가려 보내되 품계를 참관(參官)으로 올려서 그 책임을 중하게 하소서. 안집사(安集使)는 일체 파하고, 부사ㆍ서리의 무리에게는 다만 임시대리[權務]의 직책만을 제수하소서. 공역서(供驛署)는 오직 8도의 역참을 맡은 곳인데, 근년에는 공청에 앉아 있지 않고 사가에 앉아서 공문을 보내어 권세가의 부탁과 친척과 친구의 청을 들어 주어 역마를 타고 역의 아전을 거느린 자가 그치지 않으니, 역졸이 피폐한 것은 바로 이때문입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공역서를 군부사(軍簿司)에 소속시켜, 모든 마필(馬匹)과 역졸은 도당(都堂)의 문서에 의거하여서만 징발을 허가하소서. 사복(司僕)은 승여(乘輿)를 맡아 임금 좌우에 가까이 있으므로 그 인선(人選)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근래에 따로 내승(內乘)을 설치하여 내수(? 환관)의 무리가 그 직책을 독차지하니, 근일에는 횡포가 더욱 심합니다. 그 마초(馬草)를 거두어들일 때는 온갖 방법으로 빼앗고, 성에 수송하여 들일 때는 농우(農牛)가 창()이 나서 쓰러져 경기(京畿)의 고을들이 잔파(殘破)되고, 그 해독이 여러 고을에 번져 나가, 한 고을 안의 곡초(穀草) 값이 거의 베[] 9백 필 값에 이릅니다. 주ㆍ군 모두가 이러한데 또 그 공호(貢戶)를 몰아서 구종(驅從)이라 이름하는 것이 천 명, 백 명에 이르며, 공적(公籍)에 붙이지도 않고 사사로 농장을 두어 노예같이 부려서 백성을 해치고 나라를 병들게 하니 매우 애통한 일입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상승(尙乘)을 사복시(司僕寺)에 예속시켜 내수(?)로 제수하지 말고 청렴하고 재간이 있는 자를 가려 맡겨서, 매일 교대로 마초(馬草)와 콩을 몸소 친히 헤아려 주고, 경기 안에 있는 마초와 볏짚은 말 수를 계산하여 분량을 정하고 달을 나누어 공급하되, 규정(糾正)을 시켜 감독하게 하고, 매양 당번 한 명에 수의(獸醫) 5명과 구종(驅從) 30명을 두고 나머지는 모두 파하여 부병(府兵)을 붙이게 하소서. 무릇 도감(都監)은 일이 있으면 두고, 일이 끝나면 파하는 것이 전례이며, 조성도감(造成都監)은 일찍이 궁궐을 짓기 위하여 두었는데, 뒤에 선공(繕工)의 직책을 곳으로 돌려서 일국의 목재(木材)와 철의 용도를 관리하게 하였더니, 관리를 보내어 역마를 번거롭게 하고 백성의 재물을 긁어모으기에 그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백성으로부터 취할 때에는 살을 벗기고 골수를 빼듯이 하면서 그것을 사사로이 쓸 때에는 진흙과 모래 쓰듯 하니, 원하건대 도감을 파하여 선공시(繕工寺)에 붙이고 아울러 방어화통도감(防禦火?都監)을 파하여 군기시(軍器寺)에 붙여서 청렴 공정한 사람을 가리어 관직을 맡기고, 또 규정(糾正)을 시켜 감독하게 하소서. 호곶(壺串) 궁궐의 목재ㆍ기와와, 그리고 죄를 입어 적몰된 집과 양강(兩江)의 재목 및 여러 기와굽는 가마의 기와는 영조(營造)하는 데 쓸 것이며, 모든 나무를 베고 기와를 굽는 역사를 3년 동안 정지하여 백성을 쉬게 하소서.

도성은 근본이 되는 땅이며, 풍화(風化)가 먼저 시작되는 곳으로 그 백성들은 왕실을 호위할 뿐입니다. 근래에 교화가 제대로 되지 못하여 간사하고 속이는 것이 습속이 되었으며, 부역이 번거롭고 거듭되어 날마다 피폐해가니, 신은 원하건대 도총도감(都摠都監)을 파하여 5()를 개성부에 붙이고, 한 동네마다 학식 있는 노인을 택하여 사장(社長)으로 삼아서 당서(黨序 고대의 학교)의 법에 의하여 자제를 교육하게 하소서. 천인과 공장ㆍ상인의 자제는 각각 그 업을 일삼게 하며, 거리와 골목에서 떼를 지어 장난하는 경박한 풍습이 자라나지 못하게 하고, 어기는 자는 사장과 부형을 죄주소서. 도관(都官)ㆍ궁사(宮司)ㆍ창고의 노비와, 근일에 참형을 당하고 귀양간 사람의 조상 전래의 노비 및 새로 얻은 노비는 변정도감(辨正都監)으로 하여금 모두 인구를 계산하게 하여 빠짐없이 호적을 만들어서, 매양 토목ㆍ영선(營繕)의 역사와 빈객ㆍ부처ㆍ신()의 공양(供養)이 있을 때에는 모두 사역을 시키고, 방리(坊里)의 여러 가지 역사는 모두 면제하여 그 생활을 편안히 해서 왕실을 호위하게 하소서.

이인임은 국가의 권력을 제 마음대로 한 가지가 20년이 넘어 죄악이 가득 쌓였는데 다행히 하늘이 죽였으니, 원하건대 관작을 삭탈하고 시호를 내려 주지 말아 악한 짓을 하는 자를 징계하고, 정렬공(貞烈公) 경부흥(慶復興)은 청백으로 몸을 지켰으나 인임 등에게 쫓김을 당하여 적소(謫所)에서 죽었으니, 원컨대 교서를 내려 그 무덤에 조상하고 제사하게 하며, 시중 이자송(李子松)은 청렴하고 근신하고 절조를 지켰으나 죄 없이 죽어 국인(國人)들이 애석하게 여기니, 원하건대 시호를 내려주고 그 집을 후하게 구휼하소서.

조종의 의관과 예악(禮樂)은 모두 중국의 제도를 따랐었는데 원 나라 때에 이르러 당시 황제의 제도에 눌려서 중국 제도를 변경하여 몽고를 따랐으니, 위와 아래를 분별할 수 없고 백성의 뜻이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현릉(玄陵)께서 상하의 분별이 없는 것을 통탄하여 몽고의 제도를 변경하여 중국을 따라서 조종의 거룩함을 회복하고, 호복(胡服)을 개혁하기를 청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승하하셨습니다. 상왕(上王)이 뜻을 이어 승인을 얻었는데 중간에 집정하는 신하가 고쳐버렸습니다. 전하가 즉위하여 친히 중화의 의복을 입고 온 나라 신민과 함께 다시 새롭게 하였으나 품제(品制)에 맞지 않아 유신(維新)의 정령(政令)에 장애가 되니, 원컨대 헌부를 시켜서 날을 한정하여 그 제도를 따르게 하소서.

근년에 간흉(姦兇)이 서로 잇달아 정권을 잡아 뇌물의 양에 따라 그 벼슬을 올리고 내리며, 제 뜻을 따르고 어기는 것을 보아 그 사람을 죽이고 살렸으므로 선비의 풍습이 일변하여 조석으로 권문(權門)을 따르기에만 분주하여 관직을 비우고 있으니, 유사(有司)로 하여금 각각 옥사를 결단하고 송사를 판결하는 일을 두 아전이 날마다 각 상사에게 올려 날마다 본사(本司)에 앉아서 일을 보게 하고, 혹시 권문만 드나들어 자기 직책을 수행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정직을 시키고 녹을 회수하소서.

형벌이 정해진 법이 없어서 안팎의 관사(官司)가 출()ㆍ입()을 자기 생각대로 하고 있는데, 지금 전교(典校)의 한 관사가 모두 문학을 아는 신하인데 다른 맡은 것이 없으니, 원하건대 형서(刑書)를 산정(刪定)하는 것을 위임하여 만세에 혜택을 주게 하고, 또 안팎의 관사가 서로 접대하는 예절과 문서의 격식을 또한 산정하게 하고 이를 반포하여 행하소서. 옛날에는 풍속이 순후하여 속이고 거짓된 일이 생기지 않아 백관의 사첩(謝牒)을 당후관(堂後官)이 서명하였는데, 세도가 나날이 떨어져 간사와 거짓이 날로 번성하여 근래에 상장군(上將軍) 이하는 군부사(軍簿司)로 하여금 도장을 찍게 하고, 봉익(奉翊) 이하는 전리사(典理司)에게 도장을 찍게 하니, 속이는 것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도평의사가 도성 안팎의 관사(官司)에 공문을 보내는 것은 모두 전곡을 출납하는 것, 생살상벌(生殺賞罰)에 관한 것, 호령을 발하는 것 등의 일이어서 관계되는 것이 매우 중대한데, 녹사(錄事) 한 명에게 서명(署名)하게 하니 일을 융통성 있게 하고 간사함을 막는 도리가 아닙니다. 원하건대, 조정에서 직첩에 날인하는 예에 의하여 모든 도당(都堂)의 공문에는 반드시 도장을 찍게 하소서. 예전 제도에 왕패(王牌)를 여러 창고와 궁사(宮司)에 내릴 때에는 반드시 행신보(行信寶)를 찍었는데, 지금은 내수(?)가 혼자 서명하니 역시 간사함을 막는 것이 아닙니다. 원하건대, 모든 궁내에서 쓰는 것은 도평의사로 하여금 공급하게 하고 왕패를 내리지 말아 내수의 도적질하는 근원을 막게 하소서. 모든 송사를 결단하는 관원과 전곡을 출납하는 유사와 사사로운 편지를 주고받아서, 시비를 전도시키고 관청의 물건을 훔쳐 내는 데 대해서는 그 폐단이 점점 심하니, 원하건대 일체 금지하여 만일 어기는 자가 있으면 청하는 자와 들어 주는 자를 모두 불렴죄(不廉罪)로 논하고, 각 관과 각 성중애마(成衆愛馬)가 요구하는 것과, 외방 관원의 선물을 주고받는 것 역시 불렴죄로 논하소서.

옛날에 백성이 16세가 되면 비로소 정부(丁夫)가 되어 나라 역사에 복역하고, 60세가 되면 늙은이로서 역사를 면하게 되었는데, 주ㆍ군에서 매년 인구를 계산하여 백성의 호구를 조사하고 장부를 정리하여 안렴사에게 바치고 안렴사가 호부(戶部)로 바치면, 조정에서 군사를 징집하고 역군을 조발하기가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쉬운데, 근래에 이 법이 한 번 무너지니, 수령은 그 고을의 호구를 알지 못하고 안렴사는 한 도의 호구를 알지 못하여, 군사를 징집하고 역군을 조발하는 데에 있어서, 향리(鄕吏)가 속이고 숨겨주면 뇌물을 받아들이므로 부강한 자는 면하고, 빈약한 자는 징발되어 가니, 빈약한 집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도망을 하면 부강한 집이 대신 괴로움을 당하여 그집 역시 빈약해져서 도망갑니다. 징발을 맡은 관원은 향리에게 속은 것을 분하게 여겨, 혹독한 형벌을 가하여 귀를 베고 코를 베는 등 못하는 짓이 없으니, 향리가 또한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도망갑니다. 향리와 백성이 사방으로 도망가 흩어져 고을이 비게 되는 것은 호적 문서를 만들지 않은 데서 오는 화입니다. 원하건대, 지금 토지를 조사할 때를 당하여 그 경작하는 토지를 살펴 토지의 많고 적은 것으로써 호()를 상ㆍ중ㆍ하 세 등급으로 매기고, 양민과 천인의 상황을 문서로 만들어, 수령은 안렴에게 바치고 안렴은 판도(版圖)에 바치게 하면, 조정에서 일체 징병하고 조역(調役)할 때에 근거로 삼을 것이 있어 제때에 징발하여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수령과 안렴으로 만일 어기는 자가 있으면 법으로 다스리소서.

여러 도의 어염(魚鹽)과 목축(牧畜)의 번성은 국가에 없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우리 태조께서 신라와 후백제를 평정하지 못하였을 때에 먼저 수군을 조련하여 친히 누선(樓船)을 타고 금성(錦城)을 항복받아 점령하니, 여러 섬의 수입이 모두 국가에 속하였고, 그 재력에 의하여 드디어 삼한을 통일하였습니다. 압록강 이남은 대개 모두 산이고 비옥한 토지는 바다에 인접한 곳에 있는데, 비옥한 들판에 있는 수천 리의 논밭이 왜적에게 함락되어 황폐하여 갈대 숲이 하늘에 닿았으니, 국가가 이미 어염ㆍ목축의 이익을 잃고, 또 기름진 들판에 있는 좋은 전지의 수입을 잃어버렸습니다. 원컨대, () 나라에서 백성을 모집하여 변방에 채워 흉노(匈奴)를 막은 고사(故事)를 따라서, 도망한 고을의 황무지를 개간하는 자에게는 20년을 기한하여 그 밭의 전세를 받지 말고, 그 백성을 부역시키지 말며, 수군 만호(水軍萬戶)에 전속시켜 성보(城堡)를 수축하고, 노약한 자를 불러 모으며, 먼 곳까지 척후(斥候)를 두고 봉화(烽火)를 신중히 하며, 평소에 일이 없을 때에는 농사 짓고, 고기 잡고, 소금 굽고, 철공(鐵工)질하여 먹고 살며, 때때로 배를 만들고, 적이 이르면 들을 비우고 성보(城堡) 안으로 들어가고, 수군을 시켜 치게 하소서. 합포에서 의주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렇게 하면 몇 해가 되지 않아서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던 백성들이 모두 고향 고을로 돌아올 것입니다. 변방 고을이 차게 되고, 여러 섬이 점차로 차서 전함이 많아지고 수군이 훈련되면, 해적이 도망가 변방 고을이 편안해지며, 수운이 편리해지고 창고가 채워질 것입니다. 수군 만호와 여러 도의 원수가 능히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전함을 수리하며, 인심을 결속하고 호령을 시행하여, 적을 멸하고 변방을 편안히 한 자에게 섬 안의 토지를 주어서 대대로 그 수입을 먹어 자손에게 전하게 하고, 한 성보를 잃고 한 주ㆍ군을 망친 자는 군법으로 처단하여 가볍게 용서하지 않음으로써 상벌을 보이소서.

전라ㆍ경상ㆍ양광 3도는 공부(貢賦)가 나오는 곳이며 국가의 요지인데, 지금은 왜놈들이 횡행하여 우리의 주ㆍ군을 쳐서 함락시켜 우리의 곡식을 짓밟고, 우리의 노약한 자를 살육하며 우리의 건장한 젊은이들을 노비로 삼고 있는데, 장수는 성 안에 엎드려 싸울 뜻이 없으므로 적의 형세가 날마다 성하니, 원하건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시기를 잃지 말고 소탕하게 하소서. 서북 한 방면은 국가의 울타리와 같은데, 간흉이 정권을 차지하고 주변사람을 널리 등용하여 원수와 만호가 예전의 정원보다 증가되었으므로, 주ㆍ군에서 공급하는 것이 한량이 없어 백성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모두 도망갑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문무가 겸비하여 위엄과 명망이 일찍부터 드러난 사람을 뽑아서 각 도에 원수 한 사람, 상만호와 부만호 각각 한 사람을 두고, 나머지는 모두 파하소서. 장사치들이 다투어 권문에 청탁하여 천호의 소임을 구하고서는 침탈하고 거두어들이는 데 못하는 짓이 없으니,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그 도의 원수로 하여금 위엄과 혜택이 백성의 신복을 받는 자를 가려서 제수하게 하고 자주 바꾸지 마소서.

권세 있는 집에서 다투어 외국과 무역하려고 돈피ㆍ잣ㆍ인삼ㆍ꿀ㆍ밀[]ㆍ쌀ㆍ콩의 종류를 거두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백성이 매우 괴롭게 여겨서 늙은이는 부축하고 어린이는 끌고 강을 건너 서쪽으로 도망가니, 통곡할 일입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강제로 사들이는 폐단을 일체 금지하고, 만일 어기는 자가 있으면 법으로 엄하게 다스리소서. 전일에 죄를 입은 간흉배들이 강제로 사들인 물건 중에, 아직 다 거두지 못하여 민간에 남아 있는 것은 마땅히 찾아 모아 관용에 충당하게 하고, 매와 돈피를 사사로이 바치는 것은 모두 엄하게 금지하소서.

수척(水尺)과 재인(才人)은 밭갈고 씨뿌리는 것을 일삼지 않고, 앉아서 백성의 곡식을 먹으며, 일정한 산업도 없고, 일정한 마음도 없으므로 서로 산골에 모여서 왜적이라 사칭하는데, 그 형세가 무시할 수 없으니 일찍 도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그들이 살고 있는 고을의 인구를 조사하여 호적을 만들어 이리저리 이동하지 못하게 하고, 빈 땅을 주어 부지런히 경작하여 평민과 같이 살게 하며, 어기는 자가 있으면 그 지방의 관사(官司)가 법으로 다스리게 하소서." 하였다. ()이 그 글을 도당에 내렸다.

○ 왜적이 청주(淸州)ㆍ유성(儒城)을 침범하고, 또 낙안군(樂安郡)ㆍ고흥(高興)ㆍ풍안(?) 등의 고을을 침범하여 민가를 공격하고 불태웠다.

○ 홍영통(洪永通)을 영문하부사로 삼았다. 국인(國人)이 모두 말하기를, “저렇게 탐하는 사람으로서 정월의 사변(事變)에 처형을 면하고, 이제 경화(更化 정치를 개혁하여 교화를 다시 한다는 뜻)를 시작하는 때를 만나서도 오히려 배척을 당하지 않고 또 상상(上相)의 자리에 오르니, 참 복있는 사람이다." 하였다.

○ 대간과 6조로 하여금 수령이 될 만한 사람을 천거하게 하였다.

○ 왜적이 진주(晉州)를 침범하여, 목사 이빈(李賓)이 전사하였다.

○ 경상도 도순문사 박위(?)와 안동(安東) 원수 최단(崔鄲)이 왜적을 상주(尙州) 중모현(中牟縣)에서 쳐서 물리쳤으므로, 각각 활과 말을 주었다. 우리 태조를 도총중외제군사(都摠中外諸軍事)로 삼았다.

○ 왜적이 함양(咸陽)에서 운봉(雲峯)ㆍ팔라현(八羅峴)을 넘어 남원에 이르니, 도지휘사 정지가 도순문사 최운해(崔雲海), 부원수 김종연(金宗衍), 조전원수 김백흥(金伯興)ㆍ진원서(陳元瑞), 전주 목사 김용균(金用鈞), 양광도 상원수 도흥(都興), 부원수 이승원(李承源) 등을 독려하여 쳐서 크게 물리쳐 왜적 58급을 베고, 66여 필을 노획하였다. 적이 밤에 도망갔는데, 정지가 여러 군사의 양식이 없어 추격하지 못하니, 적이 배에 올랐다. ()이 정지 등에게 궁중의 술과 비단을 내려 주었다.

○ 찬성사 왕안덕을 6도 도통찰사로 삼았다.

○ 다시 사인(士人)을 현령과 감무에 임명하도록 하였다. 예전 제도에는 현령ㆍ감무를 모두 과거에 오른 사인들로 썼었는데, 근세에는 오로지 여러 관사의 서리(胥吏)에게 시켰으므로, 탐하고 더러워서 백성에게 포학하게 하였으며, 자급이 모두 78품이어서 질()이 낮고 사람이 미천하므로, 호강(豪强)한 자들이 가볍게 여겨 불법을 자행하여 시골 고을이 쇠잔하고 망하였다. 공민왕이 전이도(全以道)의 말을 따라서 56품을 안집사(安集使)로 삼아 묵은 폐단을 고치려 했으나, 안집사는 왕의 임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모두 당시 재상이 천거한 자를 써서 백첩(白牒)으로 임소(任所)에 갔었다. ()의 때에 이르러 권간이 정치를 잡자, 오로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을 써서 저희들의 좋아하고 싫어함에 따라 출척하였다. 여러 현의 안집사 중에 글자도 모르는 자가 많아서, 남의 토지와 백성의 재물을 빼앗아 권문에 바쳐 아첨하여 승진하는 매개로 삼으니, 탐하고 잔악한 화가 서리보다 심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사류(士流)를 쓰고 질() 56품으로 하였다.

○ 경상도 부원수 구성로(具成老)가 왜적 5급을 베어 바쳤다.

○ 왜적이 옥주(沃州)ㆍ황간(黃澗)ㆍ영동(永同) 등의 고을을 침범하였다.

○ 창()이 전교하기를, “사전(私田)의 조세를 모두 나라에서 거둔다면 조신들이 반드시 먹기에 곤란할 것이니, 그 조세를 반만 거두어 나라의 용도에 충당하라." 하였다.

9월에 박위가 고령현(高靈縣)에서 왜적을 쳐서 35급을 베었다.

○ 지문하부사 유만수(柳曼殊)가 파면되었다. 간관이 이뢰기를, “만수는 문음(門蔭)으로 벼슬을 얻어 재상의 자리에 올랐는데, 그 어머니에게 불효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천시합니다. 또 죽은 소윤 최수첨(崔秀瞻)의 딸을 강간하였고, 또 남이 경작하는 토지를 빼앗아 점령하여 그 주인이 원한을 품게 하였으니, 국문하여 풍속을 바로잡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헌부가 또 탄핵하여 파면시켰다.

○ 우상시 허응(許應)이 상소하기를, “근자에 사헌부에서 판도사, 전법사와 함께 글을 번갈아 아뢰어 선왕의 균전(均田) 제도를 회복하기를 청하였는데, 전하께서 윤허하시니 듣는 자로서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대가세족으로 겸병하는 자만이 홀로 불편하게 여겨 여러 말을 시끄럽게 하여 여러 듣는 사람을 현란시키니, 토지를 가진 사대부들이 일시에 같은 목소리로 호응하였습니다. 조금 뒤에 종묘ㆍ사직ㆍ도전(道殿)ㆍ신사(神祠)ㆍ공신ㆍ등과자(登科者)의 토지는 회수하지 않는다는 의논이 있었습니다. 신등이 생각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먼저 주장하여 법을 폐지하려는 실마리를 일으킨 자가 있을 것이라 여겼는데, 하루도 못 되어 과연 반만 거두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대개 법을 만드는 것은 폐단을 고치자는 것인데, 법을 만들고 폐단이 생기기도 전에 갑자기 중지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 아닙니까. 근래에는 나라의 재용과 군수(軍需)가 모두 부족하므로 일찍이 균전의 의논이 있었는데, 지금 만일 헛된 말을 믿고 끝까지 실행하지 못한다면, 녹봉과 군량은 어떻게 충족시키며, 비상하고 급한 일이 있으면 어떻게 감당하시렵니까. 중국이 요동에 위를 세워 우리 강토를 엿본 지 해가 넘었고, 왜적이 깊이 들어와 난을 일으키면서 못하는 짓이 없으니,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두가 두려운 때인데, 이런 것을 생각지 않고 국가의 공전(公田)을 공이 없이 하는 일 없이 먹기만 하는 사람에게 주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여러 사람이 떠드는 것을 내버려 두고, 균전의 예전 제도를 회복하여 군국의 수요를 모두 여유있게 하면, 국가에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하니, 그 말대로 따랐다.

○ 서해도 관찰사 조운흘이 떠나려 할 때에 글을 올려 아뢰기를,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여 안팎에 일이 없을 때에도 오히려 위태한 것을 생각하는데, 하물며 우리나라는 바다로는 왜인의 섬에 가깝고, 육지로는 오랑캐의 땅에 연하였으니, 참으로 근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라 경계가 서해에서 양광ㆍ전라도를 거쳐 경상도에 이르기까지 바닷길이 거의 2천여 리나 되는데, 바다 가운데 살 만한 섬은 대청(大靑)ㆍ소청(小靑)ㆍ교동(喬桐)ㆍ강화(江華)ㆍ진도(珍島)ㆍ절영(絶影)ㆍ남해(南海)ㆍ거제(巨濟) 등 큰 섬 20개가 있고, 작은 섬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모두 비옥한 땅과 어염(魚鹽)의 이익이 있었으나, 이제 황폐하여 쓰지 못하니 탄식할 일입니다.

바라건대, 5군의 장수와 8도의 군관에게 각각 호부(虎符)와 금패(金牌)를 주고, 천호ㆍ백호에게까지도 패면(牌面)을 주어 크고 작은 해도를 그들의 식읍(食邑)으로 만들어 자손에게 전하게 하면, 오직 장수 자신의 부귀뿐만 아니라, 또한 자손 만대로 의식이 넉넉할 것이오니, 어찌 사람마다 스스로 힘껏 싸움을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마다 자발적으로 싸움을 하면 전함이 저절로 갖추어지고, 군량을 몸소 준비하여 유격병이 되어 적을 무시로 공격하면, 적이 감히 엿보지 못하여 백성이 부유하고 번성해져서, 인가가 서로 이어지고 닭소리, 개소리가 서로 들려서, 백성은 어염의 이익을 얻고 나라는 조운(漕運)의 걱정이 없어져, 조종의 토지가 다시 온전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창이 그 글을 도당에 내렸다.

○ 우()를 여흥으로 옮겨 그 고을 군사에게 숙직 호위하게 하고, 조세(租稅)로 공양하여 받들게 하였다.

○ 군기소윤(軍器少尹) 고봉례(高鳳禮)를 제주 축마 겸 안무별감(濟州畜馬兼安撫別監)으로 삼아서 보냈다.

○ 정방(政房)을 고쳐 상서사(尙瑞司)라 하였다.

○ 침원서(寢園署)에서 아뢰기를, “종묘의 제사는 나라의 큰 일입니다. 보궤(?? 종묘에서 쓰는 제기)ㆍ변두(?豆 제기(祭器))를 채우는 것과 희생(犧牲 고기로 만든 제물)ㆍ자성(?盛 곡식으로 만든 제물)을 갖추는 것은 각각 맡은 관원이 있는데, 근래에 기강이 무너져 상고하고 검사하는 일이 없어서 희생과 전물(奠物)이 풍성하고 정결하지 못하니, 보본추원(報本追遠)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바라건대, 맡은 관원으로 하여금 풍성하고 정결하게 하도록 힘써서 정성과 공경을 극진히 하고, 전교(典校)의 축판(祝版)도 장관(長官)으로 하여금 목욕 재계하고 싸서 나오게 하고, 혹시 정성스럽지 못하면 대성(臺省)으로 하여금 규탄하여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그 말대로 좇았다.

○ 문하평리 균형(鈞衡)과 밀직부사 유광우(兪光祐)를 남경에 보내어 호인(胡人) 평정한 것을 하례하였다.

○ 겨울 10월에 대사헌 조준의 무리가 글을 올려 시무(時務)를 아뢰기를, “옛날에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기강을 세웠으니, 한 나라의 기강은 인체의 혈맥과 같은 것입니다. 몸에 혈맥이 없으면 기운이 통하지 않고, 나라에 기강이 없으면 명령이 행해지지 않으니, 법령이 행해지지 않으면 나라가 나라의 구실을 하지 못합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후로 크게 언로(言路)를 열어 상신(相臣)과 헌신(憲臣)이 각각 시무를 진달하였습니다. 그러나 묵은 폐단이 겨우 고쳐지고 새 법이 아직 행해지지 않아서, 원망이 일어나고 기강이 문란해져 병이 혈맥(血脈)에서 고황(?)에 미쳤으니, 비록 편작(扁鵲 중국 전국 시대의 명의(名醫))이 있더라도 빨리 다스리기는 어렵습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판정(判定)해서 분부하는 법제를 판()에 새겨 시행하여 금석같이 굳게 해서, 백성으로 하여금 사시(四時)같이 믿게 하고, 감히 법을 범하거나 금령에 저촉되는 자가 있으면 일체 헌사에 맡겨서 다스리게 하소서.

침원서(寢園署)의 예문을 삼가 상고하건대, 모든 제사에 참여하는 자는 4일 동안 술을 마시지 않고 훈채(?)를 먹지 아니하는데, 이것을 산재(散齋)라 하고, 혹은 본사(本司)에 거처하고 혹은 상서성(尙書省)에 있으면서 옷을 깨끗이 하고 단정히 앉아 4일 동안 정성과 공경을 지극히 하였는데, 이것을 치재(致齋)라 합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여러 집사자(執事者)가 산재로부터 치재하는 날에 이르기까지 각각 자기 집에서 혹 부녀자와 함께 가까이 있고, 또 예문을 익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강신(降神)하는 것, 헌작(獻爵)하는 것, 오르는 것, 내리는 것, ()하는 것, ()하는 것, 진설하는 것, 철찬(撤饌)하는 것이 모두 법도에 부합하지 않으니, 매우 불경한 일입니다. 전하의 보본추원(報本追遠)하는 뜻에 어떻다 하겠습니까.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모든 제사에 참여하는 자는 산재하는 4일 동안은 그 집에 있으면 규정(糾正)에서 감찰하게 하고, 정순(正順 정3품의 상()) 이하는 녹사(錄事)를 시켜 살피게 하며, 치재하는 3일 동안은 공청에 모여서 예문을 익히고 정성과 공경을 지극히 하되, 어기는 자는 불경죄로 논하소서.

본조(本朝)의 음악 절차가, 빈객을 위하여 잔치를 할 때에는 반드시 당악(唐樂)을 연주하고 난 다음에 우리 향악(鄕樂)을 연주하였는데, 지금 창기들의 가무와 성음(聲音)의 절조(節調)가 중()ㆍ화()에 부합되지 않아 예악의 근본을 잃었습니다. 조정의(朝廷儀)를 삼가 상고하건대, 조회를 하고 잔치를 하는 데 있어서는 다만 악공(樂工)을 시켜 음악을 연주하고 창기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원하건대, 이 법을 준수하시어 궁중의 향연(饗宴)에 당악(唐樂)만 연주하고, 창기는 앞에 가까이하게 하지 마소서.

남쪽 고을 백성들이 근래에 병란으로 인하여 혼란하고 생업을 잃었으며, 또 수재로 인하여 화곡(禾穀)이 손실되어 모두 생업을 유지할 수 없으니, 실로 마땅히 나라 근본을 배양하여 동요하지 않게 해야할 것이며, 각 도에 이미 절제사가 있고 또 관찰사가 있는데 군사를 징집하고 역군을 조발하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부산스러워서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니, 절제사와 관찰사 이외의 여러 사명을 받든 자들을 모두 소환하소서. 사대부로서 조정에 벼슬하는 자는, 이미 몸을 바쳐 벼슬에 종사한 바에야 제 직책을 부지런히 하는 것이 원래 그 본분인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현관(顯官)의 직책을 맡고 있는 자가 근친(覲親)과 성묘(省墓)를 칭탁하여 왕의 구전(口傳) 허락을 받고서는 시골로 돌아가서 오래도록 머무르며 관직(官職)을 비우고 직무를 폐하니, 몸을 바쳐 왕을 섬기는 도리가 아닙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부모 상사에 분상(奔喪)하는 일 이외에는 관문 밖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부득이한 일이 있는 자는 반드시 사직한 뒤에 가게 하며, 어기는 자는 엄하게 다스리소서.

서울에 있으면서 그 고을의 일을 맡아 보는 주와 현의 아전을 기인(其人)이라 하는데, 법이 오래되어 폐단이 생기므로 각 곳에 나누어 예속시켰더니, 노예같이 부리므로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서 도망가는 자가 있습니다. 해당 관청에서 경주인(京主人)에게 독촉하여 날마다 궐포(闕布) 한 필씩을 받는데, 경주인이 다른 사람에게서 빌려 내고 갚지 못하여, 곧 고을로 내려가서 서울에서 빈 수량의 곱절이나 독촉하여 징수하고 횡포를 부려 빼앗으니, 주ㆍ군이 피폐해지는 것이 또한 이 때문일 것입니다. 지난번 선공시(繕工寺)에서 날마다 기인의 궐포를 받아서 명분 없는 비용에 공급하니, 지극히 어질지 못한 일입니다. 이미 그 임무에 당하여 그 고을의 일에 이바지하지 못하고, 또 기인의 힘을 이용하여 나라의 역사에 이바지하지도 못하고, 한갓 백성의 고혈을 긁어서는 진흙과 모래같이 사용하여 나라의 근본을 깎으니, 전하께서 백성을 근심하는 뜻과 대단히 어긋난 것입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기인을 파하여 향리로 돌아가게 하고, 각 대궐의 역사는 근일에 혁파한 창고의 노비로 대신하고, 사설(司設)ㆍ막사(幕士)ㆍ주선(注選) 등속을 또한 모두 혁파하여 민생을 편안하게 하소서." 하였다.

○ 우리 태조와 이색ㆍ문달한ㆍ안종원에게 판상서시사(判尙瑞寺事)를 겸하게 하고, 조준을 지문하부사로 삼아 대사헌을 겸하게 했다.

○ 이치(李致)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시중 이색과 첨서밀직사사 이숭인을 남경에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고, 명 나라 관원이 와서 우리나라를 감시하여 줄 것과, 또 자제를 입학하게 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현릉이 승하한 뒤로부터 천자가 매양 집정 대신을 불러 입조(入朝)하라 하였으나, 모두 두려워하여 가지 못하였다. 이색이 정승이 되자, 들어가 조회하기를 자청하였다. 우리 태조의 위엄과 덕이 날마다 성하여 안팎이 마음으로 복종하므로, 이색 자신이 돌아오기 전에 변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태조의 아들을 한 명 딸려 보내기를 청하니, 태조가 우리 태종(太宗 이방원)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명 나라로 들어가는데, 길에서 한 관인(官人)이 색에게 말하기를, “귀국의 최영이 정예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있는데도 이(李 이태조의 옛 휘())가 파리 잡듯 쉽게 잡았으니 백성이 이()의 망극한 덕에 대하여 어떻게 갚으려 하는가." 하였다.

○ 급전도감(給田都監)을 두었다.

11월에 조영길(趙英吉)이 몰래 서울에 들어왔는데, 잡아서 곤장을 때려 다시 순천(順天)에 귀양보냈다.

○ 사헌부에서, 판개성부사 문달한이 외척의 세력을 빙자하여 함부로 탐욕을 부린다고 탄핵하여 합포(合浦)에 귀양보냈더니, 도당(都堂)이 가까운 땅에 두기를 청하므로 철원(鐵原)에 옮기게 하였다. 달한은 이림(李琳)의 매부이다.

○ 왜적이 구례(求禮) 등지를 침범하니, 김종연을 원수로 삼았다.

○ 밀직사 강회백(姜淮伯), 부사 이방우(李芳雨)가 남경으로 가서 조회를 청하였다.

○ 간관이 상소하여 지밀직 이무(李茂)ㆍ이빈(李彬)을 탄핵하기를, “지난번에 조영길이 제 마음대로 적소(謫所)를 떠나 몰래 경성에 들어왔으니, 그 형적이 괴이하고 비밀스러워 일이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영길이 왔을 때 무와 빈의 무리는 그 정상을 자세히 알고도 곧바로 위에 아뢰지 않았으므로, 죄가 진실로 작지 않은데 오히려 중직(重職)을 맡아 좌우에 있으니, 마땅히 헌부에 명해서 엄하게 국문하여 반측(反側 두 마음으로 이리 붙고 저리 붙는 것)하는 자들을 진정시키소서." 하였다. 소가 올라가자 그 직책만을 파하였다. 또 상소하기를, “무와 빈은 이인임의 무리가 되어 위세를 부렸으나, 다행히 전하의 자애를 입어서 그 지위를 보전하였으니, 참으로 마땅히 조심하고 공경하여 유신(維新)의 정사를 도와야 할 것인데, 영길의 반측하는 모의에 참여하려고 이무는 말을 빌려 타고 와서 집에 있고, 이빈은 가까운 이웃에서 상종하여 간사한 모의를 성사시키려 하였으니 죄가 이보다 더 클 수 없는데, 파직만 시키니 징계하여 다스리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무는 곡주(谷州), 빈은 안변(安邊)으로 귀양보냈다.

○ 다시 최영을 순군옥에 가두었다. 전법과 대간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영이 비록 공이 있으나 요동을 치기를 주장하여 중국에 죄를 지었으니, 공이 죄를 가릴 수 없습니다. 베어서 중국의 노여움을 풀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12월에 황제가 전원(前元)의 원사(院使) 희산(喜山)과 대경(大卿) 김려보화(金麗普化) 등을 보내어 말과 환자(宦者)를 구하였다.

○ 전법판서 조인옥(趙仁沃) 등이 상소하기를, “불교는 맑고 깨끗하여 욕심이 적고 세상을 떠나서 속세와 인연을 끊는 것을 종지로 삼으니, 본래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도가 아닙니다. 근세 이래로 여러 절의 중들이, 욕심을 적게 하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돌아보지 아니하여, 토지의 조세와 노비의 노역(勞役)을 부처 공양에는 쓰지 않고 자신을 부유하게 하며, 과부의 집에 출입하여 풍속을 더럽히고, 권문세가에 뇌물을 바쳐서 큰 절을 차지하기를 구하니, 맑고 깨끗하고 속세를 끊는 교리에 있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도행(道行)이 있고 이욕(利慾)이 없는 자를 가려서 여러 사원에 머물게 하고, 토지의 조세와 고용된 노비는 그 지방의 관원으로 하여금 거두어 공문서에 써서 중의 수를 계산하여 공급해서 주지(住持)가 훔쳐 쓰는 것을 금하며, 모든 남의 집에 유숙하는 중들은 간음을 범한 것으로 논죄하고, 귀천을 따질 것 없이 부녀자는 비록 부모상이라 하더라도 절에 가지 못하게 하여, 어기는 자는 실절(失節)한 것으로 논하며, 여승이 된 자는 실행(失行)한 것으로 논하고, 감히 부인(婦人)의 머리를 깎는 자는 중한 죄를 가하며, 향리(鄕吏)와 역리(驛吏)와 공노비, 사노비는 중이나 비구니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중으로서 항상 남의 집에 유숙하는 자는 군적에 채우게 하며, 그 주인 집도 죄를 주소서." 하였다.

○ 우사의(右司議) 윤소종(尹紹宗)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살피건대, 이인임은 유순하게 아첨하는 자질을 바탕으로 거짓과 간특한 마음을 품고 우리 현릉을 섬기어 외람되이 재상의 지위를 얻었습니다. 영전(影殿)의 역사에 안팎이 괴롭게 여기므로, 시중 유탁(柳濯)이 농한기를 기다리기를 청하다가 왕의 비위에 거슬려 파면되니, 인임이 드디어 그 자리를 대신하여 국정을 맡아, 정권을 잡고 뜻을 맞추어 영전의 역사를 계속해서 백성의 재력을 탕진하고 삼한을 병들게 하여, 마침내는 갑인년의 화를 초래하였습니다. 상왕이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으니, 인임이 나라의 권세를 제 마음대로 하여 일신의 백 년 부귀를 도모하고 삼한 만세의 사직을 돌보지 아니하며, 충성하는 어진이를 죽이고 대신을 귀양보내며, 서연(書筵)을 파하고 못된 아이들을 끌어들여 왕을 음악과 여색으로 인도하고, 왕을 놀고 사냥하는 데 빠지게 하여 상왕으로 하여금 친히 정사를 할 겨를이 없게 하였습니다. 환관ㆍ궁첩(宮妾)ㆍ옹부(饔夫)ㆍ내수(?)에게는 벼슬과 녹으로써 환심을 사고 뇌물로써 결탁하여 자신의 귀와 눈을 만들어 밤낮으로 왕께 자신의 칭찬하게 하였습니다. 달콤한 말과 작은 은혜로 국인(國人)을 우롱하여 환심을 사고, 임견미ㆍ염흥방을 심복으로 삼아 벼슬을 팔고 옥사를 돈으로 처리하여 문 앞이 물끓듯 하였습니다. 뇌물로써 부탁하는 자는 어진 인재가 되고, 행실과 염치가 있는 자는 불초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양부(兩府)ㆍ백사(百司)와 번진(藩鎭) 수령이 모두 그 문에서 나오고, 언관(言官)과 요직에 그와 사사로이 친한 사람을 배치하였습니다. 무한한 욕심이 끝이 없어서 남의 전토를 빼앗고 남의 노비를 빼앗으며, 부잣집 늙은이를 봉군(封君)해 준다고 꾀었으며, 인척의 젖내나는 아이들과 공인(工人)ㆍ장사치ㆍ천인ㆍ노예가 앉아서 국록을 소모하여, 숙위(宿衛)하는 신하와 백전(百戰)의 용사는 한 말의 곡식도 얻어먹지 못하였습니다.

사방에 근심이 많아서 전쟁이 한창인데 인임은 관심도 없이 패전한 장수라도 뇌물을 바치면 묻지 않으며, 적을 깨뜨린 장수라도 뇌물을 주지 않으면 상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온 나라 사람들이 명리를 다투는 것을 급무로 삼고 뇌물을 공()으로 삼아, 인임의 사문(私門)이 있는 것만 알고 왕실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임견미ㆍ염흥방의 죄악은 모두 인임이 빚어 낸 것입니다. 노씨(盧氏)는 궁첩(宮妾)이요, 최씨는 원비(院婢)인데, 왕의 뜻을 탐지하여 그들을 비()로 봉해서 정궁(正宮)에 짝하게 하고, 그 내조에 의지하여 권세를 굳혔습니다. 그러고서도 오히려 그 계교가 주밀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제 집의 여종을 바쳐 소군(小君)으로 떠받들어 꿇어 엎드려 신이라 자칭했으니 왕실을 더럽히고, 조종께 치욕을 끼쳤습니다. 추한 소문이 중국에까지 전파되어, 천자께서, '삼한에 사람이 없다.' 하였으니, 그 죄악을 논하면 개국한 이래로 인임같이 심한 자가 없습니다.

여러 간흉들은 이미 멸족을 당하였는데, 인임은 머리를 보전하여 병으로 죽었고, 그 벼슬만 삭탈하여 그 집은 온전하니, 이것은 후세에 간적(姦賊)을 장려하는 셈이 됩니다. 원하건대, 전하는 굳건한 결단을 내리어서 인임의 죄를 따져서 관()을 쪼개고, 집에 못을 파서 조종의 노여움을 풀게 할 것이며, 신민의 분통을 통쾌하게 풀어 주소서. 그 집과 노비와 재물은 일체 적몰하고, 그 자손은 멀리 귀양보내고 금고(禁錮)하여, 국인으로 하여금, 간적으로 나라를 그르친 죄에는 그 몸이 비록 죽었더라도 하늘에서 내리는 형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하면, 악한 일을 하는 자는 두려워하고 착한 일을 하는 자에게는 권하여져서, 인심이 바로잡히고 나라의 운수가 길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소가 올라가니, 자손을 금고하라고 명하였다.

○ 최영을 베었다. 영은 본관이 철원인데, 유청(惟淸) 5세손(五世孫)이다. 풍신과 용모가 괴걸ㆍ위대하고, 힘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강직하고 충성하고 청백하였다. 매양 군진에 나아가 적을 상대할 때면 신기(神氣)가 안정되고 차분하여 화살과 돌이 좌우에 날아와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고, 한걸음이라도 퇴각하는 전사는 모두 베어서 반드시 이기도록 하였다. 그 때문에 크고 작은 여러 싸움에 향하는 곳마다 공을 세워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어서, 나라가 힘입어 편안하고, 사람들이 그 혜택을 받았다. 일찍이 영의 나이 16세 때에 아버지 원직(元直)이 죽으면서 훈계하기를, “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하였다. 영이 유훈(遺訓)을 마음속에 간직하여 생업을 일삼지 않으니, 사는 집은 비습하고 좁으며 의복과 음식이 검소하여,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옷차림한 자를 보면 개돼지같이 여겼다. 비록 오랫동안 장수와 정승으로 중한 병권을 맡고 있었으나 청탁이 그에게 이르지 못하였으니, 세상에서 그 청렴한 것을 탄복하였다.

대체(大體)를 지키기를 일삼고 세세한 사리를 따지지 않아서, 평생토록 병권을 맡았으나 휘하 군사 중에 얼굴을 알아보는 자가 수십 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좀 우직하고 학술이 없어서, 모든 일을 자기 뜻대로 결단하고, 죽이기를 좋아하여 위엄을 세웠으며, 늙어서는 지식과 사려가 전도(顚倒)하고 착란(錯亂)되어, 공연히 요동을 치는 군사를 일으켰다. 간대부(諫大夫) 윤소종이 논하기를, “공은 한 나라를 덮었고, 죄는 천하에 가득하다." 하였으니, 세간에서 명언이라 하였다. ()에 임하여 말과 얼굴빛이 태연자약하였다. 죽던 날에 도성 사람들이 저자를 파하고, 원근(遠近)에서 말을 전해들은 자와 거리의 아이와 골목의 부녀에 이르기까지 모두 눈물을 흘렸으며, 시신이 길 옆에 있으니 길가는 자가 말에서 내렸다. 도당에서 쌀ㆍ콩 1 50석과 베 2 50필을 부의하였다.

 

 

[D-001]이고양이[李猫] : 당 나라 이의부(李義府)가 겉으로는 부드럽고 속으로는 남을 해칠 마음을 가졌으므로, 당시에 그를 '이고양이'라 하였다.

[D-002]군호(軍號) : 대개 출병할 때에 적에게 시위하기 위하여 군사의 실수(實數) 이외에 몇만 혹은 몇십만이라고 칭하는 것을 군호(軍號)라 한다.

[D-003]곽광전(?光傳) : 한 나라 곽광(?)이 대신으로서 무도한 창읍왕(昌邑王)을 폐하고 선제(宣帝)를 세운 사실을 기록한 책이다.

[D-004]() : 진 시황(秦始皇)의 이름이 정()인데, 실상은 진왕의 아들이 아니고, 여불위(呂不韋)의 아들이라 한다.

[D-005]() : () 나라 원제(元帝)의 이름이 예()인데, 실상은 낭야왕(?)의 아들이 아니고 우씨(牛氏)의 아들이라 한다.

[D-006]혜제(惠帝)의 후사(後嗣) : 혜제(惠帝)가 일찍 죽고 아들이 없는데, 그의 어머니 여태후(呂太后)가 다른 사람의 아들을 몰래 데려다가 혜제의 아들이라 거짓 칭하고 황제를 삼았다.

[D-007]주문공(朱文公)이……써서 : 주자(朱子)가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저술하여 춘추(春秋)의 필법(筆法)을 썼는데, 위에 인용한 세 가지 사실을 곧은 붓으로 썼다는 것이다.

[D-008]분경(奔競) : 벼슬을 청탁하기 위하여 세력 있는 집에 분주히 왕래하는 것이다.

[D-009]몸을……할 만한 : 한 나라 동중서(董仲舒)의 상소에, “임금은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하여 백관을 바르게 하고, 백관을 바르게 하여 만민(萬民)을 바르게 하여야 한다." 하였는데, 여기서는 정승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D-010]조종께서……대신하여 : 《서경》에, “정치와 관직은 하늘의 일을 사람이 대신하는 것이다." 하였다.

[D-011]()·입() : 법관이 죄인을 판결할 때에 중죄(重罪)를 가볍게 다스리는 것을 출()이라 하고, 경죄(輕罪)를 중죄로 다스리는 것을 입()이라 한다.

[D-012]()·화() : 음악은 중정(中正)과 화평(和平)을 위주로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출처 : ▒ 한 산 草 堂 ▒
글쓴이 : 천하한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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