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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려사절요 제35권 공양왕2

장안봉(微山) 2013. 5. 28. 22:59

고려사절요 제35   

 

 

 공양왕 2(恭讓王二)

 

 

신미 3(1391), 대명 홍무 24 

 

 

○ 봄 정월에 5군을 줄여 3군으로 하고, 도총제부(都總制府)에서 서울과 지방의 군무를 통솔하게 하였다. 우리 태조를 도총제사로, 배극렴(裵克廉)을 중군총제사로, 조준(趙浚)을 좌군총제사로, 정도전(鄭道傳)을 우군총제사로 삼았다.

○ 도평의사사에서 평양부의 토관(土官 토착민으로서 그 지방의 소임을 맡은 사람)을 감하고, 간전(墾田)을 측량하여 일경(日耕)을 개혁하고, 지록(地祿)을 주며, 관복 제정하기를 청하니, 그 말을 따랐다.

○ 안주(安州)ㆍ압록강ㆍ용천(龍泉)ㆍ대동강의 여러 요해처에 파절관(把截官)과 참부(站夫)를 두었다.

○ 각 도의 목과 부에 유학교수관을 두었다.

○ 예조에서 아뢰기를, “안경공(安慶公) (?)은 원종의 동모제로서 제멋대로 찬탈하였으니, 영종(英宗)이라고 일컫는 것은 부당합니다. 지금 그 기일을 당하여 치제(致祭)하는 것은 대의에 어긋나는 것이니, 이를 그만두시기를 바랍니다. 또 충숙왕의 비 홍씨(洪氏)는 곧 충혜왕ㆍ공민왕의 모후(母后)이며, 충혜왕의 비 윤씨(尹氏)는 곧 충정왕의 모후인데, 정통 군왕의 후사가 있는 비를 지금까지 제사지내지 않았으니, 실로 결여된 의식입니다. 두 비의 기일과 진전(眞殿)의 제향을 모두 근대 선후(先后)의 예에 따르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우인렬(禹仁烈)ㆍ장하(張夏)ㆍ이인민(李仁敏)ㆍ정희계(鄭熙啓)ㆍ이숭인(李崇仁)ㆍ하륜(河崙)ㆍ권근(權近)ㆍ윤사덕(尹師德)ㆍ유염(柳琰)ㆍ이빈(李彬)ㆍ노빈(盧贇)ㆍ이행(李行)ㆍ원상(元庠) 등의 죄를 사면하고, 모두 서울 밖에서 편리한 대로 거주하게 하였다.

○ 삼사 좌사(三司左使) 성석린(成石璘)이 환관의 녹을 각 품()마다 한 등급을 감하기를 청하니, 왕이 월급만 폐지하였다.

○ 왕이 경연관에게 이르기를, “지금 사람이 중국의 고사만 알고 본조의 일을 몰라서야 되겠는가." 하니 시중 정몽주가 대답하기를, “근대의 역사도 모두 편수하지 못하였고, 선대의 실록 또한 자세히 알지 못하니, 편수관을 두어 《통감강목》을 모방해서 역사를 편찬하여 전하의 살펴보심에 대비하소서" 하니, 왕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이색(李穡)과 이숭인의 직첩을 돌려주도록 명하여 실록을 편수하고자 하였으나, 시행되지 못하였다.

○ 왕이 경연에 나가고자 하니, 환자 김사행이 이를 만류하면서 아뢰기를, “세월이 많이 있사오니, 한 달쯤 강하지 않더라도 정사에 무방할 것입니다."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전지를 받은 품계가 있는 관리를 모두 3군에 소속시켰다.

2월 기미일에 왕이 남경으로 떠났다. 임술일은 왕의 탄신일이므로 회암사(檜巖寺 경기 양주)에서 중에게 밥을 먹이고, 1 2백 필을 주니, 정당문학 정도전이 간하기를, “탄일에 중에게 밥을 먹이는 일은 선왕의 전례(典禮)가 아니라 신자(臣子)의 정에서 나온 것일 뿐이며, 임금이 스스로 복을 빌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 정읍(井邑)의 백성 왕익부(王益富)는 지용기(池湧奇)의 아내와 재종 형제가 되는데, 용기의 집에 드나들면서 스스로, “충선왕의 서증손이다." 하였다. 정양군(定陽君) ()가 이를 알고 고발하여 마침내 체포하여 국문한 다음 익부와 그 자손 13명을 교살하였다. 사헌부에서 소를 올려, 용기가 익부를 몰래 비호하여 반역을 도모했다고 논핵하고, 낭사에서도 극형에 처하기를 청하였다. 왕에게 총애 받는 중 신조(神照)는 평소부터 용기와 잘 지냈으므로, 왕에게 은밀히 아뢰기를, “전하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한 공은 오로지 용기에게 있습니다." 하니, 왕이 특별히 죄를 사면하였다. 사헌부에서 다시 용기를 목 베기를 청하니, 이에 곤장을 쳐서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내었다.

○ 정묘일에 왕이 서울로 돌아왔다.

○ 삼군총제부에서 통속된 병졸을 사열하고, 번을 나누어 숙위하였다.

○ 다시 심덕부(沈德符)를 청성군 충의백(靑城君忠義伯)으로 삼았다.

3 1일 무자에 일식이 있었다.

○ 도평의사사에서 아뢰기를, “윤귀택(尹龜澤)은 김종연(金宗衍)이 난을 모의함을 알렸으므로 관직으로 상을 주었는데, 낭사에서 고신(告身)에 서명하지 않으니, 이는 종연에게 편당한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상시(常侍) 진의귀(陳義貴)ㆍ정습인(鄭習仁) 9명을 지방으로 귀양보냈다.

○ 중랑장 방사량(房士良)이 시무 11조를 올렸다.

"첫째는, 《서경》에, '검약의 덕을 삼가 하여서 영원한 계책을 생각하라.' 하였으며, 옛날에 한의 문제는 궁중에 노대(露臺)를 만들려다가, 백금(百金)을 아껴서 그것을 중지하여, 4백 년 제업(帝業)의 터전을 닦았습니다. 원 나라는 말기에는 만수산(萬壽山) 유궁(幽宮)의 낙으로 백 년 동안 배식(培植)하였던 기업을 무너뜨렸습니다. 부지런하고 검소함과, 사치하고 게을리하는 사이에서 길흉과 흥망이 나누어졌으니, 아아 두려운 일입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검소함을 숭상하고 화려함을 물리쳐서 더욱 부지런하여 게으름이 없게 하소서.

둘째는, 《서경》에, '진기한 물건을 귀하게 여기고 실용 있는 물건을 천하게 여기지 않아야 백성이 넉넉해질 것이다.' 하였습니다. 우리 조정에서는 우리 땅에서 나는 명주ㆍ모시ㆍ삼베만을 사용하고도 능히 오랜 세월을 지내 오면서 상하가 모두 넉넉했는데, 지금은 귀천을 논할 것 없이 외국 물건을 다투어 사들여서 분에 넘치는 사치에 절제가 없으니, 지금부터는 사서인ㆍ공상ㆍ천예에게는 사라ㆍ능단의 의복과, 금은ㆍ주옥의 장식을 일절 금지시켜 사치한 풍속을 그치게 하고, 귀한 이와 천한 이의 구별을 엄하게 하소서.

셋째는, 인가의 자손이 혹 집이 가난하여 돈이 없어서 비단 요와 이불을 준비하지 못한 이유로 세월을 늦추어 혼인의 때를 놓치게 되는데, 심한 경우는 부모가 죽어서 친척에게 의탁하거나, 노비에게 의탁하기까지 하니, 이로 인하여 예를 어기고 인륜을 거의 무너뜨리는 자가 왕왕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혼인하는 집에서는 오로지 면포만 쓰게 하고, 외국의 물건은 일절 금지시키되 만약 옛 폐습을 그대로 행하는 자가 있으면 법을 어긴 것으로 논죄하소서.

넷째는, 사마천(司馬遷)이 말하기를,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기를 구한다면, 농업이 공업만 같지 못하고 공업이 상업만 같지 못하며, 여자가 수를 놓는 일이 거리에서 문에 기대어 웃음을 파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습니다. 신 또한 생각하기를, 사ㆍ농ㆍ공ㆍ상 중에서도 농업이 가장 고생스럽고 공업이 그 다음이며, 상업은 놀면서 군중을 모아 누에를 치지 않아도 비단옷을 입고, 지극히 천한 신분으로 이밥을 먹으며, 부는 공실을 압도하고, 참람함은 왕후에 견주게 되니, 진실로 잘 다스려지는 세상의 죄인입니다. 적이 보건대 본조에서는, 농부에게는 밭이랑을 일일이 검사하여 세를 부과하고, 공인은 공실에서 수고로운데 상인은 노역(勞役)도 않고, 또 세전(稅錢)도 없습니다. 지금부터는 사라ㆍ능단ㆍ초자(?)ㆍ면포 등에 모두 관인을 사용하여 그 경중과 장단에 따라서 하나하나 세를 거두고, 몰래 팔고 사고 하는 자는 모두 법을 어긴 죄를 주소서.

다섯째는, 놋쇠와 구리는 본토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건이니, 지금부터는 구리그릇과 쇠그릇은 금지하고, 오로지 자기와 나무그릇만 사용하게 하여 습속을 개혁하소서.

여섯째는, 하늘과 땅 사이에 비록 지방이 다르면 풍속도 다르지만, 그 사ㆍ농ㆍ공ㆍ상은 어느 지방이나 각기 그들의 업으로써 그들의 생활을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있는 것을 가지고 없는 것과 교역함에 피차간에 통용하는 것은 돈입니다. ()가 도산(塗山)에서 돈을 주조하여 구부(九府)를 설치한 이후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통행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질이 단단하고 그 사용이 간편하여 불에도 타지 않고 물에도 젖지 않으며, 이리저리 옮기면 더욱 빛이 나고 먼 곳으로 가져 가도 탈이 없으며, 쥐도 이를 축내지 못하고 칼날도 이를 상하지 못하는 것이니, 한번 주조하여 이루어지면 만세토록 전할 수 있으므로 천하에서 이를 보배로 여깁니다. 본조에서 추포(?)를 화폐로 쓰는 법은, 동경(東京) 등지의 몇몇 주ㆍ군에서 시행하였으나, 이 추포의 폐단은, 사용한 지 10년도 되지 않았는데, 연기나 습기에 조금만 닿아도 곧 불에 타고 썩어버리니, 비록 공관의 창고에 가득하다 하더라도 쥐가 갉아먹는 손상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관청을 설치하여 돈을 주조하고, 아울러 저폐(楮幣)도 만들어 화폐로 삼아서, 추포의 통행을 일체 금지하소서.

일곱째는,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하다는 것은 고금의 지론입니다. 지금 서북면의 한 방면은, 곧 국가의 요해처이며 강한 군사가 있는 곳입니다. 지난번 간웅이 권세를 잡았을 때에 만호ㆍ천호의 관속도, 인아(?)나 자기에게 붙은 사람이 아니면, 반드시 뇌물을 바친 사람들 중에서 나오게 하여, 마침내 완악하고 포악하며 이익을 탐하는 자들을 임용하여 여러 사람의 위에 있게 하였으니, 저들에게 어찌 나라를 위하여 적과 싸우는 충성과, 죽음을 바쳐 도망하지 않는 의리가 있겠습니까. 지금부터는 서북면의 관군이나 천호의 관속은 양부 이하의 대성과 6조에서 천거한 사람을 쓰도록 허락하소서.

여덟째는, 《서경》에, “영()을 내림은 시행하기 위한 것이다." 하였으니, 만약 영이 내려져도 시행하지 않는다면, 나라가 나라 꼴이 못 되는 것입니다. 지금 영이 엄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행상의 무리들이 10, 5명씩 떼를 지어 소와 말을 이끌고 금은을 숨겨서 날마다 외국으로 가서 당나귀와 노새 따위의 노둔한 물건을 가져와서 나라 안에 널리 퍼져 있으니, 지금부터는 몰래 강을 건너가서 소와 말을 파는 자와, 관인이 찍힌 말을 가지고 가서 그들에게 팔고 돌려 오지 않는 자는, 법을 어긴 것으로 형벌을 가하소서.

아홉째로, 기인(其人)의 제도는 역사에 전해옴이 없었는데, 헌종(憲宗)께서 원 나라 지원(至元) 연간에 5도의 주ㆍ군에서 3백 명을 뽑아서, 판도사(版圖司)와 조성도감(造成都監)에 각기 1 50명씩 나누어 소속시켜 정원으로 삼았습니다. 경인년에 왜적이 침략한 이후로 주ㆍ군이 텅 비어, 백성이 살 곳을 잃고 고을에는 남아 있는 사람이 없는 데도 관에는 정원이 있으므로, 주가(主家)에서 사람을 고용하여 대신 세우는데, 이자가 붙는 베로 빌리되 날마다 1필을 징수하니, 세월이 빨리 지나가서, 또 능히 지탱하지 못합니다. 또 본관(本貫)의 인물을 침노하고 어지럽히는데 관의 위세로 위협하여 노비를 빼앗아 차지하고, 돌아가며 역을 서게 하니, 차례에 당한 자는 또한 재산을 다 팔아 역()을 하게 되므로 그 폐해가 매우 큽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전일의 폐단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이를 일절 폐지해야 할 것입니다.

열째는, 서백(西伯 주 나라 문왕)이 못을 만들다가 죽은 사람의 뼈를 발굴했는데, 서백이 이르기를, '이를 장사지내라.' 하니, 아전이 아뢰기를, '이것은 주인이 없는 뼈인데, 어찌 장사 지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서백이 이르기를, '천하를 가진 자는 천하의 주인이요 한 나라를 가진 자는 한 나라의 주인이니, 과인이 진실로 그 뼈의 주인이다.' 하면서, 다시 의복을 입히고 곽()에 넣어서 이를 장사지냈습니다. 천하 사람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서백의 은택이 마른 뼈다귀에까지 미치는데,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랴.' 하였습니다. 이는 주 나라가 8백 년간 왕천하한 운이 실로 문왕의 어진 한 생각에서 근원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습니까. 지금 도성 밖에는 온 나라 신민들의 선인의 무덤이 있는데, 꼴 베는 자가 이를 발가벗기고 사냥하는 자가 이를 불사르며, 혹은 핍박하여 밭으로 만드니, 효자ㆍ인인(仁人)이 이를 보고 그 이마에 땀이 솟아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부터는 무덤이 있는 곳에는 나무하는 것을 금지하여 초목이 무성하도록 하소서.

열한째로, 공훈이 있는 신하는 만세 사직의 기둥과 초석이오니, 지금부터는 왕실에 공이 있고 사직에 충성이 있는데, 불행히 형벌을 받아 운명하게 된 안우(安祐)ㆍ이방실(李芳實)ㆍ김득배(金得培)ㆍ박상충(朴尙衷) 등에게 포증(褒贈)을 추가하고, 특별히 소뢰(小牢)를 내려 주어서 정혼(貞魂)을 위로하소서." 하였다. 왕이 이 말을 깊이 받아들여, 조금 후에 사량(士良)에 임명해서 형조 정랑으로 삼았다.

○ 여름 4월에 부녀들이 절에 왕래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5부에 의창(義倉)을 두었다.

○ 갑자일에 혜성이 나타나서 10여 일 계속되었다.

○ 대언(代言) 유정현(柳廷顯)이 연복사의 역사를 중지하기를 청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 문하 평리 김주(金湊)에게 대사헌을 겸하게 하였다.

○ 왕이 미행하여 마암(馬巖)에서 활 쏘는 것을 구경하는데, 사헌부에서 지신사 성석용(成石瑢)이 의위(儀衛)를 갖추게 하지 않았다고 탄핵하였다. 왕이 노해서 곧 석용에게 명하여 그대로 정무를 보게 하고, 집의 강회중(姜淮仲)과 지평 이감(李敢)을 좌천시켰다.

○ 삼사에 명하여 서울과 지방의 돈과 곡식의 출납을 회계하게 하였다.

○ 황제[明太祖]의 이름(원장(元璋))을 피하여 원() 자 쓰는 것을 금하고, () 자로 대신 쓰게 하였다.

○ 황제가 환자 한룡(韓龍)ㆍ황독만(黃禿蠻) 등을 보내와서 말 1만 필과 환자 2백 명을 요구하였다.

○ 교지를 내려 신하에게 직언을 구하였는데, 그 교지에, “재앙을 그치게 하는 방법은 덕을 닦는 것만 같은 것이 없고, 정사를 하는 요체는 오직 직언을 구하는 데 있다. 옛날에 송()의 경공(景公)이 말 한마디를 잘하여 형혹(熒惑)이 삼사(三舍 90)나 물러가게 하였으니, 하늘과 사람 사이에 감응이 이와 같이 빠르다. 내가 조그마한 몸으로 조종의 영령에 힘입어 신민의 위에 의탁하고 있으니, 이른 아침부터 밤늦도록 근심하고 부지런하여 풍족하고 태평한 세상이 되기를 기약하고 있으나, 지혜와 능력이 미치지 못하고 학문이 밝지 못하여, 그 정치와 교화에 있어서는 번번히 어떻게 시행해야 할는지에 어두우니, 마치 큰 냇물을 건너는 것처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지금 일관이 말을 올리기를, '천문이 경계를 보여서 객성(客星)이 자미(紫微)를 범하고, 화요(火曜)가 여귀(輿鬼)에 들어갔다' 하니 변고가 매우 크므로 조심하고 두려워함이 더욱 심하다. 덕이 닦아지지 않아서 상제의 마음에 부합되지 못하는가. 정령이 잘못되어 여러 사람의 기대에 부합되지 못하는가. 형벌하고 상 주는 방법이 정도에 어긋났는가. 혹시 사사로운 감정에 따라 사람을 임용하였는가. 아랫사람의 사정이 위에 통하지 못하여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펴지 못한 것이 있는가. 민폐(民弊)가 제거되지 않고 부당하게 소비되는 재용이 있는가.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인재로 천거되지 않은 사람이 누구이며,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로서 물러나지 않은 자가 누구인가. 이와 같은 폐단을 어찌 내 한 사람이 능히 두루 살필 수 있으랴. 이에 곧은 말을 하는 길을 열어서, 임금의 총명을 막고 가리는 나쁜 풍조를 없애려고 한다. 꼴 베는 자의 말도 채용할 것이 있는데, 하물며 경대부ㆍ백집사로서 천위(天位)를 같이 누리고 천록(天祿)을 같이 먹는 신하에 있어서랴. 이제 정치와 교화를 함께 새롭게 하여, 하늘의 마음에 우러러 보답하고자 한다. 아아, 상벌이 분명하여야 예악이 일어나고, 음양이 조화되어야 바람과 비가 제때에 내리며, 관리가 그 직위에 적합하여야 백성이 그 생활을 즐겁게 여길 것이니, 그 요령은 어디 있는가.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것은 이를 인()이라 이를 수 없으며, 말하여도 다 말하지 않는 것은 이를 직()이라 이를 수 없으니, 오직 너희들 모든 신료는 모두 실봉(實封)을 올려, 과인의 과오나 시정(時政)의 잘잘못과, 민간의 이익이 되고 폐해가 되는 점을 숨김없이 말하라. 그 말이 쓸 만하면 내가 즉시 상을 내릴 것이요, 말이 적합하지 않더라도 죄는 주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5월에 왕이 형조 판서 조면(趙勉) 등을 불러 이르기를, “지금 천변이 자주 일어나고 가뭄이 더욱 심하니, 이것은 반드시 원통한 옥사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옥에 갇힌 죄수로서 마땅히 죽일 사람은 목 베고, 마땅히 사면할 사람은 사면하여, 속히 결단해서 보내고 오랫동안 지체시키지 말아서 하늘의 마음을 순응하라." 하였다. 이때 아버지를 위하여 사람을 죽인 자가 있었는데, 형조에서 죄를 헤아려 곤장 80대를 치기로 결정하니, 도당에서 아뢰기를, “비록 어버이를 위하여 사람을 죽였지마는 그 죄가 가볍지 않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어버이를 위하여 사람을 죽였으니 그 죄를 사면할 만하다." 하면서, 마침내 이를 용서하였다.

○ 성균 대사성 김자수(金子粹)가 글을 올리기를. "전하의 숨은 덕이 드러나서 인심이 추대하여, 이성(異姓)의 화를 제거하고 조종의 업을 회복하였으니, 그 화란을 평정할 때에, 모두 현릉대비(玄陵大妃 정비(定妃))의 명령을 받들어 이를 실행하였습니다. 그가 주장하여 계책을 정한 공은 전하가 말미암아 흥복한 바이며 삼한이 함께 힘입은 바입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처음에 즉시 왕대비(王大妃)로 봉하여 위호(位號)를 바루고 책보(冊寶)를 바쳤으니, 매우 거룩한 예전(禮典)이었습니다. 전하께서 이를 섬기는 예가 마땅히 전하를 낳은 이보다 후하게 하여야 될 것인데도, 지난해 남쪽으로 행차할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국대비(國大妃)의 전(殿)에는 친히 행차함이 한 번이 아니며 봉양 또한 지극한데, 유독 왕대비의 전에는 일찍이 한 번도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이는 생육의 은혜에만 친근하고 승통(承統)의 중함에는 소홀한 것이니, 어찌 옳겠습니까. 옛글에, '남의 후사가 되는 자는 아들이 된다.' 하였으니, 이것은 고금의 대의(大義)입니다. 왕대비가 세상을 떠나신 후에는 거상(居喪)의 예를 진실로 극진히 해야 될 것이오니, 생존할 때에 섬기는 예를 극진히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세시복랍(歲時伏臘)에 반드시 왕대비의 전에 먼저 나아가서 문안한 다음 국대비의 전에 문안하셔서 대의를 밝히소서.

근일에 봉숭도감(封崇都監)을 설치하여 왕세자를 책봉하였는데, 신은 의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황제의 선명(宣命)을 받지 못하였는데, 세자가 먼저 책봉의 예를 받는 것이 옳겠습니까. 옛글에, '아들이 비록 성인이라도, 아버지보다 먼저 제사를 받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는 선후의 차례를 어지렵혀서는 안 됨을 말한 것입니다. 우선 전하께서 황제에게 친히 조회하여 명을 받기를 기다린 뒤에, 천천히 세자의 책봉을 의논하여 행함이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 중국 조정의 사신이 와서 좋은 말 1만 필을 요구하여, 모든 관사가 그 명령을 받들기에 분주하여 피로하니, 이때를 당하여 봉숭(封崇)의 예를 억지로 행한다면 여론에 맞지 않을 듯합니다.

()의 한유(韓愈)가 헌종(憲宗)에게 말하기를, '황제(黃帝)ㆍ요순(堯舜)으로부터 삼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장수를 누리고 백성이 안락하였는데, 이때에는 불법이 있지 않았고, ()의 영평(永平 명제 연호) 때부터 비로소 불법이 있었는데, 그 후에 난망(亂亡)이 서로 잇달아 국운이 길지 못했습니다. ()ㆍ제()ㆍ양()ㆍ진()ㆍ원위(元魏 북위(北魏)) 이후로 불법을 섬김이 더욱 정성스러울수록, 연대는 더욱 촉박하여졌습니다.' 하였으니, 이것은 한유가 억측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이를 역사에 상고하여도 환하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처음에 연복사의 탑을 수리하기 위하여 민가 3, 40호를 부수었는데, 이제 또 불사를 크게 일으켜 토목의 역사를 번거롭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지금 농사일이 한창 바쁜데도 교주도(交州道) 일대의 나무를 베고 재목을 운반하여 사람과 소ㆍ말이 모두 병들게 되었으나, 일찍이 조금도 생각하지 않으며, 반드시 얻어지는 것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명복(冥福)을 구하고자 하여, 현재의 생령에게 실제의 화를 끼치니, 백성의 부모가 되어 이와 같이 해서야 되겠습니까. 원하건대, 밝은 명령을 거듭 내려서 그 역사를 정지하여 민력을 펴게 하소서.

혹자는 말하기를, '일하지 않는 중의 무리를 부리니 해가 없다.' 하지만, 중의 무리는 과연 주린 배로서 역사에 나올 수 있겠습니까. 국가의 재용을 소비하는 것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으며, 백성에게 원망을 사는 것도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이후로 태묘(太廟)와 여러 능에는 손질하고 수리한 일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도 불탑을 일으키는 일에는 급급하니, 이는 선대를 생각하는 정성이 도리어 복을 구하고 삶을 이롭게 하는 생각에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찌 전하의 거룩한 덕에 한 가지 결점이 되지 않겠습니까. 옛날에 송 나라의 경공(景公)은 임금될 만한 말[君人之言]이 있었으므로 형혹(熒惑)이 삼사(三舍)나 물러났으며, 성왕(成王)은 유언(流言)의 참소에 미혹하였으므로 하늘에서 천둥과 바람이 불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임금이 말 한마디 잘한 것이 천심을 감동시킬 수 있고, 한 가지 행실의 실수가 천변을 초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상제에게 대하여, 비록 아무도 안보는 곳에 계시더라도, 상시 상제가 굽어보는 것처럼 할 것이며, 그 사물을 응접하는 때에는 더욱 그 생각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삼가서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일을 반드시 예로써 하고, 나가고 들어오고 일어나고 앉는 일을 공경하지 않음이 없게 하여, 일을 처리함이 사욕에 가리우지 않고 고식에 흐르지 않도록 하신다면, 이 공경하는 마음이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켜 재변을 소멸하고 교화를 새롭게 해서 나라를 흥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반드시 불법을 높이 받들어서 탑묘를 크게 일으킨 후에야 국가의 복이 장구하게 되겠습니까. 하물며, '신라와 같이 불사(佛寺)를 많이 지어서 멸망하는 데 이르지 말라.' 하신 신성(神聖 태조(太祖))의 유훈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불교의 설도 오히려 믿을 수 없는데, 하물며 괴이하고 허탄하며 황당한 무당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나라 안에 무당집을 설립하는 것도 이미 정도에 어긋나는 것인데, 이른바 별기은(別祈恩)이란 곳이 10여 곳이나 되며, 사시의 제사로부터 무시로 지내는 별제(別祭)에 이르기까지 1년에 허비하는 것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제사지낼 때는, 비록 금주령이 한창 엄하더라도, 여러 무당들은 떼를 지어 나라에서 하는 일이라고 핑계하니, 유사가 감히 힐책하지 못합니다. 그 때문에 태연히 한껏 마시고, 서울의 큰 거리에서 북 치고 피리 불며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면서 온갖 짓을 다하니, 이것이 가장 심하게 아름답지 못한 풍속입니다. 원하건대, 유사에게 밝게 명하여 사전(祀典)에 기재된 것 외에는 음사(淫祀)를 일절 금지하고 여러 무당들이 궁궐에 드나드는 것을 엄금하여, 요망을 근절하고 풍속을 바로잡으소서.

근일의 교서가 직언을 구함이 간절하오나, 신이 일찍이 보건대, 대성(臺省)에서 정사에 대하여 말한 사람이 있었는데 갑자기 왕의 노여움을 당하여 그 현직을 삭탈당하거나, 하관으로 좌천되기도 하였으니, 신은 염려하기를, 직언을 구하는 교서는 비록 간절하지만 간언을 막는 생각이 아직 있는 듯합니다. 원하건대, 전일에 관직에서 쫓겨난 신하들을 일체 모두 거용하고 말한 바의 일을 일체 모두 시행하여 장래의 사람에게 권장한다면, 뜻있는 선비로서 전하를 위하여 말을 다하지 않을 이가 누구이겠습니까." 하였다.

○ 도평의사사에서 글을 올려 과전법을 정하였다.

○ 성균 박사 김초(金貂)가 글을 올리기를, “인사(人事)가 아래서 움직이면 천도는 위에서 응하게 되니, 재변은 진실로 헛되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덕이 상제의 마음에 부합되지 못하고, 정사가 여러 사람의 기대에 부합되지 못하며, 형벌과 상이 정도에 어긋나고, 임용함이 적정하지 못하며, 원통하고 억울함이 풀리지 못하고, 함부로 소비된 재용이 있을 것이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괴이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괴이를 좋아하면 중()을 잃게 되고, 중을 잃으면 화()하지 않게 되니, 이것이 천지의 기운이 순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이른바 '괴이'란 것은 석씨(釋氏)입니다. 석씨가 자기 한 몸만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인륜을 끊고 산림으로 도망해 들어가니, 이것 또한 한 가지 길이나, 그 화복의 설은 요망함이 더욱 심합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장황한 범패(梵唄)와 불사(佛事)가 능히 요망함을 진압한다.' 하므로 궁중에서 향을 내려 줌이 끊어지지 않았으며, 접대하는 비용이 매우 많이 들었으나, 천재지변이 소멸된 것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복을 빌어서 능히 사람들로 하여금 오래 살게 한다.' 하므로, 만전(萬錢)을 아끼지 않고 그들로 하여금 오래 살기를 빌게 하였으나, 백 세까지 산 증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 불법의 인도하는 데 힘입어 지옥을 부수고 극락에 태어나게 된다.' 하였으나, 죽어서 다시 살아난 사람이 없었으니, 그 극락과 지옥을 본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들이 말하기를, '지리가 흉한 데에는 금찰(金刹)과 보탑(寶塔)을 설치하여 이를 진압한다.' 하였으나, 3대 이전의 세상에는 불교가 있지 않았으니, 무슨 물건으로써 이를 진압하여 지극히 태평한 다스림을 이루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 법에, '너의 서로 낳고 기르는 도를 금하여, 이른바 청정ㆍ적멸이라는 것을 구한다.' 하였으나, 그 무리들이 우리 백성들에게 붙어서 밥을 먹으면서 부끄럼이 없으니 매우 가소롭습니다.

아아, 이 도를 하는 자는 곡식을 먹지 않고 산에 살며 짐승과 같이 살아야만 될 것이온데, 민간에 들어와서 풍속을 문란하게 하는 것은 또한 유독 어째서입니까. 전하께서 중흥하였으니, 비록 선왕의 법이라도 오히려 이를 줄이기도 하고 늘이기도 할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이 세상을 그르치는 큰 괴이를 더욱 좋아하면서 이를 물리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어찌하여 불탑을 만드는 역사에 농민이 괴롭고, 선승을 기르는 데 전곡이 헛되이 소모된단 말입니까. 윗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아랫사람이 반드시 더 심하게 좋아하는 수가 있으니, 백성들이 점점 불교에 들어가서 생업을 버리고 임금과 부모를 배반할까 두렵습니다.

옛날 양()의 무제는 동태사(同泰寺) 3번이나 사신(捨身 몸을 절에 희사하여 종이 되는 것)하고 부고의 재물을 다 없애기까지 하여 불교를 섬겼으나, 마침내 정거전(淨居殿)에서 가가(呵呵) 소리를 내고 죽은 것은 천고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우리 현릉(玄陵 공민왕)은 나옹(懶翁)을 스승으로 삼고 신돈에게 혹하여 불교를 깊이 숭상하였으나 끝내 복을 얻지 못하였으니, 이는 전하께서 친히 본 바입니다.

음사(淫祀)는 또 매우 괴이한 것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기를, '자기에게 관계 있는 귀신이 아닌 데도 제사 지내는 것은 아첨이다.' 하였습니다. 삼대 이후로 학문이 밝지 못하고 정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천하 사람이 서로 신을 두려워하고 요망에 미혹되어, 집이 무당이 되고 백성이 제사에 번독하여 부모의 신()을 풀숲에 버리고 명분이 없는 귀신을 아첨하여 섬기니, 아아, 신은 예가 아닌 제사를 흠향하지 않는 법인데, 어떻게 신으로 하여금 감동하여 이르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와 같이 하여서, 상제의 마음에 부합하여 천재를 면하고자 한들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사악한 기운이 모여서 음양이 그 도를 어겨 여름에 서리가 와서 풀을 죽이고 일식과 성변(星變)이 있으며, 해마다 바람이 불고 우박이 내리며 수재ㆍ한재가 발생하지 않은 적이 없는 것은, 하늘이 경계를 보인 것이 지극한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인심(人心)과 풍속이 바르지 못하고 괴이를 좋아하여 초래한 것입니다.

신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하늘의 들음을 돌이키고 마음에서 결단하여 출가한 무리들을 몰아서 본업으로 돌려보내고, 오교와 양종을 깨뜨려서 군사로 보충하고, 서울과 지방의 사사(寺社)를 그곳의 관사에 나누어 소속시키되, 노비와 재용 또한 모두 그곳에 소속시키며, 무당을 먼 지방으로 내쫓아 서울에 같이 살지 못하게 하고, 집집마다 가묘를 설치하여 음사를 근절하게 하여 명분이 없는 비용을 막고 부모의 신()을 편안하게 하며, 금령을 엄하게 세워 머리털을 깎는 자는 죽이고 용서하지 말며, 음사를 지내는 자도 죽이고 용서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의논하는 자는 말하기를, '이 두 가지 폐해는 뿌리가 깊어서 갑자기 개혁할 수 없다' 하나, 전하께서는 중흥하여 법제를 일체 새롭게 하였으니, 만약 만세의 큰 폐해를 하루아침에 능히 제거한다면, 공이 우()의 아래에 있지 않을 것이며, 요순의 지극한 정치에도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소를 보고 기뻐하지 않았다.

○ 낭사 허응(許應) 등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초기에, 이임(李琳)ㆍ강인유(姜仁裕)ㆍ왕흥(王興)ㆍ신아(申雅) 등이 일찍이 위조(僞朝)에 있으면서 여총(女寵)을 믿어 법을 허물어뜨리고 기강을 문란하게 한 이유로 모두 귀양 보내었는데, 조금 후에 은사(恩赦)를 입어 서울에 모여 있어 징계한 바가 없으니, 모두 귀양 보내기를 청합니다." 하니, 그 말을 따랐다. 이임은 조금 후에 귀양간 곳에서 병들어 죽었다.

○ 낭사에서 소를 올리기를,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이후로 인정을 베풀어 잘 다스림을 원하는 마음은 지극하였습니다. 그러나 언관과 법리(法吏)가 전하의 뜻을 거슬러 관직을 파면당한 자가 간혹 있으므로, 서울과 지방에서 바른 말을 기피하여, 아랫사람의 사정이 위에 통하지 못하고 천문이 경계를 보이니, 뜻있는 선비가 섭섭함이 없을 수 없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덕음을 내려서 직언을 구하여 충분(忠憤)의 기운을 펴려고 하니, 진실로 만나기 어려운 좋은 기회입니다. 신등이 언책을 맡고 있으니, 어찌 감히 묵묵히 말하지 않고 있으면서 전하의 직언을 구하는 뜻을 저버리겠습니까.

다스림을 하는 방법은 효도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왕이 먼저 실천하지 않고서는 그 아랫사람이 교화되는 일은 있지 않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잠저에 있을 때에는 효도로써 다른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왕위에 오른 후에도 마땅히 효도로써 온 나라에 알려져야 할 것이온데, 어찌하여 전하께서 한양에서 오실 때에 중궁과 세자는 함께 오면서 모후는 뒤에 오게 하십니까. 지금 또 수궁(?)은 조석으로 문안할 곳이 아닙니다. 자식의 정으로서는 밤낮으로 모시는 정성을 소홀히 할 수 없지마는 왕의 의로서는 동정과 위의를 가벼이 할 수 없사오니,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이 두 가지를 생각해서 대비를 대궐 가까운 데서 맞이하여 효도하는 뜻을 극진히 해서 백성에게 솔선하소서.

()이란 것은 남편의 도리요, ()이란 것은 아내의 도리입니다. 남편의 도리는 제어하는 것을 장점으로 삼고, 아내의 도리는 따르고 받드는 것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러므로, 비록 천자의 딸일지라도 제후에게 시집가게 되면 서인의 딸과 함께 아내의 도리를 지키게 되는 것이 그 떳떳한 일입니다. () 나라에서는, 공주를 높여서 남자로 하여금 여자를 섬기게 하고, 남편으로 하여금 아내에게 복종하게 하여 음양의 이치를 거슬렀으므로, 식자들이 이를 비난하였는데, 지금 세 궁주(宮主)에게 각기 공상(供上)이라는 명칭이 있는데, 이미 명칭을 상()이라고 하면 건()과 곤()이 자리를 바꾸고 남편과 아내가 도리를 잃은 것이니, 명칭을 어지럽히고 분수를 범함이 이보다 더 클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위조(僞朝)에서도 공주에게 공상하는 곳이 지나쳐서 8, 9군데까지 있게 되었으므로, 관리는 창졸간에 공상할 물품을 갖추지 못하면 견책을 당하고, 백성들은 번거롭고 수고로워 공급하지 못하면 염증을 내었으니, 지금 중흥한 조정에서 다시 실패한 전철을 밟겠습니까.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세 궁주의 공상의 명칭을 폐지하고, 그 늠록(?祿)을 후하게 주며 토전을 더 주어 여러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소서.

윗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아랫사람은 반드시 더 심하니, 왕이 좋아하고 싫어함을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이후로, 조정과 민간에서 전하께서 무슨 일을 좋아하는지를 몰랐는데, 이미 폐지된 연복사의 탑을 세우는데 미쳐서는 신민의 기대에 어긋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석씨(釋氏)의 도는 아버지와 임금을 섬기는 도리가 없으니, 오랑캐[印度]의 교는 삼대의 성세에서는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전하께서 삼대의 정치에 뜻을 두면서도 도리어 오랑캐의 교를 행하려 합니까. 이 역사를, 왕의 마음으로는 혹 생각하기를, '백성의 힘을 괴롭히지 않고 노는 사람을 부리며, 국가의 재용을 허비하지 않고 보시ㆍ희사에 힘입는다.' 하겠지마는, 그러나 나무와 돌, 벽돌과 기와, 구리와 쇠의 비용이 수만금이 될 것이며, 그 노는 사람을 먹이는 것과 보시하고 희사하는 물건은 우리 백성들의 항산이 아닙니까. 백성에게 항산이 없으면 밤낮으로 정사에 부지런한 왕에게 근심을 끼치게 될까 염려됩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중지해야 될 역사를 폐지하여 만민의 생활을 후하게 하고, 자신의 좋아할 바를 선택하여 신민의 기대에 부응하소서.

풍속을 좋아하고 숭상함은 임금에게 근본이 있는 것이니, 임금이 검약한 마음을 가진다면 공경ㆍ대부들이 감히 제도를 어기고 지나치게 사치하지 못할 것이며, 조정에서 검약으로 솔선한다면 사서인이 감히 분수를 어기고 지나치게 사치하지 못할 것이니, 자연히 모든 사람의 의식이 넉넉하고 참란하는 길이 없어질 것입니다. 지금 무뢰배들은 모두 외국의 물화로 이익을 취하고 농업을 일삼지 않으니, 조정에서 비록 크게 금지하여 행하지 못하게 하지만, 밀수로 몰래 가고 몰래 돌아오는 무리를 어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저 나라 사람을 데리고 와서 무역과 청구를 마음대로 하여 우리나라를 엿보기까지 하니, 신등은 적이 생각하기를, 이것은 비록 드러나는 자취는 없으나 의심할 만한 형세이니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모든 신료에게 사라(紗羅)와 단자(緞子)는 입지 못하게 하고, 검소를 힘써 숭상하며, 외국 사치품의 판매를 근절하소서." 하였다.

○ 상복의 제도를 정하였는데, 한결같이 대명(大明)의 제도에 의거하였다. 다만 외조부모와 처부모의 상복은 친백숙(親伯叔)과 같게 하고, 후사가 없는 사람은 3세 전에 버린 어린 아이를 기른 사람의 성을 따라 호적에 올리면 곧 자기 아들과 같게 하며, 그 같은 종친의 아들로서 가까운 촌수로 양자가 된 자는 그 상복을 입도록 하고, 군관은 백일상(百日喪)만 행하도록 하며, 3년 안에 장가드는 것과 잔치를 허락하지 않았다.

○ 상인이 중국과 무역하는 것을 금하였다.

○ 정당문학 정도전이 소를 올리기를, “신이 삼가 교서를 읽으니, 위로는 천문의 이변을 삼가고 아래로는 신서(臣庶)의 직언을 구하면서 여덟 가지 일로써 스스로 꾸짖었으니, 신이 이를 두 번 세 번 읽고는 감탄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하늘의 견고를 자기의 과오로 돌리고 언로를 넓혀 과실을 듣기를 희망하오니, 비록 옛날의 명철한 왕일지라도 이보다 혹 낫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이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바로잡고 도운 일이 없으므로, 군부에 근심을 끼쳐서 이렇게 간절한 교지를 내리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신은 실로 부끄럽습니다.

일찍이 생각하기를, 임금은 원수(元首)가 되고 신하는 고굉(股肱)이 되니, 이를 사람의 몸에 비한다면 실로 한 몸뚱이 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선창하면 신하가 화답하고, 신하가 말하면 임금이 듣는데, '옳다' 하기도 하고 '옳지 않다' 하기도 하며 다스림을 이루기를 기약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견고는 신하에게서 초래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재이(災異)가 있으면 삼공이 인책 면직되고, 대신이 된 자도 직위를 사양하고 재앙을 물리치려 하였으니, 청하건대 신의 관직을 파면하여 재이를 그치게 하옵소서. 그러나 옛날의 대신들은 물러가기를 청할 때에 반드시 임금에게 진계하는 말이 있었으니, 하물며 지금 교서를 받들게 되었으니, 어찌 감히 한 가지 아는 바 어리석은 생각을 다하여 만분의 일이라도 채택에 대비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교서를 읽었더니, 그 교서에, '덕이 닦아지지 않아서 상제의 마음에 부합되지 못하는가. 정령이 잘못되어 여러 사람의 기대에 부합되지 못하는가.' 하였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란 것은 득()이니 마음에 얻는 것이며, ()이란 것은 정()이니 그 몸을 바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덕이란 것이 천품을 타고나는 처음에 얻는 것이 있고, 배워 행한 후에 얻는 것도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큰 도량이 넓고 천성이 인자한 것은, 천품을 타고난 처음에 얻어서 그런 것입니다. 전하께서 평소에 일찍이 글을 읽어서 성현이 이룩한 법을 상고한 적이 없으며, 일을 처리하여 당세의 통무(通務)를 안 적이 없으니, 어찌 감히 덕이 반드시 닦아지고 정사가 잘못된 것이 없다고 보장하겠습니까. ()의 성제(成帝)는 조회에 나와서 침착하고 말이 적어서 임금의 도량은 있었으나, 한실(漢室)이 망하는 데에는 소용이 없었으며, ()의 무제(武帝)는 사형하는 데 나가서 울며 먹지 않았으므로 인자하다는 평판이 있었으나, 강남(江南)의 난을 구원하지는 못하였으니, 한갓 타고난 자질의 아름다움만 있고 덕정(德政)을 닦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천품이 좋다고 스스로를 믿지 말고, 배워 행함이 지극하지 못한 것으로 경계를 삼는다면, 덕이 닦아지고 정사가 거행될 것입니다.

삼가 교서를 읽으니, 그 교서에, '혹시 사사로운 정에 따라 사람을 임용하였는가. 상 주고 벌 주는 방법이 정도에 어긋났는가.' 하였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임용한 사람이 공변된 마음에서 나왔는지 사사로운 마음에서 나왔는지는 전하께서 스스로 알 뿐이오니, 신이 어찌 이를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제수하는 명단이 내려오면 외부 사람이 지목하여 평판하기를, '아무개는 옛 친구이고, 아무개는 외척이다.' 합니다. 세상의 평판이 이와 같으니, 신은 사정에 따른 것이 섞이었음을 염려합니다. 상이란 것은 공이 있는 자를 권장하는 것이요, 형벌이란 것은 죄가 있는 자를 징계하는 것입니다. 상을 '천명'이라 하고 형벌을 '천토'라 하는 것은, 하늘이 상 주고 형벌하는 권병을 왕에게 맡겼으니, 왕이 된 이는 하늘을 대신하여 이를 행할 뿐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상 주고 형벌하는 것이 비록 왕에게서 결정된다고 하지마는, 진실로 왕이 사사로이 이를 가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이후로 상을 받고 형벌을 받은 사람 중에는, 일은 같은 데도 받은 것은 다른 것이 있으니, 김저(金佇)의 말은 한 가지인데 극형에 처한 자도 있고, 뽑아 등용한 자도 있으며, 김종연(金宗衍)이 옥에 있다가 도망한 것은 한가지인데 그 지키는 관리를 한 사람은 목 베고 한 사람은 임용하였으며, 도망하여 난을 모의한 것은 한가지인데, 모의를 같이 하고 가까이 하여 교제한 사람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였으니,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형벌을 받아 죽은 자가 죄가 있었다면, 뽑혀 등용되어 산 자는 홀로 무슨 다행이며, 뽑혀 등용되어 산 자가 죄가 없다면 형벌을 받고 죽은 자는 홀로 무슨 죄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우와 창이 우리 왕씨의 왕위를 도적질하였으니, 실로 조종의 죄인이며 왕씨의 자손과 신민들의 공동의 원수입니다. 그 족인(族姻)과 무리의 목을 베지 않는다면, 먼 변방으로 내쫓아야만 사람과 신의 마음이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옛날에 무씨[武后]가 고종(高宗)의 후()로서 그 아들 중종(中宗)의 제위를 빼앗았는데, 오왕(五王)이 의거(義擧)를 일으켜 무씨를 물리치고 다시 중종을 세웠습니다. 무씨는 어머니이고, 중종은 아들입니다. 지친인 어머니로서 아들의 제위를 빼앗았는 데도, 호씨(胡氏 호실(胡實))는 오히려 《춘추전(春秋傳)》에서 비판하기를, '오왕(五王)이 대의로써 결단하여 그 죄를 주벌하고 그 종족을 멸하지 못하였다.' 하였는데, 하물며 우와 창이 왕씨에게는 무씨 같은 지친 관계도 없으며, 무씨와 같은 죄만 있으니, 족인과 그 당여는 무씨의 종족과도 다릅니다. 지난번에 대간이 아뢰어 이들을 밖으로 내쫓았으니, 비록 역적에 대한 처단을 명백히 하지는 못했지만, 바란 바와 같이 조종과 신민의 분을 조금 풀었습니다. 그러나 두서너 달이 못 되어서 모두 은총으로 불려 와서 서울에 모여서 마음대로 출입하니, 지금 비록 간관의 말로 그 두서너 사람을 내쫓았으나, 전하께서 마지못하여 그 말을 따랐으며 오래도록 주저하고 아까워하는 뜻이 있으니, 이 일은 과연 무슨 의리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여러 장수들이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이켜서 왕씨를 세우기를 의논하였으니, 이는 하늘이 다시 화란을 뉘우치고 조종이 가만히 도와서 왕씨가 다시 일어날 기회였습니다. 그 의논을 저지시키고 마침내 아들 창을 세워 왕씨로 하여금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한 자와, 신우를 맞이하여 왕씨를 영구히 끊으려고 한 자는, 그 난적의 당이니, 왕법에 용납할 수 없는 바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그 생명을 보전하였으니 먼 지방에 두어도 될 것이온데, 지금 모두 불러 집으로 돌아오게 하여 위로하고 편안하게 하였습니다. 만약 그들의 죄가 무함당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들이 왕씨를 저해하고 위성(僞姓)인 창을 세운 것은 여러 장수들이 다 함께 아는 바입니다. 친히 스스로 자복하여서 명백하게 증거가 있으며, 그들이 신우를 맞이하여 왕씨를 끊으려고 한 것은 김저(金佇)와 정득후(鄭得厚)가 전에 말하였고, 이임(李琳)ㆍ이귀생(李貴生) 이후에 공초(供招)로 자복하여 말한 증거가 매우 명백한데, 이를 무함이라고 한다면 천하 어디에 처단 받을 난신ㆍ적자가 있겠습니까.

대저 사람의 하는 일이 공의(公義)에 부합되지 않으면 반드시 사정에 부합됨이 있을 것이므로, 전하의 이번 일은 공의에 부합된다고 하자니 우ㆍ창의 당은 모두 공의로써는 용서할 수 없는 조종의 죄인이요, 사정에 부합된다고 하자니 우ㆍ창의 당을 남겨 두는 것은 뒷날의 걱정을 끼치는 것입니다. 윤이(?)ㆍ이초(李初)가 명 나라에 가서, 친왕(親王)이 천하의 군사를 움직이기를 청한 일과 같은 것은, 또한 어찌 인정에 편하겠습니까. 만약 죄가 있는 자를 사면하면 은혜가 이보다 큰 것이 없으니, 뒷날에 반드시 그의 힘을 얻고 인심도 스스로 편안해져서 화란이 절로 그칠 것이라고 한다면,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형법은 난을 금하는 것이며 이를 믿고 임금이 편안하게 보존되는 것이니, 형법이 한번 흔들리면 난을 금하는 기구가 먼저 허물어져서 은혜 받은 자의 힘을 얻기 전에 화란이 먼저 이르게 될 것이며, 인심이 편안하지 못하고 난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청하건대, 중종(中宗)과 무삼사(武三思)의 일로써 이를 밝히겠습니다. 무씨의 당에서 가장 권세를 부린 자는 삼사인데, 중종은 그 어머니의 친조카인 관계로 목 베지 않고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습니다.

지금에 와서 이를 본다면 오왕이 이미 무씨의 아들을 세워 황제로 삼았기 때문에, 무삼사가 도마 위의 고기가 될 것을 면하였으니, 오왕은 다만 중종에게만 공로가 있을 뿐 아니라, 삼사에게도 또한 천지와 같은 다시 살려 준 은혜가 있었는데, 저 삼사는 이를 생각지도 않고 스스로 그 죄가 세상 사람에게 용서되지 않을까 의심하여 밤낮으로 오왕을 참소하기를, '권세가 중하고 공을 믿습니다.' 하여, 중종의 마음을 미혹시켰습니다. 중종은 삼사는 자기를 사랑한다고 여겨 이를 친근하고, 오왕은 권세가 중하다고 여겨 이를 꺼리니, 오왕은 날로 소원해지고 삼사는 날로 친밀해져서 마침내 오왕이 무삼사에게 주륙되고, 중종도 무삼사에게 시해되었습니다. 가령 중종이 계책을 잘못하였다 하더라도 공신을 보전하지 못하였다고 하는 데 불과하였을 것인데, 어찌 중종이 친히 삼사의 손에 시해당할 줄 알았겠습니까. 친족으로서는 어머니의 조카이며, 은혜로서는 그 생명을 살려 주었는데, 그 은혜를 갚는 힘은 얻지 못하고 화만 얻었으니, 참소하는 사람을 보전할 수 없음이 이와 같습니다. 참소하는 사람의 계략은 처음에는 스스로 그 몸만 보전하는 데 지나지 않지마는, 악한 짓을 하는 것이 그치지 않으면 점점 남의 몸을 해치고 남의 집과 나라까지 멸망시키며 스스로 패망하는 데까지 이르고야 말게 되는 것이니, 삼사와 같은 자는 어찌 옛날과 지금이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하늘과 사람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여 길흉과 재상(災祥)이 각기 그 유()로서 응하게 됩니다. 지금 안으로는 백관이 관직을 맡고 서민이 생업에 안심하고 있으며, 밖으로는 중국과 화목하여 교통하고 섬오랑캐[島夷]가 두려워하여 굴복하고 있으니, 난이 어디서 발생하겠습니까. 그러나 참소하는 사람이 아래에서 서로 이간하면 근심스러운 상()이 하늘에 나타나게 되는데 객성(客星)이 자미성을 범하였으니, 신은 삼사와 같은 자가 왕의 곁에 있는가 두려우며, 화요(火曜)가 여귀(輿鬼)에 들어갔으니, 신은 마침내 삼사의 화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신등은 비록 오왕(五王)이 당한 해를 받더라도 근심할 것이 없사오나, 왕씨(王氏 고려 왕조)의 이미 이루어진 업을 위하여 이를 애석하게 여깁니다. 만약 이런 일이 없을 것을 믿는다고 한다면, 이 말을 한 사람은 거짓입니다. 중종의 마음도 어찌 믿지 않았겠습니까마는, 마침내 뒷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를 끼쳤으니, 신은 뒷세상 사람이 지금의 주상을 비웃는 것이 지금 사람이 옛날의 중종을 비웃는 것과 같이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동자(董子 동중서)는 말하기를, '하늘의 마음은 임금을 사랑하여 먼저 재이(災異)를 나타내어 이를 견고하니, 두려워하고 반성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주상께서는 마땅히 사람을 쓰고 사람을 형벌할 때에는 그 친근하고 소원함과 귀하고 천한 사람임을 논하지 마시고, 공과 죄가 있고 없는 것만 보아서 이를 처리하기를 각기 적당하게 하여 서로 문란함이 없게 한다면, 임용이 공평하고 상벌이 바르며, 인사가 잘 되어 천도가 순응할 것입니다.

삼가 교서를 읽으오니, 그 교서에, '민폐가 제거되지 않고 재용이 낭비되는 것이 있는가. 아랫사람의 사정이 위에 통하지 못하고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풀리지 못한 것이 있는가.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인재로 천거되지 않은 사람이 누구이며,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로 물러가지 않은 자는 누구인가.' 하였습니다. 신이 듣건대, 삼사(三司)의 회계에 부처와 신에게 쓰인 비용이 많이 차지한다고 하니, 재용의 낭비된 것으로는 이와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하오나 부처와 신의 폐해는 옛날부터 분변하기 어렵습니다. 그 무리들은 말하기를, '이것은 좋은 일이며 선한 일이다. 우리에게 귀의하면 나라가 부하게 되고 백성이 오래 살게 된다.' 하니, 임금된 이는 이 말을 듣고 기뻐하여 그 재력을 다하여 부처와 신에게 아첨하여 섬기게 됩니다. 사람들이 이를 말하는 자가 있으면 임금이 생각하기를, '내가 부처를 섬기는데 저들이 이를 헐뜯으니, 나는 선이요 저들은 악이며, 나는 정도요 저들은 마귀이다. 내가 부처와 신을 섬기는 것은 나라를 부하게 하기 위한 것이며, 백성을 오래 살게 하기 위한 것이고, 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면서, 이런 주장으로 그 마음을 굳게 하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상께서 왕위에 오른 이후로 도량이 궁궐에 높이 설치되었고, 법석(法席)이 절에 항상 설치되었사오며, 도전(道殿)의 초제(醮祭)가 일정한 때가 없고, 무당의 제사가 번독합니다. 주상께서 그것을 선한 일이라 하시나 실은 선한 일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하고, 나라를 부하게 한다고 하시나 나라가 실은 궁핍해지는 것을 알지 못하며, 백성을 오래 살게 한다고 하시나 백성이 실은 고달픈 것을 알지 못하십니다. 비록 이를 말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모두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간언을 거절했다고 여기지 않으니, 이것은 신이 이른바 착한 일을 하고 백성을 복되게 하며 백성을 오래 살게 한다는 설을 먼저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옛날에 양 나라의 무제는 만승의 존귀함을 굽혀 세 번이나 사신(捨身)하여 절의 종이 되고, 강남의 재력을 다하여 불탑을 크게 일으켰으니, 그 마음에 어찌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면서 이를 구차스럽게 하였겠습니까. 필부(匹夫 후경)가 난을 일으키니 자신이 감금되는 욕을 당하고 자손도 보전되지 못하며 나라도 따라 멸망되었으니, 불씨의 이른바 '착한 일을 닦아 복을 얻는다'는 것은 과연 어디 있습니까. 이것은 그래도 옛날의 일입니다. 현릉(玄陵)이 불교를 숭상하여 친히 중에게 제자의 예로써 지켰으며, 궁중의 백고좌(百高座)와 연복사의 문수회가 해마다 없을 때가 없으며, 운암(雲菴)의 단청이 산골짜기에 번쩍번쩍 비치고, 영전의 동우(棟宇)가 하늘에 높이 솟았는데, 재물이 다 없어지고 힘이 다하자, 원망과 비방이 많이 일어났는데도, 모두 생각하지도 않았으니, 부처를 섬김이 지극하다고 이르겠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복을 얻지 못하였으니, 어찌 밝은 귀감이 되지 않겠습니까. () 나라 말기에 신이 유신(有莘) 땅에 내려오니 태사 과()가 말하기를, '국가가 장차 일어나려 하면 사람에게서 듣고, 국가가 장차 망하려 하면 신에게서 듣는다' 하였는데, 주 나라가 과연 망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말한다면, 부처를 섬기고 신을 섬기는 것은 이익은 없고 해만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주상께서는 유사에게 거듭 명하시어 사전(祀典)에 기재된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서울과 지방의 음란하고 괴이하며, 아첨하고 번독한 일을 일체 모두 금단하게 한다면, 재용이 절약되고 함부로 허비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주상께서 왕위에 오르신 이래로, 사람들이 혹시 죄를 범하더라도 신문하지 않은 자도 있으며, 방면한 자도 있으니,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풀어지지 않는 것이 없을 것 같지마는, 그러나 사면은 간인에게는 다행이요, 선량한 백성에게는 적()이니, 자주 사면하는 것은 곧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대간이 종사의 큰 계책으로 글을 올려 논집(論執)하다가 모두 쫓겨났으니, 신이 염려하건대,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잘 풀어지지 않고 뛰어난 인재가 천거되지 않는 것은 아마 이때인 듯합니다. 참소하고 아첨하는 사람은 그 종적이 괴이하고 비밀스러우며, 말이 은밀하여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대개 임금에게 허물이 있으면 분명하게 간하고, 사람에게 죄가 있으면 마주 대하여 힐난하며, 우뚝하게 바로 서서 다른 사람의 논란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바른 선비이고, 그 종적을 숨겨서 다른 사람이 아는 것을 두려워하고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말하지 않고 홀로 임금에게 아뢰어 차츰차츰 남을 중상하는 자는 참소하고 아첨하는 사람입니다. 주상께서 밖으로 사대부와, 안으로는 소신ㆍ환관들에게서 시험적으로 신의 말대로 이를 관찰하신다면, 참소하고 아첨하는 정상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비록 지극히 어리석더라도 모두 제 몸을 스스로 아낄 줄은 알므로 누가 처자를 위해 계책을 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신은 비록 광망(狂妄)할지라도 본성(本性)을 잃기까지는 않았으니, 감히 스스로를 돌보지 않겠습니까. 신은 한 몸으로서 여러 사람의 원망 속에서 외로이 서 있으니, 말을 하면 화가 당장 이르게 될 것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지마는, 그러나 주상께서 숨기지 않고 신에게 물으시니 신은 감히 간절하고 곧은 말로써 대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신이 차라리 화를 얻을 지라도 제 몸을 돌보지 않고 통절히 말하며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주상께서는 정신을 차리시고 이 말을 채택하여, 신이 제 몸을 잊고 국가를 위한 뜻을 알아 주신다면, 만 번 죽더라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소를 보고 기뻐하지 않으니, 도전이 이에 전()을 올려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밀직 부사 남은(南誾)이 글을 올리기를, “요사이 주상께서 정전에 앉아 백관을 불러 보시고 하늘의 재변에 대하여 여덟 가지 일의 폐단을 스스로 꾸짖고 교서를 내려 직언을 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직언으로서 극력 간하는 사람이, 하나둘이 아닌데도 어물어물하며 속히 결단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신은 아마 주상께서 마음속으로 욕심이 많으면서도 밖으로는 인의를 베풀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에 가의(賈誼)가 글을 올려 말하기를, '통곡할 만한 일이 한 가지요, 눈물을 흘릴 만한 일이 두 가지요, 긴 한숨을 쉬며 탄실할 만한 일이 세 가지다.' 하였습니다. 문제(文帝) 때에 안과 밖이 편안하고 기강이 잘 정돈되었는데도 가의의 말이 오히려 이와 같았는데, 하물며 오늘날에 있어서는 말할 만한 것이 많습니다. 신은 용렬한 자질로서 주상의 중한 은혜를 입고 후한 녹을 받았으니, 모든 보고 들은 바를 위에 아뢰지 않는다면 이것은 충성하지 못한 것이므로, 우선 두서너 말씀 올림으로써 여러 간사한 자들이 이를 갈면서 몰래 중상하려 하는 화를 피하지 않으며, 감히 위에 아뢰어 만 분의 일이라도 채택하는 데 대비하옵니다.

일찍이 생각하건대, 갑인년 이후로 충신ㆍ의사들이 항상 위성(僞姓)에게 이를 갈고 마음을 썩히고 있었으나, 감히 일을 일으키지 못하였다가, 신우의 광망함이 날로 심하여 마침내 무진년에 요동을 침범하는 그릇된 일이 생기자, 여러 장수들이 대의를 주창하여 군사를 돌이켜 신우를 물리치고 최영을 내쫓고는 종실의 어진 사람을 왕으로 세우기를 의논하였는데, 주장 조민수가 만세의 법을 돌보지 않고 여러 사람의 의논을 힘껏 저지하고는, 어느 대유(大儒 이색(李穡))에게 물어서 우의 아들 창을 세우니, 충신ㆍ의사의 분함이 더욱 심하였습니다. 후에 윤승순(尹承順)ㆍ권근(權近)이 가지고 온 명나라 황제의 명을 보니, '고려 나라 안에 사고가 많은데, 배신(陪臣)이 된 자 중에 충신과 역신이 뒤섞여서, 비록 이성을 거짓으로 꾸며 왕으로 삼았지마는 역시 삼한(三韓)을 대대로 지키는 좋은 계책은 아니다.' 하였습니다. 이에 9공신이 개연히 난을 평정하고 질서를 회복할 뜻을 가지고 죽음을 무릅쓰고 계책을 내어, 대의를 주창하고 대책을 정하여 주상을 추대하여 공민왕의 후사로 삼아 왕씨의 종사를 받들게 하였으니, 이것은 실로 하늘에 계신 조종의 영()이 이를 가르쳐 인도한 것입니다.

역신 변안열(邊安烈)은 권근이 사사로이 명 나라 조정의 문서를 열어 본 것으로 해서 미리 내용을 알고는, 외척(外戚 이림(李琳))에게 편당ㆍ아부하여 도리어 신우를 맞아 세우고 왕씨를 영구히 끊어서, 성천자(聖天子)가 멸망한 나라를 보존하고 끊어진 세대를 계승하게 하는 은혜를 거의 행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들이 역모를 한 것은 실로 김저(金佇)ㆍ정득후(鄭得厚)가 명백하게 공초(供招)한 바이오며, 관리와 나라 사람들이 다 같이 들은 바입니다. 그러므로 대간이 글을 번갈아 올려 논핵하여 안열은 죄에 대한 형벌을 받았으나 나머지 무리들은 사형을 면하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실망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난번에 안열의 계책이 시행되었더라면 주상의 큰일이 실패되었을 것입니다.

김종연(金宗衍)이 몰래 간사한 무리들과 결탁하여 악한 짓을 같이하고, 서로 도와서 반역을 도모하여 윤이(?)ㆍ이초(李初)로 하여금 상국에 근거 없는 말을 퍼뜨리고, 친왕이 천하의 군사를 움직여 달라고 청하여 마침내 성천자께서 우리를 의심하게 하는 마음을 내게 하였으니, 죄가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중국에 갔던 사신 왕방(王昉)과 조반(?)이 옴에 증거가 명백하니 마땅히 유사에게 명하여 그 실정을 추국하여 중한 형벌을 명백하게 보이고, 천자에게 아뢰는 것이 옳은 것인데도, 죄는 같으나 벌은 달라서 어떤 이는 목 베고 어떤 이는 면하기도 하니, 무슨 이유입니까. 지난번에 종연의 당의 계책이 행하여지고, 천자께서 만리 밖의 일을 환하게 내다보지 못했더라면, 삼한의 백성이 죽지 않고 남은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조유(趙裕)의 말은 한 가지인데 어떤 이는 먼 곳으로, 어떤 이는 가까운 곳으로 귀양가고, 곤장을 맞은 자도 있으며, 목 벤 자도 있고, 서울로 불러 돌아오게 하여 위안시킨 자도 있으니, 이것은 또한 무슨 마음입니까. 지난번에 조유의 당의 계책이 행하여졌다면 충의로운 사직의 공신이 보전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무진년에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이킬 때에 지용기(池湧奇)가 말하기를, '친왕(親王)의 자손이 있다.' 하더니, 그 말이 과연 왕익부(王益富) 사건 때에 음모가 드러났습니다. 그렇다면 용기가 익부를 옹호하여 몰래 반역을 도모한 자취가 매우 명백한데, 전하께서 익부는 죽이고 한 가족을 멸하면서도 용기는 살리고 그 목숨을 보전하게 하니, 형벌을 쓰는 공평함을 매우 잃은 것입니다. 익부의 죽음이 죄가 있는 것이라면 용기의 삶은 무슨 다행이며, 용기의 삶이 죄가 없는 것이라면 익부의 멸족은 무슨 죄이겠습니까. 지난번에 용기의 계책이 행해졌더라면 주상의 왕위를 누리는 일은 반드시 보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이 대역ㆍ불충의 당은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않는 바이며, 이 세상에서는 같이 살 수가 없는 삼한 신자(臣子)의 원수인데, 주상께서는 어찌 이들에게 사사로이 할 수 있겠습니까. 관숙(管叔)은 성왕(成王)의 숙부인데, 주공(周公)을 위태롭게 하려다가 죽음을 당하고, 상관안(上官安)은 소제(昭帝)의 장인인데 곽광(?)을 모해하려다가 멸족되었으니, 가령 주공과 곽광이 성왕과 소제에게 의심을 받았더라면 주() 나라와 한() 나라의 국운의 장구함은 기약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상께서는 왕법을 생각하지 않고 고식적인 인자함에 이끌려서, 대간은 논핵하다가 도리어 내쫓김을 당하며, 여러 간사한 자들은 목숨을 보전하고 도리어 임용되었으니, 이것은 불충과 불의를 장래의 사람들에게 권장하는 것이며, 조종 5백 년의 사직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이 주상에게 천명을 주신 뜻에 어찌 되겠으며, 천자가 왕씨를 다시 세운 뜻에 어찌 되겠으며, 조종께서 주상을 돌보아 주신 뜻에 어찌되겠으며, 신민이 함께 주상을 추대하는 마음에 어찌되겠습니까.

신은 삼한 사람이 주상께서 인아(?) 관계로 사심을 썼다고 볼까 염려되옵니다. 신이 말한 바가 공정하다면, 주상께서 다시 일월과 같은 지극히 밝으심으로 돌이키고, 춘추의 큰 법을 따라 안열ㆍ종연ㆍ조유의 당과 용기 등을 즉시 헌사에 내려서 그 죄를 밝게 다스려, 조정과 민간에 포고해서 사람과 신의 분을 통쾌하게 풀어 주고, 난적의 무리를 징계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좋아하고 미워함은 한때에 나오는 것이지마는, 옳고 그른 것은 만세에 공정하게 논의되는 것이니, 신이 어찌 하루아침의 생명을 아까워하여 만세의 법을 돌아보지 않겠습니까. 신이 남김 없이 말하고 숨기지 않는 것은, 차라리 주상께 죄를 받을지라도 조종에게 죄를 얻지 않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 생각하건대, 군자는 양류(陽類)이므로 우뚝히 명백하고 정대하여 머뭇거리는 바가 없으니, 이를 임용하면 그 나라를 융성하게 만들어서 여러 신하는 조정에서 화락하고 만물은 들에서 온화하여 소소(簫韶)가 구성(九成)함에 봉황새가 와서 춤추게 됩니다. 소인은 음류(陰類)이므로 유유낙낙(唯唯諾諾)하여 시비를 변란시키니, 이를 임용하면 그 나라를 혼암한 지경에 빠지게 하여 일식ㆍ월식이 있고, 샘물이 끓어오르고 산골짜기의 위치가 바꾸어지고, 서리가 철 아닌 때에 내리니, 이것은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주상께서는 군자를 가까이하시어 시정의 잘된 점과 잘못된 점을 묻고 고금의 잘 다스려짐과 어지러워진 이치를 물어, 조용히 이야기하면서 덕성을 함양하고,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없고 일을 시행하지 않은 것이 없게 하며, 법에 어긋난 일은 말하지 않고 예에 어긋난 일은 행하지 말며, 환관을 끊고 소인을 멀리하며, 이단을 배척하고 천리를 보존하여 인욕을 없앤다면, 정치와 교화를 함께 새롭게 하고, 천심에 우러러 보답할 수 있어서, 천재가 소멸되고 지도(地道)가 편안할 것이며, 상벌이 명백하고 예악이 일어나며, 음양이 조화되고 바람과 비가 제때를 맞추게 되며, 천명이 더욱 새롭고 인심이 더욱 붙좇으며, 이웃 나라가 더욱 우러러 받들 것입니다." 하였다.

○ 정도전(鄭道傳)이 도당에 글을 올려 이색과 우현보(禹玄寶)의 목 베기를 청하였다.

○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환관 김사행(金師幸)과 김완(金完)이 일찍이 공교하고 사치한 것으로 현릉(玄陵)에게 사랑을 받아 생민에게 해독을 끼쳤으므로 왕의 곁에 있을 수 없사오니, 이를 내쫓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 연복사의 탑을 수리하는 일을 중지하였다.

6월에 전 전의 부정 김전(金琠)이 글을 올리기를, “태조께서 나라를 처음 세우실 때 산수의 역()함과 순()함을 보고, 지맥의 이어짐과 끊어진 것을 살펴서 절을 세우고 부처를 만들며, 노비와 전지를 주어 복을 빌고 재앙을 물리치게 하였으니, 이것은 삼한 기업의 근본입니다. 요즈음 식견이 없는 중들이 창업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전지의 산물을 거두어 스스로 그 사업만 경영하여 위로는 부처를 공양하지도 않고, 아래로는 중을 기르지도 않으니, 아아, 그 무리들은 스스로 그 법을 멸함이 심하였습니다. 지금 식견이 얕은 광망한 선비들이 삼한의 대체를 생각하지 않고, 한갓 절을 부수고 중을 내쫓는 것만으로 마음을 먹고 있으니, 아아, 성조(聖祖 태조)가 창업한 깊은 지혜가 도리어 천박한 선비의 계책만 못하겠습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주상께서 위로 성조의 큰 바램을 받들어 절을 다시 짓고 전지와 노비를 더 주어 불교를 일으키소서." 하였다.

전 호조 판서 정사척(鄭士倜)도 글을 올려 아뢰기를, “불법은 국가를 복되게 하고 이롭게 하니, 마땅히 숭상하여야 될 것입니다." 하니, 왕이 그 말을 옳게 여기고 들었다. 이때 말하는 사람은 왕이 불교를 좋아하는 폐해를 많이 지적하였는데, 김전과 정사척이 이 말로써 왕의 마음을 맞추니, 예문춘추관에서 김전이 부처에 아첨하고 왕에게 아첨하는 죄를 탄핵하였다.

○ 판선공시사 양천식(楊天植)을 남경에 보내어 말 1 5백 필을 바쳤다.

○ 사헌부에서 이색ㆍ왕안덕(王安德)ㆍ이종학(李種學)ㆍ이을진(李乙珍)ㆍ이경도(李庚道) 등의 죄를 다시 다스리기를 청하였으나, 그 말을 따르지 아니하였다.

○ 성균 생원 박초(朴礎) 등이 소를 올리기를, “적이 듣건대, '천지가 있은 뒤에 만물이 있고, 만물이 있은 뒤에 남녀가 있으며, 남녀가 있은 뒤에 부부가 있고, 부부가 있은 뒤에 부자가 있으며, 부자가 있은 뒤에 군신이 있고, 군신이 있은 뒤에 상하가 있으며, 상하가 있은 뒤에 예의가 시행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이며 고금의 떳떳한 법이니, 잠시라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부처는 본래 오랑캐[印度]의 사람이므로 중국과 말이 같지 않으며, 의복의 제도가 다르며, 부부ㆍ부자ㆍ군신의 인륜을 알지 못합니다.

삼도(三途)ㆍ육도(六道)의 설을 거짓으로 꾸미고 만들어 마침내 우매한 사람으로 하여금 망녕되이 공덕을 구하여, 나라의 금령을 꺼리지 않고 경솔하게 법을 범하도록 하였습니다. 더구나 죽고 사는 것과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 연유한 것이며, 위험을 내리고 은혜를 베푸는 것과 형벌과 정치는 임금에게 매였으며, 가난하고 부함과 귀하고 천한 것은 실지의 행위로 초래되는 것인데도, 어리석은 중들은 이를 거짓으로 꾸며서 모두 부처에게서 말미암는다고 하여, 임금의 권한을 도둑질하고 조화의 힘을 천단하고 백성의 이목을 흐리게 하여, 천하를 혼미한 데에 빠뜨려 자신도 모르게 몽롱하게 세월만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우리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오랫동안 쌓인 폐단을 깊이 징계하여, 뒷 세대의 군신들에게 사사로이 소원을 비는 사찰을 세우는 일을 금하였습니다. 이에 태사 최응(崔凝)이 불법을 제거하기를 청하니, 태조가 이르기를, '신라 말기에 불교의 설이 사람들의 골수에 들어갔으므로, 사람마다 죽고 사는 것과 화를 주고 복을 받는 것이 모두 부처가 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지금 삼한이 막 통일되었으므로 인심이 안정되지 않았는데, 만약 갑자기 불교를 개혁한다면 반드시 해괴하다는 생각을 가질 것이다.' 하면서 이에 훈계를 지어, '신라가 불사를 많이 만들어 멸망에 이른 것을 거울로 삼을 것이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태조가 뒷세상에 훈계를 전한 것이 지극히 깊고 간절합니다. 역대의 군신이 태조께서 남겨 주신 뜻을 체득하지 못하여, 구습을 따르고 구차하게 미봉하여 절을 짓고 탑을 세우는 일이 어느 대에도 없는 때가 없었으며, 지금까지 이르게 되어 그 폐해가 더욱 심하였으니, 인심과 세도를 위하여 생각하는 사람이 크게 상심하지 않겠습니까.

주상께서는 총명한 자질을 가지고 불교와 참위의 설에 미혹하여 남쪽에 도읍을 옮기며, 국군의 존귀한 신분으로서 친히 회암사에 행차하여 부모와 임금을 무시하는 불교를 주창하여, 불충하고 불효한 풍속을 이루어 우리의 삼강오륜의 법을 무너뜨리니, 신등은 주상의 중흥의 훌륭한 일을 위하여 이를 애석하게 여깁니다. 더구나 탄신에는 마땅히 백관을 거느리고 대비에게 수를 올려, 주상께서 중흥하여 효도로서 세상을 다스리는 성덕을 삼한의 신민에게 보여야 될 것이온데, 이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오랭캐 교를 따라 중을 밥 먹이고, 부처를 공양하는 일에 구구하게 얽매여, 신민이 중흥의 태평 세상을 바라는 기대를 저지해서야 되겠습니까.

백성들의 힘을 다되게 하고 사람들의 원망을 모으기까지 하면서 연복사 탑묘를 세우는 역사에 대해서는, 온 나라 안팎에서 불평이 많고, 사민(士民)이 실망하였습니다. 옛날에 후주(後周)는 불경과 불상을 부수어 갑옷과 무기를 만들었는데, () 나라는 탑묘만 숭상하고 형정을 해이하게 하였으므로, 하루아침에 전쟁이 벌어지나 주 나라는 흥하고 제 나라는 멸망하였으니, 그렇다면 불교가 인간 세상에 화와 복을 줄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주상께서는 요순ㆍ삼대의 흥한 것을 본받고, ()ㆍ진()ㆍ양() 나라의 망한 연유를 거울로 삼아, 위로는 성조의 남긴 뜻을 계승하고 아래로는 우리 유학자의 소망에 부응하여, 저 불교를 믿는 사람으로 하여금 강제로 그 고향에 돌아가게 하여, 본래대로 백성을 만들어 병부(兵賦 병역(兵役))에 충당하게 하고, 절은 민가로 만들어 호구를 증가하게 하며, 그 글은 불살라 그 근본을 영구히 근절시키고, 급여한 전지는 군자시(軍資寺)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하여 군량을 넉넉하게 하며, 노비는 도관(都官)으로 하여금 이를 관장하게 하여 각 사와 각 관에 나누어 주게 하고, 그 동으로 된 불상과 기물은 군기시(軍器寺)에 소속시켜 갑옷과 무기를 만들게 하며, 그 쓰던 그릇은 예빈시(禮賓寺)에 소속시켜 각 사와 각 관에 나누어 주게 한 다음, 예의로써 가르치고 도덕으로써 기른다면, 수년이 되기 전에 백성의 뜻이 안정되고 교화가 행해지며, 창고가 충실해져서 나라의 재용이 넉넉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영신(?) 김전(金琠)이 아첨하여 임금의 뜻에 순종하고 시비를 어지럽혀 부모와 임금을 무시하는 교를 일으켜, 고금 성현의 도를 폐하고자 하여, '태조가 나라를 세운 것은 모두 부처의 힘을 입은 것이다.' 하면서, 불교를 배척하는 사람을 가리켜 태조의 죄인이라고 합니다. 우리 국가가 경인ㆍ계사년 이전에는 통유(通儒)와 명사가 중국보다도 많았기 때문에, () 나라에서 '군자의 나라'라고 하였으며, () 나라에서는 '문물ㆍ예약의 나라'라고 하여 본국의 사신이 유숙하는 곳에 쓰기를 '소중화지관(小中華之館)'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인ㆍ계사년 이후에는 병란에 죽지 않으면 산림으로 도망해 들어갔으므로 통유와 명사가 백에 한두 명도 남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 불교를 배운 자가 비로소 사악한 설을 주창하여, 위로는 임금과 신하를 속이고 아래로는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서 이에 태조의 9()의 상()을 만들어, '어느 생에는 아무 원주(院主)가 되고 어느 생에는 아무 탑과 아무 경을 만들고, 어느 생에는 아무 절의 소가 되었다가 어느 생에 이르러서야 왕위를 얻게 되었으며, 세상을 떠난 후에는 지금 아무 보살이 되었다.' 하여, 글을 만들어 나무에 새기고 깊은 산에 간수하여 만세 사람을 속였는데, 현릉(玄陵)이 이를 보고 매우 공경하고 믿었습니다. 아아, 정학(正學)이 밝지 못하고 인심이 바르지 못하여, 덕은 닦지 않고 다만 복만 구하며 도는 알지 못하고 다만 괴이만 듣고자 하니, 어찌 애석하지 않으며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맹자(孟子)가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배척하고 공자(孔子)를 높인 이후로 한() 나라의 동자(董子 동중서(董仲舒))와 당 나라의 한자(韓子 한유(韓愈))ㆍ송 나라의 정자(程子)ㆍ주자(朱子)가 모두 유학을 붙들고 이단을 배척하여 천하 만세의 군자가 되었고, 왕안석(王安石)과 장천각(張天覺) 등은 불교를 일으키고 풍속을 바꾸어 천하 만세의 소인이 되었습니다. 주상께서 만약 안석과 천각이 좋아하던 바에 따라서 삼한 백성의 머리를 깎이고, 국가를 버리고 왕위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산에 들어가서 불도를 닦으려고 한다면, 김전(金琠)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겠지마는 만약 동자ㆍ한자ㆍ정자ㆍ주자의 학문을 높여 인심을 바로잡고 인륜을 밝혀 백설의 모적(?)을 제거하고, 요순 삼대의 다스림을 일으켜 하늘과 함께 무궁한 중흥의 업을 빛나게 하려면, 저 김전이란 자는 마땅히 도시(都市)에서 사지를 찢어서 삼한의 만세에 중흥한 대성인(大聖人)은 사설에 미혹하지 않음을 보임이 옳을 것입니다.

지금 국가의 일은 말할 만한 것이 많지마는 우선 그 큰 것만 들어서 말합니다. 다스림을 하는 근본은 인심을 바로잡는 것을 버리고 무엇으로 하겠습니까. 인심의 향방이 바르지 못하면 그 근본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비록 말단의 사무에 힘쓴 것이 있더라도 모두 구차함이 될 뿐이니, 근원이 깨끗하지 않고서 흐름이 맑은 경우는 없으며 또한 뿌리가 튼튼하지 않고서, 가지가 무성한 경우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등은 오로지 이단을 배척하는 것으로써 인심을 바로잡는 근본으로 삼습니다." 하였다.

소가 올라가니 왕이 크게 노하였다. 박초 등이 글을 올리려 하였으나 생원 서복례(徐復禮)가 서명하지 않으니, 박사 김초(金貂) 등이 북을 치고 성토하여 내쫓았다. 또 사예(司藝) 유백순(柳伯淳), 박초 등이 글을 올리는 것을 힘껏 만류하였으나 되지 않으므로, 지신사 성석용(成石瑢)에게 말하기를, “박초 등의 소를 위에 올리지 마시오." 하였다. 박초 등이 이를 알고 함께 의논하여 유백순에게 수업을 하지 않으려고 하니, 대사성 김자수(金子粹) 등이 그 무례함을 미워하고, 또 김초 등이 장관에게 알리지 않고 생도를 제 마음대로 내쫓은 것을 노하여, 김초 등의 가노를 가두고 복례를 불러와서 다시 입학하게 하였다. 자수가 출근하니 김초 등이 뜰에 내려와서 맞이하지 않으므로 자수가 전을 올려 사직하니, 윤허하지 않고 김초 등을 순군옥에 가두었다.

○ 사헌부에서 소를 올려 다시 이색의 죄를 논핵하여 함창(咸昌)으로 귀양보냈다. 간관이 또 이종학(李種學)ㆍ이을진(李乙珍)ㆍ이경도(李庚道) 등을 탄핵하여 모두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었다.

○ 교서를 여러 도에 내리어 수재ㆍ한재와 서리가 일찍 오고 우박이 내리며, 황충의 재해가 있는 주ㆍ군을 조사하여 조()를 면제하였다.

○ 처음으로 성균관의 생원과 5부의 생도에게 삭망의 조회에 참여하게 하였으니, 도당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사헌부에서 의첩(依貼)이 없다고 이를 논박하여 끝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 가뭄으로 인하여 이죄(二罪) 이하를 사면하였다.

○ 다시 정도전을 정당문학으로 삼았다.

○ 연복사의 탑을 다시 수리하였다.

사신 정정(鄭井)이 말하기를, “여러 신하의 간하는 말을 듣고 이를 그만두기를 명하였다가, 불교의 설에 혹하여 곧 이를 다시 하였으며, 간언을 거절했다는 비방은 생각지도 않고 기필할 수도 없는 복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탑묘가 이루어지자마자 천명이 이미 떠나갔으니, 애석하다." 하였다.

대간이 번갈아 아뢰기를, “우현보의 죄가 이색과 같으니, 마땅히 모두 귀양보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소가 모두 세 번을 올라갔으나 모두 궁중 안에 머물러 두었다. 대간이 다시 대궐에 나아가서 면대하여 청하니, 왕이 마지못하여 그 청에 따라 현보를 철원으로 귀양보냈다.

○ 우리 태조가 두 번이나 전()을 올려 사직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 가을 7 1일 병술에 지진이 있었다.

○ 왕이 정당문학 정도전을 불렀는데, 병을 핑계하고 사양하므로, 대언 안원(安瑗)을 보내어 간절히 권하니, 그제서야 나갔다. 왕이 이색과 우현보의 죄를 물으니, 도전이 전에 상소한 뜻과 같이 자세히 대답하였는데, 폭포처럼 거침이 없었다. 왕이 이르기를, “이색은 죄상이 조금 드러났지만 현보의 죄는 아직 명백하지 않다." 하니, 도전이 대답하기를, “이색의 죄는 이미 드러났으니, 마땅히 극형에 처하여 불충한 죄를 보여야 될 것이며, 현보 같은 자는 죄상이 명백하지 않기 때문에 대간이 번갈아 글을 올려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기를 청하였으니, 신 또한 마땅히 선인과 악인은 한데 섞여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이색과 우현보의 일은 정지시킨 지가 이미 오래인데 지금도 소를 올리는 자가 있으니, 반드시 경의 소에 따라 하는 것이다. 경이 요즈음 과인을 보지 않는 것도 또한 이 일 때문이다." 하였다. 도전이 아뢰기를, “군신의 의는 정의가 부자와 같으니, 비유하건대, 아버지가 아들의 불효한 것을 꾸짖고도 그 이튿날 또 사랑하기를 그전과 같이 하는 것은, 천리는 가리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상께서 지금은 비록 신을 꾸짖지만 후에 만약 진심으로 신을 임용한다면 감히 분발하여 힘쓰지 않겠습니까. 지금 농사철을 당하여 하늘에서 오래도록 비가 오지 않는데, 주상께서 신을 불러 면대하여 의논하니, 하늘이 곧 비를 내린 것입니다. 그전에 장마를 당하여 벼가 무성하지 않았는데 주상께서 신을 불러 정사를 의논하자, 장마가 곧 개었으니, 주상께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혹시 간당이 교지를 거짓으로 꾸며서 신을 죄주더라도 신은 면대하여 아뢴 후에야 죄를 받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기뻐하지 않았다.

○ 섬라곡국(暹羅斛國)에서 사신을 보내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 왕이 김초(金貂)가 불교를 훼방한 것을 노하여 이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죄명을 찾아내지 못하니, 좌대언 이첨(李詹)이 아뢰기를, “우리 태조 이후로 대대로 불법을 숭상하고 믿었는데, 지금 김초가 이를 배척하니 이는 선왕이 이룬 법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이로써 죄준다면 죄명이 없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왕이 옳게 여겼다.

병조 좌랑 정탁(鄭擢)이 소를 올리기를, “김초가 이단을 배척하여 말을 다하여 숨기지 않았는데, 주상께서 선왕이 이룬 법을 깨뜨렸다고 하여 극형에 처하려고 하니, 신은 적이 주상을 위하여 이를 애석하게 여깁니다. 《서경》에, '선왕의 성헌(成憲)을 본보기로 삼아 영구히 허물이 없게 한다.' 하였으니, 이른바 선왕의 성헌이란 것은 삼강오륜에 지나지 않는데, 불교는 모두 이를 어겼으니, 김초가 선왕이 이룬 법을 깨뜨린 것이 아니라, 곧 주상께서 스스로 이를 깨뜨린 것입니다." 하였는데, 대언 등이 왕이 노할까 두려워하여 감히, 그 아뢰는 말을 알리지 못하였다.

정몽주가 소를 올리기를, “믿음이란 것은 임금의 매우 귀중한 보배이니, 나라는 백성에게서 보전되고 백성은 믿음에서 보전됩니다. 근일에 주상께서 특별히 교지를 내려 직언을 구하며, '말하는 사람은 죄가 없다.'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조관과 한량인(閑良人) 등이 번갈아 글을 올려 정사의 잘잘못과 민생의 기쁨과 근심을 논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말을 마음대로 하여 기휘함이 없는 조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자 박사ㆍ생원 등이 또한 이단을 배척하여 글을 올려 말하다가 말을 삼가지 못하여 주상의 노여움을 범하였으니,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등은 생각하건대, 불교를 배척하는 것은 유자(儒子)의 떳떳한 일이므로 옛날부터 군왕이 이를 버려두고 논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주상의 관대한 은혜로써 보잘것없는 광망한 유생을 너그러이 용납해 줄 만한 데 있어서이겠습니까. 원컨대 관대한 은혜를 베풀어 일체 모두 용서하여 국인들에게 믿음을 보이소서." 하니, 이에 김초 등에게 태형(笞刑) 40대를 쳤다.

○ 정몽주가 재상 등과 함께 소를 올리기를, “상벌은 나라의 큰 전법(典法)이니, 대개 한 사람을 상 주면 천만 사람이 권장되고, 한 사람을 벌 주면 천만 사람이 두려워하게 되니, 지극히 공평하고 지극히 밝은 이가 아니면 그 중도를 얻어서 온 나라의 인심을 복종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주상께서 왕위에 오른 이후로 성헌(省憲)과 법사(法司)에서 번갈아 글을 올려 논핵하기를, '아무개는 왕씨를 세우려는 의논을 저지시키고 아들 창()을 추대하여 세운 사람이며, 아무개는 역적 김종연(金宗衍)의 모의에 참여하여 행재소(行在所)에서 내응 한 사람이며, 아무개는 여러 장수들이 천자의 명을 받들어 신우 부자가 왕씨가 아니다 하여 왕씨를 다시 세우기를 의논할 때에, 신우를 맞이하여 왕씨를 영구히 끊으려고 한 사람이며, 아무개는 윤이(?)와 이초(李初)를 중국에 보내어 친왕이 천하의 군사를 움직여 주기를 청한 사람이며, 아무개는 선왕의 얼손(孼孫)을 몰래 길러서 반역을 꾀한 사람입니다.' 하여, 장소(章疏)가 여러 번 올라가 비록 주상의 생각을 괴롭혔지마는, 지금까지 명백한 증거를 드러내지 못하여 반드시 그 중간에 죄가 있는 자가 부당하게 사면을 입거나, 죄가 없는 자가 누명을 씻지 못한 일이 있을 것이니, 공도로 볼 때에 양쪽이 다 잘못인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말하는 자들이 시끄럽게 지금까지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신등은 생각하기를 마땅히 성헌과 법사로 하여금 함께 의논하게 하여, 서로 관련된 사람의 옥사(獄詞)와 문안을 다시 자세히 살펴서, 아무개는 죄가 용서할 수 없으니 마땅히 법에 따라 처해야 되고, 아무개는 정상이 의심스러우니 마땅히 경한 형에 처해야 되며, 아무개는 죄가 없는 데도 무함을 받은 것이니 마땅히 명백히 분변해야 될 것이라고 하여, 옥장(獄章 옥사)이 올라가거든 주상께서 재보(宰輔)의 신료를 불러서 친히 자리에 나아가 심사하여,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없게 한 연후에, 내쫓기도 하고 석방하기도 한다면 인심이 복종하고 공도가 행해질 것입니다."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간관이 아뢰기를, “궁궐을 엄하게 하고 문금(門禁)을 설치한 것은 왕위를 높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랫사람을 접할 때에 마땅히 예로써 하고 친압해서는 안 되오니, 원컨대, 지금부터는 종친과 모든 신하 및 왕위에 오르시기 전에 알던 사람들은, 불러들여 만나보거나 의논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경연이나 공석에서 할 것이고, 혼자 계실 때에 사적으로 하지 말 것이오며, 대간으로 하여금 날을 번갈아 경연에 입시하게 하여 내외를 구별하고 사설을 멀리하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임진일에 지진이 있었다.

○ 왕이 우리 태조의 사제에 행차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풍악을 울리며 밤중이 된 후에 파하였다.

○ 도평의사사에서 글을 올리기를, “모든 국가의 이해와 군기의 중대한 사무나 간인의 죄상을 고발하는 자는 마땅히 날짜와 달을 명백히 기록하고 실제의 일을 지적하여 진술할 것이며, 몰래 익명서를 보내거나 말을 만들어 비방을 일으켜 국정을 교란하는 자는 사헌부와 법사로 하여금 엄하게 살피게 하며, 사실이 드러나서 탄핵을 당한 자는 종친과 귀척을 물을 것 없이 위에 아룀을 가다리지 말고 바로 직첩을 회수하고 국문하여 논죄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왕이 한참이나 머리를 숙이고 생각하다가 그제야 이를 허락하였다.

○ 과거에 성균 사예 유백순(柳伯淳)이 순녕군(順寧君) (?)과 말하기를, “무진년에 여러 장수들이 명령을 받고 요동을 쳤는데 머뭇거리다가 군사를 돌이켰으니, 공이 없는 것 같은데도 지금 도리어 포상을 받았으며, 그 군사를 돌이켰을 때에 왕씨를 세우는 것을 저지하고 아들 창을 세운 것도 또한 형세가 그렇게 된 것인데, 대신이 이 일로 옥에 갇히었다. 옛날 의종 때 조정의 난을 또한 거울로 삼을 만하다. 지금 유자 정도전 등이 나라의 권력을 마음대로 부리려 하니, 혹시 전날과 같은 난이 있다면 우리들이 그 화를 입을까 두렵다." 하였다. 이때에 와서 대간과 형조가 자은사(慈恩寺)에 모여서 담과 백순을 잡아서 신문하니 상세히 자백하므로, 드디어 담은 견주(見州)로 귀양보내어 속적(屬籍 왕실의 족보)을 삭제하고, 백순은 곤장을 쳐서 기주(基州)로 귀양보냈다. 또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 유백유(柳伯濡)가 전법(田法)을 비난하였기 때문에 광주(光州)로 귀양보내었다.

○ 도평의사사에서 글을 올리기를, “적이 듣건대, 우왕(禹王) 때는 9년의 홍수가 있었으며, 탕왕 때는 7년의 가뭄이 있었는데, 역산(歷山)과 장산(莊山)의 쇠로 모두 전폐(錢幣)를 주조하여 백성의 곤궁을 구제하였다고 하며, () 나라에 이르러서는 태공(太公)이 또 구부환법(九府?)을 세웠다고 하니, 이것이 전화(錢貨)의 시초입니다. () 나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시대마다 각기 돈이 있었으니, 송나라의 회자(會子)와 원 나라의 보초(?) 같은 것은 비록 전법을 변경한 것이지만, 실상 고대의 돈을 만든 뜻을 본받은 것이니, 이는 모두 재해나 환란에 대비하고 백성의 사용을 편리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 동방의 돈은 삼한중보(三韓重寶)ㆍ동국통보(東國通寶)ㆍ동국중보(東國重寶)ㆍ해동중보(海東重寶)ㆍ동해통보(東海通寶) 같은 것이 중국의 책에 기재되어 있으니, 상고할 수 있습니다. 가까운 옛날에는 또 은병을 만들어 화폐로 삼았으니, 모두 포필과 함께 본위화(本位貨)와 보조화로 서로 맞추어 행하였는데, 후에 법의 폐단이 있음으로 해서 동전과 은병을 모두 폐지하고 행하지 않았으며, 마침내 오종포 한 가지만 사용하여 화폐를 삼았습니다. 근년 이후로는 베올이 굵고 성글어서 점점 두 새, 석 새까지 이르게 되니, 여자들의 공은 비록 힘들었으나 백성의 이용은 편리하지 못하며, 이를 운반하면 소가 땀을 흘리고 이를 쌓아 두면 쥐가 먹으며, 상인들이 통행하지 않고 곡식값이 뛰어오른 것은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지금 주상께서 정성을 다하여 정치에 힘을 써서 정치와 교화가 다시 새로워졌는데, 이 한 가지 일만이 아직 구폐를 따르고 있으니, 만약 한두 해의 수재ㆍ한재가 있고 수십만 명의 군비가 생긴다면 장차 무엇으로써 이에 대처하겠습니까. 지금의 계책으로서는 은과 동은 이미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므로, 동전과 은병의 화폐는 갑자기 다시 시행하기가 어려우니, 마땅히 맡은 관사로 하여금 옛날 것과 지금 것을 참작하여 회자ㆍ보초의 법을 본떠서 고려에 통용하는 저화(楮貨)를 제정하여 유포시켜, 오종포(五綜布)와 서로 겸하여 사용하도록 할 것입니다." 하였다. 또 야관(冶官)을 두어 쇠를 주조하여 나라의 재용을 도우기를 청하였으나, 일이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 도당에서 수군ㆍ육군의 군정(軍丁)을 등록시키고 이어서 호패(號牌)를 가지게 하도록 청하였다.

○ 삼도수군 도체찰사 왕강(王康)이 조운선이 다닐 수 있게 전제거(蓴堤渠)를 개통하기를 청하여, 양광도의 정부(丁夫)를 징발하여 팠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 우리 태조가 의견을 올려 사람을 보내어 동여진의 여러 부락에 방을 써서 붙이고 초유하니, 이에 귀순한 자가 3백여 명이나 되었다.

8월에 대사헌 김주(金湊) 등이 소를 올려 5도의 정부를 징발하여 내성을 쌓기를 청하니, 그 말을 따랐다.

○ 징원당(澄源堂)을 설치하고, 또 춘방원(春坊院)을 세웠다.

○ 일본의 구주 절도사 원요준(源了浚)이 사신을 보내와서 조회하고, 우리나라에서 사로잡혀 갔던 백성 68명을 돌려보냈다.

○ 을축일에 지진이 있었다.

○ 사헌부에서 소를 올리기를, “선왕의 제도는 적자와 서자의 구분이 엄격하였으니, 적자라야만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을 수 있으며, 그 나머지 지자(支子)는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종자(宗子)가 아들이 없고 죽었다면 그 다음되는 자가 작위를 물려받을 수 있는데, 본조에서는 선왕의 친자의 후손에게는 적자와 서자를 논하지 않고, 가깝고 먼 것을 분변하지도 않고 일체 모두 작위를 봉하였으니, 실로 성인이 예를 제정한 뜻이 아닙니다. 더구나 이른바 '이어받는다[承襲]'는 것은 아버지가 죽고 난 후에 그 작위를 계승하는 것인데, 지금은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도 아들 또한 군으로 봉하고, 한집안의 아들이 많고 적은 것을 논하지 않고 모두 군으로 봉하게 되니, 다만 적자와 서자가 등차가 없을 뿐만이 아니라, 예의에도 어긋나는 것이며, 또 한정이 있는 작록으로써 한정이 없는 자손들을 봉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그 사이에 어질고 어질지 못한 자가 뒤섞여서 불량한 무리들이 종척을 구실로 삼아 혹시 화란이 일어날까 염려됩니다.

청컨대, 맡은 관사로 하여금 종친의 적()을 조사시켜 무릇 선왕의 친자의 후손으로서 정파(正派)의 적장자(嫡長者)와 주상의 백숙(伯叔)ㆍ친제(親弟)와 친중자(親衆子)에게만 봉군하는 것을 허락하고, 그 봉군의 후사에게는 장자로 하여금 작위를 이어받게 하며, 그 출입하고 기거하는 것을 일체 옛날의 제도에 따르게 하여 가벼이 행동하지 못하게 하며, 그 족속이 소원한데도 이미 봉군된 자는 모두 고신을 회수하고, 그중에 재간이 있는 자를 가려서 문관ㆍ무관으로 그 재주에 따라 임용하여, 선왕의 제도를 따르고 종족의 친소를 구별하소서." 하였으나, 대답이 없었다.

○ 도평의사사에서 소를 올리기를, “옛날부터 천자의 배필은 후()가 되고, 제후의 배필은 비()가 되며, 천자의 딸은 공주(公主)라 이르고, 제후의 딸은 옹주(翁主)라 하여 상하의 예를 감히 어지럽히지 못하였으니, 명분을 정하고 존비를 구별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국가가 근대 이후로는 기강이 점점 해이하여 예제(禮制)를 따르지 않으니, 후비ㆍ옹주ㆍ택주의 칭호가 그 시대 임금의 하고자 하는 데서 나오기도 하고, 권세가 있는 자의 사사로운 정에서 나오기도 하여 모두 그 의의를 잃었으며, 신료들의 처실(妻室)의 봉작과 조종의 증직까지도 모두 일정한 제도가 없으니, 모두 다시 정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판내부시사 김지탁(金之鐸)을 중국 남경에 보내어 말 2 5백 필을 바쳤다.

○ 왕이 경연에 나가서 겸 예조판서 민제(閔霽)에게 이르기를, “듣건대, 예조에서 복색을 정하고 불사(佛事)를 삭제하였다고 하니 그러한가. 이국의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실로 좋은 법이니, 나 또한 면포옷을 입을 것이다. 불사라면 곧 선왕이 행한 일인데 내가 어찌 감히 마음대로 폐지할 수 있으랴." 하였다.

9월에 왜적이 남양(南陽)에 침범하니, 양광도 도관찰사 안경량(安景良)이 군사를 보내어 이를 쳐서 물리치고 15명을 사로잡아 바쳤다.

○ 사헌부에서 공조 총랑 박전의(朴全義)가 그 어머니가 중과 간통하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고 탄핵하였는데, 왕이 특별히 명하여 이를 용서하였다.

○ 대사헌 김주(金湊)가 아뢰기를, “규정 박자량(朴子良) 등이 집의 우홍득(禹洪得)을 영접하지 않고, 또 헌관이 직무를 행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등, 아랫사람으로서 장관을 업신여겼으니, 죄를 주소서." 하였다. 자량 등을 순군옥에 가두어 국문하니, 자량이 말하기를, “이색과 우현보는 본래 죄가 같은데, 본부에서 이색에게 왕씨를 끊으려고 한 죄만 논핵하고, 현보를 함께 논핵하지 않은 것은 그 아들 홍득(洪得)이 집의(執義)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홍득이 이색의 죄를 논핵한다면 이는 곧 그 아버지를 논핵하는 것입니다. 동료들과 함께 아버지의 당을 논핵하고, 즉시 사직하고 가지 않으니 이것은 그 아버지를 무시하는 것이며, 그 아버지가 왕씨를 끊으려고 하는데 이를 알고도 간하지 않으니, 이것은 왕씨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아버지를 무시하고 임금을 무시하는 사람이니, 어찌 영접하겠습니까. 또 지난번에 성헌(省憲)과 형조에게 명하여 현보 등의 죄를 의논하게 하니, 이에 죄가 의심나는 것은 가벼운 쪽으로 벌을 준다는 것으로써 (《서경》에 있는 말임) 처리하였으나, 신우를 맞이하여 왕씨를 끊으려 하고, 윤이(?)와 이초(李初)를 중국에 보내어 우리나라를 해치려고 한 것은 죄가 큰 것인데, 성헌과 형조에서 이를 다스리지 못하고, 도리어 가벼운 벌로 처리하였기 때문에 헌관이 직무를 행하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하였다.

만호 유만수(柳曼殊)가 자량에게 말하기를, “맡은 관사에서 현보 등의 죄를 논핵한 것을 밀봉하여 아뢰었는데 너희들이 어떻게 이를 알았느냐." 하니, 자량이 말하기를, “규정 안승경(安升慶)에게서 들었다." 하였다. 이에 승경을 잡아 국문하니, 승경이 말하기를, “그전에 정도전의 집에 가서 묻기를, '선생이 글을 올려 일을 말함이 심히 간절하였다고 들었는데 그렇습니까.' 하니, 도전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면서 글속의 일을 자세히 말하였습니다. 후에 또 도전에게 묻기를 '요사이 성헌과 형조에서 우ㆍ창과 윤이ㆍ이초의 당을 논핵하면서 밀봉하여 아뢰었는데, 선생이 이를 보았습니까, 보지 않았습니까.' 하니, 도전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우ㆍ창과 윤이ㆍ이초의 당을 대악이라고 하나 그 일은 끝난 것이다.' 하였는데, 내가 들은 것은 이것 뿐입니다." 하였다. 이에 자량은 곤장을 치고, 승경은 수군에 배속시켰다.

○ 우()를 영삼사사로, 우리 태조를 판문하부사로, 심덕부를 문하시중으로, 정지(鄭地)를 판개성부사로, 유구(?)를 예문관 대제학으로, 정도전을 평양 부윤으로 삼았다.

○ 성헌과 형조에서 소를 올려 정도전이 규정을 몰래 꾀어서 대간을 비방한 것을 논핵하여 극형에 처하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정도전이 공신인 이유로 용서하였다. 다시 소를 올려 논핵하기를, “도전이 외람히 공신의 반열에 있으면서, 속으로는 간악한 마음을 품고, 겉으로는 충직한 척하여 국정을 더럽혔으니, 죄를 주기를 청합니다." 하니, 왕이 도전을 그 본향인 봉화현(奉化縣)으로 돌려보냈다.

○ 세자 석()을 남경에 보내어 정조(正朝)를 하례하였다.

○ 성헌과 형조에서 아들 창을 세우고 신우를 맞아들인 것과 김종연ㆍ윤이ㆍ이초ㆍ왕익부의 당을 논핵하여 아뢰니, 왕이 정몽주ㆍ윤호(尹虎)ㆍ유만수(柳曼殊)ㆍ김주(金湊) 등을 불러 의논하게 하였다. 김주가 아뢰기를, “조민수가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이킬 때에 이색에게 물으니, 이색이 말하기를, '아버지가 나라를 가졌다가 아들에게 전하는 것은 떳떳한 이치이다.' 하였는데, 민수가 그 말을 따라 창을 세웠다면, 이색의 죄가 명백합니다." 하였다.

몽주와 정언 김여지(金汝知) 등이 말하기를, “민수는 창의 근친이니 창을 세우고자 한 것은 민수의 뜻입니다. 이때를 당해서 이색이 비록 종실을 세우고자 하였을지라도 민수의 뜻을 빼앗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색의 죄는 응당 가장 가벼운 죄에 처해야 될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옳게 여기고 명하여 조민수ㆍ변안열은 그 가산을 적몰하고, 이을진은 법대로 죄를 처단하고, 지용기와 박가흥(朴可興)은 그전대로 있게 하고, 우인열ㆍ왕안덕ㆍ박위는 지방에서 편리한 대로 살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서울이나 지방에서 편리한 대로 살게 하였다. 몽주가 왕에게 아뢰어 영()을 만들기를, “앞으로 다시 이 일을 논핵하는 자가 있으면 무고죄로 논할 것이다." 하였다.

○ 겨울 10월에 왕이 태묘에 제사지내었다.

○ 판종부시사 송문중(宋文中)을 일본의 구주 절도사 원요준(源了浚)에게 보내어 답례(答禮)로 빙문하였다.

○ 판개성부사 정지(鄭地)가 졸하였다. 정지는 젊을 때 큰 뜻이 있고 자질이 뛰어나게 훌륭하였으며, 성품이 너그럽고 후하였다, 장수가 되어 글 읽기를 좋아하여 대의에 통하였으며, 드나들 때마다 항상 서적을 지니고 다녔다. 윤이ㆍ이초의 옥사에 잡혀서 청주(淸州)에 갇혔는데, 불복하며 말하기를, “이 시중(李侍中 이성계(李成桂))이 대의를 주장하여 군사를 돌이킬 때 내가 이윤(伊尹)ㆍ곽광(?)의 고사로써 시중에게 암시한 것은 깊은 뜻이 있었는데 다시 어찌 윤이ㆍ이초에게 편당하였겠느냐." 하면서 말할 때마다 반드시 하늘에 맹서하며 말뜻이 사무쳤는데, 결국 수재 때문에 죄를 면하고 물러나와 광주(光州)에 있었다. 이때에 와서 왕의 부름을 받았는데, 나아가기 전에 졸하였다.

○ 내성(內城)을 수축하는 것을 중지하였다.

○ 왕이 경연에 나아갔는데,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강하다가, “당()의 태종(太宗)이 다시 고구려를 치고자 하니, 방현령(房玄齡)이 표문(表文)을 올려 이를 간하였다."는 대목에 이르러, 좌대언(左代言) 이첨(李詹)이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중국에 신하의 예절을 지켰습니다. 옛날에 양()의 무제(武帝)가 후경(侯景)에게 핍박받았을 때 우리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였는데, 이르러 보니 시조(市朝)가 무성한 풀밭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자가 이를 보고 우니, 후경(侯景)이 사신을 잡아 그 이유를 묻자, 대답하기를, '국운이 흥성한 옛날과 같지 않으므로 운다.' 하니, 후경이 이를 의롭게 여겨 놓아주었습니다. ()의 현종(玄宗)이 안록산(安祿山)의 화를 당하여 서쪽으로 촉도(蜀道 사천성(四川省))에 행차하였는데, 우리나라의 사신이 촉에까지 가니, 현종이 기뻐하여 친히 시를 지어서 사신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이 모두 역사에 기재되어 환하게 볼 수 있습니다. 원 나라가 말기에 북쪽으로 상도(上都)로 옮겼는데도 달려가서 빙문함이 오히려 공손하였으니, 이것은 신등이 직접 본 바입니다. 그러므로 신하의 예절을 삼가 지키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미칠 수 없는데, 하물며 지금 당당한 천조(天朝 명 나라)에 대해서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신하의 예절을 어기겠습니까." 하였다.

지문하 김사형(金士衡)이 아뢰기를, “우리나라가 궁벽하게 먼 구석에 있어 산천이 험하니, 만약 능히 제후의 도리를 조심하여 닦는다면 누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겠습니까." 하니, 왕이 그 말을 뜻 깊게 받아 들였다.

○ 성헌(省憲)에서 글을 올려 개성윤 조반(?)이 공전(公田)을 함부로 빼앗은 죄를 논핵하니, 왕이 이르기를, “내가 왕위에 오른 초기에 조반은 중국에 사신으로 갔으며, 더구나 윤이ㆍ이초의 무망(誣罔)을 변명하여 황제의 의심을 풀게 하였으니, 관직만 삭탈하고 죽림(竹林)으로 귀양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조반이 이윤ㆍ이초의 일을 고발하였으므로, 해당되는 사람들이 꺼리고 미워하여 헌사(憲司)를 사주하여 그를 중상한 것이다." 하였다.

○ 성헌에서 번갈아 글을 올려 다시 정도전을 논핵하기를, “도전은 가풍이 바르지 못하고 파계(派系)가 명백하지 못한데, 외람되게 높은 관직을 받고 조정에 섞여져 있으니, 고신과 녹권을 회수하고 그 죄를 밝게 다스리소서." 하니, 왕이 명하여 직첩과 녹권을 회수하고, 나주(羅州)로 옮겨 귀양보내고, 그 아들 진()과 담()도 모두 폐하여 서인으로 삼았다. 밀직 부사 남은(南誾)이 자기 힘으로 능히 구원하지 못하여 병을 핑계하고 사면(辭免)하였다.

○ 판군기시사 김구주(金久住)를 남경에 보내어 고자 20명을 바쳤다.

11월에 왕이 친히 적경원(積慶園)에 제사지냈다.

○ 권중화(權仲和)와 성석린(成石璘)을 삼사 좌사ㆍ삼사 우사로, 안익(安翊)을 판개성부사로, 조인경(趙仁瓊)을 밀직 부사로 삼았다. 중화가 정지와 함께 윤이ㆍ이초의 일에 연좌되어 죄를 얻었는데, 이때에 와서 모두 복직되었으니, 이는 우씨(禹氏 우현보(禹玄寶))를 벼슬시키려고 하는 조짐이었다.

○ 일본국 원요준이 사신을 보내왔다.

○ 이색과 이숭인을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 좌대언 이첨(李詹) 9가지 규계(規戒)를 바쳤는데,

"첫째, 덕을 육성하는 것입니다. 삼대(三代) 때에는 왕이 반드시 사()ㆍ부()ㆍ보()의 관직을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주관(周官)에 태사와 태부와 태보를 세우니, 이것이 삼공(三公)으로, '도를 논하고 나라를 다스리며 음양을 조화시킨다.' 하였으며 《역경》에, '실행을 과감하게 하며 덕을 육성한다.' 하였으며, '음식을 알맞게 먹고 언어를 조심한다.' 하였습니다. 일이 지극히 천근하면서도 관계되는 점이 지극히 중대한 것은 음식과 언어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몸에 있어서는 언어가 되고 천하에 있어서는 모든 명령과 정교가 임금의 몸에서 나오는 것이 모두 이것이니, 이를 조심하면 반드시 적당하여 실수가 없을 것입니다. 몸에 있어서는 음식이 되고, 천하에 있어서는 모든 재화와 자용(資用)으로 사람을 기르는 것이 모두 이것입니다. 이를 조절하면 적당하여 손상이 없을 것이니, 몸을 기르는 도로 미루어 덕을 육성하고, 천하 사람을 기르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후세에서는 일을 행하는 데 근본이 없으므로 나라의 다스려짐은 구할 줄 알면서도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을 줄 모르며, 임금의 과실을 간할 줄 알면서도 덕을 육성할 줄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이미 경연관으로 사()를 삼았으니, 마땅히 부()와 보()의 임무를 맡겨서 모든 궁중의 언동과 복식을 모두 경영관으로 하여금 이를 알게 하여 희롱하는 말과 지나친 거동은 때에 따라 간하고 일에 따라 경계하여 바로 잡는다면, 기질을 함양하고 덕성을 훈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기미[]란 것은 마음 움직임이 은미한 것으로, 선악이 이로 말미암아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인심의 은미한데서 움직이면 천리가 마땅히 발현되며, 인욕도 역시 그 사이에서 싹터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서경》에, '그 일의 기미를 살피며 그 일의 편안함을 살핀다.' 하였으며, , '하늘의 명을 삼갈진댄 때마다 삼가야 하고 기미마다 삼가야 한다.' 하였습니다. 《역경》에, '일을 행함에 반드시 그 시초에서 꾀한다.' 하였으며, '오직 기미를 살폈기 때문에 능히 천하의 일을 성취시킨다.' 하였습니다. 일에는 선후가 있는데, 생각이란 것은 일 처리하기를 정밀하고 상세하게 함을 이르는 것입니다. 사물이 닥쳐 올 때에 응접함이 있는데, 자기 혼자만이 아는 곳에 더욱 성찰을 더해야만, 일이 그 순서를 얻고 사물이 그 화함을 얻어 예악이 일어나고 귀신이 감동할 것이오며, 그렇지 못하면 이에 반대될 것입니다. '아아 생각하지 않으면 어찌 얻을 수 있으랴'는 말은 이윤(伊尹)이 태갑(太甲)에게 고한 말이요, '생각이 이치에 합하거든 행동할 것이다'라는 말은 부열(傅說)이 고종(高宗)에게 경계한 말입니다. 지금 소신이 진술한 말도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오니,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 이를 헤아리소서.

셋째는, 허물을 고치는 것입니다. 《역경》익괘(益卦)의 상전(象傳), '군자가 익괘를 체득하여 착한 일을 보면 그리로 옮겨 가고, 허물이 있으면 고친다.' 하였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가 허물이 없겠습니까마는, 허물이 있는데도 고칠 줄 안다면 착함이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옛날에 탕왕(湯王)은 허물 고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 하였습니다. 임금은 모든 백성들의 위에 처하여 한 나라의 영화를 누리고 있으므로 교만과 사치가 빨리 이르게 되며, 탕함이 쉽사리 오게 되니, 이것을 혹시라도 살피지 않는다면 반드시 과실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한마디 말을 하였는데 재상이 옳지 않다고 하면, 마땅히 이를 살펴서 자기몸을 굽혀서 이를 따라야 하는데, 만약 억지로 응하면서 말하기를 '잠깐 이와 같이 하나 일은 마침내 그렇지 않다' 라고 한다면 이는 허물 고치기를 주저하는 것이며, 한 가지 일을 행하였는데 성헌이 옳지 않다고 하면 마땅히 이를 살펴서 자기 의견을 버리고 이를 따라야 하는데, 만약 참고 견디며 따르면서 말하기를, '벌써 일을 하였으므로 이를 중지할 수 없다.' 한다면 이는 허물 고치기를 꺼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허물을 아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없으며, 허물을 고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없으니,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그 마음에 보존하는 바를 삼가셔야 할 뿐이옵니다.

넷째는, 근본을 힘쓰는 것입니다. 하늘은 만물의 근본이 되는데 만물 또한 각기 스스로 근본이 있으니, 한 몸을 논한다면 몸은 천하를 다스리는 근본이 되고, 오상(五常)을 논한다면 효제(孝悌)가 인을 행하는 근본이 되고, 천하의 국가를 다스리는 것을 논한다면 성()이 구경(九經)의 근본이 되며, 또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 되고, 농업은 백성을 기르는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유자(有子 공자의 제자), '군자는 근본을 힘쓸 것이니, 근본이 서야 도가 생긴다'는 말은 이를 이른 것입니다. 예는 사치에서 잘못되고 상()은 형식을 차리는 데서 잘못되니, 그 근본은 검소와 슬퍼하는 것일 뿐입니다. 인은 고식(姑息)에서 잘못으로 흐르고 효는 친압하고 설만히 하는 데서 무너지니, 그 근본은 사랑함과 공경함일 뿐입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 법을 세워 폐해를 제거하여 처음 정사를 폄에 의논을 올리는 자가 요역을 덜고 음사(淫祀)를 금할 것을 말하고, 3년상을 시행하여 신종(愼終)의 의를 돈독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나, 그 검소하고 슬퍼하는 풍속은 전혀 보지 못하였습니다.

지난번에 전하께서 죄수의 원통함이 풀리지 못한 것을 불쌍히 여겨 자주 관대한 은혜를 베풀었으며, 또 서울과 지방에 처음으로 가묘(家廟)를 설치하는 법을 만들어 조상을 추모하여 제사를 지내는 도를 권장하였으나, 그 사랑하고 공경하는 실상은 그래도 알 수 없습니다. 법제에는 이와 같은 것이 대체로 많은데 신이 적이 생각하여 얻은 것이 있습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부리는 것은 믿음이니, 그러므로 믿음이란 것은 임금의 아주 귀중한 보배입니다. 지금 국대비(國大妃)께서 아직 기력이 좋고 몸에 병이 없으니, 전하께서 진실로 능히 밤낮으로 문안하여 문왕(文王)의 효()를 행하고 이를 권장한다면 백성이 감화되어 부모를 공경할 것입니다. 평소에 전하께 바치는 물품을 알맞게 줄여서 명분이 없는 비용은 폐지하고 급하지 않은 일을 정지시킨다면 검소한 풍속이 일어날 것입니다. 적이 생각하건대, 효신전(孝愼殿)에 유상(遺像)이 엄연하며 영령이 좌우에 오르내리시는 듯하니, 이를 돌아보고 슬픔을 일으킨다면 슬퍼하는 교화가 행해질 것입니다. 검소하고 슬퍼하며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은 곧 예와 상()과 인과 효의 근본이요, ()은 검소와 슬픔과 사랑과 공경을 행하는 근본입니다. 그 법제가 다 행하지 못한 것은 마땅히 몸소 행하여 솔선하되, 견고함은 금석과 같이하고, 믿음은 사시와 같이하여, 근본을 돈독하게 하는 교화에 힘쓰고 말단을 억제하는 명령을 행한다면 사치한 풍속이 변하며, 박하고 거짓이 많은 풍속이 그치게 될 것입니다.

다섯째는, 자기를 겸양하는 것입니다. 천도는 가득 찬 것을 이지러지게 하고 겸양한 이를 보태 주며, 인도는 가득 찬 것을 미워하고 겸양을 좋하하기 때문에 성인이 괘()를 서열할 때에 대유(大有)의 뒤에 겸()으로 이어받게 하였습니다. 옛날의 명철한 임금은 자기 몸을 낮추어 스스로를 다스리고 겸허로써 사물을 받아들였으므로 높아도 위태하지 않으며, 가득히 차도 넘치지 않아서, 국운의 장구함을 이루었으니, 그렇지 않았다면 이와 반대가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말할 때마다 반드시 먼저 '내가 불민하며 더구나 글을 읽지 않고 일을 겪지 않았으니 어찌 이를 알겠는가.' 한 뒤에야 다른 말을 언급하십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것은 곧 자신을 밝게 알아서 자만하여 남에게 자랑하는 잘못이 없는 것이니, 사람들이 또한 누가 선으로써 즐겨 고하지 않겠습니까. 말 한마디로써 나라를 흥하게 할 수 있으며 이런 마음으로 왕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신이 아직도 기억하는 바 현릉(玄陵) 때에 정언(正言)이 되어 현릉에게 보평청(報平廳)에 친히 임하고, 사관을 가까이하시라고 소()를 갖추어 아뢰니, 이때 바야흐로, 토목공사를 일으켜 백성을 영전에 노역시키고 있었으므로 상소를 열어보지도 않고는 억측하여, '반드시 이 일일 것이다.' 하여 매우 노하다가, 열어보니 곧 다른 일이었으므로 도리어, '내가 틀림없이 천박한 선비의 천근한 말인 줄 알았다.'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마지 못하여 그 말을 따르기는 하였으나, 남의 심정을 미리 헤아려 그것이 들어맞지도 않았으며, 선한 말을 좋아하지 않고 스스로 만족하게 여기니, 이것이 곧 교만하고 인색한 마음입니다. 진실로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마음 가짐을 교만하지 마시며, 몸가짐을 겸손하시어 시종토록 변하지 않는다면 겸양하고 또 겸양하여 홀연히 자신도 모르게 도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여섯째는, 인을 베푸는 것입니다. 인을 베푸는 방법은 친척을 친히한 다음 백성을 사랑하며 백성을 사랑한 다음 만물을 사랑하는 것이니, 절로 차등이 있으므로 혼동하여 베풀어서는 안됩니다. 전하께서 항상 스스로, '나의 허물은 진실로 인자한 데 있다.' 하셨는데, 신은 생각하기를 이것은 진실로 천지가 만물을 생육하는 마음이며, 생민이 길이 믿고 사는 근본이니, 허물이 아닙니다. 다만 우유부단함과 과단한 것과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비유하건대, 인자는 길머리[路頭]이고 우유부단과 과단은 두 갈림길입니다. 인자한 데서 과단한 면으로 나가면 기미에 응하여 수작하여 일에 미혹이 없겠지마는, 우유부단한 면으로 들어가면 일에 임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여 마침내 거꾸로 행하고 역으로 베푸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인자한 아름다운 뜻이 있으니, 마땅히 일을 제어하는 의와 알맞게 조절하고 꾸미는 예와 시비를 분별하는 지를 겸해서 행하여 하루 동안이라도 많은 정무를 오직 과단으로서 성취한다면, 백성이 편안하고 물질이 풍성하여 태평한 세상을 열게 될 것입니다.

옛날에 요()는 큰 덕을 밝혀 구족을 친하고 백성을 고루 밝게 하여 이에 화()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인을 베푸는 순서인 것입니다. () 나라 선왕(宣王)은 덕택이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면서도, () 아래에 지나가는 소에게는 불쌍히 여겼으니, 이것은 곧 인()의 순서를 잃은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요를 본받고 제 나라의 선왕을 경계하며, 우유부단을 버리고 과단을 취한다면, 인을 베푸는 순서가 문란하지 않고, 인자의 길이 어긋나지 않으므로, 덕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일곱째는, ()로 견주는 것입니다. 신이 가만히 보건대, 전하께서 정관(貞觀)의 정치에 뜻이 있어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읽은 지도 지금 2년이나 되었습니다. 모든 물()은 반드시 그 유가 있으니 견주어 그와 같이하면 크게 서로 틀리는 것이 있지 않습니다. 간절히 생각하옵건대, 당 나라의 태종(太宗)이 돈황공(燉煌公)이 된 것은 곧 전하가 정창군(定昌君)이 된 때와 같으며, 정관 원년은 곧 전하가 즉위한 해와 같습니다. 태종이 옛날에 비하여 사형을 그 반수 이상이나 없앤 것은 곧 전하의 인자와 같으며 태종이 위로는 하늘을 두려워하고 아래로는 많은 신하를 두렵게 여긴 것은 곧 전하께서 자기를 겸손한 것과 같으며, 태종이 여러 학사를 불러들여 문적(文籍)을 강론한 것은 곧 전하의 경연과 같으며, 태종이 황충 두서너 마리를 입에 삼킨 것은 곧 전하께서 가뭄을 근심한 것과 같으며, 태종이 간하는 말을 즐겨 들은 것은 곧 전하께서 직언을 구한 것과 같습니다. 태종에게는 많은 신하들 중에서 마음과 힘을 다하여 아는 것을 행하지 않음이 없는 방현령(房玄齡)이 있으며, 유악(?)에서 계획을 세워 앉아서 사직을 편안하게 한 두여회(杜如晦)가 있었으며, 번거롭고 바쁜 사무를 처리한 대주(?)가 있었으며, 간하는 일로써 자기 임무를 삼은 것은 위징(魏徵)이 있었으며, 탁류(濁流)를 배제하고 청류를 들추어 올려 악을 원수처럼 미워한 왕규(王珪)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태종(太宗)이 무덕(武德) 이전부터 사방을 경략하여, 싸우면 이기고, 치면 빼앗은 것은 전하의 잠저 때와는 다르며, ()의 난을 제거하고 당실(唐室)을 창건한 것은 전하께서 왕씨로서 다시 일어난 것과는 다릅니다. 정관 연간에는 한해 동안에 사형을 판결한 것이 겨우 29명이었는데, 오늘날에는 형을 받은 사람이 많으며, 태종은 홍문관(弘文館)의 강론을 간혹 밤중까지 이르렀는데, 오늘날의 경연은 하다가 말다가 하니, 전하께서 자신을 겸양하는 것이 과연 하늘의 뜻과 백성의 바람에 합하지 못한 점으로 스스로 생각을 하십니까. 전하가 한재를 근심하시는 것이 과연 능히 태종이 황충을 삼킬 때 병이 되는 것도 생각하지 않은 것과 같겠습니까. 태종은 말년에 간하는 자가 자못 뜻을 거스린 적이 있었는데, 전하께서 직언을 구한다는 것도 과연 이와 같지 아니 합니까. 많은 신하 중에서 천리 밖에서 일을 진술하되, 대면하여 말하는 것과 같음이 과연 방현령과 같은 이가 있으며, 인의를 행하기를 권하여 여유 있게 효과를 거두었음이 과연 위징과 같은 이가 있으며, 왕이 싫어하는 안색을 하는데도 고집하여 간함이 과연 대주와 같은 이가 있으며, 한마디 말로서 왕을 감동시킴이 과연 왕규와 같은 이가 있습니까. 지금 이미 전하를 태종에 유를 견주어 이를 같이하여 보았는데, 그와 서로 다른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태종이 말년에 위징이 소를 올려 정관 초년에 비하여 점점 끝까지 잘하지 못한 것을 논한 것이 무릇 10조나 되었는데 오늘날은 곧 정관의 초년과 같으며, 오늘부터 그 이후는 점점 끝까지 잘하지 못하는 기미인 것입니다. 전하께서 스스로 생각하시면 태종과 누가 낫겠습니까. 태종과 같이 슬기롭고 총명한 왕에게 위징의 말이 이와 같이 간절하였는데, 신이 적이 위징에 견주오니, 전하께서 헤아리소서.

여덟째는, 정사를 밝히는 것입니다. 상벌은 나라의 큰 권병이니, 진실로 혹시 지나치는 점이 있으면 백성이 손발을 둘 곳이 없을 것입니다. 옛날의 명철한 임금은 조정에서 사람을 벼슬을 주거나 거리에서 사람을 형벌할 때에, 모두 여러 사람들과 같이 처리하였기 때문에 상을 받은 사람도 임금에게 감사히 여기지 않으며, 벌을 받은 사람도 윗사람을 원망하지 않았으니, 그 공과 죄가 적당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상은 '하늘이 명한다[天命]' 하며, 형은 '하늘이 토벌한다[天討]' 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선을 상 주고 악을 벌 주는 것이 다 천도의 무위(無爲)에서 나오지는 못하니, 까닭이 있어서입니까. 지금 사람들이 일의 크게 잘되고 잘못된 점이 없는 것을 이르기를, '이리도 할 수 있고 저리도 할 수 있다.' 하는데, 신은 적이 생각하기를, 이것은 심히 되지 못한 말이라고 여깁니다. 천하의 이치는 공과 사가 있을 뿐이며, 천하의 도는 선과 악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두 가지가 존재하여 서로 용납하지 못함이, 향기나는 풀[]이 악취나는 풀[?], 얼음이 숯불과 서로 반대되는 것과 같은데, 이를 같이 가리켜 공통으로 일컫는 것이 옳겠습니까. 사람을 의논하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아무개는 비록 어떠한 공이 있으니 상을 줄 만하다. 그러나 어떠한 죄가 있으므로 벌을 줄 만하다.'고 한다면 왕이 처리할 바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그 공이 경하고 죄는 중하면 이를 벌 주는 것이 옳을 것이며, 죄는 경하고 공이 중하면 이를 상 주는 것이 옳을 것이며, 공과 죄가 서로 비슷하면 그 아주 세밀하게 비교하여 이를 결단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선을 상 주고 악을 벌 줄 때를 당하여 마음에 두 가지 뜻이 없고, 과단만을 힘쓰려고 한다면, 이리도 할 수 있고 저리도 할 수 있다는 설을 어찌 족히 생각할 것이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 그 해되는 틈을 막고 그 이익되는 근본을 열며, 드러내고 벌을 주어 두렵게 하고, 드러내어 상을 주어 감화하게 하소서. 위엄이 서면 악한 자가 두려워할 것이며, 교화를 행하면 착한 자가 권장될 것입니다.

아홉째는, 왕업을 보전하는 것입니다. 국가란 것은 중한 기물이니 이를 얻기도 지극히 어려우며 지를 지키기도 매우 어려우므로, 요는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매우 조심하며 덕을 닦고 인을 행하여, 선왕의 업을 보전할 뿐입니다. 왕업을 보전하는 방법은 다른 것이 없고 큰 집을 지키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사람들이 큰 집이 있어서 자손에게 이를 물려주어 무궁한 규모를 삼으려고 하면, 반드시 그 집의 터를 견고하게 하고, 그 기둥과 초석을 튼튼하게 하며, 그 동량을 강하게 하고 그 지붕을 두텁게 하며, 그 담을 높게 하고, 그 문의 빗장과 열쇠를 엄밀하게 할 것이며, 이미 이루어진 뒤에는 또 어진 자손을 가려서 조심하여 지키게 하고, 날마다 살피고 달마다 돌보게 하여 기울어진 것은 붙들어 일으키고, 해진 것은 보수하게 할 것이니, 이와 같이하면 비록 천백년이 되더라도 무너지거나 파손됨이 없을 것입니다. 백성은 나라의 집터와 같고, 예법은 기둥이나 초석과 같으며, 대신은 동량과 같고, 모든 관리는 지붕과 같고, 장수는 담과 같으며, 군대는 문의 빗장과 열쇠와 같으니, 6가지는 조석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임금이 조종께서 완성한 법을 삼가고 지켜서 진실로 안일과 욕심으로 무너뜨리지 않고 참소와 아첨으로 실패시키지 않는다면 대대로 서로 계승하여서 끝나는 기한이 없을 것이지만 안락을 일삼아 무너뜨리고 참소와 아첨을 받아들여 실패시킨다면 신이 노하고 백성이 원망하여 마침내 전복하여 떨쳐 일어나지를 못하는 데에 이를 것입니다.

신이 감히 멀리 옛날 일을 인증하지는 못하오나, 위조(僞朝)의 일로써 말해 보겠습니다. 위신(僞辛 우())이 시기하고 광포(狂暴)한 자질로 우리의 중기(重器)를 도적질하여 법도에 어긋난 일을 마음대로 행하였으며, 또 힘을 헤아리지 않고 명분이 없는 군사를 내어 대국과 틈이 생기게 하여 죄악이 쌓여서 멸망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지난번에 위신으로 하여금 삼가 조심하고 자기 몸을 공손히 가지고 법도를 삼가 지켜서 대신(大臣 이성계(李成桂))에게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이키는 힘과 왕씨를 새로 세우는 계책을 정하는 공을 이룰 여유를 주지 않았더라면 천명을 알 수 없으며, 전하의 오늘날도 역시 기약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서경》에, '() 나라가 거울로 삼아 경계할 일은 먼 세대에 있지 않고, () 나라의 세대에 있다.' 하였으니,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태조(太祖)의 성헌(成憲)을 준수하고 위조(僞朝)의 실패한 전철을 경계하시어, 중흥의 업을 보전하소서." 하였다.

12월에 사헌부에서 한양 부윤 유원정(柳爰廷)이 그 아들을 중매하여 스스로 장가들고, 또 남경에 사신으로 가서 매매를 멋대로 행한 일을 탄핵하여, 관직을 삭탈하고 귀양보냈다, 원정은 본디 아들이 없는 사람이었다.

○ 전 목사 조중생(曹仲生)을 남경에 보내어 말 1천 필을 바쳤다.

○ 황제가 환자 강완자독(康完者篤) 등을 보내와서 조서를 내렸는데, 그 조서에, “삼한의 땅에 왕과 신하가 패란한 행동을 한 지가 지금 20여 년이 되었다. 다행히 성야(城野)를 빼앗는 싸움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시정과 향리에서 편안히 살고 있었다. 지난해에 와서 고하기를, '왕씨의 후손이 이 백성에게 왕노릇한다' 하므로, 지금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가서 위로하고, 그 정치하는 것이 어떠한가를 보게 한다." 하고 이어서 저사(紵絲)와 능견(綾絹) 2백 필을 하사하니, 왕이 재상에게 차등 있게 나누어 주었다.

○ 이색을 한산부원군으로, 우현보를 단산부원군으로, 한천(?)을 판개성부사로, 강회백(姜淮伯)을 정당문학 겸 대사헌으로, 윤취(尹就)를 지밀직사사로, 안경공(安景恭)을 예문관 제학으로, 우홍수(禹洪壽)를 동지밀직사사로, 성석용(成石瑢)을 밀직사사로 삼고, 우리 태조와 심덕부ㆍ정몽주에게 안사공신(安社功臣)의 칭호를 더 내려주고, 설장수(?長壽)ㆍ조준(趙浚)ㆍ성덕린(成德璘)에게 정난공신(定難功臣)의 칭호를 내려 주었다.

○ 귀양간 정도전의 죄를 감등하여 봉화(奉化)로 옮겼다.

○ 이해에 의주(宜州)에서 말라 죽은 큰 나무가 다시 살아나니, 이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 태조가 나라를 세울 징조이다." 하였다.

 

 

[D-001]소뢰(小牢) : 제사(祭祀)에 희생(犧牲)을 씀에 세 가지 차등이 있으니, 태뢰(大牢)는 소·양·돼지를 갖추어 쓰는 것인데, 이것은 제후(諸侯)의 제사에 쓰며, 소뢰(小牢)는 양만을 쓰는 것인데, 대부(大夫)의 제사에 쓴다.

[D-002]()의……하였으니 : 춘추 시대에, 송 나라에 형혹성이 나타났는데, 천문을 맡은 이가 말하기를, “이것이 임금에게 재앙이 미치는 것인데 신하에게 옮길 수 있습니다." 하니, 경공(景公), “어떻게 신 하에게 옮길 수 있는가." 하니, “그러면 백성에게 옮기소서." 하였다. 경공이, “어찌 백성에게 옮길 수 있는가. 내 몸이 재앙을 당하겠다." 하였더니, 그날 밤에 형혹성이 삼사(三舍)에 물러갔다. 이것은 경공의 착한 말 한 마디로 형혹성이 물러났다는 것이다.

[D-003]실봉(實封) : 임금에게 소()를 올리되, 비밀히 봉하여 중간을 거치지 않고 임금에게 직접 들어가는 것이다.

[D-004]성왕(成王)은……불었으니 : () 나라 성왕(成王)이 유언(流言)을 듣고 주공(周公)을 의심하여 내쫓은 뒤에, 천둥과 큰바람이 불고 비가 와서 나무를 뽑고 벼를 쓰러뜨렸다.

[D-005]정거전(淨居殿)에서……것 : 양 무제(梁武帝)가 말년에 역적 후경(侯景)에게 감금되어 죽을 때에, 입이 타서 꿀을 찾았으나 얻지 못하고, “가가(呵呵)" 하고 죽었는데, 이는 목이 말라 갈라져 나오는 소리이다.

[D-006]() : 홍수를 다스려 백성을 구제한 큰 공이 있었다.

[D-007]어리석은 생각 : 옛말에, “어리석은 자도 천 번 생각하면 한 가지 얻는 것이 있다." 하였다.

[D-008]오왕(五王) : 당나라 때에 중종(中宗)을 복위시킨 공신 장간지(張柬之)·적인걸(狄仁傑) 5명을 왕으로 봉하였다.

[D-009]주상께서……것이라 : 이것은 한 나라 급암(?)이 무제(武帝)에게 한 말이다.

[D-010]관숙(管叔)은……당하고 : 주 무왕(周武王)이 죽은 뒤에 성왕(成王)이 어리므로 그의 숙부인 주공(周公)이 섭정하였더니, 주공의 형제인 관숙(管叔)·채숙(蔡叔)이 유언(流言)을 퍼뜨려 주공을 모해하고 반란을 일으키므로, 주공이 토벌하여 그들을 잡아죽였다.

[D-011]상관안(上官安)은……멸족되었으니 : 한 나라 소제(昭帝)가 어리므로 곽광(?)이 섭정하였더니, 그의 사위 상관안(上官安)이 권력을 다투어 곽광을 제거하고자 하여, 연왕(燕王)이 단()과 공모해서 반역을 도모하다가 패하였다.

[D-012]소소(簫韶) : ()의 음악인데, 9곡조를 연주하니 봉황새가 와서 춤을 추었다 한다.

[D-013]삼도(三途) : 지옥도(地獄途)·아귀도(餓鬼途)·축생도(畜生途)이다.

[D-014]육도(六道) : 삼도(三途)를 다시 삼악도(三惡道)라 하고, 천당(天堂)·인간(人間)·아수라(阿修羅)를 삼선도(三善途)라 하는데, 이것들을 모두 육도(六道)라 한다.

[D-015]어느……되었다 : 태조의 아홉 번 전생(前生)의 일을 안다고 꾸며 낸 것이다.

[D-016]정관정요(貞觀政要) : 정관(貞觀)은 당 태종(唐太宗)의 연호인데, 당시의 어진 정치를 뽑아서 기록한 책이다.

[D-017]구경(九經) : 《중용》에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데에 9가지의 떳떳한 것[九經]이 있으니, 수신(修身)·존현(尊賢)·친친(親親)·경대신(敬大臣) 등이다.

[D-018]신종(愼終) : 부모가 마지막 가실 때에, 초상(初喪)과 장사(葬事)를 공경하고 조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D-019]슬픔을……슬퍼하는 : 《논어》에, “예()는 사치한 것보다는 차라리 검소한 것이며, 상사(喪事)는 형식을 차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슬퍼하는 것이다." 하였다.

[D-020]대유(大有) : 《주역》의 대유괘(大有卦)는 임금이 높은 위()에 있는 상()이며, 겸괘(謙卦)는 겸손하여 자기의 몸을 낮추는 상이다.

[D-021]말……있습니다 : 맹자가, () 나라 선왕(宣王)이 백정에게 끌려서 죽으러 가는 소를 보고 불쌍히 여겨 그 소를 잡지 말라고 한 사실을 들어 왕에게 말하기를, “이 마음이 왕노릇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D-022]태종이……것 : 당 태종(唐太宗) 때에 황충(蝗蟲)이 생겨서 백성의 곡식을 해롭게 하므로, 태종이 황충 몇 마리를 입으로 삼키면서, 신하들이 병이 들 것이니 먹지 말라고 말리는 것을 듣지 않았다.

[D-023]천도의 무위(無爲) : 천도(天道)는 하는 흔적이 없이 만물을 생양(生養)시키는데, 이것을 무위(無爲)라 한다.

[D-024]()……있다 : ()의 걸()이 무도(無道)하므로 은()의 탕왕(湯王)이 쳐서 멸하였는데, 은 나라에서 하를 거울삼아 무도하면 망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고려사절요 제35   

 

 

 공양왕 2(恭讓王二)

 

 

임신 4(1392), 대명 홍무 25 

 

 

○ 봄 정월에 조사(詔使)에게 수창군에서 잔치를 베풀어 대접하였는데, 밀직사 이염(李 恬)을 순군옥에 가두었다. 이보다 앞서 팔관회(八關會)에서 중방(重房)에서 밀직사에 예를 하지 않아 마침내 틈이 생겨 서로 글을 올려 다투었으나, 왕이 그 글을 모두 궁중에 두고 내려보내지 않으니, 이염이 깊이 원한을 품었다. 이때에 와서 왕이 연회를 파하고 내전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이염이 술에 취한 김에 왕의 앞에 꿇어앉아 왕의 옷자락을 당기면서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정창군(定昌君)으로 있을 때를 생각하지 않습니까. 나라 일이 장차 날로 그릇되어 가는데 어찌하여 아이들의 말만 믿고 대신의 글을 경시하는 것입니까." 하며, 드디어 모자를 벗어 땅에 던지면서, “왕에게 이 모자를 돌려 드립니다." 하니, 왕이 더욱 노하여 모자를 발로 차서 부수고 성난 목소리로, “이염이 주정을 부리기를 이럴 수 있느냐." 하면서, 드디어 옥에 가두었다. 이염이 순군 만호 유만수(柳曼殊)에게 이르기를, “네가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으면서 효도하지 않고, 우애하지 않았다는 평판을 받았으므로 대성에서 두 번이나 너를 논핵하였는데, 어찌 나를 죄줄 수 있겠느냐, 내가 거리낌 없이 간한 것은 죄가 아니며, 또한 주정을 부린 것도 아니다." 하니, 만수(曼殊)가 부끄러워하면서 머리를 숙였다. 조금 후에 만호 배극렴(裵克廉) 등이 오니 이염이 그를 맞아 말하기를, “만수가 거의 나를 죽일 뻔하였는데, 지금 공들을 보니 내가 살게 되었다." 하였다. 드디어 국문하니 이염이 여전히 말하기를, “왕에게 간하는 예는 마땅히 이와 같이 하는 것이다." 하였다. 극렴 등이 왕에게 아뢰기를, “이염이 실상 주정을 부렸던 것입니다." 하니, 왕이 노하여 천호 김귀련(金龜聯)과 제강(提控) 정지탁(鄭之度)을 가두고, 극렴ㆍ만수 등의 만호직을 파면하고, 이어서 찬성사 조준(趙浚)ㆍ판개성부사 안익(安翊), 예문관 대제학 유구(?), 지문하 김사형(金士衡)을 이에 대신하게 하고 성헌에 명하여 순군부와 함께 같이 국문하게 하였다.

○ 왕안덕(王安德)ㆍ우인열(禹仁烈)ㆍ박위(?)를 사면하여 편리한 대로 거주하게 하고, 박가흥(朴可興)ㆍ지용기(池湧奇)에게는 외방에서 편리한 대로 있게 하였다.

○ 간관이 소를 올려, 이염의 불경한 죄를 논핵하고, 극형에 처하기를 청하니, 우리 태조가 아뢰기를, “이염이 실상 죄가 있지마는 그러나 그 말이 광망하고 곧은 데서 나왔으니,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왕이 이염을 곤장 1백 대를 치게 하고, 합포(合浦)로 귀양보냈다. ○ 사헌부에서 유만수(柳曼殊)가 어머니를 모셔 봉양하지 않았으며, 여러 아우들의 전지를 빼앗은 일을 논핵하여 그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사헌부에서 다시 논핵하니, 응양군 상호군(鷹揚軍上護軍)의 관직만 삭탈하였다.

○ 삭방도에 진명창(鎭溟倉)을 새로 설치하였다.

○ 유만수를 판개성부사로, 권중화(權仲和)를 문하찬성사로, 조준(趙浚)을 삼사 좌사로, 안익(安翊)을 문하평리로, 박원(朴遠)을 밀직사로, 이숭인(李崇仁)을 지밀직사사로, 김수익(金受益)을 동지밀직사사로 삼았다.

○ 처음으로 서적원(書籍院)을 설치하여 주자(鑄字)와 서적의 인쇄를 관장하게 하였다.

2월에 인물추변도감(人物推辨都監)에서 노비결송법(奴婢決訟法)을 정하였다.

○ 해온정(?)을 지었다.

○ 영복군(永福君) (?)과 찬성사 권중화를 남경에 보내어 은혜를 사례하였다.

○ 예조에서 아뢰기를, “조회 때마다 예를 마치면 전하께서 전(殿)에 앉아 계신데도 백관이 먼저 나가니 예가 아닙니다. 청컨대, 지금부터는 예를 마치고 전하께서 일어나 내전으로 들어가시면 군신들은 몸을 굽히고 공손히 보내고 난 후에 차례로 나가도록 할 것이며, 또 전하가 보평청(報平廳)에 나가 계시고 형관이 친히 아뢰어 옥사를 결단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병자일에 혜성이 나타나서 하늘에 뻗쳐 있었다.

○ 올량합(兀良哈)과 알도리(斡都里)가 와서 조회하는데 서로 윗자리를 다투었다. 알도리가 말하기를, “우리들이 온 것은 윗자리를 다투려는 것은 아닙니다. 옛날에 시중 윤관(尹瓘)이 우리 땅을 평정하고, ()를 세워, '고려의 땅[高麗地境]이다.'라고 썼습니다. 지금 경내의 인민이 모든 군사(軍事 관직)의 위신을 사모하여 왔을 뿐입니다." 하며, 드디어 서로 다투지 않았다. 태조가 올량합과 알도리를 자기 집에서 대접하였으니, 그들이 성심으로 봉종하였기 때문이다. 알도리는 곧 동여진이다.

○ 왜적이 경상도 구라도(仇羅島)에 침범하니, 구라도 만호 이흥인(李興仁)이 이를 쳐서 깨뜨리고 전함을 빼앗아 바쳤다. 20석을 내려 주었다.

3월에 통사(通事) 이현(李玄)이 남경으로부터 돌아와서 세자가 돌아옴을 보고하니, 왕이 기뻐하여 물품을 많이 내려 주었다. 우리 태조가 세자를 황주(黃州)까지 나가서 맞이하고 드디어 해주(海州)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병이 위독하였다. 왕이 연달아 중사(中使 환관(宦官))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는데, 정몽주만이 이성계가 낙상한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기색이 있었다.

○ 알도리와 올량합 등 여러 추장에게 모두 만호ㆍ천호ㆍ백호의 관직을 차등 있게 주고 의복과 마필을 내려 주었다. 또 여러 부락에 방을 써 붙여 불러서 위로하였다.

○ 경상도의 수군 만호 차준(車俊)이 왜적의 배 1척을 빼앗아 바치니, 왕이 비단을 내려 주었다.

○ 을사일에 왕세자가 남경에서 돌아오니, 도당에서는 금교(金郊)에서 맞이하고, 백관은 반열을 지어 선의문(宣義門) 밖에서 맞이하였다. 황제가 특별히 은총이 두터운 대우를 하여 세자를 공후(公侯)의 다음에 서열시키고, 내전에서 잔치를 베풀어 준 것이 모두 5번이나 되었다. 또 천관(千官)에게 명하여 날마다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게 하고, 황금 2()ㆍ백금 10, 옷의 겉감과 안감 백 필을 내려 주고, 시종한 관원에게도 은과 비단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 황제가 그전 원 나라 양왕(梁王)의 자손 애안 첩목아(愛顔帖木兒) 등을 탐라에 두었다.

○ 여름 4월에 간관 김진양(金震陽)ㆍ이확(李擴)ㆍ이내(李來)ㆍ이감(李敢)ㆍ권홍(權弘)ㆍ유기(柳沂) 등이 삼사 좌사 조준, 전 정당문학 정도전, 전 밀직 부사 남은(南誾), 전 판서 윤소종(尹紹宗), 전 판사 남재(南在), 청주 목사 조박(趙璞) 등을 논핵하기를, “정도전은 미천한 신분으로서 몸을 일으켜 당사(堂司)에 자리를 차지하였으므로, 미천한 근본을 덮고자 본주(本主)를 제거하려고 하는데, 홀로 일을 할 수 없으므로 참소로 죄를 얽어 만들어 많은 사람을 연좌시켰습니다, 또 조준은 한두 사람의 재상 사이에서 우연히 원수와 틈을 일으켜 도전과 함께 마음을 같이하여 서로 변란을 선동하고, 권세를 희롱하여 여러 사람을 꾀고 협박하니, 이에 벼슬을 잃을까 걱정하는 염치없는 무리와 그 뜻에 영합하여 일을 일으키려는 무리들이 호응하여 일어났습니다. 그 중에 남은ㆍ남재 등은 난을 선동하는 보좌가 되고, 운소종ㆍ조박 등은 말을 꾸며 내는 앞잡이가 되어, 서로 부르고 화답하여 죄의 그물을 널리 펼쳐서 형벌을 해서는 안 되는 사람에게 형벌을 쓰고, 본래 죄가 없는 일에서 죄를 구하니, 여러 사람의 마음이 두려워하여 모두 원망하며 탄식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천지의 만물을 낳고 낳는 화기를 상하게 하고, 둘째는 전하의 상하기를 꺼리는 덕을 손상시켰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조준이 공신이므로 비록 죄가 있더라도 마땅히 용서해야 된다.' 하신다면, 신등은 또 적이 듣건대 지난해 무진년에 개국백(開國伯 이성계(李成桂))이 전하를 세우려는 마음은 이미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이키던 날에 있었는데 조준은 군중에 있지 않았으니, 그가 그 의논에 참여하지 않았음이 또한 명백합니다. 기사년 겨울에 와서 개국백이 전하를 세우려는 계책이 이미 정하여졌는데, 조준은 이를 물리치고 다른 사람을 말하였으나, 개국백이 이를 허락하지 않은 덕택으로 전하께서 왕위에 설 수 있었습니다. 이를 가지고 논한다면 전에는 처음 의논하는 날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후에는 이미 결정된 계책을 저지시키고자 하였으니, 이를 전하의 공신이라고 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조준이 만약 '내가 일찍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한다면, 왕의 곁에 있는 여러 재상이 이 말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하늘이 높지마는 이 낮은 곳의 말을 두려울 만큼 환하게 들었을 것이니,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조준과 같은 자는 그 말이 저와 같으니 그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신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실로 크게 불충한 신하가 되는 것입니다.

권세 있는 연줄을 타서 요행을 구하여 도리어 공신의 이름을 얻어 공신의 반렬에 참가하여 화상을 그려 빛나게 전한 것이 큰 공신과 다름이 없으며, 품계를 뛰어 관직을 받은 것이 참 공신보다도 십배나 되니, 영화가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일찍이 허물을 뉘우치고 선으로 옮겨 죄를 가릴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다시 몰래 보좌가 되고 앞잡이가 되는 무리들과 함께 모여서 무시로 모의하니, 신등은 그들이 반드시 도모함을 이루지 못한 원한을 품고 불충한 의논을 만들어 낼까 매우 두려우니, 일찍 이를 도모하여 그 세력이 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신등이 또 듣건대, 조준이 전하의 앞에서는 거짓으로 울고 슬퍼하여 겉으로는 고치고 뉘우치는 형상을 보이고, 속으로는 죄를 용서받을 계책을 부리니, 이것은 곧 거짓으로 뉘우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천성이 정직하여 사실로 인정하시니 신은 그것을 몹시 한 합니다. 조준이 간사한 계책을 한창 부릴 처음에 하늘이 그 마음을 달래어 드디어 그전의 그른 것을 깨닫고 뉘우쳤더라면 이와 같은 것은 그 뉘우침이 진실로 참된 것이겠지마는, 지금에 와서는 그 악한 짓을 같이하고 서로 주창하고 화답한 무리들이 거의 기세가 꺾였으나, 여러 사람의 노여움과 의심이 극도에 달하였으니, 제가 어찌 이와 같이 않고서 그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실로 마지못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니 거짓으로 뉘우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만약 훗날에 다행이 다시 기회를 타서 세력을 얻게 된다면 그들이 변고를 일으킴이 전보다 심할 것은 필연적이오니,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이들을 믿지 말고 일찍 도모함이 옳을 것입니다.

또 신등이 듣건대, 남은(南誾)이 일찍이 전하에게 아뢰면서, '전하께서 속으로는 욕심이 많으면서도 겉으로는 인의를 베풉니다.' 하였다 하오니, 이 말이 웬말입니까. 더구나 남은은 국가에 별로 특수한 공도 없이 갑자기 재상에 올랐습니다. 전하의 은혜가 컸는데도 이에 조준과 정도전의 마음에 영합하는 것을 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일찍이 감사하게 여기고 만족한 줄을 아는 마음이 없고, 감히 전하를 경멸하고 모욕하는 불경한 말을 내게 되니, 왕의 뜻을 격발시켜 정도전에게 붙어서 그 욕심을 부리려는 것입니다. 그 간악하게 마음을 쓰는 것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두려워할 만합니다.

이 사람들은 그 죄가 같으니 전하께서 만약 고식적으로 하고 이를 결단하지 않으시면 하늘이 노하고 백성이 원망할 뿐만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맡은 관사로 하여금 조준과 남은ㆍ남재ㆍ윤소종ㆍ조박 등의 직첩과 공신의 녹권을 회수하고, 그 죄를 국문하여 형벌을 밝게 다스리고, 도전은 귀양간 곳에서 처단하여 뒷 사람을 경계할 것입니다." 하였다.

소가 올라가서 지신사 이첨(李詹)이 왕에게 아뢰니, 왕이 아룀에 의거하여 조준은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고, 남은ㆍ윤소종ㆍ남재ㆍ조박의 관직을 삭탈하고, 또한 먼 지방으로 귀양보냈다. 도전 또한 유배 중에 있었으나 이첨이 잊고 기록하지 않았다. 진양 등이 아뢴 대로 한다는 왕의 명령에 의거하여 사람을 봉화(奉化)로 보내어 도전을 잡아서 보주(甫州)에 가두었다.

○ 사헌부에서 판전교시사 오사충(吳思忠)을 탄핵하여, “죄가 윤소종과 같으니 함께 문초하여 다스리기를 바랍니다." 하므로, 명하여 관직을 삭탈하고, 먼 곳으로 귀양보내게 하였다.

문하성의 낭사(郞舍)에서 또 소를 올려 아뢰기를. "조준 등은 정도전과 그 죄가 같은데, 어제 글을 올려 베기를 청하였으나 오직 도전만 특별히 승낙을 받았을 뿐이며, 나머지 사람은 다만 외방으로 폄출(貶黜)되기만 했으니, 죄는 같은데 벌은 다릅니다. 청하건대, 조준 등을 모두 극형에 처하소서." 하였다. 왕이 몹시 놀라며 이르기를, “내가 처음에 도전을 베라는 말이 없었다." 하면서, 양광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먼저 남은 등 여러 사람을 국문하여 그 진술한 말이 조준과 정도전에게 관련이 있으면 그 뒤에 도전을 아울러 국문하도록 하였다.

○ 우리 태조가 해주로부터 벽란도(碧瀾渡)에 이르러 유숙하려 하니, 태종(太宗)이 달려가서 고하기를, “정몽주가 반드시 우리 집안을 해칠 것입니다." 하였으나, 태조는 답하지 않았다. , “이곳에 유숙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태조는 허락하지 않다가, 굳이 청한 뒤에야 병든 몸을 억지로 참고 드디어 견여(肩輿)를 타고 밤에 사저로 돌아왔다.

○ 성헌(省憲)에서 번갈아 글을 올려 또 조준ㆍ정도전 등을 목 베기를 청하였다. 이때 몽주가 우리 태조의 위엄과 덕이 날로 성하여 조정과 민간에서 마음을 그리로 돌리는 것을 꺼렸는데, 조준ㆍ정도전ㆍ남은 등이 비로소 태조를 추대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을 알고는 태조의 병이 위독한 것을 이용하여 도모하고자 하였다. 대간을 사주하여 조준ㆍ정도전ㆍ남은과 평소에 태조에게 마음을 돌린 자 5, 6명을 탄핵하여 이를 죽이고 태조에게까지 미치게 하려 하였다. 태종이 태조에게 아뢰기를, “형세가 이미 위급합니다. 장차 어찌하려 하십니까." 하니, 태조는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있으니, 마땅히 천명을 따라서 받아들일 뿐이다." 하였다. 태종은 태조의 아우 화()의 사위 이제(李濟) 등과 함께 휘하의 군사에게 의논하기를, “이씨가 왕실에 충성한 것은 나라 사람들이 아는 바인데, 이제 몽주에게 무함되어 악평을 받게 되었으니, 뒷세상에서 누가 능히 이를 분별하겠는가." 하면서, 이에 몽주를 제거할 것을 도모하였다. 태조의 형 원계(元桂)의 사위인 변중량(卞仲良)이 그 계획을 몽주에게 누설하니, 몽주가 태조의 사저에 나아가서 사태를 살피고자 하였는데, 태조는 그를 대하기를 전과 같이하였다. 태종이,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 하고 몽주가 돌아감에 미쳐서 곧 조영규(趙英珪) 4,5명을 보내어 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쳐서 죽였다.

태종이 또 화() 등과 의논하여 공정왕(恭靖王 정종(定宗))을 보내어 아뢰기를, “만약 몽주의 당을 신문하지 않으면 신등을 죄주기를 청합니다." 하니, 왕이 마지못하여 대간을 순군옥에 가두고, 또 이르기를, “외방으로 귀양보냄이 옳을 것이며, 국문할 필요는 없다." 하다가, 조금 후에 판삼사사 배극렴과 문하평리 김주(金湊)에게 명하여 순군 제조관 김사형(金士衡) 등과 함께 국문하게 하였다. 좌상시 김진양(金震陽)이 말하기를, “몽주ㆍ이색ㆍ우현보가 이숭인ㆍ이종학(李種學)ㆍ조호(趙瑚)를 보내어 신등에게 말하기를, '이 판문하(李判門下 이성계)가 공을 믿고 권력을 마음대로 하는데 지금 말에서 떨어져 병이 위독하니, 마땅히 먼저 그를 보좌하는 조준 등을 제거한 후에야 도모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이숭인ㆍ이종학ㆍ조호를 순군옥에 가두었다. 조금 후에 진양과 우상시 이확(李擴), 우간의 이래(李來), 좌헌납 이감(李敢), 우헌납 권홍(權弘), 집의 정희(鄭熙), 장령 김묘(金畝)ㆍ서견(徐甄), 지평 이작(李作)ㆍ이신(李申)과 이숭인ㆍ이종학을 먼 지방으로 귀양보냈다. 율문(律文)을 대조한 법관이 말하기를, “진양 등은 죄가 참수형에 해당합니다."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살인을 즐기지 않은 지가 오래이고, 진양 등은 몽주의 사주를 받았을 뿐이니, 어찌 함부로 형벌을 쓰겠는가." 하니, 관이, “그러면 엄하게 곤장을 치소서."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이미 그들을 용서하였으니 어찌 곤장을 칠 필요가 있느냐." 하였다. 진양 등이 이로 말미암아 면하게 되었다. 대사헌 강회백(姜淮伯)은 회계(淮季)의 형인 관계로써 연좌되지 않았으며, 우정언 유기(柳沂)도 또한 병으로써 면하였다.

○ 조준 등을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 백극렴을 수문하시중으로, 조준을 찬성사로, 설장수(?長壽)를 판삼사사로, 이원굉(李元紘)을 삼사 좌사로, 김사형(金士衡)을 삼사 우사로 삼고, 이두란(李豆蘭)을 지문하부사로, 우리 공정왕(恭靖王)을 판밀직사사로, 조규(趙珪)를 밀직부사로, 윤사덕(尹師德)을 지밀직사사로 삼고, 민개(閔開)는 대사헌을 겸하게 하였다.

○ 몽주의 머리를 베어 거리에 달고 방문을 붙였는데, 그 방문에, “없는 일을 꾸며서 대간을 꾀어 대신을 모해하고 국가를 요란시켰다." 하였다. 몽주는 본관이 영일현이다. 사람됨이 뛰어나게 호탕하고 고매하며 충효의 큰 절개가 있었다. 젊을 때에 학문을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았으며, 성리(性理)의 학문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깊이 깨달은 바가 있었으며, 강설이 높이 드러나 다른 사람의 의사보다 뛰어났다. 우리 태조가 평소에 그 재기(才器)를 존중하여 정벌할 때마다 반드시 그와 함께 같이 갔으며, 여러 번 천거하여 함께 올라 재상이 되었다. 이때 국가에 사고가 많아 기무가 번거롭고 많았는데, 몽주는 큰 일을 처리하고 큰 의심을 결단하는 데 말소리와 얼굴 빛을 움직이지도 않고 이것저것 바로바로 처리하되 모두 그 적당함을 얻어 베풀어 놓은 것이 많았으니, 당시에 왕천하(王天下)를 보좌할 만한 재주라고 일컬어졌다.

○ 지신사 이첨(李詹)을 결성(結城)으로 귀양보내고, 우부대언 이사영(李士穎)을 남원(南原)으로 귀양보냈다.

○ 문하시중 심덕부와 수시중 배극렴이 여러 도의 관찰사를 폐지하고 안렴사를 회복할 것이며, 절제사와 경력 도사를 폐지하고 장무녹사(掌務錄事)를 회복하기를 청하였다. 또 새로 정한 감무, 여러 역승, 여러 도()의 유학 교수, 관자섬저화고(官資贍楮貨庫), 인물추쇄도감, 동서체운소(東西遞運所), 수참(水站)과 호구성적(戶口成籍), 우마낙인(牛馬烙印), 주군향사이장(州郡鄕社里長) 등의 법을 폐지하고, 또 각 관사로 하여금 모든 결재를 받을 일들은 모두 도당으로 바로 보고하고 6조에 예속시키지 말도록 하였다.

○ 이색을 한주(韓州 충남 서천)로 내쫓았다.

○ 우리 태조의 휘하 군관이 소를 올려 정몽주의 가산을 적몰하고, 아울러 그 당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니, 그 말을 따랐다. 이숭인ㆍ조호ㆍ이종학ㆍ이종선ㆍ김진양ㆍ이확을 폐하여 서인으로 삼았다.

○ 심덕부를 판문하부사로, 우리 태조를 문하시중으로, 이원굉(李元紘)을 정당문학으로, 정희계(鄭熙啓)를 판개성부사로, 최을의(崔乙義)를 밀직사로, 이빈(李彬)ㆍ장사길(長思吉)ㆍ김인찬(金仁贊)을 동지밀직사사로, 우리 태종(太宗)을 밀직 제학으로 삼았다.

○ 군관의 3년상을 없앴다.

5월에 우리 태조가 사직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 김권(?)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태조가 또 글을 올려 사직했다.

○ 급전도감을 폐지하고 그 업무를 호조로 돌렸다.

○ 사헌부에서 소를 올리기를, “개국백(開國伯) (李 태조의 전 이름)는 마음가짐이 성실하고 정직하며, 난을 당하여 피하지 않아서 무진년 여름에는 대의를 주창하여 군사를 돌이켜서 사직을 편안하게 하였으며, 기사년 겨울에는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계책을 정해서 왕실을 회복하여 공렬이 매우 높으니, 영원한 세대까지 잊을 수 없습니다. 찬성사 조준은 성품이 본래 강직하여, 착한 사람을 좋아하고 악한 사람을 미워하며, 나라만 위하고 자기 집은 잊으며, 일에 당하여 절의를 다하였습니다. 개국백이 새로이 왕을 세울 계책을 정할 즈음에 조준이 대의를 분발하여 이 일을 도와 전하를 세웠으니, 공이 한 시대에 높으며 영원히 잊기 어렵습니다. 이들은 모두 오직 성심으로 왕을 받들고 공리는 헤아리지 않으며, 어진 사람을 천거하고 불초한 사람을 물리쳐서 구폐를 일체 개혁하였으며, 삼한을 바로잡아 한결같은 마음으로 왕을 보좌하였습니다. 정몽주는 본래 용렬한 사람인데 개국백이 그를 옛일에 통달한 서생이라 하여 여러 번 천거해서 자기의 관직을 대신하게 하였습니다. 몽주는 부귀를 탐내고 뇌물을 받아들였으며, 강직하여 자기 뜻을 거스리는 사람은 일체 모두 배척하여 내쫓고, 아첨하여 자기에게 붙좇는 사람은 조정에 나열시켜 이루지 못한 욕심이 없었으나, 오히려 그 욕심을 마음대로 다 부리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개국백과 마음을 같이하여 왕실을 도운 조준ㆍ남은 등을 꺼려하여, 대간을 몰래 사주하여 그 죄를 얽어 만들어서 이들을 극형에 처하고, 장차 개국백에게까지 미치게 하여서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고자 하여 당을 만들어 난을 일으키려 하였으니, 만일에 그 계책을 이루어 나라의 권병을 마음대로 부렸더라면 조정을 어지럽혔을 뿐만 아니라, 장차 반드시 사직을 위태롭게 하여 헤아릴 수 없는 화가 되었을 것입니다. 함께 모의한 무리를 버려두고 신문하지 않는다면 뒷날의 화를 이룰까 더욱 두렵습니다. 그 무리인 판삼사사 설장수(?長壽), 지밀직사사 이무(李茂), 동지밀직사사 이빈(李彬), 예조 판서 김이(金履) 등은 몽주와 결탁하고 편당하여 충량을 무함하고 국가를 어지럽히려 하였으니, 마땅히 직첩을 회수하고 국문ㆍ논죄하여 뒷사람을 경계하소서. 총랑 안노생(安魯生)ㆍ최관(崔關)과 호군 김첨(金瞻)은 몽주에게 아첨하여 섬긴 자이오니, 마땅히 아울러 직첩을 회수하고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어 뒷사람을 징계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소가 올라가니 설장수와 김이를 파면하여 전리(田里)로 돌려보내고, 그 나머지는 모두 파면하여 먼 지방으로 귀양보냈다.

○ 좌상시 김자수(金子粹) 등이 소를 올리기를, “전 대사헌 강회백(姜淮伯) 등이 죄 없는 사람에게 죄를 얽어 만들어 전하의 총명을 속였으나 전하께서 한두 사람의 대신에게 명하여 끝까지 신문하여 사실을 알아 김진양ㆍ정희(鄭熙) 10명은 모두 그 죄를 자복하여 외방으로 멀리 귀양갔는데, 홀로 강회백과 정언 유기(柳沂) 등은 요행히 죄를 면하고 집에 있으면서 그 의논에 참여하지 않은 척하니, 죄는 같은데 벌은 달라졌습니다. 전하께서는 대의로써 결단하여 관직을 삭탈하고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어 국법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왕이 마지못하여 외방으로 귀양만 보내도록 하였다.

6월에 도평의사사에서 전 판삼사사 우현보와 그 아들 지밀직사사 홍수(洪壽), 전의 부령 홍부(洪富), 판사 홍강(洪康), 상호군 홍득(洪得), 정랑 홍명(洪命), 종친 남평군(南平君) (), 수연군(壽延君) (), 영원군(寧原君) (), 익산군(益山君) (), 복원군(福原君) (), 순영군(順寧君) (?), 보령군(保寧君), ()과 문하찬성사 안익(安翊), 판개성부사 김남득(金南得), 밀직사 최을의(崔乙義), 전 청주절제사 왕승귀(王承貴), 전 밀직부사 도흥(都興), 지신사 안원(安瑗), 좌대언 유정현(柳廷顯), 우대언 허응(許膺), 판사 박흥택(朴興澤), 전 연안부사 안준(安俊), 내부령 신원필(申元弼), 총랑 최함(崔咸), 내관 강인부(姜仁富)를 잡아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고는, 경력 장지화(張至和)를 시켜서 왕에게 아뢰기를, “현보 등이 여러 번 죄를 범하였으나 관대한 용서를 지나치게 받았는데도 오히려 마음을 고치지 않고, 다시 난을 일으키려 하여 화란의 기미가 급박하였으므로 미처 아뢰지 못하고 현보 등을 외방으로 나누어 귀양보내었습니다. 신이 듣건대, 난신ㆍ적자는 사람마다 이를 벨 수 있다 하므로 감히 먼저 일을 행하고 뒤에 아룁니다." 하였다.

○ 도평의사사에서 아뢰기를, “우현보와 홍수(洪壽) 부자는 본래 간사한 행실로써 아첨하여 벼슬과 녹을 얻었는데, 그 집만 알고 나라가 있는 줄은 알지 못하여, 한가지 생각도 생민에게 미친 것이 없으며, 한 마디 말도 공도에 미친 것이 없었습니다. 지난번 위조(僞朝) 때에는 임견미ㆍ염흥방에게 편당하여 뇌물을 많이 받고, 토지와 노비를 점검하고 빼앗았는데, 무진년에 죽음을 면한 것은 요행입니다. 그럼에도 현보는 김저(金佇)ㆍ득후(得厚)의 모의에 참여하고, 홍수는 신우를 맞아 다시 세울 의논에 참여하여 여러 번 탄핵을 당하자, 저의 죄를 면하려고 하여 몰래 윤이(?)ㆍ이초(李初) 등을 보내어 큰 말썽을 지어 꾸며서 상국에 호소하고, 친왕(親王)이 군사를 움직일 것을 청하여 본국을 해치려고 하였으니, 이는 실로 만세에 용서할 수 없는 죄입니다. 근년 이후로 대성에서 여러 번 소를 올려 죄를 논핵하였지만, 전하의 너그럽고 인자함을 힘입어 요행이 사면을 받았습니다. 진정 마땅히 행실과 생각을 고쳐서 임금의 은혜에 보답해야 될 것인데, 도리어 지난번에 자기를 논핵한 사람에게 깊이 원한을 품고 원수를 갚고자하여, 정몽주에게 편당하여 저들과 가까이 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을 끌어들여 각 관사에 나열시키고, 또 종친 등과 수시로 모여서 모의하여, 충량을 무함하고 국가를 어지럽혔으니, 죄가 죽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신등이 상부(相府)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사직의 큰 계책을 앉아서 보기만 하고 말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전일에 죄의 괴수인 현보와 그 아들 홍수 등 5명과 그 무리 남평군(南平君) () 20명을 이미 모두 외방으로 내쫓았으나, 죄악이 너무 커서 여러 사람의 마음에 만족하지 못하오니, 삼가 바라옵건대, 그 죄를 밝게 다스려 가산을 적몰하소서." 하였다. 왕이 명하여 모두 관직을 삭탈하고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게 하고, 정도전과 남은을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 사헌부에서 말하기를, “요사이 대간이 여러 번 상소를 올려, 유만수(柳曼殊)의 효도하지 않고 우애하지 않은 죄를 논핵하였으나, 전하께서 인자하여 신문하지도 않고 은총과 대우가 날로 융성하였습니다. 마땅히 마음과 생각을 고쳐 절의에 힘써서 임금을 받들어야 될 것인데, 오히려 징계하지 않고 교만하여 포학함이 날로 심하니, 지금 만약 버려 두고 신문하지 않는다면 악을 징계할 길이 없으며, 뒷날의 화가 될까 진실로 두렵습니다. 청하건대, 직첩을 회수하고 국문하여, 죄를 다스려 여러 사람의 마음을 통쾌하게 풀어 주소서." 하니, 왕이 다만 외방으로 귀양보내게 하였다. 또 설장수와 김이의 벌이 너무 가벼운 것을 논핵하여 직첩을 회수하고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기를 청하니, 왕이 마지못하여 그 말을 따랐다.

○ 사헌부에서 아뢰기를,"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이후로 변고가 잇달아 일어나고 조정이 화목하지 못하니, 이것은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상 주고 벌 줌이 밝지 못하고 은혜와 의리가 나누어지지 못한 데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현보는 본래 절의가 없는 사람인데 세상에 아첨하여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으며, 홍수(洪壽)는 간사하고 아첨하여 한 가지도 일컬을 것이 없는 사람인데, 척리(戚里)에 연줄을 타서 은총의 대우가 두터웠으니, 모두 마땅히 성심으로 힘을 합하고 근신하여 직책을 지켜서 왕실을 보좌해야 될 것인데, 이미 안열의 역란의 모의에 참여하였으며, 정몽주가 난을 일으키려고 음모하는 데 참여하였습니다. 범한 바가 여러 번 나타나서 죄가 용서하기 어려운데, 전하의 자주 용서하는 은혜를 믿고 사직의 안위의 계책을 소홀히 여겨, 일찍이 경계하고 조심하지 않고 날로 더욱 교만하고 자랑하며, 충신을 제거하고자 도모하고 보복만을 일삼아, 마침내 도성 안팎에서 서로를 의심하고 신하들이 화목하지 못하게 했으니, 적이 전하를 위하여 상심하는 바입니다. 법이란 것은 국가의 큰 권병이니, 사사로이 굽혀서는 안 됩니다. 지금 도평의사사에서 각기 그 죄를 지칭하여 소를 올려 논핵하였는데도 전하께서 법을 굽혀 너그럽게 용서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실망시켰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사직을 생각하고 대의로써 결단하여, 그 죄를 밝게 다스려 만세에 경계를 드리우소서." 하였다. 왕은 다만 관직을 삭탈하고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게 하였다.

○ 일본에서 사신을 보내어 대장경을 청구하고, 이어서 토산물을 바쳤다.

○ 조준을 경기좌우도 절제사로, 남은을 경상도 절제사로 삼았다. 각 도에도 모두 이와 같이 하여 그 도의 병마를 관장하게 하였다.

○ 문하평리 경의(慶儀)를 남경에 보내어 성절을 하례하고, 개성윤 조인경(趙仁瓊)은 천추절을 하례하였다.

○ 왕이 우리 태조의 사제에 가서 병을 위문하였다.

○ 대간이 번갈아 글을 올려 우현보의 죄를 청하였으나, 그 글을 궁중에 두고 내려보내지 않으니, 대궐 문에 엎드려 힘써 간하였다.

○ 조준을 판삼사사로, 공정왕(恭靖王 정종(定宗))을 삼사 우사로, 남은을 동지밀직사사로, 권중화(權仲和)를 상의찬성사로, 윤호(尹虎)와 성석린(成石璘)을 찬성사로, 이인민(李仁敏)을 판개성부사로, 경의(慶儀)와 정희계(鄭熙啓)를 문하평리로, 김사형(金士衡)을 삼사 좌사로, 윤사덕(尹師德)을 판밀직사로, 김용초(金用超)ㆍ김을귀(金乙貴)ㆍ이의(?)ㆍ김균(?)을 모두 밀직 부사로 삼고, 이행(李行)을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 대간이 소를 올리기를, “김진양의 무리들이 불화를 만들고 일을 일으켜 화란을 이룬 것은, 그 모의가 하루에 한 것이 아니며 그 무리가 한 사람만이 아닌데, 이제 또 그대로 이리저리 미루어 내버려 두고 묻지 않는다면, 신등은 여러 사람의 의심이 풀릴 길이 없으며 여러 사람의 마음이 편안할 길이 없으므로, 변고가 발생하고 간사한 무리들이 얼어남이 그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원컨대, 진양 등에게 그 죄상을 따져 신문하여 경중에 따라서 그 죄를 밝혀서 화의 실마리를 근절하소서." 하였다. 왕이 명하여 다시 국문하지 말고, 다만 전일의 옥사(獄辭)에 의거하여 그 경중을 분별하여 아뢰게 하였으나, 대간이 논핵을 그치지 않았다. 이에 진양은 곤장 1백 대를 쳐서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고, 홍부(洪富)와 홍수(洪壽)는 관직을 삭탈하여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고 영구히 서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 문하평리 김주(金湊)를 남경에 보내어 고명(誥命)을 청하였었는데, 숙주(肅州)에 이르러 왕이 폐위된 소식을 듣고 곧 돌아왔다.

○ 왕이 황태자가 훙()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발상(發喪)을 하고자 하니, 조정의 신하들이 아뢰기를, “황태자는 군왕이 되지 못하였으니, 상복을 입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백관은 포대(布帶)를 띠었다.

○ 여러 도의 주ㆍ군에 다시 유학교수관을 두었다.

○ 가을 7월 갑신일에 왕이 우리 태종과 사예 조용(趙庸)을 불러서 이르기를, “내가 장차 이 시중(李侍中)과 함께 같이 맹서(盟誓)를 하려고 하니, 경 등은 시중의 말을 듣고 맹서하는 글을 초하여 오라." 하고, 또 이르기를, “반드시 고사(故事)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조용히 대답하기를, “맹서는 중한 것이 아니니, 성인이 싫어하는 바입니다. 열국이 동맹하는 것은 옛날에 있었지마는, 임금이 신하와 함께 동맹하는 것은 경적(經籍)과 고사에 의거할 데가 없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다만 초를 잡으라." 하였다. 조용히 태종과 함께 태조에게 나아가서 왕의 명령대로 전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네가 마땅히 왕의 명령대로 초를 잡으라." 하였다. 조용히 물러나서 초를 잡았는데, 그 초고에, “경()이 있지 않았더라면 내가 어찌 이런 자리에 이르겠는가. 경의 공과 덕을 내가 감히 잊겠는가.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곁에 있으니, 대대로 자손들이 서로 해치지 말 것이다. 내가 경을 저버림이 있다면 이와 같은 맹서가 있다." 하였다. 조용히 태종과 함께 왕에게 초고를 바치니, 왕이, “되었다." 하였다.

○ 다시 정도전을 봉화군 충의군(奉化郡忠義君)으로, 조반(?)을 지밀직사사로 삼았다.

○ 신묘일에 왕이 왕위를 사양하고 원주(原州)로 물러났다. 얼마 후에 간성군(杆城郡 강원도 고성군 간성면)으로 옮기고, 공양군(恭讓君)으로 봉하였다. 왕은 그 후 3년 갑술년에 삼척부(三陟府)에서 훙()하였다. 후에 공양왕(恭讓王)으로 추봉(追封)되었다.

() "()가 왕위를 차지하고 있을 그때에 이미 왕씨가 없어졌다. 16년의 오랜 세월을 지나도록 우가 음흉하여 주색에 빠져 포학을 부렸고, ()이 또 혼암하고 유약하였다. 하늘이 광망한 동자로 하여금 명기(名器 왕위(王位))를 더럽히게 하지 않고 덕이 있는 사람을 기다려 이를 주려고 하였는데, 그 뜻이 분명하니, 충신과 의사들이 반드시 왕씨의 후손을 구하여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다. 이에 공양왕(恭讓王)이 자기 집에서 그대로 일어나 보위(寶位)에 올랐으니, 왕씨의 종사가 이미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고, 왕씨의 나라가 이미 망하였다가 다시 흥하게 되었다. 이에 마땅히 공훈이 있는 어진 사람에게 성심으로 대하고 충언을 받아들이고 직간을 용납하여, 서로 함께 새로운 다스림을 도모하여야 될 것인데, 어찌하여 다만 인척들의 사사로운 감정을 담은 호소와 부녀자와 내시들의 사욕을 따르는 청만을 들어주고 믿으며, 원훈(元勳)을 꺼리고 멀리하며 충량(忠良)을 무함하여 해치니, 정사가 문란해져서 인심이 저절로 떠나가고 천명이 저절로 가버리게 되어, 왕씨 5백 년의 종사가 홀연히 망하게 되었으니 슬픈 일이다." 하였다.

백관(百官)이 국새(國璽)를 받들어 왕대비(王大妃) 안씨(安氏)의 전(殿)에 두고 정사를 청단(聽斷)하였다.

출처 : ▒ 한 산 草 堂 ▒
글쓴이 : 천하한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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