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선생문집 제2권
문(文)
변무주(辨誣奏)
여러 조정에서 신변(申辨)하였으나, 끝내 올바로 되지 못했었는데, 이 변무주로 인하여《회전(會典)》을 개정해서 종계(宗系)가 비로소 올바로 되었고, 국가의 무함이 밝게 씻어졌다. 조선국왕(朝鮮國王) 신(臣) 성휘(姓諱)는 은혜를 받아 무함을 변명하는 일을 삼가 아뢰옵니다.
지난 가정(嘉靖) 42년(명종 18, 1563) 4월에 신의 아비인 선신(先臣) 공헌왕
(恭憲王) 휘(諱)가, 《대명회전(大明會典)》에 국조(國祖)의 선신인 강헌왕(康獻王) 휘를 이인임(李仁任)의 아들이라 한 것과 모두 왕씨(王氏)의 네 왕을 시해(弑害)했다는 등의 말은 모두 억울한 무함에 해당되는바 근래 여러 열성조(列聖朝)에서 개정하도록 명령하셨으니 이에 전후의 변명한 사정을 통찰하시고 조사해서 새로 편찬하는 《회전》에 넣을 것을 바란다는 사의로써 주문(奏文)을 갖추어서 차임(差任)한 배신(陪臣) 김주(金澍)에게 아뢰게 하였습니다
그 후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받았는데, 그 대략에 "내부(內部)에 공문을 보내어 전년에 간행한 《회전》중 조선국에 대한 한 책을 한림원(翰林院)에 보내어서 본국에서 아뢴 내용을 요약하여 찬정해서 황제께서 흠정(欽定)하신 후 본조(本條)의 끝에 부록(付錄)하고, 인하여 황제께서 칙서(勅書) 하나를 내리시어 성상의 뜻을 밝게 보이라는 등의 내용으로 본부(本部 예부)상서 겸 한림원학사(兼翰林院學士) 이춘방(李春芳) 등이 제(題)를 갖추어 올렸던바, 가정 42년 9월 8일에 성지(聖旨)에 시(是)라 함을 받았으므로, 이것을 준행하기 위하여 한림원에 공문을 보내어서 기록하게 하였다. 그 후 이어서 소사 겸 태자태사 이부상서 무영전태학사(少師兼太子太師吏部尙書武英殿太學士) 서계(徐?) 등이 '《회전》에 원래 기록된 조선국의 일을 금주(今奏 조선국주문)에 찬입하여 게첩(揭帖)을 갖추어서 어람(御覽)에 올리오니, 엎드려 원하옵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채택하소서.'라고 제(題)하였던바, 성지에 시(是)라 하셨고, 예부에 알리라 하셨으므로, 이것을 공경히 받들어 행한다. 이에 자문을 보내며 아울러 《흠정회전(欽定會典)》에 부록하여 자못 조사해서 시행하려 하는바, 그 부록인 《흠정개정회전(欽定改正會典)》에 '영락(永樂) 원년(태종 3, 1403)에 국왕이 조훈조장(祖訓條章)에 실린 종계를 변명해 줄 것을 아뢴바 황제께서는 개정하도록 허락하였으며, 가정(嘉靖) 8년(중종 24, 1529)에 조선국 사자(使者)가 자세히 말하기를 '국왕의 시조(始祖) 성 휘(姓諱)의 아버지는 바로 이자춘(李子春)이요, 이인임(李仁任)이 아니다.'하였으므로 우리는 종계를 대조하여 사관(史館)에 보내었고, 42년에는 조선 국왕이 다시 종계를 개정할 것을 요청하였으므로 예부에서 변무주를 본국 사실의 아래에 기록할 것을 요청하였던바, 황제께서는 이를 따르셨다.' 고 하는 내용이다." 하였습니다.
가정 42년 12월에는 원차배신(原差陪臣)인 서장관(書狀官) 이양원(李陽元)이 칙유(勅諭)를 받들어 왔는데, 그 내용에 "아, 그대 조선국왕 성(姓) 아무는 대대로 공손하고 순종하여 나의 동쪽 번병(藩屛)이 되었다. 여러 번 선조(先祖)의 종계를 가지고 개정할 것을 요청하였으니, 이는 선조가 무함을 받은 것을 부끄러워하여 밝게 씻으려고 급급해하는 것이다. 그 정성이 말에 나타나므로 나는 특별히 그대가 아뢴 것을 윤허한다. 그리하여 사관(史館)에 선부(宣付)하여 《회전》의 옛 글 밑에다가 그대 조상의 진짜 파(派)를 기재하여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사실을 기록하여 해와 별처럼 밝게 하려고 한다. 중국 조정과 그대의 나라에서는 조선 국왕의 시조가 이자춘에게서 나왔고 이인임에게서 나오지 않았음을 모두 알고 있다. 이에 칙서를 내려서 그대에게 보여주노니, 그대는 공경히 받들라." 하였습니다.
이것을 받자옵고 선신인 휘와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은 기뻐하고 감격하여서 표문을 올려 사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흠정개정》을 살펴보오니, 아직도 미진한 부분이 있사옵니다. 다만 국조의 내력만을 기록하였고, 네 왕을 시해했다는 무함의 본말(本末)은 서술하지 않아서, 선신인 휘로 하여금 악명을 입게 하여 끝내 천하에 이것을 드러내어 밝히지 못하게 하였으니, 후세 신자(臣子)의 정리에 더욱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선신인 휘는 애통한 마음을 안고 다시 아뢰고자 하였으나, 그 후 모친상을 당하여 몸이 수척해져 병을 이루어서 한을 품고 죽었습니다. 이것은 실로 신하와 온 나라 신민들이 깊이 애통해하는 바입니다.
신은 성은을 입어 옛 전통을 이었사온데, 매양 선조의 원통함이 완전히 신설(伸雪)되지 못하옵고, 선부(先父)의 뜻이 다 펴지지 못함을 생각하여 걱정스럽고 민망해한 지가 여러 해이옵니다.
신은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하가 임금을 섬김은 자식이 아비를 섬기는 것과 같으니, 신하가 억울하고 민망한 뜻이 있으면 군부(君父)에게 하소연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기옵니다. 이것은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필연적인 것입니다. 신이 만일 치욕을 참고 민망함을 가슴속에 품고 있으면서도 끝내 성상 폐하에게 피력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도리어 천지(天地)가 함께 만물을 길러주는 인(仁)을 스스로 막는 행위이니, 신은 감히 이런 짓을 할 수가 없습니다.
신은 엎드려 살펴보오니, 영락 원년 11월에 선신인 공정왕 휘가 종계에 관한 일을 가지고 사유를 갖추어 주문을 올렸던바, 예부 상서 이지강(李至剛) 등은 "태종문황제(太宗文皇帝)의 성지에 '조선 국왕이 아뢴 것을 보니, 이미 이인임의 후손이 아니다. 생각건대 이것은 전에 잘못 전해진 말을 들어서 잘못 기록한 듯하니, 이를 개정하도록 허락한다.' 하시는 황제의 분부를 공경히 받았다." 하였습니다.
그 후 정덕(正德) 13년(중종 13, 1518) 7월에는 선신 공희왕(恭僖王) 휘가 종계와 악명 등의 내용을 가지고 주문을 갖추어 올렸던바, 예부 상서(禮部尙書) 모징(毛澄) 등이 "이 아무개[李某]가 나라를 얻고 국호를 고친 것은 모두 태조황제(太祖皇帝)의 명에서 나왔습니다. 성은으로 내려 주신 것을 보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요, 또 이인임의 후손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태조황제의 조지(詔旨)가 계시오니, 개정하도록 허락하소서. 《일통지(一統志)》에는 또 분명히 '왕요(王瑤 공양왕(恭讓王)의 성명)는 혼미하여 이 아무개가 여러 대중에게 추대된 바가 되었다.'고 기재되어 있어서 조선에서 지금 아뢴 것과 대략 서로 부합합니다. 신들은 바라옵건대, 황상(皇上)께서는 문(文)을 좋아하고 예(禮)를 지키는 나라(조선)를 생각하시고, 조상을 위하여 변무하는 정성을 굽어 살피사, 저들의 요청을 들어주시고 칙서 하나를 내려서 성상의 뜻을 효유하도록 하소서."라는 내용의 제문을 올렸던바, 무종황제(武宗皇帝)의 성지에 "조선국왕의 정성과 효성은 생각할 만하니, 다시 칙문을 써서 왕에게 주어 알리도록 하라." 하였었습니다.
정덕 14년 4월에 원차배신인 남곤(南袞) 등이 칙유(勅諭)를 받들어왔는데 "그대 선조인 성 휘는 원래 이인임의 후손이 아님을 우리 태종문황제(太宗文皇帝)께서 이미 명령을 내리시어 개정하도록 준허(准許)하셨으며, 이제 또 그대가 주문을 갖추어 진정(陳情)하니, 그대의 효성을 생각할 만하다. 특별히 요청함을 윤허하여 주고 칙문을 내리어 나의 뜻을 효유하노니, 그대는 공경히 받들라." 하였습니다.
가정 8년 8월에 배신인 유보(柳溥) 등이 경사(京師)로 달려가 《대명회전》을 중수(重修)함을 알고는, 본국의 원래 주문 및 태종황제ㆍ무종황제의 성지에 있는 사리를 사실대로 기록해서 개정해 줄 것을 예부에 올렸던바, 예부에서는 "세종황제(世宗皇帝)의 성지에 '조선국 대신이 올린 본국 종계의 일은 이미 조종조의 분명한 말씀이 계셨으니, 너희 예부에서 자세히 조사하여 바른 대로 기재하여 사관(史館)에 송부(送付)하여 채택해서 시행하도록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였습니다.
가정 18년 윤8월에 선신인 공희왕 휘가 다시 전후에 변명한 주문 및 성지를 받든 사실을 가지고 상세히 교정하여 전말을 기록해 주십사 하는 내용으로 주문을 만들어 예부에 올렸던바, 예부상서 엄숭(嚴嵩) 등은 "성지를 받자오니 '황조(皇祖)의 큰 훈조(訓條)는 감히 별도로 의논할 수가 없다. 조선국에서 아뢴 말과 아울러 열성조(列聖祖)의 분명한 뜻을 이 뒤에 새로 찬수할 때에 마땅히 부록하고, 인하여 칙문을 써서 왕에게 보여주라.' 하셨다." 하였습니다.
가정 19년 2월에 원차대신 권벌(權?) 등이 칙문을 받아왔는데 "그대의 나라에서는 여러 번 종계가 이인임의 후손이 아니라는 내용을 가지고 와서 우리 성조 및 무종에게 아뢰어 모두 분명한 말씀이 계셨고, 나 역시 내용을 자세히 알고 있다. 단 우리 고황제의 조훈(祖訓)은 만세에 변할 수 없는 것이니, 《회전》에 기재된 것은 후일 수찬(修撰)할 때에 마땅히 너희들이 아뢴 말을 자세히 부록할 것이다. 그대는 번병의 직무를 공손히 수행하라. 짐(朕)은 그대의 충성과 효성을 가상히 여기고 있으니, 다시 염려할 것이 없다. 공경히 받들라." 하였습니다.
가정 36년(명종 12, 1557) 4월에는 선신인 공헌왕 휘가 전에 아뢴 내용을 주문으로 올렸던바, “예부에서 복주(覆奏)하여 성지를 받아 한림원(翰林院)에 이문(移文)하였는데, 본원(本院)의 수본(手本)에 '사관에서 전항의 사정을 조사하여 이미 채택해서 부록하도록 했다.' 하였다. 이에 자문을 보낸다." 하였습니다.
신은 엎드려 생각하오니, 신의 선대는 원래 본국의 전주(全州)에서 나왔는바, 먼 시조인 한(翰)은 신라 때에 사공(司空)이 되었으며, 6대손 긍휴(兢休)가 고려에 들어왔습니다. 13대손 안사(安社)는 전원(前元)에 벼슬하여 남경 오천호(南京五千戶)의 다루가치[達魯花赤]가 되었는데 아들 행리(行里)를 낳았고, 행리는 춘(椿)을 낳았고 춘은 자춘(子春)을 낳았습니다. 조(祖)ㆍ자(子)ㆍ손(孫) 3대가 대대로 그 직무를 세습하였는데, 원 나라 말기에 전란이 일어나자, 자춘은 땅을 피하여 동쪽으로 돌아오니, 이가 선신 휘의 아버지입니다.
이인임(李仁任)은 바로 본국 경산부(京山府) 아전인 장경(長庚)의 후손입니다. 그 할아버지 조년(兆年)은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고, 아버지 포(褒)는 동지밀직(同知密直) 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인임의 대에 와서는 형제 여섯 사람이 모두 중요한 지위에 올라서 세력이 중외(中外)를 휩쓸었습니다. 그런데 이인임은 악을 쌓고 화를 불러 끝내 귀양가 죽었습니다.
고려의 네 왕에 대한 일로 말하면 공민왕(恭愍王)은 아들이 없자, 총애하는 신하인 신돈(辛旽)의 아들 우(禑)를 은밀히 자기 아들로 삼아 몰래 궁중에서 길렀습니다. 그러다가 공민왕이 총애하는 간신인 홍륜(洪倫) 등에게 시해(弑害)되자 이인임이 국정을 담당하고는 신우(辛禑)를 세워 후사(後嗣)로 삼았으며, 그의 아들 신창(辛昌)을 세자로 삼았습니다. 우왕(禑王) 14년에 이르러 무신인 최영(崔瑩)이 신우에게 권하여 군대를 일으켜서 요동을 침범하려고 여러 장수를 감독하여 보냈습니다. 이때 선신인 휘도 부장(副將)이 되어서 또한 그 중에 있었는데, 행군하여 압록강에 이르러서는 상국(上國)에 죄를 얻기보다는 차라리 거짓 조정인 신우에게 죄를 얻어 한 지방을 편안히 하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하고는 마침내 여러 장수들과 회군(回軍)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이에 신우는 놀라고 두려워하여 지위를 사양하고 아들 창(昌)에게 전위(傳位)하였습니다.
이때에 인심이 이반되고 국세가 위급하였으나, 그의 당여(黨與)들이 많아서 사람들은 감히 그를 폐위할 것을 말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때 마침 대신 윤승순(尹承順)이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와 태조황제의 선유(宣諭)를 전달하기를 "왕씨가 시해를 당하여 후손이 끊겼으니, 비록 왕씨의 성을 빌리고 있으나 다른 성씨로 군주를 삼는 것은 삼한(三韓)의 대대로 지켜오는 좋은 법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고려 조정에서는 선유문을 받고는 공민왕의 비(妃)인 안씨(安氏)가 여러 재상들과 상의하여 비로소 거짓 왕씨라고 칭하던 신가(辛哥)를 축출하고 왕씨의 후예를 세워서 정창군(定昌君) 요(瑤)가 임시로 국사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우와 창 부자는 모두 왕요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후 왕요 역시 임금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육을 함부로 자행하자, 국민들이 분해 하고 원망하여 서로 선신(先臣)인 휘(諱 태조)를 추대하여 국사를 주관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선신은 여러 사람들의 요청에 만부득이하여 즉시 주문을 갖추어 아뢰었던바, 태조고황제로부터 그대를 명하여 국왕으로 삼고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하사한다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에 선신인 휘는 비로소 휘를 고치고 왕요를 사저(私邸)에서 편히 봉양하여 천명을 마치도록 하였습니다.
선신의 종계에 대한 원류(源流)와 네 왕에 대한 사적은 신의 선조(先祖)와 선부(先父)들이 차례로 아뢴 내용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사오니, 진실로 천조(天朝)에서 이미 살피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무함을 입게 된 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선신 휘가 국정에 참여한 이래로 이인임의 불법한 소행을 모두 개정하여 그 당여들의 미움을 샀기 때문에 그들은 선신을 무함하려고 도모하였습니다. 이에 심지어는 윤이(尹?)와 이초(李初)의 무리들은 몰래 상국(上國)에 가서 거짓말을 날조하여 감히 천조(天朝)를 속이려는 계책을 하였으며, 이인임은 종족(種族)이 강하고 권력이 막중하여 죄악이 평소 드러났으므로, 그의 자식이라고 지적하면 자취가 의심스러워 현혹시키기 쉽고 분간하기 어렵다고 여겼으므로, 이렇게 무함했던 것입니다.
다행히 태조고황제께서 만리(萬里)를 밝게 보시어 이들 두 사람이 모두 죄를 받아 죽었는데, 조훈의 기록이 이와 같이 사실과 다르게 잘못 기록된 것은 우연히 미처 산정(刪定)하지 못해서인 듯합니다. 그 후 《일통지》를 편찬할 때에 본국의 연혁(沿革)을 기재하면서 말하기를 "왕요가 혼미하여 여러 사람들이 문하시중(門下侍中) 이 아무를 추대해서 국사를 주관했다."하였으니, 이 어찌 조훈이 미처 산정되지 못함을 알고서 그 사실을 분명히 기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회전》의 편찬으로 말하면, 다만 조훈의 옛 글을 그대로 기록했을 뿐이요, 애당초 태종황제가 개정하도록 준허(准許)한 뜻을 살피지 못한 것이며, 또 잘못된 기록을 개정하여 사실대로 밝힌 《일통지》의 뜻을 조사하지 못하고 옛 글을 그대로 기록하여 개정하지 않은 것이니, 그 원통함이 하늘에 닿아도 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선조와 선부들은 혈성(血誠)을 다한 진정을 두 번 세 번 올렸던 것입니다.
그 후 다행히 무종황제와 세종황제께서 요청을 윤허하여 상세히 기록해 주겠다는 명령을 받자옵고, 공손히 속찬(續纂)을 반포할 날을 밤낮으로 목을 늘이고 기다렸사온데, 근래에 흠정개정된 조항을 보니, 종계 한 가지 일만을 바로잡았고, 악명에 대한 무함은 다시 서술해 넣지 않았으며, 또 개정한 것은《회전》의 옛 책이요, 속찬한 새 책이 아닙니다. 만일 후일 새 책이 반포되고 옛 《회전》이 폐지되면 이른바 개정했다는 것은 끝내 허사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선신이 무함을 받은 원통함은 이미 씻을 날이 없게 되고, 열성조들이 개정하도록 준허하신 명령 또한 증거할 만한 곳이 없게 될까 두렵습니다. 이 때문에 신은 폐하에게 번독(煩瀆)하게 아뢰면서 스스로 그칠 줄 모르는 것이옵니다.
신은 또 생각하건대, 세종황제의 성지에 "사관에 송부(送付)한다." 하였고, 또 "사관에 선부(宣付)한다." 하였으니, 그 개정하는 일은 바로 사관의 임무에 관계되옵니다. 더구나 지금은 세종황제의《실록(實錄)》을 편수하고 있어서 은미한 것과 밝은 것을 편집하여 완성된 법이 있사오니, 만일 성은을 입어 신의 주문과 신의 선부와 선조가 전후에 주문한 내용을 《실록》에 자세히 기재하고 외국이라 하여 소략히 하지 않으신다면, 선신이 무함을 받은 원통함이 참으로 만대에 밝게 씻기게 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인자하신 성상께서는 열성조의 개정하라는 명령을 생각하시고 소신의 누대의 원통함을 가엾게 여기어 종계 악명을 분명히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사, 특별히 성지를 내리시어 새로 편찬하는《회전》과《실록》에 명백히 기재하도록 하소서. 이렇게 하신다면 흡족한 황제의 은택은 천지가 생성(生成)해 주신 은덕보다도 클 것이오며, 소신(小臣)이 후일 지하에서 선조와 선부에게 아뢰는 것 또한 장차 할 말이 있어서 유감이 없게 될 것이옵니다. 신은 간곡히 기도하며 이에 주문을 갖추어 삼가 아룁니다.
[주C-001]변무주(辨誣奏) : 무함을 변명하는 주문(奏文). 조선을 개국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이인임(李仁任 : 李仁人으로 잘못 표시)의 아들이며, 고려의 네 임금을 시해하였다고 《대명회전》에 기록된 것을 바로잡기 위하여 올린 주문. 제목 아래에 이 변무주로 인하여 종계(宗系)가 바로잡아졌다고 부기(附記)하고 있으나, 실제는 이후에도 계속되다가 선조(宣祖) 때에 이르러 비로소 수정되었다.
[주D-001]윤이(尹?)와 이초(李初) : 공양왕(恭讓王) 때 파평군(坡平君) 윤이와 중랑장(中朗將) 이초는 함께 명(明) 나라에 있으면서 명제(明帝)에게 본국의 공양왕과 이성계가 군사를 일으켜 명 나라를 공격하려 하며, 이에 반대하는 이색(李穡) 등이 처형되었다고 무함하였다. 이 사실이 명 나라에 가 있던 사신(使臣) 조반(趙?)의 귀국 보고서에서 밝혀져 큰 옥사(獄事)가 발생하였는데, 이것을 이초(?初)의 옥(獄)이라 한다.
고봉선생문집 속집 제2권
잡저(雜著)
천사(天使) 허국(許國)ㆍ위시량(魏時亮)의 문목(問目)에 대해 조목조목 답함
본국(本國) 아무 도(道)의 벼슬아치나 선비, 혹은 백성들 가운데 이미 죽었거나 또는 살아 있는 사람들로서 어떠한 이행(異行)과 효제(孝悌)와 절의(節義)가 있는지? 또 공맹(孔孟)의 심학(心學)을 능히 알거나 기자(箕子)의 주수(疇數)를 아는 사람에 이르기까지를 그 거주(居住)와 성명(姓名)과 실사(實事)를 하나하나 기록하라.
본국은 바다 밖에 궁벽하게 위치해 있고 땅덩이는 작지만, 백성들의 성품이 어질고 유순하여 선(善)에 잘 흥기하므로, 이행과 효제와 절의가 있었던 사람들이 사서(史書)에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그 수를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우선 그 중 한두 가지만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이자현(李資賢)은 고려 때 사람인데, 용모가 훌륭하고 성품이 총민하였습니다. 문과에 급제하여 대악서승(大樂署丞)이 되었는데, 갑자기 벼슬을 버리고 춘주(春州)의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 거친 밥 먹고 베옷 입고 살면서 유유자적하며 스스로 즐겼습니다. 고려 예왕(睿王)이 누차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표(表)를 올렸는데, 그 표에 "새의 본성대로 새를 길러서 종고(鐘鼓)의 걱정이 없게 하시고, 물고기를 관찰하여 물고기를 알아서 강호(江湖)를 좋아하는 물고기의 본성을 이루게 하소서."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왕은 그를 불러 올 수 없음을 알고, 특별히 남경(南京)에 행차하여 그의 아우 자덕(資德)을 보내 가서 효유하니, 그제야 부름에 응하여 왔습니다. 왕은 이에 그를 삼각산(三角山)에 머물도록 명하였습니다. 그 후 재차 만났을 적에 왕이 심성 기르는[養性] 요법을 물으니, 그는 "욕심을 줄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왕은 그를 특별히 후하게 대우하였으나, 그는 굳이 청하여 다시 산으로 돌아갔습니다.
한성한(韓性漢)은 성(性) 자는 유(惟) 자인 듯하다. 고려 신왕(神王) 때 사람입니다. 그는 최충헌(崔忠獻)이 국정을 제멋대로 하는 것을 보고는 "난(難)이 곧 일어날 것이다." 하고 마침내 처자(妻子)를 거느리고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은거하면서 고절(苦節)을 맑게 닦고 세상 사람들과 사귀지 않으니, 세상에서 그의 인품을 높게 여겼습니다. 조정에서 그를 불러 서대비원 녹사(西大悲院錄事)로 삼았으나 취임하지 않고, 더 깊은 골짜기로 옮겨가 살면서 종신토록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김시습(金時習)은 경기(京畿) 남양부(南陽府) 사람입니다. 그는 막 나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였고 3세 때에 능히 글을 지을 줄 알았습니다. 5세 때에는 우리 장헌왕(莊憲王)께서 그를 인견(引見)하시었는데, 응대하는 것이 마치 신과 같았으므로, 당시에 오세동자(五歲童子)라 칭하였습니다.
이미 자라서는 경적(經籍)을 널리 통하고, 제자(諸子)와 사서(史書)까지도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승도(僧徒)로 행세하면서 스스로 세속 법도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매양 높은 데 올라 먼 곳을 바라보고는 문득 통곡을 하고 돌아오곤 하였는데, 사람들은 그를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청한자(淸寒子)라 자호하였고, 그가 지은 시문(詩文)은 맑고 깊고 호탕하였습니다.
손순(遜順)은 신라(新羅) 흥덕왕(興德王) 때 사람입니다. 아버지는 죽고 집이 가난하므로, 아내와 더불어 남의 집에 품팔이를 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습니다. 그런데 손순에게 어린 자식이 있어 늘 자기 어머니의 밥을 빼앗아 먹었습니다. 손순은 아내에게 이르기를, “아이가 어머니의 밥을 빼앗아 먹는데,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구하기 어렵다." 하고는, 곧 아이를 등에 업고 가서 땅을 파고 아이를 산 채로 묻으려고 하였는데, 갑자기 땅 속에서 매우 신기한 석종(石鐘)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두 부부는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시험 삼아 그것을 두드려보니, 소리가 은은하여 듣기 좋았습니다. 그 아내가 말하기를 "이런 기이한 물건을 얻은 것은 곧 아이의 복이니 아이를 묻을 수 없다."고 하니, 손순도 그렇게 여겨 아이와 그 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와서는 종을 들보에 달아놓고 두드리니 그 소리가 왕궁(王宮)에까지 들렸습니다. 왕은 그 소리를 듣고 좌우에게 이르기를, “서교(西郊)에서 종소리가 들려오는데 소리가 맑고 멀어서 이상스럽다." 하고는 곧 찾아보게 하여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왕이 말하기를 "옛날에 곽거(郭巨)가 자식을 묻으려 할 적에는 하늘이 금부(金釜 금으로 된 솥)를 주었는데, 지금 손순이 아이를 묻으려 할 적에는 땅에서 석종이 나왔으니 전후의 일이 똑같다." 하고는 곧 한 채의 가옥을 내려 주고 매년 쌀 50석을 주었습니다.
최누백(崔婁伯)은 수원(水原) 사람입니다. 나이 15세 때 그의 아버지가 사냥을 하다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누백이 그 호랑이를 잡으려 하자 그의 어머니가 못하게 말렸으나 누백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즉시 도끼를 메고서 호랑이를 추적하였습니다.
호랑이는 이미 사람을 잡아먹고 배가 불러 드러누워 있었는데, 누백이 그 앞으로 다가가서 호랑이를 꾸짖기를 "네가 우리 아버지를 잡아먹었으니, 내가 의당 너를 잡아먹어야겠다." 하니, 호랑이가 꼬리를 흔들며 엎드렸습니다. 누백은 도끼로 호랑이를 찍어 죽이고 그 배를 갈라서 자기 아버지의 뼈와 살을 찾아내고, 그 호랑이고기는 항아리에 담아 시내 가운데 묻어두었습니다. 누백은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시묘(侍墓)살이를 하였으며, 삼년상을 마치고 나서는 그 호랑이고기를 가져다가 다 먹었습니다. 그는 뒤에 과거에 급제하여 기거사인(起居舍人)이 되었습니다.
김자강(金自强)은 성주(星州) 사람입니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뜻을 어김 없이 잘 받들어 순종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죽자 상(喪)을 치르는 데 있어 부도(浮屠 불교(佛敎)를 뜻함)의 법을 쓰지 않고 일체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예문에 따라서 하여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고, 다시 아버지를 위해 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종족들이 그를 저지하여 억지로 끌어내서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이어 그 여막을 불태워버렸습니다. 그러나 자강은 힘껏 뿌리치고 다시 돌아와 무덤 아래 엎드려서 3일 동안을 일어나지 않으므로, 종족들이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다시 그를 위해 여막을 지어주어, 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습니다. 국초(國初)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였습니다.
강렴(姜廉)은 안변(安邊) 사람입니다. 영락(永樂 명 성조(明成祖)의 연호) 연간에 그의 아버지 회조가 일찍이 대변이 막혀 통하지 않는 병이 있었습니다. 이에 강렴은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아버지의 병을 간호하였는데 4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손수 변기를 받들어 간호하였고, 심지어 대변을 맛보아 병세의 길흉을 증험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또 종기를 앓았는데, 의사가 말하기를, “거머리를 잡아다가 피를 빨리면 종기를 치료할 수 있다." 하므로, 한창 추운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강렴은 연못가에 나아가 울부짖으면서 얼음을 깨고 거머리를 찾았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거머리 두세 마리가 손가락에 붙어 나오므로 그것을 가지고 돌아와 종기를 빨리니, 아버지의 병이 곧 나았습니다. 이 일을 조정에 아뢰자 정려하였습니다.
김덕숭(金德崇)은 진천현(鎭川縣) 사람입니다. 일찍이 한산군수(韓山郡守)로 있다가, 부모 봉양하는 일이 오랫동안 빠뜨려짐을 염려하여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부모의 뜻과 안색을 잘 받들어 봉양하되 지성으로 하여 게으름이 없었습니다. 나이 62세에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매양 조석(朝夕)의 전(奠)을 마치고 나서는 반드시 아버지에게 가서 문안을 드리되, 아무리 비가 오고 눈이 내려도 폐하지 않았습니다. 3년상을 마친 뒤에는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고 더욱 독실하게 봉양하였으므로, 장헌왕(莊憲王)께서 그의 성효(誠孝)를 가상하게 여겨 특별히 술과 고기와 쌀을 하사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죽자 또 시묘살이를 하면서 지나치게 슬퍼하여 몸이 매우 수척해졌는데, 그때 나이가 벌써 72세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그가 늙은 나이에 예대로 상(喪)을 치르다가는 반드시 생명을 잃게 되리라고 여겨 그를 저지하니, 덕숭이 울면서 말하기를, “아버지는 들판에 묻혀 있는데 자식은 집에 편안히 있는 일을 나는 차마 할 수 없다." 하고, 새벽이면 일어나 반드시 묘 앞에서 곡을 하였고, 상을 다 마칠 때까지 슬퍼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였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평소에 앉던 좌석을 볼 때마다 목이 메어 울었고, 공경하기를 마치 부모가 살아계실 때와 같이하였습니다. 또 사당(祠堂)에는 새벽과 저녁으로 반드시 배알하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반드시 제사를 지내며, 시물(時物 철 따라 나는 음식물)은 반드시 사당에 올렸고 무슨 일이 있으면 반드시 사당에 고하고 나서 행하였습니다.
그가 죽은 뒤에 조정에서 그의 두 아들에게 벼슬을 내리라고 명하고, 그의 묘에 비석을 세워 정표하였습니다.
박운(朴云)은 창녕(昌寧) 사람입니다. 나이 14세 때 그의 아우 운산(云山)은 8세였는데, 그의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물려가자 운이 조그만 도끼를 들고 아우 운산과 더불어 30여 보쯤 쫓아가면서 통곡을 하니, 호랑이가 그의 아버지 시체를 버리고 갔습니다. 그리하여 운은 시체를 등에 메고 운산은 도끼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사실을 아뢰자 정려하였습니다.
김득인(金得仁)은 동래현(東萊縣) 사람입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집이 가난했는데, 어머니를 봉양하되 지극히 효성스러웠습니다. 어머니가 죽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마치고 나서는 자기 아버지의 묘를 어머니의 묘 곁으로 옮기고 다시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함으로써 전후 9년 동안 거상(居喪)하였습니다.
흉년이 들었을 때 부산포(釜山浦)의 왜노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노략질을 하다가 갑자기 득인의 여막에 이르렀는데,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감탄을 하고 떠났으며, 뒤에 해채(海菜)와 쌀과 향을 보내 주었습니다. 우리 강정왕(康靖王)께서 그에게 풍저창 부봉사(?儲倉副奉事)를 특별히 제수하였습니다.
성수침(成守琛)은 경상도(慶尙道) 창녕현(昌寧縣) 사람입니다. 그는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려서부터 효아(孝兒)로 일컬어졌습니다.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서는 예에 지나치게 슬퍼하였고, 3년 동안 죽(粥)만 먹었으며, 손수 제구(祭具)를 다루었습니다. 새벽이면 일어나 묘역(墓域)을 쓸고 나서 분향(焚香)하고 절하고 꿇어앉아 있었는데, 아무리 춥거나 더운 때라도 폐하지 않았습니다. 상을 마치고 나서도 매양 기일(忌日)을 만나면 마치 초상 때처럼 애통해 하였습니다. 조석으로 반드시 사당(祠堂)에 배알하였고 출입할 때는 반드시 사당에 고하였습니다. 어머니를 모시면서 집은 가난하였으나 매우 좋은 음식으로 봉양하였습니다.
그는 천품이 매우 고상하고 덕행과 기량이 원만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일찍이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그의 학문은 자기 마음에 반성하는 일과 자기 몸에 절실한 것을 힘썼습니다. 파평산(坡平山) 아래 은거하면서 청송거인(聽松居人)이라 자호하였습니다. 신훙왕(新薨王 명종을 뜻함) 때에 누차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죽은 뒤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증직되었습니다.
박제상(朴堤上)은 신라 눌지왕(訥祗王) 때 사람입니다. 왕의 아우 미사흔(未斯欣)이 왜국(倭國)에 볼모로 가 있었으므로 왕은 변사(辯士)를 보내 왜국을 꾀어서 미사흔을 맞아오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자 제상이 자기가 가기를 청하면서 말하기를, “왜인은 말로 효유할 수 없으니 의당 거짓으로 속여야 합니다. 신은 마치 죄를 짓고 도망간 것처럼 조작하고자 하니, 신이 떠난 뒤에 신의 가속을 옥에 가두소서." 하고는, 드디어 왜국에 들어갔습니다.
왜주(倭主)가 처음에는 그를 의심하였으나, 신라왕이 제상의 가속들을 가두었다는 말을 듣고는, 제상이 참으로 신라를 배반한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왜주는 군대를 동원하여 신라를 습격하러 나오면서 미사흔과 제상을 향도(嚮導)로 삼았는데, 해도(海道) 가운데 이르렀을 때 제상이 미사흔과 더불어 배를 타고서 마치 즐겁게 노니는 것처럼 하니, 왜인들이 그것을 보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제상이 미사흔에게 몰래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권하니, 미사흔이 말하기를 "어찌 그대를 두고 나 혼자만 돌아갈 수 있겠는가." 하자, 제상이 말하기를 "만일 두 사람이 함께 가면 꾀를 성사시키지 못할 듯하다." 하였습니다. 그러자 미사흔은 제상을 붙들고 울면서 하직하고 떠나갔는데, 이미 멀찍하게 갔을 때에야 왜인들이 미사흔이 도망했음을 알고 그를 추적했으나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왜인이 제상을 가두고 국문하기를 "네가 어찌하여 네 나라 왕자를 몰래 보냈는가?" 하니, 제상이 말하기를 "나는 곧 계림국(鷄林國)의 신하이므로, 우리 임금의 뜻을 이루고자 한 것일 뿐이다." 하였습니다. 왜주(倭主)가 성을 내어 말하기를 "지금 네가 이미 나의 신하가 되었는데도 계림국의 신하라고 칭한다면 반드시 오형(五刑)을 갖추어 처벌할 것이다. 만일 왜국의 신하라고 칭한다면 반드시 중록(重祿)으로 상줄 것이다." 하니, 제상이 말하기를 "차라리 계림국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자(臣子)는 될 수 없고, 차라리 계림국의 매를 맞을지언정 왜국의 작록(爵祿)은 받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왜주가 노하여 제상의 다리 살가죽을 벗기고 갈대를 베어낸 다음 그 위를 걷게 하면서 다시 "너는 어느 나라 신하냐?"고 물으니, 제상은 "계림국의 신하이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왜주가 또 제상을 뜨거운 철판 위에 세우고서 또 "어느 나라 신하냐?"고 물으니, 제상은 "계림국의 신하이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왜주는 그의 뜻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 그를 불태워 죽였습니다. 그의 아내는 치술령(?述嶺)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고 남편을 기다리며 통곡하다가 죽어서 치술신모(?述神母)가 되었는데, 지금도 그 사당이 있습니다.
비녕자(丕寧子)는 신라 선덕왕(善德王) 때 사람입니다. 백제(百濟)가 신라를 침공하자, 왕이 김유신(金庾信)을 보내 보병(步兵)과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가서 방어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백제의 군대가 매우 정예하여 유신이 고전을 하다가 힘이 다하자, 비녕자에게 이르기를 "계절이 추워진 다음에야 송백(松柏)이 뒤에 시드는 것을 아는 법이다. 오늘의 일이 급하게 되었는데, 자네가 아니면 누가 능히 분발하여 기발한 힘을 내어 군중의 마음을 격동시킬 수 있겠는가." 하니, 비녕자가 말하기를, “이 많은 사람 가운데서 유독 나에게 부탁을 하니, 이것은 지기(知己)라 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와서 그의 종 합절(合節)에게 이르기를, “오늘 나는 의당 위로 국가를 위하고 아래로 지기를 위해서 죽을 것이다. 그런데 내 자식 거진(擧眞)이 장한 뜻이 있으니 반드시 나와 함께 죽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부자(父子)가 함께 죽는 것은 옳지 않다. 내가 죽거든 네가 거진과 더불어 나의 뼈를 거두어라." 하고는, 창을 비껴들고 적진에 돌격하여 수인을 쳐죽이고 전사하였습니다. 그러자 거진도 달려가 싸우다 함께 죽으려고 하므로, 합절이 말 재갈을 붙잡고 저지하면서 말하기를, “대인(大人)께서 유명(遺命)을 남기셨는데, 이제 아버지의 명을 저버린다면 효(孝)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거진이 칼로 합절의 팔을 쳐버리고 적진에 돌격하여 또한 전사하자, 합절이 말하기를, “상전이 돌아가셨는데 죽지 않고 어찌하겠는가." 하고는 역시 적과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이로 인해 온 군중이 감격하여 일제히 진격함으로써 향하는 곳마다 승리하여 3천여 급(級)을 베었습니다. 왕은 그들을 애도하여 예로 장사지내 주었습니다.
성충(成忠)은 백제 사람입니다. 의자왕(義慈王) 때에 좌평(佐平)이 되었는데, 왕이 황음(荒淫)하여 즐기고 술마시기를 끝없이 하므로, 충이 극력 간(諫)하니, 왕이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충은 밥을 먹지 않다가 죽었는데, 죽음에 임하여 왕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원컨대 한 말씀 올리고 죽겠습니다. 신이 일찍이 시세의 변천을 관찰해 보니 반드시 앞으로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 전쟁을 하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지세를 잘 가려서 해야 하니, 상류에 위치하여 적에 대응해야만 보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적군이 만일 쳐들어오면 육로로는 탄현(炭峴)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로(水路)로는 기벌포(伎伐浦)를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고 험준한 곳에 웅거하여 그들을 방어해야 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은 반성하지 않았고, 그는 마침내 옥중에서 죽었습니다. 그 후 수년 만에 당(唐) 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신라와 함께 백제를 정벌하여 그들의 군대가 성 밑에까지 이르자, 의자왕이 모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탄식하기를,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른 것이 후회스럽다." 하였는데, 마침내 나당 군사들에게 멸망당했습니다.
이존오(李存吾)는 경주(慶州) 사람입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에 힘썼는데, 강개(慷慨)하여 지절(志節)이 있었고, 대범하고 묵중하여 말이 적었습니다. 나이 10여 세 때 ‘강창(江漲)’이란 제목의 시를 짓기를,
온 들이 다 묻혔는데/大野皆爲沒
높은 산만 가라앉지 않았네/高山獨不降
라고 하니, 식자들이 그를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에 좌정언(左正言)이 되었는데, 왕이 요승(妖僧) 신돈(辛旽)을
총애하여 정사를 그에게 맡기므로, 존오가 대사간(大司諫) 정추(鄭樞)와 함께 소(疏)를 올려, 신돈이 국정을 제멋대로 하여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음을 논하였습니다.
그러자 왕이 노하여 존오를 불러 면책(面責)을 했는데, 이때 신돈이 임금과 안석(案席)을 마주하여 앉아 있으므로, 존오가 신돈을 쳐다보고 꾸짖기를, “늙은 중이 어찌 이같이 무례할 수 있단 말인가." 하니, 신돈이 두렵고 놀라 자기도 모르게 안석을 내려왔습니다. 왕은 더욱 노하여 존오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는데, 이색(李穡)의 변호로 죽음을 면하고,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으며 공주(公州) 석탄(石灘)에 물러가 살았습니다.
그 후 신돈의 세력이 더욱 치성해지므로 걱정스럽고 분개함이 병이 되었는데, 병이 위독해지자 좌우를 시켜 자신을 붙들어 일으키게 하고 말하기를, “신돈의 세력이 아직도 치성한가? 신돈이 망해야 내가 망할 것이다." 하고는, 자리에 돌아와 편히 눕기도 전에 죽었습니다.
최씨(崔氏)는 영암(靈岩) 사람 인우(仁祐)의 딸인데 진주(晉州)의 아전 정만(鄭滿)에게 시집갔습니다. 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 기미년(1379)에 왜적이 진주를 침범하자, 최씨가 아이들을 안고 이끌고 하여 산중으로 도망가 숨었는데, 왜적이 칼을 뽑아들고 협박하였습니다. 그러자 최씨는 나무를 안고 항거하면서 꾸짖기를, “적에게 욕을 당하고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의리에 죽겠다."고 하면서, 욕설이 입에서 끊이지 않으므로 적이 마침내 그를 해쳤습니다. 국초(國初)에 정문이 세워졌습니다.
약가(藥哥)는 선산(善山) 사람 조을생(趙乙生)의 아내입니다. 을생이 왜구(倭寇)에게 붙들려 간 후, 약가는 남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고기도 먹지 않고, 훈채도 먹지 않고, 의복도 벗지 않은 채 잠을 자곤 하였습니다. 부모가 그를 다른 데로 시집보내려 하자 그는 죽기로 맹세하고 따르지 않았습니다. 8년 만에 을생이 돌아왔는데 다시 부부 생활을 처음과 같이 하였습니다.
최씨(崔氏)는 충주(忠州) 사람으로 부사(府使) 한약(韓約)과 정혼(定婚)하였는데, 한약이 일본(日本)으로 정벌을 나갔다가 전사하자, 최씨는 종신토록 절개를 지켰습니다. 그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정문이 세워졌습니다.
서씨(徐氏)는 풍기(?基) 사람 사달(思達)의 딸인데, 같은 군 사람 도운봉(都雲峯)에게 시집간 지 겨우 1년 만에 남편이 죽자, 예에 지나치도록 슬퍼하였습니다. 그리고 매일 당(堂) 뒤의 대밭에 가서 대를 안고 울부짖으니, 갑자기 하루는 흰 대[白竹] 세 그루가 났는데,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에 흰 대가 7~8그루에 이르렀습니다. 정통(正統 명 영종(明英宗)의 연호) 무오년(1438)에 장헌왕(莊憲王)께서 흰 대를 그림으로 그려 올리라고 명하시고, 조세(租稅)를 면제해 주고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습니다.
손씨(孫氏)는 밀양부(密陽府) 사람 윤하(胤河)의 딸입니다. 16세에 초계(草溪) 사람 안근(安近)에게 시집갔는데, 시집간 지 겨우 수일 만에 안근이 죽자, 3년 동안 슬피 울며 몸소 조석(朝夕)의 전(奠)을 올렸습니다. 삼년상을 마치자 조부모(祖父母)가 나이 어린 것을 불쌍히 여겨 재가(再嫁)시키려고 하니, 손씨가 죽기로써 굳이 거절하였습니다. 조부가 노하여 다시 그를 강제로 재가시키려 하자 손씨가 남몰래 동산의 대숲으로 들어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으려 하였는데, 그의 언니가 발견하여 풀어주니, 즉시 시집으로 돌아가 살았습니다. 시집에 와서는 조석으로 반드시 먼저 남편에게 제(祭)한 다음에 밥을 먹곤 했는데, 32세에 죽었습니다.
양씨(梁氏)는 무주(茂朱) 사람 구길생(具吉生)의 아내입니다. 길생이 죽자 조석으로 친히 전(奠)을 올렸는데, 하루는 전을 올리러 가서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가 괴이하게 여겨 찾아 보니, 초빈[殯]을 열고 관(棺)을 안고서 곡을 하고 있으므로 부모가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그때 마침 집 앞 냇물이 한창 불었는데 양씨가 갑자기 물로 뛰어들자, 그의 언니가 건져내어 구했습니다. 그러나 몇 달 뒤에는 다시 자기 침실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으니, 부모가 그를 슬프게 여겨 그의 남편과 한 묘혈(墓穴)에 장사지내 주었습니다.
성이(性伊)는 김해부(金海府)의 아전 허후동(許厚同)의 아내였습니다. 20세 때에 남편이 죽으니, 조석으로 전 드리는 도구들을 정결하게 하기 위하여 솥과 도마를 별도로 설치해 두고 제수를 장만하였으며, 초하루와 보름을 만날 때마다 시물(時物)을 준비하고 시복(時服)을 지어 입고서 제사를 지내되 제사를 마치고 나서는 시복을 불태워버렸습니다. 그리고 항상 강포한 자에게 혹 몸을 더럽히게 될까 염려하여 칼과 노끈을 휴대하고서 스스로 맹세하기를, “칼로 자결하지 못하면 노끈으로 목을 매어 죽으리라." 하였습니다. 3년 동안 몹시 슬피 울었고 남들과 대면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정문이 세워졌습니다.
배씨(裵氏)는 성주(星州) 사람 이동교(李東郊)의 아내였습니다. 홍무(洪武 명 태조의 연호) 경신년(1380)에 왜적(倭賊)이 그곳에 침노하여 배씨가 사는 마을에 갑자기 쳐들어오자, 배씨가 젖먹이 아들을 안고 달아났습니다. 적이 그녀를 뒤쫓아 강가에 이르렀는데, 강물이 한창 불어 있었으므로 배씨는 달아날 수 없음을 알고 강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러자 적이 화살을 활시위에 끼우고 겨누면서 말하기를, “이리로 나와라. 너를 살려주겠다." 하였으나, 배씨는 욕을 하며 말하기를, “왜 빨리 나를 죽이지 않느냐. 내가 어찌 적에게 몸을 더럽힐 수 있겠느냐." 하니, 적이 화살을 쏘아 배씨의 어깨를 적중시키니 마침내 강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국초에 정문이 세워졌습니다.
임씨(林氏)는 전주부(全州府) 사람 지낙안군사(知樂安郡事) 최극부(崔克孚)의 아내입니다. 왜적이 그곳에 침범했을 때 임씨가 그들에게 붙잡혔는데, 적이 임씨를 겁탈하려 하였습니다. 임씨가 굳이 거절하자, 적이 임씨의 팔 하나를 자르고 또 다리 하나까지 잘랐으나, 임씨는 끝내 굴하지 않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국초에 정문이 세워졌습니다.
본국은 기자(箕子)가 와서 봉해짐으로부터 구주(九疇)로 교화를 베풀고 팔조(八條)로 정치를 하여 인현(仁賢)의 교화가 저절로 신명(神明)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공맹의 심학(心學)을 터득하고 기자의 주수(疇數)에 밝은 선비로서 세상에 이름난 이들이 반드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군(四郡)ㆍ이부(二府) 시대 이후로 삼국(三國)이 갈라져 싸움으로써 전쟁의 분탕 속에 문적(文籍)이 죄다 흩어져 없어져서 공맹의 도를 전할 사람이 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진작 세상에 이름을 떨쳤던 사람마저도 알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 후 신라(新羅)가 삼국을 통일하였습니다. 고려(高麗) 5백여 연간에 걸쳐서는 세도(世道)가 높아지고 문풍(文風)이 점차 열리어, 중국에 유학하는 선비가 많아지고 경적(經籍)이 널리 퍼짐으로써 중국의 문명을 수용하여 오랑캐의 풍속을 변개하게 되고, 난세가 치세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시서(詩書)의 은택과 예의의 풍속이 점차로 기자(箕子)가 베푼 구주(九疇)의 옛 풍속을 회복하게 되었으니, 중국으로부터 ‘문헌(文獻)의 나라’ 또는 ‘군자의 나라’라고 칭찬을 받는 것이 바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라와 고려 2대(代)의 선비들은 학문의 중점이 끝내 언어와 문장 사이에 있었는데, 고려 말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주(程朱)의 서적이 차차로 우리나라에 들어왔기 때문에 우탁(禹倬)ㆍ정몽주(鄭夢周) 같은 이들이 성리학(性理學)의 이론을 참고하여 연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국조(國朝)에 이르러서는, 태종문황제(太宗文皇帝)께서 《사서대전(四書大全)》과 《오경대전(五經大全)》ㆍ《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서적을 반포하심으로 인하여, 본국이 그것으로 과(科)를 설치해서 선비들을 뽑았고, 또 사서(四書)와 삼경(三經)에 통달한 자들도 그 선발에 들 수 있도록 하였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선비들이 외우고 익히는 것이 모두가 공자ㆍ맹자ㆍ정자ㆍ주자의 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혹은 무기력하게 구습(舊習)만 따름으로써 드러내지 못하고 살피지도 못하며, 혹은 뜻이 지나치게 커서 학문과 수양이 높기는 하나 알맞게 재량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능히 홀로 뛰어난 견해를 가지고 개연히 분발하여 성현의 학문에 종사한 사람도 가끔 있었으나, 또한 많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제가 열거하는 몇 사람은 모두 이미 죽은 사람들이고, 현재 생존한 사람에 대해서는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몇 사람들은 선현의 세대보다 천여 년 뒤에 태어났고 궁벽한 바다 가운데서 살았기 때문에 성현의 문하에서 직접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으니, 그들이 성현의 심학(心學)을 잘 알았다고 하기는 어렵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일생 동안 여기에 힘을 썼고 보면, 심학을 공부하는 무리야 되지 못하겠습니까.
그리고 기자(箕子)의 홍범(洪範)에 대해서는 주희(朱熹)와 채원정(蔡元定)의 설(說)이 의리를 발명하는 데 있어 조금도 미진함이 없이 하였기 때문에 흐름을 인하여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것을 터득한 사람도 또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수(數)에 대해서는 구봉(九峯)의 내편도설(內篇圖說)이 비록 있고, 원락자(苑洛子)의 발명(發明)도 있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수에 밝았다는 사람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근세에 이순(李純)이라는 사람이 그 설에 능통했다고 자칭하면서 주해(註解)를 짓기까지 하였지만 그것이 과연 오류가 없는지는 또한 모르겠습니다.
설총(薛聰)은 신라 사람입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예민하였습니다. 이미 자라서는 널리 배워, 능히 방언(方言)으로 구경(九經)의 뜻을 해석하여 후진들을 훈도하였고, 또 글도 잘 지었습니다.
최치원(崔致遠)은 신라 사람입니다. 그는 정밀하고 예민하며 학문을 좋아하여 12세에 배를 타고 당(唐) 나라에 들어가 배움의 길을 찾았습니다. 18세에는 당 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선주율수현위(宣州?水縣尉)가 되었고, 시어사(侍御史)ㆍ내공봉(內供奉)에 옮겨졌습니다. 또 고변(高騈)의 종사관이 되었는데, 그가 지은 역적 황소(黃巢)를 토벌한 격문(檄文)에, “온 천하 사람이 모두 그를 공개로 처형할 것을 생각할 뿐만 아니라, 또한 지하의 귀신들도 이미 은밀히 베어 죽이기를 의논하고 있다.[不惟天下之人皆思顯戮 抑亦地中之鬼已議陰誅]"라는 구절이 있었으므로, 황소는 그 글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평상에서 내려오고 말았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이 천하에 떨쳤습니다.
광계(光啓 당 희종(唐僖宗)의 연호) 원년에 황제의 명을 받들고 본국으로 돌아와, 스스로 중국에 가서 많이 배워 얻은 것을 가지고 가슴속에 품은 경륜을 한번 펴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난세를 만났기 때문에 스스로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마음아프게 여기어 더 이상 벼슬할 뜻을 버리고서 가족을 거느리고 가야산(伽倻山)에 은거하여 일생을 마쳤습니다.
그가 저술한 《사륙집(四六集)》 1권,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이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에 실려 있습니다. 고려 현왕(顯王) 때에, 설총과 최치원이 모두 동국(東國)의 문교(文敎)에 공이 있었다 하여 문묘(文廟) 서무(西?)의 아래쪽에 배향하였는데, 지금까지도 배향되어 있습니다.
최충(崔?)은 해주(海州) 사람입니다. 그는 풍모가 뛰어나고 기이하며 지조가 굳고 곧았습니다.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글도 잘 지었습니다. 고려 목왕(穆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그 후 4대의 왕을 내리 섬겼습니다. 자질이 문무를 겸비하여 나가면 장수가 되고 들어오면 정승이 되었습니다.
현왕(顯王)이 나라를 중흥시키면서부터 전쟁은 겨우 지식되었으나, 문교(文敎)는 아직 펼 겨를이 없었는데, 최충이 후진들을 불러모아 지성으로 가르치니, 생도들이 문에 그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낙성재(樂聖齋)ㆍ대중재(大中齋)ㆍ성명재(誠明齋)ㆍ경업재(敬業齋)ㆍ조도재(造道齋)ㆍ솔성재(率性齋)ㆍ진덕재(進德齋)ㆍ대화재(大和齋)ㆍ대빙재(待聘齋)라는 9개의 재(齋)를 나누어 만들고 생도들을 수용하였습니다. 이를 '시중최공도(侍中崔公徒)'라 하였는데, 모든 과거에 응시할 사람들은 반드시 먼저 이 최공도에 예속되어 학업을 닦았습니다. 우리 동방에 학교가 생긴 것은 대개 최충으로부터 시작되었으므로, 당시에 그를 '해동공자(海東孔子)'라 칭하였습니다. 뒤에 해주 사람들이 서원(書院)을 짓고 사우(祠宇)를 건립하여 그를 향사하고 있습니다.
안유(安裕)는 흥주(興州) 사람입니다. 벼슬은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에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사람됨이 장엄하고 정중하고 안온하고 자상하였으며, 일찍이 인재를 길러서 사문(斯文)을 흥복시키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학교의 제도가 크게 무너지고 유학(儒學)이 날로 쇠퇴해짐을 걱정하여, 문교의 진흥을 위해 국학(國學)에다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해서 길이 인재 교양의 자본으로 삼았습니다. 또 남은 돈을 중국 강남(江南)에 보내어 공자 및 그의 제자 70명의 화상(?像)을 그려와 모셨고, 또 제기(祭器)ㆍ악기(樂器)와 육경(六經)ㆍ제자(諸子)ㆍ사(史) 등의 서적을 구입해 와서 비치하였으며, 또 이산(李?)ㆍ이진(李?)을 천거하여 교관(敎官)으로 삼으니, 경(經)을 펴놓고 수업을 하는 생도가 수백 명에 이르렀습니다.
만년에는 일찍이 회암 선생(晦庵先生)의 진영(眞影)을 벽에 걸어두고 경모의 뜻을 다하였으며, 회헌(晦軒)이라 자호하였습니다. 그가 죽자 칠관(七館)ㆍ십이도(十二徒)가 모두 소복을 입고 노제(路祭 발인할 때 문앞에서 지내는 제사)를 지냈습니다. '문성(文成)'이란 시호를 내리고 문묘 서무(西?)의 아래쪽에 배향하였으며, 후인들이 또 서원을 건립하였습니다.
우탁(禹倬)은 단산(丹山) 사람입니다. 고려 충선왕(忠宣王) 때에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는데, 왕이 일찍이 덕을 손상한 일이 있자, 우탁이 흰옷을 입고서 도끼를 손에 쥐고 짚을 허리에 묶고 앉아 왕에게 글을 올려 과감하게 간(諫)하였습니다. 뒤에 성균좨주(成均祭酒)로 치사(致仕)하고 복주(福州)의 예안(禮安)에 물러가 살았는데, 충숙왕(忠肅王)이 그의 충의(忠義)를 가상하게 여겨 두 번이나 불렀지만 나오지 않았습니다.
우탁은 경사에 통하였고, 역학(易學)에는 더욱 깊이 통하였습니다. 정전(程傳《주역》에 대한 정자의 전)이 맨 처음 동방에 들어왔을 적에 아무도 그것을 아는 이가 없었는데, 우탁이 문을 닫고 한 달 남짓 연구한 끝에 그것을 해득하여 생도들에게 가르쳐 줌으로써 의리(義理)에 관한 학문이 비로소 행해졌습니다.
정몽주(鄭夢周)는 영일현(迎日縣) 사람입니다. 그는 사람됨이 지혜와 용기가 뛰어났고 충효(忠孝)의 큰 절개가 있었습니다.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열심히 공부하였고, 성리학(性理學)을 정밀히 연구하여 매우 깊은 소득이 있었습니다. 당시 경서(經書)가 동방에 들어온 것은 주자(朱子)의 집주(集註)였었는데, 몽주의 강설(講說)이 너무 뛰어나서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는 훨씬 벗어나므로, 듣는 이들이 자못 의심하였습니다. 그 후 호운봉(胡雲峯 운봉은 원 나라 호병문(胡炳文)의 호)의 《사서통해(四書通解)》를 얻어본 결과 몽주의 강설이 그의 설과 모두 합치되므로, 모든 선비들이 다 복종하여 그를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로 추앙하였습니다.
고려 말기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는데, 이때는 국가에 변고가 많아 기밀(機密)한 정무가 대단히 번잡하였습니다. 그러나 몽주는 큰일에 대처하고 큰 의문을 결단하는 데 있어, 언어와 안색을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좌우로 응답하여 모든 일을 다 타당하게 처리하였고, 새로이 건설한 것도 많았으므로, 당시에 제왕을 보좌할 만한 재목감이라 일컬어졌습니다.
당시의 풍속은,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에 있어 오로지 불교(佛敎)의 법을 숭상하였는데, 몽주가 비로소 사서인(士庶人)들로 하여금 주자의 《가례(家禮)》를 본받아 가묘(家廟)를 세워 조상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습니다. 또 도성 안에는 오부 학당(五部學堂)을 건립하고, 밖으로는 전국에 걸쳐 향교(鄕校)를 설치하여 유술(儒術)을 진흥시켰습니다. 그 밖에 의창(義倉)을 세워 궁핍한 이들을 진휼하고, 수참(水站)을 설치하여 조운(漕運)에 편리하도록 한 것도 모두 그가 계획한 것입니다.
그가 저술한 시문(詩文)은 호방하고도 준엄하고 개결하였습니다. 문충(文忠)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문묘 서무의 아래쪽에 배향되었습니다. 후인이 또 서원을 세웠습니다.
이색(李穡)은 한주(韓州) 사람입니다. 그는 고려 말기에 원(元) 나라에 들어가 제과(制科)의 제이갑(第二甲)으로 합격하고 본국에 돌아와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천품이 총명하고 예민하였으며 수많은 서적을 널리 열람하였는데, 시문을 짓는 데 있어서는, 붓을 잡으면 즉시 써내려가서 조금도 막힘이 없었습니다. 힘써 후학들을 진취시켜 사문(斯文)을 진흥시키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기 때문에 학자들이 모두 우러러 사모하였습니다. 나라의 문한(文翰)을 수십 년 동안 관장하였는데, 누차 중국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길재(吉再)는 선산(善山) 사람입니다. 그는 고려 말기에 주서(注書)를 지냈는데, 지조가 고결하고 학문이 순정(醇正)하였습니다. 그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가 있을 적에는 시골 사람들까지 그의 인품에 감화되어, 아무리 못난 사람일지라도 또한 자기 몸을 선으로 신칙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국초에 누차 불렀으나 나오지 않고, 자기 집에서 죽었습니다.
윤상(尹祥)은 경상도 예천(醴泉)의 군리(郡吏)였는데, 문과에 급제하여 장헌왕(莊憲王)을 섬겨 벼슬이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학문이 정밀하고 깊었으며, 지성으로 남을 가르쳐 근대 사유(師儒)의 으뜸이 되었습니다.
김종직(金宗直)은 경상도 선산부(善山府) 사람입니다. 강정왕(康靖王)을 섬겨 벼슬이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학문이 정밀하고 깊었으며, 문장이 고상하고 고아하며 한 시대의 유종(儒宗)이 되었습니다. 또 후진들을 지성으로 가르쳐 전후의 명사(名士)가 그의 문하에서 많이 나왔으며, 점필재 선생(?畢齋先生)이라고 일컬어졌습니다.
김굉필(金宏弼)은 황해도(黃海道) 서흥부(瑞興府) 사람입니다. 그는 뜻을 독실히 하고 행실을 힘썼으며, 예법으로 몸을 단속하되 시종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이학(理學)을 정밀히 연구하였고 지성으로 후진들을 가르쳤습니다. 강정왕 때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벼슬이 좌랑(佐郞)에 이르렀습니다. 공희왕(恭僖王)께서 그에게 영의정(領議政)을 증직하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습니다.
정여창(鄭汝昌)은 경상도 함양군(咸陽郡) 사람인데, 벼슬은 현감(縣監)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옛 도(道)를 독실히 믿고 의(義)를 좋아하였으며, 학문은 실천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김굉필과 함께 점필재 선생을 사사(師事)하여, 뜻이 서로 같고 도가 서로 합치되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김정(金鄭)'이라 일컬었습니다. 호는 일두(一?)라 자호하였습니다. 공희왕께서 우의정(右議政)을 증직하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는데, 그 후에 함양군 사람들이 또 서원을 세워 제사하고 있습니다.
조광조(趙光祖)는 한성부(漢城府) 사람입니다. 공희왕을 섬겨 벼슬은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천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며, 행실은 옛사람보다 뛰어났습니다. 김굉필을 사사하여 믿음을 돈독히 하고 학문에 힘썼으며, 도술(道術)을 밝히고 인심(人心)을 선하게 하여 온 세상을 태평 시대로 인도하는 데 뜻이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일찍 죽었습니다.
김안국(金安國)은 경상도 의성현(義城縣) 사람입니다. 공희왕을 섬겨 벼슬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습니다. 학문이 정밀하고 해박하여 선비들의 사범이 되었습니다. 모재 선생(慕齋先生)이라 호칭합니다.
이언적(李彦迪)은 경상도 경주(慶州) 사람입니다. 그는 성품이 침착하고 조용하고 단정하고 정성스러우며, 효도하고 우애하고 충직하고 신의가 있었습니다. 특히 성리학을 독실하게 좋아하며 조예가 매우 깊었습니다. 그가 공희왕ㆍ영정왕(榮靖王 인종)ㆍ신훙왕(新薨王 명종)을 섬기면서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나라 다스리는 모책을 진언한 실상은 그가 배운 것에 전혀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그가 논한 무극태극서(無極太極書) 4~5편은 정자ㆍ주자의 오묘한 뜻에서 얻은 것이 있다고 합니다.
서경덕(徐敬德)은 개성부(開城府) 사람입니다. 그는 화담(花潭)에 은거하며 성리학을 강론하여 밝혔는데, 수학(數學)에 더욱 정통하였습니다. 공희왕께서 누차 불렀으나 나오지 않고 집에서 죽었습니다. 신훙왕께서 그에게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증직하였습니다.
본국의 8도(道) 중에 어느 도의 백성은 무슨 일을 익히는지, 예를 들면 선비가 많다든가, 혹은 농부가 많다든가, 혹은 어느 종류의 공예(工藝)가 많다든가, 또는 어느 종류의 장사꾼이 많다든가, 무슨 화물(貨物)이나 미포(米布)가 많이 난다든가, 또 요즘 백성들은 무슨 고통이 있으며, 혹은 부녀자들은 무슨 일을 익히고 있으며, 풍속과 교화는 어떠한지, 아무 곳과 아무 곳이 서로 다른 점 등을 하나하나 자상하게 기록하라.
본국은 모두 8도인데, 경기(京畿)가 중앙에 위치해 있고, 동쪽은 강원도(江原道), 동남쪽은 경상도(慶尙道), 남쪽은 청홍도(淸洪道)와 전라도(全羅道), 서쪽 맨 가는 황해도(黃海道), 서북쪽은 평안도(平安道), 동북쪽은 함경도(咸鏡道)입니다.
경(卿)이나 사(士)의 후손은 대대로 그 업을 지키는데, 이를 사족이라 합니다. 그들은 모두 시서(詩書)를 외고 익히는데 그것에 능하지 못한 사람은 무예를 익히기도 합니다. 서인의 자식도 글을 배우는 사람이 많고 혹은 무예를 익히기도 하는데, 이 가운데 하나도 능하지 못한 사람은 농사꾼이 되기도 하고 공장(工匠)이 되기도 합니다.
전라도ㆍ경상도ㆍ청홍도는 토지가 비옥하고, 민물(民物)이 번성하며 재부(財賦)가 많고 인재가 배출되는 것이 다른 도의 배나 됩니다. 그리고 평안도와 함경도는 한대 지방이고 기(氣)가 강하여 풍속이 활쏘고 말달리는 것을 숭상합니다. 8도가 대부분 바다를 끼고 있어 백성들은 어염(魚鹽)으로 생활을 영위하고 있고, 내륙 지방에 사는 백성들은 모두 농업에 힘쓰고 다른 업은 일삼지 않습니다.
그리고 공장(工匠)이 집기(什器)를 만들고 장사꾼이 재화(財貨)를 유통시키는 일은 8도가 다 마찬가지이지만 도성(都城) 주위에 더욱 성행합니다. 물품을 사는 데 있어서는 금(金)ㆍ은(銀)ㆍ동(銅)ㆍ철(鐵)을 사용하지 않고 다만 사(紗)ㆍ마(麻)ㆍ속미(粟米)를 가지고 서로 교역하기 때문에 부녀자들은 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다 누에를 치고 베짜는 것을 일삼으며, 천한 부녀자들은 심지어 농사일과 물 긷고 절구질하는 일 등에 종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조선이 개국한 이후 근 2백 년 동안에 걸쳐 백성들이 생업에 편안히 종사해왔고 전쟁으로 인한 걱정은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때로 수재나 한재를 만나기 때문에 괴로움이 없지는 않습니다.
도성 안에는 성균관(成均館)을 설치하고 또 사학(四學)을 설치했으며, 주(州)ㆍ부(府)ㆍ군(郡)ㆍ현(縣)에는 모두 향교를 설치하고 각각 사장(師長)을 두어 육행(六行 효(孝)ㆍ우(友)ㆍ목(睦)ㆍ인(姻)ㆍ임(任)ㆍ휼(恤))과 육예(六藝 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선비들이 모두 예의에 흥기하고 있으니, 이곳이 비록 작은 나라이기는 하지만 대대로 닦아온 정사는 실상 황조(皇朝)의 풍속과 교화가 미쳐온 바입니다.
본국은 어떻게 선비를 취하며, 모든 관원(官員)의 출신(出身)하는 길은 몇 가지나 있는가?
본국은 선비를 취하는 데 있어, 으레 자(子)ㆍ오(午)ㆍ묘(卯)ㆍ 유(酉)년마다 대비(大比)하여 선비를 뽑는 중국의 예에 의거해서 시험을 실시하되, 문과의 경우는 사서 삼경에 통한 자를 취한 다음 또 시문을 시험하고, 무과의 경우는 무예를 시험하고 또 글을 강(講)하게 하여 모두 3등으로 나눕니다. 그래서 문과는 33인을 취하고 무과는 28인을 취하는데, 이것을 식년출신(式年出身)이라 칭합니다. 또 시부(詩賦)와 경의(經義)로 선비를 취하는 것을 생원(生員)ㆍ진사(進士)라 하는데, 이들은 모두 2백 인을 뽑아 국학(國學)에 충원합니다. 만일 일시적인 왕의 은명(恩命)이 있어 특별히 문사나 무사를 취하는 경우는 이를 별시출신(別試出身)이라 합니다.
그리고 문음직(門蔭職)의 경우는, 경대부(卿大夫)의 자제로서 자질이 관리의 사무를 감당할 만한 자를 취하여 시의적절하게 서용하는 것이고, 혹은 경학에 밝거나, 행실이 훌륭하거나, 효우(孝友)가 뛰어나거나, 유일(遺逸)의 선비가 있을 경우에는 특별히 한계를 뛰어넘어 서용하고 있습니다. 그 밖의 의(醫)ㆍ역(譯)ㆍ음양(陰陽) 등 방술(方術)에 대해서도 역시 과시(科試)를 설치하여 취하되, 다만 본아문(本衙門)에만 서용합니다.
[주D-001]주수(疇數) :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큰 법칙인《書經》홍범(洪範)의 구주(九疇)를 말함. 이는 맨 처음 하우씨(夏禹氏)가 낙수(洛水)에서 나온 신귀(神鬼)에게서 얻은 것인데, 이것이 대대로 전해져 기자(箕子)에 이르러 기자가 무왕(武王)의 물음에 대답한 이후로 세상에 알려졌다고 한다.
[주D-002]새의……하시고 : 노(魯) 나라 때 해조(海鳥)가 노 나라 교외(郊外)에 날아와 앉자, 노 나라 임금은 그 새를 모셔다가 종묘에서 잔치를 베풀고 순(舜) 임금의 음악인 구소(九韶)를 연주하고, 소·양·돼지고기로 대접하니, 그 새는 어리둥절하여 근심하고 슬퍼하다가 3일 만에 죽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莊子至樂》
[주D-003]팔조(八條) : 여덟 가지 가르침[八條之敎]의 준말로, 기자(箕子)가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해 제정한 법금(法禁)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살인(殺人)·상해(傷害)·투도(偸盜) 등 세 가지만이 전할 뿐이다.
[주D-004]사군(四郡)·이부(二府) 시대 : 사군은 한 무제(漢武帝) 원봉(元封) 3년(B.C. 108)에 위만조선(衛滿朝鮮)을 없애고 그 옛땅에 둔 낙랑·임둔·현도·진번의 네 군을 말하는데, 각 군에는 한 나라의 군현제(郡縣制)에 따라 여러 속현(屬縣)이 각각 설치되었다. 이부는 한 소제(漢昭帝) 시원(始元) 5년(B.C. 82)에 사군을 다시 합하여 평주(平州)·동부(東府) 두 도독부(都督府)로 만들었던 것을 말한다.
[주D-005]구봉(九峯)의 내편도설(內篇圖說) : 구봉은 송(宋) 나라 채침(蔡沈)의 호. 채침이 《홍범황극내편(洪範皇極內篇)》을 저술하였다. 《宋史 卷四百三十四》
[주D-006]원락자(苑洛子)의 발명(發明) : 원락자는 명(明) 나라 한방기(韓邦奇)의 호. 발명은 곧 한방기가 저술한《홍범도해(洪範圖解)》를 가리킨다. (明史卷二百一)
[주D-007]칠관(七館)·십이도(十二徒) : 칠관은 고려(高麗) 때 국학(國學)의 여택(麗擇)·대빙(待 聘)·경덕(經德)·구인(求仁)·복응(服膺)·양정(養正)·강예(講藝)의 일곱 가지 분과(分科)의 관(館)을 말하고, 십이도는 고려 때에 있었던 12사학(私學), 즉 문헌공도(文憲公徒)·홍문공도(弘文公徒)·광헌공도(匡憲公徒)·남산도(南山徒)·서원도(西園徒)·문충공도(文忠公徒)·양신공도(良愼公徒)·정경공도(貞敬公徒)·충평공도(忠平公徒)·정헌공도(貞憲公徒)·서시랑도(徐侍郞徒)·귀산도(龜山徒)를 가리킨다.
고봉선생문집 별집부록 제1권
제문(祭文)
제십일(第十一) 김계휘(金繼輝) 황강(黃岡)
세차(歲次) 계유년 정월 27일에 예조 참의 김계휘는 삼가 망우(亡友) 고봉 선생에게 고합니다.
아, 하늘이 사문(斯文)에 화를 내리는 것이 어찌 그리도 혹독합니까. 몇 해 전에는 퇴계 선생께서 돌아가시더니 이제는 우리 명언(明彦)이 또 고인(故人)이 되셨습니다. 하늘이 이 사람을 세상에 내놓을 때는 이 세상을 위한 뜻이 필시 없지 않았을 터인데 어찌 그리도 빨리 빼앗아 간단 말입니까. 옛날 대유(大儒)로서 능히 장수를 누린 자를 보건대 어떤 이는 경국제세(經國濟世)로 세도(世道)를 붙들기도 하고 어떤 이는 학설을 수립하여 도맥(道脈)을 튼튼히 하기도 하였습니다.
아, 그대의 수명은 겨우 46세로 살아 생전에는 이미 세상에 크게 쓰여져 가슴속에 지닌 것을 펴보지를 못했고 죽어서는 또 저술을 남겨 뒷사람의 길잡이가 된 것이 없으니, 어찌하여 타고난 자질은 풍부하면서 베풀어 쓴 것은 이처럼 적단 말입니까. 생사(生死) 수요(壽夭)와 한 번 오고 한 번 가는 그 사이를 조물주가 아니면 그 누구도 간섭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른바 현우(賢愚)ㆍ선악(善惡)은 다 사람이 억지로 붙인 이름으로서 하늘은 실제로 화를 내리고 복을 주는 것에는 무관한 것인지, 저 푸른 하늘은 참으로 아득하여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아, 오늘날의 세상 사람들은 성리(性理)의 학문에 어두워 진정 그대의 조예의 경지를 알지 못하지만, 퇴계는 한 시대의 유림 종장(儒林宗匠)으로서 의발(衣鉢)의 전수를 그대에게 부탁하였고, 조정을 하직하고 돌아가면서 성상을 면대하실 때 홀로 그대가 학문을 좋아한다고 천거하셨습니다. 조정에 들어와 남의 시기를 받는 것은 참으로 선비의 보통 있는 일이며, 더구나 학문을 좋아한다는 이 제목은 참소하는 자의 표적이 되는 것으로서 우리 동방의 제로(諸老) 선생(先生) 모두가 큰 화를 면치 못하셨으니, 우리 그대가 자주 황급하게 오가게 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원수 사이일지라도 감히 비난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대의 숙속(菽粟) 같은 문장입니다. 요즘에 지으신 제로(諸老)의 비문(碑文)ㆍ지문(誌文)ㆍ행장(行狀)은 또한 충분히 드러내놓고 고인(古人)에게 보이더라도 부끄러움이 없을 만합니다. 그 다음으로 어진이를 좋아하고 선비를 반기는 정성은 역색(易色)의 정도만이 아니었으니, 배우는 자들이 태산 북두처럼 추앙한 것이 어찌 한 문공(韓文公 한유(韓愈))과 구양영숙(歐陽永叔 구양수(歐陽脩))보다 못하였겠습니까.
나는 천품이 혼매하고 또 도를 배우는 것도 독실히 하지 못하여 반평생 동안 벗에게 신임을 받지 못하였는데 오직 그대가 문회(文會)의 일원으로 받아 주셨습니다. 그대의 언론을 듣노라면 마치 장강 대하(長江大河)가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는 것과 같아서 가슴속이 봄날에 얼음 녹듯이 시원함을 느꼈습니다. 정직함과 진실함과 식견이 많은 이 세 가지를 갖춘 자는 참으로 성인이 이른바 도움이 되는 벗인 것입니다. 옛사람이 "쇠란한 세상에 태어났지만 유감이 없는 것은 오직 아무개를 알았다는 것 때문이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참으로 내 마음을 먼저 터득한 것이었습니다.
아, 한강가 정관(亭館)에서 하룻밤을 묵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참담하게 조정을 떠날 때 나는 그래도 서로 사랑하는 벗의 입장에서 기대하기를 ‘초야에 편히 누워 있더라도 충분히 많은 선비의 긍식(矜式)이 될 것이고 또 그대의 혈기(血氣) 가운데 고르지 못한 부분을 전부 변화시켜 그 덕업(德業)을 더 높이고 넓힐 수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어찌 이 걸음으로 영영 유명(幽明)이 갈라질 줄 알았겠습니까. 그날 작별할 때의 말소리와 얼굴이 아직도 뇌리에 뚜렷하니, 흉금은 봄바람처럼 따스하고 얼굴빛은 지는 달처럼 쓸쓸하였습니다. 아, 가신 그대를 다시는 살릴 수 없습니다. 우리 도를 위하고 이 세상을 위하여 슬퍼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우선 천리 멀리 제문을 보내 나 개인의 슬픔을 곡합니다.
[주D-001]숙속(菽粟) 같은 문장 : 평범하면서도 맛이 깊은 문장. 주 16) 참조
[주D-002]역색(易色) : 《論語》學而의 "현인을 사랑하되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처럼 한다.[賢賢易色]"에서 나온 것임.
[주D-003]문회(文會) : 《論語》顔淵의 "군자는 문(文)으로써 벗을 모은다.[君子以文會友]"에서 나온 것으로 문인의 모임을 말함.
[주D-004]정직함과……것입니다 : 고봉이 김계휘(金繼輝) 자신에게 유익한 벗이라는 것임. 《論語》 季氏에 "이익이 되는 세 종류의 벗이 있고 손해가 되는 세 종류의 벗이 있는데, 정직한 벗을 사귀고 진실한 벗을 사귀고 식견이 많은 벗을 사귀면 도움이 된다.[益者三友 損者三友 友直 友諒 友多聞 益矣]" 하였음.
논사록
논사록 하편(論思錄下篇)
선조 2년 윤 6월 7일
7일 《논어》 양화편(陽貨篇)의 ‘공자가 무성에 가서[子之武城]’에서부터 ‘그가 반드시 고칠 수 없음을 알았다.[知其必不能改也]’까지 강하였다. 승지 기대승이 글을 대하고 아뢰기를,
"예악(禮樂)을 잠시라도 몸에서 떠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예악이 차례를 잃으면 만사가 전도됩니다. 옛 예와 옛 음악을 지금 다시 볼 수는 없으나, 그 마음을 배우고 그 소리를 찾아볼 수는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10실(室)밖에 안 되는 작은 고을도 예악을 가르치면 사람들이 서로 읍(揖)하고 양보하여 풍속이 점점 후하게 됩니다. 20년 전에는 한 도의 책임을 맡은 자가 혹 알성(謁聖)하는 예를 행하여 유교를 흥기시켰는데, 을묘왜변(乙卯倭變)이 난 뒤로는 군정(軍政)에만 전념하여 다시는 유학을 권장하는 일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문치(文治)를 잘한다고 알려진 자들도 겨우 서원이나 보수하고 유생들의 음식을 공급하는 데에 불과할 뿐 선한 데로 나아가게끔 교도한다는 말은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훌륭한 치도를 이룩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교화가 있은 뒤에야 사람들이 보고 감동하는 아름다움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고는 하나 가르치지 않으면 성취시킬 수가 없습니다. 전조(前朝) 공민왕 때에 이색(李穡)이 선비들을 모아 가르쳤으므로, 충신과 의사들이 그 문하에서 많이 나왔습니다. 정몽주(鄭夢周)는 전적으로 이색에게서 배운 것은 아니나, 그 역시 권장을 받아 흥기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 학교의 정사와 교양하는 방법에 유념하시어 훌륭한 인재가 없다고 체념하지 않으시고 성심껏 시행하신다면, 교화를 점점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색은 선한 사람인가?"
하자, 기대승이 아뢰기를,
"이색은 젊었을 때에 중원에 들어가서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원 나라에서 벼슬하였는데, 재주가 높고 학문이 넓으며 문장이 매우 높습니다. 고려가 장차 망할 적에 유배되어 외지에 있었는데, 태조가 즉위한 다음 즉시 명하여 석방하고는 불러 보고 예우하였으며, 또 그로 하여금 벼슬하도록 하였으나 뜻을 굽히지 않고 그대로 죽었습니다. 단 고려 시대에는 불교를 숭상하였으므로, 모든 사찰(寺刹)의 기문(記文)과 불경(佛經)의 서문(序文)이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으므로, 선비들은 이것을 그의 단점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대저 이 분은 비록 학문한 사람은 아니나, 기절이 매우 높으며 또 유자의 학문에도 소견이 많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도 매우 공로가 있으니, 실로 우리나라 학문의 원류(源流)라 할 것입니다. 단 조정에서 벼슬할 때에 까마득한 절벽이 우뚝 선 듯한 높은 기상으로 굳세게 대처하지 못하여 시속에 따라 부침(浮沈)한 병통이 없지 않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학문은 기자(箕子) 때에는 상고할 만한 서적이 없고, 삼국 시대에는 천품은 비록 순수하고 아름다운 자가 있었으나 학문의 공부가 없었으며, 고려 때에 이르러서는 차츰 유학이 있음을 알았으나 전적으로 사장학(詞章學)을 주로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고려 말기에 우탁(禹倬)ㆍ정몽주(鄭夢周) 등이 비로소 성리학과 자신을 위하는 학문[爲己之學]을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세종 때에 예악과 문물이 환하게 일신되고, 유명한 유자들이 이어 나와서 학술이 비로소 밝아졌습니다.
동방의 학문이 서로 전해온 순서로 말한다면 정몽주가 동방 이학(理學)의 조종(祖宗)이라 할 것입니다. 길재(吉再)는 정몽주에게서 배웠고, 김숙자(金叔滋)는 길재에게서 배웠으며, 김종직(金宗直)은 김숙자에게서 배웠고, 김굉필(金宏弼)은 김종직에게서 배웠으며, 조광조(趙光祖)는 또 김굉필에게서 배웠습니다. 조광조는 연원(淵源)의 올바름을 잇고, 명선(明善)ㆍ성신(誠身)의 실제를 얻어서 더욱더 훌륭하게 되었습니다. 근래에 성현의 학문에 종사하는 자들이 매우 많습니다. 신이 여론을 듣건대, 지난 기묘년보다도 많다고 합니다. 성상께서 힘써 교화를 주장하고 이것을 권장하여 성취시킨다면, 지금이야말로 옛날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근래에 여항에 있는 미천한 자들도 모두 상례(喪禮)를 따르고 있으며, 혹은 청상과부로서 절개를 지키고 시집가지 않는 자도 있는데, 이는 모두 기묘 연간에 진작(振作)시킨 효과입니다. 다만 조광조는 나이 38세로 화를 만났기 때문에 미처 책을 저술하여 후세에 전할 겨를이 없었으니, 이 역시 사문(斯文)의 불행이라 하겠습니다."
하였다. 윤근수(尹根壽)가 아뢰기를,
"듣건대 하루는 명종께서 전교하시기를 ‘여항에서 마땅히 《소학》을 읽어야 한다.’ 하시자, 윤개(尹漑)가 정승으로 있다가 이 전교를 듣고 찬양하였다 합니다. 그러자 윤원형(尹元衡)이 ‘사람은 마땅히 마음속으로 선을 하여야 한다. 기묘년에 《소학》을 숭상하였으나 신사년에 난리가 났고 을사년에 또 난역(亂逆)이 생겼으니 《소학》은 난역의 글이다.’ 하였는데, 윤개가 이 말을 듣고 벌벌 떨었다 하니, 윤원형의 심술을 여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윤원형이 국가에 죄를 지은 것이 이루 말할 수가 없는데, 이제 이 말을 듣고 보니, 선현들을 모두 비방하였는바 그는 참으로 만세(萬世)에 죄를 지은 자이다."
하였다. 기대승이 아뢰기를,
"한탁주(韓??)는 주자(朱子)를 위학(僞學)이라고 비난하였고, 공문중(孔文仲)은 정자(程子)를 간사한 사람이라고 훼방하였으니,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윤원로(尹元老)와 윤원형은 바로 형제간인데, 두 사람이 다 간사하고 음흉하였습니다. 명종이 즉위 초에 대번에 윤원로를 축출하자 윤원로는 공신에 참여되지 못한 채 아우 원형을 원망하였습니다. 이에 윤원형은 윤춘년(尹春年)을 사주하여 상소를 올리게 하여 그를 쫓아내고는 죽였습니다. 윤원로의 죄는 죽어 마땅하나 그를 죽인 자는 윤원형이었습니다. 형제 친척간에도 오히려 이와 같았으니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겁내는 것이 어찌 다함이 있었겠습니까. 예로부터 간사한 소인으로 윤원형처럼 심한 자가 있지 않았습니다. 옛일을 잊지 않는 것은 뒷일의 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윤원형 같은 소인은 진실로 드물지만 아첨하는 소소한 무리들이야 어느 시대인들 없겠습니까. 소인들이 혹시라도 틈을 타 들어온다면 또한 성치(聖治)에 누가 될 수 있으니, 삼가 원하건대 상께서는 사욕을 극복하고 선을 따라 어진 선비들을 가까이 하소서. 그러면 세도(世道)가 자연 청명해질 것입니다."
하고, 윤근수가 아뢰기를,
"을사년에 죄를 받은 사람 중에 권벌(權?)과 이언적(李彦迪)은 이미 표창과 증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또 송인수(宋麟壽)란 사람이 있는데, 그는 바로 선인군자(善人君子)였습니다. 학문에 종사하고 효행이 탁월하였는데, 얼굴빛을 바르게 하고 조정에서 벼슬하다가 원흉들에게 거슬려 죄를 받고 죽었습니다."
하고, 기대승이 아뢰기를,
"처음에는 그를 부박(浮薄)한 무리의 영수라 하여 파직하였고, 뒤에는 양재역 벽서(良才驛壁書) 사건으로 인하여 사약을 내리기까지 하였으며, 회맹문(會盟文)에는 그를 모반했다고까지 하였습니다. 송인수는 일생 동안 기묘년의 여러 현인들을 흠모하였습니다. 계묘년(중종 28, 1543)과 다음해인 갑진년에는 전라감사가 되어서 《소학》을 읽을 것을 권면하고 후생들을 이끌어 주었으니, 그 당시 《소학》을 읽고서 흥기한 자들은 다 송인수의 공로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그도 함께 포양(褒揚)하고 추증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여름철이 비록 천둥이 치고 비가 오는 때라고는 하나, 장마가 너무 지나쳐서 호남과 영남에 수재가 극히 참혹합니다. 봄에는 한해(旱害)가 있었고, 여름에는 수해가 있어서 벼와 곡식이 크게 감손되었으니,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해 살겠습니까. 이것은 천지의 나쁜 기운 때문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군주의 한 생각이 천지의 조화를 도와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용》에 이르기를 ‘중화(中和)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찾고 만물이 잘 길러진다.’ 하였습니다. 계근공구(戒謹恐懼)하는 것으로부터 정(精)하게 하고 요약해서 군주의 마음이 바루어져 천지의 마음도 바루어지고 군주의 기운이 순하여져 천지의 기운도 순하게 되면, 비오고 볕나는 것이 때에 맞아서 천지가 제자리를 찾게 될 것입니다. 삼대(三代) 전성기에는 새와 짐승 고기와 자라에 이르기까지 모두 잘 자랐으니, 천지의 기운이 화(和)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효과를 이룬 것입니다. 당 태종 때에 수재와 한해가 있었어도 백성들이 원망하지 않았는데, 이는 군주가 걱정하고 부지런히 힘써서 백성들을 위무(慰撫)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끝내는 풍년이 들어 쌀 한 말에 3전(錢)하는 효과를 거두었으니, 그가 인의(仁義)를 진심으로 행하지 않고 겉으로만 행하였다고는 하나, 이 또한 위징(魏徵)이 선정을 행하도록 권면한 소치입니다. 금년에는 농사가 지극히 우려할 만하니, 성상께서 각별히 유념하시고 극진히 수성(修省)해서 천심을 돌리도록 하셔야 할 것입니다. 군주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성실하지 못해서 백성들이 유리(流離)하여 살 곳을 잃게 된다면 천심인들 어찌 진노하지 않겠습니까. 군주는 억조 백성의 위에 계시어 다른 것은 두려울 만한 것이 없으나, 위에서 굽어보는 황천(皇天)이 계시니, 하나의 잘못된 생각에도 매양 상제(上帝)가 진노하실까 두려워하신다면 천심이 기뻐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이 지당하다."
하자, 기대승이 아뢰기를,
"성교가 이와 같으시니, 감격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성상께서 한가로울 때에도 조금도 중단하지 않으신다면, 덕이 날로 진전되어 천지와 더불어 동등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주D-001]신사년에……생겼으니 : 신사년의 일은 중종 16년(1521)에 일어난 신사무옥(辛巳誣獄)을 가리킨다. 기묘사화 이후 심정(沈貞)·남곤(南袞) 등이 세력을 떨치자, 안당(安?)의 아들 처겸(處謙)이 이정숙(李正叔) 등과 함께 남곤·심정이 사림을 해치고 국정을 망친다 하여 제거할 것을 모의하였다. 이때 함께 있던 송사련(宋祀連)이 처겸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의 조객록(弔客錄)을 가지고 고변(告變)하여 대신을 모해하려 한다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안씨 일족과 이약빙(李若氷) 등 수많은 사람이 처형되었다. 을사년의 일은 을사사화를 가리킨다.
[주D-002]양재역 벽서(良才驛壁書) 사건 : 명종 2년(1547)에 정언각(鄭彦慤)이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양재역에서 '여주(女主 : 문정왕후)가 집권하고 간신 이기(李?) 등이 권력을 남용하여 나라가 망하려 하니, 한심하지 않은가.'라는 익명의 벽서를 발견하고, 이기·윤인경(尹仁鏡)·정순붕(鄭順朋) 등에게 알리자, 반대파들의 소행으로 몰아 사림을 대거 숙청하고 권력을 독점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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