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가정 이곡.목은 이색

[스크랩] 국조보감 -신숙주-

장안봉(微山) 2013. 5. 28. 22:58

국조보감 제1   

 

 

 태조조(太祖朝)

 

 

4(을해, 1395)

 

 

4. 재변으로 인하여 구언(求言)을 하였다. 하교하기를,

 

"시기적으로 양기(陽氣)가 한창인 달에 이같은 음산한 천변이 발생하니, 변고가 심상치 않아 나는 매우 두려워하고 있다. 인사(人事)에서 빚어지는 득실에 따라 하늘의 재상(災祥)은 유별로 반응을 보이곤 하기 때문에 옛날 슬기로운 임금들은 매번 천재(天災)를 만나면 반드시 인사에서 그 원인을 찾거나, 혹은 자신을 반성하여 그 원인을 찾거나, 혹은 여러 사람들의 말을 널리 구하여 그 원인을 찾았다.

내가 하늘을 대신해서 만물을 다스린다고는 하나, 혼자서 다스릴 수는 없다. 그래서 재상들과 함께 하려는 것이니, 시정(時政)의 득실과 생민(生民)의 애환을 숨김없이 진달하라. 그렇게 하면 아마 잘못을 시정해서 하늘의 견책에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 정도전에게 명하여, 신궁(新宮)과 여러 전(殿)의 이름을 짓게 하니, 정도전이 이름을 짓고 그 이름을 지은 취지를 함께 써서 올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궁의 이름은 '경복궁(景福宮)'으로 하소서. 신이 살피건대, 궁궐은 임금이 정사를 보는 곳이며, 사방이 우러러보는 곳입니다. 신하와 백성이 함께 조성한 것이므로 제도를 장엄하게 해서 존엄성을 보이고 명칭을 아름답게 해서 감동을 불러일으키도록 해야 합니다. () 나라와 당() 나라 이후로 궁전의 이름을 그대로 두기도 하고 바꾸기도 하였으나 존엄성을 과시하고 감동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 있어서는 그 취지가 동일합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3년째 되는 해에 한양(漢陽)에다 도읍을 정한 다음 먼저 종묘를 세우고 이어 궁실을 축조하였습니다. 이듬해 을해년에 친히 곤룡포와 면류관을 착용하고 선왕(先王)과 선후(先后)를 새로 지은 사당에다 배향하고 여러 신하들을 새로운 궁전으로 불러들여 잔치를 벌였는데, 이것은 조상신의 은혜를 넓게 하고 후손들에게 복을 주는 일이었습니다. 술을 세 순배 돌리자, 신 정도전에게 분부하시기를 '지금 도읍을 정하여 사당에다 향사를 올리고 신궁(新宮)도 낙성을 고하게 되어 여러 신하들과 여기에서 잔치를 하는 것이니, 그대는 한시바삐 궁전의 이름을 지어서 국가와 함께 그 아름다움이 영원히 전해지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신이 명을 받아 손을 모아 절을 하고 《시경》 대아(大雅) 기취(旣醉)에 있는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부르니 후왕의 앞날에 큰 복[景福]을 받게 하리라.'는 글을 외우고서 신궁의 이름을 경복(景福)으로 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이제는 전하와 자손들이 만년토록 태평스런 왕업을 누릴 수 있고 사방의 백성들도 길이 감동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춘추》에 '민력(民力)을 소중히 하고 토공(土工)을 삼가야 한다.' 하였으니, 어찌 임금이 된 자로 하여금 한갓 백성만 괴롭게 해서 자신을 받들도록 하라는 것이겠습니까. 넓은 집에서 한가로이 지내실 때에는 빈한한 선비들을 도울 생각을 하고 전각에 서늘한 바람이 일면 그 맑은 그늘을 함께 나눌 생각을 하신 뒤라야 거의 백성들의 봉양을 저버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아울러 말씀드립니다.

연침(燕寢)의 이름은 '강녕전(康寧殿)'으로 하소서. 홍범(洪範) 구주(九疇)의 오복(五福)에 세 번째가 강녕(康寧)입니다. 대체로 임금이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고 덕을 닦아서 황극(皇極)을 세우게 되면 오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강녕은 오복 중의 하나인데, 가운데를 들어서 나머지를 알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고 덕을 닦는 문제는 많은 사람이 함께 보는 곳에 있으므로 억지로 하는 이도 있습니다만, 편안히 혼자 계실 때는 안일에 빠지기 쉽고 경계하는 마음이 나태해지게 되어서 마음가짐은 바르지 못한 것이 있게 되고 덕은 닦아지지 않은 면이 있게 되어서 황극은 세워지지 않고 오복은 무너지고 맙니다. 옛날 위 무공(衛武公)이 자신을 경계한 시() '군자를 벗으로 사귈 때의 너의 태도를 보니 얼굴을 부드럽게 하여 무슨 잘못이 없을까 염려하더라만, 너의 집에 혼자 있을 때도 옥루(屋漏)에 부끄럽지 않게 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무공이 경계하고 삼가는 것이 이러했기 때문에 90세가 넘도록 살았으니, 황극을 세워서 오복을 누린 분명한 증거입니다.

그러나 그 공부하는 문제는 평소 혼자 있는 데서 비롯됩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위 무공의 시를 법으로 삼아 안일을 경계하시고 경외하는 마음을 두어서 황극의 복을 누리신다면 성자 신손(聖子神孫)이 잘 계승해서 천만세를 전해갈 것입니다. 그래서 연침을 '강녕전(康寧殿)'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동소침(東小寢) '연생전(延生殿)'이라고 하고, 서소침(西小寢) '경성전(慶成殿)'이라고 하였습니다. 천지(天地)는 만물을 봄에 싹트게 하여 가을에 성숙시키고, 성인은 만물을 인()으로 살리고 의()로 제재를 가합니다. 그러므로 성인이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릴 때에 정령(政令)을 시행하는 것을 천지가 운행하는 대로 따라 합니다. 동소침을 '연생전'이라고 하고 서소침을 '경성전'이라고 한 것은 전하께서 천지의 생성하는 도리를 법으로 삼아 그 정령을 시행하는 것을 명시하는 것입니다.

연침의 남전(南殿)은 이름을 '사정전(思政殿)'으로 하소서.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을 수 있고 생각지 않으면 잃게 됩니다. 대체로 임금은 자신의 한 몸으로 숭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수많은 사람 중에는 지혜로운 사람, 어리석은 사람, 어진 사람, 불초한 사람이 섞여 있기 마련이고, 수많은 일 중에는 옳은 일, 그른 일, 이로운 일, 해로운 일이 섞여 있기 마련입니다. 임금된 자가 깊이 생각하고 세밀히 살피지 않는다면 어떻게 일의 타당성 여부를 파악해서 처리할 수 있겠으며, 사람의 현우(賢愚)를 살펴서 진퇴시킬 수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임금이 되어 어느 누가 존영(尊榮)을 누리고 싶어하지 않고 위태로움은 피하고 싶어하지 않았겠습니까만, 옳지 못한 사람을 친근히 한 결과 계획이 옳지 못하여 패망에 이르게 되는 경우는 그 원인이 생각하지 않은 데에 있습니다. 《시경》에 '어찌 생각지 않아서이겠소! 집이 멀어서일 뿐이오.'라고 하였는데, 이 말에 대해 공자는 '생각지 않는다면 몰라도 먼 것이 무슨 상관인가.' 하였고, 《서경》에 '생각을 하면 슬기로워지고 슬기로워지고 나면 성()이 된다.' 하였으니, 생각은 사람에게 있어서 그 활용도가 절대적입니다.

이 전(殿)에서 매일 아침 정사를 보시게 되면 모든 정무를 거듭 모아서 전하께 품달하게 될 터인데 조칙을 내려 지휘할 때에 더욱더 생각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신은 이 전(殿)의 이름을 '사정전(思政殿)'으로 할 것을 요청합니다.

또 그 남쪽에 있는 정전(政殿) '근정전(勤政殿)'이라 하고 그 문을 '근정문(勤政門)'이라 하소서. 천하의 모든 일이 근면하면 다스려지고 근면하지 않으면 황폐화되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작은 일도 오히려 그러한데 더구나 정사(政事)와 같은 큰 일이야 어떠하겠습니까. 《서경》에 '걱정이 없을 때에도 경계를 하여 법도를 잃지 말라.' 하였고, '안일과 욕심으로 제후국을 가르치지 말아서 삼가고 조심하소서. 하루이틀 사이에 일의 조짐은 만 가지로 일어납니다. 여러 관직을 비워두게 하지 마소서. 하늘의 일을 사람이 대신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이는 순()과 우()가 근면했던 바입니다. '아침부터 시작하여 점심 때가 되고 저녁 때가 되도록 식사할 겨를이 없이 백성을 모두 화락하게 하는 일에 힘쓰셨다.' 하였는데, 이는 문왕(文王)이 근면했던 바입니다. 임금이 되어 근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편안히 봉양하는 것이 이미 오래되면 교만과 안일이 생기기 쉽고, 또 아첨하는 사람이 부추겨서 말하기를 '천하국가 때문에 정신을 피곤하게 하여 수명을 단축시킬 것이 없습니다.' 하고, '이미 숭고한 지위를 차지하셨는데 어찌 유독 자신을 낮추어서 수고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면서, 혹은 여악(女樂)으로, 혹은 유전(?)으로, 혹은 완호(翫好), 혹은 토목(土木)으로 일반적으로 황음무도(荒淫無度)에 속하는 일이면 뭐든지 말을 합니다. 그러면 임금은 그것에 솔깃해져서 자신이 나태함으로 빠져드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 나라와 당() 나라 임금들이 삼대(三代) 시절의 임금만 못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니 임금이 하루라도 근면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한갓 임금이 근면해야 한다는 것만 알고 근면해야 할 이유를 모른다면 그 근면은 잗달고 각박한 데로 흘러서 보잘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아침에 정사를 듣고, 낮에는 방문을 하고, 저녁에는 법령을 다스린다.' 하였으니, 이것은 임금의 근면을 말한 것입니다. '어진이를 찾는 데에 부지런히 힘쓰고 어진이에게 맡기는 것을 신속히 한다.' 하였으니, 신은 이런 취지로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동쪽과 서쪽에 있는 누각(樓閣)의 이름은 '융문(隆文)' '융무(隆武)'로 하소서. ()은 정치를 이루고, ()는 난리를 진정시키는 것이므로 이 두 가지는 마치 사람의 팔과 같아서 어느 한쪽도 폐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대체로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이 찬란하고 군사와 병기가 빠짐없이 정비되어 있는데다 사람을 등용하는 경우에도 문장(文章)과 도덕(道德)이 출중한 선비와 과감성과 용맹이 뛰어난 자를 중외에 배치시킨다면 이것은 모두 융문(隆文)과 융무(隆武)의 극치인 것입니다. 따라서 전하께서 문()과 무()를 함께 써서 장구한 정치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오문(午門)의 이름을 '정문(正門)'으로 하소서. 천자와 제후가 그 위치는 비록 다르나 남면(南面)을 하고서 정치를 하는 것은 모두 정()에 근본을 두고 있는 것이니 대체로 그 이치는 하나인 것입니다. 고전(古典)을 상고해 보면 천자의 문을 '단문(端門)'이라고 했는데, ()이란 정()을 말하니, 지금 오문(午門) '정문(正門)'이라 칭하소서. 명령(命令)과 정교(政敎)가 필시 이 문을 통해 나갈 것인데 이때 살펴보고서 윤허한 후에 내보낸다면 참설이 행해지지 않고 교만과 거짓이 발붙일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또 부주(敷奏)와 복역(復逆)이 필시 이 문을 통해서 들어오게 될 것인데 이때 살펴서 이미 윤허한 후에 들여보내게 한다면 간사한 일이 진달될 수 없고 공적을 상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을 닫아서 괴이한 말을 하는 간사한 백성을 근절시키고, 문을 열어서 사방의 현인을 오게 하는 이것이 모두 정()의 큰 것입니다."

하였다.

○ 상이 경신(30) 밤에 판삼사사 정도전 등 여러 훈신을 불러 술을 마시면서 풍악도 잡혔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상이 정도전에게 이르기를,

 

"과인이 이 자리에 이른 것은 경들의 덕택이니 서로 공경하고 삼가서 자손 만세까지 이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정도전이 대답하기를,

 

"제 환공(齊桓公)이 포숙(鮑叔)에게 묻기를, '어떤 방법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하겠는가.' 하니, 포숙이 대답하기를, '원컨대 공께서는 거(?) 땅에 있던 때를 잊지 마시고, 중부(仲父 관중(管中)을 지칭)께서는 함거(檻車)에 있던 때를 잊지 마소서.' 한 일이 있습니다. 신이 원컨대, 전하께서 말에서 떨어지던 때를 잊지 마시고 신도 갇혔던 때를 잊지 않는다면, 자손들이 만세를 이어가는 것을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악공(樂工)이 문덕곡(文德曲)을 부르자 정도전을 쳐다보면서 이르기를,

 

"이 곡은 경이 지어서 올린 것이니 경은 일어나서 춤을 추어보라."

하자, 정도전이 바로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 그래서 갖옷을 하사하고 즐겁게 지내다가 자리를 파하였다.

○ 일찍이 한산백(韓山伯) 이색(李穡)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상이 문덕(文德)ㆍ무공(武功) 두 곡을 듣고서 이르기를,

 

"노래로 공덕을 송축하는 것이 실로 실정보다 지나쳐 매번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나는 몹시 부끄럽다."

하니, 정도전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이런 마음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노래를 짓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국조보감 제4   

 

 

 태종조 2(太宗朝二)

 

 

11(신묘, 1411)

 

 

○ 상이 이르기를,

 

"대언(代言)의 임무는 막중하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요순의 도가 아니면 감히 임금에게 진언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요순의 도는 선비가 아니면 알지 못한다. 날마다 문신과 경의(經義)를 강론하고 싶으니,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는 학식이 있는 자를 채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 경연에 거둥하여 《맹자》를 강론하였다. "임금을 섬기는 자가 있으니, 이 임금을 섬기는 것은 임금의 비위 맞추는 것을 추구하는 자이다."에 이르러 이르기를,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예이다. 그런데 '이 임금을 섬기는 것은 임금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다.'라고 한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니, 조말생(趙末生)이 대답하기를,

 

"신하는 임금에 대하여 선도(善道)를 개진하여 군주의 사심(邪心)을 막아 임금의 실책을 바로잡는 것이 직분인데, 한결같이 임금을 섬기는 것으로 마음을 먹어서 임금의 실책을 보고도 말하지 않는다면, 이는 아부하여 용납되고 비위를 맞추어 기쁘게 하려는 자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 상이 서북ㆍ풍해 등도에 가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지신사 김여지(金汝知)를 책망하기를,

 

"그대는 어찌 말하지 않았는가? 옛날 왕안석(王安石) '하늘의 변고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 하였는데, 그대가 이것을 본받고자 해서인가? 지금 듣건대, 그곳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다고 하니, 속히 관리를 파견하여 구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 처음에 중국 태복 소경(太僕少卿) 축맹헌(祝孟獻)이 환국할 때, 이색(李穡)의 자손들이 하륜(河崙)과 권근(權近)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맹헌에게 부탁하여 중국에 비명을 구하였다. 이때에 맹헌이 국자 조교(國子助敎) 진련(陳璉)이 지은 비명을 통사(通事)에게 보내왔다. 그 글에 "공양군(恭讓君)이 즉위하자, 용사하는 자가 공()이 자기 편이 되지 않은 것을 꺼려하여 장단(長湍)으로 내쫓았다."는 말이 있었는데, 상이 이 글을 보고 좌우에 이르기를,

 

"진련이 어떻게 이색의 행적을 알고 이처럼 자세하게 서술하였단 말인가. 전에는 본국 사신이 복서(卜筮)로 인하여 흔단을 일으킨 자가 있었다. 통사가 어떻게 맹헌과 사통할 수 있었는지 그를 불러 문책하라."

하였다. 성석린이 이색의 자손들이 중국에 사적으로 내통한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간원이 또 이색의 아들 종선(種善)에게 죄줄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종선이 자기 어버이를 드러내고자 한 것이니 무슨 죄가 있는가."

하였다. 간원이 또 하륜과 권근의 죄를 청하기를,

 

"비명에 '용사자가 공이 자기 편이 되지 않은 것을 꺼려하였다.'는 말은 누구를 지적하여 말한 것이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비명에 '경오년 5월에 윤이(尹彛)와 이초(李初)를 중국에 보냈다고 무고하여 공 등 수십 인을 청주(淸州)에 잡아두고 준엄한 법을 적용해서 죄를 꾸며 내려던 차에 갑자기 큰비가 와서 관사가 함몰되고 문사관(問事官)은 나무 위로 올라가서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 이것을 보고 청주의 부로(父老)들이 공의 충성심에 감복되었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윤이와 이초가 중국에 호소한 것이 이미 분명한 증거가 있는데, 무고한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준엄한 법을 적용해서 죄를 꾸며 내려 했다.'는 말은 또 누구를 지칭하여 한 말이며, 수재가 난 것은 이색에게 과연 주공(周公)과 같은 덕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비명에 '임신년 7월에 우리 태상왕이 즉위하자, 공을 꺼려하던 자가 죄가 있다고 공을 무함하여 극형을 가하려 하였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생각하기에, 우리 태조께서 처음부터 개국할 의사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왕실에 충성을 다하려 하였는데, 이색이 그들의 무리들과 함께 태조를 몰아내려고 모의하였으니 그 화란을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어찌 죄가 없는데 극형을 가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른바 '공을 꺼려하는 자가 죄가 있다고 공을 무함하여 극형을 가하려 하였다.'는 말은 누구를 지칭한 것이겠습니까.

청컨대, 하륜은 법에 따라 죄를 다스리고, 권근은 부관참시하고 집은 못을 파고 가산을 모두 몰수하여 후인을 경계하소서."

하였다. 하륜이 네 번 글을 올려 스스로를 변명하기를,

 

"이른바 공을 꺼려한 자란 남은과 정도전을 지목하여 말한 것입니다. 용사한 일과 음모를 꾸민 일이 다 태조의 명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이종학(李種學)을 의살(縊殺)하고 이숭인(李崇仁) 67인을 장살(杖殺)한 일을 태조가 어찌 알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숭인과 이종학의 죽음에 대해서는 내가 알지 못했던 일이다. 태조께서 강명(剛明)함으로 창업하던 초기에 이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하고, 즉시 헌사(憲司)에게 명하여 사실을 다시 조사해서 보고하게 하였더니, 과연 교서사(敎書使) 손흥종(孫興宗)과 체복사(體覆使) 황거정(黃居正)이 정도전과 남은의 지시를 받았다. 손흥종은 이종학에게 장형을 가해 죽지 않자 목을 졸라 죽였고, 황거정도 이숭인의 허리에 장형을 가하여 죽지 않자 말 위에다 가로로 싣고 이웃 고을로 실어보내 죽게 하였다. 황거정과 손흥종을 순금사(巡禁司)의 옥에다 가두도록 명하고, 의정부, 육조, 대간에게 이르기를,

 

"황거정과 손흥종이 권신의 뜻을 바라고서 이숭인과 이종학을 잘못 죽인 것이니, 하륜과 권근이 말한 용사자는 태조를 지칭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하였다. 순금사가 '출입인죄(出入人罪)'로 적용하니, 상이 이르기를,

 

"손흥종과 황거정은 태조의 명을 따르지 않고 권신의 사주를 받아 죄 없는 자를 함부로 죽여서 태조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을 더럽혔다. 이는 신하가 있는 줄만 알고 임금이 있는 줄은 모른 행위이니 당연히 중벌을 내려야 한다."

하였다. 옥관이 다시 '모살인죄(謀殺人罪)'로 적용하여 아뢰기를,

 

"주모자는 참형에 처하고 추종자는 교수형에 처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역시 수긍하지 아니하고 의정부에 내렸다. 의정부가 아뢰기를,

 

"황거정과 손흥종은 사실 정도전과 남은의 계획을 따른 것이며 이종학과 이숭인은 모두 고려의 잔당입니다. 정도전 등은 우리 사직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지 어찌 다른 마음이 있어서 그랬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의 말은 잘못되었다. 임신년 7월에 대업(大業)이 이미 정해졌는데 어찌 피차의 당이 있겠는가."

하였다. 공신 조영무(趙英茂), 한상경(韓尙敬), 정탁(鄭擢)이 상서한 것도 정부에서 올린 내용과 같았다. 상이 이르기를,

 

"정도전과 남은이 사적인 원한을 가지고 사신을 은밀히 사주하여 죄 없는 자를 잘못 죽였다. 내가 이숭인과 이종학을 위하여 복수하려는 것이 아니고 천하 만세를 위한 계책을 세우려는 것이다. 태조는 강명한 임금이셨다. 그런데도 오히려 이러한 신하가 있었는데, 후세에 혹시라도 용렬한 임금과 나약한 임금이 나오게 되면 신하가 이것을 본받아서 장차 못 하는 짓이 없을 것이다. 내가 춘추법(春秋法)으로 정도전과 남은에게 죄를 주고 그 법을 후세에 전하여 난리의 싹을 막고자 하는데, 형법을 담당하고 있는 자가 '법률에 임금을 속인 것에 대한 조항이 없다.' 하였다. 그래서 정부에 내려서 의논하게 한 것은 공론을 듣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경들이 어찌 갑자기 이렇게 청하는가?"

하고, 이에 정도전ㆍ손흥종ㆍ황거정을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자손은 금고(禁錮)시키게 하였으며, 남은은 개국한 공이 높다 하여 논죄하지 말게 하였다.

대간이, 성석린(成石璘) 등이 법률을 잘못 적용하였다고 탄핵하였으나, 상이 모두 관직에 나오도록 명하였다. 성석린 등이 상언하기를,

 

"정부는 백관의 우두머리인데 지금 대간의 논핵을 받았으니 다시 도당(都堂)에 나갈 면목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은 임금도 논핵하는데 정부를 논핵하는 것이 뭐가 그리 이상한가."

하고, 김여지(金汝知)에게 이르기를,

 

"정도전이 흉포한 마음을 품고 은밀히 손흥종 등을 사주하여 죄 없는 자를 죽였다. 이숭인은 재주가 있었으니 진실로 꺼리는 대상이었지만 이종학이야 무슨 이유였는가? 이 두 사람의 죄가 죽어야 할 죄였다면 당연히 정당한 명분으로 주벌을 가해야 했다. 본래 죽을 죄에 해당하지도 않는데 감히 함부로 죽였으니 이는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이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그런데 대신이 종묘 사직에 관계되지 않는다고 하니 무슨 말인가? 조영무는 솔직하고 꾸밈이 적은 사람이니 책망할 것이 없다. 한상경과 정탁은 선비라고 하면서 역시 죄를 감해주도록 청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였다.

○ 고려가 덕적(德積)ㆍ백악(白岳)ㆍ송악(松岳)ㆍ목멱(木覓) 등처에 봄가을로 환시 및 무당으로 하여금 여악(女樂)을 베풀고 제사를 지내게 하고서 '기은(祈恩)'이라고 하였다. 이때 이르러 상이 이르기를,

 

"()은 예가 아닌 것을 흠향하지 않는다."

하고, 예관으로 하여금 고전(古典)을 널리 상고하여 혁파하게 하고, 조관을 보내 향을 받들고 가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병조가 또 중방(重房)의 구례(舊例)에 따라 매년 축수재(祝壽齋)를 설치해 왔다. 상이 이르기를,

 

"수요(壽夭)는 운수에 달려 있는데,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모두 혁파하게 하였다.

○ 상이 친히 태실(太室)에 강신제(降神祭)를 지냈다. 근신에게 이르기를,

 

"이번에 행한 향사에서 집사를 담당한 신하들이 각각 정성을 다하여 예의를 흐트러뜨리지 않았으니 나는 매우 기쁘다."

하였다. 전에는 친향(親享)한 후에 으레 재궁에서 향관(享官)을 제배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상이 이르기를,

 

"종묘에 친향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다. 그런데 향관을 제배하게 되면 후세에 법이 될까 염려된다."

하고, 드디어 중지하였다. 그리고 종헌관 하륜에게는 안마(鞍馬)를 하사하고, 봉조관 김승주(金承?), 찬례 안성(安省), 집례 허조(許稠) 및 여러 대언(代言)에게 각각 구마(廐馬) 1필씩을 하사하였다. 종실과 대신을 불러 광연루(廣延樓)에 음복연(飮福宴)의 자리를 마련하여 즐거움을 만끽하고 파하였다.

○ 상이 의정부와 육조에 이르기를,

 

"지금 국가에 별다른 일이 없는데도 내가 추운 겨울에 매일 조회를 보면서 번거롭게 경들을 일찍 조회에 나오게 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경들과 함께 태만함이 없이 근면하여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보살피는 도리를 다하고자 해서이다."

하니, 한상덕이 대답하기를,

 

"정사에 부지런한 것은 제왕의 미덕(美德)이며, 편안함에 맛을 들이는 것은 옛사람이 경계한 일입니다. 비록 일이 없더라도 매일 조회를 보시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법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였다.

○ 장령 이방(李倣), 지의정부사 박경(朴經)이 황거정(黃居正)과 손흥종(孫興宗)의 죄를 잘못 논의하면서 '몽롱(朦朧)하게 계문하였다.'고 탄핵하니, 의정부가 청하기를,

 

"몽롱하다는 말은 흰 것을 검다고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들이 이것을 보건대, 의정부 전체가 놀라고 있습니다. 원컨대, 이방을 유사에게 내려서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 말을 따라서 이방을 순금사의 옥에 내렸다. 이윽고 김여지에게 이르기를,

 

"이방의 일이 꼭 그른 것만은 아니지만, 내가 대신을 존중하는 까닭에 부득이 따른 것이다. 전에는 대신의 말을 듣고 간신(諫臣)을 옥에 가둔 적이 없었는데, 나도 이제 늙었다. 이런 것을 후사(後嗣)에게 보여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고, 드디어 용서해 주었다.

○ 겨울. 천둥이 일고, 목가(木稼)가 피었다. 상이 이르기를,

 

"옛날 임금은 천재 지변이 있을 경우 반드시 백성들의 고충을 물었다."

하고, 예조 참의 이지강(李之剛) 등을 제도에 나누어 파견하여 백성들의 고충을 묻게 하고 원옥(?)을 심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르기를,

 

"서울에 있는 형법을 담당하고 있는 관리가 한 사람이 아닌데도 오히려 잘못 판결을 내리는 경우가 있는데 더구나 주군(州郡)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옛날 조대림(趙大臨)의 옥사 때, 옥관이 조대림은 다그치고 목인해(睦仁海)는 봐준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황희(黃喜)를 파견하여 심문을 감독하게 해서 과연 그 실정을 캐내어 목인해를 처형한 일이 있었다. 만일 이때 다시 심문하지 않았더라면 필시 잘못 처단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후로 더욱 옥송(獄訟) 문제는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하였다. 이지강 등이 떠나기 앞서 하직하니, 상이 이르기를,

 

"재위한 지 10여 년 동안 천재 지변이 없는 해가 없었으므로 나는 매번 깊은 반성을 하고 있다. 그러나 백성들의 고통을 어찌 환히 다 알겠는가. 그대들이 가서 내 말을 잊지 말고 잘하도록 하라."

하였다.

○ 상이 대언(代言) 등에게 이르기를,

 

"《대학연의》는, 서산 진씨(西山眞氏 진덕수(眞德秀))가 고금의 격언을 모아서 만든 책이다. 내가 매번 읽어보니, 덕형(德刑)에 관한 선후의 구분과 전리(田里)에 대한 휴척의 실상이 더욱 요긴한 것이었다."

하고, 우부대언 한상덕(韓尙德)에게 명하여 전벽(殿壁)에다 크게 써 두게 하고 신하들로 하여금 보도록 하였다.

○ 상이, () 나라와 당() 나라 이후로 외척이 용사한 폐단을 논하기를,

 

"외척으로 하여금 궁중에 적()을 두게 하고 그 출입을 막지 않는 것은, 임금으로서 장구하게 이어갈 수 있는 계책이 아니다. 마땅히 싹트기 전에 단속을 하여야 한다."

하고, 또 좌우에게 이르기를,

 

"의식(衣食)은 백성들이 중하게 여기는 것이므로 어느 하나도 폐지해서는 안 된다. 옛날에도 후부인(后夫人)이 친잠(親蠶)하는 예가 있었으니 지금부터 궁중으로 삼[?]을 들여오게 해서 길쌈을 대비하게 하라."

하였다.

○ 예조가 원회악장(元會樂章)의 차례를 올리면서 몽금척(夢金尺)과 수보록

(受寶?)을 첫머리를 삼았다. 상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몽금척과 수보록은 꿈얘기와 도참설인데 어찌 악장의 첫머리가 되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우부대언 조말생이 아뢰기를,

 

"기린(麒麟)이 태어나는 것도 개나 양과 다르며, 신인(神人)이 태어나는 것도 보통 사람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후직(后稷)이 태어난 것을 찬미하는 자는, '상제의 발자국을 밟고 느낌을 받았다.' 하고, ()이 태어난 것을 찬미하는 자는, '하늘이 현조(玄鳥)에게 명하여 내려와서 상()을 낳게 하셨다.' 하였습니다. 수보록과 몽금척은 사실 태조가 천명을 받은 명부(命符)인 것이니 악장(樂章)의 첫머리로 삼아도 불가한 일이 아닙니다."

하고, 영의정부사 하륜도 아뢰기를,

 

"보록에 관한 말은 신도 들은 적이 있는데, 개국하기 이전에 승려가 얻은 것이라고 하니, 허망한 말이라고만 할 수 없습니다. 공자가 비록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지는 않았으나, 촉인(蜀人) 동오경(董五經)의 말을 선유가 역시 말을 하였고, 청청천리초(靑靑千里草)는 동탁(董卓)을 지칭한 것인데 주자(朱子)가 감흥시(感興詩)에 붙였으니, 참설(讖說)을 옛사람이 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로부터 제왕이 흥기하는 문제는 천명과 인심에 달려 있었다. 어찌 부명(符命) 도참(圖讖)을 논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 근천정(覲天庭)과 수명명(受明命)의 곡을 악장의 첫머리로 삼았다. 상이 또 대언(代言) 등에게 이르기를,

 

"도참설(圖讖說)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지금 보록(?)에 관한 말도 나는 믿지 않는다. 첫째. '삼전삼읍(三奠三邑)이 응당 삼한(三韓)을 멸할 것이다.' 하였는데, 사람들이 삼전(三奠)을 정도전(鄭道傳), 정총(鄭摠), 정희계(鄭熙啓)라고 하였다. 그러나 정희계는 재주나 덕망도 없고 공로도 없다. 이런 자가 과연 시기에 맞추어 나온 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둘째. '목자장군검(木子將軍劒), 주초대부필(走肖大夫筆), 비의군자지(非衣君子智), 부정삼한격(復正三韓格)'이라고 하였는데, 사람들이 비의(非衣)를 배극렴(裵克廉)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배극렴이 정승이 된 지도 오래되지 않았고 정치를 보좌한 이렇다할 공도 없었다. 이 역시 시기에 맞추어 나온 자라 할 수 있겠는가. 지금부터는 악부(樂府)에서 이 곡()을 삭제하라."

하였다. 하륜이 굳이 청하여 수보록을 제3곡으로 하였다. 하륜이 또 태조(太祖)를 위하여 가사(歌詞)를 지어 수보록을 대신하도록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하륜이 보동방(保東方)과 수정부(受貞符) 2편을 지어 올렸다. 상이 이르기를,

 

"수정부도 부참(符讖)에 속하는 말이니, 아무래도 불가한 듯하다. 정부와 육조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라."

하였다. 김여지가 하륜의 말로 아뢰기를,

 

"어떤 비기(?)에 이르기를, '고려(高麗)가 송악(松嶽)에 도읍을 하면 480년을 가고, 조선(朝鮮)이 한양(漢陽)에 도읍을 하면 8천 년을 간다.'고 하였는데, 고려씨의 역년(歷年)을 따져보면 과연 그렇습니다. 이것으로 비추어 보면 비기의 말을 거짓이라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하고, 인하여 태조가 개국할 당시에 금척(金尺)을 받는 꿈과 보록(?)을 받는 특이함이 있었다고 말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날 강충(江充)이 무제(武帝)의 괴이한 꿈으로 인하여 죄 없는 사람을 죽였고, 왕망(王莽)과 공손술(公孫述)의 무리는 부참(符讖)을 지나치게 믿어서 백성도 자신도 앙화(殃禍)를 입었으니, 이것으로 비추어 보면 참설과 꿈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우리 태조가 대업을 개창한 것이 천명과 인심을 기초로 하였으니, 비록 금척과 보록의 특이한 징조가 없었더라도 창업을 하지 못했겠는가. 경들은 모두 유신(儒臣)인데, 어째서 논설하는 것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하니, 신하들이 머리를 숙이고 예예하고 대답만 할 뿐이었다. 뒤에 하륜이 또 아뢰기를,

 

"신이 전일에 올린 수정부(受貞符) 1편을 상께서 불가하다고 하셨는데, 신이 생각하기에 수보록이 비록 참기(讖記)에서 나온 것이지만, 사실 천명이 먼저 정해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니 여항(閭巷)에서 부르는 것을 금지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국조보감 제5   

 

 

 세종조 1(世宗朝一)

 

 

5(계묘, 1423)

 

 

○ 황제가, 내관 유경(劉景)과 예부 낭중 양선(楊善) 등을 보내 부제(賻祭)와 시호(諡號)를 하사하니, 상이 태평관(太平館)에 행행하여 예를 행하였다. 상이 우니 사신들도 울었다. 사신이 말하기를,

 

"오늘 신하들이 모두 우는 것을 보니, 부왕이 인자하고 덕이 있었다는 것을 더욱 알겠습니다."

하고, 세자를 보고 말하기를,

 

"덕성스런 모습이 전하와 같으니 온 나라의 복입니다."

하였다. 잔치에서 효녕(孝寧)이 술을 돌리자, 상이 일어섰다. 사신이 관반(館伴)에게 물으니, 황희(黃喜)가 대답하기를,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진실로 엄하지만, 전하가 일어선 것은 천륜(天倫) 때문입니다."

하였다. 사신이 감탄하기를,

 

"옛날 촉부(蜀府) 전하가 들어와 알현할 때 황제가 동궁더러 가서 맞이하게 하면 동궁은 길을 양보하곤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효녕을 대우하시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 상이 가뭄을 걱정하여 하교하기를,

 

"임금이 부덕한데다 정사를 고르게 하지 못하면 하늘이 재앙을 내려서 잘못된 정치를 경계한다고 한다. 내가 변변찮은 몸으로 백성의 위에 있으면서 밝게 살피지도 못하고 편히 살게 하지도 못한 결과 수재와 한재로 흉년이 계속되고 있다. 백성들은 고통을 견디다 못해 집집이 떠돌이 생활을 하는데도 창고가 비어서 구제해 줄 수도 없다.

지금 정양(正陽)의 달을 맞이하여 또 가뭄이 들었다. 천벌(天罰)의 징조를 곰곰이 살펴보니 죄가 진실로 나에게 있었다. 안타깝고 부끄러운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지만, 충직한 말을 귀담아 들어 몸을 닦음으로써 화창한 일기를 불러들일까 한다. 대소 신료들은 각자 하늘의 경계를 애써 생각하여 위로는 과인의 잘못과 정사의 결점을 지적하고 아래로는 민간의 애환과 백성들의 이해를 지적하여 숨김없이 모두 말함으로써, 하늘을 경외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나의 간절한 마음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 상이 가뭄을 걱정하여 어선(御膳)을 거두게 하고 소금물로 약을 복용할 때 쓰는 술을 대신하게 하니, 영의정 유정현(柳廷顯) 등이 청하기를,

 

"전하께서 부왕의 초상에 너무 슬퍼하고 정성을 다하다가 걱정이 쌓여 병환이 나셨는데, 지금 약을 조제할 때 드는 술마저 거두게 하시면 종묘 사직과 백성들을 어찌하시렵니까."

하면서 눈물을 흘리니, 상이 이르기를,

 

"다시 말하지 말라. 부덕한 내가 백성들의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가뭄으로 인한 재앙은 바로 나를 꾸짖고 있는 것이다. 어찌 내 한 몸을 위하여 술을 마실 수 있겠는가."

하였다.

○ 승정원에 전지를 내리기를,

 

"환관(宦官)의 직책은 등불을 밝히는 것과 청소하는 것에 있으므로 출납에 관한 임무를 부여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내가 날마다 정사를 보아 정체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그러나 근자에 김수상(金壽尙)이 제수하는 사이에 연줄을 따라 거짓으로 전하였다. 그 조짐을 길러서는 안 되겠기에 이미 그의 죄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앞으로는 크고 작은 일 할 것 없이 모두 대언(代言)이 직접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 상이 경연에 거둥하여 이르기를,

 

"내가 역대 사서(史書)를 보니, 옛날의 기사들은 그렇게도 자세하고 완벽하였는데, 《고려사(高麗史)》를 보니 너무 소략하였다. 지금 사관 한 사람만이 조계(朝啓)에 돌려가며 참석하여 일을 기록하니, 어찌 국가의 일을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집현전(集賢殿)은 항상 금중(禁中)에 있으니 사실을 기록할 만하다. 신장(申檣), 김상직(金尙直), 어변갑(魚變甲), 정인지(鄭麟趾), 유상지(兪尙智)에게 명하여 다 사직(史職)을 겸임하게 해서 광범위하게 일을 기록하게 하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므로 근본이 견고해야 나라가 안정될 수 있다. 나는 덕이 적은 사람으로 외람되게 백성의 주인이 되었기에 오로지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보살펴 줄 방도만이 마음속에 간절하여 지방 관리들을 신중히 선발하고 상주고 벌주는 법을 엄격하게 해 왔다. 그러나 오히려 보고 듣지 못한 것이 있을까 염려하였다. 이에 헌부에 명하여 풍문을 듣는 대로 사실을 규명토록 하였으니, 훌륭한 인재를 얻게 되면 백성을 함께 다스리도록 할 것이다.

거듭 생각건대, 백성들이 고소(告訴)하는 것은 존비(尊卑)의 명분을 무너뜨리는 요인이 된다. 전에 조정의 논의로 인하여 금법(禁法)을 제정한 것은 수재(守宰)를 소중하게 여기고 풍속을 후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사방은 넓고 고을은 많은데, 탐심 많고 잔혹한 관리들이 법을 핑계로 권위를 세워 기탄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면서 백성을 괴롭히고 나라를 병들게 하는 자가 발생할지 또 어찌 알겠는가. () 나라와 당() 나라의 법을 살펴보면 이미 감사(監司)를 두어 군국(郡國)을 감독하게 하고 또 수시로 조신(朝臣)을 파견하여 온 천하를 순회하면서 관리의 치적과 백성들의 고통을 두루 알아보게 하였다.

지금 옛법에 따라 조정의 관리에게 명하여 고을을 다녀보고 마을을 드나들면서 수령들이 탐심을 부리거나 형벌을 가혹하게 적용하는 등의 일을 모두 적발하도록 하고 민간의 헐벗고 굶주리는 자와 원통한 일을 당하였거나 억울한 일을 당한 자들로 하여금 모두 실정을 말하게 하라. 그리고 소문을 들은 대로 아뢰도록 하라. 내가 자세히 따져보고 나서 만일 그것이 사실이면 법에 따라 엄하게 징계해서 종신토록 서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관리는 경계하는 마음이 생겨서 관직을 망치는 데까지 이르지 않을 것이며, 백성들은 남의 허물을 들추어 고발하는 풍습이 없어도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민간에는 탄식하는 소리가 영원히 근절되어서 모두가 생활의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갈 것이다."

하였다.

○ 하교하기를,

 

"정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적합한 사람을 얻는 데에 달려 있으니, 관리가 그 직무에 맞는 자라야 모든 정사가 다 잘되는 법이다. 관직에 있는 문무 관원들로 하여금 용맹과 지혜가 남보다 월등해서 변방을 충분히 지킬 만한 자와, 공정하고 총명하여 수령을 맡길 만한 자와, 사무에 능숙해서 복잡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자를 각각 천거하도록 하라.

만약 사정에 따라 잘못 천거해서 탐학한 행위를 하거나 정사를 어지럽혀 그 피해가 백성에게 미치게 하는 자는 율문대로 죄를 주어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 경연에 거둥하여 《통감강목(通鑑綱目)》을 강하였다. 책을 치우고 나서 윤회(尹淮)에게 이르기를,

 

"진서산(眞西山)의 말에, '《통감강목》은 분량이 많아서 임금이 다 읽어보기가 쉽지 않다.'고 하였는데, 나도 이 책을 읽어 온 지가 지금 이미 3년이 되었다."

하였다.

상은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경미한 병으로 앓을 때에도 오히려 독서를 그만두지 않았다. 태종(太宗)이 젊은 환관을 시켜 책을 모두 가져가게 하고 《구소수간(歐蘇手簡)》만 곁에 두게 하였는데 그것마저 다 읽었다.

즉위하고 나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수라를 들 때에도 반드시 책을 좌우에다 펴 놓았다. 간혹 늦은 밤까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책을 보곤 하였다. 일찍이 근신에게 이르기를,

 

"내가 궁중에 있으면서 손을 놀리고 한가롭게 앉아 있을 때가 없었다."

하고, 또 이르기를,

 

"나는 어떤 책이든 보고 나면 잊어버리지 않는다."

하였으니, 그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한 것은 천성이 그러하였던 것이다.

상은 매일 사경(四更)이 되면 옷을 차려 입고 있다가 아침이 되면 조회를 받고, 다음은 정사를 보고, 다음은 윤대(輪對)를 하고, 다음은 경연에 거둥하였다. 찌는 듯한 더위나 극심한 추위에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정치를 잘해 보려고 처음부터 끝까지 정신을 가다듬었으며, 친족간에 화목하고 두 형에게 우애하니, 사람들이 여기에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동쪽의 왜인(倭人)과 북쪽의 야인(野人)이 귀순하며 경내가 편안하니, 당시에 해동요순(海東堯舜)이라고 일컬어졌다.

○ 상이 유관(柳觀)과 윤회(尹淮)에게 명하여 《고려사(高麗史)》를 개수(改修)하게 하였다. 처음에 정도전(鄭道傳)과 정총(鄭摠) 등이 《고려사》를 편수하면서 이색(李穡)과 이인복(李仁復)이 지은 《금경록(金鏡錄)》에 의거하여 찬술하였다. 정도전은 원왕(元王) 이하의 일에 참람한 부분이 많다는 이유로 종()이라고 칭한 것을 왕()이라고 쓰고, 절일(節日)이라고 칭한 것은 생일(生日)이라고 썼으며, () 자는 여() 자로 쓰고 조() 자는 교() 자로 쓰는 등 많은 부분을 바꾸어 써서 사실을 인멸시켰으니, 옳고 그른 것은 정도전의 감정에서 나왔고 제시된 선과 악은 구사(舊史)의 내용과 달랐다. 하륜(河崙)이 조정에 헌의하여 구사를 상고해서 첨삭을 가하려고 했으나 착수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 상이 유관과 변계량에게 명하여 바로잡도록 하였는데, 유관은 주자(朱子)의 《강목(綱目)》을 모방하여 엮으려 하고 변계량은 정도전 등이 고친 것을 그대로 두려 하여 당시의 사실과 아주 다르게 되었다. 사관 이선제(李先齊) 등이 아뢰기를,

 

"관호(官號)가 아무리 참람하더라도 모두 당시의 제도입니다. ()라고 칭했거나 칙()이라고 칭했거나 사실을 인멸해서는 안 됩니다. 명분을 바로 세우기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춘추》의 교체(?), 대우(大雩)와 같이 후세에 전하여 감계(鑑戒)가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어찌 다시 고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변계량은 그렇지 않다고 여겼다. 윤회가 이 사실을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공자의 《춘추》는 제왕의 권위를 의탁하여 왕법을 이룩한 것이므로 오() 나라와 초() 나라가 참람하게 왕()이라 하였기 때문에 깎아내려서 자()로 썼으며 성풍(成風)의 장사에 부의(賻儀)를 예의에 어긋나게 하였다 하여 왕()을 천왕(天王)이라고 칭하지 않았으니, 쓸 것은 쓰고 삭제할 것은 삭제한 것과, 주고 빼앗고 하는 것을 성인의 마음으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좌씨(左氏)가 전()을 지을 때만 해도 형()ㆍ오()ㆍ초()ㆍ월()에 대하여 그들이 칭한 대로 따라서 왕()으로 쓰고 고치지 않았으며, 주자(朱子)가 쓴 《강목(綱目)》도 비록《춘추》의 서법(書法)을 기본으로 했다고는 하나 그 분주(分註)를 보면 참람하게 반역을 한 나라가 이름을 훔친 것도 다 사실대로 기록하였으니, 이는 기사(記事)의 규례상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날 사필(史筆)을 잡은 자가 이미 성인(聖人)이 쓸 것은 쓰고 삭제할 것은 삭제한 취지를 파악하지 못할 바엔 다만 사실대로 정직하게 써서 잘잘못이 그대로 드러나게 한다면 미더움이 후세에 전해지게 될 것이다. 반드시 전대의 임금을 위하여 잘못을 엄폐하려 하거나 경솔하게 고쳐서 사실을 인멸시켜서는 안 된다. ()을 고쳐 왕이라고 칭한 것은 사실대로 기록하도록 하고, 묘호(廟號)와 시호도 사실을 인멸시키지 말도록 하라. 범례(凡例)를 고친 것도 이것을 기준으로 하라."

하고, 유관과 윤회에게 명하여 다 구사(舊史)를 따르도록 하였다.

 

  

 

 

 

 

 국조보감 제31   

 

 

 선조조 8

 

 

26(계사, 1593)

 

 

1.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양원(楊元)ㆍ장세작(張世爵)ㆍ이여백(李如栢) 등 세 협장(協將)을 거느리고 진군하여 평양에 접근하였는데, 도원수(都元帥)도 제진(諸陣)의 군사를 합쳐 거느리고 그 뒤를 따라 군사를 나누어 에워싸고 주둔하였다.

8일에 제독이 세 영에 명령을 전하여 일시에 군사를 전진시키고 성을 둘러 진을 치게 하였다. 우리 군사는 남쪽 성에 육박하고 절강(浙江)의 군사는 서쪽 성을 공격하였는데, 제독은 말을 달려 오가며 전투를 독려하였다. 온갖 포를 일제히 발사하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제독이 겁을 먹고 후퇴하는 한 사람을 손수 베어 돌려 보이고 크게 소리치기를, “먼저 성에 오르는 자는 은() 50냥을 상으로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낙상지(駱尙志)가 긴 창을 휘두르며 먼저 오르고 절강의 군사가 함성을 지르며 뒤따라 올라가 적의 기를 뽑아 버리고 명 나라 기를 세웠다. 적이 저항을 할 수 없게 되자 후퇴하여 토굴로 들어갔다. 우리 군사도 잇따라 올라갔다.

제독이 장세작(張世爵) 등과 함께 칠성문(七星門)을 공격, 대포로 문을 부수고 군사를 정돈하여 들어갔다. 이에 이여백(李如栢)은 함구문(含毬門), 양원(楊元)은 보통문(普通門)을 통해 승세를 타고 앞을 다투어 들어갔다. 그리하여 1 2 80여 명을 참획(斬獲)하고 불태워 죽인 수도 절반이 넘었는데, 왜적에게 투항했던 절강인(浙江人) 장대선(張大膳)도 사로잡았다.

행장(行長)이 도망해 연광정(練光亭) 토굴로 들어가 의거하였는데, 여러 왜장이 연달아 여러 굴에 의거하여 모두 비오듯 탄환을 발사하니 명 나라 군사가 공격하다가 부상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제독이 진영에 머물면서 장대선을 시켜 행장에게 회유하기를,

 

"차마 인명을 다 죽일 수 없어 너희의 살 길을 열어주겠으니, 속히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와서 약속을 들어라."

하니, 행장이 대답하기를,

 

"우리들이 퇴군할 것이니 뒷길을 차단하지 말아달라."

하였다. 제독이 궁지에 빠진 적이 결사 항전할까 염려하여 행장의 청을 허락하고는 우리 군사에게 영을 전하여 일로의 복병(伏兵)을 철수하게 하였다. 밤중에 행장이 남은 적을 거느리고 얼음이 언 강을 건너 탈출했는데, 중화(中和)와 황주(黃州)에 주둔해 있던 적은 이미 먼저 철수한 뒤였다.

()을 통하여 승리한 것을 황제에게 아뢰었는데 독부(督府)와 함께 상주하였다. 주문(奏文),

 

"황제의 위엄에 힘입어 평양을 수복하고 승리한 것을 급히 보고드리는 일입니다. 만력(萬曆) 21(선조 26, 1593) 1 9일에 배신(陪臣) 제도 도체찰사(諸道都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이 치계(馳啓)하기를 '제도 도순찰사(諸道都巡察使) 김명원(金命元)의 정문(程文)과 평안도 순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신보(申報)를 받았다. 이에 의하면「이달 6일에 흠차제독계요보정산동등처방해어왜군무총병관도독동지(欽差提督?遼保定山東等處防海禦倭軍務總兵官都督同知) 이여송이 세력이 막강한 관군을 거느리고 곧장 평양성 밖에 도달하여 여러 장수를 나누어 본성(本城)을 포위하였다. 왜적 2천여 명이 성 북쪽의 모란봉(牧丹峯)에 올라가 청ㆍ백기(靑白旗)를 세우고 함성을 지르며 총포를 쏘았다. 또 왜적 1만여 명이 성 위에 벌여 서서 앞에 녹각책자(鹿角柵子)를 세우고는 방패로 가리고 칼을 휘둘렀는데, 그 기세가 매우 강성하였다. 또 왜적 45천 명이 대장기를 앞세워 북을 울리고 나팔을 불며 성 안을 순시하여 여러 적들을 지휘하였다. 본성 안팎에 장애물을 설치하여 형세상 갑자기 공격하기가 어려웠으므로 총병은 군사를 거두어 진영으로 돌아왔다. 이날 한밤중에 왜적 3천여 명이 함매(銜枚 소리를 내지 못하게 입에 막대를 물림)하고 몰래 나와 도독(都督) 양원(楊元), 도독 이여백(李如栢), 도지휘(都指揮) 장세작(張世爵) 등의 진영을 습격하였다가 본관들이 거느린 군사들에 의해 격퇴당하였다. 7일 밤에도 왜적 약 8백여 명이 다시 도독 이여백의 진영을 습격했다가 또 본관에 의해 격퇴당하였다. 8일 동틀 무렵에 총병이 향을 피우고 날을 점쳐서 길조(吉兆)를 얻었다. 아침밥을 먹고 나서 세 영의 장관들과 더불어 각 해당 장령(將領) 및 관군(官軍)을 나누어 거느리고 칠성문(七星門)ㆍ함구문(含毬門)ㆍ보통문(普通門) 밖에 진을 친 다음, 총병이 친병(親兵) 2백여 기()를 거느리고 왔다갔다 하면서 지휘하니, 장수와 사졸들은 사기가 올라 모두 힘을 다할 것을 생각하였다. 진시(辰時)에 여러 군사를 나누어 차례로 전진하며, 각종 화기를 일시에 발사하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온 들판이 캄캄하였다. 화전(火箭) 하나가 밀덕(密德) 토굴에 떨어지자 조금 뒤에 붉은 불꽃이 하늘로 치솟았으며, 불길이 번져 거의 다 태웠다. 성 위에서 왜적이 총을 난사하고 끓는 물과 돌덩이를 사용하여 죽기로써 항거하며 긴 창과 큰 칼을 밖으로 일제히 내미니, 마치 고슴도치의 털처럼 빽빽하였다. 총병이 겁내는 자 한 명을 손수 베어서 호령하며 진중에 보이니, 모든 군사가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성에 접근하였다. 등에는 마패(麻牌)를 지고 손에는 창을 가지고서 일제히 돌진하며 활과 대포를 쏘기도 하고 성을 지키는 적을 올려 찌르기도 하니, 적이 지탱하지 못하고 조금 물러났다. 총병이 몸을 솟구쳐 먼저 올라가서 여러 장수를 독려하여 진입하였다. 명 나라 군사의 1진은 본국의 관군과 더불어 함구문으로 들어가고, 1진은 보통문으로 들어가고, 1진은 밀덕(密德)의 동쪽성에 올라갔다. 기병과 보병이 구름처럼 모여서 사면으로 공격하여 쳐죽이니 적들이 무너졌다. 명 나라 군사가 당시 전투에서 참획한 수급(首級) 1 2 85()였는데, 조사해 보니 그 속에는 적추(賊酋) 평수충(平秀忠)ㆍ평진신(平鎭信)ㆍ종일(宗逸) 25인의 수급도 들어 있었다. 왜적 2명과 통사(通事) 장대선을 사로잡고, 2 9 85필과 왜적의 기물 4 52건을 노획하였으며, 본국에서 사로잡혀간 남녀 1 15명을 구출하였다. 명 나라 군사가 승세를 타고 불을 놓아 건물을 모두 불태우니, 많은 왜적이 숨어 들었다가 타죽은 자가 약 1만여 명이나 되어 그 냄새가 10여 리에 풍겼다. 잔적이 풍월루(風月樓)의 작은 성으로 숨어 들어갔는데, 총병이 시초(柴草)를 가져오게 해서 사면에 쌓아놓고 화전(火箭)을 쏘니, 일시에 타버려 모두 재가 되었다. 또 남은 적이 성을 뛰어넘어 강을 건너다가 얼음이 꺼져 빠져 죽은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칠성문ㆍ보통문ㆍ모란봉 등지에 있던 여러 왜적들은 그대로 토굴에 의거하고 있었으므로 견고하여 공략할 수 없었다. 총병은 군사를 철수하여 밥을 먹이면서 말하기를『적은 필시 밤에 도망할 것이다.』하고 즉시 부총병(副總兵)ㆍ참장(參將) 등의 관원을 보냈다. 이영(李寧)ㆍ조승훈(祖承訓)ㆍ갈봉하(葛逢夏) 등은 군사를 거느리고 매복하였고, 총병은 양원(揚元)ㆍ이여백(李如栢)ㆍ장세작(張世爵) 등 세 부장(副將)과 함께 큰 길로 추격해 갔는데, 왜적들은 사방으로 도망하다가 이영 등의 매복에 걸려 요격을 당하였다. 이때 수급 3 59과를 참획하고, 왜적 3명을 생포하였다. 남은 적들은 병기를 버리고 황급히 도망하였으니, 절령(?嶺 황해도 서흥군에 있는 재. 자비령(慈悲嶺)) 이서(以西)가 모두 평정되었다.」하였다. 신은 생각하건대, 평양부(平壤府)는 실로 본국의 옛 도읍으로서 성지(城池)가 험고한데 흉악한 적이 저돌적으로 침입하여 점거하고는 소굴로 만들었다. 즉일로 명 나라 군사가 진격하여 북소리 한번에 소탕하니, 흉악한 잔적은 도망갈 곳이 없게 되었다. 본국이 재조(再造)되는 기미가 실로 여기에 있게 되었다. 신은 이원익 등과 각처의 마초 및 군량을 독려 운반하여 본성에 들여보내어 독부에서 쓰도록 하였다. 승첩의 사유를 이렇게 갖추 아뢴다." 하였습니다.

신이 이 치계를 받고 자세히 살펴보건대, 저희 나라는 군병이 약하여 날이 갈수록 국토가 깎이고 평양은 성이 험고하여 쉽게 수복할 수 없었으므로 밤낮 근심하며 죽을 곳을 알지 못하였는데, 성명(聖明)의 천지 부모와 같은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선왕조의 옛일을 곡진히 생각하시어 신의 잘못을 죄주지 않고 남북의 정병(精兵)을 동원하여 도탄에 빠진 소방을 구제하도록 명하시었습니다. 군량이 부족할까 염려하시어 먼저 은냥(銀兩)을 하사하시고, 군량과 마초가 모자랄까 걱정하시어 계속해서 군수품을 수송해 주셨습니다. 사졸들이 들판에서 노숙하고 노새와 나귀가 길에서 나뒹구는 등 신의 허물로 말미암아 이토록까지 천조(天朝)에 근심을 끼쳐드렸으니 신은 감격하고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왕사(王師)가 정벌함에 천리(天吏) 앞에는 대적할 자가 없는 법입니다. 금년 정월 8일 평양에 진격하여 하루아침도 못 되어 성을 깨뜨렸는데, 타 죽고 빠져 죽고 참살당한 자는 말할 것도 없고 나머지 적들도 혼이 빠져 도망갔으니, 그 군위(軍威)의 성대함과 전승(戰勝)의 신속함은 옛 역사에도 없었던 일입니다. 신과 대소 배신(陪臣)들은 처음 승리의 소식을 듣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구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이는 대개 성천자(聖天子)의 성덕(盛德)이 널리 퍼지고 신무(神武)가 멀리 뻗친 데다 명공(名公)들이 계책을 잘 돕고, 병부(兵部)에서 전략을 잘 세웠기 때문입니다. 시랑(侍郞) 송응창(宋應昌)은 기무(機務)에 전심하여 방략을 지시함에 있어 계책이 부합하여 특별한 공을 이루었습니다. 총병(總兵) 이여송(李如松)은 군사들에 대한 맹세가 강개하고 그 의기(義氣)가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며, 군사들이 지나는 곳마다 털끝만큼도 침범하는 일이 없었고 전장(戰場)에 임해선 독전하여 여러 장교에 솔선하였습니다. 심지어는 말이 총탄에 맞고 불길이 몸을 에워싸도 두려운 기색이 없이 더욱 기운을 가다듬었습니다. 성을 함락시키던 날 기자(箕子)에게 제사를 지내고 먼저 그 무덤을 봉()했으며, 부상자를 어루만지고 전사자의 영혼을 두루 위로하는 한편, 덕의(德意)를 선포하고 환과고독(鰥寡孤獨)들을 위문했으니, 비록 배도(裵度)가 회서(淮西)를 평정했던 일이나 조빈(曹彬)이 강남(江南)을 함락시켰을 때의 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부장(副將)ㆍ참장(參將)ㆍ유격(遊擊)ㆍ도사(都司) 이하 각 장령(將領)들도 용감하기가 마치 범이 포효하는 듯 신()이 도와주는 듯하였습니다. 심지어는 큰 돌이 쏟아져 내려오는데도 이를 무릅쓰고 성 위로 올라간 자도 있고, 가슴에 탄환을 맞고서도 계속 왜적을 죽인 자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장졸(將卒)들은 팔짱만 끼고 놀라 움츠린 채 감히 그 사이에 돕지도 못하고 그저 철기(鐵騎)의 발굽에 들판 가득 먼지가 날리고 화전(火箭)에 맞아 붉은 불꽃이 하늘을 찌르는 것만을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포로 방책을 쏘아 맞히니 깃털이 날리듯 산산조각이 났고 창으로 적을 찌르는데 민첩하기가 마치 나는 송골매와 같았습니다. 비린내나는 연기는 공중에 가득하고 흐르는 피는 강물을 이루었으며, 천지는 갈라지고 산과 물이 뒤바뀌었습니다. 조총을 쏘고 끓는 물을 퍼부으며 돌멩이를 날리는 적들은 정말 버마재비가 수레바퀴를 막는 것과 같아서 감히 상대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평양성은 실로 정예로운 군사와 기계가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신이 한 도의 힘을 다 기울였으나 해가 지나도록 도모하지도 못했었는데, 승전하여 수복한 뒤에 그들의 수비 시설에 대해 들어보니 저희 나라의 병력으로는 결코 쳐서 함락시킬 수 있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천자의 위엄이 한번 떨쳐지자 여러 적들이 소문만 듣고도 달아나 이미 파죽지세가 되었으므로 황해도 동쪽은 싸우지도 않고 퇴각하였으니, 구도(舊都)를 머지않아 수복하여 종묘 사직을 차례로 청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선조의 영혼이 지하에서 감격할 것과 남은 백성들이 소생될 희망을 생각하니 슬픔과 기쁨이 가슴에 교차하여 어리둥절할 뿐입니다. 비록 되살려 주신 은혜를 보답하려 해도 실로 도모할 길이 없습니다.

신이 매우 한스러운 것은, 저 조무라기들이 제멋대로 날뛰어 게딱지만한 섬나라에서 스스로 잘난 체하면서 하늘의 위력을 모른 채 여러 번 미친 소리를 한 것이었습니다. 신은 가슴이 아팠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추악한 무리들이 본색을 드러내다가 천벌을 자초하여 온 섬 나라가 공포에 질린 채 벌벌 떨며 감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거의 살아남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저희 나라의 수치만 씻는 것이겠습니까. 실로 역대 제왕들의 공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신은 또 듣건대, 소원이 있을 때 곡진하게 이루어주는 것이 천지의 큰 덕이고 호소할 것이 있을 때 반드시 진달하는 것은 신하된 자의 지극한 정이라 하였습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지금 흉악한 적이 소탕된 것은 오로지 왕사(王師)가 출동했기 때문이니 소방은 털끝만큼도 한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저들은 천장(天將)이 회군(回軍)하여 저희 나라가 외롭고 미약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재차 침략할 흉계를 꾸며낼 텐데 그때에 가서는 재난이 더욱 심해져 막기가 훨씬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 성상께서 동방을 돌보는 걱정을 하시게 되고 신은 왜적 방어를 잘못한 죄를 거듭 지게 될까 두렵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해동의 잔약한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천조(天朝)의 은혜로운 인정을 끝까지 베풀어 주소서. 그리하여 제독부(提督府)로 하여금 강서(江西)와 절강(浙江)의 포수 5천 명을 뽑은 뒤 한두 장수에게 소속시켜 연해의 요해처인 부산 등지에 몇 달 동안 나누어 주둔케 하면서 한편으로는 저희 나라의 군민(軍民)을 가르치고 한편으로는 흉악한 적들의 음모를 소멸시키게 하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신은 길이 하늘의 위엄에 의지하여 수습을 해서 후일을 대비할 수 있겠습니다. 신이 이미 국토를 수복하고서도 또 마무리를 잘 해 주시도록 바라기까지 하니 지극히 참람하여 죄를 용서받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조(天朝)에서 저희 나라를 구휼하심이 이미 내국보다 더함이 있는데, 저희 나라가 천조에 하소연하는 일을 어찌 감히 외국으로 자처하겠습니까. 신은 더욱 황공스럽습니다.

신은 인력과 가축을 징발하여 군량과 마초의 운반을 독려하는 한편, 병사와 말을 조달하여 왕사와 협동해서 도성을 탈환할 계획인데, 이와 함께 함경도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적에도 대비할 것입니다. 신은 수복이 끝나는 대로 도성으로 돌아가서 관군(官軍)을 위로한 다음 곧 이어 전후로 은혜받은 사실을 갖춰 별도로 사은을 행할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러러 황제의 위엄에 의지하여 평양을 수복한 승첩의 사유를 속히 보고드려야 하겠기에 삼가 갖추 적어서 주문(奏聞)합니다."

하였다. 제독(提督)이 거느린 남군(南軍)과 북군(北軍)이 공을 다투었는데, 제독은 북군을 편들면서 우리나라로 하여금 잘못되지 않게 주문(奏文)하도록 하였다. 상이 이호민(李好閔)에게 주문을 짓게 하니 이호민이 야간에 초안을 작성하였는데, 양편 군사의 공로에 대하여 골고루 빠짐없이 기술하였으므로 남ㆍ북군의 장수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 송 경략(宋經略)은 안주(安州)에 진주(進住)하고 제독 이여송은 파주(坡州)에 진군하여 벽제역(碧蹄驛)에서 싸우다가 불리하자 후퇴하여 개성(開城)에 주둔하였다.

○ 함경도 길주(吉州)에 주둔했던 적이 성을 비워놓고 도망하였다.

정문부가 경성으로 돌아와서 의병(義兵)을 해산시킨 뒤 북쪽으로 육진(六鎭)을 순행하며 반민(叛民)을 찾아내 베고 번호(藩胡)를 어루만져 안정시켰으며, 모든 보()를 수복하여 장령(將領)을 파견해 두었다. 북변이 복구된 것은 모두 문부의 힘이었다.

○ 관원을 보내어 평양에서 전사한 명 나라 군사를 제사지내게 하고 그들의 시체를 거두어 묻었다.

상이 의주(義州)를 출발하여 다시 정주(定州)에 머물렀다. 세자가 성천(成川)에서 묘사(廟社)의 신주를 받들고 행재소(行在所)에 왔다.

2. 군병에게 조총(鳥銃)을 배워 익히게 하고 과거(科擧)에서도 조총에 대한 기술이 있는 자를 뽑도록 하는 한편 자초(煮硝)하는 법에 대해 널리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 제독 이여송이 도로 평양에 머물렀다.

제독이 오래도록 개성에 머물면서 군량이 떨어져 가는데도 전진할 생각은 없이 자주 사람을 경략(經略)에게 보냈는데, 이는 대개 전일의 화의(和議)를 계속해 보려는 것이었다. 때마침 유언비어가 떠돌아 "적장 청정이 장차 안변에서 서쪽으로 평양을 침범하려 한다." 하자 제독은 이로 인하여 큰소리치기를,

 

"돌아가 평양을 구제하려 한다."

하고는 드디어 군사를 인솔하여 서쪽으로 돌아가고 왕필적(王必迪)을 개성에 남겨 두었다.

○ 전라도 순찰사 권율이 적병을 행주에서 격파하였다.

당시 경성에는 적들이 연합하여 둔을 치고 있었으므로 그 기세가 등등하였는데 권율은 명 나라 군사와 연락하여 도성을 탈환하려고 군사를 머물려 두고 있었다. 그리고는 선거이(宣居怡)로 하여금 전군을 거느리고 금천(衿川)의 광교산(光敎山)에 주둔케 하고, 권율 자신은 정병(精兵) 4천 명을 뽑아 양천(陽川)에서 강을 건너 행주산 위에 진을 치고는 책()을 설치하여 방비를 하였다. 적은 외로운 군사가 깊이 들어간 것을 보고 수만 명의 대군을 출동시켜 새벽에 책을 포위하였다. 그들이 울려대는 징소리ㆍ북소리가 땅을 진동하니 온 책 안이 두려움에 사로잡혔는데, 권율은 거듭 영을 내려 진정시켰다.

적은 군사를 나누어 교대로 진격해 왔는데 묘시(卯時)에서 유시(酉時)에 이르기까지 안팎이 모두 사력을 다해 싸웠다. 우리 군사가 점령한 지역은 높고 험준한 데다가 뒤로는 강벽(江壁)에 막혀 달아날 길이 없었으므로 모두 죽을 각오를 하였다. 적은 올려다 보고 공격하는 처지가 되어 탄환도 자연 맞지 않는 데 반해 호남의 씩씩한 군사들은 모두 활을 잘 쏘아 쏘는 대로 적중시켰다. 화살을 비오듯 퍼부을 때마다 적의 기세가 문득 꺾이곤 하였다. 왜적이 각자 짚단을 가지고 와 책()에 불을 놓아 태우자 책 안에서는 물을 길어 불을 껐다. 적이 서북쪽의 책 한 간을 허물자 지키고 있던 승군(僧軍)이 조금 물러나니 권율이 직접 칼을 빼어 물러난 자 몇 사람을 베고, 다시 책을 세워 방어하였다. 화살이 거의 떨어지려 할 때 수사(水使) 이빈(?)이 배로 수만 개의 화살을 실어다 대주었다. 적이 결국 패해 후퇴하면서 시체를 네 무더기로 쌓아 놓고 풀로 덮고 태웠는데, 그 냄새가 몇 리 밖까지 풍겼다. 우리 군사가 나머지 시체를 거두어 참획한 것만도 1 30급이나 되었다.

다음 날 사대수(査大受)가 접전한 곳을 와서 보고 말하기를,

 

"외국에 진짜 장군이 있다."

하였다. 송 경략(宋經略)이 우리나라에 자문(咨文)을 보내 위로하고 추장(?)하는 한편 비단과 은()을 상으로 주고 황제에게 주문(奏聞)하였다. 황제가 홍로시(?)의 관원을 보내 우리나라에 선유(宣諭)하기를,

 

"조선은 본디 강국으로 일컬어졌는데, 지금 보건대 권율이 참획한 것이 매우 많으니 그대 나라의 인민이 그래도 진작될 수 있겠다.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권율이 파주의 대흥산성(大興山城)으로 옮겨 진을 치자 적병이 또 침입해 왔으나 모두 싸우지 않고 물러갔다. 제독이 이 소식을 듣고는 갑작스레 회군(回軍)한 것을 자못 후회하면서 장세작으로 하여금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도로 개성에 가서 군량을 비축해 놓고 기다리게 하였다.

권율의 품계를 자헌(資憲)으로 올려 주도록 명하였다.

○ 상이 정주(定州)를 출발하여 숙천부(肅川府)로 진주하면서 세자와 중궁(中宮)은 그대로 남아 있게 하고 숙천부에서 다시 영유현(永柔縣)으로 이주하였다.

당시 대신과 여러 재신(宰臣)들이, 상이 내지에 진주하여 군량 운반을 감독하고 백성들의 신망을 유지하도록 연달아 청하였으나 상이 주저하며 따르지 않았다. 대신이 사기(事機)가 매우 위급하다고 하며 연달아 청해 마지않으니, 상이 답하기를,

 

"나의 생각에는 경략(經略)이 뒤에 있어 차견하는 관원이 연락부절하니 접응하는 일이 긴요하겠고, 왜적이 아직 북로(北路)에 주둔하고 있어 서쪽을 침범할까 우려된다. 또 여기에서 한 걸음만 떠나도 호령이 해이해져 중국 식량을 운반하는 일도 많이 지체될 것이다. 그 때문에 쾌히 따를 수 없다. 그만둘 수 없다면 세자와 중궁을 그대로 정주에 머물게 하고 나는 약간의 수행 관원을 거느리고 단기(單騎)로 평양에 달려가 대군의 뒤를 따르며, 모든 일을 지휘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에 대신들이 아뢰기를,

 

"이는 바로 신들이 원하는 바입니다. 속히 결행하시기만을 오직 바랄 뿐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숙천부에 잠깐 머물렀는데 직로(直路)이므로 수라를 제공하는 데 폐단이 있어서 영유현으로 이주하였다.

4, 경략(經略)이 심유경(沈惟敬)을 보내 왜영(倭營)에 들어가서 강화를 논의하게 하였다.

대장 수가(秀家) 등이 날짜를 언약하고 돌아갔다. 제독이 이 소식을 듣고 다시 군사를 이끌고 개성에 이르렀다.

○ 병부(兵部)가 내고(內庫)의 은() 3천 냥을 조선에 주어 국내의 유공자 및 국사에 죽은 원역(員役)에게 반급하도록 청하였다.

○ 황제가 산동(山東)의 군량 10만 석을 내려 주어 배로 운송하여 군량을 보충하게 하였다. -이때 바닷길을 통행하지 않은 지 이미 2백 년이나 되었으므로 무관(武官) 오정방(吳定邦)을 여순(旅順)의 어구에 보내어 인도해 왔다.

○ 경기 감사 성영(成泳)이 선릉(宣陵)ㆍ정릉(靖陵) 두 능의 변고에 대하여 장계를 올렸다. 왜적이 물러간 후에 김천일(金千鎰)이 먼저 능의 변고를 살펴보고 군사로 호위하였는데, 성영이 이를 들어 계문한 것이다.

○ 예부(禮部)가 평양ㆍ개성ㆍ벽제ㆍ서울에 단()을 설치하여 전사한 관군에게 위령제를 지낼 것을 황제에게 청하였는데, 성지(聖旨)를 받드니,

 

"단의 명호를 민충(愍忠)이라 하라."

하고, 인하여 관은(官銀)을 내려 제수(祭需)를 마련하도록 하였다.

○ 경상좌도 순찰사 김성일(金誠一)이 죽었다.

성일은 일본에 봉명 사신으로 가서 적정(敵情)을 잘못 주달하였으므로 거의 죄벽(?)에 빠질 뻔하였다. 그러다가 용서하는 왕명을 받고서는 더욱 감격하여 사력을 다해 적을 칠 것을 맹세하였다. 평소 군려(軍旅)에 대한 일은 알지 못했으나 지성으로 군중을 효유하고 관군과 의병 등 모든 군사를 잘 조화시켰는데, 한 지역을 1년 넘게 보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가 통솔한 효과였다.

5. 경략(經略)이 왜적이 도성을 버리고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비로소 패()를 내어, 제독을 재촉해 추격케 하였으나 적이 떠난 지 이미 수십 일이 지난 뒤였다. 제독은 길에서 천천히 행군하는가 하면 혹은 머물러 날짜를 지연시키기도 하면서 겨우 새재를 넘어갔다가 되돌아왔다.

적이 물러가고 나서는 군사를 나누어 해변에 주둔하였다. 울산(蔚山)ㆍ서생포(西生浦)에서부터 동래(東萊)ㆍ김해(金海)ㆍ웅천(熊川)ㆍ거제(巨濟)에 이르기까지 수미가 서로 연하였는데, 16 둔진(屯陳)이 모두 산과 바다를 의거하여 성을 쌓고 참호(塹濠)를 파서 오래 머물 계획을 하였다.

명 나라 조정에서 사천 총병(四川總兵) 유정(劉綎)을 연달아 파견했는데 복건(福建)ㆍ서촉(西蜀)ㆍ남만(南蠻) 등처의 소모병(召募兵) 5천 명을 거느리고 성주(星州)에 둔을 쳤으며, 절강(浙江)의 장수 오유충(吳惟忠)은 선산(善山), 이영(李寧)ㆍ조승훈(祖承訓)ㆍ갈봉하(葛逢夏)는 거창(居昌), 낙상지(駱尙志)ㆍ왕필적(王必迪)은 경주(慶州)에 둔을 쳤다. 이들은 사면을 빙 둘러서 서로 대치하였다.

○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순변사 이빈(?), 전라 병사 선거이(宣居怡)는 적을 추격하여 영남에 내려가고, 충청 병사 황진(黃進)과 전라 방어사 이복남(李福男)은 각각 그들의 군사를 인솔하고 모였으며, 권율(權慄)은 신병(新兵)을 거느리고 운봉(雲峯)을 넘어 영남으로 달려갔다. 모두 창녕(昌寧)ㆍ의령(宜寧) 등 읍에 벌여 둔을 치고 적경(賊境)에 임하였다.

6. 청정(淸正)이 우리 두 왕자(王子)와 재신(宰臣)들을 돌려보냈다.

○ 왜적이 진주를 함락하였다.

창의사 김천일이 그 아들 상건(象乾) 및 경상 병사 최경회, 복수장(?) 고종후, 좌랑 양산숙 등과 함께 북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종인은 이곳저곳에서 싸우다가 남강(南江)에 이르렀는데, 양팔로 두 명의 적을 끼고는 크게 소리치기를,

 

"김해 부사 이종인이 여기에서 죽는다."

하며, 강에 몸을 던졌다. 진사 문홍헌(文弘獻), 정자(正字) 오차(?), 참봉(參奉) 고경형(高敬兄) 등이 모두 따라 죽었다. 성이 일단 함락되자 적이 대대적으로 도륙하였다. 거제 현령 김준민(金俊民)은 단독으로 말을 달리며 거리에서 싸웠는데, 좌우로 돌격할 때마다 적의 무리가 물 갈라지듯 흩어졌다. 왜적이 종일 그를 쫓아다녔으나 탄환과 칼이 모두 명중되지 않았는데, 끝내 그가 어디에서 죽었는지 알지 못했다. 성 안의 사녀(士女)들도 앞을 다퉈 강에 이르러 투신 자살하여 흐르는 시체가 강을 메웠다. 대략 죽은 자가 67만이나 되었는데, 장사(壯士) 중에 벗어난 자는 수삼 인에 불과했다. 적이 성곽을 헐고 가옥을 불태웠으므로 성이 온통 폐허가 되었다. 성이 포위를 당한 9일 동안 주야로 벌인 크고 작은 전투가 1백여 차례나 되었으며, 적의 죽은 자도 상당하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인 데다가 외부에서 구원병이 이르지 않았으므로 여러 장수들이 힘이 다하여 죽었다. 왜변(倭變)이 있은 이래 참혹하게 무너지고 의열(義烈)이 장엄하게 드러난 것으로 진주성 같은 예가 없었다. 천일에게는 좌찬성을, 경회에게는 좌찬성을, 종인에게는 병조 판서를, 준민에게는 형조 판서를 추증(追贈)하고, 그 나머지도 차등 있게 관작을 추증하였다.

7.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이 군영을 한산도(閑山島)로 옮기기를 청하니, 따랐다.

한산도는 거제(巨濟)의 남쪽 30리 지점에 있는데, 산세가 빙 둘러쳐져 배를 숨기기에 편리하였고 왜선(倭船)이 호남을 침범하려면 반드시 이 길을 경유해야만 하였다. 이순신은 본진(本鎭)이 좌측에 치우쳐 있어 방어하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청한 것이었다.

○ 제독(提督) 이여송이 군사를 철수해 돌아갔다. 상이 강서(江西)로부터 황주(黃州)에 가서 영송(迎送)하고 인하여 황주로부터 나아가 해주(海州)에 머물렀다. 왕비와 세자가 강서로부터 와서 모였고, 임해(臨海)ㆍ순화(順和) 두 왕자도 이르렀다.

○ 심유경(沈惟敬)이 왜영(倭營)에서 돌아왔는데, 수길(秀吉)의 화친을 청하는 표문(表文)을 가지고 오면서 왜관(倭官) 소서비(小西飛)를 데리고 왔다.

○ 이순신을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겸임시키고 본직(本職)은 그대로 두었다. 조정의 의논에서 삼도 수사(三道水使)가 서로 통제할 수 없다고 하여 특별히 통제사를 두어 주관케 하였다. 이순신이 육지는 군수 물자에 고달프다는 점을 들어 체부(體府)에 청하기를,

 

"다만 일면의 해포(海浦)를 부여해 주면 양식과 기계를 자족시킬 수 있게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소금을 구워 판매하여 곡식 몇만 석을 비축하였으며, 영사(營舍)와 기구(器具)가 완비되었다. 백성을 모집하여 완취(完聚)시키니, 하나의 거진(巨鎭)이 되었다.

9. 경략 송응창과 제독 이여송이 도로 압록강을 건너 돌아왔다. 오직 유정과 오유충(吳惟忠) 등 보병(步兵) 1만여 명만을 머물러두게 하였다. 또 왕세자가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을 경리(經理)하도록 주청한 결과 성지(聖旨)와 칙서(勅書)가 내려왔는데, 왕세자로 하여금 임시로 절제(節制)를 총괄하게 하였다.

○ 이여송은 용모가 걸출하고 국량(局量)이 넓고 컸다. 군사를 움직이고 진을 칠 때 군사를 온당하게 검속하였으므로 그가 지나는 곳마다 모두 편하게 여겼다. 그의 아버지 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樑)이 추후에 글을 주기를,

 

"조선은 바로 우리 선조의 고향이니, 너는 힘쓰라."

하였는데, 이여송이 언젠가 그 글을 사적으로 접반사(接伴使)에게 보이기를,

 

"아버님이 이처럼 분부하셨는데, 감히 귀국을 위해 힘을 다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그의 선조는 바로 우리나라 이산군(理山郡) 출신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세히 알지 못한다."

하였다. 이여송이 30여 세의 나이로 처음 우리나라에 왔을 때에는 안빈(?)이 매우 청수하였는데, 영남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흰 수염이 섞여 있었다. 그가 우리나라 사람에게 말하기를,

 

"그대 나라를 위하다 보니 이처럼 반백(斑白)이 되었다."

하였다. 뒤에 상이 명하여 평양에 사당을 세운 뒤 석성(石星)과 이여송을 제사지내고 이여백(李如栢)ㆍ장세작(張世爵)ㆍ양원(楊元)을 배향케 하고는 '무열(武烈)'이라고 사액하였다.

○ 상이 환도하려 할 때에 왕비는 머물러 두었으며, 세자는 종묘 사직을 받들고 해주(海州)에 머물러 있었다. 상이 임진강의 전쟁터를 지날 때 즉시 행주(行廚 임금의 거둥 때 어선(御膳)을 담당한 임시 주방)에 명하여 전사한 군인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10. 상이 경사(京師)로 돌아와서 -4- 정릉동(貞陵洞)에 있는 고()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집을 행궁(行宮)으로 삼았다.

○ 중앙과 지방에 교서(敎書)를 반포하고, 사신을 보내 산천(山川)에 향을 내렸으며, 택일하여 종묘의 터에 곡읍(哭泣)하였다.

벽제(碧蹄)의 전투에서 죽은 명 나라 군사를 제사지내도록 명하였다.

○ 예조 판서 이증(李增)을 보내어 유생들을 거느리고 문묘의 터에 곡읍하게 하였다.

○ 승려를 모집하여 도성의 안팎에 있는 시체를 거두어 매장하도록 명하였다.

○ 청()을 설치하여 기민(飢民)을 구휼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병란을 겪어서 도성 안이 크게 굶주려 쓰러진 시체가 즐비하였다. 5()을 설치하여 미죽(?)을 끓여 나누어 구휼하도록 명하고, 상이 친히 임하여 면대해서 지급하기도 하였다.

○ 선릉(先陵)에 배알할 날짜를 택일하도록 명하였다.

○ 윤 11. 황제가 행인사 행인(行人司行人) 사헌(司憲)을 파견하여 칙서를 가지고 와서 선포하게 하였다. 황제는 상이 나라를 회복하고 환도(還都)했다 하여 칙서를 내려 위로하고 동시에 은폐(銀幣)를 하사하였다. 칙서의 대략에,

 

"저번에 왕이 대군을 몰아 왜적을 변경으로 쫓아내고 옛 강토를 수복한 다음 표문(表文)을 보내와 사례하니, 내 마음이 매우 기쁘다. 생각건대 나라를 회복한 중대한 일은 심상하게 보아 넘길 수 없는 보고이므로 지금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옛사람의 와신상담하던 뜻으로 유시하여 권면한다. 조정에서 속국을 대우하는 은의(恩義)는 이 정도에서 그칠 것이니, 혹시 다른 변이 발생한다 해도 나는 왕을 위하여 계획을 세워 줄 수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12. 광주(光州) 유생 김덕령(金德齡)이 의병을 일으켰다.

김덕령은 신력(神力)의 소유자로서 비호처럼 용건(勇健)하고 자못 기절(氣節)이 있었으며 집에서 유업(儒業)을 익혀 겸손한 태도로 남에게 자신을 낮추었으므로 그의 역량을 아는 자가 없었다. 전란이 있은 뒤로 그는 거상(居喪)을 하며 집에 있었다. 이때 관군(官軍)과 의병(義兵)이 무려 수백 둔()이나 되었지만 적을 보고는 곧 무너졌다. 그의 자부(姉夫)인 김응회(金應會)는 강개(慷慨)한 선비였다. 그가 누차 김덕령에게 군사를 일으켜 적을 치도록 권하였으나 김덕령은 머뭇거리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때 마침 담양 부사(潭陽府使) 이경린(李景麟)과 장성 현감(長城縣監) 이귀(李貴)가 상소하여 대장의 임무를 맡길 만하다고 김덕령을 추천하였고 당시 무군사(撫軍司)가 남하하여 또 세자의 유시를 가지고 효유하였다.

이에 김덕령이 친구인 장사(壯士) 최담령(崔聃齡) 등 수십 명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는데, 전택(田宅)을 팔아 무기를 마련하고 격문(檄文)을 띄워 군사를 모집하니, 응모자가 운집하였으므로 장정 5천여 명을 확보하였다. 김덕령이 손수 지획(?)하여 행진(行陣)을 가르쳤다.

 

 

[D-001]배도(裵度)가……것입니다. : 평정이 신속하게 이루어진 것을 비유함. 배도는 당 헌종(唐憲宗) 때의 재상. 당시 회서 지방의 채주 자사(蔡州刺史) 오원제(吳元濟)가 반란을 일으켜 3년이 되도록 평정되지 않자, 조정에서 배도를 회서 초토사(淮西招討使)로 삼아 토벌케 하였는데, 절도사(節度使)인 이소(?)가 오원제를 사로잡아 난이 평정되었다. 《新唐書 裵度傳》 조빈은 오대(五代) 말기 사람으로 후주(後周)에 벼슬하다가 조송(趙宋)에 귀부(歸附)하였는데, 960(건륭 1) 강남을 토벌하여 이듬해 11월 이욱(李煜)의 오()를 항복받았다. 《宋史曹彬傳》

출처 : ▒ 한 산 草 堂 ▒
글쓴이 : 천하한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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