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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광해조일기 (광해군 5, 1613~ 광해군 8, 1616)

장안봉(微山) 2013. 5. 28. 22:58

 광해조일기 2(光海朝日記二)   

 

 

계축년(광해군 5, 1613) 6월부터 병진년(광해군 8, 1616) 12월까지.

 

 

 

6

 

20일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유생 이안진(李安眞) 24명이 상소하였는데 이러하다. 계축년 6 20,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41년에 이름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고, 종신토록 금고(禁錮)시켜 문 밖으로 쫓아 보내었다.

 

“신들은 삼가 아룁니다, 윤리ㆍ기강을 우주(宇宙)의 대들보이며 나라의 원기(元氣)입니다. 나라가 유지되는 것은 윤리ㆍ기강이 있기 때문이고, 사람이 금수(禽獸)와 다른 것도 윤리ㆍ기강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금 천하에 윤리ㆍ기강이 끊어지고서야 어찌 나라를 나라라 하고, 사람을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근년에 와서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흉악한 역적의 변고가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은, 어찌 의리가 막히고, 윤리ㆍ기강이 끊어졌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의(? 영창대군)는 어린애로서 비록 철이 없지만 이미 흉악한 역적의 기화(奇貨)가 되고 종묘 사직의 화근이 되었으니, 국법으로 반드시 죽여야 될 것이고, 전하께서 사사로운 은혜로 너그럽게 용서할 것이 아닙니다. 대비전에 대해서는 전하에게는 모자(母子)의 은혜가 있고, 신민에게는 군신의 의리가 있사오니, 대비께서 비록 과실이 있다 하더라도 전하로서는 마땅히 모자의 의리를 끊어서는 안 되오며, 대비에게 과실이 있다 하더라도 신하로서는 논의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번에 이위경(李偉卿) 등이 앞에서 주장하고, 정조(鄭造)ㆍ윤인(?)이 뒤에서 호옹하여 대비전을 곧바로 배척하고, 경전(經傳)의 인용을 잘못하여 혹은 《춘추(春秋)》에는 ‘주(?) 나라로 피하였다.[遜于?]고 쓰고, 《강목(綱目)》에서는 ‘태후(太后)를 이궁(離宮)으로 옮겼다.’고 썼다 하였으니, 그 경전의 뜻을 잘 알지 못하고서 임금을 크게 속임이 심합니다. 왜냐하면 호안국(胡安國), ‘피하였다.[]’ 한 것은 부드럽게 한 말이며, 자식에에 쫓겨나지 않은 것으로 은혜를 온전히 한 것처럼 한 것입니다. 《춘추》의 글쓰는 법에 ‘달아났다[]’는 것을 꺼려서 ‘피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로써 보건대, 으레 ‘피하였다’고 쓴 것이니, () 나라를 위하여 숨긴 것입니다. 《춘추》의 법에 숨긴 것은 나쁘게 말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 ‘주 나라로 피하였다.’고 한 것은 좋게 말한 것이 아니라 나쁘게 말한 것입니다. 내시 손정(孫程)이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면서 물리치고 기용하는 일이 모두 그의 손아귀에 있었으니, 염후(閻后)를 폐한 것은 손정인데, 서법(書法)에 ‘태후(太后)를 옮겼다.’고 한 것은 반대로 한 말입니다. 《강목(綱目)》에 옳게 여기지 않은 것이 뚜렷이 나타나 있는데, 그것을 오늘날에 법으로 삼게 하려는 것은 역시 어긋나지 않습니까. 옛날에고수(??)가 항상 순()을 죽이려 하였지만 순은 어버이 섬기는 도리를 다하였으므로 고수도 기뻐하게 되었고 고수가 기뻐하게 되었으므로 천하의 부자의 도리가 정해졌으니, 이는 실로 만세의 표준입니다.

듣건대, 전하께서 정성껏 효도를 다하여 대비전을 섬길 것이라고 전교하였다 하오니, 이것은 맹자(孟子)의 이른바, ‘자식의 직분을 다할 뿐이니, 부모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나에게 무슨 죄가 있어서인가.’라는 뜻입니다. 온 나라 신민이 누군들 감동하여 전하의 효성이 순임금과 차이가 없음을 우러러 흠모하지 않겠습니까. 신민된 자는 마땅히 순임금의 도리로 인도하여 순임금의 다스림과 같게 해야 할 것이지, 어찌 공자(孔子)의 필법에 비난한 것과 손정이 한 짓을 가지고 전하에서 그렇게 하도록 바라겠습니까.

선유(先儒)들은 ‘의()로써 논하면 어머니가 비록 조상보다 가벼우나, 정으로써 논하면 자식이 어머니와 천륜을 끊는 도리는 없다.’ 하였습니다. 무고(巫蠱)한 자취가 비록 뚜렷이 드러나긴 하였지만 전하께서 어찌 차마 모자의 도리를 끊으시겠습니까. 자식이 어머니와의 천륜을 끊지 못하는 의리가 이처럼 엄격한데, 이위경(李偉卿)등이, ‘모자의 도리가 끊어졌다.’고 말하였으며, , ‘끊어야 할 죄악이 뚜렷이 있다.’ 하였고, 또 ‘어찌 장차 국모(國母)로 대접하겠는가.’ 하였습니다.

, 이미 모자라고 말하였으면 어찌 자식으로서 어머니와 천륜을 끊는 자가 있겠습니까. 국모로 대접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디에 두시겠습니까. 전고에 없는 일로 신하로서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종이에 가득히 장황하게 늘어놓고 전하를 욕되게 하였으니, 전하의 지극한 효성으로 어찌 마음속에 척연(?)히 그 죄를 바로잡고자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대각(臺閣)이 논하지 않아 마침내 당당한 논의가 조경기(趙慶起)의 소에서 나왔는데도 소주(疏奏)는 아직 내리지 않고, 공의(公議)는 아직 펴지 못하오니, 이것이 인정상 더욱 답답한 일입니다.

신들이 유활(柳活)의 피혐한 사연과 정창언(鄭昌言)의 상소의 대강을 보건대, 혹은 두 궁에 따로 거처하시라고 주장하고, 혹은 모후(母后)를 폐출하는 변고를 만들어냈다고 말함으로써 발론(發論)의 본뜻을 은폐하고 도리어 남을 모함하는 함정으로 삼으려 하오니, 이는 실로 뚜렷이 드러난 없앨 수 없는 사실인데도 공론에서 죄를 면하려는 수작이므로, 그 속임수를 되풀이하는 정상이 여기에 와서 드러났습니다.

, 전하께서는 대비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셨는데도 전에 없는 변고를 당하시어 삼가고 두려워하시는 도리로 김제남에게 역적의 괴수라 하여 사사(賜死)한 것은 대비전을 위하는 뜻이라고는 하지만 , 훗날 국사(國史)에 기록하기를, ‘어머니와 천륜을 끊으라는 의리가 아무개 등에게서 나왔는데, 여러 신하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였고, 전하께서도 죄주지 않았다.’고 한다면 오늘날을 어떤 시대라고 말하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순임금을 본받아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를 다하소서. 그러면 모두들 말하기를, ‘우리 전하의 효성이 이러하시고, 우리 전하께서 악을 미워함이 이러하시며, 만세의 강상(綱常)을 붙들어 세움이 또한 이러하셨다.’고 할 것이니, 어찌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격절(激切)한 마음을 어찌할 길이 없사와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위경의 일에 대해서는 내가 그 자세한 경위를 모른다. 정조와 윤인 등이 비록 과격한 말을 하였지만, 너희들이 어찌 감히 언관(言官)에게 죄주기를 청하느냐. 조정에서 스스로 처분이 있을 것이니, 함부로 말하지 말라.

하였다, 헌납 유활(柳活)의 피혐한 사연은 이러하다.

 

“신이 금부(禁府)의 계사(啓辭)를 보오니, 간원(諫院)에서는 법에 없는 것으로 처리하려 한다 하였는데, 신은 역적 이경준(李耕俊)이 흉서(凶書)를 직접 지었으니, 오늘날 신하된 사람으로서는 끔찍하여 차마 들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그의 형제가 아직 서울에 있어 여론이 한결같이 분개하고 있으므로 신이 사간원이 모여 의논하는 자리에서 발론하여 귀양보내기를 청하고, 비록 연좌할 법률이 없다고 말을 하기까지 하였으나, 법률에 없다는 논의할 바가 못 되옵니다. 대간의 논하는 바가 비록 역적을 토죄하는 것이 아니라고는 하나, 또한 귀양보내자는 아룀이 있사온데, 이경준의 형제를 귀양보내기를 청한 것이 무슨 불가함이 있기에, 조문에 없는 법을 시행하려 한다고 지목하는 것입니까.

옛날의 임금이 큰 죄를 다스리는 것이 그 어떤 일이기에 한 구절의 법조문에 구애되어 감히 논죄하지 못하겠습니까. 또한 신이 지난번에 유학(幼學) 조경기(趙慶起)가 올린 소의 대강을 보오니, 정조 등 세 사람을 논죄하였고, 어제 또 조경기가 성균관에 통문(通文)한 말을 보니, ‘정조 등이 패론(悖論)을 주장하여 대비전을 선동해서 임금을 불측한 지경에 빠뜨리려 하니, 이는 만고의 강상(綱常)의 죄인이다.’ 하였습니다. 신의 성명이 비록 그 속에 들어 있지는 않았고, 이위경의 소에도 먼저 주장하고 호응하지 않았다 하였으나, 저들이 이미 주장하고 호응했다고 말하였으니, 신은 끝내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소가 내리기를 기다려 인책하려 하였으나 지레 금부의 일로 인퇴(引退)하면 회포를 끝내 아뢸 기회가 없을까 하여 그 사유를 낱낱이 들어 밝히는 바입니다. 신의 사는 곳이 가장 멀어서 그날 맨 마지막에 출근해 보니, 양사(兩司)가 모두 모여 있는데, 장령 정조(鄭造)가 이미 이 논리를 발설하였으나 동료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한창 서로 다투고 있다가 신이 들어가 참여할 때에는 각각 소견으로 인피(引避)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신이 논의의 결말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두 궁에 따로 거처하시라는 데 불과하였을 뿐이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도 이미 난처한 변을 당하여 한 궁에 같이 계시는 것은 과연 온당치 못한 일이라 여겨 소를 지어 인피하려 할 적에 ‘거처를 옮기는 일’을 그 속에 아울러 기입하였는데, 사간 최동식(崔東式)이 ‘이 한 조목은 피혐하는 말 같지 않다.’ 하므로, 신이 곧 지워 버리고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정조 등의 계초(啓草)를 보오니, 그 중간의 문구가 비록 미안스런 점이 있기는 하오나 결론은 ‘두 궁에 따로 거처하시라.[各處雨宮]는 네 글자로 그쳤사온데, 조경기 등은 각각 두 궁에 따로 거처하시라는 것을 가지고 강상(綱常)의 죄인이라거니, 임금을 불측한 지경에 빠뜨리려 한다거니 하고 있으니 알지 못하겠나이다.

신은 삼가 보건대, 성상께서 순임금의 마음으로 간절한 효성을 다하여 그 모후(母后)를 섬기는 도리에 있어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 극진히 하지 않으심이 없었는데, 불행히도 참변이 안팎에서 일어났습니다. 김제남이 국구(國舅)로서 역적의 괴수가 되었으니, 천지에 사무치는 지극히 흉악한 진상은 사사(賜死)한 문안(文案)에 밝혀져 있사옵고, 무고(巫蠱)의 변이 달마다 발생하고 맹녀(盲女)와 요사한 무당들이 백방으로 저주하는 꼴은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말할 수도 없습니다. 요사스럽고 더러운 기운과 음흉한 독이 임금님 거처하시는 곳에 숨어 있으니, 신하로서 무궁한 걱정에 이르지 않는 바가 없어야 하는데, 어찌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이 위태롭고 두려운 처지에 앉게 하고서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를 생각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무고의 변고가 이미 이러하오니, 사세상 한 궁에 같이 계셔서 그 더럽고 독한 기운을 받게 해서는 안됩니다.

제왕(帝王)의 일은 사삿집의 모자와는 다른 것입니다. 위로는 중대한 종묘 사직을 받들고 아래로는 많은 신민에게 임하고 있사오니, 그 책임이 어떠하온데, 평상시에 대처하는 도리를 가지고 변고를 처리할 때에 행하려 하옵니까. 권도(權道)를 해서 알맞게 되면 마침내경권(經權)에 합당할 것입니다. 이미 한 궁 안에 같이 계시는 것이 불가하다면 법궁(法宮)으로 거처를 옮기는 데 불과할 뿐이옵니다. 신이 같이 계시는 것이 미안스럽다고 한 것도 거처를 옮기시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뒤에 삼사(三司)에서 곧 거처를 옮기시라는 논의를 꺼냈는데, ‘거처를 옮긴다.’고 하면 사람들이 모두 옳다 하고, ‘각기 거처하신다.’하면 사람들이 모두 그르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시비(是非)가 갈리게 되어 마침내 사람을 함정에 빠뜨려서 역적을 토죄하는 사람의 입을 막아서 위로는 임금을 위협하는 자료로 삼아 무고의 옥사를 허무한 것처럼 만들게 하고자 하여 횡설수설하는 논의가 날로 일어나고, 임금의 위엄이 날로 고립되어 가고 있습니다. 성상께서 이의를 폐하라는 명이 계셨는데도 유사(有司)는 편안하게 마음을 쓰지 않고 이의를 궁중에 놓아 두었으므로 기강이 무너지고 명령이 행해지지 않게 되었으니, 훗날의 일이 어찌 될지 모르겠습니다. 역적 이의가 처단되기도 전에 지레 이 말을 꺼내어 인심을 어지럽히고 있사온데, 향교(鄕校)에서 먼저 주창하고 성균관에서 뒤를 이으려 하오니, 이렇게 하여 그치지 않으면 그 종말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들이 우리 임금을 위태롭고 두려운 지경에 처하지 않게 하려는데 여기에 무슨 죄가 있다고 도리어 강상(綱常)의 죄인으로 지목합니까. 이 함정을 한 번 열어 놓아서 일마다 여기에 밀어넣으면 시비가 가려지지 않아 믿을 것이 거의 없어질 것이니, 어찌 크게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신은 천성이 어리석고 망령되어 하는 짓마다 남의 비위를 거스르게 되었사온데 역적의 변고가 일어났을 시초에도 외람되이 이 직책에 있으면서 전에 없는 이런 변고가 전하의 측근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되었사오니, 이야말로 신하가 위험을 당하여 몸을 바칠 때이므로 오직 힘을 다하여 마지 않을 뿐이고, 그 밖의 일은 몰랐던 것입니다. 신이 사은숙배한 그 이튿날에 즉시 김제남의 죄상을 동료들에게 간통(簡通)하여 먼저 그 흉악한 기세를 꺾었더니, 김제남이 신을 꺼렸으며, 칠신(七臣)이 보호한다는 말을 완석(完席)에서 먼저 꺼내어 그 죄상을 밝혔더니, 칠신의 무리들이 신을 원수로 여겼으며, 황신(黃愼)이 역적의 장물(臟物)을 맡아 둔 것은 보통의 죄가 아니므로 동료들의 회의에서 힘써 물리치고 잡아다가 국문하기를 청하였더니, 황신을 편드는 자가 몹시 신을 미워하였으며, 서성(?)의 이름이 역적의 입에서 분명히 나왔으니 그냥 두고 논죄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회의 석상에서 강경히 다투어 먼 곳으로 귀양보내기를 청하였더니, 서성을 두호하는 자가 신을 중상하였습니다. 그 밖의 가지가지 논의할 만한 일도 신이 혼자 도맡았으므로 마침내 이항복(李恒福)의 논핵을 받게 되었고, 양사가 서로 잇달아 헐뜯고 배척하여 신을 조의(朝議)의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번에 신을 배척한 유생의 소도 이 두어 가지 문제 때문입니다. 신이 어떤 사람이기에 여러 사람의 노여움을 사서 밖으로는 금병(禁兵)이 호위하고, 안으로는 복숭아나무 가지와 갈대 빗자루로 잡귀를 물리치는 때를 당해서 직책을 다하여 조그마한 도움도 드리지 못하고 피혐으로 소란을 피우오니, 신의 죄가 이에 이르러 더욱 크옵니다. 청하옵건대,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정언 박홍도(朴弘道)가 피혐한 것도 대략 이와 같다.

23일 옥당에서 차자를 올렸는데 이러하다. 전한 정호선(丁好善), 교리 홍방() 수찬 권흔(權昕), 응교 오정(吳靖)이 동참하였고, 이민환(李民?)이 지었으며, 부응교 한찬남(韓纘男), 교리 박정길(朴鼎吉)은 논의가 같지 않았다.

 

“양사가 모두 인혐하고 물러났는데, 이번 역적의 변고는 옛날에도 없던 일이오며, 경준(耕俊)이 격문(檄文)을 지은 흉악하고도 끔찍한 짓은 실로 여러 역적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아파할 자입니다. 그런데 형벌을 참고 자복하지 않고 지레 죽었으니, 신하로서 분하고 원통함이 어찌 그지 있겠습니까. 비록 연좌시키는 법률이 없다고는 하나 어찌 그의 형제들이 서울에서 편히 숨쉬게 할 수 있겠습니까. 언관이 귀양보내기를 논하는 것은 실로 이 때문입니다.

나라가 불행하여 역적의 변고가 밖에서 일어나고, 무고가 안에서 일어나니, 신민의 슬픔과 인륜의 변고가 전고에 없던 일입니다. 역적을 다스리는 의리는 엄하지 않으면 안 되고,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 또한 극진히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두 가지 일을 처리함에 있어 털끝만큼이라도 미진한 바가 있으면 국법이 행해지지 못하고 사람의 도리 또한 거의 없어져 버릴 것입니다.

전하의 지극하신 효성으로 천고에 없는 변고를 만났으니, 온 나라 신민이 전하께 바라는 마음이 어찌 옛날 성현들의 지극한 도리를 오늘날에 법으로 삼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난번 정조(鄭造)ㆍ윤인(?) 등이 이위경(李偉卿)의 소를 주워 모아서 대비전을 바로 지적하여, ‘마땅히 모자의 도리를 끊어야 할 죄악이 뚜렷이 있다.’고까지 말하고, 또 ‘지금의 신자된 사람은 대비를 국모로 대접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또 ‘주(?) 나라로 피하였다., ‘태후(太后)를 이궁(離宮)으로 옮겼다.’는 말을 인용하여 결론지었는데, 신들의 소견으로는 이런 것이 어찌 신하로서 할 수 있는 말이겠습니까. 윤기에 죄를 지음이 심합니다.

지금 말을 많이 허비해서 왜곡하여 분소(分疏)한 사람들이 정조와 윤인의 처지를 위하여 그 피혐한 말 중의 ‘따로 거처하시라.’는 두 글자를 끄집어 내어 당초에 논의한 본뜻을 은폐하였으며, 또 무고의 옥사는 허무한 일을 하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그 ‘거처를 옮기시라.’는 논의는 국인들도 같은 생각이고, 무고의 흔적도 뚜렷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한 유활(柳活)의 말은 무슨 근거로 그렇게까지 말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마음속에 있는 바를 진실로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역적이 이미 ‘능 위에서 저주하였다.’고 진술하였으니, 능을 봉심(奉審)하는 일은 형편상 그만둘 수 없는 것이오나, 마침내 허탄한 일이 되어 간신에게 팔렸다면, 신하로서 분하고 원통히 여겼어야 할 것인데, 본 바가 있으면서도 즉시 논렬(論列)하지 않고 며칠을 끌어오다가 물러나서 뒷말만을 하니, 매우 일을 논의하는 체통을 잃었습니다. 능 위의 막대한 변고에 대해서는 그 허탄한 것임을 미리 알 수 없었으니, 봉심하는 일을 드디어 여러 사람의 논의에 따르는 것 또한 사세가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소견이 이와 같은데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청컨대, 대사간 이호신(李好信), 사간 김지남(金止男), 정언 조정립(曺挺立)과 대사헌 이하는 모두 출사하게 하시고, 헌납 유활과 정언 신득연(申得淵)은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대로 하라.

하였다.

24일 생원 정창언(鄭昌言)ㆍ박이검(朴以儉)ㆍ박창선(朴昌先)ㆍ박지행(朴知行)ㆍ유학 박영남(朴榮男)ㆍ조정립(曺挺立)ㆍ양기(梁機)ㆍ유여직(兪汝稷)ㆍ이선술(李先術)ㆍ윤좌벽(尹左?)ㆍ유우엽(柳宇燁)ㆍ한규(韓奎)ㆍ정명준(鄭命俊) 등의 상소는 이러하다.

 

“삼가 아룁니다. 무뢰배 조경기(趙慶起)등이 남의 사주를 듣고 유생(儒生)의 이름을 사칭하여 유영경(柳永慶)의 뒤를 이어 김제남을 구호하려고 마침내 강상의 죄명을 역적 다스리는 사람에게 씌워서 유적(儒籍)에서 삭제당한 성균관과 태학의 유생이 수십여 명에 이르렀는데, 반드시 이들 한 무리의 의리 있는 선비들을 모조리 없애고야 말려 하였으니, , 이 역시 끔찍스럽습니다. 이른바 강상의 적이란 무엇입니까. 임금을 위하여 역적을 엄하게 다스리는 사람이 역적입니까. 임금을 배반하고 역적을 두호하는 자가 역적입니까. 자기 죄를 도리어 다른 신하에게 씌우니, 누가 과연 역적인지 모르겠습니다. 당초에 적신(賊臣) 유영경이 세자를 위태롭게 하려고 꾀한 것은 이의(?) 때문이고, 역적 이진(?)이 궁궐 안에서 난을 꾸민 것도 이의에게 전위하고자 해서였으며, 김직재(金直哉)가 진릉군(晉陵君) 이태경(李泰慶)만을 끌어넣은 것도 이의를 숨긴 것입니다. 세 역적의 모의를 김제남이 미리 알고 있었으며, 세 역적이 믿고 역적질을 한 것도 김제남때문입니다. 김제남이 국구의 지위에 있으면서 대비의 세력을 믿고서 안으로는 역적 이의를 기화(奇貨)로 삼고, 밖으로는 세 역적을 우익(羽翼)으로 삼았다가, 세 역적이 잇달아 죽음을 당하게 되자 또 서양갑(徐羊甲) 등과 몰래 반역을 꾀하여 전번의 모의를 이루려 하였으나, 다행히도 조종의 몰래 도와주심을 힘입어 흉악한 역적 모의가 드러나서 역적들이 머리를 나란히 하고서 목이 잘렸는데, 김제남은 홀로 그 몸뚱이를 보전하고 있습니다. 죄인을 이미 잡았으나 형벌에 실수가 있어, 대의(大義)가 밝아지려다가 도로 어두워졌으니, 귀신과 사람의 분노가 이제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여러 역적의 공초 중에, ‘대비가 자기의 물건을 가지고 있으니, 어찌 주지 않겠는가. 대비는 비록 부인이지만 도량이 부원군보다 낫다.’ 하였으며, 또 ‘대궐을 지키는 장사가 대비의 교서를 받들어 아무 날 거사한다.’ 하였고, 또 ‘대비가 선왕의 유교를 내려 서울 사람들을 모아 동교(東郊)에서 습격하고, 중국 조정에 아뢰면 명분이 바르고 말이 순조롭다.’ 하였으며, 또 ‘대비의 교서를 내어 영창대군을 추대하려고 복병(伏兵)하여 거사한다.’ 하였으며, 또 ‘대비에게 상달하여 대궐 안의 무기를 꺼내도록 한다.’ 하였고, 또 ‘수렴청정하고 금과 비단을 내어 준다.’는 등의 말이 있었으니, 밖으로 역적 모의에 호응한 흔적이 이처럼 분명합니다.

저주한 일에 대해서는 고성(高城)ㆍ응벽(應璧) 등의 공초에 여기저기 나왔으며, 그 요사스럽고 흉악한 사람들이 대궐 안에 널려 있어 그 끔찍스러움을 차마 볼 수 없고, 들을 수도 없으니, 안으로 무고를 행한 흔적도 이처럼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옛날에 애강(哀姜)이 두 임금을 죽이는 데 참여하여 나라가 거의 망하게 되었는데, 《춘추》에, ‘부인 강씨가 주 나라로 피하였다.’ 하였고, 《전()》에는 그것을 ‘심하게 끊었다.’고 썼으며, 염후(閻后)가 몰래 태자를 폐하고 어린애를 황제로 세우기를 탐하였는데 《강목(綱目)》에, ‘태후를 이궁(離宮)으로 옮겼다.’고 썼고, 해설에는 죄사(罪辭)로써 일컬었습니다. 그가 이것을 인용하여 말한 것은 감히 이것을 증거로 삼아 오늘날에 시행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선왕께서 어질고 덕 있는 이를 택하여 세자의 자리에 두셨으며, 중흥의 공이 현저하여 대통(大統)을 이어받았는데, 대비께서 자기 소생을 세우려고 전하를 해치려 하였으니, 이는 선왕의 뜻을 어긴 것입니다. 또 성상께서 왕위를 이은 것은 중국 황제가 책봉한 것이고, 세자로 지위를 바르게 한 것은 황제의 명을 받은 것인데, 대비께서 백방으로 모해하여 두 임금을 제거하려 하였으니, 이는 천자의 명을 버리는 것으로 고금 천하에 없는 변고입니다. 적신 유영경과 내통하여 선왕의 유지라고 사칭하였는데도 성상께서는 그냥 놓아 두고 묻지 않으신 지 이미 5년이 지났으며, 저주하는 무고가 대궐 안에 가득 찼는데도 전하께서는 감추어 두고 말씀하지 않고 전파하지 못하게 하시니, 이는 전하의 효성이 뛰어나서 어머님의 허물을 덮고, 자신이 화를 담당하려고 시종 게을리 하지 않는데도 대비께서는 아직도 감동하지 못하고 모해함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어머니로서의 은혜가 전하에게는 이미 끊어졌습니다.

오늘의 신하는 선왕의 신하인 동시에 전하의 신하입니다. 사직이 중하므로 임금도 오히려 가벼운데, 하물며 대비는 전하에게 삼종지도(三從之道)가 있음에리까. 《춘추전》에 이르기를, ‘예날의 신하는 의리로 보아 임금을 해치려 한 이와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오늘날의 신하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까. 유영경의 남은 무리들과 김제남의 무리들이 아직도 조정에 붙어서 중요한 권력을 잡고 있으며, 두 역적의 친척들이 안팎으로 연결해서 서로 호응하고 위아래로 한 몸이 되어 의리가 막히고 기강이 없어져 역적을 다스리는 엄격함을 모르고, 오직 역적을 두호하기를 일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태학생이 이위경(李偉卿) 등이 홀로 분개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감히 충성스런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장령 정조(鄭造)ㆍ윤인(?)등이 이위경의 이 소로 변고를 처리하는 계()를 올리려 하다가 같은 자리에 있던 자들의 저지를 당하고 피혐할 적에 충성된 의분에 스스로 격하여 소의 문구가 경솔함을 면치 못하였으나, 그 결론은 다만 ‘두 궁에 따로 거처하시라.’는 말을 했을 뿐입니다. 옥당에서 이른바, ‘다 같이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으로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에 매우 합당하다.’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

‘폐()한다.’는 한 글자는 애당초 이위경 등의 입에서 나온 것도 아니며, 정조와 윤인의 피혐에도 나오지 않았는데, 흉악한 무리들이 어디에서 이 말을 지어 내어 사람을 모함하는 커다란 함정으로 만들려는 것입니까. 유생들의 소에 인용된 ‘주 나라로 피하였다.’는 것과 ‘장간지(張柬之)는 어떠어떠하였다.’는 등의 말도 소견이 있는 것입니다.

옛날 공자가 《춘추》를 지으면서 여러 번 국모(國母)의 일을 적을 적에 바르게 쓰고 숨기지 않았습니다. 공자는 노() 나라의 신하이며, 노 나라는 곧 공자의 모국입니다. 성인이 어찌 임금과 신하의 의리를 몰랐겠습니까마는, 반드시 바르게 쓴 것은 신하로서 국모를 죄주려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숨긴다면 윤기가 끊어지고 대의가 분명치 못하여 나라가 나라 구실을 못 하기 때문입니다. 이위경 등도 공자를 배운 사람들입니다. 어찌 신하로서의 분수와 의리를 모르겠습니까. 대비의 일을 바르게 쓴 까닭은 《춘추》에서 숨기지 않는 대의를 본받은 것입니다.목욕하고 토죄하기를 청한 것은 《강목(綱目)》의 역적을 엄하게 토죄하려는 뜻을 취한 것으로, 그가 인용한 말은 실로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찌 신하로서 전하께 감히 모후를 폐하라는 말을 꺼낼 수가 있겠습니까. 옛날에 성현 중에는 창고를 고치고, 우물을 팔 적에 삿갓으로 가리고, 굴 속에 숨어 피하였다가 나왔으며, 또한 큰 매를 치면 달아난 자도 있는데, 하물며 임금의 몸은 위로는 종묘 사직을 이어받고 아래로는 신민을 도맡고 있으니, 일신의 안위(安危)는 곧 한 나라의 존망(存亡)입니다. 진실로 신변에서 일어나는 변고와 내부에서 생기는 걱정이 조석에 임박했는데, 어찌 편안히 지내면서 피할 계책을 쓰지 않으십니까.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같이 거처하는 것은 떳떳한 일입니다. 그러하오나 잠깐 피하시어 스스로 인륜의 큰 변고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륜의 큰 변고는 일이 애매한 데에 관계되므로 당대의 사람들도 그 곡절을 모르는 것이 있으면 의심을 품게 되는 법이온데, 하물며 훗날에 있어서는 더욱 오랠수록 더욱 의심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이위경 등이 경사(經史)의 대의를 인용하고 아울러 이의를 토죄하는 일에까지 언급하게 된 것입니다. 이위경ㆍ정조ㆍ윤인 등의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이처럼 지극한데, 흉악한 무리들이 이위경ㆍ정조ㆍ윤인 등을 윤기(倫紀)의 적이라고 지목하니, 적이라 한 것은 모후에 대해 바르게 쓴 것을 적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이것은 《춘추》에 대해서 죄인입니다. 이의를 다스리라는 것을 적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이는 《강목》에 대해서 죄인입니다. 이것은 소 안의 말을 주워 모아 폐치(廢置)라는 이름을 지어 내어 일망타진하려는 계책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전하께서도 통촉하시는 바이고, 온 나라가 모두 아는 사실이니 어찌 신들의 구구한 변명이 필요하겠습니까. 또 흉악한 무리들이 가탁(假托)하는 말로 임금의 마음을 위협하여 전하로 하여금 시비를 꺼려 감히 말을 내지 못하시게 하는 것은 저들이 대비의 일을 덮어버리고, 변고에 처리하는 도리를 어지럽혀 당시에 의혹을 일으키고 후세에 비방을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것은 대비에게는 충성하고 전하께는 불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이위경과 정조와 윤인이 모후에 대해 바르게 쓴 것은 전하께서 변고에 잘 처리하시도록 한 것으로 전하를 크게 위하는 것이고, 흉악한 무리들이 모후에 대한 말을 꺼리는 것은 전하께 나쁜 평판을 듣게 하려는 것으로 전하를 매우 저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숨기는 까닭은 그를 유지시키기 위해서인데, 그 유지시키려는 자는 모후가 아니라, 역적 이의입니다. 그 속셈이 이의를 유지시키는 데에 있다면 이는 실로 유영경ㆍ역적 이진ㆍ김직재ㆍ김제남등의 잔당으로서 훗날의 발판을 만들려는 것이오니, 윤기의 적이 이들이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흉악한 무리들이 이위경과 정조와 윤인등을 극구 공격하는 까닭은 반드시 전하께서 감히 스스로 말씀하지 못하시게 하고 나라 사람들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게 하여 전하께서 무고와 저주 속에 앉아서 꼼짝 못 하시고 그 독을 달게 받으시게 하고야 말려는 것입니다. 이들의 전하를 해치려는 음모는 군사를 동원하여 대궐을 침범하는 것보다도 심합니다.

, 위포(韋布 가죽띠와 베옷으로 가난한 자의 복장)의 선비나 이목(耳目)의 신하로서 이위경과 정조와 윤인 등처럼 충의에 분격하는 이가 몇 사람이나 있겠습니까. 이들은 전하의 신하이고, 저 이위경과 정조와 윤인 등을 공격하는 자들은 모두 유영경과 김제남의 잔당이니, 이들은 대비와 이의의 신하입니다. 역적을 토죄하시라는 전하의 신하를 공격하는 데 극단적인 수단을 쓰지 않음이 없을 것이오니, 이위경과 정조와 윤인 등이 비록 흉악한 모함 속에서 죽을지라도 종묘 사직을 위하고, 임금을 위하는 데에는 죽어도 만족할 것입니다. 다만 두려운 것은 전하의 신하가 일망타진된다면 전하의 좌우 전후가 모두 유영경ㆍ김제남의 잔당이므로 전하께서는 고립되고 의지할 데가 없으실 것이니, 장차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이항복이 이른바 ‘어찌 몹시 쓸쓸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한 것이 여기에서 증명될 것입니다. 조경기의 소가 들어간 뒤에 태학생 정복형(鄭復亨) 등이 사론(邪論)을 극력 주장하여 맨 먼저 흉악한 모의를 주창하여 강상(綱常)의 죄를 지었다는 것으로 명목을 만들어 생원 이위경등 12명을 유적에서 지워 버리고, 곧 사학(四學)에 통문(通文)하여 지난날 상소에 참여한 유학 황덕부(黃德符) 8명을 모조리 제명하고, 또 소를 올려 세 신하[三臣 이위경ㆍ정조ㆍ윤인]를 죄주기를 잇달아 청하고 임금을 위협하니, 곧 윤기의 적을 기쁘게 하는 것이 과연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습니까.

무신년(선조 41, 광해군 즉위년, 1608) 사이에 유영경이 양궁(兩宮)을 이간하였다고 죄안(罪案)을 만들어 사류(士類)를 얽어 넣었고, 이제 그의 잔당들이 또 대비전을 동요하였다는 구실로 정당한 논의를 하는 사람을 일망타진하려 합니다. 사람을 모함하는 방법이 앞뒤가 한결같으니, 유영경의 뒤를 이어받아 가지고 사람을 모함한다는 말을 그가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 사류의 한패가 어찌 그들에게 사사로운 감정이 있겠습니까. 매양 역적을 토죄한 때문에 밉게 보인 것인데, 반역당의 무리들이 복노(伏弩 숨어 쏘는 화살)를 연발하여 죽어가는 사람이 자주 생기오나, 결국 믿을 것은 대의(大義)이고, 정론(正論)입니다. 전하께서 만약 좋아하고 미워함을 밝히고, 간사하고 올바름을 가리지 않아서 도깨비 같은 무리들이 대낮에 날뛰게 되면 옳고 그름이 분명치 않고, 역리(逆理)와 순리(順理)가 구별이 없어져서 어지러운 사태가 안정되지 않고 나라가 따라서 망할 것이오니, 마음아프지 않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밝으신 판단을 가지시고 조강(朝綱)의 위엄을 떨치시어 유영경의 간사한 논의를 통렬히 물리치고, 빨리 사람을 모함하는 죄상을 다스리시어 한편으로는 윤기를 정하시고 또 한편으로는 사직을 안정시키소서. 신들이 강개하고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삼가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소의 사연은 잘 알았다. 조정에 자연 공론이 있을 것이니, 너희들은 망령된 말을 하지 말고 물러가 글이나 읽어라.

하였다.

□일 동학(東學)의 유학(幼學) 조경기(趙慶起)등의 상소는 이러하다.

 

“신들은 듣자옵건대, 《맹자》에, ‘요순(堯舜)의 도가 아니면 왕 앞에 감히 아뢰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고금 천하에 칭송할 만한 밝고 어진 임금이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마는, 반드시 요순(堯舜)을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임금이 요순의 도로써 스스로 처신하지 못하는 것은 임금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고, 신하가 요순의 도로써 임금을 인도하지 못하는 것은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잇달아 화란(禍亂)을 만나고 역란(逆亂)의 변고가 자주 일어납니다. 대군을 추대한다는 비밀 계획이나 임금으로 세운다는 흉악한 모의가 이의(?)를 지적하였으니, 이는 종묘 사직의 화근이고 신민의 큰 원수입니다. 전하께서는 비록 천륜의 중함과 동기간의 친함일지라도 국법에 있어서는 가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비에 있어서는 이의의 대비가 아니고 곧 전하의 대비이오니, 이의의 일 때문에 그 사이에 경솔히 논의해서는 안 됩니다.

신하된 사람은 진실로 성명(聲明)을 요순의 도로써 인도하여 요순의 정치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진사 이위경(李偉卿)등이 맨 먼저 주창하여 소를 올려 모후를 추하게 헐뜯고, 전 장령 정조(鄭造)와 윤인(?)이 경전(經傳)을 속여 인용하여 같은 악인으로 인혐(引嫌)하는 체하면서 패악(悖惡)한 말을 거리낌없이 방자하게 하고, 혹은 대비를 애강(哀姜)이 주 나라로 피한 것에 비유하기도 하였는데, 애강이 노() 나라로 시집간 것은 장공(莊公)이 그 어머니를 막지 못하여 예법에 벗어나고 때를 넘겨 원수의 딸을 얻었으니, 인륜의 시초가 이미 바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뒤에 경보(慶父)와 간통하여 그 두 임금을 죽이는 데 참여하였으니, 신하된 사람으로는 의리상 같은 하늘 아래 살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에 ‘주 나라로 피하여 이()에서 죽었는데 제() 나라 사람이 그 시체를 돌려보내서 부인 강씨의 상()이 제 나라에서 돌아왔다.’라고 쓴 것은 애강을 깊이 끊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선왕의 가례(嘉禮) 행하신 것을 인륜의 시초를 어지럽힌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대비의 과실에 또한 애강의 죄악과 같은 것이 있습니까. 혹은 염후(閻后)를 이궁으로 옮긴 일에 비유하기도 하였는데, 염후의 과실이 비록 한 가지뿐이 아니라 하더라도 손정(孫程)이 권력을 마음대로 부린 것이 이미 군자의 자기 처신의 도리가 아니며, 임금을 폐하고 세우는 일에 또한 제음(濟陰)이 참여하여 알았던 것이 아니니, 감히 오늘의 일에 증거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지금 세 역적[이위경ㆍ정조ㆍ윤인]의 말이 모두 옳다 하더라도 자식은 아버지를 위하여 나쁜 일을 숨겨 주고, 아버지는 자식을 위하여 나쁜 일을 숨겨 주는 가운데에 정직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높은 이ㆍ친한 이ㆍ어진 이를 위하여 숨겨 주는 것도 《춘추》의 의리이니, 전하에게 대비의 과실을 주창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한 ‘모자의 도리가 끊어졌다.’는 것은 어디에서 취한 것이며, 그들이 말한 ‘모자의 도리를 끊어야 할 죄악이 현저히 있다.’고 한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들이 말한, ‘장차 국모로 대접하겠느냐.’는 것은 무슨 소견입니까. 세 역적도 선왕께 어찌 은혜로운 대우를 받지 않았겠습니까.

오늘날 그들이 선왕을 저버리는 것은 훗날 또한 전하를 저버릴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세 역적의 흉악함은 참으로 말할 것이 못 됩니다. 대신은 전하의 팔다리인데 보고도 말하지 않으며, 삼사(三司)는 전하의 귀와 눈인데 편안히 여기고 논쟁하지 않으며, 정원은 전하의 후설(喉舌)인데 그저 순종하기만 하고 깨우쳐 드리는 일이 없고, 다만 논의하는 데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것만을 능사(能事)로 삼고, 본직을 교체하는 것만을 일로 삼고 있을 뿐이니, 그 밖의 절개도 주견도 없이 어울려 진퇴만을 거듭하고 있는 자야 말할 것이 무엇 있겠습니까.

제갈양(諸葛亮)은 한 후주(漢後主 유선(劉禪))에게 이르기를, ‘시위(侍衛)하는 신하가 조정 안에서 게을리 하지 않고, 충성되고 뜻 있는 선비가 밖에서 자기 한 몸을 잊어 버리고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것은 선제(先帝 유비(劉備))의 특별한 대우를 추모하여 폐하에게 갚으려는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저 대신ㆍ삼사ㆍ승정원의 관원도 모두 선왕께서 특별히 대우한 신하들이니, 마땅히 전하의 조정에서 선왕의 은혜를 갚아야 할 것인데, 선왕의 후한 대우를 잊어 버리고, 세 역적의 흉악함을 편들기에 익숙하여 천토(天討 하늘의 주벌)가 죄 있는 자에게 행해지지 않고 흉악한 목숨들이 천지 사이에 살아 있게 하니, 신들은 삼사ㆍ대신ㆍ승정원이 모두 죄가 있다고 여깁니다.

, 세 역적의 말은 행해질 리가 만무합니다만, 그들이 마련한 계책은 만대(萬代) 후에 전하를 어떤 임금으로 만들려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저 이위경ㆍ정조ㆍ윤인등은 전하의 죄인일 뿐만 아니라, 실로 선왕의 죄인이며, 선왕의 죄인일 뿐만 아니라 실로 만고의 강상(綱常)의 죄인입니다. 신들은 그러므로 정조 등 세 역적을 목 베지 않으면 삼강(三綱)이 없어지고구법(九法)이 파괴되며, 예악(禮樂)이 무너지고 오랑캐가 횡행할 것이니, 얼마 안 가서 금수가 되지 않겠습니까.

신들은 바라옵건대, 이위경ㆍ정조ㆍ윤인 등을 유사(有司)에 회부하여 법을 밝게 보이심으로써 귀신과 사람의 분노를 풀어 주고, 종묘 사직과 하늘에 계신 혼령을 위로하여 만고의 강상을 유지하고, 국민으로 하여금 전하의 효성이 순임금과 조금도 차이가 없음을 알게 한다면 어찌 훌륭하지 않겠으며, 어찌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지극히 원통하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옵니다.

하니, 답하기를,

 

“정조ㆍ윤인 등이 비록 과격한 말을 했다 손 치더라도 너희들이 어찌 감히 그들을 목 베라는 말을 하느냐. 조정의 처분이 있을 것이니, 망령된 말을 하지 말라.

하였다.

저주(咀呪)와 흉서(凶書)에 관한 교서를 중외(中外)에 반포하니, 내용은 이러하다.

왕은 이르노라. 흉악한 무리들이 실로 번성하여 하늘에 사무치는 죄악이 이미 여물었고, 역적 모의가 스스로 드러났으니 저자에서 목 베는 형벌을 피하기 어렵게 되었도다. 이에 그들의 공초를 게시하여 알리노라. 역적의 괴수 김제남(金悌男)이 처음 유영경(柳永慶)과 함께 이의(?)를 세울 모의를 하여무신년의 화를 빚어내었으나, 그 흉계가 이루어지지 않자, 양갑(羊甲)ㆍ우영(友英) 등과 은밀히 결탁하여 밖에서 난을 만들고 응희(應希)ㆍ금란(金蘭) 등과 몰래 통하여 안에서 요망한 짓을 하였으니, 그 대역무도한 죄상을 이루 다 말하기 어려우므로, 우선 저주와 흉서의 두 가지 일만 말하노라.

역적 김응벽(金應璧)의 공초 중에, ‘능 위에서의 저주는 지난해 2월에 한 상궁(韓尙宮) 정이(貞伊)가 무당을 시켜 능소(陵所)에 가서 경을 외게 하였으며, 응벽도 같이 가서 저주하였는데, 연이(連伊)가 오곡밥 세 그릇과 가래를 가지고 밤중에 나가서 깊이가 한 자 남짓한 구덩이를 파고 고양이를 묻었으며, 또 경문(經文)을 대홍단(大紅緞) 조각에 써서 묻었는데, 응벽(應璧)이 황응인(黃應仁)ㆍ이만룡(李萬龍)과 함께 하였습니다. 대궐 안에서의 저주도 한 상궁이 한 짓이라는 것은 고온(古溫) 등이 응벽에게 말한 것입니다. 소경 장순명(張順命)이 이의의 처소에 들어가 이의의 연월(年月)을 쓰고, 차마 말하지 못할 일을 가지고 경으로 외었으며, 또 종이에 사람을 그려 바늘로 눈을 찌르고 부엌 바닥에 묻었으며, 또 궁정 뒤의 솔숲에서 산 개를 죽였으며, 내시 민희건(閔希騫)이 말을 묶어서 금구현(金溝縣) 금산사(金山寺)깊은 못에 던졌습니다. 최 상궁이 고양이와 큰 수탉을 사다가 도서비(道西非)를 시켜 해가 뜰 때에 진주(眞珠)와 부적을 먹이고 고양이에게 몰아서 죽이게 하였습니다. 나인(內人) 환이(環伊)가 또 금빛 고양이의 눈알을 바늘로 찔러서 연기가 찬 항아리 속에 넣었습니다.’ 하였다.

나인 예()의 공초에, ‘저주하는 일에 대해서는 이의의 보모 덕이(德移)가 모의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ㆍ환이(環伊)ㆍ신옥(信玉) 등이 대비전 윤 상궁의 종 춘금(春今)의 말을 듣고 은을 뇌물로 받고 내응하였다고 합니다. 저주에 쓰는 물건들은 몰래 서로 주고받았으며 보자기에 싼 형상이 말[]보다 작은 것을, 예가 두 번 보았습니다. 저주의 방법은 모두 여자 소경에게 배워서 하였는데, 매화나무 위에 쥐를 찢어서 걸어 놓고, 대궐 안 서쪽 담 밑에는 흰 수탉을 놓아 두고, 서쪽 담 안에 흰 종이에 돼지를 그려 땅에 깔아 놓았으며, 섬돌 밑에는 죽은 쥐를 버리고, 남궁(南宮) 밖에는 청개구리와 쥐가죽을 버리고, 남쪽 섬돌 밑에는 죽은 고양이를 놓고, 오미자(五味子) 떨기 밑에는 큰 글씨를 써 놓고, 우물 안에는 마른 대구어(大口魚)를 던져 넣었으며, 동궁 남쪽 담 안에는 죽은 까치와 죽은 쥐를 던져 두고, 동궁 담 밖에는 돼지와 새깃을 꽂은 갓을 쓴 사람을 그려서 버리고, 대전 마루 밑에는 쥐를 묻고, 뒷간 밑에는 까마귀의 두 다리와 두 날개를 잘라서 둔 것 같은 것으로, 위의 각가지 저주에 소용되는 물건을 이의의 사내종 순창(順昌)이 바깥에서 구해 들여왔습니다. 예이(禮伊)가 이의의 방에 가 보았더니, 덕복(德福)ㆍ향이(香伊)ㆍ환이 등이 흰 개 한 마리를 잡아서 눈알을 빼고 주홍(朱紅)으로 메우는 것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모두 열 여섯 가지의 저주를 하였는데, 전후 모두 열 여섯 차례 정월에서 4월까지 혹은 열흘, 혹은 닷새 간격을 두고 행하였습니다. 또 유릉(裕陵 의인왕후(懿仁王后) )에서 한 저주는 학이(鶴伊)ㆍ환이(環伊)가 무당 오연(於延)과 함께 하였는데, 그것을 위하여 무당의 사당을 지었습니다.’고 하였다. 박동량(朴東亮)ㆍ박동열(朴東說)도 말하기를, ‘대군 방 사람이 요망한 무당들과 함께 잇달아 유릉에 가서 인형을 만들어 놓고 활과 칼로 흉측한 짓을 했다는 말을 경춘(京春)에게서 들었다.’고 하였다.

여자 소경 고성(高城)의 공초에, ‘지난해 12월에 윤남(允男)의 집에 갔더니, 「병오생의 팔자가 어떠냐?」고 묻기에, 「좋다.」고 대답하였더니, 또 묻기를, 「병오생과 무술생이나 을해생ㆍ병자생 두 분 중에 누가 낫느냐?」 하였고, 또 묻기를, 「이 어느 아기가 세자가 될 수 있겠는가?」하기에, 「열살 전이면 좋다.」고 하였습니다. 또 아기 어머니 집에 갔더니, 묻기를, 「이 저주를 하면 병오생이 이롭고, 해치고자 하는 곳에 액()을 주게 되겠는가? 3~4개월 안에 이런 감응의 여부가 있을 것인가?」 하고, , 차마 들을 수도 차마 말할 수도 없는 말을 하면서 묻기를, 「병자생과 을해생을 흉하게 만들고자 하는 저주가 성공 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방에 있던 두 여자가 말하기를, 「개는 꼬리를 자르고 머리를 쪼개며, 쥐는 사지를 불에 굽고, 또 개를 개구리와 함께 하면 매양 을해생ㆍ병자생이 액달[厄削]에 해치고자 하는 사람을 해칠 것이다.」 하였으며, 아기 어머니가 또 말하기를, 「병자생ㆍ을해생 집의 남자는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옛 무당이 있었는데, 하나는 이비(李非)이고 하나는 황금(黃金)으로, 저주를 전에도 한 일이 있습니다.’하였다.

오윤남(吳允男)의 아들 오강(吳講)의 공초에도 말하기를, ‘그의 아버지가 고성(高城)을 불러다가 「대군의 팔자가 매우 좋으냐?」고 물으니, 답하기를 「혼인한 후에는 매우 귀하게 될 것이니, 대군 위에 마땅히 귀함이 더해질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였고, 나인 청금(靑今)의 공초에, ‘북가(北家)에서 기도한 일이 틀림없이 있었으며, 저주하는 일은 덕복ㆍ신옥 등이 쥐를 매화나무 위에 매달아 놓고 김 상궁이 시비(侍婢)를 꾸짖었습니다.’ 하였으며, 춘단(春丹)의 공초에 말하기를, ‘북가(北家)를 수리하고 쓸고 상궁들이 벽을 바르고, 다리가 높은 주홍색의 상을 놓고 놋동이에 정화수를 담아 놓고 손을 모아 빌면서 경을 읽었는데, 그 뜻은 대전과 중전에게 불측한 일로서 이의가 도로 서울에 들어오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였고, 나인 예옥(禮玉)의 공초에 말하기를, ‘천제(天祭)를 지낸 절차는 다리가 높은 상에 삼색 과일과 큰 과일을 놓고 금란(金蘭)이 권 상궁과 함께 손을 모으고 경을 외면서 빌었으니, 어찌 상감을 위하여 좋은 일을 구하였겠습니까. 불측한 일을 한 것입니다.’ 하였다. 이것이 저주의 대강이다.

나인 의일(義一)의 공초에, ‘한문과 언문을 한 종이에 함께 썼는데 별감(別監) 하자징(河自澄)이 썼습니다. 내간(內間)에 들여보낸 글은 저 혼자만 알고 있었는데, 작은 문 상궁(文尙宮)과 금란이 드나든 것을 유월이(六月伊)가 전했습니다. 지난해 10월께 연락한 글은 흑문(黑門)을 거쳐 나와서 서응상(徐應祥)에게 전하게 하였는데, 유월이(六月伊)가 두 번 갔었고, 또 그해 12월에 문 상궁의 글 가운데 「중국 관원이 나올 때에, 너의 생질 방신원(方信元)은 액정 별감(掖庭別監)이니 이의를 강화에 안치(安置)하였다는 일로 글을 지어서 올리게 하라.」 하고, 이의의 베개 속에 들어 있는 파자(破字) 언문을 그에게 물어 직접 풀이하라고 하였더니, 그 사이의 말에 「이의의 목숨이 비록 굳세기는 하나 지금 계사(啓辭)에 단단히 안치하라는 이치가 전부터 있고 중국 사람이 나온다는 소식을 몰래 회답하였더니, 만약 그 은혜를 지닌다면 일생 동안 무엇으로 갚을까. 중국 사람이 오면 궁궐의 호위가 풀려서 보통 사람과 같아서 천만 죽지 않을 것이다. 신원은 액정서(掖庭署) 사람이므로 중국 사람의 처소에 올릴 것 같으면 이 원통한 정상이 마침내 풀리겠는가. 모쪼록 널리 헤아려 회보하되, 이미 서로 아는데 자주 왕래하는 것이 번거로운 듯하니, 서로 가깝지 않다는 말로 꾸며서 회보하고, 잘 일러 보내되 옳고 그른 것을 막론하고 자세히 적어서 응상(應祥)에게 주어 몰래 춘향(春香)을 시켜 들여 보내되 중국 사람이 마음속으로 알고 갔는지 조금만 알았는지. 사람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진 것이 임진년 난리 때보다도 심하니, 지금은 어찌할 것인지. 이런 때에 구제하는 사람은 그 자손이 만대까지 영화를 누릴 것이오.」 하였습니다. ()은 강화로 갔습니다.’ 하였다.

나인 중환(仲環)의 공초에 ‘지난해 8월 그믐께, 문 상궁ㆍ권 상궁ㆍ종종(種從)ㆍ예옥(禮玉) 등이 내차비문(內差備門)에 서 있기에 그 까닭을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관유(寬裕) 처소에 가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하였습니다. 다른 상궁은 모두 돌아가고 권 상궁이 혼자 남아서 편지 한 장을 내시 박 방실(朴邦實)과 장무 내관(掌務內官) 최충흡(?)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9월 보름께 예옥이 문 안에 서서 편지를 최충흡에게 전하는 것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12월 보름께 예진(禮眞)이 벽틈으로 외부 사람과 몰래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는 예옥이었습니다.’ 하였다.

박방실의 공초에도, ‘우음덕(于音德)ㆍ부전(富田) 두 사람이 대궐 안에서 나와 무엇인지 모르는 물건을 싸 가지고 최충신(?)에게 주며, 「박 상궁과 진 상궁(秦尙宮)이 나가 있는 바깥에 전해 주라.」고 하였습니다.’ 하였으며, 나인 종종의 공초에, ‘문 밖에 서리(書吏) 같은 사람이 와서 벽틈을 뚫으므로 우음덕이 「누가 와서 벽을 뚫느냐?」고 물었더니, 이에 쪽지를 들여보냈습니다. 9월께에 서응상이 편지를 전하였는데, 이것이 전부터 한 일 같았으나 지난해 12월께에 시작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하였다.

또 서리(書吏) 최수인(崔守仁), 별감 박의남(朴義男) 등이 모두 나인과 서로 내통하여 김제남의 집과 강화에 있는 이의의 처소에 편지를 전하였다. 이것이 흉서(凶書) 사건의 대략이다. 내가 일찍이 그 나타난 저주에 쓴 여러 가지 물건과 요망한 짓을 한 날짜를 기록하여 비망기를 만들어 친히 국문할 때에 빈청(賓廳)에 내려보내어 여러 역적의 공초에 참고케 하였더니, 서로 들어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 양궁(兩宮)과 양처(兩處)를 모해하려는 계획이 매우 흉측하고 끔찍하며, 여러 역적이 처단된 후에도 잔당들이 여전히 독기를 피워 금란ㆍ의일 등이 편지로 안팎에서 서로 통하였는데, 파자(破字)로 쓴 비밀 사연은 음험하고 괴이하여 헤아릴 수 없었으며, 중국 관원에게 비밀히 하소하여 흉계를 부려 화를 전가시키려고까지 하였으니, 더욱 마음아픈 일이다.

이로써 저주한 사실과 흉서 사건이 여러 사람의 공초에서 남김없이 드러났으니, 저들이 비록 지극히 흉악하여 종묘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자 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나 나인은 내가 차마 모두 법대로 처단할 수 없으므로 다만 죽음을 내리고, 그 나머지 무리들은 불문(不問)에 붙였으나 반측(反側)하는 무리들은 여전히 불안해할 것이고,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은 혹 다 알지 못할 것이니 널리 알리는 일은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국문하는 옥사는 이미 끝이 나서 형의 집행도 이미 그쳤으므로 죄인들의 전후에 진술한 사연을 대강 추려서 내외의 신민들에게 널리 알리는 바이다.

, 국가에 법이 있으니, 어찌 귀역(?)의 음모가 용납될 수 있겠는가. 화와 복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니, 군신의 대의(大義)를 힘쓰기 바라노라.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는 것이니 잘 알았으리라 생각한다.

 

 

7

 

9일 정인홍(鄭仁弘)의 차자는 이러하다.

 

“아뢰옵니다. 신이 저번에 차자를 올려 신의 작은 정성을 대강 말씀드렸더니, 전하께서 널리 용납하시어 죄주지 않으시고 도리어 올라오라는 하교를 내리셨습니다. 신이 병든 몸으로 이러한 교서를 받자오니, 감격하고 황송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의 쇠병(衰病)이 날로 심하여 내의(內醫)가 와서 보고서도 어떻게 하지 못하오니, 죽어가는 몸의 마음이 불안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나라의 큰 변고에 있어서 대부(大夫)의 뒤에도 따르지 못하고, 의원이 또 지키고 있으니 죄가 더욱 쌓여 그저 견책을 기다릴 뿐입니다.

전하께 모자ㆍ형제의 변고가 있음을 보오니, 바로 순임금이나 노장공(魯莊公)이 당한 것이온데, 그보다 더 심한 바가 있습니다. 전하께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는 모르오나, 이번의 이 역적은 그 흉측한 음모를 세움이 실로 간귀(?)의 으뜸으로 발을 들고 목을 빼고 나라에 무슨 일이 있기를 바라니, 하루 아침에 연결되고 뭉친 것이 아닙니다. 대비의 세력을 의지하고, 어린 영창대군을 끼는 것을 명분으로 하고 있습니다.

신이 앞서 올린 차자 중의 ‘불알 깐 돼지’라는 말은 신의 생각으로는 다만 신하로서 마땅히 먼저 그 도당을 다스리는 데 서둘러야 하며, 무리들을 없애기를 잡초를 제거하듯이 하고, 머리털을 그슬려 가면서 불을 끄듯이 하여 그 우두머리를 꺾고 그 괴수를 잡은 뒤에 그만두신다면 이의와 같은 어린애는 자연 천천히 처리할 수 있으니 혹은 순임금이 상()을 처리하듯이, 혹은 주공(周公)이 세 숙[三叔]을 죄주듯이, 혹은 한 혜제(漢惠帝)가 여의(如意)를 어루만지듯이, 문제(文帝)가 장()을 꾸짖듯이 하신다면 전하의 하시는 일이 옳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라고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 문장의 뜻이 명백하여 자연 돌아갈 데가 있는데, 가만히 듣자옵건대, 한쪽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떠들어 대고, 역적을 다스리는 사람을 비방하기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오니, 신은 참으로 그들의 속셈이 장차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그들의 사사로운 음모를 성취하려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신의 ‘역적을 다스리는 것이 시급하다.’는 한마디 말이 마침내 이론자(異論者)의 구실이 되어 도리어 역적을 두호하는 자료가 되리라고 어찌 생각했겠습니까. 이것 또한 신의 죄이오니, 청컨대, 먼저 신의 죄를 다스려 역적을 치는 의리를 엄하게 하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신이 오늘날의 계책을 생각하옵건대, 그 도당의 죄를 급히 다스리되, 그 경중에 따라 혹은 목을 베고 혹은 귀양을 보내며, 귀하거나 친소(親疎) 때문에 이랬다저랬다 하지 말고 끊어서 같은 나라에 살지 못하게 하고 날개와 뿌리를 뽑아서 뒷걱정이 없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역적의 무리로 사형을 받은 자는 서양갑(徐羊甲)등 약간의 역적들뿐이고, 조금이라도 귀하고 가까운 자로서 처형당한 자는 한 사람도 없어서 여론이 매우 불쾌하게 여기오며, 신 또한 의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만약 역적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의당 도리어 무고한 죄로 처형해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모의에 참여한 자는 그 죄가 똑같은 것입니다. 제남의 죽음이 이미 정당한 형벌이 못 되었는데 그 나머지 무리들도 어찌 다만 벼슬을 깎고 고향으로 돌려보내서 대수롭지 않은 죄과인 것같이 해서야 되겠습니까.

, () 임금 때 사흉(四凶)의 죄도 오히려 귀양가고 죽이는 것을 면치 못하였는데, 이것이 어떤 죄이기에 이렇게 죄주기를 아끼는 것입니까.《주역(周易)》 겸괘(謙卦)의 육오(六五)에 이르기를, ‘침벌함이 이로움은 복종하지 않는 자를 정벌하는 것이다.’ 하였으니, 임금은 겸손함만을 가지고 한결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겸손함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이런 복종하지 않는 데에 대한 정벌이 생기므로, 성인이 시대의 뜻을 분명히 밝혀 이런 괘상(卦象)이 있고, 이런 사실이 있는 것이니, 어찌 후세 사람을 속이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전하께서 깊이 생각하셔야 할 일입니다.

신이 또 듣자옵건대, 저주의 변고가 대궐 안에 파다하여 죄인들이 계속해서 실정을 공초하였는데 차마 말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옵니다.

, 순임금은 그 부모가 우물에 묻으려 하고, 곳간에 불질러 죽이려 하였으나 피하여 집으로 돌아와 평상에 앉아서 거문고를 타고 있던 것을 군자는 죄로 여기지 않고 우물이나 불 속에서 죽는 것을 불효로 여겼습니다. 큰 매로 치려 할 때에는 피하여 달아나는 것도 부모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는 도리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궁에 각각 거처하시도록 청한 것은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에 알맞은 것이라고 신은 생각하옵는데, 무슨 근거할 만한 고사(故事)가 있기에 또다시 이러저러한 말이 그 사이에 있습니까. 이것이 어찌 전하에게 충성하는 말이겠습니까. 반드시 순임금으로 하여금 우물이나 불 속에서 죽게 한 뒤에 도리어 그것이 효도라고 하여 마음에 시원하게 생각하려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새 궁으로 옮겨 가시면 양궁(兩宮)이 자연 따로 계시게 되어 출입함에 있어 외부와 사귀는 길이 끊어지게 될 것이오니, 이것이 곧 무사하게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대비를 대접하는 것이 이보다 나은 것이 있겠습니까.

옛날에 광무제(光武帝)가 여후(呂后)를 수백 년 뒤에 폐하였는데, 말하는 이가 이것을 인용하여 두후(竇后)의 오라비 두헌(竇憲)이 반역죄로 죽었고, 두후도 임금을 낳은 어머니 양 귀인(梁貴人)을 죽인 죄를 논하여 합장(合葬)하지 말기를 청하였습니다. 대개 의()가 있는 곳에는 예()가 때에 따라 변하는 것이 있으니 이런 것들입니다. 다른 궁에 거처하심으로써 서로 보전하는 것이 무엇이 예의에 해롭습니까.

듣자옵건대, 신이 전에 올린 차자를 승정원에 내리지 않았다 하는데, 다시 아뢰는 것이 어찌 어리석음을 무릅쓰는 데에 관계됨을 모르겠습니까마는, 이처럼 일이 급한 때에 어찌 감히 조그마한 혐의를 피하여 대의(大義)를 저버리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주역》의 뜻을 체득하시고 전하의 위엄을 떨치시어 법궁(法宮)으로 옮겨 가셔서 아버님의 자리를 바로하시면 혹 후회하고 위험을 겪는 걱정이 있다 하더라도 거의 편안히 하는 계책이 될까 하나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날 역적이 일어남이 옛날보다 심하게 되며,서리를 밟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닐 것이니, 굳은 얼음이 얼지 않으리라고 어찌 보장하겠습니까.

옛날 송 고종(宋高宗)은 장방창(張邦昌)이 외람되이 왕노릇을 한 뒤에도 도리어 그를 위로하여 보부(保傅)를 삼아 여러 왕을 이롭게 하려고 하자, 이강(李綱)이 외람되이 왕노릇한 그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으나 주달한 것을 안에 머물러 두고 내려보내지 않으니, 이강이 떠나기를 청하면서, ‘신은 방창과 반열을 같이할 수 없습니다. 신이 비록 변변치 못하오나 다시 나라의 문에 들어오기가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전하는 깊이 살피시어 재결하여 주소서.

하였다.

진사 이명달(李命達)ㆍ엄가성(嚴可誠), 유학 엄가눌(嚴可訥) 30여 명이 상소하였는데, 이러하다.

 

“이위경(李偉卿) 등 세 사람이 강상(綱常)의 죄를 지었는데도 삼사(三司)가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으니, 모두 정조(鄭造)와 같은 무리 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정조와 윤인(?) 등이 과격한 말을 한 죄는 비상시의 변고를 당하여 따로 거처하는 계책을 말한 데 불과한 것인데, 너희들이 어찌 감히 어지러이 잇달아 역적으로 지목하여 목 베게 하는가. 변고를 처리하는 데는 위에서 충분히 삼가고 조심해야 하지, 정조와 윤인의 말에 경중이 달려 있는 것이 아닌데, 조정을 싸움터로 만드니 몹시 놀랍다. 망령된 말을 하지 말고 물러가 생각해 보라.

하였다.

장령 김질간(金質幹), 지평 조존도(趙存道)와 김극성(金克誠)이 아뢰기를,

 

“신들이 모두 변변치 못한 사람들로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하는 이런 때를 당하여 오직 종묘 사직이 중하고 역적 토죄하는 일이 시급함을 알고 늘 화근을 제거하지 못한 것을 민망히 여겼는데, 지금 유생 이명달의 상소의 대강을 보오니, 오늘의 삼사가 모두 정조와 같은 무리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초에 정조의 말이 잘못된 것이라 하더라도 이것을 죄안(罪案)으로 삼아 삼사까지 모두 꼼짝 못 하게 하여 일망타진하려 하오니, 그 계책이 또한 끔찍하지 않습니까. 신들이 언관의 지위에 있으면서 역적을 토죄하여 종묘 사직을 편안케 하지 못하와 제멋대로 하는 의논과 비방이 이 지경에 이르렀사오니, 무슨 낯으로 편안히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집의 신경락(申景洛)이 아뢰기를,

 

“저번에 정조 등이 피혐한 말에 ‘종묘 사직에 죄를 얻었으니 모후(母后)로서의 도리가 끊어졌습니다. 전하에게는 비록 어머니와 아들의 은혜가 있으나 종묘 사직에 대해서는 마땅히 끊어야 할 죄악이 현저합니다. 오늘날 신하된 사람이 그를 장차 국모(國母)로 대접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이것이 비록 한때 전에 없던 변고로 말미암아 이런 앞뒤가 전도되고 망령된 말을 했다 손 치더라도 윤기를 거스르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신이 그 죄를 똑똑히 밝혀야 함을 모르는 바 아니오나, 역적을 다스리는 일이 한창 급하므로 소란스러울까 염려되오며, 또한 소차(疏箚)가 내려오면 아뢰어 인피하고자 하였는데, 이제 생원 이명달이 올린 소의 대강을 보오니, ‘삼사가 모두 정조와 같다.’는 말을 하여 몹시 비방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언관의 지위에 있을 수 없사오니,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오늘날 여러 신하들이 역적을 토죄하는 의리를 생각지 않고 조정을 다만 싸움터로 만들어 징조가 불길한데, 너도 그것을 본받는 것이냐. 내가 부덕한 탓으로 대궐 안에서의 중대한 변고를 만났으니, 참작하여 변고를 처리할 것이지, 어찌 정조와 윤인의 말 때문에 거기에 경중하는 바가 있겠느냐. 정조와 윤인 등이 부당한 일을 경솔히 발언하여 시비의 단서를 만들어 조정이 불안하고 역적 토죄를 엄히 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내가 매우 마음아프게 여긴다. 정조와 윤인 등의 문구 가운데 비록 과격한 말이 있기는 하나, 이미 두 궁에 따로 거처하기로 결말지었으면 평시에 대비께서 별궁에 옮겨 계시는 일이 많았으므로 다만 채택하지 않았을 뿐인데, 무슨 깊이 다스려야 할 죄가 있느냐. 이제 네가 분명히 밝힌다고 임금에게 고하나, 너 역시 한 명의 이명달일 뿐이로구나.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정언 조정립(曺挺立)이 아뢰기를,

 

“신이 역적을 토죄하는 날에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어야 하는 의리를 다하고자 하여 오직 종묘 사직을 위하고 임금에게 아뢰는 것만 알았을 뿐인데, 이제 유생 이명달 등의 상소의 대강을 보오니, ‘오늘날 삼사가 모두 정조와 같다.’고 공격하였습니다. 당초에 정조의 피혐하는 말에 비록 잘못된 말이 있기는 하나 그것으로 죄안을 삼고 삼사에까지 아울러 미치게 하는 것은 또한 이상하지 않습니까. 기회를 노려 일망타진하여 그들의 간사한 계책을 이루려고 그렇게 한 것이 분명합니다. 신도 삼사의 반열에 있으면서 애매하게 추한 욕을 받게 된 것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으니, 장차 무슨 낯을 들고 뻔뻔히 이 자리에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사간 최동식(崔東式), 헌납 이홍망(李弘望)이 아뢰기를,

 

“신 등이 생원 이명달(李命達)이 올린 소의 대강을 보오니, ‘윤기(倫紀)의 적이 오래도록 살아 있는데도 온 조정에 사람이 없어 감히 그들을 죽이기를 청하는 이가 없으니, 오늘날의 삼사는 모두 정조이다.’고 하였으니, 신 등이 매우 두렵습니다. 신 등이 저번 정조 등이 피혐한 일에 윤기를 거스른 점이 있음을 몰랐던 것은 아니오나, 화근이 제거되지 못하여 역적 다스리는 일이 한창 시급하므로 다른 말을 할 겨를이 없었는데 갑자기 유생의 비방과 배척을 받았사오니, 감히 뻔뻔히 이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장령 강익문(姜翼文)이 아뢰기를,

 

“신은 마땅히 간언을 뒤늦게 한 주벌(誅罰)을 받아야 하는데 특별히 감싸 주시는 관대함을 입었으므로 청하는 글을 올린 뒤에 다시 피혐하려 하였사오나 시끄럽게 할까 두려워 잠자코 일을 하노라니 떨리고 애타는 마음이 간절하였습니다.

어제 저녁에 유생의 소의 대강을 보오니, 극구 헐뜯고 배척하는 것이 극도에 달하였으므로 양사(兩司)의 많은 관원들이 지금 이미 모두 피해 버렸습니다. 신은 외딴 시골에 들어앉아 있었으므로 조보(朝報)를 보지 못하였고, 성 안에 들어와서는 또 병으로 누워 있어서 한 사람도 만나 보지 못하였으므로 정조 등의 사건의 전말에 대해서 진실로 그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생각하옵건대, 이번 역적의 변고는 옛날에도 없던 것이오나, 불쌍히 여기는 은덕으로 힘써 너그러운 은전을 따르려 하셨기에 법망(法網)에서 빠진 실수가 간혹 있어 역적의 입에서 많이 나온 이수(李燧)와 역적의 와주(?)인 황신(黃愼)이 떳떳한 형벌을 면하고 서울에 살고 있으니, 분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신도 남에게 뒤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제 석상에서 발언하였더니, 동료들의 의논이 모두 쾌하게 여겨 장차 간원에 통고하여 합계(合啓)하려는 즈음에 대사간 송석경(宋錫慶)이 친국(親鞫)에 참여하고 있어 미처 의논하지 못하였으므로 내일을 기다려서 해야겠습니다.

역적의 국문이 아직 끝나지 않아 머리를 보전하고 있는 자가 하나뿐이 아닌데, 이제 흉악한 목숨을 오래 붙어 있게 한다는 말을 정조 등에게 씌우고 있으니, 신은 정조 등이 무슨 지극한 죄악이 흉적보다 더 심한 것이 있기에 공격하기를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하루 동안 직무를 본 것이 이렇게까지 비방을 받으니, 뻔뻔스러이 이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대사헌 윤효전(尹孝全), 대사간 송석경(宋錫慶)이 피혐한 사연의 대강이 집의, 사간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하였다.

대사헌 윤효전(尹孝全), 대사간 송석경(宋錫慶) 등에 대한 옥당에서의 처치는 이러하다. 전한(典翰) 정광성(鄭廣成), 교리 이창후(李昌後)ㆍ홍방(), 응교 한찬남(韓纘男)ㆍ이명(李溟), 수찬 권흔(權昕)ㆍ이구징(李久澄).

 

“아뢰옵니다. 모두들 인혐하고 사퇴하였는데 난역(亂逆)의 변고가 어느 시대엔들 없겠습니까마는 신변에서 일어난 화가 이보다 심한 것이 없사오니, 모든 혈기 있는 사람으로서 누군들 원통해하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미 비상한 변고를 당하여 대비께 효성을 다하시는 바가 진실로 비난할 것이 없사오니, 논의할 여지가 없습니다.

저번에 정조(鄭造)ㆍ윤인(?) 등의 피혐한 말 중에 말이 전도되고 망령되어 사람들의 귀를 놀라게 하고 물의를 일으킬 수 있었으므로 죄주기를 청하는 소가 올라오게 된 것이오나, 언관이 곧장 죄주기를 청하지 않은 것을 정조와 같다고 지적하여 욕하고 배척한 데에 이르러서는 또한 괴이하지 않습니까. 곧 지나치고 잘못된 줄을 알았지만 역적을 다스리는 일이 시급하므로 시끄럽게 할까 두렵고, 또 소사(疏辭)가 내리기를 기다린 것은 모두 피할 만한 혐의가 없으니,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루 동안 봉직한 것은 혐의가 없습니다. 모두 출사하게 하소서.

하였다.

11일 검열 엄성(嚴惺)이 승문 박사(承文博士) 윤전(?), 정자(正字) 권확(?), 성균 학유(成均學諭) 나무춘(羅茂春), 교서 정자(校書正字) 김상윤(金相潤)과 중학(中學)에서 일제히 모여 이위경(李偉卿)ㆍ이상항(李尙恒), 한희(?) 20여 명에게 정거(停擧 유생들에게 얼마 동안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는 형벌의 한 가지)하였다.

13일 응교 한찬남(韓纘男), 교리 이창후(李昌後)의 상소의 대강은 ‘신의 관직을 삭제하기를 청한다.’는 것이었는데, 입계하였더니 전교하기를,

 

“검열 엄성(嚴惺)은 사필(史筆)을 잡는 직책에 합당치 않으니 체차하도록 전교를 받들어 시행하라.

하였다.

14일 정원이 아뢰기를,

 

“어젯밤 탑전에서 검열 엄성을 체차하라는 명을 받자오매, 하늘 같은 위엄 아래에 모두가 황송하고 의아하게 여겼습니다. 엄성의 죄가 있고 없고는 신 등이 논할 바 아닙니다만, 성명(聖明)한 세상에 이런 일이 있는 것은 실로 아름다운 일이 못 됩니다. 하물며, 전하의 지척(咫尺)에서 붓을 잡는 사관(史官)의 임무의 중요함이 어떠하온데, 공의(公議)를 기다리지도 않고 체차하고 나타난 허물도 거론하지 않고서 죄를 주는 것입니까. 엄하신 말씀으로 면대하여 물리치시면서 조금도 돌보시고 아끼심이 없사오니, 조종조에서 사관을 대우하는 뜻은 이렇지 않은 듯합니다. 한 사람의 하찮은 관원의 진퇴가 전하께 아무런 손익(損益)이 없을 것 같사오나, 임금의 말씀이 한 번 퍼지면 사방이 의아하게 듣고, 내외의 인심이 그 본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 자연 의심이 생길까 염려됩니다. 신 등의 직책이 전하를 가까이 모시고 있으므로 끝내 잠자코 있을 수 없사와 황공하옵게도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았노라. 내가 임금으로서 하나의 사관도 처치하지 못하겠느냐. 승정원에서는 당을 두둔하는 말을 하지 말라.

하였다.

비망기에,

 

“내가 덕이 부족한 사람으로 왕위에 있은 여러 해 동안 정성과 마음을 다하여 대비를 섬겨 왔으니, 이는 신명이 아시는 바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저주의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서 연초부터 요사스럽고 더러운 물건이 궁정(宮庭)에 두루 찼는데도 궁인(宮人)들을 엄하게 단속하여 퍼뜨리지 못하게 하였고, 대역(大逆)의 변고에 제남(悌男)이 괴수였는데도 사사(賜死)하는 데에 불과하였으니, 어찌 생각이 없어서 그렇게 한 것이겠느냐.

저번 정조ㆍ윤인이 한갓 분개하기만 하고 사리의 체통은 생각지 않고 감히 말할 수 없는 일을 경솔히 발언하여 시끄러운 단서를 크게 열어 조정이 편치 못하고 역적 다스리기를 엄하게 하지 못하게 하였다. 내가 죄줄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나. 이것이 언관에 관계되는 일이고, 또 직언하는 신하를 먼저 죄주면 역적을 다스리는 데 방해가 될 것이므로 우선 멈추어 너그러이 용납하였을 뿐이다.

유생 정복형(鄭復亨)ㆍ이안진(李安眞)ㆍ권염(?)등이 시끄럽게 소를 올렸으니 이미 불가한데, 여러 도()에 통문(通文)을 내어 소집하고 알리기까지 하였다 하니, 장차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나쁜 징조를 키워서는 안 될 것이다. 하물며 검열 엄성(嚴惺)이 사당(私黨)만 알고 임금 있는 줄은 알지 못하여 제 마음대로 선비들에게 과거를 못 보게 하면서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거리낌이 없으니, 그 일이 매우 놀랍고 그 징조가 불길하므로 마땅히 엄히 국문하여 법대로 죄를 결정할 것이로되 벼슬을 빼앗고 성문 밖으로 내쫓아 보내고, 정복형 등 세 사람은 유적(儒籍)에서 제명하고 금고 종신(禁錮終身)시켜 성분 밖으로 쫓아 보내어 소란스러움을 가라앉히도록 하라.

하였다.

15일 진하(陳賀 초하루와 보름에 의례로 하는 일)하였다.

비망기에,

 

“정조ㆍ윤인 등이 감히 말할 수 없는 일을 경솔히 발언하여 조정을 싸움터로 만들어서 그 말류(末流)의 폐단이 유생들을 정거(停擧)하게 하고, 역적을 다스리는 일이 엄하지 못하게 하기에 이르렀으니, 지극히 놀랍다. 정조ㆍ윤인을 삭직(削職)하라.

하였다.

16일 대사헌이 탑전에서 아뢰기를,

 

“대개 정복형 등이 지방에 통문하기까지 한 것은 지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하오나 이것 때문에 유적에서 제명하고 금고 종신에 처하여 성문 밖으로 쪼차 보내기를 명하기까지 하셨으니, 나라에서 선비를 대우하는 예의가 너무 야박하지 않습니까. 유생을 금고에 처한 것은 근고(近古)에 없는 일이오며, 성문 밖으로 내쫓는 것은 조정 관원을 죄주는 일이온데, 그들이 비록 처치를 받았을지라도 이렇게 하는 것은 좋은 세상의 일이 아닙니다.

하였다.

대사간이 아뢰기를,

 

“윤효전(尹孝全)의 말이 옳습니다. 신 등이 어찌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그 사이에 사사로이 두호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상은 모두 그 대강을 적었다.

답하기를,

 

“지금 의리가 어둡고 막히고 인심이 몹시 사나워서 역적을 다스리는 의리를 아는 사람이 적으므로 비록 사모(紗帽)를 머리에 쓴 자라도 도리어 벌과 개미의 군신(君臣)의 의리도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선비들이랴. 내가 오래 전부터 죄를 주고자 하였으나 용서하고 그만두었는데, 어제 한찬남(韓纘男)ㆍ이창후(李昌後)등의 소를 보니, 전 검열 엄성(嚴惺)이 나이 젊은 신진(新進)으로 감히 마음대로 많은 선비를 정거(停擧)시켰는데, 이것이 어찌 그가 스스로 한 일이겠느냐. 반드시 사주(使嗾)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임금을 무시하고 거리낌없이 멋대로 한 짓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 성균관 유생들이 여러 도()에 통문하여 팔방에서 불러들였는데, 장차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가. 나쁜 조짐을 키워서는 안 되겠으므로 약간 죄전(罪典)을 보인 것이다.

하였다.

대사헌이 또 아뢰기를,

 

“요즈음 선비들의 기풍이 좋지 않아 조정의 큰 의논에 대하여 선비들이 번번이 혼란을 일으키곤 하오니, 옳지 않다고 하겠습니다마는, 선비들을 금고시키고 성문 밖으로 내쫓는 것은 좋은 세상의 일이 못 됩니다.

하였다.

대사간이 또 아뢰기를,

 

“유생들이 통문한 일에 대해서는 듣기에도 놀랍습니다마는, 이러한 처치는 외부 사람들이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므로 스스로 의심이 생기게 될 것이니, 보고 듣기에 또한 미안하지 않습니까.

하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16일 옥당의 차자는 이러하다. 부제학 이성(李惺)이 지었다.

 

“삼가 아룁니다. 난적(亂賊)은 사람들이 다같이 원수로 여기는 바이니, 저 이의(?)는 어찌 삼사 신하만의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이겠습니까. 곧 억조창생(億兆蒼生)이 모두 원수로 여기는 바입니다. 원수로 여길 것을 원수로 여기지 않으니, 인심의 동향을 무엇으로 살피시겠습니까. 전하께옵서는 오늘날 인심을 믿을 만하다 여기십니까. 이의를 줄이시라는 요청이 석 달이 되었는데도 가까이는 교관(交關)의 밖으로부터 멀리는 바닷가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도 의()를 부르짖고 직언하여 전하의 마음을 돌이키려는 자가 없음은 어찌된 일입니까. 이것은 섬기는 바에 전심하여 그 있는 곳에서 죽음을 바쳐서 제남(悌男)ㆍ양갑(羊甲)이 이의를 임금으로 세우려는 모의를 한 것을 원수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매양 천륜의 변고를 당하고서도 차마 역적을 토죄하는 법을 가하지 못하시므로 신민들의 심정이 역적을 다스리지 않는 것을 예사로 여기게 되어 인륜이 날로 무너져서 이 지경에 이른 것인데, 이제 다시 어렵게 여기고 빨리 이의를 처단하지 않는다면 민심이 안정되지 않고, 난적이 두려워하지 않아 앞으로 다가올 화가 오늘날보다 더 심해질까 두렵습니다. 바라옵건대, 속히 이의를 법에 의하여 처단하여 공론을 따르게 하소서. 감히 처분을 기다립니다.

하였다.

18일 사간 최동식(崔東式), 헌납 이홍망(李弘望)이 아뢰기를,

 

“신 등이 합사(合司)하여 계사(啓辭)할 일로 대궐에 모였더니, 여러 동료들이 유생 정복형(鄭復亨) 등의 일을 가지고 완의석(完議席)에서 논의를 꺼냈습니다. 복형 등이 감히 조정의 일을 가지고 시끄럽게 소를 올렸으며, 심지어는 지방에 통문하기까지 하였으니, 지극히 해괴합니다만, 나라에서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는 이렇게 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그러므로 신들이 이런 뜻으로 상의하여 입계(入啓)하려 하옵는데, 정언 배대유(裵大維)ㆍ조정립(曺挺立)과 의논이 맞지 않아 사세가 합의하기 곤란하오니, 체척(遞斥)을 명하소서.

하였다.

정언 배대유(裴大維)가 아뢰기를,

 

“오늘 아침에 정언 조정립이, 엄성(嚴惺)이 선비들에게 정거할 때에 사관(四館)에서 논계(論啓)한 일을 신에게 간통(簡通) 하였으므로 ‘삼가 알았다.’고 써 보내고 이어 대궐에 나아갔는데, 그것을 논의할 즈음에 동료들이 ‘사관에도 마땅히 수종(首從 주범과 종범)의 구별이 있을 것이니, 의당 사판(仕版 관원 명부)에서 지워 버리자고 아뢰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생각하옵건대, 성균관 유생들이 이미 제적되었지만 사관은 정거시킬 것이 없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황유첨(黃有詹)ㆍ윤계영(尹繼榮)이 영경(永慶)을 구호하다가 성균관 유생들이 성균관에서 제적당하였으나, 사관은 정거되지 않았고, 이신(李莘)도 무신년에 역적을 두둔한 죄로 금년에 성균관에서 제적되었으나 사관은 역시 정거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희(?)등에게만 갑자기 정거하여 드디어 부도(不道)라는 말로 죄목을 삼았으니, 같이 참여했던 사관이 똑같이 죄가 있기는 하나 일을 주장한 사람은 엄성이며, 탑전에서 속여 아뢴 자도 엄성입니다. 부동해서 찬성한 죄는 마땅히 구별이 있어야 하므로 수종을 사판에서 삭제하자는 논의가 있었던 것입니다.

또 대사헌 윤효전(尹孝全)은 선비들이 팔방에 불러 모은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나 종신 금고하고 성문 밖으로 내쫓는 것은 좋은 세상의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므로 아뢰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대사간이 곧 동료들과 의논하였는데, 혹 신과 의견이 달라서, ‘금고하고 내쫓는 일로 아뢰면 사관의 정거를 풀어 줄 일도 아뢰어야 된다.’고 하여 의논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큰 의논을 합의할 수 없사오니, 신이 어찌 감히 언관의 자리에 이대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벼슬을 갈아 물리치소서.

하였다.

정언 조정립(曺挺立)이 아뢰기를,

 

“오늘 아침 엄성(嚴惺)이 정거할 적에 같이 참여하였던 사관(四館)도 엄성과 죄가 같으니 징계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뜻을 동료들에게 간통(簡通)하였더니, 모두 모여서 상의하자고 대답하였으므로, 신이 곧 대궐로 나왔습니다. 그래서 함께 논의가 오갈 때에, 선비를 금고하고 내쫓은 일도 논계(論啓)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선비된 도리로서 진실로 생각이 있으면 한 번 소를 올리는 것은 혹 가하다고 할 수 있사오나, 지방에 통문하여 불러모으고 알려서 반드시 임금에게 여럿임을 보여 협박하는 소지로 삼으려 한 그 속셈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 조짐을 키워서는 안 될 것이라면 제명과 금고 처분은 그들이 받아야 할 죄이오나, 성문 밖으로 쫓아 보내기까지 하는 것은 선비를 죄주는 형벌이 아닐 듯합니다. 그러므로 성문 밖으로 내쫓는 것만은 온당치 않다는 뜻으로 논계하려 하였으니, 신의 죄가 크옵니다. 어찌 감히 편안히 이대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벼슬을 갈고 물리치기를 명하소서.

하였다.

장령 김질간(金質幹)이 아뢰기를,

 

“오늘 이른 아침에 지평 조존도(趙存道)와 함께 서면으로 동료들에게 간통(簡通)하여 사관(四館) 등이 엄성(嚴惺)과 부동하여 감히 말할 수 없는 일로 죄목을 만들어 마음대로 여러 선비들을 정거(停擧)하였으니, 그 거리낌없이 방자하게 한 죄를 논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하였으므로, 조반 후에 대궐에 나아갔더니, 대사헌 윤효전이 입시(入侍)하였다가 나오면서 사관(四館)을 논계할 일로써 서로 말이 오갈 즈음에 그가 말하기를, ‘선비들을 종신 금고하고 성문 밖으로 쫓아 보낸 일 또한 어째서 그렇게 한 것인지 모르겠다.’ 하여, 동료들과 의논이 일치하지 않아서 혹은 쫓아내라 하고 혹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하였는데, 신이 답하기를, ‘여러 도에 통문하여 팔방에 불러모은 것은 장차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엄중한 비지(批旨)가 방금 내렸는데 이제야 논계하는 것은 너무 늦다고 생각되는데, 하물며 동료들도 아직 다 모이지 않고 집에 있는 동료들의 뜻도 자세히 알 수 없으니, 사관에 대한 의논을 오늘 하더라도 선비들의 의논은 내일 동료들이 다 모인 다음에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더니, 답하기를, ‘오늘 만약 사관에 대해 논한다면 선비들에 대한 의논도 오늘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여 동료들의 의논이 일치하지 못해서 헛되이 파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합사의 큰 의논도 이어서 아뢸 수 없사오니, 체직하고 물리치소서.

하였다.

지평 조존도(趙存道)가 아뢰기를,

 

“오늘 이른 아침에 장령 김질간과 함께 동료들에게 간통(簡通)하여 ‘앞서 정거할 때에 같이 참여하였던 사관 등이 엄성과 부동하여 감히 말할 수 없는 일로써 죄목을 만들어 마음대로 여러 선비들을 정거시켰으니, 거리낌없는 방자한 죄는 엄성과 다를 것이 없는데, 아직도벼슬 자리에 있으니, 여론이 분개할 것이다.’ 하니, 대사헌 윤효전, 집의 신경락(申景洛)이 모두 대궐로 나아가서 다시 의논하자고 대답하였습니다. 신이 곧 들어오니, 효전은 이미 입시하였고, 경락은 병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신이 동료와 같이 효전에게 간통하였더니, 처음에는 틈을 보아 나가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나오게 되어 서로 모여 앉아 있는데, 신이 동료에게 말하기를, ‘사관 등이 엄성과 함께 논의에 참여해서 서명하여 죄는 같은데 벌이 다르므로 징계하지 않으면 안 되겠으니, 벼슬을 빼앗는 것으로 논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더니, 효전이 말하기를, ‘사관을 논죄하지 않을 수 없으나 모두 벼슬을 빼앗는 것은 너무 심하다.’ 하여, 말이 오갈 때에 효전이 말하기를, ‘어제 내가 말한 선비들을 종신 금고시키고 성문 밖으로 쫓아 보내는 죄를 주자고 논계한 의논은 어째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다.’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선비들에 대한 일은 위로부터 엄한 꾸지람이 내렸으므로 마음이 몹시 미안하고, 또 선비들이 여러 도에 통문하여 팔방에 불러모으기까지 하였으니, 그들을 선비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 마음을 알 수 없으니, 제명하고 금고시키는 것은 그들에게 알맞는 죄이지만, 성문 밖으로 쫓아 보내기까지 하는 것은 아마 그들에게 적당한 벌이 아닌 듯하다. 그러니 다만 성문 밖으로 쫓아 보내는 일만을 아뢰는 것이 어떠한가.’ 하였더니, 효전이 말하기를, ‘금고시키는 것이나 쫓아 보내는 것이 모두 전고에 없는 일이다.’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이번에 유생들이 통문하고 불러모은 일 역시 전고에 없는 일이다.’ 하였더니, 효전이 그 일을 탑전에서 사실대로 모두 아뢰자고 하였으나 구차하게 같이 할 수 없어 의논이 일치되지 않아 헛되이 파하게 되었으며, 큰 논의에 이르러서도 잇달아 아뢸 수 없게 되었사오니, 체직시키고 물리치소서.

하였다.

지평 남이준(南以俊)이 아뢰기를,

 

“유생 정복형(鄭復亨) 등이 지방에 통문한 일은 지극히 놀랄 만하오나, 종신 금고시키는 것은 근대에 없는 일이오며, 성문 밖으로 쫓아 보내는 것도 선비를 죄주는 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비록 지극히 변변치 못할지라도 나라에서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가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대사헌 윤효전(尹孝全)이 먼저 이 말을 석상에서 꺼내었으며, 신의 생각도 그렇다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대궐에서 회의할 때에 지평 조존도와 논의가 달라서 신은 구차하게 찬동할 수가 없으므로 직책에 눌러 있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고금 천하에 어찌 임금 없는 나라가 있겠느냐. 종신 금고시키는 것이 비록 근대에 없는 일이라고는 하나, 선비들이 여러 도에 통문하고 내외에 호소하여 다투어 소장을 올려 임금을 위협하는 것은 과연 근대에 있는 일이냐. 너희들이 대관(臺官)으로 있으면서 바로 들어 논핵하지 않고 도리어 죄인을 구호하는 계책을 만들어 내니, 나라에서 언관을 둔 뜻이 어디에 있느냐.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대사헌ㆍ대사간ㆍ집의 등의 의논도 지평 남이준과 대동소이하였다.

옥당에서 올린 처치한 차자는 이러하다. 부제학 이성(李惺)이 지었다. 응교 한찬남(韓纘男)ㆍ이명(李溟), 부교리 이창후(李昌後)와 조명욱(曺明?), 전한 정호선(丁好善), 교리 박정길(朴鼎吉), 수찬 이구징(李久澄)

 

“양사가 인혐하고 사퇴하였는데, 정조ㆍ윤인등이 언관의 지위에 있으면서 전하의 신변에서 일어난 전에 없는 변고를 직접 보고서 비록 전도되고 망령된 불륜(不倫)의 말을 하기는 하였으나, 그들이 이미 체척되었고, 그 피혐한 사연은 조정에서 버리고 쓰지 않아 마침내 한 장의 휴지로 되고 말았으니, 이것이 어찌 성상의 성심으로 효도하시는 덕에 손상되겠습니까. 또 정조ㆍ윤인의 말이 두 궁에 따로 거처하시는 것으로 결말을 지었으니, 대비를 깎아 내려 폐한다는 의논은 오늘날 조정에 일찍이 없던 일입니다.

정복형 등이 정조ㆍ윤인의 피혐한 사연 중의 말을 끄집어 내어 허위 사실을 날조하려 하였으며, 심지어는 여러 도에 통문하고 팔방에 호소(號召)하여 조정이 실제로 동요한 거조가 있는 것처럼 하였으며, 역적을 다스리는 교서가 아직 내외에 반포되지 않았는데 근사하지도 않는 것으로 성상을 핍박하는 글이 먼저 원근에 퍼뜨려졌으니, 그 백성들의 귀를 어지럽히고 조정을 모함함이 지극합니다.

이런 때에 그 허망함을 자세히 밝히고 그 경박함을 통렬히 다스리는 것은 양사의 책임인데도 선비를 대우하는 상규(常規)를 끌어대어 변명하여 구해주는 조건으로 삼아 논의가 일치하지 않아서 연명해서 아뢰지도 못하였으며, 병으로 집에 있어 논의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므로 모두 피할만한 혐의가 없사오니, 청하옵건대, 대사헌 이하와 대사간 이하를 모두 출사할 것을 명하소서.

하였다.

23일 성균관 유생 이득양(李得養) 등의 상소는 이러하다. 장의(掌議) 이순형(李純馨)ㆍ홍헌(洪憲)ㆍ한복윤(韓復胤), 색장(色掌) 심인(沈寅)ㆍ경유후(慶有後)ㆍ금시조(琴是調)

 

“신 등이 아뢰옵니다. 하늘을 두려워하고 아버지를 엄하게 여기는 것은 어진 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같은 생각이오나 아프고 곤궁하면 아버지와 하늘을 부르오니, 어찌 부른다 하여 두려워하고 엄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신들의 절박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있사오니, 진실로 두려워하여 잠자코 있어서 자애스러우신 성상께 스스로 막힐 수 없으므로 신들의 심정이 역시 슬픕니다. 우러러 바라건대, 천지와 부모 같으신 성상은 신자(臣子)의 지극한 심정을 굽어살피소서

신들이 이달 14일의 비망기를 보오니, 거기에, ‘유생 정복형(鄭復亨)ㆍ이안진(李安眞)ㆍ권염(?) 등이 분분하게 소를 올린 것이 이미 불가하고, 여러 도에 통문한 데 이르러서는 그 조짐을 키워서는 안 되겠다.’ 하시어 성교가 이미 준엄하셨고, 또 엄한 꾸지람이 가해졌으니, 복형 등의 죄는 만번 죽어 합당하옵니다. 신들의 뜻을 이미 두 차례의 소에서 아뢰었사오니, 신들의 죄가 어찌 이 세 사람 아래에 있겠습니까. 모여서 의논하고 소장을 올린 것은 신들이 모두 같이 한 일이오며, 여러 도에 통문한 것 역시 신들이 함께 한 일이오니, 그 죄가 균등하오며 진실로 경중(輕重)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석고대죄(席藁待罪)하기를 열흘이 넘었으나 어명이 내리지 아니하오니, 여러 사람의 심정을 군부(君父) 앞에 아뢰지 않을 수 없으므로, 곡절(曲折)을 전하께 자세히 아뢰는 바입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들이 비록 지극히 보잘것없사오나 거처하는 곳은 현관(賢關 어진 선비를 기르는 곳)이고, 바라는 바는 명륜(明倫 인륜을 밝힘)입니다.

저번에 이위경(李偉卿)의 소를 보고, 이어서 정조와 윤인의 피혐한 사연을 듣자오니, 앞장서서 주창하고 다시 호응하여 강상(綱常)을 무너뜨렸으니, 타고난 천성이 같은 바이므로 분통해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하물며 2백 년 동안 배양한 은택을 입은 것이 깡그리 한마디 말에 파묻혀 버리려 함에리까.

선비들이 성균관에 모두 모여 말하기를, ‘윤기(倫紀)의 역적은 사람마다 죽일 수 있는 것이다.’ 하여, 모두들 분노해서 소의(疎議)가 결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재임(齋任 성균관 등의 기숙생 중의 임원) 등이 여러 유생에게 의논하기를, ‘소두(疏頭)로는 누가 좋겠는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아무개 아무개가 좋겠다.’ 하여, 드디어 중론을 채택하여 소두를 정하고 유생 수백 명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소를 짓는 일에 참가하였사오니, 이는 성균관과 사학(四學)이 공동으로 한 일이고, 실로 재임 한두 사람이 그 의논을 주장하고, 많은 선비를 지휘하여 억지로 따르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일의 옳고 그름에 대한 책임이 균등하온데, 한두 유생이 이미 그 죄를 받고 신들만이 면한 것은 또한 이상하지 않습니까. 통문하였다는 한 구절에 이르러서는 이것은 다만 성균관 안에서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규례로 한 예사로운 일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태학은 많은 선비들의 근본이고, 공론(公論)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소를 올릴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 뜻을 향교에 알리는 것은 어제 오늘에 생긴 일이 아니어서 이루 다 적을 수 없사오나, 우선 지난날의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을사년(인종1, 1545)에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을 변명할 때에 그렇게 하였고, 무신년에 고경리(高敬履)의 죄를 청할 때에도 그렇게 하였으며, 경술년(광해군2, 1610)에 오현신(五賢臣)을 문묘(文廟)에 제사하기를 청할 때에도 그렇게 하였고, 이 해 이현(二賢 이언적과 이황)을 변무(卞誣)할 때에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또 요사이 이의(?)를 토죄하도록 소를 올릴 때에도 팔도에 통문하였으니, 이는 감히 여러 선비들에게 도움을 구하려고 부르고 알린 것이 아닙니다.

이는, 선비는 일을 같이 해야 할 의리가 있으므로 모든 일이 있을 때에는 원근에 서로 알리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전후의 통문한 일은 사람들이 다 보고 들은 것이어서 속일 수 없는 것인데도 대관(臺官)이 속여 아뢰기를, ‘유생들이 통문한 것은 전교에 없는 일이다.’하였고, 또 ‘임금에게 여럿임을 보여서 협박의 조건으로 삼으려고 한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근사하지도 않은 것으로 임금을 협박하는 말을 만들어 내었다.’ 하였습니다.

여러 도에 통문한 일에 이르러서는 명백히 전례가 있으니, 이것이 과연 여럿임을 보여 협박하려는 계책으로 오늘날 처음 시작한 일입니까. 신들이 전일 올린 소와 통문은 다만 이위경ㆍ정조ㆍ윤인 등 소두(疏頭)가 한 인륜에 어긋난 말을 들어 그 죄를 밝히고 강상(綱常)을 붙들고자 하였을 뿐이고, 단연코 다른 말은 없었으니, 그 이른바 근사하지도 않는 것으로 임금을 협박하였다는 말 또한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였습니까. 참으로 많은 선비들을 함정으로 얽어 넣으려 하다가 스스로 군부를 속인 죄를 부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귀와 눈의 구실을 하는 신하들도 이러한데 저 창언(昌言)ㆍ귀달(貴達)의 소가 종이 가득히 장황하게 늘어놓아 전하의 귀를 어지럽게 한 꼴은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

, 신들의 구구한 한 생각이 윤기(倫紀)를 붙들고, 한결같은 혈기가 성덕(聖德)을 밝히려고 한 것이온데, 도리어 ‘장차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고 하교하시니, 만약 이 말씀에 따른다면 죽어도 꾸지람을 면치 못할 것이므로 놀랍고 걱정되어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죄진 몸이오라 뭐라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만, 죄가 있고 없고는 사람들이 다 함께 아는 바이오며, 사생(死生)과 화복(禍福)은 의리에 따라 같고 다릅니다. 이미 일을 같이 하였사오니, 의당 죄도 같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들이 스스로 마음이 편치 못하여 전하께 한 번 하소연하는 것이옵니다.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특별히 호소하는 여러 사람의 심정을 살피시고 모두 금고하여 내치시는 죄를 주옵소서. 대죄하여 걱정하고 두려워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너희들은 스스로 반성하지는 않고 또 와서 다투어 변명하니, 너희들이 잘못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말이 많으면 자주 곤란해지니 중도(中道)를 지킴만 못하다.’ 하였는데, 그것이 너희들을 두고 한 말이다.

저 정조ㆍ윤인 등이 비록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어야 한다는 의리 때문에 망령된 말을 하였지마는, 조정에서 이미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그 계사(啓辭)는 다만 한 장의 휴지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너희들이 감히 불측한 말로써 팔방의 많은 선비들을 불러모아 장차 다투어 소장을 올려 임금을 협박하려 하니, 이것이 과연 유생이 할 만한 짓이냐.

복형(復亨) 등의 방자한 죄는 절로 마땅히 다스릴 법이 있으므로 조금 벌을 주었는데 너희들이 또 터무니없는 말로 이처럼 시끄럽게 구니, 더욱 놀랍도다. 물러가 생각해 보고 다시는 시끄럽게 굴지 말라.

하였다.

 

 

8

 

□일 나주(羅州)에 사는 서원(書院)의 유생 이색()ㆍ정미(鄭渼)ㆍ김집(?)ㆍ이우형(李友?)ㆍ나찬소(羅纘素)ㆍ나계소(羅繼素)ㆍ김종의(金宗義)ㆍ정혼(鄭渾)ㆍ나회소(羅繪素)ㆍ김종례(金宗禮)ㆍ정활(鄭活)ㆍ나유소(羅由素)ㆍ김극윤(金克潤)ㆍ나위소(羅緯素)ㆍ정함(鄭涵)ㆍ이지호(李之晧)ㆍ김협(金協)ㆍ노시증(魯時曾 고친 이름 시급(時伋))ㆍ김효달(金孝達)ㆍ김근(?) 등이 본주(本州) 향소청(鄕所廳)에 보낸 통문(通文)은 이러하다.

 

“창의사(倡義使 임진왜란 때에 의병을 일으킨 사람에게 임시로 주는 벼슬)란 나라를 위하여 죽은 사람입니다. 두어 칸 사당에 정렬사(旌烈祠)라고 이름지어 현판을 달았으니, 추숭(追崇)한 거조가 어떤 것이라 하겠습니까. 그런데 김제남은 역적의 괴수로, 하늘을 쏘려고 음모하여 날이면 날마다 달이면 달마다 인심을 모아 세상을 속이려고, 숨은 사적을 발굴한다는 명분을 빌리고 충절을 표창하는 일이라 핑계 대고 스스로 도유사(都有司 향교ㆍ서원 따위의 사무를 맡은 우두머리)가 되어 비석을 우리 고을에 만들어 보내어 의병을 일으킨 공적을 표창하려 하였습니다. 창의사가 참으로 의병을 일으킨 공적이 있다면 어찌 역적의 괴수가 비석을 세워 준 다음에서야 한 고을이 그 공적을 알고, 한 나라가 그 공적을 인정하겠습니까. 한 조각의 흉한 비석이 아직도 정문(旌門) 아래에 남아 있어 길 가는 사람마다 그 비석을 가리켜, ‘저 비석은 역적이 세운 것이다.’ 하니, 지금 세상에서도 모두 그렇게 말하고, 후세에서도 그렇게 말한다면 이 비석은 의병을 일으킨 공적을 표창하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의병을 일으킨 이름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귀소(貴所)에서 온 고을의 부로(父老)와 선비들에게 알려서 곧 그 비석을 깨뜨려 문 밖에 내어 던지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귀소에서 만약 우리들의 의논이 악을 미워하는데 너무 편벽된다 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듣지 않는다면 다른 곳으로 끌어 내어 뜻대로 세우게 하십시오. 여러분께서는 살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20명 중 나유소ㆍ노시급ㆍ정함ㆍ김근은 유학(幼學)으로 과거를 보았고, 이색ㆍ정미ㆍ김종의ㆍ정혼ㆍ이지호는 귀양갔으며, 나위소는 광해군 때에 과거에 올랐고, 나회소ㆍ나계소는 남이 대신 보아 준 과거로 무관이 되었으며, 그 나머지는 모두 죽었다.

옥당에서 올린 차자는 이러하다. 부제학 이성(李惺), 응교 이명(李溟)ㆍ한찬남(韓纘男), 교리 박정길(朴鼎吉)ㆍ이창후(李昌後)

한찬남이 지었다.

 

“양사가 모두 인혐하고 사퇴하였사온데, 죄가 십악(十惡)을 범하면 공론이 용서하지 않는 것이 명 나라의 금석같이 변함없는 법전입니다. 더구나 난역(亂逆)은 천하가 모두 미워하고, 사람마다 죽이는 것이온데, 신하로서 어찌 감히 은혜를 온전히 하라는 설을 꺼내어 역적을 놓아 주고 임금을 위태롭게 하는 계책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법에 의거하여 이의를 처단하라는 의논이 다만 삼사(三司)에서만 나와 시일을 끌고 있으며, 백관이 뜰에 가득하지만 여태껏 청한다는 것이 고작 이의를 궁궐 밖에 옮겨 두거나, 강화도에 안치하자는 데 불과할 뿐이오니, 이른바 여러 재신(宰臣)이란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이들이 《춘추》의 역적을 다스리는 의리를 아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은 수상이 되어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어야 하는 시기를 당하여 의리를 주창하고 법에 의거하여 역적을 다스리려 하지는 않고 사특한 말을 장황하게 늘어 놓아 위로는 임금을 협박하고 아래로는 온 세상을 현혹케 하오니, 그 속셈을 진실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엄일괴(嚴一魁)ㆍ만애민(萬愛民)이 조사한 치욕도 대신이 충성을 다하지 못한 탓이온데, 오늘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뽐내고 있습니다. 또 광녕(廣寧)에서 온 위관(委官)으로 임금을 겁나게 하고, 역적의 괴수를 두둔하였사오니, 이른바 ‘깊이 생각하여 잘 처리하라.’는 것은 또한 무슨 일입니까.

오늘날의 일은 무신년의 일과는 다른데, 이른바 ‘뜻밖에 잘못 전해졌다.’는 것은 또한 무엇을 가리키는 말입니까. 위관도 신하이오며, 중국 사람이니, 어찌 《춘추》에서 역적을 다스린 의리와 주공(周公)이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을 죽인 일과, 장준(張俊)의 철탑(鐵塔) 의 일을 모르겠습니까. 비록 알았다 하더라도 다른 까닭으로 논척(論斥)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대신이 대의(大義)를 밝혀 역적을 다스리기를 청천백일(靑天白日)과 같이 하여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해야 되는데도, ‘화근을 제거하는 데 어찌 다른 적당한 방법이 없으랴.’ 하였으니, 이른바 방법이라는 것이 과연 무슨 계책입니까. 이것은 임금을 우롱하는 말이 아닙니까. 또 ‘옛부터 위태롭고 어지러운 때를 타서 힘으로 겨루어 임금의 자리를 뺏는다.’고 한 것은 더욱 음흉합니다.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 차마 할 말입니까. 또 ‘일종의 설화 중에는 흉측한 무리가 다시 일어나 큰 걱정거리가 된다.’고 하면서 심지어는 육지(陸贄)의 여우처럼 의심해서 지나치게 방비한다는 경계를 인용하여 마땅히 오늘날에 본받아야 할 것이라고 하였으나, 걱정거리를 생각하고 미리 막는 것은 성인의 가르침이고, 대신의 책임입니다.

지금 의리가 밝지 못하고 사특한 말이 멋대로 판치는 시기에 화가 일어나는 것을 좋아하는 무리와 딴마음을 품은 역적의 남은 무리들이 이의를 끼고 반란을 꾀하는 일이 어찌 반드시 없으리라고 보장하겠습니까. 이것은 진실로 온 나라가 함께 걱정할 일인데, 덕형이 감히 염려할 일이 못 된다고 하였사오니, 그 속셈을 더욱 알 수가 없습니다. 이덕형의 소의 끝부분은 바로 붕당(朋黨)의 말로 은연중 역적을 다스리는 의논을 막는 것입니다. 또 그의 여태까지 해 온 일로 임금에게 요구하여 자기의 죄를 면하고자 함이오니, , 또한 교묘합니다. 덕형이 이미 역적을 다스리지도 않고 또 따라서 변명하는 말을 하는데 조정에 있는 신하 중에 어찌 한 사람의 주운(朱雲)이 없습니까. 일찍이 죄주기를 청하는 한마디 말을 꺼내는 사람도 없사오니 붕당의 폐단이 이에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원통함을 이길 길이 없습니다.

양사에서 법대로 하시라는 의논은 이것이 임금을 위하여 역적을 다스리고, 종묘 사직을 위하여 화를 미워하는 것이오니, 여러 달을 두고 그만두지 않는 것이 어찌 법을 무너뜨리는 것이겠습니까. 피할 만한 혐의가 없사오니, 양사를 모두 출사하게 하소서.

하였다.

성균관 유생 권염(?) 등이 다시 올린 소는 이러하다. 유적(儒籍)에서 제명하고 종신 금고시켜서 성문 밖으로 내쳤다.

 

“신들은 아룁니다. 감히 피맺힌 소를 올려 패륜(悖倫)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한 것은 우리 임금을 요순(堯舜)이 되게 하고, 만고의 강상(綱常)을 붙들고자 함이었으니, 신들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그 중에 밝혀 아뢰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사오니, 다시 대궐 문에 부르짖는 것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저번 이위경(李偉卿)이 흉측한 의논을 앞장서서 주창하여 겉으로는 역적을 다스린다는 명분을 핑계 대고, 속으로는 불측한 계책을 부려, 심지어는 ‘어머니로서의 도리가 이미 끊어졌다.’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공자가 《춘추》에서 으레 피하였다고 썼으며, 호씨(胡氏)는 《강목(綱目)》에서 장간지(張柬之)를 허물하였다.’고 하여, 감히 이런 말을 소 가운데에 썼사오니, 그 속셈이 과연 무엇을 하려는 것입니까.

정조(鄭造)ㆍ윤인(?) 등은 같은 악인으로 인피하였는데, 그 사이의 곡절은 성상께 밝히기 어렵지 않습니다. 언론이 정직하면서 그 중도를 얻지 못한 것은 ‘과격하다.’ 할 수 있으나, 정조 등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감히 ‘마땅히 모자의 도리를 끊어야 할 죄악이 현저하니 국모로 대접할 수 없다.’는 말을 대간이 아뢰는 자리에서 느닷없이 꺼내어 전하의 귀를 더럽혔사오니, 이런 인륜에 어긋나는 말을 다만 ‘과격하다.’ 하고 그 죄를 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태학은 어진 선비들이 모이는 곳이고, 공론이 있는 곳이오니, 사문(斯文)의 흥망과 국가의 안위에 있어 반드시 소를 올려 아뢰는 것은 그 유래가 오랩니다. 하물며 이 윤기(倫紀)의 적은 사람마다 죽일 수 있음에리까. 신들이 윤리를 밝히는 곳에 있으면서 눈으로 강상(綱常)을 무너뜨리는 변고를 보고서 의논하지 않았는데도 말이 모두 같아서 선비들의 의논이 한결같이 분격하오니, 어찌 정조를 언관(言官)이라 하여 죄주기를 청하지 않겠습니까.

어느 날, 흉측한 의논이 발표되자 모든 혈기 있는 사람은 머리카락을 곤두세우고 주먹을 불끈 쥐었는데, 어찌 조정의 처치를 기다리겠습니까. 이목이 되는 언관으로서 입을 다물고 아직도 그 죄를 분명히 말하지 않고 그 죄를 감싸 주며, 유활(柳活)ㆍ정창언(鄭昌言)등이 계속해 늘어놓으면서 발론(發論)한 본뜻을 엄폐하려고 도리어 사람을 모함하는 음모로 삼으니, 조정의 처리를 또 언제까지 기다리겠습니까.

, 한두 역적 신하가 대비를 동요시켰는데도, 전하께서는 ‘과격’이라는 말로 용서하시고, 수백 명의 유생들이 강상을 붙들어 세우려는데 전하께서는 망령된 말이라고 물리치시니, 신들은 일국의 당당한 정론(正論)이 간사한 역적들의 비웃음거리가 될까 염려됩니다.

, 이위경의 사리에 어긋나는 말이 사람들의 귀와 눈에 퍼지고, 정조ㆍ윤인 등의 흉측한 말이 조보(朝報)에 나와서 사람들이 보고 듣는 바 원근이 놀라고 의심하고 있사오니, 신들의 생각으로는, 진실로, 위경ㆍ정조ㆍ윤인의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천하 후세 사람이 장차 죄줄 곳이 없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홀로 이 세 적신을 사랑하시어 천하 후세의 의논을 돌아보지 않으십니까. 우리 전하께서 효성을 다하시어 대비를 받드시는데 위경이 사리에 어긋난 의논을 지어 내어 전하께 누를 끼치고 허물을 성상께 돌리고 죄는 그의 몸에 미치지 않았으니, 이것이 온 나라 신민이 마음이 아프고 뼈가 저린 바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여러 신민들의 심정을 통찰하시와 빨리 그들의 죄를 바로잡으시면 종묘 사직이 매우 다행하옵고, 나라가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신들이 격정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삼가 아뢰옵니다.

하니, 답하기를,

 

“너희들은 다만 생각하는 바를 진술하는 데 그칠 뿐이고, 시비를 바로잡는 것은 유생의 할 일이 아니니, 다시 번거롭히지 말고 물러가 독서하라.

하였다.

권염(?)ㆍ이유원(李幼源)ㆍ이두첨(李斗瞻)ㆍ박자응(朴自凝)ㆍ경유후(慶有後)ㆍ이득양(李得養)ㆍ정호제(丁好悌)ㆍ권훈(權勛)ㆍ이종룡(李從龍)ㆍ이지정(李志定)ㆍ박안제(朴安悌)ㆍ이순형(李純馨)ㆍ이경의(李景義)ㆍ오부(吳溥)ㆍ어몽렴(魚夢濂) 등 □ 유학(幼學) □□□□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상소는 이러하다.

 

“아뢰옵니다. 신이 노병으로 거의 다 죽게 되어서 늦게나마 국난(國難)에 나가던 중 중도에서 기운이 빠져 앞으로 나아갈 힘이 없사와 소를 올려 심정을 피력합니다. 앓고 누워 신음하며 여관에 묵기 한 달이 되었으나 병이 나을 가망이 없사와 늘 불안한 마음으로 엄한 견책을 기다리고 있던 차에 돌연 성상의 비답(批答)이 내려 따뜻하신 말씀으로 간곡하고 불쌍히 여기시니, 감격하고 황송하옵니다. 성은이 하늘과 같사온데 감히 병든 몸을 이끌고 물러가 고향에서 죽기를 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임금을 사랑하는 한 마음이 천성에서 나왔으므로, 옷깃을 여미고 임금 계신 곳에 도달하지 못하고 지레 돌아가오니 바라보고 생각하매 답답하여 진정할 수가 없습니다. 몸은 비록 산으로 돌아왔으나 마음은 전하께 있어 지극한 정성을 스스로 막지 못하옵나이다.

신이 우러러 생각하옵건대, 차마 하지 못하시는 생각이 깊이 성스러운 충정에 가득하시어 조정의 의논이 날로 격렬하나 전하의 판단은 의연하시니 효도하고 우애하시는 정성이 실로 인륜의 극치로서 비록 백세(百世) 뒤라도 의심이 없을 것입니다. 이러므로 신도 전에 어리석은 소견을 아뢰었는데, 외람되이 살펴 주심을 입었으니, 지극히 기쁘고 다행함을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이번 신이 다시 《춘추》의 의리에서 깨달은 것이 있사온데, 전하께서 판단하시는 데 도움이 없지 않을 듯하옵니다. 신이 이미 들은 바가 있사옵기에 감히 숨기지 않고 아뢰오니, 전하께서는 유의(留意)하시기 바랍니다.

옛날 노 양공(魯襄公) 30, 주 경왕(周景王) 때에 적신(賊臣) 담괄(?)이 난을 일으켜 왕자 영부(?)를 임금으로 세우려 하였습니다. 영부는 곧 경왕의 아우로, 실상 담괄이 자기를 임금으로 세우려 하는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얼마 안 가서 일이 발각되자 담괄은 달아나고, 윤언다(尹言多)ㆍ유의(劉毅) 등 다섯 사람이 함께 영부를 죽였는데, 공자는 그 사실을 《춘추》에 쓰기를, ‘천왕(天王)이 그 아우 영부를 죽였다.’고 하였습니다. 선유(先儒)들이 그것을 논하기를, ‘모든 왕이 죽인 것은 쓰지 않는 법이고, 반드시 죄가 없는 것으로 된 뒤에 쓴다.’ 하였습니다. 이는 천자는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것이므로 ‘영부의 죽음은 쓰지 않아야 할 것인데 서법(書法)이 이러한 것은 ‘영부가 참여하여 듣지 못한 것이어서 성인이 죄가 없는 것으로 처리하였다.’ 하였으니, 그 실정을 따져서 법을 적용하는 뜻이 매우 절실하고 명백하지 않습니까. 또한 영부의 죽음이 처음부터 경왕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다만 죽이는 것을 금지시키지 못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춘추》의 뜻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좌씨(左氏)는 ‘죄가 왕에게 있다.’ 하고, 곡량자(穀梁子)는 ‘경왕의 소행이 심하다.’ 하였고, 두예(杜預)는 ‘골육을 해친 것이다.’ 하였으니, 그것이 경왕에게 누가 됨이 어떻다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경왕의 허물은 다섯 명의 대부가 만든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늘날의 일도 우연히 이 일과 서로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그 어려서 철없는 것은 영부의 알지 못했던 정도뿐만이 아니오며 조정의 의논이 그치지 않고, 반드시 죽이라는 명을 받고자 하는 점은 더욱 경왕이 금지시키지 못한 것보다도 심하지 않습니까. 그 말은 성상으로 하여금 장차 무엇으로써 천하 후세에 《춘추》를 강독하는 자들에게 변명하게 하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몹시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하오나 아직 깊이 살피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진실로 깊이 살피는 바가 있다면 우리 임금을 허물 없는 곳에 계시게 하는 것이 신하된 사람의 큰 소원일 것입니다. 전날의 의논을 철회하고 전하의 심정에 순종하려고 생각하는 것은 신으로서는 반드시 말 수 없는 바가 있다고 여깁니다.

바라옵건대, 신이 전후에 말씀드린 것을 깊이 생각하시어 여러 사람들의 의논에 흔들리지 마시고 대의(大義)를 바로잡으시고 대론(大論)을 온전히 하시면 성상의 마음이 태연하여 틈이 없고 성상께서 하시는 일이 다 아름답고 착하여 후세 사람이 지금을 보기를 마치 지금 사람이 옛날의 성인을 보고서 모두 와서 본받는 것처럼 할 것이니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신의 사심으로 지나친 계산이 없지 못하온 것은 법대로 시행하라는 아룀이 바야흐로 심하온데, 민가로 내어 보낼 것만을 허락하셨으니, 은혜와 사랑이 융숭함은 옛날에도 없던 일이므로 보고 듣는 이가 누군들 감격하고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염려되는 것은 어리고 약하여 혈기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는데, 깊은 궁전 넓은 집에 편안히 살다가 갑자기 좁고 누추한 곳에서 추위와 더위가 알맞지 않고, 음식을 제때에 못 먹고, 어버이를 그리워하고 살던 곳을 생각하여 답답하여 울고 부르짖어도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물어 보지도 구할 수도 없사오면 안개와 이슬같이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찌 보장하겠습니까.

송대(宋代)의 주희(朱熹)가 일찍이 그의 임금 광종(光宗)에게 말하기를, ‘한 문제(漢文帝)가 잠깐 생각을 잘못하여 「한 자의 베와 한 말의 곡식……」이라는 노래가 있어 평생 동안 병통으로 여겼으니, 비록 어진 임금일지라도 그 허물을 스스로 용서하지 못한 것이 오늘의 염려거리가 됩니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이미 큰 은혜를 베풀었으니, 원하옵건대, 더 생각하시어 사는 길로 나가게 하시어 후회됨이 없게 하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전하께서 정성을 다하시어 대비께 공경하시는 것은 온 나라 신민이 모두 감복하고 우러러보는 바이온데, 불행히도 흉악한 변고가 번지고, 사특한 의논이 마구 일어나 성상의 마음을 불안케 하오니, 신은 매우 마음이 아픕니다. 부자간의 큰 은혜는 하늘처럼 그지없는 것입니다. 어쩌다 혹 변고를 당하더라도 모두 처리할 도리가 있는 것이오나, 평상시와 변고가 같지 않고 순리와 역리가 형편이 다르므로 우리가 응대하는 데 있어서도 어렵고 쉬운 차이가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기미(機微)를 잃으면 잘못을 이루게 되니, 또한 신중하게 여기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옛날 신하된 사람은 대궐을 지날 때에는 땅에 엎드려 정성을 쌓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 임금을 권면하였는데, 지금의 말하는 이들은 다른 궁에 따로 거처하기를 청하오니 신이 이해할 수가 없는 바입니다만, 어찌 감히 그 말씀을 다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오직 옛 성인의 지성으로 하던 뜻을 깊이 생각하시어 그것으로써 오늘의 사태에 대처하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밤낮으로 조심하시어 반드시 순임금의 마음으로써 마음을 삼으시어, 천하에는 옳지 않은 부모가 없다 생각하시와 전날에 섬기시던 것을 조금도 변함이 없게 하시면 순임금처럼 되는 것도 이보다 나을 것이 없을 뿐 아니라, 바로 이보다 더할 것입니다.

대개, 부득이(不得已)한 것은 종묘 사직의 대계이지만, 다할 수 있는 데까지 다하는 것은 부모의 지극한 정이기 때문입니다. 그 할 일을 다하는 데는 여러 말이 필요 없고, 오직 포용하고 참고서 더욱 성상의 뜻을 굳게 가지시는 데에 달렸습니다. 설사 언행(言行)이 혹 근사하지 못한 것이 있더라도 효도하고 순종하며 사랑하고 공경하는 도리를 극진히 하여 지성으로 하기를 오래도록 하여 그치지 않으면 성하게 믿고 감격하지 않을 자가 있겠습니까. 대처하는 데 지극함이 이보다 더할 것이 없사오니, 천하의 부자간의 위치가 정해져서 순임금의 공이 되었던 그러한 기틀은 오로지 전하께서 교화하시는 데에 달렸습니다. 이렇게 되오면 뭇사람들의 저해하고 떠드는 일들이 마치 구름이 사라지듯 안개가 흩어지듯 시원히 풀리게 되어 화목하고 흐뭇하며 화기가 가득 차게 될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필 다른 궁에 따로 거처하면서 틈이 없는 것처럼 해서 외부 사람들이 엿보고 의심이 생기게 할 것이 무엇입니까.

도깨비처럼 홀리고 어지럽힌 변고에 이르러서는 또 성명하옵신 세상에 생기리라곤 생각지 못하였는데, 길가에 전해지는 소문이란 갑()과 을()이 같지 않는 것이므로 진실로 그 단서를 헤아릴 수가 없사오니 또한 놀라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하오나 과연 소문과 같다면 정범(正犯)과 수악(首惡)이 죽임을 당하였사오니,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남은 무리들은 큰 도량으로 용서하여 내버려 두고 그 정상과 귀추가 어떠한가를 시험해 보시는 것도 의연히 부동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오니, 광명한 햇빛 아래 정기(正氣)가 가득하오면 음산하고 요사한 재앙이 어찌 끼어들 수 있겠습니까. 신이 아뢰는 말은 모두가 이미 전하의 깊으신 마음속에 결정하고 계실 것이온데 감히 다시 번거롭게 아뢰니, 작은 반딧불 같은 신이 어찌 밝은 해와 달 같은 성상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이 또한 제 분수를 모르는 것입니다.

병들어 물러나려 하오며 대궐을 바라보고 치닫는 마음을 생각나는 대로 모두 아뢰어 크옵신 은혜에 보답하고자 말씀드리기 어려운 말을 거리낌없이 아뢰어 흉금을 털어놓느라 마음이 격하였으니, 죄가 만번 죽어도 합당하옵니다. 신은 두렵고 떨림을 이길 수 없습니다. 재결을 바랍니다.

하였다.

순녕군 경검(順寧君景儉)의 차자는 이러하다.

 

“아뢰옵니다. 신은 종실(宗室) 중의 한 무식한 사람입니다. 그 학식에 있어서는 남에게 뒤떨어지오나 군신과 부자의 의리와 형제 사이의 우애의 정에 대해서는 대강 알고 있어 예사로운 윤기(倫紀)의 변고에 대해서도 일찍이 마음아파하고 준엄하게 배척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이번의 이의(?)의 변고는 바로 국가에서 나온 것이니, 혈기가 있는 사람으로서 어찌 하루인들 한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있겠습니까. 제남(悌男)의 모의나 흉적들의 추대하려는 것이 모두 이의 때문이오니, 이의가 알고 모르고는 진실로 논의할 것이 못 됩니다. 종묘 사직에 대해 스스로 끊었고 선왕께 죄를 지었사오니, 전하께서 비록 은혜로써 덮어 주고 정으로써 법을 굽히려 할지라도 그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종척(宗戚)의 한 사람으로 대궐문 밖에 엎드려 호소하기 몇 달이온데 정청(庭請)을 정지하자는 논의가 뜻밖에 갑자기 나와서 그 까닭도 모르고 따라서 정지하였사오니, 역적을 늦추어 준 죄는 진실로 면하기 어렵습니다. 이의의 죄가 어떤 죄이기에 왕자의 자리를 뺏는 데 그치며, 폐출(廢出)하는 데 그치며 궁궐 담장에서 두어 걸음 되는 바깥에 내치는 데 그치는 것입니까. 정청을 정지한 지 이미 며칠이 되었사오니 대의(大義)가 어그러지고, 윤기가 없어지고, 떳떳한 형벌을 잃어버린 것이 또한 며칠이 되었습니다. 고금에 역적을 다스린 것이 과연 이때와 같이 하였습니까.

순임금이 상()에게, 주공(周公)이 관숙(管叔)ㆍ채숙(蔡叔)에게 모두 인륜의 변고를 당하였으되 변고를 처리하는 방법을 알았으니, 처지를 바꾸면 누구나 다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순임금의 마음으로써 주공이 관숙과 채숙을 죽인 것처럼 행하시는 것이 신이 전하께 바라는 바입니다.

전하의 마음은 본래 동기를 사랑하는 지극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오나, 신하로서 역적을 다스리는 것을 그저 순종하고 고식적인 것으로 천하의 대법(大法)을 그르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그날 왕자(王子)가 정지(停止)의 여부를 신에게 물었으나 신이 고집하여 아뢰지 못하였사오니, 신의 죄가 더욱 큽니다. 정계(停啓 왕이 윤허할 때까지 논쟁하지 않고 중간에서 계()를 정지하는 것)한 후로는 뭇사람들의 심정이 더욱 답답하고 나라 형편이 날로 위태로워졌습니다. 역적을 다스리는 시기를 잃어 이렇게 지연한 것이 모두 신의 죄입니다. 신이 어찌 감히 재신(宰臣)의 반열에서 직무를 맡아 여러 신하들에게 수치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신을 논죄하여 공의에 답하시오면 매우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겠나이다. 재결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서 의리에 분발한 뜻을 매우 가상히 여기노라, 내가 임금답지 못하여 죄가 깊고 무거워서 이 큰 변고를 당하여 스스로 마음아플 뿐인데, 어떻게 이의를 처단하겠느냐. 하물며 골육 상잔하는 일은 나로서는 차마 못 하겠다. 대신들이 정계한 것은 실로 나의 뜻을 받은 것이다. 대신들이 이미 정지하였으니, 경이 굳이 논할 필요가 무엇 있겠느냐. 경은 마땅히 안심하고 직무를 다하고, 과인을 멀리 버리지 말라.

하였다.

진사 민귀달(閔貴達), 생원 조형(趙烱), 유학 이효성(李孝誠)ㆍ임휘지(任徽之)ㆍ임광후(任光後)ㆍ이원(李瑗)ㆍ심지청(沈之淸) 등의 상소는 이러하다.

 

“아뢰옵니다. 윤기가 없어져 난역(亂逆)이 일어나고, 의리가 어두워져 시비가 혼란하온데, 난역이 일어나도 사람이 토죄할 줄을 모르고, 시비가 혼란해져도 사람이 변별할 줄을 모른다면 역리와 순리가 같은 것이 되고 부정과 바름이 구별이 없어질 것이오니, 장차 무엇으로써 윤기를 세우고 의리를 밝히겠습니까.

신들이 살펴보옵건대, 근래 국운이 불행하여 역적이 뒤를 이어 일어나는데 흉악한 음모가 음흉하고 끔찍함이 이 역적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화가 집안에 임박하고, 재앙이 침상 머리에 절박하였사오니, 이야말로 온 나라 신민이 목욕하고 토죄하기를 청하기에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영경이 모위(謀危)한 것도 이의 때문이고, 제남이 난을 꾸민 것도 이의 때문입니다.

두 역적의 도당들이 서로 결탁하고, 또 □□□의 논의를 펴서 역적을 토죄하는 사람을 힘껏 공격하여 은밀히 사사로운 분풀이를 하려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백관이 대궐문에서 호소하는 것이 어떠한 일이온데, 이의를 궁궐 밖에 내다 안치하는 것으로 갑자기 정지하였다가, 여론이 일제히 분개하고 종척(宗戚)이 대죄하게 되자, 다만 2품 이상만을 거느리고 조종(祖宗)의 옛 관례라 하여 다시 청하여 지레 정지한 죄를 덮으려 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모든 관원은 유독 신하가 아닙니까. 《춘추》의 ‘사람마다 역적을 죽일 수 있다.’는 의리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또 우산(宇山)의 바람을 증거로 삼아 넌지시 보호할 뜻이 있으니, 또한 역적을 다스리는 의리를 안다고 하겠습니까. 무고(巫蠱)의 변고가 대궐 안에 파다하고 닭, 고양이의 부적과 개, 말의 요사스러운 저주들이 모두 응벽(應璧)의 공초에서 나와 의심 없이 밝게 드러나 국민들이 모두 알고, 능소(陵所)를 봉심한 관원이 이미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말로 아뢰었으며, 언관 또한 시험삼아 파 본 결과 증험이 되었음에도 도리어 허황된 일이라 합니다.

이번 저주한 일이 발각된 지 며칠이 되었는데도 전대로 묻어 두는 것은 천만 무리인데, 그것을 가지고 말하여 큰 옥사를 감추려 하오니, 이것이 어찌 명령을 받든 신하인 제남의 조카가 할 말이겠습니까.

위경(偉卿)으로 말하면 대현(大賢)의 문에서 수업하였으니 어찌 아는 것이 없겠으며, 정조ㆍ윤인은 모두 언관의 지위에 있으므로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반드시 아뢰는 것입니다. 위경의 소에, ‘어머니의 도리가 끊어졌다.’ 하였으며, 정조ㆍ윤인 등의 피혐한 내용에는, ‘종묘에 대해서 끊어야 할 죄악이 현저하다.’ 하였습니다. 그것이 비록 어버이의 잘못을 숨겨주는 도리에 저촉되기는 하오나, 그 ‘어머니로서의 도리가 저절로 끊어졌다.’라고 말한 것은 안으로는 무고를 일으키고 밖으로는 역모에 응하여 국모로서 나라에 임하는 도리를 몹시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 ‘종묘에 대해서 끊어야 할 죄악이 현저하다.’라고 한 말을 ‘종묘에 대해서[於宗廟]’라는 석 자를 지워 버리고 은연중에 허물을 전하께 돌린 것입니다. 그래서 감히 ‘자식은 어머니와 끊는 의리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한 자를 더하고 빼고 해서 오직 임금을 협박하고 선비들을 모함하기를 위주로 하였으니, 그 계책이 지극히 교묘하고도 끔찍합니다. 저 무리들이 또 말하기를, ‘경전(經傳)을 속여 인용하여 임금을 몹시 속였다.’고 했는데, 지금 경사(經史)의 본뜻으로 보건대, 공자가 《춘추》에서 비록 숨겼다고는 하나 이미 ‘주 나라로 피하였다.’고 썼으니, 참여한 사실이 저절로 뚜렷합니다. 하물며, ‘피하였다.’고 한 것은 부드럽게 한 말로, 강씨가 스스로 한 일이고, 아들이 쫓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모든 ‘옮긴다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반대로 한 말과 죄주는 말이 있습니다. 서법(書法)에 ‘염후(閻后)를 옮겼다.’는 것은 죄주는 말입니다. 죄주는 말로 한 것은 몰래 태자를 폐하고 어린아이를 세우려 했기 때문입니다.

저 무리들이 마침내 죄주는 말을 반대로 한 말로 바꾸어 ‘《강목(綱目)》에서는 허여하지 않음이 분명하다.’고까지 말하였으니, 그들의 이른바 ‘경전을 인용하여 임금을 몹시 속였다.’는 것은 과연 누구에게 해당하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주 나라로 피하였다.’거니 ‘염후(閻后)를 옮겼다.’거니 하는 고사의 인용은 ‘폐()’ 자의 뜻과는 아주 다른데, 저 무리들이 한 말은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이것으로 ‘잘못 인용하였다.’고 말한다면 공자가 노() 나라의 신하가 아니어서 《춘추》에 그렇게 썼으며, 주자(朱子) 또한 옛날의 대현(大賢)이 아니어서 손정(孫程)을 죄주지 않았습니까.

,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대비를 섬기는 것은 전하의 효성이 극진한 것인데, 어머니를 원수로 삼고, 또 어머니를 끊어야 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소문에 듣건대, 해조(該曹)의 논의에서 나온 군말을 옥당이 지지해 나서고 성균관과 사학(四學)에서 부동하여 사방에 통문하고 호응한다고 하니, 이 일을 참을 수 있겠습니까. ‘절()’ 자 한 자는 처음에 정조와 윤인 등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사오며, 그 계사(啓辭)의 본뜻은 두 궁에 따로 거처하라는 것으로 결말이 났으니, 임금을 사랑하는 이외에 딴 뜻은 결단코 없습니다. 이른바 윤기의 적()이란 누구에게 해당됩니까.

이제 만약 문자나 말 속에서 흠집을 찾아 내어 사람을 모함하는 죄안으로 삼는다면 대신 심희수(沈喜壽)가 일찍이 차마 쓸 수 없는 일을 사사로운 편지로 전하였는데도 깊이 책망하지 않았으며, 생원 이신(李莘)도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성균관에서 발언하였으나 아직도 머리를 보전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위경의 소나 정조ㆍ윤인의 계()가 비록 과격하였으나 모두 강개해서 숨기지 않고, 말을 다듬을 줄 모른 데 불과한데, 어찌 심희수와 이신과 같이 취급해서야 되겠습니까.

, 괴상한 붕당을 만드는 일이 그치지 않고, 사론(士論)이 일치하지 못하여, 시비가 분명치 않고 역리와 순리가 구별이 없어서 소()를 올려 한 번 아뢴 탓으로 20여 명이 유적에서 삭제되고 이미 금고(禁錮)당하였으니, 이것은 무신년에 영경도 하지 않은 일이고, 한탁주(??)가 주자학을 위학(僞學)이라 하여 금지한 것보다도 더 심합니다. 소장을 올려 죄주기를 청한 것도 오히려 부족하다 하여 제적하고 금고까지 시키고, 또 부족하다 하여 팔도에 통문하여 많은 선비의 도움을 구하기까지 하였사오니, 한두 신하의 죄명을 만들려다가 도리어 임금의 실덕(失德)을 꾸미게 됨을 생각지 못하였으므로 그 마음먹는 것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생원 정복형(鄭復亨)은 곧 역적 유영경의 친척이므로 영경의 뒤를 이어 은밀히 제남을 옹호하여 윤기를 위한다고 주장하여 잇달아 두 번 소를 올려 많은 선비를 금고시켰습니다. 명륜당(明倫堂)은수선(首善)하는 곳이온데 그 무리들이 어지럽히는 마당으로 만들어 같은 악인 이안진(李安眞)ㆍ권염을 소두(疏頭)로 삼았는데, 모두 두 역적의 남은 무리들이오니, 어찌 마음아프지 않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싸우는 처지라 하여 등한히 보시지 말고, 진정시킨다고 포용하지 마시어 좋아하고 미워함을 분명히 보이시고 부정과 바름을 통쾌하게 가리시어 시비를 일시에 정하고, 윤기를 만세에 붙들어 세우면 난역(亂逆)은 사라지고 의리는 밝아질 것입니다. 그러하오면 종묘 사직이 매우 다행하고, 사림(士林)이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소의 사연은 잘 알았다. 공론이 자연 조정에 있으니, 물러가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월

 

□일 정인홍(鄭仁弘)의 차자는 이러하다,

 

“성지(聖旨)를 보오니, ‘나라 일이 위급한데 정승의 자리가 오래 비었으니 역마를 타고 밤중에라도 올라오라.’ 하시오니, 신이 황공하고 감격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군신의 의리는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도 천성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온데, 신도 혈기 있는 사람으로 비록 도리로써 임금을 섬기지는 못하오나 불□의 예(不□之禮)는 대강 알고 있는데, 하물며 밤중에라도 올라오는 분부가 계심에리까.

신은 듣자옵건대, 《예기(禮記)》에 ‘잘 생각하고 나서 조정에 들어가고, 들어가고 나서 생각하지 않는다.’하였습니다. 신이 제 자신을 생각하여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 두 가지요, 사세를 생각하여 감히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기에 조목을 들어 아뢰오니, 전하께서는 살펴 주시옵소서.

신이 지난해에 갑자기 차지해서는 안 될 관직을 더 받고 만번 죽음을 무릅쓰고 사퇴하기를 청한 것은 이미 들어간 뒤에는 생각하지 못함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신이 비록 대단한 병은 없사오나 이미 다 노쇠하여 이가 빠지고, 귀와 눈이 어두워서 보고 듣고 먹고 마시는 것을 남처럼 하지 못하니, 이승 사람으로 저승에 가기가 멀지 않는 것입니다. 또 지난 겨울부터 지금까지 하루에 두어 숟갈도 먹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다행히 의원을 명하여 치료하게 한 성은을 입어 아침저녁에 달린 목숨을 연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 80에 기운이 빠지고 먹는 양도 줄었으며, 담이 끓어 숨이 차고, 숨쉬는 것이 실낱 같아 얼마 못 갈 것 같습니다. 또 봄부터는 머리에 온통 부스럼이 나서 가을에는 더욱 심해지고 얼굴에 열이 나서 마치 숯불을 대하는 것처럼 화끈거리며, 어깨와 목에까지 내려와 맺힌 망울이 계속 퍼져서 고개를 돌려 돌아볼 수도 없습니다. 가뜩이나 어두운 눈에서는 눈물이 자꾸 흘러 물건을 분별하지 못한 지 이제 4~5개월이나 되며, 세수도 못 하고 머리도 못 빗고, 문 밖에 나가지도 못하여 사람의 꼴이 아닙니다.

지난 해 올라가 뵈었을 때에 전하의 말씀이 간곡하셨지만 신은 열에 한둘도 아뢰지 못하여 거의 진대(陳對)하지 못하다시피 하였습니다. 지금은 보통 사람의 말도 조금만 나직히 말하면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반드시 큰 소리로 되풀이해야 비로소 문답이 통합니다. 이러고서 천리나 되는 대궐로 들어가 전하를 모시고 도와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왕래(往來)를 꺼리지 않는다.’는 비방은 걱정하지 않습니다마는, 살아서 갔다가 죽어서 돌아오는 것이 인정으로 어찌 바라는 바이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제 자신을 생각하여 나아가지 못하는 첫째입니다.

일찍이 보옵건대, 정승의 업적을 남겨 놓은 이는 반드시 포용하는 아량이 있고 크게 뛰어난 재주와 지혜가 남의 4~5배나 되어 만사(萬事)의 변화를 촛불을 비추고 수를 계산하듯이 하고서야 나라의 막힌 운수를 구제하여 나라의 형세를 태산과 같이 편안케 하였습니다. 사람으로서 어찌 자기 자신을 모르겠습니까. 신의 성질이 편벽되고 막혔으며, 재주와 지혜가 얕고 짧아서 번번이 남과 불화하고 말하는 것이 시의(時宜)를 잃고 옛것에 집착되어 통하지 못해서 도움은 없고 해만 됨을 신 자신이 알고 있을 뿐만 아니오라, 국인이 모두 아는 바이며, 국인이 알 뿐만 아니오라 전하께서도 이미 신이 세상에 쓸모 없는 물건임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꼭 내세우시려고 여러 번 부르시니 신은 실로 의혹스럽습니다. 송구스러운 마음이 더욱 깊어 발은 나아가려 하여도 걸음이 저절로 물러납니다. 하물며 공자가 이르기를, ‘임금은 그 신하에 대하여 책임지우는 것이 있고 신하는 그가 한 말에 죽는 것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책임지울 가망이 없고, 신에게는 목숨을 걸 만한 말도 없습니다. 지혜는 작은데 계책은 크고, 힘은 작은데 책임은 무거워서 다리가 부러진 솥이 담긴 음식을 뒤엎는 것과 같이 남의 나라에 화를 끼치게 될 것이오니, 이것이 신이 제 자신을 생각하여 나아가지 못하는 둘째 이유입니다.

신은 시비(是非)가 서로 섞이지 않음은 마치 얼음과 숯불이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것과 같고 사정(邪正)이 서로 같이할 수 없는 것은 마치 한() 나라와 적()이 양립(兩立)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여깁니다. 지금 벼슬아치들 사이에는 시비가 혼란하고, 조정에는 오동나무와 신 대추나무를 함께 길러 혹은 역적을 보호할 생각을 하는가 하면 혹은 역적을 다스리는 것을 놀이로 하고 있습니다. 원반(?)에서 높이 행세하는 사람이 일찍이 흉적의 모사(謀士)였으며, 부정(府庭)에서 논쟁하던 자는 전에 무신년(유영경이 파면되던 해)의 전사(傳舍)에 들었던 사람으로 바야흐로 동류(同類)끼리 모였으니, 그 마음먹음이 서로 다를 것입니다. 만약 나라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면 다시 사대부가 되지 않을 자가 몇 사람인지 모릅니다. 신이 이미 그들과 반열을 같이하지 않으려 하는데 그들 또한 어찌 저를 용납하려 하겠습니까. 전하께서 비록 두루 포용하는 아량이 있어 피차가 병존(竝存)하는 정치를 하고자 하시어도 모든 양()이 음을 이기는 날에도 부호(孚號)의 경계가 있었으니, 사문(四門)이 안온(安穩)한 세상에 어찌 네 가지 죄인을 용납하겠습니까. 만약 ‘모두 다 머물러 있게 되어야 좋다.’고 한다면 이야말로 송() 나라 때 조정지설(調停之說)이 결국 나라를 그르치고 만 것과 같습니다. 신더러 그 사이에서 힘써 보라고 하시지만 어찌 조정(調停)이 되겠습니까. 남의 뒤를 따라 빌붙는 수치를 가져올 뿐입니다. 이것이 신이 사세를 헤아려 감히 나아가지 못하는 까닭의 첫째입니다.

지금 조정에서 역적을 다스리는 데 있어 신의 그릇된 소견으로는 아마도 먼저 할 것과 뒤에 할 것, 천천히 할 것과 급히 할 것의 순서를 잃어서 배를 삼킬 큰 고기를 놓치고 도마뱀을 걱정하는 격입니다.

저 흉적의 변고가 세 번 일어났는데, 그 원인이 모두 이의(?)에게 있습니다. 그것이 결국 역적의 입에서 나와 낭자(狼藉)하기 그지없습니다. 이의는 진실로 난의 장본이고, 역적의 수뇌이니, 이의가 없으면 역적이 믿을 곳이 없습니다. 곧 이의를 죽이는 것을 시급하게 여기오니, 이것이 진실로 국난을 다스리는 데 쉽게 하고, 종묘 사직을 위하여 깊이 후환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공적(公的)이고, 사사로운 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오나 이의가 어리고 철이 없으며, 선왕의 부탁이 진실로 전하의 말씀과 같다면 한결같은 마음이고, 훌륭하신 말씀이십니다.

엉금엉금 기어서 우물로 들어가는 어린애가 비록 철이 없다고는 할지라도 스스로 기어가서 떨어져 죽는 것을 그가 한 짓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밀고 끌어서 우물에 빠뜨렸다면 이것이 어찌 어린애의 죄이겠습니까. 밀고 끈 자의 죄는 묻지 않고, 어린애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그것이 무슨 이치입니까. 이의의 경우는 기어서 우물로 들어간 어린애라고는 말할 수 없고, 역적의 무리가 밀고 끌어서 우물에 빠뜨린 것입니다. 전하께서 벌써 그 정상을 통찰하시고 선왕의 생각을 먼저 하신 것은 그야말로 인정과 천리(天理)의 지극하심입니다. 만약 한결같이 훗날에 다가올 걱정을 염려하여 현재의 해야 할 바를 그르치신다면 이는 한 명의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천하를 얻는다 하더라도 하지 않는다는 것과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전해 듣건대, 역적의 입에서 거듭 나와 죄상이 드러난 역적의 무리로서 죽음을 받아야 할 자 중에 그 죄를 승복하지 않고, 혹은 국문을 받지 않은 자도 있다 하는데, 이 말이 사실이라면 조정에서 거기에 대한 청은 하지 않고 이의만 죽이는 것뿐이고, 전하께서도 급하게 이진(? 임해군)을 처단하듯이 이의를 처단하는 것이니, 이는 밀고 끌어서 우물에 넣은 자는 버려 두고 우물에 들어간 어린애를 죄주는 것입니다. 원근에서 듣고 어찌 의혹이 없겠습니까. 신은 먼저 역적의 무리를 다스리고 이의는 천천히 처리할 것을 청하는 바입니다.

신이 일찍이 신하가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는 방법은 하나뿐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계책으로 사직을 편안케 하여 충성하는 사람도 있고, 덕으로써 임금을 사랑하여 충성을 하는 이도 있으니, 맹가(孟軻)가 요순(堯舜)의 도리를 아뢰는 것을 왕을 공경하는 것으로 삼은 것이 곧 이런 뜻입니다. 성인은 인륜의 극치입니다.

신이 감히 주공(周公)의 일을 예로 들어 그릇되고 망령된 이야기를 밝히겠습니다. 주공이 삼감(三監)을 처단함에 있어 관숙(管叔)을무경(武庚)과 함께 죽이고, 채숙(蔡叔)은 가두고, 곽숙(?)은 강등(降等)하였는데, 그것은 같은 형제인데 차별을 두어 후하고 박하게 한 것이 아니라, 그 죄에 경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채숙ㆍ곽숙이 처음에 관숙의 역모에 참여하였는데도 오히려 감해 주는 법전을 베풀어 죽이지 않았습니다. 성인이 인륜의 변고를 당하여 저울로 달듯이 공평하게 잘 살핌이 이와 같았습니다. 이의가 어려 역모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주공이 채숙과 곽숙을 처벌한 것과 비교하면 이의의 죄는 무겁습니까, 가볍습니까. 전하께서 이미 역적 이진에게 죽이는 형벌을 가하지 않았사오니, 신은 진실로 전하께서 이의도 마땅히 죽이지 않으실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가두어 두라는 명이 갑자기 역적의 무리에게보다 먼저 내렸사오니, 만약 역적의 무리는 아직 모두 살아 있는데 이의가 혹시라도 잘 보호하지 못하여 먼저 죽어 형벌이 도리어 채숙ㆍ곽숙이 죽지 않은 데 비하여 무겁게 된다면 칼이나 몽둥이와 다를 것이 없사오니 전하의 마음이 어찌 괴롭지 않겠습니까. 신의 노둔(老鈍)함으로써 성덕(聖德)을 위하여 염려하면서 말하지 않음이 이 지경에 이르렀음이 조정에서 환란을 염려하는 뜻과는 서로 몹시 어긋남을 스스로 압니다. 이것이 신이 사세를 헤아려 감히 나아가지 못하는 까닭의 둘째입니다.

신이 이 두 가지의 불가함과 두 가지의 감히 하지 못할 일을 짊어지고도 묵묵히 명대로 조정에 나아간다면 스스로 몸과 마음을 저버릴 뿐 아니라, 전하의 불러 주신 뜻까지도 저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이 비록 누()가 되더라도 마음대로 지껄이기를 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이 듣자옵건대, ‘일이 쉬운 데에 있는데도 어려운 데에서 찾는다.’ 하였습니다. 임금은 세상을 구제하는 계책을 맡고 가능한 사세에 의거하였으니, 진실로 하고자 한다면 어려운 일은 없을 것인데, 하물며 쉬운 일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신이 전에,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저절로 갈라지는 것이니 갈라진 것으로부터 수습하는 것이 또한 쉽지 않겠느냐.’ 한 것은, 그 단서를 시작하기가 쉽다는 것이었습니다.

살펴보옵건대, 근래 이리저리 눈치만 보고 앉아서 성패(成敗)를 관망하면서 두 가지 마음을 품는 것이 풍습이 되었사오나, 그 중에도 충성된 마음으로 나라를 근심하고 충성을 지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의당 몇 사람은 있을 것인데, 전하께서는 어찌 그런 사람을 모르십니까. 알고 계시다면 어찌 빨리 발탁하여 혹은 정승 자리에 앉히고, 혹은 전형(銓衡)을 맡기고, 혹은 대간(臺諫)을 삼지 않으십니까. 또 그들로 하여금 각기 알고 있는 자를 천거하게 하여 여러 자리에 배치하여 간사한 의논에 흔들리지 않고, 이간으로 벌어지지 않게 하시고, 만일 사사로운 마음을 품고 도리에 맞지 않는 언행을 하는 무리가 있으면 귀양보내고 목 베어 위엄을 보이시면 덕이 높은 선비와 큰 보필자가 절로 전하 아래에 있게 될 것입니다. 이는 본래 쉽지도 않는데, 도리어 그 어려움을 위하여 소용도 없는 사람을 영해(嶺海) 사이에서 멀리 불러들이시어 공사(公私)로 하여금 모두 병들어 시국(時局)에 이로움이 없게 하시렵니까.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하였다.

 

 

□월

 

□일 정인홍(鄭仁弘)의 차자는 이러하다.

 

“아뢰옵니다. 신이 5 20일에 내린 유지(諭旨)를 삼가 받자오니, 거기에, ‘또 역적의 변고를 지척에서 만나 처리할 바를 모르겠으니 모름지기 힘써 일어나 와서 국난을 구제하라.’ 하셨는데, 신이 지극히 감격하고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신이 변변치 못하여 사람의 맨 뒤에 있고, 성질이 소루하고 어리석어 쓸 만한 학문이 없으며, 게다가 늙고 병들어 생각이 쇠퇴하여 예사로운 일신상(一身上)의 일도 한결같이 우물쭈물하여 의리에 어긋남이 열에 8~9이온데, 하물며 이 역적의 변고로 어렵고 위태로운 시기의 막대한 나라의 변고에 어찌 힘써 볼 가망이 있겠습니까. 하물며 신의 전에 아뢴 말이 모두 시의(時宜)에 맞지 않아 행해질 수 없게 된 지가 오래입니다.

설사, 기력이 조금 있어 어명대로 나아간다 하더라도 장차 있다 없다 할 것도 못 될 것입니다. 하물며 마소 같은 천한 신의 나이가 이미 근력을 쓰지 못하게 되어 원기가 다 빠지고 병이 들어 약으로써 낫기를 바라오나, 마치 허물어진 집안에서 도둑을 막는 격과 같아서 동쪽을 막으면 서쪽으로 들어오고, 서쪽을 막으면 동쪽으로 들어와서 병을 이길 수 없음을 스스로 알고, 이제는 약물을 폐지하고 다만 죽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또 첫여름부터는 음식 맛도 모르고, 보리를 볶아 죽을 쑤어 두어 숟가락 먹을 뿐이오며, 문 밖에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는 것을 이웃 마을에서만 듣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의(內醫)도 아는 바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신도 혈기가 있는 사람이온데 바야흐로 큰 역적을 다스리는 때에 어찌 몸이 초야(草野)에 있다 하여 감히 여러 사람보다 뒤처져서 부르심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겠습니까.

또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 위에 계시고, 학문이 높은 선비들이 경사(經史)에 의거하여 득실(得失)을 논하며 큰일을 처리하고, 큰 의논을 결정하오며, 의심스러운 일에도 점을 치는 거북보다도 틀리지 않는 사람들이 모두 여러 자리에 배치되어 있는데, 어찌 늙고 쇠약한 신이 뻔뻔하게 그 사이에 끼어 있겠습니까. 나라에 무익함을 알고, 신의 병이 또한 말씀드린 바와 같사와 비록 어명을 받들고자 하여도 그리 할 수가 없사오니, 오직 엎드려 대죄할 따름입니다.

몸이 이미 나아갈 수 없고, 입이 또다시 말하지 않아서 전하의 뜻을 저버린다면 신의 죄가 이에 이르러 더욱 클 것입니다. 신이 조보(朝報)를 보옵고, 또 소문을 듣자오니, 전하께서 역적을 다스림에 있어 비록 너그러운 법규에 따르시나 흡족하게 하지 않으시어 다만 역적을 고발하여도 끝내 거절하고 잡지 않는 일이 있으며, 이미 잡은 역적도 사사로운 정에 끌려 거의 놓아 주다시피 한 자와 사람에게 협박당한 후에 아뢴 것도 급히 글을 보내어 역적을 보호하고 협박하여 놓아 주게 한 것도 있으며, 역적의 주모자를 위하여 흉측한 무리들을 숨겨 두고 사람을 죽이고 빼앗은 재물을 받아 감춘 자도 있고, 역적의 괴수를 많이 기용하여 군사의 책임을 맡긴 자도 있사온데, 전하께서는 그것을 불문에 붙이고, 혹은 가벼운 견책만을 하셨다 하오니, 이것이 어떤 일이기에 이렇게 하십니까. 이것이 어찌 전하의 본뜻이겠습니까. 아마도 어떤 사론(邪論)이 사사로운 일을 공()적인 것이라 핑계 대어 전하의 총명을 가리고 나라의 존망(存亡)을 생각지 않은 것일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기축년의 역변을 보건대, 수상 노수신(盧守愼)이 역적을 칭찬한 한마디 말 때문에 벼슬을 빼앗기고 내쫓겨 죽었습니다. 한순(韓徇)ㆍ이몽학(李夢鶴)이 왕이라 칭하고 크게 내달려 올 적에, 그들을 추천하고 기용한 이가 유성룡(柳成龍)이었는데 마침내 연좌법을 쓰지 않은 것은 아마도 왜구(倭寇)가 변경을 제압하여 나라가 불행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그때의 사세가 그러했던 것이고, 그 죄에 경중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로부터 역적을 두호하는 풍습이 생겨 오늘에 이르렀고, 전하 또한 자못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역적을 구제하는 것을 죄로 삼지 않으시므로 그 기세를 믿고 의()를 소멸시켜 조금 지체가 높거나 전하와 가까운 이는 모두 정당한 형벌을 면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정권을 쥐고 계시는데 무슨 거리낄 것이 있어서 이처럼 법을 쓰십니까.

, 임금의 권한이 땅에 떨어지고, 권세 있는 사삿집의 문이 크게 열려 온 세상이 도도하게 의()는 무시하고 이익으로만 내달려 은혜를 베푼 주인이 있는 줄만 알고 임금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권세를 두려워할 줄만 알고 왕실을 존경할 줄을 모르며, 대신은 편안하면서도 충성심이 없고, 대간(臺諫)은 입이 있으나 말하지 못하오니, 위태로운 형세가 이에 이르러 더욱 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전하의 손을 한 번 들었다 놓는 데에 달려 있사온데도 살피지 않으시니, 이것이 민심이 모두 염려하는 것입니다.

공자는 이르기를, ‘화란(禍亂)을 평정하는 것을 무()라 한다.’ 하였고, 《예기(禮記)》에는 ‘난을 일으킨 형벌에는 나라에서 무거운 법을 쓴다.’ 하였으며, 《주역》에는, ‘침벌(侵伐)이 이로운 것은 읍국(邑國)을 정복하는 것이다.’ 하였으니, 평정하는 데에 무()를 쓰지 않고, 난을 일으킨 자의 형벌에 무거운 법을 쓰지 않고, 읍국(邑國)을 정벌하는 데 침벌(侵伐)을 쓰지 않고서, 고금 천하에 일을 잘 처리해 나간 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잡초를 없애되 뿌리를 뽑지 않고, 도적을 잡되 그 괴수를 잡지 않으면 탐욕스런 이리의 마음을 가지고 개 같은 행동을 하는 무리들이 두려워하고 굴복하지 않아 분노하고 원망만 깊어지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대비의 권세를 믿고 이의를 이용해서 난을 꾸며 장차 전하를 노 은공(魯隱公)으로 만들려 할 것이니 신민들의 아픔이 마음을 찌르고 뼈에 사무칩니다. 다행으로 여기는 바는 하늘이 그 모의를 친 것뿐입니다.

전하께서 평정하시는 데 무를 쓰시고, 난을 일으킨 자에게 무거운 형벌을 주며, 읍국을 정벌함에 침벌을 써서 천토(天討)를 봉행하시고, 《춘추(春秋)》에서 먼저 도당을 다스린 법을 쓰시어 주장해서 모의하고 배치한 자를 무찔러 없애 버리시어 심복들이 떨어져 나가면 어린 이의는 다만 한낱 우리 안의 불알 깐 돼지요,묘유(苗劉)가 죽은 뒤의 황자(皇子) (?)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천천히 해도 될 것이니, 전하께서는 공의(公義)를 참작하고 사은(私恩)을 생각하시어 합당한 것을 찾아서 처리하실 것이지, 또한 무엇을 기다릴 것이겠습니까. 유교 칠신(遺敎七臣)에 관한 말에 이르러서는 신이 의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선왕의 돌아가실 때의 부탁하신 뜻을 생각하시고 이의를 어루만져 기르시는데, 이의에게 사고가 없으면 자연 칠신이 보호할 필요도 없을 것이오며, 만약 자아(子雅)의 핍박과 숙단(叔段)의 죄가 있다면 칠신이 어떻게 보호하겠습니까. 반드시 군대를 동원하여 다투기를 반드시 공자(公子) ()가 제() 나라에서 한 것처럼 하고야 말 것입니다. 현명하신 선왕께서 어찌 일찍이 사려가 여기에 미치지 못하여 이런 화를 끼치는 일을 하셨겠습니까. 하물며 제왕(帝王)이 병환이 있을 적에 진실로 유언을 하고자 할 때에는 사왕(嗣王)을 나오게 하고 대신을 불러 밝고 정대하게 명하기를 청천백일같이 하는 것이니, 어찌 남몰래 쪽지를 홀로 외척의 무리들에게 주어서 유교(遺敎)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다만 선왕의 덕에 누를 끼치고 허위로 조작한 죄를 범하였으니, 칠신의 죄 또한 어찌 여기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이것 역시 전하께서 귀근(貴近 높은 지위에 있어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신하)이라 하여 너그러이 용서하여 다시 훗날의 걱정을 남긴 것이라 하겠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빨리 여러 신하 가운데서 충실하고 믿을 만한 사람들을 택하셔서 심복과 이목의 자리를 맡기시어 그들의 말과 계책을 따르시고 남의 말 때문에 그만두지 않으시어 한 번 역적을 다스리는 법을 적용하여 뿌리를 아주 끊어 버리면 지난날 나라에 몸을 바쳤던 사람이 어찌 마음을 이랬다저랬다 하며 오늘에 바치지 않겠습니까. 신의 병이 날로 심해 가오니, 목숨이 연장될 가망이 전혀 없습니다. 만약 다행히 차도가 있으면 마땅히 병든 몸을 이끌고 명을 받들어야 하겠지만, 어명을 받들고 나가는 것이 늦어질까 염려되므로 감히 구구한 신의 생각을 먼저 전하께 아뢰오니, 변변찮은 신의 말을 굽어 채택하시어 목전의 시급함을 구하시기를 불에 타고 물에 빠진 것을 구하듯이 하오면 가할까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전철(前轍)을 그대로 따라 신의 말을 그저 한 처사(處士)의 큰소리로 여기신다면 신이 비록 갈 수 있다 하더라도 ‘왕래하여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는다.’는 비방을 들을 수 있고, 결국 나라의 편안함과 위태함에 아무런 이익도 없을 터이오니, 차라리 집안에서 죽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굽어살피소서. 재결을 바랍니다.

하였다.

 

 

□월

 

□일 곽재우(郭再祐)의 상소는 이러하다.

“아뢰옵니다. 신의 나이 70에 병이 몸에서 떠나지 않아 몸은 마르고 정신은 쇠약해져서 살아 있지만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전에 부르심을 받고도 곧장 달려가지 못하여 죄가 만번 죽어 마땅하온데도 꾸지람이나 벌을 내리지 않고, 성지(聖旨)가 또 내려 바깥의 근심을 걱정하고 난을 구제하는 계책을 생각하고, 나라 일에 힘써 임하라고 분부하시오니, 감격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 올라가서 성은에 보답하는 것이 신의 직분입니다마는, 듣자옵건대, 역적이 추대한다고 말한 것 때문에 대군이 지금 여러 신하들이 죽이기를 청하는 중에 있다 합니다.

, 대군이 무슨 죄가 있기에 여러 신하들이 죽이고자 하는지 그 뜻을 신은 참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오늘날 대군에게 법을 적용해서는 안 되는 것은 전날 역적 이진에게 전은(全恩)할 수 없던 것과 같습니다. 저 역적 이진은 평소에 죄악이 가득 차 있고, 역모가 뚜렷하여 은폐하기 어려웠으며, 왕실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이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도 신하들이 감히 전은이란 말을 꺼냈습니다. 지금 대군은 나이가 겨우 여덟 살이라고 합니다. 여덟 살짜리 어린아이니 필시 역모가 무슨 일인지 몰랐을 것인데, 어찌 참여하여 알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대군에게는 털끝만큼도 죽여야 할 죄가 없음은 온 나라 인민이 모두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천지 귀신도 반드시 알고 있을 것인데, 조정에서 죽이기를 청하는 말을 합니다. 전에는 큰 죄인을 놓아 주자고 하였고, 지금은 죄 없는 이를 죽이자고 하니, 이것은 진실로 무슨 마음입니까. 신은 참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신이 듣자옵건대, 비망기에 ‘선왕의 유명(遺命)이 바로 오늘을 위해서 염려하신 것이다. 하늘에 계시는 영령이 여기에 오르내리시는데, 어찌 차마 마음을 쓰겠느냐.’ 하셨다 하오니, 위대하도다, 성명의 말씀이시여! 어질도다, 성명의 마음이시여! 이 마음을 넓히시고 이 말씀을 실천하시어 친한 이를 친하게 여기시고 백성을 사랑하시와 민심이 모두 기뻐하게 되면 국운의 무한한 발전이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울 것입니다. 온 조정의 신하들이 성상의 뜻에 순종하여 전하를 허물없는 곳으로 인도할 줄을 모르니, 신은 참으로 마음아픕니다. 이것뿐이 아닙니다. 영창대군을 죽이면 인목대비께서 반드시 참지 못하실 것입니다. 참지 못하고 혹 자결이라도 하신다면 전하께서는 천하 후세에 무슨 말로 변명을 하시겠습니까. 신은 여러 신하들이 장차 전하로 하여금 큰 불의(不義)에 빠지게 할까 두렵습니다. 만일 대군이 자라서 마음과 행실이 역적 이진과 같이 되어서 반역을 꾀하게 된다면 죄를 용서할 수 없으니 죽여도 가합니다. 그리고 역적이 추대하였다는 말이 비록 대군에게 관여된다 하더라도 만약 그 추대의 모의를 한 자가 조정에 있으면서 혹 형벌을 면하고 있다면 겨드랑이 밑의 벌이나 소매 속의 뱀이나 전갈 같아서 앞으로 다가올 화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죄가 있으면 반드시 벌을 주고 죄가 없으면 반드시 용서하소서. 죄가 있는데도 벌주지 않고, 죄가 없는데도 용서하지 않는다면 나라가 나라꼴이 아닐 것입니다. 신의 하는 말이 매양 여러 신하들과 같지 않습니다. 말이 같지 않으면 마음이 같지 않으니 마음이 같지 않으면서 서로 용납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데 어찌 나라 일을 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관직을 빨리 갈아치우시고 시골에 내치시어 평소의 뜻을 이루게 하소서. 신은 지극히 감격하고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월

 

□일 전 예빈 첨정(禮賓僉正) 정대용(鄭大容)의 상소는 이러하다.

 

“아뢰옵니다. 역적 모의는 천하의 큰 죄이고, 역적을 다스리는 것은 천하의 큰 법입니다. 이런 죄가 있는데도 그 법을 쓰지 않는다면 난역(亂逆)을 다스릴 수 없고, 윤기(倫紀)를 바로잡지 못하여 나라가 나라 구실을 못하고 마침내는 반드시 망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춘추》에 역적을 다스리는 법을 엄하게 하여 임금을 죽이기를 도모하는 자는 죽이고, 윗사람을 범하는 자도 죽였습니다. 이의(?)가 전하에게 비록 지친(至親)이면서 동기이고, 어려서 철이 없다고는 하나 그 신분으로 말하면 신하이고, 그 죄로 말하면 역적의 괴수이고, 그 몸으로 말하면 역적의 기화(奇貨)입니다. 제남(悌男)이 이의가 아니었으면 밖에서 딴생각을 내지 않았을 것이고, 저주(咀呪)도 이의가 아니었으면 안에서 죄를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남은 역적의 괴수이고, 이의는 역적 괴수의 괴수입니다. 신하로서 이런 죄를 지었는데도 혹 강화도에 옮겨 두거나, 혹은 그 몸을 성 밖에서 온전히 하고 있으니, 이것이 《춘추》의 역적을 다스리는 법이라 하겠습니까. 옮겨 두는 것이 타당하다면 10가지 죄악을 용서하지 못하는 법은 어디에 쓰시렵니까. 몸을 온전히 하고 있는 것이 타당한 일이라면 도거(刀鉅)와 정확(?) 같은 형구는 어디에 쓰는 것입니까. 전하께서 앉으신 자리는 조종(祖宗)의 왕위이오며, 전하께서 지키시는 법은 《춘추》의 법입니다. ()으로써 사()를 없애고, 사로써 은혜를 덮으시어 조종의 법으로써 처단하고 국민들의 벌로써 죽여야만 난역자가 두려워하여 명분이 정해질 것이고, 대의(大義)가 밝아질 것이요, 종묘 사직과 백성이 편안해질 것입니다.

전에 법으로 영경(永慶)과 이진에 대해서 한 번 실수하고 나서 겨우 추형(追刑)을 하였는데, 이의와 제남에게 재차 실수하여 《춘추》의 의리를 크게 무너뜨리렵니까. 국법이 한 번 문란해지면 사람들이 법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에 저주의 옥사를 공공연히 근거 없는 것이라고 한 사람이 주창하자 백 사람이 호응하여 먼 곳의 어리석은 백성들까지도 모두 의혹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니 신은 이것을 두려워합니다.

, 저주에 관한 일이 제남이 역모를 한 근본이 되었고, 그것이 이미 고성(高成)ㆍ응벽(應璧)의 공초에서 모조리 나타났으며, 상께서 날짜까지 써 내리시어 털끝만큼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도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가리키는 것은 어찌 된 일입니까. 저주를 도리어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한다면 옥사가 모두 사실이 없는 것으로 귀결이 되오니, 통탄할 일이 아닙니까. 전하께서는 왜 저주의 경위를 낱낱이 의금부에 내려서 내외에 널리 물어 보게 하시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는 불안히 여기는 마음을 굽어살피시고 재결을 내리시어 법에 의하여 이의를 처단하고, 제남을 추형(追刑)하여 역적을 다스리는 법을 엄하게 하시고, 저주의 경위를 밝혀 여러 사람들의 의심을 시원히 풀어 주시옵소서.

하였다.

옥당에서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을 목 베기를 청한 차자는 이러하다.

 

“아뢰옵니다. 《춘추》의 의리는 역적을 다스리는 것을 중히 여겨서 신하가 역적을 다스리지 못하면 도리어 시역(弑逆 임금을 죽임)의 이름을 받게 됩니다. 조돈(趙盾)이 그것이오니, 조돈이 어찌 시역에 참여하였겠습니까. 그 사람이 임금을 죽였다고 특별히 쓴 것은 역적을 다스리지 않는 것은 역적과 같기 때문입니다. 덕형이 역적을 두둔한 것은 조돈보다 심합니다. 영경을 천거하여 역모를 하게 하고, 영경과 어울려서 전하의 성명(聖明)을 가리고 삼사(三司)가 직언하자 스스로 그 죄악을 숨기고 전은(全恩)을 주장하여 이진을 순화군(順和君)에 비유하고, 영경을 너그러이 다루어 권간(權奸)이라 하였으며, 영경을 높여 상신(相臣)이라 하고, 역적 정협(鄭俠)을 가리켜 현실에 어둡다 하였습니다. 오늘에 와서 제남과 이의는 만고를 통해 봐 도 없던 역적인데 여덟 살에 해당하는 형벌로써 그의 열 가지 죄악을 용서할 것을 차자로 올리니, 진실로 전하의 신하로서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어야 한다는 의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어찌 감히 이런 말을 꺼낼 수가 있겠습니까. 비록 차자로 그런 말을 꺼낸다 하더라도 전하를 두려워하고, 공의(公議)를 두려워한다면 감히 못할 것입니다. 신하로서 임금을 업신여기고 공의를 멸시한 뒤에라야 그런 말을 하였을 것입니다. 신하로서 임금을 업신여기고 공의를 멸시한다면 무엇인들 못 할 짓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신들의 큰 걱정입니다.

역적을 두둔하는 덕형의 마음을 길 가는 사람도 아는 터요, 정청(庭請)하는 데 이르러서도 전은(全恩)이라는 말을 되풀이하고, 법을 집행하라는 논의를 극구 배척하여 청하다가 멈추고, 멈춘 뒤에 이의를 옮겨 두기를 청하고는 또 멈추어 그럭저럭 남의 일처럼 책임을 때웠습니다. , ‘어머니를 원수로 여긴다.’느니, ‘어머니의 도리를 끊는다.’느니 하는 군말로써 임금을 모함하고 대중을 현혹하여 성균관과 사학(四學)이 팔방에 통문하게 하여 조정에 이런 일이 참으로 있는 것처럼 만들고, 함부로 글을 올려 그 죄를 면하려고 비유해서는 안 되는 무신년의 일을 인용하고, 말할 수 없는무원(撫院)의 말을 빌려, ‘반드시 화근을 제거하려면 어찌 편법(便法)이 없겠느냐.’느니, ‘어지러운 시기를 이용하여 힘으로 겨루어 지위를 취한다.’느니 한 말은 글자마다 음흉합니다. 또 역적 이의는 ‘절대로 뒷걱정이 없다.’느니, ‘여러 재신(宰臣)들과 다른 의논에 구차하게 찬동할 수 없다.’느니 한 것은 신하로서 할 말이 아닙니다. 전하를 지척(咫尺)에서 우롱하고 놀라게 하고, 협박하고 역적을 두호하기를 못 하는 짓이 없사오니, 조돈(趙盾)에게도 없던 죄입니다. 신들의 한 권 《춘추》에 부월(?)이 삼엄한데, 덕형이 역적을 두둔하고 임금을 협박하는 죄를 보오니 마음이 아프고 뼈가 저리어 말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 덕형의 기세가 미치는 곳에 지위를 잃을까 걱정하는 사람은 두려워서 말하지 않고, 그에게 천거되어 은혜에 감격한 자는 다투어 피하여 그에 대한 절개를 지키니, 전하께서 비록 덕형의 죄를 듣고자 하셔도 어찌 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말을 꺼내면 화가 미칠 것을 본래부터 알면서도 임금을 사랑하는 구구한 정성이 차라리 덕형의 손에 죽을지언정 차마 전하를 저버리고서 죽을 수는 없습니다.

, 개나 말은 기르면 주인을 그리워하는 정성이 있지마는 뱀이나 전갈을 기르면 도리어 물릴 걱정이 있는 법입니다. 기르는 것은 마찬가지지마는 그 갚는 것이 다른 것은 기르는 것을 잘못 택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요()임금의 덕은 하늘과 땅의 만물을 함육(涵育)하였지마는 사흉(四凶)이 죄를 저질렀으며, 한 고조(漢高祖)는 밥상을 밀어 주고 옷을 벗어 입혀 주기까지 하였는데도 회음후(淮陰侯)는 마침내 배반하였으며, 고황제(高皇帝)는 신하들을 예로 대접하였으나 유용(惟庸)이 역모를 하였습니다. 소인의 성질은 너그럽게 대해 주면 교만해지고, 교만해지면 무례해지고, 무례해지면 상관을 범하는 것은 진실로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은혜를 알고 소인은 덕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아비와 아들에게 벼슬을 주어 전하의 덕형에 대한 대우가 매우 두터웠는데 역적을 두둔하고 임금을 위협하여 전하에 대한 덕형의 보답은 너무도 박합니다. 이렇게 불충하고서도 어찌 그 목을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조돈을 죄준 《춘추》의 의리를 취하시어 쾌히 공론에 따르시어 그 죄를 처벌하여 신하로서의 부도(不道)한 죄악을 응징하소서. 재결을 바랍니다.

하였다.

백사 선생(白沙先生 이항복)이 지은 한음(漢陰) 이공(李公)의 묘지(墓誌)는 이러하다.

 

“선조가 승하하고 금상(今上 광해를 지칭)이 즉위하였는데, 임해군의 옥사를 당하여 임금이 이진(?)을 처리하는 데 알맞는 방법을 물으시기에 나의 의견은, 의당 전은(全恩)하여 죽음에 이르지 않게 해야 한다고 하였더니, 조정에서 보는 이가 놀라 서로들 돌아보았으나, 명보(明甫 한음 이덕형의 자)가 ‘나도 같은 사연이다.’고 말하였다. 그것을 낭관(郞官)이 와서 알리기에, 내가 놀라서, ‘영상이 미처 끝부분의 말을 살피지 아니하고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여 가서 다시 품의(稟議)케 하였더니, 명보가 웃으면서 ‘아무튼 내 이름을 써라.’ 하고, 태연하게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얼마 안 가서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대사헌으로서 또한 이 의논을 소로 아뢰고, 이완평(李完平 이원익(李元翼))이 차자로 간략하게 이것을 언급하자, 그때 논의하는 이들이 역적을 두둔하는 것이라고 어지러이 공격하여 사태가 장차 헤아릴 수 없게 되었으나 임금이 양쪽의 의논이 다 옳다고 하여 모두 정지시켰으므로 조정의 의논이 드디어 갈라져서 법대로 집행해야 한다는 쪽과 전은(全恩)하라는 쪽의 이견(異見)이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더욱 심하게 되었다.

하였고,

 

“임자년(광해군 4, 1612) 봄에 황해도의 역옥(逆獄)이 일어나고, 계축년에 이르러서는 응서(應犀)의 옥사가 잇달아 일어났는데, 일이 대궐 안에까지 관련되어 임자년의 옥사보다 더욱 심하였다. 상이 해를 거듭하여 날마다 친국(親鞫 친히 심문하는 것)할 적에 털끝 이상의 일이면 유사(有司)에게 맡기고 잘 묻는 적이 없는데, 참소하는 말들이 얽히고설키어 일이 지극히 곤란하여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명보가 수상이고, 내가 좌상으로서 날마다 국청(鞫廳)에서 임금을 모셨는데, 명보는 공정하게 처리하여 좀처럼 순순히 영합(迎合)하지 않았다. 특히 삼사(三司)가 번갈아 가며 글을 올려 영창(永昌)을 죽이기를 청하고, 또 삼공(三公)이 백관을 거느리고 가서 간하게 하려고 하였다.

하루는 임금이 들어와 옷을 갈아입는데 양사의 장관이 대궐에서 큰소리치기를 ‘조정의 논의가 대신이 즉시 복합(伏閤 큰일이 있을 적에 조신 또는 유생이 대궐 문에 엎드려 상소하는 것)하지 않음을 허물로 여기니, 감히 알리지 않을 수 없다.’ 하기에, 내가 밖으로 나가니, 명보도 따라 물러나오면서 묻기를, ‘조정의 논의가 이러하니, 화가 대신에게 먼저 미칠 것인데 그대는 어떻게 하려는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내 생각은 무신년의 논의에 따르겠다.’ 하니, 명보가 ‘그렇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기에, 내가 ‘그대가 수상으로서 마땅히 이 논의를 결단하여야 할 것이다. 만약 영창을 대궐 밖에 내치게 한다면 나는 마땅히 고개를 숙여 그 논의에 따를 것이나, 만약 삼사의 논의처럼 반드시 전인(甸人)에게 목 졸려 죽게 한다면 이의(異議)를 내세우지 않을 수 없다. 죽고 삶은 명()에 달린 것이다.’ 하였더니, 명보가 웃으면서 ‘내 생각도 그렇소.’ 하였다. 이튿날 백관이 복합할 때에 명보가 영창을 대궐 밖에 내치게 하자는 것으로 말하였다. 며칠 있다가 어떤 권신이 말하기를, ‘조정의 의논은 처형하게 하고자 하는데 대신의 계사(啓辭)는 다만 내치기만 하자고 청하였으니, 그것은 백관들의 종묘 사직을 위하는 뜻이 아니다.’ 하여, 말이 아주 거칠었으나, 명보가 웃으면서 ‘이미 여러 사람의 의견을 알았소.’ 하고, 계사를 쓰게 되어서는 전의 의견을 고집하고 바꾸지 않았다.

이튿날 그 사람은 병을 핑계 대고 오지 않으며, ‘대신과는 구차하게 의견을 같이할 수 없다.’ 하니, 명보가 듣고 웃으면서, ‘오지 않아? 사람은 각기 소견이 있으니 제 마음대로 하라.’ 하였다.

옥사를 날마다 아뢰는데, 외부에서는 혹 전하기를 장차 모후(母后)를 폐하려 한다고 하며, 정조(鄭造)ㆍ윤인(?)이 대관으로 피혐할 적에 앞장서서 이 논의를 꺼내었다. 내가 명보에게 말하기를, ‘나는 죽을 곳을 얻었소. 요즈음 사람들이 고집하여 위를 속이고 또한 아래를 위협하는 것이 세 가지 말이 있는데, 첫째는 의리가 분명하지 못하다는 것인데, 나도 의리가 분명하지 못하다고 말하오. 둘째는 역적을 다스림이 엄하지 않다는 것인데, 나도 역적을 다스림이 엄하지 않다고 말하오. 셋째는 역적의 무리를 비호한다는 것인데, 나도 역적의 무리를 비호한다고 말하겠으나, 말하는 뜻이 다를 뿐이오. 그들이 이른바 역적이라는 것은 아직 그 역적질하는 진상을 보지 못하였으니 감히 엄하게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오. 죄주자는 의논에 이르러서는 그 사연이 또한 우물쭈물하오. 진실로 역적인데 유사(有司)가 이러하다면 의리가 과연 분명치 못하오. 이제 신하로서 임금의 어머니를 폐한다는 것은 참으로 역신(逆臣)이오. 역모의 진상을 참으로 안다면 토죄하는 데 있어 어찌 감히 엄하지 않겠으며, 당파를 어찌 감히 두둔할 수 있겠소.

전날 영창을 위하여 죽었다면 용기를 손상한 것이고, 오늘 모후를 위하여 죽지 않으면 의리를 손상하게 되니, 부끄럽게도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정조와 윤인의 은폐한 바가 되어서 천하에 누명을 짊어지게 하겠소.’ 하였더니, 명보가 말하기를, ‘우리 두 사람이 같이 나아가서 먼저 전하께 효성을 극진히 하여 대비를 위로하라는 뜻을 되풀이하여 아뢰어서 상이 깨닫기를 기다려서 대관의 무도함을 말하되 남김없이 힘껏 쳐부수는 것이 좋겠소.’ 하기에, 나는 ‘그렇지 않소. 우리들의 계사가 반도 끝나기 전에 전하께서 진노하고 대관이 서로 공격하면 사세가 그들과 겨루기 어려울 것이오. 대관이 이미 《춘추》를 잘못 인용해서 전하의 총명을 현혹케 하였으니, 이 일을 반드시 대신에게 물을 것이오. 내가 《춘추》를 대강 익혔으므로 마땅히 경전을 인용하고 그 뜻에 의거하여 단락마다 쳐부수겠소. 이제 이미 복안(腹案)이 섰으니 혹은 헌의(獻議)하는 자리에서, 혹은 차자를 올려서 영창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뜻을 여쭈어야 하겠소.’ 하였더니, 명보가 ‘그 초안을 한 번 나에게 보이라.’ 하였다.

이튿날 대궐에 나아갔더니, 명보가 나에게 귓속말로 말하기를, ‘이 일을 어떻게 며칠을 참고 기다리겠소. 내 속이 타는 듯하니, 오늘 입계(入啓)하는 것이 어떻겠소.’ 하기에, 내가 ‘안 된다.’ 하고, 인하여 초안을 잡은 것을 보였더니, 명보가 기뻐하면서, ‘매우 잘 되었네.’ 하였다. 이틀을 지나 양사(兩司)가 먼저 나를 탄핵하였으므로 나는 동강(東江)에서 대죄(待罪)하였다. 내가 조정을 떠난 뒤부터 명보는 더욱 믿고 의지할 곳이 없어 허전해하였다. 나라 일을 돌보고, 성덕에 누가 미칠까 걱정하여 매양 집으로 돌아와서는 지붕을 쳐다보고 눈물을 머금었다. 밥을 물리치고 먹지 않았으며, 오직 찬 술을 찾아 마음을 달랬을 뿐이다. 김제남(金悌男)이 국구로서 사사(賜死)되자 부음(訃音)을 알리느냐 알리지 않느냐라는 논의가 한창일 때, 명보가《 춘추》의 ‘자식이 어머니를 원수로 삼거나, 어머니와의 인연을 끊는 일이 없다.’는 등의 말을 인용하여 의논하였으므로 당시의 의논이 매우 놀랍게 여겼다. 얼마 안 가서 상이 또 정청(庭請)을 허락하여 영창을 대궐 밖에 내다 두게 하였는데, 의논하는 자가 또 법으로 처벌하자고 한 것은 우리들의 처음 의논이 이 정도로 그치자고 한 것을 몰랐던 것이고, 또 명보가 우뚝이 서서 흔들기 어려운 것을 알지 못하고 화복으로 움직일 수 있다 하여 앞장서서 주창하기를 재촉하게 되자, 명보가 차자를 올려 그의 뜻을 표시하니 여론이 흉흉하여 전에 거칠게 굴던 사람들이 이것을 가지고 그를 제거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한두 신진(新進)이 그 뜻을 받아 옥당에서 팔을 걷어붙이고 법대로 처벌하라는 의논을 주창하고, 삼사가 찬동하여 거센 정쟁(庭爭)이 달이 넘도록 그치지 않았으나 상은 다만 삭직(削職)을 명하였을 뿐이었다.

또 말하기를,

 

“이제 와서 크게 한 되는 일은 모후를 폐하려는 논의가 일어나매 명보는 급히 공격하려는 것을 나는 때를 기다리자고 하여 결국 나의 의견에 따랐으나, 내가 먼저 패하여 물러나니 명보가 고립되어 할 말을 다하지 못하고 그대로 쓸쓸하게 죽어서 뒤의 지사들로 하여금 천고에 눈물을 흘리게 한 것이니, 내가 명보를 그르침이 많았도다.

하였다.

 

 

[D-001](?) 나라로 피하였다 : 《춘추》에 “부인 강씨(姜氏)가 주(? 노 나라의 이웃 나라) 나라로 피()하였다.”는 대목이 있는데, 이것은 노 나라 임금의 어머니 강씨가 죄를 짓고 주 나라로 쫓겨간 것을 기록한 것이다.

[D-002]태후(太后)를 이궁(離宮)으로 옮겼다 : 태후는 당 고종(唐高宗)의 왕비 무후(武后)를 말함. 무후가 집정한 말기에 조정의 법이 문란해지자, 장간지(張柬之) 등이 무후를 협박하여 중종(中宗)에게 선위(禪位)하게 하고 무후는 이궁(離宮)으로 옮겼음.

[D-003]호안국(胡安國) : 송 고종(宋高宗) 때의 학자. 《춘추》를 해석한 책에 《좌전(左傳)》ㆍ《공양전(公羊傳)》ㆍ《곡량전(穀梁傳)》과 아울러 호안국의 《춘추전(春秋傳)》이 있다. 이 《춘추전》을 《호씨춘추(胡氏春秋), 또는 《호전(胡傳)》이라고도 한다.

[D-004]고수(??) : 순임금의 아버지로 어리석어 선악을 판단하지 못하였으므로 아들 순을 죽이려 하였다. 고수는 장님으로, 순 같은 아들을 몰라 보았다 하여 이런 별명이 붙여졌다고도 하고, 진짜 장님이었다고도 한다.

[D-005]경권(經權) : ()은 정상적인 도이고, ()은 임시로 변통하는 도로, 예를 들면 남녀간에 직접 손을 잡지 않는 것은 경이고, 형수나 제수가 물에 빠졌을 때에 시숙(媤叔)이 손으로 건져 내는 것은 권이다. 여기에서는 임금과 대비가 딴 궁에 별거하는 것을 권이라 하였다.

[D-006]간통(簡通) : 사헌부나 사간원의 관원이 자기의 뜻을 글로 써서 서로 통함.

[D-007]완석(完席) : 사헌부 관원들이 집무를 할 때에 죽 둘러앉아서 의논하는 자리.

[D-008]애강(哀姜) : 춘추(春秋) 때 노 장공(魯莊公)의 부인이며, 민공(閔公)의 적모(嫡母)로 음란한 행실이 있었고, 민공을 죽이는 데 참여하였다.

[D-009]삼종지도(三從之道) : 봉건 시대 여자가 따라야 할 세가지 도리로 어려서는 아버지를, 시집가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후에는 자식을 좇으라는 것.

[D-010]목욕하고 토죄하기를 청한 것 : 공자가 노 애공(魯哀公)에게 제() 나라에 일어난 역적을 치기를 청하기 위해 목욕을 하고 간 일이 있었다.

[D-011]창고를 고치고 …… 나왔으며 : 고수(??)가 순()에게 창고 지붕을 고치게 하고서는 사다리를 치우고 불을 질렀고, 또 우물을 파게 하고서는 위에서 묻어 버렸는데, 순은 모두 꾀를 써서 삿갓으로 가리고서 뛰어내렸으며, 우물 속에 미리 숨을 구멍을 뚫어 놓고서 그 구멍으로 피해 살아온 일이 있었다.

[D-012]제음(濟陰) : () 나라의 왕자 제음왕(濟陰王)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역적들의 추대를 받은 일이 있었다.

[D-013]자식은 …… 있습니다 : 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말하기를, “우리 동네에 정직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양을 훔친 것을 관가에서 증언하였습니다.” 하였더니, 공자가 답하기를, “자식은 아버지를 위하여 나쁜 일을 숨겨 주고, 아버지는 자식을 위하여 숨겨 주는 가운데에 정직함이 있다.” 하였다.

[D-014]구법(九法) : 〈홍범(洪範)〉의 구주(九疇)를 말함. () 나라 때에 대사마(大司馬)가 천하를 다스리기 위하여 만든 구법도 있다.

[D-015]무신년의 화 : 선조 41(1608)에 유영경(柳永慶) 등이 광해군(光海君) 대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세자로 옹립하려던 일.

[D-016]반측(反側) : 불안히 여기는 것. 한 나라 광무제(光武帝)가 왕낭(王郞)의 난을 평정한 뒤에 왕낭과 내통한 자들의 문서를 불사르며, “불안히 여기는 자로 하여금 안심케 한다.” 하였다.

[D-017]귀역(?) : 귀신과 물여우로 음흉한 사람을 가리킨다. 물여우는 귀신과 같이 그 정체를 볼 수가 없는데, 모래를 물고 있다가 물에 비치는 사람의 그림자에 뿌리면 그 사람이 병에 걸린다고 한다.

[D-018]머리털을 …… 불을 끄듯이 : 남의 집에 난 불을 끌 때에 앞장서서 끄다가 머리가 타고 이마를 덴 사람이 가장 대접을 받는다는 옛말이 있다.

[D-019]순임금이 상()을 처리하듯이 : ()은 순()의 이복 동생인데, 그가 부모와 함께 갖은 방법으로 순을 죽이려 하였으나, 순은 우애의 정을 다하여 감화시켰음.

[D-020]주공(周公)이 …… 죄주듯이 : 삼숙(三叔)은 주 무왕(周武王)의 아우 관숙(管叔)ㆍ채숙(蔡叔)ㆍ곽숙(?)을 말함. 주 성왕(周成王)이 나이가 어리므로 주공이 섭정할 때에 그의 형 관숙ㆍ채숙ㆍ곽숙이 “공이 장차 성왕에게 이롭지 못하리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반역하였으므로, 주공이 황공하여 동도(東都)로 피하였다. 성왕이 주공을 다시 맞아들여서 관숙 등을 잡아서 죽였다.

[D-021]한 혜제(漢惠帝)가 …… 어루만지듯이 : 여의(如意)는 한 고조(漢高祖)의 후궁 소생이다. 고조는 그를 사랑하여 태자를 폐하고 여의를 태자로 삼으려 하였으나 여후(呂后)가 장량(張良)의 꾀를 써서 중지시켰는데, 태자가 혜제(惠帝)로 즉위하여 여의를 잘 달래었다.

[D-022]문제(文帝)가 …… 꾸짖듯이 : 문제는 한 나라 3대 황제로, 그 아우 회남왕 장(淮南王張)이 반역하자 귀양보냈더니 장이 자살하였다.

[D-023]사흉(四凶) : 순임금 때의 네 악인(惡人) 공공(共工)ㆍ삼묘(三苗)ㆍ환도(驩兜)ㆍ곤(?)을 말함.

[D-024]주역(周易) …… 정벌하는 것이다 : 《주역(周易) 64괘의 하나인 지산겸(地山謙) 괘로, “높은 산이 낮은 땅 아래에 있으니 겸손하다. 부귀(富貴)하면서도 겸손하니, 많은 사람이 심복한다. 그러나 복종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정벌함이 좋다.” 하였다.

[D-025]순임금은 …… 거문고를 타고 있던 것 : 순의 아버지 고수가 순에게 창고의 지붕을 고치라고 하고서는 사다리를 치우고 불을 질렀다. 또 우물을 파게 하고서는 위에서 묻어 버리기도 하였는데 순이 모두 꾀를 써서 피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모르는 아우 상()은 “형을 묻어 버린 것은 내 공적이다. 형의 방패와 창, 거문고와 활은 내가 가지겠다.” 하고 순의 집에 가 보니, 순이 평상에서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

[D-026]광무제(光武帝)가 …… 폐하였는데 : 여후는 한 고조(漢高祖)의 황후로, 고조가 죽은 뒤에 여주(女主)로 집권하여 여씨(呂氏) 일족을 왕으로 봉하고 유씨(劉氏)의 한 나라를 위태롭게 한 ‘여씨의 난’을 일으켰다. 수백 년 뒤에 광무제가 후한(後漢)을 일으켜 한 나라의 사직을 회복한 뒤에 여후를 폐하였다.

[D-027]두헌(竇憲) : 후한 장제(章帝)의 황후 두 태후(竇太后)의 오라비로, 장제가 죽은 뒤에 두후가 정치를 하게 되자 시중(侍中)으로 권세를 잡고, 흉노(匈奴)를 토벌하여 공을 세운 뒤에는 천하에 견줄 수 없는 권세가로 드디어 황제까지 암살하려다가 발각되어 일족이 멸망하였다.

[D-028]서리를 밟는 : 서리를 밟는다는 것은 장차 얼음이 어는 추운 겨울이 닥친다는 뜻이니, 앞으로의 위험을 경계하라는 말이다.

[D-029]장방창(張邦昌)이 …… 왕노릇을 한 : () 나라 군사가 쳐들어와서 송 휘종(徽宗)ㆍ흠종(欽宗) 두 황제를 잡아가고, 송 나라 신하 장방창을 왕으로 세우고 갔다. 뒤에 장방창이 자진 사퇴하였으나, 남송(南宋)의 이강(李綱)이 그 동안에 장방창이 황제 노릇한 죄를 추궁하였으나 임금은 나무라지 않았다.

[D-030]간통(簡通) : 사헌부나 사간원의 벼슬아치가 서면으로 서로의 의견을 통함.

[D-031]오현신(五賢臣) : 조선조의 다섯 현신(賢臣). 즉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

[D-032]하늘을 쏘려고 : 은왕(殷王) 무을(武乙)이 가죽 주머니에 피를 담아 공중에 달고 활로 그것을 쏘아서 하늘을 욕되게 한 고사에서 나온 말로, 여기에서는 김제남이 임금을 욕되게 한다는 뜻이다.

[D-033]십악(十惡) : 사람의 가장 큰 10개의 죄악으로, 모반(謀反), 모대역(謀大逆), 모반(謀叛), 악역(惡逆), 부도(不道), 대불경(大不敬), 불효(不孝), 불목(不睦), 불의(不義), 내란(內亂)이다.

[D-034]엄일괴(嚴一魁) …… 치욕 : 광해군(光海君)이 제2왕자로 선조(宣祖)의 후계자가 된 것이 무슨 이유냐고 명 나라에서 묻자 제1왕자인 임해군이 정신 이상이라 왕위에 오를 수 없어서라고 대답하였더니, 명 나라에서 사실을 조사하기 위하여 엄일괴(嚴一魁)ㆍ만애민(萬愛民)두 차관(差官)을 보내 와서 임해군을 면대했는데, 임해군은 거짓 미친 척까지 하였다.

[D-035]장준(張俊)의 철탑(鐵塔) : 미상.

[D-036]육지(陸贄)의 …… 방비한다는 경계 : 육지(陸贄)는 당 덕종(唐德宗) 때의 유명한 정승인데, 그의 말 중에 여우처럼 의심이 많아서 지나치게 방비한 것을 경계한 말이 있다.

[D-037]주운(朱雲) : 한 성제(漢成帝) 때의 충신으로 임금에게 “상방검(尙方劍)을 빌려 주시면 아첨하는 신하 장우(張禹)의 목을 베겠습니다.” 하였다.

[D-038]곡량자(穀梁子) : 춘추(春秋) () 나라 사람 곡량적(穀梁赤)으로,《춘추》〈곡량전(穀梁傳)〉을 지음.

[D-039]두예(杜預) : () 나라 때의 학자로 《좌전(左傳)》에 능통하며, 《춘추좌씨경전집해(春秋左氏經傳集解)》를 지었다.

[D-040]한 자의 베와 …… 노래 : 한 문제가 형제간에 불화한 것을 조롱한 노래로, 《한서(漢書)》에, “한 자의 베도 기울 수 있고, 한 말 곡식도 찧어 먹을 수 있건마는, 형제 두 사람은 서로 용납하지 못하네[一尺布尙可縫 一斗粟尙可? 兄弟二人 不能相容].” 하였다.

[D-041]영경이 모위(謀危)한 것 : 선조(宣祖)가 만년에는 광해군을 싫어하고 늦게 낳은 아들 영창대군을 지극히 사랑하였는데, 그것을 안 유영경이 영합(迎合)하여 광해군의 왕세자 지위를 바꾸려고 음모한 것을 말한다.

[D-042]우산(宇山)의 바람 : 미상.

[D-043]수선(首善)하는 곳 : 선을 숭상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여기에서는 성균관을 가리킨다.

[D-044]() 나라와 …… 못하는 것 : ()은 촉한(蜀漢), ()은 조조(曹操)를 말함. 제갈량(諸葛亮)의 〈후출사표(後出師表)〉에, “선제(先帝)가 한()과 적()이 양립(兩立)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 [先帝慮漢賊不兩立]”라고 하였다.

[D-045]원반(?) : (?)은 차례 있게 날아다니는 새이므로 조정 관원의 반열(班列)을 원반이라 한다.

[D-046]모든 양()이 …… 부호(孚號)의 경계 : 군자들이 아무리 득세한 때라도 언제나 주의해야 한다는 뜻. 《주역》 〈쾌괘(?)〉에 “군자들이 조정에 나타나게 된 시기라도 항상 믿음으로 호령하여 경계함이 있게 할 것이다[揚于王庭孚號有?].”하였다.

[D-047]조정지설(調停之說) : 송 영종(宋英宗) 때 여대방(呂大防)ㆍ유지(劉摯)가 원풍(元豊 송신종(宋神宗)의 연호)의 당인(黨人)을 등용하여 옛날 원한을 풀게 하려 하였음. 조정(調停)은 중간에서 화해를 붙이는 것.

[D-048]낭자(狼藉) : 이리가 풀을 깔고 자고 난 뒤의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모양이라는 뜻으로, 어지럽게 흩어져 있어 어수선한 모양을 말한다.

[D-049]삼감(三監) : 세 감시인(監視人)으로, 즉 관숙(管叔)ㆍ채숙(蔡叔)ㆍ곽숙(?). 20) 참조.

[D-050]무경(武庚) : ()의 주왕(紂王)의 아들로, 주 무왕(周武王)이 그에게 은()의 유민(遺民)을 다스리게 하고 관숙ㆍ채숙ㆍ곽숙으로 하여금 감시하게 하였는데, 무왕이 죽은 뒤에 관숙 등과 공모하여 난을 일으키므로 주공이 관숙과 함께 죽였음.

[D-051]잘 보호하지 못하여 …… 없사오니 : 잘 보호하지 못해서 죽게 된다면 죽었다는 측면에서는 칼로 찌르거나 몽둥이로 쳐서 죽인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뜻임.

[D-052]천토(天討) : 하늘이 악인을 치는 것인데, 전해서 덕이 있는 사람, 즉 임금이 하늘을 대신하여 행하는 정벌.

[D-053]묘유(苗劉) : 묘유(苗劉)는 남송(南宋) 첫째 황제인 고종(高宗) 때의 황제 친위대(親衛隊)의 대장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고종을 퇴위하게 하고 일곱 살 난 고종의 아들 유(?)를 황제로 추대하였는데, 뒤에 실패하여 처형당한 자로 두 사람의 성이다. 어린 황자 유도 처형당했는데, 그것은 황제의 의사가 아니고, 그 신하들의 뜻이었다.

[D-054]유교 칠신(遺敎七臣) : 선조(宣祖)가 죽을 때에 어린 아들 영창대군 이의를 잘 보살피라고 허욱(許頊)ㆍ한응인(韓應寅)ㆍ신흠(申欽)ㆍ박동량(朴東亮)ㆍ허성(許筬)ㆍ서성(?)ㆍ한준겸(韓浚謙) 7인에게 유서를 써서 부탁하였다. 그것을 고명 칠신(顧命七臣)이라고도 한다.

[D-055]자아(子雅)의 핍박과 숙단(叔段)의 죄 : 자아ㆍ숙단은 모두 춘추 때의 제후(諸侯)의 친족으로 반역하다가 죽은 사람들이다.

[D-056]공자(公子) () : () 나라의 공자(公子)들이 망명할 적에, 관중(管仲)이 공자 규()를 모시고 망명하였다가 돌아올 때, 환공(桓公)과 공자 규가 서로 먼저 들어오기를 다투다가 규가 패하여 죽었다.

[D-057]무원(撫院) : () 나라 지방 관청 이름으로, 순무사(巡撫使)라는 대관이 있는 곳이다. 여기서는 요령 순무사(遼寧巡撫使)로서 우리 나라의 내정을 간섭하였음을 말한다.

[D-058]부월(?) : 형구로서 작은 도끼와 큰 도끼이다. 옛날 임금이 대장이나 제후(諸侯)에게 생살권(生殺權)의 상징으로 주었다.

[D-059]사흉(四凶) : 순임금 때의 네 악인(惡人)공공(共工)ㆍ삼묘(三苗)ㆍ환도(驩兜)ㆍ곤()을 말함.

[D-060]회음후(淮陰侯) : 한 고조(漢高祖) 때의 명장 한신(韓信)

[D-061]유용(惟傭) : 명 태조(明太祖) 때의 정승 호유용(胡惟庸)으로, 정승이 된 후에 왜인을 불러들이고 원()의 후예와 연합하여 난을 모의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죽었음.

[D-062]전인(甸人) : 교야(郊野)를 맡은 관원. 《예기(禮記)》 〈문왕세자편(文王世子篇)〉에, “공족(公族)에게 사죄(死罪)가 있으면 전인(甸人)에게 목 졸려 죽게 한다[公族其有死罪則磬于甸人].” 하였음.

출처 : ▒ 한 산 草 堂 ▒
글쓴이 : 천하한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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