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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대동야승 상촌잡록(象村雜錄) -신흠(申欽) -

장안봉(微山) 2013. 5. 28. 22:57

상촌잡록(象村雜錄) 

 

 

신흠(申欽) ()

김진양(金震陽)은 고려(高麗) 충신이다. 그가 정도전(鄭道傳)을 논한 소()에 말하기를, “형벌을 베풀고, 죄가 본래 없는 사람에게 죄를 씌웠습니다.”하였는데, 형벌을 베풀지 않을 곳에 베풀었다는 것은 우()와 창()의 부자(父子)를 가리킨 것이고, 본래 죄 없는 사람에게 죄를 씌웠다는 것은 목은(牧隱)과 여러 대부(大夫)들을 가리켜서 한 말이다. 만일 정도전이 형벌을 바로잡았다면 고려의 운수가 그렇게 빨리 망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가 들어가도 궁중에 머물러 두었다가 신하가 합문을 두드린 뒤에야 겨우 조정에 내보냈고, 그것을 또 이내 들여왔으니, 이것을 보면 사람으로 하여금 기막히게 한다.

○ 고려 말년의 여러 어진 이가 화를 입은 것이 몇 가지 까닭이 있으니, 하나는 목은을 가리킨 것이고, 하나는 중국에서 다른 성()을 임금으로 세웠다고 말한 것이다. 창을 세운 것은 당연한 일이니, 진실로 대신(大臣)의 도리이다. 중국에서 말한 것은 실상 중국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때 벌써 두 마음을 가진 자가 만들어 낸 것일 것이다.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화답해서 마치 귀신의 말과 같았으나, 일이 폐립(廢立)에 관계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해서 함정을 만드는 참혹함이 이때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다. 이는 비록 천명(天命)이 돌아갈 곳이 있어서 권간(權奸)의 손을 빌려서 성조(聖祖)의 운수를 열어 준 것이라 하지만, 그 당시 충신과 현사(賢士)가 모함을 받은 것은 지사(志士)들의 눈물을 흐르게 하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 권근(權近)은 고려 말년의 이름난 대부(大夫)이다. 그가 죄를 입은 것은 하나는 목은(牧隱) 때문이고, 하나는 도은(陶隱) 때문이니, 진실로 당시에 그가 유방(流放)당하는 것을 편안히 여겼다면 그 문장과 명론(名論)이 어찌 두 공()만 못했으리요. 그러나 계룡송(鷄龍頌) 한 편으로 갑자기 개국(開國)의 총신(寵臣)이 되었으니, 슬프도다! 그가 항복한 뒤에도 벼슬이 삼사(三司)에 지나지 못했고, 나이는 육순(六旬)도 도리지 못했으니 얻은 것이 적었다. 그때 권근을 기롱하는 시()가 있었으니,

 

 

대낮에 양촌이 의리를 말하고 있으니 / 白晝陽村談義理

세간에 어느 대인들 어진 이가 없으리 / 世間何代更無賢

 

하였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오직 그 자손들이 계승하여 조정에 벼슬하는 이가 끊어지지 않았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전보다 낫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모두, “양촌(陽村) 양촌”하며 마치 덕행(德行)이 있었던 것처럼 하니, 심하도다. 그 이름을 도둑질함이.

○ 정도전(鄭道傳)은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과 함께 목은(牧隱)에게 배워 재주와 명망이 서로 비슷했으나 향방(向方)이 달라서 정도전이 항상 불평을 품었다. 태조(太祖)가 등극하자 정도전이 권력을 쥔 신하가 되어 자기의 사인(私人) 황거정(黃居正)을 도은이 귀양가 있는 고을의 원으로 보내서 도은을 매질하여 죽이게 했으니, 소인(小人)의 마음씀이 심하기도 하도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정도전은 이방석(李芳碩)의 난리에 관여해서 자기의 몸은 두 동강이 났고, 함거정도 정도전의 문객(門客)이라 해서 태종대왕(太宗大王)의 미움을 받아 특별히 훈적(勳籍)이 삭제되어 지금까지도 서용되지 못하고 있다. 그 자손들이 임금께 말해서 원통함을 하소연하였으나 선비들의 의론이 이를 허락하지 않아서 회복되지 못했다. 정도전이 받은 화는 이숭인보다 더 심했고, 이숭인의 이름은 후세까지 빛나니 천도(天道)가 어긋남이 없다. 이로써 후세의 소인들에게 경계할 것이로다.

○ 고려(高麗) 역사에서 칭찬하고 나무라는 것은 모두 믿을 수 없지만, 말년의 사적은 더욱 어긋나고 잘못되었다. 이는 비록 숨기고 피하는 데 국한되어 그렇다고 하지만, 믿음을 전하는 글에 있어서, 어찌 모두 그 실상을 묻어 버리고 덮어놓기만 한단 말인가. ()을 세우고 우()를 보고 윤이(?)와 이초(李初)를 보낸 세 가지 일은 큰 죄안(罪案)이 되는 것으로, 원신(元臣)과 고로(故老)들이 넘어지고 유락(流落)해서 마침내 그 나라가 옮겨졌다. 저 정도전과 윤소종(尹紹宗)과 조준(趙浚)은 천리가 없단 말인가. 《고려사(高麗史)》를 만든 것은 정인지(鄭麟趾)이다. 정인지는 세종(世宗)과 문종(文宗) 양조(兩朝)의 사랑을 받아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으나, 마침내 임금을 죽인 역적이 되었다. 노산(魯山) 때에 수상으로 정청(廷請)한 자임.

○ 태헌(台軒) 고경명(高敬命)은 임진난에 의리를 세웠는데, 태헌의 아들 고종후(高從厚)가 원수를 갚는다고 군사를 일으켰다가 또 진양성(晉陽城)이 함락되는 날 죽어 부자(父子)가 절개를 같이했다. () 나라 변호(卞壺)의 집과 아름다움을 짝할 만하다. 고종후도 문장에 능하여 말에 기대어 격문(檄文)을 썼는데, 빛나는 문장이 사람을 놀라게 했다. 그가 제주(濟州)에 말을 모집하는 글에, “옷깃을 떨치고 일어날 자가 바다 밖에도 있음을 알겠으니, 채찍을 잡고 가서는 행여 천하에 말[]이 없다고 하지 말라.”하여, 말뜻이 사람을 놀래키고 대()를 맞춘 것이 자연스러워서 당시 사람들이 서로 전해 가며 외웠다. 그러나 아깝도다. 이러한 인재가 있었어도 마침내 버려지고 말았구나. 신묘년 봄에 고명(誥命)을 짓는 데 뽑혔다가 이내 대간(臺諫)의 비평을 받았으니, , 사람의 진퇴(進退)와 여탈(予奪)이 이와 같고서야 어찌 도적을 부르지 않으리오.

○ 임진란에 동래(東萊)의 송상현(宋象賢)이 성을 지키다가 죽었는데, 죽을 적에 자기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기를, “외로운 성은 달무리처럼 포위를 당했고, 모든 고을은 와해(瓦解)되었으니, 군신(君臣)의 의리는 중하고 부자의 은의(恩誼)는 가볍습니다.”하여, 말이 늠연(凜然)했으니 비록 옛날 열사(烈士)라도 이보다 지날 수가 없다.

○ 선조대왕(宣祖大王)이 옥당(玉堂)에 명하여 《주역(周易)》 고경(古經)을 교정하고, 《춘추(春秋)》와 좌씨(左氏)ㆍ정씨(程氏)ㆍ호씨(胡氏)의 글을 모아서 사전춘추(四傳春秋)의 예를 모방해서 이것을 베껴서 올리라 했다. 내가 부제학(副提學)으로 실상 이 일을 맡았다. 두 경()을 완성한 뒤에 또 여러 유신(儒臣)들에게 명해서《주역》을 번역하게 하여 일시의 이름 있는 관리는 글을 알거나 모르거나를 따지지 않고 혹 팔괘(八卦)의 방위도 모르는 자까지도 모두 여기에 참여하였다. 그래서 각각 자기 의견을 가지고 옳고 그른 것을 공격하니 매우 시끄러워 마침내 긴요한 곳을 계발(啓發)하지 못하였다. 몇 해가 지난 뒤에야 비로소 책을 완성해 바쳤는데, 완성해 놓고 보니, 고치지 않을 곳을 고친 것과 고쳐야 할 곳을 고치지 않은 것이 이루 셀 수 없이 많았다. 《주역》이 어떠한 책인데 학문하는 방도도 전혀 모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제 마음대로 서서 말하듯이 정하게 한단 말이냐. 백호관(白虎觀 한 나라 장제(章帝) 때 오경(五經)에 대한 동이(同異)를 창론한 곳을 말함)이나 석거각(石渠閣 한 나라 선제(宣帝) 때 오경(五經)을 논정한 곳을 말함.)에서 저술한 모든 경서(經書)도 오히려 후세를 위한 것이 되지 못하는데, 하물며 조그만 나라의 후학(後學)이 만든 것이겠는가. 이 일을 담당한 부서를 철거할 때에 특별히 일등선온(一等宣?)을 하사해서 몹시 즐기고 파했다. 이 자리에 참여했던 자들이 사례하는 글을 올리고 또 그림을 그려 축()을 만들어 성대한 일을 기록했다. 이때 나도 우연히 한 구절을 지었으니,

 

 

성인의 마음을 보지 못했으니 / 未見聖人心

어찌 성인의 일을 알 수 있으리 / 焉知聖人事

어찌 마음 씻는 사람을 얻어서 / 安得洗心人

그와 함께 시의를 의논하리오 / 與之論時義

 

하였다. 이는 감히 일세(一世)를 가벼이 여긴 것이 아니라. 조금이나마 내 마음의 생각을 기록한 것이다.

○ 원천석(元天錫)은 고려 사람이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벼슬하지 않고 원주(原州)에 살면서 목은(牧隱)과 그 밖의 여러 노인들과 서로 왕래하였다. 그의 유고(遺稿) 속에서 후세에서 알지 못하는 당시의 사적을 직필(直筆)로 기록해 놓은 것이 있으니, 신우(辛禑)를 공민왕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그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이다. 그때 원천석은, ‘주상전하(主上殿下)께서 강화(江華)로 옮겨 가고, 원자(元子)가 즉위했다는 말을 듣고 느낌이 있어서.라는 제목으로 두어 수를 지었으니,

 

 

성현이 서로 만나 당시에 바뀌니 / 聖賢相遇遞當時

천운이 돌고 도는 것 이제부터 알겠구나 / 天運循環自此

야인이라고 어찌 나라 걱정 없으리 / 田畝豈無憂國意

다시금 충성된 마음 안고 안위를 생각하네 / 更彈忠懇念安危

 

하였고, ,

 

 

새 임금 나오고 옛 임금 옮겨 가니 / 新主臨朝舊主遷

쓸쓸한 바다 고을 바람과 연기뿐이로세 / 蕭條海郡但風煙

천관의 바른 길을 누가 열고 닫는가 / 天關正路誰開閉

밝고 밝은 전감이 눈 앞에 있음을 알아야지 / 要見明明鑑在前

 

하였다. 도통제사(都統制使) 최영(崔瑩)이 형벌받은 것을 두고 세 수를 짓기를,

 

 

수경은 빛 묻히고 주석은 꺾였으니 / 水鏡埋光柱石頹

사방 백성들 모두들 슬퍼하네 / 四方民俗盡悲哀

빛나는 공업 마침내 썩게 되었지만 / 赫然功業終歸朽

확고한 네 충성은 죽어도 없어지지 않으리 / 確爾忠誠死不灰

일을 기록한 책이 벌써 한 질이나 찼는데 / 記事靑編曾滿秩

가련타! 땅 속에 들어가 이미 흙덩이가 되었네 / 可憐黃壞已成堆

생각건대 멀고 먼 저 구천(九泉) 아래 / 想應杳杳重泉下

괘안동문하려는 그 눈 분해서 뜨지 못하리 / 掛眼東門憤未開

 

하고, ,

 

 

홀로 조정에 서니 누군들 감히 간섭하리오 / 獨立朝端無敢干

똑바로 충의를 가지고 모든 어려움 이겨냈네 / 直將忠義試諸難

육도 백성들의 소망을 따르기 위해 / 爲從六道黔黎望

능히 삼한의 사직을 편안하게 했네 / 能致三韓社稷安

동렬로 있던 영웅들 얼굴 다시 두꺼워질 게고 / 同列英雄顔更厚

죽지 않은 간사한 무리는 뼈가 오히려 서늘하리 / 未亡邪?骨猶寒

다시 어지러운 날 만나면 누가 계교를 내리 / 更逢亂日誰爲計

우습도다, 당시 사람들 간사한 짓만 하네 / 可笑時人用事奸

 

하고, ,

 

 

내 이제 부음 듣고 슬픈 시를 짓노니 / 我今聞訃作哀詩

그대를 슬퍼함이 아니라 나라 위한 슬픔일세 / 不爲公悲爲國悲

하늘 운수 누가 행운과 불운을 알리 / 天運誰能知否泰

나라의 기틀 안위를 결정짓지 못했네 / 邦基未了定安危

날카로운 칼날 이미 끊어졌으니 슬퍼한들 무엇하리 / ?鋒已絶嗟何及

충성된 마음 항상 외로우니 한을 이기지 못하네 / 忠膽常孤恨未支

홀로 산하를 대해 이 노래 부르니 / 獨對山河歌此曲

흰구름과 흐르는 물 모두 슬프기만 하네 / 白雲流水摠噫噫

 

하였다. ‘이달 15일에 국가에서 정창군(鄭昌君)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전왕(前王)의 부자는 신돈(辛旽)의 자손이라 해서 폐하여 서인(庶人)을 만들었다는 말을 듣고.’라는 제목으로 두 수를 짓기를,

 

 

전왕 부자가 각각 분리되어 / 前王父子各分離

만리나 되는 동쪽과 서쪽 하늘가에 있네 / 萬里東西天一涯

이분들을 서인으로 만들었어도 / 可使一身爲庶類

한 가닥 마음은 천고에 변하지 않으리 / 寸心千古不還移

 

하고, ,

 

 

태조의 맹서하던 일 하늘에 순응하여 / 祖王信誓應于天

남은 혜택 흘러흘러 수백 년을 전했네 / 餘澤流傳數百年

거짓인지 참인지 가려냄을 어찌 일찍 하지 않았는가 / 分揀假眞何不早

저 하늘 굽어봄이 분명할 것을 / 彼蒼之鑑照明然

 

하였다. ‘국가에서 전왕 부자를 죽이게 했다.’는 제목으로 시를 짓기를,

 

 

벼슬이 종정에 오른 것 임금의 은혜인데 / 位高鍾鼎是君恩

반달 만에 원한을 품고 이미 씨를 말렸네 / 半月含讐已滅門

한 나라에 어찌 커다란 복을 오래 머물러 두리 / 一國豈能留景祚

구천에 가도 깊은 원한 씻을 길 없네 / 九原難可雪幽?

옛날 풍도 망해 없어지니 시절은 도리어 태평하고 / 古風淪喪時還泰

새로운 법 밝아지니 도가 더욱 높아지네 / 新法淸平道益尊

다시금 대궐을 향해 만세 부르니 / 且向玉?呼萬歲

원하건대 넓은 은혜 베푸시어 □산(□山)에 미치소서 / 願施優渥及□山

 

하였다.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이 참소를 받고 장단으로 귀양갔다.는 제목으로 두 수를 짓기를,

 

 

천보는 빛을 감추고 정령은 가혹한데 / 天寶韜光政令苛

누가 깎은 듯하고 또 다듬은 듯하리 / 有誰如琢復如磨

요즘 꿈속에 연거푸 사흘 밤을 뵈었고 / 邇來夢謁連三夜

영혼과 노래하는 것을 두고 노래 한 수 지었네 / 記取魂遊作一歌

국가의 경륜은 화택(일이 틀어졌다는 뜻)으로 돌아갔고 / 邦國經綸歸火澤

강물에 뜬 배 풍파에 시달렸네 / 江河舟楫困風波

하늘이 만일 사문을 망하게 하지 않으려면 / 天如未喪斯文也

비록 광인이 있은들 나에게 어찌하리 / 縱有匡人奈我何

 

하였고, ,

 

 

옥은 스스로 티가 없는데 일은 이미 거짓되었네 / 玉自無瑕事已訛

사람 형벌한 것은 두 번이고 딴 사람 아니도다 / 刑人兩朋定非他

해동의 풍월 응당 분함을 머금었고 / 海東風月應含憤

천하의 영웅들 모두 다 한탄하네 / 天下英雄所共嗟

만백성은 함께 새 일월을 보고 / 萬姓同瞻新日月

삼한은 스스로 옛 산하로 굳었네 / 三韓自固舊山河

옳고 그름 환히 아는 것은 오직 하늘이 있으니 / 明知枉直蒼蒼在

꿈속에도 비옵나니 몸 편히 계시옵소서 / 寤寐祈傾體氣和

 

하였다. ()의 어조는 비록 질박하여 말이 안 되는 곳이 많지만 사실을 바르게 쓰고 숨기지 않았으니, 정인지의 《고려사(高麗史)》에 비교하면 일성(日星)과 무지개처럼 현격하게 달라서 읽으면 눈물이 몇 줄이 흘러내린다. 대개 고려가 망한 것은 무진년 폐주(廢主)로 말미암은 것이다. 목은(牧隱) 같은 이들이 그래도 일맥(一脈)을 유지하여 공의(公議)가 아주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 정도전ㆍ윤소종의 무리들이 왕씨(王氏)가 아니라고 하는 자는 충신이 되고, 왕씨라고 말하는 자는 역적이 된다는 말을 만들어서 조정에서 떠들어 인심을 현혹시켜 드디어 선비들을 죽이고 사람들의 입을 막아 겨우 5년 만에 나라가 망했다. 그러니 그 시대에 태어나서 정직하게 자기의 주장을 세운 자는 그 생활의 괴로움이 어떠했겠는가. 그러나 인심을 다 현혹시키지는 못하고 사람의 입을 다 막지는 못해서 시골 구석에도 이처럼 두려워하지 않고 바르게 쓰는 동호(董狐) 같은 직필이 있었으니, 어찌 돌이 누르면 죽순이 비스듬히 나온다는 것이 아니리오.

○ 서화담(徐花潭)의 이름은 경덕(敬德)이고, ()는 가구(可久), 타고난 자질이 상지(上智)에 가까웠다. 시골에서 태어나 스스로 학문하는 방법을 알았다. 소강절(邵康節)의 《주역(周易)》에 더욱 깊어 그가 알아 낸 《황극경세(皇極經世)》의 수가 한 가지도 틀림이 없었으니, 기이하도다. 가령 중국에 태어나서 대유(大儒)와 함장(函丈)에게서 교육을 받았다면 그 고명(高明)하고 투철(透徹)함이 지금의 조예에 그칠 뿐이 아니었을 것이다. 복희씨(伏羲氏) 《주역》의 방법을 아는 자는 우리 나라에 이 한사람뿐 이었다. ()가 있었으니,

 

 

글 읽던 당일에 세상 다스리길 뜻했는데 / 讀書當日志經綸

느지막하게 도리어 안씨(顔氏)의 가난을 달게 여기네 / 歲暮還甘顔氏貧

부귀에는 경쟁이 있어 손을 대기 어렵고 / 富貴有爭難下手

임천이야 금하는 이 없어 가히 안식할 수 있네 / 林泉無禁可安身

산에서 나물 캐고 물에서 고기 낚아 배를 충분히 채우고 / 採山釣水堪充腹

달을 노래하고 바람 읊으니 정신이 상쾌해라 / 詠月吟風足暢神

학문이 의심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러야 참으로 쾌활하니 / 學到不移眞快活

백년을 헛되게 사는 사람이 되지 않으리 / 免敎虛作百年人

 

하였으니, 그 뜻의 있는 바를 상상할 수 있겠다.

○ 성대곡(成大谷)의 이름은 운()으로, 나면서부터 아름다운 바탕이 있어 일찍이 세상에서의 틀을 벗어났는데, 그의 형 성우(成遇)가 을사년 난을 당해서 비명에 죽자 이로부터 더욱 시속 공명에 뜻이 없어 보은(報恩) 속리산(俗離山) 아래에 숨어 살다가 나이 80여 세에 죽었다. ()도 그 인격과 같아서 충담(沖澹)하고 한아(閑雅)하여 서호 처사(西湖處士 임포(林逋))의 남긴 운치가 있었다. 그 시구(詩句)의 아름다운 것 중에,

 

 

봄옷이 몸에 알맞아 두 소매 짤막하고 / 春服稱身雙袖短

옛 거문고 손에 익어 일곱 줄이 길어라 / 古琴便手七絃長

10년 동안 산 속에 있는 약을 모두 맛보았으니 / 十年賞盡山中藥

손이 오면 내 입 속의 향기를 맡으리 / 客到時聞口齒香

 

하였고, 그가 남명(南溟) 조식(曺植)을 전송하는 시에,

 

 

아득아득 기러기 남해로 향해 나니 / 冥鴻獨向海南飛

때는 정히 가을 바람 나뭇잎 떨어질 무렵일세 / 正値秋風木落時

땅에 가득한 벼와 기장은 닭과 따오기가 쪼아 먹는데 / 滿地稻梁鷄鶩啄

푸른 구름 하늘 끝에 스스로 기심을 잊었네 / 碧雲天末自忘機

 

하였으니, 이와 같은 것이 몹시 많다.

○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조중봉(趙重峰)을 곡()한 글에 말하기를, “슬프다, 여식(汝式)이여! 공자(孔子)ㆍ안자(顔子)를 배우고 가의(賈誼)ㆍ굴원(屈原)을 사모하여 곧게 죽으려 하더니 마침내 절개에 죽었도다. 슬프도다, 여식(汝式)이여!”하였는데, 세상에서는 그를 지언(知言)이라고 했다.

○ 백사(白沙) 이상국(李相國)이 무오년 봄에 대비(大妃)를 폐하는 것을 간하니, 당시 의논이 그를 장차 극형에 처하고자 하여 하수인들을 시켜 상소하여 머리를 베자고 청한 글이 하루에 서너 번씩 올라갔다. 대사헌 이각(李覺)과 대사간 윤인(?) 등이 외딴섬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자고 청하니, 임금이 먼 곳으로 귀양보냈다. 처음 관서(關西)로 귀양갔는데, 권간(權奸)들이 또 하수인들을 시켜 먼 변방으로 보내자고 청해서 육진(六鎭)으로 옮겼다가 또 삼수(三水)로 옮겼는데, 임금이 특별히 북청(北靑)으로 옮겼다. 성을 나가는 날, 절구 한 수를 짓기를,

 

 

햇빛이 흐려 대낮도 어두운데 / 白日陰陰晝晦微

북풍이 불어 나그네 옷이 찢기네 / 朔風吹裂遠征衣

요동 성곽들 응당 의구하련만 / 遼東城郭應□□

정령위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까 하노라 / 只恐令威去不歸

 

하니, 듣는 자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때 영상(領相) 덕양(德陽) 기공(奇公)과 첨추(僉樞) 정홍익(鄭弘翼), 정언(正言) 김덕함(金德?)이 모두 바른말을 하다가 북쪽 먼 곳으로 내쫓겨서 함께 떠나가니, 국맥(國脈)이 이 걸음으로 인하여 끊어진 셈이다. 그때 옥당의 장관(長官)은 정조(鄭造)였다. 우리 나라 역대 임금의 문필로 말하면 문종(文宗)이 으뜸이고, 성종(成宗)ㆍ선조(宣祖)의 글도 출중해서 한 무제(漢武帝)나 당 태종(唐太宗)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문종이 지은 제극성문(祭棘城文)을 보면, “정이 없는 것을 음양(陰陽)이라 하고, 정이 있는 것을 귀신이라 한다.”하였으니, 비록 원숙한 유학자라도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으리오. 종영(宗英 종실 중 우수한 자) 중에는 시 잘 짓는 자가 또한 많은데, 풍월정(風月亭 성종대왕의 형님 이정(?))이 제일이고, 성광자(醒狂子 이심원(李深源))와 서호주인(西湖主人 이총(李摠))이 그 다음이다. 그런데 기묘년 화에 배척을 받은 자가 계사년에 이르러 차츰 풀리기 시작하여 정유년에 이르러서는 더욱 많이 풀렸고 인종(仁宗)이 즉위하고 나서 크게 풀렸다. 마침 인종이 승하하여 다 신원(?)되지 못한 자는 선조(宣祖) 초년에 이르러 비로소 신원하는 은전(恩典)을 널리 폈고,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은 죽은 뒤에 삭직(削職)했으며, 정암(靜菴) 이하 여러 어진 이들은 차례로 증직(贈職)했다. 이것은 60년 뒤의 일로써 죄주고 상준 것이 모두 죽은 뒤의 일이니, , 슬픈 일이로다. 그러나 또한 지사(志士)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었다.

○ 을사년의 화는 명종(明宗) 말년에 이르러 비로소 풀렸고, 선조가 즉위한 11년 정축에 위훈(僞勳)을 삭제했으니 또한 하늘에 계신 인종의 영혼을 위로함이 되었다. 을사년 화를 치르고 남은 사람은 백인걸(白仁傑)ㆍ노수신(盧守愼)ㆍ이담(李湛)ㆍ민기문(閔起文)ㆍ김난상(金鸞祥)ㆍ유희춘(柳希春) 공 등 몇 사람이었다. 이들은 모두 조정에 벼슬해서 혹 공경(公卿)이 되고, 혹은 관각(館閣)의 장이 되어 성하게 세상에 쓰였으니 선조 초년의 정치는 우리 나라에서 제일이 되었다.

○ 명종(明宗) 정미년에 정언각(鄭彦慤)이 경기 감사(京畿監司)가 되어 양재역(良才驛)을 지나노라니 역 벽에 익명(匿名)으로 된 글이 붙어 있으므로 정언각이 이것을 도려다가 변고를 아뢰어 드디어 큰 옥사(獄事)를 만들어 일시의 명현(名賢)들이 죽음을 당하는 자가 서로 계속되었다. 이 공으로 해서 정언각은 부제학(副提學)을 제수받았는데, 어느 날 조정에 나가다가 말에서 떨어져 한 발이 등자(?)에 걸린 채 그 말이 정언각을 끌고 거리로 달아나 밟히고 부딪쳐 뼈와 살과 얼굴이 뭉개져 죽으니, 사람들은 모두 그 응보(應報)가 빠른 것을 통쾌하게 여겼다. 그러나 그 자손들은 창성해서 지금 바야흐로 세력이 혁혁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계해년 반정(反正)한 뒤에 그 자손 중에 높은 벼슬에 있는 자는 혹 죽임을 당하거나 혹 관노(官奴)가 되기도 하였다.

○ 을사사화에 먼저 기미를 알고 행동한 자는 김하서(金河西)한 사람으로 너무도 우뚝하여 따라갈 수가 없고, 일에 당해서 꺾이지 않은 이는 찬성(贊成) 권발(權潑)과 참찬(參贊) 백인걸(白仁傑)이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는 나면서부터 남과 다른 재질이 있어 신동(神童)이라고 불렸다. 처음 벼슬하여 조정에 들어가 대절(大節)이 있더니, 을사년 화가 일어날 때에는 외직(外職)으로 나가기를 원하여 옥과 현감(玉果縣監)에 제수되었다. 그 뒤에는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서 생을 마쳤다.

○ 열경(悅卿) 김시습(金時習)은 우리 나라의 백이(伯夷)이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그의 풍도를 듣고 일어난 자일 것이다. 김시습의 위천지간도시(渭川持竿圖詩),

 

 

바람과 비가 쓸쓸히 낚시터에 불어 오니 / 風雨蕭蕭拂釣磯

위천의 어조가 기심을 잊었네 / 渭川魚鳥可忘機

어찌해서 늘그막에 용맹한 장수가 되어 / 如何老作鷹揚將

부질없이 백이ㆍ숙제로 하여금 고사리 캐다 주려 죽게 하였나 / 空使夷齊餓採薇

 

하였다. 추강(秋江)이 중에게 지어준 시에,

 

 

세상은 침침하고 지옥은 깊은데 / 人世沈沈地獄深

무슨 일로 무릎 꿇고 관세음보살을 외우는가 / 跏趺何事念觀音

이름을 벼슬길에 구하자니 풍파가 사납고 / 求名宦海風波惡

낚싯대를 가을 강에 드리우니 습기가 침노하네 / 把釣秋江?濕侵

성정을 다스리려면 세상 풍교 어겨지고 / 欲理性情違世敎

생산을 꾀하자니 처음 마음 저버리네 / 謀營生産負初心

《참동계(도가 위백양(魏佰陽)이 저술한 책이름)》나 손에 들고서 / 不如手執參同契

쓸쓸한 단풍나무 숲에 돌아가 누우려네 / 歸臥蕭蕭楓樹林

 

하였다. 나는 일찍이 이 시들을 보고 많이 감탄하였다. 열경은 스스로 매월당(梅月堂)이라고 호()를 지었다.

○ 추강(秋江)은 어려서 가업(家業)을 버리고 열경과 어울렸다. 어느 날 열경이 추강에게 말하기를, “나는 세종(世宗)의 두터운 대접을 받았으니 이렇게 고생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공()은 나와는 다른데 어찌 살아갈 계획을 세우지 않는가?”하니, 추강이 말하기를,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일은 천지의 큰 변이니 현덕왕후를 회복시킨 뒤에 과거에 응시해도 늦을 게 없다.”하였다. 열경이 다시는 강권하지 않았다 한다.

○ 선조가 즉위해서 드디어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불렀다. 이때에 임금이 바야흐로 몸을 가다듬어 학문에 힘쓰니 조정 안에 맑은 의론이 한창 일어나고 또 소인들의 가림이 없으니 사서인(士庶人)들 역시 모두 감화되어 사모하고 선비들이 위로 성명(性命)을 말하고, 아래로 예용(禮容)을 갖지 않는 자가 없었다. 계속하여 율곡(栗谷) 이이(李珥)ㆍ우계(牛溪) 성혼(成渾)이 모두 한때에 일어나서 비록 원기(元氣)가 잠깐 흐려졌지만 풍속이 크게 변했다. 이 두 분이 한 분은 죽고 한 분은 배척당하니 세상에는 학문을 말하는 자가 거의 없었다.

○ 우리 나라에 유종(儒宗)으로 세상의 모범이 된 이는 한훤(寒暄) 김굉필(金宏弼)ㆍ일두(?) 정여창(鄭汝昌)ㆍ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ㆍ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ㆍ퇴계(退溪) 이황(李滉)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된 이가 아, 이들 다섯 사람뿐이었는데, 이 중에서 죽임을 당한 이가 3명이고, 귀양가서 죽은 이가 1명이고, 퇴계만이 겨우 천명대로 살았다.

그러나 퇴계도 중년에 그 형 대헌공(大憲公) 이해(李瀣)의 화를 입어 당시에 삭직당하고 내쫓겨서 외직(外職)으로 전전하고 초야에서 지냈다. 비록 늦게 제수되어 선조가 크게 쓰려 했으나 공은 이미 늙었으니 세도(世道)의 아름답지 못함을 어떻게 구할 수 있겠는가. 죽은 뒤에 추숭(追崇) 또한 무슨 도움이 되리오.

○ 물화(物貨)가 통하고 막히고 쇠하고 흥하는 것도 때가 있다. 우리 동방(東方)에는 은광(銀鑛)이 많기 때문에 고려 말년에 중국이 많이 요구해서 백성들이 견딜 수가 없었다. 아조(我朝) 초년에 여러 번 중국에 은자(銀子) 바치는 것을 면제받고자 아뢰어 허락을 얻고 보니 그것을 국화(國貨)로 사용할 수도 없으므로 역대의 임금이 그대로 지켜서 마침내 은() 캐는 것을 금하고, 법령의 맨 첫머리에 나타내서 심지어 역관(譯官)이 명 나라 서울에 갈 적에 만약 사사로이 싸 가지고 강을 건너는 자가 있으면 그 죄가 죽이는 데 이르렀다.

그 후 2백 년을 지나 임진년 왜란에 이르러 중국에서 은()을 우리 나라에 나누어 주고, 군량(軍糧)과 군상(軍賞)도 모두 은을 썼다. 이로써 은화(銀貨)가 크게 행해져서 중국과의 통상무역 금지법이 폐지되고 거행되지 않으니 시정(市井)에 매매하는 무리들도 딴 재물을 모으지 않고 오직 은이 많고 적은 것을 가지고 부자를 따졌다.

오늘날에 이르러 탁지(度支 호조(戶曹))의 경비와 중국의 주청(奏請) 및 조사(詔使)의 접대 등의 비용이 더욱 많아짐에 따라 은값이 마구 올라가서 민간에서 매점하는 자가 크게 이익을 보았다. 조정에서의 탐관오리들의 뇌물 거래도 이것이 아니고는 딴 길이 없으며, 관작을 임명받는 것이나 형벌을 면하는 데에도 모두 이것으로 소개를 하고, 심지어는 대궐문에까지 들어가 진() 나라 공방(孔方 돈의 별명)과 서로 비슷하니, 세변(世變)의 유행을 막기 어려움을 보겠다.

○ 아조(我朝)에서 사람을 뽑는 길이 세 가지가 있으니, 문과(文科)와 무과(武科)와 음직(蔭職)이다. 문과는 글로 시험하고 경서(經書)로 강()을 하는 것이고, 무과는 궁마(弓馬)로 시험하고 병서(兵書)로 강을 하는 것이고, 음직은 보거(保擧)로 인재를 취하여 공천과 중선(重選)이 있은 연후에 바야흐로 주의(注擬)를 허용했던 것이니, 이는 2백 년 동안에 변하지 않았다.

벼슬의 계급은 9()이 있으니, 낭관(郞官)으로부터 대부(大夫)에 이르기까지 계급이 올라가는 자는 반드시 달수를 따져서 기한이 차야만 올라가는데 이것을 ‘사가(仕加)라고 일컫고, 국가에서 은상(恩賞)이 있어서 백관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별가(別加)라고 일컬으며, 부형이 벼슬이 높아서 친히 은전(恩典)을 받지 않는 자는 자제들이 이것을 대신 받는데 이것을 ‘대가(代加)라고 일컫는다. 별가와 대가는 상전(常典)이 아니고 기한이 차기를 기다려 올라가는 것은 반드시 몇 해가 걸려야 겨우 한 계급을 올려 준다.

그렇기 때문에 태평한 시대에 벼슬길에 들어간 자는 벌열(閥閱)이나 공로가 있지 않으면 횡()으로 올라가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벼슬살이하는 사람은 비록 10년이 되어도 오히려 통훈대부(通訓大夫)의 계급에도 오르지 못한다. 임진년 이후에 국가가 병난을 만나 임금이 파천하게 되자 적을 치는데 급해서 조그마한 공적을 세운 자도 모두 벼슬로 상을 주었으니 이로 인해서 문무(文武)의 두 길이 흐려졌다. 오늘날에 이르러서 조정의 일이 더욱 많기 때문에 은혜를 바라고 상을 바라는 자가 못할 짓이 없어 크게는 변고를 알려서 훈적(勳籍)에 오르고 작게는 시세를 타서 벼락감투를 써서 배초(緋貂)와 금서(金犀)가 길에 가득하고 옥관자를 붙이고 은대(銀帶)를 찬 자가 거의 말로 잴 정도였다.

그리고 아직 미숙한 어린애 같은 것들이 참봉(參奉)ㆍ감역(監役)ㆍ찰방(察訪)이 되었는데, 그 계급을 물으면 모두 통훈대부(通訓大夫)라 한다. 오래지 않아서 외현(外縣)으로 원이 되어 나가면 좀도둑 하나라도 잡고 도랑 하나만 치고 차원(差員) 하나만 맡아도 이를 올려 써서 상대부(上大夫)의 열에 오른다.

심지어는 과거를 뵈어 선비를 뽑는 데도 모두 사정(私情)을 써서 혹 고관(考官)과 과거 보는 사람이 버젓이 서로 통하여 혹 남의 글을 빌려다가 쓰고서도 조금도 거리낌이 없고 이미 벼슬을 얻은 뒤에는 대성(臺省)과 관각(館閣)을 자기 고유의 것 같이 알며, 계급을 초월하고 차서를 건너뛰어도 남이 감히 말하지 못하고, 누가 물으면 이는 누구의 문하(門下)에서 나와서 무슨 일을 주장한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를 보인다는 명령이 내리면 선비를 시험(試驗)하는 제목이 이미 외간(外間)에 알려져서 방()을 걸기도 전에 과거 보는 사람이 합격하고 떨어지는 것이 먼저 정해진다.

그래서 수년 이래로 과거 보려는 선비가 글공부는 폐지하고 사람 교제하는 데에 힘쓰며, 이들과 같이하기를 부끄러워하는 자는 모두 과거를 버리고 밖으로 나가 숨어 사는 자가 역시 많았다. 무인이 벼슬에 진출하는 데는 오로지 은화(銀貨)를 써서 위로 병사(兵使)ㆍ수사(水使)로부터 아래로 보장(堡將)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해진 값이 있고, 사람을 천거하고 벼슬을 제수하는 데도 모두 이런 방법을 썼으니 사람을 뽑는 길이 극도로 무너지고 어지러워졌다.

하물며 부형의 세력을 빙자하여 음관(蔭官)으로 나가는 자이겠는가. 조금만 힘이 있으면 누구나 공()이 되고 경()이 되고 대부(大夫)가 되지 않는 자가 없어 의기양양(意氣揚揚)하며, 그 중에 유락(流落)해서 곤경에 처한 자는 경서(經書)를 껴안고 의리를 지키는 사람이니, 이 역시 기운(氣運)이 이렇게 만든 것인가.

○ 우리 나라 인물은 마땅히 기묘년 선비들로 제일을 삼아야 할 것이다. 그 중에는 비록 경박한 선비도 있지만, 모두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데서 나와서 의()를 바르게 하고, ()를 밝게 하며 공리(功利)를 계교하지 않는 마음이 있었으니, 이 어찌 쉽게 얻을 수 있으리오.

○ 우리 나라는 비록 요() 임금 때부터 나라를 세웠으나 한 바다 밖의 둔장(屯長)에 지나지 않았다. 삼한(三韓)과 사군(四郡) 시대의 사적은 아득해서 상고할 수가 없고 고구려(高句麗)ㆍ신라(新羅)ㆍ백제(百濟)는 나라를 다스린 지가 비록 오래였으나 그 국가의 제도를 상고해 보면 오륜(五倫)이 확립되지 못했으며, 고려 역시 그 습속을 고치지 못했다. 고려 말년에 이르러 포은(圃隱)이 건의해서 비로소 관복(官服)과 상제(喪制)를 갖추었으나 얼마 안 되어 고려는 망하였고, 아조(我朝)에 이르러 여러 가지 모든 문물(文物)을 한결같이 중국 제도를 모방하여 고루 갖추어져 볼 만했다.

그러나 무당과 부처에게 비는 것은 아직도 오랑캐 풍속이 있으므로 조종조(祖宗朝)에서도 임금이 만일 병이 나면 중이나 무당이 경을 외우고 인정전(仁政殿) 위에서 빌며 또 송악신사(松岳神祠)를 더욱 숭봉(崇奉)하여 신사(神祠)에서 예를 행한 뒤에는 무당이 자리를 만들어 놓으면 개성 유수(開城留守)가 들어가 참여하며, 심지어 무당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것까지도 전혀 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때 무당이 신사에 왕래하는 데 소용되는 물건은 모두 관청에서 공급했다.

성종(成宗) 때에 이르러 비로소 말하는 자가 있어 이것을 파했고, 중종(中宗) 기묘년에 이르러서는 선비들을 올려 썼으니, 비록 겨우 1년 만이지만 국가의 풍속이 크게 변했다. 이 뒤로부터 관혼상제(冠婚喪祭)에 차츰 예가 갖추어졌다.

○ 선조(宣祖) 중년에는 나라에 근심이 없고, 백성들이 생업(生業)을 즐기니 이때를 소강(小康)이라고 일컬었다. 임금이 문학하는 선비를 쓰기 시작하자, 신진(新進) 중에 나이 젊고 재주가 있는 한음(漢陰)ㆍ백사(白沙) 같은 여러 사람이 모두 문장으로 출세하여 마침내 국가에 크게 쓰였으니 그 힘을 얻었다고 할 만하다. 그 이후로는 조정에 있는 자가 대부분 부정한 방법으로 나갔기 때문에 국가의 정치도 자연 무너져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다시 말할 것도 없다.

○ 우연히 《고려사(高麗史)》를 보니, 성조(聖朝)께서 명을 받을 적에 천심(天心)과 인심(人心)이 함께 쏠렸다. 그래서 새 나라가 서던 날에도 시장에는 점포가 바뀌지 않았고, 조정에도 반열이 변경되지 않아서 한양(漢陽) 도읍에 벼슬한 사람들이 모두 송경(松京)의 옛 신하들이었으니, 아조(我朝)로 말한다면 포용하는 성덕(盛德)이 되겠지만, 왕씨(王氏)로 논하면 모두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무리라고 하지 않겠는가. 《춘추(春秋)》의 법으로 다스린다면 마땅히 반역의 죽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 중에도 정상이 가장 미워할 만한 자는 곧은 체한 윤소종(尹紹宗)과 임금을 위협한 남은(南誾)과 일을 꾸민 정도전(鄭道傳)과 거짓 이름을 가진 권근(權近)이고, 허옇게 늙은 성석린(成石璘)은 간사한 자에게 좌지우지(左之右之)되어 조영규(趙英珪)를 시켜 방망이로 충성스러운 재상 포은을 죽이게 했으니, 왕씨(王氏)임금들이 영혼이 있다면 지옥에서의 벌줌이 없겠는가. 남은과 정도전은 아조(我朝)에 들어와서 모두 극형을 받았으니 이는 하나의 응보(應報)일 것이다.

○ 무신년 이후로 큰 옥사(獄事)가 해마다 일어나서 사람이 가문(家門)을 일으키고 이름이 뛰어나게 된 자는 모두 고변(告變)했거나 내통(內通)하지 않은 자가 없어 크게는 맹단(盟壇)에서 피를 바르고 경상(卿相)이 되며, 적게는 푸른 옷과 붉은 띠를 띠고 뜻대로 되어 횡행(橫行)하였다. 그 반면에 이 길을 거치지 않은 자는 기구했으며 심하게는 죄를 얻고 법에 걸려 비록 죽음은 면하더라도 모두 내쫓겨 귀양가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즐기고 염치가 없는 자는 내시들에게 붙어 못 할 짓이 없으므로 심지어 잡채 상서(雜菜尙書)ㆍ침채 정승(沈菜政丞)이란 말이 세상에 유행하였으니, 이것은 잡채나 침채를 임금께 바치고 사랑을 받은 것이니, 옛날의 양두 관내후(羊頭關內候)만을 어찌 나무라리오. 중국에서는 건문(建文) 때에 절의에 죽은 신하와 경태(景泰) 때에 옳은 것을 주장한 사람을 모두 뒤에 설원(?)하고 증직을 해서 사람마다 전하고 집집마다 외워서 문자에 실어 사적을 바르게 써서 후인들을 권면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무인년의 변과 계유ㆍ을해년의 변을 모두 숨기고 감히 말하지 않아 지금은 2백 년이 지났어도 갈수록 더욱 심하다.

그래서 안평대군(安平大君)ㆍ김종서(金宗瑞)ㆍ황보인(皇甫仁)이 무고(誣告)로 죽은 것과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의 큰 절의도 모두 감추고 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꽃다운 향기와 나쁜 냄새는 섞이기 어렵고 하늘의 이치는 지극히 밝으니 비록 문자에 실린 기록은 없지만 세상 사람의 입은 가릴 수 없는 것이다.

○ 박원종(朴元宗)의 공은 장하도다. 그는 무인(武人)으로서 문()까지 겸한 자로다.

○ 김종서(金宗瑞)의 충성은 크도다. 그 몸이 죽지 않았으면 임금이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 성삼문(成三問)의 뜻은 슬프도다. 그는 해도 안 될 것을 알면서도 한 것이로다.

○ 우리 나라에서 선비로 이름난 자는 대부분 그 성명(性命)을 보전하지 못했으니, 세종(世宗) 때에 배양(培養)된 자는 노산(魯山)을 폐할 때에 그 절의가 나타났고, 성종조 때 배양된 자는 모두 연산(燕山) 때 죽임을 당하였다. 그 밖의 기묘년 화와 을사년 화에 유종(儒宗)ㆍ거경(巨卿)으로부터 아래로 대각(臺閣)에 이르기까지 죽음을 당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며, 명종(明宗)이 죽고 선조(宣祖)가 대통(大統)을 이어받자, 그 후 40년 동안에는 큰 형옥(刑獄)이 없었으며, 기축년 연간에 비록 옥사(獄事)는 있었지만 1년이 지나지 못하여 이내 끝났다.

여기에 연루되어 죄를 입은 자는 임진년 여름에 모두 깨끗이 씻어져서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용서해서 석방하고 도로 벼슬을 시켰으니, 저 탕() 임금의 그물을 풀어 준 인()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그 뒤에 송유진(宋儒眞)ㆍ이몽학(李夢鶴) 등의 역옥(逆獄)이 일어나서 이산해(李山海)ㆍ이덕형(李德馨) 같은 이가 모두 역적의 초사(招辭)에 관련되었으나 선조는 특별히 용서하여 불문에 부치고 다만 역적을 죽이는 데 그치고 딴 사람에게는 미치지 않았다. 선조가 승하(昇遐)한 뒤로 무신년에 이르기까지 고변(告變)하는 일이 날마다 있어 10년 동안에 국청(鞫廳)을 계속해서 설치하였으니, 이는 사람 죽이는 것을 즐겨하지 않는다는 훈계와는 거리가 멀다.

○ 이재(吏才 관청 사무를 잘 처리하는 것)는 바로 문서를 쓰는 하급 관리의 임무로 귀하게 여기지는 않지만 재상으로 이재가 있는 자 또한 얻기 어렵다. 나는 젊어서부터 조정에 벼슬하여 낭료(郞僚)의 몸으로 거공(巨公)들 사이에 놀았는데, 오직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ㆍ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ㆍ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등 세 정승이 이재(吏才)에 뛰어났다.

바야흐로 임진ㆍ계사년에 왜적이 들끓어 중국 군사가 성 안에 가득할 때 격문이 여기저기에서 날아들어 처리할 문서가 산같이 쌓였는데, 서애는 도착하면 내가 글씨를 빨리 쓴다 해서 반드시 나에게 붓을 잡으라 하고, 입으로 글을 불러 계속하여 몇 편이고 글을 이루는데 빠르기가 풍우(風雨)와도 같아서 붓을 쉬지 않고 글을 쓰는데 그 글에 점 하나도 더하지 않고도 빛나게 문장을 이루었다. 비록 자주(咨奏)의 글이라도 이러해서 사신(詞臣)으로 명을 받고 글을 지어 바치는 자라도 여기에 가감을 할 수가 없었으니 참으로 기재(奇才)였다. 한음과 백사는 그 다음이다.

4, 5년 이래로 무관(武官)과 음관(蔭官)의 크고 작은 벼슬자리 임명은 밖으로는 망()에 올리는 것과 안으로는 낙점(落點)을 받는 것까지 모두 뇌물을 쓰게 되니 시중의 장사꾼들이 그것을 주장해서 가령 무슨 벼슬을 하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시중의 장사꾼이 먼저 은() 얼마쯤을 내서 그 벼슬의 고하(高下)와 좋고 나쁨을 보고 더하고 덜해서 한편으로는 전관(銓官)에게 은()을 바쳐서 망()에 올리도록 하고, 한편으로는 궁인(宮人)에게 은을 바쳐서 낙점을 받는 길을 만든다.

뇌물이 다 들어가고 나면 그 사람은 앉아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얻어서 병사(兵使)나 수사(水使)가 되고자 하는 자는 병사나 수사가 되고, 목사(牧使)나 부사(府使)가 되고자 하는 자는 목사나 부사가 되고 그 이하로 군()ㆍ현()ㆍ진()ㆍ보()에 이르기까지 값을 주고서 제수를 받지 못하는 자는 없다. 이리하여 장사꾼과 그 사람이 전후로 부임하면 그 사람은 백성들의 재물을 긁어 내어 밤낮으로 모아서 뇌물로 쓴 값에 배를 주어 갚으니 1백 냥을 쓴 자는 2백 냥을 얻고 2백 냥을 쓴 자는 4백냥을 얻으며, 몇천 냥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벼슬을 얻은 자가 그 값을 갚기 전에 파면당하거나 혹 죽게 되면 장사꾼은 곧장 그 집에 찾아가서 갚게 하기 때문에 심지어는 집과 전장(田莊)과 종까지 모두 팔아서 갚는 일도 있다. 이정표(李廷彪)는 무반(武班) 중에서도 가장 무뢰배(無賴輩)였다. 무신년과 계축년 사이에 임해군(臨海君)과 대군(大君)을 죽일 때에 도와서 이로 인하여 뽑혀서 병사(兵使)에까지 올라갔고, 갑인년에 강화 부사(江華府使)로 있을 때에는 또 장사꾼을 시켜 은() 여러 백 냥을 바쳐 통제사(統制使)가 되었다. 그러나 진소(鎭所)에 가자마자 독한 병에 걸려 죽으니 그 장사꾼이 손해 보고 분이 나서 전주(全州)에 있는 본가(本家)로 가서 받았다 하니 이것이 그 한 가지 예이다.

○ 성종이 생가 아버지를 추존(追尊)하여 덕종대왕(德宗大王)으로 삼았는데, 선유(先儒)들의 정론(正論)으로 말한다면 마땅히 송 나라 영종(英宗)의 박왕(?)과 같이 할 뿐이거늘 덕종까지 아울러 종묘에 들어가게 한 것은 예법의 상도(常道)가 아니다. 추존할 시초에 성종이 공경(公卿)들에게 의논하니 혹은 옳다 하고, 혹은 옳지 않다고 하여 삼사(三司)가 진계(陳啓)하기에 이르렀는데, 오직 이승소(李承召)만이 유독 추존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여 그에 대한 상소가 몹시 장황했다.

성종이 비록 그의 말을 채용해서 마침내 추숭(追崇)할 계획을 이루었으니 마음으로는 그가 남의 비위를 맞추는 것을 추하게 여겨 이승소를 등용하되 큰 벼슬은 주지 않아 이품(二品)에 이르렀을 뿐이니 식자들이 비웃었다.

해평(海平) 윤근수(尹根壽)가 명종 때에 경연에 입시하여 조정암(趙靜菴)의 죄명을 신원(?)할 것을 청하니 명종이 크게 노하여 곧 외직(外職)으로 내보냈다. 이는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의 의론이 명종 중년에 이르도록 여전히 고질이 되어 있었으니, 소인(小人)들의 화야말로 참혹하다 할 것이로다.

○ 십 수년 이래로 사대부(士大夫)들 사이에도 더러 풍수(風水)를 말해서 자기 부모를 이장(移葬)하는 자까지 있으니 식자들이 탄식했다. 임자년 연간에 도읍을 옮기자는 말을 임금께 아뢴 자가 있어 이것을 조정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성지(性智)와 시문용(施文用) 등이 있어 세 대궐을 짓자는 의논을 임금께 아뢰어 토목 공사가 크게 일어나 백성들이 도탄(塗炭)에 빠져 온 나라가 시끄러웠으니, 모든 일에는 모두 먼저 그 조짐이 없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일에 하려면 처음을 잘 하여야 하는 것이다. 성지는 중으로 처음에는 풍수로 사대부의 집에 출입하면서 산을 보아 자리를 잡아 주었는데, 마침내 임금에게 잘 뵈었다. 그는 일정한 거처가 없었는데 요즈음 세 대궐 근처에 집 하나를 짓고 중을 기르므로 떠돌이 중들도 맘대로 출입하니 흡사 하나의 절처럼 되었다.

○ 시문용(施文用)은 임진년에 나온 중국 군사로 도피하고 돌아가지 않은 자이다. 정인홍(鄭仁弘)이 자기 친척집 누이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고, 시문용은 풍수와 점치는 것을 이야기하여 정인홍이 일동일정(一動一靜)을 모두 물어서 길흉(吉凶)을 점치더니, 마침내 임금에게 천거해서 토목 공사를 일으키는 계제가 되었다.

○ 국가에서 영()ㆍ진()을 설치하고 군대의 수효를 정하여 방비하게 하는데, 평시에는 훈련하고 일이 있으면 방비하고 막는다. 때때로 어사(御史)를 보내서 변장(邊將)들이 아fot사람들을 학대하는 것을 염탐해서 법으로 다스렸다. 그 금제(禁制)가 이러한데도 여전히 토색질하고 포악한 자가 있으니 지난날 군무(軍務)를 실패한 폐습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는 자기 한 몸만 살찌우려 해서일 뿐만이 아니라 조정에서 요구하는 조공포(助工布) 같은 물건의 가짓수 하나만이 아니어서이다. 그러므로 변장(邊將)들이 백수(白手)로 아무것도 소득이 없는 자는 다만 군사를 침해하는 한 가지 일뿐이다. 그런데 이는 북도(北道)의 진보(鎭堡)가 더욱 심하니 병란이 한 번 일어나면 어떻게 뒤처리를 하려는지 모르겠다.

○ 을사년의 화에는 비록 여주(女主)가 대위를 담당하여 고관들이 도륙을 당하였으나 수년이 지난 뒤에도 오히려 청류(淸流)가 등용(登庸)된 일이 있었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오늘날처럼 이름 높은 이를 모두 내쫓아 한 사람도 조정에 있는 이가 없는 것은 진실로 옛날에는 없는 일이다.

○ 남사고(南師古)는 명종(明宗) 때 사람으로 관동(關東)에 살았다. 그는 풍수(風水)와 천문(天文)ㆍ복서(卜筮)ㆍ상법(相法)을 잘 알아서 모두 전해지지 않는 비결(?)을 얻었으므로 말하면 반드시 맞았다. 명종 말년에 서울에 와 살면서 판서(判書) 권극례(權克禮)와 친했는데, 일찍이 말하기를, “오래지 않아서 조정에 반드시 분당(分黨)이 생길 것이며, 또 오래지 않아서 반드시 왜변이 있을 것인데, 만일 진년(辰年)에 일어난다면 그래도 구할 수 있지만, 사년(巳年)에 일어난다면 구할 수가 없을 것이다.”하고, 또 일찍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사직동(社稷洞)에 왕기(王氣)가 있으니 마땅히 태평성대의 임금이 그 동네에서 나올 것이다.”하였다.

김윤신(金潤身)과 함께 동교(東郊) 밖을 지나다가 태릉(泰陵)근처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내년에 동쪽으로 태산(泰山)을 봉할 것이다.”하니, 김윤신이 괴상히 여겨 다시 물으니, 남사고가 말하기를, “내년에 저절로 알 것이다.”하였다. 이렇게 말 한 것을 일일이 다 들 수 없다. 조정이 을해년부터 의론이 두 갈래로 갈라지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거의 50년이 되는데도 그치지 않으며, 왜병의 침입은 임진년에 시작되었으며, 선조(宣祖)가 사직동 잠저(社稷洞潛邸)에서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었으며, 태산(泰山)이란 곧 태릉을 말한 것으로 문정왕후(文定王后)가 그 이듬해에 돌아가서 태릉에 장사지냈다. 우리 나라에도 이러한 사람이 있었으니 기이한 일이다.

○ 역대(歷代)로 천하를 차지한 나라 중에는 오직 한() 나라가 정당했고, 한 나라 이후로는 모두 신하로 임금 자리를 탈취한 것이니, () 나라가 나라를 세운 것은 도둑의 무리에게서 빼앗은 것과 같으니 고조(高祖)는 자신이 신하가 되었던 것이다. 황조(皇朝 명 나라)에 이르러서는 실로 적을 제거하고 나라를 연 공이 있었으나, 그가 대위에 오른 것은 적을 제거한 뒤에 하고, 임금이 되는 데에 서두르지 않았다. 그가 먼저 힘쓴 일은 종묘(宗廟)를 일으키고 사직(社稷)을 세우고 공자의 사당을 설치하며 인재를 일으키고 절약과 검소함을 우선으로 하여 사방을 교화시킨 가르침이 이루 다 셀 수가 없었으니, 이야말로 백성을 위하여 명()을 세운 것이다.

장사성(張士誠)이 잡혀왔을 적에 그를 반드시 살려 주고 해치지 않으려 했으며, 심지어는 관()을 주어 장사지내게 했고, 진리(陳理)가 와서 항복하자 그 손을 잡고 말하기를, “가족들을 모두 모아서 살라.”하였고, () 나라 세자(世子)가 잡혀오자 포로로 바치지 못하게 하고, 말하기를, “원 나라가 비록 오랑캐이나 들어와서 중국의 주인 노릇을 해서 백년 안에 인종이 많이 번식했고, 집집마다 풍족하며 짐()의 조부(祖父)도 이곳에서 태평을 누렸으니, 옛날에는 비록 포로를 바치는 예가 있었지만 나는 차마 그렇게 할 수 없다.”하였으니, 이 말이 족히 천하 만세(萬世)를 덮을 만하도다.

() 나라 무왕(武王)을 성인(聖人)이라고 일컬었으나 주()는 보옥(寶玉)을 입고 타 죽는 것을 면치 못했으며, 달기(?)는 태백(太白)의 깃대에 매달렸으니 그 명 나라 태조와 비교하면 어떠한가. 하물며 백년 동안 괴롭히던 오랑캐를 중국 땅에서 쫓아내고 다시 삼대(三代)의 태평 시대를 보게 되었으니, 나는 그의 공이 우() 임금 아래에 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선조 때의 역사 기록은 임진왜란에 사관(史官) 조존세(趙存世)ㆍ박정현(朴鼎賢)ㆍ임취정(任就正)ㆍ김선여(金善餘) 등이 불살라 없애고 도망가서 정묘년부터 신묘년까지 25년간의 사적이 캄캄하여 알 수가 없다.

○ 선조(宣祖)가 승하하자 실록(實錄)을 만드는데 나와 월사(月沙) 이공(李公)이 유사당상(有司堂上)이 되고, 백사(白沙) 이공(李公)이 총재관(摠裁官)이 되었다. 내가 백사에게 말하기를, 25년 동안의 사적을 그날그날의 일을 다 찾아서 기록하자면 비록 10년이 걸려도 물어서 완성할 수가 없을 것이오.

그때 명공 거경(名公巨卿)의 행적이 뚜렷하게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있는 것이 많으니, 만일 이것만 기록해서 마치 열전(列傳)처럼 만든다면 당시의 사적이 모두 드러날 수 있을 것이며, 곤월(袞鉞)의 의()도 여기로 인해서 얻을 수 있을 것이오.”하니, 백사도 내 말을 옳게 여겨 나누어서 기록하려 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계축년의 화가 일어나 나는 먼저 내쫓기고 백사도 점이 찍혔으며 월사도 파직당했다. 이에 권력을 잡은 사람이 실록을 쓰는데 한결같이 자기가 좋아하고 미워하는 대로 썼으니, 이야말로 나라가 망하기 전에 역사가 먼저 망하게 되었다. 선조 말년에 혜성(彗星)이 자미성(紫微星)에 나와 삼태성(三台星)을 없앴으며 우림성(羽林星)이 시원성(市坦星)으로 들어가더니 선조가 승하하여 조정이 일신(一新)되었다. 또 유성(流星)이 여러 번 헌원(軒轅)에 들어가더니 궁인(宮人)들이 모두 비명(非命)에 죽었으니 하늘의 형상은 속일 수가 없도다.

○ 신우(辛禑)와 신창(辛昌)의 일은 마땅히 원천석(元天錫)이 기록한 것을 확실한 사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최영(崔瑩)이 죽자 고려(高麗)에 사람이 없었으며, 정도전(鄭道傳)이 들어가자 고려에 역적이 생겼으니, 이른바 한 사람으로 나라가 흥하고 한 사람으로 망한다는 것이로다.

○ 신우(辛禑) 때에 윤소종(尹紹宗)이 간관(諫官)이 되어 신우의 잘못을 말하는데, 바로 지적하고 조금도 남겨 두는 것이 없어 마치 죄를 꾸짖는 것처럼 했으니, 이 어찌 참으로 바른말한 것인가. 이는 한() 나라의 곡영(谷永)이 오로지 임금을 공격한 데 지나지 않는 것으로 임금의 악을 드러내서 손바닥 위에서 희롱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두 임금에게 복종할 수가 있었겠는가.

○ 만력(萬曆) 신축년 겨울에 내가 옥당(玉堂)이 되었는데, 선조가 동방(東方) 사람들의 시부(詩賦)를 추려서 바치라 했다. 내가 이것을 모으기는 했으나 탈고(脫稿)하기 전에 일이 있어 틈을 얻어 집에 있게 되어서 이 일을 문형(文衡)에게 돌려보냈다. 문형(文衡)은 오봉(五峰) 이호민(李好閔) 공으로 그 역시 오래도록 이를 미루고 이루지 못했다. 을사년에 오봉이 문형직에서 바뀌자 서경(西坰) 유근(柳根) 공이 대신하였고, 나도 납언(納言)에 제수되여 승정원으로 들어갔다.

이에 선조가 다시 이 일을 명하여 부서를 열고 올바로 선별하게 하고 오봉(五峰)ㆍ서경(西坰)과 나로 하여금 그 일을 맡게 하고, 해평(海平) 윤근수(尹根壽) 공ㆍ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공ㆍ유천(柳川) 한준겸(韓浚謙) 공ㆍ만취(晩翠) 오억령(吳億齡) 공ㆍ부제학 홍경신(洪慶臣)ㆍ첨지중추부사 정협(鄭協)ㆍ정언(正言) 김현성(金玄成)이 참여하게 되었다. 책은 모두 네 권이고 서경이 서문(序文)을 썼다.

○ 조남명(曹南溟)의 이름은 식()이고, 자는 건중(楗中)이다. 절의(節義)를 숭상하여 천길 절벽(絶壁)에 선 듯한 기상이 있었다. 숨어 살고 벼슬하지 않았으며 문장을 짓는 데에도 기위(奇偉)하고 속되지 않았으니,

 

 

청컨대 천석 종을 보라 / 請看千石鐘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 非大叩無聲

만고의 천왕봉은 / 萬古天王峯

하늘이 울려도 오히려 울지 않는다 / 天鳴猶不鳴

 

는 것과 같은 시는 시운(詩韻)이 호장(豪壯)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자부(自負)함도 얕지 않았다. 유독 괴이한 것은 그의 학문이 일차로 정인홍(鄭仁弘)에게 전해졌는데 정인홍이 허다한 형옥(刑獄)을 만들어 내어 백년의 기강을 무너뜨린 것이다. 그러나 양귀산(楊龜山)도 육당(陸棠 귀산(龜山)의 제자(弟子))에게 어찌하겠는가.

○ 아조(我朝)에 부자가 서로 이어서 정승이 된 자가 조종조(祖宗朝) 때에는 상당히 많았으나, 중세에는 전혀 없었다. 근대에는 홍언필(洪彦弼)ㆍ홍섬(洪暹)이 있고, 지금은 정유길(鄭惟吉)ㆍ정창연(鄭昌衍)과 윤두수(尹斗壽)ㆍ윤방(尹昉)이 있는데, 정유길은 바로 옛 정승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의 후손이다. 문익은 당시의 명상(名相)이었고, 정유길은 곧 그의 손자이며, 정창연은 그의 증손(曾孫)이다. 정창연의 종형(從兄) 역시 정승이 되어 사대(四代)에 정승 넷이 있었으니, 세상에서 보기 드문 일이다.

○ 박원효(朴元孝)는 가정(嘉靖) 연간에 우상(右相)이 되었다. 형제가 9명이 있었으며 매부(妹夫) 이동발(李東發)과 같은 때에 정사에 간여했는데, 마침 부정한 일이 있어 박원효가 임금에 아뢰어 파면되었다. 이때 정언(正言) 김선철(金先哲) 등이 대간(臺諫)으로 소()를 올리니, 성종은 본래 그가 관후(寬厚)하다고 일컫던 터라, 박원효를 만나고자 하였으나 마침 병이 있어 교서를 내리기를, “나의 병을 경()등이 아는가. 만약 죽게 되면 경들은 나에게 어찌 하겠는가.”하였다.

이리하여 박원효가 석방되어 와서 임금께 뵈니, 임금이 웃으며 이르기를, “내 몸의 병이 위독한 것은 공()이 오기를 바란 까닭이더니, 이제 경을 보니 내 병이 곧장 낫는도다.”하였다. 그 뒤에 우상(右相)으로 졸()하자 밀양군(密陽君)으로 봉했고, 시호(諡號)를 혜문(惠文)이라고 했으며, 공의 아우 박원의(朴元義)도 우상이 되어 졸하니 태안군(泰安君)으로 봉하고 시호(諡號)를 충민(忠愍)이라 했다.

공의 아홉 형제가 모두 태사(台司)에 들어갔으며, 충민공(忠愍公)의 아들 박선문(朴善文)이 그 아우 박선일(朴善一) 3명과 일시에 과거에 올라 모두 벼슬이 좌우상(左右相)에 이르렀고, 그의 자손들이 그 명예를 잃지 않아서 이미 56대에 이르러 정삼품(正三品)이나 정사품(正四品)이 끊어지지 않으니, 세상에서 말하기를, “천도(天道)가 어그러지지 않아서 우러러볼 곳이 있으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리오.”한다.

 

 

[D-001]괘안동문 : () 나라 장군 자서(子胥)가 참소를 입고 죽을 때, “내 눈을 빼서 오 나라 동문(東門)에 걸어 놓아라. 장차 오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야 말겠다.”하였다. 《史記》 〈子胥傳〉

[D-002]하늘이 만일 …… 나에게 어찌하리 : () 나라 양호(陽虎)가 광() 땅 사람에게 폭행한 일이 있었는데 공자(孔子)가 그곳을 지나자 광인(匡人)은 공자의 얼굴이 양호와 같다 하여 무기를 들고 5일 동안을 포위하니, 공자가, “하늘이 사문(斯文)을 아주 없애려 하지 않는다면 광인이 나를 어찌하겠는냐.”하였다.

[D-003]함장(函丈) : 《예기(禮記)》에 석간함장(席間函丈)이란 말이 있고 그 주(), “함()이란 용납한다는 뜻으로 학문을 가르칠 적에 선생과 청강하는 제자와의 거리가 한 길쯤 떨어진다는 것이다.”하였다.

[D-004]() 임금의 그물을 풀어 준 인() : 《사기(史記)》〈은본기(殷本記)〉에, “탕() 임금이 외출하다가 보니 사냥꾼이 사면에 그물을 치고 빌기를, ‘천지 사방의 짐승은 모두 내 그물 안으로 들어오라.’하므로, 탕 임금은, ‘아, 다 잡을 작정인가.’하고, 그 삼면은 풀어놓게 하고 빌기를, ‘왼편으로 가려거든 왼편으로 가고 오른편으로 가려거든 오른편으로 가라.

그렇지 않으면 내 그물로 들어오라.’하였다.”고 하였다.

[D-005]곤월(袞鉞)의 의() : 범영(范寗)의 《춘추전(春秋傳)》서(), “한 글자의 칭찬이 곤의(袞衣)보다 낫고 한 글자의 나무람이 부월(斧鉞)보다 엄하다.”하였다.
출처 : ▒ 한 산 草 堂 ▒
글쓴이 : 천하한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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