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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대동야승 소문쇄록(?聞?錄) -조신(曺伸) -

장안봉(微山) 2013. 5. 28. 22:57

소문쇄록(??) 

 

 

조신(曺伸) ()

○ 삼국(三國) 시대에, 고구려는 압록강 일대에 걸쳐 있었고, 신라는 북쪽으로 한강에 이르고, 동쪽과 남쪽은 바다에 닿아 있어, 땅이 진실로 백제의 배나 되었다. 백제는 지금의 전라ㆍ충청 두 도의 경계이다. 국토는 수백 리에 국한되어 있었는데, 능히 고구려ㆍ신라 두 나라를 업신여기고 싸울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국민의 성품이 강하고 병졸들이 용맹하여서 그랬을까. 그렇지 않으면, 땅은 좁아도 인구가 두 나라에 비하여 가장 많았기 때문일까. 모두 알 수 없는 일이다.

○ 세 나라의 땅을 다 합쳐도 사방 수천 리에 불과하지만, 국사(國史)에 각각 기록되어 있는 재변이나 길ㆍ흉ㆍ화ㆍ복이 모두 다르다. 일식과 월식의 경우만 하더라도 신라에는 쓰여 있는데, 백제, 고구려에는 반드시 없었던 것은 아닐 터인데도, 쓰여 있기도 하고 안 쓰여 있기도 하니 어찌 된 일이냐.

○ 보통 경주를 동경(東京)이라 하고, 평양을 서경(西京)이라 하며, 개성을 송경(松京)이라고 했는데, 내가 모두 두루 다녀보았다. 동경의 오릉(五陵)ㆍ무산영묘(巫山靈廟)ㆍ포석정(鮑石亭)ㆍ첨성대(瞻星臺)와 서경의 정전(井田)ㆍ을밀대(乙密臺)ㆍ관풍전(觀風殿)ㆍ기린굴(麒麟窟) 등은 고도(故都)의 유적인데, 천년을 지나온 지금 그 시대의 형상을 비슷하게 알 수 있다. 송도(松都)가 무너진 것으로 말하면 최근 1백여 년 전의 일인데, 32왕의 능묘(陵墓)나 명공(名公)과 거경(巨卿)의 저택과 정자, 누대가 없지 않았을 터인데, 그 지방에 쇠잔한 비()라든가 단갈(短碣) 같은 것을 찾으려 하여도 많이 얻을 수가 없으니, 고려의 풍속은 비석 세우기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인가. 지금은 9품의 선비가 죽어도 모두 단갈이나 비석을 세워 후세 사람이 그것을 보고 고인을 생각하게 하는데, 이런 일은 너무 나무랄 것이 아니다.

○ 영릉(英陵 세종) 갑진년에,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서호(西湖)의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지었다. 그때 한창 가뭄이 심하였는데, 임금이 거기에 행차를 했더니 마침 비가 내렸으므로 그 정자의 이름을 희우(喜雨)라고 하였다. 성종(成宗) 계묘년에 그 정자가 저절로 무너졌는데, 이듬해 갑진년에 월산(月山)대군이 효령에게서 물려받아 그 정자를 다시 세우고 망원(望遠)이라고 불렀다. 임금의 율시 3수를 써서 편액을 만들어 걸었는데, 61년이 되니 정자의 흥폐도 반드시 운수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이 경상 감사로 있을 때에, 남지(南智)가 새로 경상도 도사(都事)로 임명되어 온다는 말을 듣고 걱정되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아니가 젊고 문벌이 높은 집의 자제이므로, 반드시 직무를 옳게 처리하지 못할 것인데 내 어찌할까.” 하였다. 남지가 처음 도착하여 뵈려 들어올 때에, 공이 시험해 보려고 판별하기 어려운 공사(公事) 문서를 뽑아 주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이를 처결해 오라.” 하고, 그가 물러가자 사람을 시켜 하는 행동을 엿보게 했더니, 한창 손[]과 함께 장중(帳中)에서 술만 마구 마시고 있으므로 공이 탄식하기를, “과연 나의 추측과 같구나.” 하였다. 이튿날 남지가 술이 깨자 일어나 그 문서를 한 번 훑어보고는 손톱으로 그어 표를 하고 공에게 드리면서, “아무 글자가 빠졌으니 아마 잘못된 것이요, 아무 일은 그릇되었으니 판별해 보아야겠습니다.” 하므로, 공이 깜짝 놀라 탄복하였다. 그로부터 특별히 남다르게 대접하였다. 남지가 한 기생을 사랑하여 임신하게 했는데, 하루는 선물로 들어온 배[]가 남은 것이 있으므로 공이 짐짓 남지에게 말하기를, “내 친구가 앓고 있어 배를 보내려는데 그대도 응당 병든 친구가 물론 있겠지.” 하니, 곧 일어나 있다고 대답하였다. 한 그릇을 나누어주고 몰래 엿보게 하였더니 그 기생이 먹고 있었다. 남지가 뒤에 공이 농으로 그랬던 것을 알았다. 진양(晉陽 진주)에 이르러 촉석루(矗石樓)에 올라, 공이 남지를 돌아보며, “우리 고장의 산수가 참으로 기이하지 않은가.” 하였더니, 남지가 쳐다보며 하는 말이, “산천은 아름다운 원님이 농을 좋아해서 탈입니다.” 하고, 서로 희롱을 하였다. 뒤에 하연이 정승으로 있을 때에 남지도 정승이 되자 하연이 말하기를, “감사(監司)가 발이 빠르지 못했더라면 도사(都事)에게 밟힐 뻔하였구나.” 하였다.

○ 서하(西河) 임원준(任元濬)의 자는 자심(子深)인데 총명이 매우 뛰어났었다. 일찍이 죄를 짓고 밀양부(密陽府)로 귀양갔을 때, 관찰사 박()이 순행하다가 밀양부에 이르러 그의 문장을 시험해 보니, 메아리처럼 대답을 잘하였다. 또 그의 기억력을 시험하려고 무려 5백 명이나 되는 관기(官妓)의 명부를 가져다가 공에게 한번 보인 뒤에 그 명부를 감추고 공으로 하여금 이름을 불러보게 하였더니,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을 뿐더러 그 순서도 틀리지 않았다. 박공이 탄복하여 곧 말을 달려 임금께 아뢰기를, “이러한 사람은 우리 나라에서 흔히 얻을 수 없으므로, 비록 작은 죄가 있다 하더라도 끝내 버릴 수는 없사오니, 원컨대 빨리 불러올리소서.” 하였더니, 세종이 곧 불러오게 하였다. 예궐하는 날 임금이 연침(燕寢)에서 창너머로 동궁(東宮)에게 이르기를, “옛 사람 중에 바리때[]를 쳐 시를 재촉한 사람도 있었고, 일곱 걸음 만에 시를 지은 자도 있었으니, 마땅히 구름으로써 시제(詩題)를 삼고, 운자를 불러서 이 선비에게 시를 짓게 하라.” 하였더니, 공이 즉석에서 지어 올렸는데 이르기를,

 

화창한 봄이 지나간 뒤에 / ?蕩三春後

만리에 구름은 멀리 드날리도다 / 悠揚萬里雲

바람을 능멸하여 천길이나 곧고 / 凌風千丈直

햇빛에 비치어 오색무늬 찬란하구나 / ?日五花文

상서로운 빛은 옥전에 어리었고 / 祥光凝玉殿

서기는 금문을 에워쌌도다 / 瑞氣擁金門

용을 따라 나는 그날을 기다려서 / 待得從龍日

비가 되어 성군을 도우리라 / 爲霖佐聖君

 

하였다. 임금께서 곧 명하여 백의(白衣)로 집현전(集賢殿) 찬서국(撰書局)에 참여하게 하였다.

명 나라 영종(英宗)이 복위하던 날에 세조가 축하의 표문(表文)을 올리고자 하였다. 그때 영성군(寧城君) 최항(崔恒)이 문병(文柄)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표문을 지어 올렸는데, 세조가 임원준(任元濬)을 급히 불렀으나 마침 외출하였다가 조금 늦어졌으므로 세조가 국문하게 하였다. 이윽고 들어오니 이르기를, “너를 부르는 것이 일정한 시간이 없는데, 어찌 한가히 출입하느냐. 이미 너를 국문할 것을 명하였으나, 하복위표(賀復位表)를 곧 지어 올리라.” 하였더니, 원준이 사죄하고 급히 지어 바쳤는데, 그 중에, “열 여덟 해 요순(堯舜)의 덕화가 오랫동안 만백성에 젖었고, 천만 년 국운의 장구함이 다시금 덕 있는 데로 돌아오니, 넓은 하늘 아래 해가 다시 중천에 뜬 듯하구나.”라는 글귀가 있었다. 임금이 기뻐서 이르기를, “대제학이 지은 글을 버릴 수는 없으니, 그 표문 속에 이 글귀를 넣어서 쓰라.” 하였다. 법관이 공의 죄를 결정하여 올리니 임금이 판결하기를, “재주가 일국에서 뛰어나니, 그 공이 죄를 덮을 만하다.” 하였다.

○ 김종서(金宗瑞)가 정승으로 있으면서 정사를 독단적으로 처리하는 일이 많아, 6조의 일도 모두 상부(相府)를 거쳐야 했다. 문성공(文成公 정인지)이 병조 판서로 있었는데, 그만은 그의 지시를 받지 않았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상부는 상부로서 스스로 할 일이 있고, 병조는 병조로서 스스로 할 일이 있는 것인데 어찌 서로 간섭하랴.” 하고, 비록 동청(同廳)에 비방하는 말이 들리더라도 돌보지 않았다. 종서가 그를 꺼려 임금에게 아뢰기를, “정인지(鄭麟趾)가 오랫동안 육경(六卿)으로 있었으니 마땅히 어진이를 우대하여 작질(爵秩)을 높여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벼슬을 판중추(判中樞)로 올려주고서 병권을 교체하였다.

○ 이 문순공(李文順公 이규보의 시호)이 동국의 글씨를 평론하기를, 김생(金生)의 글씨를 신품(神品)의 첫째로 잡고, 중 탄연(坦然)을 둘째로, 진양공(晉陽公) 최우(崔瑀)를 셋째, 유신(柳伸)을 넷째로 쳤다. 또 학사 홍관(洪灌), 재상 문공유(文公裕), 종실의 중 중희도휴(仲曦道休), 시랑 박효문(朴孝文), 재상 유공권(柳公權), 태성후(邰城侯) 김거실(金居實), 재상 기홍수(奇洪壽), 학사 장자목(張自目), 산인(山人) 오생요연(悟生了然)의 것을 묘품(妙品)이라 하여 절품(絶品)의 다음에 두었다. 또 말하기를, “내가 아직 그 글씨를 보지 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하여서는 우열을 말할 수 없다.” 하였다. 우리 동방에 문아(文雅)가 적어서 희귀한 서화로서 문순공 때에 아직 못 보았다는 글씨는 지금에 와서도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한탄스러운 일이다. 고려의 이름 있는 글씨로 유항(柳巷) 한수(韓修), 독곡(獨谷) 성석린(成石璘), 중 유암(幼菴)의 것이 최근 1백여 년 동안에 있기는 하지만, 퍼져있는 것이 많지 않다. 조선의 행촌(杏村) 이암(李岩), 직제학 최흥효(崔興孝), 안평대군(安平大君) (),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 삼재(三宰) 성임(成任), 판서 정난종(鄭蘭宗), 사간 박효원(朴孝元), 임사홍(任士洪), 박경(朴耕) 등이 모두 글씨에 능하였다. 최흥효의 초서와 안평대군의 행서가 세상에 많이 나돌아다녔지만 지금에 와서는 이미 희귀해졌다.

○ 고려의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이 일찍이 시를 지어 성균관에 쓰기를,

 

곳곳에 향등 달아 부처에게 기원하고 / 香燈處處皆祈佛

집집마다 풍류잡아 신을 제사하는데 / 絃管家家盡祀神

홀로 한 칸 부자의 사당에는 / 獨有一間夫子廟

봄풀만 뜰에 가득하여 사람 없이 쓸쓸하구나 / 滿庭春草寂無人

 

라고 개탄하고는, 유학(儒學)의 진흥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고, 노비 1백 가구(家口)를 성균관에 바쳤다. 죽은 뒤에 문묘에 배향되어 조정이나 민간에서 제사지낸다. 지금 공에게 제사지내는 자손이 10대를 이어 모두 과거에 올랐으니, 그의 보답을 누린다고 할 만하다. 공이 병마사(兵馬使)로 합포(合浦)에 수개 월 머무르고 있을 때에, 조정에서 선비를 뽑으려고 급히 불러 시석(試席)을 주관하게 하였다. 그때 장마로 홍수가 넘쳐 공은 사잇길로 성주(星州)에 이르러 시를 지어 이동암(李東菴)에게 보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첫 여름에 병마사로 바닷가에 와서 / 夏初分鉞海邊來

삼경을 지나 치원대에서 시를 읊조렸다 / 吟過三更致遠臺

역리가 번개처럼 달려와 밀지 전하기를 / 驛吏雷馳傳密旨

향시에서 급히 인재를 뽑으라시네 / ?火迫選賢才

성산의 넘치는 홍수를 뗏목 타고 건너서 / 星山暴遼乘?

월굴 맑은 바람에 청운의 뜻을 기르도다 / 月窟淸?養桂?

미리 생각하노니 어전에 이름 아뢰고 경석을 열면 / 預想奏名開慶席

어악 풍류 흥겨운데 비단이 천 무더기로다 / 鳳笙檀板錦千堆

 

하였다. 공의 부자가 서로 이어 합포도절제사(合浦都節制使)가 되었고, 9대 손 침()도 절도사가 되었는데, 공의 시에 차운하기를,

 

문성공의 8대 손이 여기에 와서 / 文成公後耳孫來

검은 창 붉은 기로 옛 대를 찾노라 / ?紅旗訪吉臺

시와 예는 우리 가문의 적선이 될 만하니 / 詩禮我家能積善

문무 어느 대엔들 인재가 나지 않으리오 / 武文何代不生才

나라 위한 일편단심 여기에 있으니 / 勤王一村丹心在

임금 향한 그리움에 천 가닥 백발이 생기도다 / 戀闕千莖白髮?

대대로 가문의 전통을 전하여 잃지 않기를 기약할 뿐 / 傳世靑氈期勿失

부질없이 무더기를 이루는 황금은 달갑지 않네 / 黃金不屑?成堆

 

하였다.

○ 목면(木綿)은 민광(?廣 지금의 복건성 광동성 일대)과 교지(交趾 지금의 베트남) 등지에서 나는데, 그 크기가 술잔 만하다. 그곳 사람들이 그것으로 천을 만드는데, 길패(吉貝)라고 부른다. 송강(松江) 사람이 오니경(烏泥涇)에서 심기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씨아[踏車]와 솜타는 활[推弓] 따위의 연장이 없었으므로 손으로 씨를 뽑고 활줄을 상 사이에 설치해 놓고 그것으로 타서 솜을 뽑았는데, 그 공이 매우 고생스러웠다. 원 나라 초에 황도파(黃道婆)라는 노파가 애주(崖州)에서 와서 솜을 틀고 무명을 짜는 연장을 가지고 깁[]을 섞어서 배색(配色)을 하여 짜기도 하고, 가로 세로 무늬를 놓기까지 하는데, 각각 방법이 있었다. 짜서 옷과 이불ㆍ띠ㆍ수건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그 방법을 다 배우자 서로 다투어 만들어서 다른 고을에 팔았다. 노파가 죽자 사람들이 다 그 은혜에 감사하여 함께 장사지내고 또 사당을 지어 제사하였다. 지금 북경(北京)ㆍ요양(遼陽) 등지에서 남녀가 일상 입는 옷이 다 이 무명이다.

우리 나라는 옛날에 무명이 없어 다만 삼ㆍ모시ㆍ명주실로만 천을 만들었는데, 고려 말에 진주(晉州) 사람 문익점(文益漸)이 일찍이 중국에 갔다가 목면(木綿)의 씨를 구하여 주머니 속에 감추어 넣고, 아울러 씨 뽑는 기구와 실 잣는 기구를 가지고 왔다. 나라 사람들이 다투어 그 방법을 전하여 1백 년도 못 되어 온 나라 안에 퍼져서 지체가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대체로 다 이 무명옷을 입었다. 또 그것을 돈으로 바꾸기도 하고 쌓아두기도 하는 일이 세상에 널리 행하여졌는데, 삼베에 비하여 갑절이나 많이 쓰였다. 처음에는 민월(?) 등 아주 남쪽 지방에서 났으나, 온 천하에 널리 퍼져 사람을 이롭게 했다. 전에는 없었던 이런 물건이 지금 동방에 성하게 된 것은, 익점의 공이 황도파(黃道婆)에 못지 아니하여 나라에서 그 자손을 기용했다고 했다. ‘성()하게’의 성()은 작()으로도 썼다. 옛날에는 그 나라의 부()를 물으면 말의 수효로 대답하였고, 중국 사람은 동전(銅錢)이나 금ㆍ은으로써 빈부를 비교하였지마는, 우리 동방에는 금ㆍ은이 나지 않으므로 우리 조정에서는 전법(錢法)을 시행하지 않고 다만 무명으로 화폐를 삼았다. 무명 35자가 한 필이고, 50필이 한 동인데, 쌓아둔 것이 많아야 1천 동에 불과하였다. 근대의 재상 윤파평(尹坡平)ㆍ상인 심금손(沈金孫)이 무명을 무려 1천여 동이나 쌓아두었다가 갑자ㆍ병인 연간에 함께 뜻밖의 화를 입었다.

○ 《목은집(牧隱集)》을 보건대, 공은 홍무(洪武) 기사년 12월에 귀양가서 장단(長湍)에 있다가, 경오년 4월에 또 지난 일을 논의하여 함창(咸昌)에 중도부처하였다. 8월에 함창에 이르러 삼봉(三峯 정도전)에게 부치는 시에 이르기를,

 

세리는 추호 같이 작고 / 世利秋毫小

우정은 죽 같이 짙도다 / 交情粥面濃

중간에 어긋나게 한 것은 내버려두라 / 任敎中齟齬

백 번 끊어져도 꼬불꼬불 물은 동쪽으로 흐르네 / 百折水流東

 

하였다. 임신년 4월에 또 귀양가 금천(衿川)에 있으면서 송헌(松軒 이태조)에게 부치는 시에서,

 

갑자기 산중의 고을을 내려주시니 / ?賜山中君

안심하고 석양을 보내노라 / 安心送夕陽

 

하였는데, 이는 오히려 산중의 고을에서 늙기를 바란 것이다. 6월에 또 여흥(驪興) 벽촌(?)에 살면서,

 

배를 띄우고 노자암에 이르다 / 有泛舟至??

 

등의 시가 있다. 시는 이것으로 그쳤는데, 성랑(省郞) 제형(諸兄)에게 부치는 12수의 절구는 모두 극히 처절한 느낌이 있다. 이르기를,

 

듣건대, 삼랑이 탄핵된다 하니 / 聞說三郞方被劾

하늘이여 어이하리, 하늘이여 어이하리 / 奈何天也奈何天

 

하였고, ,

 

늘그막 신세에 장단으로 중도부처되었네 / 白頭身世付長湍

 

하는 것이며, ,

 

벼슬길 예나 이제나 위태롭기만 한데 / 宦途今古足危機

늘그막에 시비 일으킨들 무엇이 괴이할꼬 / 何怪衰年惹是非

천지같이 큰 성은에 두 번 절하니 / 再拜聖恩天地大

온 산에 남은 눈이 사립을 덮었도다 / 萬山殘雪掩柴扉

 

하였고, 또 이르기를,

 

현릉(공민왕) 갑인년에 책문을 올리고 / 玄陵策上甲加寅

우왕 때에 급제하여 출신하였네 / ?辛廟始出身

죄받고 지금 황야로 돌아간 사람을 앉아 헤아려보니 / 坐數至今荒野去

뜰에 찼던 귀인들은 한 사람도 없구나 / 滿庭靑柴絶舞人

 

한 것은 갑인년 과거에 등과한 사람들이 신조(辛朝 우왕 때) 출신이라 하여 다 귀양보내고 남아있지 않음을 말한 것 같다. ,

 

붙잡혀 죽은 늙은이 이 4자는 / 捉敗老翁唯四字

쫓겨난 중이 도리어 오륜을 두려워함이다 / 黜僧還恐五輪

 

하였다. ,

 

송헌(이태조)이 나라를 맡았는데 나는 떠돌이 몸이 되었으니 / 松軒當國我流離

꿈속엔들 어찌 이런 생각을 했으랴 / 夢裏何曾有此思

 

한 것은 그 속 뜻이 매우 깊다. ,

 

탄핵하여 용서 없이 바로 죽이자고 했으나 / 彈文直欲殺無赦

아직도 나란히 천지 간에 살아있도다 / 尙幸竝生天地間

 

한 것은, 삼봉(三峯)을 지목한 것인 듯하다.

태조가 일찍이 이색(李穡)에게 가서 그 자()와 거처하는 방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물었는데, 색은, 계수나무꽃이 가을에 희고 깨끗함을 취하여 태조의 자를 중결(仲潔)이라고 하였으며, 계수나무의 짝으로는 소나무 만한 것이 없다. 공이 소중히 여기는 것은 절의이므로, 그 당호를 송헌(松軒)이라 하였다고 한다. 태조가 유교를 숭상하고 도의를 존중하여 평소에 목은을 후히 대접하였는데, 목은이 만년에 비방을 받아 어쩔 줄 몰라하고 거의 매장당할 뻔했지만 끝내 보전한 것이 어찌 태조가 평소에 보살펴준 힘이 아니겠는가. 지금 떠도는 말에 급제하여 선달(先達)이 되었다는 것은 언제부터 그런 말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 가 장원 조서강(趙瑞康)에게 수창한 시에 이런 것이 있다.

 

옛날 양경에서 같이 놀던 일을 생각하니 / 憶昔同遊在兩京

그대는 후진이고 나는 선생이었는데 / 君爲後進我先生

어찌하여 오늘날 선달로 돌아와 / 如何今日還先達

도리어 선생으로 하여금 성명을 우러르게 하는고 / 却使先生仰盛名

 

하였다.

○ 홍치(弘治) 기유년(성종 20) 5 20일에, 예조에 교지를 내리기를, “폐비 윤씨는 죄악이 사책(史策)에 똑똑히 나타나 있으니, 다만 백성이 함께 분노할 뿐만 아니라, 천자께서도 폐위를 허용한 것이니, 어찌 재론할 것이 있겠는가. 나는 박덕하여 좋은 사람을 배필로 얻지 못하고, 위로는 조종의 큰 덕에 누를 끼치게 되었으며, 아래로는 신민의 큰 기대를 저버렸으니, 부끄러운 마음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그러나 천지신명과 조종이 은근히 도와주심을 힘입고, 삼전(三殿)의 간곡하신 깨우침을 받들어 내 몸은 이미 당 나라의 중종(中宗) 이 됨을 면하고 진() 나라 가후(賈后) 의 죄를 밝혔으니, 이것은 대신들이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는 바이다. 지금도 지난 일을 생각하고는 밤중에 탄식하면서 홀로 앉아 잠 못 이룬 지가 몇 날이나 되는지 알 수 없다. 비록 폐비의 제사를 영원히 끊더라도 그 영혼인들 무엇이 원통하며 낸들 무엇이 불쌍하랴마는, 다만 어머니(윤씨)가 아들의 덕으로 영화롭게 됨은 임금이 주는 은혜이고, 훗날의 간악함을 예방한 것은 임금이 하는 정사인 것이다. 동궁(東宮)의 심정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찌 가엾지 않으리오. 이에 특히 그의 무덤을 윤씨의 무덤이라 하고, 묘지가 두 사람을 정하여 시속 명절 때마다 제사를 지내게 하여 그 아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또 죽은 영혼도 감응하게 할 것이니, 비록 내가 죽은 후에라도 영원히 변경하지 말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게 하라.” 하였다.

병진년 봄에 연산(燕山)이 무덤을 옮기는 논의를 하니, 신종호(申從濩)가 그때 예조 참판으로 있으면서 홀로 성종의 유교(遺敎)를 내세워 그 옳지 않음을 극언하였다. 연산의 노여움이 대단하였지만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사당을 짓고 신주 세우기를 의논할 때, 옛날의 제도를 인용하여 아뢰기를, “장사를 지내면 반드시 신주를 만들어 귀신을 편안하게 하고, 반드시 사당을 세워 제사를 받드는 법입니다. 윤씨가 전하를 낳아서 길렀으니, 마땅히 사당에 높여 받들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선왕께 죄를 얻었으니, ()를 상고해 보면 온당치 못한 점이 있을 것입니다. 삼가 상고하여 보건대, () 나라 소제(昭帝)의 어머니 조첩여(??)는 그를 위하여 원읍(園邑)을 두고, 또 장승(長承)을 시켜 지키기를 법대로 하였지마는, 사당을 세웠다는 것은 상고할 데가 없습니다. 다만 위현성(韋玄成)의 전기에, ‘효소태후(孝昭太后)의 침사원(寢祠園)을 수리하지 말라.’ 하였으니, 그렇다면 다만 침사(寢祠 능묘에 있는 사당)만 있고 서울에 사당이 없는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 나라 명제(明帝)의 어머니 견후(甄后)는 신하들이 주() 나라 강원(姜嫄)의 예의 의거하여 따로 침묘(寢廟 종묘) 세우기를 청하니, 그 의견을 옳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강원은 제곡(?)의 비이고 후직(后稷)의 어머니였습니다. 주 나라에서 후직을 높여서 시조를 삼았으니, 강원은 배향할 데가 없으므로 특별히 사당을 세워서 제사지냈던 것입니다. 견후와 강원은 그 일이 같지 않은데 위 나라의 신하가 끌어다가 예()로 삼았으니, 대개 당시에 억지로 끌어댄 말이었던 것입니다. 만일 한 나라를 본받으려면, 원침(園寢)은 우리 나라의 제도가 아니오며, 위 나라를 본받으려면, 억지로 끌어댄 잘못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하물며, 한 무제(漢武帝)와 위 문제(魏文帝)는 모두 남겨놓은 교시가 없었으니, 지금의 형편과는 같지 않습니다. 폐비는 이미 종묘와는 인연이 끊어졌으니 전하께서 사사로운 은혜로써 예()를 어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비록 사당과 신주를 세우지 않고 묘에만 제사지내어도 족히 효도를 다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 논의가 비록 채용되지는 않았으나 논리가 매우 옳아 다른 여러 논의가 이것을 누르지는 못하였다.

○ 서울과 연경(燕京) 사이는 3 2 45리인데, 서울 성문(城門)에서 의주(義州)까지가 1 1 40리요, 의주에서 요동(遼東)까지는 5 50리이다. 요동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사이에는 안산(鞍山)ㆍ해주위(海州衛)ㆍ우가장(牛家莊)ㆍ사령(沙嶺)ㆍ고평(高平)ㆍ반산(盤山)ㆍ광녕위(廣寧衛)ㆍ여양(閭陽)ㆍ십삼산(十三山)ㆍ능하(凌河)ㆍ행산(杏山)ㆍ연산(連山)ㆍ조장(曹莊)ㆍ동관(東關)ㆍ사하(沙河)ㆍ고령(高嶺) 16파발이 있는데, 도합 8 80리이며, 관내에서 연경까지의 사이에 천안(遷安)ㆍ유관(楡關)ㆍ노봉구(蘆峯口)ㆍ난하(?)ㆍ칠가령(七家嶺)ㆍ의풍(?)ㆍ영제(永濟)ㆍ양번(陽樊)ㆍ어양(漁陽)ㆍ공락(公樂)ㆍ하점(夏店)ㆍ노하(潞河) 12 파발이 있는데, 도합 6 70리이다.

○ 고려 때에는 은병(銀甁)을 돈으로 썼는데, 그것을 활구(闊口)라고 했으며 우리 나라의 지형을 본뜬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이 활구의 제도를 보지 못하겠지마는, 대개 우리 나라의 땅 모양이 좁고 길어서 서울에서 남쪽으로는 장흥(長興)에 이르기까지가 9 75리요, 북쪽으로는 강계(江界)에 이르기까지 1 3 59리가 되며, 서남쪽으로는 진도(珍島)까지 9백 리, 서북쪽으로는 의주(義州)까지 1 1 40, 동남쪽으로는 울산(蔚山)까지 9 20리가 되며, 동쪽으로는 영해(寧海)까지 5 40리이고, 서쪽으로 고양(高陽)까지 30리이니, 이로써 활구가 타원형임을 알 수 있다.

○ 서울에서 유구국(琉球國)에 이르기까지 5 4 30리인데, 동래(東萊) 부산포(釜山浦)에서 배로 대마도(對馬島)의 수도 요사지(要沙只)에 이르기까지가 4 80리이고, 여기서부터 강월포(舡越浦)에 이르기까지가 1 90, 일기도(一岐島)의 풍본포(風本浦)까지가 4 80, 모도리포(毛都理浦)까지 50, 비전주(肥前州)의 상송포(上松浦)까지 1 30, 혜라무(惠羅武)까지 1 6 50, 대도(大都)까지 1 4 50, 도구도(度九島)까지 3백리, 여론도(輿論島)까지 5 50리이고, 유구까지가 1 50리이다. 육로 10리를 수로 1리로 치면 수로는 모두 5 43리이다. 일본국에는 모두 8() 66()가 있는데, 기내(畿內) 5주이고, 산성주(山城州) 8() 대화주(大和州) 13, 화천주(和泉州) 3, 하내주(河內州) 12, 섭진주(攝津州) 14군이 있다. 나라의 수도는 산성주에 있는데, 산이 성과 같이 되어 북쪽으로부터 남쪽을 향하여 동서로 에워싸고 있으며 남쪽에 이르러도 합쳐지지 않고 있다. 따로 원산(圓山)이 있는데, 그 어귀에 두 내[]가 있어 동서로 흘러 원산에서 합류하여 남쪽으로 바다에 흘러 들어간다. 수도의 길은 온 사방으로 통해 있어 큰 길이 아홉 줄 있고, 20 6천여 호가 있다. 거리에는 시장이 있고, 국왕 이하 여러 대신이 모두 땅을 갈라가지고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데, 비록 외주(外州)에 살아도 경저(京邸)를 두고 있다. 천황(天皇)의 궁은 동북쪽 구석에 있고 국왕전(國王殿) 은 궁의 서북쪽에 있다. 전산전(?山殿)은 궁의 동남쪽에 있고, 세천전(細川殿)은 국왕이 사는 전의 서쪽에 있으며, 식무위전(式武衛殿)은 국왕이 사는 전의 남쪽에 있다. 이상의 3전은 서로 번갈아가며 관제(管提)를 하는데, 관제는 곧 관령(管領)으로서 국왕을 보좌하여 정권을 잡는 것이다. 경극전(京極殿)은 전산전(?山殿) 남쪽에 있는데, 대대로 형정(刑政)을 맡아보고, 산명전(山名殿)은 국왕이 거처하는 전의 서쪽에 있고, 우무위전(右武衛殿)은 우리 나라와 관계 깊다. 동산도(東山道) 8(), 동해도(東海島) 15주이고, 겸창전(鎌倉殿)이 거처하던 곳인데, 그 나라 사람들이 동도(東都)라고 부른다. 산양도(山陽島) 8주이고, 대내전(大內殿)은 주방주(周防州)에 산다. 대내현(大內縣)의 산구(山口) 다다량(多多良)의 백성은 백제(百濟)의 후손이라 하는데, 병력이 가장 강하다. 남해도(南海道) 6, 북육(北六)을 북륙(北陸)이라고도 쓴다. 도는 7주이고, 산음도(山陰道) 8, 서해도(西海道) 9주인데, 소이전(小二殿)은 축전주(築前州)의 재부(宰府) 에 거처하고, 재부와 박다삼리(博多三里) 사이에는 원씨(源氏) 민가가 2 2백여 호이며 대마도에 소속되어 있다. 대우전(大友殿)은 풍후주(?後州)에 사는데, 그것은 박다(博多)의 동쪽에 위치하고 원씨 주민 만여 호가 있다. 박다는 축전주(築前州)에 있는데 패가대(覇家臺)라고도 일컫고, 혹은 석성부(石城府) 혹은 냉천진(冷泉津), 또는 여기진(?崎津)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진의 민가는 만여 호이다. 소이전과 대우전이 갈라 맡아 다스리는데, 소이전은 서남쪽의 4천여 호를, 대우전은 동북쪽의 6천여 호를 주관한다. 주민은 행상(行商)을 업으로 하고 있으며, 유구(琉球)와 남만(南蠻)의 상선들이 모이는 곳이다. 북쪽에는 백사장이 30리나 뻗쳐 있고 소나무 숲을 이루었다. 우리 나라에서 통행하는 자는 구주(九州) 중에서 박다에 가장 많다. 천엽전(千葉殿)은 비전주에 있어 북으로 박다와 15리 사이이고, 민가는 1 2백여 호이다. 국지전(菊地) 국지(菊池)라고도 쓴다 은 비후주(肥後州)에 있는데, 관장하고 있는 병력이 2천여 명이다. 정통(正統) 8년 계해에 우리 나라의 신 문충공(申文忠公 신숙주)이 사신으로 다녀온 후 지금은 통신하지 않는데, 문충공이 말하기를, “일본의 땅이 흑룡강(黑龍江) 북쪽에서 시작하여 우리 나라 제주도의 남쪽에까지 이르러 유구와 서로 접하여 그 지형이 매우 길다. 최초에는 곳곳에 부락을 이루고 각기 나라를 만들었는데, () 나라의 평왕(平王) 48년에 그 시조가 좁은 들에서 군사를 일으켜서 치고 처음으로 주현을 두었다. 대신이 각각 갈라 맡아서 다스리는데, 중국의 봉건(封建)과 비슷하다.” 하였다.

○ 대마도에는 군() 8인데, 대략 82()에 주민 8 3 70호가 있다. 도주(島主)는 종씨(宗氏)인데, 그 선조 종경(宗慶)이 죽은 뒤에 아들 영감(靈鑒)이 대를 잇고, 그 영감의 아들, 정무(貞茂), 그 정무의 아들 정성(貞盛)이 대를 이었는데, 정성의 아들 성직(盛職)이 죽자 아들이 없어, 성화(成化) 정해년에 섬 사람들이 정성의 어머니의 아우 성국(盛國)의 아들 정국(貞國)을 세워 도주로 삼았다. 정국이 죽은 뒤 아들 정수(貞秀)가 대를 이었고, 군수 이하 사관(士官)을 다 도주가 임명했는데, 그것도 세습이다. 토지ㆍ염전(鹽田)ㆍ민호(民戶)를 나누어주고, 삼번제(三番制)로 하여 7일씩 교대하며 도주의 집을 지키게 한다. 군수는 3분의 1 전세(田稅)를 거두어들이고 또 그것을 3분하여 도주에게 바치고 3분의 1을 자기가 쓴다. 목장이 넷이고 말이 한 2천 필 된다. 풍기군(?崎郡)은 섬의 동북쪽에 있고, 두두군(豆豆郡)은 바로 남쪽에, 이내군(伊乃郡)은 서쪽에 조금 치우친 북쪽에 있고, 괘로군(卦老郡)은 서쪽에, 요라군(要羅郡)은 남쪽에 조금 치우친 서쪽에 미녀군(美女郡)은 서남쪽에, 쌍고군(雙古郡)은 북쪽에 있는데, 3군은 도주 자신이 지킨다. 이로군(尼老郡)은 쌍고군의 남쪽에 있다. 일기도(一岐島)에는 마을이 7개 있는데, 대략 13리에 호수는 1 3 60여 호이다. 14()에 호수는 7백여 호, 논은 6 20 정보인데, 땅이 오곡을 심기에 알맞고, 세 곳의 시장이 있다. 지좌(志佐)ㆍ좌지(佐志)ㆍ호자(呼子)ㆍ압타(鴨打)ㆍ염류(?)를 나누어 다스리고, 세금을 거두기는 대마도와 같다. 지형이 수레바퀴 같이 동서가 반날 길, 남북이 하룻길이고, 면적이 대마도의 절반쯤 된다. 내가 일찍이 연경(燕京) 6, 대마도에 3번 갔었는데, 대마도의 문물과 기후에 대하여 물어보았더니, 말하기를, “대마도가 우리 나라 보기를 우리 나라가 중국을 보는 것과 같이 한다.” 하였다.

○ 연산(燕山)의 비(?)는 재상 신승선(愼承善)의 딸인데, 연산의 황음(荒淫)하고 패륜함이 날로 심하여 매번 바른 말로 간하다가 여러번 부당한 능욕을 당하였다. 이때 숙의전(淑儀殿)의 노자(奴子)라고 일컫는 자들이 사방에 흩어져서 재물을 독점하여 이익을 취하고 평민들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아 차지하였으나, 공사간에 아무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신비는 항시 탄식하되, “여러 궁인들이 나라의 정치를 어지럽게 하니 나는 그 나쁜 것을 본받을 수는 없다.” 하고, 일찍이 내수사(內需司)에게 따끔히 경계하기를, “만일 본궁의 노자들 가운데 횡포한 자가 있다는 소리가 들리면 반드시 먼저 매를 쳐서 죽이리라.” 하였다. 이로써 본궁의 노자들은 감히 횡포하지 못하였다. 등명사(燈明師) 학조(學祖)가 직지사(直旨寺)에 있을 때에, 절에 품질이 좋은 감이 있어 늘 두 바리씩을 내전(內殿)에 바치고 은밀히 아뢰기를, “저의 절이 멀리 떨어져 있사오니, 원하건대, 본궁(本宮)의 노자들을 시켜 해마다 와서 두세 바리씩 실어 가도록 하소서.” 하였다. 신비가 이르기를, “그것은 매우 쉬운 일이기는 하나, 다만 열매가 잘 열리는 해도 있고, 잘 안 열리는 해도 있을 터이니, 만약 안 열리는 해에 본궁의 노자가 가서 정한 바리수대로 거두어온다면 영영 한없는 폐단이 될 것이다.” 하였으니, 신비의 뒷일을 염려함이 이와 같았다. 그의 친척 가운데 지방 고을의 원이 있었는데 홍람(紅藍 빨간 물감의 원료가 되는 풀) 몇 섬과 흰 솜[雪綿子] 수십 근을 바쳤다. 신비는 이것을 물리치면서 말하기를, “백성들이 못 살고 있는데 이런 물건이 어디서 나왔느냐. 나는 차마 받아둘 수 없다.” 하였다.

○ 연산은 평상시에 한 짓이 한없이 잔인하고 사나워서 사람 죽이기를 거리낌없이 하였으므로, 폐위되어 물러갈 때에 마땅히 형벌을 받을 줄로 알고 몹시 두려워하였다. 이날 큰 바람이 일어나 배가 거의 뒤집힐 뻔하다가 간신히 교동(喬桐)에 닿았다. 호위하여 고을 뜰[縣庭]에 들어가니 장수와 군졸들이 둘러섰는데, 연산은 땅에 엎드려 땀을 흘리면서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였으니,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가 궁에서 나갈 때에 신비는 반드시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교동에 가서 별일 없다고 하니, 신비는, “그때에 여러 장수에게 청하여 귀양간 곳으로 따라가지 못한 것이 한이로다.” 하고, 탄식하였다.

○ 매계공(梅溪公)의 자는 태허(太虛) 대허(大虛)로도 쓴다 인데,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여 사람들이 모두 학문에 조예가 깊을 것을 기대하였다. 과연 벼슬자리에 오르자 성종의 지우(知遇)와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어버이를 위하여 군수가 되기를 청하였더니, 4품으로 한 계급 더 벼슬을 올려 함양 군수(咸陽郡守)로 임명하였다. 군수로 있을 때에, 칭찬하는 유시(諭示)를 내려 이르기를, “그대는 문장으로 입신하여 나의 모신(謀臣)으로 나를 위하여 오랫동안 일하여 왔는데, 이제 사직하고 늙은 어버이를 모시기 위하여 가까운 고을의 수령이 되었으니, 부득이한 일일 것이다. 그대는 나의 시종이었으므로 감사에게 명하여 그대의 어버이를 봉양하게 하고,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그대같이 학문에 힘을 다하면 영화가 어버이에게 미친다는 것을 알게 할 터이니 그대는 그렇게 알라.” 하였다. 공이 글을 올려 감사하였다.

이보다 앞서 연말에 지은 시를 임금께 올리게 하였더니, 임금의 마음에 들었으므로 그 부모에게 곡식을 내려주게 하였다. 군수로 있을 때, 임기가 다할 무렵에 어버이의 상을 당하니 또한 부의와 제사지낼 곡식을 내렸는데, 지방관에게 부의의 특전을 내린 것은 전에 없었던 일이다.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는데 연산조 때 점필재(?畢齋 김종직)의 시고(詩藁)를 수찬(修撰)했으므로, 죄를 받고 의주(義州)로 귀양갔다가 순천(順天)으로 옮겨가, 거기에서 홍치(弘治) 계해년에 병들어 죽었는데 그때 나이가 50이었다. 사귄 사람[交結] () 자가 없기도 하다 은 모두 지체 높은 선비들로서, 서로 더불어 조정에서 강론하고, 문장과 역사를 연구하고 익혀 게으름이 없었다. 비록 글에 관계된 일로 유배까지 되었지만 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하여 저술이 자못 많다. 일찍이 《매계총화(梅溪叢話) 10여 가지를 썼으나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 서사천(徐師川)이 유감(有感)이라는 제목의 시에 이르기를,

 

세 조정에 정치하던 한 늙은 신하 / 經濟三朝一老臣

묘당 깊은 곳에 엄연히 큰 띠 드리웠네 / 廟堂深處儼垂紳

당년의 사업을 사람들아 묻지 말라 / 當年事業人休問

신전과 신궁이 불일간에 새롭다 / 神殿神宮不日新

 

하고, 자기가 주석하기를, “그때의 정승 정분(?)이 삼조(三朝 세종ㆍ문종ㆍ단종)의 원로로 어린 임금을 섬기면서 덕의(德義)로 보좌하지는 못하고, 집짓기만을 숭상하여 계유년 6월에 창덕궁전이 이루어지니, 민력이 크게 곤궁에 빠졌다. 혹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대답하기를, “이제 태평한 시대를 당하여 이것밖에는 남은 큰 일이 없다.” 하였다. 나는 이것을 서하(西河) 임공(任公 임원준)에게서 들었다.

○ 문정공(文靖公) 안지(安止)의 호는 고은(皐隱)인데 집현전 대제학으로 있을 때, 당대의 문사들이 안평대군(安平大君)을 따랐으나, 공만은 추종하지 아니하였다.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어 청하기도 하고, 혹은 병풍ㆍ족자에 글씨를 써서 보내면 공은 말하기를, “대군의 편지를 어찌 멀리 앉아서 답하리오. 마땅히 몸소 가서 뵈오리다.” 하고는, 마침내 가지 않았다. 하루는 안평대군 처소에서 여러 문사가 글짓기를 하여 그 고하를 다툴 때에 말하기를, “그 늙은이가 잘 알 것이다. 그에게 물어보자.” 하였던 바, 공은 일부러 글이 잘된 것을 못 되었다 하고, 못 된 것을 잘 되었다고 하였더니, 모든 선비들이 웃으면서, “이 늙은이가 나이가 많아서 정신이 없으니 우열을 가릴 수가 없다.” 하고는, 드디어 청하기를 그만두었다. 세조가 즉위하자 공을 매우 중히 여겼지만 민수(閔粹)의 사옥(史獄) 때 공이 제조였기 때문에 논죄를 면하지 못하여 그의 본관인 전라도 강진현(康津縣)에 좌천되었다. 세조가 감사에게 글을 내리기를, “매양 음식물을 위에 진상할 때에, 반드시 그에게 주고 공의 답례하는 글을 받아서 아뢰라.” 하여, 이렇게 수년 동안 편히 잘 있었다. 어느 날 조회 때에 임금(성종)이 어좌에 납시었는데, 문충공(文忠公) 신숙주(申叔舟)와 충성공(忠成公) 한명회(韓明澮) 등이 늦게 와서 조반(朝班)에 미처 참예하지 못하고 사죄의 말씀을 드리기를, “마침 옛벗이 먼 곳에서 왔으므로 찾아가서 함께 이야기하다가, 늦게 되는 줄 몰랐사오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먼 데 친구라는 것이 누구인가.” 하므로, 안지(安止)라고 대답하였더니, 임금이 기뻐 말하기를, “나 역시 그를 보고 싶으니 급히 불러오라. 그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리라.” 하고, 곧 음식을 많이 차리고 종일토록 즐기고는 명하여 숭정(崇政)에 승진시켰다.

○ 문충공 신숙주의 병이 위독하자 성종이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이웃 나라와 사귀려면 일본과 통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였다. 이로써 성화(成化) 기해년에 통신사ㆍ부사(副使)ㆍ서장관(書狀官)을 일본에 보내고, 또 문사(文士)를 더 증원하였다. 그때 홍 문광(洪文匡) 겸손(兼善 홍귀달〈洪貴達〉의 자)과 채 인천(蔡仁川) 기지(耆之 채수〈蔡壽〉의 자)가 승지로 있으면서 나를 추천하여 부름을 받고 서울에 왔더니, 임금이 어제(御題) 다섯을 내어 시를 지어 바치라 하였고, 또 여섯 승지에게 명하여 각기 어려운 제목을 내게 하여 시험을 보았다. 이튿날 또 어제가 나와 5편을 지어 바쳤더니 모두 칭찬을 받았다. 드디어 통신사에 임명되어 차비하고 떠나는데, 점필재(?畢齋)가 시를 지어 보내기를,

 

천리마도 향쑥을 배불리 먹어야 / 赤驥飽香

연월 사이를 하루에 왕래하고 / 燕越朝暮返

강한 쇠뇌도 가득 당겨야만이 / 强弩能持滿

반드시 먼 데까지 나가는 걸세 / 其發必及遠

숙도는 내 아내의 아우인데 / 叔度吾婦弟

퍽이나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 頗好紙田墾

약관에 스승에게 배움도 없이 / 弱冠無師資

세 모퉁이를 유추하여 깨달았네 / 能以三隅反

시와 역사를 두루 탐색하고 / 詩史遍搜討

경학 또한 깊이 연구를 하여 / ???

중씨 계씨가 마치 훈지와 같고 / 仲季若塤?

난초 혜초가 밭에 가득하여라 / 蘭蕙滿畦?

충적된 것은 이미 유여하건만 / 充積己有餘

누가 그 잠긴 문을 열어 줄꼬 / 誰爲發關鍵

때로는 불평 어린 시문 지어서 / 時作不平鳴

명백하게 예원을 압도하였고 / 班班傾藝苑

그 파란이 점차로 광대해져서 / 波瀾漸滂沛

기괴함과 화려함이 뒤섞이었네 / ?雜華婉

향인들이 절신을 가벼이 여기니 / 鄕人輕節信

내 힘으론 밀기 끌기 어려워라 / 吾力難推挽

성조에선 인재를 잘 안 빠뜨리는데 / 聖朝少遺材

더구나 이런 훌륭한 인재임에랴 / 何況此琰琬

어느 날 그 명성이 성상께 들리니 / 一日聲徹天

어찌 담장 넘어 피하길 배우리오 / 寧學踰墻遯

공거에서 조서를 기다렸다가 / 待詔於公車

마침내 태관의 밥을 먹게 되었네 / 得喫太官飯

어제의 시문 동아줄처럼 나올 제 / 御題出如綸

붓을 대자 물병을 거꾸로 세운 듯 / 筆落?水建

도리어 두자미를 비웃을 정도라 / 却笑杜子美

춘관으로 포곤의 영광 주었네 / 春官與褒袞

그러자 항백의 하풍을 추향하여 / 巷伯趣下風

허리에 인끈 이미 편안히 매었는데 / 腰綬繫已穩

이윽고 국경 나가는 사신을 따라 / 俄從出疆使

돛 펼치고 일본을 향해 가누나 / 張帆指日本

웅대한 뜻으로 이험을 하나로 보는 / 撫壯一夷險

그대 마음을 내 스스로 안다오 / 君心吾自忖

때는 오직 해가 남륙으로 가서 / 時維日南陸

경풍이 보리밭을 요동시키는데 / 景風搖麥坂

바닷물은 마치 기름처럼 말갛고 / 海水澹似油

어패류들도 서로 싸우지 않으니 / 鱗介無鬪狼

배 타는 것이 말 타기와 같아서 / 乘舡如騎馬

마치 와상에 드러누운 것 같도다 / 如在牀息偃

어서가서 그곳 풍토를 기록하여 / 去去?風土

세모에 서로 만나길 기약하세나 / 團欒期歲晩

인정은 훼방과 청산이 용이하나니 / 物情易毁譽

이익을 얻으려면 스스로 겸손해야지 / 受益宜自損

돌아와서 은총이 더욱 높아지면 / 歸來增睿渥

어찌 한갓 호권만 종사하리오 / 豈徒從虎圈

그대는 충성과 효도를 힘쓸지어다 / 勉哉忠與孝

내 시는 참으로 정성을 다한 거로세 / 吾詩誠??

 

하였다. 매계(梅溪)와 가운데 형 자진(子眞)도 모두 시를 지었는데, 배 안에서 한가로울 때에 각기 전송하는 시들을 꺼내니, 모여서 큰 두루마리가 되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만은 적었다. 내가 말하기를, “우리집에는 시 3편이면 충분하다. 어찌 많을 필요가 있으랴.” 하였다. 갑인년에 나는 또 권() 참판 지경(支卿)을 따라 대마도에 갔었는데, 문광(文匡)이 적암(適菴)에게 지어 보낸 부(),

 

연경에는 이전에 두 번 다녀 왔고 / 燕京之前赴者再兮

대마도에는 이제 가면 세 번째로다 / 馬島今去三也

 

하였는데, 모두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 월산대군(月山大君) (?)의 자는 자미(子美)이고 호는 풍월정(風月亭)인데, 술을 즐기고 문사를 좋아하였다. 성화(成化) 을사ㆍ병오년 무렵에 여러번 시를 짓고 술을 마시는 자리에 모셨는데, 일찍이 나에게 주는 시에,

 

신은 �V류객이요 / 伸也風騷客

시명 또한 뛰어나도다 / 詩名又一奇

홀로 능히 고시를 겸하였으니 / 獨能兼古律

어찌 아름다운 구슬이 아니랴 / 不柰是珠璣

시 속의 생각이 무궁무진하여 / 吟裏思無盡

한가로운 기망 있음을 기뻐하노라 / 閑中喜有期

서로 만나 한 통 술을 마시며 / 相逢一樽酒

담소하니 흥취가 진진하도다 / 談笑興遲遲

 

하였다. 시의 품격이 높고 깊어서 예사 시인으로서는 도저히 따를 수가 없다.

○ 성화 정미년(성종 18) 겨울에 교리 최부(崔溥)가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제주(濟州)에 갔다가, 이듬해 정월 아버지의 상사를 듣고 윤월 초3일에 배를 출발시켰는데, 큰 바람을 만나 표류하여, 뱃사람 43명이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죽기만 기다리다가, 11일에야 한 섬에 닿아 비로소 물을 얻어 마셨다. 13일에는 중국 영파부(寧波府) 근처의 산에서 도적을 만나 가진 금품을 모두 빼앗기고, 도적이 닻과 노를 꺾어버린 다음 배를 끌고 가 바다 한가운데 내버리고 달아났다. 또 동서로 표류하다가 16일에 태주(台州) 임해현(臨海縣) 근처의 우두(牛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바다에서 또 어선들에게 포위되어 왜적(倭賊)이라는 지목을 받았다. 17, 비를 무릅쓰고 겨우 피하여 촌집에 투숙[出投] 출몰(出沒)이라고도 한다 했더니, 동네 사람들이 서로 번갈아 끌고 다니면서 마구 때리기도 하였다. 18일에 포봉리(浦蓬里)에 이르렀는데, 수당두채(守塘頭寨) 천호(千戶) 허청(許淸)이 불러서 심문하더니 끌고 갔다. 피로에 지쳐 다리는 절룩거리며 천신만고 끝에 도저소(桃渚所)에 이르렀다. 21일에는 송문(松門)의 비왜지휘(備倭指揮) 유택(劉澤)이 와서 취조하고, 천호 적용(翟勇)을 시켜 호송하였다. 2월 초4일에 소흥부(紹興府)에 도착하니, 비왜서(備倭署) 도지휘(都指揮) 및 포정사관(布政司官) 등이 최부에게 본국의 일을 캐어 물어보고, 왜인이 아님을 가려내었다. 6일에 항주(沆州)에 이르니, 지휘(指揮) 양왕(楊旺)을 보내어 기행(起行)으로 압송하였다. 가흥(嘉興)ㆍ소주(蘇州)ㆍ상주(常州)ㆍ양자강(揚子江)ㆍ양주(楊州)ㆍ고우주(高郵州)ㆍ회안부(淮安府)ㆍ질주(?)ㆍ서주(徐州)ㆍ패현(沛縣)ㆍ제령주(濟寧州)ㆍ동창부(東昌府)ㆍ덕주(德州)ㆍ창주(滄州)ㆍ정해현(靜海縣)ㆍ천진(天津)ㆍ위곽현(?)ㆍ장가만(張家灣)을 거쳐, 3 28일에 북경(北京)에 이르렀다가 4월에 떠나 6 4일에 본국으로 돌아와, 14일 청파역(靑坡驛 서울 청파동 근처에 있었다)에 도착하여, 임금의 명에 의하여 표류 일기를 써 가지고 들어왔다.

 

 

[C-001]소문쇄록(??) : 조선 성종 때의 문인 조신(曺伸)의 문집으로서 주로 역사와 지리에 관한 글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는 일부를 추려서 실었다. 자잘한 단편록(斷片錄)이라는 뜻이다.

[D-001]조신(曺伸) : 자는 숙분(叔奮), 호는 적암(適庵),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두시언해(杜詩諺解)》를 지은 조위(曺偉)의 서형(庶兄)이다. 문장에 뛰어났고 특히 시를 잘 지었다. 성종 10년에 신숙주(申叔舟)를 따라 일본에 가 문명을 떨쳤고, 돌아와 사역원 정(司譯院正)으로 발탁되었다. 중종(中宗)의 명으로 김안국(金安國)과 더불어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를 편찬하였다. 외국어에도 능통하여 역관으로 명 나라에 7, 일본에 3번 다녀왔다. 명 나라에 갔을 때에는 안남국(安南國) 사신과 시로 수창하여 외국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만년에는 금산(金山)에 은거하면서 풍류로 세월을 보냈다. 저서에 《적암시고(適庵詩稿)》ㆍ《소문쇄록(??)》ㆍ《백년록(百年錄)》 등이 있다.

[D-002]오륜(五輪) : 불교에서 쓰는 말로, 우주의 만물을 형성한다고 하는 다섯 가지의 원소인데, 땅ㆍ물ㆍ불ㆍ바람ㆍ공()을 가리킨다. 오대(五大)라고도 한다.

[D-003]중종(中宗) : 중종이 황후인 위후(韋后)의 음란하고 방자함을 그냥 내버려두었다가 뒤에 위후에게 도리어 시해당하였다.

[D-004]가후(賈后) : 혜제(惠帝)의 황후인데, 흉악하고 음란하여 국정을 어지럽히다가 처단되었다.

[D-005]국왕전(國王殿) : 무가 정권의 집권자인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쇼군)을 대외적으로는 일본 국왕이라 불렀다.

[D-006]재부(宰府) : 태재부(太宰府)를 말하는 것인데, 13세기 말 겸창막부(兼倉幕府 가마쿠라)가 원()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구주에 세운 관아. 태재부는 축전국(筑前國) 축자군(筑紫郡)에 있던 관청으로, 구주(九州)와 일기(壹崎), 대마(對馬) 2섬을 관할하고, 아울러 외교와 외적의 침입을 막는 임무를 맡고 있다.

[D-007]원씨(源氏) : 원씨는 일본의 성씨의 하나인데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미나모토씨를 말한다. 12세기 말에 막부(幕府)가 설치되어 이른바 무가정치(武家政治)가 명치유신(明治維新)까지 약 7백 년 동안 계속 되었는데, 막부의 성씨가 바뀌어도 대외적으로는 계속 원씨로 통했다.

[D-008]세 …… 깨달았네 : 네 모퉁이가 있는 물건이 있을 때, 한 모퉁이를 들어서 나머지 세 모퉁이를 유추(類推)하여 알아내는 것을 이른 말로, 즉 학문에 대단히 힘쓰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論語 述而》

[D-009]담장 …… 피하길 : 전국 시대 위 문후(魏文侯) 때의 현인(賢人) 단간목(段干木)이 위 문후가 그를 만나보려고 하였으나, 그는 문후를 만나지 않으려고 담장을 넘어 피해 버렸던 일을 가리킨다.《孟子 ?文公下》

[D-010]공거(公車) : 관서(官署)의 이름. 천하의 상서(上書) 및 징소(徵召)의 일을 관장하며, 임금의 조명(詔命)을 기다리는 자가 대기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D-011]포곤(褒袞) : 《춘추(春秋)》의 필법(筆法)에 있어, “한 글자의 포양이 화곤보다 영광되다.[一字之褒 榮於華袞]”는 데서 온 말이다.

[D-012]항백(巷伯) : 늙은 내시(內侍)를 이르는 말인데, () 나라의 신하 맹자(孟子)가 참소를 입어 내시로 좌천되자 항백이란 시를 노래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여기서는 낮은 벼슬을 감수하였음을 비유한 것이다. 《詩經 小雅 巷伯》

[D-013]해가 …… 가서 : 여름철을 이름. 《한서(漢書)》 율력지(律曆志)에 “해가 북륙(北陸)으로 가는 때를 겨울이라 하고, 해가 남륙(南陸)으로 가는 때를 여름이라 한다.” 하였다.

[D-014]호권(虎圈) : 범을 기르는 곳을 이름. 전하여 범 기르는 곳을 관장하는 소신(小臣), 즉 호권색부(虎圈嗇夫)의 준말로, 여기서는 곧 낮은 벼슬을 비유한 것이다.

출처 : ▒ 한 산 草 堂 ▒
글쓴이 : 천하한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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