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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려사절요 제34권 공양왕1

장안봉(微山) 2013. 5. 28. 22:59

고려사절요 제34   

 

 

 공양왕 1(恭讓王一)

 

 

공양왕 1

 

 

()는 요()이며 신종(神宗) 7대손이다. 일찍이 정창부원군(定昌府院君)에 책봉되었는데, 기사년 11월에 우리 태조가 심덕부ㆍ정몽주 등과 계책을 세워 왕으로 세웠다. 재위 4년이다. 임신년 7월에 왕위를 사양하고 원주(原州)에 있었는데 간성군 공양군(杆城郡恭讓君)으로 강봉되었다가 후에 왕으로 추봉되었다.

 

 

 

   

 

 

 

 

 고려사절요 제34   

 

 

 공양왕 1(恭讓王一)

 

 

기사 원년(1389), 대명(大明) 홍무 22 

 

 

○ 봄 정월에 예문춘추관 전교시에서 글을 올리기를, “예문관은 사명(詞命)을 맡고, 춘추관은 기사(記事)를 맡고, 전교시는 사전(祀典)을 맡고 축문을 수찬하니, 이 세 가지는 모두 중요한 일입니다. 이러므로 선왕이 그 관청을 금중(禁中)에 두고 '금내(禁內)'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관()과 시()가 밖에 있으니, 선왕이 관직을 설치한 뜻이 아닙니다. 지금부터는 사한(史翰) 2명과 전교 1명에게 궐내로 들어와 숙직하게 하여, 옛 제도를 회복하소서." 하니, ()이 그 말을 따랐다.

2월에 창이 이인임을 장사 지내도록 허락하니, 윤소종(尹紹宗)이 또 동사(同舍) 허응(許應)ㆍ민개(閔開) 등과 다시 상소를 올려 인임의 죄를 논핵하려 했으나 날이 저물어 상소를 올리지 못하였다. 마침 윤소종이 등에 등창이 나서 휴가를 청하였으므로 허응 등이 그 글을 중지시켜 올리지 않았다. 이인임의 족당은 윤소종을 미워하여 그를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소종이 성균관 대사성으로 옮겨지자 그제야 이인임을 장사지냈다.

○ 동지밀직사사 윤사덕(尹師德)을 남경에 보내어 최영(崔瑩)을 베어 죽인 것을 아뢰었다.

○ 경상도 원수 박위(?)가 병선 1백 척을 거느리고 대마도를 쳐서 왜적의 배 3백 척과 막사를 불살라 거의 없애 버렸다. 원수 김종연(金宗衍)ㆍ최칠석(崔七夕)ㆍ박자안(朴子安) 등이 잇달아 이르러 사로잡혀 갔던 백성 1백여 명을 찾아 돌아왔다. 창이 박위에게 의복과 안장 갖춘 말과 은정(銀錠)을 하사하여 권장(?) 위유(慰諭)하였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박위는 막사와 배만 불살랐을 뿐이고, 포로를 빼앗은 사실은 없다." 하였다.

○ 간관이 상소를 올려 부병(府兵)을 논하기를, “적이 생각하옵건대, 우리 태조께서 부병을 설치하시고 군부사(軍簿司)을 시켜서 마섭(馬攝)의 정무를 맡게 하셨는데 풍채와 무예를 구비한 자가 그 선발에 참여하게 되어, 이 때문에 장수는 그 적임자를 얻었고, 군사는 날래고 강하게 되었습니다. 근년 이후로는 벼슬로 들어오는 길이 많아져 군정(軍政)이 온통 무너져서 도목(都目)에 구애를 받거나, 청탁으로 인하여 나이나 재능을 묻지 않고 벼슬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포대기에 쌓인 어린아이나 공()ㆍ상()과 노예가 조그만 공도 없으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국록을 소모하니, 한 번 급한 일이 있으면 장차 어떻게 이들을 쓰겠습니까. 이는 선왕(先王)께서 군사를 설치한 뜻이 전혀 아닙니다. 용맹과 지략을 모두 갖춘 자를 정선하시어 이에 충당하시고, 항상 무예를 익히게 하여 그 능력을 조사하여 승진시키기도 하고 내쫓기도 하소서. 대호군과 상호군은 임금의 호위이며 군()의 사표(師表)이오니 늙은 사람과 어린아이들에게는 이것을 시키지 말 것이며, 제색(諸色)의 공인과 장인 중에 공로가 있는 자는 돈과 곡식으로 상을 주고 일을 맡기지는 마옵소서. 선왕이 설치한 관직의 정원 외에 더 설치한 인원수는 일체 모두 삭감하소서." 하였다.

3월에 사헌부에서 민중리(閔中理)가 진주에서 아버지의 상()에 달려가면서 생선과 고기를 싣고 간 것과, 판도 판서가 되어서는 기복시키기를 기다리지 않고 사무를 보고 녹을 받은 죄를 탄핵하여 귀양보냈다.

○ 예조에서, 조회를 받을 때에 음악을 사용하기를 청하니, 창이 그 말을 따랐다.

○ 강회백(姜淮伯)이 남경에서 돌아왔다. 예부에서 황제의 명을 받들어 자문을 보내어 이르기를, “고려는 산이 막히고 바다를 등져서 풍속이 다르니, 비록 중국과 서로 통하고 있으나 떨어지고 합함이 일정하지 않았다. 이제 신하가 그 아버지를 내쫓고 아들을 왕으로 세워 중국에 조회하러 오기를 청하니, 이는 인륜이 크게 무너지고 왕의 도가 전혀 없기 때문에, 신하 노릇하지 않는 반역이 크게 드러난 것이다. 사자에게 돌아가서 동자(童子 창())가 와서 조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라. 왕으로 세우는 것도 저희들에게 달렸고 폐하는 것도 저희들에게 달렸으니, 중국은 상관이 없다." 하였다.

○ 사관 최견(?) 등이 글을 올리기를, “사관의 임무는 왕의 언행ㆍ정사와 백관의 시비ㆍ득실을 모두 사실대로 써서 후세에 보여 권계(勸戒)를 남기는 까닭으로, 예로부터 국가를 가진 자는 사관의 직책을 중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러므로 본조에서도 예문관ㆍ춘추관을 설치하여 문학과 행실을 갖춘 자 8명을 뽑아서 모두 사관과 문한(文翰)의 직책을 맡겼으며, 또 겸관을 두어 이를 통솔하게 하였으니, 그 책임을 중하게 하는 까닭입니다. 근년 이후로 사관과 문한이 나누어져 둘이 되고, 겸관도 직무를 보지 않으며, 공봉(供奉) 이하 4명만으로 이를 담당하게 하여, 사실을 기록하는 데 갖추지 못하게 되었으니, 국가에서 사관을 설치한 본뜻이 아니옵니다. 지금부터는 사한(史翰) 8명은 그 직임을 같이하게 하여 각기 사초 2본을 만들게 하고, 임기가 차서 옮기게 되면 1본은 사관(史館)에 바치고 1본은 집에 간수하여 뒷날의 상고에 대비하게 하고, 겸관과 충수찬(充修撰) 이하의 관원은 각기 보고 들은 바에 의하여 이를 기록하여 사초를 만들어 모두 사관에 보내게 하고, 또 본관(本館 사관(史館))에서는 직접 서울과 지방의 크고 작은 아문에 통첩하여 시행한 모든 일을 일일이 사관에 보고하게 하여 기록하는 데에 전거로 삼게 하고, 이를 영원한 제도로 삼게 하십시오." 하니, 창이 그 말을 따랐다.

○ 여름 4월에 예의사(禮儀司)에서 매월 육아일(六衙日)에 조참(?)하기를 청하였다.

○ 이색(李穡)이 남경에서 돌아왔다. 황제가 평소부터 이색의 명망을 들었으므로 예로써 매우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에 이르기를, “너는 원조(元朝)에 벼슬하여 한림이 되었으니 응당 중국말을 알 것이다." 하였다. 이색이 중국말로 빨리 대답하기를, “왕이 친히 조회하기를 원합니다." 하니, 황제가 알아듣지 못하여 예부의 관원이 이를 전해 아뢰었다. 황제가 웃으며 이르기를, “너의 중국말이 꼭 나하추[納哈出]와 같다." 하였다. 이색이 발해에 이르러 두 객선과 같이 왔는데, 반양산(半洋山)에 이르러 회오리바람이 일어나서 두 객선이 모두 침몰되고, 태종(太宗)이 탄 배도 거의 구원하지 못할 뻔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여 자빠지고 넘어졌으나 태종은 신색이 태연하더니, 마침내 보전하여 돌아왔다. 이색이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이 황제는 마음에 주장이 없는 임금이었다. 내가, '황제가 반드시 이 일을 물을 것이다.' 하고 생각하면 황제가 그것은 묻지 않았고 황제가 물은 것은 내가 생각하지 않은 것이었다." 하니, 그때의 의논이 이를 비난하기를, “대성인의 도량을 속된 선비가 비평할 수 있는 것이랴." 하였다.

○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아뢰기를, “입춘으로부터 입추에 이르기까지 사형을 정지하고, 서울에서는 다섯 번 복심해서 아뢰고, 지방에서는 세 번 복심해서 아뢴 뒤에야 죄를 결단하도록 허락하고, 군기(軍機)와 반역에 관계된 일은 이 한정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였다.

○ 도평의사사에서 전제(田制)를 의논하였다. 이때 전제가 크게 문란하여 겸병하는 집들이 토지를 빼앗아 산과 들을 차지하였으니, 독해(毒害)가 날로 깊어 백성들이 서로 원망하였다. 우리 태조가 대사헌 조준(趙浚)과 더불어 사전을 개혁하고자 하였는데, 이색이 옛 법을 경솔하게 고쳐서는 안 된다 하며 그 의논을 고집하여 따르지 않았고, 이임(李琳)ㆍ우현보(禹玄寶)ㆍ변안열(邊安烈)도 모두 개혁하려 하지 않았다. 이색을 유종(儒宗)으로 여기고 그 말을 빌려 여러 사람의 귀를 현혹시켰으므로, 개혁하여 사전을 공전으로 회복하려는 의논이 결정되지 못하였다. 예문관 제학 정도전(鄭道傳)과 대사성 윤소종(尹紹宗)은 조준의 의논에 찬동하고, 후덕 부윤(厚德府尹) 권근(權近)과 판내부시사(判內府寺事) 유백유(柳伯濡)는 이색의 의논에 찬동하고, 찬성사 정몽주(鄭夢周)는 두 사이에서 어름어름하고 있었다. 이에 각 관사(官司)로 하여금 사전을 개혁하여 공전으로 회복하는 이해(利害)를 의논하게 하니, 의논한 자 53명 중에 개혁하고자 하는 자가 10 8,9명이었는데, 개혁하지 않으려는 자는 모두 대가(大家)의 자제였다.

○ 예의 판서(禮儀判書) 민제(閔霽)가 군신(群臣)의 의종(儀從)과 일산(日傘), 부채[]에 차등을 두도록 다시 정하기를 청하니, 그 말에 따랐으나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 가뭄 때문에 죄수를 사면하였다.

10()에 교수(敎授)를 두었다.

6월에 문하평리 윤승순(尹承順)과 첨서밀직사사 권근을 남경에 보내어 왕이 친히 조회하기를 청하였다.

○ 심덕부(沈德符)를 판삼사사로, 안종원(安宗源)을 문하찬성사로, 정몽주를 예문관 대제학으로, 정영손(丁令孫)ㆍ이서원(李舒源)을 밀직부사로 삼았다.

○ 경상도 도절제사 박위(?)가 왜적의 배 1척을 잡고 32급을 베었다.

○ 안종원(安宗源)을 남경에 보내어 성절(聖節)을 하례하고, 밀직사 황보림(皇甫琳)은 천추절(千秋節)을 하례하였다

○ 경기 절제사 박자안(朴子安)이 왜적과 싸워 30급을 베었다.

○ 가을 7월에 왜적의 배 20척이 와서 해주(海州)에 정박하므로, 절제사 유만수(柳曼殊)와 우리 공정왕(恭靖王 정종(定宗))을 보내어 이를 막았는데, 활과 화살을 하사하였다.

○ 대사성 윤소정(尹紹宗)이 글을 올리기를, “《역경》에, '어릴 때에 바름을 기름이 성인(聖人)이 되는 공부다.' 하였습니다. 하늘이 준 성품은 본래 선하여 악이 없으니, 범인(凡人)과 요순(堯舜)은 애당초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옛날의 성왕(聖王)은 진실로 태교(胎敎)를 받고 태어나서, 강보(襁褓)에 있을 때에는 보()가 있어서 그 신체를 보호하여, 마땅한 기거(起居)에 나아가고 조심하는 마음을 갖게 하였으며, ()가 있어 덕의(德義)를 가르쳐서 지나친 기호(嗜好)를 조절하고 그릇된 견문을 막게 하였는데, 특별히 행실이 바른 선비를 뽑아서 함께 출입하고 기거하게 하였으므로, 반드시 바른 일만 보고 바른 말만 들어서, 외물(外物)의 유혹이 들어올 수 없고 천성(天性)의 진실(眞實)함이 잘 길러져서, 마음속에 가르침을 받을 터전이 맑고 고요하여 물욕의 가림이 없는 까닭으로 모두 요순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적이 보건대, 주상께서 《논어》를 읽은 지 13개월이나 되었는데 매일 새로 안 것이 많아야 서너 글자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혹시 읽기가 어렵다 하더라도 주상은 총명하신 재주를 타고났으니, 배움에 있어 하지 않는 것이지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주상께서 서연(書筵)에 잠시 납셨다가 금새 내전(內殿)에 들어가서 환관ㆍ궁녀와 가까이 지내시어, 마음이 외물에 얽매어 있고 글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근일에 이르러서는 학문을 게을리 하는 흔적이 겉으로 나타나서, 사부(師傅)가 물러가기 전에 음훈(音訓)을 통하기도 전에 문득 읽다가 문득 일어나고, 조금 후에는 어선(御膳)의 때를 놓친다고 말하면서 내전에 들어가시니, 학문이 어떻게 향상되겠으며 덕이 어떻게 밝아지겠습니까. 상왕(上王)이 처음 왕위에 오르실 때에 총명하여 학문에 뜻을 두셨는데, 간신이 나라를 도둑질할 계책으로 즉시 강연을 파하여 우리 상왕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여 하마터면 종사(宗社)를 전복시킬 뻔하였습니다. 주상께서 왕위를 전해 받은 초기에 대신이 전조(前朝 전왕(前王))의 일을 경계로 삼아 맨 먼저 경연(經筵)을 열어 성인의 학문을 권면하여 요순 같은 성인을 주상에게 기대하였사옵니다. 만약 학문을 게을리 하신다면 종묘는 어떻게 할 것이며 생령(生靈)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지금 7월의 길한 절후인데 곡식을 손상시키는 바람이 불어, 국가 생민(生民)의 생활을 해치니, 하늘의 견책이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홍범(洪範)〉에 이르기를, '성스러움에 제때에 바람이 부는 것이며, 몽매함에 항상 바람이 부는 것이다.' 하였는데, 주상께서 학문을 게을리 하시는 흔적이 나타나 징계하는 바람이 응한 것이니, 하늘이 몽()으로써 주상에게 경계하는 뜻이 어찌 매우 명백하지 않습니까. 옛날에는 8세에 소학(小學)에 들어가고, 10세가 되면 사부에게 나아가 생활하였습니다. 옛날에 노()나라 양공(襄公)은 나이 겨우 8세인데도 나가서 천하 제후의 회합(會合)에 참여하였으니, 어찌 어선(御膳)을 반드시 깊은 궁궐 안에서 먹었겠습니까. 옛날에 정자(程子)가 강관(講官)이 되어서 글을 올리기를, '임금이 하루 안에 환관과 궁첩(宮妾)을 가까이하는 때가 적고 어진 사대부와 접하는 때가 많게 되면, 자연히 기질이 변화하여 덕기(德器)가 이루어진다' 하였습니다.

주상께서는 매일 아침 태후(太后)에게 문안드린 후에는 편전(便殿)에 나가서 어선을 올리도록 명하고, 여러 간관(諫官)과 관각(館閣)의 학사(學士)에게 명하여 항상 곁에서 모시도록 하여, 조용한 말로 도리를 설명하기를 해가 기울거나 밤이 깊을 때까지도 하여, 천명이 떠나고 머무는 것과, 인심이 따르고 배반하는 것, 농사의 어렵고 고생스러움, 수자리의 괴로움, 치란의 근본, 흥망의 자취, 고금의 예악, 인물의 어질고 어질지 못한 일들을 날마다 앞에 와서 진술하게 하면, 오랫동안 들어서 저절로 통달하게 되며, 습관이 천성(天性)이 되어 덕이 요순과 같게 될 것이옵니다. 이를 항상 깊은 궁궐 안에 있어서 부인과 환관의 사특함에 물이 들어, ()이 변하여 몽()이 되는 것에 비한다면 그 유익함이 어찌 매우 크지 않겠습니까. 환관과 부인들의 버릇없는 행동은 실로 왕의 덕을 해치는데 있어 곡식을 해치는 가라지[??]와 같으며, 어진 사대부의 훈도하는 이익은 곧 성덕(聖德)을 함양하는데 있어, 만물을 기르는 우로와 같습니다. 무릇 궁녀와 환관도 정자가 경연에서 아뢴 말에 따라, 모두 나이 40,50세 이상의 중후한 사람을 뽑아서 측근에 대비하고, 나이 젊은 자는 측근에 나아오지 못하도록 하여 왕을 사특하고 사사로운 데로 인도하는 근원을 끊게 하소서. 대궐에서 쓰는 기용(器用)은 주()의 옥배(玉杯)와 상저(象箸)를 경계(警戒)로 삼고, () 임금이 의복을 검소하게 하던 것을 모범으로 삼으소서.

지금의 영서연(領書筵)ㆍ지서연(知書筵)은 옛날의 태사(太師)ㆍ태부(太傅)이며, 시독은 옛날의 소사(少師)ㆍ소부(少傅)입니다. 지금부터는 정전(正殿)에서 글을 읽을 때에 지서연이 나아오면 반드시 일어나서 자리를 피하여 경서를 배우고, 지서연이 물러가면 역시 일어날 것이오며, 시독이 나아오고 물러갈 때에도 역시 자리를 피하고 얼굴빛을 고쳐 사부(師傅)를 존중하는 뜻을 극진히 하소서. 이것이 이른바, '탕왕(湯王)은 이윤(伊尹)에게 반드시 배우고 난 뒤에 그를 신하로 삼았기 때문에 수고롭지 않고 왕 노릇을 하셨고, 환공(桓公)은 관중(管仲)에게 반드시 배우고 난 뒤에 신하로 삼았기 때문에 수고롭지 않고 패자(覇者)가 되었다.'(《맹자》에 있는 말)는 것이니, 성덕을 양성하는 데에는 이보다 더 급한 것이 없습니다. 주상께서는 위로는 태조(太祖)께서 5백 년을 전해 주신 왕통(王統)을 생각하시고, 아래로는 삼한(三韓)의 억조 창생의 기대를 생각하시어, 미천한 신의 간절한 말을 죄주지 마시고 살펴 받아들여 닦고 반성하여 천만세의 태평을 이루소서." 하였다.

○ 왜적이 함양ㆍ진주를 침범하니, 절제사 김상(金賞)이 가서 구원하였으나 패하여 죽었다.

○ 문하 시중 이색(李穡)이 해직을 원하고 이임(李琳)을 천거하여 자신를 대신하게 하니, 이색을 판문하부사로, 이임을 시중(侍中)으로, 홍영통(洪永通)을 영삼사사로 삼았다. 이색이 일찍이 홍영통ㆍ이무방(李茂方) 등과 함께 남신사(南神寺)에서 백련회(白蓮會)를 설치하니, 식자들이 그 부처에게 아첨하는 것을 기롱하였다.

8월에 대사헌 조준(趙浚) 등이 소를 올리기를, “적이 생각하옵건대, 사전(私田)은 사문(私門)에만 이익이 되고 나라에는 이익이 없으며, 공전은 국가에 이익이 되고 백성에게도 매우 편합니다. 사문에 이익이 되면 겸병이 이로써 일어나게 되고, 용도가 이로 말미암아 부족하게 되며, 국가에 이익이 되면 창고가 차고 국가의 재용이 넉넉하게 되며, 송사가 그치고 백성이 편안하게 될 것입니다. 국가를 가진 이는 마땅히 경계(經界)를 인정(仁政)의 시초로 삼아야 될 것이온데, 어찌 겸병의 문을 열어서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전지는 본래 사람을 기르기 위한 것인데 사람을 해치는 데 알맞게 되었으니, 사전의 폐해가 이 지경으로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다행히 하늘이 국가를 도와서 여러 대에 쌓인 폐단을 제거하게 되었으니, 사전을 개혁하여 공전으로 회복하는 이해(利害)는 분명히 알 수 있는데도 세신(世臣)과 대가(大家)들은 오히려 폐단이 있는 풍속을 이어받아 말하기를, '본조(本朝)의 이루어진 법을 하루아침에 갑자기 개혁해서는 안 되며, 만일 이를 개혁한다면 사군자(士君子)의 생계가 날로 곤란해져서 반드시 공업과 상업에 마음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하면서, 서로 부언(浮言)을 선동하여 여러 사람의 귀를 현혹시키고 사전을 일으켜 부귀를 보전하고자 하니, 그것이 한 집의 계책으로서는 잘된 일이지마는 사직과 생민에는 어찌되겠습니까. 만약 사전을 일으키면 이는 삼한(三韓)의 백만 민중을 기름불 속에 밀어 넣는 것입니다. 지금 나라가 잘 다스려지기를 도모하면서 도리어 백성들에게 걱정을 끼치게 되니, 불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적이 생각하건대, 경기의 땅으로 왕실을 보위하는 사대부의 전지로 삼아 그것으로 생계를 이바지하고 업을 두텁게 하며, 나머지는 모두 개혁하고 제거하여 위에 바치거나 제사 지내는 용도에 충당하고, 녹봉과 군수의 비용을 넉넉하게 하여, 겸병의 문을 막고 쟁송(爭訟)의 길을 근절시키는 영원한 아름다운 법을 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 유구국(琉球國)의 중산왕(中山王) 찰도(察度)가 사신을 보내와서 빙문하고, 우리나라에서 왜적에게 사로잡혀 간 인구(人口)를 돌려보냈다.

○ 간관 이준(?) 등이 사전을 다시 일으킬 수 없다고 글을 올려 간쟁하니, 좌사의(左司議) 문익점(文益漸)이 이색(李穡)ㆍ이임(李琳)ㆍ우현보(禹玄寶)에게 붙어 병을 핑계하여 서명하지 않고, 다음날 곧장 서연(書筵)으로 달려갔다. 조준이 탄핵하기를, “익점은 본래 유일(遺逸)로서 진주(晉州)의 두메에서 몸소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어질다 하여 간대부(諫大夫)로 임명하여 왕의 측근에 두고 왕의 자문(諮問)에 이바지하게 하였으니, 진실로 마땅히 충언을 남김없이 올리고 치도(治道)를 진술하여 다스림을 도와야 될 것인데도, 우물쭈물하며 비굴하게 남의 비위를 맞추어 간쟁하는 절개가 없으며, 몸을 굽히고 하는 일 없이 남에게 순종만 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동료 오사충(吳思忠)과 이서(李舒)가 각기 소를 올려 시사를 극력 말하였으나, 익점은 녹()만 지키고 관직을 잃을까 걱정하여 한마디도 언급함이 없었으며, 또 동료가 연명하여 소를 올려 전제를 극력 논하였으나, 익점은 권세에 아부하여 병을 핑계하고 참여하지 않은 것을 스스로 잘한 계책으로 생각하여, 위로는 전하의 사람을 알아보는 밝은 지혜에 누를 끼치고, 아래로는 사림의 기대를 저버렸으니, 이것은 마땅히 그 관작을 삭탈하고 산야(山野)에 돌려보내어, 말할 책임이 있는데도 말하지 않는 자의 경계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곧 익점을 파면시켰다.

○ 창()의 생일에 이죄(二罪) 이하의 죄수를 사면하였다.

○ 양광도 도관찰사(楊廣道都觀察史) 성석린(成石璘)이 주ㆍ군에 의창(義倉)을 설치하기를 청하니, 그 말을 따랐다.

○ 정지(鄭地)를 양광 전라 경상도 도절제체찰사로 삼아서 적을 토벌하고 백성에게 전지를 경작시키며, 성곽을 수축하는 일을 겸하여 맡게 하였다.

○ 전객령(典客令) 김윤후(金允厚)와 부령(副令) 김인용(金仁用)을 답례로 유구국(琉球國)에 보냈다.

○ 사재 부령(司宰副令) 문윤경(文允慶)이 그 아버지의 첩을 간음하고, 또 관아의 물품을 도적질하니, 법사(法司)에서 탄핵하여 윤경과 그 아버지의 첩을 목매어 죽였다.

4월부터 이 달에 이르기까지 늘 비가 와서 물이 솟아오르고 산이 무너졌다.

9월에 창()이 중국에 친히 조회하려 하니 이색이 아뢰기를, “요동의 들판은 매우 추우니, 일찍이 떠나야 합니다." 하였다. 조금 후에 창()의 어머니 이씨(李氏)가 그의 나이 어린 것을 민망하게 여겨 도당(都堂)에 말하여 가는 일을 중지하게 하였다.

○ 영흥군(永興君) ()이 일찍이 어떤 일로 무릉도(武陵島 울릉도)로 귀양갔는데, 생사를 알지 못 한 지가 19년이나 되었다. 그의 아내 신씨(辛氏)가 환이 풍파에 표류하여 일본국(日本國)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조정에 청하여 가노(家奴)를 시켜 사신을 따라가서 물색하여 찾은 것이 서너 번이었다. 이때에 와서 그 가노가 환이라고 칭하는 자와 함께 왔는데, 위인이 매우 어리석고 얼굴도 닮지 않았으며, 말도 많이 잊어버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과 성이며 마을도 알지 못하였다. 신씨의 아우 전 판사 극공(克恭)과 인친(姻親) 전 판개성부사 박천상(朴天祥), 전 밀직부사 박가흥(朴可興), 지밀직 이숭인(李崇仁)ㆍ하륜(河崙)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진짜 환이 아니다." 하였으나, 신씨가 경산부(京山府)로부터 와서 보고는 매우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아는 것이 어찌 아내의 아는 것만 같으랴." 하고, 드디어 사헌부에 송사하였다. 사헌부에서 종실(宗室)과 천상 등을 모아 대질하니, 환의 두 아들과 형인 중 참수(?)와 종실의 여러 사람이 모두 말하기를, “진짜 영흥이다." 하니, 천상 등을 탄핵하여 무고죄(誣告罪)를 주었다. 숭인이 도망하니, 옥졸(獄卒)이 숭인의 아들 차약(次若)을 두 손을 뒤로 묶고는 숭인을 찾아내라고 등을 매질하여 피가 흘렀다. 길에서 우리 태조(이성계(李成桂))를 만났는데 옥졸이 차약을 길가의 집에 숨기니, 차약이 큰소리로 부르짖기를, “영공(令公 태조)은 나를 살려 주십시오." 하였다. 태조가 놀라서 불러 물어보고는 옥졸에게 이르기를, “어찌 아들에게 아버지를 찾도록 강요할 수 있느냐." 하고, 곧 석방하도록 명령하고, 또 종자 한 사람을 시켜 차약을 집에 데려다 주게 하였다. 이에 시중 이임(李琳)과 창에게 아뢰기를, “즉위한 초기에 너그러운 정사를 베풀어야 될 것이오니, 천상 등을 사면하기를 바라오며, 더구나 숭인은 서연(書筵)에서 시강하여 학문을 보좌한 지가 오래되었으니, 직무에 힘쓰게 하기를 바랍니다." 하니, 천상 등 4명을 먼 지방으로 귀양 보냈다. 숭인이 서연에 나아가니 사헌부에서 또 탄핵하였다. 이때 윤소종(尹紹宗)이 숭인의 높은 재능을 질투하였고, 또 이색이 숭인을 칭찬하면서 자기는 칭찬하지 않는 것을 시기하여 갖은 방법으로 참소하고 헐뜯었다.

○ 창()이 이색ㆍ이임과 우리 태조는 칼을 차고 신을 신은 채로 전상에 오르게 하고, 찬배(贊拜)하고 이름을 칭하지 말게 하였다. 각기 은 50냥과 채단 10필과 말 1필을 하사하고, 교지를 내려 권장하고 위유하였으니, 정몽주의 청을 따른 것이다.

○ 밀직 부사 유원정(柳爰廷)을 시중 경복흥(慶復興)의 무덤으로 보내어 제사 지내게 했는데, 그 제문에, “우리 선조 공민왕(恭愍王)이 경을 헌사(憲司)에 탁용하여 경에게 기강을 바로잡기를 맡겼으며, 침실에 불러들여 밤을 새워 정사를 자문하였다. 모든 백성들의 고락과 사대부의 충간(忠姦)을 밝게 알아내어, 이익되는 일을 일으키고 해되는 일은 제거하며, 현재(賢材)를 등용하고 불초한 자는 물리쳤으니, 드디어 안으로는 기철(奇轍)을 목 베고 밖으로는 홍건적을 섬멸하였다. 덕흥(德興)의 난리에 경과 최영(崔瑩)이 충성을 발하여 이를 쳐서 쫓아 우리 사직을 보존하였으며, 역적 신돈이 사도로 우리 선조(先朝)를 미혹시켜 영첨의사(領僉議事)가 되니, 삼한의 경대부가 어두운 밤에 달려가서 청탁하고 오직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여 그 문정(門庭)이 물 끓듯 하였는데, 신돈도 경의 청렴과 충성을 공경하였으며, 경을 굽히게 하려고 제 집에 오게 하여 권위(權威)를 보이자고 여러 번 은근한 뜻을 통하였으나 경이 한 번도 그 문에 나아가지 않으니, 신돈이 마침내 경을 참소하였던 것이다. 이에 명이(明夷)의 행이 있자 삼한 사람이 경을 아는 자와 알지 못하는 자가 모두 울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신돈이 주벌을 받은 뒤에, 선조가 경을 쫓은 것을 매우 뉘우쳐서, 바로 그날에 경을 불러 좌상에 복직시켰다. 우리 상왕이 왕위를 계승하니 적신 이인임(李仁任)이 기회를 타서 제멋대로 관직을 팔고 옥을 팔았으나 경이 조정에 있었기에 5,6년 동안은 사직이 조금 안정되었다. 인임이 경을 꺼려서 한정이 없는 욕심을 마음대로 부리지 못하므로 조석으로 눈을 흘겼으나, 우리 왕모(王母) 명덕비(明德妃)가 경을 깊이 신임하였기 때문에 감히 일을 일으키지 못하였다. 명덕비가 승하함에 미쳐서 인임이 여러 흉악한 사람을 사주하여 경을 내쫓았으니, 이에 인임의 흉악함이 극도에 달하여 원통한 소리가 천지 사이에 가득 차게 되었던 것이다. , 경의 관직은 신하로서 제일 높지마는 경성 근처에 한 이랑의 토지도 없고, 집 안에는 한 말의 곡식도 없었으며, 대그릇 밥에 물을 마시고, 해진 갖옷과 야윈 말[]로써 지냈으니, 천만년(千萬年) 지나간 옛날에서 찾더라도 경과 같은 이는 몇 사람이나 되겠으랴. 경의 충성과 청렴과 의열(義烈)은 삼한에 모범이 되고 만세에 권장할 만하므로, 내가 그 충성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사자(使者)를 보내어 제사를 드리게 하니, 이 특별한 대우를 흠향하여 길이 우리 왕가를 보우할지어다." 하였다.

○ 장하(張夏)ㆍ성석린(成石璘)을 문하 평리로, 조운흘(趙云?)ㆍ김사형(金士衡)ㆍ최유경(崔有慶)을 동지밀직사(同知密直事), 권주(權鑄)를 밀직 제학(密直提學)으로, 민제(閔霽)를 개성윤(開城尹)으로 삼았다.

○ 김여지(金汝知)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윤승순(尹承順)과 권근이 남경에서 돌아왔다. 예부(禮部)에서 황제의 명을 받들어 도평의사사에 자문을 보냈는데, 그 자문에, “고려의 국내에 변고가 많아서 배신(陪臣)은 충신과 역적이 뒤섞여 하는 일이 모두 좋은 계책이 아니다. 왕위(王位)는 왕씨(王氏)가 시해를 당하여 후사(後嗣)가 끊어진 이후 비록 왕씨라고 꾸며서 이성(異姓)으로 왕을 삼았으나, 이것은 삼한이 대대로 지켜 왔던 좋은 일은 아니다. 옛날에도 임금을 시해한 적()이 있었으나 임금의 죄악이 지극한 데서 생겼던 것이며, 무릇 임금을 시해한 자는 비록 난신적자이기는 하나, 또한 인정을 베풀어 천의를 돌이키고 많은 백성을 편안하게 한 자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고려의 배신들은 음모에 간사함까지 겹쳐서 지금까지 편안하지 못하였고, 설혹 역으로써 나라를 얻었을지라도 역으로 나라를 지키는 것이 될 일인가. 만약 역을 떳떳한 일이라고 한다면 역신이 잇달아 이를 일삼을 것인데, 모두 맨 먼저 역()을 한 자가 이를 가르친 것이니, 또 무엇을 원망할 것이랴. 전에 예부에서 '동자(童子)는 서울에 올 필요가 없다'고 이문(移文)하였으니, 과연 어질고 지혜로운 배신이 보필하는 지위에 있어 위에서 군신의 분의(分義)를 정하고 나라에서 백성을 편안히 할 계책을 만든다면, 비록 수십 년을 조회하지 않더라고 무엇을 걱정할 것이며, 해마다 와서 조회하더라도 무엇을 싫어하겠는가." 하였다. 권근이 도중에서 사사로이 열어 보고 돌아와서는 이림(李琳)의 집에 먼저 보이고 난 후에 도당으로 보냈다.

○ 겨울 10월에 왜적이 양광도의 도둔곶(都屯串)을 침범하였는데, 도체찰사 왕안덕(王安德)이 왜적과 싸워 크게 패하였다.

○ 찬성사 배극렴(裴克廉)과 밀직 부사 박경(朴涇)을 남경으로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였다.

○ 간관 오사충(吳思忠) 등이 예문관 제학 이숭인을 탄핵하기를, “숭인은 성품이 간사하고 탐욕스러우며 언행이 사특하고 아첨하며, 나라를 다스릴 만한 재주도 없고, 원대(遠大)한 생각을 할 만한 계책도 없는데, 문묵(文墨)의 말기만으로 출세하여 분수에 넘치는 명예를 얻어 중요한 관직에 오래 있었습니다. 이인임이 권세를 부릴 때에는 이 사람이 아첨하여 붙었으며, 임견미(林堅味)가 정권을 희롱할 때에는 또 그의 심복이 되어 자못 세력을 부리고 불법을 자행하였습니다. 부모의 상에 3년의 상기를 마치기 전에는 과거의 시관이 될 수 없는 것이 국가의 제도입니다. 그런데 숭인이 산기 상시로 있을 때,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는데도 감시(監試)의 시관을 요구하여 시관이 되었으나, 조복을 입고 시관노릇을 맡을 수 없기 때문에, 상시(常侍)의 높은 관직을 강등하고 상호군의 낮은 관직을 요구하여 과거 시험을 맡았으며, 더구나 어머니가 죽은 지 겨우 백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태연히 고기를 먹어 사람의 도리를 허물었으니 이는 불효입니다.

근래에 상국에서, 간흉들이 탐욕을 부린다 하여 우리나라를 절교하였는데, 간흉들이 처형되고 주상께서 중흥하여 시중 이색(李穡)이 중국에 들어가 조회할 때에 숭인이 따라갔는데, 전일의 탐욕의 마음을 고치지 못하고 몸소 물건을 팔고 사고 하기를 상인과 같이하여 중국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 삼한 사대부의 면목에 침을 뱉게 하였으니, 비록 시를 칠보(七步)에 짓고, 입으로 요순의 말을 외울지라도 실로 개와 돼지보다도 못하니, 참으로 이른바 '소인유(小人儒)'인 것 입니다. 어찌 시독(侍讀)으로 삼아 왕의 측근에 두겠습니까.

근일에 와서는 그 간사한 꾀를 마음대로 부려 종친(宗親 영흥군(永興君) ())을 무함하여 부자ㆍ형제ㆍ부부의 대륜을 무너뜨리고자 하였으나, 진상이 드러나자 말이 궁하여 명을 어기고 숨었는데, 주상께서 그를 시독이라 하여 특별히 죄를 사면하고 묻지 않았사오며, 또 선마(宣麻)를 내려 후한 예로써 대우하였는데도, 숭인은 천지의 포용하는 은혜를 알지 못하고 순월(旬月) 동안이나 지체하고 즉시 나와 사은하지 않았으니, 주상을 업신여기고 예를 무너뜨림이 심하였습니다. 그 불경함이 무엇이 이보다 크겠습니까. 헌사를 시켜서 죄를 추궁하여 엄하게 다스려 멀리 변방으로 귀양보내어 불효하고 불경함과 나라를 욕되게 한 죄를 징계하여 인륜을 바로잡고 선비의 절개를 권려(勸勵)하소서." 하였다. ()이 그 소를 헌부에 내려 그 죄를 추궁하니, 숭인이 또 도망하였으나 찾아 잡아서 경산부(京山府)로 귀양보냈다.

또 헌부에서 박돈지(朴惇之)가 일찍이 그 장모를 간음하였고, 이제 또 이색을 따라 중국에 들어가서 조회할 때에 몸소 물건을 팔고 샀다 하여 탄핵하니,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었다. 돈지는 숭인과 평소부터 친한 까닭으로 죄를 받게 된 것이다.

○첨서밀직사사 권근이 숭인을 구원하는 글을 올리기를 "숭인을 불효하다고 하는 것은 어머니가 죽고 난 후 3년 안에 시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그의 아버지 원구(元具)는 이미 늙고 병들어 금방 죽을 목숨으로 매우 급박하였는데, 그가 살아 있을 때에 아들이 감시(監試)를 맡는 영화(榮華)를 보고자 하였습니다. 국가에서 숭인의 재주를 중히 여기고 원구의 뜻을 가련하게 여겨 그로 하여금 감시를 맡게 하였습니다. 만약 숭인이 구차스럽게 사양하였다면 이는 죽은 어머니만 알고 살아 있는 아버지는 알지 못하는 것이 되며, 그가 후일의 비방을 면하고자 한다면 그 아버지의 뜻을 돌보지 않게 되기 때문에, 비록 마음속으로는 편안하지 못하였으나 힘써 직무에 나아간 것입니다. 이것은 비록 허물이 있지만 공자의 이른바, '허물을 보고서 그 사람을 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실로 효자의 불행이니, 불효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관직에 있는 자 중에도 혹은 부모가 모두 죽고 난 후 3년 안에 왕의 구전(口傳)을 받았다 사칭하여 시험을 보고 과거에 오른 자가, 중요한 관직에 올라 헌부(憲府)에 앉아서 사람을 형벌하고 사람을 죽이면서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자가 있으니, 그 사람들은 부모가 모두 죽었으니 누구를 위한 영화이겠습니까. 오직 자기 몸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아버지를 위하여 어머니에게는 미안한 일을 한 것이 불효가 된다면, 제 몸을 위하여 부모를 잊은 것이 참 효도가 되겠습니까. 하물며, 우리나라 사람이 3년상을 행하는 사람은 만 명에 혹시 한 명이 있을 정도이며, 국가에서 기복의 법을 만들어 거상하려는 뜻을 빼앗는데, 만약 숭인에게 죄를 주고 반드시 3년상을 행한 사람을 구하여 이를 쓰려고 한다면, 이는 만 명을 버리고 한 명을 얻는 것이므로 신은 주상께서 사람을 얻어 쓸 수 없을까 염려합니다. 숭인이 아버지를 사랑한 심정은 살피지 않고 불효하다는 명목으로써 허물을 씌우니 어찌 너무 가석하지 않습니까.

숭인을 불충이라고 한 것은 영흥(永興 환())의 진위를 대질할 때에 이미 왕의 명을 받았으면 마땅히 즉시 스스로 나아갈 것이온데, 미루면서 나아가지 않고 숨어 피하기까지 한 그것입니다. 그러나 숭인은 대신이요, 영흥의 진위에 대한 분별은 말을 잘못한 사소한 실수인 것입니다. 국가의 옛날 법으로써 이를 처리한다면 한 장의 공함(公緘)을 보내어 이를 묻는 정도에 불과할 뿐이옵니다. 하물며, 전일에 헌사(憲司)에서 글을 올리기를, '대신은 법을 범하였더라도 형리에게 보내어 욕보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으니, 주상께서 옳게 여겨 판격(判格)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숭인이 국가의 구법을 믿고 주상의 판지(判旨)를 믿어서 즉시 나아가서 변명하지 않았던 것인데, 헌사에서 노발하여 잡아 오게 한 후에야 구법을 의지할 것이 못 되며, 판지를 믿을 것이 못 됨을 알았습니다. 형세가 궁하고 일이 박하여 숨어 피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비록 겁이 많고 유약한 일이지만, 또한 조정의 처리가 도리를 잃어 그로 하여금 놀라고 두려워하게 한 것이며, 숭인이 마음에 불충한 생각을 품고 감히 왕의 명을 거역한 것은 아닙니다.

그가 영흥의 진위에 간섭한 일은, 그의 천성이 인자하고, 붕우를 매우 사랑하였기 때문인데, 마침 가흥(可興)의 무리와 서로 이웃이라 친하게 되어, 그의 말을 듣게 된 것이오며, 숭인이 거짓으로 이 말을 꺼낸 것은 아닙니다. 작위를 회복하고 난 후에 즉시 나아가서 사은하지 않은 것은 진실로 헌사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지, 왕의 명을 공경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 몸소 물건을 팔고 사고 하였다는 일로 그가 비난을 받게 된 것은 까닭이 있습니다. 지휘(指揮 관명(官名))이며 성이 진씨(陳氏)인 자는 그 아내가 곧 숭인의 아내의 종족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 집에 가게 되어 시항(市巷)을 지나갔으며, 또 구경을 하려고 길을 지나갔는데, 숭인과 사이가 좋지 못한 자가 이것으로 말을 만들어 무함하고 헐뜯으니, 이 말을 들은 자는 내용을 살피지도 않고 사실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만약 과연 물건을 팔고 사고 하여 국가를 욕되게 하였다면, 신이 사신으로 간 것이 마침 숭인이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후이니, 마땅히 이를 들었을 것이온데, 신이 중국에 있을 때에 일찍이 숭인이 물건을 팔고 사고 하여 왕의 명을 욕되게 하였다는 일을 한번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 일을 의논하는 자는 그의 발이 일찍이 중국의 국경을 밟아보지도 못했는데, 그의 귀가 어떻게 이 일을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헐뜯는 자가 과연 숭인보다 어질겠습니까. 한갓 헐뜯는 자의 말만 믿고 숭인의 행실은 믿지 않으시니, 어찌 그렇게 한 쪽으로만 치우치십니까.

우리 국가가 대명(大明)을 섬긴 후로 표전의 사명(詞命)은 대부분 숭인의 손으로 지어졌으니, 공민왕(恭愍王)이 시호를 얻고, 상왕이 부조(父祖)의 봉작을 이어받게 된 것은 모두 숭인의 문장(文章)의 힘이며, 세공에 금ㆍ은ㆍ말ㆍ베를 면제 받은 것도 역시 숭인의 힘이며, 황제께서 여러 번 문장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면서 우리나라에 인물이 있다고 말한 것도 역시 이것이 숭인의 공이었습니다. 숭인의 문장은 간결하고 고고(高古)하여 세상에 드물게 뛰어났고 중국에서도 드물게 있사오니, 국가의 사명(詞命)은 이 사람에게 맡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논하는 자는 이를 살피지 않고 도리어 소인의 헐뜯는 말만 믿고서 감히 대악의 죄를 씌우니, 어찌 너무 가석하지 않습니까.

종실(宗室)을 친히 하고 어진이를 높이는 것의 두 가지는 천하 국가의 대경(大經)입니다. 주상께서 종실을 친히 하고 중하게 여겨 그 치욕을 씻으려고 맡은 관원에게 특별히 명하여 영흥의 진위를 밝히게 하였으니, 친족을 친히 하는 도리에는 잘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숭인은 오랫동안 시독의 관직에 있었으니 주상께서 가르침을 받은 신하입니다. 그에 대한 의심과 비난이 생기자마자 그것을 잘 분별하여 처리하지 않고서 곧 내쫓으라고 명하시니, 어진이를 높이는 도리에는 지극하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적이 주상을 위하여 이를 애석하게 여깁니다. 또한 마땅히 그를 위하여 맡은 관원에게 특별히 명하여 그를 헐뜯는 말이 나온 이유를 추궁하여 밝혀야 할 것이옵니다. 헐뜯은 자는 과연 중국에서 한 터럭의 물건도 사지 않은 사람이겠습니까. 숭인이 화물을 운반할 때에 반드시 귀신이 운반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수레 몇 채와 짐 싣는 말 몇 필을 사용하였을 것이오니, 그 수레에 실린 것이 과연 모두 숭인의 화물이며 그 말이 과연 다른 사람들의 예()에 배였겠습니까. 일일이 추궁해 밝힌다면 헐뜯은 자는 참으로 한 터럭의 물건도 산 것이 없었겠습니까. 수레에 실은 것이 모두 숭인의 화물이고, 말이 다른 사람의 예에 배나 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숭인의 죄를 밝힌다면 숭인도 자백ㆍ복종할 것이오며, 만세토록 주상이 공평하였다고 일컬을 것입니다. 만약 헐뜯는 자도 역시 판매한 물건이 있고, 그 수레가 모두 숭인의 화물이 아니고, 그 말이 다른 사람의 예에 배가 되지 않았다면 헐뜯은 자는 참으로 군자를 무함한 소인이오니, 마땅히 헐뜯은 자의 무함한 죄를 밝히시어 현신(賢臣)이 억울함을 당한 치욕을 씻어 준다면, 어진이를 높이는 도리도 얻게 되고 만세토록 모두 주상의 밝으심을 일컫게 될 것입니다.

의논하는 자가 또 말하기를, '숭인은 글을 읽어 이치를 통달하여 평소에 중한 명망이 있으므로 다른 무지한 사람과 같이하기는 어렵다. 범한 죄가 비록 작더라도 극형에 처해야 할 것이다.' 하니, 또 어찌 생각하지 못함이 이와 같이 심합니까. 의리를 알지 못하여 국가에 도움이 없는 자가 죄를 범함이 있으면 들추어 낼 만한 것이 못 된다 하면서 항상 용납하여 이를 보전하게 하고, 문장에 통달하여 나라에 이익이 있는 자에게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으면 용서할 수 없다고 하면서 반드시 조사하여 죄에 빠지게 한다면, 이는 후진(後進)의 선비가 모두 구차하게 형벌만 면하고 수치를 갖지 않는 사람이 되려 할 것이니, 누가 애써 마음과 힘을 쏟아 경서를 궁구하고 이치를 통달하여 헛된 명예만 얻고 실지로는 화를 받는 짓을 하겠습니까. 의논하는 자의 말대로 하면 인심과 사풍(士風)을 무너뜨리고 후학을 그르침이 심할 것입니다.

예로부터 어진 자를 의논하고, 재능 있는 자를 의논하고, 공이 있는 자를 의논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어진 자와 재능 있는 자는 혹시 실수를 하더라도 그 어진 것과 재능 있는 것을 의논하여 형벌을 감하여 사람마다 모두 어진 사람과 재능 있는 사람이 되도록 힘쓰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의논하는 자는 도리어 어진 사람과 재능 있는 사람의 죄를 중하게 하니, 이는 후세의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하려고 하는 뜻을 막는 것입니다. 가령 숭인에게 진실로 죄가 있다. 하더라도 문장의 공을 의논하여 특별히 용서하여 주신다면 후진의 선비가 모두 학문하는 데 힘쓸 것이온데, 하물며 지금 숭인의 죄는 신이 진술한 바와 같이 모두 의논할 여지가 있는 데이겠습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주상께서는 신의 이 글을 도평의사(都評議使)ㆍ문하부ㆍ사헌부에 내리시어 숭인을 헐뜯은 자를 추궁ㆍ힐문하시어 그 곡직을 밝혀서 그 치욕을 씻어 주고, 그의 어짊을 기리고, 사유(師儒)를 높여 주며, 후학을 권장하소서." 했으나 대답이 없었다. 대사헌 조준이 이때 기복(起復)했었는데 권근의 상소 가운데 부모가 모두 죽은 3년 이내에 현달한 자리에 올라 부사(府司)에 앉았다는 등의 말이 자기 때문에 나온 말이라 하여 깊이 감정을 품었다. 숭인은 진실로 재주는 있지마는 행실은 실수가 역시 많았으니, 그를 구하는 권근의 말도 지극히 공평한 말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 판 문하부사 이색이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원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색이 또 전()을 올리기를, “신이 지난해에 경사에 가서 신정을 하례하였는데 부사로 갔던 이숭인이 지금 탄핵을 당하여 귀양갔사오니, 신이 감히 편안히 있을 수 없으므로 맡은 일을 사면하기를 원합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교지와 술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 간관 오사충(吳思忠) 등이 소를 올려 권근이 숭인에게 편당한 죄를 논핵하니, 권근을 우봉현(牛峯縣)으로 귀양보냈다가, 또 영해부(寧海府)로 옮겼다.

○ 이색이 장단(長湍)의 별업(別業)으로 돌아가니, ()이 지신사(知申事) 이행(李行)을 보내어 술을 하사하여 위유하고 그에게 정무를 보게 하였으나 이색은 나오지 않았다.

11월 갑술일에 지진이 있었다.

○ 전 대호군 김저(金佇)와 전 부령(副令) 정득후(鄭得厚)가 몰래 황려(黃驪 여주)에 가서 우()를 알현하였다. 김저는 최영(崔瑩)의 생질인데 최영을 따른 지 오래되어 자못 권세를 부렸으며, 정득후도 역시 최영의 먼 인척이었다. 우가 울면서 말하기를, “답답하게 이곳에 있으면서 손을 묶고 앉아 죽음을 받을 수는 없다. 역사(力士) 한 사람만 얻어 이시중(李侍中 이성계)만 해친다면 내 뜻은 성취할 수 있다. 내가 평소에 예의 판서(禮儀判書) 곽충보(郭忠輔)를 좋아하였으니 네가 가서 보고 이 일을 도모하라." 하고는 칼 한 자루를 충보에게 전해 주게 하면서, “일이 이루어지면 비()의 동생을 처로 삼고 부귀를 함께 누릴 것이다. 이번 팔관일(八關日)에 일을 일으키라." 하였다. 김저가 충보에게 알리니 충보가 겉으로 승낙하고는 달려와서 우리 태조에게 알렸다. 김저와 정득후는 밤에 태조의 사저로 갔다가 문객에게 잡혔는데, 정득후는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정축일에 김저를 순군옥에 가두고 대간과 더불어 번갈아 문초하니, 진술한 말이 전 판서 조방흥(趙方興)에게 관련되므로 모두 옥에 가두었다. 김저가 말하기를, “변안열(邊安烈)ㆍ이임(李琳)ㆍ우현보(禹玄寶)ㆍ우인열(禹仁烈)ㆍ왕안덕(王安德)ㆍ우홍수(禹洪壽)가 공모하여 여흥왕(驪興王)을 맞이하는데 내응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무인일에 우를 강릉부(江陵府)로 옮겼다.

우리 태조가 판삼사사 심덕부(沈德符), 찬성사 지용기(池湧奇)ㆍ정몽주(鄭夢周), 정당문학 설장수(?長壽), 평리 성석린(成石璘), 지문하부사 조준(趙浚),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 박위(?), 밀직 부사 정도전(鄭道傳) 등과 흥국사(興國寺)에 모여서 삼엄한 군사의 호위 속에서 의논하기를, “우()와 창()은 본래 왕씨(王氏)가 아니니 종사(宗祀)를 받들게 할 수 없으며, 또 천자의 명도 있으니 마땅히 가왕을 폐위시키고 진왕을 세워야 될 것이다. 정창군(定昌君) ()는 신왕(神王 신종(神宗)) 7대손으로 그 족속이 가장 가까우니 왕으로 세워야 할 것이다." 하니, 조준이 말하기를, “정창군은 부귀한 집에서 나고 자라서 자기의 재산을 다스릴 줄만 알고 나라를 다스릴 줄은 알지 못하므로 왕으로 세울 수 없다." 하였으며, 성석린은 말하기를, “임금을 세우는 데는 마땅히 어진이를 가려야 될 것이고, 그 족속이 가까운지 먼지는 논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이에 종실(宗室)의 몇 사람의 이름을 써서 심덕부ㆍ성석린ㆍ조준을 보내어 계명전(啓明殿)에 가서 태조(고려 태조)에게 고하고 제비를 뽑았더니 정창군의 이름이 뽑혔다.

○ 기묘일에 우리 태조가 심덕부 등 8명과 공민왕(恭愍王)의 정비(定妃) 궁에 나아가서 군사로 호위하게 하였는데, 종친과 백관이 모두 이에 따랐다. 비의 교지를 받들어 창()을 강화(江華)로 추방하고, 정창부원군(定昌府院君)을 맞이하여 왕으로 세웠다. 교지에, “우리 태조로부터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자손이 서로 계승하여 종묘와 사직을 받들었는데, 불행히도 공민왕이 세상을 떠나니 후사가 없었다. 당시에 종척(宗戚)과 신하들이 의논하여 종실의 어진이를 왕으로 세우려고 하였으나, 권신 이인임(李仁任)이 오랫동안 나라의 권력을 잡고 있으면서 불의한 일을 많이 행하여 남(새 임금)에게 은혜를 베풀어 자기의 죄를 면하기 위하여 역적 신돈의 아들 우()를 공민왕의 아들이라고 거짓으로 꾸며서 그를 낳은 어미를 죽여 입을 봉하고, 질녀를 시집보내어 그 총애을 굳게 하였으니, ()과 사람의 분노가 쌓인 지 15년이나 되었다. ()가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여 국인에게 원망을 사고, 군사를 일으켜 중국을 침범하여 천자에게 죄를 얻었다. 지금은 마땅히 왕씨(王氏)가 종사(宗祀)를 회복할 시기인데도 대장 조민수(曹敏修)가 이인임의 친척으로써 상상(上相)이 되어 이인임의 간사한 꾀를 이어받아 우의 아들 창을 왕으로 세워 악으로써 악을 계승하였는데, 권병이 그 손에 돌아가니 형세가 갑자기 제거하기 어려워졌다. 지난번에 윤승순(尹承順) 등이 경사에서 돌아왔는데 황제가 이성으로 왕을 삼은 것을 꾸짖었다. 이에 나라 안의 여론과 종척(宗戚), 대소 신료들에게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정창부원군(定昌府院君) ()는 곧 태조의 직계 신왕(神王 신종(神宗)) 7()손으로서 족속이 가장 가까우니, 마땅히 공민왕의 후사가 될 것이다.' 하여, 요에게 명하여 왕위에 오르게 해서 종묘와 사직을 받들게 하고, 우와 창을 폐하여 서인으로 삼는다. 아아, 자홍(子弘)을 폐하고 대왕(代王)이 한가(漢家)의 종사(宗祀)를 회복하여 4백 년 동안 태평스러운 업()의 터전을 잡았으니, 지금의 일을 옛날과 비교하면 그 이치는 한가지이다." 하였다. 이날 요()가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올라 우와 창을 낮추어 서인으로 삼고, 이임(李琳)과 그 아들 귀생(貴生), 유염(柳琰)ㆍ최염(崔濂)ㆍ노귀산(盧龜山)ㆍ이근(李懃)을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고, 정양군(定陽君) 우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장단(長湍)에 가서 비상사태에 대비하였다.

○ 병진일에 왕이 정전(正殿)에 나가서 조회를 받고 정사를 청단하였다. 어머니 왕씨(王氏)를 높여 복녕궁주(福寧宮主)라 하고, () 노씨(盧氏)를 순비(順妃)로 삼으며, 아들 정성군(定城君) ()을 책봉하여 세자(世子)로 삼고 경내(境內)의 죄수를 사면하였다.

○ 이색이 장단으로부터 대궐에 나아와서 하례하니, 왕이 내전으로 불러들이고 용상에서 내려와 기다렸다. 이어서 이르기를, “나는 평생을 한가로이 놀고 있었는데 오늘날에 이 자리를 얻을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다. 경은 나를 도와 달라." 하였다. 다시 이색을 판문하부사로, 변안열(邊安烈)을 영삼사사로, 심덕부(沈德符)를 문하시중으로, 우리 태조(이성계)를 수문하시중으로, 정도전(鄭道傳)을 삼사우사로 삼고, 집의 송문중(宋文仲)을 파면시켰다. 송문중은 일찍이 나주 목사로 있을 적에 청렴하지 못했다는 평판이 있으므로, 대간이 고신(告身)에 서명하지 않아 드디어 파면되었다.

○ 갑신일에 왕이 친히 태묘(大廟)에 제사지내고 왕위에 오른 것을 고하였다. 유사가 우()의 어머니 신주(神主)를 철거할 것을 청하니, 이색이 말하기를, “이 일은 그 종말을 보장할 수 없으니 아직 천천히 하라."고 하였다.

○ 김저(金佇)가 옥 안에서 갑자기 죽으니, 저자에서 송장을 베었다. 김저가 진술한 말이 순군부의 관원과 많이 관련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의 죽음을 의심하였다. 이에 문하평리 정지(鄭地)ㆍ이거인(李居仁), 전 판후덕부사(前判厚德府事) 유혜손(柳惠孫)ㆍ이을진(李乙珍), 전 밀직 이유인(李惟仁)ㆍ유번(柳蕃)ㆍ조호(趙瑚)ㆍ안주(安柱) 27명을 귀양 보냈으니, 김저의 모의에 참여한 까닭이었다. 또 조방흥(趙方興)을 목베었다.

○ 왕이 즉위한 날 저녁에 왕의 사위 강회(姜淮)의 계부(季父) ()가 내전에 들어와서 왕에게 아뢰기를, “여러 장상들이 전하를 왕으로 세운 것은 다만 자기의 화를 면하기 위한 것이지 왕씨(王氏)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삼가시고 친신(親信)하지 마시어 스스로 보전할 것을 생각하소서." 하였다. 왕의 사위 우성범(禹成範)이 곁에 시립하고 있다가 이 말을 듣고 그 어머니 윤씨(尹氏)에게 알리니, 윤씨의 종형(從兄) 소종(紹宗)이 전해 듣고 9공신에게 알렸다. 공신들이 왕에게 의견을 아뢰기를, “전하께서 겨우 왕위에 오르자마자 참소하는 말이 갑자기 들어오니, 신들은 두려워서 어찌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참소하는 말을 믿으신다면 곧 신들에게 죄를 주시고, 만약 신들이 위성(僞姓)을 내쫓고 다시 왕씨를 세운 공이 있다고 여기신다면, 참소하는 사람에게 죄주어 윗사람과 아랫사람으로 하여금 틈이 없도록 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왕이 측근 신하를 돌아보고 잠잠히 말이 없었다.

○ 순안군(順安君) ()과 동지밀직사사 조반(?)을 남경으로 보내어 왕의 즉위를 알렸다.

12월에 좌사의(左司議) 오사충(吳思忠), 문하사인 조박(趙璞) 등이 소를 올리기를, “판문하부사 이색이 우리 현릉(玄陵 공민왕(恭愍王))을 섬겨 벼슬이 보상(輔相)에 이르렀는데, 현릉이 훙하고 후사가 없으므로, 많은 신하들이 의논하여 종실의 어진이를 왕으로 세우려고 하니, 권신 이인임이 스스로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고자 하여 위주(僞主)를 기어이 세우려고 하니, 이색이 의논을 도와 우()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무진년에 여러 장수들이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왕씨를 세우려고 의논할 무렵에, 인임의 친척인 대장 조민수(曹敏修)가 우의 아들 창()을 세워 그 간사한 꾀를 계승하고자 하여 계책을 이색에게 물었는데, 이색도 역시 일찍이 창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으므로 드디어 의논을 정하여 창을 세웠습니다. 그 아들 조종학(曹種學)이 외척(外戚)에게 선언하기를, '많은 신하들이 의논하여 종실을 세우려고 하였는데, 마침내 세자(世子 창())를 세우게 된 것은 우리 아버지의 힘이다.'고 하였습니다. 후에 천자께서 명하시기를, '이성(異姓)을 왕씨라 꾸며서 왕으로 삼았으니, 이는 삼한을 대대로 지킬 계책이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충신과 의사들이 왕씨를 회복시켜 천자의 명에 따르려고 하였는데, 적신 변안열(邊安烈)이 기이한 공을 세워 부귀를 얻으려고 이색과 우()의 외숙 이임(李琳)과 김저(金佇)ㆍ정득후(鄭得厚) 등과 더불어 신우를 맞이하여 왕씨를 다시 세우려는 의논을 저지하려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이색은 대대로 왕씨에게 봉직하여 공민왕의 더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는데, 이인임에게 붙어서 신우를 세우고 왕씨의 종사를 끊으며, 장수들이 왕씨를 세우려고 하자 조민수에게 붙어서 우를 내쫓고 창()을 세웠으며, 충신과 의사가 왕씨를 회복하려고 하자 변안열에게 붙어서 창을 내쫓고 우를 맞이하여, 다시 왕씨의 종사를 끊으려 하였으니, 우와 창에 있어서도 모반하는 신하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족히 논할 것도 못 됩니다. 대대로 왕씨의 신하이면서도 적신에게 아첨하여 왕씨의 종사를 영원히 끊어지게 하였으니, 그의 죄악은 천지ㆍ종사(宗社)가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색은 이인임에게 중하게 여겨져서 그 부귀를 보전하였습니다. 이인임은 그 무리 임견미(林堅味)ㆍ염흥방(廉興邦)과 더불어 탐욕을 마음대로 부려 관직을 팔고 옥()을 팔아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토지와 노비를 빼앗아 차지했으니, 원망이 쌓이고 죄가 많아져서 마침내 패망을 초래하였는데도, 이색은 그 그른 점을 말하지 않았으며, 우의 사부가 되어 여러 번 상사(賞賜)를 받고 젖내 나는 어린 자제들을 모두 높은 과거에 뽑아서 요직에 늘어놓았고, 우가 포학을 부려 죄 없는 사람을 죽였는데도 이색은 그 허물을 바로잡지 않았으며, 또 우()가 망녕되게 군사를 일으켜 상국의 경계를 침범하여 동방의 무궁한 화를 만드는데도 이색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국가에서 사전(私田)으로 공가(公家)를 궁핍하게 하고, 민생을 해치며 송사를 일으키고 풍속을 무너뜨리므로, 이를 개혁하여 전법을 바로잡고자 하였는데도 이색은 상상(上相)으로서 불가하다고 고집하였으며, 이임(李琳)이 탐하고 못났음은 국인들이 아는 바인데도 이색이 또 외척(外戚)에 붙어서 지위를 보전하고자 하여, 이임을 천거하여 자기를 대신하게 하였으며, 또 유종(儒宗)으로서 부처에 아첨하여 사람들의 심술을 무너뜨리고 풍속을 어지럽혔습니다. 왔다갔다 간사함이 심하여 이숭인이 탄핵당한 것을 핑계하여 장단(長湍)으로 돌아가서 일의 추이를 관망하고 있다가,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자 공공연히 와서 판문하의 관직을 받고, 백관의 위에 서 있으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으며, 학문을 굽혀 세상에 아첨하고, 거짓을 꾸며서 명예를 구하는 짓을 하더니, 마침내 또 다시 반복하여 큰 죄를 짓기에 이르렀습니다. 맡은 관사(官司)에 내리어 이색의 부자와 조민수의 죄를 다스려서 후세의 신하가 되어 불충한 자를 경계하소서. 이인임의 죄도 전하께서 친히 본 바이오니 헌사에 맡겨서 관()을 베고, 집을 헐어 못을 파서 그 죄를 드러내소서."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삼사우사 김속명(金續命)이 우()의 어머니를 분별할 수 없다는 말을 처음 꺼낸 이유로 내쫓겨서 죽었으며,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 이자송(李子松)은 우()가 군사를 일으킨 것을 간하다가 드디어 죽음을 당하였으니, 전하께서는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그 무덤에 치제(致祭)하고 그 자손을 녹용하여 충혼을 위로하소서." 하였다. 명하여 이색의 부자를 파면하고, 조민수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았다.

○ 사헌부에서 소를 올려 권근이 사사로이 명나라 예부의 자문(咨文)을 열어 본 죄를 논핵하기를, “이 자문은 본국 종사(宗社)의 존망에 관계된 것이니, 마땅히 바로 도당에 보내어 재상들을 모아서 열어 보아야 될 것인데, 권근이 여러 날 동안 사사로이 간수해 두었다가 사사로이 열어 보고 은밀히 모의하여 천기를 누설시켰으니, 음모가 헤아리기 어렵고, 이보다 더 심한 불충이 없으니, 잡아다 신문하여 형률에 의거해서 죄를 결정하여 후세의 사람을 경계하소서." 하였다. 왕이 명하여 죄를 신문하지는 않고 먼 지방으로 귀양 보냈다.

○ 대간이 번갈아 소를 올리기를, “지금은 전하께서는 위로는 천자의 명을 받들고, 아래로는 신민의 기대에 응하여 난리를 평정하고, 질서 있는 세상으로 회복시켜 우리 조성(祖聖)의 끊어졌던 대통을 계승하셨고, 신우(辛禑) 부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았으니, 이것은 명분을 바로잡고 백성의 뜻을 정한 것으로, 만세의 태평을 열 시기입니다. 옛날에 위() 나라 임금이 공자를 보시고 정사를 하려 하니, 공자는 먼저 명분을 바로잡고자 하여 말하기를,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어진다.' 하였습니다. () 나라 여후(呂后)가 궁첩의 아들 홍()을 데려와서 혜제(惠帝)의 후사로 삼으니, 태위(太尉) 주발(周勃), 홍이 혜제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여 이를 목 베고, 대왕(代王)을 맞이하여 세워서 백성의 뜻을 정하고 4백 년의 태평을 열었습니다. ()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가 그 아들 중종(中宗)을 폐위하고 이성(異姓)인 무삼사(武三思)를 세워 태자로 삼으려하니, 승상 장간지(張柬之)가 측천후의 무리 장역지(張易之)ㆍ장창종(張昌宗) 등을 목 베고 다시 중종(中宗)을 세웠는데, 무삼사만은 남겨두어 중종이 스스로 베어 죽이기를 기다렸더니, 설계창(薛季昶) 등이 장간지에게 말하기를, '풀을 제거하면서 뿌리를 뽑지 않으면 뒤에 반드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삼흉(三凶)은 비록 목베었으나 무삼자가 아직 살아 있으니, 공들은 마침내 장사지낼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일찍이 도모하지 않으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하니, 장간지 등이 그 말을 따르지 않고 말하기를, '큰 일이 정하여졌으니 저 무삼사 한 사람은 도마 위의 고기와 같을 뿐이다.' 하더니, 후에 무삼자가 과연 장간지 등을 죽이고 중종도 시해를 당하였습니다. 군자가 이를 논하기를, '측천후는 이미 당나라의 종묘에 죄를 지었으니, 중종이 그 어머니에게 사정(私情)을 둘 수 없으며, 장간지 등이 이미 중종을 세웠으니 측천후를 사사하여도 중종이 대의로써 그 의논에 간여하지 않는다면 조종의 노여움을 풀게 될 것이며 천지의 떳떳한 법도가 서게 될 것이다.' 하였으니, 역시 공자의 명분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한둘의 대신이 전하를 추대하여 공민왕의 뒤를 계승하게 하고, 신우(辛禑)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닌 것을 바로잡아 조정과 백성에게 포고하니, 삼한 억조의 백성이 서로 말하기를, '우리 평생에 다시 태조의 손자를 보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지난번 홍륜(洪倫)의 난의 근원과 우()의 어미 반야(般若)의 말과 죽음도 주상께서 명백히 알고 계시오며 성천자(聖天子)께서도 이미 들으신 바이옵니다. 지금 이색은 마음속으로 그른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인임(李仁任)이 신씨(辛氏)를 왕으로 세울 때에도 말 한마디 한 적이 없었고, 조민수(曹敏修)가 창을 세울 때에도 제일 먼저 주창하여 국가의 계책을 정하였으며, 금년에 또 다시 신우(辛禑)를 세우고자 하였으니, 그 죄는 전에 올린 소()에서 말을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이미 정통을 이었는데, 이종학(李種學)이 홀로 사람들에게 선창하여 말하기를, '현릉(玄陵)께서 이미 우를 강녕군(江寧君)으로 책봉하고 부()를 세웠으며, 또 천자(天子)께서도 우()에게 작위를 주었는데, (李 태조의 옛 이름)는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현릉의 명을 어기고 우리 여흥왕(驪興王)을 폐하느냐.'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우의 부자의 죄를 다스려 태묘에 고하여 백성의 뜻을 정하지 않으시고, 또 이색 부자가 우의 부자에 붙었던 죄를 다스려 수많은 소인들의 음모를 근절시키지 않으신다면, 전하께서도 하루도 왕위에 편안히 계실 수 없을 것입니다.

혹자가 말하기를, '()의 부자는 천자께서 아는 바이니 천자의 명이 내림을 기다려 그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하는 것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천자께서 이미 삼한의 배신(陪臣)에게 이성을 왕으로 삼은 것을 꾸짖었으니, 또 어찌 두 가지의 명이 있겠습니까. 또 혹시 상국에서 신우를 보존하고자 하신다면 모르겠습니다마는, 전하께서는 왜 이를 보존해 두고 백성의 뜻을 정하지 않으십니까. 춘추(春秋)의 법에 난신ㆍ적자는 누구나 이를 벨 수 있으니, 먼저 일을 행하고 뒤에 알려도 될 것인데, 또 어찌 천자의 명이 내리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이인임이 신씨(辛氏)를 추대한 죄는 곧 하늘에 계신 태조와 열성의 영이 다 베고자 하는 것이온데, 어찌하여 신등의 청을 따르지 않으십니까. 이를 베지 않으신다면 이는 만세에 난적(亂賊)의 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유사를 시켜서 관()을 베고, 집을 헐어 못을 파고 가산을 적몰하도록 해야 하옵니다. 이종학(李種學)의 부자는 관직을 파면시키는 데만 그친다면 만세에 간적(姦賊)을 어떻게 징계하겠습니까. 맡은 관사(官司)에게 명을 내려 그 죄를 밝게 다스려야 될 것입니다. 이숭인(李崇仁)과 하륜(河崙)은 전에는 이인임의 심복이 되었다가 후에는 이색의 간사한 꾀에 따라 신창(辛昌)을 독촉하여 중국에 조회하도록 하고, 신우(辛禑)를 세워서 열성의 제사를 영원히 끊고자 하였으니, 죄가 죽음으로도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역시 맡은 관사로 하여금 논죄하여야 될 것입니다. 또 이종학이 창을 세운 것은 그 아버지의 공이라고 환관 이분(李芬)에게 말하니, 이분이 이임(李琳)의 딸에게 말하여 종학이 이임에게 편당하고 아부하여 간사한 꾀를 이루고자 하였으니, 이분을 맡은 관사에 내려 정상을 추국하여 그 죄를 다스리소서.

권근은 황제의 명을 사사로이 열어 보고는 먼저 이임에게 보이고 또 이색에게 보였으니, 그 마음이 왕씨에게 있지 않음이 명백합니다. 조금 후에 이숭인의 일로써 글을 올렸다가 탄핵을 당하였는데, 그들 사이의 일은 역시 알 수 없는 바이니, 먼 지방에 귀양보내는 데만 그치고 그 죄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뒷세상의 불충한 신하를 징계하겠습니까. 전 한양윤(漢陽尹) 문달한이 이임의 인척이라 하여 궁중에 있으면서 권세를 부리고 불의를 자행하였는데, 이임의 족속은 이미 모두 귀양갔는데도 문달한만은 홀로 서울에 있사오니, 직첩을 거두고 외방으로 추방하소서. 또 거짓 조정의 환관을 추방하여 뜻밖의 환란을 방비할 것이오며, 또 문종의 제도에 따라서 10여 명만 남겨 놓고 궁내의 소제하는 데만 충당하고, 또 충렬왕(忠烈王)의 고사에 의거하여 육품 벼슬에 임명하는 것을 허락하지 마옵소서." 하였다. 이에 이인임의 집을 헐고 못을 팠으며, 이색의 부자와 이숭인ㆍ하륜ㆍ이분ㆍ문달한을 귀양보내고, 조민수를 삼척(三陟)으로 옮기고, 환관은 그전대로 직무를 보게 하였다.

○ 임인일에 우의 어머니 의릉(懿陵)을 철거하였다.

○ 사헌 규정(司憲糾正) 전시(田時)를 창녕(昌寧)에 보내어 조민수를 국문하였다. 전시는 조민수가 창()을 세운 계책이 이색(李穡)에게서 나온 것으로 진술 받고자 하였는데, 조민수가 자복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창을 세운 죄는 진실로 나 혼자 한 것이요, 이색은 실로 관여함이 없다." 하였으나, 여러 날 동안 핍박하니 드디어 자복하였다.

○ 사재 부령(司宰副令) 윤회종(尹會宗)이 소를 올려 우와 창을 베기를 청하였다. 왕이 여러 재상에게 차례로 물으니 모두 잠잠히 말이 없었는데, 홀로 우리 태조가 아뢰기를, “이 일은 용이하지 않습니다. 이미 강릉(江陵)에 안치시켰다고 중국 조정에 알렸으니 중도에 변경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신 등이 있사오니, 우가 비록 난을 일으키고자 한들 무슨 걱정이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우가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였으니, 스스로 죽음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지신사(知申事) 이행(李行)에게 명하여 교서를 내리고, 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을 강릉(江陵)으로 보내어 우를 베며, 예문관 대제학 유구(?)를 강화(江華)로 보내어 창을 베도록 하였다. 우의 아내 최씨(崔氏)가 크게 울면서 말하기를, “첩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우리 아버지 최영의 허물이다." 하였다. 10여 일 동안 먹지 않고 밤낮으로 울며 밤에는 반드시 시체를 안고 자며, 쌀을 얻으면 번번이 정하게 찧어서 전()을 드리니, 그때 사람들이 이를 불쌍하게 여겼다.

○ 좌사의 오사충(吳思忠)과 문하사인 조박(趙璞) 등이 소를 올리기를, “환시(宦寺)는 본래 궁궐 안을 소제하는 것을 직무로 삼고 그 밖의 일은 간여하지 않았는데, () 나라에 이르러 옛 제도를 무너뜨리고 조고(趙高)를 중거부령(中車府令)으로 삼아서 2()가 그 손에 죽었으며, 서한(西漢)에서는 홍공(弘恭)을 중서령으로 삼아 충량(忠良)을 죽여서, 왕망(王莽)에게 찬탈 당했고, 조절(曹節) 등이 권세를 부리더니 동한(東漢)이 멸망하였으며, () 나라에서는 구사량(仇士良)을 중위(中尉)로 삼았다가 임금을 폐하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였으며, () 나라에서는 동관(童貫)을 장수로 삼았다가 두 황제(휘종(徽宗) 흠종(欽宗))를 여진(女眞)에게 붙들려 가게 하였으며, 전의 원() 나라에서는 원사(院使)가 권세를 부리자 드디어 천하를 잃게 되었으니, 이는 고금(古今)의 밝은 본보기입니다. 우리나라의 조정의 제도에 있어서도 심부름하는 환관이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또한 녹()을 먹은 적이 없었는데, 현릉(玄陵)에 이르러 환자들을 조반(朝班)에 포열(布列)시켰다가, 마침내 최만생(崔萬生)의 변고를 초래하였으니, 이 또한 주상께서 친히 본 바입니다. 주상께서 왕위에 오르시자 다시 내시부(內侍府)를 세우셨는데 관계(官階) 3품이나 되오니, 이는 주상께서 중흥한 임금으로서 다시 나라를 망쳤던 전철을 밟는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궁중의 일 보는 환관에게는 다만 의식만 주고 내시부를 폐지하소서."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 교지를 내리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께서 나라를 세운 이후로 자손이 서로 계승하여 능히 종사(宗祀)를 받들었는데, 공민왕에 이르러 불행히도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셨다. 적신 이인임이 정권을 마음대로 하고자 하여 나이 어린 얼자(孼子)를 기어이 세워 신우를 왕씨라고 거짓으로 일컬어 왕으로 삼았었다. 우가 완악하고 패악스러워서 장차 요양(遼陽)을 침범하려고 하므로, 시중 이(李 태조의 옛 이름) 등이 사직의 큰 계책으로 많은 사람을 타일러 회군하여 왕씨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주장 조민수(曹敏修)가 이인임의 당으로서 다시 권병을 마음대로 하여, 그 간사한 꾀를 계승해서 마침내 여러 사람의 의논을 저지하고, 우의 아들 창을 세우니, 왕씨의 종사가 끊어져 신()과 사람이 다 같이 분노한 지 16년이 되었다. 시중 이(李 태조의 옛 이름)가 충성을 분발하고 대의를 주장하여 마침내 심덕부(沈德符)ㆍ정몽주(鄭夢周)ㆍ지용기(池湧奇)ㆍ설장수(?長壽)ㆍ성석린(成石璘)ㆍ박위(?)ㆍ조준(趙浚)ㆍ정도전(鄭道傳) 등과 더불어 계책을 정하여 위로는 천자의 밝은 명을 받들고, 아래로는 종친ㆍ기로ㆍ문무 신료와 의논하여, 공민왕의 정비(定妃)의 명을 받들어 우와 창 부자를 폐하고, 내가 왕씨로서 가장 촌수가 가깝다 하여 나로 하여금 조종의 대통을 계승하게 하였다. 비록 내가 덕이 적어서 책임을 감내하지 못하지마는 이(李 태조의 그전 이름) 등이 명분을 바로잡고 회복시켜 왕실을 다시 세웠으니, 그 공이 실로 태조의 개국공신들보다 적지 않다. 대려(帶礪)의 맹세로 잊을 수 없고, 벽상(壁上)에 얼굴을 그려 공신으로 남기며, 그 부모와 아내에게는 봉작(封爵)하고, 그 자손에게는 음직을 주며, 10세까지 죄를 사면하노라." 하였다.

○ 대사헌 조준(趙浚) 등이 소를 올리기를, “「경()」이란 한 글자는 제왕이 성인(聖人)이 되는 기초이고, 「공()」이란 한 글자는 제왕이 다스림을 이루는 근본입니다. 청하건대 전하께서는 위로는 황천(皇天)의 굽어보심을 두려워하고, 아래로는 억조 백성의 우러러봄을 두려워하여, 한 사람을 상 주더라도 상제(上帝)의 착한 자를 복 주는 마음에 합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한 사람을 벌주더라도 상제의 음란한 자를 죄주는 뜻에 합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여러 사람이 기뻐한 후에야 상을 주고, 여러 사람이 버린 후에야 형벌을 더하시옵소서. 자문(咨問)을 부지런히 하여 총명을 넓히고, 학문을 좋아하여 덕업을 높이며, 많은 신하를 예로써 대하고, 모후를 효도로써 받들며, 간사한 사람을 제거할 때에는 의심하지 말고, 영을 내리면 반드시 행하시옵소서. 궁궐에 거처할 때에는 백성의 집이 비바람을 막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고, 진수성찬을 드실 때에는 백성이 거친 음식도 넉넉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며, 가볍고 따스한 의복을 입을 때에는 잠부(蠶婦)의 헐벗은 것을 생각하여, 대우(大禹)의 의복을 검소하게 한 것을 본받고, 연향(宴享)에 임해서는 농부의 굶주려 죽는 것을 생각하여, 수문제(隋文帝)의 한 가지 고기만 먹던 것을 본받으며, 검소함을 숭상하고 사특함을 경계하며, 재용을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시옵소서.

군자와 소인의 구분은 왕이 당연히 알아야 될 것입니다. 안색을 엄숙하게 하여 조정에 서서 남김없이 말하고 숨기지 않으며, 우뚝하게 뛰어나서 조금도 회피함이 없는 것이 군자이니, 주상께서 이를 가까이하고 이를 믿으시면 요순의 다스림도 앉아서 이루게 되고, 태조의 업을 계승하여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인아(?)는 반드시 천거하고자 하고, 은원(恩怨)는 반드시 갚고자 하며, 백성의 고통스러움을 듣거나 왕의 과실을 보고도 잠잠하게 있으며, 거리낌 없이 말하지 않으면서 '입은 화()의 문이다.' 하며 아첨만을 행하여 부귀를 도둑질하는 자는 소인이오니, 주상께서 기뻐하여 이를 용납하신다면 걸주(桀紂)의 멸망을 서서 기다리게 될 것이오며, 태조의 공렬이 금방 무너질 것입니다. 원하건대 주상께서는 경사를 통달하고 심술이 바른 큰 선비를 가려서 날을 번갈아 입직하게 하며, 경사를 토론하고 치도를 토론하여 넓고 밝은 학문을 이룰 것이오며, 또 사관으로 하여금 번갈아 곁에서 모시게 하여 좌사(左史)는 말을 우사는 사실을 모두 기록하게 하여 만세에 전하시옵소서. 또 세자(世子)를 위하여 특별히 서연(書筵)을 열어서 당세의 대유를 사부로 삼고, 경의에 밝고 행실이 닦인 선비를 요좌(僚佐)로 삼아, 아침저녁으로 함께 있으면서 경적(經籍)을 강론하고 밝혀서 근본을 바로잡고 근원을 맑게 하는 학문을 밝히게 하소서.

부병(府兵) 8()에 영속되고, 위는 군부사(軍簿司)에 통속되어, 42도부(都府)의 군사가 12만 명이나 되는데, ()에는 정()이 있고, ()에는 위()가 있어 상장에 이르기까지 서로 통속되어 있으니, 금위(禁衛)를 엄하게 하고 외적을 막는 것입니다. () 나라를 섬긴 이후로 태평이 오래 계속되니 문관이나 무관이 모두 안일하고 태만하여 금위(禁衛)에 사람이 없습니다. 이에 근시와 충용에 모두 호군 이하의 관직을 설치하여, 금위의 임무를 대신하게 하고 이들에게 녹을 주니, 이에 조종의 8위의 제도가 모두 소용이 없는 제도가 되어 한갓 국록만 허비하게 되었습니다. 우달치(?達赤)ㆍ속고치(速古赤)ㆍ별보(別保) 등의 모든 애마(愛馬 고려 말의 병제(兵制))가 추울 때나 더울 때나 이른 아침이나 깊은 밤에 수고로움이 심하였으나, 한 되, 한 말의 녹도 먹지 못하였고, 42도부(都府) 5()10()ㆍ위()ㆍ정()의 녹을 먹는 자는 어리고 약한 자제가 아니면 곧 공상과 천예(賤隸)들이어서, 녹을 먹고도 그 직책을 비워두거나, 국사에 부지런하고도 녹을 먹지 못하기도 하였으니, 어찌 조종께서 성의(誠意)로 대우하고 후하게 녹을 주는 뜻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근시(近侍)를 좌우위에 합하고, 사문(司門)을 감문위(監門衛)에 합하고, 사순(司楯)을 비순위(備巡衛)에 합하고, 충용(忠勇)을 신호위(神虎衛)에 합하며, 그 나머지 각 애마는 종류별로 여러 위에 합하여, 이들로 하여금 날을 번갈아 입직하게 하여, 그 부지런하고 게으름을 상고하여 각기 그 위() 안의 호군 이하에서 위ㆍ정의 관직에 이르기까지 품계에 따라 녹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녹을 먹고 그 직무에 부지런하게 한다면, 사람들이 즐거이 일을 보고 국록이 덜어질 것이며, 금위가 엄해지고 무비가 신장될 것입니다.

사막(司幕)은 옛날의 상사(尙舍)이고 지금의 사설(司設)이며, 사옹(司饔)은 옛날의 상식(尙食)이고 지금의 사선(司膳)인데, 지금은 사설은 그 녹을 먹고도 그 직무를 폐하며, 사막은 그 일에 근실하고도 그 녹은 먹지 않으며, 사옹 이하의 관직도 역시 그러하오니, 사막과 사옹 등 애마를 6()에 합하여 선왕의 옛날 제도를 회복하고 근대의 폐해를 개혁한다면 명칭과 실상이 서로 맞고 맡은 일이 확립될 것입니다.

()이 있는 이가 아니면 후()를 봉하지 않는 것은 우리 조정의 법입니다. 김부식(金富軾)은 참란(僭亂)을 제거하고 서도(西都)를 평정하고서 낙랑후(樂浪侯)로 봉해졌고, 김방경(金方慶)은 탐라의 반란을 토벌하고 동쪽의 왜국을 문죄하고서 상락공(上洛公)으로 봉해졌으니, 지금부터는 재상(宰相)으로 사직을 편안하게 하였거나 변방을 평정한 공신이 아니면 군()으로 봉하지 마소서.

환관은 국초부터 경릉(慶陵) 때에 이르기까지 관직에 참여하지 못하였는데, 근래에는 궁중에서 명을 전달하는 직임으로서 도()를 논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재상(宰相)의 반열에 참여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조정을 높이는 방법이 아닙니다. 지금부터는 환관의 제수는 경릉의 제도를 따라서 조관에 임명하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군기시와 선공(繕工)은 사무는 번거롭고 인원은 적으니, 상장군ㆍ대장군ㆍ낭장ㆍ별장을 겸판사ㆍ주부 등 관직에 임명하면 녹이 허비되지 않고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무가 번잡한 시()ㆍ감()도 이를 본받아 겸섭하게 하면 공무에 편리할 것입니다.

학교는 풍속과 교화의 근원이니, 국가의 치란과 정치의 득실이 이에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요사이 전쟁이 일어남으로써 학교가 폐지되었거나 해이하여 무성한 풀밭이 되었는데, 향원(鄕愿)으로 유명(儒名)을 핑계하여 군역을 피하는 자들이 여름 5, 6월 사이에 동자들을 모아 당()ㆍ송()의 절구를 읽고, 50일이 되면 파하고서 이를 '여름 공부[夏課]'라고 하는데, 수령이 된 자들도 이를 보고 범연히 여겨 일찍이 마음에 두지도 않으니, 이와 같이 하고서 경의에 밝고 행실이 닦인 선비를 얻어서 국가의 다스림에 도움을 주고자 한들 되겠습니까. 지금부터는 근실하고 민첩하여 학식이 넓은 사람을 교수관으로 삼아 5도에 각기 1명씩 나누어 보내어 군ㆍ현을 두루 다니게 하고, 그 마필과 접대는 모두 향교에 맡겨서 이를 주관하도록 하소서. 또 주ㆍ군에 한가로이 있으면서 유학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본 고을의 교도로 삼고, 자제로 하여금 항상 사서 오경만 읽고 사장은 읽지 못하게 하며, 교수관은 쉬지 않고 항상 돌아다니면서 과정을 엄격히 세우고, 몸소 어려운 문제를 논의하여 그 통하고 통하지 못한 것을 상고하여 이름을 올려 명부에 쓰고, 인도하고 권장하여 진실한 이재를 이루게 하되 인재를 많이 배출시켜 효과를 거둔 자는 계급을 거치지 않고 뽑아 쓸 것이며, 만약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여 효과를 거두지 못한 자는 벌을 논하도록 하시옵소서.

맹자가 이르기를, '불효에 세 가지가 있는데 후사가 없는 것이 그 중에 큰 것이다' 하였으니, 그것은 제사를 끊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옛날에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들에 장사하고 나서 우제(虞祭)를 지내어 신을 편안하게 하고 사당에 모시어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것은 죽은 부모 섬기기를 살아 있는 부모 섬기는 것과 같이 하는 도리입니다. 우리 동방에 가묘의 법이 오랫동안 폐해졌는데, 지금은 서울로부터 군ㆍ현에 이르기까지 모든 집이 있는 자는 반드시 신사(神祠)를 세워 이를 '위호(衛護)'라고 이르니, 이것이 가묘의 유법(遺法)입니다. 아아, 부모의 시체를 땅밑에 묻어 두고 가묘를 만들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면 부모의 영이 어디에 의지하겠습니까. 이것은 자식의 마음이 아닌데, 습관이 떳떳한 일로 여겨 일찍이 생각하지 않았던 것일 뿐입니다. 지금부터는 일체《주자가례(朱子家禮)》를 좇아서, 대부 이상은 3()까지 제사를 지내고, 육품 이상은 2세까지 제사를 지내며, 칠품 이하에서 서인에 이르기까지는 그 부모만 제사를 지내도록 하며, 깨끗한 방 한 칸을 가려서 각기 한 감실(龕室)을 만들어, 그 신주를 간수하되 서쪽을 윗자리로 삼을 것이며, 초하루와 보름에 반드시 전()을 드리고, 밖에 나가고 집에 들어올 때에 반드시 고하며, 철을 따라 새로 나는 음식물은 반드시 올리며, 기일에는 반드시 제사를 지내고, 기일을 당하면 말을 타고 출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빈객을 대접할 때에 상중(喪中)의 예절과 같이하며, 그 무덤에 성묘하는 예절은 풍속에 따르되 매년 삼명절(三名節)과 한식(寒食)으로 정하여 조상을 추모하는 풍속을 이루게 할 것이며, 이를 어기는 자는 불효로 논죄하시옵소서.

《중용》에 말하기를, '성의로 대우하고 녹을 후하게 주는 것은 사()를 권장함이다.' 하였습니다. 이러므로 옛날에는 위로는 공경으로부터 아래로 서리에 이르기까지 녹을 후하게 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모든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들이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는 데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공무에만 마음을 쏟았던 것입니다. 세력 있는 자들이 겸병한 이후로는 조세가 날로 줄고 녹질(祿秩)이 해마다 부족하여, 선왕이 정하신 녹의 숫자는 한갓 형식이 되었을 뿐이니, 유사로 하여금 옛 제도를 참작하여 그 녹질을 풍족하게 한다면 사()가 항심(恒心)이 있어 염치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경기(京畿) 8현은 요역이 매우 번거로운데 그것은 정관(正官)이 통할하고 관찰사가 다스릴 것이 아닙니다. 또 수령이 교화를 펴는 일도 없기 때문에, 과세가 고르지 못하고 부역이 제한이 없어서 백성이 의지해 살 수 없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부터는 각 도의 예에 따라서 현에 5,6품의 관원을 두고 개성부(開城府)를 시켜서 공적을 상고하여 무능한 사람은 깎아내리고 유능한 사람은 승진시키는 법을 밝히소서.

근년 이후로 군사를 거느리는 직임은 그 재주는 묻지도 않고 재상(宰相)의 자리에만 있으면 경솔하게 명하여 이를 보냈으니, 지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적의 기세가 더욱 강해져서 침략을 초래하여 군ㆍ현이 황폐해졌습니다.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임금이 장수를 가리지 않으면 그 나라를 적에게 내주는 것이 되고, 장수가 병법을 알지 못하면 그 임금을 적에게 내주는 것이 된다.' 하였으니, 장수를 가려 왜적(倭賊)을 제어하는 것은 진실로 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 도평의사와 대간을 시켜 각기 위엄과 덕이 일찍부터 드러난 사람을 천거토록 하여, 이들에게 명하여 장수로 삼아 군정을 다스리게 하시옵소서.

또 군정이 여러 곳에서 나오면 지휘가 엄숙하지 않게 되니, 지금 한 도에 세 사람의 절제사(節制使)를 두는 것은 옛 제도가 아닙니다. 지금부터는 동북면과 서북면 외에는 한 도에 한 사람의 절제사만 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폐지하시옵소서.

병이란 것은 백성의 생명을 맡은 것이요 나라의 큰 정사이니, 왕실을 호위하고 화란을 없애기 위한 것입니다. 본조 5 42도부(都府)는 대개 한() 나라의 남북군과 당() 나라의 부위병(府衛兵)에 해당됩니다. () 나라와 금() 나라가 양계(兩界)에 접경하였는데, 요 나라가 진제(晉帝)를 세워 이를 자식으로 대우하고 천하를 노려보면서, 우리나라에 화친을 구하였으나 태조께서 국교를 끊었으며, 금 나라가 요 나라와 송 나라의 세 황제를 사로잡아 위엄이 사해에 떨쳤는데도 감히 옆의 우리를 엿보지 못하고 지금까지 이르게 된 것은, 조종의 군정이 그 규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근세에는 병제가 크게 무너져서 전쟁을 한 지 30여 년이 되도록 군정의 통솔이 없었습니다. 전술이 없는 장수로서 가르침을 받지 않은 백성을 거느리고 싸우게 되어, 멀리 바라보고 놀라서 싸우지도 않고 달아나서 천리에 해골이 널렸습니다. 조그만 왜놈들이 나라의 걱정이 되었으니,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부터는 전임 사품 이상의 관원은 3군에 소속시켜 군에 장수의 보좌로 두고, 오품 이하의 관원은 부위(府衛)에 소속시켜 군부사(軍簿司)에 통속되게 하여서, 위와 아래가 서로 매이고 체통이 서로 연결되어 군정이 한곳에서 처리되고, 여러 사람의 마음이 한곳에 통일된 후에 군령을 거듭 밝히고 사졸을 훈련한다면, 백만의 군사도 몸이 팔을 쓰는 것과 같고 팔이 손가락을 쓰는 것과 같이 쉬울 것이니, 어디를 지킨들 견고하지 않으며, 어디를 공격한들 빼앗지 못하겠습니까.

근세에는 간신이 정치를 문란하게 하여, 장수가 될 만한 인재가 아닌데도 중방(重房)에 늘어섰고, 온갖 전쟁에 수고로운 자는 겨우 첨설직(添設職)에 임명되니, 상벌의 규정이 없어 군사들이 해이해져서 이르는 곳마다 공적이 없습니다. 지금부터는 견고한 적진을 깨뜨리고 적을 함락시킨 공과, 장수의 목을 베고 기를 빼앗은 용맹과, 수많은 전쟁에서 수고한 공적이 있는 자로 공이 큰 자는 상호군(上護軍), 다음은 호군, 중랑장에서 별장, 산원(散員)에 이르기까지 모두 적절히 임명하여, 적을 깨뜨린 공을 장려한다면, 사람마다 모두 윗사람을 친애하여 그를 위해서 죽을 것입니다. 또 근일에 의병을 일으켜 어지러운 세상을 평정할 때에 군에 종사한 자에게도 관직과 상을 주어서 후세 사람을 권장하시옵소서.

국가에서 관찰사를 뽑고 수령을 가려 임명하여 5도를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였는데, 동북면ㆍ서북면만이 아직도 옛날의 습속을 따르고 왕의 교화를 입지 못하였으니, 지금부터는 여러 도의 예에 의거하여 관찰사를 두어서 군ㆍ현을 순행(巡行)하여, 군과 민의 관원 중에 무능한 자는 깎아 내치고 유능한 자는 승진시키게 하시옵소서.

근래에 역호(驛戶)가 피폐해져서 모든 포마(鋪馬 역말)ㆍ전체(傳遞)ㆍ지로(知路)ㆍ지로(指路)의 역()을 주ㆍ군에서 대신 맡아, 그 고통이 심해서 백성들이 흩어져서 도망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런 주ㆍ현을 회복시키고자 한다면 마땅히 역호를 우선으로 돌보아야 될 것입니다. 국가에서 비록 정역별감(程驛別監)을 두어 여러 역()을 편안하도록 하였지마는, 한 사람이 다스릴 수 없어서 역마다 사속(私屬)을 두어 이목(耳目)을 삼았으나 도당(都堂)에서 보낸 사람이 아니므로, 사람마다 이를 업신여기기 때문에 편안하지 못합니다. 지금부터는 역마다 5, 6품의 역승(驛丞) 한 사람을 두어 그 보거(保擧)는 수령의 예와 같이 하고, 또 반인(半印)을 주어 보낼 것이며, 역호를 풍족하게 하고 역마를 번성하게 하는 자가 있으면, 관찰사가 도당에 보고하여 수령이 결원된 곳에 보충하고, 또 경관(京官)에 임명하여 포상할 것이며, 변방과 먼 곳의 역승은 관찰사로 하여금 천거하여 보충하게 하시옵소서.

상평창(常平倉)과 의창(義倉)의 법은 흉년을 구제하는 좋은 계책입니다. () 나라 경수창(耿壽昌)의 의창에 대한 상소(上疏)와 당() 나라 장손평(長孫平)의 사창(社倉)에 대한 건의는, 그 법이 주관(周官)ㆍ위인(委人)의 직책에서 나온 것이오니, 국가를 가진 자는 마땅히 먼저 해야 될 일입니다. 지난해 한여름에 군사를 일으키고 게다가 왜구(倭寇)까지 침범하여 농사짓는 시기를 어기고 수확이 때를 놓치게 되었으며, 금년에는 또 수재를 입어 동남방의 주ㆍ군이 쓸쓸히 헐벗게 되었으니, 흉년을 구제하는 계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가에서 이미 사전(私田)을 개혁하여 이르는 곳마다 모두 축적이 있으니, 지금부터는 군ㆍ현에 모두 상평창을 두고, 풍년에 거두었다가 흉년에 흩어 주는 법은 일체 근일에 도평의사에서 아뢴 바에 의해서 행하소서. 적이 듣건대, 양광도(楊廣道)에서는 상평창을 설치하였다고 하니, 각 도로 하여금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게 하되, 법대로 하지 않는 수령이 있으면 이를 벌주소서.

먹는 것은 백성에게 제일 소중한 것이 되고 곡식은 소[]로 인하여 생산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나라에는 소 잡는 것을 금지하는 도감[禁殺都監]이 있으니, 이는 농사를 소중하게 여기고 백성의 생계를 후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달단(??)의 수척(水尺)은 소를 잡는 것으로써 농사를 짓는 것에 대신하니, 서북면이 더욱 심하여 주ㆍ군의 각 참()마다 모두 소를 잡아서 손님을 먹여도 이를 금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금살도감과 주ㆍ군의 수령으로 하여금 금령을 신칙ㆍ시행하게 하되, 법을 위반하는 자를 잡아서 관()에 알리는 자가 있으면 범인의 가산을 상으로 주고, 금령을 범한 자는 살인죄로 논죄하시옵소서.

주ㆍ군에서 위에 바치는 삭선(朔膳)과 사객(使客)을 대접하는 등의 일로 인하여, 비록 한창 바쁜 농사철이라도 농민을 모아서 가시숲 속을 쫓아다니면서 한 달 동안이나 사냥하니, 농사가 시기를 놓쳐서 백성의 먹을 것이 넉넉하지 못한 것은 이 일 때문입니다. 닭과 돼지 같은 가축이라면 우리 안에서 이를 취할 수 있으니 백성에게 소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경기에 계돈장(鷄豚場) 두 곳을 만들어 한 곳은 전구서(典廐署)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하여, 종묘와 제사의 쓰임에 이바지하게 하고, 한 곳은 사재시(司宰寺)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하여 어주(御廚)에 바치는 것과 빈객의 쓰임에 공급하게 할 것이며, 주ㆍ군과 각 역()에도 모두 이를 기르게 하여 수용을 절약하고 잘 기르며 새끼 가진 짐승을 죽이지 않는다면, 수년이 못 되어서 공상(供上)ㆍ제사ㆍ빈객의 쓰임에 충당되고 우리 백성들의 먹을 것도 풍족하게 될 것이며, 사냥함으로 인하여 농사를 망칠 걱정도 없게 될 것입니다.

사옹시(司饔寺)에서는 해마다 각 도에 사람을 보내어 대궐에서 쓰일 자기(瓷器)의 제조를 감독하는데, 1년에 한 번씩 하게 되오나 공사(公事)를 빙자하고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해서 온갖 방법으로 침탈하여 한 도에서 짐을 싣고 오는 것이 소 890바리나 됩니다. 지나오는 곳은 떠들썩하지만, 서울에 이르러서 바치는 것은 백 분의 일 정도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사사로이 차지하니, 폐해가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또 새의 깃[]과 수의 힘줄[]과 화살대[箭竹] 등의 차견(差遣)이 있어서 백성을 소란하게 함이 한 가지가 아닙니다. 지금부터는 각 관사의 애마(愛馬)를 외방에 보내는 것은 일체 이를 금하되, 모든 이와 같은 일은 모두 도당에 아뢰게 하고, 도당에서는 관찰사에게 내려보내며, 관찰사는 물품이 있는 주ㆍ현에 배정하여 문서에 따라서 직접 바치게 한다면 백성에게 편리할 것입니다.

군사가 왜놈들과 싸워서 빼앗은 말과 무기와, 모든 백성들이 적을 죽이고 빼앗은 물건은, 그 곳의 관원이 경내에 통첩하여 도적같이 국문해서, 모두 서울로 실어 보내어 후한 상()을 바라니, 윗사람을 속이고 백성을 해침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군사들은 해이해지고 적의 세력은 더욱 강하게 되니, 매우 나쁜 계책입니다. 지금부터는 여러 도의 장수 중에 적을 깨뜨린 자는 벤 적의 머리만 바치게 하고, 군사와 백성들이 빼앗은 왜적의 물건은 추국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기록하여 영전(令典)으로 한다면, 사람들이 그 이익을 즐거워하여 싸움에 용감할 것이오며, 이를 범한 자는 불렴죄(不廉罪)로 논죄하소서.

재상은 임금의 보좌이니, 더 불어 천위(天位)를 함께 누리고 천공(天工)을 대행하는 사람입니다. 그 높음이 비할 데가 없으니, 불행히 죄가 있으면 이를 폐하여도 될 것이며 이를 물리쳐도 될 것이며, 이를 사사하여도 될 것이온데, 마침내 법리(法吏)에게 내려서 포승으로 몸을 결박하고 칼을 씌우며 머리를 베어 달고 몸뚱이를 드러내어 버려두고 장사하지 못하게 하니 심한 일입니다. () 나라 문제(文帝) 때에 가의(賈誼)가 소()를 올려 대부 이상에게는 형벌이 미치지 않아야 한다고 하니, 문제가 이 말을 깊이 받아들여 이로부터 대신에게 죄가 있으면 모두 죽음을 내리되, 모욕은 주지 않았고, 예로써 아랫사람을 대우한 까닭으로 그 당시에 사대부들이 남의 과실을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한 나라 4백 년의 예속(禮俗)을 이루었습니다. 지금부터는 양부(兩府 문하부ㆍ밀직사)의 대신에게 비록 죽을죄가 있더라도 그 대역부도(大逆不道) 외에는 한 문제의 옛일을 본받아 죄인을 죽여 그 시체를 여러 사람에게 보이는 형벌은 쓰지 말아, 국가에서 대신을 후하게 대우하는 은전(恩典)을 이루소서.

《서경(書經)》에, '()은 후사(後嗣)에게 미치지 않는다.' 하였으며, 《맹자》에, '죄인은 형벌이 처자(妻子)에게는 미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순()은 곤(?)을 형벌에 처하고도 그 아들 우()를 재상으로 삼았으며, 무왕(武王)은 주()를 목베고도 그 아들 무경(武庚)을 봉작하였으니, 곧 천지가 만물을 생육하는 마음입니다. 근세에 와서는 사람 죽이기를 밥 먹듯이 하고 남을 멸족하는 데는 오히려 그 후사가 남아 있을까 두려워하니 매우 불인한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모든 죄가 있는 자는 3대의 거룩한 임금들의 제도를 본받아 처자가 연좌(連坐)되는 일이 없게 하여, 거룩한 우리 조정의 인자한 정사를 보이소서.

모든 옥사와 모든 금계(禁戒)를 문왕(文王)이 감히 이를 간여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것이 주 나라가 다스림을 이루었던 것이며, 진평(陳平)이 전곡(錢穀)의 숫자를 알지 못하여, 군자가, '진평은 재상의 체통을 아는 사람이다.' 하였으니, 그가 다른 관청의 직무를 침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조의 제도는 도당(都堂)이 백규(百揆 백관)를 통솔하고 호령을 반포하며, 헌사(憲司)가 백관을 살피고 풍속을 바로잡으며, 전법도관(典法都官)이 곡직을 분별하고 옥송을 결단하는 것이 그 직책입니다. 근래에는 요행을 바라고 이익을 탐하는 무리들이 대궐 안을 속이고 도당을 업신여겨 송사의 문서가 많이 쌓이고, 문서를 발송하는 사이에 고식적이고 구차스러워 그 번잡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니, 관직을 설치하고 직책을 나누게 한 본뜻이 아닙니다. 지금부터는 송사하는 자로 하여금 각기 맡은 관사(官司)에 송사를 하게 하고, 바로 대궐 안과 도당에 올리는 것은 일절 이를 금지시켜 대궐 안을 높이고 도당을 엄하게 하소서. 모든 공사(公私)의 재물을 불려서 늘리는 것은 본전이 1냥이면 이자도 1냥일 뿐이온데, 요사이 재물을 늘리는 무리들은 이익만 보게 되어 본전 1냥의 이자가 10배까지 이르기도 하니, 빌려 쓴 무리들이 아내를 팔고 자식을 팔아도 마침내 갚지 못하므로, 국가에서 이미 금령(禁令)이 있었습니다. 지금 공판도감(供辦都監)의 보미(寶米 보()의 미곡(米穀))는 불리고 늘리는 데 한이 없어서 빌린 사람으로 하여금 집을 잃고 생업을 잃게까지 만들었으니, 국가에서 백성을 구휼하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부터는 본전 1냥에 이자도 1냥을 받고 더 취하지 못하게 하소서.

삼사(三司)와 육부(六部)의 관원은 때로 친히 소속 각 관사(官司)에 이르러 그 보고된 것을 가지고 문서를 살펴 조사하고, 회계를 점고하여 사무가 점점 해이함이 없도록 할 것이니, 만약 법을 받들지 않는 자가 있으면 헌사로 하여금 이를 살펴 다스리게 하여, 큰 죄는 강등시켜 별도로 쓰기도 하고 제명시켜 서용하지 않기도 하여, 죄에 따라서 이를 논죄하고, 작은 죄는 순군부(巡軍府)에 문서를 내려보내어 태형(笞刑)과 장형(杖刑)을 쓰고 관직을 회수하소서.

서울과 지방의 모든 관리가 제목(除目)이 내려간 지 여러 날이 지나도 즉시 취임하지 않으므로, 공사(公事)를 지체시켜 그 문서와 전곡(錢穀)이 모두 간사한 아전에게 숨김을 당하니, 이것은 폐해의 큰 것이며, 또 신하가 성심으로 임금을 섬기는 도리가 아닙니다. 지금부터는 대성과 정조(政曹)를 제외한 그 경관(京官)의 모든 원리(員吏)는 임명이 내린 후, 경관은 3, 외관(外官) 10일로 한정하여, 대궐에 나아가서 사은하고 즉시 상관(上官)으로 가서 취임하게 하소서. 권지행사(權知行事)라고 일컫는 것은 신관(新官)과 구관(舊官)이 서로 마주 대하여, 문서와 전곡 관계를 명백하게 계약서로 만들어, 손수 서로 교부하여 고과에 증빙하게 하고 사은 후에 정식으로 관직에 취임하게 하되, 법대로 하지 않은 자가 있으면 법으로써 엄하게 다스리소서.

근년 이후로 기강이 점점 해이하여 향리가 군공이라 일컬어 관직을 부당하게 받기도 하고, 잡과(雜科)를 빙자하여 본역(本役)을 피하려고 꾀하기도 하며, 권세 있는 사람과 결탁하여 외람되이 관질(官秩)이 올라가기도 한 자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으므로, 주ㆍ군이 텅 비고 8()가 피폐해졌습니다. 지금부터는 비록 3() 1()로써 34() 향리의 역()을 면하였으나, 확실한 증명서가 없는 자와 군공(軍功)으로 향리의 역을 면하였으나, 특별히 기특한 공을 세워 공패(功牌)를 받은 일이 없는 자와, 잡과라도 성균관의 전교(典校)ㆍ전법(典法)ㆍ전의(典醫) 출신이 아닌 자와, 첨설직(添設職)의 봉익(奉翊)과 참관직의 3품 이하는 강제로 본역에 따르게 하여 주ㆍ군을 채우고, 지금부터는 향리에게 명경과와 잡과 출신의 향리라도 역을 면하지 못하게 하고 이를 일정한 법식으로 삼으소서." 하였다.

○ 사헌부에서 소()를 올려 전제를 논하였는데, 그 대략에 말하기를, “하늘이 화란(禍亂)을 뉘우쳐서 흉악한 사람들이 이미 멸망되고 신씨(辛氏 우 창)도 이미 제거되었으니, 마땅히 사전을 일체 개혁하여 백성을 부유하고 오래 살도록 하셔야 하는데, 이때가 그 기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신과 대가들은 사직의 큰 계책은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폐단이 있는 풍속을 이어받아 서로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뜨려 인심을 선동하여 사전을 회복하고자 합니다. 주상께서 중흥하여 왕위에 오른 지 열흘 만에 생민이 도탄에 빠진 것을 생각하시고, 여러 해나 된 큰 폐해를 깊이 징계하여 멀리는 성주(成周)의 규전(圭田 경대부(卿大夫)의 제전(祭典))ㆍ채지(采地)의 법을 계승하고, 가까이는 문종(文宗)이 경기(京畿)를 넓히고 개척하였던 제도에 따르소서. 경기는 서울에 있는 시위하는 자의 전지로 주어서 사족(士族)을 우대하셨으니, 곧 문왕(文王)이 벼슬한 자에게 대대로 녹을 주던 아름다운 뜻이요, 여러 도()에는 군전(軍田)만 주어서 군사를 구휼하셨으니, 곧 조종이 선발한 자에게 전지를 주던 좋은 법입니다. 이에 서울과 지방의 전지의 경계가 확실하여져 서로 엉클어지지 않게 하였고, 겸병의 문을 막고 쟁송하는 길을 막았으니, 진실로 성인의 제도입니다. 그러나 경기에서 전지를 받았는데도 수량이 차지 않는 자에게는 외방(外方)에서 이를 주고자 하는데, 이것은 전하께서 다시 겸병의 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신등은 전하의 성하게 중흥하는 정치를 위하여 이를 심히 애석하게 여깁니다. 전제을 먼저 바로잡지 않고서 중흥의 정치를 이루고자 하는 것은 신등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6도의 관찰사가 보고한 개간된 전지의 수량은 50만 결()도 되지 않는데, 상부에 바치는 것은 풍족하게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10만 결을 우창(右倉)에 속하게 하고, 3만 결을 사고(四庫)에 속하게 하였습니다. 녹봉은 후하게 주지 않을 수 없으므로 1만 결을 좌창(左倉)에 속하게 하였으며, 조관(朝官)를 우대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경기(京畿) 10만 결을 나누어 주니, 그 나머지는 17만 결뿐입니다. 6도의 군사와, ()ㆍ원()ㆍ역()ㆍ시()의 전지와, 향리(鄕吏)ㆍ사객(使客)ㆍ아록(衙祿)ㆍ늠급(?)의 쓰임도 오히려 넉넉하지 못하고, 군수(軍需)가 나올 곳도 없는데, 지금 또 사전을 외방에서 주려고 하니, 자세히 모르겠습니다마는, 공상(供上)ㆍ녹봉의 비용과 진ㆍ원ㆍ역ㆍ시의 각종 전지는 어디서 오겠으며, 방진(方鎭)의 병졸과 해도의 군졸은 무엇으로써 먹이겠습니까. 만일 3, 4년 동안 수재와 한재가 있게 되면 무엇으로써 이를 진휼하겠으며, 수천 수만 명의 군사를 먹이는 비용은 무엇으로써 공급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위로는 태조의 큰 업을 계승하고 아래로는 중흥의 무궁한 터전을 여는 이때에 나라의 재용을 저축하여 제사와 빈객의 비용을 넉넉하게 하고, 녹봉을 풍족하게 하여 백관을 후하게 대우하고, 군량을 넉넉하게 하여 삼군을 기르지 않고서, 이에 도리어 대가들이 근거 없이 퍼뜨린 소문을 두려워하여, 생민의 큰 계책은 생각하지 않고 외방에다 사전을 일으켜 간사하고 교활한 자가 겸병하는 문을 열고자 하시니, 삼군을 굶게 하여 6도의 변방 도적을 기르게 하고, 녹봉을 박하게 하여 백관의 염치를 무너뜨리고, 나라의 재용을 부족하게 하여 제사와 빈객의 비용을 모자라게 함이, 어찌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정사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모든 서울에 있는 자에게는 경기 안의 전지만 주고, 외방에서 전지를 주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심을 일정한 법으로 삼아, 백성과 더불어 혁신하여 나라의 재용을 넉넉하게 하고, 백성의 생계를 후하게 하고 조정의 선비를 우대하고, 군량을 풍족하게 하소서." 하였다.

○ 왕이 아우 우()를 영삼사 영삼사종부시사(領三司宗簿寺事)로 삼고, 조준(趙浚)을 문하평리 판상서시사(門下評理判尙瑞寺事), 성석린(成石璘)을 사헌부 대사헌을 겸하게 하였다.

○ 관제를 고쳤다.

○ 계해일에 왕이 효사관(孝思觀)에 나아가서 우와 창을 벤 일을 태조에게 고하기를, “조선(朝鮮)의 말기에는 나라가 아주 작게 나누어져서 78개나 되었는데 약한 나라를 강한 나라가 합하여 모두 세 큰 나라[三雄]가 되어 전쟁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성조(聖祖 태조)께서 일어나니 왕사(王師)가 가는 곳에 많은 도적들이 평정되었습니다. 김부(金傅 경순왕(敬順王))가 와서 의탁하고, 견훤(甄萱)이 와서 항복하고, 신검(神劍)이 항복하여 통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자손이 4 57년을 서로 이었는데, 공민왕이 아들을 두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니, 적신 이인임이 나라의 정치를 마음대로 하고자 하여, 이에 신돈(辛旽)의 비첩(婢妾) 반야(般若)가 낳은 우()를 세워 왕으로 삼고, 족제(族制) 이임(李琳)의 딸을 시집 보내어 사내아이를 낳으니 창()이었는데, 그를 부자가 서로 왕위를 계승하여 국운이 중간에 끊어졌습니다.

근년에 창이 중국에 친히 조회하기를 청하니, 예부에서 자문을 보내어 이성(異姓)이 왕이 되었음을 꾸짖었습니다. 자문이 도착되니 이임(李琳)이 상상(上相)으로서 이를 숨기고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시중 이(李 태조의 그전 이름)가 충성을 분발하고 대의를 주창하여 왕씨(王氏)를 흥복시키려고 하니, 덕부(德符)ㆍ몽주(夢周)ㆍ용기(湧奇)ㆍ장수(長壽)ㆍ석린(石璘)ㆍ박위(?)ㆍ조준(趙浚)ㆍ도전(道傳) 등 여덟 명의 장상(將相)이 그 계책을 돕고 정하여, 종친ㆍ백료와 함께 공민왕의 정비(定妃)의 궁에 나아가서, 모두 비의 교지를 받들고 천자의 명을 선포하였습니다. ()의 부자를 폐하고 신이 태조의 후손이고 신왕(神王) 7대 손자라 하여 정통을 계승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백관을 거느리고 조상의 묘()에 반정한 것을 고합니다.

우와 창을 남겨 두어 천자의 명을 기다리려 하였는데, 간신(諫臣) 사충(思忠) 등이 우와 창을 베기를 청하여 말하기를, '춘추의 법에 난신ㆍ적자는 누구나 이를 목 벨 수 있으니, 먼저 일을 행하고 후에 알려도 될 것이므로, 반드시 사사(士師 법관)가 아니라도 처형할 수 있습니다.' 하였으며, 잇달아 사재부령(司宰副令) 윤회종(尹會宗)이 말을 올리기를, '두 흉인은 조종의 죄인이니, 왕씨 신하들과는 이 세상에서 함께 살 수 없는 원수이므로 하루라도 왕씨의 땅 위에는 둘 수 없습니다.' 하므로, 신이 그 말에 감동하여 그 글을 도당에 내려보냈더니, 모두 청하는 것이 간신들의 의논과 같으므로, 드디어 우와 창을 베었습니다. 이미 그 죄를 다스렸으니 재계하고 길일을 가려서 감히 성조의 어진(御眞) 앞에 고합니다.

일찍이 우가 왕위에 오르자, 재상 속명(續命), '그는 참다운 왕자가 아니다.' 하여, 인임(仁任)이 이를 내쫓았으며, 신돈의 첩 반야(般若)가 스스로 말하기를, '우는 바로 내가 낳은 것이다.' 하니, 인임이 이를 죽였습니다. 김유(金庾)와 최원(崔源)이 황제에게, '우는 왕씨가 아닙니다.'라고 하다가, 인임에게 모두 도륙을 당하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화를 두려워하여 아버지가 감히 그 아들에게 말하지 못하고, 남편이 감히 그 아내에게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 이를 아는 사람은 점점 적어지고, 또 그 인친들이 조정과 외방에 뿌리박고 있어서 뽑아 없앨 수가 없었는데, 이제 흥복된 것은 실로 우리 성조께서 가만히 도와주신 공 때문입니다. 아아, 이성이 제거되고 종사가 계승되었으니, 어기지도 않고 잊지도 않아 성조께서 이룬 법을 따르는 일이 곧 신이 마음을 다할 바입니다. 우러러 생각하옵건대, 성조께서는 공신에게 성의를 다하여 시종토록 보전해 주시고 이를 국사에 써서 만세에 귀감이 되게 하였사오니, 한 가지라도 따르지 않는 것이 있으면 신은 효성스러운 손자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원하옵건대, 하늘에 계신 영은 신의 성심을 살피시고 신의 뜻을 도와서 실추함이 없이, 큰 왕업을 계승하여 만세의 태평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하옵소서." 하였다.

또 공신에게 상을 주는 것을 고하는 글에, “탕왕(湯王)은 이윤(伊尹)을 기용하여 우왕(禹王)의 옛 업적을 계승하였고 태갑(太甲)이 끝까지 정치를 잘한 것은 이윤의 훈계에 힘입었으며, 이척(伊陟)은 태무(太戊)를 도왔는데 그 정성이 상제에게 감동되었고, 태공(太公)는 용맹스럽게 은() 나라를 쳐서 천하가 주() 나라를 높였는데, 주공(周公)과 더불어 왕실을 보좌하여 제() 나라에 봉함을 받아 그 책명이 맹부(盟府)에 간수되어 있으며, 그 후손 환공(桓公)은 천하를 바로잡아 주 나라를 높였습니다. 탕왕(湯王) 6백 년이나 전해 내려갔고 주 나라는 그 보다 더 오래갔으니 국운의 장구함은 뒷세상에서 이에 미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실로 이윤ㆍ태공이 보필했던 공로를 잊지 아니하여서 그 자손이 선인의 훌륭함을 본받는 충성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 나라는 삼걸(三傑)에 힘입었으며, 장량은 황제의 스승이 되었으나 그를 정승에 임명하지 않았고 벽곡(?)하는 것을 들어 주었으며 소하(蕭何)는 도필리(刀筆吏)로서 정승이 되었으나 또한 옥에 갇히었으며, 한신(韓信)은 멸족되었고, 경포(?)는 배반하여 화살이 고제(高帝)의 몸에 맞았습니다. 나라에 사람이 없어 그 대를 전하자 중간에 끊어져서 유씨(劉氏 한() 나라) 2대 만에 망한 진() 나라와 같이 될 뻔하였으니, 그 상() 나라와 주() 나라가 나라를 세운 공신인 이윤과 태공으로 하여금 후사를 보좌하게 하여 잘 다스렸던 것에 비교한다면 하나같이 어찌 그렇게 떨어집니까. 성조께서 공에 보답하여 배현경(裵玄慶)ㆍ홍유(洪儒)ㆍ신숭겸(申崇謙)ㆍ복지겸(卜智謙)ㆍ유검필(庾黔弼)ㆍ최응(崔凝) 6()의 얼굴을 그려 어진과 마주 대하게 하고, 태묘(大廟)에 배향하여 춘추로 같이 제사 하였습니다.

31대까지 전하다가 공민왕에 이르러 아들이 없이 갑자기 훙하여 국운이 중간에 끊어졌습니다. 공민왕을 장사지낼 때에 무지개가 해를 거듭 둘러쌌으며, ()가 처음 제사[]를 지낼 때에 올빼미가 태실(太室 종묘에 태조의 신주를 모신 방)에서 우니 천지가 진동하였습니다. 다음 해 3월의 의능(毅陵)의 기일에 큰바람이 불고 비가 왔으며 천둥이 치고 또 우박이 왔습니다. 우가 작()을 물려받을 때에 큰바람이 조묘(?)에서 일어나 북쪽으로 향해 부니, 태실의 망새[鷲頭]가 부러지고 묘의 문이 넘어졌으며, 조묘 침원(寢園)의 소나무가 거의 반이나 뽑히고, 쥐가 태실의 신주 밑자리를 뜯어먹었으며, 이듬해에는 어름(?)에 화재가 일어났습니다. 지난해 6월에는 창()이 세워 둔 말이 전국보(傳國寶)의 갑()을 발길로 차서 자물쇠를 부수고 어보를 부러뜨리고 뛰어나가 달아났습니다. 조종께서 이성을 노하여 그가 받드는 제사를 흠향하지 않으며, 위엄을 보여 이를 끊으시니, 비록 면전에서 가르치고 귀를 당겨 일러 주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 하겠습니까. 인임이 우를 세우고 나서 우()의 생모 반야를 죽여 입을 봉하니, 사평문(司平門)이 무너졌습니다. 뼈를 장사하면서 말하기를, '이는 공민왕의 궁인인데 실상 우의 어머니다' 하였는데, ()의 휘장에 불이 나서 이를 바꾸었더니 또 불이 났습니다. 재상 속명(續命)을 내쫓고 김유(金庾)ㆍ최원(崔源)을 죽이니, 사람들이 모두 기운이 꺾이어 말이 신씨(辛氏)에게 관계되면 깜짝 놀라 얼굴빛이 변하며 멸족 당할까 서로 경계하였습니다. 우와 창의 인친(姻親)이 심복과 조아(爪牙)가 되어 조정과 민간에 뿌리박고 있어, 이를 제거하기 어렵기가 산을 뽑기와 같았습니다. 시중 이(李 태조의 옛 이름)가 충성을 다하고 대의를 분발하여 제일 먼저 흥복(興復)을 주창하여, 덕부(德符) 8장상이 따라 이를 도와 드디어 두 흉인(兇人 우ㆍ창(禑昌))을 제거하였으니, 우리 조종(祖宗) 31대의 하늘에 배향(配享)된 제사를 다시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옛날에 문왕(文王) 4명의 신하가 아니었다면 주() 나라를 세울 수 없었을 것이며, 무왕(武王) 9명의 신하가 있었으므로 큰 공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지금의 이 흥복은 진실로 성조께서 가만히 도와주신 데 말미암은 것이지만, 또한 이(李 태조의 옛 이름) 등의 충성은 일월을 꿰뚫었고 공정은 삼한에 드러났으니, 크게 천도를 따랐기에 하늘이 위에서 도왔으며, 크게 미덥게 하였기에 사람이 아래에서 복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인임과 우ㆍ창이 길렀던 자들로 하여금 갑자기 순종하도록 하여 저자는 가게를 바꾸지 않고, 사람들은 얼굴빛도 변함이 없이, 새벽에 시작하여 아침이 되기 전에 나라가 왕씨에게 돌아오게 하였으니, 이에 성조(聖祖)의 어진에 나아와서 공을 아뢰고 상을 시행합니다. (李 태조의 그 전 이름)에게는 식읍을 주고 군()에 봉하여 대대로 물려받게 하고, 덕부(德符) 이하는 충의군(忠義君)에 봉하고 모두 세습하게 하여 그 녹을 대대로 주게 할 것입니다. 얼굴을 그리고 공적을 새겨서 영구히 전할 것을 맹서하고 이를 종묘에 간수합니다.

성조(聖祖)께서는 후사왕과 9명의 후손을 도와 마음과 덕을 같이하여,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두려워하여 위로는 종묘를 받들고 아래로는 생령을 보전하여 천록(天祿)을 같이 누리고 영원한 세대까지 전하도록 하여 주소서. 9명의 자손은 비록 대역을 범하더라도 재량하여 가장 가벼운 죄에 처하고, 다시 그 후사를 구하여 작()을 물려받고 제사를 받들게 하며, 대대로 끊어짐이 없게 하여 9명의 공에 보답할 것입니다. 후사왕이 중흥의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고 9명의 후손으로 하여금 혹시 그 작과 식읍을 잃게 한다면 성조(聖祖)께서 죄를 주어서 나라를 누리지 못하게 할 것이며, 9명의 후손이 그 조부의 충성을 잊고 간사한 꾀를 품거나 교만하고 사치하여 집에 재앙를 끼치고 나라에 해를 끼친다면, 성조께서 이를 죄주어 그 작과 식읍을 다른 후손에게 주어, 9명으로 하여금 영원한 세대까지 제사를 받게 하소서. 이는 신이 9명에게 사사로운 정을 두는 것이 아니고 실로 9명이 죽음을 무릅쓰고 계책을 내어 사직에 몸을 바쳐 왕씨(王氏)를 흥복시켜, 우리 조종의 종사로 하여금 하늘과 더불어 무한히 전하게 함을 가상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 종친ㆍ문무 기로ㆍ신료(臣僚)들은 중흥ㆍ반정할 때에 위주(僞主)를 버리고 진주에게 돌아와, 어려운 지경에 있는 나를 호위하였으니, 신이 매우 이를 가상하게 여깁니다. 성조께서는 그 후손을 길이 도와서 우리 왕실을 호위하게 하소서." 하였다.

9공신의 녹권을 내려 주었는데, 우리 태조로 분충 정난 광복 섭리 좌명공신 화령군 개국충의백(奮忠定難匡復燮理佐命功臣和寧郡開國忠義伯)으로 삼고, 식읍 일천호 식실봉 삼백호, 2백 결, 노비 20()를 주었으며, 심덕부를 청성군 충의백(靑城郡忠義伯)으로 삼고, 1 50, 노비 15구를 주었으며, 정몽주ㆍ설장수 등 7명은 모두 충의군으로 삼고 각기 전 1백 결, 노비 10구를 주었다.

 

 

[D-001]사명(詞命) : 문신(文臣)이 왕을 대신하여 교서(敎書) 및 외교 문장을 제술(製述)하는 것이다.

[D-002]옥배(玉杯)와 상저(象箸) : () 나라 주()가 사치하여 처음으로 옥배(玉杯)와 상저(象箸)를 만드니, 기자(箕子)가 탄식하기를, “장차 경궁(瓊宮)과 요대(瑤臺)를 지어 사치가 한이 없을 징조로다." 하였다.

[D-003]백련회(白蓮會) : 서방(西方) 극락 세계(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하기를 원하여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르고 예경(禮敬)하는 것으로, () 나라 혜원법사(慧遠法師)가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서 백련사(白蓮寺)를 만들어 염불하였는데, 그 절의 연못에 흰 연꽃을 심은 데서 유래했다.

[D-004]찬배(贊拜) : 절할 때에 옆에서 홀기(笏記)를 불러 주는 것이다.

[D-005]명이(明夷) : 《주역》의 명이괘(明夷卦)는 어진 사람이 참소를 당하는 괘이니, 여기서는 참소를 당하여 귀양간 것을 말한 것이다.

[D-006]칠보(七步) : () 나라 조식(曹植)이 글재주가 민첩하여, 걸음을 걸으면서 7() 안에 오언절구(五言絶句)를 지었다.

[D-007]소인유(小人儒) : 《논어》에, 공자가 자하(子夏)에게 이르기를, “너는 군자유(君子儒)가 되고, 소인유(小人儒)가 디지 말라." 하였으니, ()에도 군자와 소인의 구별이 있는 것이다.

[D-008]허물을……안다 : 예를 들면, 후한(後漢) 때 오우(吳祐)의 속관(屬官) 손성(孫性)이 사사로이 백성들에게 돈을 거두어 아비의 옷을 해드리다가 죄를 받자, 오우가 "아전 손성이 오명을 받았으니 이른바 허물을 보고 사람을 안다는 것이로구나." 하고 돌려보낸 일이 있다. 이 말은 허물의 종류에 따라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는 뜻으로 《논어》에도 보인다.

[D-009]어진……법 : 주관(周官)의 제도에, 형벌을 쓰는 데 팔의(八議)가 있으니, 그 중에 의현(議賢)·의능(議能)·의공(議功)의 조목이 있다. 이것은 같은 죄를 지어도, 현인이나 재능이 있는 이나 공()이 있는 이에게는 참작하여 감면할 수 있다는 말이다.

[D-010]자홍(子弘)을 폐하고 : 한 나라 혜제(惠帝)가 죽은 뒤에, 여태후(呂太后)가 자홍(子弘)을 혜제의 후사(後嗣)로 삼았는데, 여태후가 죽은 뒤에 자홍은 혜제의 참아들이 아니라 하여 대신들이 폐하고, 고제(高帝)의 아들인 대왕(代王) ()을 맞아 세웠다.

[D-011]()……명분 : 당시에, () 나라 임금이 출공(出公) ()인데, 그보다 먼저 그의 아버지 괴외(??)가 태자 때에 그의 아버지 영공(靈公)에게 죄를 얻어 망명하고, 영공이 죽은 뒤에 출공이 유명(遺命)으로 즉위하였는데, 그의 아버지 괴외가 국내로 들어오므로 출공이 이를 막았다. 공자가 말한 명분은 위 나라 부자간의 명분을 말한 것이다.

[D-012]측천후는……대의 : 무후(武后)는 중종(中宗)의 어머니인데, 신하들이 무후를 당 나라 황실에 대한 역적으로 처단하게 될 때에 중종이 말려야 할 것이나, 사정(私情)보다 대의(大義)로 모르는 척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D-013]향원(鄕愿) : 한 고을 사람이 모두 그를 점잖다[] 칭하는 것인데, 이것은 지적할 허물도 없고 겉으로 점잖은 것 같으나 실상은 어름어름하게 처세하는 사람으로, 공자와 맹자가 모두 이런 종류의 사람을 덕()의 적()이라 하였다.

[D-014]항심(恒心) : 맹자가 말하기를, “보통 사람은 일정한 산업[恒産]이 있어야 일정한 마음[恒心]이 있다." 하였다.

[D-015]요……대우하고 : 중국 오대(五代) 시대에, 후진(後晉)의 황제 석경당 (石敬?)이 글안의 덕으로 임금이 되어, 글안을 아버지로 섬기었다.

[D-016]보거(保擧) : 천거하는 사람이 그의 신분을 보증하여, 후일에 천거받은 자가 죄를 지으면 천거한 사람이 책임을 지는 것이다.

[D-017]모든……않는다 : 《서경》입정편(立政篇)에 있는 말인데, 문왕(文王)은 대체(大體)만을 살피고, 모든 옥사(獄事) 같은 것은 해당 관청에 맡겨 직접 관여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D-018]채지(采地) : 경대부(卿大夫)의 봉읍(封邑)인데, 그 조세의 수입으로 녹봉을 삼는 것이다.

[D-019]삼걸(三傑) : 한 고조(漢高祖)의 개국을 보좌한 인걸이 3명인데, 소하·장량·한신이다.

[D-020]벽곡(?) : 장량이 벼슬을 사양하고 인간 일을 버리고 벽곡하여 신선을 배우겠다고 한 고조에게 하직하고 갔다.

[D-021]신하 : 태공망(太公望)·태전(太顚)·굉요(?)·산의생(散宜生)을 말한다.

 

 

   

 

 

 

 

 고려사절요 제34   

 

 

 공양왕 1(恭讓王一)

 

 

경오 2(1390), 대명(大明) 홍무 23 

 

 

○ 봄 정월에 낭사 윤소종(尹紹宗)과 이첨(李詹) 등이 소를 올리기를, “변안열(邊安烈)이 신우(辛禑)를 맞이하여 왕으로 세워 왕씨의 종사(宗祀)를 영원히 끊으려고 한 것은 실로 김저(金佇)가 명백하게 말한 바이오며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이오니, 청컨대, 헌사에 내려 형벌을 밝게 적용하고 가산을 적몰하소서." 하였다. 왕은 일이 사()하기 전에 있었다 하여 그 관직만 파면시켰다. 소가 또 올라가니, 관직을 삭탈하고 한양(漢陽)으로 귀양보냈다.

○ 낭사에서 소를 올리기를,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 홍영통(洪永通),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 우현보(禹玄寶), 판삼사사 왕안덕(王安德), 찬성사(贊成事) 우인열(禹仁烈),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 정희계(鄭熙啓) 등은 실상 안열(安烈)의 역모에 참여하였으니, 왕씨의 신하들과는 이 세상에서 같이 살 수 없는 원수입니다. 안열과 함께 헌사에 내려 이들을 극형에 처하소서." 하였는데, 답이 없었다.

○ 낭사에서 다시 아뢰기를, “영통은 인임에게 편당하여 아부하고, 견미ㆍ흥방과 더불어 악한 일을 같이 하고 서로 도왔습니다. 여러 흉인들이 죽음을 당하였으나 영통만은 우의 인척인 관계로 목숨을 보전하고 있습니다. 현보는 벼슬이 상상(上相)에 이르렀으나 관직을 잃을까 근심하였고, 재물에 염치가 없었으며 간사하고 아첨하여 우리의 예절과 풍속을 무너뜨렸습니다. 안덕은 장수란 명칭을 가지고서도 매양 패배하였으며, 남포(藍浦)의 전쟁에서는 전군이 크게 패하여 국가의 위엄을 크게 손상시켰으니, 군법으로 죽음을 당해야 할 것입니다. 인열은 도필리(刀筆吏)에서 출신(出身)하여 권세 있는 사람의 연줄을 타서 정부(政府)에 참여하였으나, 백성들에게 공덕을 끼쳤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희계는 흥방과 인친(姻親)을 맺어 불의를 멋대로 행했으며, 또 우의 아내인 최천검(崔天儉)의 딸 덕으로 요행히 무진년의 난을 면하였습니다. 5명은 죄악이 천지 사이에 가득히 찼으니, 그것만으로도 반드시 목베어야 될 것이온데, 하물며 안열의 모의에 참여하여 신우를 추대하고자 하였으니, 이들은 천지 사이에 용납될 수 없는 바이므로, 전하께서 사사로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대의로써 결단하여 맡은 관사(官司)에 내려 국문하여 죄를 다스리소서." 하였다.

소가 올라갔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으므로 간관이 대궐 문에 엎드려 명령을 기다리며 한낮이 되어도 물러가지 않으니, 왕이 심덕부와 우리 태조를 불러 이 일을 의논하고, 마침내 교지를 내리기를, “안열은 이미 관직을 삭탈하여 귀양보냈고, 영통ㆍ현보ㆍ희계 등은 김저의 진술에서 모두 관계하지 않았음이 드러났고, 안덕은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 모의에 찬동하여 계책을 정하였으며, 인열은 설장수와 함께 중국에 들어가 조회할 때 우의 광패(狂悖)한 형상를 아뢰었으므로, 김저의 모의에는 반드시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니 그 관직만 파면시킨다." 하고는 밀직 부사 유용생(柳龍生)을 몰래 보내어 영통 등에게 말하기를, “내가 있으니 경 등은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다.

이날에 여우가 수창궁(壽昌宮) 서문에서 나와 달아나 효사관(孝思觀)의 서산으로 들어갔다. 낭사에서 다시 소를 올리기를, “여우는 음의 종류이며 구멍에 사는 짐승이니, 소인의 권세에 의탁해 있는 상입니다. 그러므로 전()에 소인의 제거하기 어려움을 논하면서 '성에 구멍을 내고 있는 여우이니, 물을 부을 수도 없다.' 하였으니, 성은 권세를 비유한 것이며 여우는 소인을 비유한 것입니다. 지금 신등이 대궐문에 엎드려 소인을 제거하기를 청하는데, 요망한 여우가 이에 나타났으니, 이는 소인이 모두 제거되지 않은 상이며 하늘이 경고한 것이 명백합니다.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결단을 못 내리고 여우처럼 의심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참소하고 해치는 입을 초래한다' 하였으니, 전하께서는 위로는 하늘의 경고를 두려워하고, 다음으로는 조종의 업을 생각하여 안열 등 6인의 죄를 다스려 조종에 사과한다면 하늘의 견책을 그치게 할 수 있습니다."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 예조에서 적경원(積慶園) 세우기를 의논하여 청하기를, “지금 서원군(西原君) 이하의 4대를 봉하여 높이고 원()을 세워 사관(祠官)을 두는 일을 삼가 전대의 전고에 의거하여 이를 의논하겠습니다. () 나라 말기에 왕망(王莽)이 제위를 빼앗았는데 광무황제(光武皇帝)가 중흥하여 한실(漢室)을 바로잡아 회복시켰습니다. 효원황제(孝元皇帝)는 세대가 제8대에 있고 광무황제는 세대가 제9대에 있으므로 원제(元帝)를 고묘(考廟)로 삼고 4()의 사당을 낙양에 따로 세워 아버지 남돈군(南頓君) 이상에서 윗대 할아버지 용릉절후(?陵節侯)까지를 제사지냈습니다. () 나라의 영종(英宗)은 인종(仁宗)의 종형(從兄) 복왕(?)의 아들로서 들어와서 대통을 계승하였는데, 조서를 내려 복왕을 높이는 전례(典禮)를 의논하게 하였더니, 사마광(司馬光) 등이 의논하기를, '남의 후사가 된 자는 아들이 되는 것이므로 마땅히 생부 복왕은 고관 대작으로 높여 황백(皇伯)이라 일컫고 이름을 일컫지 않는다' 하였으며, 여씨[呂海]는 정자(程子)의 의논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남의 후사가 된 자는 자기를 후사로 삼은 이를 부모라 하고, 그 생부모를 백숙부모라 한다.' 하였으니, 이는 천지의 커다란 법이요, 생민의 큰 윤리이므로 변경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나를 낳은 의는 지극히 높고 지극히 크니, 정통(正統)에 뜻을 전일해야 되겠지마는 어찌 사사로운 은혜를 모두 끊을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사체를 헤아려 별다른 칭호를 따로 세워야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 천명을 받아 중흥한 것이 광무황제와 같아서, 들어와서 대통을 계승하여 조종의 제사를 받들었으니, 서원군(西原君) 이하의 조상을 마땅히 한 나라와 송 나라의 고사에 의거하여 고관대작으로 높이고, ()을 세워 사관(祠官)을 두어 다른 아들로 제사를 받들게 하고, 자손들에게 작()을 물려받도록 하는 것이 예()에 있어서도 마땅히 그렇게 해야 될 것입니다. 청컨대, 정원부원군(定原府院君)을 높여 삼한국대공(三韓國大公)으로, 순화후(淳化侯)는 마한국공(馬韓國公)으로, ()는 마한국비(馬韓國妃), 익양후(益陽侯)를 진한국공으로, ()는 진한국비로, 서원후(西原侯)는 변한국공으로, ()는 변한국비로 삼을 것이며, 원을 세워 '적경원(積慶園)'이라 하고 사관을 두어 적경서(積慶署)라 하며, 제향은 삭망과 사맹월(四孟月)에 하기로 제도를 삼으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사헌부에서 부인과 중들에게는 작을 봉하지 말기를 청하니, 그 청을 따랐다.

○ 사헌부에서 소를 올려 위조(僞朝)의 첨설 직첩을 회수하기를 청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 경연관을 두어 심덕부와 우리 태조를 영경연사로 삼고, 정몽주와 정도전을 지경연사로 삼았다. 왕이 《정관정요(貞觀政要)》를 보고자 하여 몽주에게 그 서문을 강하도록 명하니, 강독관(講讀官) 윤소종(尹紹宗)이 나아와서 말하기를, “전하께서 중흥하였사오니, 이제(二帝 요순)와 삼왕(三王 하ㆍ상ㆍ주)을 모범으로 삼아야 하오며, 당의 태종은 취할 것이 못 됩니다.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읽어서 제왕의 다스림을 천명하소서" 하니 왕이 옳게 여겼다. 이때 큰 범을 잡아서 바치는 자가 있으니, 도전이 말하기를, “여러 도에서 정식 공물 외에 바치는 것은 물리치는 것이 옳으며, 그렇지 않으면 유사에게 맡겨서 나라의 재용으로 마련하소서. 큰 범 같은 것은 길에서 수십 명이 이를 메고 왔으니 번거로운 폐단이 더욱 심합니다. 더구나 그 고기는 제사에도 쓰지 못하니 장차 어디에 이를 쓰겠습니까." 하니 왕이 옳게 여겨 공물과 헌납을 모두 유사에게 맡겼다.

○ 우리 태조에게 8도의 군마를 거느리게 하고, 군영을 두고 번을 나누어 번갈아 숙직하게 하고 군수물자로 늠료(?)를 주었다.

○ 왕의 어머니 복녕궁주(福寧宮主)의 부()를 세우고 칭호를 숭녕부(崇寧府)라 하였다.

○ 사헌부에서 대간으로 하여금 임금의 명전에서 시정의 잘잘못을 아뢰게 하도록 청하니, 이를 따랐다.

○ 농사가 흉작이어서 전조의 6분의 1을 감면하였다.

○ 대사헌 성석린과 좌상시 윤소종 등이 변안열을 베기를 청하였다. 이때 강도가 동대문 밖에서 사람을 겁탈하니, 소종 등이 아뢰기를, “당 나라의 헌종(憲宗) 때에 오원제(吳元濟)가 채주(蔡州)를 점령하고 배반하니, 승상 무원형(武元衡)과 중승(中丞) 배도(裴度)가 이를 토벌하기를 청하였는데, 이사도(李師道)가 번진(藩鎭)으로서 명성과 위세를 믿고 도적을 보내어 무원형을 죽이고 배도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가버렸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원제를 용서하여 번진을 달래기를 의논하였는데, 헌종이 듣지 않고 배도를 승상으로 삼아 마침내 원제를 평정하고 천하를 편안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적이 서울 가까이 있고 또 한양(漢陽)에도 있으니, 강도의 발생은 실상 이 무리들에게서 연유된 것이므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물러가서 소를 올리기를, “전에 안열의 대역에 대해 다섯 번이나 소를 올려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으나, 전하께서 관대히 용서하여 한양(漢陽)에 안치하기만 하니, 나라 사람들이 실망하였습니다. 신우를 강릉으로 옮기니, 탄식하기를, '안열 때문에 죽게 되었다'고 하였으며, 더구나 안열은 조종에게 죄를 지었으니, 전하께서 사사로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헌사로 하여금 그 죄를 밝게 다스려 난적을 징계하게 하소서." 하였다.

왕이 그 소를 헌부에 내리며 말하기를, “귀향간 곳에 가서 다시 국문하지 말고 목 베라." 하였다. 헌부에서 즉시 한양 부윤(漢陽府尹) 김백흥(金伯興)에게 통첩하여 안열을 목베게 하였다. 도평의사사에서 아뢰기를, “대신을 어찌 이유도 묻지 않고 곧바로 극형에 처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므로, 왕이 좌사의 오사충(吳思忠)과 집의 남재(南在)를 보내어 가서 국문하게 하였는데, 사충 등이 길을 떠나 벽제역(碧蹄驛)에 이르니 안열이 죽은 뒤였다. 안열이 형에 임하여 탄식하기를, “신우를 맞아 오려고 의논한 것이 어찌 나 혼자일 뿐이랴." 하면서 말을 하고자 하였으나, 백흥이 묻지 않았다.

○ 문하평리 윤호(尹虎)ㆍ유만수(柳曼殊), 첨서밀직 우홍수(禹洪壽), 동지밀직 유광우(兪光祐),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 최윤지(崔允沚), 밀직 부사 유용생(柳龍生),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 정희계(鄭熙啓)와 우리 공정왕(恭靖王 정종(定宗))과 밀직 부사 김인찬(金仁贊), 지신사 이행(李行), 밀직사 강회백(姜淮伯), 지밀직 윤사덕(尹師德)을 공신(功臣)으로 삼았는데, ()을 폐하고 왕을 세울 때에 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행은 굳이 사양하였다. 윤소종 등이 아뢰기를, “상벌은 나라의 큰 권병이니, 남용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태조 때에 김낙(金樂)과 김철(金哲)도 오히려 6공신의 반열에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화령백(和寧伯 이성계(李成桂)) 이하 9명을 종묘에 고하고 상을 시행하였는데, 윤호 등의 공은 사람들이 듣지 못한 바이오니, 이를 삭제하소서."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 급전도감(給田都監)에서 비로소 전적(田籍)을 반포하였다.

○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왕강(王康)을 경상도 수군도체찰사 겸 방어염철사로 삼았다.

○ 왕이 경연에 나가서 시강관에게 이르기를 "내 나이 이미 많으니 비록 성인의 경서를 읽더라도 이익이 없을 것 같다." 하니, 밀직 박의중(朴宜中)이 아뢰기를 "옛날에 진() 나라의 평공(平公)이 사광(師曠)에게 이르기를, '내 나이 77세이니 배우고자 하나 너무 늙은 듯하다.' 하니, 사광이 아뢰기를, '어찌 촛불을 밝히지 않습니까.' 하였습니다. 평공이 이르기를, '어찌 신하가 되어 임금을 희롱하는가.' 하니, 사광이 아뢰기를, '눈먼 자가 어찌 감히 그 임금을 희롱하겠습니까. 제가 듣건대, 소년 시절에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해가 처음 돋는 것과 같고, 장년에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해가 중천에 빛나는 것과 같고, 늙어서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촛불을 밝힌 빛과 같다 하였으니 촛불을 밝힌 밝음이 어두운 길을 가는 것과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평공이 옳게 여겼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춘추가 아직 젊으시니 배움이 늦지 않았습니다." 하니, 왕이 가상하게 받아들였다.

○ 어느 사람이 익명서를 조준(趙浚)의 집에 보냈는데, 그 글에, “고영수(高永壽)가 우인열과 더불어 난리를 일으키려 한다." 하였다. 조준이 그 사람을 찾아 잡아 보니, 곧 영수의 형 영손(令孫)이 한 짓이었다. 영수와 영손을 순군옥에 가두어 국문하니, 영손이 재물을 다투어 틈이 났기 때문이었다. 무함한 죄를 받아 죽음을 당하였다.

○ 낭사 윤소종 등이 글을 올리기를, “예로부터 난신적자가 당()이 없이 감히 악한 짓을 한 자는 있지 않았습니다. 신등이 적이 듣건대, 역신 안열이 형에 임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신이 죽는 것은 진실로 당연하지만 함께 모의한 자가 많은데 나만 죽는 것인가.' 하였으나, 김백흥이 묻지도 않고 목베었습니다. 안열의 심복 이을진(李乙珍)이 반드시 그 모의에 참여하였을 것이오니, 국문하지 않을 수 없사오며 백흥(伯興)이 역적에 편당하여 죄상을 가린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민수는 적신 이인임에게 편당하여 멋대로 탐욕하고 포악함을 부려 풍속을 크게 문란하게 하였으며, 또 주장(主將)으로서 왕씨(王氏)를 세우려는 의논을 가로막고, 창을 세워 종묘로 하여금 영원히 제사를 받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권근(權近)은 성지를 사사로이 열어보고는 신씨(辛氏 우 창)에게 편당ㆍ아부하여 이임(李琳)에게 먼저 알렸습니다. 이들은 모두 천지 사이에 용납할 수 없는 바이오며, 조종께서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맡은 관사에 내려 법대로 처형하소서." 하였다. 왕이 교지를 내리기를, “민수는 대의(大義)를 주장하여 회군한 공이 있으므로 거듭 논죄할 수 없으니, 마땅히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낼 것이며, 백흥은 파면하라." 하였다.

○ 제강(提控) 박위생(朴爲生)과 규정(糾正) 신효창(申孝昌)을 청주(淸州)로 보내어 을진을 국문하니, 진술한 말이 소윤 원상(元庠), 정주 목사(定州牧使) 이경도(李庚道), 정지(鄭地)ㆍ이임(李琳)ㆍ이귀생(李貴生)과 관련되었다. 대간과 순군부에서 백흥을 국문하고, 또 원상에게 안열ㆍ을진과 더불어 모의한 정상을 국문하니, 원상이 말하기를, “사전 개혁을 원망하여 신우를 맞아 세워 그 일을 저지하고자 하였을 뿐이다." 하였는데, 원상은 안열의 처족이다. 또 사의(司議) 오사충과 장령 권담(權湛)을 안주(安州)로 보내어 경도를 국문하게 하고, 집의(執義) 남재(南在)와 헌납 함부림(咸傅霖)을 전주로 보내어 이임을 국문하게 하고, 정지와 귀생을 계림(鷄林)에서 국문하게 하였다. 백흥이 얼마 뒤에 옥 안에서 죽으니, 왕은 옥관의 엄한 형벌 때문에 죽었는가 의심하여 정몽주에게 말하기를, “무릇 죄수를 국문할 때에는 마땅히 그 정상을 천천히 살펴야 할 것인데, 지금 순군부에서는 법률에 의거하지 않고 갑자지 참혹한 형벌을 가하니, 죄 없는 사람이 더러 죽게 되어 내가 매우 가엾게 여기는데, 하물며 재상은 비록 무거운 죄가 있더라도 사사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원상을 석방하였다.

○ 궁성숙위부(宮城宿衛府)를 설치하였다. 왕이 정도전에게 말하기를, “위조(僞朝)의 첨설직(添設職)을 폐지하고자 하는데, 그 방법을 어떻게 해야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옛날에 사람을 쓰는 법이 네 가지가 있었으니, 문학(文學)ㆍ무과(武科)ㆍ이과(吏科)ㆍ문음(門蔭)이었습니다. 4과로 사람을 뽑되 해당되면 이를 쓰고 해당되지 않으면 버렸으니, 그 누가 원망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또 묻기를, “관질이 높은 자는 어떻게 처우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옛날에 송() 나라에서는 대단관(大丹館)과 복원궁(福源宮)을 두어 제조에 임명하기도 하고 제거(提擧)에 임명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도 이를 본받아 별도로 궁성 숙위(宮城宿衛)를 두고, 관직이 밀직ㆍ봉익(奉翊)인 자를 제조로 삼고, 34품의 관직은 제거로 삼는다면, 정사가 그 마땅함을 얻어 체통이 엄해질 것입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지방에 있는 자는 어떻게 처우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서울에 있는 자를 이와 같이 처우하면 밖에 있는 자도 다투어 와서 왕실을 호위할 것입니다. 그런 후에 관질의 높고 낮은 것으로서 제조나 제거로 삼을 것입니다."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헌부에서 소를 올려 이색ㆍ조민수가 의논하여 신창을 세우고, 또 신우를 맞아 돌아오고자 한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다.

2월에 간관이 또 소를 올려 이색ㆍ조민수 등을 극형에 처하기를 청하니, 이에 이색의 관직을 삭탈하고 조민수와 함께 모두 변방으로 귀양보냈다. 간관이 또 소를 올리기를, “현릉(玄陵 공민왕)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니, 이인임이 신우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대신들 중에 감히 의논을 달리하는 자가 없었는데, 죽은 판삼사사 이수산(李壽山)이 홀로 종친을 세울 것을 청하였습니다. 신우가 왕이 된 뒤에, 신돈의 비첩 반야가 스스로 말하기를, '임금의 어머니다.' 하였는데, 인임 등이 거짓으로, '우는 현릉이 사랑했던 죽은 궁인의 소생이다' 하여 그 명씨를 찾았으나 정하지 못하였습니다. 우사(右使) 김속명(金續命)이 말하기를, '천하에 그 아버지를 분별하지 못한 자는 혹시 있을 수도 있지마는, 어찌 그 어머니를 분별하지 못한 자가 있겠는가.' 하니, 인임이 이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명덕태후(明德太后)의 구원에 힘입어 겨우 귀양하게 되었습니다. 수산 등의 몸은 비록 죽었지만 충의가 사람을 감동시켰으니, 원컨대 포상과 시호를 추가하여 그 무덤에 조제(弔祭)하고, 그 자손을 녹용하여 충혼을 위로하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사의(司議) 오사충(吳思忠), 집의 이고(李皐), 규정(糾正) 전시(田時)를 장단(長湍)에 보내어 이색을 국문하게 하고, 명하기를, “이색을 놀라게 하지 말라. 만약 복죄하지 않거든 마땅히 다시 교지를 받아라." 하였다. 이색이 복죄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신창(辛昌)을 주장하여 세운 것은 내가 모르는 바이니, 조민수와 대질해라." 하였다. 사충이 전시를 보내어 아뢰니, 왕이 명하여 고문을 가하게 하였다. 전시가 돌아와서 교지를 선포하고 옥졸로 하여금 곤장을 잡고 곁에 서서 밤낮으로 핍박하고 또 민수가 창녕에게 자백한 진술을 보이니, 이색이 말하기를,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왕을 세우기를 의논할 때에 민수가 나에게 종친과 아들 창() 중에 주가 적당하냐고 물었으나, 이때는 민수가 주장으로서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왔으며, 더구나 창의 외조부 이임(李琳)과 친족간이라 마음을 같이하고 있었으므로 내가 감히 어기지 못하였으며, 우가 왕이 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마땅히 아들 창을 세워야 된다고 대답하였을 뿐이고, 마음대로 세우기를 맨 먼저 권하여 말한 적이 없다. 지난해 남경에 조회 가서 예부에 이르니, 상서 이원명(李原明)이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서는 아버지를 내쫓고 아들을 세우니 천하에 어찌 이런 도리가 있느냐. 왕과 최영이 모두 갇혔으니, 이것은 무슨 일이냐.'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최영이 왕으로 하여금 요양(遼陽)을 범하도록 하였으나, 장군 조민수와 이(李 태조의 옛 이름)가 불가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의주(義州)까지 왔으나, 감히 출발하지 못하니 최영이 자주 독촉하므로 마지못하여 군사를 돌이켜 최영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에 왕이 노하여 장수들을 살해하고자 하므로, 태후가 왕을 폐하고 강화에 안치하였으니, 개경과의 거리가 20여 리이며, 구도의 경치 좋은 곳이므로 성정을 수양함이 이 땅과 같은 데가 없으며, 또 재상이 시위하고 의장ㆍ기물과 조석으로 받들어 모심이 모두 평일과 같았는데 어찌 내쫓았다고 하겠습니까.' 하였다. 돌아와서 이 시중(李侍中)에게 말하기를, '원명(原明)의 말은 귀로는 들을 수 있어도 입으로는 말할 수 없습니다. 여흥(驪興)은 땅이 머니 가까운 곳에 두면 임금을 추방했다는 비난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니 어떻습니까.' 하였는데, 다만 이 말뿐이었고 진실로 맞아 세우자는 의논은 없었다." 하였다. 사충 등이 진술을 받아 돌아왔다.

이색이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옛날에 진() 나라의 원제(元帝)가 들어가서 대통을 계승하였는데, 치당(致堂) 호씨[胡寅]가 이를 논하기를, '원제는 성이 우씨(牛氏)인데도 사마씨(司馬氏)라고 거짓 일컫고 진() 나라의 종사를 계승하였는데, 동진(東晉)의 군신(群臣)이 어찌 이를 그대로 두고 개혁하지 않았을까. 호갈(胡鞨)이 번갈아 침범하여도 강좌(江左)가 미약하였으니, 만약 구업에 의지하지 않으면 어찌 인심을 결속시킬 수 있었으랴. 이를 버리고 처음 창건하는 것은 어려움과 쉬움이 현절(懸絶)한 것이다. 이것도 형세를 이용하여 이를 성취시키는 데 있어 마지못하여 한 것이다.' 하였으니, 지금 내가 신씨(辛氏)를 세우는데 감히 이의를 가지지 못하는 것도 이 뜻이다." 하였다.

○ 왕이 조계종(曹溪宗)의 중 찬영(粲英)을 맞이하여 스승을 삼고자 하니, 대사헌 성석린(成石璘)과 좌상시 윤소종(尹紹宗) 등이 대궐문에 엎드려 이를 간하고, 또 연장(聯章)하여 소를 올리기를, “삼대의 제왕은 도를 논하고 나라를 다스리며 음양(陰陽)을 고르게 다스리는 자를 스승으로 삼았기 때문에, 탕왕(湯王)도 이윤(伊尹)을 스승으로 삼아 하() 나라를 치고 백성을 구제하여 6백 년의 상() 나라를 창건하였으며, 무왕(武王)도 태공(太公)을 스승으로 삼아 용맹스럽게 떨쳐 일어나 주()를 목 베고 8백 년의 주() 나라를 창건하였습니다. 요진(姚秦)은 오랑캐 중 구마라습(鳩摩羅什)을 스승으로 삼았다가 얼마 안 가서 망하였으며, 전의 원() 나라는 번승(番僧) 파라발제(婆羅跋蹄)를 스승으로 삼았다가, 말세에 가서 천자의 높은 몸으로서 중을 종처럼 섬겨 복과 수를 바랐으나, 마침내 응창(應昌)의 패()함을 초래하였습니다. 불교는 아비도 무시하고 어미도 무시하는데, 요진과 전의 원() 나라는 오호(五胡)ㆍ북적(北狄)의 풍속으로 제왕(帝王)의 다스림을 본받지 않고 강상(綱常)을 문란 시켰으므로 하늘에 죄를 범하여 난망을 재촉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중흥하셨으니, 바야흐로 법을 만들고 모범을 보여서, 성스럽고 신령한 자손들이 억만세토록 따르게 해야 할 것이온데, 이제 다시 오랑캐의 실패한 점을 물려받아 이에 불교를 스승으로 삼으려 합니다. 국가를 가진 자는 정사를 세울 때에 그 명분에 따라서 마땅히 실적을 구해야 합니다. 이른바 사()란 것은 그 도를 본받는 것이온데, 석씨(釋氏)는 신하와 자식으로서 임금과 아버지를 배반하고 도망하여 산림으로 들어가서 적멸을 즐거움으로 삼았으니, 만약 그 법을 본받는다면 반드시 삼한의 백성들을 중으로 만들고, 반드시 구묘(九廟)의 제사를 끊어지게 해야만 그 명분에 맞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임금과 아버지를 무시하는 자를 스승으로 삼지 말고, 요순(堯舜)과 공맹(孔孟)의 도를 높여 삼한의 태평한 업을 여소서." 하니, 왕이 마지못하여 그 말을 따랐다. 찬영(粲英)은 숭인문(崇仁門)까지 와서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갔다.

○ 왕세자가 서연(書筵)을 개설하였다.

○ 대간이 왕의 면전에서 직접 아뢰는 법을 폐지하니, 윤소종 등이 소를 올리기를, “요순은 사악(司岳)에게 자문하여 사방의 문을 열어놓고, 사방의 눈을 밝히고 사방의 귀를 통하게 하여 유익한 말이 숨겨짐이 없었는데도, 오히려 한 말이라도 혹시 아래에서 막혀 위에 통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그 신하에게 명하기를, '나의 도리에 어긴 일을 네가 보필할 것이니, 너는 내가 보는 데서는 복종하고 안 보는 데서는 비난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너도 또한 착한 말을 하라.' 하였습니다. 삼대의 성왕들도 모두 이 도를 따라서 꼴을 베는 천하고 무식한 자에게도 물었으며, 백공(百工)은 각각 자기의 기예에 관한 것을 간하였으며, 비방(誹謗)의 나무가 있고 진선(進善)의 정()이 있었으며, 필부필부의 말도 모두 위에 들리게 하였으니, 상하가 서로 사귀는 것이 태괘(泰卦)가 되었습니다. () 나라가 쇠함에 미쳐 비방하는 자를 감시하게 하여 이를 그치게 하다가, 드디어 문왕ㆍ무왕의 천하를 잃었습니다.

() 나라는 충성을 다하여 간하는 자를 요망하다고 하여 이를 금지시켰으니, 간신 조고(趙高)가 임금 앞에서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여도 이를 말하는 자가 없었으므로, 천하를 얻은 지 2세 만에 멸망하였습니다. () 나라로부터 원() 나라에 이르기까지 언로가 열리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또 평안하였으며, 언로가 막히면 나라가 어지럽고 또 멸망하였습니다. 이성이 나라를 도둑질한 이후로 대간이 입을 다물어서, 무진년에 요동을 치는 일에 이르러서도 한 사람도 말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신 이후로 5일 만에 한 번씩 조회에 나와서 대간으로 하여금 시정의 잘잘못을 면전에서 아뢰게 하니, 온 나라 사람들이 기뻐하여 뛰면서 태평을 기대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대간으로 하여금 다시 면전에서 아뢰지 못하게 하오니, 어찌 크게 중흥의 정치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말 한마디로써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말은, 이를 이르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다시 대간에서 그전대로 면전에서 아뢰게 하시고 여타의 여러 관사(官司)도 각기 그 맡은 일을 가지고 말을 올리게 하여 전하의 총명을 넓혀서 지극한 정치를 이룩하소서." 하였다.

○ 서울 안의 5부와 동북면의 부ㆍ주(府州)에 유학교수관(儒學敎授官)을 두었다.

○ 위조(僞朝)에서 가증(加贈)한 선왕ㆍ선비(先妃)의 시호를 삭제하였다.

○ 대간이 다시 이색ㆍ조민수의 죄를 논핵하였으나, 답이 없었다.

○ 윤소종 등이 소를 올리기를 "대간은 임금의 이목이니 잠시라도 곁을 떠나게 할 수 없습니다. 지난번에 신우 부자의 일은 대체에 관계된 것이므로, 전하께서 대간에게 명하여 가서 그 사실을 추궁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종사를 중히 여기는 한때의 임시 변통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드디어 대간을 밖으로 나누어 보내어 전하의 이목의 직임을 이지러지게 하였으니, 전혀 중흥의 좋은 법이 아닙니다. 지금부터는 대간으로 하여금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임금의 허물을 바로잡으며 임금에게 훌륭한 일을 하도록 권하는 임무를 맡기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교지를 내리기를, “예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문교와 무비(武備)를 어느 한 쪽이라도 폐해서는 안 되는데, 근년 이후로 법제가 점점 해이하여 인재는 일어나지 않고 도적이 일어나 돌아다니니 내가 이 때문에 두려워한다. 벽옹(?雍 천자의 나라에 세운 태학)에 나가서 국로(國老)를 배알하고, 농한기에 무예를 연습하는 것은 옛날의 제도이다. 내가 문묘에 배알하여 유학을 권장하고, 전함(戰艦)을 시찰하여 군용(軍容)을 사열하고자 하니, 맡은 관사(官司)에서는 아뢰어 시행하라." 하였다.

3월에 사헌부에서 소를 올리기를, “지난번 위조 때에 탐관오리의 무리들이 토전과 노비로 권세를 부려서, 나쁜 평판이 중국에 들리게 하였으니, 징계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 관직을 삭탈하고 전지를 주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서 후세 사람을 경계하소서." 하니, 답이 없었다.

○ 왕이 장단(長湍)에 행차하여 전함을 관람하려고 하니, 대간이 소를 올리기를, “주상께서 하는 일을 반드시 사관(史官)이 쓰게 되는데 쓴 것이 모범이 되지 않는다면 후사들이 무엇을 보겠습니까. 지금 전함을 검열하여 무비에 유의하고자 하니, 이는 진실로 편안할 때 위태함을 잊지 않는 원대한 계책입니다. 그러나 나라 사람들은 무비를 정돈하는 뜻을 알지 못하고 모두 사냥한다고 여기는데, 하물며 지금 농사일이 막 시작되었으니, 전하의 행차가 이르는 곳의 길을 닦는 것과 접대의 비용이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컨대 급한 것을 말해보면 교제(郊祭) 참례와 능묘(陵墓) 배알과, 적전을 갈고 문묘에 배알하는 일이 마땅히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당분간 이 일을 정지하여 나라 사람들의 의심을 풀고 농사를 방해하는 폐단을 없애소서." 하였다. 왕이 사람을 보내어 시중 심덕부에게 묻기를, “오늘 일을 장차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임금의 행동거지는 대간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왕이 뜻을 정하고 가려 하였으나, 대간이 그래도 물러가지 않았다. 성석린(成石璘)이 곧장 대궐 안에 들어와서 말하기를, “대간의 말을 거절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왕이 마지못해 그 말을 따랐다. 후에 또 장단에 행차하고자 하니, 간관 이서(李舒)가 이를 간하여 이를 그쳤다.

○ 헌부에서 소를 올려 우인열(禹仁烈)ㆍ왕안덕(王安德)ㆍ우홍수(禹洪壽) 등이 변안열(邊安烈)의 모의에 참여하였음을 극언하여 국문하기를 청하였으나, 그 글을 궁중에 두고 내려 보내지 않았다.

○ 홍영통(洪永通)을 영삼사사로, 우현보(禹玄寶)를 판삼사사로, 왕안덕을 강원군(江原君)으로, 우인열을 계림윤(鷄林尹)으로 삼고, 윤소종과 오사충은 모두 다른 관직으로 옮겼는데 그들이 탄핵하기를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인열을 불러서 관직에 나아가도록 재촉하니, 인열이 말하기를, “대간이 글을 번갈아 올려 신의 죄를 논핵하였으니, 신을 한 변방으로 폄출시켜 여생을 보전하게 하기를 원합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만약 스스로 폄출되기를 원하면 이는 그 죄를 시인하는 것이다." 하였다.

○ 왕이 예성강(禮成江)에 행차하여 전함을 관람하고, 드디어 창릉(昌陵)ㆍ현릉(顯陵)ㆍ양릉(陽陵)ㆍ현릉(玄陵) 4능에 배알하였다.

○ 헌납 함부림(咸傅霖)을 불러서 말하기를, “내가 대간과 형조에 명하여 왕안덕ㆍ우인열ㆍ우홍수 등을 논핵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너는 이를 아는가." 하니, 부림이 대답하기를, “신이 이를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네가 이미 이를 알고 있다면 무엇 때문에 논하여 고집하기를 그치지 않는가. 내가 비록 덕이 없지만 이미 임금이 되었는데 너희들이 내 명을 따르지 않는 것이 옳으냐." 하니, 대답하기를, “상벌이 적당하지 않으면 대간이 논박하는 것은 진실로 그 직책입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너희들이 내 명을 따르지 않으면 마땅히 죄를 주겠다." 하니 대답하기를, “예로부터 임금이 언관에게는 죄를 주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현릉(玄陵) 시대에도 죄를 얻은 간관이 많았다." 하니, 대답하기를, “어찌 현릉을 본받을 것 있겠습니까. 왕위에 오른 초기에는 어진 마음과 어질다는 소문이 있어서 조금 현군(賢君)이라고 일컬어졌으나, 그 후에는 자못 스스로 성인인 척하여 신하들을 멸시하였으므로, 비록 말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마음에 두지도 않으시고 시기함이 날로 심하여 대신과 대간이 모두 그 화를 받았으며, 언로가 막혀져서 점차로 갑인년의 변고를 초래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신의 추대를 받아 대업을 계승ㆍ회복하니, 온 나라 사람이 매우 기뻐하며 태조 때의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다고 하는데, 만약 현릉(玄陵)을 본받고 마는 것이라면 어찌 신민의 기대이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홍수는 지금 공신이 되었으며, 안덕은 회군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인열은 중국에 들어가서 조회할 때에 우()의 죄악을 아뢰었으니, 어찌 우를 맞아 세우고자 하였겠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무진년의 회군할 때에는 권한이 이 시중에게 있었으며, 안덕은 그 휘하에 있었으니 어찌 감히 이의가 있었겠습니까. 인열이 중국에 들어가 조회한 것은 나라의 명에 몰려서 한 일인데, 또한 어찌 그렇지 아니할 수 있었겠습니까. 홍수가 공신이 된 것은 대간이 이미 분수에 넘는 것임을 말하였습니다. 대체로 왔다갔다하는 소인들은 권세와 이익이 있는 곳이면 이를 따르니 전하께서는 대의로써 결단하소서." 하니, 왕이 기뻐하지 않았다.

○ 대간이 번갈아 소를 올리기를, “삼가 선유한 성지를 보건대, '고려의 배신(陪臣)은 충신과 역적이 뒤섞어져 있어 비록 왕씨라고 속여서 이성으로써 왕을 삼고 있으나, 이는 삼한이 대대로 지킬 좋은 계책은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황제폐하는 강하고 분명하며 과감하게 결단하는 자질을 가지고 공 있는 사람은 반드시 상 주고 죄 있는 사람은 반드시 벌 줌으로써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외국의 일을 아는 것도 마치 폐간(肺肝)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으니, 천하 사람들이 만 리를 환히 내다본다고 일컫는 것이 참말이며, 그 제후를 회유하고 절사(絶嗣)된 나라를 잇게 하는 뜻도 지극하였습니다.

지금 시중(侍中) (李 태조의 옛 이름)도 평소에 충의를 품고 위조에 속을 썩였으나 감히 일을 일으키지 못하였는데, 신우의 광망함이 날로 심하여 드디어 요동을 공격하는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 최영이 이를 주장하니, (李 태조의 옛 이름)가 힘써 이를 저지하였으나, 마지못하여 압록강에 이르러 의를 들어 군사를 돌이켜 우를 물러앉히고 최영을 내쫓고 종친을 왕으로 세우기를 의논하였습니다. 이는 황제의 선유하는 말을 보고 개연히 반정할 뜻을 품고 죽음을 무릅쓰고 계책을 내어 대의를 주창하고 대책(大策)을 결정하여, 전하를 받들어 정통을 회복하여 종묘가 그 때문에 제사를 받게 되었으니, 신등이 이르기를, '이것이 천자께서 이른바 충신이라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인임이 정사를 마음대로 하고 총애를 굳게 하고자 하여 우를 세워 임금으로 삼았으며, 그 후에 민수와 이색이 함께 그 아들 창을 세웠고, 변안열ㆍ이림ㆍ이귀생ㆍ정지ㆍ우인열ㆍ왕안덕ㆍ우홍수ㆍ원상 등이 또 이(李 태조의 옛 이름)를 해치고 우리 왕씨의 종사(宗祀)를 끊으려고 하였으나, 다행히 조종의 영에 힘입어 그 계책이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지난번에 안열의 계책이 행하여졌더라면 어찌 이(李 태조의 옛 이름)가 화를 면하지 못하는 것만으로 그치겠습니까. 종친들도 죽지 않고 남은 사람이 없게 될 것이며 전하의 큰일도 실패되었을 것이오니, 신등은 이르기를, '이것이 천자께서 이른바 역적이라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안열이 처형 당했으나 그 나머지의 무리들을 극형에 처하지 않아서 신등이 죄주기를 청하였는데, 전하께서는 윤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포장(?)을 가하고, 글이 두 번이나 올라가도 또 도당에 내리지 않으니, 충신과 역적이 뒤섞어져서 크게 중흥의 누가 됩니다. 이임ㆍ이귀생ㆍ정지ㆍ우인열ㆍ왕인덕ㆍ우홍수ㆍ원상ㆍ을진ㆍ경도(庚道) 등의 죄를 밝게 다스리면 충신과 역적이 분별되어 조정이 깨끗하고 밝아져서 난신ㆍ적자(賊子)가 경계할 바를 알 것입니다." 하니 대답이 없었다.

○ 예조 판서 윤소종(尹紹宗)을 금주(錦州)로 추방하였다. 이전에 소종이 상호군 송문중(宋文中)에게 말하기를, “지금 이 시중은 군자를 천거하고 소인을 물리치지 못하니, 만약 하루아침에 소인의 계략에 빠진다면 후회한들 소용이 있겠는가." 하였는데, 심덕부(沈德符) 등이 이 말을 듣고 왕에게 아뢰니, 왕이 노하여 소종에게 죄를 주고자 하였다. 우리 태조가 청하기를, “조정 신하로서 기탄 없이 바른말 하는 사람은 오직 소종 뿐이오니, 이 사람에게 죄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고 하였다. 좌부대언(左副代言) 이사위(李士渭)도 말하기를, “소종이 여러 번 소를 올렸으나 전하께서 모두 듣지 않았는데, 지금 갑자기 이 사람에게 죄를 준다면 세상에서 평하기를 반드시, '전하께서 강직한 신하를 싫어한다.' 할 것입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내가 소종을 높은 관직에 임명하였는데, 사람들이 어떻게 말할 수 있느냐. 이 시중은 사직에 공을 세웠는데 소종 등이 감히 모욕하니 죄를 주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면서, 드디어 추방한 것이다. 소종은 일찍이 처족 최을의(崔乙義)와 노비 문제로 다투었는데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하더니, ()의 폐신(嬖臣) 반복해(潘福海)에게 청탁하여 이를 얻었었다. 이때 조준(趙浚) 등에게 천거를 받아 낭사(郎舍)가 되자 일을 논하기 좋아하니, 왕이 매양 소종이 반복해에게 청탁한 것을 말하면서 매우 미워하였다.

○ 우리 태조가 병으로 사직하였다.

○ 여름 4월에 왕이 환관을 우리 태조의 집에 보내어 병을 위문하고 억지로 나오게 하며, 9공신에게 교서를 내려 칭찬하고 내구의 말 1, 백금 50, 백견(帛絹) 5()을 각각 주고, 우리 태조와 심덕부에게는 금띠[金帶] 하나를 더 내려 주었으며, 내전에서 위로하는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 정유일에 금성(金星)이 달을 꿰뚫었는데, 왕이 삼사 우사 정도전에게, “금성이 달을 꿰뚫었으니 무슨 재앙이 있으려는가." 하니, 도전이 아뢰기를, “재앙이 중국에 있으니 우리 조정에는 관계가 없습니다." 하였다.

○ 대간이 번갈아 소를 올려 다시 조민수ㆍ이색ㆍ권근을 논핵하고, 또 이임ㆍ이귀생ㆍ이을진ㆍ정지ㆍ우인열ㆍ이경도ㆍ왕안덕ㆍ우홍수ㆍ원상에게 죄주기를 청하니, 왕이 우리 태조와 심덕부에게 이르기를, “대간이 논핵한 민수ㆍ권근은 이미 죄를 주었으니, 경등은 마땅히 대간을 타일러서 다시는 논핵을 고집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마침내 이색은 함창(咸昌)으로, 정지는 횡천(橫川)으로, 이임은 철원(鐵原)으로, 귀생은 고성(固城)으로 옮기고, 인열을 청풍(淸風)으로 귀양보냈다. 을진과 경도는 곤장을 치게 하였으며, 안덕과 홍수는 공이 있고, 원상은 다만 변안열의 말만 들었다 하여 그들은 모두 용서하였다.

○ 선왕(先王)과 선비(先妃)의 존시(尊諡)를 더 올렸다.

○ 회군한 공신을 녹(錄)하는 교서를 내리기를, “신우가 무도한 일을 멋대로 행하더니, 마침내 최영과 함께 요양(遼陽)을 침범하고자 하여, 국가로 하여금 천자의 조정에 죄를 지어 사직의 존망을 대단히 급하게 하였는데, 수시중(守侍中) (李 태조의 옛 이름)가 조민수와 더불어 제일 먼저 대의를 주창하여 장수들을 타일러 계책을 정하고 회군하여 사직을 안전하게 하였다. 그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함께 한 심덕부 등 45명에게 모두 공신(功臣)의 칭호를 내려 준다. 고령삼사사(故領三司事) 변안열은 비록 몸은 이미 죽었으나 공을 잊을 수 없으며, 예조 판서 윤소종과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남재(南在) 등은 사직의 큰 계책을 고사(故事)를 증거로 인용하여 계책을 도왔으니, 역시 칭찬할 만하다. 유사(有司)는 포상의 은전을 거행하라." 하였다.

○ 정비(定妃) 안씨(安氏)를 높여 왕대비로 삼고, 어머니 왕씨(王氏)를 높여 삼한국대비로 삼았다.

○ 헌부에서 경연검토관 신원필(申元弼)이 세자(世子)의 명령을 사칭했다고 탄핵하니, 왕이 그 관직을 파면하였는데, 조금 후에 이를 뉘우치고 말한 자에게 죄를 주려고 하자, 지신사 이행(李行)이 세자에게 몰래 아뢰어 왕에게 간하여 이를 중지하게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우사(右使) 정도전이 아뢰기를, “원필은 곧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기 전의 옛 친구이니, 만약 그 죄를 용서한다면 말한 자는 반드시 전하의 기뻐하고 노함이 사심에서 나왔다고 할 것이오니, 전하께서 처음 정사를 시작할 때 베풀어야 할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하니, 왕의 노여움이 조금 풀렸다.

○ 밀직 부사 유원정(柳爰廷)을 남경에 보내어 노왕(魯王)의 상()을 위로하였다.

○ 대간이 번갈아 소를 올려 다시 변안열의 당()을 논핵하니, 을진(乙珍)과 경도(庚道)를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고, 왕안덕(王安德)은 풍주(?), 우홍수는 인주(仁州), 원상(元庠)은 광주(光州)로 귀양보냈다.

○ 윤월에 지신사 이행과 우대언 조인옥(趙仁沃)을 파면시켰다. 과거에 대간이 이색(李穡) 등의 죄를 논핵하니, 왕이 재상과 이 일을 의논하려고 하는데, 이행이 아뢰기를, “대간의 논핵이 어찌 공신이 시킨 것이 아님을 보장하겠습니까." 하고, 손수 소의 끝에, “이색을 좌주(座主)로 삼았습니다."라고 쓰고는 인옥에게 대신 서명하게 하였다. 대간이, “이행은 멋대로 왕의 이목을 가리는 짓을 일삼는다."고 탄핵하고, 아울러 인옥이, “월권하였다."고 탄핵하니, 왕이 마지못하여 이들을 모두 파면시켰다.

우리 태조와 공신(功臣) 7명이 글을 올리기를, “대간이 이색 등을 논핵한 것은 신등이 아는 바가 아니오나, 사람들이 이로써 신등에게 허물을 돌리고 우()ㆍ창()의 무리들이 신등을 미워하여 말을 조작하고 비방을 일으키니, 신등이 관직을 물러나 비방을 그치게 하고 생명을 보전하기를 청합니다." 하고, 드디어 모두 집안에 들어앉아 나오지 않으니, 대사헌 성석린(成石璘)도 이 소식을 듣고 역시 글을 올려 사직하였으나, 대간의 논핵을 고집함은 더욱 심하였다. 왕이 평소부터 이색이 난을 꾀하였다는 것은 믿지 않았으며, 더구나 우홍수(禹洪壽)는 부마(駙馬) 성범(成範)의 아버지인 까닭으로 대간이 탄핵을 그치지 않음을 노하여 어선(御膳)을 들지 않는데도, 대간은 대궐문에 엎드려 명령을 청하였다. 왕이 전지를 내리기를, “이임ㆍ이색 등은 모두 이미 귀양갔으니, 다시는 논핵하지 말라." 하였다. 9공신에게 명하여 정무(政務)를 보게 하고, 곧 이행(李行)을 청주(淸州)로 귀양보냈다.

○ 대간이 그 말이 시행되지 않아 모두 사직하므로 좌천시켜 수령으로 삼았다. 형조 판서 한상질(韓尙質) 등이 소를 올리기를, “지금 대성에서는 말로써 죄를 얻었으니, 청하건대 모두 유임시켜 그전대로 직무를 보게 하소서." 했으나, 듣지 않았다.

○ 정도전(鄭道傳)을 정당문학으로, 김사형(金士衡)을 밀직사로 삼아 대사헌을 겸무하게 하고, 우리 태종을 우부대언으로 삼았다.

○ 왕안덕(王安德)을 돌아오게 하였다.

○ 도당에서 무과를 설치하되 제가의 병서에 모두 통하고, 또 무예에 익숙한 자를 1등으로 삼고, 무예를 대강 익히고 병서에 통한 자를 2등으로 삼으며, 병서에 조금 통하거나 한 가지 무예를 익힌 자를 3등으로 삼아 33명을 뽑기를 청하니, 그 말을 따랐다.

5월에 왕방(王昉)과 조반(?) 등이 남경에서 돌아와서 아뢰기를, “예부에서 신등을 불러 말하기를, '너희 나라 사람 파평군(坡平君) 윤이(?)와 중랑장 이초(李初)란 자가 와서 제()에게 호소하기를, 고려의 이 시중(李侍中)이 왕요(王瑤)를 세워 왕으로 삼았으나 요는 종실이 아니고 곧 그 인친입니다. 요가 이 시중과 함께 병마를 움직여 중국을 범하려고 하므로, 재상 이색 등이 옳지 않다고 하자, 즉시 이색ㆍ조민수ㆍ이임ㆍ변안열ㆍ권중화(權仲和)ㆍ장하(張夏)ㆍ이숭인ㆍ권근ㆍ이종학(李種學)ㆍ이귀생(李貴生) 등을 살해하고, 우현보ㆍ우인열ㆍ정지(鄭地)ㆍ김종연(金宗衍)ㆍ윤유린(尹有麟)ㆍ홍인계(洪仁桂)ㆍ진을서(陳乙瑞)ㆍ경보(慶輔)ㆍ이인민(李仁敏) 등을 멀리 귀양보냈습니다. 귀양가 있는 재상들이 몰래 우리들을 보내어 천자에게 고하고, 이내 친왕(親王)이 천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토벌하여 주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하면서 윤이와 이초가 기록한 이색ㆍ조민수 등의 성명을 꺼내어 보이므로, 조반(?)이 윤이와 대변하기를, '본국이 대국을 성심으로 섬기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하고, 윤이에게 묻기를, '너는 지위가 봉군에 이르렀다니 나를 알겠느냐.' 하니, 윤이가 깜짝 놀라서 얼굴빛을 변하였습니다. 예부의 관원이, '성스럽고 밝은 천자께서는 그것이 무고인 것을 알고 있으니, 네가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서 왕과 재상에게 말하여 윤이의 글 속에 있는 사람들을 힐문하고 와서 보고하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대간이 서로 잇달아 소를 올려 윤이와 이초의 무리를 국문하기를 청하니, 그 글을 궁중에 두고 내려보내지 않았다. 무술일 밤에 김종연이 도망하므로 경내를 크게 수색하였다. 국가에서 처음 조반의 말을 듣고 추국을 하고자 하면서도 의심하고 주저하여 결정하지 못하였는데, 지용기(池湧奇)가 종연과 잘 지내므로 종연에게 비밀히, “공의 이름이 윤이와 이초의 글 속에 있으니 공이 위태할 것이다." 하니, 종연이 두려워하여 도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큰 옥사가 갑자기 일어나서 우현보ㆍ권중화ㆍ경보ㆍ장하ㆍ홍인계ㆍ윤유린을 순군옥에 가두었다. 옥관이 먼저 매우 매섭고 급하게 유린을 국문하니 진술한 말이 최공철(崔公哲)ㆍ최칠석(崔七夕)ㆍ조언(曹彦)ㆍ조경(趙瓊)ㆍ공의(公義)ㆍ한성(韓成)ㆍ김충(金忠) 등이 관련되었으므로 모두 옥에 가두고, 이색ㆍ이임ㆍ우인열ㆍ이인민ㆍ정지ㆍ이숭인ㆍ권근ㆍ이종학ㆍ이귀생 등을 청주옥(淸州獄)에 가두었다. 얼마 안 가서 윤유린ㆍ최공철ㆍ홍인계가 옥중에서 죽으니, 저자에 목을 매어 달았다. 윤유린의 종제 사강(思康)은 평소에 행실이 없었다. 일찍이 중이 되었으나 장오죄를 범하고 도망하여 중국으로 들어가서 이름을 이(?)라고 고쳤다. 유린의 가신(家臣) 정부개(丁夫介)는 조반을 따라 남경에 들어가서 이를 알고서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고, 돌아와서 먼저 유린의 집에 가서 말하였다. 일이 발각되니 부개(夫介)를 가두었다.

을사일에 문하평리 윤호(尹虎), 밀직 부사 박경(朴經), 우사의(右司議) 이확(李擴), 형조 좌랑 신효창(申孝昌), 사헌 규정 전시(田時) 등을 보내어 양광도 도관찰사 유구(?)와 함께 이색 등을 청주(淸州)에서 국문하게 하였다. 한창 여러 죄수를 국문하는데, 갑자기 천둥이 치고 비가 많이 내려 앞 냇물이 갑자기 범람하여 성의 남문을 부수고 바로 북문에 부딪쳤다. 성안의 물 깊이가 한 길이 넘어서 관사와 민가를 거의 모두 떠내려 보냈으며 옥관(獄官)은 허둥지둥 나무를 휘어잡고 올라가서 죽음을 면하였다. 노인들이, “고을이 생긴 이후로 수재가 이같이 심한 적은 없었다." 하였다.

○ 김종연(金宗衍)을 봉주(鳳州)의 산 속에서 잡아 순군옥에 가두었는데, 종연이 또 변소 구멍으로 도망하였다. 3일 동안 성안을 샅샅이 수색하였으나 잡지 못하자, 엄중하게 지키지 않았다 하여 당직한 영사(令史)를 목 베고 진무 이사영(李士穎)을 가두었다.

○ 왕강(王康)을 밀직부사 삼도도체찰사로 삼고, 한상질(韓尙質)을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 황충의 해가 있었다.

6월에 회양부(淮陽府)의 백성 권금(權金)이 밤에 범에게 물렸다. 집에 장정 7,8명이 있었지만 두려워하여 감히 나가지 못하였는데, 그 아내가 남편의 허리를 안고 문턱에 버티어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힘을 다하여 구원하니, 범이 그제야 버리고 갔다. 다음날 권금이 죽었는데, 도당에서 그 아내를 정표하고 포상하였다.

○ 청주(淸州)에 큰 수재가 있었으므로 이조 판서 조온(趙溫)을 청주에 보내어 죄수를 석방하여 안치하고, 또 오래도록 비가 내리므로 서울의 죄수 1 50명을 석방하였다.

○ 이조(?)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정당문학 정도전(鄭道傳)을 남경에 보내어 성절을 하례하고, 예문관 제학 한상질(韓尙質)은 천추절(千秋節)을 하례하였다. , 아뢰기를 "윤이와 이초의 무망(誣忘)한 일은 신이 감히 먼저 그 허실을 분별할 수 없사오니, 황제께서 관원을 보내어 캐묻기를 원합니다. 또 신이 남경에 가서 배알하여 아뢰도록 하소서." 하였다.

○ 예성강(禮成江)의 물빛이 붉고 끓어오르기를 3일 동안 계속하니 왕이 근심하는 기색이 있었다. 신원필(申元弼), “어찌 그것이 상서가 아닌 줄 알겠습니까." 하니, 사람들이 그의 아첨을 비난하였다.

○ 경진일(庚辰日)에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나 하늘에 뻗쳤다.

○ 동지밀직사사 안숙로(安叔老)를 보내어 연왕(燕王 명 태조의 작은 아들 체(?))에게 빙문하였다.

○ 왜적이 양광도를 침범하여 음죽(陰竹)ㆍ음성(陰城)ㆍ안성(安城)ㆍ죽주(竹州)ㆍ괴주(槐州)에 이르니, 우리 공정왕(恭靖王 정종(定宗))과 지밀직사사 윤사덕(尹師德)을 보내어 왜적을 잡게 하니, 영주(寧州) 도고산(道高山) 밑에서 적을 만나 적의 머리 백여 급을 베고, 사로잡힌 남녀를 빼앗아 돌아왔다.

○ 간관이 소를 올리기를,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초기에는 안일(安逸)에 빠지지 않기를 스스로 기약하여, 대언(代言) 성석용(成石瑢)에게 명하여 〈무일편(無逸篇)〉을 써서 바치게 하니, 온 나라의 신민이 기뻐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사이는 해가 사시, 오시가 되어서야 나오시며, 혹 밤중까지 연회를 하시니 신등이 실망하였습니다. 지금부터는 이른 아침에 정사를 청단(聽斷)하시고 밤중의 연회를 하시지 마소서." 하니, 왕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 도당(都堂)에서 아뢰기를, “문하성의 녹사ㆍ주서와 삼사(三司)의 도사(都事), 밀직사(密直司)의 당후(堂後)ㆍ내원영승(內院令丞)ㆍ선관영승(膳官令丞)은 모두 사재(私財)로 관비(官費)에 쓰고 명칭을 역관(役官)이라 하니, 관직을 설치한 뜻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그 음식과 지찰(紙札)을 모두 관에서 주도록 하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왕이 적경원(積慶園)에 가서 사친(四親)의 작과 시호를 추상하고, 동모제 우()를 시켜서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 헌부에서 소를 올리기를, “좌사의 김진양(金震陽)이 일찍이 동료에게 말하기를, '윤이(?)와 이초(李初)의 일은 세 살난 어린아이라도 조반(?)의 무망(誣忘)인 줄을 알고 있다.' 하며 대역을 경솔히 의논하여 정론을 가로막으니, 관직을 삭탈하고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소서." 하니, 드디어 김진양을 파면시키고, 다른 간관들도 역시 모두 좌천시켰다.

○ 가을 7월에 크게 사면을 베풀었다. 찬성사 정몽주가, 대간이 윤이와 이초의 무리를 논핵함이 매우 심하므로 왕에게 아뢰기를, “마땅히 4대를 추봉(追封)하는 기회에 이색ㆍ권근 등을 사()하는 큰 은혜를 내리소서." 하니, 그 말을 따른 것이다.

○ 유원정(柳爰廷)이 남경에서 돌아와서 아뢰기를, “황제가 윤이와 이초의 무망을 알고 율수현(?水縣)으로 귀양보냈습니다." 하였다.

○ 도당(都堂)에서 아뢰기를, “공이 있는 이가 아니면 봉하지 않는 것이 옛날의 제도인데, 근래에는 공덕의 유무와 관직의 높고 낮은 것은 논하지도 않고 봉군된 자가 너무 많으니, 원컨대 지금부터는 큰 공을 세워서 봉군된 자와 찬성사 이상으로서 봉군된 자가 아니면 녹()을 주지 마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서운관(書雲觀)에서 소를 올리기를, '《도선밀기(道詵密記)》에 지리 쇠왕(地理衰旺)의 설()이 있으니 서울을 한양(漢陽)으로 옮기어 송도(松都)의 지덕을 쉬게 하소서." 하였다. 왕이 박의중(朴宜中)에게 이르기를, “경은 도읍 옮기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아뢰기를, “옛날에 군왕이 참위 술수(讖緯術數)로써 그 국가를 보전했다는 말을 신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많은 사람을 움직이면 백성을 소란하게 하는 폐해와 공급되는 비용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서경》에, '필부ㆍ필부가 스스로 다함을 얻지 못하면 임금이 더불어 그 공을 이룰 수가 없다.'고 하였으니, 전하께서는 살피소서."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내가 그 폐해를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마는 음양의 설이 또한 어찌 거짓이겠느냐." 하면서, 평리 배극렴(裵克廉)을 보내어 가서 궁궐을 수리하게 하였다.

좌헌납 이실(李室)이 소를 올리기를, “전하께서 참위설을 믿고 한양(漢陽)으로 도읍을 옮기고자 하는 일 자체가 이미 옳지 못하옵니다. 하물며, 지금 추수를 다하지 않았는데, 사람과 말이 곡식을 짓밟으면 반드시 백성의 원망을 초래할 것입니다." 하니, 왕이 꾸짖기를, “《비록(?)》에, '도읍을 옮기지 않으면 군신을 폐하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네가 어찌 홀로 옳지 않다고 고집하느냐." 하였다.

○ 왕이 연복사(演福寺)를 중수하려고 절 옆의 민가 30여 호를 철거하였다

○ 사헌부와 형조에서 소를 올려 윤이ㆍ이초 무리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다. 이튿날 대간이 다시 청하였으나 모두 답하지 않았다.

8월에 사대부 집의 제의(祭儀)를 반포하였다.

○ 사헌부와 형조에서 다시 윤이ㆍ이초 무리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니, 도당에 내리어 의논하게 하였다. 정몽주가 아뢰기를, “윤이ㆍ이초의 무리는 죄가 명백하지 않으며 또 사면을 받았으니 다시 논죄할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왕이 오히려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라 마침내 우현보(禹玄寶)ㆍ권중화(權仲和)ㆍ경보(慶補)ㆍ장하(張夏) 등을 먼 지방으로 귀양보냈다.

○ 형조 총랑 윤회종(尹會宗)이 소를 올리기를, “국운의 장구함은 왕이 덕을 많이 쌓고 인을 베풀어 나라의 근본을 배양하는데 달렸을 뿐이온데, 어찌 도성 지세의 왕기(旺氣)만 믿겠습니까. 옛날에 은() 나라 임금 반경(般庚)이 경(耿 지명(地名))을 버린 것은 황하(黃河)가 범람한 재난이 있었기 때문이오며, () 나라 태왕(太王)이 빈(? 지명)을 버린 것은 적인(狄人)의 침범이 있기 때문이오며, 주 나라 평왕(平王)이 동쪽으로 천도(遷都)한 것은 견융(犬戎)의 난리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이러한 몇 가지 일도 없으면서 한양(漢陽)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하니 세상이 몹시 놀라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다만 강물의 빛이 붉고 끓어오르며,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하여 참위의 말을 믿고 천도하여 이를 피하고자 하시며, 또 중 법예(法猊)의 설()에 혹하여 연복사를 수리하면서 사방에 있는 민가를 모두 허물어 집을 잃은 자가 많으니, 신은 전하를 위하여 잘하신다 하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는 도읍 옮기는 일을 중지하시고 법예를 내쫓으시며, 조심하시고 반성하시어 천심에 보답하고 사설에 미혹됨이 없게 하소서." 하였다.

○ 우성범(禹成範)을 단양군(丹陽君)으로 삼고, 강회계(姜淮季)를 진원군(晉原君)으로 삼았다.

○ 밀직(密直) 이두란(李豆蘭)과 장사길(張思吉)을 서해도(西海道)로 보내어 왜적을 쳤다.

○ 왕이 문묘에 배알하였다.

○ 왕이 친히 적경원(積慶園)에 제사를 지냈다.

○ 왜적이 전라도에 침범하니 절제사 이무(李茂)가 쳐서 물리치고 적의 머리 27급을 베었다.

○ 유구국(琉球國) 중산왕(中山王) 찰도(察度)가 사신을 보내와서 빙문하였으며, 우리 나라의 사로잡혀 간 백성 37명을 돌려보냈다.

○ 대사헌 김사형(金士衡) 등이 도읍 옮기는 일을 정지하기를 청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9 1일 경인에 개기식(皆旣蝕)이 있었으며,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서 하늘에 뻗쳤다.

○ 사헌 규정 이감(李敢) 9명을 폄직하여 모두 현의 일을 보게 하였다. 이때에 왕이 궁중의 부녀와 환관에게 상을 내려 주는 것이 제한이 없어 창고에 묵은 저축이 없어지니, 이감(李敢)이 풍저창(?儲倉)에 분대(分臺)로 있으면서 말하기를, “집을 잘 다스리는 사람도 반드시 먼저 재용을 절약하는데, 하물며 나라의 왕이 사사로운 사람에게 함부로 상을 주어 창고를 텅 비게 하는 것이 옳겠는가." 하였더니, 환관이 고했으므로 왕이 노하여 이감의 가노(家奴)를 가두었으니, 동료 박기(朴起) 8명이 모두 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감의 폄직(貶職)이 있게 된 것이다.

○ 내시(內侍)를 보내어 연복사(演福寺)ㆍ낙산사(洛山寺)ㆍ왕륜사(王輪寺) 등의 절에 재()를 베풀었다.

사신 진자성(陳子誠) 이 말하기를, “왕이 즉위한 이후로 신령과 부처에 아첨하여 섬기기를 거의 거르는 달이 없으므로, 대신과 대간이 매양 시비를 늘어놓고 논하였으나, 왕의 마음이 이미 미혹되어 이를 풀 수 없게 되었다. 아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고, 강물의 빛이 붉고 끓어오르며, 일식ㆍ월식이 있고, 천둥과 번개가 때 아닌 데 쳤으니, 하늘의 견고(譴告)가 지극하였으며 사람의 근심과 의심도 심하였다. 진실로 마땅히 삼가고 덕을 닦아서 정사를 고쳐 다스려야 될 것인데, 이 일은 버려두고 하지 않으면서 한갓 신령과 부처의 힘만 빌려서 그 나라를 보전하고 그 지위를 편히 하고자 하였으니, 어찌 미혹됨이 심하지 않는 것이랴." 하였다

공전과 사전의 문서를 저자거리에서 불살랐는데 불길이 며칠 동안이나 꺼지지 않으니, 왕이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조종의 사전법이 과인의 대에 이르러 갑자기 개혁되니 애석한 일이다." 하였다.

○ 병오일에 한양(漢陽)으로 도읍을 옮기고 판삼사사(判三司事) 안종원(安宗源)에게 명하여 송경(松京)에 머물러 지키게 하였다. 경술일에 어가(御駕)가 한양에 이르니 양광도 관찰사 유구(?)가 화려한 가설무대를 짓고 온갖 놀이를 베풀어 맞이하므로, 왕이 먼저 사람을 보내어 이를 그만두게 한 후에야 들어갔다. 간관이 유구가 백성에게 조세를 과중하게 징수하여 왕에게 잘 보이려 한다고 구를 탄핵하여 파면시켰다.

○ 밀직 부사 강은(姜隱)을 남경에 보내어 종마 50필을 바치고, 문하평리 김남득(金南得)과 밀직 제학 이지(李至)는 정조(正朝)를 하례하였다.

○ 도당에서 아뢰기를, “의주(義州)ㆍ이성(泥城)ㆍ강계(江界)는 나라의 울타리가 되므로 더욱 어루만지고 구휼해 주어야 될 것이니, 요역(?)을 면제해 주기를 청합니다."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겨울 10월에 이조에서 아뢰기를, “내시다방(內侍茶房)은 대궐 안에 드나들므로 그 직임이 가볍지 않은데도 정원이 없어 군역을 피하려는 자가 서로 다투어 들어왔다가 겨우 몇 개월이 되면 곧 향리(鄕里)로 돌아가서 요역을 하지 않으며, 걸핏하면 수백 명에 이르게 됩니다. 몸가짐이 단정한 젊은이 백 명을 뽑아 여기에 충당하고 이번(二番)으로 나누게 하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각 도()에 염문계정사(廉問計定使)를 나누어 보냈다.

11월에 우리 태조가 글을 올려 사직하니, 왕이 눈물을 흘리면서 윤허하지 않으므로 태조도 역시 눈물을 흘리면서 사()했다.

○ 우현보(禹玄寶)ㆍ이색(李穡)ㆍ권중화(權仲和)ㆍ경보(慶補)의 죄를 사면하고 편리한 대로 거주하게 하였다.

○ 이전에, 서경 천호(西京千戶) 윤귀택(尹龜澤)이 천호(千戶) 양백지(楊百之)와 더불어 술을 마시다가 술이 취하자 말하기를, “너는 재상을 할 뜻이 없느냐." 하니, 백지가, “누가 그런 마음이 없으랴마는 다만 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하였다. 귀택이 말하기를, “김종연(金宗衍)이 판사(判事) 조유(趙裕)와 함께 모의하여 이 시중(李侍中)을 해치고자 하니, 네가 만약 강한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들과 마음을 같이한다면 재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심 시중(沈侍中 심덕부(沈德符))도 이 모의를 알고 있다." 하니, 백지가 거짓으로 응답하였다.

귀택은 모의가 누설될까 두려워하여 먼저 서울에 이르러 우리 태조에게 비밀히 아뢰기를, “종연이 도망하여 서경(西京)에 이르러 나와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시중(侍中)을 해치자고 약속하였는데, 종연은 이미 몰래 본경(本京 송경(松京))에 들어와서 시중 심덕부, 판삼사 지용기(池湧奇), 전 판자혜부사(前判慈惠府事) 정희계(鄭熙啓), 문하평리 박위(?), 동지밀직 윤사덕(尹師德), 한양 부윤 이빈(李彬), 나주도 절제사 이무(李茂), 전주도 절제사 진을서(陳乙瑞), 강릉도 절제사 이옥(李沃) 및 진원서(陳原瑞)ㆍ이중화(李仲和) 등과 난을 일으키기를 모의하였습니다. 조유(趙裕)도 나에게 말하기를, '심 시중(沈侍中)이 그 부하인 진무(鎭撫) 조언(曹彦), 김조부(金兆府)ㆍ곽선(郭璇)ㆍ위충(?)ㆍ장익(張翼)ㆍ유() 등과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 시중을 치려 한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우리 태조가 그 말을 비밀히 덕부에 알리니, 덕부가 조유(趙裕)를 옥에 가두고 천호 정을방(鄭乙邦)을 본경에 보내어 종연의 아내와 종과 그 족인 박천상(朴天祥)ㆍ박가흥(朴可興)을 잡아 순군옥에 가두고 국문하니, 종이 말하기를, “주인 종연이 상복으로 변장하고 가흥의 집에 들어와서 저에게, '윤귀택(尹龜澤)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른다면 일은 성취된다.' 하였습니다." 하자, 가흥이 마침내 죄를 자백하였다.

우리 태조가 아뢰기를, “신은 덕부와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나라를 받들었으며 본래 시기와 의심이 없었습니다. 조유를 신문하지 말아서 우리 두 신하로 하여금 시종토록 정의를 보전하게 하소서." 하니, 왕이 조유를 석방하려고 하였다. 덕부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아뢰기를, “조유가 진술한 말이 신에게 관련되었으니, 지금 만약 신문하지 않는다면 신이 어찌 변명하겠습니까." 하면서 스스로 순군옥에 나아갔다. 왕이 두 번이나 명하여 불러오게 하니, 덕부가 그제서야 대궐에 나아와서 사례하였고, 왕은 조유를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 우리 태조를 영삼사사로, 정몽주(鄭夢周)를 수문하시중으로, 지용기(池湧奇)를 판삼사사로, 배극렴(裵克廉)ㆍ설장수(?長壽)ㆍ조준(趙浚)을 문하 찬성사로 삼았다.

○ 헌부에서 소를 올리기를, “본조(本朝)의 고사(故事), 후비부(后妃府)를 설립하여 관속을 두었는데 좌사윤(左司尹)ㆍ우사윤ㆍ승()ㆍ주부(注簿)ㆍ사인(舍人)이 있을 뿐입니다. 공민왕이 명덕태후(明德太后)를 높여 부()를 세워 '숭경부(崇敬府)'라 하고, 관료는 판사ㆍ윤ㆍ소윤ㆍ판관이라 하였는데, 지극히 높인 것입니다. 지금 숭녕부(崇寧府)는 예전 제도에 의하여 좌사윤ㆍ우사윤 등의 관직을 두었는데 의덕부(懿德府)ㆍ자혜부(慈惠府)의 두 부는 아직도 숭경부(崇敬府)의 예()를 그대로 따르고 있으니, 옛 제도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모두 숭녕부의 예를 따르게 하소서, 또 종친에게 일을 맡기지 않는 것이 옛 제도이온데, 근래에는 성중애마(成衆愛馬)ㆍ창고ㆍ궁사(宮司)의 제조를 많이 맡고 있으니, 모두 중지하고 파직하여 왕친을 높이며, 원윤(元尹)ㆍ정윤(正尹)은 나이 15세가 차야만 제수하고, 차지 않은 경우에는 임명되었더라도 녹을 받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헌부에서 소를 올려 조유(趙裕)와 윤귀택(尹龜澤)을 대질시키기를 청하니, 평리 박위(?)에게 명하여 대간과 함께 국문하여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 박위가 윤귀택을 먼저 고문하려고 하니, 집의 유정현(柳廷顯)이 말하기를, “고발한 자를 먼저 국문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니, 박위가 얼굴빛을 변하고 잠잠히 말이 없었다. 이에 조유를 신문하니 조유가 그 사실을 자백하였다. 헌부에서 심덕부를 탄핵하고 드디어 진무 조언(曹彦) 5명을 옥에 가두었다. 조유를 목매어 죽이고 가산을 적몰하였으며, 조언 등은 곤장을 쳐서 귀양보냈다.

이에 대간이 날마다 대궐문에 엎드려 종연(宗衍)의 당을 논핵하여 지용기(池湧奇)는 삼척으로, 박위(?)는 풍주(?), 정희계(鄭熙啓)는 안변(安邊)으로, 윤사덕(尹師德)은 회양(淮陽)으로, 이빈(李彬)는 안협(安峽)으로 귀양보냈다. 또 심덕부를 탄핵하여 토산(兎山)으로 귀양보내고, 진원서(陳原瑞)를 흥덕(興德)으로 귀양보냈다.

○ 헌부에서 아뢰기를, “지금 서울과 지방의 군사(軍事)는 이미 영삼사(領三司) (李 태조의 옛 이름)로 하여금 모두 통솔하게 하였으니, 여러 원수(元帥)의 인장(印章)을 모두 회수하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안숙로(安叔老)가 연()에서 돌아왔는데 연왕(燕王)의 답서(答書), “네가 사신을 보내어 예물을 가지고 왔으나 어찌 감히 쉽사리 받아들일 수 있으랴.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신하는 외국과 교제하는 도리가 없다.' 하였다. 이를 물리치면 반드시 남의 뜻을 곤란하게 할 것이므로 물품은 남겨두고 사신은 돌려보낸다. 삼가 글로 부황(父皇 명 태조(明太祖))에게 삼한의 뜻을 아뢰고 반드시 명이 있어야 회보하겠다." 하였다.

정당문학 정도전(鄭道傳) 등이 남경에서 돌아왔는데, 황제가 이르기를, “윤이ㆍ이초가 일찍이 너희 나라에서 난을 일으킬 음모를 하였다는 일은, 짐이 이미 믿지 않으며 벌써 죄를 처단하였으니, 너희 나라가 다시 무엇을 근심하고 의심하는가." 하였다.

○ 다시 우리 태조를 문하시중으로 삼으니, 태조가 전()을 올려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에 임순례(任純禮)를 곡주(谷州)로 보내어 산 속에서 김종연을 잡아 왔는데, 이튿날 옥중에서 죽었다. 순례(純禮)가 길에서 밥을 주지 않고 하룻밤 하루낮에 3백 리를 달려 피곤하고 굶주리고 얼어서 죽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의심하였다. 종연의 사지를 찢어 여러 도에 돌리고, 이방춘(李方春) 등을 목 베고, 박가흥(朴可興)을 먼 지방으로 귀양보냈다. 종연이 두 번째 도망할 때에 방춘의 집에 가서 말하기를, “이 시중(李侍中)은 성품이 본래 인자한데 다만 정몽주ㆍ설장수ㆍ조준ㆍ정도전 등에게 꾀임을 당해 나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내가 서울에 들어가서 박가흥에게 의탁하려고 하니, 정양군(定陽君) ()와 지용기(池湧奇)ㆍ윤귀택(尹龜澤) 등에게 알려서 함께 모의하여 이 시중과 정몽주만 해친다면 내가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때에 와서 체포하여 국문하니, 방춘 등이 모두 자복하였으므로 처형되었다.

○ 백관을 시켜서 각기 현량 두 사람을 천거하게 하였다.

○ 조민수(曹敏修)가 창녕(昌寧)에서 졸()하였다.

○ 형조 판서 안원(安瑗)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술사가 재이(災異)로써 도읍을 옮겨 화를 피하기를 청하였으나, 지금 도읍으로 옮긴 지 오래 되었는데도 사나운 범이 사람을 해치고 변괴가 그치지 않으니 술사의 말은 증험이 없습니다. 빨리 본래의 서울로 돌아가서 하늘의 뜻에 응하고 사람의 기대를 위로하소서." 하니, 왕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D-001]대학연의(大學衍義) : 송 나라 진덕수(眞德秀)가 《대학(大學)》을 해설한 책인데, 치국(治國)하는 도리(道理)로 역사적인 사실을 인용하여 상세히 설명하였다.

[D-002]강좌(江左) : () 나라가 외족에게 중원을 빼앗기고 양자강 남쪽[江左]으로 가서 동진(東晉)을 세웠다.

[D-003]비방(誹謗)의 나무 : 요 임금 때에 표목(表木)을 세워 백성으로 하여금 정치의 잘못된 점을 써 달라고 하였다.

[D-004]진선(進善)의 정() : 요 임금이 기를 세워 두고 착한 말을 드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 아래에 서게 하였다.

[D-005]태괘(泰卦) : 《주역》에 상곤(上坤)·하건(下乾)이 태괘(泰卦)가 되는데, 이것은 낮은 땅이 위로 가고 높은 하늘이 아래로 내려와 상하가 서로 교통한다는 격이다.

[D-006]비방하는……하여 : () 나라 여왕(?)이 포악한 정치를 하자, 백성 중에 비방하는 사람이 많으므로, 위무(衛巫)를 시켜 비방하는 자를 감시하였다.

[D-007]말……한다 : 《논어》에 정공이 "한 마디 말로 나라를 잃을 수 있다 하니, 그러한 것이 있습니까?" 하자, 공자께서 "말은 이와 같이 기필할 수는 없거니와 사람들 말에 '나는 임금된 것은 즐거울 것이 없고, 오직 내가 말을 하면 어기지 않는 것이 즐겁다.' 합니다." 하였다.

[D-008]만 리를……내다본다 : 한나라 광무제(光武帝)가 하서(河西)의 竇融(竇融)에게 친서(親書)를 보냈는데, 두융의 실정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이 하였으므로 하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천자는 밝게 만 리를 보는구나”하였다.

출처 : ▒ 한 산 草 堂 ▒
글쓴이 : 천하한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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