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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려사절요 제32권 신우3

장안봉(微山) 2013. 5. 28. 23:00

고려사절요 제32   

 

 

 신우 3(辛禑三)

 

 

계해 신우 9(1383), 대명 홍무 16 

 

 

○ 봄 정월에 해도(海道) 부원수 정지가 왜적을 쳐서 크게 격파시키자, 금대(金帶) 한 벌과 백금 50냥을 내려 주었다.

○ 나하추가 문합라불화(文哈刺不花)를 보내어, 예전의 우호관계를 회복하자고 청하였다.

○ 정몽주 등이 요동에 이르니, 도사(都司)가 칙명이 있다 하며 들이지 않고 바치는 예물만 받았다. 칙서에 이르기를, “하늘이 덮고 땅이 싣고 일월이 임하는 곳에 만민의 임금이 되었으니, 봉한 지역은 비록 크고 작은 것이 다르나, 백성을 다스리는 도는 모두 마찬가지다. 온 천하의 백성들을 옛날부터 지금까지 어찌 한 임금이 두루 잘 길렀으랴. 전에 삼한의 추장이 백성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죽인 뒤에도 거듭 와서 짐에게 아뢰고 신하로서 조공하는 것을 평상시와 같이 하였다. 두 번 세 번 물리쳤으나 그치지 않아, 특별히 세공 문제로 그들을 곤란하게 하면 반드시 그치리라 생각하였다. 이제 그치지 않고 굳이 청하므로, 과거 수년 동안 바치지 아니한 자잘한 공물까지 모두 합하여 수효를 만들어서 그들을 암암리에 우롱하고 모욕하려 한다. 그러나 삼한의 지역이 중국의 동쪽, 창해의 밖에 있는데, 짐이 우리 중국의 서적을 보였다. 그 지방 사람들은 은혜를 생각지 않고 화를 얽기를 좋아한다 하였다. 비록 잠깐 신하 노릇을 할지라도 무슨 소용이 있으랴. 너희 요동을 지키는 여러 장수들은 굳게 내 강토를 지키되, 견주거나 청구하지 말라. 이제 수년 동안의 물건을 합하여 하나로 만들어서, '칙명과 같이 하라.' 하고, 그 뜻이 정성스럽지 못하거든 부서(符書)가 이르는 날에 전과 같이 저지하여 돌려보내어, 국경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다만 스스로 교화가 되도록 하라." 하였다.

○ 오랑캐 발도가 와서 이성(泥城)을 노략하다가 날아오는 화살을 맞고 달아났다.

○ 요동 도사가 통첩을 보내기를, “고려가 대명을 신하로서 섬기니, 나하추와 화친을 통하지 않아야 할 터인데, 이제 듣건대, '나하추가 문합라불화를 보내어 화친을 청하자, 고려가 후하게 대접하여 그를 위로하였다.' 하니, 신하로서 대명을 섬기는 의리로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만일 죄를 면하고자 하거든, 문합라불화를 잡아 보내어 그 정성을 드러내라. 그렇지 않으면 비록 후환이 있더라도 후회막급이리라." 하였다.

2월에 양광도 안렴 유극서(柳克恕)와 교주도 안렴 최자(崔資)에게 나라 마구의 말을 각각 한 필씩 주었다. 두 사람은 모두 간사하고 영리하며 아첨하는 사람으로, 우가 남쪽으로 순행했을 때에 백성의 고혈을 짜서 맛있는 음식을 극진히 올렸고, 권세가에 뇌물을 주어 아첨하고 기쁘게 하였으므로, 이것을 하사한 것이다.

○ 우가 송경에 돌아왔다.

○ 좌사에서 의논하여 권근(權近) 등이 상소하기를, “관작이라는 것은, 덕이 있는 사람에게 명하고 공이 있는 사람을 상주는 것이기 때문에, 어진 자가 자리에 있고 능한 자가 직책에 있어야 하니, 공이 없는 사람은 함부로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근년 이래로 사방에 병란이 일어나 국가의 재정이 고갈되어, 싸움에서 승리한 공이 있는 사람이 있어도 돈과 재물이 모두 상주기에 부족하였고, 관작은 다 주기 어려웠습니다. 선왕께서는 임시로 첨직(添職)을 마련하여 일정한 수를 두어 공이 있는 사람에게 상으로 주었으며, 전공이 없으면 감히 헛되이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공이 있는 자는 더욱 격려되었으며, 공이 없는 자는 감히 바라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지금은 첨직이 너무 많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게 되어, 공이 있고 없는 것이 서로 혼돈되고, 요행을 바라는 길이 날마다 열려, 공인ㆍ장사꾼ㆍ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함부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공이 있는 자는 비록 얻더라도 기뻐하지 않으며, 공이 없는 자는 함부로 구하기를 그치지 않아, 관작의 천함이 진흙같이 되었으니,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지금 국가가 의지하는 것은, 공 있는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으로 사람의 마음을 잡아매는 것은 오직 관작뿐인데, 관작이 중하지 아니하여 사람마다 모두 그것을 가볍게 여기면, 뒤에 비록 공이 있더라도 무엇으로 상을 베풀 것입니까. 또 전장에서 싸우는 군사가 어찌 가볍고 천한 벼슬에 보태지기를 바라고 측량하기 어려운 위태 땅으로 달려가겠습니까.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공이 있는 사람을 상주기 위해서 첨설한 관직은 한결같이 선왕께서 정한 수에 의거하여, 싸움에 나가 공이 있는 군관(軍官)을 제외하고는 제수를 허여하지 마옵소서. 여자에게 택주(宅主)를 봉하는 것과, 중에게 제군(諸君)을 봉하고 법호(法號)를 주는 것과, 양부 외에 봉군하는 것은 모두 벼슬이 가볍고 천하게 되는 데에 관계되므로, 아울러 금지하옵소서.

국가의 안위가 주ㆍ현의 성쇠에 달려 있는데, 근년 이래로 지방 고을의 아전들이 본역을 면하기를 꾀하여 명서업(明書業)ㆍ지리업ㆍ의율업(醫律業)을 한다고 핑계대나, 모두 진정한 재능 없이 관직에 나아가 역사를 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골 아전이 날마다 줄어서 공무를 집행하기 어렵고, 수령들은 부리고 시킬 사람이 없게까지 되었으며, 여러 업으로 관직에 나아간 자들은 고향으로 물러나 앉아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행하여도 수령이 이를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ㆍ현에 약간 남아 있는 아전들도 모두 분에 넘치는 생각을 가지게 되니, 각 고을이 이로 인하여 더욱 쇠할까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동당(東堂)의 제업(諸業)과 감시(監試)의 명경(明鏡)을 모두 폐지하옵소서. 옛 책에 이르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재물은 백성의 마음이므로, 그 마음을 잃으면 백성이 흩어지고, 그 근본을 잃으면 나라가 위태하다." 하였습니다. 근년 이래로 전쟁이 그치지 않고 수재와 한재가 겹쳐서 백성들에게 주린 기색이 있고 들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있으며, 게다가 밭 하나에 주인이 두셋씩 되어서 각각 그 도조를 징수하여 백성을 괴롭혀도 그 곳 관사(官司)들이 이를 꾸짖어 금하지 못하니, 지금부터는 한결같이 본국의 전법(田法)에 의거하여 서울 안에서는 판도사가, 지방에서는 안렴사가 판단 결정하여, 백성이 소생하여 쉬게 하고, 만일 어기는 자가 있거든 철저히 금지하옵소서.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옛 교훈을 배워야 이로써 일을 세울 수 있다.' 하였으니, 옛날부터 어진 임금이 배우지 않고서 온갖 정사를 잘 다스린 분은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처음 즉위하셨을 적에는 배움에 뜻을 두어 먼저 서연(書筵)을 개설하시니, 국인이 서로 치하하고 태평을 기대했었는데, 근년 이래로 하다가 말다가 하시어, 사람들이 모두 실망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처음 뜻을 잊지 마시고 다시 서연을 열어, 대신에게 건의하도록 명하기도 하고, 측근의 신하로 하여금 강논하게 하기도 하여, 경학에 실린 의리의 종지를 통달하시고, 고금에 걸친 치란의 변천을 관찰하시어, 삼한 신민의 소망에 부응하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3월 사헌부에서 글을 올려 아뢰기를, “본조에서는 벼슬에 복무한 기간과 노력의 실적을 가지고 자격에 따라 계급을 올려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상주는데, 근년 이래로 분주하게 경쟁하는 것이 풍속이 되어 관작이 날로 천해져서, 공로가 있는 자는 승진하지 못하고 공이 없는 자는 함부로 받으니, 자세히 조사고 차례에 따라 서용하여, 인사 행정의 법을 밝히소서. 수령은 백성을 가까이하는 직책이니 더욱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되는데, 근래에 간사하고 아첨하며 탐하고 사나운 무리들이 권세가에 붙어 수령이 되어 멋대로 불법을 행하므로, 주ㆍ부와 군ㆍ현이 나날이 피폐해지니, 대성(臺省) 6조에 청렴하고 정직하며 근검한 자를 천거하게 하여 군ㆍ현에 나누어 보내고, 도순문사와 안렴사에게 어진 사람은 올리고 나쁜 사람은 내치어 상과 벌을 밝히게 하며, 만일 잘못 천거한 것이 있거든, 죄가 천거한 사람에게까지 미치게 하옵소서." 하였다. 우가 그 말을 받아들였다.

○ 우가 정비의 대궐에 갔다. 이 뒤로부터 왕래가 매우 잦았는데, 어떤 때는 들어가지 못하였다. 갈 적마다 희롱하기를, “나의 궁녀들은 어쩐지 어머니의 인물만 못합니다." 하였다.

○ 좌사의 권근 등이 상소하기를, “전하가 오로지 노는 것만 일삼고 동작에 절도가 없어, 낮이나 밤이나 기사 두어 명을 데리고 길을 달리시니, 백성이 용안을 바라보고 아는 자는 깜짝 놀라 실망하여, '전하가 어찌 이렇게까지 하시는가.' 하며, 알지 못하는 자는 난봉꾼으로 생각하여 손가락질하며 모욕하고 비웃습니다. 지금 사방에 병란이 일어나고 흉년이 거듭 들어서, 백성의 생업이 탕진되고 나라 형세가 장차 위태롭게 될 것이니, 이때야말로 밤낮으로 근심하고 부지런히 정신을 가다듬고 정사를 할 때입니다. 전하께서는 조금도 유의하지 않고 밤늦도록 놀고 아침 늦게 일어나며, 안에서는 향락에 빠지고 밖에서는 말 달리며 돌아다니시어 작은 재미를 즐기고 장래의 걱정을 잊으시니,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기면 장차 어떻게 이를 처리하시렵니까. 더구나 향락에 빠져 뜻을 방탕하게 하고, 말을 달리어 몸을 수고롭게 하는 것은, 진실로 정신을 수양하여 수명을 보전하는 방법이 아니옵니다. 전하께서 한창 젊어서 혈기가 굳지 않았사오니, 이 또한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부터는 감히 경솔히 나가서 길에서 달리지 마시고, 밤이 되거든 자고 아침이 되거든 단정히 앉아 높이 손을 모아 쥐고, 대신을 가까이하시어 시국 정치의 잘잘못을 묻고 고금의 치란을 문의하시며, 조용히 담소하고 덕성을 함양하셔서, 법이 아닌 것은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닌 것은 행하지 말아, 하루하루 더욱 조심하고 아무리 쉬고 싶더라도 쉬지 마옵소서. 그러면 전하께서는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고 착한 것을 좋아하시는 미덕이 생기고, 뜻을 방탕하게 하고 몸을 괴롭히는 근심이 없어져 천위(天位)는 더욱 높아지고 왕업은 더욱 오래 갈 것입니다." 하였다.

○ 문하시중 홍영통(洪永通)이 은퇴하기를 청하니, 조민수를 시중으로, 임견미를 수시중으로 삼고, 견미ㆍ도길부ㆍ우현보ㆍ이존성을 시켜 정방(政房)을 제조하게 하였다. 전례에 시중이 인사 행정을 맡았었는데, 영통과 민수가 시중이 되어도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견미가 권세를 독차지했기 때문이었다.

○ 여름 4월에 가뭄으로 이죄(二罪) 이하를 사면하였다.

○ 김한로(金漢老)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5월에 전 판사 한중보(韓仲寶), 상호군 한중량(韓仲良)에게 장형을 행하고 변방에 귀양보냈다. 중보는 일찍이 제주 안무사로 있으면서 임금의 명령을 가장하고 마음대로 욕심을 부린 죄로 순군옥에 갇히었으며, 그 아우 중량은 본래 중보와 우애가 없었는데, 중보가 형을 당하는 것을 기뻐하고 형의 죄악을 열거하여 이존성의 집에 익명으로 투서하였으므로, 아울러 중량도 옥에 가두어 죄를 주었다.

○ 해도 원수 정지가 남해현(南海縣)에서 왜적을 쳐서 크게 파하였다. 이때에 정지가 거느린 전함은 겨우 47척이었는데, 나주와 목포에 머물러 있었다.

적선 1 20척이 크게 이르자, 경상도 바닷가의 고을들이 매우 동요하였다. 합포 원수 유만수(柳曼殊)가 위급함을 고하므로, 정지가 밤낮으로 배 몰기를 독려하여 손수 노를 젓기도 하니, 노 젓는 군사들이 더욱 힘을 다하였다. 섬진(蟾津)에 도착하여 합포의 군사들을 징집하니, 적이 이미 남해의 관음포(觀音浦)에 이르렀는데, 형세가 대단히 성하여 사면으로 둘러싸고 전진하였다. 정지가 군사를 독려하여 나가 박두양(朴頭洋)에 이르니, 적이 큰 배 20척마다 강한 군사 1 40명씩을 태워 선봉으로 삼았다. 정지가 진격하여 크게 깨뜨려 적선 17척을 불태우니, 뜬 시체가 바다를 덮었다. 병마사 윤송(尹松)이 화살에 맞아 죽었다.

○ 우가 몰래 호곶(壺串)에 가서 말 먹이는 것을 보았는데, 숙위하는 자들이 아무도 간 곳을 몰랐었다.

6월에 교주ㆍ강릉도 수척(水尺)ㆍ재인(才人)이 가짜 왜적이 되어 평창ㆍ원주ㆍ영주ㆍ순흥 등지를 약탈하니, 원수 김입견(金立堅)과 체찰사 최공철(崔公哲) 50여 명을 잡아 죽이고, 그 처자를 각 고을에 나누어 귀양보냈다.

○ 대간이 번갈아 글을 올려 아뢰기를, “우리 태조가 삼한을 통일하자 자손이 서로 계승함에 반드시 옛 일을 본받았습니다. 임금이 출입하는 것은 반드시 종묘의 제사나 국제간의 회합이나 외국 빈객의 접대 같은 일에 의하였고, 일없이 함부로 다닌 적이 없었습니다. 영릉(永陵 충혜왕)에 이르러 조종(祖宗)의 법을 따르지 않으며, 간신(諫臣)의 말을 듣지 않고 날마다 여러 소인과 더불어 마을에 돌아다니며 놀다가, 그 소문이 상국에까지 들려 마침내 악양(岳陽)의 행차가 있었습니다. 지금 전하가 놀러 다니심이 절도가 없어, 기사 두어 명을 데리고 말달리며 다니시지 않는 곳이 없으니, 신민이 기대를 잃고 있습니다. 위로는 하늘의 명을 두렵게 여기시고, 아래로는 조종을 본받아 출입하는 것이 절도가 있으며, 시위는 의장을 갖추어 혹시라도 가볍게 나다니지 마시어, 신민의 기대에 응하여 주옵소서." 하였다.

○ 왜적이 경상도 길안(吉安)ㆍ안강(安康)ㆍ기계(杞溪)ㆍ영주(永州)ㆍ신녕(新寧)ㆍ장수(長守)ㆍ의흥(義興)ㆍ의성(義城)ㆍ선주(善州) 등지를 침략하고, 또 단양(丹陽)ㆍ제주(堤州)를 침략하였다. 전의령(典儀令) 우하(禹夏)를 경상도에 보내어, 원수들이 왜적을 막는 태도를 감독하고 시찰하게 하였다.

○ 가을 7월에 우하가 여러 병마사를 독려하여 의성에서 왜적을 쳐서 3급을 베고, 또 예안(禮安)ㆍ순흥(順興)에서 싸워 14급을 베었다.

○ 지순주사 황안신(黃安信)이 군량 운반을 감독하다가 쌀 70여 석을 절취하였다. 유사가 법으로 처단하려 했는데, 우의 인척인 관계로 관직만 삭탈하였다.

○ 왜적이 대구(大丘)ㆍ경산부(京山府)ㆍ선주(善州)ㆍ인동(仁同)ㆍ지례(知禮)ㆍ김산(金山) 등지를 침략하였다.

○ 양광도 원수 왕안덕(王安德)이 괴주(槐州)에서 왜적을 쳐서 3급을 베었다.

○ 요동 심양의 비적 40여 기가 단주에 침입하니, 단주 만호 육여(陸麗)와 청주 만호 황희석(黃希碩)과 천호 이두란(李豆蘭) 등이 추격하여 서주위(西州衛)ㆍ해양(海陽) 등지에 이르러 괴수 여섯 명을 베니, 나머지는 모두 도망가 버렸다.

○ 교주ㆍ강릉도 도체찰사 최공철이 방림역(芳林驛)에서 왜적을 쳐서 8급을 베었다.

8월에 문하찬성사 조인벽(趙仁璧)을 동북면 체찰사로, 판개성 부사 한방언(韓邦彦)을 상원수로, 문하찬성사 김용휘(金用輝)를 서북면 도순찰사로, 전 판도판서 안사조(安思祖)를 강계 만호로 삼아 변경을 방비하게 하였다.

○ 왜적이 비옥(比屋)ㆍ의성 등지를 침략하는데, 적은 많고 아군은 적어 여러 번 싸웠으나 불리하였다. 부원수 윤가관(尹可觀)이 안동ㆍ예안 등지에서 싸워 패하였다.

○ 왜적이 거령(居寧)ㆍ장수(長水) 등의 현을 함락시키고 군사를 나누어 전주를 침략하려 하는 것을, 부원수 황보림이 여현(礪峴)에서 싸워 물리쳤다.

○ 우가 밀직제학 조준(趙浚)을 불러 이르기를, “양광ㆍ경상도에 왜적이 매우 성한데, 원수와 도순문사가 약하고 겁내어 싸우지 못하니, 경이 가서 전쟁의 상황을 살펴야 되겠다." 하니, 준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만일 신에게 두 도를 맡게 하시려면, 그 장수로서 머뭇거리거나 패전한 자는 신의 조처에 맡기셔야 합니다. 그러하지 않으면 원수와 도순문사의 직위가 신의 위에 있는데, 어찌 신을 두려워하여 죽을 땅에 나가려 하겠습니까." 하였다. 장수의 족속들이 이를 꺼리어 우에게 사뢰어 그만두게 하고, 마침내 문하평리 문달한(文達漢)을 양광ㆍ경상도 도체찰사로 삼고 명령하기를, “가서 장수의 부지런함과 태만함, 사기의 왕성함과 쇠약함 것을 살피어, 머뭇거리고 전진하지 않는 자가 있거든 원수는 잡아 가두고 보고하여, 그 나머지는 군율에 의하여 곧장 처단하라." 하였다.

○ 왜적 2백여 기가 괴주(槐州) 장연현(長延縣)을 침략하니, 원수 왕안덕ㆍ김사혁(金思革)ㆍ도흥(都興)이 적과 싸워 3급을 베었다.

○ 왜적 1천여 명이 춘양(春陽)ㆍ영월(寧越)ㆍ정선(旌善) 등의 군ㆍ현을 침략하였다.

○ 좌사의 권근 등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우리 태조께서 근심하고 부지런하시여 만대에 전통을 내려 주셨고, 여러 성군이 서로 계승하여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에게 부지런히 하며 법과 제도를 준수하여 차차 태평을 이루었습니다. 선대에서 수백 년 동안 쌓아올려 어렵게 이룬 왕업이 전하여 전하에게 이르렀으니, 물려받으신 책임이 무겁다 할 수 있습니다. 임금의 지위는 어려울 뿐이며, 관계되는 것이 지극히 소중하여, 한 생각이라도 삼가지 않으면 사해에 근심을 끼치기도 하고, 하루라도 삼가지 않으면 백 년의 걱정을 이루기도 하니, 비록 정치가 잘 되고 일이 없는 때라도 오히려 마땅히 두려워하며 조심하여 뜻밖의 변에 대비하여야 할 것인데, 하물며 국가의 위급한 시기를 당하여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나라는 수재와 한재가 잇달아 일어나고 기근과 유행병이 겹쳐, 나라에는 몇 달을 지탱할 저축이 없고, 백성은 하루저녁거리도 없어, 늙고 약한 자는 죽어서 개천과 구렁에 뒹굴고, 굶어죽은 시체가 길거리에 널려 있습니다. 게다가 이웃나라가 국경 가까이에 군사를 주둔하여 우리의 영토를 침범하며, 우리의 인민을 꾀어 가고, 또 왜적이 깊이 들어와 약탈해서 각 고을이 쓸어낸 듯 버려져 적의 구혈이 되었어도, 수령이 막지 못하고 장수가 제어하지 못하니, 자고로 위란의 지극함이 이때보다 더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섶을 쌓아 놓고 불을 지르는 것도 현재의 다급함에 비유하기에 부족하고, 침상을 깎아 살갗에까지 재앙이 미친다는 것도 현재의 절박함을 비유하기에 부족합니다. 시국을 구제하기가 급함이 마치 새는 물을 타는 불에 붓는 것같이 하더라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려우니, 이제는 참으로 전하가 두려워하여 닦고 살피며 밤낮으로 근심하고 부지런하며 분발하여 일을 하여야 할 때입니다.

지난번에 신등이 사헌부와 함께 글을 올려 미행(微行)을 간하였더니, 전하께서 영명하고 과단하신 덕으로 넉넉히 용납하여 어기지 아니하시고 곧 이를 받아들이시어, 궁중에 단정히 계시고 두어 달 동안을 나다니지 아니하셨습니다. 간하는 말을 좇으시는 덕과 허물을 고치는 아름다움이 오늘날에 빛나고 옛날보다 뛰어나서 일월이 빛을 더하니, 신하들은 조정에서 서로 경사로 여기며, 백성들은 들에서 서로 기뻐하여, 안팎이 한결같이 정치가 잘될 것을 기대한 지가 한 달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위태하고 어지러워 어려움 많은 시기를 당하여, 반성하고 조심하며 두려워하는 태도를 생각지 아니하시고 다시 나다니심만을 일삼아 밤낮으로 말을 달리며 돌아다니십니다. 높으신 왕의 몸으로 말 한 필을 타고 다니시어 자주 깊은 궁중을 떠나서 거리를 달리시니, 시위하는 신하들은 활과 칼을 끼고 빈 궁을 지키고 있으며, 공경과 백관들은 전하의 계신 곳을 알지 못합니다. 틈을 엿보고 내응하는 도적이나, 첩자와 자객이 이 나라 안에 있지 않을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만일 강하고 사나운 무리가 기회를 노리고 몰래 일어난다면 창졸간에 변이 일어날까 매우 두렵습니다. 이것이 신등이 밤낮으로 마음 아프게 생각하며, 깊이 전하를 위하여 위태롭게 여기는 바입니다.

옛날부터 인심은 헤아리기 어렵고, 화란은 일정한 것이 없습니다. 위태로움은 반드시 편안한 데서 생기고, 변은 반드시 소홀히 여기는 데서 생기는 것이니, 환란을 방비하는 도를 참으로 엄하게 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잘 다스릴 때에도 오히려 변이 날까 두려운데, 하물며 지금은 도적이 많은 때이므로 더욱 한심합니다. 전하께서는 선조가 쌓아올린 어려운 왕업을 계승하고 계시니, 비록 자신은 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장차 종묘 사직을 어찌 하시렵니까. 잘못인 줄 알면서 간하는 말을 좇지 않음은 허물을 늘리는 것이고, 위태한 줄을 알면서 정사를 닦지 않음은 망함을 재촉하는 것입니다. 이 소문이 만일 나돌아 사방에 번진다면, 틈을 타려는 도적이 어찌 다행스럽게 여기지 않겠으며, 적을 막으러 간 장수가 어찌 실망을 하지 않겠으며, 백성의 마음이 어찌 더욱 분산되지 않겠으며, 나라 형세가 어찌 더욱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신등이 밤이 되어도 자지 못하고 밥을 대해도 탄식하면서, 가슴을 치며 슬픔을 금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감히 안락하지만 마시 만기(萬機)의 정사를 도모하시고, 감히 놀러 나다니지 마시어 비상한 변고를 방비하시며, 간하는 말대로 반드시 행하시어, 혹시라도 신용을 잃지 마시며, 단정히 앉아 높이 손을 모아 잡으시어 재신들을 가까이해서 나라를 다스리는 계획과 도적을 막는 방책을 널리 물어 보시고, 밤낮으로 근심하고 부지런하시며 정신을 가다듬고 다스리기를 꾀하며, 덕을 닦고 정사를 행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상과 벌을 엄정하게 주시어 나라의 법전을 밝히시면, 장수와 병사는 저절로 분발하고 도적은 저절로 그칠 것이며, 이웃 나라가 감히 꾀하지 못하며 강포한 자가 감히 방자하지 못하여, 조종의 업이 영원히 전할 것입니다." 하였다. 우가 마을로 말을 달리며 돌아다니면서 그래도 대간을 두려워하고 꺼렸었는데, 환관들이 말하기를, “대간도 모두 상감께서 제수한 것이온데, 만일 뜻에 거슬리면 갈아 치우는 것이 어찌 어렵겠습니까." 하였다. 이로부터 우가 더욱 대간을 가볍게 여기어 다시 기탄 없이 노닐며 사냥하기에 쉴 날이 없었다.

○ 왜적이 임실현을 침략하였다.

○ 호발도(胡拔都)가 와서 단주를 침략하니, 부만호 김동불화(金同不花)가 이에 내응하여, 재물을 모두 차지하고 뒤에 거짓으로 붙잡혔다. 상만호 육여(陸麗)와 청주 상만호 황희석(黃希碩) 등이 여러 번 싸워 모두 패하였다. 그때에 이두란이 어머니의 상복을 입고 청주에 있었다. 이태조가 사람을 시켜 불러와서 그에게 이르기를, “국가의 일이 급하여 그대가 복을 입고 집에 있을 수 없다. 상복을 벗고 나를 따르라." 하였다. 두란이 상복을 벗고, 하늘에 울면서 절하여 고하고 나서 활과 화살을 차고 따라갔다. 발도와 길주평(吉州平)에서 만나, 두란이 선봉이 되어 먼저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돌아왔다. 태조가 조금 뒤에 이르니, 호발도가 세 겹이나 되는 두꺼운 갑옷에 붉은 털옷을 껴입고, 검정 암말을 탄 채 진을 가로막고 기다리고 있다가, 태조를 가볍게 생각하고 군사는 머물러 두고 칼을 뽑아서 몸을 던져 달려 나왔다. 태조 또한 단기로 칼을 뽑아 들고 달려 나가서 검을 휘두르며 서로 쳤는데, 둘 다 날쌔게 비키어 맞히지 못하였다. 호발도가 미처 말을 가누지 못하고 있을 때에, 태조가 급히 말을 돌리며 활을 당겨 그 등을 쏘았으나, 갑옷이 두꺼워 화살이 깊이 들어가지 않았다. 곧 또 그 말을 쏘아 관통시키니, 말이 거꾸러지며 호발도가 떨어졌다. 태조가 또 쏘려 하자, 그 휘하들이 몰려들어 구원하니, 우리 군사들도 쫓아나왔다. 태조가 군사를 놓아 크게 쳐서 깨뜨리니, 호발도는 겨우 몸만 빠져 도망갔다.

○ 찬성사 김유를 보내어 성절을 하례하고 시호와 승습(承襲)을 청하는 진정표를 올리고, 밀직부사 이자용(李子庸)은 천추절을 하례하게 하였다. 앞서 요동을 경유하다가 번번히 도달하지 못하였으므로, 유 등으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가게 하였다.

○ 좌사의 권근 등이 간하기를, “지금 왜구가 사방을 침략하여 소란하고, 첩자와 자객이 경성에 왕래하는데, 전하께서는 기사 두어 명을 데리고 길거리를 달리시며 밤새도록 돌아오지 아니하시니, 신들은 전하를 위하여 매우 위태롭게 여깁니다." 하니, 우가 말하기를, “내가 정말 이런 잘못이 있다. 경들이 아니면 누가 말하겠는가." 하였다.

○ 우리 태조가 변방을 편안히 하는 계책을 올렸는데, 아뢰기를, “북계(北界)는 여진ㆍ달달ㆍ요동ㆍ심양의 지역과 서로 연하였으니, 실로 국가의 중요한 땅입니다. 비록 일이 없는 때라도 반드시 양식을 저축하고 군사를 길러 의외의 사태에 대비하여야 하겠는데, 이제 그 곳 주민들이 매양 저 사람들과 서로 물자를 교역하여 날마다 서로 친압하여 혼인을 맺기까지 하여 저쪽에 있는 족속이 유인하여 가고, 또 앞잡이가 되어 들어와 약탈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말과 같이, 이것은 동북 한 방면의 걱정일 뿐만이 아닙니다. 또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유리한 지리를 차지하느냐 못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저쪽 군사들이 점령한 곳이 우리의 서북쪽에 가까운데 내버려 두고 도모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중한 이익을 노려 멀리 우리 오읍초ㆍ갑주ㆍ해양의 백성들을 꾀어서 유인하여 가고, 지금 또 단주 독로올(禿魯兀)의 땅에 쳐들어와서 사람과 물건을 몰아가니, 이것으로 본다면 우리 요해의 지리 사정을 저쪽에서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신이한 방면의 임무를 맡고 있는 터에 앉아서 보기만 할 수 없어서, 삼가 국경 경비의 방책을 계획하여 보고하나이다.

도적을 막는 방법은 군사를 훈련시켜 일제히 공격하는 데 있사온데, 지금은 훈련시키지 않은 군사들을 먼 땅에 분산시켜 놓았다가 도적이 들어온 뒤에야 황급하게 불러들이는데, 군사가 올 때쯤 되면, 도적은 벌써 노략질하여 물러난 뒤입니다. 비록 시기에 이르러 싸운다 하더라도, 전술에 서투르며, 싸움에 익숙하지 못한데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제부터는 병졸을 훈련시켜 약속을 엄하게 세우고 호령을 거듭 밝혀, 변을 기다렸다가 곧 출동해서 사기(事機)를 잃지 말게 하옵소서.

군사의 생명은 양식에 달려 있으니, 비록 백만 군사가 있다 할지라도 하루 동안의 식량이 있어야 하루의 군사가 될 수 있고, 한 달 동안의 식량이 있어야 한 달의 군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하루도 먹는 것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도의 군사에게는 과거에는 경상ㆍ강릉ㆍ교주의 양곡을 운반하여 공급하였는데, 지금은 도내의 지세로 이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근래에 수재ㆍ한재로 인하여 관청과 민간이 모두 텅 비었고, 게다가 놀고 먹는 중과 무뢰배들이 불사를 칭탁하여 함부로 권세가의 편지를 받아서, 각 고을에 간청하여 백성에게 쌀 한 말과 베 한 자를 꾼다고 하고는 섬곡식과 10여 자의 베를 거두는데, 명목을 '반동(反同)'이라 하여 징수하기를 빚받아 내는 것처럼 하니, 백성들이 이때문에 기한에 시달리고, 또 여러 관청과 여러 원수(元帥)가 보낸 사람들이 떼를 지어 다니며, 이집저집에서 돌려 가며 먹어서 살을 깎아 내고 뼈를 망치질하듯 하니, 백성들이 고통을 참지 못하여 흩어지고 도망치는 자가 열에 여덟, 아홉입니다. 그리하여 군사의 식량이 나올 데가 없으니, 모두 금하여 없애어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옵소서.

또 도내의 고을들이 산과 바다에 끼어 있어서 땅이 좁고 또 척박한데, 지금 그 세를 거두는 것이 경작하는 토지가 많고 적은 것은 묻지 않고, 오직 호구가 크고 작은 것만을 보아서 책정합니다. 화령(和寧)은 도내에서 땅이 넓고 풍요한데, 모두 아전들의 녹전이어서 그곳의 지세는 관청에서 거두지 못하므로, 백성에게서 받아들이는 것이 고르지 못하고 군사를 먹이는 것은 족하지 못하오니, 금후로는 도내 여러 고을과 화령을 모두 경작하는 토지의 많고 적음에 준하여 과세함으로써 관청이나 민간이 다 편하게 하옵소서.

군사와 백성은 통속이 있지 않으면 급한 일이 있을 때에 서로 보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선왕의 병신년 하교에, 세 집으로 한 호()를 만들고, 백 호로 통을 만들며, 통주(統主)는 원수의 영()에 소속시키고, 일이 없으면 세 집이 차례로 번을 서며, 일이 있으면 다 나오고, 일이 급하면 집안의 장정을 모두 징발하였으니, 진실로 훌륭한 법이었습니다. 근래에 법이 폐지되어 소속된 곳이 없어서, 징발할 때마다 흩어져 사는 백성들이 산골로 도피하여 불러 모으기가 어렵습니다. 지금은 또 한재와 기근으로 민심이 더욱 이탈되는데, 저들은 돈과 식량으로 미끼를 삼아 불러들이고, 군사를 숨기고 와서 노략질하여 돌아가기 때문에, 한 지역의 궁한 백성들이 이미 일정한 마음이 없고, 또 종족이 서로 섞여 있어서 이리저리 관망하다가 유리한 쪽으로만 따르니, 실로 보존하기가 어렵습니다. 병신년 하교에 의하여 다시 군호(軍戶)를 정해서 통속이 있게 하여 굳게 그 마음을 결속하게 하옵소서.

백성이 잘살고 못사는 것은 수령에게 달려 있고, 군하의 용감하고 비겁함은 장수에게 달렸습니다. 지금 고을을 다스리는 자가 권세가의 문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세력을 믿고 그 직책을 삼가지 않아서, 군사는 그 수요가 부족하고 백성은 그 생업을 잃게 되어 호구가 줄고 창고가 텅 비니, 이제부터는 청렴하고 부지런하며 정직한 자를 공정하게 선발하여 백성에 게 임해서는 홀아비와 과부를 돌보아 주게 하며, 또 장수가 될 만한 자를 선택하여 군사를 거느려 국가를 방위하게 하옵소서." 하였다.

○ 왜적 1천여 명이 옥주(沃州)ㆍ보령(報令) 등의 고을을 함락시키고, 마침내 개태사(開泰寺)로 들어가서 계룡산에 웅거하였다. 문달한(文達漢)ㆍ왕안덕(王安德)ㆍ도흥(都興)이 나가서 공격하니, 적이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공주 목사 최유경(崔有慶)과 판관 송자호(宋子浩)가 구점(仇岾)에서 싸워 자호는 패하여 죽고, 달한ㆍ김사혁(金斯革)ㆍ안덕ㆍ도흥ㆍ안경(安慶)ㆍ박수년(朴壽年) 등은 공주 반룡사(盤龍寺)에서 싸워 8급을 베고, 사혁은 목천(木川)ㆍ흑점(黑岾)까지 추격하여 20급을 베었다.

○ 문하평리 지용기를 전라도 도원수로 삼았다.

9월에 지문하사 이을진을 강릉도 원수로 삼았다.

○ 일본이 포로로 잡힌 우리 백성 1 12명을 돌려보냈다.

○ 대호군 정승가(鄭承可)를 오도 체복사로 삼아서, 군사 진용의 허실과 접전의 근태(勤怠)를 조사하였다.

○ 사헌부가, 환관 예의 판서 조순(曹恂)이 우를 인도하여 황음한 짓을 하게 한 것을 논핵하여 전라도 내상(內廂)에 귀양보냈다.

○ 왜적이 강릉부와 김화현(金化縣)을 침략하고 또 회양부(淮陽府)와 평강현(平康縣)을 함락하니, 경성에 계엄을 실시하고 평양과 서해도의 정병을 불러들여와 호위하게 하며, 전 정당상의 남좌시(南佐時), 지밀직 안소(安紹), 밀직상의 왕승귀(王承貴)ㆍ왕승보(王承寶)ㆍ정희계(鄭熙啓)ㆍ인해(印海), 개성군 왕복명(王福命), 판개부성사 곽선(郭璇) 등을 보내어 그들을 치도록 하였으나 김화에서 싸워 패전하였다.

○ 왜적이 홍천현(洪川縣)을 함락하니, 원수 김입견(金立堅)ㆍ이을진(李乙珍)이 적과 싸워 5급을 베었다.

○ 진병법석(鎭兵法席)을 중앙과 지방의 사찰 도합 1 51개소에 크게 베풀었는데, 공급하는 비용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방어에 나가는 군사는 식량을 각자 준비하였다.

○ 밀직 김세덕(金世德)의 처 윤씨가 보국사의 중과 간통하니, 사언부가 적발하여 다스리려 하였으나, 세력이 강한 족속이기 때문에 면하였다.

○ 겨울 10월에 도체찰사 최공철(崔公哲)이 낭천(狼川)에 이르렀는데, 왜적이 갑자기 나와 습격하여 그 아들을 사로잡았다. 체복사 정승가가 왜적과 양구에서 싸우다가 패전하여 물러가 춘주에 주둔하니, 적이 춘주까지 추격하여 함락시키고, 드디어 가평현(加平縣)에 침입하였다. 원수 박충간(朴忠幹)이 싸워서 쫓아 버리고 머리 6급을 베었는데, 적은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 웅거하였다. 찬성사 상의 우인열(禹仁烈)을 도체찰사로 삼고, 전 밀직 임대광(林大匡)을 조전원수로 삼아, 가서 적을 치게 하였다.

○ 이성 만호(泥城萬戶)가 보고하기를, “요동 총병관이 아뢰기를, '달달(??)이 문합라불화(文哈剌不花)를 고려에 보내어 함께 요동을 치려 하니, 군사를 보내어 이를 구원하소서.' 하니, 황제가 손도독(孫都督)에게 명하여 전함 8천여 척을 거느리고 우리나라를 치게 하여, 요동에 이르렀다가 배가 떠나려 하는데, 마침 달달의 군사가 혼하구자(渾河口子)를 공격하므로, 도독의 군사가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하니, 우가 변방을 방비하여 지킬 것을 명령하였다.

○ 대간이 상소하기를, “근래에 이웃 나라의 경계가 있고, 해적이 깊이 들어와 첩자가 왕래하므로 사변이 있을까 두려운데, 전하께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단기로 돌아다니시니, 신들은 근심하고 위태롭게 여기어 두세 번이나 간하였는데, 곧 받아들이시면서도 환관과 내수(?)ㆍ위사ㆍ어인(?人 말을 기르는 사람)이 뜻을 맞추어 아첨하여 주상을 예가 아닌 길로 인도하고, 도리어 전하로 하여금 무시로 출입하게 하여 나라에서 믿음을 잃게 하였으니, 충성스럽지 못하며 도리에 어그러짐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내승별감과 속고적(速古赤)ㆍ환관ㆍ내수 등의 일을 맡고 있는 자를 국문하여 뒷사람을 경계하게 하소서. 또 말[]을 맡은 자는 왕의 명령을 출납하는 것이어서 그 책임이 가볍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반드시 정직하고 근신하는 자 두 사람을 선택하여 그 임무에 충당하였는데, 지금은 두 사람을 더 두었으나 도리어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어 전하가 출입하는 것을 백관에게 고하지 않으니, 옛 제도에 의하여 두 사람만 선택하여 두고, 그 나머지는 도태시켜 버리소서." 하였다. ()가 올라가니, 우가 환관 김길봉(金吉逢)에게 장형을 행하여 이산(泥山)에 귀양보내고 내수(?) 서양수(徐良守)를 쫓아내었으며, 내승별감 김천용(金千用)은 도망갔으므로 그를 수색하게 하였다.

○ 왜적이 안변부 흡곡현을 침략하고 사방으로 나와 무인지경을 밟듯이 노략하였다. 우가 밀직제학상의 조준(趙浚)을 강릉ㆍ교주도 도검찰사로 삼았다.

○ 이을진과 부원수 권현룡(權玄龍), 병마사 곽충보(郭忠輔)가 동산현(洞山縣)에서 왜적을 쳐서 20여 급을 베고 말 72필을 노획하니, 적은 남은 무리를 거두어 고성포에 물러가 정박하였다. 우가 을진 등에게 차등에 따라 백금을 내렸다.

11월에 통역 장백(張伯)이 명나라 서울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황제가, 진하사 김유(金庾)ㆍ이자용(李子庸)이 시기가 지나서 이르렀다 하여 법사(法司)에 회부하였다." 하고, 예부에서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자문(咨文)을 보냈는데, 이르기를, “고려가 멀리 동쪽 변방으로부터 지난번에 와서 아뢰어 약속 듣기를 원하였으나, 속으로는 여러 가지로 거짓을 품어서 틈이 생기는 것을 예사로 여겼다. 짐이 그 때문에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스스로 교화가 되도록 허락하였는데, 그 뒤에도 자주 와서 허락하여 주기를 청하므로, 짐은 성의가 지극하다고 생각하여 세공을 한정해서 저들의 성의를 표하게 하였던 것이다. 간 뒤에 약속대로 조공하지 않은 지가 다섯 해나 되었는데, 이제 또 경하하는 예로 왔으니 정성스럽기는하나, 시기가 지나서 이르렀으니 어찌 심한 모욕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사신을 보낸 일로 말하면 고려 국왕과 그 신하의 잘못이 아니며, 사자가 고의로 무시하고 만홀히 하여 시기가 지나서 온 것이다. 지금 고려가 완전히 신하가 되었으니, 영구히 사대(事大)의 정성을 지킬 것이다. 온 사신은 이미 조회하는 예에 어긋났으므로 마땅히 법사에 회부하고, 바친 예물은 이미 시기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받아들이지 말며, 다시 고려에 문서를 주고, 반드시 약속 듣기를 원한다면, 지난 5년 동안 바치지 않은 세공으로 말 5천 필, 5백 근, 5만 냥, 5만 필을 한꺼번에 가져와야만 곧 성의가 인정되며, 다른 날에 사자를 데려가기 위한 군사의 출동을 면할 것이다." 하였다. 이에 진헌반전색(進獻盤纏色)을 두어 세공을 준비하였다.

○ 왜적이 청풍군(淸風郡)을 침략하니, 도순찰사 한방언(韓邦彦)이 금곡촌(金谷村)에서 그들과 싸워 8급을 베었다.

○ 문하평리 홍상재(洪尙載)와 전공판서 주겸(周謙)을 경사로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였다.

○ 지문하부사 정지가 여러 도에서 전함을 만들어 왜구를 방비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좇았다.

12월에 정지를 해도 도원수, 양광ㆍ전라ㆍ경상ㆍ강릉도 도지휘 처치사로 삼았다.

○ 우가 노빈(盧贇)의 집에 갔다. 빈은 영수(英壽)의 아우인데, 우가 일찍이 빈의 처가 예쁜 것을 보고 이때부터 자주 갔다.

 

   

 

 

 

 

 고려사절요 제32   

 

 

 신우 3(辛禑三)

 

 

갑자 신우 10(1384), 대명 홍무 17 

 

 

○ 봄 정월에 재신자 추신들이, 우의 광태가 날로 심하여 사람 같지 아니하므로, 혜명전(惠明殿)과 현릉(玄陵)에 제사하여 이를 기도하였다.

○ 사신을 양광ㆍ전라ㆍ경상 3도에 보내어, 횡포한 자를 금하고 폐해가 되는 것을 없앴다.

○ 요동 군사 1백여 기가 강계를 침략하여 백호 홍정(洪丁)들을 사로잡아서 돌아갔다.

○ 판전교시사 김구용(金九容)을 요동에 보냈다. 과거에 의주 천호 조계룡(曹桂龍)이 하정사를 호송하여 요동에 이르니, 도지휘 매의(梅義)가 속여 말하기를, “내가 너희 나라에 대하여 공사가 있을 때마다 마음을 다해 시행하여 주었는데, 너희 나라에서는 어째서 한 번도 문안을 하지 않는가." 하였다. 재상이 그 말을 듣고 믿어서 구용을 행례사(行禮使)로 삼아 편지와 백금 1백냥, 저마포(苧麻布) 50필을 주어 보냈다. 총병 반경섭(潘敬葉)ㆍ왕여(汪與)ㆍ매의 등이 말하기를, “남의 신하된 자는 도리상 사적인 교제는 못하는 것인데, 어찌 이렇게 할 수 있는가." 하고, 드디어 붙잡아 경사로 돌아갔다. 구용을 대리(大理)에 귀양보냈는데, 도중에서 병들어 죽었다.

○ 우가 노영수의 집에 가니, 백관들이 시종하였다. 우가 예부좌랑 이여량(李汝良)을 불러 말하기를, “너희들은 내가 단기로 나다니는 것을 염려하여 백관으로 하여금 호종하게 하니, 예로서는 그러하나, 내가 깊이 구중궁궐에 있으므로 너무 무미해서 나다니며 심심풀이를 하려는 것이다. 만일 성 밖이라면 호종하는 것이 마땅하지마는, 거리에 다니는 데까지 어떻게 늘 호송할 수가 있는가. 또 대간과 각 관사는 공무가 매우 많으니, 각각 일을 처리하여 지체됨이 없게 하라." 하고, 드디어 남산(男山)으로 달려 올라갔다. 백관이 또 따라가니, 또 여량을 불러 말하기를, “어째서 명령을 좇지 않고, 감히 다시 이렇게 하는가." 하였다. 이날 아홉 번이나 영수의 집에 갔다. 소경 김철(金哲)이 퉁소를 잘 불어 항상 영수의 집에 출입하였는데, 우가 가면, 번번이 그를 불러 밤을 새우고 날이 다하도록 피곤함도 잊고 즐겼다. 김철은 아첨을 잘하며 나쁜 짓을 하여 우의 악한 짓을 더하게 하니, 국인들이 미워하여 없애고자 했는데, 마침 명령을 꾸민 일이 발각되어, 곤장을 때려 금주(錦州)에 귀양보냈다.

2월에 우가 호곶(壺串)에서 사냥하는데 백관이 시종하니, 명령하여 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로부터 교외에 나가 사냥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우가 또 내시들을 거느리고 동쪽 못에서 말을 씻기며, 그들과 함께 말을 달리고 돌아다니다가, 김원길(金元吉)이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쳤다. 저녁이 되어 우가 손수 피리를 불며 환관들에게 잡된 놀이를 시킬 적에, 원길로 하여금 당인(唐人) 놀이를 하게 하였는데, 원길이 다리를 다쳐 못한다고 사양하니, 우가 노하여 죽도록 때리고, 그래도 노여움이 풀리지 않아 순군옥에 가두었다가 조금 뒤에 석방시켰다.

○ 우가 여러 도에 귀양간 자로 하여금, 말을 타거나 배를 타고 왜적을 잡아서 속죄하게 하였다.

○ 왜적이 사로잡은 부녀 25명을 작은 배에 싣고 진포에 들어와서 돌려 주었다.

3월에 판문하부사 최영이 양곡 80석을 내어 군량에 보충하였다.

○ 판후덕부사 한수(韓脩)가 졸하였다. 수는 초서와 예서를 잘 썼다. 충정왕(忠定王)이 명하여 정방 비도적(?)을 삼았는데, 양위하고 강화에 갈 때 수가 따라갔다. 이때문에 한 때 명망이 무거웠었다. 공민왕이 불러 다시 정방에 두었다. 신돈이 왕의 총애를 받아서 그 형적이 매우 은밀하였다. 수가 넌지시 아뢰기를, “돈은 바른 사람이 아니니 난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하였는데, 왕이 한창 돈에게 빠져서 수를 예의 판서로 제수하였으니, 이는 멀리하기 위함이었다. 돈이 패함에 미쳐, 왕이 이르기를, “수가 선견지명이 있었다." 하였다.

○ 여름 4월 병자에 지진이 있었다.

5월에 판종부시사 김진의(金進宜)를 요동에 보내어, 세공하는 말 1천 필을 바치고 금과 은은 본국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하여, 사복정 최연(崔涓)을 보내어 그 수효를 감하기를 청하였다.

○ 무신에 지진이 있었다.

○ 우가 밤에 궁녀 두서너 패를 데리고 자하동(紫霞洞)으로 갔다가 마침내 염흥방(廉興邦)의 집에 갔다. 이튿날 또 궁녀를 데리고 자하동에 가서 함께 목욕하며 희롱하였다.

6월에 우가 환자와 창기를 데리고 장시를 지나면서 장시 사람들을 후려갈기고 즐겁게 여기니, 사람들이 모두 달아나 숨어서 물건을 잃은 자가 매우 많았다.

○ 전 판종부시사 장방평(張方平)을 남경에 보내어 세공하는 말 2천 필을 바쳤다.

○ 죽은 판삼사 이성서(李成瑞)의 처 박씨(朴氏)가 일찍이 더러운 행실로 두 번이나 법사의 국문을 당하였는데, 이제 또 추한 소문이 있으므로, 헌사에서 핵실하여 벌주었다.

○ 우가 미행(微行)하여 동쪽 교외에서 놀다가 귀법사 남쪽 개천에 이르러 궁녀와 함께 목욕하며 온갖 음란한 짓을 다하였다.

○ 우가 이인임의 집에 갔다. 이전에 조영길(趙英吉)이 인임의 계집종의 남편이 되어 봉가이(鳳加伊)라는 딸을 낳았는데, 인임이 우에게 바쳤더니 이날 우가 봉가이를 인임의 집에 데리고 가서 행음하였다. 그리고 영길에게 전농부정(典農副正)을 제수하였다.

○ 가을 7월에 우가 밤에 궁녀와 환자 두어 기를 데리고 거리로 돌아다니며 놀았는데, 노래와 피리 소리가 길에 퍼졌다. 이때에 우가 흰 초립(草笠) 쓰기를 좋아하였는데, 불량한 노예들이 이를 본받아 초립을 쓰고 상감이라 사칭하며, 밤에 동네를 돌아다니며 닭과 개를 잡거나, 협박하고 약탈하기도 하였다.

○ 전라도 도순문사 지용기가 왜적 8급을 베었다.

○ 왜적이 구례현(求禮縣)을 함락시키고 또 영동(永同)ㆍ주계(朱溪) 등의 현을 침략하였다.

○ 정당문학 정몽주를 남경에 보내어 성절을 하례하고, 또 시호와 승습(承襲)을 청하였으며, 우상시 이천사(李天?)는 천추절을 하례하였다.

8월에 양부(兩府)로 하여금 6품까지 차등에 따라 금과 은을 내게 하고, 또 여러 도에서 긁어 모아 세공에 충당하게 하였으며, 도당에서 또 노국공주 대궐에 있는 금은 그릇을 가져다가 이에 보충하였다.

○ 왜적이 양산현(梁山縣)을 침략하였다.

○ 제주 만호 김중광(金仲光)이 말 1 4필을 바치자, 우가 좋은 말 39필을 뽑아 두고, 나머지는 모두 총애하는 환자에게 주었다.

○ 왜적이 영동 청산ㆍ안읍 등의 현과 은천소(銀川所)를 침략하고, 또 전라도 안성(安城)ㆍ천잠(天蠶) 두 소()와 응령(應嶺)ㆍ소천(所川) 등의 역을 침략하였다.

○ 우가 교외에서 사냥하고 밤에 돌아오면서, 피리 불고 노래하며, 북치고 춤추며 무당놀이를 하면서 탄식하기를, “사람이 세상에 사는 것이 초로 같도다." 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또 봉가이를 데리고 성 북문으로 나가 동쪽 교외의 개천에 이르러, 나무 사닥다리를 띄워 배를 만들고, 자기가 끌면서 장난을 쳤다. 밤이 되어 돌아왔다가, 곧이어 다시 교외로 가려 하니, 좌우 사람들이 아뢰기를, “밤이 이미 깊고 또 비가 많이 오는데, 어디를 가려 하십니까." 하였다. 우가 말하기를, “매를 부르려 한다." 하고는, 드디어 남쪽 교외에 나가 놀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우가 또 동쪽 교외에서 사냥하는데, 손에는 화각(?角 악기의 이름)을 쥐고 봉가이ㆍ수정ㆍ초생 등은 남장을 하고 활을 메고 화살을 차고 따랐다. 달려서 신경(新京)에 이르러 드디어 해풍군(?)에 가서 온갖 장난을 치다가, 마침내 여러 총애하는 궁녀와 대낮에 야합하였다. 이때에 우가 빠지는 날 없이 나가 놀아서, 내구에 있는 말이 모두 야위고 없어졌으므로, 지나는 곳마다 남의 말을 빼앗아 궁녀와 환관을 태우니, 사람들이 다투어 피하고 숨어서 길에 사람이 없었다.

○ 응양군(鷹揚軍) 상호군 이무(李茂)가 아뢰기를, “부의 군사가 허약하니, 여러 도의 한량(閑良) 자제를 뽑아 '보충군'이라 이름하여 부병(府兵)을 채우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좇았다.

○ 일본이 사신을 보내어 포로로 잡힌 우리 백성 92명을 돌려보냈다.

○ 왜적이 서해도 노도(蘆島)를 침략하고 군함 두 척을 불태웠다.

○ 서북면 도순문사 김용휘(金用輝)가 매를 바쳤다. 우가 사냥을 좋아하므로, 여러 도의 원수들이 다투어 매와 개를 바쳐 그를 기쁘게 하였다.

○ 우가 이인임의 처 박씨와 인임의 별장에 가서 마음껏 즐겼다. 우가 일찍이 인임을 '아비'라고 하였으므로, 박씨도 존대하여 '어미'라고 불렀다. 이때 우가 봉가이를 총애하여 항상 인임의 집에서 잤기 때문에 인임은 별장에 나가 있었다.

○ 예의 판서 김진의(金進宜)를 요동에 보내어 세공하는 말 1천 필을 바쳤다.

9월에 우가 활과 화살을 차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닭과 개를 쏘고, 마침내 진헌반전색(進獻盤纏色)에 달려 들어가서 좋은 말 5필을 취하여 내구로 돌려보냈다.

○ 최영을 문하시중으로 삼고, 이성림(李成林)을 수문하시중으로 삼았다. 이 일이 있기 전에, 우가 수시중 임견미의 욕심 많은 것을 미워하여 매양 그 아들 치(?)에게 일깨워 주었더니, 견미가 병을 칭탁하고 물러가기를 청하였다. 영삼사사 이인임과 판문하부사 최영, 시중 조민수가 또한 모두 물러가기를 청하여, 우의 뜻을 살펴보았더니, 인임은 영삼사로 그대로 두고 홍영통을 판문하로 삼았으며, 조민수는 파면하여 창성 부원군(昌城府院君)으로 삼았고, 임견미는 평원 부원군(平原府院君)으로 삼았으며, 최영과 이성림으로 이를 대신케하였다. 또 환관 김실(金實)로 문하찬성사상의를 삼으니, 실이 도당에 앉아서 일을 처리하였다.

○ 겨울 10월에 최영이 도통사를 사양하자 허락하지 않았다. 영이 두 번째 시중이 되면서부터 병을 칭탁하고 나오지 않았는데, 이때에도 도통사의 인()을 봉하여 올리고 군사의 권한을 놓기를 청하였다. 우가 지신사 염정수(廉廷秀)를 보내어 위로하며 일보기를 권하였다. 영이 도당에 이르러 여러 재상의 겸병하는 폐단을 극도로 말하고 드디어 문안을 갖추어 침탈하는 것을 금지하며, 여러 재상을 보면서 말하기를, “이 문안에 서명한 뒤에도 다시 전과 같이 할 사람이 있을까." 하니, 여러 재상들이 말이 없었다.

○ 왜적이 서해도 관량(館梁)을 침략하였다.

○ 북원(北元)이 사신을 보내어 화령부에 이르렀다. 호군 임언충(任彦忠)을 보내어 위로하고 돌려보냈으나, 길이 막혔으므로 반 년을 머물러 있다가 갔다.

○ 윤달에 수창궁이 준공되었다. 조성도감 판사(造成都監判事) 최영ㆍ이성림ㆍ이자송ㆍ염흥방 등이 대궐에 나가 낙성을 하례하니, 우가 말하기를, “큰 집이 5년만에 이루워졌으니, 무엇으로 경들에게 보답하랴." 하였다. 영이 따라 아뢰기를, “지금 왜적이 누에가 뽕잎 먹듯 하여 전제가 날로 문란해지고 민생이 곤궁하고 지쳐서 언제 나라를 잃어버릴지 모르는데, 대신과 함께 국정을 도모하여 의논하지 않고, 소인들을 가까이하여 놀고 사냥하는 것이 절도가 없으니, 신이 장차 누구를 바라보고 신하의 직분을 다하겠습니까." 하니, 우가 얼굴이 붉어지며 말하기를, “삼가 가르침을 받겠다." 하였다.

○ 연산군(連山君) 이원굉(李元紘)을 남경에 보내어 세공하는 말 1천 필을 바치자, 도평의사사가 예부에 상신하기를, “원래 바쳐야 할 5년 동안의 세공 금 5백 근 내에서 현재까지 보내온 것이 96 14냥이고, 바치지 않은 것이 4 3 2냥으로서 말 1 29필에 해당하며, 5만 냥 내에서 현재까지 보내온 것이 1 9천 냥이니, 바치지 않은 것이 3 1천 냥으로서, 1 4필에 해당하며, 5만 필 내에서 현재까지 보내온 것이 백저포(白苧布) 4 3백 필, 흑마포(黑麻布) 2 4 4백 필, 백마관포(白麻官布) 2 1 3백 필이며, 5천 필 내에서 이미 보내온 4천 필은 요동도사가 영수하였고, 지금 보내온 것이 1천 필이다." 하였다. 또 은천군(銀川君) 조림(趙林)을 보내어 정삭을 하례하였다. 이때에 명의 조정에서는 아직도 의심을 품고 있으므로, 사명절의 명령을 받은 자가 가기를 꺼리어 세력가에 붙어 면하게 되기를 구하였는데, 원굉과 임이 모두 산관(散官)으로 갔다.

○ 왜적이 장연현(長淵縣)을 침략하니, 서해도 상원수 왕승보가 적과 싸워 패하였다.

○ 찬성사 심덕부(沈德符)를 명하여, 명나라에 진헌하는 물건을 평양부에서 점검하게 하였다. 개인으로 금ㆍ은을 가지고 가는 자를 금하게 되어 있는데, 압물(押物) 위견(魏堅)이 영()을 범하였으므로, 목을 베어 조리돌렸다.

○ 왜적이 청하현(淸河縣)을 침략하였다.

11월에 최영ㆍ이성림이 김실에게 이르기를, “선왕 때에는 한 달에 아일(衙日 백관이 모여서 조회하는 날) 6번 있었는데, 지금을 아일이 이틀 뿐인데도 매양 조회를 보지 않아서 심지어 백관들이 반의 차례도 알지 못하니, 명일 아침 아회(衙會) 때는 반드시 조회를 보도록 아뢰라." 하였다. 김실이 그대로 고하였으나, 우는 회답하지 않고 끝내 용덕(龍德)의 집에 가서 잤다. 이른 아침에 백관이 모두 모였으나, 우는 용덕의 집에서 남쪽 교외로 사냥을 나갔다. 실이 궁에서 달려가 고하고 반드시 조회를 보도록 청하니, 우가 말하기를, “재상들이 국사를 도모하고 의논하는데, 나는 아직도 동심이 있어 노는 것이 절제가 없으니 부끄럽다. 네가 술을 가지고 위로하며 말하여 달라." 하였다. 용덕은 통제원의 여종인데, 처음에 노씨의 궁인으로서 사랑을 받아, 총애가 노씨보다 더하였다. 얼마 안 되어 숙비(淑妃)로 봉하고, 그 아비 최천검(崔天儉)은 밀직사를 시키고, 언니 갓난이[孩兒]의 남편 정희계(鄭熙啓)는 판밀직사사로 삼았다. 그때 우가 봉가이를 총애하므로, 용덕이 이를 질투하여, “평리 도길부(都吉敷)가 일찍이 봉가이와 간통하였다."고 참소하니, 우가 길부를 내보내어 서북면 도체찰사로 삼았다.

○ 왜적이 함양군을 침략하니, 도순문사 윤가관(尹可觀), 진주 목사 박자안(朴子安)이 적과 싸워 18급을 베었다.

○ 우가 손수 도끼와 까뀌로 나무깎는 장난을 하는데, 사람들이 보고 듣는 것을 싫어하여, 그것을 보고 있는 호위하는 군사 세 사람에게 곤장을 때렸다.

○ 왜적이 동복현(同福縣)을 침략하니, 도순문사 윤유린(尹有麟), 광주(光州) 목사 김준(金準), 장흥(長興) 부사 유종(柳宗)이 적과 싸워 9급을 베었다.

○ 최영을 판문하부사로, 임견미를 문하시중으로 삼았다. 과거에 우가 원중포(元中浦)에 가서 어떤 해변에 이르니, 물이 한창 불어서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우가 말을 달려 뛰어 건너려 하니, 평리 문달한이 아뢰기를, “물의 깊이도 모르면서 어찌 갑자기 들어가십니까." 하였다. 그러자 얼마 안 되어 어떤 사람이 물을 건너가서 짐승을 쏘았다. 우가 바라보고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만일 정말 물이 깊다면 저 사람은 날아서 건넜느냐? 문평리가 나를 속인 것이로구나." 하고, 곧 달한을 집에 돌려보내어 출입을 금지시키고 얼마 뒤에 벼슬을 삭탈하였다. 얼마 후에 최영이 밀직부사 최단(崔鄲)을 시켜 아뢰기를, “달한이 우직하여 뜻을 거슬렀으나, 집에서 수심에 차 지내오니, 출입을 허여하여 주소서." 하니, 우가 이를 허락하였다. 이때에 영이 정사를 잡자, 달한의 벼슬을 회복시켜 주었다. 우가 비목에, 달한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지난번에 최단이 달한을 용서하길 청하였는데, 벌써 용서를 받았느냐." 하고 붓을 들어 지워 버리고, 아울러 단의 벼슬까지 삭탈하여 순군옥에 가두었다. 또 권근이 대언(代言)이 된 것을 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은 일찍이 간관으로 있을 때에 나를 놀러 나다니지 못하게 하더니, 어떻게 가까이 모시는 대언이 되었는가. 왜적이나 방어하게 하는 것이 합당하다." 하고 또 지워버렸다.

○ 왜적이 수원 공이향(工二鄕)을 침략하니, 부사 허조(許操)가 적의 첩자 세 사람을 사로잡았다.

○ 요동 도사가 여진의 천호 백파파산(白把把山)을 보내어 70여 기를 거느리고 갑자기 북청주(北靑州)에 이르렀다. 만호 김득경(金得卿)이 군사를 이끌고 거짓으로 피하다가 밤을 이용하여 그 영채(營寨)를 불지르고 공격하여 40명을 베니, 파파산이 도망하여 돌아갔다. 처음에 이원굉 등이 요동에 이르러 도사가 장차 군사를 보내어 합라ㆍ쌍성에 이르러 오랑캐의 사신을 막아 끊으려는 것을 알고,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어 와서 알렸다. 도당에서 곧 통첩을 보내어 득경으로 하여금 미리 이를 방비하게 하였다.

12월에 배원룡(裵元龍)을 계림 부윤으로 삼았다. 원룡은 본래 유능한 관리로서 이름이 있었으나, 염흥방에게 붙어서 양부로 섬기고, 집을 주어서 이 벼슬을 얻고서는, 백성을 침탈하여 심지어 쇠스랑까지 집으로 실어 갔다. 그 모양이 문어같이 생겼기 때문에 시골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철문어 부윤이라 하였다.

○ 해도 만호 윤지철(尹之哲)이 덕적도에서 왜적을 만나 쳐서 쫓고, 왜선 두 척을 노획하여 80명을 사로잡았다.

○ 추징색(推徵色)을 설치하여 각 고을의 체납된 공부를 받아들이게 하였다.

○ 우가 환관을 보내어 화살 만드는 사람 송부개(宋夫介)에게 술을 주었다. 우가 이어 그 집에 가서 화살 만드는 것의 교묘함을 보고 기뻐하여 안()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그 뒤로는 여러 공인의 집을 가지 않은 데가 없으며, 곧 그 기술을 모방하였는데 매우 정교하였다.

○ 무예도감(武藝都監)을 설치하였는데, 통역관 중랑장 곽해룡(郭海龍)의 말에 의한 것이다.

 

 

 

   

 

 

 

 

 고려사절요 제32   

 

 

 신우 3(辛禑三)

 

 

을축 신우 11(1385), 대명 홍무 18 

 

 

○ 봄 정월에 우는 전 판삼사사 강인유(姜仁裕)가 사위를 얻는다는 말을 듣고 기한에 앞서 그 집으로 달려가 그 딸을 빼앗아 돌아와 정비(定妃)의 궁에 두고 아침 늦도록 일어나지 않아, 인일(人日 정월 7)의 조하를 정지했다. 이때에 딸을 가진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모두 혼례를 갖추지 않고 몰래 사위를 얻었다. 호군 송천우(宋千祐)가 지문하 도길봉(都吉逢)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과거에 정조를 잃은 여자라는 말이 돌았으나, 세력을 두려워하여 감히 버리지 못하였다.

○ 해도 부원수 전 개성윤 조언(曹彦)이 왜적을 여주도(汝走島)에서 쳐 배 한 척을 빼앗고 세 사람을 사로잡으니, 우가 백금 50냥을 내려 주었다.

○ 환관 김실이 도망갔다. 과거에 실이 아내를 버리고 다시 사족의 딸에게 장가들려 하니, 우가 말하기를, “그 여자를 내게 보인 연후에야 장가들 수 있다."고 하였다. 실이 용덕을 통하여 그러지 말기를 청하니, 우가 허락하였다. 그래서 실이 그 여자를 우에게 보이지 않고 장가들었는데, 우가 감정을 품고 다른 일로 칭탁하여 실을 순군옥에 가두고 죽이려 하므로, 실이 도망갔다. 우는 영을 내려 크게 수색하며 당직했던 천호 유극서(柳克恕)를 옥에 가두었다.

○ 안동 원수 황보임(黃甫琳)이 왜적 2급을 베었다.

○ 공치는 마당에서 크게 사열을 하였는데, 대사헌 임헌(任獻)이 도당에 말하기를, “이곳은 선왕께서 크게 조회하고 행례하던 곳일 뿐만 아니라, 또 경령전(景靈殿)과 가까이 있어서, 태조와 열성조의 신위가 마당 바로 위에 있는데, 어떻게 군사를 내 놓아 그 안에서 말을 달리게 할 수 있는가." 하였다. 삼사좌사 염흥방이 말하기를, “현릉께서도 일찍이 이곳에서 오군(五軍)을 사열하였으니, 한적하고 넓음을 취한 것이다." 하며 듣지 않았다.

2월에 우가 왕흥(王興)의 집에 가서 그 딸을 바치게 하고 이때부터 그 집에서 잤다. 처음에 흥이 그 딸을 변안열(邊安烈)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려 하였는데, 우가 말하기를, “내 명령을 기다려서 시집보내라." 하고 드디어 사람을 시켜 그 딸을 보게 하였다. 흥이 말하기를, “신의 딸이 어리고 미련하며, 또 그 어미가 병으로 앓고 있으니, 무슨 정신으로 사위를 맞겠습니까." 하니, 우가 눈을 부릅뜨고 꾸짖기를, “조그만 놈이 나를 속이려 드느냐. 네가 명령을 좇지 않으면, 죄가 처자에게 미칠 것이다." 하였다. 시중 조민수 등이 우에게 말하기를, “안열은 나라의 명장으로서 그 공이 매우 큰데, 지금 그 며느리를 빼앗으면 장수와 신하 중에 누가 실망하지 않겠습니까. 성혼을 허락하소서."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 흥의 집으로 갔으나, 흥은 이미 집을 비우고 피하였다. 우가 크게 노하니, 흥은 할 수 없이 그 말을 따랐다.

○ 요동 도사가 백호 정여(程與)를 보내와, 김득경이 관군을 쳐 죽인 까닭을 묻고, 득경을 잡아 남경으로 압송하였다. 우가 임견미ㆍ이성림과 함께 정여를 극히 후하게 대접하고 몰래 장자온(張子溫)을 시켜 정여에게 금 50, 수행원 세 사람에게 은 50냥씩을 주었다. 득경이 가다가 철주(鐵州)에 이르렀는데, 밤중에 도적이 그를 죽였으므로, 왜적의 피해를 당했다고 황제께 보고하였다. 득경이 떠나려 할 때에 도당에서 그를 꾀어 이르기를, “북청주의 사건은 네가 그 책임을 지고 나라에는 누를 끼치지 않게 하라." 하니, 득경이 말하기를, “나는 다만 도당의 통첩을 받들어서 행하였을 뿐이니, 상국에서 만일 묻는다면 어떻게 감히 끝내 숨기겠는가." 하였다. 견미가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어떻게 할 줄을 몰랐는데, 밀직제학 하륜(河崙)이 은밀히 견미에게 말하기를, “일은 임시 변통이 중요한 것이다. 지금 서북에 왜적이 가득하니, 어찌 도적을 만나서 죽는 자가 없겠는가." 하니, 견미가 크게 기뻐하여 마침내 그 계책을 따른 것이다.

○ 우가 서해도에서 15일간 사냥하였는데, 경성에서 해상에 이르기까지 공급하는 수레가 백 리에 이어졌다. 환관과 내수가 총애를 믿고 멋대로 횡포한 짓을 하여 안렴사와 수령을 누르고 능욕하니, 서해도의 아전과 백성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모두 흩어져 달아났는데, 안렴사 이수(李須)는 말을 잃고 진흙 속을 걸어갔다. 온 도 사람들이 탄식하고 원망하는데, 우는 즐거워하며 돌아갈 줄을 몰랐다. 연안부에 이르러는, 비가 많이 내려 호종하는 자들이 들판에서 떨고, 길에는 죽은 소와 말이 즐비하였다. 돌아오다 백주(白州)에 이르러 연안부 큰 못에서 물고기를 구경하려 하자, 최영이 간하기를, “신의 휘하 군사가 수천 명이며, 지금 죽은 말이 많고, 더욱이 여러 가지 물자가 마련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협소한 고을에 행차하시면 민폐를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우가 이에 그쳤다.

3월에 왜적이 영강현(永康縣)을 침략하였다.

○ 연주(漣州)의 징파도(澄波渡)의 물이 사흘 동안 누렇게 흐렸다.

○ 강인유(姜仁裕)가 그 아내와 함께 송악에서 제사지내니, 우가 손수 피리를 불고 풍악을 울리며 상춘정(賞春亭)에서 맞이하였다. 술에 취하여 밤에 돌아올 적에, 전 낭장 전성길(全成吉)이 길을 가로질러 건너가자, 그를 때려 죽였다.

○ 대언 윤취(尹就)가 성균시를 맡았는데, 모두 세력가의 젖내나는 아이만 뽑았다. 그때 사람들이 이를 분홍방(粉紅榜)이라고 조롱하였으니, 그것은 아이들이 분홍옷 입기를 좋아하였기 때문이었다.

○ 여름 4 1일 임진에 주먹만한 우박이 많이 쏟아졌는데, 수일 후에야 그쳤다.

○ 요동에서 사람을 보내 와서 농우를 구매하였다. 이에, 점우색(點牛色)을 설치하고 서북면 백성의 자유 매매를 허락하여, 5백 마리를 모아서 도순문사에세 낙인을 찍어서 보냈다. 그러나 요동에서 말하기를, “인을 찍은 소는 나라에서 바치는 것이다." 하여 값을 주지 않으므로, 곧 폐지하였다.

○ 김유(金庾)ㆍ홍상재(洪尙載)ㆍ주겸(周謙) 등이 남경에서 돌아왔다. 처음에 유는 성절을 하례하고, 상재와 겸은 정삭을 하례하며, 이자용은 천추절을 하례하러 갔는데, 바닷길이 험난하였기 때문에 모두 제때 미치지 못하였다. 황제는 유 등이 사명을 띠고 늦게 온 것과, 임금을 죽이고 사신을 죽인 이유를 국문하여 대리(大理)로 귀양보냈다가, 이때에 와서 모두 놓아 보내고, 또 조빙을 통할 것을 허락하였다. 자용은 도중에서 죽었다. 우가 유 등을 불러들여 보고 술을 주며 위로하기를, “경들이 사명을 받들어 2 8천여 리의 먼곳으로 귀양갔다가 3년 만에 살아 왔으니, 내가 매우 민망하다." 하고, 각각 안장 갖춘 말을 하사하였다.

○ 우홍명(禹洪命)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이 과거에 노씨(盧氏)의 아우 귀산(龜山)과 환관 이광(李匡), 종자 문윤경(文允慶) 등도 응시하였다. 전례에, 시험장마다 심사하여 합격자를 발표하는데, 초장(初場)에 합격지 못한 자는 중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종장에서도 그렇게 하였다. 귀산은 어리고 미련하여 글자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중장에게 쫓겨났다. 우가 크게 노하여 과시(科試)를 파하려 하니, 시관 염국보(廉國寶)ㆍ정몽주 등이 그를 급히 뽑았다. 윤경은 초장에서 그 친구의 책문(策文)을 훔쳐 썼으므로, 몽주가 를 쫓아내니, 국보가 안 된다 하며 이를 아울러 뽑았다. 최영이 사람들에게 농담으로 말하기를, “전달에 감시학사 윤취는 빈한한 선비를 버리고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뽑았기 때문에, 큰 우박이 와서 내 삼[]을 다 망가뜨렸는데, 이번에 동당학사는 다시 무슨 천변을 가져오려는가." 하였다.

○ 찬성사 심덕부를 동북면 상원수로, 지밀직 홍징(洪徵)을 부원수로 삼고, 판덕창 부사 김입견(金立堅)을 교주도 부원수로 삼았다.

○ 우가 정몽주의 집에 갔는데, 몽주가 막 원로들에게 잔치를 베풀 때였다. 최영이 잔을 받들어 올리니, 우가 말하기를, “내가 술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부왕 때의 늙은 재상들이 모두 모였다는 말을 듣고 부왕을 보는 것 같아서 왔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나무는 먹줄을 따르면 곧아지고, 임금은 간하는 말을 들으면 밝아진다 하는데, 경은 어째서 이롭고 해로운 것을 말하지 않는가. 술을 마시는 것은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다." 하였다. 영이 갓을 벗고 사과하기를, “전하의 이 말씀은 국가의 복입니다. 또 어제 신이 드린 글이 있사오니, 거행하시길 바랍니다." 하였다. 우가 말하기를, “꿈에 경과 함께 적을 대하여 싸워서 이기고 내가 탄 말을 보니 나귀였는데,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 하였다. 이에 윤환(尹桓)ㆍ이인임ㆍ홍영통ㆍ조민수ㆍ임성림ㆍ이색 등이 아뢰기를, “옛날에 원 세조(元世祖)가 꿈에 나귀를 보면 길하다 하여, 항상 나귀를 대궐 마당에 매어 두고 나귀 꿈을 꾸려 하였으나 꾸지 못하였는데, 지금 상감께서는 이것을 꿈꾸었으니, 얼마나 길한 일입니까. 태평의 업을 곧 기다릴 수 있사온데, 다만 신등은 늙어서 미처 보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우가 크게 기뻐하여 실컷 마시고 영에게 활을 주며 말하기를, “경과 함께 사방을 평정하려 한다." 하고, 술잔을 잡아 꿇어 앉아서 이색에게 올리고 말하기를, “사부(師傅)께서도 여악(女樂) 보는 것을 좋아하는가." 하고, 드디어 좌중의 노래하는 기녀들을 데리고, 길에서 말을 빼앗아 타고 궁으로 돌아갔다.

사신이 말하기를, “윤환 등은 지위가 최고에 달하여 그 부귀를 누리면서, 우의 거칠고 음란함이 절도가 없는 것을 보고도 남의 일처럼 여겨서, 한 번도 간해서 말리지 않았고, 우의 양심이 잠간 동안에 발로하여, 허물을 고쳐 줄 것을 바랐는 데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우가 스스로 요망한 꿈 얘기를 함에 이르러는, 도리어 허탄하고 바르지 않은 말로 인사를 같이하여 아첨을 하였으니, 심하다. 그 면대하여 속임이여."

5월에 문하평리 윤호(尹虎)와 밀직부사 조반(?)을 남경에 보내어 은혜를 사례하고 시호와 승습을 청하였다.

○ 김유를 순군옥에 가두고 찬성사 우현보(禹玄寶)와 밀직 강회백(姜淮伯)을 시켜 국문하였다. 과거에 유가 남경에 갔을 때 황제가 책망하기를, “지난번에 네 나라에서 우리 사신을 죽이고 또 네 임금을 죽였는데, 그 권신이 누구냐." 하니, 유가 이인임이라고 대답하였다. 황제가 유를 안으로 끌어들여 달래기를, “너의 먼저 국왕이 아들이 없는 것은 짐이 아는 바인데, 지금 왕은 누구의 아들이냐." 하니, 유가 이를 변명하지 않았다. 다음날 본국 환관 최안(崔安)이 흥성사(興聖寺)에 이르러 유의 수행원 단득춘(段得春)에게 속여 말하기를, “네 임금의 출생 관계를 유가 벌써 황제께 아뢰었는데, 너는 어째서 숨기느냐." 하였다. 득춘이 말하기를, “유의 말이 터무니없다." 하고, 득춘이 물러와서 통역 정연(鄭連)에게 말하였다. 인임의 집 종이 또한 일행 가운데 있었는데 듣고 돌아와서 보고하니, 인임이 우에게 아뢰어 국문하여, 유는 청주에 귀양보내고, 연은 한양(漢陽)에 귀양보냈다.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유가돌아올 때에 비단과 사라(紗羅)를 많이 가지고 와서도 인임 등에게 뇌물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죄를 당하였고, 홍상재는 바다에서 왜적에게 약탈당하여 행장이 텅 비었으므로, 화를 면했다." 하였다.

○ 사헌부가 상소하기를, “판사 손용진(孫用珍)이 사신으로 남경에 갔는데, 황제가 우리나라 일을 의심하여 국문하였으나, 용진은 나라를 위하여 몸을 잊고 죽기에 이르러도 항복하지 않았으니, 충의가 상을 줄 만합니다. 벼슬과 시호를 주고, 그 자손에게 벼슬을 주어 뒷사람에게 보이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우가 여러 기생을 데리고 남쪽 교외에서 사냥하고, 화원에 돌아와 밤에 불놀이를 하다가 잘못하여 집 처마까지 태웠는데, 우는 직접 옷에 물을 적시어 불을 껐다.

6월에 사복부정 변벌개(邊伐介)가 우에게 아뢰기를, “날마다 길 가는 사람의 말을 빼앗아 기생을 태우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도 원망하오니, 여러 섬에서 기르는 말을 갖다가 놀고 사냥하는 데 공급하십시요." 하였다. 우가 그렇게 여기고 벌개를 보내어 섬의 말 30여 필을 가져왔다.

○ 우가 이인임의 집에 가서 인임의 처 박씨를 데리고 다야점(多也岾) 별장에 가려 하였는데, 박씨가 말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자, 우가 길가는 사람의 말을 빼앗아 마침내 함께 가서 여러 기생들을 거느리고 음란하게 즐겼다. 인임이 우의 총애하는 기생 개성(改成)에게 곡식 20()을 주고, 여러 기생과 내수(?)에게는 2곡씩을 주었다. 이때에 인임이 우를 데릴사위같이 접대하여, 나라에는 열흘 동안 쓸 저축이 없는데도, 전원(田園)과 노비가 중앙과 지방에 널려 있고, 장군과 대신이 모두 그 집안에서 나왔다.

○ 문하시중 임견미를 기복시켰다.

○ 가을 7월에 좌사의 이지(李至) 등이 상소하여 놀고 사냥하는 것을 간하였는데, 우가 지신사 염정수로 하여금 그 글뜻을 해석하게 하고, 갑자기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때가 바야흐로 위태하고 어지러운데, 이 무리들은 내가 말달리기를 익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불충하기가 얼마나 심한가. 철저히 징계하여, 말하는 자를 끊어야 하겠다." 하고, 후에 또 간관이 이름을 모두 적어서 간직하여 말하기를, “이 무리들로 왜적을 막게 해야 한다." 하였다. 이 때문에 병을 칭탁하는 간관이 많았다.

○ 우가 기생을 데리고 귀법사(歸法寺)의 개천에 이르러 기생과 함께 목욕하고 밤에 돌아와 전 개성 윤 오충좌의 집에 이르렀다. 충좌의 아내는 본시 단양대군(丹陽大君) (?)의 집 여종인데, 적몰당하여 의순고(義順庫)에 들어가서 딸 셋을 낳았다. 충좌가 천역을 면하기 위하여 사사로이 환관을 섬기어 그 가운데 딸을 바쳤다. 이때부터 여러 번 그 집에 갔다.

○ 왜적이 단주를 침략하니, 동북면 상원수 심덕부가 그들과 싸워 패하였다.

○ 계림군 이보림(李寶林)이 죽었다. 사람됨이 엄하고 굳세며 바르고, 행정하는데 재능이 있었다. 일찍이 경산부를 맡았을 때, 길에 나갔다가 어떤 부인이 우는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이 여자의 우는 소리가 슬프지 않고 기뻐하는 것 같다." 하고 잡아서 심문하니, 과연 간부와 짜고 남편을 죽인 여자였다. 또 한 사람은 이웃 사람이 자기 소의 혀를 잘랐다고 몰아댔는데, 이웃 사람은 부인하였다. 보림이 그 소를, 사람을 시켜 오래 목마르게 한 다음, 간장을 물에 타 놓고서 마을 사람을 다 모아 놓고 명령하기를, “너희들이 차례로 소에게 물을 마시게 하되, 소가 마시려 하거든 그만두고 다음 사람에게 넘겨 주라." 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명령대로 하여 차례가 그 피의자에게 이르니, 소가 놀라서 달아났다. 그래서 그 피의자를 잡아서 심문하니, 과연 자백하기를, “이 소가 내 벼를 뜯어 먹었기 때문에 그 혀를 잘랐다."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말을 내 놓아서 다른 사람의 보리를 거의 다 뜯어먹어버려 보리밭 임자가 말 임자를 고소하려 하니, 말 임자가 사정하기를, “나도 보리밭이 있으니, 보리가 익으면 당신에게 주겠소. 그러니 관청에 고소하지 마시오." 하여, 보리밭 임자가 허락하였다. 여름이 되어, 그 말이 뜯어먹은 보리가 다시 싹이 돋아 그래도 수확할 것이 있자, 말 임자가 말하기를, “당신의 보리도 여물었으니, 내가 반드시 당신의 보리를 갚아줄 이유가 없다." 하여, 보리 임자가 고소하였다. 보림이 두 사람을 앞마당에 불러 말 임자는 앉히고 보리 임자는 세워 놓고 말하기를, “동시에 빨리 달려서 못 따라가는 자는 벌을 주겠다." 하였더니, 말 임자가 따라가지 못하였다. 따져 물으니 대답하기를, “저 사람은 서고 나는 앉았으니, 어떻게 따를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보림이 말하기를, “그 보리도 마찬가지다. 뜯어먹은 뒤에 다시 싹이 났으니, 제대로 여문 보리를 따를 수 있겠느냐. 네가 처음에 말을 내놓아서 남의 밭에서 뜯어먹게 한 것이 첫째 죄요, 사사로이 그 주인한테 빌어서 관청에 고하지 못하게 한 것이 둘째 죄요, 꾀를 내어 약속을 어기고 보리를 주지 않았으니, 셋째 죄다. 법을 어지럽힌 백성은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곤장을 때리고, 그 밭 보리를 고소한 자에게 돌려 주었다. 그가 정사를 엄하고도 분명하게 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대사헌이 되었을 때에 자못 집정 대신의 뜻에 맞추어 평소의 지조가 없으므로, 세상에서 대단찮게 여겼다.

○ 왜적이 옹진 기린도를 침략하니, 해도 만호 정룡(鄭龍)이 이를 추격하였다.

○ 요동에서 상린(桑麟)을 보내어, 원나라 말기의 떠돌이 백성 이타리불대(李朶里不?) 47명을 되찾아 돌아갔다.

○ 왜적이 평해부를 침략하니, 강릉도 도체찰사 목자안(睦子安)이 쳐서 물리치고 5급을 베었다.

○ 우가 봉천선(奉天船)을 타고 동강(東江)에서 물놀이를 벌였다. 우가 호곶에 화려하게 채색한 누각을 짓고 누선(樓船)을 만들었는데, 매우 사치스럽고 크게 만들어 이름을 봉천선이라 하였다.

○ 무인일에 지진이 나서 말떼가 치닫듯이 소리가 울리고 담과 집이 무너지니, 사람들이 모두 나가서 피하였으며, 송악산 서쪽 고개에 돌이 무너졌다. 우가 말하기를, “이 지진은 하늘이 요동을 무너뜨리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 황제가 감유의 일행인 선지철(宣之哲) 38명을 석방하여 돌려보냈다.

○ 기묘일에 3일 동안 지진이 있었다.

○ 환관 정난봉(鄭鸞鳳)이 호곶에 가서 우에게 아뢰기를, “전하께서 나라 일을 걱정하지 않으니, 참으로 임금된 도리가 아니오며, 또 도당에서 명령을 받지 못하여 일이 지체되는 것이 많사오니, 돌아가셔서 일을 보시옵소서." 하니, 우가 돌아왔다가 조금 뒤에 또 호곶으로 갔다.

○ 강릉도에 서리가 와서 벼가 죽었다.

8월에 아들 창()의 생일로 인하여 사형수 이하의 죄인을 놓아 주었다.

○ 왜적이 단주를 침략했다.

○ 계림군 이달충(李達衷)이 졸하였다. 달충은 강직하여 흔들리지 않았다. 공민왕이 유명한 학자라 하여 뽑아서 밀직제학으로 삼았다. 그때 신돈(辛旽)이 한창 권세를 부렸는데, 일찍이 여럿이 있는 자리에서 돈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이 상공(相公)이 주색을 좋아한다고 하더이다." 하니, 돈이 좋아하지 않았는데, 얼마 안 되어 파면되었다.

○ 전라 해도 원수 진원서(陳元瑞)가 왜적 20여 급을 잡았다.

9월에 우리 태조를 동북면 원수로 삼았다. 최영은 교외에 나가 주둔하였는데, 이때에 태조와 최영의 위명이 상국에 알려졌고, 또 조서를 전하는 사신 장보(張溥) 등이 국경에 와서 태조와 이색(李穡)의 안부를 물었으므로, 태조와 영을 모두 지방에 내보내 보 등으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했다.

○ 을해일에 장보와 단우(段祐) 등이 와서 조서를 내렸는데, 이르기를, “원 나라가 통제를 잃은 뒤로부터 군사를 일으켜 중국을 다투는 자가 별처럼 많이 늘어서서, 각기 지역을 차지하고 정치를 달리하는데 이르렀으니, 어찌 오이를 가르듯이 쉽게 땅을 나누어 가지는 것과 다르겠으며, 백성을 학대하고 살생을 마음대로 하였으니 어찌 오랑캐와 다르지 않겠는가. 이렇게 한 것이 20년 가까이 되었으니, 사람들은 세상이 잘 다스려지기를 바랐고, 하늘에서도 돌보아 주심이 나타났다. 짐은 본시 한미한 사람으로서 중원에 임금으로 임하여, 여러 오랑캐를 각 지역에서 무마하고 사방을 모두 편안하게 하니, 달리 국경에서 말썽을 부리는 일이 없으며, 함부로 정벌하는 군사를 일으켜서 험난한 수륙으로 원정하여 우리 백성을 괴롭힌 적이 없었다. 너의 고려는 하늘이 만든 동이(東夷)로 땅이 험하고 멀어서 짐이 이를 조사하며 따져서 틈을 내지 않고 각각 편안히 살게 하려고 생각하였는데, 어째서 자주 예속되기를 청하여 자꾸 고집을 부리는가. 하물며 여러 신하들이 받아들이자고 간하였기 때문에, 또 같이 보고 다 같이 사랑하여 중국 이외의 지방임을 구별하지 않았다. 이제 공경과 정성을 윤허하여 전 작위를 이을 것을 명하노니, 의식은 본래 풍속을 따르고, 법은 옛 전장(典章)을 지키라. 아아, 동이와 중국이 모두 편안하게 된다면, 반드시 하늘이 밝게 굽어보실 것이다. 이미 짐의 명령을 좇았으니, 틈을 내지 말고 생업을 이루라." 하였다. 병자일에 주탁(周倬)ㆍ낙영(?) 등이 와서 우를 책봉하여 왕을 삼고 또 경효왕(敬孝王)의 시호를 주어 공민(恭愍)이라 하였다.

○ 왜적 1 50척이 함주ㆍ홍원(洪原)ㆍ북청(北靑)ㆍ합란북(哈蘭北) 등 여러 곳을 침략하여, 인민을 거의 다 죽이고 사로잡았다. 원수 심덕부ㆍ홍징(洪徵)ㆍ안주(安柱)ㆍ황희석(黃希碩)ㆍ정승가(鄭承可) 등이 적과 홍원의 대문령(大門嶺) 북쪽에서 싸워, 장수들이 모두 패하여 먼저 도망하고, 심덕부만이 홀로 적진에 돌진하였다가 창에 맞아 말에서 떨어졌다. 적이 다시 찌르려 하는데, 부하인 유가랑합(劉訶郞哈)이 달려 들어가 쏘아서 잇달아 세 사람을 죽이고, 적의 말을 빼앗아 덕부에게 주고 싸워가며 적진을 탈출하였다. 이리하여 덕부의 군사도 크게 패하자, 적의 형세가 더욱 성하였다.

태조(太祖)가 가서 치기를 청하여, 함주에 이르러 여러 장수의 부서를 정돈하였다. 진영 안에 70보 쯤 되는 곳에 소나무가 있는데, 태조가 군사를 불러 말하기를, “내가 몇째 가지의 몇째 솔방울을 쏘아 맞힐 것이니, 너희들은 보라." 하고, 곧 유엽전으로 쏘아서 일곱 번 쏘아 일곱 번 맞혔는데, 모두 말한 것과 같이 하니, 군영 안이 모두 뛰고 춤추며 환호성을 질렀다. 이튿날 바로 적이 주둔하고 있는 토아동(?兒洞)으로 향하여 동구의 좌우에 군사를 매복시켰다. 적의 무리가 먼저 동네 안의 동쪽 서쪽 산을 점령하였는데, 멀리 나팔소리를 듣고 크게 놀라서 말하기를, “이것은 이() 태조의 옛날 이름 의 차거(??) 나팔이다." 하였다. 태조가 이두란ㆍ고여(高呂)ㆍ조영규(趙英珪)ㆍ안종검(安宗儉)ㆍ한나해(韓那海)ㆍ김천(金天)ㆍ최경(崔景) 등 백여 기를 거느리고 고삐를 잡고 천천히 행진하여 그 사이로 지나가니, 적이 그 군사가 적고 행진하는 것이 느린 것을 보고 하는 짓을 헤아릴 수 없어서 감히 치지 못하고 동쪽 적이 서쪽 적에게로 가서 함께 주둔하였다. 태조가 동쪽 적이 주둔했던 곳에 올라 큰 걸상에 걸터앉아 군사로 하여금 안장을 풀고 말을 쉬게 하였다. 얼마 뒤 말에 오르려 할 적에, 백 보쯤 되는 곳에 마른 나무 등걸이 있었는데, 태조가 잇달아 세 발을 쏘아 모두 정확하게 맞히니, 적들이 서로 돌아보며 놀라고 탄복하였다.

태조가 왜말을 아는 자를 시켜 소리쳐 말하기를, “지금 주장이 바로 이만호이다. 너희들은 빨리 항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하였다. 적의 괴수가 대답하길,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곧 그 부하들과 항복하길 의논하다가 결정을 못하고 있는데, 태조가 말하기를, “적이 태만한 틈을 이용하여 쳐야 한다." 하고, 말에 올라 두란ㆍ여ㆍ영규를 시켜 적을 유인하니, 적의 선봉 수백 기가 추격하였다. 태조가 거짓으로 쫓기는 체하며 스스로 후군이 되어 복병 속으로 퇴각하다가 드디어 군하를 돌려 친히 적을 쏘니, 20여 명이 모두 활시위에 맞아 죽었다. 두란ㆍ종검 등과 함께 말을 달려 적을 치는데 복병이 또 일어나자 이에 태조는 자신이 군사에 앞장서서 단기로 적진에 출입하기를 서너 번이나 하였는데, 향하는 곳마다 적들이 흩어지고 쓰러졌다. 손수 적을 무수히 죽였는데, 쏜 화살이 겹으로 된 갑옷을 꿰뚫기도 하고 혹은 화살에 사람과 말이 함께 관통된 적도 있었다. 적이 달아나고 무너지자, 관군이 승세를 타고 지르는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였으며, 넘어진 송장이 들에 덮여 한 놈도 탈출하지 못하였다. 이 싸움에서 여진군이 승세를 타고 적들을 마구 죽이니, 태조가 명령하기를, “적이 궁하여 불쌍하니, 죽이지 말고 생포하라." 하였다. 남은 적이 천불산(千佛山)으로 들어갔는데, 놈들도 모두 사로잡았다. 우가 태조에게 백금 50냥과 표리(表裏) 5벌과 안장 갖춘 말을 주고, 또 정원십자공신(定遠十字功臣)의 호를 더해주었다.

○ 장부(張溥) 등이 서사호(徐師昊)의 비를 가서 보았다. 이에 앞서 비를 세운 뒤로 병란과 수재ㆍ한재가 연이어져 비가 쓰러졌었는데, 지금 부 등이 이 비에 대하여 물었기 때문에 다시 세운 것이다.

○ 우가 태묘에 분황(焚黃)하는 제사를 지내고, 동지밀직 최을의(崔乙義)를 보내어 장부에게 제사에 쓴 고기를 보내니, 부가 직접 맞이하여 받았다. 밀직부사 구홍(具鴻)이 주탁(周倬)에게 제사고기를 전했는데, 마침 탁이 식사를 하고 있어 홍이 고하지 않고 부엌에 두고 갔다. 탁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왕이 천자의 명령을 태묘에 고하기 위하여 분황하는 것이 예이며, 제사를 마치고 사신에게 제사고기를 보내는 것도 예이다. 제사고기를 받으면 천자의 높음으로도 복장을 갖추고 몸소 맞이하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겠는가. 내가 마땅히 예법에 따라 몸소 맞이했어야 했는데, 어째서 내게 고하지 않고 부엌에 두었는가. 그 죄가 세 가지이니, 불경스럽게 천자의 명령을 태만히 한 것이 첫째요, 국왕의 가르침을 소홀하게 여긴 것이 둘째요, 조종이 내려주심을 가볍게 여긴 것이 셋째이다. 죽이지 않고 어떻게 하랴." 하였다. 장자온(張子溫)이 말하기를, “홍의 벼슬은 비록 밀직이나, 본시 무인으로서 예를 알지 못한다." 하였다. 탁이 말하기를, “이와 같이 교화가 되지 않은 사람은 따질 필요는 없지만, 꾸짖어서 예를 알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탁의 무리가 또 우리의 제사지내는 전례를 보고자 하므로, 사직과 적전과 풍운을 적어서 보이니, 탁이 충신ㆍ열사ㆍ효자ㆍ순손ㆍ의부ㆍ절부(節婦)를 추가하여 함께 제사지내게 하였다. 보의 무리가 가서 사직단을 보고 재실을 짓지 않았다고 책하였다. 또 성황(城隍)을 보려 하여, 조정에서 높은 곳에 올라서 서울을 두루 보게 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의논하여, 정사색(淨事色)을 성황이라고 속여서 보였다. 정사색은 별을 제사지내는 곳이었다.

○ 전 지문하 이을진을 강릉도 원수로 삼아 왜적을 막게 하였다.

○ 겨울 10월에 찬성사 조인벽(趙仁璧)을 교주도 원수로 삼았다.

○ 장부ㆍ주탁 등이 돌아갔다. 우가 백금ㆍ저포ㆍ마포ㆍ의복ㆍ안마를 주니, 받지 않고 말하기를, “주는 것을 감히 절하고 받지 않으리요마는, 지금 몸이 추위를 느끼지 않고, 또 걸어서 가는 것이 아니니, 받아서 어디에 쓰겠습니까." 하고, 다만 조신들이 가는 사람에게 주는 시를 받아서 보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동방에 인물이 있다." 하였다.

○ 판문하부사 조민수와 문하찬성사 우현보, 첨서밀직사사 하륜을 남경에 보내어 은혜를 사례하고, 또 역서(曆書)와 부험(符驗)을 청하며, 따라서 전원(前元) 때의 포마(鋪馬)와 몽고 문자 여덟 벌을 바쳤다.

○ 문하찬성사 심덕부와 밀직제학 임헌(任獻)을 남경에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였다.

○ 충주병마사 최운해(崔雲海)가 왜적 6급을 베었다.

○ 무신일에 지진이 있었다.

○ 좌대언 윤취(尹就)가 최천검(崔天儉)의 집 종이 무례하다고 해서 때렸는데, 용덕이 우에게 호소하니, 우가 노하여 취를 파면시켜 서인으로 삼았다.

11월에 국인에게 품등에 따라 말을 내게 하여, 세공에 충당하였다.

○ 우가 화원(花園)에세 말을 조련하다가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물푸레나무[水靑木] 공문(公文)을 가져 오라. 내가 장차 이 말을 길들이겠다." 하였다. 이때에 이인임ㆍ임견미ㆍ염흥방이 그 악한 종을 내놓아 좋은 토지를 가진 사람이 있으면 모두 물푸레나무로 때리고 빼앗았다. 그 주인이 비록 관가의 문권이 있더라도, 감히 더불어 항변하지 못하니, 이때 사람들이 이것을 문푸레나무 공문이라 하였다. 우가 듣고 미워하였기 때문에 말할 적마다 그것을 언급하였다.

○ 전 부령 장연(張演)이 그 아내와 몰래 간통하는 호군 김장(金璋)을 잡아서 사헌부에 고발하였는데, 그 아내는 전공 판서 김극공(金克恭)의 딸이었다. 도망하여 이인임의 집으로 들어갔는데, 이때 인임이 영사헌 부사로 있어서 사헌부로 하여금 추궁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가 공공연하게 뇌물을 받고 법을 흔들며 정사를 어지럽힘이 이와 같았다.

○ 경상도 도순문사 박위(?)가 왜적 14급을 베었다.

12월에 밀직부사 강회백을 남경으로 보내어 세공하는 말 1천 필과 베 1만 필, 금은을 환산한 말 66필을 바쳤다.

○ 강씨를 봉하여 안비(安妃)로 삼고, 봉가이를 숙녕옹주(肅寧翁主)로 삼으며, 기생 칠점선(七點仙)을 영선옹주(寧善翁主)로 삼았다. 사가의 종과 관가의 종을 옹주로 봉한 것은 예로부터 없던 일이므로, 국인들이 놀라고 해괴하게 여겼다.

 

 

[D-001]분황(焚黃) : 나라에서 관직이나 시호를 내리면, 그 내린 명령의 부분을 누런 종이에 옮겨 써서 선조의 사당 앞에서 태우고 제사를 드리는 것인데, 이번에는 명 나라에서 우()를 왕으로 봉하고 먼저 왕에게 공민(恭愍)이라는 시호를 내린 데에 대한 제사이다.

 

   

 

 

 

 

 고려사절요 제32   

 

 

 신우 3(辛禑三)

 

 

병인 신우 12(1386), 대명 홍무 19 

 

 

○ 봄 정월 초하루 무오일에 우가 이인임의 집에 있었다. 인임의 아내가 큰 술잔을 올리며 아뢰기를, “오늘은 삼원(三元)이니, 삼가 수()를 올립니다." 하였다. 우가 잔을 다 마시고 희롱하기를, “내가 한편으로는 손자요, 한편으로는 계집종의 서방인데, 지금 마주 앉아서 마시는 것이 실례가 아닐까." 하고, 처용(處容) 가면을 쓰고 놀이를 하여 그를 기쁘게 하였다.

○ 다시 김유를 전옥(典獄)에 가두고, 그 집을 적몰하며, 곤장을 때려 순천부에 귀양보냈다. 이인임이 압송하여 가는 아전에게 다만 5일 안에 갔다 오라고 경계하였는데, 유는 경천역(敬天驛)에서 죽었다.

2월에 정당문학 정몽주를 남경에 보내어 왕의 편복(便服)과 배신(陪臣)의 조복과 편복을 청하고, 이어서 세공을 감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 정지를 해도원수 사도도지휘처치사로 삼았다.

○ 우가 서해도에서 사냥하는데, 스스로 피리를 불고, 여자와 환관은 노래를 부르며 밤낮으로 쉬지 않으니, 제공하는 비용이 매우 많이 들어 여러 고을이 불만으로 시끄러웠다. 도순문사 왕안덕과 안렴사 배구(裵矩), 해주 목사 이숙림(李淑林), 연안 부사 안준(安俊) 등이 크게 술과 음식을 갖추어 우에게 향연을 베푸니, 우가 모두 내구의 말로 상을 주었다.

3월에 우가 나가서 노는데, 어떤 사람이 말을 달려 그 앞을 지나가므로, 우가 말에서 내려 몸소 그 사람을 잡아서 발가벗겨 묶어서 말에 붙잡아매고 길로 달리니, 그 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 용덕과 그 아비 최천검을 전주에 귀양보내고, 그 어미와 언니 갓난이와 시녀 네 사람을 함께 목매어 죽였다. 이때 봉가이가 바야흐로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무함하여 참소하기를, “용덕과 그 어미가 사술로 현혹한다." 하였다. 임견미ㆍ이성림ㆍ염흥방이 그 원통한 것을 애석히 여겨 구원하려 하였으나 할 수 없었다. 한 사람이 형벌에 임하여 말하기를, “반드시 나를 죽인 자에게 복수하겠다." 하였는데, 말투가 태연자약하였다. 마침내 형을 집행하여 시체를 저자에 버렸는데, 수일 후에 우가 가보고 시체를 지키는 자로 하여금 다시 시체를 수레 위에 들어 내놓아 썩게하니, 썩는 냄새가 길에 가득하여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였다.

○ 조민수ㆍ우현보가 남경에서 돌아왔는데, 황제가 역서와 선마(船馬)ㆍ병부적[符驗] 여덟 벌을 주었다.

○ 여름 4월에 삼사우사 김속명(金續命)이 졸하였다.

○ 한산 부원군 이색이 과거보이는 것을 맡았는데, 옛 전례에 의하여 화원에서 우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우가 색을 스승이라 하여 공경하고 중히 여기어 친히 손을 잡고 들어가서 걸상을 마주 대하여 앉으려 하니, 색이 굳이 사양하였다. 우가 친히 내구의 안장 갖춘 말을 끌어내 주었다.

○ 칠원 부원군 윤환(尹桓)이 졸하였다. 환의 집은 큰 부자였는데, 일찍이 휴가를 얻어 칠원에 돌아갔을 때에, 큰 흉년이 들어서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자, 집의 재물을 흩어서 구제하고 가난한 백성에게 빌려 준 문서를 모두 불살라 버렸다. 때마침 오래 가물었는데 물이 환의 논에서 솟아나서 다른 사람의 논에까지 적시어 결실이 잘 되니, 경상도의 백성들이 칭송하기를 마지않았다.

5월에 맹사성(孟思誠)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삼사좌사 염흥방, 판밀직사사 최염(崔濂)의 두 집 종으로 부평(富平)에 사는 자가 세력을 믿고 방자하게 횡포하였다. 부사 주언방(周彦邦)이 아전을 보내어 군정(軍丁)을 점검하였는데, 종들이 그를 때려 거의 죽게 되었다. 언방이 사도 도지휘사의 발군첩(發軍牒)을 가지고 직접 그 집에 이르렀는데, 종들이 또 언방을 때렸다. 우가 순군제공 신귀생(辛龜生)을 부평에 보내어 멋대로 포악한 짓을 한 종들을 잡아들여 다시 추궁하여 묻지도 아니하고 모두 베어버렸다. 염은 이임(李琳)의 사위였다.

○ 도평의사사에서 우가 항상 동강에 가서 있으므로, 재신과 추신을 나누어 네 당번을 만들어 시위하였다. 이때에 우가 환관 및 기생들과 나체로 헤엄치며 고기잡는 것을 즐겁게 여겨 날마다 일과로 삼았다.

6월에 광흥창사 나영렬(羅英烈), 부사 전사리(田思理), 분대규정 권간(權幹) 등이 동강의 창고에서 녹을 나누어 줄 때에, 우가 동강에 가서 환관 안거(?)로 하여금 영렬 등을 시켜 따라다니며 고기를 잡는 자와 말을 먹이는 자, 풀무장이 등 31명에게 쌀 한 섬씩을 주게 하였다. 영렬 등이 말하기를, “이 창고는 선왕께서 백관에게 녹을 주는 것이니, 함부로 줄 수 없다." 하니, 우가 크게 노하여 영렬 등을 가두어 3일 만에 석방하고, 거에게 명하여 창고를 열어서 나누어 주었다.

○ 문하평리 안익(安翊)을 남경에 보내어 성절을 하례하고, 밀직부사 유화(柳和)는 천추절을 하례하였다. 이때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이 돌아오면 정권을 잡은 자가 그 뇌물의 양을 따져서 그 벼슬을 높이고 낮추었으며, 혹 욕심대로 되지 않으면 반드시 그를 중상하였다. 그 ��문에 사신으로 가는자가 그 화를 면하기 위하여, 무역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익이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기를, “내가 일찍이 재상을 보내어 조빙하는 것은 국가를 위하는 것이라 생각하였더니, 오늘에서야 세력가의 재산을 마련해 주기 위한 것임을 알았다." 하였다.

○ 가을 7월에 정몽주가 남경에서 돌아왔다. 예부에서 자문을 보내어 이르기를, “황제의 명령에 의하여 말하노니, 하늘이 덮고 땅이 싣고 있는 것에, 상제가 명하여 백성을 맡게 한 자의 운수를 누가 다 알 수 있으랴. 왕으로서 능히 하늘의 이치를 아는 자라면 상제가 명한 분수를 지키는 것이다. 산에 막히거나 바다에 막히더라도 틈을 내지 말고, 예를 닦고 이웃과 화목하여 살리기 좋아하는 상제의 덕을 본받아서 각각 생민을 보전하면, 나라 운수가 길이 계속되지 않는 법이 없다. 만일 그렇지 않고, 경솔하게 간사와 거짓을 행하여 멋대로 이웃 나라를 업신여기면, 전쟁을 일으켜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법이다.

과거에 공민(恭愍)이 살아 있을 때에 조공하는 사신이 이르면 짐은 이를 기쁘게 여겼다. 짐은 초야에서 일어났지만, 왕전(?)은 삼한의 왕이 된 것이, 그의 선조가 임금을 죽인 데서 시작하여 이제까지 4 67년이 되었는데, 삼한의 왕자와 왕손이 이제 우리에게 조공을 잘하였으므로, 곧 성의로 미루어보아 대접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삼한에 사신가는 자는 반드시 그 나라 사람인 환자[?]가 갔으니, 짐의 뜻이 바로 성의를 미루어보는 데 있었다. 그런데 공민이 임금 죽인 죄의 벌을 받게 될 줄을 어찌 예측하였으랴. 돌아오기를 좋아하는 천도를 피하기 어려워서 곧 시해된 것이다. 그러나 죽인 자가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의 죄역을 은폐할 생각으로 우리의 사신을 죽였다. 그런 뒤에도 여러 번 제후로서의 약속을 청하였으나, 짐이 자주 허락하지 아니한 것은 바로 분수를 지키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청하기를 마지아니하므로, 짐이 무리하게 그 말을 좇아서 세공을 요구한 것은 삼한의 정성을 알아보려 한 것인데, 그쪽에서 명을 들은 지 한두 해가 못 되어 약속을 위반하고, 3년이 못 되어 약속대로 하며, 2년이 못 되어 곤란한 뜻을 호소하였다. 아아, 짐이 볼 때에 사해 안에서 중국에 이웃하여 있는 나라로 삼한은 최하의 나라가 아니다. 직경이 1, 2천 리나 되는데 어찌 사람이 없겠는가. 어째서 바른 성품이 일정하지 못한가. 또 세공을 설정한 것이 어찌 중국이 이것으로 부유하게 되려 해서이겠는가. 삼한이 진실한가 거짓인가를 알려고 하는 데 불과한 것이다.

이제는 진실과 거짓이 분명해졌다. 표문(表文)에 중국의 법으로 오랑캐의 풍속을 변경하겠다는 말이 있는데, 오랑캐의 풍속을 변경하는 것은 저의 임금과 신하가 힘써 행하는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요, 표문에 세공에 대하여 말하기를, '백성의 생활이 심히 어렵다.' 하였는데, 사자가 돌아갈 때에 짐이 다시 약속하여 세공을 깎아서 3년에 한 번씩 조회하고, 좋은 말 50필을 바치도록 하여 종산(鍾山 중국의 지명으로서, 말을 기르는 곳)의 남쪽 목야(牧野 중국의 지명으로서, 말을 기르는 곳)의 무리에 보태려 한다. 영원히 서로 보존하고 지키기로 하고, 금년 말부터 이 약속으로 증험하여서 뒤에 홍무(洪武) 24년 정월 초하루 아침에 이르러 진헌(進獻)하는 것을 처음과 같이 하도록 이르라. 짐의 말은 변경하지 않는다. 그쪽에서 그대로 하려는지 알 수 없다." 하였다.

○ 일본 패가대(?家臺)에서 사로잡힌 우리 백성 1 50명을 돌려보냈다.

○ 전의부정 이행(李行)과 대호군 진여의(陳汝義)를 탐라에 보냈다. 이때 조정에서 탐라의 말을 가져오려 하였고, 또 이 섬이 여러 번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이행 등을 보내어 그들의 자제를 불러들이게 하였더니, 명년 4월에 이르러야 성주(星主) 고신걸(高臣傑)의 아들 봉례(鳳禮)를 데리고 돌아왔다. 탐라가 귀순하여 정성을 바친 것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8월에 임견미가 파면되고, 이인임을 좌시중으로 삼았다. 봉가이를 더 봉하여 헌비로 삼았다.

○ 찬성사 윤진(尹珍)을 남경에 보내어 세공을 감하여 준 것을 사례하고, 밀직부사 이단(?)은 관복을 고치기를 청하니, 그대로 좇았다.

○ 중이 말을 타는 것을 금하고, 왕사와 국사는 나귀를 타도록 허여하였다.

9월에 문하평리 김주(金湊)와 동지밀직사사 이숭인을 남경에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고, 밀직부사 장방평(張方平)은 세공하는 말 50필을 바쳤다.

○ 겨울 10월에 우가 서해도에서 사냥하는데, 이인임ㆍ최영 등이 수행하였다. 우가 옹진에 이르러 산돼지를 쏘니, 산돼지가 우의 말에 달려들어 우가 놀라서 말에서 떨어졌다. 밀직부사 반복해(潘福海)가 말을 달려 곧장 앞으로 달려가 한 발로 산돼지를 쏘아 죽여 우가 화를 면하였다.

11월에 안익ㆍ유화 등이 남경에서 돌아와 황제의 명령을 전하기를, “비단 1만 필과 무명 4만 필로 말 5천 필을 사려고 한다." 하였다. 이에 전객령 곽해룡(郭海龍)을 보내어 아뢰기를, “소방(小邦)에 말이 많지 않고, 또 말의 키가 작으니, 어떻게 감히 값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명령을 받들어 마땅히 힘을 다하여 마련하겠습니다." 하였다.

12 1일 계미에 일식이 있었는데, 흐리고 구름이 껴서 보이지 않았다.

○ 황제가 지휘첨사 고가노(高家奴)와 서질(徐質)을 보내와서, "기해년에 도적을 피하여 동쪽으로 온 심양의 군사와 백성 4만여 호를 조사하여 찾아간다." 하였으니, 이것은 전원의 심양로 다루하치(達魯花赤) 교주(咬住)의 무고 때문이다. 또 말 3천 필을 살 것을 요청하고, 말 한 필에 무명 8필과 비단 2필을 주는데, 말을 요양(遼陽)까지 보내와서 값을 받아가게 하였다.

 

 

[D-001]왕전(?) : 공민왕의 이름. 그의 선조가 임금을 죽였다 함은 고려 태조가 궁예를 죽인 것을 말하는 것이니, 고려 개국 후 공민왕 23년까지가 4 67년이 된다.

[D-002]기해년 : 고려 공민왕 8, 원나라 순제(順帝) 지정(至正) 19년인데, 이때에 중국에서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우리나라에까지 그들이 침입하였다.

 

   

 

 

 

 

 고려사절요 제32   

 

 

 신우 3(辛禑三)

 

 

정묘 신우 13(1387), 대명 홍무 20 

 

 

○ 봄 정월에 우가 보원고(寶源庫)를 시켜 비단 1백 필을 바치게 하였다. 별감 판도총랑 이만실(李蔓實)이 창고에 물품이 없어 곧 바치지 못하자, 우가 노하여 곤장 2백대를 때렸다.

○ 광흥창(廣興倉)에 물품이 다 떨어졌다 하므로, 백관의 녹봉을 감하였다.

○ 왜적이 강화를 침략하니, 도통사 최영이 해풍에 나가 주둔하였다.

2월에 지밀직사 설장수(?長壽)를 남경에 보내 표문을 올려 교주가 무고한 것을 변명하였다. 이때 우가 동강에 있었는데, 담당관이 청하기를, “서울에 돌아가서 백관을 거느리고 표문을 절하고 보내야 됩니다." 하였다. 우시중 이성림이 아뢰기를, “표문을 절하여 보내는 예절은 신들이 대행하겠사오니, 전하께서 직접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우가 기뻐하였다.

○ 우가 동강에 있는 인임의 별장에서 여러 기생을 10여 기에 태워 거느리고 나팔을 불며 연쌍비(?雙飛)와 함께 나란히 말을 몰아 서울로 들어오는데, 길에서 사람의 삿갓을 빼앗아 과녁을 만들고 말을 달려 이것을 쏘았다. 우가 연쌍비와 함께 고삐를 나란히 하여 다야점(多也岾)에 가는 것을 매일같이 하였는데, 연쌍비의 의관이 우의 의관과 다르지 않아 길가는 사람들이 바라보고 구별을 못하였다.

○ 양부 이하 무당ㆍ술사에 이르기까지 차등에 따라 말을 내게 하여 진헌(進獻)에 충당하였다.

○ 판밀직사사 윤가관(尹可觀)이 졸하였다. 과거에 왜적이 모두 축산도(丑山島)를 경유하여 들어와 침략하였는데, 가관이 나가서 합포(合浦)를 지킬 때에 배에서 싸우는 군사를 주둔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이후로 왜적에 대한 걱정이 차차 없어졌다. 성품이 청렴하고 검소하여 추호도 탈취하지 않았으며, 음악과 기생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못쓰게 된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고, 둔전을 개간하여 군사의 식량을 넉넉하게 하였다. 돌아올 때에는 안장과 굴레가 깨져 삼으로 만든 노끈으로 그것을 기웠다.

○ 곽해룡이 남경에서 돌아왔는데, 예부에서 자문(咨文)을 보내어 이르기를,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말하노니, 짐이 일찍이 여러 제후국의 왕과 더불어 성의와 신용으로 서로 믿게 하기를 힘써 왔다. 고려에서 온 사신에게 말하기를, '비단과 무명을 가지고 말 5천 필을 사겠다.' 하였더니, 지금 사자가 와서 말하기를, '나라가 작고 물산이 적어 물건을 감히 바치지 못하고 재화도 감히 받을 수 없사오니, 거저 5천 필을 바치겠다.' 하였다. 아아, 고려가 짐의 지극한 뜻을 인식하지 못하는구나. 짐이 전대를 모방하여 사람을 핍박하는 줄로 생각하는 모양이나, 이러한 짓을 짐은 하지 않는다. 예부에서는 빨리 국왕에게 통보하여, 그전에 말한 대로 물건을 가지고 서로 팔고 사되, 4필에 무명 8, 비단 2필로 정하여 관가나 민간을 구별하지 말고 영구히 교역하는 방법을 삼으라." 하였다.

3월에 우가 서해도에서 사냥하였는데, 진헌하는 말 40필을 가지고 갔다.

○ 정축일에 해에 검은 점이 있었다.

○ 여름 4월에 서질이 와서 말을 바치길 독촉하였다. 이에 나누어 운반하여 서로 연이어 요동에 갔다. 도사(都司)가 검사하여 뽑는데, 3등으로 나누어 상등에는 비단 2필과 무명 8필을 주고, 중등에는 비단 1필과 무명 6필을 주며, 하등에는 비단 1필과 무명 4필을 주었다.

5월에 요동에서 운송하는 배가 서해의 여러 섬에 표류하여 정박하였다. 이때 어떤 사람이 선의문(宣義門)으로 달려 들어와 외치기를, “중국의 수군이 모두 상륙하여 경성을 습격하려고 벌써 성문에 이르렀다." 하니, 도성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

6월에 백관의 관복을 정하였다. 1품에서 9품까지 모두 사모와 단령을 입고, 그 품대(品帶)는 차등을 두었다. 이 의논을 주도한 사람은 정몽주ㆍ하륜ㆍ염정수ㆍ강회백ㆍ이숭인 등 이었다. 백관이 이것을 입고 서질에게 보이니, 질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고려가 다시 중국의 관대를 착용할 줄은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천자께서 이 사실을 들으시면 어찌 가상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우와 환관 및 총애받는 신하들만 입지 않았다. 이옥(李沃)은 좌상시로 호복(胡服)을 입고 매를 부르며, 우를 따라 달리고 쏘았다.

○ 윤달에 찬성사 장자온을 남경에 보내어 관복을 고치도록 허여한 것을 사례하였다.

○ 밀직부사 윤취를 남경에 보내어 천추절을 하례하였다.

○ 가을 8월에 이인임이 늙고 병들었으므로 은퇴하니, 이성림을 좌시중으로, 반익순(潘益淳)을 우시중으로, 최천검(崔天儉)을 천양부원군으로 삼고, 반복해에게는 왕씨 성을 주어 아들로 삼아, 발탁하여 문하찬성사로 삼고, 신아(申雅)와 왕흥(王興)을 동지밀직사사로, 오충좌(吳忠佐)를 밀직부사로, 노귀산(盧龜山)을 우부대언으로 삼았다. 익순은 복해의 아비로서 문하평리를 거쳐 시중으로 뛰어올라 제수되었다. 복해는 이미 왕의 아들이 되었으므로, 부자간에 서로 피하지 않았다. 귀산은 나이 20세도 못 되었으므로, 국인들이 모두 맞지 않는다 하였다. 이때에 환관과 장사꾼과 고기잡고 사냥하는 무리들로 벼슬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 우가 호곶에 가서 매를 부르고 개를 끌며, 피리와 나팔을 불고 길게 노래하며 느릿느릿 춤을 추었는데, 앞뒤로 인도하고 따르는 자가 길에 끊이지 않았다.

○ 정지(鄭地)가 글을 올려 동쪽(일본)을 치기를 자청하여 말하기를, “왜국은 온 나라가 도적이 아니고, 그 나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백성들이 대마와 일기(一岐) 두 섬을 나누어 점령하였는데, 합포(合浦)와 가깝기 때문에 무시로 들어와 도둑질하는 것이니, 만일 죄를 성토하고 크게 군사를 일으켜 그 소굴을 전복시킨다면, 변방의 근심이 영구히 없어질 것입니다. 또 지금의 수군은 신사년 동정할 때 배에 익숙하지 못한 몽고병이나 한병(漢兵)과는 비교가 안 되오니, 순풍을 만나서 가면, 두 섬을 한꺼번에 섬멸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 우가 6도의 광대를 불러 온갖 유희를 동강에서 펼치고, 국고를 털어 잡된 놀이에 제공하였는데, 재상과 대간이 이를 간하여 말리지 못하고, 기이한 재주를 부려서 뜻을 맞추는 자까지 있었다. 하루는 우가 물 속에서 발가벚고 여러 기생들과 말처럼 교접하였다. 하늘에서 크게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쏟아졌다.

9월에 강릉도 원수 이을진(李乙珍)을 회덕현에 귀양보냈다. 을진이 양구현 사람 양부(楊富)의 딸을 간음하려다가 이루지 못하자, 드디어 부의 아내를 강간하였다. 그 당시 부가 죽은 지 백일이 안 되었다. 사헌부에서 을진을 탄핵하고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고, 곤장을 때려 귀양보냈다.

○ 요동에서 와서 둔전을 가는 소 5 7백 마리를 사 갔다.

○ 우가 환관 수녕부윤 조순(曹恂)을 순군진무상호군으로 삼았다.

○ 지문하부사 장방평(張方平)을 남경에 보내어 나하추가 항복하여 귀순한 것을 하례하였다.

○ 겨울 10월에 광주(光州) 사람 노준공(盧俊恭)이 시묘를 살고 3년 복을 입었으므로, 그 마을을 정표하였다.

○ 우가 기악을 화원에서 사열하였는데, 풍악이 뜻에 맞지 아니하므로, 2 50필을 징수하였다.

○ 문하평리 이구(李玖)와 지밀직 이종덕(李種德)을 남경에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였다.

○ 왜적이 임주(林州)ㆍ한주(韓州)ㆍ서주(西州) 세 고을과 홍산현(鴻山縣)을 침략하니, 도순문사 왕승보가 싸워서 패하였다.

○ 우가 정비(定妃)의 궁에 가서 그 아우 안숙로(安淑老)의 어린 딸을 보고, 유사에게 명하여 가례에 쓸 폐백으로 베 7 5백 필과 백금 1 5백 냥을 준비하고, 다른 물건도 여기에 맞추게 하였다. 이때 우가 정비의 궁에 하루에도 두세 번씩 가기 때문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정비가 남의 조소를 가리고자 하여, 그 질녀를 보인 것이다." 하였다.

11월에 밀직부사 김상(金賞)을 전라도 조전원수로 삼았다.

○ 우가 최영과 총애하는 신하 왕복해 등을 거느리고 해풍에서 사냥하였다.

○ 개인 토지의 도조 절반을 거두어 군량을 준비하게 명령하고, 또 여러 도의 안렴사를 시켜 장수의 재능과 수령의 성적을 조사하게 하였다.

○ 왜적이 광주(光州)를 침략하여 전 서운정(書雲正) 김언경(金彦卿)의 처 김씨를 잡아 가서 욕보이려하니, 김씨가 땅에 엎어져 적을 꾸짖으며 크게 고함치기를, “너희들은 곧 나를 죽여라. 의리상 욕은 당하지 않겠다." 하여, 드디어 해를 당하였다.

○ 장방평ㆍ이구ㆍ이종덕이 요동에 이르러 중국 국경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방평의 무리가 가서 첨수참(甛水站)에 이르니, 도사가 천호 왕성(王成)으로 하여금 황제의 명령을 적어 보이기를, “지금 이후로 고려국 사신으로 오는 자는 1백 리 밖에서 그대로 돌려보내고 국경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또 남경으로 보내지도 말 것이다. 여러 가지 일을 가르쳐 주지 말고, 시기에 따라서 거행하는 예절이 있을 때도 반드시 오게 하지 말라. 그 나라의 집정하는 신하는 경박하고 간사하며 속이는 무리로서 믿을 수가 없다. 왕래를 허여한 이후로 지금까지 여러 가지로 약속한 것이 지나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하여 한 번도 성의로 서로 믿게 하지 못하였으니, 절교하고 왕래하지 못하게 하라. 만일 우리나라에 오기를 구하고자 하거든, 칙사록(勅使錄)을 보여서 돌려 보내라." 하였다. 방평의 무리가 드디어 돌아오니, 반익순이 달려가 최영에게 고하기를, “공은 공민왕이 의지하고 중하게 여겼으며, 삼한이 촉망하는 사람이다. 지금 국가가 위태하게 되었는데, 어찌하여 힘껏 도모하지 않는가." 하였다.

영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집정한 사람이 이익을 좋아하고 악을 쌓아서 스스로 화와 패란을 초래하니, 늙은 내가 장차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영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집정한 사람이 이익을 좋아하고 악을 쌓아서 스스로 화와 패란을 초래하니, 늦은 내가 장차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이성림이 이구에게 말하기를, “공은 대신으로 사명을 받든 보잘것없이 녹록한 사람으로 한갖 나라의 녹만 허비할 뿐이다." 하니, 구가 한참 쳐다보고 대답하지 않았다.

○ 우가 내승으로 하여금 말 3백 필을 충주에서 기르게 하였다. 내수(?)들이 이것을 이유로 침탈하고 횡포하여 온 고을이 괴롭게 여겼다.

12월에 영원군(永原君) 정몽주를 남경에 보내 조빙을 통하게 해달라고 청하려 했으나, 요동에 이르러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 왜적이 정읍현을 침략하여 전의정 경덕의(景德宜)의 처 안씨가 사는 마을에 들어가니, 안씨가 두 아들과 세 여종을 끌고 후원 움 속에 숨었다. 적이 찾아내어 난행을 하려 하자, 안씨가 꾸짖고 항거하니, 적이 머리끝을 부여잡고 칼을 뽑아 위협하였다. 안씨가 온 힘을 다해 꾸짖기를, “죽을지언정 네놈들의 말은 듣지 않겠다." 하였다. 적들이 노하여 그를 죽이고, 아들한 명과 여종 한 명을 잡아갔다. 또 중랑장 이득인(李得仁)의 처 이씨를 붙잡아서 욕보이려 하니, 이씨가 죽기로 대항하였으므로 적들이 드디어 죽였다.

○ 우가 도당에 이르기를, “모든 창고와 궁사(宮司)의 전민(田民)을 빼앗아 차지한 자는 그 이름을 자세히 적어 아뢰어라." 하니, 도당이 스스로 혐의가 있어 드디어 덮어두고 실행하지 않았다.

○ 우가, 신아(申雅)가 남의 밭을 빼앗았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그 아들 효온(孝溫)과 사위 전 삼사좌윤 박보령(朴保寧)을 가두라고 명령하였다. 효온이 도망가니, 순군에 명령하여 신아의 집을 포위하고 수색하여 잡아서 옥에 가두었다가 모두 곤장을 때려 각산(角山)에 귀양보냈다.

○ 전 밀직부사 조반(?)이 염흥방의 집 종 이광(李光)을 백주(白州)에서 베었다. 이전에 이광이 조반의 토지를 빼앗았다. 반이 흥방에게 애걸하여, 흥방이 이를 돌려주었으나, 광이 또 그 밭을 빼앗고 능욕하였다. 반이 광에게 가서 애걸하니, 광이 더욱 포학을 부렸다. 반이 분을 견디지 못하여 수십 기로 광을 포위하여 베고 그 집을 불지르고, 서울로 달려 들어와 흥방에게 고하려 하였다. 흥방이 듣고 크게 노하여, 반이 반란을 꾀한다고 무고하고, 순군을 시켜 반의 어머니와 아내를 잡고, 4백여 기를 백주에 보내어 반을 잡게 하였다. 기병이 벽란도(碧瀾渡)에 이르자, 뱃사람들이 말하기를, “반이 다섯 기병을 데리고 이미 서울로 달려 들어갔다." 하였다.

출처 : ▒ 한 산 草 堂 ▒
글쓴이 : 천하한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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