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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려사절요 제30권 신우1

장안봉(微山) 2013. 5. 28. 23:00

고려사절요 제30   

 

 

 신우 1(辛禑一)

 

 

신우 1

 

 

어렸을 때의 이름은 모니노(牟尼奴)인데, 신돈(辛旽)의 비첩(婢妾) 반야(般若) 소생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반야가 낳은 아이는 죽고 다른 아이를 훔쳐다 길렀는데, 공민왕이 자기 아들이라고 일컬었다."고 하였다. 왕이 훙()하니 이인임(李仁任)이 세워서 임금으로 삼았는데, 공양왕(恭讓王)이 즉위하자 그를 죽였다. 참람하게 왕위를 차지한 기간이 14년이다.

 

 

   

 

 

 

 

 고려사절요 제30   

 

 

 신우 1(辛禑一)

 

 

을묘 신우 원년(1375), 대명 홍무 8 

 

 

○ 봄 정월에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최원(崔源)을 남경에 보내어 왕의 상사(喪事)를 고하고, 시호와 왕위의 계승을 청하였다. 김의(金義)가 원 나라로 달아난 뒤로부터는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명 나라에 사신을 교통하지 못하였다. 전교령(典校令) 박상충(朴尙衷)과 성균사예(成均司藝) 정도전(鄭道傳)이 재상에게 말하기를, “빨리 사신을 보내어 상사를 알려야 합니다." 하니, 이인임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꺼리니 갈 사람이 누구인가." 하였다. 상충 등이 최원에게 말하기를, “왕이 시해를 당하였는데, 상사를 알리지 않으면 황제가 반드시 의심할 것이다. 만일 죄를 묻는 상황이 있다면 온 나라가 화를 받을 것이다. 재상이 생각을 하지 않으니, 그대가 사직을 위하여 갈 수 있는가." 하였다. 최원이 말하기를, “사직을 편안하게 하는 일이라면 어찌 한 번 죽는 것을 아끼겠는가." 하였다. 상충 등이 그 말을 인임에게 고하니, 그대로 따랐다.

○ 나하추(納哈出)가 사신을 보내어 우()가 왕위를 계승한 것을 물었다. 이때에 북원에서, 현릉(玄陵)이 아들이 없다 하여 심왕(瀋王) ()의 손자 탈탈불화(脫脫不花)를 봉하여 왕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 물음이 있었다.

2월에 우()가 교서를 내려 편민사의(便民事宜 백성의 생활을 편리하게 할 적당한 사항)를 반포하였다.

○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나흥유(羅興儒)가 글을 올려 일본과 화친하기를 청하므로, 흥유를 통신사(通信使)로 삼아서 보냈다.

3월에 판사(判事) 손천용(孫天用)을 남경에 보내어 말 1백 필을 바치게 하였다.

○ 왜적이 경양현(慶陽縣)을 침범하니 양광도(楊廣道) 도순문사(都巡問使) 한방언(韓邦彦)이 적과 싸워 패하였다.

○ 대사헌 송천봉(宋天逢) 등이 상소하기를, “환관 윤충좌(尹忠左)가 일찍이 선왕 앞에서 화를 내어 칼을 뽑아서 제 손으로 제 머리털를 잘랐고, 승하하신 뒤에는 귀가 먹었다고 거짓으로 핑계하고 손을 끼고 앉아서 사태를 관망하였으니, 그 마음이 헤아릴 수 없이 불충하고 불경하여 그 죄가 베어도 용서할 수 없거늘, 또 권세를 마음대로 부려 뇌물을 받아서 관직을 제수하며, 토지를 널리 점유하여 나라를 그르치고 백성을 해치니, 그 직첩을 회수하고 가산을 적몰하여 뒷사람을 경계하소서." 하였다. 간관이 또 상소하기를, “근자에 헌사(憲司)가 아뢰어 환관의 녹봉을 없애기를 청하였고, 또 전 상호군(上護軍) 이미충(李美忠), 전 전공총랑(典工摠郞) 서능준(徐陵俊)이 궁내 창고의 물건을 도적질하여 쓴 것을 탄핵했는데, 전하께서 윤허하지 않으니 중앙과 지방이 실망하고 있습니다. 환관 윤충좌는 사특하고 흉험하여 은밀히 권력을 희롱해서 김사행(金師幸)ㆍ윤상(尹祥)과 함께 악한 짓을 같이 하여 서로 도왔는데, 김사행과 윤상은 이미 귀양갔으나 충좌는 홀로 벼슬을 받았고, 또 교활한 환관 황중길(黃中吉)과 부자간을 맺어서 전하의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며 총명을 가리니, 마땅히 헌사의 말을 따라 4명의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였다. 명하여 충좌ㆍ중길ㆍ미충ㆍ능준의 벼슬을 삭탈하고, 미충과 능준을 옥에 가두었다.

○ 여름 4월에 이인임이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효사관(孝思觀)에 나아가 태조의 혼령께 맹세하기를, “본국의 무뢰배들이 심왕(瀋王)의 손자를 끼고 북쪽 변방에 와서 왕위를 엿보니, 우리 동맹하는 신하들은 힘을 다하여 막아서 새 임금을 돕고 받들겠나이다. 이 맹세에 변함이 있으면, 천지와 종묘 사직이 반드시 은밀한 주벌을 내릴 것입니다." 하였다.

○ 윤충좌를 먼 땅에 귀양보냈다.

○ 판사 박사경(朴思敬)이 북원에서 돌아와 태후께 아뢰기를, “나하추의 말에, '너희 나라 재상이 김의를 보내어 왕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다고 아뢰고, 심왕을 받들어 임금을 삼기를 원하기에, 황제께서 심왕을 봉하여 너희 임금으로 삼은 것이다. 만일 전 왕에게 아들이 있다면 조정에서 반드시 심왕을 보내지 않겠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태후가 인임을 불러 이르기를, “재상이 김의를 원 나라에 보냈다는 말은 내가 들은 지가 오래다. 경들은 알지 못하는가." 하였다. 이전에 어떤 사람이 이인임에게 말하기를, “옛날부터 왕이 시해를 당하면 재상이 먼저 그 죄를 받는 법인데, 명 나라 황제가 만일 선왕의 변고를 들으면 반드시 문죄하는 군사를 일으킬 것이니, 공이 반드시 면하지 못할 것이다. 원 나라와 화친하는 편이 낫다." 하였다. 인임이 그렇게 여겨서 찬성사 안사기(安師琦)를 보내어 거짓으로 채빈(蔡斌) 등을 전송한다고 말하고, 비밀리에 김의(金義)에게 지시하여 채빈 등을 죽여 비밀을 누설하지 못하게 하였다. 김의의 수행원이 돌아오니 인임과 사기가 후하게 대접하였다. 박상충(朴尙衷)이 상소하기를, “김의가 명 나라 사신을 죽인 죄는 당연히 문책하여야 하는데, 재상이 김의의 수행원을 매우 후하게 대접하니, 이것은 사기가 김의를 사주하여 사신을 죽인 형적이 이미 드러난 것입니다. 이제 만일 그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사직의 화는 이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하였다. 그 상소를 오래 내려 보내지 않았다가 이때에 와서 태후가 그 상소를 도당(都堂)에 내리고, 또 안사기를 옥에 가두게 하였다. 사기가 남의 집으로 도망하여 들어가서 칼을 뽑아 목을 찔렀다. 이어서 베어 죽이고 저자 거리에 목을 매달았다. 인임이 말하기를, “김의를 원 나라에 보낸 것은, 찬성사 강순룡(康舜龍), 지밀직(知密直) 조희고(趙希古), 동지밀직 성대용(成大庸) 등이 한 짓이다." 하여, 모두 먼 땅으로 귀양보냈다. 대개 강순룡 등이 일찍이 원 나라에서 벼슬하였기 때문이었다.

○ 찬성사 지윤(池奫)을 서북면 도원수로, 문하평리 유연(柳淵)을 동북면 도원수로 삼아서 여러 도의 군사를 징집하여 북원을 방비하게 하였는데, 조금 뒤에 변방이 평안하다는 보고를 듣고 중지하였다.

○ 이인임이 백관과 함께 연명으로 글을 써서 북원의 중서성에 바치려 하였는데, 그 글에 말하기를, “백안첩목아왕(伯顔帖木兒王 공민왕)의 유명(遺命)으로 원자 우()가 왕위를 이어받고, 판밀직(判密直) 김서(?)를 보내어 부음을 고하였는데, 이제 와서 탈탈불화(脫脫不花)가 부질없이 다른 마음을 먹고 왕위의 계승을 다투고자 하니 금지하여 주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좌대언(左代言) 임박(林樸), 전교령 박상충, 전의부령(典儀副令) 정도전(鄭道傳), “선왕께서 계책을 결정하여 남쪽의 명 나라를 섬겼으니, 이제 북쪽의 원 나라를 섬기는 것은 부당하다." 하고, 서명하지 않았다.

○ 충정왕(忠定王)을 태묘에 부(?)하였다.

5월에 왜인 등경광(藤經光)이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다. 순천(順天)ㆍ연기(?) 등지에 두고, 관아에서 양식을 공급하였다.

○ 판안동 부사(判安東府事) 이보림(李寶林)을 치적으로 발탁하여 대사헌으로 삼았다.

○ 북원이 사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백안첩목아왕[공민왕]이 우리를 배반하고 명 나라에 붙었기 때문에 너희 나라의 임금을 죽인 죄를 용서한다." 하였다. 이때에 이인임과 지윤이 원 나라 사신을 맞고자 하니, 삼사좌윤(三司左尹) 김구용(金九容), 전리총랑(典理摠郞) 이숭인(李崇仁), 전의부령 정도전, 예문응교(藝文應敎) 권근(權近)이 도당에 글을 올리기를, “만일 원 나라 사신을 영접한다면 온 나라 신민이 모두 난신적자의 죄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훗날 무슨 면목으로 현릉(玄陵)을 지하에서 뵈오려는가." 하였다. 경복흥ㆍ이인임이 그 글을 물리쳐 받지 않고, 드디어 정도전으로 하여금 원 나라 사신을 맞게 하였다. 도전이 복흥의 집에 가서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사신의 목을 베어 가지고 올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명 나라에 묶어 보내겠다." 하여, 언사가 매우 공손하지 못하였고, 또 태후께 아뢰어, “사신을 맞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니, 복흥과 인임이 노하여 도전을 회진(會津)에 귀양보냈다.

○ 성균대사성 정몽주(鄭夢周) 등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바다 밖 한쪽에 있어서, 우리 태조가 당 나라 말기에 일어나면서부터 예로써 중국을 섬겼는데, 그 섬기는 대상은 오직 천하의 의로운 군주만을 보고 따를 뿐이었습니다. 지난번에 원씨(元氏)가 자초하여 북으로 파천되고 명 나라가 일어나니, 우리 승하하신 왕께서 분명히 천명을 알고 표문을 받들어 '신하'라 일컬었습니다. 황제께서 가상하게 여겨 왕의 작위로 봉하고, 하사품과 바치는 물품이 서로 연속되었는데, 금상이 즉위하던 초기에 적신 김의가 천사(天使 명 나라 사신)를 전송하다가 중도에서 제 마음대로 죽이고 반역하여, 북원으로 들어가서 원씨의 남은 무리와 함께 심왕을 들여보내려고 꾀하였으니, 패역이 심한데도 국가에서 김의의 죄를 묻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재상 김서를 시켜 북방에 조공을 바쳤습니다. 오계남(吳季男)은 국경을 지키는 신하로서 제 마음대로 정료위(定遼衛)의 세사람을 죽였고, 장자온(張子溫) 등은 김의의 일행인데 정료위까지 가지도 않고 공연하게 환국하였으나 내버려 두고 불문에 부쳤습니다. 이제 북쪽 사신이 와서도 대신을 보내어 국경에서 영접하기를, '북원의 노여움을 격발시키지 않고 군사를 늦추기 위함이다.' 하였습니다. 원씨가 나라를 잃고 멀리 와서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은 한 번 배불리 먹어서 잠깐 동안이라도 생명을 연장하려 하는 것입니다. 명목은 왕(심왕)을 들여보내는 것이나 실상은 자신의 이익을 위함이니 거절하면 우리의 강함을 보이는 것이요, 섬기면 도리어 그 뜻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으로 군사를 늦추려 하는 것이 실상은 불러들이는 것이 될 것입니다. 삼가 듣건대, 조서를 보내 우리에게 대역의 죄를 씌우고 이어서 용서하는 체하였는데, 우리가 본래 죄가 없는데 무엇을 용서하는 것입니까. 국가에서 만일 원 나라 사신을 잘 대접하여 보낸다면, 이것은 온 나라 신하와 백성이 사실도 없이 스스로 대역의 이름을 뒤집어 쓰는 것이니, 다른 나라에 소문이 들리게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신하된 자로서 참을 수 있는 일입니까. 또 하물며 명 나라 조정에서 처음에 김의의 일을 듣고 이미 우리를 의심하였을 것인데, 또 원씨와 서로 통하고 김의의 죄를 묻지도 않는다는 것을 들으면 반드시 의심없이 우리가 사신을 죽여 적에게 주었다고 여길 것입니다. 만일 죄를 묻는 군사를 일으켜 바다와 육지로 동시에 진격해 온다면, 장차 무슨 말로 대답할 것입니까. 작은 적의 군사를 늦추려 하다가, 실상은 천하(명 나라)의 군사를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사리가 대단히 분명하여 깨닫기 쉬운 것인데도, 조정에서 말하지 못하는 것같이 하는 것은 그 까닭을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전날에 여러 소인들이 일으킨 변 때문에, 그 당시의 재상으로 있던 이가 명 나라의 문책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실상은 김의와 공모해서 명 나라를 끊고자 한 것입니다. 안사기가 실정이 드러나니 스스로 목을 찌른 것이 그것입니다. 사기가 죽은 뒤에 빨리 계책을 정하여 여러 사람의 분노를 쾌하게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인데, 이제까지 아무 소문도 없으니 인심이 물끓듯 하여 다른 변이 일어날까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주상께서 결단을 내려 원 나라의 사신을 잡고 원 나라의 조서를 거두며 오계남ㆍ장자온과 김의가 데리고 갔던 자를 묶어서 남경에 보내면, 우리의 애매한 죄가 변명하지 않아도 저절로 밝혀질 것입니다. 그리고 정료위와 약속하여 군사를 양성해서 시기를 보아 북쪽으로 향한다고 소리치면, 원씨의 남은 무리가 자취를 거두어 멀리 도망가 국가의 무궁한 복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박상충도 글을 올려 말하였다.

○ 찬성사 황상(黃裳)을 서북면 도체찰사(西北面都體察使), 좌부대언 성석린(成石?)을 체찰사로 삼아서 강계(江界)에 가서 원 나라 사신을 위로하여 돌려보냈다.

○ 대사헌(大司憲) 이보림(李寶林)이 이인임의 뜻에 아부하여, 임박(林樸)이 중서성에 바치는 글에 서명하지 않았다고 논핵하고, 평민으로 폐하여 길안현(吉安縣)에 귀양보냈다.

○ 석기(釋器)가 안협(安峽) 백성 백언린(白彦麟)의 집에 숨어 있으므로, 찬성사 목인길(睦仁吉), 밀직부사 조인벽(趙仁璧)을 보내어 잡아 죽이고, 언린은 자수하였기 때문에 곤장만 때리고, 전 판사 정양보(鄭良輔)는 알고도 고하지 않았다고 죽였다. 그제서야 평양에서 죽은 것이 석기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 판전의시사(判典義寺事) 전보(全甫)를 남경에 보내어 말을 바치게 하였다.

6월에 왜인 공창(公昌)의 무리 16명이 와서 항복하였다.

○ 간관 이첨(李詹)ㆍ전백영(全伯英)이 상소하기를, “시중 이인임이 몰래 김의와 공모하여 명 나라 사신을 죽이고도 다행히 죄를 면하였으니, 이 점을 사람들이 이를 갈고 마음 아파합니다. 오계남은 제 마음대로 정료위의 사람을 죽였고, 장자온은 김의가 사신을 죽인 일을 정료위에 고하지 않았으니 죄를 마땅히 국문하여야 하는데, 인임이 내버려 두고 묻지 않았으니 첫 번째 죄요, 근자에 찬성사 지윤(池奫)이 외직으로 서북면(西北面)을 맡아 지킬 적에 김의의 편지를 얻고도 전하께 상달하지 않고 비밀히 인임에게 전하였으며, 전하께서 여러 번 찾은 연후에야 아뢰고 핑계하기를, '백성들의 마음을 의혹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하였으니 두 번째 죄요, 오랑캐의 국서가 왔을 때에 지윤이 그 편지를 등사하여 중요한 말은 삭제하고 전하께 바치며 그 원본은 인임에게 주었는데, 인임이 즉시 아뢰지 않았으니 세 번째 죄요, 백관과 함께 맹세하여 오로지 전하를 섬기는 뜻을 보이면서도 오랑캐와 통하여 심왕(瀋王)에게 공을 세워 훗날의 화를 면하려 하였으니, 반복하여 간사한 것이 네 번째 죄입니다. 두 사람이 입술과 이()같이 결탁하고 변란을 선동하여 장래의 화를 헤아릴 수 없으니 인임과 지윤의 목을 베고, 또 계남과 자온의 죄를 다스려서 기강을 진작시키소서." 하였다. 글이 올라가니, 이첨을 지춘주사(知春州事), 전백영을 지영주사(知榮州事)로 폄직하여 내보냈다.

○ 가을 7 1일 기미에 일식이 있었다.

○ 응양군 상호군(鷹揚軍上護軍) 우인열(禹仁烈), 친종호군(親從護軍) 한이(韓理)가 인임의 뜻에 아부하여 글을 올려 아뢰기를, “간관이 재상을 논핵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니 명백히 판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이첨과 전백영을 옥에 가두고, 최영(崔瑩)과 지윤을 시켜 국문하자 진술하는 말이 정당문학 전녹생(田祿生)과 박상충에게 관련되었다. 최영이 매우 참혹하게 녹생과 상충을 국문하였다. 인임이 말하기를, “이 무리들을 죽일 것은 없다." 하고, 귀양보냈는데, 녹생과 상충은 모두 길에서 죽었다. 이첨ㆍ전백영ㆍ방순(方旬)ㆍ민중행(閔中行)ㆍ박상진(朴尙眞)은 곤장을 때려 귀양보내고, 또 정몽주ㆍ김구용(金九容)ㆍ이숭인ㆍ임효선(林孝先)ㆍ염정수(廉廷秀)ㆍ염흥방(廉興邦)ㆍ박형(朴形)ㆍ정사도(鄭思道)ㆍ이성림(李成林)ㆍ윤호(尹虎)ㆍ최을의(崔乙義)ㆍ조문신(趙文信) 등이 자기(이인임)를 해하려고 모의하였다 하여 모두 귀양보냈다. 상충은 강개하고 큰 뜻이 있고, 널리 배워서 글을 잘 지었으며, 겸하여 성명학(星命學)에 통달하였고, 그 행실과 벼슬에 있어서 반드시 도리대로 하여 의롭지 못한 부귀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다.

○ 전라도 원수 김선치(金先致)에게 등경광(藤經光)을 꾀어서 죽이라고 하였다. 선치가 크게 술과 음식을 갖추고 먹이는 기회를 타서 죽이려 하였는데, 모의가 누설되어 등경광이 부하를 거느리고 바다에 떠서 도망가고, 겨우 3명만을 잡아 죽였다. 선치가 죄를 두려워해서 70여 급을 베었다고 속여 보고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수졸(戍卒)에 편입되어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왜적이 주ㆍ군을 침범하면서도 사람은 죽이지 않았는데, 이 뒤로부터 노여움을 격발하여 매양 들어와서 침범할 때마다 부녀자와 아이들조차도 모두 죽이니, 전라도와 양광도의 바닷가의 고을들이 텅 비게 되었다.

8월에 왜적이 낙안(樂安)ㆍ보성(寶城)에 침범하였다.

○ 도성 안의 오부(五部)의 호수(戶數)를 개정하여, 20칸 이상을 1호로 삼아 군정(軍丁) 1명을 내고, 칸수가 적으면 너덧 집을 아울러 1호로 하였다.

○ 경상도 부원수 윤승순(尹承順)이 왜적 20급을 베었다.

○ 서운관(書雲觀)에서 아뢰기를, “근래에 재변이 여러 번 일어났으니, 왕의 거처를 옮겨 재앙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였다. ()가 도읍 옮기기를 의논하니, 판삼사사(判三司事) 최영 등의 의논하기를, “큰 연고도 없이 지금 갑자기 옛 도읍을 버리면 인심이 소란해질 것이니 경솔히 할 수 없습니다." 하여, 그만두었다.

○ 이성 만호(泥城萬戶)가 보고하기를, “심왕(瀋王) 모자(母子)가 반역자 김의(金義)와 진봉사(進奉使) 김서(?)의 무리를 거느리고 이미 신주(信州)에 도착하였다." 하였다. 이에 중앙과 지방이 두려워하여 지문하사 임견미(林堅味)를 서경 상원수(西京上元帥)로 삼고, 밀직부사 경보(慶補)에게 도순문사를 겸임시키고, 문하평리 양백연(楊伯淵)을 안주(安州) 상원수로, 동지밀직(同知密直) 이원계(李元桂)를 원수로, 찬성사 지윤을 서북면 도체찰사로, 밀직사 나세(羅世)를 서해도(西海道) 상원수로, 밀직부사 박보로(朴普老)를 부원수 겸 도체찰사로, 밀직부사 조인벽(趙仁璧)을 동북면 원수로, 문하평리 변안열(邊安烈)을 부원수로 삼아서 여러 도의 군사를 징발하였다.

9월에 김의의 어미와 아내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죽이려 하니,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김의가 비록 반역하였으나 부녀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죽이지는 마소서." 하였다. 이에 상주(尙州) 관비(官婢)로 적몰하였다.

○ 이성(泥城) 원수 최공철(崔公哲)의 휘하 2백 명이 반란을 일으켜 군사와 백성을 죽이고,

강을 건너 도망갔다.

○ 왜적의 선박이 덕적(德積)ㆍ자연(紫燕) 두 섬에 크게 모여들었다. 그때에 장수와 군사가 모두 북쪽 정벌에 나아갔기에, 이에 각 방리(坊里)와 여러 능호(陵戶)의 군사를 징발하고, 또 양광ㆍ전라ㆍ경상 여러 도의 군사를 징발해서 우리 태조(太祖 이성계)와 판삼사사 최영에게 거느리게 하여, 동강과 서강에서 군사의 위엄을 보이면서 방비하였다.

○ 여러 절의 주지승으로부터 군마 한 필씩을 받고, 또 여러 절의 토지세[田租]를 취하여 군비에 충당하였다.

○ 왜적이 영주(寧州)ㆍ목주(木州) 두 고을에 침범하였다. 최영이 가서 치기를 청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 왜적이 서주(瑞州)ㆍ결성(結成)에 침범하였다.

○ 겨울 10월에 요()ㆍ심()의 초적(草賊) 오연(吳連)의 무리 1백여 명이 안주를 침범하니, 상원수 양백연이 오연 등 40여 명을 잡아 베었다. 이때에 압록강 북쪽에 여러 번 적들의 변란이 있자, 국가에서 김의가 오랑캐 군사를 이끌고 오는 것으로 의심하였는데, 이때에야 초적인 것을 알았다. 여러 군사가 오래 머물러 군량의 공급이 계속되지 못하므로 백성에게서 양식을 취하니, 백성들이 매우 괴롭게 여겼다. 안주 이북이 더욱 그 고통을 받았다.

○ 팔천군(八川君) 정인(?)이 졸하였다. 정인은 음률에 정통하고 또 예()를 알기로 이름이 나서, 예관(禮官)이나 후배들이 모두 가서 예를 배웠다.

○ 우()가 정사를 맡으니 환관 김현(金玄)이 옆에서 모시면서 행동이 거만하여 근신이 일을 아뢰면 우가 미처 말하기 전에 김현이 먼저 제 마음대로 결단하였다. 김현이 겉으로 부지런하고 공경하는 체하며 교묘하게 임금의 뜻을 맞추기 때문에, ()와 태후(太后)의 신임을 받아서 국가의 중요한 정무를 맡아 궁중에서 권력을 부려 여자들의 청탁이 공공연하게 행해졌다.

○ 북쪽을 정벌하던 여러 원수를 모두 소환하였다.

○ 사헌부에서 양광도 안무사(安撫使) 정비(鄭庇), 순문사 한방언(韓邦彦)이 왜적을 막지 못한 것을 논핵하여, 수졸(戍卒)에 편입시켜 정배하였다.

○ 천변이 여러 번 있기 때문에 장형(杖刑)에 해당한 죄인 이하를 석방하고, 또 양강(兩江)에 있는 여러 도의 군사를 돌려보냈다.

○ 사헌부가 차자방(箚子房)을 혁파하고 문관ㆍ무관의 관리 선발과 임용을 이부ㆍ병부에 나누어 예속시키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으나, 실행하지는 못하였다.

○ 하윤원(河允源)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11월에 양광도 안무사 박인계(朴仁桂)가 왜선 2척을 잡아서 섬멸하였다.

○ 제주 사람 차현유(車玄有) 등이 관사를 불사르고 안무사 임완(林完), 목사 박윤청(朴允淸), 마축사(馬畜使) 김계생(金桂生) 등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니, 그 고을 사람 문신보(文臣輔)ㆍ고실개(高實開) 등이 군사를 일으켜 모두 베었다.

○ 왜적이 김해부(金海府)를 침범하여 사람과 짐승을 죽이고 노략질하며 관사를 불살랐다. 도순문사 조민수(曹敏修)가 적과 싸워 패전하고, 대구현(大丘縣)에서 또 패전하여 죽은 군사가 매우 많았다. 왜선 수십 척이 또 김해로부터 황산강(黃山江)을 거슬러 올라 밀성(密城)을 침범하려 하므로, 민수가 요격하여 수십 급()을 베었다. ()가 궁중에서 왕명을 전하는 내시를 보내어 옷과 술과 말을 주니, 민수가 전()을 올려 사례하였다. 좌정언 김자수(金子粹)에게 명하여 회답하는 교서를 지으라 하니, 자수가 사양하며 아뢰기를, “민수가 한 도의 군사를 거느리고서 김해ㆍ대구 싸움에서 비겁하고 나약하여 패전하고 많은 군사를 죽였으니, 밀성의 조그만 승전을 가지고는 공로가 죄를 가리지 못합니다. 옷ㆍ술ㆍ말의 상을 준 것이 이미 지나치거늘, 또 무슨 회답하는 교서란 말입니까. 또 회답하는 교서는 공덕을 기록하는 것인데, 이제 민수가 기록할 만한 공이 없으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가 노하여 자수를 순위부(巡衛府)에 가두고, 지윤ㆍ하윤원에게 명하여 국문하게 하였다. 지윤의 무리가 위지(違旨)의 죄를 적용하려 하니, 자수가 말하기를, “선왕이 간관을 둔 것은 임금의 잘못을 시정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왕의 말이 옳지 않을 때에는 간관이 간쟁하나니, 원하건대 여러 공들은 국가가 간관을 둔 본의를 살피십시오." 하였다. 지윤이 노하여 곤장을 때려서 귀양보내려 하여 도당(都堂)에서 의논하니, 여러 재상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말을 하는 자가 없었다. 밀직부사 이보림이 말하기를, “자수가 비록 작은 선비이나 간관이요, 또 소위 위지(違旨)라는 것은 사람을 동쪽에 배치하라 하였는데 제 마음대로 서쪽에 옮기는 것 같은 일을 말하는 것이니, 자수의 죄를 이것으로 논죄할 수는 없다." 하였다. 도당에서 그 말을 옳게 여겨, 다만 귀양보내기를 청하였다. ()가 이르기를, “순위부에서 이미 그 죄를 의논하였는데, 지금 가볍게 하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우사(右使) 김속명(金續命)이 들어가 태후께 아뢰기를, “신은 무인이기에 사리는 알지 못하나, 문신들이 모두 말하기를, '간관이 비록 왕의 뜻을 거스르더라도 죄를 주지 않는 것은 언로(言路)를 열어 놓기 위함이다.' 합니다. 지금 자수의 죄가 작은데 벌을 중하게 의논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태후가 우()에게 청하기를, “내가 늙어서 겪은 일이 많지만, 간관을 때리고 욕뵈는 것은 듣지 못하였소. 만일 그렇게 한다면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닫을 것이니, 나라 일은 장차 날마다 잘못되어질 것이오." 하였다. 이에 곤장을 면하고 전라도 돌산에 수자리 살도록 귀양보냈다. 지윤의 무리가 생각하기를, 자수가 반드시 낭관(郞官)들과 의논하였을 것이라 하여, 간의 정우(鄭寓)를 경상도 죽림에 수자리 살도록 귀양보냈다.

12월에 재상과 6()와 대성(臺省)으로 하여금 재주가 문무를 겸하여 수령이 될 만한 자를 천거하게 하였다.

○ 밀직부사 김보생(金寶生)을 남경에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게 하였다.

○ 우()가 좋은 벼슬을 외척에게 주려고, 작은 수첩(手帖)에 써서 김선(金瑄)은 중방(重房), 한충(韓忠)은 전법(典法), 한약(韓略)은 대관(臺官)에 임명하려고 정방(政房)에 내렸다. 제조(提調) 경복흥(慶復興) 등이 아뢰기를, “제수하는 일이 이미 끝났으니, 고칠 수 없습니다." 하니 우()가 이르기를, “종이와 먹이 있는데 고치기가 무엇이 어려운가." 하였다. 복흥이 또 아뢰기를, “옛 제도에 외척은 언관에 제수받지 못하였으니 다른 벼슬을 제수하소서." 하였다. ()가 이르기를, “어째서 명령대로 하지 않는가." 하고, 다시 강압하였으나, 복흥이 극력 간쟁하고 끝끝내 제수하지 않았다. 한약의 사람됨이 재주와 행실이 없었으나 구변은 있어서 이전에 사헌부 아전으로 있다가 명경과(明經科)에 오르고, 외척에 의지하여 등급을 뛰어넘어 관작을 제수받았으며, 또 환관과 왕의 유모에게 청탁하여 지평(持平)이 되기를 구하였다.

 

 

   

 

 

 

 

 고려사절요 제30   

 

 

 신우 1(辛禑一)

 

 

병진 신우 2(1376), 대명 홍무 9 

 

 

○ 봄 정월에 전라도 도안무사 하을지(河乙沚)가 왜선 1척을 잡았으므로 옷과 술을 주었다. 을지는 재주와 행실이 없고, 또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방이 있었다. 권력 있는 귀인에게 뇌물을 바쳐 외방의 중임을 얻으니, 사람(士林)들이 더럽게 여겼다.

○ 정당문학 이무방(李茂芳)을 파면시켜 광양군(光陽君)으로 삼았다. 무방은 일찍이 경복흥에게 말하기를, “한방신(韓方信)ㆍ노진(?)의 집을 왜 적몰하지 않는가." 하니 복흥이 말하기를, “한안(韓安)과 노선(盧瑄)이 죄를 자복하지 않고 죽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무방이 말하기를, “두 역적이 스스로 큰 죄악인 줄 알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자복하지 않았으나, 정상이 드러나서 시역으로 논죄하였으니, 그 아비가 어찌 연좌를 면할 수 있는가." 하였다. 복흥이 불끈 노하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무방의 말이 더욱 절실하니, 복흥이 할 수 없이 한방신과 노진의 집을 적몰하였다. 무방은 결국 이것으로 파면되었다.

○ 첨설직(添設職)을 군사에게 상으로 주어, 봉익(奉翊)으로부터 7, 8품에 이르기까지 수가 없으니, 이때에 수레로 싣고 말로 헤아린다[車載斗量]는 비방이 있었다.

2월에 이지부(李之富)를 정료위(定遼衛)에 보내어 우호를 통하고, 이어서 상황의 변동을 염탐하였다. 또 이원실(李原實)을 보내어 나하추에게 빙문하게 하였다.

○ 이인임 등이 귀양보낸 여러 환관을 모두 편리한 곳에 가서 살도록 허락할 것을 청하였다. 정당문학 홍중선(洪仲宣)이 김속명(金續命)에게 말하기를, “환관들이 선왕 때에 권력을 잡아 화란의 계단이 되었으니, 귀양보낸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근자에 간관들이 여러 번 곧은 말로 쫓겨나서 한 사람도 돌아온 자가 없는데, 이제 도리어 이 무리를 석방하려는가." 하였다.

○ 신돈의 첩 반야(般若)가 밤에 몰래 태후의 궁에 들어가서 울부짖으며 아뢰기를, “제가 실상 주상을 낳았는데, 어째서 한씨(韓氏)를 어머니로 합니까." 하였다. 태후가 쫓아내니 인임이 반야를 옥에 가두었다. 대사헌 안종원(安宗源) 등이 상소하기를, “연성군(延城君) 김현(金玄)이 궁중의 일을 오로지 맡고 있는데, 반야가 바로 궁중에 들어와도 금지하지 않아 태후를 놀라게 하고, 여러 사람의 이목(耳目)을 해괴하게 하였으니, 법관에 회부시켜 국문하여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김현을 회덕현(懷德縣)에 귀양보냈다.

○ 안주(安州) 부원수 왕안덕(王安德)이 심왕(瀋王)이 죽은 것을 보고하였다.

○ 양부(兩部)ㆍ대간ㆍ기로(耆老)들이 흥국사(興國寺)에 모여 반야의 일을 추궁하는데, 말직(密直) 권중화(權仲和)가 서연(書筵)에서 강의를 하느라고 이르지 않았다. 삼사우사(三司右使) 김속명이 당리(堂吏)에게 말하기를, “왕의 어머니가 정해지지 않았으니 빨리 분변하여 나라사람들의 의심을 풀어야 하는데, 서연(書筵)은 하여 무엇 하느냐." 하고, 조금 있다가 탄식하기를, “천하에 그 아버지를 분변하지 못하는 일은 혹시 있을 수 있지만, 어머니를 분변하지 못하는 일은 나는 듣지 못하였다." 하였다.

3월에 김속명을 문의현(文義縣)에 귀양보냈다. 속명은 태후의 가까운 인척으로서, 전적으로 궁중의 일을 맡아 보면서 청렴하고 정직하며 말을 바로하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꺼렸다. 일찍이 병으로 집에 나가 있는데, 경복흥ㆍ이인임ㆍ지윤이 문병하러 왔다. 속명이 말하기를, “옛 제도에, 양부(兩府)와 성()에는 5명이고 추신은 7명인데, 이제 하룻동안에 제수하는 재신과 추신이 50명이나 되니, 공론을 어찌하려 하는가." 하니, 복흥이 말하기를, “부득이하여 그리한 것이다." 하였다. 속명이 말하기를, “지금의 재신과 추신은 녹(祿)만 먹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어서, 나같이 마음이 바르지 못한 자가 없다." 하였다. 인임이 말하기를, “공의 마음이 바르지 않다면 누가 바르겠는가.” 하였다. 속명이 말하기를, “내가 도당(都堂)에서 자리만 채우고 봉록만 받으면서 무릇 안건에 서명할 때에 마음으로는 그르게 여기면서도 입으로는 옳다 하였으니, 마음이 바르지 못하기가 누가 나와 같겠는가." 하였다. 복흥 등이 모두 말이 없었다. 지윤과 이인임이 깊이 감정을 품고 몰래 중상하기를 꾀하였으나 틈을 얻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사의(司議) 허서(許時)와 김도(金濤) 등을 사주하여 탄핵하기를, “신하로서 불경하는 것이 죄가 이보다 클 수 없는데, 근자에 흥국사에 모여 의논할 때에 속명이 입으로 하지 못할 말을 하였으니, 불경이 더 심할 수 없습니다. 국문하여 다스리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글을 두 번 올리니, 태후가 힘써 구하여 귀양만 보냈다. 이 뒤로부터 태후가 좌우의 손을 잃은 것 같았다. 이때 사람들이 아깝게 여기었다.

○ 대간(臺諫)과 순위부(巡衛府)가 함께 반야의 옥사를 다스리는데, 반야가 신축한 중문(中門)을 가리키면서 부르짖기를, “하늘이 만일 나의 원통함을 안다면, 이 문이 반드시 무너질 것이오." 하였다. 허시가 문에 들어서자마자 문이 저절로 무너져서 허시가 겨우 죽음을 면하니, 사람들이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마침내 반야를 임진강(臨津江)에 던져 죽이고, 그 친족인 판사 강거실(姜居實)을 베었다.

○ 사헌부 지평 송제대(宋齊岱)를 파면시켜 지태안군사(知泰安郡事)로 내보냈다. 이전에 지윤이 그 아내를 시켜서 우()의 유모와 결탁하여 궁중에 출입하면서 권세를 부리며 뇌물을 받으니, 김속명(金續命)이 기롱하였다. 지윤이 깊이 미워하여 배척하기에, 제대(齊岱)가 지윤을 탄핵하려 하였다. 집의 김승득(金承得)이 지윤에게 고하여 내쳤다.

○ 판사(判事) 김용(金龍)을 정료위(定遼衛)에 보내어 우호를 통하였다.

○ 왜적이 진주를 침범하니, 조민수가 청수역(淸水驛)에서 싸워 머리 13급을 베어서 바쳤다.

○ 여름 4월에 이숙림(李淑林)을 서북면 완호사(完護使)로 삼았다. 지난해에 북쪽을 정벌하는 군사가 오래 머물러서 소란하여 굶주리는 백성이 많으므로, 숙림을 보내어 베 1 5백 필을 주어서 진휼하였다.

○ 경효대왕(敬孝大王)의 영전(影殿)을 짓고 혜명(惠明)이라 칭하였다.

○ 중 나옹(懶翁)을 밀성군(密城郡)으로 내쳤다. 이때에 나옹이 양주(楊州) 회암사(檜巖寺)에서 문수회(文殊會)를 베풀었는데, 중앙과 지방의 남녀들이 귀한 사람, 천한 사람 할 것 없이 다투어 포백(布帛)ㆍ과실ㆍ떡을 싸 가서 보시하기 위하여 서로 먼저 이르려고 절의 문이 메워질 지경이자, 추방한 것이었는데, 가다가 여흥 신륵사(神勒寺)에 이르러 죽었다.

○ 문하찬성사상의(門下贊成事商議) 유연(柳淵)이 졸하였다. 유연은 공정하고 청렴하고 재간이 있기로 이름이 났으며, 장수가 되어서는 자못 군사들의 마음을 얻었다.

5월에 제주 만호 김중광(金仲光)이 역적 하치(哈赤)ㆍ강백안(姜伯顔) 13명을 베고, 처자를 광주ㆍ나주 두 고을에 나누어 귀양보냈다.

○ 경오일에 지진이 있었다.

○ 우()가 북원(北園)에 가서 말타기를 익히고, 또 농장(弄杖)놀이를 구경하였다.

○ 북원이 초아지(抄兒志)를 보내어 왔다.

○ 정총(鄭摠)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이때에 지공거(知貢擧) 정당문학 홍중선(洪仲宣)이 다시 시()와 부()로 선비를 뽑고, 향시(鄕試)와 전시(殿試)를 파하니, 의논하는 자들이 그르게 여겼다.

6월에 유영(柳濚)을 전라도 원수로 삼았다.

○ 경한 죄로 옥에 갇힌 자를 석방하고, 먼 곳에 귀양간 여러 사람들을 가까운 곳에 양이(量移)하기를 차등 있게 하였다.

○ 왜적이 임주(林州)를 침범하니, 전주도(全州道) 병마사 유실(柳實), 지익주사(知益州事) 김밀(金密) 등이 힘껏 싸워서 물리쳤다.

○ 무신일에 혜성이 나타났다.

○ 가을 7월에 왜적이 전라도 원수의 군영을 침범하고, 또 영산(榮山)을 침범하여 전함을 불사르고, 또 나주를 침범하여 불을 놓고 노략질하였다. 이때에 원수 하을지(河乙沚)는 유영(柳濚)이 자기 대신으로 온다는 말을 듣고 곧 진주 농장으로 돌아갔다. 왜적이 틈을 타서 침범하자, 감히 막을 자가 없었기 때문에 크에 패하였다. 을지를 하동현(河東縣)에 귀양보냈다.

○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김서(?)가 나하추(納哈出)의 군영으로부터 도망하여 돌아왔다. 이보다 먼저 중 소영(小英)이 연화(緣化 불법을 믿을 인연이 있는 사람을 권하여 인도하는 것)를 칭탁하고 그 무리 몇 사람을 북방에 보내어 은밀히 글을 심왕(瀋王)에게 부쳐서 말하기를, “나라의 상황이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임금과 신하가 서로 아첨하고, 나라의 권력이 오로지 권신에게 있으니, 만일 군사를 이끌고 온다면 큰일을 성취할 수 있다." 하였다. 김서가 그 편지를 보고 와서 고하였는데, 소영을 옥에 가두고 국문하니 과연 자복하였다. 그리하여, 벽란도(碧瀾渡)에 던져 죽였다.

○ 왜적이 부여를 침범하여 공주에 이르니, 목사 김사혁(金斯革)이 정현(鼎峴)에서 싸워서 패전하여 공주가 함락되었다. 원수 박인계가 속현인 회덕(懷德)의 감무(監務) 서천부(徐天富)가 와서 구원하지 않았다 하여 목을 베었다. 왜적이 또 석성(石城)을 침범하고, 연산(連山) 개태사(開泰寺)로 달려들었다. 인계가 맞아 싸우다가 말에서 떨어져 살해되었다. 적이 드디어 개태사를 도륙하였다.

○ 사헌부가 탄핵하기를, “전교부령(典校副令) 신인보(申仁保) 3품 직함을 거짓 칭하였고, 또 죽은 낭장(郞將) 박동조(朴東朝)의 아내와 간통하였으니, 법에 의하여 논죄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인보는 평소 권신에게 아부하였고, 또 동조의 처는 재상 김원명(金元命)의 딸로 현릉(玄陵)의 외척이 되기에, 그 일은 덮어 두고 다만 직함을 거짓 칭한 것만 죄를 주어, 곤장을 때리고 장암수(長岩戍)에 귀양보냈다.

○ 판삼사사 최영이, 박인계가 패하여 죽었다는 말을 듣고, 왜적 치기를 자청하였다. ()와 여러 장수들이 늙었다고 말리니, 최영이 말하기를, “조그만 왜적이 포학을 이와 같이 부리니, 지금 시기를 잃고 제어하지 않으면 뒤에는 도모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제 만일 다른 사람으로 장수를 삼는다면 꼭 승리한다고 기대할 수 없고, 또 군사가 본래 훈련되지 않았으니 쓸 수가 없습니다. 신이 몸은 비록 늙었으나 뜻은 쇠하지 않았으니, 다만 사직을 편안히 하고 경성을 호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고, 휘하 군사를 거느려 급히 가서 치기를 재삼 청하여 허락하였다. 최영은 자지도 않고 곧 떠났다.

○ 교동현(喬桐縣) 백성을 경성 가까운 땅에 옮겨 왜구를 피하게 하였다.

○ 왜적이 낭산(朗山)ㆍ풍제(?) 등 현()을 침범하니, 전라도 원수 유영(柳濚), 전주 목사 유실(柳實)이 힘껏 싸워 물리치고, 왜적이 노략하였던 소와 말 2백 필을 빼앗아 그 주인에게 돌려 주었다.

○ 헛소문이 전하기를, “왜적이 장차 도성을 침범한다." 하므로, 밤중에 방리(坊里)의 군사를 징발하여 성을 지키고, 또 적이 장차 먼저 송악산으로 오른다는 말을 듣고 중을 징발하여 군사로 삼아서 요해처를 지키게 하였다.

○ 최영이 양광도 도순문사 최공철(崔公哲), 조전원수 강영(康永)ㆍ병마사 박수년(朴壽年) 등과 함께 홍산(鴻山)에 이르니, 왜적이 먼저 험하고 좁은 곳에 웅거하여 있었다. 삼면이 모두 절벽이고 오직 한 길만이 통할 수 있었으니, 여러 장수들이 두려워하고 겁내어 전진하지 못하였다. 최영이 몸소 군사들의 앞장을 서서 날카로운 기세로 돌격하니, 적이 휩쓸려 흩어졌다. 한 적이 숲속에 숨어서 최영을 쏘아 입술을 맞히니 피가 철철 흘렀지만 기색과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적을 쏘아 활시위 소리에 따라서 거꾸러뜨렸다. 그제서야 화살을 뽑고 더욱 세차게 싸워서, 드디어 크게 깨뜨려서 사로잡고 베어 거의 섬멸시켰다. 사람을 보내어 승전 보고를 드리니, 최영에게 옷ㆍ술ㆍ안장 갖춘 말을 주었다.

○ 벼락이 한천군(漢川君) 왕규(王揆)와 그 아내 박씨(朴氏)를 쳤다. 세속(世俗)에 전하기를, 벼락맞아 죽은 집 물건을 가져 가면 부자가 된다 하여, 도성 사람들이 몰려들어 소ㆍ말ㆍ재물ㆍ포백(布帛)ㆍ그릇ㆍ나무ㆍ돌ㆍ기왓장 등을 다투어 가져 갔다. 이때에 왕규와 박씨의 목숨이 아직 끊어지지도 않았는데, 심한 자는 사지와 몸뚱이의 살까지 떼어 가서, 잠깐 동안에 빈 터로 변하여 버렸다.

8월에 김진(金縝)을 경상도 원수 겸 도찰사로 삼았다.

○ 최영이 개선하니 우()가 재신과 추신에게 명하여 천수사(天水寺)에 연회를 위해 여러 가지를 배설하고, 순위부(巡衛府)에서 여러 가지 놀이를 갖추어 임진강(臨津江)에서 맞아들이는데, 마치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예식과 같았다.

○ 사신을 여러 도에 보내어 군사를 점고하였다. 이때에 정료위가 가을을 타서 침략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군사를 검열하여 준비한 것이었다.

9월에 중앙과 지방의 관원과 아전ㆍ백성ㆍ노비로 하여금 차등에 따라 곡식을 내어 군량을 보충하게 하였다.

○ 홍산(鴻山) 싸움의 전공을 논하여 최영을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으로, 유영을 밀직부사상의(密直副使商議)로 삼고, 그 나머지 군사들은 차등이 있게 벼슬을 제수하였다. 이때에 경복흥ㆍ이인임ㆍ지윤이 정방제조(政房提調)로 있었는데, 지윤과 이인임이 권세를 제 마음대로 하여 종군도 하지 않고 벼슬을 얻은 자가 매우 많았다. 복흥은 청렴결백하고 스스로를 지켜 어진 사람을 천거하고자 하였으나, 견제를 받아서 실행하지 못하였다.

○ 왜적이 고부(古阜)ㆍ태산(泰山)ㆍ흥덕(興德) 등 군ㆍ현(郡縣)을 침범하여 관청을 불사르고, 또 보안(保安)ㆍ인의(仁義)ㆍ김제ㆍ장성 등 고을을 침범하였다.

○ 우()가 처음으로 말달리기ㆍ매사냥을 연습하였다. 우가 처음에는 조금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이인임ㆍ지윤ㆍ임견미 등이 선비를 좋아하지 않아서 다투어 진귀한 노리개감으로써 유도하였다.

○ 왜적이 전주를 함락시키니, 목사 유실(柳實)이 적과 싸워 패전하였다. 적이 물러가 귀신사(歸信寺)에 주둔하니, 유실이 다시 쳐서 물리쳤다.

○ 조사민(趙思敏)을 전라도 부원수로, 목충(睦忠)을 조전병마사로, 또 변안열(邊安烈)을 양광ㆍ전라도 도지휘사(都指揮使) 겸 조전원수로 삼았다.

이때에 왜적이 임피현(臨陂縣)을 함락시키고, 다리를 끊어서 견고히 지켰다. 유실이 몰래 군사를 시켜 다리를 만드니, 안열이 군사를 끌고 건너서 안렴사 이사영(李士穎)을 시켜 다리 부근에 군사를 매복하였다. 적이 바라보고 반격하여 우리 군사가 패하였다.

○ 윤달에 전라ㆍ양광ㆍ경상도의 바닷가 고을들의 부역과 납세를 3년 또는 5년 동안 차등 있게 감면하였다.

○ 나세(羅世)를 전라도 상원수 겸 도안무사로 삼았다.

○ 순정(順靖) 왕후 한씨(韓氏)를 의릉(懿陵)에 장사하고 드디어 혜명전(惠明殿)에 배향하였으며, 노국공주(魯國公主)는 별실(別室)에 제사하였다. 이때에 한약(韓略)이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한씨의 친족인데, 이전에 한씨가 졸하였을 때에 내가 한씨의 친족 중 능우(能祐)와 함께 그 시체를 화장하고 뼈를 거두어 봉은사(奉恩寺) 소나무 숲속에 묻었다." 하였다. 이에 봉은사 북쪽산에서 태운 뼈 한 항아리를 발굴하여 의식에 필요한 물건을 갖추어 현릉(顯陵) 서쪽에 이장하는데, 상여가 십천교(十川橋)에 이르러 조전(祖奠)을 바치고 혼전(魂錢)을 태우다가 영구(靈柩)의 휘장에 불이 옮기고 의물(儀物)까지 불탔으나, 오직 영구만은 구하여 화재를 면하였다. 이때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기고, 혹 말하기를 하늘이 내린 불이다 하였다.

○ 사헌부가 상소하기를, “전라도 원수 유영(柳濚)이 곤임(?任 지방에 파견된 장수)에 뜻을 두지 않고 날마다 음악과 여색에만 정신을 쏟아 왜적이 승기를 타서 포학을 자행하게 만들었고, 전주가 함락되니 말에서 떨어졌다고 거짓으로 핑계를 대고 군사를 끼고 앉아 머무르고 나가지 않았으니, 형벌로 다스리기를 청합니다. 병마사 유실은 관할인 태산군(泰山郡)이 또한 적의 침범을 입었는데, 토벌할 기회를 잃고 도리어 패전하였고, 또 전주를 수복하지 못하였으니 죄가 또한 큽니다. 그러나 유실은 지난번에 왜적이 전주를 범하였을 때에 힘을 다하여 쳐서 물리쳤으니, 유영의 죄와는 경중이 있을 것 같습니다. 봉익(奉翊) 이상의 관직을 삭탈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이에 유영을 폐하여 평민을 만들고, 유실과 함께 먼 땅에서 수자리살게 하였다.

○ 사헌부에서 청하기를, “병란과 한재가 해마다 겹쳐서 군량이 절핍되었으니, 공신전(功臣田)에서는 조세 3분의 1을 취하고, 사사전(寺社田)에서는 반을 거두며, 양전(兩殿)에 소속된 궁사전(宮司田)에서는 과렴(科斂) 이외의 남는 것은 모두 군량에 충당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겨울 10월에 나흥유(羅興儒)가 일본에서 돌아왔다. 일본이 중 양유(良柔)를 보내어 답례하고, 이어서 채단(綵段)ㆍ화병(?)ㆍ장검 등의 물건을 바쳤다. 신사년 동정(東征)한 이후로, 국교를 끊은 지가 백 년이나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일본이 흥유(興儒)를 간첩이라 하여 가두었다. 양유(良柔)는 본래 우리나라 진주의 중이었는데, 젊었을 때에 왜승을 따라서 건너갔다. 흥유가 왔다는 말을 듣고 찾아와서 만나고, 드디어 흥유를 석방하여 주기를 청하고 화친을 통하게 하였다. 흥유가 돌아올 때에 그 나라 중 주좌(周佐)가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우리 서해도 일대 구주(九州)를 난신들이 나눠 차지하여, 조공과 구실을 바치지 않은 지가 10여 년이 되었습니다. 서변해도(西邊海道)의 완악한 백성들이 틈을 엿보아 나가 고려를 침범하는 것이요, 우리가 한 소행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조정에서 장수를 보내서 토벌하여 깊이 그 땅에 들어가서 양쪽 진영이 칼날을 맞대어 날마다 서로 싸우고 있으니, 구주(九州)를 회복하기만 하면 바다의 도적을 금지할 것을, 해를 가리켜 하늘에 맹세합니다." 하였다.

○ 왜적이 부령(扶寧)을 침범하자, 변안열ㆍ나세ㆍ조사민 등이 나가 쳐서 크게 깨뜨렸다.

○ 북원이 병부 상서 발가첩목아(?哥帖木兒) 등을 보내어 왔는데, 우승상 확확첩목아(擴廓帖木兒)가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지난해에 어떤 사람이 전하기를, '전왕이 아들이 없다.' 라고 하여 조정에서 생각하기를, '너희 나라가 오래 임금이 없으면 반드시 위란이 올 것이라.' 하여, 너의 친족에서 선택하여 가서 제사를 잇게 하려고 조서를 받든 사신이 이미 출발하였는데, 그곳에서는 길을 막았다. 이때를 당하여 조정에서는 새 임금을 세울 계책이 없거나 문죄의 군사를 일으키지 못한 것이 아니다. 군사가 한 번 임하면 옥과 돌이 모두 불타는 일이 없지 못할 것을 특별히 염려해서, 탈탈불화(脫脫不花)를 잠깐 요서(遼西)에 머물게 하고 군사 한 명과 말 한 필도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여,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또 백안첩목아(伯顔帖木兒) 왕에게 아들 모니노(牟尼奴)가 있어서 국인이 추대하여 정무를 통솔하고 있는 것을 알았는데, 왕의 아들이 비록 국민의 복종을 받는다 하더라도 조정의 명령은 있지 않았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데는 반드시 믿는 곳이 있어야 나라를 세울 수 있는 것이다. 너의 전왕이 지난해에 우리 황제께서 북쪽으로 옮기셨기 때문에 필시 잠깐 동안 주구(朱寇 명 태조를 가리킴)에게 미끼를 주어서 나라 안을 편안하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조정이 가까이 있고, 또 옛 임금(원 나라 황제)의 의리가 중하며, 구생(舅甥)간의 은혜가 두터우니, 배반을 할 수가 있는가. 왕자(王子)는 생각을 고쳐서 상국의 명령에 응하여, 군사를 가다듬고 말을 먹여서 함께 앞뒤로 호응하여 적을 견제하는 형세를 이루어 우리 국가의 중흥의 대업을 돕게 하라." 하였다. 나하추가 우승(右丞) 구주(九住)를 보내어 우리의 사신 문천식(文天式)을 돌려보냈다.

○ 왜적이 진포(鎭浦)를 침범하고, 또 강화부를 침범하여 군함을 불사르고, 또 한주(韓州 충남 서천(舒川))를 침범하였다. 최공철이 쳐서 1백여 급을 베었으므로, 술과 안장 갖춘 말을 주었다.

○ 밀직부사 손언(孫彦)을 북원에 보냈는데, 백관이 성()에 바치는 글에 말하기를, “본국이 대대로 동토(東土)를 보존하였고, 백안첩목아왕이 아들 모니노를 낳아서 현재 왕위를 이어받아 명백하게 결단하심을 기다린 것이 지난해에 진달한 글에 있었는데, 뜻밖에 김야열가(金也列哥)가 본국 왕실의 계보와 관계없는 심왕(瀋王) 완택독(完澤禿)의 손자 탈탈불화에게 붙어 흉한 무리를 모아서 결속하여, 위로 조정을 속이어 국통을 어지럽히고자 하니, 바라건대 국통을 어지럽히고 일을 꾸미는 무리를 본국으로 돌려보내어 치죄하게 하소서." 하였다. 김야열가는 바로 김의(金義)이다. 또 개성 윤(開城尹) 황숙경(黃淑卿)을 보내어 나하추에게 답례하였다. 나하추가 말하기를, “내가 본래 고려와 싸우려는 것이 아닌데, 백안첩목아왕이 나이 젊은 이장군을 보내어 나를 쳐서 내가 자칫하면 죽을 뻔하였다. 이장군은 평안한가. 나이는 젊어도 군사 쓰는 것이 귀신 같으니 참으로 천재였다. 장차 너희 나라에서 큰일을 맡을 것이다." 하였다.

○ 사헌부가 상소하기를, “지난번 심왕의 변에 재상들이 합의하여 기밀을 결정하고, 여러 장수는 충의를 분발하여 곧 한 패의 군사를 거느리고 밤낮으로 이틀길을 하루에 가는 행보로 와서 맞아 싸워 물리쳐서 조야(朝野)를 편안하게 하였는데, 상전을 거행하지 않아서 뒷사람에게 장려할 수 없으니, 공로대로 상줄 것을 청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11월에 경효대왕(敬孝大王)을 태묘에 부(?)하려 하는데, 큰비가 쏟아지고 천둥과 번개 때문에 부(?)를 하지 못하였다.

○ 왜적이 진주 명진형(溟珍縣 경남 거제)를 침범하고, 또 함안(咸安)ㆍ동래(東萊)ㆍ양주(梁州)ㆍ언양(彦陽)ㆍ기장(機張)ㆍ고성(固城)ㆍ영성(永善) 등을 불사르고 노략질하였다.

○ 집의 김승득(金承得)과 지신사(知申事) 김윤승(金允升)이 지윤(池奫)에게 말하기를, “임박(林樸)이 성()에 바치는 글에 서명하지 않았고, 또 심왕을 맞아 세울 뜻이 있었으니, 이것은 죄를 주어야 한다." 하고, 승득이 드디어 대관(臺官)을 거느리고 글을 올려 베어 죽이기를 청하였다. 드디어 임박에게 착고를 채워 잡아 와서, 윤승이 중간에서 전법(典法)에 회부하여 곤장 1백 대를 때려서 귀양보냈는데, 중도에서 죽었다. 대사헌 안종원(安宗源)이 그 세력을 두려워하여 감히 발언을 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지윤은 안에서 권력을 잡고, 승득 윤승은 우익(羽翼)이 되었다. 임박이 죽은 것을 경복흥ㆍ이인임은 듣지도 못하여 드디어 미워하였다. 이보다 먼저, 왜적이 전주를 침범하니 도당(都堂)에서 원수를 뽑기를 의논하다가, 적합한 사람이 없어 지윤의 아들 익겸(益謙)을 보내려 하였는데, 지윤이 마음속으로 불평하였다. 인임ㆍ지윤ㆍ최영 등이 복흥의 집에 모여 의논하였는데 오래도록 결정이 나지 않았다. 지윤이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판삼사공(최영)이 적합하다." 했다. 최영이 노하여 말하기를, “나는 이미 양광도를 나누어 맡았는데, 어찌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가." 하였다. 지윤이 앞으로 나와 인임에게 말하기를, “시중(侍中)이 일을 도모하면서 이것도 결정하지 못하니, 시중이 가야 한다." 하였다. 지윤이 또 요동을 치는 것을 칭탁해서 이 의론을 방해하여 말하기를, “왜적은 다만 변방을 소요하게 할 뿐이니 근심할 것은 없다. 만일 대군이 정료위에 근거를 삼으면, 뒤에는 반드시 도모하기가 어려우니, 지금의 계책으로는 군사를 옮겨 먼저 치는 것이 낫겠다. 시중의 계책이 좋기는 하나, 오늘에 있어서 나라에 이바지하는 좋은 계책은 아니다." 하였다. 인임이 불끈 화를 내며 말하기를, “삼재(三宰)가 감히 이럴 수 있는가. 그대가 나라 일에 좋은 계책을 내니, 내가 마땅히 사양하여 피하겠다. 내 생각에는 전주는 나라의 옷깃이고 목구멍이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게 되니, 구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애를 쓰는 것인데 삼재가 이 의논에 항거하니,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하고, 드디어 먼저 나가 버렸다. 복흥은 쫓아가서 그 소매를 붙잡고 울면서 말리고, 지윤은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하였다. 인임이 병으로 집에서 쉬는데 지윤이 그 문 앞을 지나면서도 들어가 보지 않으니, 사람들이 비로소 지윤과 이인임이 틈이 난 것을 알았다.

○ 왜적이 진주 반성현(班城縣)을 침범하고, 또 울주ㆍ회원(會原)ㆍ의창(義昌) 등 현을 침범하여 죽이고 노략해서 거의 다 휩쓸고, 또 밀성군과 동래현을 침범하였다.

○ 경효대왕을 태묘에 부(?)하고, 순정왕후(順靖王后)를 배향하였다.

○ 춘성군(春城君) 이수산(李壽山)이 졸하였다.

12월에 나하추가 사신을 보내어 백금과 양()을 바쳤다.

○ 왜적이 합포영(合浦營)을 불사르고, 양주(梁州)와 울주 두 고을과 의창(義昌)ㆍ회원(會原)ㆍ함안ㆍ진해ㆍ고성ㆍ반성(班城)ㆍ동평(東平)ㆍ동래ㆍ기장 등 현()을 도륙하고 불살랐다. 이전에 원수 김진(金縝)이 한 도의 창기 중에 얼굴 예쁜 자를 모아다가 날마다 부하들과 밤낮으로 취하게 마시니, 군중에서 소주패라고 불렀는데 김진이 소주를 즐기기 때문이다. 군졸과 부장들이 허물이 있으면 반드시 때리고 욕하기 때문에, 온 군사가 분하게 여기고 원망하였는데, 적이 이르니 군사들이 물러서서 싸우지 않고 말하기를, “원수는 소주패를 시켜 적을 치라. 우리들이 무엇하리오." 하였다. 이 때문에 크게 패하였다.

○ 곡식을 바치고 벼슬을 사도록 명령하여 그것으로 서북면의 군량에 충당하였다.

○ 집의 김승득과 헌납 안정(安定) 등이 번갈아 글을 올려 익비(益妃)의 소생인 아들을 죽이자고 청하니, ()가 그 말을 따랐다. 익비가 숨겼다가 오랜 뒤에 내놓았는데 딸이었다. 또 익비가 국문하기를 청하니, 우가 허락하지 않고 이르기를, “이것은 선군의 과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였다. 또 최만생(崔萬生)과 홍윤(洪倫)의 부모ㆍ처자ㆍ형제를 베고, 친숙질과 종형제는 삭직하여 멀리 귀양보내어 영구히 서용하지 말기를 청하고 말하기를, “대역의 적()은 만생과 홍윤뿐만 아니라 홍관(洪寬)ㆍ권진(權瑨)ㆍ한안(韓安)ㆍ노선(盧瑄) 등의 부모ㆍ처자ㆍ형제ㆍ친숙질ㆍ종형제도 모두 일체로 시행하여야 합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이에 수시중(守侍中) 이인임, 찬성사 목인길(睦仁吉), 평리(評理) 변안열, 정당문학 홍중선(洪重宣), 판밀직 왕안덕(王安德), 밀직부사 우인열(禹仁烈) 등이 말하기를, “적신(賊臣)의 부형을 이미 다 멀리 귀양보냈으니, 그 사형은 면하게 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가 듣지 않았다. 목인길이 말하기를, “신이 선왕을 따라서 원 나라 조정에 11년을 있었으나, 남편의 죄로 인하여 아내를 죽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우가 허락하였다. 만생의 아내는 이미 죽었고, 홍윤의 아내는 형을 받기 직전에 면하였다. 이에 홍윤의 아비 사우(師禹)와 형 이(?), 한안의 아비 방신(方信)과 형 휴(), 아우 열(), 권진의 아비 용()과 형 정주(定住), 노선의 아비 진(?)과 형 정()ㆍ아우 균(), 홍관의 아비 사보(師普)와 아우 헌()을 베고, 홍윤 등의 친숙질과 종형제는 귀양보냈다. 만생과 홍윤은 악행의 주모자이므로, 이모의 아들과 고모의 아들도 모두 귀양보냈다. 사우는 언박(彦博)의 아들인데, 일찍이 합포(合浦)를 맡아 지킬 적에 아전이 두려워하고 백성이 복종하였다. 사람됨이 청렴하고 부지런하고 근신하였다. 홍윤이 불초한 것을 알고 죽이려다가 실행하지 못하였다. 홍윤이 신임을 받아 총애가 여러 소인을 압도하니, 사우가 아뢰기를, “홍윤은 사람의 얼굴이나 짐승의 마음이니, 궁중에 두지 마소서." 하였고, 전라도 도순문사가 되었을 때에, 큰아들 홍이에게 편지를 부쳐 홍윤의 방자함을 경계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홍이와 함께 죽으니, 나라사람들이 아깝게 여기고, 경상ㆍ전라도 사람 중에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다.

○ 지윤을 문하찬성사로, 윤방언을 밀직제학으로, 정양생(鄭良生)을 대사헌으로 삼았는데, 이날에 벼슬을 제수한 재신과 추신이 59명이나 되었다. 인임과 지윤 이하 각기 당을 심어서, 대간ㆍ장수ㆍ수령이 모두 그들의 친한 사람이고, 시정배와 공인 및 장인에 이르기까지 연줄로 제수되지 않음이 없으니, 그때 사람들이 '굴뚝차례 제수(除授)'라 일컬었다.

○ 진산군(晉山君) 하윤원(河允源)이 졸하였다. 윤원이 여러 벼슬을 역임하여 명성과 공적이 있었는데, 신돈이 권세를 휘두를 때를 당하여 아부하지 않았다.

○ 지윤이 죽은 대사헌 왕중귀(王重貴)의 처에게 장가들고자 하여 자주 중매를 통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하루는 지윤이 제 패를 거느리고 그 집에 이르렀는데, 노비들이 뛰어들어가서 고하기를, “부인은 피하소서." 하니 부인이 말하기를, “내가 구차히 도망할 것 없다." 하였다. 노비들이 생각하기를, “장차 순종하려나보다." 하였다. 중귀의 처가 지윤에게 술을 대접하니, 지윤이 그 방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중귀의 처가 지윤의 턱을 잡고 따귀를 때리며 말하기를, “재상이 이런 강포한 행동을 어떻게 하는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너를 따르겠느냐." 하였다. 지윤이 부끄러워서 물러갔다. 중귀의 처가 드디어 최영에게 가서 고하기를, “첩이 좋은 집을 가지고 있기에 지윤이 차지하고자 하여 첩에게 폭행과 욕을 보였습니다. 공께서 청렴하고 정직하기로 소문이 났기 때문에 와서 고합니다." 하였다.

 

 

[D-001]수레로……헤아린다 : 중국 남북조 때에 양() 나라에서 벼슬을 남발하니,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보궐(補闕 : 관명)은 수레를 연하여 실을 만하고, 저작(著作 : 관명)은 말로 헤아릴 수 있다." 하였다.

 

 

   

 

 

 

 

 고려사절요 제30   

 

 

 신우 1(辛禑一)

 

 

정사 신우 3(1377), 대명 홍무 10 

 

 

○ 봄 정월에 왜적이 회원창(會原倉)의 품미(品米)를 약탈하였다. 이때에 군량이 부족하여 주군(州郡)으로 하여금 직품에 따라 차등 있게 쌀을 내게 하고, 그것을 '품미(品米)'라고 하였다.

○ 지용기(池湧奇)를 양광도의 부원수로 삼았다.

○ 김진을 패군한 죄로 평민으로 삼아 가덕도(嘉德島)에 귀양보내고, 천호(千戶) 2명을 베며, 군관(軍官)은 차등에 따라 곤장을 때렸다.

○ 나하추가 사신을 보내어 양과 말을 바쳤다.

○ 안주에 신용군(新勇軍)ㆍ신맹군(新猛軍)을 두었다.

2월에 왜적이 신평현(新平縣 충남 홍성)을 침범하였다.

○ 북원이 한림승지 패라적(?刺的)을 보내서 우()를 책봉하여 개부의동삼사 정동행성 좌승상 고려국왕(開府儀同三司征東行省左丞相高麗國王)으로 삼았다.

○ 나하추가 문합라불화(文蛤剌不花)를 보내어 왔다.

○ 북원이 사신을 보내어 경효대왕에게 제사지냈다.

○ 북원의 선광(宣光) 연호를 비로소 시행하였다.

○ 왕안덕을 양광도의 도원수로 삼았다.

○ 왜적이 경양(慶陽)을 침범하고 곧바로 평택현(平澤縣)으로 들어오니, 양광도의 부원수 인해(印海)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 양민의 자제 중에서 활 잘 쏘고 말 잘 타는 자와, 군현의 아전 중에서 힘이 강한 자를 모집하여 왜적을 막게 하고, 여러 관사(官司)의 원리(員吏)로서 휴가를 얻어 고향에 돌아가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자를 삭직하고, 그 토지를 빼앗아 전공이 있는 자에게 주었다.

○ 익명서를 이인임의 문에 붙이기를, “지윤의 문객 김윤승 등 78명이 문하사인 정목(鄭穆)을 사주해서 인임을 탄핵하여 쫓아 버리고 지윤을 시중으로 삼으려 하는데, 일이 절박하니 빨리 도모하라." 하였고, 그 끝에 또 말하기를, “내 관직은 판사(判事)이고, 내 성()은 이()이고, 내 이름은 11획이라." 하였다. 인임이 숨기고 발설하지 않았는데, 대호군(大護軍) 구성로(具成老)가 또 그런 글을 얻어서 인임에게 보였다. 인임이 비밀히 지윤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이것은 공과 내가 교분이 대단히 두텁기 때문에 우리 두 사람을 이간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니 지윤이 말하기를, “이것은 장령(掌令) 김상(金賞)의 글씨다." 하였다. 김상은 바로 인임의 족질(族姪)이다. 이때에 판전교시사 이열(李悅), 좌상시 화지원(華之元), 우부대언 김승득(金承得)이 지신사(知申事) 김윤승(金允升)과 함께 붕당을 만들어서, 지윤에게 아첨하고 섬기며 영전을 바라면서 '지윤 문하의 사걸(四傑)'이라 자칭하였다.

인임이 지윤의 당을 제거하려 하나 틈을 얻지 못하였는데, 지원과 승득이 이열의 집에 모여 말하기를, “원 나라 사신을 후대하고, 홍무(洪武) 연호를 쓰지 않고 선광 7(宣光七年)을 시행하는 것이 너무 빠르지 않은가." 하였다. 인임이 염탐하여 알고 드디어 3명을 순위부(巡衛府)에 가두었다. 지윤이 이때에 순군부만호(巡軍副萬戶)로 있었다. 그러므로 인임이, 지원 등이 조정의 정사를 비방하였다 하여 심하게 국문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근일에 이열의 집에 모여서 무슨 문서(文書)를 만들어서 세월을 보냈는가." 하였다. 대답하기를, “천하가 어지러워 전쟁이 종식되지 않아 선왕께서 계책을 결정하여 남쪽을 섬겼는데, 이제 선왕의 뜻을 따르지 않고 갑자기 선광 연호를 쓰는 것이 너무 빠르지 않은가 하여 다만 의논하였을 뿐이요, 문서로써 이 말을 낸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한략(韓略)도 지윤의 당이었기에 함께 옥에 가두었다가, 드디어 곤장을 때려 귀양보냈다. 이열ㆍ지원ㆍ한략ㆍ승득ㆍ김상은 귀양보냈지만, 윤승은 그대로 둔 것은 인임이 지윤의 위태롭고 의심하는 마음을 위로하려 함이요, 또 사변이 급히 발발하지 않기를 바란 것이었다. 지윤이 몹시 두려워하여 인임에게 맹세하여 말하기를, “내가 만일 공을 해치려 한다면 하늘이 반드시 벨 것이라." 하였다. 그 아들 익겸(益謙)을 시켜 최영에게 구제해 주기를 청하다가 되지 못하니, 군사를 엄하게 단속하여 스스로 호위하였다.

3월에 이인임이 대간을 사주하여, 김윤승이 당파를 만들고 주색에 빠져 있다고 탄핵하였다. 윤승이 밤에 지윤을 찾아가서 말하기를, “지원ㆍ승득ㆍ이열이 이미 모두 귀양갔으니 공의 우익(羽翼)이 제거된 것인데, 이제 또 저까지 탄핵하니 화()가 장차 공에게 미칠 것입니다. 일찍 도모하소서." 하였다. 지윤이 말하기를, “내일에 내가 왕에게 청하여 그대로 하여금 나와서 일을 보도록 명령하겠다." 하고, 드디어 우()에게 아뢰기를, “경복흥과 이인임은 역신 홍윤(洪倫)의 일가인데, 전하께서 그 족속을 베어 멸하는 것을 보고 큰일을 도모하고자 하니, 급히 군사를 출동시켜 잡게 하소서." 하였다. 약속을 정하고 나서, 또 그 아들 익겸을 시켜 목인길에게 용맹한 군사를 청하여 다음날 아침에 궁문에 모이기로 약속하였다. 인길이 말하기를, “없애려는 것은 인임뿐인가." 하니 익겸이 경복흥ㆍ최영ㆍ이희필(李希泌)ㆍ이임(李琳)ㆍ도길부(都吉敷) 등을 열거하였다. 인길이 달려가 인임 등에게 고하여 다른 데 피하여 자면서 사태를 관망하도록 하였다. 익겸이 몰래 교주도(交州道) 군사 20여 명을 이끌고 비밀히 인임의 동정을 엿보고 있었다.

○ 이튿날 지윤이 도당에 이르러 복흥ㆍ인임에게 말하기를, “김윤승이 지금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는데 대간의 탄핵을 당하였습니다. 만일 다른 사람으로 대신한다면 과거를 보이는 것이 지체되어 반드시 농사 시기와 겹칠 터이니, 김윤승으로 하여금 일을 보게 하자." 하였다. 복흥이, 지윤이 나간 틈을 타서 최영과 의논해서 지윤을 제거하고자 하여, 거짓 꾸며서 말하기를, “공이 스스로 대궐에 가서 아뢰는 것이 좋다." 하였다. 지윤이 드디어 나가서 대궐에 이르러 왕의 명령을 거짓으로 꾸며서 대관(臺官)을 불러 윤승으로 하여금 일을 보도록 재촉하였다. 마침 지평(持平) 이길조(李吉祚) 등이 상소하기를, “지윤이 널리 붕당을 결성하고 권력을 마음대로 행하며 총재(?)를 죽이려고 꾀하는데, 윤승은 지윤의 목구멍과 혀 노릇을 하니, 반드시 그 모의를 알 것입니다. 옥에 가두어 국문하소서." 하였다. 상소문을 장차 올리려 하는데, 복흥ㆍ인임ㆍ최영ㆍ희필ㆍ길부ㆍ박임종(朴林宗)ㆍ조민수ㆍ임견미ㆍ인길 등이 궐내로 들어왔다. 지윤이 그 도당 빈천익(賓天翊) 20여 명을 시켜서 옷 속에 갑옷을 입고 칼을 차고 궐하에 모여 인임 등이 나오는 것을 엿보아 치려 하였다. 복흥ㆍ인임 등이 인길을 시켜 우()에게 아뢰기를, “노신(老臣)이 변란이 있음을 듣고 아뢰지 않으면, 신도 역시 죄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지윤이 익겸을 시켜 신에게 군사를 청하니, 그 심정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지윤이 곧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그런 일이 있습니다. 복흥ㆍ인임ㆍ임은 홍윤의 처족이고, 희필은 홍윤의 처부(妻夫)인데, 신이 역당을 베고자 하는 것을 꺼려서 장차 신을 죽이려 하기 때문에, 군사를 청하여 방비한 것입니다." 하고는, 최영이 칼을 차고 있는 것을 보고, 눈을 부릅뜨고 무릎으로 기어서 앞으로 나와 빼앗을 것같이 하였다. 최영이 칼집을 잡고 몸으로 우()를 가리며 지윤에게 말하기를, “신하로서 왕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면 그에 해당한 나라에서 정한 형벌이 있다. 또 네가 두 시중만 죽이려고 하는 것인가." 하였다. 지윤이 말하기를, “어찌 시중뿐이랴." 하며, 자리에 있는 여러 재상을 열거하며 항변하기를 마지않았다. 우가 지윤에게 나가기를 재촉하니, 지윤이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어째서 신만 먼저 물러가라 하십니까." 하며, 옷자락을 떨치고 달려나와서 문에 이르러 말에 오르려 하니, 임견미가 붙잡았다. 지윤이 좌우를 돌아보며 칼을 찾았으나 구하지 못하였다. 드디어 지윤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 지윤이 견미에게 말하기를, “그대와는 평소의 교분이 있으니 빨리 나를 죽여라. 내가 죽은 뒤에는 그대가 또한 내 뒤를 따라 죽을 것이다." 하였다.

이전에 윤승이 비밀리에 지윤에게 말하기를, “공이 총재(?)가 되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지윤이 말하기를, “인임이 있다. 더군다나 내 운명이 무오년이 되어야 운수가 길하다." 하였다. 윤승이 말하기를, “운수가 있다면 어찌 무오년을 기다릴 필요가 있소. 다만 나의 계교나 들어 보라." 하고, 드디어 변란을 꾀하여 말하기를, “황상(黃裳)은 어름어름하는 사람이니 좌시중이 되어야 하고, 공은 수시중(守侍中)이 되고, 익겸은 응양군(鷹揚軍) 상호군이 되고, 지원은 대사헌이 되고 저 윤승은 정당문학이 되고, 승득은 첨서밀직(簽書密直)이 적당하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지윤이 말하기를, “윤승의 계교를 듣다가 이 모양이 된 것을 후회한다." 하였다. 지윤ㆍ익겸ㆍ윤승이 드디어 참형을 당하였다. 지윤은 군졸 출신으로 여러 번 종군하여 공이 있어 재상에까지 이르렀다. 또 우()의 유모를 간통하여, 그것을 연줄로 왕에게 총애가 있게 되었으며 마음대로 발호하고 아부하는 자는 쓰고 저와 다른 자는 배척하며, 그 심복들을 대간에 배치하여 크게 권력을 부렸다. 첩이 많아서 거의 30명이나 되었는데, 오직 부자(富者)만 취하고 얼굴의 예쁜 것은 따지지 않았다. 따로 문호(門戶)를 세운 첩이 12명이나 되었다. 탐욕스럽고 음란하며 간사하고 속이어, 벼슬을 팔고 옥사를 팔아서 남의 노비를 얻은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또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벼슬을 요수(遙授)하고, 대신으로 녹을 받았다. 참형을 당하니, 사람들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또 그 도당 빈천익 등 20여 명을 베었다.

○ 삼사좌사(三司左使) 이자송(李子松)을 북원에 보내어 책명을 사례하였다.

○ 예의판서(禮儀判書) 문천식(文天式)을 나하추에게 보내어 답례하였다.

○ 국내의 죄인을 사면하였는데, 홍윤의 친족과 지윤의 당만은 용서하지 않았다.

○ 왜적이 밤에 착량(窄梁)에 들어와 군함 50여 척을 불태웠는데, 바다가 낮과 같이 밝았고, 죽은 자가 1천여 명이나 되었다. 만호 손광유(孫光裕)는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검선(劍船)을 타고 간신히 면하였다. 이전에, 최영이 광유를 경계하기를, “착량강 어귀에서 군사의 위엄만 보이고, 바다에는 삼가 나가지 말라." 하였다. 이날 광유는 착량을 떠나자마자 크게 취하여 깊은 잠이 들었는데, 적이 갑자기 이르니 드디어 참패하였다. 경성이 크게 진동하였다. 왜적이 또 강화부를 침범하니, 만호 김지서(金之瑞), 부사 곽언룡(郭彦龍)이 마리산(摩利山)으로 도망하였다. 왜적이 드디어 크게 노략하여 지서의 처를 사로잡아 갔다. 강화부 관리의 처녀 세 사람이 적을 만나,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서로 끌어안고 강에 빠져 죽었다. 광유ㆍ지서ㆍ언룡을 옥에 가두었다.

○ 심덕부를 서해도 원수로 삼았다.

○ 판개성 부사(判開城府事) 나세(羅世)가 아뢰기를, “군사를 끌고 강화에 들어가 왜적을 쳐서 쫓겠습니다." 하였다. 우가 그 뜻을 장하게 여겨 말 두 필을 주고, 드디어 나세ㆍ이원계(李元桂)ㆍ강영(姜永)ㆍ박수년(朴壽年)ㆍ조사민(趙思敏)을 보내어 강화에서 왜적을 치게 하고, 도통사 최영은 승천부(昇天府)에 주둔하여 방비하니, 적이 강화를 버리고 물러가서 수안(守安)ㆍ통진ㆍ동성(童城) 등 현을 노략질하여, 지나간 곳마다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동성에 이르러 말하기를, “금지하고 막는 사람 하나도 없으니 참으로 낙토(樂土)로다." 하였다. 이때에 적의 군중에서 도망하여 돌아온 아이가 있었는데, 여러 장수들이 불러서 적의 하는 짓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적들이 항상 말하기를, '두려운 것은 오직 머리가 센 최 만호뿐이다. 지난날 홍산(鴻山) 싸움에 최 만호가 오면 그 부하의 군사들이 앞을 다투어 우리 군사에게 말을 달려 짓밟으니 대단히 두렵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 삼사좌사 이희필(李希泌)을 동강(東江) 도원수로 삼고, 목인길ㆍ임견미 등 11명을 부()로 삼아 수성도통사(守城都統使) 경복흥의 통제를 받게 하고, 의창군(義昌君) 황상(黃裳)을 서강(西江) 도원수로 삼으며, 우리 태조ㆍ양백연ㆍ변안열 등 10명을 부()로 삼아, 경기도통사(京畿都統使) 이인임의 통제를 받게 하였다.

○ 경상도 원수 우인열이 보고하기를, “왜적이 대마도로부터 바다를 덮어 와서 돛과 돛대가 서로 이어질 정도입니다. 이미 군사를 보내어 요해처를 나누어 지켰으나, 적이 형세가 성대하고 방어할 곳이 많아서, 한 도의 군사로써 나누어 지키기에는 형세가 심히 위태롭고 약하니, 조전원수를 보내어 요해처를 방비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때에 강화에 있는 왜적이 서울에 아주 가까이 밀어닥쳐서 국가에서 방비하기에 겨를이 없는데, 또 이 보고를 받자 어찌 할 바를 몰랐다.

○ 여러 도에 명령하여 중을 불러 모집하여 군함을 짓게 하였다.

○ 최영이 아뢰기를, “교동(喬桐)과 강화는 적을 막는 요해처인데, 세력이 강한 자들이 다투어 전답을 점령하여 군량을 잇지 못하니, 두 고을의 사전(私田)을 혁파하여 군량에 충당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교동의 늙은이와 어린이를 내지에 옮기고, 젊은이들만 머물러 농상(農桑)을 다스리게 하였다.

○ 최영이 여러 원수들에게 각각 종사(從事) 10명을 내게 하고, 또 애마(愛馬)를 징발하여, 궁중에 딸린 창고에 속한 사람들을 군사로 만들어서 강화에 보내어 수자리를 살게 했다.

○ 여름 4월에 왜적이 울주와 계림(鷄林)을 침범하였다.

5()의 장정을 점고하여 군사를 편성하되 10칸 집에서는 장정 한 사람을 내고, 9칸 집 이하는 양식과 무기를 내어 군졸에게 주게 하였다.

○ 왜적이 또 울주를 침범하니, 원수 우인열이 가서 쳐서 9급을 베었다.

○ 김해 부사 박위(?)가 왜적을 황산강(黃山江) 어귀에서 쳐 29급을 베었다. 강에 빠져 죽은 적도 또한 많았다.

○ 목인길ㆍ홍중선을 문하찬성사로, 목충(睦忠)을 동지밀직으로, 왕빈(王賓)을 밀직부사로 삼았다.

○ 김승득ㆍ화지원ㆍ이열을 청주에서 베어, 머리를 서울에 전하였다. 이전에 체복사(體覆使) 최인철(崔仁哲)을 보내어 국문하니, 지원이 자복하기를, “지윤과 윤승이 대신을 죽이기를 모의하였는데, 나도 실상 참여하였다." 하였고, 이열은 말하기를, “전날 익명서는 실상 내가 한 소행이다. 내 이름자가 11획이니 용서하여 주시오." 하였다. 인철이 지원에게 묻기를, “이열도 참여하였는가." 하니, 지원이 대답하기를, “그런 일이 있다." 하였다. 이열이 자복하지 않다가, 매우 참혹하게 국문하니 드디어 자복하였다. 승득은 고문을 당하여 거의 죽게 되었으나, 그래도 자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원과 이열의 증거가 분명하므로 이에 자복하였다. 이인임이 경복흥ㆍ최영에게 말하기를, “이미 그 괴수를 베었으니, 이 무리들은 석방하여도 좋다. 다시 곤장을 쳐서 귀양보내는 것이 어떠한가. 하물며 죄는 두 번 가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 하였다. 최영이 말하기를, “지난날에 곤장을 쳐서 귀양보냈던 것은 조정의 정사를 비방하였기 때문이요, 오늘의 참형은 대신을 해치려고 한 때문이니, 모두 중한 죄인데 어찌 석방할 수 있는가." 하였다. 인임이 말하기를, “이열은 어떻게 조처할 것인가. 만일 이열의 익명서가 없었던들 우리의 오늘이 있겠는가." 하니 최영이 말하기를, “과연 이열의 한 짓이라면, 지윤이 살아 있을 때에 말할 수 있는데, 귀양간 뒤에도 오히려 말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우리를 속이는 것이다. 한꺼번에 베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이광보(李光甫)를 보내어 용진(龍津)에서 전함을 만들었다.

○ 왜적이 울주ㆍ양주(梁州)ㆍ밀성을 침범하여 거의 다 불사르고 노략질하며, 또 언양현(彦陽縣)을 침범하였다.

○ 밀직 이임을 경상도 조전원수로, 왕빈을 안동도 부원수로, 최공철을 강릉도 원수로 삼았다.

○ 왜적이 밀성군을 침범하니, 우인열이 적과 싸워 패하였다. 적이 영산현(靈山縣)에 이르니, 인열과 부원수 배극렴(裵克廉) 등이 율포(栗浦)에서 싸워 10여 급을 베었다.

○ 왜적의 배가 서강에 들어오니, 최영ㆍ변안열이 군사를 내어 물리쳤다.

○ 밀직부사 경의(慶儀)를 서경 도순문사 겸 서북면 부원수로 삼았다.

○ 성석인(成石?)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왜적이 여미현(餘美縣)을 침범하였다.

5월에 우리 태조가 삼사우사 김득제(金得齊), 지밀직 이임, 밀직부사 유만수와 함께 왜적을 경상도에 가서 쳤다.

○ 왜적이 밀성을 침범하니, 왕빈이 쳐서 물리쳤다.

○ 우가 순위부(巡衛府)에 이르기를, “손광유ㆍ김지서ㆍ곽언룡(郭彦龍)의 죄는 마땅히 군법으로 논하여야 하겠으나, 바야흐로 가뭄이 심하니, 사형을 감하여 모두 먼 곳으로 귀양보내라." 하였다. 최영이 탄식하기를, “지난번에 법을 굽혀 김진(金縝)을 용서하고, 지금 또 광유 등을 석방하니, 정사와 형벌이 이같아서야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오." 하였다. 우가 또 김진에게 옷과 말을 주어 소환하니, 최영이 불가하다 여겨 아뢰기를, “김진이 군사를 어루만지지 않았으며, 적을 보고도 전진하지 않아서 패군하기에 이르렀으니, 머리를 보전하는 것도 다행이거늘, 이제 도리어 후하게 하사하며 소환하니, 훗날에 공을 세우는 자가 있으면 무엇으로 대접하려 합니까. 상벌은 군주의 큰 권세이니, 거꾸로 시행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그만두었다.

○ 가뭄으로 기우제를 지내고, 또 사찰에 두루 기도하였다. 최영이 도당(都堂)에게 크게 말하기를, “국가의 정사와 형벌이 문란하여, 공이 있는 자는 상을 주지 않고 죄가 있는 자는 벌을 주지 않으니, 하늘이 어찌 비를 내리겠는가." 하였다.

○ 경성이 바다에 인접하고 있어, 왜적의 침입을 헤아릴 수 없기에, 도읍을 내륙지방으로 옮기려고 기로 윤환(尹桓) 등을 모아 놓고 동()ㆍ지() 두 글자를 써서 가부를 의논하였다. 여러 사람이 이전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후에 만일 변이 있으면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모두 동()자에 점을 찍고 서명하였으나, 오직 최영은 반대하고 군사를 징집하여 굳게 지킬 계책을 말하였다. 이인임이 말하기를, “지금 한재를 당하여 온 땅이 텅 비어 있어, 농부들이 밭가는 것을 멈추고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데, 또 군사를 징발하여 농사짓지 못하게 하는 것은 나라를 위하는 계책이 아니다." 하였다. 경복흥ㆍ최영 등이 태조의 진전(眞殿)에 가서 동()ㆍ지()를 점쳐 지()자를 얻었다. 우가 이르기를, “도적이 매우 가까이 왔는데 점만 좇을 수 있는가." 하고, 정당문학 권중화(權仲和)를 철원(鐵原)에 보내어 집터를 살펴보게 하였다.

○ 우인열이 정예 기병 5백 명을 보내어 왜적을 사불랑송지(沙弗郞松旨)에서 치니, 적이 무너져서 배를 타려고 다투다가 물에 빠져 죽고 화살에 맞은 자가 또한 많았다. 순라하는 군사가 또 말하기를, “적선이 해도(海島)에 숨었다 나타났다 하여 그 수를 알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때에 우리 태조가 행군하여 아직 이르지 않으니, 인심이 흉흉하고 두려워 공포에 싸였다. 인열의 급보가 계속하여 이르니, 태조가 이틀 길을 하루에 행군하여 적과 지리산 아래에서 싸웠는데, 거리가 2백여 보쯤 되는 곳에 한 적이 돌아서서 몸을 구부리고 손으로 궁둥이를 두드리며 두려울 것이 없다는 모양을 보여 모욕하였다. 태조가 작은 화살을 쏘아서 한 화살에 거꾸러뜨리니, 이에 적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기운을 빼앗겼다. 즉시 크게 깨뜨리니, 적의 무리가 낭패하여 산에 올라 절벽에 임하였는데, 칼을 내밀고 창을 뻗친 것이 마치 고슴도치털 같아 관군이 올라갈 수 없었다. 태조가 비장(裨將)을 보내서 군사를 거느리고 치게 하였다. 비장이 돌아와 말하기를, “바위가 높고 깎은 듯하여 말이 올라가지 못합니다." 하였다. 태조가 꾸짖고, 공정왕(恭靖王 정종(定宗))에게 휘하의 날랜 군사를 나누어 주어 함께 가게 하였다. 공정왕이 돌아와 말하는 것이 역시 비장의 말과 같았다. 태조가 말하기를, “그러면 내가 친히 가 보겠다." 하고, 휘하 군사에게, “내 말이 먼저 오르거든 너희들은 내 뒤를 따르라." 하였다. 드디어 말을 채찍질하여 이리 달리고 저리 달리어 그 지세(地勢)를 살펴보고 곧 칼을 빼어 칼등으로 말을 때렸다. 때는 한낮이라 칼빛이 번개 같았다. 말이 한 번 뛰어오르니, 군사(軍士)들이 혹은 밀고 혹은 붙잡으며 뒤를 따랐다. 이에 기운을 떨쳐 치니, 언덕에 떨어져 죽는 적이 태반이었다. 드디어 남은 적을 쳐서 섬멸하였다. 태조가 원래 인심을 얻었고, 또 군사가 정예하여 싸워서 이기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각 고을들이 가뭄에 구름과 무지개 바라보듯 하였다.

○ 김해 부사 박위(?)가 왜적을 황산강에서 쳐서 이겼다. 이전에, 왜선 50척이 먼저 김해 남쪽 포구에 이르러 뒤에 오는 적에게 방()을 붙여 보이기를, “우리들이 마침 순풍을 만났으니, 황산강을 거슬러올라 곧장 밀성을 치자." 하였다. 박위가 정탐해 알고서 강 양쪽 언덕에 군사를 매복하여 놓고, 주사(舟師) 30척을 거느려 기다리고 있었다. 적이 과연 방 붙인 것을 보고 큰 배 한 척이 먼저 강 어귀로 들어왔다. 복병이 일어나고, 박위가 또한 돌진하여 막아 치니, 적이 낭패하여 스스로 칼질하여 죽고 물에 빠져 죽어 거의 전멸하였다. 강주(江州) 원수 배극렴(裵克廉)이 또 왜적과 싸우는데, 적의 괴수 패가대만호(?家臺萬戶)가 보졸을 시켜서 좌우를 호위하고 말을 뛰어 앞으로 나오다가 진흙에 빠져서 멈추니, 우리 군사가 맞아 쳐서 베었다.

○ 왜적이 강화로부터 양광도 바닷가의 고을들을 쳐서 함락시켰다. 이전에 적선이 겨우 22척이었는데, 우리 전함을 빼앗은 것이 많아 50척이나 되었다. 정탐하는 군사가 우리 전함을 바라보고 우리 군사라고 여겨 백성들이 모두 믿고 피하지 않았다가, 죽고 상한 이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적이 또 경양(慶陽)과 안성군을 침범하니, 양광도 원수 왕안덕(王安德)이 겁내고 나약하여 싸우지 못하고, 부원수 인해(印海)와 양천(陽川) 원수 홍인계(洪仁桂)를 불러 퇴각시켜서 가천역(加川驛)에 머물면서 적이 돌아가는 길에서 요격하려 하였으나, 적이 바라보고 다른 길로 갔다. 안덕이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하늘을 부르짖으며 통곡하였다. 적의 간첩을 사로잡아 물으니 간첩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의논하기를, '만일 양광도 여러 고을을 침공하면 최영이 반드시 군사를 거느리고 내려올 것이니, 이에 빈 틈을 타서 바로 치면 경성을 도모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했다. 이전에, 적이 안성에 들어와서 삼[]밭에 복병하고, 포로 34명을 시켜 밭두둑 위에서 농부인 체하고 밭을 매어 속이게 하였다. 수원 부사 박승직(朴承直)이 세 원수가 온다는 말을 듣고, 역시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밭매는 자에게 묻기를, “적이 물러갔느냐. 세 원수가 어디 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적은 이미 물러가고, 세 원수가 쫓아갔다." 하였다. 승직이 그 말을 믿고 곧 안성 관사로 들어갔다. 적의 복병이 뛰어나와 포위하니, 승직이 단기(單騎)로 포위를 뚫고 빠져 달아나고, 군사는 많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수원(水原)에서 양성(陽城)ㆍ안성에 이르기까지 쓸쓸하여 사람의 자취가 없었다. 체복사 최인철이 조정에 돌아와서 속여 말하기를, “신이 왕안덕ㆍ홍인계ㆍ인해를 독려하여 직산현(稷山縣)에서 왜적을 쳐 50여 급을 베었습니다." 하니, 우가 인철에게 말과 백금을 주고 안덕 등에게 옷ㆍ술ㆍ말을 주었으며, 찬성사 양백연, 평리 변안열ㆍ임견미를 보내어 싸움을 도왔다.

○ 우()가 철원에 궁성을 쌓으라고 명령하니, 최영이 아뢰기를, “여름에 도읍을 옮기면 농사에 방해될까 걱정되고, 또 경성을 적에게 내주면 나라는 장차 날로 기울어질 터이니, 옳습니까." 하니, 일이 드디어 중지되었다.

○ 왜적 1백여 기가 남양(南陽)ㆍ안성ㆍ종덕(宗德) 등 현을 침범하고, 50척이 다시 강화를 침범하여 부사 김인귀(金仁貴)를 죽이고, 수자리 사는 군사로 사로잡힌 자가 1천여 명이나 되었다. 또 수원부를 침범하니 원수 양백연ㆍ나세가 전함 50척으로 쳐서 쫓았다. 나세가 강화 지경을 지나는데, 한 부인이 물가에 숨었다가 손가락질하며 말하기를, “적의 간첩이 저 민가에 들어 있습니다." 하였다. 나세가 빨리 달려가서 포위하고 불을 질러 적 29명을 죽였다.

○ 봉화불이 강화로부터 낮에도 올려져 끊어지지 않으니, 경성에 계엄을 내리고, 여러 원수를 보내어 동ㆍ서강(東西江)에 나누어 주둔하게 하며, 용사들을 소집하여 모두 벼슬로 상주고, 먼저 한 사람에게 베 50필씩을 주었다.

○ 여성군(麗城君) 민변(?)이 졸하였다.

○ 왜적이 또 강화를 침범하여 크게 죽이고 노략질하였다.

○ 경상도 도순문사 우인열이 병으로 사직하니, 배극렴으로 대신하였다.

6월에 사헌부가 탄핵하기를, “최인철이 명을 받고 사신으로 나갔다가, 제 마음대로 조정에 돌아와서 거짓으로 왜적에게 승첩하였다고 아뢰어 국가를 속이고 참람되게 상을 받았으니, 법으로 다스려 뒷사람을 징계하소서." 하니, 곤장을 때려 귀양보냈는데, 길에서 죽었다.

○ 왜적이 신주(信州)ㆍ옹진(甕津)ㆍ문화(文化) 등 현을 침범하니, 원수 조인벽ㆍ나세ㆍ심덕부가 적과 싸워 이기지 못하고, 군사를 더 보내 주기를 청하였다.

○ 왜적이 순천ㆍ낙안(樂安) 등지를 침범하니, 병마사 정지(鄭地) 18급을 베고, 3명을 생포하였다.

○ 가뭄으로 사면령을 내렸는데, 김속명(金續命)만은 용서하지 않았다.

○ 왜적이 서해도 안주(安州)를 침범하고, 또 장택현(長澤縣)을 침범하였다.

○ 우()가 도당(都堂)에 이르기를, “이제 들으니, 변방 백성으로 적에게 사로잡혔다가 요행히 도망하여 돌아온 자를 모두 적의 간첩이라 지목하여 곧 죽인다 하니, 대단히 불가한 일이다. 대개 고향을 생각하고 본토를 그리워하는 것은 인지상정인데, 하물며 부모 처자가 있는 사람이야 누가 돌아오기를 생각지 않겠는가. 다만 죽음을 두려워하여 적을 따른 것 뿐이다. 이제부터는 도망하여 돌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포상을 더하고, 실지로 간첩이라도 죽이지는 말고 관가에서 물자와 양식을 주어서 살게 하며, 만일 왜적을 베어 가지고 환국하는 자가 있으면 상을 더 주게 하라. 변방 고을에 방을 붙여 보이고, 명령을 어기는 자는 죄를 주라." 하였다.

○ 지문하 박보로(朴普老)를 서해도 조전원수로, 밀직부사 이인립(李仁立)을 서경 부원수로, 판밀직 한방언(韓邦彦)을 안주 원수로 삼았다.

○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안길상(安吉常)을 일본에 보내어 왜구를 금지할 것을 청하였는데, 길상이 일본에 도착하여 병들어 죽었다.

○ 왜적 2백여 척이 제주를 침범하고, 또 영강(永康)ㆍ장연(長淵)ㆍ풍주(?)ㆍ안악(安岳)ㆍ함종(咸從)ㆍ삼화(三和)ㆍ강서(江西) 등 현을 침범하였다.

○ 우가 재상에게 이르기를, “왜인이 비록 도적이나 그 시체를 묻어 주어야 할 터인데, 하물며 적에게 죽은 우리 강화 및 서해 백성의 시체가 그대로 뒹굴고 있는 것이 매우 많으니, 어찌 차마 볼 수 있는가. 궁내 창고의 돈과 베를 내어, 매장하여 주는 데 쓰게 하라." 하였다.

○ 가을 7월에 숭경부윤(崇敬府尹) 진영세(陳永世)를 연주(漣州)에 보내어 궁궐터를 보게 하였는데, 영세가 돌아와 말하기를, “오역(五逆)의 땅이라 도읍을 세울 수 없다." 하였다.

○ 북원이 선휘원사(宣徽院使) 철리첩목아(徹里帖木兒)를 보내 와서 정료위를 협공하자고 청하였다. ○ 전라도 수군도만호 정용(鄭龍) 등이 왜적이 제주를 침범한다는 말을 듣고, 병선 두 척을 거느리고 정탐하여 적의 배 한 척을 잡아서 모두 죽였다.

○ 왜적이 풍주(?)를 침범하였다.

○ 사신을 여러 도에 보내어 산성을 수축하였다.

8월에 진천군(晉川君) 강인유(姜仁裕)를 북원에 보냈다.

○ 찬성사 양백익(梁伯益)을 서해도 원수로 삼았다.

○ 왜적이 서해도 신주(信州)ㆍ문화(文化)ㆍ안악(安岳)ㆍ봉주(鳳州)를 침범하니, 원수 양백익(梁伯益)ㆍ나세ㆍ박보로(朴普老), 도순문사 심덕부 등이 공격하다가 패해서, 장수를 보내어 싸움을 도와 주기를 청하였다. 우리 태조와 문하평리 임견미ㆍ변안열, 밀직부사 유만수ㆍ홍징(洪徵)을 조전원수로 삼았다.

○ 일본이 중 신홍(信弘)을 보내 와서 답례하고, 글을 전하기를, “고려에 침범하는 초적(草賊)들은 도망한 무리들이라, 우리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니, 금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였다.

○ 최공철(崔公哲)을 의주(義州) 원수로 삼았다.

○ 왜적이 해주(海州)를 침범하였다.

9월에 우리 태조가 여러 원수와 함께 왜적을 해주에서 공격하였는데 변안열ㆍ임견미 등이 무너져 달아났다. 우리 태조가 장차 싸우려 할 적에, 투구를 백 수십 보 밖에 걸어 놓고 시험삼아 쏘아서 승부를 점쳤는데, 세 번 쏘아서 모두 꿰뚫었다. 말하기를, “오늘의 일을 알 수 있다." 하고, 해주의 동정자(東亭子)에서 싸워서 싸움이 한창일 때, 진흙 수렁의 넓이가 10여 척이나 되는 곳을 만났다. 태조의 말이 한 번 뛰어 건넜으나, 따르는 자가 모두 건너지 못했다. 태조가 대우전(大羽箭)으로 적을 17번 쏘았는데 모두 죽었다. 이에 군사를 몰아 쳐서 드디어 크게 깨뜨렸다. 이 싸움에서, 태조가 처음에 대우전 20개를 가졌었는데, 싸움을 끝내니 화살 3개가 남았다. 좌우에게 말하기를, “내가 모두 왼편 눈을 쏘았으니, 너희들은 가서 보라." 했다. 가서 보니 과연 모두 틀림이 없었다. 나머지 적들이 험한 곳에 의지하여 나무를 쌓아서 굳게 지키므로, 태조가 말에서 내리어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풍악을 울리게 하니, 중 신조(神照)가 고기를 베어 술을 올렸다. 군사에게 명하여 적의 쌓은 나무에 불을 지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넘쳤는데, 적이 형세가 궁하여 죽을 힘을 다해서 충돌하여, 화살이 태조가 앉은 앞의 병(?)을 맞혔다. 태조가 일어나지 않고 태연히 앉아서 김사훈(金思訓) 등을 시켜 쳐서 거의 섬멸하였다.

○ 왜적이 영광ㆍ장사(長沙)ㆍ모평(牟平)ㆍ함풍(?) 등지를 침범하였다.

○ 왜적이 또 해주ㆍ평주(平州) 두 고을을 침범하니, ()가 최영에게 월()을 주어서 원수 이희필ㆍ김득제(金得齊)ㆍ양백연ㆍ변안열ㆍ우인열 등과 함께 쳐서 쫓았다.

○ 왜적이 악양현(岳陽縣)을 침범하니, 원수 이임이 쳐서 적선 2척을 노획하였다.

○ 전 대사성(大司成) 정몽주를 일본에 보내어 답례하고, 또 왜구를 금지하기를 청하였다.

○ 왜적이 홍주(洪州)를 도륙하고 불사르고, 목사 지득청(池得淸)의 처를 죽이며, 판관(判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양광도 원수 왕안덕 등이 노현(蘆峴)에서 싸워서 패하였다. 이튿날 적이 또 온수현(溫水縣 충남 온양)을 침범하고, 이산영(伊山營)을 불태웠다. 원수 인해(印海) 등이 섶다리[薪橋]에서 싸웠는데, 밤에 적이 사면으로 포위하자 군사들이 놀라 무너져서 많이 살상되었다. 적이 또 진포(鎭浦)에서 한주(韓州)로 들어오니, 안덕이 장수를 보내어 싸움을 돕기를 청하였다. 우가 상산군(商山君) 김득제, 밀직부사 목충ㆍ왕빈에게 명하여 가게 했다.

○ 겨울 10월에 비로소 화통도감(?都監)을 설치하였다. 판사 최무선(崔茂宣)의 말을 따른 것이다. 이때에 원 나라 염초공장(?工匠) 이원(李元)이 최무선과 같은 동네 사람으로 무선이 몰래 그 방법을 물어서 하인 두어 사람을 시켜 사적으로 배워서 시험하여 보고 조정에 건의했다.

○ 경성을 수리하라고 명령하였다.

○ 왜선 40척이 동래현(東萊縣)을 침범하였다.

○ 여러 도의 군사를 징발하여 왜적을 방비하였다.

○ 왜적이 영주(寧州)ㆍ아주(牙州)를 침범하니, 왕안덕ㆍ홍인계ㆍ인해ㆍ김득제ㆍ목충ㆍ왕빈이 아주에서 싸워 쫓아 버리고, 3명을 생포하였다.

○ 왜적이 또 함열현(咸悅縣)을 침범했다.

○ 임신일에 찬성사 양백연을 안주 상원수로 삼았다.

11월에 인해(印海)를 청주 옥에 가두어, 이산(伊山)에서 패군한 죄를 다스렸다.

○ 우()가 시중 경복흥ㆍ이인임에게 토지 2백 결()과 노비 15명을 주고, 또 유모 장씨에게 토지 1백 결과 노비 10명을 주었다. 장씨는 죽은 동지밀직 김횡(?)의 종이었다. 김횡이 신돈에게 장씨를 뇌물로 주었는데, 신돈이 우에게 젖을 먹이게 하였다.

○ 왜적이 부여ㆍ정산(定山)ㆍ홍산(鴻山)에 침범하였다.

○ 왜적 1백 척이 김해부를 침범하고, 또 의창현(義昌縣)을 침범하니, 도순문사 배극렴이 적과 싸워 패하였다.

○ 왜적이 수안(守安)ㆍ동성(童城)ㆍ통진(通津) 등 현을 침범하였다.

○ 성변(星變)이 있으므로 사면령을 내렸다.

12월에 순천 병마사 정지(鄭地)가 왜적 40여 급을 베고, 2명을 생포하여 바쳤다.

○ 명 나라 황제가 우리나라 사람 정언(丁彦) 3 58명을 놓아 돌려보냈다.

○ 중 달명(達明)이란 자가 있었는데, 안주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충숙왕(忠肅王)의 동모제(同母弟) 덕흥군(德興君)의 아들이라 자칭하고, 몰래 반역을 꾀하였다. 판개성 부사 경보(慶補)를 보내어 잡아 와서 옥에 가두고 국문하니, 본래 선주(善州) 백성 왕가물(王加勿)이었다. 베고 아울러 그 무리 다섯 사람을 베었다.

○ 삼사좌사 이희필이 졸하였다.

○ 나하추가 사신을 보내어 양()을 바치었다.

 

 

[D-001]요수(遙授) : 지방에 있는 사람에게 중앙의 관직을 임명하나, 실제로는 취임하지 않는 것이다.

[D-002]오역(五逆) : 풍수설에 있는 말인데, 산수(山水)가 역행되는 5종류의 흉한 땅이다.

[D-003]() : 전쟁에 나가는 대장에게 독자적으로 생살(生殺)하라는 권한의 표시로 주는 도끼이다.

 

   

 

 

 

 

 고려사절요 제30   

 

 

 신우 1(辛禑一)

 

 

무오 신우 4(1378), 대명 홍무 11 

 

 

○ 봄 정월에 왜적이 연안부(延安府)를 침범하고, 2월에 또 안산(安山)ㆍ인주(仁州)ㆍ부평ㆍ금주(衿州)를 침범하였다.

○ 지간성군사(知杆城郡事) 전광부(田光富)가 탐욕하여 뇌물을 먹고 빼앗아 백성을 해치므로, 3일 동안 칼[]을 씌워 거리에 조리돌리고, 곤장을 때려 귀양보냈다.

○ 임신일에 지진이 있었다.

3월에 왜적이 태안군(泰安郡)을 침범하였다.

○ 판선공시사(判繕工寺事) 유번(柳藩)을 남경에 보내어 사은하고, 예의판서 주의(周誼)는 공민왕의 시호와 왕위 계승을 요청하게 하였다.

○ 왜적이 남양(南陽)을 침범해서 드디어 수원부를 불사르고 노략질하니, 부사 신인도(愼仁道)는 겨우 몸만 빠져 나왔으며, 원수 왕빈은 적과 싸워서 패하여 구원병을 청하였기에, 밀직부사 박수경(朴修敬)에게 명하여 가게 했다. 왜적이 또 한주(韓州)ㆍ임주(林州) 두 고을을 침범하였다.

○ 밀직부사 조희고(趙希古)를 한양도(漢陽道) 조전도병마사로 삼았다.

○ 여름 4월에 왜적이 덕풍(?)ㆍ합덕(合德) 등 현을 침범하고, 도순문사 영()을 불태웠다.

○ 왜선이 착량(窄梁)에 크게 모여 승천부(昇天府)에 들어와서 말을 퍼뜨리기를, “장차 경성을 침략한다." 하니, 중앙과 지방이 크게 진동하여 계엄을 내리고, 모든 군사를 나누어서 명하여 동ㆍ서강에 나가 주둔하게 하고, 호위 병졸을 궐문에 벌여 세워 적이 쳐들어오는 것을 대비하니, 성 안이 흉흉하였다. 방리(坊里)의 군사를 시켜서 성에 올라 바라보게 하였다. 판삼사사 최영이 모든 군사를 거느려 해풍군(?)에 주둔하고, 찬성사 양백연을 부사로 삼았다. 적이 정탐하여 알고 생각하기를, “최영의 군사만 깨뜨리면 경성을 엿볼 수 있다." 하여, 우리 군사가 주둔한 여러 곳을 그대로 지나쳐서, 서로 겨루지 않고 해풍으로 달려들어 곧장 중군(中軍)으로 향하였다. 최영이 말하기를, “사직의 존망이 이 한 번 싸움에 결정된다." 하고, 드디어 양백연과 함께 진격하였다. 적이 최영을 쫓으니, 최영이 달아났다. 태조(太祖)가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바로 나가서 백연과 합력하여 쳐서 크게 깨뜨리니, 적이 쓸려 흩어지는 것을 최영이 보고, 휘하 군사를 거느려 나와서 옆에서 공격하여, 적이 거의 전멸하고 남은 무리는 밤에 도망했다. 밤에 성 중에서 최영이 쫓겼다는 말을 듣고, 더욱 물끓듯하여 갈 곳을 알지 못하였다. ()가 나가 피난하려고 하자, 백관이 행장을 꾸리고 여러 겹으로 대궐에 모여 기다리고 있었는데, 여러 원수가 사람을 시켜 승전보를 드리니, 경성의 계엄을 풀고 백관들이 모두 하례하였다. 조정에서 최영의 공이라 하여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주었다.

5월에 가뭄으로 사면령을 내렸다.

○ 왜적이 서주(西州) 비인현(庇仁縣)을 침범하고, 또 수원부를 침범하였다.

○ 최공철(崔公哲)을 양광도 도원수로 삼았다.

○ 경성에 흉년이 들어, 베 한 필의 값이 쌀 3, 4[]였다.

6월에 왜적이 청주를 침범하여 그 기세가 매우 날래니, 우리 군사가 풍문만 듣고도 도망쳐, 적이 사방으로 나가서 치고 노략하였다. 우리 군사가 다시 틈을 타서 습격하여 10여 급을 베었다.

○ 일본 구주(九州) 절도사(節度使) 원료준(源了俊)이 중 신홍(信弘)을 시켜서 군사 69명을 거느리고 와 왜구를 잡았다.

○ 왜적이 또 목주(木州)ㆍ영주(寧州)ㆍ온수현(溫水縣)을 침범하였다.

○ 명 나라 황제가 최원(崔源) 등을 석방하여 돌려보냈다.

○ 우인열을 경상ㆍ양광ㆍ전라 3도 도체찰사로 삼았다. 인열이 왜적에게 이긴 첩서를 드리니, 술과 안장 갖춘 말을 주었다.

○ 왜적이 종덕(宗德)ㆍ송장(松莊)ㆍ영신(永新) 등 현()을 침범하니, 원수 최공철ㆍ왕빈ㆍ박수경(朴修敬) 등이 쳐서 물리쳤다.

○ 가을 7월에 정몽주가 일본에서 돌아왔는데, 구주 절도사 원료준이 주맹인(周孟仁)을 보내어 함께 왔다.

○ 왜적이 아주(牙州)를 침범하니, 최공철ㆍ왕빈ㆍ박수경 등이 쳐서 쫓았다.

○ 일본 중 신홍(信弘)이 왜구와 조양포(兆陽浦)에서 싸워 배 한 척을 잡아서 모조리 베고, 포로가 되었던 부녀 20여 명을 돌려보냈다.

8월에 경상도 원수 배극렴(裵克廉)이 왜적을 욕지도(欲知島)에서 쳐서 50급을 베었다.

○ 왜적이 장흥부(長興府)를 침범하니, 도순문사 지용기(池湧奇)가 탁사청(卓思淸)을 보내서 회령현(會寧縣)에서 싸워 9명을 베었다.

○ 왜적이 연안부와 해주를 침범하고, 또 금주(衿州)ㆍ양천(陽川)을 침범하였다.

○ 판숭녕 부사(判崇寧府使) 나세, 판밀직(判密直) 심덕부(沈德符)를 보내어 전함을 가지고 여러 섬에서 왜적을 크게 수색하였다.

○ 사헌부가 아뢰기를, “여러 도가 해마다 가물고 흉년이 들어 군량이 넉넉지 못하고, 백성이 도랑과 계곡에 뒹굴어 죽으니, 참으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 마땅히 수령을 시켜서 금년이 풍년인지 흉년인지 상황을 살펴, ()의 대소에 따라 곡식을 차등 있게 내어서 고을 창고에 저장하여, 내년의 흉년을 구제하고, 또 예상치 못한 쓰임에 대비하게 하소서.

또 첨설직(添設職)은 다만 군사의 공을 상주기 위함인데, 공로가 없이 한가하게 있던 자가 혹 뇌물을 바치고 청탁하여 속여서 얻어 명기(名器 명호(名號)나 거마 의복ㆍ의물 따위)를 지극히 천하게 만드니, 이제부터는 종군하여 공을 세운 자를 제외하고는 첨직을 주지 마소서." 하였다.

9월에 왜적이 서주(瑞州)를 침범하였다.

○ 사헌부가, 최원(崔源)이 남경에 있을 때에 김의(金義)가 사신을 죽인 것과 선왕이 훙서(薨逝)한 까닭을 숨기지 않았다고 탄핵하였다. 이에 최원을 옥에 가두고 국문하였으나 자복하지 않았으며 마침내 죽였다.

○ 다시 홍무(洪武) 연호를 시행하였다.

○ 왜적이 철주(鐵州)를 침범하고, 또 익주(益州)ㆍ공주ㆍ이산(尼山)ㆍ연산ㆍ회덕(懷德)ㆍ진동(珍同)ㆍ옥천ㆍ청산(靑山) 등 현을 침범하였다.

○ 문하평리 한방언(韓邦彦)과 판밀직 이임(李琳)을 양광ㆍ전라도 조전원수로 삼았다.

○ 겨울 10월에 왜적이 임주(林州)를 침범하고, 또 전주를 도륙하고 불태웠다.

○ 밀직부사상의(密直副使商議) 최재(崔宰)가 졸하였다. 최재는 강직하여 꺾이지 않았기에, 세상에서 중하게 여겼다.

○ 판도판서(版圖判書) 이자용(李子庸)과 전 사재령(司宰令) 한국주(韓國柱)를 일본에 보내어 왜구를 금지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 왕승귀(王承貴)ㆍ김광후(金光厚)ㆍ최준(崔準)ㆍ김한제(金漢?)ㆍ안익(安翊)ㆍ장하(張夏)ㆍ목자안(睦子安)을 밀직부사로 삼았다.

○ 판밀직사사 삼덕부를 남경에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고, 판도판서 김보생(金寶生)은 최원 등을 놓아 돌려보낸 것을 사례하게 했다.

○ 왜적이 영광ㆍ광주ㆍ동복현(同福縣)을 침범하니, 도순문사 지용기, 순천 병마사 정지(鄭地)가 쫓아 옥과현(玉果縣)에 이르렀다. 적이 미라사(彌羅寺)로 들어가니, 우리 군사가 포위하고 불을 놓아서 맹렬하게 공격하여 적이 스스로 불타 죽고, 1백여 필을 획득하였다. 이 싸움에 정지의 공로가 많았다. 승전보가 이르자, 용기와 정지에게 은 50냥을 각각 주었다.

11월에 문하평리 박보로(朴普老)를 안주 상원수 겸 서북면 도체찰사로 삼았다.

○ 왜적이 담양현(潭陽縣)을 침범하니, 지용기와 정지가 적과 싸워 17급을 베었다. 왜적이 또 익주(益州)를 침범하였다.

○ 정당문학 권중화(權仲和)와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 장보지(張補之)를 협계(峽溪)에 보내어 궁궐터를 보았다. 이때에 전 총랑(摠郞) 민중리(閔中理)가 아뢰기를, “도선(道詵)의 〈밀기(密記)〉에 실려 있는 북소(北蘇)ㆍ기달(箕達)이란 것이 바로 협계인데, 도읍을 옮길 만합니다." 하고 중화가 돌아와 말하기를, “북소의 옛 궁궐터 1 80칸을 발견하였다." 하였다. 조정의 의논이, 협계가 궁벽하게 산골짜기에 있어서 선박의 조운이 통하지 않는다 하여, 의논의 드디어 중지되었다.

○ 신사일에 지진이 있어 사면령을 내렸다.

○ 전 밀직부사 황숙경(黃淑卿)을 동북면 도순문사 겸 화령 부윤(和寧府尹)으로 삼았다.

○ 광주(廣州) 관할 안에 있는 지평현(砥平縣)을 나누어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유모 장씨의 고향이기 때문이었다.

12월에 왜적이 하동현(河東縣)을 침범하고 또 진주를 침범하니, 도순문사 배극렴이 사주(泗州)까지 추격하여 20여 급을 베었다.

○ 좌소(左蘇) 조성도감(造成都監)을 두었다. 이때의 의논이 도읍을 옮기려고 하는데, 국사(國史), 좌소(左蘇) 백악산(白岳山), 우소(右蘇) 백마산(白馬山), 북소(北蘇) 기달산(箕達山) 등의 세 곳에 궁궐을 창건했다는 글이 있어서, 이 공사가 있었다.

○ 전법사(典法司)에서 아뢰기를, “전 성균좨주(成均祭酒) 김문현(金文鉉)이 아비와 형을 죽였으니 만세에 용납지 못할 대역인데, 오히려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주색에 빠져 있으니, 만일 통절히 응징하지 않으면 어떻게 뒷사람을 징계하겠습니까. 법에 의해 처단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곧 문현을 옥에 가두고, 곤장 백 대를 때려 전의현(全義縣)에 귀양보냈다.

○ 사신을 여러 도에 보내어 호구를 점검하고, 서북면의 전례에 의하여 좌ㆍ우익 군사를 두었다.

○ 사헌부가 상소하기를, “수령이란 임금의 백성에 대한 근심을 나누는 중대한 책임이므로, 옛날부터 반드시 명망이 있는 자를 선택하였습니다. 근래에 군국의 일이 많아서 56()을 안집사(安集使)로 삼으면서 어질고 어질지 않음을 따지지 않아, 침탈하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자가 매우 많으니, 대간(臺諫)으로 하여금 심사하고 논평하여 가려서 보내기를 청합니다. 또 안렴사는 여섯 달 만에 교대하여, 가는 사람을 보내고 오는 사람을 맞아들임에 백성이 폐해를 입으니, 이제부터는 1년을 만기로 교대하기를 허락하소서. 국가에서 가끔 사신을 보내어 여러 도의 주ㆍ군의 산성을 수축하는데, 군정(軍丁)을 많이 징발해서 며칠이 못 되어 공사를 마치기 때문에, 곧 바로 다시 무너져서 그 폐해가 매우 크니, 이제부터는 다시 사신을 보내지 말고, 수령에게 시켜서 이웃 고을의 군정을 징발하여 농한기를 이용해서 수축하고, 만일 끝마치지 못하면 정지하여 명년을 기다려서 해마다 행하는 전례를 삼으소서. 공신의 호는 반드시 공이 있는 사람을 대우하는 것인데, 근년 이래로 양부(兩府)로부터 첨설직인 봉익(奉翊)에 이르기까지 조금의 공도 없는 자가 외람되게 공신의 호를 받으니, 만일 큰 공훈을 세우는 자가 있다면 무엇으로 상을 주시렵니까. 명기(名器)를 중하게 여기고 아껴 함부로 주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옛날에는 공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후()를 봉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군()을 봉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근래에 왜적으로 인하여 조운(漕運)이 통하지 못하여 창고가 모두 비어 버렸으니, 성재(省宰)의 봉군(封君)을 제외한 나머지 봉군은 녹을 주지 마소서." 하였다.

○ 정지를 전라도 순문사로 삼았다.

 

 

   

 

 

 

 

 고려사절요 제31   

 

 

 신우 2(辛禑二)

 

 

기미 신우 5(1379), 대명 홍무 12 

 

 

○ 봄 정월에 요동 도지휘사(都指揮司)가 진무(鎭撫) 임성(任誠)을 보내와서 포로된 사람과 도망한 군사를 찾았다. 그때 요동 사람들이 말을 전하기를, “고려가 군사를 보내어 북원(北元)을 돕는다." 하였기 때문에, 성을 보내어 허실을 탐지한 것이었다.

○ 간관이 아뢰기를, “나라에 3년을 지탱할 만한 저축이 없으면 나라 구실을 할 수 없다 하였는데, 지금 안팎의 창고가 모두 비어서 1년을 지탱하기에도 부족하니, 각 고을로 하여금 둔전을 고과하여 군량을 충족하게 하십시오.《주역(周易)》에 말하기를, '장자가 군사를 거느리고, 제자가 시체를 실으면 흉하다.' 하였는데, 지금 원수(元帥)가 너무 많아 명령이 여러 곳에서 나오기 때문에 체통이 문란하고 기강이 서지 않으니, 옛날 제도에 의거하여 한 명의 원수만 두고 나머지는 모두 파해서 다른 칭호를 주어 모두 원수의 지휘를 듣게 하십시오. 벼슬을 설치하고 직책을 나누는 것은 본래 정한 제도가 있는데, 양부(兩府)의 인원수가 많아서 60명이나 되고, 밀직(密直) 이하 봉군(封君)과 통헌(通憲) 이상 첨설직(添設職)도 매우 많으니, 모두 파하고, 공장(工匠)의 무리는 비록 공로가 있더라도 관직을 받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이미 받은 자는 직첩(職牒)을 빼앗을 것이며, ()으로 봉한 중들과 옹주(翁主)ㆍ택주(宅主)로 봉한 부녀자도 파하여 관작을 중하게 하소서.

또 왜적이 날마다 강성하여 여러 도를 침략하는데, 국가에서 급한 보고를 기다린 뒤에서야 장수를 보내고 군사를 내니, 거리가 멀기 때문에 장수가 도착할 때에는 적은 벌써 바다에 떠서 미처 싸움도 해 보지 못하며, 가령 싸운다 하더라도 이틀 길을 하루에 달려가기 때문에 군사와 말이 피곤하여 여러 번 패하였으니, 여러 도에 미리 장수를 보내어 도적이 이르거든 치게 하소서.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하여야 나라가 편안할 것입니다. 근래에 왜적과 홍수와 가뭄의 재앙으로 인하여 백성이 굶주리므로 마땅히 더욱 구휼하고 농상을 장려하여야 하는데, 이제 후소(後蘇)ㆍ좌소(左蘇)의 토목공사가 한창 일어나서 그치지 않으니, 백성이 부역 때문에 피곤하여 장차 구렁에 뒹굴어 죽게 되었습니다. 곧 토목의 역사를 정지하였다가 가을이 되거든 역사를 시작하소서. 현릉(玄陵)께서 경학(經學)을 숭상하여 그것으로 선비를 양성하고 인재를 취하였는데, 근년 이래로 시()와 부()로 선비를 뽑기 때문에 오로지 사장(詞章)만 숭상하여 경학이 점점 폐하여지니, 지금부터는 한결같이 현릉의 기유년 과거법에 따르소서." 하였다. 우가 그 말을 받아들였으나, 토목공사만은 파하지 않았다.

○ 경인일에 일포(日抱)ㆍ일배(日背)ㆍ일관(日冠)ㆍ일대(日戴)ㆍ일이(日珥)에 갓끈[] 같은 것이 둘렸다.

2월에 좌소(左蘇)에 천도(遷都)하는 계획을 파하였다.

○ 왜적이 순천(順天)ㆍ조양(兆陽) 등지에 침범하였는데, 정지(鄭地)가 적과 싸우다가 패하였다. 경복흥(慶復興)ㆍ황상(黃裳)ㆍ우인열(禹仁烈)이 함께 최영의 집에 가니, 영이 말하기를, “왜적의 침노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재상들은 어째서 걱정을 하지 않소. 정지 한 사람이 아무리 용맹한들 많은 도적을 어찌하겠소." 하니, 재상들이 부끄러워 하였다. 영이 또 일찍이 이인임에게 말하기를, “국가에 어려운 일이 많은데, 공이 수상(首相)으로 있으면서 어째서 이것은 걱정하지 않고 가산만 생각하오." 하였는데, 인임이 말이 없었다.

3월에 우인열을 경상도 상원수로, 목자안(睦子安)을 전라도 부원수로 삼아서, 모두 도순문사를 겸하게 하였다.

○ 심덕부(沈德符)ㆍ김보생(金寶生)이 남경에서 돌아왔다. 황제가 손수 쓴 조서를 내리기를, “그대들이 온 것은 간신의 속임에 따라 부득이하여 와서 속이는 것이다. 이제 그대들에게 명하여 돌아가게 하니, 그대들은 마땅히 고려의 화를 빚어낸 괴수에게 짐이 이르는 말을 전해야 할 것이다. 죄 없는 사자(使者)를 죽인 원수 문제는 집정대신이 와서 조회를 하고 해마다 바치는 조공을 약속대로 하지 않는다면, 훗날에 문책하는 군사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창해(滄海)를 우리와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을 왜 알지 못하는가. 만일 내 명령을 믿지 않는다면, 전함 수천 척과 정예 군사 수십만을 거느리고 돛을 날리며 동해에 대어 사지가 어디 있는가를 물을 것이다. 비록 그 도당을 다 멸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어찌 태반은 포로로 잡지 못하겠는가. 과연 감히 나를 가볍게 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예부 상서 주몽염(朱夢炎)이 전지를 기록하여 국인에게 보이기를,

"고려 국왕 왕전(?)이 표문을 받들어 조공할 때부터 신하라 일컬었는데, 그 표문에 '자손 대대로 신첩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수년 뒤에 왕이 간신에게 시해될 것을 어찌 알았으랴. 전후(前後)해서 사람을 보내어 바친 글에 모두 사왕(嗣王)의 사신이라고 말하였으나, 짐은 왕의 진실을 알지 못한다. 짐이 보건대, 고려가 중국에 대하여, () 나라 때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나라의 대부분의 임금과 신하가 은혜를 생각지 못하고, 거짓으로 사귀어 화를 만들기만 하였다. 옛날 한 나라 때에 고()씨가 왕위를 잃었는데 광무제(光武帝)가 그 왕호를 회복하여 주었으나 도리어 곧 변방을 침략하다가 한 나라 군사에게 크게 패하였고, 당나라가 천하를 차지하였을 때에도 일찍이 봉작(封爵)을 주었으나, 곧 다시 배반하여 부자가 포로가 되어 족성(族姓)이 마침내 끊어졌다. 송 나라가 일어남에 이르러서는 왕씨(王氏)가 나라를 차지했으나 거란과 여진(女眞)에게 핍박당하여 기꺼이 종노릇을 하였고, 원 세조(元世祖)가 중원에 들어와서 거의 망하게 된 본국을 구원하여 주었는데, 공연히 의심을 품고 사신을 죽여서 여러 번 항복하고 여러 번 반역하였다. 그러므로 자주 병화를 만난 것이다. 지금 왕전이 시해 당하고 간신이 권력을 훔쳐 먼저 우리와 원수를 맺으려 하니, 우리가 받아들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춘추(春秋)의 법으로 논한다면, 난신과 적자는 누구든 벨 수가 있으니 또 무슨 말을 하겠는가. 어찌하여 전후 5번이나 모두 이르기를, '사왕(嗣王)의 명을 배신(陪臣)이 받들었다.' 하는가. 중서성(中書省)에서는 사람을 보내어, 저곳에 가서 사왕이 어떠한지, 정령(政令)이 누구에게서 나오는지를 물어 보라. 만일 정령이 전과 같고 사왕이 잡혀 갇히지 않았다면, 마땅히 전왕(前王)의 약속대로 금년에 말 1천 필을 바치고 집정배신(執政陪臣) 반수(半數)를 보내어 조회하고, 명년에는 금 1백 근, 1만 냥, 좋은 말 1백 필, 세포(細布) 1만 필을 조공하여 해마다 이를 상례(常例)로 만들고, 또 잡아 간 요동 백성을 몇만 명이 되든지 따지지 말고 돌려보내라. 그런 뒤에야 왕위가 진실하고 정령이 행하여지는 것을 짐이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임금을 죽인 적이 하는 짓이니, 뒤에 많은 거짓이 아울러 생겨 반드시 멋대로 우리 변방을 침노하여 큰 화를 고려 백성에게 끼치게 할 것이다.

짐이 이 간신의 뜻을 추측하건대, 반드시 창해가 강토를 두르고 겹겹의 산이 굳고 험한 것을 믿고, 흉포하고 완악한 짓을 멋대로 부리고 날뛰는 데 뜻이 있어서 우리 조정의 군사가 출동하는 것을 한 나라ㆍ당 나라처럼 보는 모양인데, 한 나라ㆍ당 나라의 장수는 말 타고 활 쏘는 것을 잘하나, 배에는 서툴기 때문에 바다를 건너기에 고생을 하고 행군하는 것이 순조롭지 못하였다. 짐이 중국을 평정하고 호로(胡虜)를 물리침으로부터, 물과 육지를 모두 정벌하였으니 말 타고 활 쏘고 배 타고 하는 군대의 여러 장수가 어찌 한 나라ㆍ당 나라만 못하랴마는, 그래도 사신을 보내어 가서 보고 사왕(嗣王)의 안부를 묻는 것이니, 조칙과 같이 시행하라."

하였다. 이에 소루(邵壘)ㆍ조진(趙振)을 시켜 덕부(德符) 등을 따라서 왔다. 두 사람이 첨수참(甛水站)에 이르러, 본국에서 문천식(文天式)ㆍ오계남(吳季南)을 북원에 사신으로 보냈다는 말을 전하여 듣고 말하기를, “지난날에 사신을 죽이고 지금 또 두 마음을 품으니, 내가 고려에서 죽는 것보다는 우리나라에서 죽는 것이 낫겠다." 하고 마침내 이르지 않고 돌아갔다.

○ 전 전공판서(典工判書) 이연(李演)을 요동에 보내어 총병(摠兵) 반경(潘敬)과 섭왕(葉王)에게 우호를 닦게 하였는데, 연이 요동에 이르러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 왜적이 도강(道康)과 곡성(谷城)을 침범하고, 또 남원과 순천부를 침범하였다.

○ 여름 4월에 평리상의(評理商議) 한방언(韓邦彦), 밀직상의(密直商議) 김용휘(金用輝), 동지밀직 경의(慶儀)를 양광ㆍ전라ㆍ경상도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삼고, 찬성사 양백연(楊伯淵)으로 하여금 싸움을 독려하게 하며, 지밀직 홍인계(洪仁桂)를 부()로 삼고, 또 만호 정용(鄭龍)과 윤송(尹松)을 보내어서 전함 20척으로 왜적을 쫓아서 잡게 하였다. 민간에서 양백연 등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말하기를, “차라리 왜적을 만날지언정 원수(元帥)는 만나지 말아야 한다." 하였다.

○ 밀직부사 안익(安翊)을 양광도 도문순사로 삼았다.

○ 갑진일에 지진이 있었다.

○ 왜적이 안산군을 침범했다.

○ 우가 판개성 부사 이임(李琳)의 딸을 책봉하여 들여서 근비(謹妃)로 삼았다.

○ 왜적이 연안부를 침범하니, 김해군(金海君) 김유(金庾)와 연안군(延安君) 나세(羅世)를 보내어 전함 52척을 거느리고 가서 치게 하였다.

○ 왜적이 합포를 침범하니, 원수 우인열이 싸워서 물리치고 4급을 베었는데, 인열은 빗나간 화살에 맞았고, 우리 군사의 사상자가 80여 명이나 되었다.

5월에 왜적의 기병 7백과 보병 2천여 명이 진주를 침범하니, 양백연이 우인열ㆍ배극렴(裵克廉)ㆍ한방언ㆍ김용휘ㆍ경의ㆍ홍인계와 함께 반성현(班城縣)에서 싸워 13급을 베었으므로, 물건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 왜적이 풍주(?)를 불사르고 노략질했다.

○ 찬성사 홍중선을 의령에 내치었다. 이인임과 임견미 등이 중선과 함께 정방(政房)에 있었는데, 권세가 나뉘는 것을 싫어하여 중선을 계품사(啓稟使)로 삼아서 남경에 가게 하였다. 중선이 곧 떠나지 않으니, 간관 서균형 등이 평소 중선과 원한이 있고, 또 인임의 뜻을 맞추어 중선을 탄핵하여 시골로 쫓아 버리고,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을 중선을 대신하여 사부(師傅)로 삼았다.

○ 무인일부터 25일간이나 낮에 태백성이 보였다.

○ 나세와 김유가 왜적과 용강현(龍岡縣) 목곶포(木串浦)에서 싸워 적선 2척을 잡아 섬멸하였다.

○ 검교시중(檢校侍中) 권고(權皐)가 졸하였다. 고의 성품이 탐욕스럽고 잔인하여 일찍이 그 아들 간()과 토지를 다투다가 간의 아내를 차 낙태를 시켜 죽게 하였다.

○ 지문하(知門下) 심덕부를 서해 도원수로 삼았다.

○ 왜적이 신주(信州)를 침범하였다.

○ 윤달에 안주 만호 최원지(崔元沚)가 왜적을 영청현(永淸縣)에서 쳐서 이겼다.

○ 밀직제학(密直提學) 김도(金濤)를 파면하였다. 도가 홍중선에게 붙어서 인물을 비평하여 인임이 미워하였는데, 마침 도의 집 종이 옛 연경궁(延慶宮) 터의 돌을 도둑질하여 대리(臺吏)가 붙잡자, 인임이 대관(臺官)을 사주하여 탄핵해서 파면시켰다.

○ 사헌부에서 상소하여 5도에 새로 좌ㆍ우익(左右翼) 군사를 둔 폐단을 말하니, 우가 도당(都堂)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파하게 하였다.

○ 왜적이 울주(蔚州)를 침범하고, 또 계림부(鷄林府)를 침범하니, 일본해도포착군관(日本海盜捕捉軍官) 박거사(朴居士)가 왜적과 싸웠는데, 원수 하을지(河乙沚)가 구원하지 않았으므로 거사의 군사가 크게 패하여 겨우 50여 명만 살아 남았다. 이에 앞서 한주국(韓柱國)이 일본에서 돌아올 때에, 거사가 그 군사 1 86명을 거느리고 같이 왔었다.

6월에 왜적이 청도군(淸道郡)을 침범하니 원수 우인열이 쳤다.

○ 김속명(金續命)을 사면하였다.

○ 사헌부에서 남원 부사 노성달(盧成達)이 적이 물러간 뒤에 창고를 불지르고 쌀 1 30여 석을 훔쳐내어 항상 창기들과 잔치하고 즐기어 백성의 일을 구휼하지 않은 것을 탄핵하고, 그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다. 성달이 도망하니 이인임이 법대로 하지 않고 덮어 주었다.

○ 조인벽(趙仁璧)을 강릉도 원수로, 박수경(朴修敬)을 안동도 원수로 삼아 부윤을 겸하게 했는데, 왜적이 계림에서 강릉도로 향하기 때문이었다.

○ 북원이 첨원(僉院) 보비(甫非)를 보내어, 연호를 천원(天元)으로 고쳤다고 알려왔다.

○ 왜적이 용주(龍州)를 침범하니, 의주(義州) 만호 장여(張侶)가 쳐서 물리쳤다. 왜적이 또 울주ㆍ청도ㆍ밀성ㆍ자인(慈仁)ㆍ언양 등지를 침범하니, 우인열ㆍ배극렴ㆍ하을지가 울주에서 싸워 적선 7척을 사로잡았다.

○ 가을 7월에 찬성사 양백연을 합주(陜州)로 귀양보냈다. 백연이 경상도에서 돌아와 전공을 믿고 매우 교만하게 뽐내었다. 이인임ㆍ임견미 등이 미워해서 사헌부를 사주하여 백연이 몰래 처제와 간통하였고, 또 전 판사 이인수(李仁壽)와 죽은 밀직 성대용(成大鏞)의 첩을 간음하였다고 탄핵하여 드디어 관직을 삭탈해서 귀양보냈다. 그날 저녁에 환자(宦者) 임보(林甫)ㆍ한진(韓軫) 등이 왕의 명령을 거짓으로 꾸며서 백연을 소환하다가, 사자가 순작관(巡綽官)에게 잡혔다. 최영이 우에게 아뢰기를, “상호군(上護軍) 전천길(全天吉)이 일찍이 신에게 말하기를, '양백연이 두 시중(侍中)을 해치고 스스로 수상이 되려고 한다.' 하오니, 그 도당을 신문하여 치죄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천길ㆍ보ㆍ진과 전 제학 김도를 순군옥에 가두고, 영 등에게 명하여 국문하게 하였다. 천길ㆍ보ㆍ진이 모두 자복하기를, “백연은 스스로 좌시중이 되며, 최영을 수시중(守侍中)으로 삼고, 성석린은 대사헌을 겸하게 하며, 임보는 반주(班主)가 되기로 하였다." 하였는데, 도만이 자복하지 않아 고문을 받아서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나기를 3번이나 하다가, 다시 고문함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자복하였다.

또 백연의 아우 삼사좌윤 중연(仲淵), 상호군 계연(季淵), 밀직부사 자연(子淵)과 그 친구인 지문하사 윤승순(尹承順), 동지밀직 성석린ㆍ유만수(柳曼殊), 밀직부사 임의(任毅)ㆍ신렴(辛廉), 전법판서 안득희(安得禧), 판사 김남귀(金南貴)ㆍ조숙경(曹淑卿)ㆍ이귀(李貴), 전 직문하 홍임(洪琳), 전 소부윤(少府尹) 조희보(趙希甫)를 옥에 가두고 국문하니, 말이 홍중선에게 관련되었다. 드디어 판도판서 표덕린(表德麟), 전법판서 유번(柳蕃)을 보내어 백연과 중선을 귀양간 곳에서 죽이고, 그 집을 적몰하니, 국인들이 원통하게 여겼다. 중선은 표덕린 등이 온다는 말을 듣고서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하늘을 우러러 맹세하기를, “나는 분명히 죄가 없다. 만일 죄가 있어 형을 받는다면 하늘이 빛을 변하지 않을 것이고, 만일 죄가 없이 원통하게 죽는다면 하늘이 반드시 위엄을 보일 것이다." 하였다. 죽은 뒤에 과연 하늘에서 크게 번개가 치고 바람이 부니, 고을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또 도ㆍ보ㆍ진ㆍ계연ㆍ남귀ㆍ숙경ㆍ임()을 죽여 머리를 거리에 매달고, 도ㆍ진의 집을 적몰하였으며, 석린ㆍ승순ㆍ만수ㆍ의ㆍ귀ㆍ희보는 곤장을 때려서 수졸(戍卒)에 충당하고, 자연ㆍ중연ㆍ득희ㆍ염은 시골로 쫓아버렸다. 천길도 옥에서 죽었다. 도의 문생인 진사 10여 명이 문 밖에 이르러 시체를 보호하고, 이종(李悰)이란 사람은 시체를 안고 냇물에 들어가 그 피를 씻고 옷을 벗어 입히고, 삿자리로 싸고, 그 머리는 망()에 넣어 달아매고는 재배하고 가니, 당시 사람들이 의롭게 여겼다.

○ 왜적이 낙안군(樂安郡)을 침범했다.

○ 영녕군(永寧君) 왕빈(王彬)을 북원에 보내어 연호 고친 것을 하례하였다.

○ 전 판삼사사 손홍량(孫洪亮)이 졸하였다.

○ 이자용(李自庸)이 일본에서 돌아오는데, 구주(九州) 절도사(節度使) 원료준(源了俊)이 포로된 우리 백성 2 30여 명을 돌려보냈다.

○ 왜적이 무릉도(武陵島)에 들어와서 반 달을 머물다가 물러갔다.

○ 왜적이 울주에 머무르면서 벼와 기장을 베어 양식을 삼고, 기장(機張)ㆍ언양까지 침노하니, 땅을 쓴 듯이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우인열이 군사를 모집하여 동래현에서 싸워 7급을 베었다.

8월에 왜적이 여미현(餘美縣)을 침범하고, 또 수주(隨州)ㆍ곽주(郭州)를 침범하였다.

○ 요동도사(遼東都司)가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게 공문을 보내어 말하기를, “근자에 들으니, 나하추가 사람을 시켜 합라(哈刺)ㆍ쌍성(雙城)을 경유해서 은밀히 고려에 보내어 예를 행하였고, 호주(胡州 북원(北元))도 사람을 시켜 앞서 고려에 가서 공무의 회의를 하였다 하는데, 생각하건대 본국(고려)이 일찍이 여러 번 사신을 보내서 우리 조정에 조공하여 신하의 예를 이미 정하였으니,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나하추 등이 비록 사람을 은밀히 보내더라도, 본국이 어찌 다시 그와 교통할 수 있는가. 오랑캐 사신을 잡아서 사람을 보내어 압송(押送)하라. 그렇지 않으면 간악한 것이 저절로 밝혀질 것이니,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하였다.

○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지용기(池湧奇)를 전라도 원수로 삼았다.

○ 경상도 원수 우인열ㆍ배극렴ㆍ박수경, 병마사 오언(吳彦)이 왜적을 사주(泗州)에서 쳐 크게 깨뜨리고 43급을 베었다.

9월에 우()가 유모 장씨(張氏)를 지평현(砥平縣)에 귀양보냈다. 이보다 먼저, 정당문학 허완(許完)과 동지밀직 윤방안(尹邦晏)이 그 아내를 시켜 장씨와 결탁해서 우에게 참소하여, 내재추(內宰樞) 임견미ㆍ도길부를 제거하기를 청하였다. 우가 견미 등에게 명하여 개인 집으로 돌아가 출입을 금하도록 하였다. 견미 등이 경복흥ㆍ이인임ㆍ최영에게 달려가 고하기를, “허완 등이 우리 두 사람을 죽이고 여러분에게도 이르려 하니, 화가 장차 일어날 것이다." 하였다. 완의 무리가 왕의 명령을 거짓으로 꾸며서 최영을 부르니, 영은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복흥ㆍ인임 등과 함께 흥국사(興國寺)에 모여서 백관ㆍ기로(耆老)를 모아놓고 의논하여, 장씨를 국문하자고 청하였다. 우가 급히 영을 부르니, 영이 아뢰기를, “이제 일국의 신민이 실망하고 있으니, 전하께서 만일 여러 사람의 뜻을 좇는다면 신이 들어가 뵙겠습니다." 하였다. 우가 말하기를 "경이 병으로 여러 날을 조회하지 않으니 한 번 볼 겸 실망한 일에 대해서 묻고자 한다." 하였다. 영이 들어가 뵈려 하니, 재상들이 말리며 말하기를, “간인(奸人)이 안에 있으니 경솔히 들어가서는 안 된다. 공이 가면 이 군사가 반드시 혼란할 것이니, 군사가 혼란하면 나라가 편안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영이 그 말을 좇았다.

이에 양부ㆍ대간이 함께 대궐에 나아가, 장씨를 하옥해서 신문하여 다스리기를 청하였다. 우가 듣지 않으니, 영의 무리가 장씨의 족당인 강유(康侑)ㆍ권원순(權元順)ㆍ권원보(權元甫) 등을 가두고 국문하였다. 우가 장씨의 말을 누설시킨 것에 노하여 환자 정난봉(鄭鸞鳳)을 하옥하고, 경복흥ㆍ목인길을 불러 이르기를, “내가 임금으로서 유모한 사람 구하지 못하겠는가. 석방하고 다스리지 말라." 하였다. 영 등이 더욱 굳게 청하니, 우가 완과 방안을 하옥하고, 영에게 군사를 파하라고 명령하며 이르기를, “경은 어떤 도적을 막으려고 하기에 군사를 끼고 있으면서 오지 않는가. 경이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여러 대의 충신이라 하더니, 충심이 어디 있는가." 하였다. 최영이 아뢰기를, “신이 만일 부르시는 명령에 응하여 들어가면 군사가 반드시 따를 것이며, 군사를 끌고 대궐에 들어가면 신의 죄는 마땅히 베어야 합니다. 또 신이 어찌 궐하에 나가서 죽고자 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주상의 뜻이 아닌 것 같으므로 감히 못합니다. 신의 몸은 비록 작사오나 관계되는 바는 심히 크오니, 만일 간인의 손에 죽는다면 국가가 위태할 것입니다." 하였다. 또 대간과 중방(重房)을 거느리고 장씨를 내치기를 청하니, 우가 이에 장씨를 인임의 집에 보냈으며, 죽이지는 말고 국대부인(國大夫人)의 작위(爵位)는 삭탈하라 하였다. 영 등이 대궐에 나아가 사례하였다. 문하평리 김유가 영에게 말하기를, “신하로서 임금에게 항거하는 것은 불가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니, 영이 노해서 우에게 아뢰어 유를 하옥하였다. 장씨가 늘 궁중에 있으면서 공공연하게 뇌물을 받으며, 불법적인 일을 많이 행하였다. 우가 일찍이 자주 왕비의 처소에 가니 장씨가 아뢰기를, "예에 군왕은 반드시 날짜를 가려서 비빈과 동침하는 법인데, 지금 어째서 들개처럼 어울립니까." 하였다. 이때에 와서 대간이 불경죄를 아울러 탄핵하여 귀양보내고, 완ㆍ방안ㆍ유ㆍ원순ㆍ원보를 베었으며, 김유는 곤장을 때려 합포(合浦)에 귀양보내고, 또 장씨의 양녀서(養女?) 손원미(孫元美)를 베었다.

○ 왜적이 반성현을 침범해서 확산(確山) 꼭대기에 올라 목책을 세워서 스스로 보존하고 있었다. 우인열ㆍ박수경ㆍ오언이 합심해서 포위하고 공격하여 이겼으며, 머리 34급을 베었다. 왜적이 또 단계(丹溪)ㆍ거창(居昌)ㆍ야로(冶爐) 등의 현을 침범하여 가수현(嘉樹縣)에 이르니, 도순문사 김광부(金光富)가 적과 싸우다가 패하여 죽었다. 왜적이 또 산음ㆍ진주ㆍ사주ㆍ함양을 침범했다.

○ 사신을 서해ㆍ양광도에 보내서 수군을 점검하여 경상ㆍ전라도에 있는 왜적에 대비하였다.

○ 겨울 10월에 문하평리 이무방, 판밀직 배언(裵彦)을 남경에 보내어 세공을 바치고 진정표(陳情表)를 올리기를, “신이 태어난 지 10년 만에 신의 아비 전(?)이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조모 홍씨(洪氏)가 곧 신에게 명하여 상차(喪次)에서 상사를 주관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슬피 울부짖을 줄만 알고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여러 신하들이 조모의 명령을 받들고 신에게 임시로 국사를 맡아 보라고 청하므로, 신이 비록 사양하여 피하려 하였으나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표문을 갖추고 신의 서명을 청해서 들어가 천자께 아뢰고, 선신(先臣)의 시호와 신의 작명을 하사하기를 빌었는데, 세월이 흐르고 흘러 지금에 이르도록 밝은 명령의 내림을 받지 못했사오니, 신이 비록 어리석고 어리나 어찌 두렵고 황공하지 않겠습니까. 사적으로 생각하건대, 죽은 아비는 능히 천명이 돌아가는 것을 알아서 나라를 들어 복종하였는데, 수명이 길지 못하여 갑자기 돌아가셨고, 반신(叛臣) 김의가 사신을 죽이고 북방으로 달아났는데, 조모는 이미 늙고 신은 또 어리고 약하여, 더할 수 없이 어려운 일이 많은 때입니다. 성명(聖明)하신 천자께서 보전하여 주시는 혜택을 입지 않으면 장차 어떻게 존립을 꾀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므로 표문을 받들고 멀리서 바라보며 날마다 덕음이 이르기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배신(陪臣) 덕부(德符)가 서울(남경)로부터 돌아왔으므로, 공경히 성지를 받들고 읽었는데, 송구스러워 땀을 흘리며 몸둘 곳을 몰랐습니다. 조모 홍씨가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내 손자가 나이 어려서 사리를 분명히 알지 못하고, 여러 신하들이 또 스스로 진달하기가 어려우니, 내가 마땅히 표문을 올려 아뢰어야 하겠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배신 이무방ㆍ배언 등을 시켜 조모의 표문을 싸서 금 31 4, 1천 냥, 백세포(白細布) 5백 필, 흑세포 5백 필, 2백 필을 함께 가지고 서울로 가게 하오니,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 선신의 귀부(歸附)한 공을 생각하시고 조모의 궁박한 정상을 통찰하시어, 선신의 시호를 주시고 신의 습작(襲爵)을 명하시며, 해마다 조공하는 물건도 정한 수량에 구애받을 것 없이 소방(小邦)이 힘에 따라 마련하여 바치도록 용납하시면, 선신이 지하에서 웃음을 머금고 우리 자손을 인도하여 대대로 성조(聖朝)의 번신(藩臣)이 될 것이니, 이것은 신의 지극한 소원이요, 지극한 다행입니다." 하였다.

왕태후의 표문에 아뢰기를, “첩이 듣건대, 자고로 제왕이 바다 안팎을 통치하므로, 만방의 백성들이 모두 신첩이어서 남자는 신하가 되고 여자는 첩이 되니, 그 종류는 비록 다르나 그 성품은 같으며, 그 형세는 비록 다르나 그 정은 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한 지아비와 한 지어미가 자기 진정을 다하지 못하면 임금이 그 공을 이룰 수 없다.' 한 것입니다. 지금 첩은 사세가 박절하여 하늘에 부르짖을 뿐입니다. 폐하는 곧 하늘입니다. 보고 듣는 것을 우리 백성을 통하여 하는데 하늘이 말을 못하므로 폐하께서 대신하여 말씀하시니, 첩이 하늘의 위엄을 무릅쓰고 마음속에 있는 것을 남김없이 전달하는 바입니다. 첩이 16세 때에 선신 왕도(王燾)를 섬겨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정()이요, 다음 아들은 전(?)입니다. 정의 아들은 흔()과 지(?)가 차례로 왕위를 이었다가 모두 일찍 죽어 아들이 없고, 전이 가장 뒤에 즉위하였는데, 첩에게 효도를 다한 것은 국인이 다 알고 있으며 천지가 보셨습니다. 폐하께서 즉위하심에 미쳐 전이 천명이 돌아가는 것을 알아서 즐겁게 귀부하였으니, 폐하께서도 또한 그 충성을 아셨을 것입니다. 불행히도 단명하여 갑자기 죽었으므로 의심을 사게 되었고, 전하는 말이 실지와 다르게 폐하께 들렸으니 폐하께서 노하시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너무 갑작스럽게 죽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의심을 산 것이지, 다른 변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신을 죽인 도적 김의는, 중도에서 전의 죽음을 듣고 곧 간계를 내어서 심왕(瀋王)을 세워 왕을 삼으려고 오랑캐 땅으로 도망가서, 지금까지 감히 환국하지 못하고 있으니, 본국이 간여하지 않은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또 들으니, 멸한 나라를 일으켜 주고 끊어진 대를 계승시켜 주는 것은 성인의 큰 정사라 합니다. 하물며 나라가 멸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았고, 대가 끊어지는 데까지 이르지 않음에 있어서겠습니까. 지금 우가 전의 고자(孤子)로서 임시로 국사를 맡아 보면서 표문을 올려 시호를 내리실 것과 왕위를 계승하게 하여 주실 것을 청한 것이 이미 해가 넘었습니다. 첩과 국인이 크나 작으나 할 것 없이 밤낮으로 멀리 바라며 덕음(德音)을 기다리나, 아직껏 내리시지 않으셨습니다. 폐하는 천지이십니다. 천지 사이에서 성대하게 만물을 발육시켜 각각 그 성()을 얻게 하는데, 소방(小邦)만이 왕화를 흡족히 받지 못하오니, 첩이 실로 애통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또 생각하건대, 소국이 바닷가에 있어서 왜국과 인접하여 날마다 서로 적이 되어 있기 때문에, 집정하는 신하들이 모두 장수가 되고 안에 있는 자가 적으니, 폐하의 명대로 그 반수(半數)로써 조회하러 들어간다면 국방에 소루하게 될 것입니다. 혹시라도 왜적이 뜻을 얻게 된다면, 어찌 소방의 불행이 아니겠으며, 조정의 걱정이 아니겠습니까. 소국의 땅이 척박하여 금은이 산출되지 않는 것은 중국에서 아는 바이며, 말이 2종류가 있는데, 호마(胡馬)는 북방에서 오는 것이고, 향마(鄕馬)는 나라 안에서 산출되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말은 나귀와 같아서 좋은 것을 얻을 수 없고, 호마는 백에 한두 마리밖에 안 되니, 이것도 또한 중국에서 아는 바인데, 근래에는 왜적으로 인하여 거의 다 손상되었습니다. 포필(布匹)은 나라 안에서 나기는 하지마는, 수효가 1만 필이나 되면 참으로 수를 채우기가 어렵습니다. 요동에서 유리하여 온 백성은, 현재 방을 붙여서 불러모으는 중에 있습니다. 첩이 젊어서부터 한 번도 망언을 한 적이 없는데, 하물며 감히 하늘을 속이겠습니까. 첩이 대덕(大德) 무술년에 나서 나이 82세가 되었으니, 오늘 내일에 곧 세상을 하직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죽은 자식 전이 일심으로 폐하의 덕화를 향하던 아름다운 일이 민멸하여 나타나지 않고, 혈혈한 외로운 손자가 세상에 설 수 없게 된 것을 차마 보지 못하여, 예법을 범하고 심정을 호소하여 폐하께서 한 번 깨닫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여, 선왕의 시호를 주시고 습작(襲爵)의 명령을 내리시며, 세공의 조서를 거두어 소방으로 하여금 사사로이 그 편의를 도모하여 시절에 따라 토산물을 바치는 것을 영구히 준수하게 하시면, 첩이 마땅히 안심하고 죽는 날을 기다리겠고, 죽은 자식 전도 지하에서 보은하기를 도모할 것입니다. 첩이 한 여자로서 두 아들과 세 손자가 서로 이어서 봉양함을 받았는데, 하루아침에 급하고 어려운 일을 만나서 성명(聖明)의 세상에 변명함이 없다면, 장차 어떻게 선왕을 지하에서 보겠습니까. 지금 사람들은 십금(十金)의 자산만 있어도 오히려 자손에게 전하여 잃어버리지 않으려 하거든, 하물며 한 나라이겠습니까. 하물며 늙은 소가 송아지를 핥는 것 같은 자정(慈情)이겠습니까. 첩이 표문을 씀에 임하여, 눈물이 나와서 말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 찬성사 목인길ㆍ밀직부사 목자안ㆍ양제(梁濟)를 보내어 왜적을 전라도에서 쳤다. 이보다 먼저 인길이 묘당에서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왜적이 주ㆍ군을 침략하는데 우리들은 여기에서 배불리 먹고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으니,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인임은 그 말이 자기에게 저촉되는 것에 노하여 인길을 내보냈다.

○ 삼사좌사 권중화, 문하평리 조민수(曹敏修)를 보내어 회암(檜巖)에 집터를 보았는데, 서운관(書雲觀)에서 말하기를, “도선(道詵)의 이른바 좌소(左蘇)가 곧 이 땅이다." 하였기 때문이었다.

12월 을해일에 지진이 있었다.

○ 동지밀직 경의(慶儀)를 서경 원수로 삼았다.

○ 우가 그 장인 이임을 위하여 연회를 열어, 환관과 함께 풍악을 베풀고 대단히 즐겼는데, 얼마 후에 정색하고 이르기를, “옛 사람의 말에, 사람은 묵은 사람을 구하고 옷은 새것을 구하라고 하였는데, 지금 신하들이 내 좌우에 있으면서 나의 잘잘못을 말하여 서로 반성하고 깨우쳐 주니, 비록 참소하는 말이 있어도 내가 믿지 않을 것이다. 그 전에 유모 장씨가 나를 꾸짖고 때리고 하였으니, 나라 생긴 이래로 나같이 요물의 손에 곤욕을 본 사람이 없다. 다행히 헌사(憲司)에서 규탄하고 적발하여 멀리 귀양보내니 궁중이 조금 편안해졌다. 밖에는 기년(耆年) 석덕(碩德)이 있어서 여러 정사를 맡고 있으니, 안에서 너희들과 술에 취하여 즐기기로 무엇이 해롭겠느냐." 하였다.

○ 사헌부에서 상소하여 장씨를 베기를 청하였다.

○ 나하추가 사람을 보내어 매와 양을 바쳤다.

 

 

[D-001]장자가……흉하다 : 주역》 사괘(師卦), “장자(長子)가 군사[]를 거느려야 하는데, 제자로 군사를 거느리게 한다면 필연코 패전하여 송장을 메고 올 것이니 흉하다." 하였다.

[D-002]창해(滄海)를……못하는가 : 이 말의 뜻은, “고려가 바다를 믿고 복종하지 않는 모양이나, 중국에서도 그 바다를 함께 가지고 있는데 어찌 바다만을 믿을 것인가." 하는 뜻이다.

[D-003]보고……하는데 : 《서경》에 이르기를, “하늘이 보는 것은 백성이 보는 것을 통해서 보고, 하늘이 듣는 것은 백성의 귀를 통해서 듣는 것이다." 하였다.
출처 : ▒ 한 산 草 堂 ▒
글쓴이 : 천하한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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