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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려사절요 제29권 공민왕4

장안봉(微山) 2013. 5. 28. 23:01

고려사절요 제29   

 

 

 공민왕 4(恭愍王四)

 

 

경술 19(1370), 대명 홍무 3 

 

 

○ 봄 정월 갑오일에 혜성(彗星)이 동북방에 나타났다. ○ 우리 태조(이성계(李成桂))가 기병 5천 명과 보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동북면에서 황초령(黃草嶺 함남 함흥(咸興))을 넘어 6백여 리를 가서 설한령(雪寒嶺 평북 강계(江界))에 이르고, 7백여 리를 가서 갑진일에 압록강을 건넜다. 이날 저녁에 서북방에서 자줏빛의 서기가 공중에 가득히 차고 그 그림자가 모두 남쪽으로 향하니, 서운관(書雲觀)에서 말하기를, “맹장의 기운입니다." 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내가 이성계(李成桂)를 보냈으니, 반드시 그 징험일 것이다." 했다. 이때 동녕부 동지(東寧府同知) 이오로첩목아(李吾魯帖木兒 이원경(李原景)), 태조가 온다는 말을 듣고, 우라산성(?羅山城 봉천성(奉天省) 회인현(懷仁縣) 동가강(?佳江) 오른쪽 오녀산성(五女山城))으로 옮겨 험한 곳에 웅거하여 막으려 하였다. 태조가 야돈촌(也頓村)에 이르자 오로첩목아가 와서 싸움을 걸었으나, 조금 후에 무기를 버리고 두 번 절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선대는 본래 고려 사람이니, 신복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며, 3백여 호를 거느리고 항복했으나, 그 추장 고안위(高安慰)는 아직도 성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으니, 우리 군사가 이를 포위하였다. 이때 태조는 활과 살을 가지고 있지 않아 종자의 활을 가지고 아기살로 적을 쏘았는데, 무려 70여 발을 쏘아 모두 그 얼굴을 맞히니, 성 안 사람들이 놀라 기운이 빠졌다. 고안위는 밤에 처자를 버리고 줄에 매달려 성을 넘어서 도망하였다. 이튿날 두목 20여 명이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항복하니, 여러 산성도 풍문만 듣고 모두 항복했는데, 그 호수가 무려 만여 호나 되었다. 노획한 소 2천여 마리와 말 수백 필을 모두 그 주인에게 돌려 주니, 북방 사람이 크게 기뻐하여, 저자로 사람들이 몰려가듯 귀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동으로는 황성(皇城)에 이르고, 북으로는 동녕부(東寧府)에 이르고, 서로는 바다에 이르고, 남으로는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모두 텅 비게 되었다. ○ 여진의 만호 궁대(弓大)가 토산물을 바치고, 부락 1백 호로써 정릉(正陵)에 예속하기를 청하였다. ○ 임자일에 지진이 있었다. ○ 왕이 왕륜사(王輪寺)에 행차하여 부처의 치사리(부처의 이에서 나온 사리)와 호승(胡僧) 지공(指空)의 두골을 보고, 대궐 안에 맞아들였다.

2월에 왜적이 내포(內浦)에 침범하여 여러 주의 조세를 약탈하고, 선주(宣州 평북 선천(宣川))에 침범해 오니, 양백연(楊伯淵)이 맞아 쳐서 적의 머리 50여 급을 베었다. ○ 우리 태조가 군사를 이끌고 돌아와서 이원경(李原景) 3백여 호를 바치고, 양백연도 두목 50여 명을 잡아서 돌아왔다. 이원경은 곧 오로첩목아(吾魯帖木兒)이다. ○ 나하추(納哈出)가 사신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고는 관직을 요구하였으며, 또 황금 8냥으로써 부인의 허리띠를 구하였다. 나하추에게 삼중대광 사도(三重大匡司徒)의 관직을 주고 올이 가는 베 2필과 부인의 금띠 하나를 하사하고, 황금은 돌려보내었다.

3월에 달단왕(??) 합라팔독(哈刺八禿)과 야선불화(也先不花)가 사신을 보내어 예물을 가지고 왔다. ○ 오왕(吳王)과 회왕(淮王)이 사신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쳤다. ○ 왕이 대를 이를 아들이 없는 것을 걱정하여, 의릉(毅陵)을 개장하려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 여름 4월에 영전(影殿)에 관음전(觀音殿)을 지었다. ○ 문수회(文殊會)를 연복사(演福寺)에서 베풀었는데, 신돈에게 먼저 가도록 명하고, 곧 승선(承宣)과 위사(衛士)에게 신돈을 호위하게 하였으며, 왕도 친히 행차하여 참석하였다. ○ 명 나라 황제가 보낸 도사(道士) 서사호(徐師昊)가 산천에 제사지내고, 충혜왕(忠惠王)의 딸인 장녕공주(長寧公主)를 돌려보냈다. 장녕공주는 곧 덕녕공주(德寧公主)의 소생이다. 신돈이 좌사의 대부 오중륙(吳中陸) 등을 시켜 글을 올리기를, “부인은 한 남편을 섬기고 세상을 마치는 법인데, 장녕공주는 원조(元朝) 때에 음행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으며, 원 나라가 망할 무렵에도 능히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대명에 포로가 되었으니, 심히 부끄러운 일입니다. 천자께서 우리 조종(祖宗)의 후손임을 생각하여 우리에게 돌려보내셨는데, 만약 맞아서 서울에 둔다면 종묘를 대하는 면목에 어찌하겠으며, 국인(國人)의 이목에도 어찌하겠습니까. 공주를 먼 변방에 두어 그 생명을 보전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에 비가 오니, 왕은 영전(影殿)의 역사에 방해될까 염려하여 절과 신사(神祠)에서 날이 개기를 기도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춘추(春秋), '비가 왔다. 비가 오지 않았다.'고 써서 비를 걱정하고 비를 걱정하지 않음을 표시하여, 포폄함이 엄격하였다. 하물며 5월을 맞아 농사일이 한창 급한데, 하늘이 만약 비를 내려 주지 않으면 거듭 흉변이 이르러 도적이 일어날 것이다. 왕은 이를 염려하지 않고 영전의 역사를 위하여 날이 개기를 빌었는데, 먹을 것이 떨어져서 백성이 떠돌아다니면 영전이 준공되더라도 그것을 지킬 수 있으랴. 심하다. 왕의 미혹됨이여." 하였다.

정릉(正陵)을 지키는 민호 1 14호를 두고, 또 전지 2 2 40결과 노비 46구와 베 1 5 2 93필을 능 곁에 있는 광암사(光岩寺)에 바쳐 명복을 빌었다. 왕이 군신과 함께 같이 맹세하기를, “뒷 세대의 임금과 신하가 이 맹세를 따르지 않고 이 절에 바친 것을 침탈하거나 도용(盜用)하면, 신이 반드시 죄를 줄 것이다." 하였다. ○ 황제가 상보사승(尙寶司丞) 설사(?)를 보내 와서 왕을 책봉하고는 인()과 금단(錦段)을 주고 의제(儀制)와 복용(服用)은 본국의 풍속에 따르도록 허락하였다. ○ 성준득(成准得)이 명 나라 서울에서 돌아왔는데, 황제가 새서(璽書)를 내렸다.

"요사이 사신이 돌아왔기에 국왕의 정사를 물으니 말하기를, '왕이 불도에만 힘쓰고 있으며, 바닷가를 지나오는데 백성들이 바다에서 50, 혹은 3, 40리 떨어진 데서만 살고 있었습니다.' 하기에 짐이 그 까닭을 물으니, 왜놈들이 침범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어, '성곽이 어떠하더냐.'고 물으니, 백성은 있어도 성은 없다고 하며, '갑병이 어떠하더냐.'고 물으니, 엄숙한 기상은 보지 못하였다고 하며, '왕의 거처가 어떠하더냐.'고 물으니, 거처는 있어도 정사를 청단(聽斷)하는 곳은 없다고 하였다. 짐이 이내 생각해 보니, 만약 과연 이와 같다면 왕을 위하여 심히 염려된다. 짐이 비록 덕은 부족하지마는 중국의 임금이 되었으며, 고려왕이 이미 신이라 일컫고 조공을 바쳤으니, 사체가 옛날의 예절과 부합된다. 무릇 제후국의 형세가 위태롭게 되었는데, 짐이 위태함을 붙들어 주는 도리로 왕에게 개유하여 이를 알리지 않을 수 없다. 중고 이후로 왕공(王公)이 요해처를 설치하여 그 나라를 지켰는데 지금 왕이 백성은 있어도 성이 없다면 백성의 생명이 장차 위태로워질 것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군사를 없애지 않았는데 지금 왕이 무비를 정돈하지 않고 있다면 나라의 위엄이 장차 위태로워질 것이며, 백성은 먹거리를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데 지금 왕이 바닷가의 땅을 경작하지 않고 있다면 백성의 먹거리가 장차 위급하게 될 것이며,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반드시 정사를 청단하는 처소가 있는 법인데, 지금 왕은 거처하는 집은 있어도 정사를 청단하는 처소는 마련하지 않았으니, 배신(陪臣)에게 존엄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만일 혹 이를 마련하더라도 사치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역대의 군주는, 중화와 사이(四夷)를 논할 것 없이, 인의와 예악을 행해야만 백성을 교화하여 아름다운 풍속을 이룰 수 있는데, 지금 왕은 이를 버리고 힘쓰지 않으며, 날마다 재()를 지내고 계()를 지키는 것을 일삼아서 죄와 원한에서 벗어나 내생의 복을 구하기를 바라니, 불경의 설()에 이런 내용이 있기는 하지만 왕도를 높이지 않고 불도를 높이니, 그 요령을 잃은 것이다. 짐이 어릴 때 중이 되어 선강(禪講)을 또한 참구(參究)하였는데, 부처가 있다는 것만 들었을 뿐이요, 생사를 초월함은 전혀 증험하지 못하였다. 불교에 힘써서 나라를 잘 다스린 자는 실로 고금에 없었으니, 양무제(梁武帝)의 처사가 귀감이 될 만하다. 지금 왕이 능히 선왕의 도를 행하여, 백성에게 이익되는 것을 일으키고 해되는 것을 제거해서 부모 처자로 하여금 배부르게 먹고 따뜻하게 입게 하여서 각기 편안한 생활을 누리게 한다면, 인구가 날로 번성할 것이다. 이 도가 만약 행하여지면 복덕(福德)의 응보로서 반드시 궁중에서 왕자가 날 것이니, 이는 수행의 큰 것이다. 짐은 인간과 신의 주인이 되었으므로 천지·백신(百神)의 제사에 희생을 감히 빼놓지 못하였다. 듣건대 왕의 나라에서는 가축이 번성하지 않는다고 하니, 경내의 산천과 성황의 제사에 무엇을 바치는가. 나라를 보유한 임금은 마땅히 사전(祀典 국가의 전례(典禮)로 정한 일정한 제사)을 존중해야 될 것인즉, 유강공(劉康公)도 말하기를, '나라의 큰일은 제사와 군사에 있다.' 하였다. 만약 군사가 갖추어지지 않고 제사가 전례에 맞지 않는다면, 그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랴. 지금 오랑캐[蒙古]의 운수가 이미 다 되었으나, 사막의 백성을 일시에 통일할 수 없다. 그래서 짐의 군사가 요동과 심양에 이르기 전에 혹시 광포한 자가 나온다면, 중국의 근심이 되거나, 아니면 고려를 침범할지도 모른다. 더구나 왜놈이 해도(海島)에 드나든 지도 10여 년이나 되니, 왕이 나라의 허실을 어찌 두루 알지 못하랴. 모두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왕이 이를 막으려 한다면, 웅무(雄武)의 장수와 용맹한 군사가 아니고는 멀리 국경 밖에서 싸울 수 없을 것이며, 왕이 만약 지키려고 한다면, 해자를 깊게 파고 성벽을 높이 쌓으며 그 저축을 많이 하고, 사방의 원병이 있지 않고서는 능히 그 예봉을 꺾어 적을 사로잡지 못할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왕의 책임이 심히 무겁다고 할 수 있다. 지혜가 있는 자라야만, 환난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 방지하고 위태로움을 전환시켜 편안하게 만들 수 있으니, 왕이 이를 살펴서 도모하라. 사신의 보고에 의하여 왕이 법복을 마련해서 종묘를 받들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짐이 매우 기뻐하여 이제 왕의 관복과 악기, 그리고 배신(陪臣)의 관복과 대통력(大統曆)을 주노니, 그곳에 도착되거든 받도록 하라."

또 왕에게 서적을, 왕비에게는 관복을 하사하였다.

6월에, 관음전(觀音殿)의 제3층에 대들보를 올리다가 들보에 눌려서 죽은 자가 26명이나 되었다. 태후가 이 말을 듣고 역사의 중지를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 장자온(張子溫)이 명 나라 서울에서 돌아왔는데, 황제가 그 편에 본국의 조하의(朝賀儀)와 금룡저사(金龍紵絲)를 하사하였다. ○ 신돈·이춘부(李春富) 등이 마암(馬巖) 영전(影殿)의 역사를 정지하기를 두 번이나 청하여 왕이 그 청을 따랐으나, 왕륜사(王輪寺)의 영전을 다시 수리하게 하였다. ○ 황제가 예부 주사(禮部主事) 백례(栢禮)를 보내 와서 여러 왕자를 책봉한 조서를 반포하고, 시의사인(侍儀舍人) 복겸(卜謙)에게는 과거 보이는 조서를 반포하게 하였다. 또 백호(百戶) 정지(丁志)와 손옥(孫玉)을 보내 와서, 난수산(蘭秀山)의 반적(叛賊) 진군상과 진괴일(陳魁一) 등을 잡아서 돌아갔다. 이보다 앞서 진군상 등이 강남(江南)에 거주하면서 명 나라에 거짓 항복하여 관리를 죽이고, 도당 1백여 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배를 타고 와서 고부(古阜)에 거주하였다.

○ 가을 7월에 홍무(洪武) 연호를 처음 시행하였다. ○ 삼사좌사 강사찬(姜師贊)을 명 나라 서울에 보내어 책명(冊命)과 새서(璽書) 준 것에 사례하고, 아울러 원 나라에서 준 금인(金印)을 바치게 하였다. 그리고는 탐라의 일을 아뢰고, 악공을 청하였다. ○ 황제가 중서성 선사(中書省宣史) 맹원철(孟原哲)을 보내 와서 조서를 내렸다.

"짐은 본래 농가에서 나서 원 나라의 세상에서 편안히 살았는데, 경신군(庚申君 원 나라 순제(順帝))이 어찌나 황음하고 혼약(昏弱)하던지 기강이 크게 무너지고, 이로 인하여 호걸이 모두 일어나 국내가 갈가리 나누어졌다. 원 나라 군사가 중원 여기저기서 싸웠으나 끝내 능히 다스리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 그러나, 난리를 일으킨 무리들이 맨 먼저 천하에 화를 끼치고, 강토를 빼앗아 왕자(王者)와 패자(?)가 되려고 하였지만, 그들의 소행을 보면 예에 합당하지 못하였기에 모두 멸망되었으니, 이것 역시 하늘의 뜻이다. 이때 짐의 나이가 24세였는데, 요란한 시기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난리를 피하였으나 마침내 편안히 살 수 없어서, 몸을 군중(軍中)에 의탁하였다. 전쟁에 종사한 지 3년 동안, 많은 영웅들이 성공하지 못하고 백성들만 소란하게 한 것을 보고, 짐이 군사를 거느려서 강(江 양자강(揚子江))을 건너 장수를 훈련하고 군사를 조련하여, 하늘의 명령을 받들고 정토(征討)한 지가 지금 16년이 되었다. 강포한 자를 평정하고 천하를 통일하여 대통(大統)이 이미 바르게 되니 백성들이 모두 편안하여졌다. 금년 6 10일에 좌부장군(左副將軍) 이문충(李文忠)과 부장군(副將軍) 조용(趙庸) 등이 사자를 보내와서 아뢰기를, '5 16일에 군사를 거느리고 북으로 사막에 이르러, 응창부(應昌府)에서 원 나라 황제의 손자 매적리팔라(買的里八刺) 및 그 후비(后妃)와 보책(寶冊) 등의 물건까지 얻었는데, 경신군(庚申君)은 벌써 4 28일에 이질로 응창에서 죽은 것을 알았습니다. 대군이 이르는 곳마다 남김 없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하였으며, 중서성(中書省)에서 아뢰기를, '마땅히 그 손자 및 그 후비와 보책을 태묘(太廟)에 포로로 바쳐야 합니다.' 하였으나 짐이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해 보니 차마 하지 못할 점이 있다. 군왕이 망하는 것은 천운에 달려 있는데, 남은 어린 손자를 포로로 바쳐서 그 몸에 앙화(殃禍)를 내리는 일은 짐이 차마 할 수 없다. 더구나 짐도 본래 원 나라 백성이며, 천하를 요란스럽게 만든 것은 실로 짐이 시작하지 않았다. 지금 사해를 평정하고 우리 백성들을 전리에서 휴식시키는 것도, 짐이 그렇게 만들지 않았고 역시 천운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아직 신민이 짐의 뜻을 알지 못할까 염려되므로 천하에 널리 알리는 바이다."

8월에 사헌부(司憲府)에서 복색을 바꾸기를 청하니, 그 말을 따랐다. ○ 태상박사(大常博士) 박실(朴實)과 정언(正言) 김도(金濤)와 춘추관 수찬(春秋館修撰) 유백유(柳伯濡)를 보내어 명 나라 서울에 가서 과거를 보게 하였더니, 김도가 제과(制科)에 합격하였다. ○ 우리 태조와 서북면 상원수 지용수(池龍壽)와 부원수 양백연(楊伯淵) 등에게 명하여 동녕부(東寧府)를 치게 하였다. 일찍이 기새인첩목아(奇賽因帖木兒)는 원 나라에서 벼슬하여 평장이 되었다. 원 나라가 망하니, 분사요심(分司遼瀋)의 관원 평장 김백안(金伯安), 우승(右丞) 합라파두(哈刺波豆), 참정(參政) 덕좌불화(德左不花) 등과 함께 망한 원 나라의 남은 무리들을 불러모아 동녕부에 웅거하였는데, 그 아버지 기철의 죽음에 원한을 품고 우리나라의 북쪽 변방에 쳐들어와서 원수를 갚으려 하므로, 왕이 명하여 이를 치게 하였다. ○ 원 나라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배주(拜住)를 판사농시사(判司農寺事)로 삼고, 한복(韓復)이란 성명을 하사하였다. 처음에 우리 태조가 우라(?)를 항복받을 적에, 무너진 담 속에서 우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사람을 시켜 나아가서 보게 하니, 한 사람이 벌거벗고 서서 얼굴을 가리고 울고 있었다. 잡아서 물으니 그가 말하기를, “나는 원조(元朝)의 장원 배주인데, 귀국의 이인복(李仁復)이 나와 동년(同年 동방급제(同榜及第))이다." 하였다. 태조가 곧 옷을 벗어서 입히고 말을 주어 타게 하고는 함께 오니, 왕이 후하게 대우했다. 배주가 태조를 매우 공손히 섬겼다. ○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윤강(尹控)을 중국 서울에 보내어 친왕을 봉건(封建)한 것을 하례하게 하였다.

9월에 왕이 영전의 규모가 좁고 작다 하여 이를 헐고 다시 짓게 하니, 백성들이 매우 고통스러워 하였다. ○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치사(致仕)한 윤택(尹澤)이 졸하였다. 윤택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그는 항상 주머니 한 개를 차고 다니면서 맛좋은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주머니에 넣었다가 어머니에게 드렸다. 또 연경(燕京)에서 노닐 적에, 길에서 다른 사람이 잃은 금 백 냥을 보고 그 주인을 기다리고 있으니, 그 주인이 울면서 사례하고 갔다. 한평생을 베이불과 해진 돗자리로 생활하면서도 태연하였다. ○ 공부 상서 권균(權鈞)을 명 나라 서울에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게 하였다.

○ 겨울 10월에 왕이 시중 이춘부(李春富) 등에게 이르기를 "겨울철에 우레 소리가 나고 나무에 상고대가 끼어 천도가 순하지 못하다. 이것은 나의 부덕의 소치이지만, 옥사의 판결이 공평하지 못하고 오래도록 판결이 미루어진 데도 까닭이 있다. 추정도감(推整都監)을 설치한 것은 본래 여러 관사를 규찰하려고 한 것이었는데, 경 등이 판사(判事)가 되어 그 직책을 다스리지 않으니 정치하는 도리에 비추어 어떠한가. 상고의 선왕이 모두 친히 정사를 청단하였으니, 지금부터는 대간과 6부로 하여금 날마다 본관에 출근하여 각기 친히 일을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 영전의 역부를 놓아 보냈다.

11월 정해일에 우리 태조와 지용수(池龍壽) 등이 의주에 이르러서 뜬다리를 만들어 압록강을 건넜는데, 사졸들이 3일 만에 모두 다 건넜다. 이날 저녁에 갑자기 천둥이 치고 비가 오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병마사 이구(李玖)가 말하기를, “길조를 어찌 의심하겠는가." 하였다. 여러 원수가 이유를 물으니, 이구가 말하기를, “용이 움직일 때는 반드시 천둥이 치고 비가 오게 마련인데, 지금 상원수(지용수(池龍壽))가 그 이름이 용() 자인데 강을 건너는 날에 천둥치고 비가 내리니 싸움에 이길 징조입니다." 하니, 여러 사람의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무자일에 나장탑(螺匠塔)에 이르니, 요성(遼城)과의 거리가 2일 노정이었다. 군수품 대부분을 그곳에 남겨 두고, 7일분의 양식만 가지고 떠났다. 비장 홍인계(洪仁桂)·최공철(崔公哲) 등에게 날랜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게 하여 기축일에 나아가서 요성을 습격하였다. 저들이 우리 군사가 소수임을 보고는 가볍게 싸움에 응했으나, 대군이 잇달아 이르니 성 안 사람들이 바라보고 낙담하였다. 그 장수 처명(處明)이 날래고 용맹함을 믿고 그래도 막아 싸우니, 태조가 이원경(李原景)을 시켜 그에게 타이르기를, “너를 죽이기는 매우 쉽지마는, 너를 살려서 쓰고자 하니 빨리 항복하라."고 하였다. 그 말을 따르지 않으니 이원경이 말하기를, “네가 우리 장군의 재주를 모르기 때문이다. 네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단번에 쏘아서 가슴팍을 꿰뚫을 것이다." 하였으나, 처명이 항복하지 않았다. 태조가 활을 쏘아 일부러 투구를 스치게하고, 원경을 시켜 타일렀으나, 역시 그 말을 따르지 않으므로 태조가 또 그 다리를 쏘니, 처명이 화살에 맞고 달아났다. 얼마 후에 다시 와서 싸우려고 하므로, 원경을 시켜 타이르기를, “네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곧 네 얼굴에 쏠 것이다." 하니, 처명이 말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리면서 항복하였다. 저쪽의 어떤 사람이 성에 올라 부르짖기를, “우리들은 대군이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항복하고자 하였으나, 성을 지키는 장수가 강제로 우리들로 하여금 막아 싸우게 하였으니, 고려 군사가 만약 힘을 다하여 공격한다면 성을 빼앗을 수 있다." 하였다. 성이 매우 높고 험준하며 화살이 빗발처럼 쏟아지고, 나무와 돌까지 섞여서 쏟아졌으나, 우리의 보병이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성 가까이 가서 급히 공격하여, 드디어 함락시켰다. 새인첩목아(賽因帖木兒)가 도망하였으므로, 김백안(金伯顔)을 사로잡고 성의 동쪽으로 군사를 물러나게 하였다. 이튿날 군사가 성의 서쪽 10리 되는 곳에 주둔하였다. 이날 밤에 붉은 기운이 진영을 내리쏘는데 활활 타는 불길 같았다.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이상한 기운이 진영에 내려쏘이니, 다른 데로 옮겨 둔치면 크게 길하리라." 하였다. 신묘일에 드디어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왔다. 처음에 성을 함락시킬 때, 우리 군사가 창고에 불을 질러 거의 없앴으므로 양식을 취할 데가 없어졌다. 군중에서 크게 굶주려 소와 말을 잡아 먹게 되니, 진을 칠 겨를도 없었으며, 뒤쫓는 군사가 있을까 두려워하여 사잇길을 따라 돌아오는데, 들에서 자면서 사졸들로 하여금 각기 뒷간과 마굿간을 만들게하였다.나하추 (納哈出)가 이틀이나 뒤를 밟아와서 말하기를, “변소와 마굿간을 만들었으니, 군사의 행진이 정제(整齊)하다. 그러니 습격할 수 없다." 하면서 돌아갔다. 군사가 안주(安州)에 이르렀을 때 김백안(金伯顔)을 목베었다. 그 아버지는 우리나라의 중인데, 통제원(通濟院)의 여종과 사통하여 백안을 낳았다. 백안은 원나라에 들어가서 벼슬을 역임하여 평장(平章)에 이르렀다. ○ 정언 이첨(李詹)이 소를 올려 6부와 대성의 관원에게 매월 육아일(六衙日 한 달에 여섯 번 관아에서 일을 보는 날)에 친히 일을 아뢰도록 하고, 또 사관으로 하여금 입시하도록 청하니, 그 말을 따랐다. ○ 여진의 달마대(?)가 사신을 보내어 땅을 바치므로, 달마대를 대장군 진변도호부사(大將軍鎭邊都護府使)로 삼고 의복을 하사하였다.

12월에 왕이 비로소 보평청(報平廳)에 나가서 정무를 보니, 사관 2명이 곁에서 모셨다. 왕이 간의대부 오중륙(吳中陸)에게 이르기를, “민간의 이해와 과인의 잘잘못을 숨김없이 모두 아뢰라."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정치를 잘 하는 요건은 오직 재상을 잘 임명하는 데 있고, 간관의 직책은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다. 신돈이 사특함은 어리석은 남자와 어리석은 여자들도 다 같이 아는 바이므로 먼저 제거되어야 마땅한데도, 이첨 등이 그의 심복이 되어 신돈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다만 사신을 가까이하고 정무를 친히 보아야 된다는 것을 말하여, 자신이 올바른 말을 하지 않는 책임을 미봉하려고 하였다. 이때에 신돈이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행하여 왕의 이목을 가렸으니, 사신을 가까이하고 정무를 보더라도 다스리는 도리에 무슨 이익이 되리오. 왕이 신하에게 직언을 구하는 뜻이 간절하였는데도, 중륙(中陸) 또한 관망만 하고 말하지 않았으니 비부(鄙夫)가 어찌 말할 것이 있으랴." 하였다.

신돈이 아뢰기를, “매월 육아일(六衙日)에 정사(政事)를 재결(裁決)한다면 송사를 맡은 관원이 5일 안에 송사를 모두 해결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6일과 26일에 정사를 보시기를 청합니다."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경오일에 태양에 흑점이 있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니, 일관이 살풀이를 하여 재앙을 풀기를 청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태양에 흑점이 있는 것은 허물이 과인에게 있으니, 살풀이하지 말 것이며, 태백성이 낮에 나타난 것은 응험이 경상에게 있으니, 그것은 살풀이하여 재앙을 풀도록 하라." 하였다. ○ 문하부(門下府)에서 아뢰기를, “선왕이 염창(鹽倉)을 바다 가까운 고을에 두고, 내륙에 있는 백성이 세를 바치어 화매(和賣)하게 하였는데, 요사이는 세를 바치고도 10년이 되도록 소금을 받지 못한 자가 간혹 있으니 백성이 견딜 수가 없어서 사판(私販)이 갑자기 생기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염호(鹽戶)가 그 직업에 안심하고 종사하도록 하고, 또 수령이 백성들이 바친 세를 보상하도록 하여 사판(私販)을 금하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왕이 신돈의 집에 행차하여 문병하였다. ○ 지문하사(知門下事) 이금강(李金剛)을 전라도 도순문사로 삼았다. 금강이 재물을 탐내고 주색에 빠졌으며, 나주 목사(羅州牧使) 하을지(河乙祉)의 옥정자(玉頂子 갓 꼭대기에 진옥(眞玉)으로 만들어서 단 장식)를 빼앗았으며, 또 조운의 기일을 어겨 표몰(漂沒)하게 하였다. 헌부에서 이를 탄핵하려 하니, 지신사(知申事) 염흥방(廉興邦)이 듣고 말하기를, “금강이 바치는 뇌물이 길에 늘어졌는데 헌부가 어찌하랴." 하더니, 금강은 과연 뇌물로써 처벌을 면하였다. ○ 달마대(?)를 원수부 원수(元帥府元帥)로 삼고 은인(銀印)을 하사하였다.

 

 

[D-001]호승(胡僧) 지공(指空) : 서역(西域) 중 지공(指空)이 중국을 거쳐 잠깐 우리나라에 왔었는데, 그는 밀교(密敎)의 진언(眞言)과 주술에 능통하였다.

[D-002]() : 여기서의 재()는 주육과 훈채(?)를 먹지 않는 것을 말한다.

[D-003]수행 : 여기서는, 수행은 불법만을 따를 것이 아니라, 유교의 인의(仁義)의 수행을 가리킨 것이다.

[D-004]친왕을 봉건(封建) : 황제의 아들을 왕으로 봉한 것을 말한다.

[D-005]비부(鄙夫) : 공자의 말에, “비부(鄙夫)는 지위를 얻기 전에는 얻으려고 애쓰고, 얻은 뒤에는 잃을까 근심하니, 잃을 것을 근심하면 하지 못할 것이 없다." 하였다.

 

 

   

 

 

 

 

 고려사절요 제29   

 

 

 공민왕 4(恭愍王四)

 

 

신해 20(1371), 대명 홍무 4 

 

 

○ 봄 정월에 왕이 공주의 혼전에 친히 제사지냈다.

2월에 여진의 천호 이두란첩목아(李豆蘭帖木兒)가 백호 보개(甫介)를 보내어 1백 호를 거느리고 와서 투항하였다.

3월에 왜적이 해주(海州)에 침범하여 관청을 불사르고, 목사의 아내와 딸을 사로잡아 갔다. ○ 왕이 대비를 뵙고 문병하였다. 왕이 오랫동안 혼정신성(昏定晨省)을 하지 않았는데, 이때에 와서 대비가 병이 드니 그제야 가서 뵈었다.

○ 윤달에 신돈의 겸인(?)이 신돈을 위하여 천판(穿坂)에서 잔치를 베푸니, 시중 이하의 시관(時官), 산관 각 품관(品官)이 모두 참여하여 무려 2백여 명이나 되었다. 도성 사람들이 모여서 구경하고, 이를 첨의전송(僉議餞送)이라 하였다. ○ 왕이 장단(長湍)에 행차하여 정릉(靖陵)에 배알하고, 배를 타고 여악(女樂)을 베풀어 장단 석벽을 구경하고, 헌릉(憲陵) ·경릉(景陵)의 두 능에 배알하였다.

○ 여름 4월에 권적대(權適大)가 신돈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면서 화산대(火山臺)를 설치하니, 신돈이 불안하게 여겨서 시원한 대청으로 옮기고 왕을 청하여 이를 구경하게 하였다.

5월에 강사찬(姜師贊)이 명 나라 서울에서 돌아왔는데, 황제가 고려의 태상(太常)의 악공을 명 나라 서울에 보내어 음악을 익히라고 명하였다. ○ 오왕(吳王)이 사신을 보내어 예물을 가지고 왔다.

6월에 김잠(金潛) 31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가을 7월에 왜적이 예성강(禮成江)에 침범하여 병선 40여 척을 불태웠으므로, 병마사 김입견(金立堅)을 곤장을 쳐서 귀양보냈다. ○ 선부의랑(選部議郞) 이인(?)이 신돈이 반역을 모의한 사실을 알고 성명을 숨겨 한림거사(寒林居士)라 일컫고 글을 써서 밤에 재상 김속명(金續命)의 집에 던졌다. 속명이 이 사실을 아뢰니, 왕이 명하여 신돈의 당 기현(奇顯)·최사원(崔思遠)·정귀한(鄭龜漢)·진윤검(陳允儉)·기중수(奇仲修) 등을 잡아 목베었다. 왕은 성품이 시기심이 많고 잔인하여, 심복 대신일지라도 권세가 강성해지면 반드시 꺼려 목베었다. 신돈이 자신이 폭위를 떨침이 너무 심함을 알고, 왕이 자기를 꺼릴까 두려워 반역을 도모하였다. 왕이 헌릉(憲陵)과 경릉(景陵)의 두 능에 배알할 적에, 신돈이 그 당을 나눠 보내어 길가에 매복시켜 두고 큰일(시해)을 행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무사히 왕이 궁에 돌아오니 신돈이 무리에게 말하기를, “어째서 약속대로 하지 않았느냐." 하니, 그 무리가 말하기를, “왕의 의위(儀衛)가 심히 성대함을 보고 차마 범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신돈이 노하여 꾸짖기를, “너희들은 참으로 겁이 많아 쓸모가 없는 자들이다." 하였다. 이후로 밤낮으로 모여서 모의하고 다시 날을 정하여 일을 거사하기로 했다. 이때 관직을 구하는 자는 모두 신돈에게 붙었는데, 이인(?)이 신돈의 문객이 되어 흉악한 계책을 자세히 알고, 몰래 명부를 만들어 이를 기록하였다. 일이 급박해지자 상세히 고변하고는 곧 변장하고 도망쳐 버렸다. 왕이 처음에는 이인(?)이 무고한다고 의심하였으나, 신돈의 당을 잡아 이들을 국문하니 모두 증거가 있었다. 드디어 신돈을 수원(水原)으로 귀양보내고는 왕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익재(益齋 이제현)가 일찍이, '신돈은 바른 사람이 아니므로 반드시 후환을 끼칠 것이라.' 말하더니, 선견의 밝음은 미칠 수 없구나." 하였으며, 또 근신에게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신돈의 집에 가서 시비와 관계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그 아이를 놀라게 하지 말고 잘 보호하라." 하였다. 아들은 곧 모니노(牟尼奴)이다. ○ 좌시중 이춘부(李春富),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 김난(金蘭), 동지밀직(同知密直) 홍영통(洪永通), 승지 김진(金縝)이 사죄하기를, “신등이 신돈과 일을 같이 본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이제 신돈은 귀양갔는데도 신들만이 면하였으니, 국내의 공론을 어찌하겠습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우선 돌아가서 일을 보라." 하였다. ○ 양부(兩府)·대간·이부에서 글을 올리기를, “대역은 천하 만세의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돈은 본시 일개 미천한 중으로서, 외람되게 성상의 알아 주심을 만나 벼슬이 신하로서 최고의 지위에 올라, 백관을 진퇴시키고 턱으로 지시하고 기분으로 부려, 자기를 따르는가 안 따르는가의 여부를 보아서 벼슬을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였습니다. 흉한 도당을 널리 조정 안에 심어 놓고 분()이 아닌 자리[왕위(王位)]를 엿보았으나, 다행히 조종의 영()과 전하의 선견지명에 힘입어 음모가 발각되었습니다. 그러나 관대한 형벌을 써서 귀양보내는 데서 그쳤사오니 온 나라가 실망하였습니다. 또 신돈의 당이 어찌 다만 최사원(崔思遠)·기현(奇顯) 7명뿐이겠습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대의로써 결단하시어 신돈을 극형에 처하고, 가산을 몰수하고 그 도당까지 모두 죽여서, 여러 사람의 마음을 통쾌하게 하소서." 하니, 왕이 그 말을 따라 대사성 임박(林樸)과 판사 김두(金斗)를 보내어 신돈을 수원에서 목베고 팔다리를 찢어 사방에 돌리고, 서울의 동문에 목을 매달았다. 일찍이 왕이 신돈·이춘부 등과 함께 맹세를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임박에게 맹세한 글을 주어 신돈에게 보이고 수죄(數罪)하게 하였다. 임박이 수원에 이르러 사람을 시켜서 왕명으로 불러들인다고 거짓 알리니, 신돈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오늘 불러들이는 것은 대개 아기(阿只 모니노(牟尼奴))를 위하여 나를 생각하는 것이다." 하였다. 아기는 방언에 어린아이의 존칭이다. 신돈이 형을 받을 때 묶인 손으로 임박에게 애걸하기를, “원하건대 아기를 보아서 내 생명을 살려 주시오." 하였다. 신돈은 성품이 사냥개를 두려워하고 사냥을 싫어하였다. 또 방자하고 음란하여, 항상 오골계와 백마를 잡아먹어 양기(陽氣)를 보충했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신돈을 늙은 여우의 정기라고 하였다. ○ 신돈의 당 대호군 이백수(李伯修)를 목베고, 성여완(成汝完)·조사겸(趙思謙)·유준(柳濬)을 귀양보냈다. ○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이춘부·김난(金蘭)·홍영통(洪永通)이 모두 신돈에게 아부했으니, 이들을 목베십시오." 하니, 명하여 관직만 파면시키고 죄는 묻지 않았다. ○ 윤환(尹桓)을 문하시중으로 삼고, 한방신(韓方信)을 찬성사로 삼고, 이색(李穡)을 정당문학으로 삼고, 우리 태조를 지문하부사로 삼았다. 왕이 근신에게 묻기를, “문신 이색과 무신 이성계(李成桂)가 같은 날에 문하성(門下省)에 들어왔는데, 조정의 의논이 어떻더냐." 하였다. 대개 적임자를 얻은 것을 스스로 흡족하게 여겨서이다. ○ 왕이 전 시중 유탁(柳濯)이 신돈의 일당이라고 죽이려 하므로, 태후가 환자 사안불화(沙顔不花)를 시켜 용서해 주기를 청하니, 왕이 노하여 사안불화를 가두고, 유탁을 목졸라 죽였다. 그때의 의논이, 일찍이 유탁이 영전의 역사를 간하여 중지시킨 데 대하여, 왕이 감정을 품은 것이라고 하였다. 또 신돈의 당 백현(白絢)·손연(孫演)·김두달(金斗達)·김원만(金元萬)을 죽이고, 송란(宋蘭)·석란(石蘭)·손주(孫湊)·김안(金安)·김중원(金仲源)·박천우(朴千祐)를 곤장을 쳐서 귀양보냈다. ○ 왕이 모니노(牟尼奴)를 불러와서 태후의 궁전에 들여보내고 수시중 이인임(李仁任)에게 부탁하기를, “원자가 있으니 나는 걱정이 없다." 하였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아름다운 부인이 신돈의 집에 있었는데, 그가 아들을 잘 낳는 여자란 말을 듣고 관계하여 이 아이가 있게 되었다." 하였다. 처음에 임박(林樸)이 상장군 이미충(李美?)과 함께 왕을 모셨는데, 왕이 미충에게 눈짓을 하며 말하기를, “너는 아기 일을 알고 있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임박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밖으로 나와서 미충에게 물으니, 미충이 말하기를, “주상께서 일찍이 금전(金錢)을 주조하여 신에게 주므로 신돈의 집에 가 아기에게 주었더니, 아기가 크게 기뻐하였다. 신돈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상께서 우리 집에 자주 행차하심은 나 때문이 아니다.' 하였다. 내가 이 일을 자세히 아는 까닭에 주상께서 이 말씀을 하셨다." 하였다. 이때에 와서 임박이 사관 민유의(閔由誼)·이지(李至)에게 말하기를, “주상께서 궁인과 관계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제 벌써 7세가 되었다. 신돈이 이를 몰래 길러서 국인에게 알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 또한 마땅히 목베어야 할 죄임을 사관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하였다. ○ 대사헌 손용(孫湧)을 귀양보내고, 전녹생(田祿生)으로 대체시켰다. ○ 이춘부·김난(金蘭)·이운목(李云牧)을 목베고, 그 아들들을 도류안(徒流案 도형·유형의 죄인 명부)에 넣었다. 또 신돈의 2살 된 어린아이와 기현(奇顯)의 아들 중평(仲平)을 목베고, 김진(金縝)과 대호군 김정(金鼎) 등을 곤장쳐서 귀양보냈다. ○ 죄수를 사면하였다. ○ 나주 목사(羅州牧使) 이진수(李進修)가 소를 올려, 내재추(內宰樞)를 폐지하고 근시위(近侍衛)를 엄중하게 하며, 군수부(軍帥府)를 세워 분경(奔競)을 근절시키기를 청하니, 왕이 이를 가상하게 여겨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제수하였다.

8월에 신돈의 당 신순(辛純)·신귀(辛貴)·임희재(林熙載)·기숙륜(奇叔倫)·기중제(奇仲齊)·최진(崔津)을 목베고, 홍영통(洪永通)·김횡(?)·허완(許完)·오중화(吳仲華)·성준덕(成俊德)·오일악(吳一?)과 이춘부(李春富)의 아우 광부(光富)·원부(元富)를 귀양보냈다. ○ 헌부에서 아뢰기를, “찬성사 이성서(李成瑞)의 아내가 신돈과 간통하였습니다." 하여, 도역(徒役)에 배치하였다. ○ 왜적이 봉주(鳳州 황해 봉산(鳳山))에 침범하였다. ○ 황상(黃裳)·안우경(安遇慶)·최영(崔瑩)을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이순(李珣)을 삼사좌사로, 무신 시중 윤환(尹桓)를 감춘추관사로 삼았다.

9월에 서경 도만호 안우경(安遇慶)과 안주 상만호 이순(李珣)을 보내어 오로산성(五老山城 올라산성(兀刺山城))을 치게 하였다. ○ 염제신(廉悌臣)을 서북면 도통사로 삼았다.

○ 겨울 10월에 우리 군사가 오로산성을 쳐서 이기고, 원나라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합라불화(哈刺不花)를 사로잡았다. ○ 전라도 도순문사가 왜선 한 척을 잡았다. ○ 왕이 친히 태묘에 제사지냈다. ○ 가주(家州)의 합라장(哈刺匠)이 와서 왕을 뵈니, 대장군의 작위를 주었다. ○ 왕이 여러 신하를 모아 잔치를 베풀었는데, 초저녁이 되자 화살이 뜰에 떨어지자 궁성에 계엄을 내렸다.

11월에 태후가 환자 김수만(金壽萬)을 시켜 술과 안주를 가지고 가서 왕에게 드리니, 왕이 한없이 술을 마셨다. 수만이 아뢰기를, “늙은 놈이 항상 성체의 만수무강(萬壽無彊)을 빌고 있사오니, 주량에 따라 알맞게 마시소서. 제가 만약 이곳에서 자고 머물게 되면, 아마 태후께서는 반드시 제가 술을 많이 드리고 늦게 돌아왔다고 할 것입니다." 하면서, 곧 하직하고 가버렸다. 이때 왕이 주벽이 있어서 측근을 자주 때리기 때문에, 환자들이 왕이 술에 몹시 취하여 정신을 잃게 하기 위해서 다투어 술을 드렸는데, 왕은 몹시 취하면 공주를 생각하며 울었다. ○ 다시 응방(鷹坊)을 설치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내가 매를 기르는 것은 사냥용이 아니라, 매의 맹렬하고 날쌘 것이 사랑스러워서이다." 하였다. ○ 염제신의 딸을 맞아들여 신비(愼妃)로 삼았다.

12월에 비로소 다시 현릉(顯陵)에서 삭망제(朔望祭)를 행하였다. ○ 이부에서 아뢰기를, “우리 조정에서 옛날에 응방을 설치하여 서울과 지방을 소란하게 하니, 백성들이 이를 매우 괴롭게 여기므로 선왕께서 그 폐해를 깊이 살피시어 폐지를 명하였습니다. 지금 변경에 걱정거리가 많아 전쟁이 한창이온데, 이를 생각하지 않고 다시 응방을 설치하오니, 윗사람이 행하면 아랫사람이 본받는 것은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고 메아리가 소리에 호응하는 것보다도 빠릅니다. 신은 여러 신하들이 이것을 본받아 사냥하고 노는 데 정신이 빠져서, 직무에 게으르고 농작물을 짓밟을까 염려스럽습니다. 응방을 폐하고 설치하지 마옵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좌승선 김흥경(金興慶)에게 명하기를, “지금 전쟁이 그치지 않아서 재물이 다 없어졌으니, 군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줄 수 없게 되었다. 문관 3품과 무관 5품 이하의 관직을 더 설치하여 군공이 있는 사람에게 상주게 하라." 하였다. ○ 환자 이강달(李剛達)이 도당에서 사사로이 뵈면서 왕의 총애를 믿고 거만하게 구니, 재상이 노하여 대궐에 나아가서 아뢰었다. 왕이 강달을 옥에 가두었다가 조금 후에 석방하였다.

 

 

   

 

 

 

 

 고려사절요 제29   

 

 

 공민왕 4(恭愍王四)

 

 

임자 21(1372), 대명 홍무 5 

 

 

○ 봄 정월에 태후에게 존호를 올리고, 죄수를 사면하였다. ○ 오산불화(於山不花)·나하추(納哈出)·고가노(高家奴) 등이 와서 이성(泥城)·강계(江界) 등지를 침범하였다. ○ 지윤(池奫)을 서북면 원수로 삼았다.

2월에 왜적이 백주(白州)에 침범하였다. ○ 호발도(胡拔都)·장해마(張海馬) 등이 이성(泥城)·강계(江界) 등지를 침범하니, 이성만호(泥城萬戶) 3명을 사로잡아 목베었다. ○ 판사 조인벽(趙仁璧)이 가주(家州) 등지의 적을 토벌하여 다 죽였다.

3월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홍사범(洪師範)을 남경(南京 명 나라 서울)에 보내어 촉()을 평정한 것을 하례하고, 자제를 보내어 입학하기를 청하였다. ○ 예부 상서 오계남(吳季南)을 남경에 보내어 말을 바치게 하였다. 명 나라에서 비서감 유경원(劉景元)을 간선어마사(揀選御馬使)로 삼아 오계남과 같이 탐라에 보냈더니, 탐라에서 유경원과 목사 이용장(李用藏)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니, 계남이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민부 상서 장자온(張子溫)을 남경에 보내어 탐라를 토벌할 것을 주청하였다. ○ 왜적이 순천(順天)·장흥(長興)·탐진(耽津)·도강(道康) 등의 군에 침범하였다.

○ 여름 4월에 나하추(納哈出)가 사신을 보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 왜적이 진명창(鎭溟倉)을 약탈하였다.

5월에 왕태후가 사람을 시켜 왕에게 고하기를, “날이 오래 가무는 것은 사람의 허물로 말미암아 초래된 것이니, 신돈 도당들의 처첩과 몰입되어 관비가 된 자들을 석방하소서. 여자들이 그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니, 왕이 그 말을 따랐으나, 신돈의 처첩만은 사면하지 않았다. ○ 영전(影殿)의 정문이 완성되었는데, 왕이 장엄하고 화려하지 않다고 여겨서 명하여 헐어버렸다. ○ 황제가 전 원 나라의 원사(院使)인 환자 연달마실리(延達?失里)와 손내시(孫內侍)를 보내 와서 왕에게 채단(綵段)과 사라(紗羅)를 주고, 또 한황제(漢皇帝)·하황제(夏皇帝)의 가속 27명을 보내면서 말하기를, “군사도 삼지 말고 백성도 삼지 말라." 하였다. 이에 진리(陳理)·명승(明昇) 등이 배를 타고 왔다. ○ 손내시가 불은사(佛恩寺)의 소나무에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6월에 정당문학 한중례(韓仲禮)를 순군옥에 가두었다. 처음에 중례가 난수산(蘭秀山) 적인(賊人)의 당선(唐船 중국 배)을 사니, 황제가 듣고 말하기를, “재상이 도적의 배를 사서는 안 되니, 속히 추문하여 돌려보내라." 하였다. 이때에 와서 그 배가 이미 부숴졌으므로, 중례로 하여금 이를 수리하게 하였다. ○ 큰비가 내리니, 왕이 영전의 역사를 위하여 날이 개기를 빌었다. ○ 왜적이 강릉부(江陵府)와 영덕(盈德)·덕원(德原)의 두 현에 쳐들어왔다. 이때 이춘부(李春富)의 아들 옥()이 몰입되어 동계(東界)의 관노가 되었는데, 왜적이 쳐들어오니, 우리 군사는 풍문만 듣고 패하여 달아났다. 부사와 안렴사가 옥이 용맹스럽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주어 이를 치게 하니, 옥이 힘을 다하여 싸워 적을 물리쳤다. 왕이 안장 갖춘 말을 내려 주고 역을 면제해 주었다. ○ 관제를 고쳤다. ○ 왜적이 안변(安邊)과 함주(咸州)에 쳐들어왔다. ○ 간관 이보림(李寶林)·장하(張夏) 등이 아뢰기를, “김문현(金文鉉)이 역적 신돈에게 붙어서 아비와 형을 참소하여 죽였으니, 그 얽어서 모함한 일은 신돈과 이춘부가 상시 말했으며, 온 나라 신민(臣民)이 다 압니다. 그 아비가 죽음에 다다라, 문현에게 모함을 당하였다고 말하며 원통하게 여기는 소리가 있었는데, 이 또한 사람들이 다 들었습니다. 이것은 정히 천지에 용납될 수 없는 바이며, 왕법에서 반드시 목베어야 하니, 이를 버려 두고 묻지 않는다면, 천리가 없어지고 인도가 끊어집니다. 법대로 처단하여 후세에 보이소서." 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간관이 다시 간하였으나 좇지 않았다. ○ 제주 사람이 반적을 죽이고 항복하였다. 이용장(李用藏)이 죽을 적에 판관 문서봉(文瑞鳳)이 도망하여 죽음을 면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모두 서봉을 추대하여 권지 목사(權知牧使)로 삼고, 사람을 보내어 명령을 청하였다. ○ 우리 태조를 화령 부윤(和寧府尹)으로 삼고, 이어서 원수로 삼아 왜적을 방어하게 하였다. ○ 왜적이 동계의 안변 등에 쳐들어와서 부녀를 사로잡고, 창고의 쌀 1만여 석을 약탈하였으므로, 존무사 이자송(李子松)을 파면시켜 전리로 추방하였다. ○ 왜적이 또 함주(咸州)·북청(北靑)에 쳐들어오니, 주의 만호 조인벽(趙仁璧)이 군사를 매복시켜 이를 크게 깨뜨리고, 적의 머리 70여 급을 베었다. ○ 왜적이 홍주(洪州)에 쳐들어왔다.

○ 가을 7월에 영정의 종루(鐘樓)가 이루어졌는데, 왕이, 높고 크지 않다고 하여 곧 고쳐 짓도록 명령하였다. ○ 헌부에서 소를 올려 김문현을 목베자고 청하니, 문현이 도망하였다. ○ 동지밀직(同知密直) 김서(?)를 남경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게 하고, 동지밀직 성원규(成元揆)에게 절일을 하례하게 하며, 판도판서 임완(林完)에게 천추절을 하례하게 하였다.

8월에 영전의 망새[鷲頭]가 이루어졌는데, 그 장식에 황금 6 50냥과 백은(白銀) 8백 냥이 들었다. ○ 찬성사 강인유(姜仁裕)를 남경에 보내어 채단 준 것을 사례하였다.

9월에 윤환(尹桓)을 면직시키고, 경복흥(慶復興)을 좌시중으로 삼았다. 복흥은 곧 천흥(千興)이다. ○ 양광도 순문사 조천보(趙千輔)가 용성(龍城)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패하여 죽었으므로 더 높이 추증하라고 명하였다. 장자온(張子溫)이 돌아왔는데, 황제가 약재를 내려 주며 친필의 조서를 내리기를, “올린 표문에 말하기를, 탐라의 목자(牧子)가 함부로 덤비어, 관리와 군병이 뜻밖의 재난으로 죽었다 하니, 심히 한스럽고 노엽다. 춘추(春秋)의 법에, 난신 적자(賊子)는 사람마다 이를 목벨 수 있다고 하는데, 지금 목자가 이와 같으니 토벌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나라가 크고 작은 것을 논할 것 없이, 벌과 전갈도 독이 있으니, 비록 저들을 다 멸할 수 있지마는 이쪽에서도 역시 반드시 다칠 것이다. 대저 지난번의 실수는 작은 일 때문에 큰 화를 일으켰으니 애석하다. 생선을 너무 급하게 굽듯이 하고 너무 심하게 시기를 해서 초래되지는 않았는가. 일이 이미 이와 같으니, 왕은 옛 버릇대로 미봉책을 써서 모욕을 당하지 말고 속히 군사를 내어 토벌하라. 그러나 사기(事機)를 늦추고 서두르는 것은 왕이 살펴서 도모하라." 하였다.

○ 겨울 10월에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여, 나이 어리고 얼굴이 아름다운 자를 뽑아서 여기에 소속시키고, 대언(代言) 김흥경(金興慶)에게 맡게하였다. 홍륜(洪倫)·한안(韓安)· 권진(權瑨)·홍관(洪寬)·노선(盧瑄) 등이 음란함으로써 왕의 사랑을 얻어 항상 침실에서 모시었다. 왕이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음을 걱정하여 홍륜·한안의 무리로 하여금 여러 비와 강제로 관계시켜서 사내아이를 낳게 하여 자기 아들로 삼으려 하였다. 정비(定妃)·혜비(惠妃)·신비(愼妃) 세 비는 죽음으로 항거하고 따르지 않았다. 대전보마배행수(大殿寶馬陪行首) 조준(趙浚)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인도가 없어졌으니 다시 무엇을 말하겠는가. 더구나 왕이 형벌을 주고 은전(恩典)을 베풀어 벼슬을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는 모든 일을 항상 여러 많은 소인들과 의논하고, 군자와는 의논하지 않으니, 오늘날의 사세는 매우 위태하다." 하였다. ○ 왕이 정릉(正陵)에서 제사지냈다. 제사를 마친 후에 능의 영역(塋域)을 둘러보고 배회하여 거닐며, 슬피 생각하고 공주의 화상을 대하여 잔치를 베풀고, 원 나라 음악을 연주하게 하며, 술잔을 주고 받는 것을 공주의 생전처럼 하였다. 종친과 재·추들도 모두 잔치에 참여했다. ○ 왕이 양릉(陽陵)에 배알하고 궁에 돌아왔는데, 전리판서 조민수(曹敏修)의 아들 취귀(取貴)가 어가를 호종하지 않았으므로, 곤장을 쳐서 죽였다. 취귀가 일찍이 신돈에게 사랑을 받았으므로, 행신(倖臣) 김흥경(金興慶)이 참소하였다. ○ 왜선 27척이 양천(陽川)에 들어와서 3일간 머물렀다. 여러 장수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싸웠으나, 우리 군사가 모두 성중애마(成衆愛馬 궁중의 숙위와 시종을 맡았던 관원을 이름)로서 수전에 익숙하지 못하여 크게 패하였다. 왕이 각 관사의 성중애마와 5() 방리(坊里)의 사람들을 5()에 나누어 소속시켜서 친히 5군을 거느리고, 승평부(昇平府)에 나가서 용천사(龍泉寺)의 산봉우리에 주둔하였는데, 숙위가 엄하지 않다고 하여 여러 제조관(提調官)을 매질하고, 찬성사 안사기(安師琦)에게 말하기를, “나의 이번 행차는 하릴없이 놀기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행군이 어떠한가를 보려고 함이다. 경자년·신축년의 홍건적과 경인년 이후의 왜적을 대적할 수 있었는데도, 백성이 사로잡히고 조정이 파천하게 된 것은, 군사를 부리는 규율이 없고 호령이 엄하지 않아서이다. 지금 내가 친히 나와 있어도 명령을 받들지 않는 자가 있는데, 하물며 여러 장수가 대행하는 것이랴. 경은 나의 뜻을 알고 여러 사람을 효유하여, 지금부터는 혹시라도 군령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없게 하라."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왕이 섬 오랑캐의 폭위(暴威)를 분하게 여겨 국위를 떨치려고 하였으니, 만약 전일의 마음을 씻고 생각을 고쳐, 폐행(嬖幸)을 물리치고 토목의 역사를 폐지하며 현인을 구하여 정치에 힘을 썼다면, 백성들을 보호하고 도적을 막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으리오. 애석하게도 왕이 능히 그렇지는 못하면서 안사기 한 사람에 의지하여 군령을 떨치고자 하였으니, 그렇게 되겠는가." 하였다.

11월에 다시 응방(鷹坊)을 설치하였다. ○ 판밀직 노진(?)을 남경에 보내어 약재와 약방(藥方) 준 것을 사례하게 하고, 대호군 김갑우(金甲雨)에게는 탐라의 말을 바치게 하고, 판서 장자온(張子溫)을 사신으로 요동에 보냈다.

 

 

[D-001]한황제(漢皇帝)·하황제(夏皇帝) : 원 나라 맡기에 여러 영웅들이 각지에 웅거하여 황제라 칭하였는데, 진리는 한 황제(漢皇帝)라 칭하였고, 명승은 하 왕제(夏皇帝)라 칭하였다.

[D-002]생선을……하고 : 노자에, “큰 나라 다스리기를 적은 생선 삶는 것같이 하라." 하였는데, 이것은 건드리고 서두르지 말라는 뜻이다.

 

   

 

 

 

 

 고려사절요 제29   

 

 

 공민왕 4(恭愍王四)

 

 

계축 22(1373), 대명 홍무 6 

 

 

○ 봄 정월에 낭장 안천검(安天儉)의 집에서 불이 났는데, 천검이 마침 술에 취하여 누워 있었다. 그 아내가 밖에서 불을 무릅쓰고 들어와서 부축하여 나가려 하였으나, 나가지 못하고 마침내 함께 죽었다. ○ 바다에 가까운 각 고을의 수령들이 백성을 잘 다독거리지 못하므로, 안집별감(安集別監)을 나누어 보내었다.

2월에 북원(北元)에서 파도첩목아(波都帖木兒)와 오산불화(於山不花)를 보내서 조서를 내리기를, “지난번에 병란으로 인하여 북방에 파천하였으나, 이제 확곽첩목아(擴廓帖木兒)를 재상으로 삼아 거의 중흥하게 되었다. 왕도 세조(世祖 홀필렬(忽必烈))의 손자이니, 힘을 보태서 다시 천하를 바로잡아야 마땅하다." 하였다. 처음에 두 사람이 국경에 들어오니 왕이 사람을 보내어 이들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많은 신하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다투었다. ○ 왜적이 구산현(龜山縣)에 침범하니, 경상도 도순문사 홍사우(洪師禹)가 적의 머리 수백 급을 베고, 노획한 병기를 바쳤다. ○ 나하추(納哈出)가 문합라불화(文哈刺不花)를 보내니, 강계 만호(江界萬戶) 강영(康永)이 종자 10여 명을 죽이고 그 재물을 빼앗으므로, 합라불화가 두세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도망쳐 버렸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강영을 소환해서 순위부(巡衛府)에 가두고 벌주었다. ○ 왕이 익비(益妃)의 궁에 행차하여 홍륜(洪倫)·한안(韓安)·김흥경(金興慶) 등을 시켜 익비를 간통하게 하자, 익비가 이를 거절하므로 왕이 칼을 뽑아 치려고 하니, 익비가 두려워서 복종하였다. 이로부터 홍륜 등이 왕의 명이라 거짓 핑계하고 자주 왕래하였다. 왕은 성품이 여색을 좋아하지 않으며, 정력이 없는 까닭에, 노국공주가 살아 있을 때에도 왕이 동침할 때가 매우 드물었다. 공주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여러 비를 맞아들이고도, 별궁에 두고 감히 가까이하지 못했으며, 밤낮으로 슬퍼하며 공주만 생각하여 드디어 마음의 병이 되었다. 항상 스스로 화장을 하여 부인의 형상을 하고, 먼저 내비(內婢) 중 젊은 자를 방 안에 들여 보자기로 그 얼굴을 가리고, 홍륜의 무리를 불러서 이를 간음하게 하고는, 왕은 옆방에서 창호지에 구멍을 뚫고 보다가, 마음이 동하면 곧 홍륜의 무리를 침실로 끌어들여 그 형상대로 하게 하였다.

3 1일 계묘에 일식이 있었다. ○ 문묘(文廟)에서 삭망제를 다시 행하였다. ○ 왜적이 하동군(河東郡)에 침범하였다. 진주(晉州) 사람 정임덕(鄭任德)이 일찍이 이 고을에서 수자리를 살다가 마침 병이 났는데, 아들 유()와 손(?)이 아버지를 부축하고 피해 달아났다. 적이 뒤쫓아 따라오므로 유가 두서너 사람을 쏘아 죽이니, 적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갑자기 적 한 명이 칼을 휘두르며 뛰어와서 임덕의 뺨을 찌르므로, 손이 몸으로 가리고 적 4명을 목베었으나, 끝내 적에게 죽고 말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지니, 유를 종부시 승(宗簿寺丞)에 임명하였다. ○ 왕이 태후를 뵈옵고, 모니노(牟尼奴)를 후사로 삼고자 취학시켜서 성균직강 이숭인(李崇仁)에게 글을 가르치게 하고자 하니, 태후가 마음이 내키지 않아 핑계대기를, “아이가 아직 어리니, 조금 장성하거든 취학시켜도 늦지 않을 것이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신이 지금 수()가 다 되어 죽음에 임박하였으니, 지금 후사를 세우지 않으면 사직을 누구에게 부탁하겠습니까. 또 영전의 역사는 누가 내 뜻을 계승하겠습니까." 하니, 태후가 말하기를, “영전의 장엄하고 화려함은 천하에 비할 데가 없으며, 백성을 괴롭히고 재물을 손상시킴이 막심하고, 수재와 한재가 그 때문에 났으니, 역사를 정지하시오. 신하들은, 나와서는 국사에 종사하고, 들어가서는 가산을 다스려야 하는데, 김흥경(金興慶) 등 여러 자제들은 밤낮 궁에만 있고 집에는 돌아가지 못하니, 어찌 왕을 원망하지 않겠소. 왕이 일찍이 적신 신돈을 지나치게 믿고 내 말을 듣지 않다가 거의 나라를 망칠 뻔하였는데, 이제 또 그렇게 함은 무슨 이유이오. 자제들로 하여금 윤번으로 숙위(宿衛)하게 해야 마땅하오. 또 왕이 보는 정무는 지극히 번거로워서, 이른 새벽에 옷을 입고 저녁 늦게 밥을 먹어가면서 부지런히 정사를 보더라도 충분치 못할 텐데, 지금 왕은 해가 중천에 뜰 때 일어나니 군무(軍務)·국무가 어찌 밀리어 늦어지지 않겠소. 왕은 마땅히 아침 일찍 일어나고 저녁 늦게 자면서 국정을 친히 재결하여 늙은 어미에게 효도하시오." 하였다. 왕이 불쾌한 심정으로 하직하고 나가려 하므로, 태후가 세 번 반복하여 말하니 그제야 대답하기를, “삼가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태후가 또 묻기를, “어찌하여 비빈(妃嬪)들을 가까이하지 않소." 하니, 왕이 말하기를, “공주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태후가 웃으며 말하기를, “한 번 죽는 것은 당연한 이치오. 왕도 마침내 죽음을 면하지 못할 텐데, 어찌 그다지도 심히 슬퍼하시오. 남의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우니, 아예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마시오." 하였다.

○ 여름 4월에 수릉(壽陵 왕이 생전에 만들어 두는 자기의 능)을 정릉(正陵)의 서쪽에 만드는데, 환자 김사행(金師幸)에게 그 역사(役事)를 감독하게 하였다. 사행이 마음이 바르지 못하고 교묘하게 아첨을 잘하여, 영전과 정릉의 역사를 왕의 뜻에 맞추어 모두 극도로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하였다. ○ 전라도 도순문사 도흥(都興)이 왜적 2명을 포로로 바치고, 아울러 노획한 병장기(兵仗器)를 바쳤다. ○ 전라도·경상도에 흉년이 들었으므로, 사자를 보내어 진휼하였다.

5월에 왕의 생일이므로 죄수를 사면하였다. ○ 좌정언 윤소종(尹紹宗), 김흥경(金興慶) 등의 여러 소인이 왕의 곁에 있으면서 정치를 문란하게 하고, 환자 김사행이 왕의 뜻을 맞추어 영전의 역사를 크게 일으킨 사실로 소를 초하여, 흥경을 제거하고 사행을 목베고 영전의 역사를 정지하기를 청하였다. 좌헌납(左獻納) 김윤승(金允升)이 이를 알고 간의(諫議) 우현보(禹玄寶)와 모의해서, 윤소종이 여러 달을 휴가가서 자리를 비웠다는 이유로 탄핵해서 내쫓았다. ○ 병인일에, 평주(平州)에 공중에서 얼음이 떨어졌는데, 크기가 되만하였다.

6월에 전 계림 윤(鷄林尹) 김유(金庾)를 남경에 보내어 성절을 하례하게 하였다. ○ 왜적의 배가 동·서강()에 모여서 양천(陽川)에 침범하여, 마침내 한양부(漢陽府)에 이르러 가옥을 불태우고 인민을 죽이며 약탈하니, 수백 리의 지방이 소란하고 서울이 크게 진동하였다. ○ 화원팔각전(花園八角殿)을 이현(泥峴)에 짓고, 빙 둘러 꽃나무를 심어, 연회하는 데에 대비하게 하였다.

○ 가을 7월에 판선공시사(判繕工寺事) 주영찬(周英贊)을 남경에 보내어 천추절을 하례하게 하였다. ○ 모니노(牟尼奴)에게 이름을 우()라고 내려 주고,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책봉하며, 정당문학 백문보(白文寶)를 우의 사부로 삼았다. ○ 체복사(體覆使) 이걸생(李傑生)을 보내어, 강화 만호 하을지(河乙沚)와 한양 부윤 신렴(辛廉)을 왜적을 능히 막지 못한 죄로 곤장을 쳐서 봉군(烽軍)에 배치하였다. ○ 왜적이 교동(喬桐)을 함락하였다. ○ 홍사범(洪師範)이 남경에서 돌아오다가 바다 가운데 이르러 배가 부서져서 죽었다. 서장관(書狀官) 정몽주(鄭夢周)가 돌아와서 황제의 명령을 선포하였는데, “고구려가 당 태종 때에 자제를 보내어 입학하였는데, 지금 왕도 자제를 보내기를 청하니 진실로 훌륭한 일이다. 다만 고려가, 남경과의 거리가 수로와 육로로 만여 리나 되므로, 부모가 반드시 그 아들이 염려될 것이요, 아들이 반드시 그 어버이를 생각할 것이니, 그 아비와 아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자만 보내도록 할 것이다. 또 해마다 두서너 번 물품을 바치는 것은 반드시 백성을 번거롭게 할 것이요, 사신이 왕래하는 바닷길이 험하다. 옛날에 중국에서는, 제후가 천자에게 해마다 한 번 소빙(小聘)을 하고, 3년에 한 번 대빙(大聘)을 하며, 구주(九州)이외의 지역은 한 세대 만에 한 번 조현(朝見)하였는데, 지금 고려는 중국과의 거리가 조금 가깝고 문물과 예악이 중국과 서로 같으므로, 다른 번국(蕃國)과 같이 하기는 어려우니, 지금부터는 3년 만에 한 번 조빙하는 예에 의거할 것이며, 혹시 한 세대 만에 조현하고자 하여도 가하다. 방물은 토산의 베만을 쓰되, 그것도 3, 5()만으로써 성의만 표시하는 데 그치라." 하였다.

8월에 의용좌우군(義勇左右軍)을 설치하여, 문하평리(門下評理) 유연(柳淵)과 밀직사(密直使) 변안열(邊安烈)에게 나누어 통솔하게 하였다. ○ 동·서강() ()에 성을 쌓았다.

8월에 왕이 윤가관(尹可觀)에게 익비(益妃)를 간통하게 시키니, 가관이 죽음으로써 굳게 거절하므로, 왕이 크게 노하여 가관을 몽둥이질하고 폐하여 서인으로 삼았다. ○ 김흥경(金興慶)이 청하여 그 어머니 적선옹주(積善翁主) 유씨(柳氏)를 교주(交州)·강릉·양광(楊廣) 3도 기은사(三道祈恩使)로 삼아 향을 받들고 가게 하니, 역마가 10여 필이었으며, 안찰과 수령이 다투어 뇌물을 주었다. ○ 왜적이 해주에 침범하여 목사 엄익겸(嚴益謙)을 죽였으므로, 구원하지 않은 아전을 목베고, 주를 강등시켜 군()으로 삼았다. ○ 도당에 명하여 각기 재주가 수령직을 감당할 만한 사람 몇 명을 천거하게 하였다. ○ 서해도 만호(西海道萬戶) 허자린(許子麟)이 왜적을 능히 막지 못한 이유로, 체복사(體覆使) 삼사좌윤(三司左尹) 정단봉(鄭丹鳳)을 보내어 곤장을 치게 하였는데, 단봉이 자린을 목졸라 죽였다. 자린의 아우가, 단봉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억울하게 죽였다고 고소하니 단봉이 도망하였다. ○ 하을지(河乙沚) 등의 죄를 가볍게 판결했다는 이유로 체복사 이걸생(李傑生)을 죽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걸생은 성품이 강직하여 거리낌 없이 말하는데, 일찍이 김흥경(金興慶)과 사이가 좋지 않은 까닭으로 죽음에 이르렀다." 하였다. ○ 주영찬(周英贊)을 밀직부사로 삼았다. ○ 왕이 판사 윤호(尹虎)와 바둑을 두면서 약속하기를, 이기지 못한 사람은 어떤 일에 대한 것을 써서 주기로 하였다. 윤호가 이기지 못하였으므로 옛날 시를 썼는데, 그 시에, “어두운 데에서 속여도 항상 옳지 않은데, 밝은 데서 속이면 마땅히 죄를 받을 것이다. 한 사람의 손으로, 천하의 눈을 가리기 어렵다.[欺暗常不然 欺明當自戮 難將一人手 掩得天下目]" 하였다. 왕은 이를 휼간(譎諫 풍자하여 간하는 것)이라 하여 그를 점차 소원하게 대하였다.

○ 겨울 10월에 찬성사 최영(崔瑩) 6도 도순찰사(六道都巡察使)로 삼아 장수와 수령을 승진·출퇴(黜退)하게 하고, 군호(軍戶)를 군적(軍籍)에 편입시키고, 전함을 만들게 하고, 죄가 있는 자는 모두 현장에서 처벌하게 하였다. 최영이 나이 70세 이상이 된 자에게 품계에 따라 쌀을 차등 있게 내어 군수(軍需)를 보태게 하니, 명적(名籍)에서 이탈하고 도망하는 백성이 많아지며, 원성이 크게 일어났다. ○ 왕이 친히 정릉(正陵)에 제사지내고, 술자리를 베풀어 풍악을 연주하다가, 저녁 늦게까지 능 아래에서 유숙하였다. 백관이 군복을 입고 호종하였으며, 자제위(子弟衛)가 모두 붉은 옷을 입고서 검은 옷을 덧입고 말을 달려 앞에서 인도하였다. ○ 주영찬(周英贊)을 남경에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게 하고, 판선공시사(判繕工寺事) 우인열(禹仁烈)에게는 말을 바치게 하였다. 또 김잠(金潛)·송문중(宋文中)·조신(曹信)을 보내어 명 나라의 과거를 보게 하였는데, 영광(靈光)의 자은도(慈恩島)에 이르러 배가 부숴져서, 영찬과 김잠·조신은 물에 빠져 죽고 인열과 문중은 다시 돌아왔다. ○ 왜적을 능히 막지 못한 죄로, 최영이 양광도 도순문사 이성림(李成林)을 곤장을 쳐서 봉군(烽軍)에 배치하고, 도진무(都鎭撫) 지심(池深)을 목베었다. 처음에 김흥경(金興慶)이 창기(娼妓) 소근장(小斤莊)을 사랑하여, 날마다 그 일당 최인철(崔仁哲)을 시켜 이를 엿보게 하였는데, 마침 성림이 그 집에서 자는 것을 보았다. 이튿날 흥경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재상으로서 창기의 집에서 자는 것이 옳으냐." 하니, 성림의 안색이 변하면서 말하기를, “그런 일이 없다." 하였다. 이 때문에 서로 미워하더니, 김흥경이 왕에게 아뢰어 성림을 내쫓게 하였다. 마침 패군(敗軍)한 허물이 있으므로, 최영이 흥경의 비위를 맞추어 성림을 죽이고자 하니, 왕의 총애가 두터운 성림의 이부(異父) 아우인 염흥방(廉興邦)이 힘써 구원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11월에 밀직부사 장자온(張子溫)을 남경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화약(火藥)을 하사하기를 청하게 하였다.

12월에 평양 윤(平壤尹) 전녹생(田祿生)이 충혜왕(忠惠王)의 얼자(孼子) 석기(釋器)라고 사칭하는 자를 목베고, 머리를 서울에 보냈다. 석기의 저지른 죄가 분명히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죽이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의심하였다. ○ 대사(大赦)를 하고, 교서를 내리기를, “석기는 서얼(?)이 아니고, 단양대군(丹陽大君)의 가비(家婢)가 낳은 자이다. 전번에 손수경(孫守卿) 등이 그를 빙자하고 변고를 일으키려고 음모를 꾸미다가 죄를 받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화의 근본인 석기는 마땅히 제거되어야 합니다.' 하였으나, 내가 차마 즉시 처형하지 못하고 이안(李安)·정보(鄭寶) 등에게 명해서 제주에 보내어 안치하게 하였으나, 이안 등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배에 오를 즈음에 스스로 물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하므로 서울과 지방에 그 사실을 포고(布告)하였다. 그런데 지금 석기가 부내(部內)에 있으면서 흉악한 무리를 꾀어 모아 몰래 반역을 도모한 사실을 서북면 도순문사 전녹생(田祿生)이 비밀리에 탐지하고, 서해도 도순문사 김유(金庾)와 함께 즉시 가서 체포하여 머리를 베어서 서울에 보냈다. 내가 처음에 이 말을 듣고, 진실이 아니라고 의심하였으나, 석기의 외조부 임신(林信)을 잡아 신문하여 석기가 과거에 죽지 않았음을 명백히 알게 되었다. 내가 그를 보전시키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전복(顚覆)을 취한 것이다. 이안·정보는 석기가 살아 있는데도 죽었다고 하였으니 임금을 속이고 불충하였으며, 임신(林信)은 그가 망명한 사실을 알고도 즉시 고하지 않았으니 모두 처형하고, 그 흉도(兇徒) 김광수(金光秀)·김옥경(金玉鏡)·최흑려(崔黑驢)·이인(李仁)은 모두 용서하지 말며, 남에게 속아서 잘못을 저지른 그 나머지 사람은 형을 일체 면제하라." 하였다. ○ 김의(金義)를 밀직부사로 삼았다.

 

 

[D-001]구주(九州) : 고대에 중국을 9()로 나누었으므로, 후세에 이르러서도 중국 전토를 9주라 한다.

 

 

   

 

 

 

 

 고려사절요 제29   

 

 

 공민왕 4(恭愍王四)

 

 

갑인 23(1374), 대명 홍무 7 

 

 

○ 봄 정월에 검교 중랑장 이희(李禧)가 글을 올려 아뢰기를, “지금 왜구의 기세가 한창 성한데, 배타는 데 익숙하지 않은 백성을 내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수전을 하도록 하니, 매양 패전하게 됩니다. 신이 바닷가에서 나서 자랐으므로 수전을 조금 익혔사오니, 원하건대 바닷가에 사는 백성 중에 배질에 익숙한 자를 거느리고 그들과 함께 힘을 다하여 싸운다면 공을 세울 수 있습니다." 하였다. 왕이 개연히 이르기를, “초야의 신하인 이희 같은 자도 오히려 이와 같이 계책을 아뢰는데, 백관과 위사(衛士) 가운데 일찍이 한 사람도 이희 같은 자가 없었더냐." 하였다. 위사 유원정(柳爰廷)이 나아가서 아뢰기를, “중랑장 정준제(鄭准提)가 일찍이 왜구를 평정할 계책을 초고로 만들어 두었는데 올리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준제가 마침 궁전 섬돌에서 시립(侍立)하고 있었으므로 왕이 돌아보고 물으니, 준제가 즉시 전대 안에서 찾아 올렸다. 왕이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여 이희를 양광도 안무사로, 정준제를 전라도 안무사로 삼아, 왜인추포만호(倭人追捕萬戶)를 겸하게 하였다. 준제는 후에 이름을 지()로 고쳤다. ○ 대언 김흥경(金興慶), 그의 어미 국태부인(國大夫人) 유씨(柳氏)에게 녹으로 주는 쌀과 베가 품질이 나쁘다고 하여, 광흥창(廣興倉) 관원을 대궐 문 밖에서 곤장을 쳤다.

2 1일 정유에 일식이 있었다. ○ 무술일에 혜성이 동방에 나타났는데 길이가 한 발이 넘었다. ○ 죄수를 사면하였다. ○ 대간이 첨설관(添設官)의 인원이 너무 많아 폐단이 있다고 말하였다. ○ 이무방(李茂芳)을 정당문학으로 삼았다. 나라 제도에, 산릉(山陵)의 수도(隧道)는 반드시 대관(臺官)에게 서명시켜서 봉()하게 하였으니, 세상에서 이를 봉묘관(封墓官)이라고 하였다. 이 사람들은 대부분 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관들이 대개 모두 피하고 꺼리었는데, 무방이 장령으로서 정릉을 봉하니,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서 높은 지위에 임용하게 되었다. ○ 밀직부사 정비(?)를 남경에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게 하고, 판사(判事) 우인열(禹仁烈)에게는 일을 계품(啓稟)하게 하고, 상호군 주의(周誼)에게는 은혜에 사례하게 하고, 육로를 통하여 조현(朝見)하기를 청하게 하였다.

3월에 전 문하사인(門下舍人) 박계양(朴啓陽)이 처모(妻母) 홍씨(洪氏)와 간통한 것이 발각되어 도망하였다. 그 처모를 신문하니 자백하므로, 곤장을 치고 적몰하여 관비로 삼았다. ○ 양백연(楊伯淵)을 서북면 도순문사로 삼았다. ○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 이인복(李仁復)이 졸하였다. 인복은 인품이 정대하고 근후하며, 예로써 몸을 닦고 학문에 힘쓰며 글을 잘 지어, 그의 손으로 지은 국가의 사명(辭命)이 많았다. 왕이 신돈을 총애할 적에 인복이 비밀리에 아뢰기를, “신돈은 마음이 바른 사람이 아니므로, 훗날에 반드시 변()을 일으킬 것이오니 멀리하십시오."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후에 신돈이 죽임을 당하니 왕이, 그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이 때에 와서 등창을 앓아 거의 죽게 되었는데, 아우 인임(仁任)이 염불하기를 권하니 대답하기를, “내가 한 평생 본래 부처에게 아첨하지 않았는데, 이제 어찌 스스로 속이겠느냐." 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왜적이 안주(安州)로 쳐들어오니, 목사 박수경(朴修敬)이 힘써 싸워 물리쳤다. ○ 병자일에 지진이 있었다. ○ 김흥경(金興慶)이 안사기(安師琦) 등과 함께 대궐 안에서 개인적인 잔치를 베풀며 풍악판을 벌였다. ○ 경상도 관찰사가 보고하기를, “왜적이 병선 40척을 부수니 죽은 군사가 매우 많다." 하였다. ○ 최영을 경상·전라·양광도 도순문사로 삼으니 헌사에서 아뢰기를, “최영이 일찍이 도순찰사가 되었을 때에 6도가 소란하였으니, 다시 순문사를 시킬 수 없습니다." 하였다. 최영이 울면서 왕에게 하소하기를, “신이 성심으로 나라를 위하여 몸바쳐 죽으려 하는데 이처럼 비방을 들었사오니, 신의 관직을 파면시키소서." 하였다. 왕이 최영을 강직하게 여겼으면서도 도당과 대간에게 대임자를 천거하게 하였다. ○ 서울에 역질이 크게 돌았다.

○ 여름 4월에 이인임을 면직하고, 염제신(廉悌臣)을 문하시중으로 삼았다. ○ 과거를 보여 김자수(金子粹) 33명을 뽑았다. 처음에 왕이 과거를 보는 선비의 시권(試券)에 모두 나이를 기록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어기는 사람이 있으니, 왕이 노하여 방을 발표하는 것을 정지시켰다. ○ 최영을 논핵하였다는 이유로 대사헌 김속명(金續命)을 면직시키고, 지평 최원유(崔元濡)를 폄직시켜 연안 부사로 삼고, 문하평리 유연(柳淵)에게 대사헌을 겸하게 하고, 판개성부사 전녹생(田祿生)을 최영에 대신하여 경상도 도순문사로 삼았다. ○ 황제가 예부주사(禮部主事) 임밀(林密)과 자목대사(?牧大使) 채빈(蔡斌)을 보내서 탐라의 말 2천 필을 바치게 하였다. 이에 문하평리 한방언(韓邦彦)을 탐라에 보내어 말을 가져 오게 하였다. ○ 왜선 3 50척이 합포(合浦)에 침범하여 군영과 병선을 불사르니, 죽은 사졸이 50여 명이었다. 명하여 도순문사 김굉(?)을 목베고, 팔다리를 찢어 여러 도에 돌리게 하였다. 김굉이 처음에 나주에 거주할 적에, 토지와 노비를 빼앗아 재산이 넉넉하였다. 일찍이 왜적을 목포(木浦)에서 쳐서 관직과 상을 받았는데 이것을 통하여 권세 있는 사람에게 뇌물을 바쳐서 해마다 포왜사(捕倭使)가 되고, 도순어사(都巡禦使)가 되어서 백성의 재물을 가혹하게 벗겨먹으니, 전라도의 백성이 이를 고통스러워했다. 대호군 송분(宋芬)이 죽었는데, 그 아내가 상복을 벗기도 전에, 김굉이 관사(官事)를 핑계하고 끌고 가서 대낮에 강간을 하고 첩을 삼았으며, 또 관하 군졸에게 지급하는 관의 양곡을 감하여 반만 지급하고, 또 여러 주의 녹전선(祿轉船)에서 세를 받아 모두 제 집에 싣고 갔으니, 그의 탐하고 악함이 이와 같았다. ○ 서해도 만호 이성(李成)과 부사(副使) 한방도(韓方道)·최사정(崔思正)이 왜적과 목미도(木尾島)에서 싸우다가 패하여 죽었다. ○ 왜적이 자연도(紫燕島)에 침범했다.

5월에 사람들이 오랑캐를 본받아 앞머리를 깎는 것을 금하였다. ○ 왜적이 강릉과 삼척에 침범하고, 또 경주와 울주(蔚州) 2주에 침범하였다.

6월에 도당에서 임밀(林密)과 채빈(蔡斌)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기생이, 채빈의 관모에 꽃을 바르게 꽂지 않으니, 채빈이 크게 노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시중 염제신(廉悌臣)을 광주(廣州)로 귀양보냈다. 채빈은 기생이 자기 뜻을 거스른 데 노하여 말을 달려서 본국으로 돌아가려 하니, 왕이 김흥경(金興慶)을 시켜 금교역(金郊驛)까지 뒤쫓아 가서 위로하여 도로 오게 했다. 이때 빈관(賓館)에서 사신을 심히 후하게 대접하니, 부고(府庫)가 이 때문에 비게 되었다. 각 관사로 하여금 윤번으로 연회를 베풀게까지 하였다. 채빈은 성품이 횡패(橫悖)하여 사람을 구타하고 꾸짖기를 좋아하니, 시중 이하의 여러 재상이 모두 능욕(陵辱)을 당하였다. ○ 영전이 폭우로 인하여 새는 곳이 있으니, 왕이 크게 노하여 동역관(董役官)인 찬성사 한방신(韓方信)과 평리 노진(?)을 옥에 가두고 곤장을 쳤다. ○ 경복흥(慶復興)을 문하시중으로, 이인임(李仁任)을 수문하시중으로 삼았다. ○ 헌부에서 내부령(內府令) 나흥유(羅興儒)가 영전의 재목을 훔쳐서 썼다고 탄핵하여, 그 관직을 파면시켰다. ○ 정비(鄭庇) 등이 남경에서 돌아왔는데, 중서성에서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자문(咨文)을 보냈으니, 그 자문에, “정비가 가지고 온 예물이 정해진 공물 액수보다 많고, 또 백저(白苧) 3백 필을 태부감(大府監)에 보냈으니, 태부감은 본래 원조가 설치하였던 명칭이다. 너희 나라에서 자주 사신을 보내 오면서, 어찌 국가(명 나라)에서 태부감을 일찍이 설치하지 않은 사실을 알지 못하며, 공물을 명분도 없이 바치는 것은 실로 대국을 성심으로써 섬기는 예가 아니다. 하물며, 우리 조정은 사해가 한 집안이 되었으니, 어찌 작은 나라의 공물에 의뢰하겠느냐. 또 지난해에 김갑우(金甲雨)가 말 50필을 바쳤다고 말하나, 길에서 2필이 없어져서 남성에 이르렀을 때 남은 것은 49필이었다. 말한 바가 모두 진상하는 수효에 관계되므로 태복시(太僕寺)를 시켜 조사해 보니, 모두 탈 만한 말이 아니고, 그 중의 1필은 김갑우가 제 물건이라 하면서 스스로 동궁에게 바치고자 하는데, 그 중의 거짓 계략과 속임수를 환하게 알 수 있다. 이것이 왕의 뜻에서 나온 것인지, 혹은 신하들이 성실하지 못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 조정은 피아(彼我)의 차별 없이 똑같이 사랑하고 있으므로, 사소한 허물은 따지지 않겠다. 지금 왕이 바다 건너 멀리 사신을 보내 왔으니, 어려움과 험함이 있을 것이다. 바친 공물은 베 6()만 받고, 나머지 물건은 온 사신에게 주어서 돌려보낸다. 3년 만에 한 번 조공을 하라. 물건은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니고 지성에 달려 있다." 하였다. 이에 김갑우를 목베었다. ○ 기미일에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나 하늘에 뻗쳤다.

○ 가을 7월에 한방언(韓邦彦)이 제주에 이르니, 합치(哈赤)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관음보(觀音保) 등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어찌 감히 세조황제(世祖皇帝 홀필렬)가 놓아기르게 한 말을 대명(大明)에 바칠 수 있으랴." 하면서, 3백 필만 보내었다. 임밀(林密) 등이 왕에게 아뢰기를, “제주의 말이 2천 필의 수효를 채우지 않는다면 황제가 반드시 우리들을 죽일 것이오니, 오늘 왕에게 죄를 받겠습니다." 하니, 왕이 답을 하지 못하였다. 드디어 제주를 치기로 의논하여 문하찬성사 최영 등에게 명해서 가서 치게 하니, 전함이 3 14척이요, 날랜 군사가 2 56 5명이었다.

8월에 종친·재·추·대언 이상의 관원에게 각기 말 한 필을 내어 명 나라에 진헌하는 데 돕게 하고, 한방언(韓邦彦)을 곤장을 쳐서 귀양보냈다. ○ 최영이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탐라의 명월포(明月浦)에 이르니 적이 1천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항거하였다. 모든 군사가 언덕 아래로 내려가서 머뭇거리며 나아가지 않으므로, 최영이 비장(裨將) 한 사람을 목베어 돌리니 대군(大軍)이 일제히 진격했다. 좌우 양쪽에서 분발해서 적을 크게 깨뜨리고, 적의 괴수 3명을 목베어 머리를 서울로 보내니, 탐라가 평정되었다.

9월에 지문하사(知門下事) 정비(鄭庇)를 남경에 보내어 말을 바치게 하였다. ○ 임밀·채빈 등이 돌아가므로,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김의(金義)를 보내어 진상하는 말 3백 필을 요동까지 호송하게 하였다. ○ 왜적이 국경에 가까이 다가오므로, 도성에 계엄을 내렸다. ○ 왜적이 안주(安州)에 침범하였다. ○ 죽은 궁인 한씨(韓氏)의 조고(祖考)에게 추증하였는데, ()를 한씨의 소생이라고 거짓 칭했기 때문이다. ○ 갑신일에 환자 최만생(崔萬生)과 행신(幸臣) 홍륜(洪倫) 등이 왕을 시해하였다. 하루 전날에 만생이 왕을 따라 변소에 가서 비밀리에 아뢰기를, “익비가 아기를 밴 지가 벌써 5개월이 되었습니다." 하니, 왕이 기뻐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영전을 부탁할 사람이 없음을 염려하였는데, 비가 이미 아기를 배었으니 내가 무슨 근심이 있으랴." 하였다. 조금 후에 묻기를, “누구와 관계하였느냐." 하니, 만생이 아뢰기를, “홍륜이라고 비가 말합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내가 내일 창릉(昌陵)에 배알하고 주정하는 체하면서 홍륜의 무리를 죽여서 입막음을 하겠다. 너도 이 계획을 알고 있으니 마땅히 죽음을 면하지 못할 줄 알아라." 하니, 만생이 두려워하였다. 이날 밤에 만생이 홍륜·권진(權瑨)·홍관(洪寬)·한안(韓安)·노선(盧瑄) 등과 모의하고, 왕이 술에 몹시 취한 것을 틈타서 칼로 찌르고는 부르짖기를, “적이 밖에서 들어왔다." 하였다. 위사(衛士)들은 겁을 내어 떨면서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재상과 백관들도 변고를 듣고도 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이른 새벽에 태후가 강녕대군(江寧大君) ()를 데리고 내전에 들어와서 상()을 숨기고 발표하지 않았다. 이인임(李仁任)은 중 신조(神照)가 상시 대궐 안에 있으면서 완력이 있고 간사한 꾀가 많으므로 난을 일으켰는가 의심하여 옥에 가두었다. 조금 후에 병풍과 만생의 옷 위에 뿌려진 피 흔적을 보고 만생을 옥에 가두어서 국문하여 그 진상을 모두 알았으므로, 드디어 홍륜 등을 옥에 가두었다.

 

사신이 말하기를, “왕이 왕위에 오르지 않았을 적에는, 총명하고 인후하여 백성의 마음이 모두 그에게 쏠렸었다. 왕위에 올라 정성을 다하여 정치에 힘쓰므로, 조정과 민간에서 크게 기뻐하여 태평 시대가 오기를 기대하였는데, 노국공주(魯國公主)가 세상을 떠난 후로는 지나치게 슬퍼하여 본심을 잃고, 신돈에게 정사를 맡겨 공신과 현인을 내쫓고 죽이며, 토목의 역사를 크게 일으켜 백성의 원망을 사고, 못된 젊은 아이들을 가까이하여 음란한 행동을 방자히 하며, 무시로 술주정을 부리며 측근 신하를 구타하였고, 또 후사가 없음을 걱정하여 다른 사람의 아들을 데려다가 책봉하여 대군(大君)으로 삼았다. 외인이 이를 믿지 않을까 염려하여 비밀히 폐신(嬖臣)으로 하여금 후궁과 관계하여 더럽히게 하였으며, 후궁이 임신하게 되자 관계한 그 사람을 죽여서 입을 막으려고 하였으니, 패란(悖亂)함이 이와 같고도 화를 면하고자 한들 되겠는가." 하였다. 병술일에 우가 재·추와 함께 상을 발표하고 곡을 하였다.

○ 정해일에 태후와 시중 경복흥(慶復興)은 종친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고, 시중 이인임은 우를 세우고자 하여 의논이 주저주저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니, 도당에서도 서로 쳐다만 보고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판삼사사(判三司事) 이수산(李壽山)이 말하기를, “오늘날의 계책은 마땅히 종실 영녕군(永寧君) ()에게 있어야 된다." 하였다. 밀직 왕안덕(王安德) 등이 인임의 뜻에 맞추어 크게 말하기를, “왕이 이미 대군을 후사로 삼았으니, 이를 버리고 어디서 구할 것이냐." 하였다. 인임이 백관을 거느리고 우()를 왕으로 세웠으니, 나이 10세였다. ○ 백관이 거리에서 최만생·홍륜을 사지(四肢)를 수레에 매고 끌어 당겨서 찢어 죽이고, 한안(韓安)·권진(權瑨)·홍관(洪寬)·노선(盧瑄)과 그들의 여러 아들을 목베어 머리를 매어 달고, 가산을 적몰하며, 처와 첩들은 나누어 관비로 삼았다. 한안의 아비인 방신(方信), ()의 아비인 진(?), ()의 아비인 용(), ()의 아비인 사보(師普)는 곤장을 쳐서 도류안(徒流案)에 적어 넣어 먼 곳으로 귀양보내고, 친숙질과 종형제들도 모두 곤장을 쳐서 귀양보냈다. 환관 김사행(金師幸)은 대행왕에게 아첨하고 미혹하게 하여 토목의 역사를 일으킨 죄로 몰입하여 익주(益州)의 관노로 삼고 그 가산을 적몰하였다.

○ 겨울 10월에 김흥경(金興慶)을 언양(彦陽)으로 귀양보내고, 그 가산을 적몰하였다. ○ 신돈의 당을 사면하였다. ○ 경신일에 현릉(玄陵)에 장사하고, 경효(敬孝)란 시호를 올렸다. 이날 무지개가 해를 에워싸고, 해 곁에 또 크고 작은 해 2개가 생겼다.

11월 기사일에 태묘에 대신을 보내 제사를 대신 지내게 하였다. 이날에 큰비가 내리고 천둥과 번개가 치며, 땅이 크게 진동하고 올빼미가 태묘에서 울었다. ○ 한씨(韓氏)에게 추시(追諡)하여 순정왕후(順靖王后)라 하였다. ○ 밀직사(密直使) 장자온(張子溫)과 전공판서(典工判書) 민백훤(閔伯萱)을 남경에 보내어 부고(訃告)를 전하고, 시호와 왕위 계승을 청하게 하였다. ○ 나하추(納哈出)가 사신을 보내 와서 낙타 2마리와 말 4필을 바쳤다. ○ 김흥경(金興慶)이 처형되었다. 일찍이 오헌(吳獻)이 홍륜 등의 음모를 듣고 흥경에게 알리니, 흥경은 홍륜 등이 왕의 총애를 받으므로 왕이 이를 믿지 않으면 도리어 그들에게서 해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망설이면서 감히 왕에게 아뢰지 못하였다. 난이 일어나니 오헌이 최영에게 자세히 알리므로, 최영이 오헌을 흥경의 귀양간 곳에 보내어 대질하게 하였다. 흥경이 오헌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일찍이 너의 입에서 젖냄새가 날 때에, 내가 너를 선왕에게 천거하였는데, 네가 도리어 나를 해치고자 하느냐." 하니, 오헌이 말하기를, “내가 홍륜 등의 역모를 공에게 알린 것이, 곧 공의 은혜에 보답한 것입니다." 하였다. 흥경이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 임밀(林密)과 채빈(蔡斌)은 이르는 곳마다 지체하여 머물렀으며, 채빈은 주정이 있어 매양 김의(金義)를 죽이고자 하였다. 개주참(開州站)에 이르러, 김의가 채빈과 그 아들 집밀(執密)을 죽이고, 갑사 3백 명과 말 2백 필을 가지고 북원(北元)으로 달아났는데, 장자온(張子溫)과 민백훤(閔伯萱)이 도망해 돌아왔다. 김의는 본래 원 나라 사람이다. ○ 간관 유구(?)와 안종원(安宗源) 등이 도당에 글을 올리기를, “환자(宦者)가 국가의 근심이 되는 것은 조고(趙高) 이후로 명백하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충선왕이 토번(土蕃)에서 곤욕을 당하고, 충혜왕이 악양(岳陽)에서 화를 당한 것은, 모두 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와 고용보(高龍普) 때문이었고, 전일 최만생의 대역에 이르러서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지금 주상께서 나이 어리시니, 노성한 이를 친하여 덕성을 함양하여야 마땅하며, 다시 환자들에게 조석으로 가까이하게 하여 임금의 총명을 가리어 나라를 그르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혼전(魂殿)에는 이미 도감(都監)의 원리(員吏)가 있어 조석의 전()을 공경히 받들고 있사오니, 다시 환자들이 부산하게 그곳에 모여서 총애를 굳히는 터전을 마련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여러 재상께서는 나라를 위해서 깊이 생각하여, 충성스럽고 근실한 사람 10여 명만을 가려서 궁내를 소제하는 임무에 대비하게 하고, 별사(別賜)와 녹봉을 중복하여 받아 나라의 비용을 허비하는 일을 못하게 하며, 나머지 도당은 각기 편리대로 하게 하여 다시는 국가의 환난이 되지 말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 이때 우의 나이가 어려 정사를 재상이 처리하였기 때문에, 간관이 글을 올려 환자들의 처치를 바랐는데, 재상들은 이를 생각하지도 않았다.

12월에 삼사좌사 이희필(李希泌)을 서북면 상원수로 삼았다. ○ 김자수(金子粹)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직산군(稷山君) 백문보(白文寶)가 졸하였다. 문보는 글을 잘 짓고 성품이 질박하며 정직하여, 이단에 미혹되지 않았다. ○ 판밀직사사 김서(?)를 북원(北元)에 보내어 전왕의 상을 알리게 하였다. ○ 왜적이 밀성(密城)에 침범하여 관청을 불사르고 사람을 포로로 잡고 재물을 약탈하였다.

 

 

[D-001]조고(趙高) : () 나라 때의 환자(宦者) 조고(趙高)가 권력을 썼는데, 마지막에는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망쳤다.

 

   

 

 

 

 

 

출처 : ▒ 한 산 草 堂 ▒
글쓴이 : 천하한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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