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절요 제27권
공민왕 2(恭愍王二)
계묘 12년(1363), 원 지정 23년
○ 봄 정월에 양부와 전 시중 윤환(尹桓)ㆍ이제현(李齊賢)ㆍ이암(李?)ㆍ염제신(廉悌臣)을 불러 환도할 일을 의논하니 모두 아뢰기를, “송도(松都)는 종묘가 있는 곳이요, 국가의 근본이옵니다. 서운관에서 음양에 구애되는 것이 있다고 아뢰니, 마땅히 먼저 성 남쪽 흥왕사(興王寺)로 행차하시어 그곳에서 머무르셨다가 강안전(康安殿)이 수리되기를 기다려 옮기소서." 하니, 왕이 이 말을 따랐다.
○ 2월 을해일에 청주를 떠났다.
○ 경진일에 지진이 있었다.
○ 계미일에 흥왕사(興王寺)에 이르니 백관들이 환도를 축하하고 서울에 머물러 있던 재ㆍ추들이 왕을 축수(祝壽)하는 술을 올리니, 왕이 이르기를, “오늘 경성(京城)에 돌아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하였는데 돌아왔으니 이 모두 경들의 공이로다."하고, 마음껏 즐기다가 파했다.
○ 찬성사 김용(金鏞)을 제조순군(提調巡軍)으로 삼았다.
○ 3월 임인일에 지진이 있었다.
○ 찬성사 이공수(李公遂)와 밀직제학 허강(許綱)을 원 나라에 보내어 진정표(陳情表)를 올렸다. 이공수는 기황후(奇皇后)의 외종형이다. 일찍이 모든 기씨가 패하자 황후가 태자에게 이르기를, “네 이미 나이가 들었는데도 어찌 나를 위하여 원수를 갚지 않는가." 하였다. 때마침 최유(崔濡)가 원 나라에 있었는데 승상 소사감(?思監)과 본국 출신 환자 박불화(朴不花)에게 아첨하고 장작동지(將作同知)가 되었다. 황후가 국왕을 원망한다는 것을 알고, 김용이 안우(安祐) 등 여러 장수를 죽였으므로 내응이 있을 것을 믿고 여러 불평 품은 자들과 더불어 황후를 달래어 국왕을 모함하여 폐하고,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세울 것을 꾀했다. 이때에 이공수가 서경에 이르러 태조의 원묘(原廟)에 가 뵙고 맹서하기를, “우리 왕을 복위시키지 못하면 신은 죽어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연경(燕京)에 이르니 기황후가 음식을 베풀어 후히 위로하며 이공수에게 이르기를, “경이 마음을 다하여 우리 어머니에게 효도하니 곧 나의 친오빠입니다. 감히 친오빠를 대접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이공수가 대답하기를, “주(周) 나라 강원(姜嫄 주 나라 시조 후직(后稷)의 어머니)과 임사(任?)는 성인을 낳아 길러 덕화로 터를 닦아 《시경(詩經)》에 그에 대한 칭송이 있었는데, 중간에 운수가 쇠해지자 강후(姜后)가 대죄하니 선왕(宣王)이 중흥하였사오며, 포사(褒?)ㆍ달기(?己)ㆍ여후(呂后)ㆍ무천측(武天則)은 친정을 뒤엎고 후손이 끊어졌사오니, 아름답고 악함이 분명하여 천추의 거울이 되었나이다. 우리 고려가 원 나라 큰 조정에 대하여 처음에는 장수들끼리 서로 형제의 의리를 맺었었고, 뒤에는 천자께서 구생(舅甥 여기서는 장인과 사위를 말함)의 관계를 정하신 지 백 년이 넘어 물고기와 물이 서로 만난것 같사온데, 하물며 지금 황후께서는 주 나라의 임사로서 삼한(三韓)이 매우 다행스럽게 여깁니다. 이제 우리 왕께서 천자를 위하여 적을 쳐서 국가(원 나라)를 위하여 공을 세우니, 마땅히 상을 주어서 이것을 사방에 밝게 보여 장수들을 격려시켜야 하는데도 어찌 사사로운 감정을 풀려고 공인의 의리를 폐하나이까. 병신년의 화는 실로 우리 집안의 세력이 너무 성하고 차는 데도 만족할 줄 모르고 분수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지 왕의 죄는 아니었사옵니다. 그런데 자기 집에 허물이 있는 줄은 모르고 공이 있는 왕을 폐하려 한다면 훗날에 반드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황후는 그 말에 감동받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노여움이 다 풀리지 않아 이공수에게 덕흥군을 받들어 동으로 돌아가라 하니 이공수는 병을 청탁하고 그곳에 머물러 있기를 청했다. 이때 최유(崔濡)가 덕흥군에게 말하기를, “이공수가 여기 머물러 있는 것은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사오며, 일이 혹시 중간에 변하면, 후회해도 미치지 못할 것이니 독로첩목아(禿魯帖木兒)와 박불화(朴不花)에게 뇌물을 많이 주어 기어코 이공수를 데리고 가십시오." 하였다. 이공수가 이 말을 듣고 서장관 임박(林樸)에게 말하기를, “내 지금 부모도 없고 자손도 없는데 벼슬이 지극히 높으니 어찌 다시 조금이라도 거리끼는 마음이 있으리오. 마땅히 머리를 깎고 산에 들어가되 저들을 따르지는 않으리다." 하니, 두 사람이 들어가 이공수를 데려갈 것을 아뢰었는데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 왜국에서, 잡혀간 우리나라 사람 30여 구를 돌려보냈다.
○ 삼사우사 김광재(金光載)가 졸했다. 김광재는 김태현(金台鉉)의 아들로서 충정왕을 섬겨 매우 신임을 받았는데, 왕이 즉위하자 두문(杜門)하고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를 지극한 효도로 섬기더니, 어머니가 죽자 무덤 앞에 여막(廬幕)을 짓고 3년 상을 마쳤는데, 매양 제사 때를 당하면 눈물을 흘리며 울기를 그치지 않으니, 왕이 듣고 가상히 여겨 유사에게 명하여 그가 사는 곳에 정표(旌表)하여 영창효자리(靈昌孝子里)라 하게 하고, 그 마을 몇 집의 부역을 면제시켜 그를 받들어 섬기게 하였다. 그는 집에서 산업에 힘쓰지 않고 좌우에 거문고와 책만 두고 담박하게 지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 윤달 신미일 밤 5경에 적 김수(金守)ㆍ조련(曹連) 등 50여 명이 행궁인 흥왕사(興王寺)로 침입하여 문지키던 자를 죽이고 바로 안으로 들어가 말하기를, “나는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왔다" 하고, 지름길로 왕의 침전(寢殿)에 이르러 지게문 밖에서 환자 강원길(姜元吉)을 죽이니 숙위하던 군사들이 모두 도망해 숨었다. 이 때 환자 이강달(李剛達)이 왕을 업고 창문으로 나가 대비의 밀실로 달려가 담요를 뒤집어 씌워 숨겨 놓고, 공주가 지게문 앞에 막고 앉아 있었다. 적들이 침전으로 들어갔다. 환자 안도적(安都赤)은 용모가 왕과 비슷하므로 자기 몸으로 왕을 대신하고자, 왕의 잠자리에 누웠는데, 적은 왕인 줄 알고 죽이고서 좋아 날뛰면서 만세를 불렀다. 그들은 또 시위첨의평리(侍衛僉議評理) 왕재(王梓)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김한룡(金漢龍) 등을 죽이고 우정승 홍언박(洪彦博)의 집에 이르러 말하기를, “나와서 황제의 명령을 받아라." 하였다. 홍언박이 의관을 정제하고 나가려 하니, 그의 아들과 아내가 적들의 속임수라는 것을 깨닫고 피하기를 권했으나, 홍언박은 말하기를, “어찌 수상이 되어가지고 죽음을 피해 도망하리오." 하고, 나가 말하기를, “너희 도적들이 어찌 황제의 명령이라 일컫는가." 하니, 적들이 쳐서 죽였다. 이윽고 적들은 왕이 아직 살아 있는 것을 알고 거짓으로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를, “삼가 주상을 놀라게 하지 말라." 하고, 도당 40여 명을 나누어 궁중의 모든 직책을 맡게 한 다음, 음식 만드는 자를 재촉하여 음식을 갖추어 올리게 하여 왕이 의심하지 않고 나오도록 하였다. 또 도당을 나누어 경성으로 달려가서 경성에 머물러 있는 재상들을 죽였다. 때마침 좌정승 유탁(柳濯)은 여러 재상들과 더불어 초하루마다 국가를 위하여 복을 비는 일로 묘련사(妙蓮寺)에 있다가, 이 변을 듣고 순군만호부로 가서 군사를 모아 적을 치려 하였으나, 적의 선기(先騎)가 이미 묘련사 동구에 이르렀다. 유탁 등이 말에 재갈을 물리고 지름길로 빠져 순군부에 가니, 김용만이 묘련사에 가지 않고 있다가, 먼저 순군부에 이르러 여러 사람을 모아놓고 적을 친다고 거짓으로 말하면서 여러 재상들에게 이르기를, “제공(諸公)들은 이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왕이 계신 곳으로 가시오. 나는 흩어진 군사들을 거두어 가지고 뒤따라 가리다." 하였다. 그러나 유탁은 김용에게 딴 뜻이 있는 것을 짐작하고 그곳에 머물러 무슨 변이 있는지 지켜 보았다. 김용은 자기의 문객인 순군제강(巡軍提控) 화지원(華之元)과 서로 눈짓하고 잡혀 오는 적들을 신문도 않고 그대로 죽여서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는 것이었다. 밀직사 최영(崔瑩), 부사(副使) 우제(禹?), 지도첨의(知都僉議) 안우경(安遇慶), 상호군(上護軍) 김장수(金長壽) 등은 경성에서 행궁(行宮)에 달려가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여러 장수들이 이르기를, “적들의 있는 곳을 살펴보고난 후 들어가야 한다." 하니, 김장수가 큰 소리로, “적의 무리들은 안에 있는데 무엇을 살펴 본단 말이오." 하고, 문을 부수고 먼저 들어가 적 3명을 베니 최영 등이 진격하여 모두 죽였다. 김장수는 적의 칼을 맞아 죽었다. 난이 평정되고 숙위(宿衛)가 다시 모이니 왕이 밀실에서 나와 그날로 경성으로 들어갔다. 백관에게 명하여 숙위하고 순찰하게 하였다.
○ 흥왕공신(興王功臣)을 정하고 토지와 노복을 차등있게 하사하는데 김용에게도 주었다. 김용이 염제신(廉悌臣)의 집에 이르러 술을 마시다가 염제신에게 말하기를, “세 가지 걱정거리가 없어졌으니 어찌 즐겁지 않으리오." 하였으나, 사람들은 그 뜻을 알지 못했다.
○ 신축년의 호종공신(扈從功臣)을 정했다.
○ 염제신을 우정승으로 유탁을 좌정승으로, 최영을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우제(禹?)ㆍ한휘(韓暉)를 밀직부사로 삼았다.
○ 흥왕사에서 난을 일으킨 적당의 무리 90여 명을 체포하였는데 김용이 제조가 되어 한 사람도 신문(訊問)을 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의심했다. 왕이 김용을 불러 이르기를, “너를 순군옥에 내려 정상을 신문해야 마땅하지만 다만 전일의 공을 생각하여 우선 죄를 감하노라." 하고, 명하여 밀성군(密城郡)으로 귀양보내고 그의 도당 대호군(大護軍) 고환(高?)과 전리정랑(典理正郞) 화지원(華之元) 등 몇 사람도 외지로 귀양보냈다. 이달 초순부터 해와 달이 빛을 잃어 구름도 없는데도 날이 흐리더니, 김용이 쫓겨나자 날이 청명하여졌다.
○ 여름 4월에 장사성이 사신을 보내어 홍두적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고 공작을 바쳤다.
○ 밀직상의(密直商議) 홍순동(洪淳同)과 지밀직(知密直) 이수림(李壽林)을 원 나라에 보냈는데, 백관과 기로들이 원 나라 어사대에 글을 올려 말하기를, “적을 평정하여 길을 통한 뒤에 첩서(捷書)를 바치고 신정을 축하하였으며, 사은하고 성절을 축하하는 등 사신을 계속 보냈으나, 한 사람도 동으로 돌아오는 자가 없으며, 또 봄이 다 가도록 정삭(正朔)을 반포하지 않고 대사(大赦)가 내려도 사신이 오지 않으니 이는 필시 조정이 참소하는 무리를 받아 들여 우리나라? 소홀히 해서입니다. 지금 왕이 왕위에 오른 후로 조빙하는 예를 게을리 하지 않고 더욱 공경히 하였고, 마침 홍두적의 난리를 만났으나, 두 번이나 공을 세웠기에 혹 허물이 있더라도 여러 번 은사(恩赦)를 입었는데, 참소하는 말을 하는 자가 어떻게 모함하였기에 이렇게 딴 의논이 생겼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우리 왕의 공을 표창하시고 참소하는 사람의 죄를 바르게 다스리소서." 하고, 글을 중서성(中書省) 첨사원(詹事院)에도 바쳤다.
○ 염제신(廉悌臣)을 파직하고 유탁을 우정승에, 이공수(李公遂)를 좌정승으로 삼았다. 신축년 난리에 염제신이 그 어머니를 버리고 갔는데 대간이 고신에 서명하여 주지 않아 파면되었다.
○ 왜선 2백 30척이 교동(喬桐)에 정박하니, 경성을 계엄하고 안우경(安遇慶)을 방어사(防禦使)로 삼았다.
○ 대호군 임견미(林堅味)와 호군 김두(金斗)를 보내어 김용(金鏞)을 계림부(鷄林府)로 옮겨 가두게 하고 안렴사 이보림(李寶林)과 함께 국문하니, 김용이 말하기를, “내 8년 동안에 세 번 재상을 하여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한 것이 없었는데, 어찌 왕을 범할 마음이 있었겠는가. 다만 홍시중을 없애고 싶어서 한 일이다." 하였다. 임견미 등이 힐난하기를, “무엇 때문에 안도적(安都赤)을 죽였는가." 하니, 김용이 대답할 말이 없었다. 드디어 김용을 죽여 그 머리를 경성에 전하고 재산을 몰수했으며 도당 10여 명을 베었다. 그 밖에 곤장을 때려서 귀양보낸 자도 수십 명이었다. 왕은 그래도 김용을 못잊어 그 때문에 눈물을 흘리면서 두 번이나 탄식하며, “누구를 가히 믿을 것인가." 하였다. 그 뒤에 어떤 사람이 김용이 가졌던 묘아안정주(猫兒眼精珠)를 얻어 도당에 바치니 일좌(一座)가 돌려 가면서 구경했으나, 평리(評理) 최영만은 돌아다 보지도 않고 말하기를, “김용의 큰 뜻을 이런 물건들이 흐려 놓았는데 제공들은 무엇 때문에 구경하시오." 하였다.
○ 김용의 도당 방언휘(房彦暉)ㆍ최수자(崔守雌)를 곤장때렸다. 방언휘의 딸이 기유걸(奇有傑)에게 시집갔는데 김용이 일찍이 방언휘를 위협하고 꾀여서 자주 그 딸과 간음했으나, 제 남편이 있으므로 감히 맘대로 하지 못하고 최수자에게 주어 아내를 삼도록 했다.
○ 왜가 수안(守安)을 침범했다.
○ 병인일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이틀 동안 하늘에 뻗쳤다.
○ 5월에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내가 왕위를 이어 받은 후로 내란이 여러 번 일어나고 외적도 두 번이나 침입했다. 깊이 생각하건대, 이 허물은 실로 나의 몸에 있도다. 하물며 환도 초기에 하늘이 화를 내린 것을 뉘우치지 않아 성변(星變)으로써 경고를 보이며 가뭄으로 재앙을 이루니, 먼저 내 몸을 자책하고 백성에게 혜택을 주어야 마땅하겠다. 경자년 이전의 여러 도ㆍ주ㆍ현의 세 가지 세금과 잡공(雜貢) 중에 아직 관청에 도착하지 않은 것은 모두 추징을 그만 두라. 근래 왕명으로 지방에 나간 신하들과 백성들을 다스리는 관리들이 으레 군법을 써서 감히 맘대로 사람을 죽이며, 또한 죄인에게 매를 때리고 나서 재물을 받고 속해 주니 내 심히 민망히 여기노라. 지금부터는 중한 형벌은 아뢰어 처리하고 죄가 가벼운 자는 매때리는 것과 재물 받는 것을 함께 행하지 말라. 기내(畿內)의 백성들이 난리로 인하여 유랑하여 밭과 들이 많이 황폐해졌으니, 너그럽게 구휼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백성들을 불러 들이겠는가. 경기 지방의 공전과 사전의 조세는 3년간 3분의 1씩을 감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 역어(譯語) 이득춘(李得春)이 원 나라에서 와서 말하기를, “황제가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삼고, 기삼보노(奇三寶奴)를 원자로, 이공수(李公遂)를 우정승으로 삼았습니다. 최유(崔濡)는 스스로 좌정승이 되고, 김용을 판삼사(判三司)로 삼았으니,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원 나라에 있는 자는 모두 위관(僞官)에 임명되었습니다. 또 요양성(遼陽省)에 군사를 청하였는데 군사가 출발하였습니다."하였다. 당시 왕은 원 나라에서 자신의 왕위를 폐하였다 해도 공헌(貢獻)을 폐한 일이 없었고, 여러 번 사신을 보내어 사대하는 예의를 더욱 공경히 하였으며, 진정(陳情)하고 계품(啓稟)하여 황제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랐으나, 최유(崔濡)와 박불화(朴不花) 등이 이것을 가려 진헌하는 예물을 빼앗아서 황제께 보내는 글이 하나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왕이 어찌할 수 없어 재ㆍ추들과 함께 요양성의 군사가 오는 것을 막을 방법을 의논하여 경천흥을 서북면도원수(西北面都元帥)로 삼아 안주(安州)에 둔을 치게 하고, 안우경을 도지휘사로 삼아 의주(義州)에 둔을 치게 하며, 이귀수(李龜壽)를 도순찰사로 삼아 인주(麟州 평북 의주(義州))에 둔을 치게 하고, 이순(李珣)을 도체찰사로 삼아 이성(泥城 평북 창성(昌城))에 둔을 치게 하며, 홍선(洪瑄)을 도병마사(都兵馬使)로 삼아 정주(靜州 평북 의주(義州))에 둔을 치게 하고, 우제(禹?)ㆍ박춘(朴椿)을 도병마사로 삼아 군사를 나누어 강계(江界)와 독로강(禿魯江) 등에 둔을 치게 하며, 전공판서(典公判書) 지용수(池龍壽)를 순무사(巡撫使)로 삼아 용주(龍州 평북 용천(龍川))에 둔을 쳐서 북쪽을 방비하도록 하되, 모두 도원수의 절도(節度)를 받게 했다. 이인임(李仁任)에게 명하여 평양윤(平壤尹)을 삼아 군사의 군량을 조달하게 하고, 밀직부사 정찬(丁贊)을 서북면 도안무사로 삼아, 한휘(韓暉)와 함께 유병(遊兵)을 거느리고 여러 병영 사이를 왕래하면서 군정(軍情)을 살피도록 하고, 한방신(韓方信)을 동북면 도지휘사로, 김귀(金貴)를 도병마사로 삼아 화주(和州 함남 영흥(永興))에 둔을 치게 하여 동북쪽을 방비시켰다.
○ 이공수(李公遂)를 파면하였는데, 이는 이득춘(李得春)이 말을 잘못했기 때문이다.
○ 판밀직사 오인택(吳仁澤)과 밀직부사 김달상(金達祥)이 건의하여, 대간과 이부ㆍ병부를 제외한 동반의 3품 이하 6품 이상과 서반의 5품 이하의 정원을 더 늘리자고 하였다. 이때 국가는 해마다 군사를 일으켜 국고가 바닥이 나서 공이 있는 자에게는 모두 관직으로 상을 주었다. 오인택 등이 이 의논을 아뢰니, 전주(銓注)를 맡게 하여 전쟁에 나간 장사(將士)들은 모두 계급을 뛰어 넘어 승진하지 않은 자가 없으니 사람들이 기꺼이 군사로 나갔다. 그러나 청탁이 크게 성해지고 뇌물이 버젓이 행해져 공장(工匠)이나 천한 종이라도 벼슬을 받지 않는 자가 없어 관작이 지나치게 많아졌다.
○ 사신을 여러 도에 보내어 군사를 점검했다.
○ 밀직부사 주사충(朱思忠)이 덕흥군에게 내응했다 하여 목베었다. 주사충은 강직한 사람인데 옥에 갇힐 때 큰소리로 말하기를, “나는 본래 죄가 없는데 공도 없이 갑자기 귀하게 된 두서너 명의 집정(執政)들이 나를 이같이 핍박하는구나." 하였다. 그가 죽으니 사람들이 애석히 여겼다.
○ 6월에 판도판서(版圖判書) 김서(金?)와 개성윤(開城尹) 양백안(楊伯顔)을 보내어 절령(?嶺)의 책(柵)을 지키게 했다.
○ 원 나라에서 보낸 이가노(李家奴)가 조서를 내려 왕인(王印)을 회수했다. 이가노가 국경에 들어오자,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의 종자를 잡아다가 폐립된 까닭을 물었다.
○ 전쟁에 나가는 여러 고을의 군사가 경성 동교에 둔을 치고 있었는데 밤 5경에 평택현(平澤縣) 군사 어량대(於良大) 등이 전쟁에 나가기를 꺼리어 여러 사람을 협박해서 반란을 꾀하여 성문으로 쳐들어 갔으나, 날이 이미 밝은 후라 일이 성공하지 못할 줄 알고 스스로 흩어지니 이들을 쫓아가 잡아서 순군옥에 넘기고 그 괴수 8명을 베었다.
○ 가을 7월에 이가노(李家奴)가 왔는데, 왕은 나가지 않고 백관으로 하여금 병위(兵衛)를 장엄하게 하여 맞이하게 했다. 이가노가 돌아가자 백관과 기로(耆老)들이 중서성에 글을 올려 말하기를, “세조께서 우리 충경왕(忠敬王)이 천하의 어느 나라보다 먼저 조근(朝覲)한 공을 가상히 여겨 제녀(帝女)를 충령왕에게 하가(下嫁)시키고, 본국의 풍속을 고치지 않을 것을 허락하여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덕흥군 탑사첩목아(德興君塔思帖木兒)는 충선왕의 출궁인(出宮人)이 백문거(白文擧)에게 시집가서 낳은 자인데 간신 최유(崔濡)가 조정에 거짓 고하여 우리 왕의 자리를 빼앗고 심지어 상국의 군사까지 번거롭게 하오니, 대대로 구생(舅甥)이 된 뜻을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이것을 황제께 아뢰어 탑사첩목아와 최유 등을 잡아 보내시어 본국 사람들의 분한 마음을 풀어주소서." 하였다.
○ 왕이 북방에서 싸우는 군사가 많이 굶어 죽는다는 말을 듣고 반찬수를 줄였다.
○ 8월에 재상이 왕에게 권하여 남방으로 거둥하여 덕흥의 난을 피하라 하는 자가 있어 왕도 매우 옳게 여겼으나, 오인택(吳仁澤)이 아뢰기를, “덕흥은 홍두적과 비교가 되지 아니 하옵니다. 전하의 행차가 남쪽으로 옮기게 되면 경성 북쪽에서는 누가 전하를 따르겠습니까. 오늘의 계책으로는 친정(親征)하는 것이 가장 상책입니다." 하니, 남으로 가자는 의논이 드디어 중지되었다.
○ 이인복(李仁復)을 서북면 도찰군용사(西北面都察軍容使)로 삼았다.
○ 겨울 11월에 홍두적을 쳐서 쫓은 공신을 정했다.
○ 12월에 덕흥군이 요동에 둔을 치고 척후기병(斥候騎兵)이 여러 번 압록강에 이르니, 조야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또 변방 장수가 혹 변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군사를 쓰는 방략(方略)은 모두 멀리 중앙에서 지휘를 하고 장수들이 스스로 두려워하여 감히 전결하지 못하니, 싸울 기회를 많이 잃었다. 또 모든 군졸들은 여름에 전쟁에 나가서 겨울이 되도록 교대하지 않고 양식마저 끊어져, 추위에 얼고 배고파 쓰러지고, 장교와 관속만이 인마(人馬)가 조금 힘이 있었으나 가벼운 병기로 무장한 군사로 강을 건너 자주 요심(遼瀋) 지방을 습격하여 그곳 백성들을 잡아다가 관청에서 상을 받으려고만 하므로 군사가 한 번도 싸워보지 못하고 피폐해졌다. 또 국가에서 건의하여 경천흥(慶千興)에게 서북을 유수(留守)하게 하고 안우경(安遇慶) 등 여러 장수에게 압록강을 건너가서 치게 하니, 평양윤(平壤尹) 이인임(李仁任)이 도원수 부진무(都元帥府鎭撫) 하을지(河乙沚)에게 말하기를, “우리 군사는 굶주리고 추워서 밤낮으로 집에 돌아갈 것만 생각하니 어찌 딴 마음이 없으리오마는, 법이 두려워서 감히 가지 못할 뿐입니다. 근래에 이 도순찰(李都巡察)이 봉주(鳳州)에 이르렀을 적에 군졸들이 모반하다가 잡혀 죽은 것이 그 한 가지 징험이 아니요, 강을 건너간다는 것도 가히 한심한 일입니다. 도원수는 성질이 의심이 많아 필시 능히 결단을 내리지 못할 것인즉, 딴 일을 핑계하여 원수에게 청해서 그대를 왕에게 보내어 일을 품하게 할 것이니, 그대는 잘 도모하라." 하고, 곧 군졸들이 모반한 사실을 기록한 글을 하을지에게 주어 보내면서 또 이르기를, “그대가 돌아가면 왕께서 반드시 불러 보실 것이니 그대는 이 글만 바치고 아예 딴 말은 하지 말라. 그러면 왕께서 깨닫고 반드시 군사를 돌이킬 것이다." 하였다. 하을지가 길을 재촉하여 돌아오니 왕이 글을 보고 과연 크게 놀라 글로 갖추어 보낼 사이도 없이 말로 경천흥에게 일러 도강을 중지하게 하였다. 하을지가 돌아오니 이인임이 말하기를, “군사가 장차 강을 건널 것인데 원수가 문서가 없다고 해서 머뭇거리고 일을 결정하지 못하면 어찌한단 말인가. 내 먼저 원수를 보고 극진히 이해를 말할 것이니 그 뒤에 그대가 돌아오라." 하였다. 이인임이 경천흥을 만나서 조용히 말하기를, “영공이 일찍이 상주목(尙州牧)이 되어 부임해 갈 때의 민심과 해관(解官)하고 올 때의 민심이 어떠했습니까." 하고 물었다. 경천흥이 말하기를, “해관하고 올 때 민심이 처음과 같지 않았다." 하니, 이인임이 다시 말하기를, “오늘의 일이 상당히 그와 비슷합니다. 주상은 옛 임금이며, 덕흥은 새 임금인데 어리석은 백성이 편안하고 배부른 것만 즐거운 줄 알지, 어찌 사(邪)ㆍ정(正)이 무엇인지 알리오. 더구나 우리 군사는 떠나온지 이미 오래 되어서 모두 돌아갈 생각만 하는 판이 아닙니까. 하루 아침에 강을 건너가고 보면 그 변을 측량하기 어려울 것이니 군사를 거두어 영(營)으로 돌아가 압록강을 굳게 지키고 적들이 강을 건너는 것을 막느니만 못합니다." 하였다. 경천흥이 놀라서 말하기를, “그러나 벌써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찌하리오. 그리고 하을지가 어느 때 돌아올는지. 국가에서 필시 처분이 있을 것이오." 하다가, 잠시 후에 을지가 돌아와서 왕의 명을 전하니 천흥이 기뻐하여 즉시 여러 장수를 불러 영으로 돌아가게 했다.
[주D-001] :
[주D-002] :
고려사절요 제28권
공민왕 3(恭愍王三)
갑진 13년(1364), 원 지정 24년
○ 봄 정월에 최유(崔濡)가 원 나라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덕흥군(德興君)을 받들고 압록강을 건너와서 의주의 궁고문(弓庫門)을 포위하니, 도지휘사(都指揮使) 안우경(安遇慶)이 일곱 번 싸워 이를 물리쳤다. 최유가 산에 올라 우리 군사의 수효가 적고 후원군이 없는 것을 엿보고는 군사를 일곱 부대로 나누어 북을 치고 떠들썩하게 나오니, 우리 군사가 도망해 돌아와서 문 안으로 들어왔다. 중랑장(中郞將) 최흑려(崔黑驢)가 말에서 내려 창을 쥐고 문 밖에 서 있으니 최유가 전진하지 못하였다. 흑려가 우리 군사를 뒤에서 호위하여 천천히 몰아서 문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 군사가 다시 나가서 싸웠는데 적군이 도병마사(都兵馬使) 홍선(洪瑄)을 사로잡으니 우리 군사는 패하여 달아나서 안주(安州 평남)를 지켰다. 최유가 선주(宣州 평북)에 들어가 점거하였다. 왕이 찬성사 최영에게 명하여 도순위사(都巡慰使)로 삼아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급히 안주로 달려가서 모든 군사를 지휘하게 하였다. 길에서 도망하는 군사를 만나면 목을 베어 군중에 돌리니 군령이 비로소 엄숙하여졌다. 또 우리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에게 명하여 동북면(東北面)에서 정예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이성(泥城 평남 창성(昌城))으로 달려가게 하였다.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순(李珣)과 도병마사 우제(禹?)ㆍ박춘(朴椿)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모이니 우리 군사의 기세가 다시 떨쳐졌다. 최유의 척후 기병이 정주(定州)에 이르니 안우경이 정예 기병 3백 명을 거느리고 습격하여 쳐서 이를 패퇴시키고, 그 장수 송신길(宋臣吉)을 사로잡아 죽여 몸뚱이를 쪼개어 군중에 돌리니 최유가 기운이 꺾였다.
○ 평창현령(平昌縣令) 배중련(裵仲連)이 탐욕스럽고 잔인하여 불법을 자행하므로 가산(家産)을 몰수하였다.
○ 황상(黃裳)을 동북면 도순토사(東北面都巡討使)에 임명하였다. 여진의 삼선(三善)ㆍ삼개(三介) 등이 홀면(忽面)ㆍ삼살(三撒)을 침범하므로 교주도 병마사(交州道兵馬使) 성사달(成士達)에게 명하여 정예 기병 5백 명을 내어 이를 치게 하였다. 처음에 북방 사람 김방괘(金方卦)가 우리 도조(度祖)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삼선과 삼개를 낳았으니,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에게는 고종 형제였다. 여진 땅에서 나서 자라 완력이 남보다 세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다. 불량한 젊은이를 모아 북쪽 변방에서 거리낌없이 돌아다녔으나 태조를 두려워하여 감히 방자한 행동을 취하지 못하였다. 태조는 함주(咸州 함북 함흥(咸興))에서 대대로 자라 은혜와 위엄이 그 전부터 쌓이니 백성들이 부모와 같이 우러러보고, 여진도 두려워하고 우러러보며 스스로 조심하였다. 이때에 와서 삼선ㆍ삼개가 태조가 가서 서북면을 원조한다는 소문을 듣고 여진을 꾀어 크게 침략을 자행하고 함주를 함락시키니, 지키던 장수 전이도(全以道)ㆍ이희(李熙) 등이 군사를 버리고 도망해 돌아왔다. 동북면 도지휘사 한방신(韓方信)과 병마사 김귀(金貴)가 화주(和州 함북 영흥(永興))에 진군했다가 역시 패하여 물러나와 철관(鐵關 함남 덕원(德源)의 북쪽)을 보전하였으니, 화주 이북 지방이 모두 함몰되었다. 관군이 여러 번 패하자 장수와 군사가 기운이 꺾여 밤낮으로 태조가 도착하기만 바라고 있었다.
○ 대호군 김두(金斗)가 서북면 체복사(西北面體覆使)로 갔다가 돌아왔다. 이때 군졸들이 춥고 배고파서 도롱이를 입어 몸을 덥히고, 말 한 필을 쌀 한 말로 바꾸었다. 길에서 죽는 자가 잇달았으며, 걸식하고 있는 도망병이 길에 가득 찼는데 얼굴이 매우 초췌하니 이웃 사람이나 친구라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살아 돌아온 자가 백 명에 겨우 한두 사람뿐이었는데 권세 부리는 신하가 왕의 총명을 가려서 아뢰지 않으니 체복사가 연이어 가더라도 군중의 허실을 왕이 끝내 알지 못하였다.
○ 안우경(安遇慶)ㆍ이귀수(李龜壽)ㆍ지용수(池龍壽)ㆍ나세(羅世)가 좌익(左翼)이 되고, 이순(李珣)ㆍ우제(禹?)ㆍ박춘(朴椿)과 우리 태조가 우익(右翼)이 되고, 최영이 중군이 되어 정주(定州)에 이르렀다. 태조가 여러 장수들이 패배한 것을 보고, 그들이 겁을 내어 힘써 싸우지 않았다고 말하니,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꺼렸다. 이때 적이 수주(隋州 평북 정주(定州))의 달천(?川)에 둔쳤는데, 여러 장수들이 태조에게 말하기를, “내일 싸움은 그대가 홀로 맡으시오." 하니, 태조는 여러 장수들이 자기를 꺼리는 줄 알고 조금 걱정하는 기색이 있었다. 이튿날 적이 세 부대로 나누어 쳐들어오므로, 태조는 가운데 있고 수하의 늙은 장수 두 사람을 좌우로 갈라서 각기 적의 한 부대씩 맡게 하여 힘을 내어 쳤다. 태조가 탔던 말이 진흙에 빠져 매우 위태로웠는데, 말이 힘을 내어 뛰어서 솟구쳐 나오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이상히 여겼다. 태조가 적의 장수 두서너 사람을 쏘아 넘어뜨리자 적이 그제야 패주하였다. 두 늙은 장수가 칼을 뽑아 마구 치니 적이 벌써 패하여 도망하였고 티끌과 먼지만이 하늘을 덮을 뿐이었다. 처음에 최유가 몽고ㆍ한족 군사에게 이익으로 꾀기를, “고려왕이 장수와 군사를 협박하여 서북면을 지키게 하였으니, 신왕이 온다는 소문을 들으면 싸우지도 않고 흩어질 것이다. 일이 성공되면 고려의 재상 이하 사람들의 가산을 상으로 주겠다" 하니, 여러 사람이 모두 이를 믿었다. 압록강을 건너오자 우리 군사가 굳게 막고 한 사람도 항복하는 자가 없었다. 몽고ㆍ한족 군사는 우리가 그들을 꾀어 깊이 들어오게 하고 군사를 매복시켜 놓고 기다리는가 의심하더니, 달천에서 패전하자 그제야 최유의 꾀에 빠진 줄 알고 밤에 거짓으로 우리 군사인 것처럼 하여 큰 소리로 떠들며 경동시키매, 최유의 군사가 그 진영을 불사르고 다시 압록강을 건너 달아났다. 우리 군사가 뒤쫓아 압록강까지 이르렀으나 도달하지 못하였다. 유인우(柳仁雨) ㆍ강지연(康之衍)ㆍ안복종(安福從) 등이 피곤해서 뒤떨어져 있으므로 이를 잡아서 죽였다. 저들 군사 중에 연경(燕京)에 돌아간 자는 겨우 17기뿐이었다.
○ 동녕로만호(東寧路萬戶) 박백야대(朴伯也大)가 연주(延州)에 쳐들어오니 최영이 그의 장수를 보내어 이를 쳐서 물리쳤다.
○ 김광조(金光祚)를 동북면 도순위사(東北面都巡慰使)에 임명하였다.
○ 2월에 우리 태조가 서북면에서 군사를 이끌고 철관(鐵關)에 이르니, 사람들이 마음으로 모두 기뻐하고 장수와 군사들의 담기(膽氣)가 저절로 배가 되었다. 한방신(韓方信)ㆍ김귀(金貴)와 함께 삼면(三面)에서 진격하여 크게 패배시키고, 화주(和州 함남 영흥(永興))ㆍ함주(咸州) 등의 주(州)를 모두 수복하였다. 삼선ㆍ삼개가 여진 땅으로 달아나 돌아오지 않았다. 왕이 태조에게 의지함이 더욱 중해졌다.
○ 김일봉(金逸逢)을 영도첨의(領都僉議)로 삼고, 우리 태조를 밀직부사로 삼고, 단성 양절 익대공신(端誠亮節翊戴功臣)의 공신호를 내려주었다.
○ 한방신에게 채단(彩緞)을 내려주고 우리 태조와 김귀에게 금띠를 내려주었다.
○ 경천흥(慶千興) 등이 개선하니, 왕이 유사에게 명하여 어가를 맞이하는 의식과 같이 하여 백관들은 국청사(國淸寺)의 남쪽 교외에서 잔치를 베풀어 그들을 위로하고, 여러 장수에게 적신의 전택과 재물을 주었다.
○ 서북면 도병마사 정찬(丁贊)의 휘하 목충(睦忠)이 종형 인길(仁吉)의 세력을 믿고 교만 방자하여 법을 지키지 않으니, 정찬이 이를 제어했으나 능히 금지시키지 못하였다. 목충이 원한을 품고 정찬이 덕흥군과 서로 통한다고 무고하여 순군부에 가두니 정찬이 근심하고 분하여 졸하였다. 정찬은 성품이 너그럽고 도량이 넓으며 무예가 있었다.
○ 한방신과 김귀가 개선하니 왕이 내전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 신유일에 혜성이 나타났다.
○ 3월에 왜선 2백여 척이 하동(河東 경남 하동(河東))ㆍ고성(固城 경남 고성(固城))ㆍ사주(泗州 경남 사천(泗川))ㆍ김해(金海)ㆍ밀성(密城 경남 밀양(密陽))ㆍ양주(梁州 경남 양산(梁山))에 침범하였다.
○ 좌정언(左政言) 김제안(金齊顔)을 파면시켰다. 처음에 환관 한휘(韓暉)가 변경에서 세운 공로로 첨의평리에 임명되었는데, 간관이 고신에 서명하지 않았다. 한휘는 김제안이 한 짓이라 생각하고 왕에게 참소하기를, “신은 나라를 위하여 집을 잊고 눈서리 내리는 한데서 거처하며 외방에서 적을 막았습니다. 제안은 나이가 어린데 외람되이 언관에 있으면서 두 마음이 있어 신의 사첩(謝牒)에 서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달천(?川) 싸움에 참가한 장사(將士)들의 사첩에도 아울러 서명하지 않으니 이는 장수들을 해체시키고자 하는 짓입니다." 하였다. 왕이 크게 노하여 첨서밀직사사(僉書密直司事) 원송수(元松壽)를 꾸짖기를, “제안은 경의 족인인데 경이 전선(銓選)을 관장하면서 제안을 끌어들여 간관을 삼은 것은 무엇을 하고자 함인가." 하니, 송수가 땅에 엎드려 땀을 흘리면서 대답하지 못하였다. 제안을 옥에 가두려 하니, 수시중 경천흥(慶千興)과 밀직부사 송인적(宋仁績)이 간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밀직부사 김달상(金達祥)이 왕에게 나아가서 아뢰기를, “제안은 간관이니 옥에 가둔다면 후대에 전하를 어떤 왕이라고 하겠습니까." 하니, 왕이 더욱 노하여 일어나서 내전으로 들어갔으나 옥에 가두지는 않았다. 제안이 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아니하니, 왕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억지로 나오게 하여 한휘의 고신에 서명하게 하고는 마침내 파면시켰다.
○ 전라도의 조선이 왜적에게 막히어 운행되지 못하므로 왕이 동북면의 무사와 교동(喬桐)ㆍ강화(江華)ㆍ동강ㆍ서강의 전선 80여 척을 뽑아서 우도병마사(右道兵馬使) 변광수(邊光秀)와 좌도병마사 이선(李善)에게 명하여 나누어 거느리고 가서 엄호하게 하였다. 변광수의 배가 대도(代島)에 이르니 내포(內浦) 백성으로 왜적에게 사로잡혔던 자가 도망해 와서 고하기를, “적이 이작도(伊作島)에 군사를 매복시켰으니 경솔히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선이 듣지 않고 북치고 함성을 지르면서 먼저 나아가니 적이 배 두 척으로 맞아 싸우다가 속임수로 물러가더니 조금 후에 적의 배 50여 척이 포위하였다. 병마판관 이분손(李芬孫)과 중랑장 이화상(李和尙) 등이 앞서 적과 싸우다가 모두 적에게 살해되자 여러 배의 군사들이 이를 바라보고 넋을 잃어 바다에 몸을 던져 죽는 자가 10에 8, 9명이나 되었다. 변광수와 이선 등이 형세를 관망하면서 싸우지도 않고 물러가니, 싸우던 병졸이 크게 부르짖기를, “병마사는 어찌 사졸을 버리고 물러가시오. 조금만 머물러 국가를 위하여 적을 격파하십시오." 하였으나, 광수 등이 끝내 구원하지 않았다. 병사의 사기는 더욱 저하되어 크게 패하였다. 부사 박성룡(朴成龍)만이 힘을 다하여 싸워 배를 온전히 보전하여 왔는데 몸에 두서너 개의 화살을 맞았다. 병마판관 전승원(全承遠)이 판관 김현(金鉉)과 산원(散員) 이천생(李天生)과 함께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니, 적이 추격하였으나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적의 배 두 척이 갑자기 서쪽에서 측면으로 공격하자 사졸들이 능히 지탱하지 못하고 모두 물에 뛰어들었다. 승원만이 힘을 다하여 싸우다 서너 곳에 창을 맞고 물에 뛰어들었으나 헤엄을 잘 쳤기 때문에 죽지는 않았다. 밤에 돌아와서 배에 오르니 군사 하나가 화살에 맞고 물에 몸이 빠져 뱃전을 붙잡았으나 힘이 없어 능히 올라오지 못함을 보고, 승원이 배 가운데로 끌어올려 밤낮으로 배를 직접 저어 3일 만에 남양부(南陽府)에 도착하였다. 돌아온 것은 광수(光秀)ㆍ선(善) 등의 배 겨우 20척뿐이었다. 교동ㆍ강화ㆍ동ㆍ서강에 통곡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나 광수 등은 끝내 죄를 받지 않았다. 전라도 도순어사 김굉(金?)이 조선을 거느리고 내포에 이르러 적과 싸우다가 패하여 죽은 자가 반수 이상이 되었으나, 왕의 총애를 받는 측근이 김굉의 뇌물을 받고 도리어 칭찬하고 왕이 내온(內? 임금이 신하에게 하사하는 술)을 내려주고 맞이하여 위로하니 사람들이 매우 분개하였다.
○ 여름 4월에 강절(江浙) 지방의 장사성(張士誠)이 만호(萬戶) 원세웅(袁世雄)을 보내어 예물을 가지고 왔다.
○ 회남(淮南)의 주평장(朱平章)이 만호 허성(許成)을 보내어 예물을 가지고 왔다.
○ 5월에 경상도 도순문사 김속명(金續命)이 왜적 3천 명을 진해현(鎭海縣)에서 쳐서 이를 크게 깨뜨리고 병장기를 바치니, 왕이 의복과 술과 금띠를 내려주고 전사(戰士)에게 차등 있게 관작을 주었다.
○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이암(李?)이 졸하였다. 암의 그 전 이름은 군해(君?)이다. 두 번이나 시중이 되어 법도를 조심스러이 지키어 조금도 용서함이 없었으며, 집에서는 살림살이에 간여하지 않고 책으로써 스스로 즐겼으며, 예서(隷書)와 초서(草書)를 잘 썼다. 일찍이 태갑편(太甲篇)을 써서 왕에게 바치면서 그 아들 강(岡)에게 말하기를, “너는 명심해라. 나는 이미 늙어서 실무의 직책도 없고 간관의 직책도 없으니 마땅히 왕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으로써 직무를 삼을 뿐이다." 하였다. 후에 충정왕의 묘에 배향되었다.
○ 대호군 이성림(李成林)과 전교부령(典校副令) 이인(李?)을 보내어 강절에 답례하였다.
○ 6월에 이공수(李公遂)ㆍ홍순(洪淳)ㆍ허강(許綱)이 원 나라에 있으면서 판서 이자송(李子松), 판사 김유(金庾)ㆍ황대두(黃大豆), 부령 장자온(張子溫), 북부령(北部令) 임박(林樸) 등과 함께 서신을 만들어 대지팡이 구멍에 넣어 정량(鄭良)ㆍ송원(宋元)을 샛길로 보내 보고하기를, “덕흥군이 영평(永平)에 있고, 최유는 원 나라로 돌아와서 권세 있는 자에게 결탁하여 많은 군사를 일으켜 동으로 가기를 꾀하고 있으며, 황제에게 청하기를, '덕흥이 본국에 돌아가게 되면 장정을 다 징발하여 천자의 위병(衛兵)에 충당하고, 해마다 양향(糧餉)을 바치며, 또 경상도와 전라도에 왜인만호부(倭人萬戶府)를 두고 왜놈들을 불러 와서 금부(金符)를 주어 상국의 원조가 되도록 하오리다.' 하였습니다. 그들의 계획이 이와 같사오니, 국가에서는 덕흥군이 이미 실패했다고 생각지 말고 방비를 더욱 신중히 하소서." 하였다.
○ 명주(明州)의 방국진(方國珍)이 사신을 보내와서 침향(?香)ㆍ궁시(弓矢)와 옥해(玉海) 등 서적을 바쳤다.
○ 가을 7월에 여러 도의 양가의 자제를 뽑아서 8위(衛)에 보충시켜 상번(上番)하여 숙위하게 하고, 5군(軍)에 나누어 예속하여 서울 4문 밖에 주둔하게 하였다. 강릉도의 자제만은 그 도에 주둔하여 동북면을 방비하게 하였다.
○ 오왕 장사성이 사신을 보내와서 옥영(玉纓)ㆍ옥정자(玉頂子)ㆍ채단(彩段)을 바쳤다.
○ 8월에 왕이 시중 유탁(柳濯)ㆍ경천흥과 찬성사 최영을 불러 이르기를, “오인택(吳仁澤)과 김달상(金達祥)이 전주(銓注)를 맡아 현량(賢良)을 밀쳐 버리고 친인(親姻)을 추천 임용하며, 공로는 기록하지 않고 뇌물 준 자만 보니 천지의 화기를 손상하여 재앙이 옴이 여기에서 연유했다. 마땅히 먼 지방으로 물리쳐서 하늘의 재앙을 내리는 뜻에 응답해야 된다." 하였다. 이때 인택과 달상이 도당에 있었는데, 중사(中使)를 보내어 그 자리에서 교지를 선포하고 인택은 청풍군(淸風郡 충북 제천(提川))으로 귀양보내고, 달상은 옥주(沃州 충북 옥천(沃川))로 귀양보내니 국인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조금 후에 달상을 한양윤(漢陽尹)에 임명하였다. 전 군부판서 오영주(吳英柱)와 삼사판관(三司判官) 오영좌(吳英佐)를 귀양보내니 모두 인택의 아들이다. 영주 등이 그 어머니의 말을 따라 소경 석천록(石天祿)에게 점을 치기를, “최영과 이귀수가 어느 때에 배척되겠느냐." 하니, 천록이 말하기를, “오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 말이 누설되어 영주 등이 죄를 얻게 되고, 천록도 역시 곤장을 맞고 귀양가게 되었다.
○ 9월에 호군 장자온(張子溫)이 원 나라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승상 패라첩목아(?羅帖木兒) 등이 이르기를, '고려왕이 공은 있고 죄는 없는데 소인에게 곤욕을 치르니 어찌 소인을 먼저 다스리지 않으랴.' 하면서, 황제에게 아뢰어 왕을 복위하게 하고, 최유를 함거(檻車)에 실어 본국으로 송치하게 하였습니다." 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자온에게 금대와 쌀ㆍ베 등의 물품을 내려주고 상호군으로 임명하였다.
○ 홍순(洪淳)ㆍ이자송(李子松)ㆍ김유(金庾)ㆍ황대두(黃大豆)가 원 나라에서 돌아왔다. 처음에 황제가 원 나라에 있는 고려 사람에게 모두 덕흥군을 따라 본국으로 가게 하니, 김첨수(金添壽)ㆍ유인우(柳仁雨)ㆍ강지연(康之衍)ㆍ황순(黃順)ㆍ안복종(安福從)ㆍ문익점(文益漸)ㆍ기숙륜(奇叔倫) 등이 모두 이에 붙어 따랐다. 홍순ㆍ이자송ㆍ김유ㆍ황대두는 피하여 따르지 않고 절개를 지켜 변하지 않았다.
○ 겨울 10월에 원 나라에서 한림학사 승지(翰林學士承旨) 기전룡(奇田龍)을 보내어 조서를 내려 왕을 복위시켰다. 도당에서 왕에게 교외에서 맞이하기를 청하니 왕이 윤허하지 않고 백관에게 명하여 맞이하게 하고, 또 이르기를, “만약 내가 교외에서 영접하지 않는 이유를 조사(詔使)가 묻거든 마땅히 대답하기를, 과군(寡君)이 일찍이 상국에 죄를 얻어 폄작(貶爵)되었으니 지금 복위되었다 해도 황제의 명령을 받기 전에는 감히 조사를 영접하지 못한다고 하라." 하였다. 원 나라의 사신이 행성에 이르자 왕이 편복을 입고 나아가 조서를 듣고는 그제야 면복을 갖추고 절하였다.
○ 원 나라에서 최유를 잡아 보내니 순군옥에 가두었다.
○ 이공수(李公遂)를 영도첨의(領都僉議)로, 홍순(洪淳)을 지도첨의 겸 감찰대부(知都僉議兼監察大夫)로, 이자송(李子松)과 김유(金庾)를 밀직부사로 삼아 모두 공신의 칭호를 주었다.
○ 찬성사 이인복(李仁復)을 원 나라에 보내어 왕의 복위를 사례하게 하고, 동지밀직사사 왕중귀(王重貴)에게는 천추절을 하례하게 하였다.
○ 11월에 최유가 처형되었다.
○ 전녹생(田祿生)을 감찰대부로, 염지범(廉之范)을 밀직부사로 삼았다.
○ 밀직부사 한공의(韓公義)를 원 나라에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게 하였다.
○ 죄수를 사면하였다.
○ 전 판삼사사 손홍량(孫洪亮)에게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 주었다.
○ 12월에 왜적이 조강(祖江)에 쳐들어와서 관리(關吏)를 죽였다.
○ 풍저창사(?儲倉使) 정득년(丁得年)에게 명하여 환관에게 쌀을 내려주게 하였더니, 득년이 이 명령이 양부(兩府)를 경유하지 않았다 하여 명을 받들지 않았다. 왕이 노하여 곤장을 때려 귀양보내고자 하였으나, 찬성사 최영이 아뢰기를, “책임은 신등에게 있사오니 득년의 죄가 아닙니다." 하므로, 이에 득년을 풀어 주었다.
[주D-001] :
[주D-002] :
고려사절요 제28권
공민왕 3(恭愍王三)
을사 14년(1365), 원 지정 25년
○ 봄 정월에 밀직부사 김유를 원 나라에 보내어 덕흥군을 잡아 보내 달라고 청하였다. 김유가 요양(遼陽)에 이르니,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흑려(黑驢)가 김유에게 말하기를, “황제가 신에게 명하여 탑사첩목아(塔思帖木兒 덕흥군)를 잡아 곤장을 쳐서 본국으로 돌려 보내라고 하셨는데 지금 등창이 났으니 등창이 낫기를 기다려 곤장을 쳐서 돌려 보내겠다." 하였다. 김유가 이 말을 듣고 곧 돌아왔다.
○ 기묘일에 지진이 있었다.
○ 전의부령 임박(林樸)에게 명하여 시정의 득실을 논하게 하니, 임박이 10여 가지 조항을 올리므로 왕이 옳게 여겨 그 말을 들어주었다. 처음에 임박이 이공수(李公遂)를 따라 원 나라에 갔을 때 덕흥군이 전리총랑(典理摠郞)에 임명하였으나 임박이 따르지 않았다. 그가 돌아오자 중서사인을 제수하여 표창하였다. 또 글을 올려 성균관(成均館)에 오경(五經)ㆍ사서(四書)의 재(齋)를 나누고 과거는 한결같이 중국의 법식에 의거하게 하였다.
○ 2월에 공주가 만삭이 되었으므로 죄수를 사면하였다. 공주가 난산으로 병이 심해지니 또 대사하였다. 공주가 얼마 후에 훙(薨)하니, 왕이 매우 슬퍼하여 사도감(四都監)과 13색(色)을 설치하여 상사(喪事)에 이바지하게 하고, 각 관사에 명하여 전(奠)을 차리게 하여 풍성하고 정결하게 차리는 자에게는 상을 주었다. 참경회(懺經會)를 빈전(殯殿)에 설치하였다. 왕이 본래 불법을 믿었는데 이때에 와서 맹신하여 불사(佛事)를 크게 일으켰다.
○ 황원군(黃原君) 최백(崔伯)을 원 나라에 보내어 성절을 하례하게 하였다.
○ 3월에 왜적이 교동과 강화에 침범하므로 동서강 도지휘사 최영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서 동강을 지키게 하였다.
○ 밀직부사 양백연(楊伯淵)을 원 나라에 보내어 공주의 상(喪)을 알렸다. ○ 원 나라에서 이부시랑 왕타예독(王朶例禿)을 보내와서 왕을 태위(太尉)로 책봉하고는 어주(御酒)를 주었다.
○ 왜적이 창릉(昌陵)에 침입하여 세조(世祖)의 초상을 가지고 돌아갔다. 김속명(金續命)을 동서강 도지휘사에 임명하였다.
○ 김속명을 삼사좌사로 삼고, 원송수(元松壽)를 정당문학으로 삼았다.
○ 밀직부사 홍사범(洪師範)을 원 나라에 보내어 책명사(冊命使) 보낸 것에 사례하게 하였다.
○ 여름 4월에 오왕 장사성이 사신을 보내왁서 방물을 바쳤다.
○ 공주를 정릉(正陵)에 장사지냈는데 왕이 불교의 설에 미혹되어 화장을 하고자 시중 유탁에게 물으니, 유탁이 옳지 않다 하므로 그쳤다. 왕이 손수 공주의 초상을 그려서 밤낮으로 마주 대하여 밥먹으면서도 슬피울고, 3년 동안 고기 반찬을 먹지 않았다.
○ 왜적이 교동ㆍ강화, 동ㆍ서강에 침범하였다.
○ 최백(崔伯)ㆍ양백연(楊伯淵)ㆍ홍사범(洪師範) 등이 원 나라에 난리가 일어나 길이 막혔기 때문에 이르지 못하고 돌아왔다.
○ 지평주사(知平州事) 이수(李守)가 탐오하므로 잡아다가 곤장을 치고 폐하여 서인으로 삼았다.
○ 5월 을축일에 지진이 있었다.
○ 경천흥과 최영이 사병을 거느리고 동교에서 대대적으로 사냥하였다.
사신 안중온(安仲溫)이 말하기를, “이때 한창 한재와 황충(蝗蟲)과 지진이 있었는데 경천흥과 최영은 재상의 몸으로 백성의 기대가 그들에게 매였는데도 음양을 고르게 다스릴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냥을 일삼고 있었으니, 그들이 신돈(辛旽)이 참소하고 모함하는 화를 초래한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니다." 하였다.
요승 편조(遍照)가 최영을 참소하니 계림 윤으로 좌천하였다. 편조가 이때 밀직 김난(金蘭)의 집에 주인을 정하고 있었는데, 김난이 두 처녀를 들여보내어 잠자리를 시중들게 하였다. 이 일로 최영이 김난을 꾸짖자 편조가 최영을 미워하였는데, 최영이 교외로 나가서 사냥하니 편조가 드디어 참소하였다. 왕이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이순(李珣)을 보내어 최영을 꾸짖기를, “경이 동서강 도지휘사(東西江都指揮使)가 되어 왜적이 창릉에 들어와서 세조의 초상을 가져갔는데도 경은 모르고 있었다. 김속명(金續命)으로써 경을 대체하였음에도 경은 군사를 속명에게 넘겨주지 않고 그 군사를 거느리고 아무 때나 사냥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대간이 경을 용서하겠는가. 지금 경으로 계림 윤(鷄林尹)을 삼으니 급히 임지로 갈지어다." 하였다. 최영이 명을 듣고 탄식하기를, “오늘날 죄를 지은 자로서 몸을 보전하는 이가 적은데 나는 계림 윤이 되어 가게 되니 이도 왕의 은혜이다." 하면서 떠나갔다. 이전에 왕이 꿈을 꾸니, 어떤 사람이 칼을 뽑아 왕을 찌르려 하는데 어떤 중이 왕을 구원하여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이튿날 왕이 대비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때마침 김원명(金元命)이 편조를 왕에게 보였는데, 모습이 꼭 같았다. 왕이 이를 크게 이상하게 여겨 함께 이야기하니 총명하고 말을 잘하며, 스스로 불도를 깨달았다고 하면서 큰소리치며 궤변을 늘어놓아 왕의 뜻에 맞추었다. 왕이 꿈을 꾸고 한창 불교에 미혹되었으므로, 이후로 여러 번 비밀리에 편조를 내전으로 불러들여 불법의 이치를 강설하였다. 편조는 영산현(靈山縣 경남 창녕(昌寧)) 옥천사(玉泉寺)의 종이다. 글을 한 자도 알지 못하는데 중이 되어 서울에 와서 돌아다니며 보시를 권하고 여러 과부들을 속이고 꾀어 간음하였다. 왕을 뵈온 후로는 그 형체를 도인(道人)처럼 하여 가식에 힘써, 몹시 더운 여름과 몹시 추운 겨울에도 해진 납의(衲衣 승복) 한 벌로 지내니 왕이 그를 더욱 존중하여 그에게 주는 의복과 음식을 반드시 극히 정결하게 하며 버선까지도 반드시 머리 위에 이고 공경을 표시한 뒤에 편조에게 보냈다. 이승경(李承慶)이 이를 보고 말하기를, “국가를 어지럽힐 자는 반드시 이 중놈이다." 하였다. 정세운(鄭世雲)이 요사스러운 중이라 여겨 편조를 죽이고자 하니 왕이 비밀리에 피하게 하였다. 승경과 세운이 죽으니 편조가 머리털을 기르고서 두타(頭? 여기서는 거사(居士)를 말함)가 되어 다시 와서 왕을 뵈었다. 이때에야 비로소 궐내에 들어와서 권세를 부렸다. 왕이 청한거사(淸閑居士)란 칭호를 주고 사부(師傅)라 칭하고 국정에 대해 자문하니 사람들이 많이 그에게 붙었다. 사대부(士大夫)의 아내가 설법을 듣고 복을 구하겠다고 찾아갔다가 곧 사통하였다.
○ 김보(金普)ㆍ이춘부(李春富)를 도첨의 찬성사(都僉議贊成事)로 삼고, 임군보(任君輔)ㆍ김난(金蘭)ㆍ박희(朴曦)를 밀직부사로 삼았으니 모두 편조가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편조가 찬성사 이귀수(李龜壽), 평리(評理) 양백익(梁伯益), 판밀직 박춘(朴椿), 예성군(芮城君) 석문성(石文成), 진원부원군(晋原府院君) 김수만(金壽萬)을 참소하여 귀양보내고 그 가산을 모두 몰수하였다. 유탁(柳濯)ㆍ이인임(李仁任)에게 명하여 도당에서 모든 정사를 맡게 하고, 김난ㆍ임군보ㆍ목인길(睦仁吉)에게는 궁중에서 모든 사무를 맡게 하였다. 경천흥(慶千興)은 정사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 6월에 이공수(李公遂)ㆍ경천흥ㆍ이수산(李壽山)ㆍ송경(宋卿)ㆍ원송수(元松壽)ㆍ왕중귀(王重貴)ㆍ한공의(韓公義)를 면직하고 김보를 수도첨의 시중(守都僉議侍中)으로 삼고, 이인복을 판삼사사로, 이인임(李仁任)을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권적(權適)과 목인길(睦仁吉)을 첨의평리(僉議評理)로, 박원경(朴元鏡)을 밀직부사로, 홍영통(洪永通)을 감찰대부로 삼았다. ○ 편조가 또 양천군(陽川君) 허유(許猷), 전 전공판서(典工判書) 변광수(邊光秀), 판사 홍인계(洪仁桂), 첨의평리 김귀(金貴), 춘성군(春城君) 박희(朴曦), 허유(許猷)의 아들 전리판서 허서(許瑞)를 참소하여 귀양보냈다.
○ 가을 7월에 편조가 그 무리 상호군 이득림(李得林), 순군경력 오계남을 나누어 보내어 최영ㆍ이귀수(李龜壽)ㆍ양백익(梁伯益)ㆍ석문성(石文成)ㆍ박춘(朴椿) 등을 국문하여 그들이 내신(內臣) 김수만(金壽萬)과 서로 결탁하여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이간시키고, 현량을 배척해 내쫓아 크게 불충한 짓을 하였다고 죄를 얽어 옥사를 만드니, 최영 등이 모두 자복하였다. 그 가산을 모두 몰수하였다.
○ 감찰장령 허소유(許少游)를 내쫓아 전라도의 수졸로 삼았다. 처음에 감찰사에서 전 호군 우선좌(牛宣佐)가 사람을 죽인 죄상을 국문하려 하니 선좌가 도망하므로, 선좌의 친구 오계남(吳季南)의 종을 잡아 선좌를 수색하게 하였다. 왕은 오계남이 한창 최영 등을 국문하고 있으므로 우선좌를 국문하지 말도록 명하였더니, 허소유가 왕의 명을 받들지 않으므로 왕이 노하여 소유를 유배보냈다. 첨의사(僉議司)에서 대궐에 나아가 소유를 용서해 주기를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소유의 죄는 경들이 모른다." 하였다. 그리고는 측근의 신하에게 이르기를, “소유의 아버지 허옹(許邕)이 강포하여 세상 사람에게 미움을 받더니, 소유는 참으로 그 아비에 그 아들이구나."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사랑하고 미워함은 치우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허옹은 곧은 신하인데도 왕이 소유의 억센 기질을 미워하여 그 미움이 아버지에게 미치고, 계남은 간사한 사람인데도 왕이 편조를 총애하여 그 친구인 계남까지 용서하게 되니, 악한 자가 어찌 두려워하겠으며 착한 사람이 어찌 권장되겠는가."하였다.
편조를 진평후(眞平侯)로 삼았다.
○ 8월에 명주(明州)의 방국진(方國珍)이 사신을 보내어 예물을 가지고 왔다.
○ 왕이 서녕군(瑞寧君) 유숙(柳淑)을 불러 이르기를, “나는 경이 길이 고굉지신(股肱之臣)이 되기를 바라는데 근래에 몸이 어찌 그리 노쇠해졌는가. 경은 속 뜻을 말하라. 경의 바람을 들어 주겠다." 하였더니, 유숙이 전리(田里)에 돌아가기를 원하므로 이를 허락하였다. 처음에 유숙이, 왕이 의심과 시기가 많아서 공신 중에 목숨을 보전한 자가 적음을 보고, 자기의 지위와 권세가 이미 한도에 차서 장차 화가 올 것을 두려워하여 여러 번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원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편조가 대궐 안에 드나들므로 유숙이 그를 점차 억제하였으나 그가 등용되고는 대신을 중상하고 포악한 기세가 사람을 두렵게 하였다. 매양 유숙을 부르는데 유숙이 가지 않으니 편조가 깊이 감정을 품고 온갖 방법으로 참소하였다. 왕이 점차 이를 믿고 물러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 9월에 김보(金普)를 면직하고 지용수(池龍壽)를 지도첨의로, 김원명(金元命)을 삼사좌사로, 김유(金庾)를 동지밀직으로 삼고, 안원숭(安元崇)ㆍ성원규(成元揆)ㆍ김한귀(金漢貴)를 밀직부사로 삼았다. 이때 임군보(任君輔)는 편조의 덕으로 다시 재상이 되었으나 마음 속으로 부끄러움을 품고 왕에게 아뢰기를, “최영ㆍ이귀수 등은 모두 계묘년의 공신으로서 난리를 평정하고 사직을 편안하게 하였사오니 10세 자손까지도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하는데도 무슨 죄가 있기에 폄출하였습니까. 더구나 사부(師傅 편조)는 본래 중입니다. 국가에 인재가 부족하더라도 어찌 천한 중에게 정사를 맡게 하여 세상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겠습니까.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군보가 물러나와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여러 대의 벼슬아치로써 다행히 왕의 은혜를 입어 정부에 봉직하면서 무식한 중으로 하여금 그 간사함을 마음대로 부리게 하였으니, 후대에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여기겠는가." 하였다. 김보도 또한 왕에게 여러 번 아뢰니 편조가 김보를 참소하여 재상에서 파면시켰다. 군보까지 아울러 내쫓고자 하니 왕이 이르기를, “김보와 임군보가 다시 등용되었는데 이제 다시 아무런 까닭도 없이 모두 내쫓으면 사람들이 나와 경이 사람을 등용하고 물리침을 너무 경솔히 한다고 생각할 것이니, 잠시 후일을 기다리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이후로 군보가 정부에 몸을 담고 있어도 국사에는 참여하지 못하였다.
○ 겨울 10월에 방국진(方國珍)이 사신을 보내어 예물을 가지고 왔다.
○ 윤월에 밀직사 최백(崔伯)을 원 나라에 보내어 천추절을 하례하게 하였다.
○ 윤소종(尹紹宗) 등 28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12월에 신돈을 수정 이순논도 섭리 보세공신 벽상 삼한 삼중대광 영도첨의사사사 판 감찰사사 취성부원군 제조승록사사 겸 판서운관사(守正履順論道燮理 保世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領都僉議使司事 判監察司事 鷲城府院君 提調僧錄司事兼判書雲觀事)로 삼았다. 신돈은 곧 편조이다. 왕이 왕위에 있은 지 오래되니 재상 가운데 뜻에 맞지 않은 이가 많았으므로 생각하기를 세신(世臣) 대족(大族)들은 친당이 뿌리처럼 이어 뻗어 서로 허물을 가리어 숨겨주고, 초야의 신진들은 실지의 감정을 감추고 일부러 겉으로 꾸며 명망을 취하니 그들이 귀현(貴顯)이 되면 스스로 문벌이 한미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대족(大族)들과 인척을 맺어 처음의 의지를 다 버리고, 유생은 유약하여 강직한 이가 적으며, 또 문생(門生)ㆍ좌주(座主)ㆍ동년(同年)의 칭호가 있어 당을 만들고 사정을 따르게 되니, 이 세 부류 사람은 모두 쓸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세간을 떠나 초연한 사람을 얻어 인순하는 폐단을 개혁하고자 생각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신돈을 보고는 이 사람이 불도를 깨닫고 욕심이 적으며 미천한 출신에서 나왔고, 게다가 친근한 당이 없으니 큰 일을 맡긴다면 반드시 곧장 실행하고 뒤돌아봄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여, 신돈을 승려에서 발탁하여 국정을 맡기고 의심하지 않은 것이다. 왕이 신돈에게 중의 행실을 버리고 벼슬하여 세상 일을 구제하기를 청하니, 신돈이 겉으로 탐탁지 않은 체하여 왕의 뜻을 굳건하게 하였다. 왕이 굳이 청하니 신돈이 아뢰기를, “일찍이 듣자옵건대, 국왕과 대신이 참소와 이간질하는 말을 많이 믿는다고 하오니, 절대로 이와 같은 일이 없어야만 세상에 복과 이익을 줄 수 있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에 손수 맹세하는 글을 썼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사(師)가 나를 구원하고 내가 사를 구원할 것이다. 생사를 같이하여 다른 사람의 말에 의혹됨이 없을 것이니 부처와 하늘이 이를 증명할 것이다." 하였다. 이에 신돈이 국정에 참여하여 권세를 잡은 지 30일 만에 훈친과 명망 있는 자를 파면시켜 내쫓고, 재상과 대간(臺諫)의 임명이 모두 그 입에서 결정되었다. 신돈이 신사년에 성인(聖人)이 세상에 나온다는 참언으로써 공언하기를, “이른바 성인이 어찌 내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때에 와서야 비로소 대궐 안에서 나와 기현(奇顯)의 집에서 우거하니, 백관이 그 집에 나아가서 일을 의논하였다. 김원명(金元命)에게 응양군(鷹揚軍)ㆍ상호군을 겸무하게 하여 8위(衛) 42도부병(都府兵)을 맡게 하였다. 처음에 기현의 후처가 과부로 있을 적에 신돈이 중의 신분으로 간통하였는데 후에 기현에게 시집왔다. 신돈이 귀하여지니 기현이 그 아내에게 신돈의 식사를 맡게 하였다. 신돈은 탐욕과 음탕이 날로 심해져, 뇌물이 그 집으로 몰려 들었다. 집에 있을 적엔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며 음악과 여색을 마음대로 즐겼으나, 왕을 뵈올 적엔 맑고 고상한 이야기를 하며 채소와 과실을 먹고 차를 마셨다.
[주D-001] :
[주D-002] :
고려사절요 제28권
공민왕 3(恭愍王三)
병오 15년(1366), 원 지정 26년
○ 봄 3월에 밀직제학 전녹생(田祿生)을 보내어 하남왕(河南王) 곽확첩목아(廓擴帖木兒)에게 예물을 주었다.
○ 여름 4월에 응양군 상호군 김원명이 시(市)의 북쪽 거리에 도랑을 파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장차 조정을 누르려 한다." 하였다. 술가(術家)가 말하기를, “시가를 가로질러 도랑을 파면 무관이 성하여지고 문관이 쇠하여진다." 하였다. 그런데 이때 원명이 신돈에게 아부하였던바, 대간과 문신(文臣)이 신돈의 간계를 적발할까 두려워서 술가의 말을 써서 이를 제지하려 하였다.
사신 윤소종(尹紹宗)이 말하기를, “우리 동방은 기자(箕子)가 교화를 펼친 땅이니, 한 나라 때에는 인현(仁賢)의 교화가 있었고, 당 나라 때에는 군자의 나라라 일컬어졌다. 본조에서는 대대로 문교를 숭상하여 조정의 반열에 늘어선 사람이 모두 독서인이며, 장수를 명하여 군사를 내보낼 때에도 역시 문신(文臣)을 썼으니, 인헌공(仁獻公) 강감찬(姜邯贊)이 요(遼)나라의 군사를 물리치고 국토를 튼튼하게 하였으며, 문숙공(文肅公) 윤관(尹瓘)이 여진을 물리치고 9성을 쌓았으며, 서경(西京)의 묘청(妙淸)이 반역할 적에 시중 김부식(金富軾)이 이를 토벌하였으며, 금산왕자(金山王子)가 동쪽으로 침범할 적에는 태위(太尉) 조충(趙?)이 이를 평정하였다. 이는 모두 유신(儒臣)을 써서 큰 공을 이룬 것이니 어찌 유학자라고 무예에 부족함이 있으랴. 의종(毅宗)의 말년에 정중부(鄭仲夫)가 조신을 다 죽이면서 비로소 문신을 가리켜 조정이라 하였다. 이로부터 무부(武夫)가 정권을 차지하여 조종의 법이 허물어지고 지금까지 조정에 글읽는 사람이 얼마 안 되는데, 원명이 변변치 못한 요술(妖術)로써 눌러버리려고 하였다. 소인이 군자를 해치고자 하여 그 음험하고 간사한 꾀를 함부로 하여 이르지 않는 데가 없음이 이와 매우 비슷하니, 통탄스럽다." 하였다.
○ 왕이 호기동(呼旗童)의 놀이를 대궐뜰에서 구경하고 베 1백 필을 내려 주었다. 나라 풍속에 4월 8일 석가의 생일에, 집집마다 등불을 달고 여러 아이들이 종이를 오려서 장대에 붙여 기를 만들어 성중의 거리로 돌아다니고 소리치면서 쌀과 베를 구하여 그 비용에 충당하였는데, 이를 호기(呼旗)라 하였다.
○ 왕이 사자(嗣子)가 없어서 덕풍군(德豊君) 의(義)와 우상시(右常侍) 안극인(安克仁)의 딸을 비로 삼으려고 선을 보는 데 신돈도 함께 보았다. 신돈은 호상(胡床)에 기댄 채 태연하였다.
○ 좌사의 정추(鄭樞)와 우정언 이존오(李存吾)가 소를 올렸다.
"신등이 삼가 보옵건대, 3월 13일에 대궐 안에서 문수회(文殊會)를 베풀 때를 당하여 영도첨의 신돈이 재신의 반열에 앉지 않고 감히 전하와 나란히 앉아 그 사이가 두서너 자도 되지 않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몹시 놀라서 민심이 흉흉합니다. 대체 예(禮)는 웃사람과 아랫사람을 분별하여 백성의 뜻을 정하는 것이니, 진실로 예가 없다면 무엇으로 왕과 신하의 기준을 삼으며, 무엇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기준을 삼으며, 무엇으로 나라와 집의 기준을 삼겠습니까? 성인이 예를 마련할 때에 상하의 구분을 엄하게 한 것은 깊은 생각으로 먼 장래를 염려한 것입니다. 가만히 보옵건대, 신돈이 왕의 은혜를 지나치게 입어서 국정을 제 마음대로 하고 왕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당초에 신돈에게 영도첨의 판감찰(領都僉議判監察)을 임명하시는 날에 법으로는 마땅히 조복을 입고 나아가 사은하여야 할 것인데도 반달 동안이나 나오지 않았으며, 후에 대궐 뜰에 나아가서도 무릎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고, 항상 말을 타고 홍문(紅門)에 드나들며, 전하와 호상에 나란히 기대고 있으며, 집에 있을 때에는 재상이 뜰 아래서 절하면 모두 앉아서 이를 받았사오니 최항(崔沆)ㆍ김인준(金仁俊)ㆍ임연(林衍)이라도 이와 같은 일은 없었습니다. 전일에는 그가 사문이었으니 마땅히 예법의 밖에 두어 무례를 책할 필요도 없었지마는, 지금은 재상이 되어 명분과 지위가 정해졌는데도 감히 예를 어기고 상도를 무너뜨림이 이와 같으니, 그 이유를 따진다면 반드시 사부(師傅)란 명칭을 핑계댈 것입니다. 그러나 유승단(兪升旦)은 고왕(高王 고종)의 사(師)요, 정가신(鄭可臣)은 덕릉(德陵)의 부(傅)이지만, 신 등은 저 두 사람이 감히 이와 같이 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이자겸(李資謙)은 인왕(仁王 인종)의 외조부이므로 인왕이 겸손하여 조부와 손자가 대하는 예로써 하였으나, 자겸이 공론을 두려워하여 감히 받지 못하였사오니 대개 왕과 신하의 분수가 본래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예는 임금과 신하가 생긴 후로 만고에 고쳐질 수 없사오니, 신돈과 전하께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신돈은 어떤 사람이기에 제가 감히 이렇게 높은 체합니까.
홍범(洪範)에 이르기를, '임금이라야 은상을 줄 수 있으며, 임금이라야 형벌을 줄 수 있으며, 임금이라야 옥식(玉食)을 할 수 있다. 신하이면서도 은상을 주고 형벌을 주고 옥식을 한다면 반드시 집에 해롭고 나라에 흉할 것이며, 벼슬하는 사람들이 편벽하게 되고 백성들이 참람하고 분수에 어그러지게 될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신하이면서도 임금의 권한을 참람하게 쓴다면 벼슬에 있는 자는 모두 그의 분수에 편안하지 아니하고, 소민이 이에 따라 또한 그 본분에 어긋나게 됨을 이른 것입니다.
신돈이 은상을 주고 형벌을 주며, 전하와 대등한 예를 쓰니, 이는 나라에 두 왕이 있는 격입니다. 참람함이 극도에 달하고 교만이 버릇이 되면, 벼슬에 있는 자는 모두 그 분수에서 편안하지 아니하고 소민은 그 본분에 어긋나게 되니 두렵지 않습니까. 송 나라의 사마광(司馬光)이 말하기를, '기강이 서지 않으면 간웅이 야심을 내게 된다.' 라고 하였으니, 그런즉 예는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으며, 관습은 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반드시 이 사람(신돈)을 공경함으로써 백성에게 재앙이 없어질 것이라 여기신다면, 그 머리를 깎게 하고 옷을 승복으로 바꿔 입게 하고 관직을 파면하여 사원에 두고 공경할 것이오며, 반드시 이 사람을 씀으로써 국가가 편안해질 것이라 여기신다면 그 권한을 억제하고 상하의 예를 엄하게 하여 그를 부려야만 백성이 임금을 받드는 뜻이 전해지고 나라의 위난이 풀어질 것입니다. 더구나 전하께서는 신돈을 현인으로 여기시지만, 신돈이 권세를 잡은 후로는 음양이 제때를 어기어 겨울철인데도 뇌성이 울리고, 누런 안개가 사방에 자욱이 끼며 10일 동안이나 태양이 검고, 밤중에 붉은 요기(妖氣)가 끼며, 천구성(天狗星)이 땅에 떨어지고 나무에 상고대가 너무 심하게 끼며, 청명(淸明) 후에 우박이 내리고 차가운 바람이 불며, 천문(天文)이 자주 변괴가 있고, 산새와 들짐승이 대낮에 도성 안에서 날아가며 달아나고 있으니, 신돈에게 내리신 '도(道)를 논하고 음양을 고르게 다스린다'는 공신의 칭호가 과연 천지(天地)와 조종의 뜻에 부합하겠습니까. 신등은 직책이 간원에 있사온데, 애석하게도 전하께서 재상을 잘못 써서 장차 주위의 웃음거리가 되고 만세의 비난을 받을 것이기에 책임을 면하고자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서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말씀을 올렸으니, 삼가 재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소가 올라가니, 왕이 크게 노하여 반도 보지 않고 갑자기 이를 불살라 버리라고 명하고, 정추 등을 불러서 면대하여 꾸짖었다. 이때 신돈이 왕과 호상에 마주 대하여 앉아 있으므로, 존오가 신돈을 쏘아보고 꾸짖기를, “늙은 중이 어찌 이처럼 무례할 수 있느냐." 하니, 신돈이 저도 모르게 두려워하고 놀라 호상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왕이 더욱 노하여 정추 등을 순군옥에 가두고, 찬성사 이춘부(李春富), 밀직부사 김란(金蘭), 첨서밀직 이색(李檣), 동지밀직 김달상(金達祥)에게 이를 명하여 국문하게 하고, 측근의 신하에게 말하기를, “나는 존오의 성난 눈이 두렵다." 하였다. 처음에 존오가 소를 초하여 문하성에 나가서 소매 속에서 초고를 꺼내어 보이니, 여러 낭관들이 연명하기를 어렵게 여겼다. 존오는 정추와 인친(姻親)이 되므로, 정추에게 말하기를, “형은 마땅히 이와 같지 않을 것이오." 하니, 정추가 그 말을 따르므로 드디어 함께 소를 올렸다. 춘부 등이 정추에게 묻기를, “너를 꾀어 소를 올린 자가 누구냐." 하니, 답하기를, “우리 부자가 서로 이어 간대부(諫大夫)가 되어 나라의 은혜를 받았다. 이제 왕께서 정사를 위임하는 데 사람을 잘못 써서 사직을 위태롭게 하니 사람마다 분개하는 것을 보고, 언관의 직책에 있으면서 잠자코 있을 수 없다. 어찌 남이 꾀기를 기다려서 말하겠느냐. 더구나 신돈이 권력을 제 마음대로 부리니 길가는 사람들까지 두려워하여 눈짓으로 말하는데, 누가 시킬 것인가." 하였다. 존오에게 묻기를, “너는 아직 입에서 젖내가 나는 동자인데 어찌 능히 스스로 알겠느냐. 반드시 몰래 사주한 늙은 여우가 있을 것이니, 숨기지 말고 말하라." 하니, 답하기를, “국가에서 동자가 아는 것이 없다고 여기지 않고 언관에 두었으니, 감히 말을 하지 않아서 국가를 저버리겠느냐." 하였다. 이때 존오의 나이 25세였다. 신돈의 당이 이것을 기회로 자기들과 의견을 달리한 자를 다 제거하고자 하여, 명망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정추 등과 공모한 사람으로 끌어넣으려 하였다. 어떤 사람이 정추 등에게 말하기를, “만약 전 정당 원송수(元松壽)와 전 시중 경천흥(慶千興)이 사주했다고 하면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답하기를, “몸이 간관이 되어 국적(國賊)을 논핵하였을 뿐이니, 어찌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은 일이 있겠는가. 또 죽고 사는 것은 명이니, 어찌 남을 무함하여 화를 면하기를 구하겠느냐." 하였다. 우헌납 박진록(朴晋祿), 우사의(右司議) 임현(林顯)이 정추 등을 순군옥에 가서 보고, 진록이 장차 나오면서 말하기를, “우리들은 사람 구실을 못하니 사람이 아니다." 하니, 임현이 몹시 놀라며 빨리 나오면서 말하기를, “그 말이 무슨 말이냐." 하였다. 마침내 정추를 폄출하여 동래 현령(東萊縣令)으로 삼고 존오를 폄출하여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삼았다. 정추 등이 옥에 갇혔을 적에 신돈의 당이 꼭 죽이고자 하니, 이색(李穡)이 춘부(春富)에게 말하기를, “두 사람이 미치고 망녕되었으니 진실로 죄를 줄 만하다. 그러나 태조 이후로 5백 년 동안에 한 사람의 간관도 죽이지 않았는데, 이제 영공(令公 신돈)의 일로 인하여 간관을 죽인다면 나쁜 평판이 멀리 전파될 것이다. 더구나 소유(小儒)의 말이 대인(大人)에게 무엇이 손상되겠는가. 영공에게 아뢰어 그들을 죽이지 않느니만 못하다고 하라." 하였다. 춘부 등이 그렇게 여겨 정추 등이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존오는 본관이 경주(慶州)이다. 어려서 어버이를 여의고 학문에 힘썼으며, 강개하여 뜻과 절개가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울분이 쌓여 병이 되었다. 그 후 6년 만에 병이 위독하여 좌우 사람에게 부축하여 일으키게 하고 말하기를, “신돈의 세력이 아직도 치성한가." 하니 좌우 사람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도로 누우며 말하기를, “신돈이 죽어야만 내가 비로소 죽을 것이다." 하더니, 자리에 도로 누워 편안히 눕히기도 전에 죽었다. 존오가 죽은 지 4개월 만에 신돈이 죽임을 당하였다. 왕이 그 충성을 생각하여 성균 대사성을 증직하였다. 아들 내(來)는 나이 10세였는데 왕이 손수, '간신(諫臣) 존오의 아들 안국(安國)'이라 써서 정방(政房)에 내려 장거직장(掌車直長)을 제수하였다. 안국은 내의 어릴 때의 이름이다.
○ 첨의평리(僉議評理) 목인길(睦仁吉)과 판밀직 임군보(任君輔)를 귀양보냈다. 이보다 먼저 인길이 밤에 경성을 순찰하는데, 어느 사람이 야간 통행을 범하고 노국공주의 종형 합라불화(哈刺不花)의 집으로 들어가 숨었다. 이에 심히 급하게 수색하므로 합라불화가 왕에게 호소하니 왕이 노하였다. 신돈이 이미 꾀를 써서 구신들을 다 쫓아버렸는데, 인길은 왕의 잠저 구신이지마는 무인이라 글자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꺼리지 않았으나, 이때에 와서 신돈이 저의 흉악하고 간사한 것이 더욱 드러나니, 인길이 왕에게 저의 죄를 아뢸까 두려워하여 왕이 노한 기회를 타서 인길을 참소하였다. 군보가 말하기를, “인길은 구인(舊人)이니 작은 실수로써 내쫓을 수는 없습니다." 하니, 신돈이 평소에 군보에게 감정을 품고 있었는데, 정추(鄭樞)가 쫓겨날 때에 군보가 힘써 구원했다는 말을 듣고는 더욱 그를 미워하여 그 때문에 인길과 군보가 같은 날에 귀양을 가게 되었다. ○ 신돈이 재ㆍ추와 함께 광주(廣州) 천왕사(天王寺)의 불사리(佛舍利)를 맞이하여 왕륜사(王輪寺)에 두었다.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가서 보고 황금과 채색 비단을 보시하고, 중에게 베 8백 필을 내려 주었다. 재ㆍ추 이하의 관원이 관대를 하고 뜰에 섰는데 신돈은 반견의(半臂衣)를 입고 손에는 원선(圓扇)을 들고 왕과 나란히 어상(御床)에 앉았다. 왕이 사리를 보고 절하니 신돈도 절하였으며, 신돈이 연화문(緣化文 불교에 인연을 맺을 신도를 모집하는 글)을 소매 속에서 꺼내어 서서 왕에게 주니, 왕이 이것을 받으면서 더욱 공손하였다.
○ 영주(榮州)에 불탑(佛塔)이 있는데, 지주사(知州事) 정습인(鄭習仁)이 그 이름을 물으니 무신(無信)이라고 하였다. 습인이 말하기를, “이상하다. 옛 글에, '악목(惡木) 밑에는 쉬지 않고 도천(盜泉)은 마시지 않는다.' 한 것은 그 명칭을 싫어하기 때문인데, 어찌 그 형체가 높고 커서 한 고을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데도 무신으로 이를 표시할 수가 있으랴." 하고, 주리(州吏)를 시켜 기일을 재촉하여 이를 없애버리고 그 벽돌을 써서 빈관(賓?)을 수축하였다. 신돈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습인을 계림부(鷄林府)의 옥에 가두게 하였다가, 5개월이 지난 후에 전법옥(典法獄)에 옮겨 가두어, 곤란과 고통을 주었다. 이때에 습인이 어머니의 상(喪)을 입고 있었는데, 신돈은 그를 기어코 죽을 곳으로 밀어넣고자 하였다. 조정의 신하들이 습인을 불쌍히 여겨 왕에게 많이 아뢰었으므로, 이에 죽음을 면하고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그 고을에 가서 다시 탑을 쌓게 하였다.
○ 5월에 익산부원군(益山府院君) 이공수(李公遂)가 졸하였다. 공수는 익주(益州) 사람이다. 인품이 정명(精明)하고 근신하며, 과단성이 있고 굳세며, 우뚝서서 권세 있는 사람에게 굽히지 않았다. 이때 신돈이 나라의 정사를 맡아 공수를 매우 꺼려했는데, 공수도 지위가 높은 것을 스스로 경계하여 덕수현(德水縣)의 별장에 가 살면서, 복건을 쓰고 청려장을 짚고 그 가운데서 시를 읊조리니, 풍류가 한아하여 산야에서 노니는 은사의 흥취가 있었다. 병이 드니, 친척들이 부인 김씨에게 말하기를, “어찌 부처에게 기도하지 않는가." 고 하니, 김씨가 말하기를, “공이 한평생 부처에게 아첨하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감히 그의 도를 위반하고 공을 속일 수 있겠소." 하였다. 그가 졸하니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다. 후에 공민왕의 묘에 배향되었다.
○ 왜적이 심악현(深嶽縣)을 침략하였다.
○ 정원비(鄭元庇)를 보내어 하남왕(河南王) 곽확첩목아(廓擴帖木兒)에게 예물을 주게 하였다.
○ 왕이 자기 생일에 내전에서 중 7백 명을 밥먹이고 베 천여 필을 주었다.
○ 전민추정도감(田民推整都監)을 설치하고 신돈을 판사로 삼았다. 이에 권세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본 주인에게 돌려주는 사람이 많으니, 조정과 민간에서 매우 기뻐하였다. 신돈은 하루 걸러 도감에 다녀가고 이인임(李仁任)ㆍ이춘부(李春富) 이하의 관원이 송사를 처결하였다. 신돈이 겉으로는 공의(公義)를 빙자하고 있었으나, 실상은 사람들에게 환심을 사고자 하여 천예(賤隷)들로 양민이 되겠다고 호소한 자는 한결같이 모두 이를 양민으로 만드니, 노비로서 주인을 배반한 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말하기를, “성인이 세상에 났다." 하였다. 신돈이 여러 소인들의 환심을 얻어서 간특한 계책을 성취시키려 함이 이와 같았다. 송사하는 부인이 얼굴이 예쁘면 신돈이 겉으로 불쌍히 여기는 체하며 꾀어서 그 집에 오게 하고는 번번이 간음하였다.
○ 시중 유탁(柳濯)이 병을 칭탁하여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원하였다.
○ 정릉(正陵)의 역부가 덕릉(德陵)의 나무를 거의 다 베어 정릉의 재실을 지었으나, 덕릉을 지키는 자가 감히 금하지 못하였다.
사신 윤소종(尹紹宗)이 말하기를, “왕이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왕위에 오른 초기에는 재상 장항(張沆)이 예학(禮學)에 깊은 조예가 있으므로 그에게 명하여 태묘의 예악에 관한 기구ㆍ의복을 수정하게 하였으며, 장항이 졸하니 왕이 탄식하기를, '지금 재상 중에 종묘에 정성을 다함이 어찌 장눌재(張訥齋 장항(張沆))와 같은 사람이 있으랴.' 하였다. 이에 지주사(知奏事) 원송수(元松壽)에게 명하여 태조 이후의 선왕과 선후(先后)의 어진(御眞)을 다시 그리게 하고 진전과 능을 한결같이 모두 새롭게 하였으니, 왕의 선대를 받들고 추모하는 뜻이 지극하였다. 신돈이 권력을 잡은 후로 여러 현인이 물러나니, 소인이 면전에서 아첨하고 대간이 입을 닫고 있으므로, 조종 능묘의 송백을 베어도 왕은 모르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다." 하였다.
백관이 신돈의 집에 모였는데 땅이 크게 진동하였다.
○ 왜적이 조운선 3척을 빼앗았는데, 죽고 다친 사람이 매우 많았다. 또 교동현(喬桐縣)을 도륙하니 서울이 크게 진동하였다. 찬성사 안우경(安遇慶), 평리 지용수(池龍壽), 판개성(判開城) 이순(李珣) 등에게 명하여 33병마사를 거느리고 나가서 동ㆍ서강과 승천부(昇天府)에 주둔하게 하였다. 이때 노국공주 영전과 정릉의 역사를 크게 일으켰으니 모든 관사가 하는 일이 토목의 역사에서 벗어나지 않아 일반 사무가 폐지되거나 해이해지고 창고가 텅 비고, 숙위가 고단ㆍ허약하며 군정(軍政)을 다스리지 않았으므로, 병기는 가질 만한 것이 없고 갑옷은 줄 만한 것이 없었으니, 모든 군사가 사기가 떨어져서 적을 바라보고 감히 나아가지 못하였다.
○ 노국공주의 영전을 왕륜사(王輪寺)의 동남쪽에 크게 짓는데, 백관으로 하여금 나무와 돌을 실어 운반하게 하였다. 수백 명의 인부가 큰 목재 한 개를 끌고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어허야 어허' 하는 소리가 천지에 진동하고 밤낮으로 끊이지 않으며, 죽은 소가 길에 죽 널렸다.
○ 6월에 전녹생(田祿生)이 하남(河南)에 이르지 못하고 돌아왔다. 녹생이 연경(燕京)에 이르니, 황태자가 우리나라가 하남에 통신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녹생에게 명하여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서장관 군부좌랑(軍簿佐郞) 김제안(金齊顔)이 녹생에게 말하기를, “공은 대신이니 머물 수 없습니다. 내가 머물러 반드시 하남에 사명(使命)을 전달하겠습니다." 하면서, 연경에 머물렀다. 왕은 김제안이 자기를 배반하였다 하여 내려준 치장(治裝)과 전곡을 회수하게 하였다.
○ 상호군 이득림(李得林)이 신돈에게 붙어 전라도 안찰사가 되었는데, 길을 떠나기 전에 헌사(憲司)에서 득림이 일찍이 광주(廣州)에서 공(貢)바친 명주를 도적질했다고 탄핵하니, 왕이 죄를 다스리지 말도록 명하고, 그로 하여금 임지에 가도록 독촉하였다.
○ 전 정당문학 원송수(元松壽)가 졸하였다. 송수가 전주(銓注)에 참여한 지가 8년이나 되었는데, 벼슬아치 선발을 신중히 하여 조금도 사정을 쓰지 않으니 왕이 존경하여 송수가 오는 것을 보면 반드시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였다. 신돈이 권세를 부리니 근심하다가 병이 나서 졸하였다.
○ 가을 7월 1일 신사에 일식이 있었는데 개기식(皆旣蝕)이었다.
○ 8월 병진일에 태백성(太白星)이 대낮에 하늘에 뻗쳤는데 9월까지 계속하였다.
○ 덕녕공주(德寧公主)가 태후를 위하여 문예부(文睿府)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왕이 모시고 있었다. 신돈이 왕을 따라 들어가서 태후를 뵈었는데, 태후가 앉을 자리를 내주지 않으니 신돈이 빨리 나가 버렸다. 왕이 태후에게 아뢰기를, “첨의는 나라의 주석인데 어찌하여 앉을 자리를 내주지 않습니까." 하니, 태후가 정색하면서 이르기를, “미망인이 어찌 감히 외간 중과 자리를 같이할 수 있겠소." 하였다. 왕은 잠자코 말이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신돈이 태후에게 원한을 깊이 품었다. 이때 공경과 구신들이 모두 내쫓겨서, 신돈이 꺼려하는 사람은 태후뿐이므로 온갖 계책을 써서 참소하고 이간하였다.
○ 이귀수(李龜壽)를 형벌로 머리를 깎아 송광사(松廣寺)에 두고 김귀(金貴)를 머리를 깎아 노산사(盧山寺)에 두고, 박춘(朴椿)을 머리를 깎아 열암사(裂巖寺)에 두었더니, 그 2년 후에 신돈이 사람을 보내어 모두 강물에 빠뜨려 죽였다.
○ 심왕(瀋王)이 사신을 보내왔다. 심왕은 곧 왕고의 손자이다. 이전에 원 나라의 황후와 태자가, 왕이 기씨(奇氏 기철(奇轍))를 베어 죽인 데 원한을 품고, 김용(金鏞)에게 내응하게 하여 심왕을 왕으로 세우려 하니, 심왕이 굳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숙부께서 아들이 없으니 세상을 떠난 뒤에는 나라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지금은 숙부께서 몸에 탈이 없으신데 내가 숙부의 왕위를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천하 사람들이 그를 어질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가상히 여겨 안부를 묻고 매우 후하게 물품을 주었다. ○ 왕이 이름을 전(?)으로 고쳤다.
○ 문수회(文殊會 문수보살을 찬양하는 법회(法會))를 궁중에서 베풀어 7일 동안 계속하였다. 왕이 후사 없음을 근심하여 심지어는 울면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니, 신돈이 왕을 달래어 아뢰기를, “문수회를 개설하면 반드시 원량(元良 태자(太子))이 탄생할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따라 매우 기뻐하면서 아들을 얻는다는 희망을 가졌다. 법회를 개설하기 하루 전에 따로 정결한 집을 대궐 안에 세우고 띠풀로써 지붕을 덮어 도량(道場)을 만들고는 나각을 불고 북을 치기를 삼군(三軍)의 고각(鼓角) 울리듯이 하니, 서울 사람이 처음에는 듣고 궁중에 변고가 있다고 여겨 모두 몹시 놀라다가 한참 후에야 진정되었다. 신돈이 도량에 들어가서 법회를 마치고 나오는데, 승려와 도사ㆍ잡류들이 대궐 안에 붐비고 비용이 한이 없었다.
○ 요양 평장(遼陽平章) 고가노(高家奴)가 요(?)를 바치니, 왕이 이를 놓아 보냈다. 왕은 성품이 자애로워 동물을 차마 해치지 못해서 왕위에 있은 지 10여 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사냥을 하지 않았다.
○ 9월에 왕이 낙산사(洛山寺)에 행차하니 낙산사는 신돈의 원찰(願刹)이다. 측근의 신하가 다투어 왕에게 아뢰기를, “금년에는 대풍이 들었습니다." 하니, 왕이 부처 앞에 꿇어 앉아 말하기를, “제가 나라를 다스린 지 15년이 되었으나 수재ㆍ한재가 많았는데, 금년의 풍작은 실로 첨의(僉議)가 음양을 고르게 다스린 데 연유한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신돈을 공경하여 첨의라 일컫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신돈은 낙산사의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영이하다 하므로 오일악(吳一?)을 시켜 비밀리에 저의 축원문(祝願文)을 쓰게 했는데, 그 원장에, “제자(弟子 신돈 자신을 말함)의 분신 모니노(牟尼奴)가 복이 많고 장수하여 나라에 머물러 살도록 해주십시오." 하였다. 모니노는 신돈의 비첩 반야(般若) 소생이니 우(禑)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처음에 신돈이 사비(私婢) 반야를 맞아 들여 임신시켜서, 반승(伴僧) 능우(能祐)에게 부탁하여 능우의 어머니 집에 가서 아이를 낳게 했다. 7일 만에 반야는 돌아오고 능우의 어미가 아이를 거두어 길렀는데 만 1년이 되지 않아서 아이가 죽었다. 능우의 어미는 신돈에게 꾸지람을 받을까 두려워서 다른 사람의 아이를 훔쳐와서 다른 곳에 두고, 신돈에게 청하기를, '아이가 병이 있으므로 성 밖으로 옮겨서 기르려고 하는데 어떻겠습니까.' 하니, 신돈이 이를 허락하였다. 1년이 되어 신돈이 아이를 데려다가 집에서 길렀으나, 반야도 제 아이가 아닌 줄은 알지 못하였다. 왕이 항상 대 이을 아들을 구하여 양자를 세우려고 했는데, 어느날 미행하여 신돈의 집에 가니, 신돈이 그 아이를 가리키면서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양자를 삼아 뒤를 잇게 하소서.' 라고 하였다. 왕이 곁으로 보고 웃으면서 답하지 않았어도 오히려 내심 이를 허락하였다." 한다.
○ 왜적이 양천현(陽川縣)에 침범하여 조운선을 약탈하였다.
○ 겨울 10월 계축일에 큰 천둥과 지진이 있었고, 병진일에 지진이 있었다.
○ 전라도 도순문사 김유(金庾)가 군사를 모집하여 배 1백 척을 얻어 제주를 토벌하다가 패전하였다. ○ 회왕(淮王)이 사신을 보내어 양을 바쳤다.
○ 11월에 시중 유탁(柳濯)이 왕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왕씨ㆍ안씨 두 비는 동쪽에 있고 신돈은 서쪽에 있었다. 신돈이 왕에게 아뢰기를, “두 비가 나이가 어리고 어리석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어리석지는 않다." 하였다. 신돈이 또 왕에게 희롱하기를, “몸이 너무 피로하지 않습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피로하다." 하였다. ○ 하남왕(河南王)이 중서검교(中書檢校) 곽영석(郭永錫)을 보내어 답례하였다. 김제안(金齊顔)이 연경(燕京)에서 단기로 하남으로 달려가서 국서를 올리고, 이어서 자신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대왕(大王)의 충의(忠義)는 천하에 알려졌는데, 우리 임금께서 대왕과 함께 동과 서에서 서로 힘을 합하여 참란(僭亂)을 평정하고 원 나라 제실을 양쪽에서 돕고자 합니다." 하니, 하남왕이 크게 기뻐하여 위에 아뢰어 제안에게 중의대부중서병부낭중 첨서하남강북등처 행추밀원사(中議大夫中書兵部郞中簽書河南江北等處行樞密院事) 를 제수하였다. 이때에 와서 영석과 함께 오니, 왕이 대언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신돈이 제안이 자기를 사사로이 만나지 않았다고 이를 저지시켰으므로, 내서사인(內書舍人)을 제수하였다.
○ 12월에 곽영석이 문묘에 배알했는데, 학사가 버려져 무너진 것을 보고는 관반(?伴) 이색(李穡)에게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귀국은 예부터 문을 숭상한다고 했는데 어째서 이 지경에 이르렀느냐." 하니, 이색이 말하기를, “국학이 신축년에 화재를 당했는데, 왕이 지금 백성들을 휴식시키고 있기 때문에 궁궐도 아직 수리하지 못했다. 이 건물은 개성(開城)의 부학(府學)이다." 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심히 부끄러워하였다.
○ 곽영석이 백금(百金)을 써서 왕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왕씨(王氏)를 책봉하여 익비(益妃)로 삼아 성을 한씨(韓氏)로 내려주고, 안씨(安氏)를 책봉하여 정비(定妃)로 삼았다.
○ 곽영석이 돌아가므로 왕이 의복ㆍ안장말ㆍ금띠를 선사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 이운목(李云牧)을 응양군(鷹揚軍) 상호군으로 삼았다. 운목이 신돈과 가까운 이웃에 살았으며, 그 딸이 고한우(高漢雨)에게 시집갔는데 얼굴이 예뻤다. 운목이 신돈을 자기 집에 청하여 그 딸을 시켜 술을 따르게 했더니, 신돈이 좋아하여 간음하였다. 신돈이 죽은 밀직제학 허강(許綱)의 아내 김씨에게 장가들고자 하니, 김씨가 듣고 말하기를, “우리 남편은 평일에 다른 부녀를 곁눈으로도 본 적이 없으니, 지금 내가 미망인으로 어찌 차마 배반할 수 있으랴. 기어이 내 몸을 더럽히려고 한다면 마땅히 스스로 목을 찌르겠다." 하더니, 드디어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주D-001] :
고려사절요 제28권
공민왕 3(恭愍王三)
정미 16년(1367), 원 지정 27년
○ 봄 정월에 원나라에서 전 요양이문(遼陽理問) 홀도첩목아(忽都帖木兒)를 보내어 영릉(永陵)의 시호를 충혜(忠惠)로, 명릉(明陵)의 시호를 충목(忠穆)으로, 총릉(聰陵)의 시호를 충정(忠定)으로 추증하였다.
○ 2월에 원 나라의 태자가 대부경(大府卿) 대도려(大都驢)를 보내어 왕에게 의복과 술을 주었다.
○ 환자 신소봉(申小鳳)에게 정릉(正陵)을 3년 동안 지키게 하였는데, 밀직사상의(密直使商議)를 제수하고, 충성절의 익위공신(忠誠節義翊衛功臣)의 칭호를 내려주며, 이어서 백관에게 명하여 영빈관(迎賓?)에서 맞이하게 하였다.
○ 어느 백성 형제가 함께 길을 가다가 아우가 황금 2정(錠)을 얻어 1정을 형에게 주었다. 양천강(陽川江)에 이르러 한 배에 같이 타고 건너다가 아우가 갑자기 금을 물에 던져버렸다. 형이 괴이하게 여겨 이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내가 평일에 형을 심히 돈독하게 사랑했는데, 지금 금을 나누어 가지자 갑자기 형을 시기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은 상서롭지 못한 물건이니 강물에 던져서 잊어버리는 것만 못합니다." 라고 하였다. 형도 말하기를, “네 말이 진실로 옳다." 하면서, 역시 금을 물에 던져 버렸다. 이때 한 배에 탔던 사람이 모두 어리석은 백성이기 때문에 그 성명과 거주를 묻는 이가 없었다.
○ 원 나라의 어의주사(御衣酒使) 고대비(高大悲)가 제주에서 왔는데, 황제가 왕에게 채백(綵帛)과 금견(錦絹)을 주었다. 이때 원 나라의 황제가 제주도로 피난하고자 하여 어부(御府)의 금과 비단을 실어다 두었다. 그리고 명하여 제주를 다시 고려에 소속시켰다. 이때 목호(牧胡)가 강성하여 국가에서 보낸 목사와 만호를 자주 죽이고 배반하였는데, 김유(金庾)가 목호를 토벌하니, 목호가 원 나라에 호소하여 만호부를 두기를 청하였다. 왕이 아뢰기를, “김유가 실제로 제주도를 토벌한 것이 아니며 왜적을 잡으려고 뒤쫓아 제주도의 경계에 이르러 땔감을 마련하고 있었는데, 목호가 엉뚱하게 의혹을 품어서 서로 싸우게 된 것입니다. 본국으로 하여금 스스로 목사와 만호를 보내어 목호가 기른 말을 가려 바치기를 그 전처럼 하도록 하옵소서." 하니, 원 나라에서 그 청을 따랐다.
○ 원 나라에서 신돈을 집현전 태학사로 삼고 의복과 술을 내려 주니, 신돈이 제 집에서 받아 자리 곁에 두고는 말하기를, “이 물건이 무엇이냐. 다만 그가 주는 것이니 버릴 수는 없다." 하였다. 신돈의 교만함이 이와 같았다.
○ 3월에 전법판서 백한룡(白漢龍)을 원 나라에 보내어 은혜를 사례하게 하고, 전 동지밀직(同知密直) 왕중귀(王重貴)에게는 성절을 하례하게 하였다.
○ 왜적이 강화부에서 노략질을 하였다.
○ 왕이 연복사(演福寺)로 행차하여 문수회(文殊會)를 크게 베풀었다. 불전 한 가운데에 채색 비단을 연결시켜 수미산(須彌山)을 만들고, 산을 빙 둘러 촛불을 켜니 촛불의 크기는 기둥만하였고 높이는 10척이 넘었으며 밤에도 대낮처럼 밝았다. 실로 만든 꽃과 비단으로 만든 봉(鳳)의 광채가 눈부셨다. 폐백은 채색 비단 16속(束)을 썼으며, 중 3백 명을 뽑아 수미산을 돌아다니게 하니 범패 소리가 하늘을 진동시켰으며, 일을 맡아 본 사람이 무려 8천 명이나 되었다. 왕은 신돈과 함께 수미산 동쪽에 앉아 양부의 관원을 거느리고 부처에게 경배하였다. 신돈이 왕에게 아뢰기를, “선남 선녀가 왕을 따라 문수(文殊)의 좋은 인연을 맺기를 원하오니, 여러 부녀들에게 불전에 올라와서 설법을 듣도록 허락하시옵소서." 하였다. 이에 남녀가 혼잡하여 붐비고, 과부들 중에는 신돈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얼굴을 예쁘게 단장하는 자까지 있었다. 중에게 밥먹일 적에 왕이 손수 금로(金爐)를 받쳐들고 중을 따라 향을 피우면서 조금도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신돈이 떡과 과실을 부녀들에게 나누어주니, 기뻐하여 말하기를, “첨의(簽議 신돈)는 문수의 후신이다." 하였다. 왕은 홀치충용위(忽赤忠勇衛) 2백 50명에게 명하여 밤낮으로 신돈을 호위하게 하였다. 이날에 폭풍이 종일토록 불고, 누런 흙먼지가 하늘에 가득하였다. 법회는 무릇 7일 동안 계속되었는데, 폭풍이 3일 동안 불고 서리가 3일 동안 많이 내렸다.
○ 헌사에서 정당문학 이승로(李承老)가 그 처제와 간통했다고 탄핵하니, 제명하여 백성으로 삼고 가산을 적몰하였다.
○ 요양평장(遼陽平章) 홍보보(洪寶寶), 지요양연해행추밀원사(知遼陽沿海行樞密院事) 어산첩목아(於山帖木兒)가 사신을 보내왔다.
○ 여름 4월에 신돈이 평양에 가서 터를 보는데, 찬성사 이춘부(李春富), 지밀직 김달상(金達祥) 등이 따라갔으며, 의위(儀衛)가 왕의 행차와 같았다. 이때 신돈이, 도선기(道詵記)의 송도(松都)는 왕기(王氣)가 쇠진했다는 설로써 왕에게 천도하기를 권하였으나, 왕은 바야흐로 노국공주의 영전의 역사에 정신이 팔려서 듣지 않으니, 신돈이 다시 말하지 않았다.
○ 전교령(典校令) 임박(林樸)을 제주 선무사(宣撫使)로 보냈다. 이보다 앞서 국가에서 보낸 관리들은 대개 탐욕스럽고 포학하여 백성들이 모두 괴롭게 여겼기에 목호(牧胡)가 이를 꾀어 자주 배반하였다. 임박이 털끝 만큼도 백성들에게서 취하지 않으니, 백성들이 매우 기뻐하여 말하기를, “국가의 관리가 모두 임선무(林宣撫)와 같다면 우리들이 어찌 배반까지 하겠느냐." 하였다.
○ 왕이 걸어서 봉선사(奉先寺)의 송강(松岡)에 이르러 격구를 구경하였다.
○ 5월에 장자온을 보내어 하남왕에게 답례하였다.
○ 왕이 궁문 동쪽에 누각을 짓도록 명하고, 온갖 놀이와 격구를 크게 벌여서 이를 구경하였다. 신돈이 말을 타고 도평의사의 막 앞에 이르니, 재상이 모두 일어서서 두 손을 마주잡고 있었는데, 신돈은 말을 탄 채로 그들과 말하였다. 이것을 본 사람은 모두 그의 무례함에 분개하였다.
○ 국학을 다시 짓도록 명하였는데, 서울과 지방의 유관(儒官)을 시켜서 품계에 따라 베를 내어 그 비용에 충당하게 하였다.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이색(李穡)으로 대사성을 겸하게 하고, 생원을 더 두게 하였다. 경학에 통달한 선비 김구용(金九容)ㆍ정몽주(鄭夢周)ㆍ박상충(朴尙衷)ㆍ박의중(朴宜中)ㆍ이숭인(李崇仁) 등을 뽑아서 모두 학관을 겸하게 하였다.
○ 감찰사에서, 아내가 죽었을 때에 그 자매에게 장가드는 것과, 성이 다른 6촌 자매에게 장가드는 것을 금할 것을 청하였다.
○ 가을 7월 병신일에 지진이 있었다.
○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이제현(李齊賢)이 졸하였다. 제현은 진(?)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숙성하여 성인과 같았다. 충선왕(忠宣王)이 원 나라에 머물러 만권당(萬卷堂)을 세우니, 요수(姚燧)ㆍ염복(閻復)ㆍ원명선(元明善)ㆍ조맹부(趙孟?) 등 여러 학사(學士)들이 모두 왕의 문하에서 놀았는데, 제현이 그 사이에 주선하여 학문이 더욱 향상되었다. 천자(天資)가 온후하고 신중하였는데, 그 위에다가 문학을 잘하고, 의론에 나타난 것과 사업에 시행된 것이 모두 볼 만한 점이 있었다. 한평생 말을 빨리하거나 당황하여 얼굴빛을 변하는 일이 없었다. 스스로 익재(益齋)라 칭호하니, 사람들의 귀천없이 모두 익재라 일컬었다. 그러나 성리학(性理學)을 즐겨하지 않았으므로 정력(定力 성리학에 대한 수양의 정신력)이 없었다. 행성(行省)에서 임시로 직무를 볼 적에, 전폐(殿陛) 위에 올라가서 원 나라에 보내는 표문(表文)을 줄 때에 의위(儀衛)가 왕과 다름이 없으니, 사람들이 이를 기롱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후에 공민왕의 묘(廟)에 배향되었다.
○ 8월에 왕이 문묘(文廟)를 배알하였다.
○ 겨울 10월에 왕이 걸어서 신돈의 집에 행차하여 주연을 베풀고 낙성하였다. 처음에 신돈이 기현(奇顯)의 집에 있을 적에 봉선사(奉先寺)의 송강(松岡)을 지나서 왕궁을 드나들었다. 송강 서남쪽에 빈 땅이 있었는데, 신돈이 왕에게 아뢰기를, “이곳에 작은 산방(山房)을 짓는다면 노복(老僕 신돈의 자칭)이 나오고 물러가는 데 편리하겠습니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신돈이 그 무리를 나누어 역사를 감독하여 며칠 안 돼서 집을 이룩하였다. 또 북원(北園)에 별실을 지으니, 겹문이 매우 깊숙하고, 밝은 창에 깨끗한 궤상(机床)을 놓고, 향불을 피우고 혼자 앉으니 한가하게 물욕이 없는 사람과 같았다. 기현의 아내와 두 여종이 드나드는 것만 허용하였다. 죄를 지은 자와 벼슬을 구하는 자는 반드시 아내와 첩을 보내어 먼저 기현의 아내에게 뇌물을 주고 비밀히 신돈에게 만나기를 청하면, 기현의 아내가 나와서 말하기를, “별실이 매우 협착하니 웃옷을 입어서는 안 되며, 데리고 들어와서는 안 된다." 하니, 아내와 첩들이 웃옷을 벗고 짧은 적삼을 입고 뇌물을 가지고 혼자 들어와서 소원을 자세히 말하였다. 신돈이 홀로 그들과 마주 대하게 되니 추잡한 소문이 많이 있었다. 기현과 그 아내가 신돈을 섬겨 아침 저녁으로 그 곁을 떠나지 않았으니, 마치 늙은 사내종ㆍ계집종과 같았다.
○ 나하추[納哈出]가 사신을 보내와서 말을 바쳤다.
○ 지도첨의(知都僉議) 오인택(吳仁澤)이 전 시중 경천흥(慶千興), 전 평리(評理) 목인길(睦仁吉), 삼사우사 안우경(安遇慶), 삼사좌사 김원명(金元命), 전 밀직부사(密直副使) 조희고(趙希古), 판 개성 이순(李珣), 평리 한휘(韓輝), 응양군(鷹揚軍)의 상호군 조린(趙璘), 상호군 윤승순(尹承順) 등과 비밀리에 의논하기를, “신돈이 사특하고 아첨하며 음험하고 교활하여 사람을 참소하고 헐뜯기를 좋아하여, 훈구를 내쫓고 죄없는 사람을 무찔러 죽여 당파가 날로 성해졌다. 도선기(道詵記)에,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사람이 정치를 문란하게 하고 나라를 망친다는 말이 있는데,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다. 장차 국가의 큰 근심거리가 될 것이니, 마땅히 왕에게 아뢰어 이를 일찌감치 제거해야 한다." 하였다. 판소부시사(判小府寺事) 강원보(姜元甫)가 이 말을 듣고 신돈에게 알리니, 신돈이 왕에게 아뢰기를, “돈은 산수 사이에 사는 일개 중이온데 전하께서 억지로 벼슬을 시켜 이에 이르렀으므로 감히 명을 어기지 못하고, 간악을 제거하고 현량을 임용하여 삼한의 백성들을 조금 평안하게 한 후에 가사 한 벌과 바리때 하나를 가지고 산림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사온데, 이제 나라 사람들이 장차 돈을 죽이려고 하오니 전하께서 불쌍히 여겨 주소서." 하였다. 왕이 놀라서 물으니 신돈이 원보의 말로써 자세히 대답하였다. 이에 인택 등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어 국문하고, 인택ㆍ희고(希古)ㆍ천흥(千興)ㆍ원명(元命)ㆍ우경(遇慶)ㆍ인길(仁吉)을 곤장을 쳐서 남쪽 변방으로 보내어 관노로 삼고, 그 가산을 적몰하였다. 또 이순(李珣)ㆍ윤승순(尹承順)ㆍ조인(趙璘)을 지방으로 귀양보내었다. 후에 인택은 신돈이 자기를 꼭 죽이고자 한다는 말을 듣고 도망하니, 신돈이 인택의 처자를 순군옥에 가두었다.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옥천계(玉天桂)가 인택의 어린 아들을 길렀기 때문에 인택과 공모했는가 의심하여 고문을 몹시 하니 마침내 옥 안에서 죽었다. 인택을 잡아 곤장을 쳐서 봉군으로 삼았다.
○ 11월에 이원구(李元具)를 경상 강릉 삭방도 찰방사(慶尙江陵朔方道察訪使)로 삼았다. 원구는 본래 신돈과 사이가 좋은 사람이다. 신돈이 뜻을 얻자 원구가 와서 신돈을 보고 돌아가려고 하니, 신돈이 말하기를, “국가에서 현량을 뽑고자 하는데 그대가 어찌 돌아가기를 서두르느냐. 머물러 기다리라." 하더니, 조금 후에 대호군(大護軍)을 제수하여 찰방사로 삼았다. 무릇 신돈의 원수에게는 모두 보복을 하였다.
○ 정유일에 지진이 있었다.
○ 12월에 왕이 신돈의 집에 행차하였는데 이후로는 자주 행차하였다.
○ 임박(林樸)을 차자방지인(箚子房知印)으로 삼았다. 이보다 먼저 성석린(成石璘)이 지인(知印)이 되어 신돈에게 아부하지 않으니, 신돈이 왕에게 참소하여 임박으로 대체시켰다. 임박이 궤이(詭異)한 짓을 좋아하고 또 세상에 이름내기를 좋아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나라를 위하여 힘써 일할 줄만 알 뿐이고, 청탁하기 위하여 윗사람을 뵙지는 않았다." 하였으나, 매양 밤에 신돈의 집에 드나들면서 신돈을 위하여 계책을 꾸미니, 그 종적은 괴이하고 수상하며, 신돈을 성덕(盛德)이라고 칭찬하니, 신돈이 기뻐하였다. 지인이 되어서는 왕의 뜻을 잘 살피고, 또 신돈의 좋아하고 미워함을 추측하여 비위 맞추기만 힘쓰므로 예우를 받아서 날로 친밀해졌다.
○ 환자 신소봉(申小鳳)을 첨의평리 상의회의도감사(僉議評理商議會議都監事)로 삼았다.
[주D-001] :
'여행이야기(가정 이곡.목은 이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부원군 이시언(李時言) 사간원이 아뢰었다.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0) | 2013.05.28 |
---|---|
[스크랩] 고려사절요 제26권 공민왕1 (0) | 2013.05.28 |
[스크랩] 고려사절요 제28권 공민왕3 (0) | 2013.05.28 |
[스크랩] 고려사절요 제29권 공민왕4 (0) | 2013.05.28 |
[스크랩] 고려사절요 제30권 신우1 (0) | 2013.0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