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절요 제26권
공민왕 1(恭愍王一)
공민왕 1
휘(諱)는 전(?)이요, 옛 휘는 기(祺)이고, 몽고 휘는 백안첩목아(伯顔帖木兒)이다. 충혜왕의 동모제(同母弟)이다. 충숙왕 17년 경오 5월에 출생하였다. 성품이 엄격ㆍ중후하고 또한 자애로우며 어질어 여러 백성의 인심을 많이 얻었으나, 만년에 이르러서는 시기심이 많고 음란하여 화를 당하는 데에 이르렀다. 재위 24년, 수(壽)는 45세였다.
고려사절요 제26권
공민왕 1(恭愍王一)
임진 원년(1352), 원 지정 12년
○ 봄 정월에 감찰사(監察司)에서 탄핵하기를, “찬성사 전윤장(全允臧)은 일찍이 남의 금을 뇌물로 받고 잡히게 되자 원 나라로 도망해 갔다가, 이제 어가(御駕)를 호종하고 돌아와 뛰어 삼재(三宰)에 임명되었습니다. 멀리 떠나가서 시종한 공로는 마땅히 돈으로 상줄 것이지, 어찌 발탁해서 재상의 지위에 둘 수 있습니까. 이상(二相) 조익청(曺益淸)은 남이 주는 말을 받고 음사(淫祀)를 행하였으니, 이 두 사람에게 모두 벌을 주시옵소서." 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 전라도 만호(萬戶) 유탁(柳濯)이 군사를 엄정하게 통솔하면서 군사들과 고락을 함께 하였으므로, 교서(敎書)를 내리고 의복과 술을 주어 위로하였다.
○ 감찰사에서 아뢰기를, “모든 군(君)들이 한가로이 있으면서 녹을 먹고 있으니, 그들에게 주는 봉록을 정지하소서." 하니, 그 의견에 따랐다.
○ 감찰대부 이연종(李衍宗)이 왕이 머리를 땋고 호복(胡服)을 입고 있다는 말을 듣고 대궐에 나아가 간하기를, “머리를 땋고 호복을 입는 것은 선왕의 제도가 아니오니, 전하께서도 그런 것을 본뜨지 마소서." 하였더니, 왕이 기뻐하여 곧 땋은 머리를 풀고, 이연종에게 옷과 요를 주었다. 이연종은 어진 신하였다. 착한 것을 드러내고 악을 없애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알았으며, 위무(威武)로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였으니, 당시에 그를 부르기를, “철석간장(鐵石肝腸)"이라 하였다.
○ 왕이 몸소 태묘(大廟)에 관(?)하고자 하였더니, 판서운사(判書雲事) 강보(姜保)가 음양의 구기(拘忌)로써 왕에게 아뢰기를, “금년에는 몸소 제사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도당(都堂)에서 강보를 책하여 말하기를, “제사는 나라의 큰일인데 그대가 어찌하여 왕께 말리는가." 하였으나, 또 간신이 있어 왕대비에게 고하여 굳이 못하게 하였다.
○ 2월에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문무(文武)의 전주(銓注)를 전리군부(典理軍簿)로 돌렸다.
○ 경내(境內)에 사(赦)하고 교서를 내리기를, “우리 태조(太祖)께서 삼한(三韓)을 통일하셨고, 열성(列聖)께서는 이어서 소국으로서 대국을 섬겼으며, 우리 원 나라가 일어남에 미쳐서는 천하에 앞장서서 귀부하였다. 우리 충경왕(忠敬王)께서 원 나라에 들어가시어 조근(朝覲)하였을 때에는 세조황제(世祖皇帝)께서 특별한 총애를 내려 주시었고, 충렬ㆍ충선의 두 왕은 대대로 원 나라의 사위가 되셨으며, 우리 아버지 충숙왕께서도 또한 원 나라 황제의 사위가 되는 영광을 받으셨고, 왕위를 계승하고 나라에 임하시기 25년이었다. 그 뒤로 하늘이 돌보지 않아 충목왕 이래 수명을 오래 누리지 못하였는데, 나라의 원로들이 나를 충선왕의 손자요, 충숙왕의 아들이므로 덕으로나 연치로나 왕위를 이음이 합당하다 하여 글을 천자에게 바쳐 받들어 왕으로 삼기를 원하여, 천자께서 그 말을 굽어살피시어 채택하여 주셔서 오늘 나를 왕으로 삼는 명을 내려주셨다. 돌이켜 보건대 내가 무슨 덕으로 이 지위에 오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시세가 점점 쇠하고 풍속이 퇴폐하여 조정에는 요행히 지위를 얻은 자가 많고 창고에는 비축한 것이 없으며, 이웃의 왜적이 침략해 들어오고, 천문에 재변이 있으니, 만일 사욕을 억제하며 정신을 가다듬고 날로 더욱더 삼가는 데 힘써서, 사특함과 거짓을 없애며 간사한 소인배를 제거하고서 지성으로 너그럽고 후한 정치를 행하지 않으면, 어떻게 천자의 덕에 보답하며 조종의 대업을 보존하고 태후의 마음을 위로하며 나라 원로들의 기대를 채워줄 수 있겠는가. 무릇 모든 관직에 있는 사람들은 나의 부족한 점을 바로 잡아 끝을 잘 맺도록 도모할지어다." 하였다.
○ 배전(裵佺)을 용서하였다.
사신 하관(河寬)이 말하기를, “원흉은 마땅히 법으로 처단하여야 할 것이어늘, 배전은 명릉(明陵) 때에 권력을 써서 정형(政刑)을 문란하게 하였으니 극형을 면한 것도 요행한 일인데, 왕정의 시초에 그 죄를 굽혀서 가볍게 해 주었으니 어떻게 뒷사람을 징계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상서 현경(玄慶)이 간하기를, “양궁의 침전은 심히 엄한 금제(禁制)의 처소인데, 지금 외인의 출입이 제한되지 않고 있습니다. 궁전의 문을 맡는 것은 환관의 직책인데 지금 홀치(忽赤)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있으며, 정무를 보시는 때에는 뜰 밑의 경호가 마땅히 근엄해야할 것이어늘 지금은 좌우가 시장처럼 되어 신하들이 일을 아뢰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밖으로 새나가고 있습니다. 형벌을 맡은 관원을 너무 가까이 하여서는 아니되는데, 지금 전법총랑(典法摠郞) 정운경(鄭云敬)과 좌랑(左郞) 서호(徐浩)에게 침전에서 술을 내려주신 일은 모두 법에 어긋남이 있사옵니다." 하니, 왕이 옳게 여겼다.
○ 대비의 덕경부(德慶府) 명칭을 문예부(文睿府)로 고치고 노국공주(魯國公主)의 부(府)를 두어 숙옹부(肅雍府)라 하였다.
○ 3월에 감찰대부(監察大夫) 이연종(李衍宗)이 사직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이연종은 이때 나이 70을 넘었는데, 원사(院使) 기원(奇轅)이 기롱하기를, “이 늙은이는 듣는 것도 알지도 못하는가. 어찌 사람들의 시비를 살피지 못하는가." 하더니, 이연종이 말하기를, “근자에 조익청(曺益淸)ㆍ전윤장(全允臧)을 탄핵하는데, 만일 이제현(李齊賢)과 조일신(趙日新)을 탄핵한다면 왕이 누구하고 일을 의논하겠는가" 하였다.
○ 최유(崔濡)ㆍ금원지첩목아(金元之帖木兒) 등이 원 나라에 머물러 있으면서 본국을 소란스럽게 하고자 모의하고는, 곧 황제에게 정남병(征南兵) 10만 명을 고려에서 징발하도록 주청하니, 황제가 그 말에 따라 최유를 보내어 군사를 징발하게 하였다. 이때 우리나라 사람으로 원 나라에 가 있는 자들이 모두 아뢰기를, “고려는 좁고 작은 나라인데다 바야흐로 왜적의 환난을 당하고 있으며, 또한 중국과는 땅이 멀리 떨어져 있어 징병하는 것이 불가하옵니다."하였더니 황제가 옳게 여기고 최유 등을 소환하였다.
○ 신해일에 전왕이 강화에서 독살되어 훙하였다. 일찍이 왕이 왕위를 빼앗기고 강화에 갈 때, 전교령(典校令) 신덕린(申德隣), 전교승(典校丞) 안길상(安吉祥) 등 4~5명이 시종하였는데 쫓아가 체포하여 순군옥에 가두고 박사신(朴思愼)만이 따라갔다. 공선(供膳)은 충분하지 못하였고 왕래도 또한 끊기어 근심에 싸여 울부짖을 뿐이었다. 전왕의 어머니 희비(禧妃)가 왕에게 청하여 가서 만나보고 며칠 머무른 뒤에 돌아왔다. 전왕의 부음이 이르자 도성 안의 사람들이 눈물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이제현이 사직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조일신이 왕을 원 나라에서 시종한 공을 믿고 횡포하고 교만 방자하였는데, 이제현이 자기보다 위에 있는 것을 심히 질투하였다.
○ 내부소윤(內府少尹) 김휘남(金暉南)에게 명하여 전함 25척을 거느리고 왜적을 막도록 하였는데, 풍도(楓島)에 이르러 왜선 20척을 만나 싸우지도 않고 퇴각하였다. 또 교동(喬桐 경기 강화(江華))에 이르러서는 왜적의 배가 매우 강성한 것을 바라보고 드디어 서강(西江 예성강(禮成江))에 돌아와 증병(增兵)을 청하였다. 김휘남 등이 왜적과 착량(窄梁 경기 강화(江華))ㆍ안흥(安興 충남 서산(瑞山))ㆍ장암(長巖) 등지에서 싸워 적선 1척을 노획하였는데, 왕이 김휘남에게 좌상시(左常侍)를 제수하였다.
○ 왜적이 파음도(巴音島 경기 강화(江華)) 사람들을 도륙하였다.
○ 서주방호소(瑞州防護所)에서 왜선 1척을 노획하여 섬멸하였다.
○ 조일신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환국하실 때에 원 나라 조정의 권신과 총애받는 신하들 가운데 우리나라와 인척 관계가 되는 사람이 그들 친족에게 벼슬 줄 것을 이미 전하께 부탁드리고 신에게도 부탁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리군부(典理軍簿)로 하여금 전선(銓選)을 맡게 한다면 유사가 법문(法文)에 구애되어 지체됨이 많을까 걱정이옵니다. 정방(政房) 제도를 회복하시어 안에서 벼슬이 제수되도록 하소서." 하니, 왕이 말하기를, “이미 정방을 없애고 옛 제도로 고친 지 얼마 안 되어 중간에 변경한다면 반드시 남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경이 부탁받은 것을 나에게 고하라. 내가 선사(選司)에 이르면,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는가"하였다. 조일신이 분연히 말하기를, “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신다면 무슨 면목으로 원 나라나 조정의 사대부들을 다시 볼 수 있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사직하였다.
○ 왜선이 크게 몰려들었다. 김휘남은 군사가 적어 대적할 수 없어 물러나 서강(西江)에 머물러 급한 사정을 고하였다. 응양군 상장군 김용(金鏞)이 제령(諸領)의 군사를 징발하니, 부녀자들이 거리에 넘쳐 통곡하며 도성 안이 크게 놀랬다. 또 백관과 방리(坊里)의 민가에서 각자 차등 있게 군량미와 화살을 거둬들였다.
○ 왜적이 교동(喬桐) 갑산창(甲山倉)을 불질렀는데, 전 대언(代言) 최원(崔源)이 싸워 왜선 2척을 노획하였다.
○ 전리판서(典理判書) 백문보(白文寶)가 상소하여 선법(選法)을 논하고, 송(宋)의 사마광(司馬光)의 십과거사(十科擧士)의 제도를 행할 것을 청하였다.
○ 윤월에 감찰집의 김두(金?)와 지평 곽충수(郭忠秀)가 조일신을 탄핵하였더니, 조일신이 대관(臺官)과 조정에서 대질할 것을 청하므로 정당문학 이공수(李公遂)와 감찰대부 이연종에게 명하여 쌍방의 주장을 내전(內殿)에서 들었다. 이연종이 손수 김두 등의 탄핵문을 쥐고 조목조목 따져 물었더니, 김두가 이연종에게 말하기를, “공은 헌사(憲司)의 장(長)으로서 먼저 죄인을 탄핵하는 일에는 참예하지 않고 도리어 우리들을 따지는가." 하니, 이연종이 부끄러워하였다. 김두와 곽충수가 또 조일신의 가노(家奴)를 옥에 가두었더니, 조일신이 옥을 깨고 출감시키며 도리어 대관을 고소하니, 왕이 김두 등에게 일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일찍이 김두와 곽충수는 이연종이 늙고 간사하며 조일신에게 아부하는 사람이라 하여 그를 탄핵하는데 있어 이연종과 함께 의논하지 않았다. 이연종이 이것에 감정을 품고, 이때에 이르러 명을 받고 사헌부에 앉아서 드디어 김두와 곽충수와 장령(掌令) 경천흥(慶千興)을 탄핵하였다. 뒤에 왕이 이제현을 불러 나라 일에 관해 자문을 듣고는 말하기를, “이연종은 매우 간사한 사람이로다."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왕은 총명하고 인자하여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왕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처음 정치를 하려 할 때 대간들은 헌강(憲綱)을 진작하여 고풍을 회복하려 생각하였으나, 왕의 좌우 측근들이 원 나라에서 왕을 모시고 따르던 공로를 믿고 어진이를 질투하고 재능 있는 이를 미워하였는데, 조일신은 특히 심하게 횡포를 부렸다. 이연종은 자신이 헌사(憲司)의 장(長)이 되어 도리어 조일신에게 붙어서 김두 등을 탄핵하여 저지시켰다. 이에 뭇 소인배들은 날로 등용되고 충직ㆍ선량한 사람들은 날로 물러나니 정사는 점점 문란하여졌다. 비록 타고난 자질의 훌륭함이 있다 하더라도 나라 다스림에 무슨 도움이 되었겠는가." 하였다.
이제현이 조일신의 시기를 피하여 세 번이나 글을 올려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삼사우사 홍언박(洪彦博)과 밀직부사 이성서(李成瑞)를 원 나라에 보내어 성절일(聖節日)을 하례하였다.
○ 감찰대부 이연종이 관직을 버리고 돌아갔다. 처음에 연종이 조일신에게 붙어 이 관직을 얻었는데, 조일신이 탄핵을 당하니 화가 제 몸에 미칠까 두려워 가만히 전리(田里)로 돌아갔다.
사신이 말하기를 "소인을 알아내기는 매우 어렵다. 진실로 지극한 밝음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그 간사함을 환히 비칠 수 있겠는가. 이연종이 왕의 머리 땋은 것을 간한 데 대하여 사관은 말하기를, '어진 신하로다. 비록 위무(威武)로써도 그를 굴복시킬 수는 없다' 하였고, 김두 등을 탄핵한 데 대하여는 사관이 지목하여 말하기를, '늙고 간사하다' 하였으니, 위무로써도 굴복시킬 수 없는 것을 어찌 간사한 자가 할 수 있는 것인가. 이 두 사관의 기록은 모두 그 사람을 직접 눈으로 보고 쓴 것인데, 비난하고 칭찬함이 이와 같이 다르니, 어찌 연종에게 사사로운 생각으로 일부러 비난하거나 칭찬할 것이었겠는가. 대개 연종은 시세와 인심을 잘 추측해서 거짓을 꾸며 명예를 닦는 자이다. 하는 일들을 보건대 가히 그 사람됨을 상상할 수 있겠다. 조익청(曺益淸)과 전윤장(全允臧)은 모두 왕을 수행ㆍ시종한 공신으로 기염(氣炎)이 치성하나, 왕의 총애를 굳건하게 하고 음흉하며 독한 점에 있어서는 조일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먼저 그들을 탄핵하여 위세를 꺼리지 않는 것을 보였고, 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는 데에 뜻을 두어 간언을 받아들일 것을 알았으므로 변발이 그리 큰 허물이 아닌데도 홀로 간언하여 과감히 꺼리지 않고 말한다는 것을 보였으며, 기원(奇轅)이 그의 말하지 않음을 기롱하였을 때에는 곧 이제현과 조일신을 병칭하면서 만일 이들을 탄핵한다면 왕이 가히 일을 논할 사람이 없지 않겠느냐는 말로 변명하였으며, 조일신이 장차 패할 지경에 이르러서는 먼저 기미를 알고 물러나 화를 피하게 하였으니, 추측하여 맞추는데 용하고, 간사히 꾸미는데 교묘한 자가 아니고서는 어찌 이와 같을 수가 있겠는가. 그런 까닭으로 비록 당시의 사신도 오히려 그 악인에게 붙음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착한 것을 드러내고 악한 것을 물리쳐 없애는 사람이라고 그를 칭찬하였으니, 소인을 알기 어려움이 이와 같도다. 그런데 왕은 이제현에게 말하기를, “이연종은 매우 간사한 사람이다." 하였으니, 간악함을 환하게 살피시는 왕의 밝음이 어찌 그리 지극하던가. 다만 밝게 알면서도 능히 그를 제거하지 못하고, 그 스스로 물러났다는 명분을 도둑질할 수 있게 한 것이 한스럽다. 이로 말미암아 신돈(辛旽)과 같이 간사함을 품고 총애를 얻어 왕을 속이고 나라를 그릇치게 한 자가 다시 나와 거리낌이 없어 마침내는 어둡고 혼미하여 깨닫지 못하는 지경에 빠졌으니, 아아 애석하도다. 후세에 소인을 다루는 이는 가히 이것을 거울로 삼지 않을 수 있으랴." 하였다.
여름 4월 1일 계묘일에 원 나라에서 일식을 고하여 왔으나 이날 일식이 있지는 않았다.
○ 원 나라에서 활 3백 장(張)과 화살 3백 매(枚), 칼 3백 자루를 주었다.
○ 왕이 부처의 생일에 궁중에서 연등(燃燈)하고 중 1백 명을 밥먹이고 기악(妓樂)을 연주하며 구경하였다.
○ 밀직제학(密直提學) 윤택(尹澤)이 상소하여 시사를 논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으니 드디어 사직하였다.
○ 우부대언 김득배(金得培)와 좌부대언 유숙(柳淑)을 파면하였다. 원 나라의 승상 탈탈(脫脫)이 사자를 보내 경고문을 왕에게 보내어 경계하기를, “소인을 쓰지 말라."하였는데, 찬성사 조일신과 지신사(知申事) 최덕림(崔德林)이 사자를 맞이하여 말하기를, “유숙과 김득배가 안에서 용사(用事)한다." 하여, 사자가 왕에게 말하여 그들을 파면하게 하였다.
○ 왕이 성절을 하례하여 행성(行省)에 거둥할 때, 원사(院使) 기원(奇轅)이 말머리를 나란히 하여 말을 하려는데, 왕이, 호위하는 군사에게 명하여 앞뒤로 나누어 호위하도록 하여 그가 가까이 올 수 없게 하였다.
○ 왕이 궁중에 화산(火山)을 만들어놓고 잡희(雜?)를 베풀었는데, 조일신이 왕과 함께 난간에 기대어 구경하였다. 순군부(巡軍府)에서 일찍이 어떤 일로 배전(裵佺)의 가노(家奴)를 가두고 문초하였는데, 조일신이 군졸 50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순군부의 관리를 불러 석방하여 주도록 하였던바 그 관리가 말을 듣지 않자 그를 때리고, 만호(萬戶) 홍유(洪裕)에게 부탁하여 마침내 석방하였다. 조일신은 또 참소로서 도평의녹사(都評議錄事) 김덕린(金德麟) 등을 국문하여 모두 제명하고 금고하였는데, 왕이 그것이 불가함을 알면서도 부득이 따랐다. 나라 사람들도 그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아무도 감히 말을 하는 자가 없었으니, 그가 권세를 제멋대로 부림이 이와 같았다.
○ 5월에 왕이 자기 생일에 내전(內殿)에서 3일 동안 도량(道場)을 설치하였다. 재상들이 왕에게 수연(壽宴)을 베풀고자 하였더니, 왕이 이르기를, “잔치하면 반드시 살생을 하게 되니, 그 잔치의 비용으로 중 1천 명을 지장사(地藏寺)에서 밥 먹이도록 하라." 하였다. 왕이 불교를 믿기 시작하니 백관들이 모두 왕을 위해 축수재(祝壽齋)를 베풀었다.
○ 기축일에 지진이 있었다.
○ 중 보허(普虛)를 익화현(益和縣)에서 궁중으로 불러 들어오게 하여 법도를 물었더니, 보허가 말하기를, “임금되는 도리는 교화를 닦아 밝히는 데 있는 것이지, 반드시 부처를 믿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국가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비록 부처님을 지극히 받들어도 무슨 공덕이 있겠습니까. 꼭 하시겠다면 다만 태조(太祖)께서 설치하신 절을 개수할 뿐이지, 새로 절을 창건하지는 마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군왕(君王)께서 사특한 자를 제거하고 바른 이를 등용하시면 나라를 다스리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사특함과 바름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그들이 나를 원 나라에서 시종할 때 모두 바친 정성을 생각하면, 가볍게 제거할수 없다. 이 점이 과인(寡人)이 어렵게 여기는 것이다." 하였다.
○ 6월에 왕이 강안전(康安殿)에서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
○ 간관이 상소하기를, “환관 가운데 검교관(檢校官)에 임명되어 녹을 먹는 자가 너무 많으니, 삭감하소서." 하였다.
○ 2년 동안 토목의 역사를 금하라고 하였다.
○ 왜적이 전라도에 침입하니, 지익주사(知益州事) 김휘(金輝) 등이 수군을 거느리고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옥구 감무(沃溝監務) 정자룡(鄭子龍)은 머뭇거리고 나아가지 않은 죄로 곤장을 때려 돌산(突山)의 봉졸(烽卒)로 삼았다.
○ 왜적이 강릉도(江陵道)에 침입하였다.
○ 가을 7월 계유일에 전왕을 총릉(聰陵)에 장사지냈는데 장례에 쓰는 비품이 많이 빠졌다.
○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권준(權準)이 졸하였다. 권준은 일찍이 원 나라에서 충선왕(忠宣王)을 뵙고 은총이 더욱 융숭하여져 하사받은 상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충숙왕(忠肅王)과 심왕(瀋王)이 서로 대립할 때 많은 불평 분자들이 심왕에게 붙었으나 권준은 의를 지켜 변절하지 않았고, 조적(曹?)의 난을 당해서는 권준은 문을 닫고 나아가지 않았다. 성질이 순후하고 말과 웃음이 적었으며, 의표(儀表)가 수려하여 바라보면 우뚝하니 존경을 받을 만 하였다. 그러나 세력을 믿고 토지를 빼앗아 차지하고 뇌물을 받아 거부가 되었기에 식자들은 비난하였다.
○ 합포 만호(合浦萬戶)가 왜적 포로를 바쳤다.
○ 대비가 병이 있어 사면령을 내렸다.
○ 8월에 왕이 공주와 함께 복령사(福靈寺)에 거둥하였는데, 이후로 자주 사원(寺院)에 거둥하였다.
○ 왕이 교서를 내리기를, “옛 군왕이 나라를 정치에 정려(精勵)하여 몸소 나라의 정무를 살피고 총명을 넓히어 아래 백성들의 사정에 통달하였다. 첨의 감찰 전법사 개성부 선군도관(僉議監察典法司開城府選軍都官)은 무릇 판결한 소송 내용을 5일에 한 번씩 아뢰어라" 하였다.
○ 원 나라에서 직성사인(直省舍人) 보사니(普思泥)를 보내어 왕에게 금대(金帶)와 초(?) 2천 정(錠)을 주었다.
○ 왕이 서연(書筵)을 열고 교지를 내리기를, “원로ㆍ대신ㆍ사대부들은 번갈아 입시하여 경(經)ㆍ사(史)의 법언(法言)을 진강하라. 그리고 권세있는 자에게 빼앗긴 전택과 노비로 생긴 여러 해 묵은 소송과 원통하고 오래 묵은 옥사를 잘 살펴 심리하라. 첨의감찰(僉議監察)은 나의 귀와 눈이니, 시정의 득실과 민간의 이해에 대하여 직언하고 숨기지 말지어다." 하였다.
○ 인승단(印承旦)이 서연에 입시하여 변정도감(辨整都監)을 폐지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 이에 불응하고 다만 이르기를, “좀도둑이 밤에 다니면서 달 밝음을 미워하는 격이구나." 하였다. 이때 권호(權豪)들이 기현(畿縣)의 공전(公田)을 빼앗았는데 인승단의 점유가 특히 많았다. 변정도감에서 그 전답을 몰수하고 더구나 여러 해 묵은 조세(租稅)까지 추징한 까닭에 인승단이 미워하였던 것이다. 다른 날에 김영후(金永煦)가 또 변정도감의 폐지를 청하였더니, 왕이 이르기를, “나는 아름다운 말을 듣고자 서연을 설치했는데, 경들이 하는 말은 참으로 나의 마음과 어긋나도다." 하고는 몸이 아프다 칭탁하고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 복안부원군(福安府院君) 권겸(權謙)이 원 나라에 가 딸을 황태자에게 바쳤다.
○ 포왜사(捕倭使) 인당(印?)을 머뭇거리고 나가 싸우지 않은 죄로 옥에 가두었다.
○ 9월에 송서(宋瑞)를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으로, 조일신(趙日新)을 판삼사사로 삼았다.
○ 왜적의 배 50여 척이 합포(合浦)를 침략하였다.
○ 대호군(大護軍) 성사달(成士達)이 정방(政房)에 있으면서 관직을 사사로이 40여 명에게 주었으므로 옥에 가두었다.
○ 상장군(上將軍) 전보문(全普門)의 아내 송씨(宋氏)가 보문의 족질 조복생(曹復生)과 간통하였으므로 옥에 가두고 문초하여 자백을 받아 각각 곤장 87대를 때렸다.
○ 기해일에 조일신이 전 찬성사 정천기(鄭天起)와 최화상(崔和尙), 장승량(張升亮) 등과 함께 밤에 거리의 불량배들을 모집하여, 기철(奇轍), 기륜(奇輪), 기원(奇轅), 고용보(高龍普), 박도라대(朴都羅大), 이수산(李壽山) 등을 제거하고자 모의하여, 각각 인원을 나누어 이들을 체포하게 하였는데, 기원(奇轅)만을 잡아 목베고, 나머지는 모두 달아났다. 일신은 그 무리를 이끌고 성입동(星入洞)에 나아가 시어궁(時御宮 왕의 임시 처소)을 포위하고 숙직하는 판밀직사사 최덕림(崔德林), 상호군 정환(鄭桓), 친종호군(親從護軍) 정을상(鄭乙祥) 등 몇 사람을 죽였다. 호위 군사들이 놀라서 두려워하니 일신이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여러 악한 무리들만 제거할 따름이다." 하고는, 사람을 보내어 상호군(上護軍) 홍의(洪義)를 그의 집에서 죽이려고 칼을 뽑아 내리치려고 하니, 그 아내가 갑자기 몸으로 앞을 가로막아 홍의는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 경자일에 조일신이 왕을 위협하여 어보(御寶)를 꺼내게 하고는 스스로 우정승에 제수되고, 정천기(鄭天起)를 좌정승으로, 이권(李權)을 판삼사사로, 나영걸(羅英傑)을 판밀직사사로, 장승량(張升亮)을 응양군 상호군(鷹揚軍上護軍)으로 삼고, 그 무리들에게도 각각 차등 있게 벼슬을 주었다. 또 배천(裵天)을 평양도존무사로, 장원석(張元碩)을 강릉도존무사로, 유광대(劉廣大)를 철령방호사(鐵嶺防護使)로, 이수장(李壽長)을 의주방어사로 삼았으며, 또 박서(朴西)ㆍ한범(韓範) 등을 시켜 의성(義成)ㆍ덕천(德泉)의 두 창고를 봉하였다. 일신은 고충절(高忠節)ㆍ최화상(崔和尙) 등과 함께 김일봉(金逸逢), 안진(安震), 황순(黃順), 이제(李濟) 등을 위협하여 자기 편을 따르도록 하였다. 또 영을 내려 기철 등의 집을 수색하고, 그들의 어미와 아내를 잡으니, 옥에 갇힌 사람이 감옥에 가득 찼고, 군사들이 길거리에서 서로 맞붙어 싸웠다. 왕이 공주와 함께 천동(泉洞)의 별궁에 이어하였는데, 호위하는 군사가 적었으며, 앞뒤에 모두 적당이었다.
○ 겨울 10월 초하루 신축일에 일신이 곧 죄를 도당에게 뒤집어 씌우고, 스스로 면하고자 하여 밤에 최화상(崔和尙)과 함께 입직하였다가 새벽에 화상에게 말하기를, “공이 차고 있는 칼이 매우 좋으니 한 번 봅시다." 하니, 화상이 말하기를, “이 칼은 사람을 참으로 많이 죽였소." 하고, 곧 빼어서 일신에게 주니, 일신이 그 칼을 받아들고는 화상을 목베었다. 왕에게 친히 나와서 적을 잡으라고 권하였다. 왕이 의심하고 승낙하지 않으니, 일신이 청하면서 말하기를, “우두머리 없이 일이 성사되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하므로, 왕이 부득이 칼을 차고 십자(十字) 거리에 나왔더니, 백관들이 비로소 모여들었다. 장승량(張升亮) 등 8~9명을 체포하여 목베고, 거리에 그 머리를 내걸며, 천기(天起)를 옥에 가두고, 그 아들 총랑(摠郞)인 명도(明道)를 목베었다.
○ 송서(宋瑞)를 우정승으로, 조일신(趙日新)을 좌정승 판군부감찰사(左政丞判軍簿監察事)로, 홍언박(洪彦博)을 판삼사사로, 유탁(柳濯)ㆍ정을보(鄭乙輔)ㆍ조유(趙瑜)를 찬성사로, 김보(金普)ㆍ김일봉(金逸逢)ㆍ최천택(崔天澤)을 평리로, 강득룡(姜得龍)ㆍ홍원철(洪元哲)을 각각 삼사우좌사로, 안진(安震)을 정당문학으로, 김신(金信)을 지도첨의사사로, 강지연(姜之衍)을 첨의평리상의로, 한가귀(韓可貴)를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로, 유진(兪眞)을 밀직사(密直使)로, 강천유(姜千裕)를 지밀직사사로, 고충절(高忠節)ㆍ이성서(李成瑞)ㆍ황순(黃順)을 동지밀직사사로, 김귀년(金龜年)을 밀직부사상의로, 이종(李宗)ㆍ홍개도(洪開道)ㆍ손불영(孫佛永)을 밀직부사로, 이제(李濟)를 밀직제학으로 삼았다.
○ 계묘일에 왕이 단양대군(丹陽大君)의 집으로 이어(移御)하였는데, 옮겨 가는 도중에 고라리(高羅里)를 지나갈 때 일신이 말 위에서 왕과 대비와 공주에게 술을 바쳤다. 이때 일신이 난을 일으켜 내외에 호령하니, 조정 신하들이 두려워하여 입을 다물고 한 마디의 말도 하는 자가 없었다. 왕이 전 좌사(左使) 이인복(李仁復)을 몰래 불러 이르기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니 이인복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신하된 자로서 감히 난을 일으킨 자에 대하여는 본시 떳떳한 형벌이 있습니다. 하물며 지금 천조(天朝)가 당당하여 법령이 밝은데 만일 어물어물 결단을 내리지 못하면 신이 생각하기에 상왕(上王)에게 미칠까 두렵습니다." 하니 왕이 드디어 일신을 제거할 것을 결의하고, 갑진일에 행성에 거둥하여 기로 등을 불러 밀의하며, 다음날에 다시 행성에 거둥하여 김첨수(金添守)에게 명하여 일신을 잡아오게 하고, 행성의 문 밖에 끌어내어 목베었으며, 그의 친당 정을보(鄭乙輔), 이권(李權), 나영걸(羅英傑), 고충절(高忠節), 이종(李宗), 이군상(李君常), 박희(朴曦), 채하로(蔡河老) 등 2백 18명을 옥에 가두었다. 적당 조파회(趙波廻)는 멀리 도망가 숨었다가 그의 늙은 어머니가 옥에 갇혔다는 말을 듣고 자수하여 왔는데 목베었다. 이때 여러 날 계속해 흐리며 침침하였는데, 일신을 목베자 활짝 개었다.
○ 이제현(李齊賢)을 우정승으로, 조익청(曹益淸)을 좌정승으로, 유탁(柳濯)을 판삼사사(判三司事)로, 홍언박(洪彦博)ㆍ김승택(金承澤)을 찬성사로, 조유(趙瑜)를 도첨의평리로, 이공수(李公遂)를 삼사우사로, 문백(文伯)ㆍ김광현(金光鉉)을 동지밀직사사로, 김용(金鏞)ㆍ최원(崔源)ㆍ박수년(朴壽年)을 밀직부사로, 안보(安輔)를 밀직제학으로 삼았다. 홍탁(洪鐸)을 회원현령(檜原縣令)으로 좌천시켰다. 정을보(鄭乙輔)를 광양감무(光陽監務)로, 이권(李權)을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임명하였다. 홍탁은 일신의 장인이었다.
○ 상장군(上將軍) 강석(姜碩)을 원 나라에 보내어 천추절(千秋節)을 하례하였다.
○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황천(皇天)이 돌보아주지 않아 재변이 자주 일어나, 적신 조일신ㆍ정천기 등이 흉악한 무리들을 모아 반역을 도모하였으나, 조종(祖宗)의 영(靈)에 힘입어 원흉들은 이제 모두 죄를 다스려 처형하였으니, 무릇 너희들 내외의 백성들은 모두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것이며, 다시는 놀라 동요하지 말라. 죄에 대하여는 불충ㆍ불효ㆍ살인죄 이외는 모두 용서하노라." 하였다.
○ 11월에 백관들이 정동성(征東省)에 글을 올려 말하기를, “적신 조일신은 은밀히 반역을 도모하여 제 마음대로 군사를 일으켜, 기씨(奇氏)를 제거하고자 하여 그 집을 쳐부수고, 왕궁(王宮)에 함부로 난입하여 좌우의 신하들을 살해하며, 포학한 짓을 마음대로 하다가, 스스로 그 죄가 용납될 수 없음을 알고 또 간악한 음모가 깨어지고 폭로될까 두려워서, 도리어 그와 동당(同黨)인 최화상(崔和尙) 등을 죽여 입을 막아서 스스로 죄를 벗어나려 하여 왕을 부축해서 말에 태우고, 그 도당들을 체포하여 제 공로라고 큰소리치고는 스스로 정승이 되어 왕의 좌우에 있으면서 늘 칼날을 번뜩이며 기세를 부리고 가만히 다른 생각을 품어 일당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왕께서는 묘한 계책을 가만히 써서 짐짓 부드러운 얼굴빛을 취하면서 그 틈을 기다려 군사를 싸우게 하지 않고서도 일신을 주륙시켰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황제께 아뢰어 법대로 분명히 처단하여 주시고 뒷날에는 그런 일이 없도록 징계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 밀직부사 박수년(朴壽年)을 원 나라에 보내어 군기를 보내어 준 데 대하여 사례하고, 도첨의사사(都僉議司使) 한가귀(韓可貴)를 보내어 신년을 하례하였다.
○ 12월에 밀직부사 이성서(李成瑞)를 원 나라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 원 나라에서 종정부상판(宗正府常判) 양렬첩목아(梁烈帖木兒)ㆍ이부상서(吏部尙書) 불화첩목아(不花帖木兒)를 보내어 조일신의 변란에 관한 것을 국문하였다.
○ 김용(金鏞)에게 곤장을 때렸다. 조일신의 난에 궁중의 호위 군사가 많이 다쳤는데, 김용만은 홀로 면하고 적에게 저항하여 막지 않은 때문이었다.
[주D-001] :
[주D-002] :
[주D-003] :
고려사절요 제26권
공민왕 1(恭愍王一)
계사 2년(1353), 원 지정 13년
○ 봄 정월에 왕이 영안왕 대부인(榮安王大夫人) 이씨(李氏)의 집에 거둥하였다.
○ 왕이 친히 태묘(大廟)에 제사를 지냈다.
○ 홍빈(洪彬)을 우정승으로, 조익청(曹益淸)을 좌정승으로, 이공수(李公遂)를 찬성사로, 이달충(李達衷)을 감찰대부로 삼았다.
○ 영산군(永山君) 장항(張沆)이 졸하였다.
○ 2월에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서(宋瑞)가 졸하였다.
○ 3월에 원 나라에서 종정부 단사관(宗正府斷事官) 합아장(哈兒章), 병부랑중 강승(剛升) 등을 보내어, 정천기(鄭天起), 고충절(高忠節), 염백안첩목아(廉伯顔帖木兒), 곽윤정(郭允正), 이군상(李君常), 이귀룡(李龜龍) 등을 목베고, 그 집을 몰수하며, 그 도당 박서(朴西) 등 14명을 목베고, 조용권(曹用權) 등 17명에게 곤장을 때렸다. 정당문학(政堂文學) 안진(安震), 밀직제학 이제(李濟)는 연로하였으므로 곤장맞는 것을 면하고, 대신 동(銅)을 바쳐 속죄하게 하였다. 또 조일신의 처자를 기천린(奇天麟)에게 주어 노비로 삼았다.
○ 첨의찬성사 유탁(柳濯), 삼사우사 최천택(崔天澤)을 원 나라에 보내어 성절을 하례하게 하였다.
○ 여름 4월 갑진일에 지진이 있었다.
○ 5월에 이색(李穡) 등 33명과 명경(明經)에 응시한 사람 2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밀직사 이야선첩목아(李也先帖木兒), 응양군 상호군 안우(安祐)를 원 나라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황후 생일에 예물을 바쳤다. 황후 생일의 하례는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 6월에 우정승 홍빈(洪彬)이 사직하니, 왕이 내관(內官)을 보내어 다시 나오도록 하였으나, 홍빈은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재신과 추신들이 그의 집에 회동하여 나오기를 청하니, 그제야 나와서 일을 보았다.
○ 가을 7월에 원 나라에서 태부감 대감(大府監大監) 산동(山童) 등을 보내어, 태자를 책봉한 조서를 반포하였다.
○ 8월에 원 나라에서 만만태자(巒巒太子). 정안평장(定安平章) 등을 보내어, 발아찰(?兒?) 연회를 내려, 드디어 그 연회를 연경궁(延慶宮)에서 베풀었다. 공주와 태자는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앉고, 왕은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앉으며, 황후의 어머니 이씨(李氏)는 동쪽에서 서쪽을 바라보고 앉았는데, 왕이 먼저 일어나 무릎을 꿇고 원 나라의 태자에게 잔을 올렸더니, 태자가 서서 마신 뒤 차례로 술잔을 돌리고, 태자가 또 일어나 술을 이씨에게 드리고 다음에는 왕에게, 다음에는 공주에게 돌렸다. 이 잔치에 베를 써서 꽃을 만든 것이 무릇 5천 1백 40여 필이요, 다른 물건들도 이에 기준을 맞추어 극도로 사치를 다하였다. 원 나라의 법에 인아(姻?)간에 모여서 잔치하는 것을 일컬어 발아찰 잔치라 하였다. 먼저 왕이 이씨를 위하여 표문을 올려 청했기 때문에 황제가 이 잔치를 내린 것이었다. 이때 사신들의 왕래가 그치지 않아서 사관(舍館)만으로는 모두 수용하기 어려워 무려 30여 군데의 재상들의 집에 그들을 유숙시켰다.
○ 9월 1일 을축에 일식이 있을 것이라고 원 나라에서 고하여 왔으나, 그날에 일식은 없었다.
○ 밀직부사(密直副使) 이야선 첩목아(李也先帖木兒)를 원 나라에 보내어 발아찰 잔치를 베풀어 준데 대하여 사례하였다.
○ 인승단(印承旦)을 좌정승으로, 조유(趙瑜)를 판삼사사로 삼았다.
○ 겨울 10월에 경상도 도순문사에게 교지를 내려 이르기를, “해구(海寇)가 여러 해 동안 계속해서 변방의 걱정거리가 되고 있는데, 이제 경이 왜적 10여 명을 사로잡았으니 매우 가상하게 생각한다. 이에 경에게 술과 은 50냥을 하사하노라. 휘하의 군사 가운데 공이 있는 자는 그 명단을 올리라. 내가 장차 채용하겠다." 하였다.
○ 채하중(蔡河中)을 원 나라에 보내어 천추절(千秋節)을 하례하고, 군부판서 김희조(金希祖)를 보내어 태자 책봉을 하례하였는데, 이색(李穡)을 서장관으로 따라가게 하여 과거에 응시하게 하였더니, 제과(制科)에 합격하였다.
○ 11월에 전 좌정승 조익청(曹益淸)이 졸하였다.
○ 남양군(南陽君) 홍언박(洪彦博)을 원 나라에 보내어 신년을 하례하였다.
○ 12월에 쇄권도감(刷卷都監)을 폐지하였다. 이때 사람들이 관전(官錢)을 빌어다가 갚지 않은 자가 많아서 도감을 설치하여 징수하였는데, 본인이 내지 못하는 것은 친족이나 이웃 사람에게 물리게 하고 원금의 배를 징수하니 사람들이 매우 고통스럽게 여겼다. 그리하여 전 판밀직사사 김일봉(金逸逢)이 글을 올려 그 폐단을 극력 말하므로 그 말을 따랐다.
고려사절요 제26권
공민왕 1(恭愍王一)
갑오 3년(1354), 원 지정 14년
○ 봄 정월에 왕이 군신(群臣)들에게 연경궁(延慶宮)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 채하중(蔡河中)을 우정승으로, 염제신(廉悌臣)을 좌정승으로, 강천유(姜千裕)를 판삼사사로, 이인복(李仁復)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삼았다.
○ 원 나라에서 환자(宦者) 원사(院使) 김광수(金光秀), 첨원(僉院) 가라발피(迦刺撥皮)를 보내어 왕에게 지폐楮幣〕1만 정(錠), 황금(黃金) 1정, 백은(白銀) 9정을 내렸다.
○ 2월에 덕녕공주(德寧公主)가 원 나라에서 돌아왔다.
○ 채하중을 영도첨의로, 염제신(廉悌臣)을 우정승으로, 유탁(柳濯)을 좌정승으로, 강윤충(康允忠)ㆍ원호(元顥)를 찬성사로, 최천택(崔天澤)ㆍ기륜(奇輪)을 각각 삼사우좌사로, 김신(金臣)ㆍ김경직(金敬直)ㆍ이진(李珍)을 평리로, 강지연(康之衍)을 평리상의(評理商議)로, 박수년(朴壽年)을 지도첨의로, 기완자불화(奇完者不花)를 판밀직사사로, 박지춘(朴之椿)을 밀직사사로, 강순룡(康舜龍)ㆍ강중상(姜仲祥)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강석(姜碩)ㆍ전보문(全普門)을 동지밀직사사로, 활재가(闊宰哥)ㆍ박정(朴?)ㆍ최용자(崔用滋)ㆍ박군정(朴君正)ㆍ지찬(池贊)을 밀직부사로, 안보(安輔)를 밀직제학으로 삼았다. 완자불화(完者不花)는 기원(寄轅)의 아들이었다.
○ 3월 1일 계해일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 첨의평리 김경직(金敬直)을 원 나라에 보내어 성절을 하례하였다.
○ 여름 4월에 왜적이 전라도의 조선(漕船) 40여 척을 약탈하였다.
○ 5월에 한재(旱災) 때문에 술마시는 것을 금하고 궁중의 음식 가짓수를 줄였다. 감찰대부 김두(金?), 전법판서 홍중원(洪仲元)을 불러서 민간의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물었다.
○ 원 나라에서 태부감소감(大府監少監) 환자(宦者) 안동(安童)을 보내어, 무늬놓은 모시와 모피(毛皮)를 구하였다.
○ 밀직사(密直使) 이야선첩목아(李也先帖木兒)를 원 나라에 보내어 황후의 생일에 예물을 바쳤다.
○ 경양대군(慶陽大君) 노책(盧)이 딸을 원 나라에 바쳤다.
○ 6월에 평강부원군(平康府院君) 채하중(蔡河中)이 원 나라에서 돌아와 승상 탈탈(脫脫)의 말을 전하기를, “두 나라가 서로 우호를 맺은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지금 한적(漢賊)이 크게 일어나, 내가 황제의 명을 받아 남으로 정벌하러가니, 왕은 마땅히 용감한 정예 군사를 보내 도와 주시오." 하였다. 하중은 원 나라에 있으면서 다시 본국의 정승이 되고자 도모하였는데, 마침 원 나라가 홍건적(紅巾賊) 등의 난적을 정벌하면서 한편으로 사방으로 용사(勇士)를 구하였다. 하중은 원 나라에 청하기를, “고려국으로 돌아가 군사를 출병하여 정벌에 협조하겠다." 하고는, 곧 정승 유탁(柳濯)ㆍ염제신(廉悌臣) 등이 용맹과 지략이 있다 하여 천거하고는, 이수산(李壽山)과 함께 원 나라의 사신보다 앞서서 돌아왔다. 수산은 황제의 말을 왕에게 선포한다면서 말하기를, “하중은 일에 익숙하고 단련된 사람이니 쓸 만하다." 하였고, 하중도 또한 황제의 말을 전한다면서 말하기를, “수산은 영리한 사람이니, 왕은 등용하라." 하였다.
○ 흉년이 들어 유비창(有備倉)의 곡식을 방출하여 값을 내려서 백성들에게 팔았다.
○ 채하중을 첨의정승으로, 이수산ㆍ강중상(康仲祥)을 첨의평리로, 염제신(廉悌臣)을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으로, 유탁(柳濯)을 고흥부원군(高興府院君)으로 삼았는데, 감찰사(監察司)에서 하중의 직첩에 서명을 하지 않고 있다가 여러 달만에야 서명하였다.
○ 한양부원군(漢陽府院君) 한종유(韓宗愈)가 졸하였다. 종유는 어려서부터 눈매가 보통 사람과 달랐고, 얼굴이 빼어나고 체구가 커서 바라보면 엄연(儼然)하여 재상의 그릇임을 알 수 있었다. 그가 현달하기 전에 당시의 이름 있는 선비들과 서로 왕래하고 어울려 술마시면서 하루도 그냥 보내는 날이 없었는데, 취하면 곧 일어나서 소매를 드리우고 춤을 추면서 양화사(楊花詞)를 노래부르기를, “두여회(杜如晦)의 맑은 바람 기다려 날아가 황각 안에 이르리."〔待如晦淸風飛揚到黃閣中〕하니 식자들이 모두 특이하게 여겼다. 성질이 관후하고 진중해서 일을 처리하고 사람을 접함에 있어 모두 여유가 있었다. 시호를 문절(文節)이라 하였다.
○ 원 나라에서 이부낭중(吏部郎中) 합라나해(哈刺那海) 등을 보내어, 탈탈승상(脫脫丞相)이 황제의 명이라 하여 유탁(柳濯), 염제신(廉悌臣), 권겸(權謙), 원호(元顥), 나영걸(羅英傑), 인당(印?), 김용(金鏞), 이권(李權), 강윤충(康允忠), 정세운(鄭世雲), 황상(黃裳), 최영(崔瑩), 최운기(崔雲起), 이방실(李芳實), 안우(安佑) 등 40여 명과 서경(西京)의 수군(水軍) 3백 명을 부르고, 날래고 용감한 군사를 모집하여, 8월 10일을 기해서 연경(燕京)에 집합하게 하여 고우(高郵)의 적 장사성(張士誠)을 토벌하려고 하였다. 또 공부시승(工部寺丞) 박새안불화(朴賽顔不花)에게 보초(寶?) 6만 정(錠)을 싸서 보내어, 정벌에 나가는 장졸에게 나누어 주었다.
○ 인당(印?)을 석성부원군(碩城府院君)으로, 이권(李權)을 오원부원군(五原府院君)으로, 나영걸(羅英傑)을 금성군(錦城君)으로, 손불영(孫佛永)을 돈성군(敦城君)으로, 김경(金鏡)을 의성군(義城君)으로, 김용(金鏞)을 안성군(安城君)으로, 안우(安祐)를 오성군(鼇城君)으로, 최원(崔源)을 용성군(龍城君)으로, 인안(印安)을 연성군(延城君)으로, 최안수(崔安守)를 함성군(咸城君)으로, 구정(具貞)을 면성군(沔城君)으로, 조충신(趙忠信)을 상원군(祥原君)으로 삼았으며, 그 나머지의 장졸에게도 아울러 작질(爵秩)을 내려 주었다. 모집에 지원하는 자는 모두 3등급을 높여 직위를 주게 하였다. 각사(各司)에 모두 3, 4품(品)을 첨설하고, 육부의 판서 총랑(摠郞)은 정조(政曹)를 제외하고 모두 그 수를 배로 늘려 설치하며, 42개의 도부(都府)에 있어서는 영(領)마다 중랑장(中郞將)과 낭장을 각 2명씩, 별장과 산원(散員)을 각 3명씩 늘려 설치하였는데, 이것을 상군정(賞軍政)이라 일컬었다. 첨설의 직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 백관과 각 종파의 승도(僧徒)에게 차등 있게 말을 내게 하고, 군사들로 하여금 합당한 값을 주며 사도록 하였다. 이때 정벌에 나가는 군관들이 백성들의 말을 빼앗거나 혹은 강제로 사는 일이 많아서 행성(行省)에서 이를 금하였으나, 그치지 않았다.
○ 유비창(有備倉)의 쌀 5백 석(碩)을 방출하여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 전라도 만호(萬戶) 인당(印?)이 왜적포로를 바쳤다.
○ 가을 7월에 유탁(柳濯). 염제신(廉悌臣) 등 40여 명이 군사 2천여 명을 이끌고 원 나라로 가는데, 왕이 영빈관(迎賓館)에 거둥하여 친히 이들을 사열하여 보냈다. 이들 일행이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강윤충(康允忠)이 여러 사람에게 모의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이 친척과 헤어져서 조상의 무덤을 버리고 죽음의 땅에 나가 언제 돌아올 것인가. 정기(精騎) 50으로 서울로 되돌아가 출병을 처음 주장한 자를 목베고자 한다." 하고는 염제신에게 고하였다. 제신은 말하기를, “그것은 옳은 생각이 아니다. 우리 임금은 하늘인데, 하늘을 피해 도망할 수 있겠는가. 또한 충신 의사가 어찌 두 마음을 가진 말이 있을 수 있는가." 하고는, 드디어 유탁 등과 함께 사잇길로 급히 들어갔다. 이때 원 나라에 소집된 40여 명은 모두 장상(將相) 중에 명망 있는 자들이고, 또한 정예한 병졸이 모두 정벌에 따라갔기 때문에 궁궐의 호위가 비었으므로 왕이 불안하고 두려워하여 서해도(西海道)에 궁수(弓手)를 모집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 원 나라에서 중상감승(中尙監丞) 최유(崔濡)를 보내어 정벌에 나갈 군사를 독촉하고, 겸하여 창자루를 구하였다. 최유는 일찍이 원 나라로 도망해 달아났었는데, 왕이 즉위하려 동으로 돌아오자 왕의 행차를 호종하다가 요양(遼陽)에 이르러 도로 원 나라로 도망갔었다.
○ 강순룡(康舜龍)ㆍ박새안불화(朴賽顔不花)를 찬성사로, 최유(崔濡)를 삼사우사(三司右使)로 삼고, 강천유(姜千裕)를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으로, 기륜(奇輪)을 덕산부원군(德山府院君)으로, 기완자불화(奇完者不花)를 덕양부원군(德陽府院君)으로 봉하였다.
○ 채하중(蔡河中)이 규정분대감(糾正分臺監)과 모든 창고를 폐지하자고 발의하였으나, 왕이 잠자코 있었다.
○ 강윤충을 판삼사사(判三司使)로, 홍언박(洪彦博)ㆍ윤환(尹桓)ㆍ김경직(金敬直)을 찬성사로, 강득룡(康得龍)ㆍ이수산(李壽山)ㆍ박수년(朴壽年)을 평리로, 유지정(柳之淀)을 삼사좌사로, 이인복(李仁復)을 겸 감찰대부(兼監察大夫)로, 이승로(李承老)를 지밀직사사로, 신중전(申仲佺)을 동지밀직사사로, 손취(孫就)ㆍ서신계(徐臣桂)ㆍ강중경(姜仲卿)ㆍ권항(權恒)을 아울러 밀직부사로 삼았다.
○ 겨울 10월에 원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영안왕대부인(榮安王大夫人) 이씨(李氏)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왕이 공주와 함께 그 집에 거둥하였다.
○ 환자 신소봉(申小鳳)을 친어군 상호군(親禦軍上護軍)으로 삼았다.
○ 전 우정승 염제신이 원 나라에서 돌아왔다. 이때 왕이 사신을 보내어 제신을 데려가 달라고 청하였더니, 황제가 이르기를, “제신은 고려의 대신이다. 그를 예우하여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 11월에 처인군(處仁君) 이진(李珍)을 원 나라에 보내어 천추절(千秋節)을 하례하였다.
○ 전라도 도순문사 신중전(申仲佺)이 왜적의 목을 바쳤다.
○ 김경직(金敬直)ㆍ임숙(林淑)을 삼사우좌사(三司右左使)로, 김인호(金仁浩)를 찬성사(贊成事)로, 이승로(李承老)를 정당문학으로, 홍원철(洪元哲)을 판개성부사로, 전보문(全普門)ㆍ왕재(王梓)를 지밀직사사로, 지찬(池贊)을 동지밀직사사로, 김원부(金元富)ㆍ최백(崔伯)ㆍ석말시월(石沫時月)을 밀직부사로 삼았다.
○ 인안(印安)이 원 나라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태사(太師) 탈탈(脫脫)이 군사를 거느리고 고우성(高郵城)을 공격할 때 유탁(柳濯) 등 정벌에 나간 장수와 사졸, 연경(燕京)에 있는 우리나라 사람 총 2만 3천 명을 선봉(先鋒)으로 삼았다. 성이 함락되려 할 때 달단지원로장(??知院老長)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공을 독차지할까 두려워서 명령을 내리기를, '이제 날도 저물었으니, 내일 쳐부수도록 하자.' 하고는 군사를 회동하여 퇴진하였다. 그날 밤에 적은 성벽을 견고하게 설비하였으므로 우리 군사가 다음 날에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다. 때마침 어떤 자가 탈탈을 참소하여 황제가 탈탈을 회안(淮安)으로 유배보내니, 이때부터 남쪽에 있는 적의 세력이 날로 강성하여졌다. 우리 군사는 육합성(六合城)을 함락시키고, 회안로(淮安路)로 이동하여 적을 막았는데, 이권(李權)ㆍ최원(崔源) 등 여섯 사람이 싸움에서 죽고, 최영(崔瑩)은 힘껏 싸우다가 몸에 두어 군데 상처를 입었다." 하였다.
○ 12월에 찬성사 김보(金普), 지밀직사사 전보문(全普門)을 원 나라에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였다.
○ 교지를 내려 이르기를, “연해의 수령은 방어의 직책도 겸하는 것이니, 참으로 그에 합당한 인물을 얻기가 어렵다. 봉익(奉翊) 이하 대언(代言) 이상은 각각 청백하고 무재가 있는 사람 2명씩을 천거하라." 하였다.
○ 채하중(蔡河中)을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司事)로, 이제현(李齊賢)을 우정승으로, 홍언박(洪彦博)을 좌정승으로, 강인백(姜仁伯)을 판삼사사로, 최천택(崔天澤)을 찬성사로, 강득룡(康得龍)ㆍ홍원철(洪元哲)을 삼사우좌사(三司右左使)로, 한가귀(韓可貴)를 평리로, 윤침(尹?)을 지도첨의사사로, 이춘우(李春遇)를 판개성부사로, 전보문(全普門)을 판밀직사사로, 김성보(金成寶)를 지밀직사사로, 안보(安輔)를 밀직제학으로, 강중경(姜仲卿)ㆍ서신계(徐臣桂)를 동지밀직사사로, 차포온(車蒲溫)을 밀직부사로 삼았다. 이제현이 사퇴하려 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고려사절요 제26권
공민왕 1(恭愍王一)
을미 4년(1355), 원 지정 15년
○ 봄 2월에 원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공주의 호를 승의(承懿)라고 내려주었다.
○ 안을기(安乙起)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전라도 안렴사 정지상(鄭之祥)이 원 나라의 어향사(御香使) 야사불화(?思不花)를 전주에서 가두었다. 불화는 본시 우리나라 사람인데, 원 나라에 들어가 황제에게 총애를 받았다. 그의 형 서신계(徐臣桂)는 육재(六宰)가 되었고, 아우 응려(應呂)는 상호군이 되어 권력을 휘두르며 상과 벌을 내리게 만드니, 온 나라가 두려워하였다. 이때 불화가 각 도에 강향(降香)할 때, 이르는 곳마다 방종하고 횡포하여 존무사나 안렴사 등이 많은 수모를 겪고 욕을 먹어도 누구 하나 감히 그 비위를 거스르지 못하였다. 지상이 공근히 맞이하였으나, 불화는 매우 거만하게 대하였다. 접반사(接伴使) 홍원철(洪元哲)이 지상에게 청탁한 일이 있었는데, 지상이 그 청을 들어주지 않으니 원철이 불화를 격분시켜 말하기를, “지상이 천사(天使)를 가벼이 여긴다." 하니, 불화가 지상을 포박하여 욕보였다. 지상이 분하여 크게 읍리(邑吏)들을 규합하여 속여 말하기를, “나라에서는 이미 기씨(奇氏) 일당을 주멸(誅滅)하고 다시는 원 나라를 섬기지 않기로 하였으며, 김경직(金敬直)을 원수로 삼아 압록강을 지키게 하였으니, 이 사자(使者)를 잡을 수 있다. 너희들은 무엇이 두려워서 나를 구하지 않는가." 하니, 읍리들이 소리지르며 몰려들어와 그의 포박을 풀어주었다. 지상은 드디어 무리들을 이끌고 불화.원철 등을 잡아가두고, 불화가 차고 있던 금패(金牌)를 빼앗아 가지고 서울〔開城〕로 달려 왔다. 오는 도중에 공주(公州)를 지날 때 그의 아우 응려(應呂)를 붙잡아 철퇴로 수일 동안 매질하여 죽게 하였다. 지상이 와서 왕에게 이 사실을 아뢰니, 왕이 깜짝 놀라 그를 순군옥에 가두고, 행성원외랑(行省員外郞) 정휘(鄭暉)에게 명하여 전주목사 최영기(崔英起)와 읍리 등을 체포하고, 차포온(車蒲溫)을 보내어 그 금패를 불화에게 돌려주었다.
○ 3월에 전 첨의(僉議) 김신(金信), 찬성사 박수년(朴壽年)을 원 나라에 보내어 성절(聖節)을 하례하고 ,밀직부사(密直副使) 윤지표(尹之彪)를 보내어 공주에게 봉호(封號)를 내려준 것을 사례하였다.
○ 여름 4월에 원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여악(女樂)을 구하였다.
○ 왜적이 전라도의 조선(漕船) 2백여 척을 약탈하였다.
○ 5월에 안보(安輔)를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윤수상(尹守常)을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삼았다. 수상은 환자(宦者)의 처족(妻族)으로 이 직위를 얻었으므로 세상의 기롱감이 되었다.
○ 지신사(知申事) 임군보(任君輔)를 원 나라에 보내어 황후의 천추절(千秋節)을 하례하였다.
○ 원 나라에서 단사관(斷事官) 매주(買住)를 보내어 정지상(鄭之祥)을 국문하였다.
○ 가을 7월에 찬성사 박수년(朴壽年)이 원 나라에서 졸하였다. 수년은 승상 왕가노(汪家奴)의 장인인데, 승상이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니 술을 과음하여 급사하였다.
○ 지신사 임군보가 원 나라에서 돌아왔는데, 황제가 왕에게 술을 내리고 공물로 바치던 무늬놓은 모시를 면제하여 주었다.
○ 양부(兩府)에 명하여 각각 수령의 직무를 감당할 만한 사람을 천거하게 하였다.
○ 8월에 원 나라의 태자가 월로첩목아(月魯帖木兒)를 보내어 영안왕 대부인(榮安王大夫人)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왕이 그 집에 거둥하였다.
○ 9월에 원 나라에서 자정원사(資政院使) 강금강길사(姜金剛吉思)를 보내어 영안왕대부인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 겨울 10월에 밀직부사 임군보가 왕의 명령을 거짓 전하였다 하여 제주(濟州)로 유배시켰는데, 이것은 김용(金鏞), 정세운(鄭世雲) 등이 참소하였기 때문이었다.
○ 김용, 홍의(洪義), 정세운, 유숙(柳淑) 등에게 명하여 매일 입궁해서 크고 작은 일에 관계 없이 모두 아뢰도록 하였다.
○ 11월에 전주(全州)를 강등시켜 부곡(部曲)으로 삼았는데, 이는 전주에서 야사불화(?思不花)를 가두었기 때문이었다.
○ 정원군(定原君) 균(鈞), 대호군(大護軍) 김진(金瑨) 등을 원 나라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 12월에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 김용(金鏞)이 찬성사(贊成事) 김보(金普)와 권세를 다투었는데, 김보가 어머니의 상을 당한 것을 기화로 하여 몰래 정동성도사(征東省都事) 최개(崔介)에게 권유하여 왕에게 글을 올려, 백관들로 하여금 부모의 상에 삼년 동안 벼슬을 쉬게 하도록 청하였고, 김용 등은 왕의 명령을 거짓 꾸며가지고 그 글을 도평의사(都評議司)에 내려 보내어 꼭 시행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왕이 그 사실을 모두 알고는 김용을 제주로 유배시키고, 삼년상을 폐지하였다.
○ 우리 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가 쌍성(雙城) 지방의 천호(千戶)로서 왕을 뵈었더니, 왕이 이르기를, “네 할아버지와 네 아버지는 몸은 비록 원 나라에 귀화하였으나 그들의 마음이 우리 왕실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 고조(祖考)께서도 총애하고 가상하게 여겼다. 이제 너는 할아버지, 아버지를 욕되게 함이 없을지어다. 그러면 내가 장차 그대를 잘 성취시켜 주리라." 하였다. 쌍성은 땅이 매우 비옥하고 풍요하여 동남쪽의 백성들 가운데 일정한 생업이 없는 자들이 많이 이곳에 들어와 살았다. 우리나라에서 중서성(中書省)에 보고하여 중국에서 황제의 성지(聖旨)를 받들고 차관(差官)이 그곳에 오고, 요양성(遼陽省)에서도 또한 차관이 왔을 때, 우리나라에서도 왕이 성랑중(省郞中) 이수산(李壽山)을 보내어 그곳에서 회동하게 하여, 신ㆍ구로 호적을 나누어 삼성조감호계(三省照勘戶計)라 일컬었다. 그 뒤에 백성들을 잘 안무(按撫)하지 못하여 백성들이 차차 흩어지고 옮겨갔다. 환조에게 명하여 맡아 다스리도록 하였더니, 백성들이 이로 말미암아 생업에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고려사절요 제26권
공민왕 1(恭愍王一)
병신 5년(1356), 원 지정 16년
○ 봄 2월에 원 나라에서 왕에게 공신호를 주어, 친인보의 선력 봉국 창혜 정원(親仁保義宣力奉國彰惠靖遠)이라 하였다. 평장사 기철(奇轍)이 왕에게 시(詩)를 올려 치하하였는데, 신(臣)이라 일컫지 않았다.
○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 김영후(金永煦)를 원 나라에 보내어 공신호를 내려 준 것을 사례하였다.
○ 중 보우(普愚)를 내불당(內佛堂)에서 밥먹였다. 보우는 곧 보허(普虛)인데 광주(廣州) 관내의 미원장(迷元莊)에서 살고 있었다. 그가 왕에게 아뢰어 미원을 승격시켜 현(縣)으로 높이고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자기가 호령을 주장하고 감무는 그의 명령대로 일을 처리할 뿐이었다. 전원을 널리 점유하여 목마(牧馬)가 들에 가득했으나 모두 궁중에서 쓰는 말이라고 일컬어서 비록 벼를 해치는 일이 있더라도 사람들이 감히 쫓지 못하였다.
○ 3월에 왕과 공주가 대비를 모시고 봉은사(奉恩寺)에서 보우(普愚)의 선(禪)에 대한 설법을 듣고, 폐물ㆍ은ㆍ바리때ㆍ수 놓은 가사 등을 시주하였는데, 그것이 산더미처럼 많이 쌓였다. 구경하고자 하는 남녀들이 물결처럼 밀어닥쳐 오히려 구경에 미치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 손용(孫湧)을 감찰대부로 삼으니, 이는 원 나라 태사(太師) 왕가노(汪家奴)의 청에 의한 것이었다.
○ 우리 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가 와서 조회하였더니, 왕이 말하기를, “완민(頑民)들을 어루만져서 다스리느라고 수고롭지 않은가" 하였다. 이때 기씨(奇氏) 일족이 황후의 세력을 믿고 횡포하였는데, 어떤 자가 밀고하기를 기철(奇轍)이 쌍성의 반란민과 몰래 통하여 당을 만들고 역모를 꾸민다 하였다. 왕이 환조에게 유시하여 이르기를, “경은 마땅히 돌아가 백성들을 진무하라. 우리 백성들 가운데서 혹 변란이 일어나면 마땅히 나의 명령대로 하라." 하였다.
○ 여름 4월에 왕이 보우를 연경궁(延慶宮)에 청하여 사제의 예를 행하였는데, 그 의위(儀衛)가 노부(鹵簿 왕의 행차)에 비길 만하였다. 또 내전으로 인도하니, 대비와 공주가 기뻐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다과를 권하였으며, 공주는 그에게 유리쟁반과 마류수저등의 물건을 내렸다. 이때 승도 가운데 절의 주지되기를 원하는 자는 모두 보우에게 붙어서 왕에게 청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이제부터는 선(禪)ㆍ교(敎) 종문(宗門)의 절 주지는 스님에게 청하고 주의(注擬)하여 보고하도록 하라. 과인은 다만 제목(除目)을 내릴 따름이다." 하였다. 이에 승도들은 다투어 보우의 문도가 되었다.
○ 5월에 원 나라에서 기완자불화(奇完者不花)를 보내어, 영안왕(榮安王)을 책봉하여 경왕(敬王)으로 삼았다.
○ 왕이 곡연(曲宴)을 베푼다는 구실로 재추(宰樞)들을 불러 모두 대궐에 모이게 하고는, 판밀직(判密直) 홍의(洪義)에게 명하여 태사도(太師徒) 기철(奇轍)과 아들 찬성사 유걸(有傑), 조카 소감(少監) 완자불화(完者不花), 태감(太監) 권겸(權謙)과 아들 만호 항(恒), 사인(舍人) 화상(和尙), 경양부원군(慶陽府院君) 노책(盧)과 아들 행성낭중(行省郎中) 저(渚) 등을 불러오게 하였다. 철(轍), 겸(謙)이 먼저 부름을 받고 왔는데, 밀직(密直) 경천흥(慶千興) 황석기(黃石奇), 판사(判事) 신청(申靑) 등이 몰래 왕에게 아뢰기를, “두 사람은 이미 왔으나 그 나머지 자질(子姪)들과 노책의 부자가 아직 오지 않았는데, 만일 일이 누설되면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르니, 빨리 도모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여, 왕이 옳게 여겨 곧 밀직 강중경(姜仲卿), 대호군 목인길(睦仁吉)ㆍ우달적(?達赤)ㆍ이몽고대(李蒙古大) 등에게 명하여 장사를 매복시켜 두었다가 불의에 기철을 철퇴로 내리치니, 철이 즉시 넘어져 죽었고 권겸은 피하여 달아나는 것을 쫓아가 자문(紫門)에서 죽이니 피가 궁문에 낭자하였다. 철과 겸 두 사람을 죽이자, 기씨ㆍ권씨 휘하의 사람들은 낭패하여 사방으로 흩어지니, 금위(禁衛) 4번(番)의 군사가 일시에 모두 쏟아져 나와 칼날이 길에 가득하였다. 중경(仲卿) 등은 군사를 이끌고 노책의 집에 몰려가서 그를 잡아 죽였다. 유걸ㆍ완자불화ㆍ항ㆍ화상 등 모두 달아나니 경성(京城)에 계엄을 내렸다. 드디어 정지상(鄭之祥)을 석방하여 순군제공(巡軍提控)으로 삼아 궁궐을 시위하도록 하고, 홍언박(洪彦博)을 우정승으로, 윤환(尹桓)을 좌정승으로 삼고, 원호(元顥)를 판삼사사(判三司事)로, 허백(許伯)ㆍ황석기(黃石 奇)를 찬성사로, 전보문(全普門) ㆍ한가귀(韓可貴)를 삼사우좌사(三司右左使)로, 김일봉(金逸逢)ㆍ김용(金鏞)ㆍ인당(印?)을첨의평리(僉議評理)로 삼았다.원호는 유걸의 장인인데 언박(彦博)을 대신해서 권력을 쥐고자 하여, 일찍이 언박이 다른 뜻을 품었다고 참소하더니, 이때에 이르러 또 가귀(可貴)와 면성군(沔城君) 구영검(具榮儉)이 권, 노의 잔당을 쫓아가 잡지 않았다고 참소하였다. 이에 세 사람을 옥에 가두어 대질하게 하였는데, 왕이 평소에 호를 미워하였던 까닭으로 이몽고대(李蒙古大)를 시켜 옥중에서 죽이고, 또 명하여 가귀와 영검을 저자에서 목베게 하였다. 영검의 후처 장(張)씨가 추행 때문에 버림당하였는데, 장씨는 연줄을 타서 왕의 총애를 받게 되어 왕에게 영검을 참소하였기 때문이다. 왕이 조금 뒤에 그 죄없는 것을 알고 뒤쫓아 그의 처형을 중지시켰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영검의 그전 이름은 정(貞)이었다. 이때 가귀 등이 참소를 당해 죽음을 당하니 사람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였다. 또 중외에 명하여 유걸(有傑) 등을 수색하여 잡고, 기ㆍ권ㆍ노 세 집의 노비를 의성창(義成倉), 덕천창(德泉倉), 유비창(有備倉) 등의 노비로 삼았다.
○ 정동행중서성의 이문소(理問所)를 폐지하였다.
○ 평리 인당(印?)과 동지밀직 강중경(姜仲卿)을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사윤(司尹) 신순(辛珣), 유홍(兪洪), 전 대호군 최영(崔瑩), 전 부정 최부개(崔夫介)를 부사로 삼아 압록강 이서의 8참(站)을 격파하게 하고, 밀직부사 유인우(柳仁雨)를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전 대호군 공천보(貢天甫), 전 종부령(宗簿令) 김원봉(金元鳳)을 부사로 삼아 쌍성(雙城) 등지의 지방을 수복하도록 하였다. 다음날 인당이 먼저 교외로 출발하였는데, 중경(仲卿)이 술에 취해 뒤늦게 도착하여 술주정을 부리고 인당이 말려도 듣지 않았다. 전정(餞亭)에 이르러?도 그러하였다. 인당이 신순(辛珣)에게 눈짓하여 칼을 뽑아 베고는, 왕에게 보고하기를, “중경이 두 마음을 품었기에 군법에 따라 처단하였습니다." 하였다. 국가에서는 그 까닭을 알지 못하니 물의가 분분하였다.
○ 교지를 내려 이르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께서 창업 수통(創業垂統)하여 관을 설치하고 법을 세워, 상하가 서로 보존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우리 충헌왕(忠憲王)이 진심으로 원조(元朝)에 귀복하였을 때에는 세조(世祖)황제가 우리 고려의 옛 풍속을 고치지 않기를 허락하여 위로하고 구휼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또한 직공을 성실이 닦아서 일찍이 신하로서의 도리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이제 기철ㆍ노책ㆍ권겸 등이 원 나라에서 우리를 구휼한 뜻과, 선왕(先王)께서 창업 수통하신 법을 생각하지 않고, 세력을 믿고 임금을 업신여기며 권력을 함부로 행사하여 백성을 한없이 해쳤다. 나는 그들이 원 나라 황실과 혼인 관계가 있다고 해서 그들의 말을 한결같이 모두 따라주었는데, 그들은 오히려 부족하여 몰래 반역을 도모하고 사직을 위태롭게 하였다. 다행히 천지와 조종의 영령에 힘입어 기철 등은 이미 처단되었다. 흉한 무리들 가운데 도망간 자와 기유걸(奇有傑)ㆍ완자불화(完者不花)ㆍ노저(盧渚)ㆍ권항(權恒)ㆍ화상(和尙) 등은 그 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데, 한가귀(韓可貴)와 구정(具貞) 등이 명을 따르지 않고 고의로 배반자들을 놓아주었다. 그러므로 이들을 모두 법대로 처치하였노라. 배반자들을 잡아서 고하는 자가 있으면 배반자의 가재로써 공을 헤아려 상주는 데 충당하리라. 그 밖에 나머지 사람들의 범행에 대하여는 이를 일체 면제하여 주라. 기철 등이 빼앗아 가진 인구와 토지에 대하여는, 빼앗긴 사람에게 고발하는 것을 허락하여 각각 원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하리라." 하였다. 조금 뒤에 유걸, 완자불화, 기저, 화상을 잡아 목베었는데, 권항은 평소에 권세가에 붙지 않았다. 죽음을 면하고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기철의 아내 김씨(金氏)가 머리를 깎고 어린 자식 새인(賽人)을 데리고 도망하였다가, 잡히어 순군옥에 갇혔는데, 새인은 얼마 후에 죽었다. 그들의 당인 금녕군(金寧君) 김보(金普), 밀직부사(密直副使) 이야선첩목아(李也先帖木兒), 행성원외(行省員外) 조만통(趙萬通), 동첨(同僉) 홍익(洪翊), 찬성사 황하연(黃河衍), 평리 이수산(李壽山), 밀직(密直) 왕중귀(王重貴), 대언 황하안(黃河晏), 호군(護軍) 황하식(黃河湜), 전 대언 홍개도(洪開道)를 유배하고, 전 밀직 임군보(任君輔) 등 수인에게 곤장을 때렸는데, 익(翊)과 하연(河衍)에게는 조금 뒤에 죽음을 내렸다.
○ 6월에 인당(印?)이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에 이르러 파사부(婆娑府) 등의 3참(站)을 격파하였다.
○ 쌍성(雙城 함북 영흥(永興)) 사람 조도적(趙都赤)이 내조하니, 그에게 금패(金牌)와 고려쌍성 지면관군 천호(高麗雙城地面管軍千戶)를 내렸다.
○ 원 나라의 사신 직성사인(直省舍人)이 기철(奇轍)에게 태사도(太司徒)를 삼는 선명(宣命)과 인장을 가지고 왔는데, 서북면 병마부사 신순(辛珣)이 도중에서 그를 만나 선명과 인장을 빼앗고, 사인(舍人)을 가두고는 그의 하인 3명을 죽였는데 사인은 밤중에 도망하였다.
○ 왕이 전 호군 임중보(林仲甫)가 석기(釋器 충혜왕 서자)를 추대하여 몰래 역모를 꾸민다는 말을 듣고, 곧 붙들어 순군옥에 가두고 문초하였더니, 그의 자백으로 전 정승 손수경(孫守卿), 전 밀직 홍준(洪峻), 감찰대부 손용(孫湧)ㆍ황숙경(黃淑卿), 전교령(典校令) 정세공(鄭世功), 전 판사 김성(金成)ㆍ홍계(洪桂) 등 10여 명이 연좌되어서 그들을 모두 체포하여 옥에 가두었다. 옥관(獄官)이 중보(仲甫)에게 힐문하기를, “네가 손용을 아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모릅니다." 하자, 손용을 석방하였다. 수경, 계(桂), 중보(仲甫), 성(成)을 목베고, 석기는 지방으로 추방하며, 찬성사 강윤충(康允忠)을 폄직하여 동래현령(東萊縣令)으로 삼고, 한양윤(漢陽尹) 홍중원(洪仲元)과 정세공(鄭世功), 설기종(薛起宗), 강찬(姜贊), 장만(張萬), 임주운(林朱雲) 등에게 곤장을 때렸는데, 수경에게 붙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 사령(赦令)을 내려 이르기를, “기철 등이 임금을 능가하는 위세를 빙자하여 나라의 법도를 흔들고, 관리의 임명은 그들의 희노(喜怒)에 좌우되며, 정령은 그들로 말미암아 이리저리 마음대로 신축이 되었고, 남이 토지를 가지고 있으면 빼앗았으며, 남이 노비를 가지고 있어도 빼앗았다. 다행히 조종의 영(靈)에 힘입어 반역 무리인 철(轍)ㆍ책() 등과, 간악하고 부정한 무리인 수경 등은 나라의 떳떳한 법대로 처단되었으니, 협박을 받아 그들에게 따른자는 다스리지 않겠노라. 이제부터는 법령을 밝히고 기강을 정돈하여 온 나라 사람이 함께 모두가 새로이 출발할 것을 기약하노라." 하였다. 드디어 원 나라의 연호인 지정(至正)을 쓰지 않기로 하였다.
○ 가을 7월에 옛 관제를 회복하여, 홍언박(洪彦博)을 문하시중으로, 윤환(尹桓)을 수문하시중으로, 유탁(柳濯)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 평장사로, 허백(許伯)을 중서시랑 동중서문하 평장사로, 황석기(黃石奇)를 문하평장사로, 김용(金鏞)을 중서평장사로, 김일봉(金逸逢)ㆍ인당(印?)을 참지정사로, 전보문(全普門)ㆍ정인(鄭?)을 수사공 좌우복야로, 경천흥(慶千興)을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로, 최인원(崔仁遠)을 추밀원사로, 안우(安祐)를 지추밀원사로, 배천경(裵天慶)ㆍ황상(黃裳)을 동지추밀원사로, 유인우(柳仁雨)ㆍ이춘부(李春富)를 추밀원부사로, 김희조(金希祖)를 첨서추밀원사로, 유숙(柳淑)을 추밀원학사(樞密院學士)로 삼았다.
○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 유인우(柳仁雨) 등이 쌍성에서 2백여 리 떨어진 등주(登州)에 이르러 10여 일이나 머물렀다. 이때 쌍성총관(雙城摠管) 조소생(趙小生)과 천호(千戶) 탁도경(卓都卿) 등이 용진(龍津) 사람 조돈(趙暾)을 불러 그와 모의하여 항거하고자 하였으나, 돈은 듣지 않고 평소부터 친한 협객 조도적(趙都赤)에게 말하기를, “이제 조소생과 탁도경 두 놈이 감히 나라의 명을 거역하는 것은 네가 그들의 심복이 되었기 때문이다. 너는 본래 고려 사람으로서 너의 조상과 나의 조상이 모두 한양(漢陽)에서 왔는데, 이제 본국을 배반하고 반역자를 따르다니 무슨 심보인가." 하였다. 도적이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숙부께서 나를 살려주셨습니다. 공은 먼저 가시오. 나는 뒤따르겠습니다." 하고 조돈은 하룻 밤에 2백 리를 달려 인우의 군영으로 나아가 말하기를, “두 놈이 세가 궁해져서 북으로 달아나려고 합니다. 쌍성 사람들은 모두 산곡으로 달아나 숨어 있는데, 이제 대군이 갑자기 몰려가면, 반드시 놀래어 내려오지 않아 청야(淸野)하여 먹을 것이 없을 것이니, 공을 위해 계책을 내건대, 나의 큰아들 인벽(仁璧)을 보내어 먼저 그들을 산곡에서 불러 모으도록 하는 것보다 좋은 계책이 없습니다." 하니, 인우가 그렇게 여겼다. 곧 인벽을 시켜 쌍성을 돌며 그들을 귀순시키도록 하니, 쌍성 사람들이 그가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기뻐하면서 서로들 말하기를, “조별장(趙別將)이 왔으니, 우리들도 다시 살아났다." 하고는, 서로 이끌고 내려와 항복하여 관군을 호궤(?饋)하여 맞이하면서, “고려왕은 참다운 우리의 임금이다." 하였다. 이전에 왕이, 인우(仁雨)가 지체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우리 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에게 소부윤(少府尹)을 제수하고, 병마 판관 정신계(丁臣桂)를 보내어 환조에게 타일러 내응(內應)하도록 하였다. 환조는 명을 듣고 곧 군사들에게 하무를 입에 물리고 가서 인우의 군사와 합세하였다. 인우 등은 진군하여 쌍성총관부를 격파하였다. 조소생(趙小生)과 탁도경(卓都卿)은 처자를 버리고 이판령(伊板嶺) 북쪽의 입석(立石) 땅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이에 지도에 의거하여 화주(和州 함남 영흥(永興))ㆍ등주(登州 함남 안변(安邊))ㆍ정주(定州 함남 정평(定平))장주(長州) 함남 정평(定平) 장곡(長谷)ㆍ예주(預州 함남 정평(定平) 예원(預原))ㆍ고주(高州 함남 고원(高原))ㆍ문주(文州 함남 문천(文川))ㆍ의주(宜州 함남 덕원(德源))와 선덕(宣德 함남 정평(定平)ㆍ(선덕(宣德))ㆍ원흥(元興 함남 정평(定平))ㆍ영인(寧仁)ㆍ요덕(耀德)ㆍ정변(靜邊 함남 영흥(永興)) 등 진(鎭)의 제성(諸城)을 수복하였다. 대개 함주(咸州 함북 함흥(咸興)) 이북 합란(哈?)ㆍ홍헌(洪獻 함남 홍원(洪原))ㆍ삼살(三撒 함남 북청(北靑))은 본래 우리나라의 영토였는데, 고종(高宗) 무오년에 원 나라에 함몰되었다가 무려 99년 만에 수복한 것이다.
○ 원 나라에서 중서성 단사관(中書省斷事官) 살적한(撒迪罕)을 보내어 내린 조서에, “고려는 우리 세조(世祖)께서 천하를 통일한 처음부터 천명(天命)을 밝게 알고, 온 나라를 들어 신하로 복종하였으며, 이에 혼인을 맺은 지 백 년이나 되었다. 그런데 근자에는 간악한 백성이 변경에 사단을 일으켜 우리 국경을 넘어 들어오고, 우리 백성들을 시끄럽게 만들며, 우리 역사(驛舍)를 불태우고 우리 행인(行人)을 방해하니, 이것은 법에 의거하여 보건대, 토벌하고 도륙한다고해도 이상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오히려 염려되는 것은 하찮은 도적의 무리가 혹은 너희 나라에서 죄를 얻고 도망와서 도당을 불러 모은 것이거나, 혹은 다른 나라에서 너의 백성이라고 거짓 일컫고 무력을 도용(盜用)하여 대대로 지켜온 우호 관계에 금이 가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만일 사실과 거짓을 살펴 묻지 않고 대병이 한번 움직여 너의 나라에 임한다면 옥석이 함께 타게 될 것이니, 이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너는 의심하거나 두 마음을 갖지 말고, 너의 군사를 내어 기회를 보아 귀순시키거나 잡도록 하며, 혹은 우리 중국 군사와 약속을 하여 힘을 합해서 양쪽에서 협공하여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평안하게 하여야 할 것이고, 길이 전일의 우호 관계를 두텁게 하여 모두 갖추어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 서북면 병마사 인당(印?)을 목베어 살적한 편에 보내며 표문을 올려 아뢰기를,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소방은 멀리 극동(極東)에 있어 수(隋)ㆍ당(唐)이 융성할 적에도 기미(羈?)하였을 뿐이었는데, 세조께서 용흥(龍興)할 때에 소방이 천명을 밝게 알아 제일 먼저 귀부하여 대대로 조그마한 공로를 나타내었으므로 동방으로 옮겨 내려주는 황제의 은택은 날로 새롭고 달로 성대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불의에 적신 기철(奇轍)이 노책(盧)ㆍ권겸(權謙)과 반역을 음모하여 우리의 화가 되었습니다. 간절히 살피건대 기철(奇轍) 등은 액정(掖庭)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하여 위엄을 대조에서 빌려, 기염이 하늘에 치솟고 제 나라의 임금을 협박 견제하며, 남이 노비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빼앗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하였고, 남이 토지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빼앗지 않고서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신은 천조를 두려워하여 한결같이 감히 따지지 못하는데, 일반 백성들이야 어찌 그 원망을 표현할 수 있었겠습니까. 기철 등은 죄가 가득차고 악이 쌓여 남에게 용남될 수 없음을 스스로 알고, 또 망녕되이 생각하기를, 천하가 시끄럽고 어지러워 전쟁이 바야흐로 치열한데, 일조에 세력이 없어지면 몸을 능히 보전할 수 없을 것이라 하며, 이에 스스로 편안할 방책을 도모하고 그 권세를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중외의 관사(官司)에 모두 저의 친당을 배치해 놓으니, 요직에는 그들의 심복이 아닌 자가 없으며, 제멋대로 병기를 만들고 활쏘기와 말달리기를 공공연히 익히면서 조금도 숨김이 없었습니다. 유언을 선동하여 뭇사람을 현혹시키고 어지럽혔습니다. 금년 5월 18일에는 무뢰배를 소집하여 일시에 모두 일어나서 배에 무기를 가득 싣고 이미 강 어귀까지 이르렀으며, 또 몇 사람을 시켜 천사(天使)라 사칭하고 조지(詔旨)가 있다고 거짓으로 일컬어, 궁문에 들어닥쳐, 우리 군신을 섬멸하여 저들의 욕망을 마음껏 채우고자 하였습니다. 나라의 안위와 사생의 급박함이 머리카락 한 올 들어갈 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황제의 덕택으로 조금이나마 변란에 대응하여 적의 무리를 잡았습니다마는 다른 변이 있을까 두려워 보고할 틈도 없이 모두 법에 의하여 처단해 버렸으니, 참으로 황공하여 몸둘 곳이 없습니다. 또 변방의 백성들이 틈을 타서 망동하거나, 혹은 간인들이 왕래하면서 우리의 실정을 잘못 전할까 염려한 까닭으로, 관방(關防)을 두어 출입을 삼가게 하고 있사온대, 그 관원과 군사들이 강을 건너가 위협하고 약탈하는 것은 참으로 본의가 아닙니다. 그 죄인을 찾아내어 이미 국법대로 처단하였사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천지(天地)의 어지심을 넓히시고 뇌정(雷霆)의 노여움을 거두어 주옵소서." 하였다.
○ 8월에 채하중(蔡河中)을 순천(順天)으로 유배시키고, 인승단(印承旦)을 보안(保安)으로 유배시키며, 정인(鄭?)을 청주목사(淸州牧使)로 폄직시켰다.
○ 9월에 염제신(廉悌臣)을 서북면 도원수(西北面都元帥)로, 김지순(金之順)ㆍ유연(柳淵) 등을 부원수로 삼아 차등있게 초구(貂?)와 금대(金帶)를 내리고, 도끼[鉞]를 주어 보내었다.
○ 도당(都堂)에서 백사(百司)에 영을 내려 화폐 제도에 관하여 의논하게 하였더니, 간관이 건의하기를, “우리나라에서는 근고에 쇄은(碎銀)으로 은병(銀甁)의 중량(重量)을 표준하여 화폐로 삼았고, 오승포(五升布)를 보조 화폐로서 사용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그 제도가 오래되어 폐단이 없을 수 없으니, 은병은 날로 변하여 동(銅)으로 바뀌기에 이르렀고, 베는 날로 거칠어져서 베라고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의논하는 자들은 은병을 다시 사용하도록 하고자 하나, 어리석은 저희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은병 하나는 무게가 한 근(斤)이요, 가치는 배 1백여 필에 해당하는데, 지금 민가에 한 필의 베를 가지고 있는 집도 오히려 적으니, 만일 은병을 사용한다면 백성들은 무엇으로 무역할 수 있을까요. 혹자는 의논하기를, '마땅히 동전(銅錢)을 사용하여야 한다.' 하지만, 나라의 풍속이 오랫동안 동전을 쓰지 않았는데, 일조에 갑자기 영을 내려 그것을 사용하도록 한다면 백성들이 반드시 비방할 것입니다. 또 혹자는 말하기를, '마땅히 쇄은을 사용하여야 한다.' 하지만, 민간에 흩어져 있어서 표지가 없게 되면 화폐의 권한이 위에 있지 않게 되오니, 또한 불편하게 됩니다. 이제 은 한 냥은 값어치가 베 8필(匹)에 해당하오니, 마땅히 관(官)으로 하여금 은전을 수조하게 하고 은전에다 표지를 하여 그 냥수의 가볍고 무거움에 따라 비단이나 곡식의 많고 적음에 준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은병에 비하면 주조하기가 쉽고, 힘이 적게 드는 장점이 있으며, 동전에 비하면 운반하기에 가볍고 이익을 취함이 많아, 관민(官民)이나 군사들이 모두 편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릇 은(銀)을 생산하는 지역은 그곳에 사는 백성들의 부역을 면제하고 은을 채취하게 하여 관에 납품하도록 하고,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은그릇은 모두 관에 납입하도록 해서 은전을 주조하여 주며, 아울러 오승포를 보조 화폐로서 병용하게 한다면 공사간에 편리할 것입니다." 하였다.
○ 천호(千戶) 정신계(丁臣桂)가 군사를 거느리고 이판령(伊板嶺 마천령(摩天嶺))을 지나다가 여진의 군대와 싸웠다. 우리 군사가 크게 승리하여 적의 목을 벤 것이 매우 많았고, 그 괴수 첩목아(帖木兒)를 포로로 잡아 목을 서울에 전하였다.
○ 왕이 구정(毬庭 격구하는 마당)에서 군대를 사열하였다.
○ 우리 환조(桓祖)를 태중대부 사복경(大中大夫司僕卿)으로 삼고 집 한 채를 하사하였다.
○ 겨울 10월에 원 나라에서 다시 살적한(撒迪罕) 등을 보내어 조서를 내리기를, “옛날에 우리 세조(世祖)께서 천하를 통일할 때 너희 고려국은 솔선해서 성심으로 순종하여 나라를 세워 동번(東蕃)이 되어서는 혼인을 제실(帝室)에 청하니 황제도 그것을 허락하고 따랐다. 그렇게 한 지도 이제 백 년이 되어 가고 있으며, 우리가 주는 것과 너희가 바치는 것이 서로 잇달아 이간질하는 말이 없었더니, 올 여름에 너희 나라의 유병(遊兵)이 우리의 강역에 들어와 우리의 역사를 파괴하여 변경의 백성들이 편안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사신을 보내어 그 사유를 고하게 하였더니, 사신이 돌아올 때 그 편에 표문[表]을 올려 상세히 보고해 오기를, '근자에 변경에서 틈을 타서 침노한 무리들은 이미 그 죄를 처단하였다.' 하고 또 말하기를, '사단이 창졸간에 생겼기 때문에 뜻이 난을 평정하는 데만 있어서 품명(稟命)하기에 미치지 못하였다.' 하였다. 그 사이의 변란에 대응한 상황은 중서성(中書省)에서 모두 짐에게 보고하여 왔었다. 짐이 그 사정을 살피고, 우리 조종에 아랫나라를 기특히 여기신 은혜와 너희 선조들의 의(義)를 사모한 정성을 생각한다면, 어찌 한 가지의 과실로 문득 이어온 큰 덕을 더럽힐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극히 공정한 법으로 따지자면, 네가 처음에 주모자를 잡았을 때 죄목을 갖추어 보고하여 왔더라면, 선(善)을 선으로, 악(惡)을 악으로 처리하여 짐이 천하에 드러내어 처치하였을 것이니, 어찌 사사로운 정에 따라서 큰 법도를 문란하게 하였겠는가.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 진달할 틈이 없었다고 한다면 사건이 평정된 뒤에 어찌 먼저 아뢰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이다. 하물며 능히 죄를 뉘우치고 진정하는 데 있어서랴. 이에 너그러이 용서하여 특히 너의 허물을 풀어주나니, 지금부터는 삼가고 조심하며, 떳떳한 법을 따르고 순종하여 짐의 명령을 어기지 말지어다." 하였다.
○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인복(李仁復)을 원 나라에 보내어 표문을 올려 사례하고 또 글을 올려 아뢰기를, “그윽히 생각하옵건대, 세조황제께서 동쪽을 정벌하실 때에 우리 국왕으로 하여금 원 나라의 승상(丞相)으로 삼고, 행성(行省)의 관리들을 국왕에게 위임하여 보증 천거하도록 하시어, 일반의 예와는 달리한 것이 다른 행성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계속해서 도진무사(都鎭撫司)ㆍ이문소(理問所)ㆍ유학제거사(儒學提擧司)ㆍ의학제거사(醫學提擧司)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행성의 관리들이 모두 궁인(宮人)이나 환관(宦官)과 결탁하여 관직에 외람되이 앉아서 멋대로 상벌을 내립니다. 조그만 우리나라에
감찰사(監察司)와 전법사(典法司)가 있어서 형벌을 관장하고 소송을 청취하여 이치에 어긋남을 규명하며 바로잡는데, 행성의 관리들이 사람들의 거짓호소를 듣고는 감찰과 전법의 제사(諸司)에서 판결한 문권을 빼앗아 가서 옳은 것을 그르다고 하는데, 아무도 무어라 따지지 못하고 사람들이 이리나 호랑이처럼 그들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이제 행성의 관리들이 역적과 함께 모의를 한 자가 있음에랴. 원하옵건대, 지금부터는 그 좌우사관(左右司官)은 신이 보증 천거하여 전의 폐단을 다시 밟지 않도록 하시옵고, 이문소 등의 관사(官司)는 일체 폐지하여 주옵소서.
세조황제께서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하실 때에 설치하신 것은 만호ㆍ중군ㆍ우군ㆍ좌군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순군(巡軍)을 증설하여, 합포(合浦)ㆍ전라ㆍ탐라ㆍ서경 등의 만호부(萬戶府)에는 모두 거느리는 군사도 없이 금부(金符)만을 차고서, 선명(宣命)을 뽐내고 평민을 꾀어 모아 호계(戶計)라 명칭을 붙이어 현관(縣官)이 그들을 발징하지 못하게 하니 매우 불편합니다. 세조황제의 옛 제도에 삼가 의거하여 일본을 진수(鎭守)하는 3만 호부를 제외하고는 그 나머지의 증설한 5만 호부ㆍ도진무사(都鎭撫司)는 모두 폐지하여 주옵소서.
조정의 사신(使臣)과 부(府)ㆍ시(寺)ㆍ원(院)ㆍ감(監)ㆍ사(司)에서 보내 오는 관원들은 대부분 우리나라 출신 사람들이온데, 천자의 덕의를 선포하는 데는 힘쓰지 않고 제 고향에서 으스댈 것만을 구하여 상벌을 마음대로 내리고 은혜와 원수를 꼭 갚고, 재상에게 굴욕을 가하고 나라의 임금을 업신여겨 침범하며, 해가 바뀌어도 돌아가지 않으면서 처첩을 더 얻고 하여 그들이 행하지 않은 악(惡)이 없습니다. 금강산(金剛山)의 여러 절에는 해마다 두 번 향(香)을 내리는데,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고 일을 만드니, 이는 도리어 폐하께서 복을 구하시는 뜻과 어긋납니다. 폐지하심이 좋을 줄로 압니다. 쌍성(雙城)과 삼살(三撒 북청(北靑))은 원래 우리 나라의 경계 안에 들었는데, 선신(先臣) 충헌왕(忠憲王) 때에 조휘(趙暉)와 탁청(卓靑) 등이 죄를 범하고 벌받을 것이 두려워, 여진 족을 불러들여 뜻하지 않은 틈을 타서 우리의 관리를 살육하고, 남녀의 백성들을 얽어 묶어 모두 노비로 만들었으니, 부로들이 지금까지 이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눈물을 흘리고 그들을 지목하여 피맺힌 원수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역신 기철(奇轍)ㆍ노책(盧)ㆍ권겸(權謙) 등은 그곳의 추장과 친교를 맺고 결탁하여, 죄를 짓고 도망한 자들을 소집하며 그들이 역모를 꾸밀 때에 이르러 성원(聲援)하여 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철(奇轍) 등이 죽은 뒤에는 그 도당들이 많이 그쪽으로 달아났습니다. 그런 까닭에 영을 내려 수색하도록 하였더니, 그들은 도리어 군사를 동원하여 반역자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부득이 군사를 동원하여 친 것입니다. 총관(總管) 조소생(趙小生)과 천호(千戶) 탁도경(卓都卿)은 지금 달아나 숨어 있는데, 그들이 사단을 일으키고 틈을 생기게 할까 두렵습니다. 공손히 생각하옵건대, 조정은 해내와 해외가 왕토(王土) 아님이 없사온데, 척촌(尺寸)의 불모(不毛)의 땅을 어찌 네것 내것 가리겠습니까. 비옵건대 우리의 옛 강토인 쌍성과 삼살 이북을 돌려주셔서 관방(關防)을 세우도록 허락하여 주옵소서.
조왕(祖王) 이래로 서얼의 자식은 반드시 중이 되게 하였으니, 그것은 적서의 구분을 분명히 하여 왕위를 엿보는 싹을 막는 소이이옵니다. 그런데 지금 탑사첩목아(塔思帖木兒)라는 자가 있는데, 스스로 일컫기를 충선왕(忠宣王)의 서자라 하고 일찍이 머리를 깎았는데, 자라면서 환속하여 경사(京師)로 달아나, 그곳에서 우리 나라의 불량배를 불러모아 거짓말로 선동하고 인심을 현혹하니, 이와 같은 자는 조정에 있어서 어찌 조금의 이익인들 있겠습니까. 이 사람과 그 도당을 우리나라로 돌려보내 주었으면 하옵니다." 하였다.
○ 제주의 가을치(加乙赤)ㆍ 홀고탁(忽古托) 등이 반란을 일으켜 도순문사(都巡問使) 윤시우(尹時遇), 목사(牧使) 장천년(張天年), 판관(判官) 이양길(李陽吉)을 죽였다.
○ 추밀원사(樞密院使) 김희조(金希祖)를 원 나라에 보내어 태자(太子)의 천추절(千秋節)을 하례하게 하였다.
○ 11월에 홍언박(洪彦博)을 면직하고, 윤환(尹桓)ㆍ허백(許伯)ㆍ유탁(柳濯)을 유배시키며, 이제현(李齊賢)을 문하시중으로, 염제신(廉悌臣)을 수문하시중으로, 경천흥(慶千興)을 참지문하정사(參知門下政事)로, 이천선(李千善)을 참지중서정사로, 이인복(李仁復)을 정당문학 겸 어사대부(政堂文學兼御史大夫)로, 안우(安祐)를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삼았다. 이제현이 사퇴하려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서북면 도원수 수시중(守侍中) 염제신이 글을 올려 사퇴하려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염제신이 글을 올려 군무를 논하여 아뢰기를, “먹는 것은 백성들의 하늘이요, 군사는 농군사이에 감추어야 하니, 군사들이 일이 생기면 무기를 잡고 아무 일도 없으면 둔전을 한다면 군량을 운반하는 수고가 덜어지고 군량이 넉넉할 것입니다. 군대의 강성은 군수 물자의 저축에 달렸는데, 지금 군사를 일으킨 것이 많은 시일이 지났는데도 수송하는 도로는 험하고 멉니다. 만일 그 정강(精强)한 자들을 골라 요해처에 나누어 주둔시키고 그 나머지 병졸은 이동시켜 안주(安州 평남) 등에 나아가 먹고 있다가 정세의 변동을 보아가며 움직이게 한다면, 군량미의 수송에 드는 수고를 덜 수 있고, 또 군사를 양성하는 세력이 확장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변경에 수자리 지키는 법은 적당한 때에 교체하는 제도를 실시하는 것입니다. 이제 군사들이 한참 더운 여름에 북쪽으로 가서 오래도록 머물러 겨울에는 옷과 이불이 없을 것이니, 무엇으로 추위를 막을 것이며, 설사 그들을 몰아다가 화살과 돌이 날아오는 싸움터에 투입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어찌 그 힘을 다 할 수 있겠습니까. 한갓 군사의 수효만 채워 쓸데없이 군량미만 축낼 뿐입니다. 반년으로 일기(一期)의 당번으로 삼아 복무하도록 하옵소서. 또 군대 안에서는 비록 친상(親喪)을 당하더라도 항오(行伍)를 떠날 수 없으니, 사람의 자식된 정리로서 어찌 가히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지금부터는 상을 당한 자는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도록 하는 것을 허락하여 주시고, 대신할 사람이 없으면 날짜를 계산해서 휴가를 주도록 하옵소서. 그러면 백성들이 기뻐할 것이며 효제(孝悌)의 도덕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였다. 제신이 또 사퇴하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12월에 참지정사 이천선(李千善)과 이부상서 이수림(李壽林)을 원 나라에 보내어 신년을 하례하였다.
[주D-001] :
고려사절요 제26권
공민왕 1(恭愍王一)
정유 6년(1357), 원 지정 17년
○ 봄 정월에 왕이 기철(奇轍) 등의 의복과 채백(綵帛)을 양부(兩府)에 하사하였는데, 시중 이제현은 공이 없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 왕이 보우(普愚)를 내전에 맞이하여 황금 50냥과 금선(金線) 한 필을 하사하였다.
○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가서 태조(太祖)의 진전에 배알하고 한양(漢陽)으로 도읍을 옮기는 것의 동(動)과 정(靜)을 점쳤다. 왕이 옥을 더듬어 정(靜) 자(字)를 얻었는데, 다시 이제현에게 명하여 점치게 하였더니, 곧 동(動) 자를 얻었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경이 정결히 재계하여 길한 점을 얻어, 참으로 나의 마음에 부응하였도다." 하였다.
○ 명을 내려 중외(中外)의 학교를 수리하였다.
○ 사면령을 내렸다.
○ 2월에 이제현에게 명하여 한양에 궁궐터를 보고 궁궐을 축조하게 하였다. 개성윤을 치사한 윤택(尹澤)이 아뢰기를, “묘청(妙淸)이 인묘(仁廟)를 현혹하여 나라를 전복시킬 뻔하였던 것이 먼 옛날의 일도 아니요, 하물며 지금은 사방에 근심이 있어 군사를 훈련하고 길러도 오히려 힘이 부족할까 염려되는데, 공사를 일으켜 백성들을 괴롭힌다면 나라의 근본을 손상시킬까 두렵습니다.
○ 언양부원군(彦陽府院君) 김경직(金敬直)을 서북면 도원수(西北面都元帥)로 삼았다.
○ 여름 4월에 염흥방(廉興邦)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5월에 이제현이 치사하였다.
○ 왜적이 교동(喬桐)에 침노하였다.
○ 무일편(無逸篇)을 필사하도록 명하여 그것을 재상들에게 내리고 윤택에게 명하여 강의하도록 했다. 윤택(尹澤)은,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보좌하는 노고를 진술하고 곧 말하기를, “전하께서도 성왕이 능히 주공의 교훈을 들은 것을 본받으셔서 공손하시고 자신을 억제하여 겸손하시고 두려워하시면 사직(社稷)의 복이 됩니다." 하니, 왕이 얼굴빛을 고쳤다. 뒤에 윤택이《대학연의(大學衍義)》와 우리나라의 최승로(崔承老)가 성종(成宗)에게 올린 글을 가지고 강의하기를 청하였는데, 이때 왕은 불교를 깊이 신앙하여 초연히 세상 밖에서 노닐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윤택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위로는 종묘(宗廟)를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보존하시는데, 어찌하여 필부가 중이 되어 윤리를 끊어버리는 일을 본받으려 하십니까. 만일 신의 말을 듣고자 하신다면, 공자(孔子)의 도(道)가 아니면 안 됩니다. 이점에 유의하옵소서." 하였다. 왕의 측근 신하 가운데 향악(鄕樂)을 원 나라에 바치자고 논의하는 자가 있었다. 윤택은 상소하여 아뢰기를, “세조황제께서 일찍이 이것을 물리치셨는데, 그것을 이제 다시 바친다면 조소거리가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하였고, 또 절약을 진언하니, 왕이 그 말을 깊이 받아들였다.
○ 6월 1일 갑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 중 달선(達禪)이 채하중(蔡河中)의 귀양살이하는 곳에서 와서 전찬(全贊)을 방문하여 말하기를, “채 정승이 공과 함께 대사를 도모하고자 합니다." 하였는데, 말이 누설되어 달선을 순군옥에 가두고 신문하였다. 전찬(全贊)은 달아나고 하중은 체포되었다. 이인복(李仁復) 등에게 명하여 그를 국문하였는데 수십일 동안 고문을 거듭하니 하중은 죄도 없이 허위 자백하고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그리하여 나라에서는 거리에 끌어다 목을 베었다. 인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그 사람이 죄없는 것을 알고서도 능히 그것을 변명하여 밝혀 주지 못하고 옥사(獄事)가 이루어��으니, 나는 아마도 자손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달이 지나서 전찬을 잡아 목베었다.
○ 가을 7월에 문하시중으로 치사한 이능간(李凌幹)이 졸하였다. 충선왕(忠宣王)이 일찍이 자신이 가까이 했던 두 여자를 능간과 백문거(白文擧)에게 주었는데, 능간은 그 여자를 별실(別室)에 두고 감히 범하지 않았다. 또 충선왕을 따라 원 나라에 있을 때에는 반전별감(盤纏別監)이 되었는데, 함께 일을 보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치부하였는데 능간만은 홀로 청빈하므로 스스로 가다듬어, 겨울 동안에도 해진 적삼과 홑바지를 입으면서 사사로이 일전도 쓰지 않았다. 왕이 토번(吐蕃)으로 귀양가는데 능간이 금을 품에 품고 몰래 역리(驛吏) 편에 부쳐 왕에게 바치니, 왕과 따르는 신하들이 이것에 힘입어 비용이 궁핍하지 않았다. 충선왕이 훙(薨)하여 영구를 받들고 우리나라에 돌아올 때에는 울부짖으며 발섭(跋涉)하여 그 근고(勤苦)함이 대단하였다.
○ 전 평장사(平章事) 허백(許伯)이 졸하였다.
○ 제주(濟州)의 성주(星主)가 와서 말을 바쳤다.
○ 8월에 전우상(全祐祥)ㆍ신귀(辛貴)ㆍ조휘(趙暉)ㆍ조만통(趙萬通)ㆍ홍개도(洪開道)ㆍ이칭(李稱)ㆍ정인(鄭?)ㆍ강찬(康贊)ㆍ홍상재(洪尙載) 등에게 곤장을 때려 귀양보냈는데, 이것은 이들이 채하중(蔡河中) 사건의 공술에서 그와 연루되었기 때문이었다.
○ 김득배(金得培)를 서북면 방어 도지휘사로 삼았다.
○ 대장군(大將軍) 최영(崔瑩)을 동북면 체복사(東北面體覆使)로, 이부상서(吏部尙書) 홍유귀(洪有龜)를 동북면 병마사로 삼았다.
○ 이제현에게 명하여 종묘(宗廟)의 소목(昭穆)의 차서를 정하게 하였다.
○ 9월에 정당문학 안보(安輔)가 졸하였다. 안보는 성품이 강직ㆍ염결하고 치산(治産)에 관심을 두지 않아 그가 죽었을 때에 그 집에는 한 섬의 저축도 없었다.
○ 염철별감(鹽鐵別監)을 각 도에 나누어 파견하였는데, 좌간의(左諫議) 이색(李穡), 기거사인(起居舍人) 전녹생(田祿生), 우사간(右司諫) 이보림(李寶林), 좌사간(左司諫) 정추(鄭樞) 등이 글을 올려 염철별감의 파견은 폐단이 있어 불가하다 하였다. 왕이 재상과 대성(臺省)을 불러 염철(鹽鐵)의 이해를 물었더니, 이색과 이보림은 병이라 일컫고 나아가지 않았으나, 전녹생과 정추는 전일의 의논을 고집하였다. 좌간의 남긍(南兢)은 동료들과 평소에 서로 좋게 지내지 않았는데, 홀로 말하기를, “파견함이 편리하옵니다." 하여 왕이 그 말을 따랐다.
○ 왕이 양부(兩府)의 관원을 불러 말하기를, “듣건대 경들이 모두 매를 기른다고 하니, 그러한가." 하니 시중 염제신이 대답하기를, “신은 평소부터 그것을 좋아하지 않사옵고, 또한 양부에서 그것을 기르는 자가 있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왕이 노하여 말하기를, “이제 사방에서 군사가 일어나고 민생이 몹시 어려운 처지인지라 내가 그것을 매우 민망하게 여기고 있는데, 경들은 어찌하여 나라는 걱정하지 않고 매나 개를 놓아 벼와 곡식을 마구 짓밟도록 하는가." 하였다.
○ 왜적이 승천부(昇天府)의 흥천사(興天寺)에 쳐들어와 충선왕(忠宣王)과 한국공주(韓國公主)의 영정을 가지고 갔다.
○ 윤월에 사천소감(司天少監) 우필흥(于必興)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옥룡기(玉龍記 옥룡자 도선(道詵)의 비결)에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백두산(白頭山)에서 시작하여 지리산(智異山)에서 끝나는데, 그 지세는 오행으로 보아 수(水)를 뿌리로 하고 목(木)을 줄기로 하는 땅이다. 흑(黑)을 부모(父母)로 삼고 청(靑)을 몸으로 삼는다. 만일 풍속(風俗)이 토질에 순응하면 창성하고 역행하면 재앙이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풍속이란, 군신(君臣)과 백성의 의복ㆍ관개(冠蓋)ㆍ악조(樂調)ㆍ예기(禮器)ㆍ집용(什用)이 그것입니다. 이후로는 문무백관은 흑의(黑衣)에 청립(靑笠)을 하고, 승복은 흑건(黑巾)에 대관(大冠)을 하며, 여자는 흑라(黑羅)를 입도록 하소서. 또 모든 산에 소나무를 심어서 빽빽하도록 하고, 그릇은 유동(鍮銅)이나 질그릇을 써서 토풍(土風)에 순응하게 하소서." 하여, 왕이 그 말을 따랐다.
○ 병진일에 지진이 크게 일어서 사령을 내렸다.
○ 상장군 이운목(李云牧), 장군 이몽고대(李蒙古大)를 보내어 왜구를 추격하고 나포하도록 하였는데, 왜적이 교동(喬桐)에 침입하니, 운목 등이 겁을 먹고 나가 싸우지 않기에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
○ 겨울 10월에 간관(諫官) 이색(李穡) 등이 3년상을 행하도록 하자고 청하여 그 말을 따랐다.
○ 판개성부사 손등(孫登)을 원 나라에 보내어 신년을 하례하고, 형부상서 이교(李嶠)를 보내어 태자의 천추절(千秋節)을 하례하였다.
○ 왕이 구정(毬庭)에서 군내를 사열하였다.
○ 동북 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었다.
○ 11월에 추밀원직학사(樞密院直學士) 김득배(金得培)를 서북면 도순문사로, 전 호부상서 김원봉(金元鳳)을 서북면 방어지휘사로 삼았다.
○ 12월에 전선(銓選)의 권한을 이부와 병부에 귀속시켰다.
○ 왕이 이르기를, “사람의 목숨이란 지극히 중한 것이라 한 번 끊기면 다시 이어질 수 없는 것이다. 듣건대 옥관들이 형벌을 자세히 살피지 않아 원통하게 죽은 이가 많다 하니, 지금부터 형벌을 그릇되게 처리하는 자가 있으면 도평의사사와 어사대에서 아뢰어 규명하여 다스리도록 하라." 하였다.
고려사절요 제27권
공민왕 2(恭愍王二)
무술 7년(1358), 원 지정(至正) 18년
○ 봄 정월에 서울 성을 고쳐 쌓으려고 대신들 중에 나이 많은 이들을 찾아 가서 물으니, 시중(侍中)으로 치사한 이제현(李齊賢)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우리 태조께서 사방을 정토(征討)하사, 3국(태봉ㆍ신라ㆍ후백제)을 통일하여 한 나라로 만든 뒤 7년 만에 훙하셨사온데, 그때 전쟁으로 상처 입은 백성들을 시켜 토목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할 일이라 하여 송경(松京)에 성을 쌓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형편 때문에 불가했습니다. 현종(顯宗) 초년에 이르러 거란이 서울을 짓밟고 궁실에 불지르며 파괴하였는데, 당시에 성곽이 견고하였던들 거란이 이토록 쉽게 짓밟고 불지르고 유린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현종 20년에야 비로소 이가도(李可道)에게 명해서 서울에 성곽을 쌓게 하니, 뒤에 금산왕자(金山王子)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서해도(西海道)와 충청도와 사평진(沙平津) 북쪽 등을 침략하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서울에는 들어오지 못하였고, 또 여고차라대(余古車羅大)가 황교(黃橋)에 둔병(屯兵)하였지만 서울에는 들어오지 못하였으니, 이는 성곽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하온즉 당연히 성곽을 고쳐 쌓아야 한다는 것은 지혜 있는 자와 어리석은 자를 가릴 것 없이 모두 알고 있는 일이라 이 논의가 이미 정해졌으니 음양가의 의논에 꺼리는 것이 있더라도, 확고하게 한 번 정한 논의를 변경하지 않아야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 2월에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 원의(元?)가 졸하였다.
○ 염제신(廉悌臣)을 문하시중으로, 황석기(黃石奇)를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로, 김용(金鏞)을 중서시랑 문하평장사로, 전보문(全普門)을 문하평장사로, 김일봉(金逸逢)을 중서평장사로, 경천흥(慶千興)을 지문하정사 상의회의도감사(知門下政事商議會議都監事)로, 이천선(李千善)을 참지문하정사로, 안우(安祐)를 참지중서정사로, 정세운(鄭世雲)을 지문하사로, 유인우(柳仁雨)ㆍ최인원(崔仁遠)을 수사공상서 좌우복야(守司空尙書左右僕射)로, 배천경(裵天慶)을 판추밀원사로, 황상(黃裳)을 추밀원사로, 이춘부(李春富)를 지추밀원사로, 유숙(柳淑)을 동지추밀원사 상의회의도감사(同知樞密院事商議會議都監事)로, 이여경(李餘慶)을 동지추밀원사로, 정휘(鄭暉)ㆍ김원봉(金元鳳)을 추밀원부사로 삼았다.
○ 3월에 왜적이 각산수(角山戍)에 침략하여 배 3백여 척을 불태웠다.
○ 전 첨의평리 강지연(姜之衍)을 원 나라로 보내어 절일(節日)을 축하하게 하였다.
○ 정주부사(定州副使) 주영세(朱永世)와 전라도만호 강중상(姜仲祥)이 제 마음대로 자기 임지를 떠나 왕께 와 뵈니, 왕이 노하여 이르기를, “지금 국가에 난이 많아서, 남쪽에는 홍두적(紅頭賊)의 우환이 있고, 동쪽에는 왜노(倭奴)의 우환이 있어, 바다 연변에 사는 백성들이 평안히 살지 못하는데, 너희들이 어찌 감히 이런단 말이냐." 하고, 옥에 가두었다.
○ 개경의 외성(外城)의 수축을 명하였다.
○ 여름 4월에 전 합포진변사(合浦鎭邊使) 유인우(柳仁雨)가 왜적을 막아 내지 못하였으므로 순군옥에 가두었다.
○ 가뭄이 크게 들어 대사령을 내리고, 왕이 먹는 반찬 수를 줄이며, 음악을 폐하였다.
○ 대장군 최영(崔瑩)을 양광전라도체복사(楊廣全羅道體覆使)로 삼고, 왜적을 막아 내지 못한 자들을 모두 군법으로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 도평의사사에서 왕께 아뢰기를, “요즈음 안렴사와 수령들의 기강이 해이해져서, 여러 고을의 향리들이 제멋대로 욕심을 드러내어 군정(軍丁)을 점검할 때는 부잣집은 제외하고 조세를 거둘 때는 사사로이 큰 말을 쓰며, 병정에 나가야 할 서울 장정을 몰래 데려다가 제 농사를 짓게 하고, 양민들을 모아서 제 집 종을 삼는 등 백성들에게 토색질이 한이 없으니, 마땅히 어사대와 각 도의 안렴사를 시켜서 그 원악(元惡)을 찾아 내어, 죄가 중한 자는 극형에 처하고, 가벼운 자는 매를 때리고 귀양보내게 하소서." 하였더니, 왕이 이 말을 좇았다.
○ 왜적이 한주(韓州 충남 서천(舒川))와 진성(鎭城) 창고를 노략질하므로, 전라도 진변사(全羅道鎭邊使) 고용현(高用賢)이 바닷가에 있는 창고를 내지로 옮기자고 청하니, 왕이 이 말을 좇았다.
○ 동북면(東北面)을 진휼하였다.
○ 왜적이 면주(沔州 충남 당진(唐津))ㆍ용성(龍城 경기 진위(振威))을 침범하였다.
○ 태주(台州 절강성(浙江省)) 방국진(方國珍)이 사람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 조소생(趙小生)ㆍ탁도경(卓都卿)이 도망해서 해양(海陽)을 점령하니, 해양 사람 완자불화(完者不花)가 군사 8백 명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다.
○ 교주ㆍ강릉도(交州江陵道)를 진휼했다.
○ 왜적이 교동을 불사르니, 경성(京城)에 계엄을 내리고, 방리(坊里)의 장정들을 뽑아 군사를 만들었다.
○ 도평의사사가 아뢰기를, “요즈음 왜적의 침입으로 세미를 실은 배가 왕래하지 못하여 백관들의 녹봉을 주지 못하고 있사오니, 이제부터는 백(伯)으로 봉한 모든 사람들 중에 시중(侍中) 벼슬을 지낸 이에게는 재ㆍ추의 녹과(祿科)를 주고, 그 나머지 백에게는 이성 제군(異性諸君)의 예로 주도록 하소서." 하니, 왕이 좇았다.
○ 대장군 조천규(趙天珪)를 원 나라에 보내어 황후의 천추절(千秋節)을 축하하게 하였다.
○ 6월 1일 무진에 일식이 있었다.
○ 참지정사 경천흥(慶千興)을 서경군민 만호부 만호로, 참지정사 안우(安祐)를 안주군민 만호부 만호로, 추밀원부사 정휘(鄭暉)를 삭방도군민 만호부 만호로 삼았다.
○ 가을 7월에 중서평장사로 치사한 김승택(金承澤)이 졸하였다.
○ 강절행성승상(江浙行省丞相) 장사성(張士誠)이 보낸 사신이 와서 침향(沈香)ㆍ산수정(山水精)ㆍ산옥대(山玉帶)와 비단 등의 물건을 바치며 말하기를, “요즈음 중국이 평온하지 못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회동(淮東)에서 분연히 군사를 일으켜 다행히 오(吳)의 땅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으나, 서쪽 도적이 흉악한 짓을 함부로 하여 백성들을 못살게 구니, 소탕할 뜻은 있지만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겠소. 내 들으니, 국왕은 덕이 있어 국내의 백성들이 생업을 즐긴다 하니 내 마음이 위로되오." 하였는데, 이때 사성이 항주(杭州)에 웅거하여 태위(太尉)라 일컬었다. 강절해도 만호(江浙海島萬戶) 정문빈(丁文彬)도 글을 보내고 토산물을 바쳐 왔다.
○ 참지정사 경천흥(慶千興)과 지문하성사 정세운(鄭世雲)과 동지추밀원사 유숙(柳淑) 등이 아뢰기를, “사방에서 난이 일어나 백성들은 만신창이가 되어 굶주리고 있는데, 지금 성을 쌓는다면 백성들이 장차 견디어내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왕이 재ㆍ추와 의논하고 그 역사를 중지하라고 명하였다.
○ 왜적이 검모포(黔毛浦 전북 부안(扶安))에 침입하여 전라도의 세미 실은 배를 불태웠다.
○ 8월에 왜적이 화지량(花之梁 경기 수원(水原))을 불태우고, 인주(仁州 인천(仁川))를 노략질하였다.
○ 이암(李?)을 수문하시중으로 삼았다.
○ 서강(西江 예성강)에 성을 쌓았다.
○ 겨울 10월 정해일에 지진이 있었다.
○ 병부상서 홍사범(洪師範)을 원 나라에 보내어 황태자의 천추절을 축하하게 하였다.
○ 11월에 재변이 있었으므로 사면령을 내렸다.
○ 정원백(定原伯) 균(均)을 원 나라에 보내어 신정을 축하하게 하였다.
○ 12월 1일 을축에 일식이 있었다.
고려사절요 제27권
공민왕 2(恭愍王二)
기해 8년(1359), 원 지정 19년
○ 봄 정월에 황석기(黃石奇)를 파면하고, 이승경(李承慶)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로, 김득배(金得培)를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로 삼았다. 이승경이 일찍이 왕에게 아뢰기를, “신은 이인복(李仁復)을 간사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하니, 왕이, “무슨 말이냐." 하였다. 이승경이, “인복이 평소 배운 것이 세상을 경륜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것인데, 이런 것을 어찌 한 번도 전하께 아뢰지 않는단 말입니까." 하였다.
○ 2월에 홍두군(紅頭軍)이 글을 보내기를, “백성들이 오랫동안 오랑캐에게 함몰된 것을 개탄하여, 의병을 일으켜서 중원을 회복하여, 동으로 제(齊)와 노(魯)를 넘어서고, 서쪽으로는 함진(函秦 함곡관(函谷關)을 넘어 옛 진 나라 지역)으로 나가며, 남으로는 민광(?廣 복건(福建)ㆍ광동(廣東)ㆍ광서지역)을 지나고, 북으로는 유주(幽州)와 연지(燕地)에 도달하니, 마치 배고픈 자가 맛있는 음식을 얻은 듯이 백성들이 기꺼이 와서 붙고, 병든 자가 약을 얻은 듯하다. 이제 여러 장수들에게 군사들을 엄격히 다스리게 하여 조금도 백성들을 침노하지 못하게 해서, 귀화해 오는 백성은 무휼(撫恤)하고, 거역하는 자들은 죄주려 한다." 하였다.
○ 왜적이 장흥부(長興府)와 해남현(海南縣)을 침범하였다.
○ 여름 4월에 강절의 장사성(張士誠), 정문빈(丁文彬)이 보낸 사신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 이제현(李齊賢)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 5월에 왜적이 예성강(禮成江)을 침범하여 옹진현(甕津縣)을 불태웠다.
○ 전라도 추포부사(全羅道追浦副使) 김횡(金?)이 보약도(甫若島 전남 무안(務安))에서 왜적을 쳐 20여 명을 사로잡았다.
○ 6월에 지면주사(知沔州事) 곽중룡(郭仲龍)이 홍주(洪州) 창고를 맡아 보면서 쌀 20석을 도둑질하여 관기와 관노에게 주었으므로, 삭직하여 충군하였다.
○ 가을 7월에 어사대(御史臺)에서 핵계(劾啓)하기를, “황상(黃裳)과 판각문사(判閣門事) 양백연(楊伯淵)이 전 판밀직사 신귀(辛貴)의 아내 강씨(康氏)와 간통하여 풍속을 어지럽혔으니, 파직시키고 금고시키소서." 하니, 왕이 이 말을 따랐다.
○ 연안백(延安伯) 인승단(印承旦)이 졸하였다.
○ 서원백(西原伯) 정오(鄭?)가 졸하였다. 정오는 청주(淸州) 사람인데, 고을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듣고 말하기를, “흉한 놈 하나가 없어졌군." 하였다.
○ 전 찬성사(贊成事) 민사평(閔思平)이 졸하였다.
○ 장사성(張士誠)이 보낸 사신이 와서 비단과 금띠를 바치고, 정문빈(丁文彬)도 토산물(土産物)을 바쳤다.
○ 동북면 병마사 정휘(鄭暉)가 보고하기를, “조소생(趙小生)과 탁도경(卓都卿)이 쳐들어 오려고 하니, 군사를 내어 막게 하소서." 하니, 왕이 예빈경(禮賓卿) 조돈(趙暾)을 보내어 조소생 등에게 타이르기를, “너희들이 귀순해 오면 상을 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으리라." 했다.
○ 강절성평장(江浙省平章) 화니적(火尼赤)이 바람을 만나 황주(黃州) 철화강(鐵和江)에 내박하니, 쌀 1백 석과 저포(苧布) 20필을 하사하였다.
○ 8월에 방국진(方國珍)이 보낸 사신이 방물을 바쳤다.
○ 겨울 11월에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 정휘(鄭暉)가 해동청(海東靑)을 바치니, 왕이 이르기를, “지금 군무가 한창 시작되니 마땅히 검소를 숭상해야 할 것인데, 어찌 이런 진기한 새가 필요하리오." 하고, 놓아 보냈다.
○ 요양(遼陽)과 심양(瀋陽)의 유민 2천 3백여 호가 와서 투항하니, 서북의 고을에 나누어 살게 하고, 관곡으로 양식을 대주었다. 이보다 앞서, 본국 사람 중에도 압록강을 건너가서 사는 자가 있었는데, 난리 때문에 모두 돌아왔다.
○ 홍두적 3천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와서 노략질해 가지고 돌아갔는데, 도지휘사(都指揮使) 김원봉(金元鳳)이 이 일을 숨기고 보고하지 않았다.
○ 경천흥(慶千興)을 서북면 원수(西北面元帥)로, 안우(安祐)를 부원수로 삼았다.
○ 12월에 사람들이 마음대로 비구승, 비구니가 되는 것을 금하였다.
○ 정묘일에 홍두적의 괴수 위평장(僞平章) 모거경(毛居敬)의 4만 명이라고 떠드는 군사들이 얼음을 밟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를 함락시키고, 부사(副使) 주영세(朱永世)와 고을 백성 1천여 명을 죽였다. 또 정주(定州)를 함락시켜 도지휘사(都指揮使) 김원봉(金元鳳)을 죽이고, 인주(麟州)를 함락시켰다.
○ 수문하시중 이암(李?)을 서북면 도원수(西北面都元帥)로, 경천흥(慶千興)을 부원수로, 김득배(金得培)를 도지휘사(都指揮使)로, 이춘부(李春富)를 서경윤(西京尹)으로, 이인임(李仁任)을 서경 존무사(西京存撫使)로 삼았다.
○ 전쟁이 일어났으므로, 홀치(忽赤)ㆍ충용(忠勇)ㆍ삼도감(三都監)ㆍ오군(五軍)에게 3년상을 면해 주었다.
○ 전 찬성사 강윤충(康允忠), 전 대언 홍개도(洪開道), 상장군 손거원(孫巨源)을 죽이니, 당시 의논하는 사람들이 이들을 원통히 여겼다.
○ 을해일에 적이 철주(鐵州 평북 철산(鐵山))에 들어오니, 안우(安祐)가 청강(淸江)에서 맞아 힘써 싸워서 물리쳤으므로, 왕이 안우에게 금띠를 하사하였다. 경천흥(慶千興)은 군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안주(安州)에 나가 둔병하였으나 적을 두려워하여 나가지 못했으므로, 왕이 노하여 군법으로 다스리려 하였다. 이에 홍언박(洪彦博)이 아뢰기를, “경천흥은 공평하고 청렴하며 근신하고 독실하오나, 장수 노릇할 재주는 없사오니, 이것은 그를 쓴 사람의 잘못입니다." 하니, 왕의 노여움이 풀어졌다.
○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김희조(金希祖)를 서해도 도지휘사(西海道都指揮使)로 삼았다. 이때 이암이 서경(西京)에 이르니, 모든 군사가 아직 모이지 않았다. 이암이 이춘부(李春富)와 함께, 서경을 지킬 수 없는 것을 알고 창고를 불사르고 물러가서 요해지를 보전하려 하니, 호부낭중(戶部郎中) 김선치(金先致)가 말하기를, “만일 창고를 불태운다면 양식이 없으므로 적들이 졸지에 나라 안으로 쳐들어올 것이니, 이것은 좋은 계교가 아닙니다." 하니, 이암이 이 말을 좇았다. 이 때문에 창고와 가옥들이 온전하게 되었다. 여러 군사가 퇴군하여 황주(黃州)에 둔을 치니, 서울과 지방의 인심이 흉흉하고,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피난할 계획을 세워서 서로 다투어 쌀을 내다 가벼운 물건과 바꾸었으므로, 전에는 포목 1필에 쌀 2말씩 하던 것이, 이 때에 와서는 곡식 값은 싸지고 물건값은 비싸져서 대포(大布) 한 필에 5, 6말씩 하였다.
○ 여러 사(司)의 이서(吏胥)들을 뽑아 서북면(西北面)에서 싸울 군사로 보충하고, 승선(承宣) 이상에게 각각 말 한 필씩을 내게 하였다. 또 모든 선교(禪敎)의 절의 중과 인마(人馬)를 모아서 군용에 충당하였다.
○ 정해일에 적이 서경(西京)을 함락시켰다.
○ 호부상서 주사충(朱思忠)을 보내어 올이 가는 포목과 말안장과 말굴레와 술과 안주를 적의 장수에게 주고, 그들의 허실을 엿보도록 하였다.
○ 이암은 겁이 많아서 전쟁을 하지 못한다 하여, 평장사 이승경(李承慶)에게 그를 대신해서 모든 군사를 독려하여 전진하게 하고, 전 찬성사 권적(權適)에게 명하여 승병을 거느리고 전장에 나가도록 하였다.
○ 이해에 심하게 흉년이 들었는데, 경상도 진제사(慶尙道賑濟使) 예부시랑(禮部侍郞) 전이도(全以道)가 돌아와 아뢰기를, “감무와 현령은 가장 백성과 가까운 직책이니, 적당한 사람이 아니면 백성들이 기한을 면할 수 없습니다. 선왕께서는 그것을 아셨기 때문에, 과거에 뽑힌 선비들을 모두 감무와 현령의 직책에 썼는데, 지금은 모두 서도(胥徒)에서 뽑아 쓰기 때문에 온갖 방법으로 백성들을 괴롭히니, 장차 농사와 양잠ㆍ길쌈을 장려하고 교화를 닦고 밝히는 일을 어찌 하겠습니까. 신이 의성현(義城縣)을 순시할 때에 옛 둑이 있는 것을 보았으니, 만일 이것을 더 수축하면 심한 가뭄이 들더라도 가히 물을 대서 쓸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현령은 앉아서 보기만 하고 수리하지 않아서 농사의 시기를 놓치게 만들었으므로, 신이 명령을 받들어 곤장을 쳤습니다. 이제부터는 과거에 뽑힌 선비들만을 감무와 현령으로 쓰소서." 하니, 왕도 옳게 여겼으나, 끝내 이 말을 쓰지는 못하였다.
고려사절요 제27권
공민왕 2(恭愍王二)
경자 9년(1360), 원 지정 20년
○ 봄 정월에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정세운(鄭世雲)을 서북면 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로 삼고, 군중에서 공이 있는 자에게 은기(銀器)ㆍ솜ㆍ비단ㆍ의복을 차등 있게 하사했다.
○ 계묘일에 형부상서 김진(金縉)과 환관 김현(金玄)이 수백 기를 거느리고 상원군(祥原郡)에서 사잇길을 따라가서 서경(西京)에서 적을 공격하여, 적 3백여 명을 만나 죽을 각오로 싸워서 1백여 명을 베어 죽였다.
○ 어사대(御史臺)에 명해서 백관을 거느리고 병장(兵仗)ㆍ복종(僕從)ㆍ말안장ㆍ말먹이 ㆍ양식을 갖추고서, 넓은 구정(毬廷)에서 수십 일 동안 수직하고 호위하게 하여 창졸간에도 적을 피하는 방법을 연습하게 했다. 왕은 본래 말타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말에 올라타기를 겁냈는데, 공주와 함께 밤에 후원에 나가서 말타기를 배웠다.
○ 갑진일에 상장군(上將軍) 이방실(李芳實)이 철화(鐵化)에서 적을 만나 1백여 명을 베었다. 병오일에 모든 군사가 생양역(生陽驛)에 모이니 총수가 2만 명이었다. 이때 날씨가 몹시 추워서, 손발이 얼어 터지고 쓰러지는 군사들이 매우 많았다. 적이 우리 군사가 장차 진군하여 공격할 것을 알고 저들이 사로잡았던 의주(義州), 정주(定州), 서경(西京) 사람으로 만 명으로 추산되는 사람을 죽였는데,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정미일에 우리 군사가 서경으로 진격하여 공격하였는데, 보병이 먼저 들어가다가 밟혀 죽은 자가 1천여 명이나 되었고, 적의 군사도 죽은 자가 수천 명이 넘으니, 적이 물러가서 용강(龍岡), 함종(咸從)에 둔을 쳤다.
○ 안우(安祐)를 안주 도만호(安州都萬戶)로, 이방실(李芳實)을 상만호로, 김오진(金於珍)을 부만호로 삼았다.
○ 2월 기미일에 안우(安祐) 등이 함종(咸從)으로 진군하였으나, 우리가 아직 진을 정비하지 못한 틈을 타서 적이 돌격해 오니, 우리 군사가 패해 달아났다. 적이 날랜 기병으로 쫓아왔으나, 안우(安祐)ㆍ이방실ㆍ김오진과 대장군 이순(李珣) 등이 군대의 뒤에서 퇴각하면서 막으니 가까이하지 못했다. 이때 마침 동북면 천호(東北面千戶) 정신계(丁臣桂)가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와서 죽기로써 적과 더불어 싸워 수십 명을 베니, 적이 50리를 쫓아오다가 그만두었다. 우리 보병은 산으로 올라가 죽음을 면하였고, 잡혀간 자도 1천여 명이나 되었다.
○ 강양백(江陽伯) 이승로(李承老)를 수안(遂安)ㆍ곡산(谷山) 등지의 축성감독사(築城監督使)로 삼았다.
○ 신유일에 적 4백여 명이 숙주(肅州) 산골짜기에 둔을 치고 있다가, 그의 도당이 서경에서 패했다는 말을 듣고 의주로 돌아갔다. 이때 중랑장 유당(柳塘)과 낭장(郎將) 김경(金景)이 의주에 있으면서 성문을 수축하다가, 적이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주(州)의 천호(千戶) 장륜(張倫)을 불러 용주(龍州) 등지의 지방의 군사를 징발해서 적을 맞아 공격하니, 적이 정주성(靜州城)으로 들어가 성을 지키려 하므로, 유당(柳塘) 등이 진군해가서 모두 쳐서 섬멸하였다.
○ 정당문학 안진(安震)이 졸하였다.
○ 임신일에 우리 군사가 또 함종(咸從)에서 싸우다가,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신부(辛富)와 장군(將軍) 이견(李堅)이 죽었다. 모든 군사가 힘껏 싸워 적병 2만 명을 베고 위원수(僞元帥) 황지선(黃志善)을 사로잡으니, 적이 물러가서 증산현(甑山縣)을 지켰다.
○ 계유일에 이방실이 정병 1천 기를 거느리고 적을 쫓아 연주강(延州江)에 이르렀는데, 안우(安祐)ㆍ김득배(金得培)ㆍ김오진도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잇달아 달려오니, 형세가 궁한 적이 강을 건너다가, 얼음이 꺼져서 빠져죽은 자가 거의 수천 명이나 되었다. 적들이 언덕에 올라 대오를 짓고 다시 항거할 태세를 하니, 우리 대군(大軍)은 궁지에 몰린 도둑이 죽기로 싸울까 두려워하여 군사를 거두고 쫓지 않았는데, 적들은 이날 밤에 도망하였다. 이방실이 새벽에 군사를 일찍 먹이고 적을 쫓았는데, 적의 무리들은 주리고 피곤하여 안주(安州)와 철주(鐵州) 두 고을에는 죽는 시체가 길에 많이 있었다. 이방실이 고선주(古宣州)까지 적을 쫓아가서 수백 명을 베었다. 형세가 궁한 적은 죽기로 싸우고, 이방실 진영은 군사와 말이 피곤하여 군사를 거두고 싸움을 그치니, 남은 적 3백여 명은 하룻낮 하룻밤 만에 의주에 이르러서 압록강을 건너 달아났다. 이방실과 안우 등이 쫓았으나 미치지 못하고 돌아왔다.
○ 생양역(生陽驛)에 있던 도원수(都元帥) 이승경(李承慶)은, 모든 장수들이 힘을 다하여 적을 치지 않았다 하여 항상 분하게 여기고 음식을 먹지 않아 병이 나서 돌아오니, 왕이 여러 재상들에게 이승경을 한없이 칭찬하였다. 이후로 이승경은 병을 칭탁하고 사무를 보지 않았다.
○ 3월에 경천흥ㆍ안우ㆍ김득배가 적을 파한 경과를 전(箋)을 올려 아뢰었다.
○ 을미일에 회군하였다.
○ 기유에 홍두적의 배 70척이 와서 서해도 풍주 벽달포(西海道?州碧達浦)에 정박하였다. 서경(西京) 덕도(德島)와 석도(席島) 등지에 적이 배를 정박하여, 봉주(鳳州)에 들어가 성문을 불태웠다. 적의 배 1백여 척이 안악군(安岳郡)에 들어가 돈과 곡식을 빼앗고 가옥을 불태웠는데, 우리 군사는 그들과 수일 동안 싸우다가 30여 명이 죽었다. 적은 황주(黃州)와 안주(安州)를 침범하였다.
○ 이승경(李承慶)ㆍ경천흥ㆍ안우ㆍ김득배ㆍ이방실에게 공신호를 하사하고, 황지선(黃志善)을 베었다. 호부상서 주사충(朱思忠)을 원 나라에 보내어 적을 평정한 일을 보고하게 하였으나, 요양(遼陽)에 이르자 길이 막혀서 그대로 돌아왔다.
○ 장사성이 보낸 사신이 왔다.
○ 여름 4월에 홍두적이 황주를 침범하니, 목사(牧使) 민후(閔珝)가 적과 싸워 20여 명을 베고, 빼앗은 병기를 바쳤다.
○ 이방실을 풍주(?州)로 보내서 적을 쳐서 30여 명을 베자, 적은 배를 타고 도망갔다.
○ 김백환(金伯環)ㆍ권중화(權仲和)를 보내서 장사성에게 답례하였다.
○ 여러 신하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고, 이방실에게 옥띠와 옥갓끈을 하사하니, 공주가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어찌 이토록 지극한 보배를 아끼지 않으시고 남에게 주시나이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우리 종사가 폐허가 되지 않고 백성들이 어육이 되지 않은 것은 모두 방실의 공로인데, 내 살을 베어서 주더라도 오히려 제대로 보답하는 것이 아닌데, 하물며 이 물건 정도야 어떻겠는가." 하였다.
○ 왕이 서정(西亭)에 나갔다가 어떤 여자가 매우 슬피 우는 소리를 듣고 사람을 시켜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우리 오빠가 전쟁에 나가 죽었는데, 어머니도 그 소식을 듣고 3일 동안 통곡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집이 가난해서 장사를 지낼 수 없으므로 웁니다." 하니, 포목 50필을 하사하였다.
○ 왜적이 사주 각산(泗州角山)을 침범하였다.
○ 북방을 정벌한 장사들에게 음식을 후히 대접하였다.
○ 교서를 내리기를, “지금 백성들이 전쟁에 시달리고 주림에 괴로워하고 있으니 심히 민망하도다. 오랫동안 옥중에 있는 죄수 중에 혹시 억울한 자가 있으면 화기를 상할 것이니, 2등죄 이하는 사하고, 각 도의 염세(鹽稅)를 면제하라." 하였다.
○ 왕이 오랫동안 가문다 하여, 식사를 하루에 한 끼만 하였다.
○ 5월에 왜적이 전라도 회미(會尾)ㆍ옥구(沃溝) 등을침범하고,양광도 평택(平澤)ㆍ 아주(牙州) ㆍ신평(新平) 등의 고을을 침범하였는데, 용성(龍城) 등 10여 고을을 불태우니, 경성에 계엄(戒嚴)을 내리고, 전 평장사 유탁(柳濯)을 경기병마도통사(京畿兵馬都統使)로,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 이춘부(李春富)를 동강 도병마사(東江都兵馬使)로,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이던 우리 환조(桓祖)를 서강 병마사(西江兵馬使)로 삼아, 방리(坊里)의 장정들을 뽑아서 군인을 삼고, 백관에게 전쟁을 돕게 하였다. 간관이 궁문에 나아가 절하고 하직하니, 참정(參政) 정세운(鄭世雲)이 아뢰기를, “간관이 전쟁에 나가는 것을 옛날에 듣지 못하였으니, 나라의 체면이 무슨 꼴이 됩니까." 하니, 왕이 특별히 이를 면하여 주었다. 국자박사(國子博士) 등이 아뢰기를, “신등은 공자의 묘정(廟庭)을 모시고 있는데, 예부터 학관(學官)이 정쟁터에 나가는 예는 없었나이다." 하니, 시중 염제신(廉悌臣)과 이암이 모두 말하기를, “네가 공자를 모시지 않으면 공자가 어디로 도망가느냐." 하였다. 첨서(僉書) 김희조(金希祖)도 쟁론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못했다.
○ 언양백(彦陽伯) 김경직(金敬直)이 대궐에 들어갔다가, 재ㆍ추들이 장기두고 바둑두며 농담하는 소리를 듣고, 집에 돌아와서 크게 탄식하기를, “국가가 장차 망하리로다. 재상은 태평한 세상에서도 놀이에 빠져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지금 전쟁이 한창이며 흉년까지 겹쳤는데도 이것은 구휼하려 하지 않고 이렇게 놀음에 빠졌으니, 망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 윤달에 왜가 강화를 침범하여 선원(禪源)ㆍ용장(龍藏) 두 절에 들어가서 3백여 명을 죽이고, 쌀 4만여 석을 빼앗았다. 이때 심몽룡(沈夢龍)이란 자가 있어, 왜적 13명을 베고 마침내 적에게 죽었다.
○ 문하시랑 평장사 이승경이 졸하였다. 이승경은 원 나라에 들어가 벼슬해서 여러 노(路)의 염방사(廉訪使)를 지냈는데, 일처리를 잘한다고 알려졌다.
○ 왜적이 교동현(喬桐縣)을 불살랐다.
○ 6월에 경성에 큰 기근이 들어 대포(大布) 1필에 쌀 5되씩을 바꾸므로, 왕이 창고를 열고 쌀 2천 석을 풀어, 백성들로 하여금 대포 한 필에 쌀 한 말씩을 받도록 했다.
○ 가을 7월에 왕이 백악(白岳)에 거둥하여 도읍을 옮길 자리를 보았는데, 백악은 임진현(臨津縣) 북쪽 5리에 있다. 이전에 남경(南京)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전 한양윤(漢陽尹) 이안(李安)을 보내서 성과 대궐을 수리하게 하니, 백성들이 몹시 괴로워 하였다. 그래서 태묘에서 점을 쳤더니 불길하므로 도읍을 옮기지 않았는데, 이때 또 백악에서 역사를 시작하니, 당시 사람들이 신경(新京)이라 하였다. 재상들이 남경의 궁실을 헐고 백악으로 옮기려 하니, 양광도 안렴사 김일치(金一致)가 떠나면서 아뢰기를, “지금 남경의 궁실을 헐면, 백성들이 실망할까 하나이다." 하니, 왕이 놀라 이르기를, “나는 실상 알지 못하는데, 재상들이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하고, 헐지 말라고 명하였다.
○ 익산군(益山君) 이공수(李公遂), 호부상서 주사충(朱思忠), 환관 방도적(方都赤)을 원 나라에 보내어 그곳 형세를 살펴 오라 하였는데, 탕참(湯站)에 이르러 길이 막혀서 방향을 돌려 압록강을 건넜다. 이에 왕이 크게 노하여 이르기를, “죽더라도 그대로 돌아오지는 못한다." 하고 기어이 보내니, 다시 심양(瀋陽)에 도착하였으나 몇 달이 되어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 강절(江浙) 지방의 이우승(李右丞)이 장국진(張國珍)을 보내어 침향(沈香)ㆍ비단ㆍ옥띠ㆍ궁검(弓劍)을 바쳤으므로, 다시 소윤(小尹) 김백환(金伯環)을 보내어 답례했다.
○ 8월에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사방에서 전쟁이 일어나 사람을 급하게 써야 하니. 3년상 제도를 없애라." 하였다. 이때에 3년상을 허락하더라도, 모두 백 일 만이면 최복(衰服)을 벗고 벼슬만 쉴 따름이었다.
○ 윤환(尹桓)을 칠원후(漆原侯)로, 유탁(柳濯)을 고흥후(高興侯)로, 설손(?遜)을 고창백(高昌伯)으로, 안우(安祐)를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삼았다. 설손은 고창국(高昌國) 사람인데, 왕이 원 나라에 있을 때 더불어 사귀었고, 그 뒤에 난리를 피해서 가족을 데리고 동쪽으로 왔다.
○ 겨울 10월에 정몽주(鄭夢周)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11월 신유일에 왕이 백악의 새 궁으로 옮겼다.
고려사절요 제27권
공민왕 2(恭愍王二)
신축 10년(1361), 원 지정 21년
○ 봄 2월에 백관에게 명하여 각각 현량(賢良) 2명씩을 천거하게 하였다.
○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내가 왕위를 계승한 후,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조상의 교훈을 본받아 나라를 잘 다스리고자 하는 마음이 항상 간절하였으나, 마침 어려움이 많은 때여서 은혜가 아래로 미치지 못하여, 난리가 자주 일어나며 재앙과 괴이한 변이 여러 번 나타나므로, 내 이를 두려워하여 도선(道詵)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 땅에 옮겼으니, 이는 대저 장차 국운을 무궁하게 이으려는 것이다. 백성들이 분주히 일을 하여 매우 수고하였는데, 내 어찌 나라를 구제할 큰 계책을 알지 못하겠는가. 나 역시 감히 도모하지 않을 수 없으니, 사무를 시작하며 새 은혜를 펴노라. 2등죄 죄인 이하는 모두 용서하고, 북방을 정벌하는 전쟁에서 죽은 자에게는 국가에서 내리는 은전(恩典)을 더하며, 그들의 아들에게는 모두 관직을 주도록 하라." 하였다.
○ 우리 환조(桓祖)를 동북면 병마사로 삼아, 왕이 홀적청(忽赤廳)에서 잔치를 베풀어 전송하고, 출발한 뒤에 호부상서를 제수했다. 환조가 북도(北道)에 이른 지 얼마 안 되어,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저쪽 땅에 들어갔던 자들이 모두 명령에 순종하여 나왔다.
○ 보제사(普濟寺)에서 진제장(賑濟場)을 베풀었다.
○ 이제현(李齊賢)에게 명하여 무일편(無逸篇)을 강독하게 하였다.
○ 전라ㆍ양광도 방어사 김횡(金?)이 왜국선 5척을 포획하고, 군사 3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 3월 정사일에 왕이 백악(白岳)에서 돌아왔다.
○ 장사성이 보낸 사람이 와서 비단ㆍ옥잔ㆍ침향(沈香)ㆍ궁시(弓矢)를 바쳤다.
○ 회남성 우승(淮南省右丞) 왕성(王晟)이 보낸 사신이 와서 비단과 침향(沈香)을 바쳤다.
○ 왜적이 남해현(南海縣)을 불태웠다.
○ 용주(龍州)에 기근이 들어 사람을 서로 잡아먹으므로, 창고를 열어 구제하였다.
○ 여름 4월 1일 신사에 개기일식(皆旣日蝕)이 있었다.
○ 요양성 총관(遼陽省摠管) 고가노(高家奴)가 보낸 사신이 와서 옥잔과 개를 바쳤다.
○ 왜가 고성(固城)ㆍ울주(蔚州)ㆍ거제(巨濟)를 침범했다.
○ 서북면에 크게 기근이 들어 도둑이 일어났다.
○ 경술일에 우리 환조가 훙하니, 왕이 심히 슬퍼하여 사신을 보내서 조상하여 위로하며 부의를 내렸다. 사대부들이 모두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제는 동북면에 좋은 사람이 없다." 하였다.
○ 5월에 추밀원직학사(樞密院直學士) 한방신(韓方信)을 동북면 도병마사로, 전 도첨의 평리(都僉議評理) 안중상(安仲祥)을 경상도 도순문진변사(慶尙道都巡問鎭邊使)로 삼았다.
○ 상락후(上洛侯) 김영후(金永煦)가 졸하였다. 김영후는 성품이 엄하고 굳세며 침착하여, 친척이나 친구 중에 궁색한 사람이 있으면 도와 주었다. 그의 손자 김사안(金士安)ㆍ사형(士衡)은 모두 나이 20세가 넘었는데, 사람들이 혹 김영후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벼슬을 구하지 않느냐." 하면, 그는 대답하기를, “자제들이 참으로 어질다면 국가에서 자연히 쓸 것이요, 어질지 않으면 벼슬을 구해서 얻는다 해도 그것을 보전할 수 있겠는가." 하니, 듣는 자들이 탄복하였다.
○ 좌승선(左承宣) 이색(李穡)에게 명하여 《서경(書經)》 홍범(洪範)을 강독하게 했다.
○ 어사대에서 아뢰기를, “불교는 본래 밝고 깨끗한 것을 숭상하는데, 그 무리들이 죄받고 복받는다는 말로써 과부와 부모 없는 딸들을 속여 유인하며, 머리를 깎고 중이 되게 하여 잡거하고 분별이 없어, 그들의 음탕한 욕심을 맘대로 누리며, 심지어는 사대부와 종실의 집까지 다니며 불공하기를 권하고, 산속에 유숙시켜 추한 소문이 때때로 있어 풍속을 더럽게 물들이오니, 지금부터는 이런 짓을 일체 금하여, 어기는 자는 죄를 주소서. 향리나 공노와 사노들이 부역을 피하기 위하여 불문(佛門)에 자취를 숨기고, 손에는 불상을 가지고 입으로는 중의 노래를 외며 여염집에 횡행해서 백성들의 재산만 소모하여, 그 죄가 가볍지 않사오니, 이들도 함께 체포하여 모두 그들 본래의 신분으로 돌려보내소서." 하니, 왕이 이 말을 좇았다.
○ 전라도 안렴사 전녹생(田綠生)이 아뢰기를, “주ㆍ현 관리의 폐단 중에 왜적을 막을 때의 폐단이 제일 큽니다. 경인년 이후로 전라도 안의 수자리의 수효는 해마다 늘어나, 지금은 18곳에 두었사오며, 그곳의 군관(軍官)들은 주ㆍ군에서 사나운 행동으로 위엄을 세워 고을을 쇠퇴하게 하고, 마침내는 수졸들을 부려 자신의 일을 하도록 하니, 수졸이 도망가, 적이 오면 주ㆍ군의 사람들을 징발하여 이를 연호군(煙戶軍)이라 이릅니다. 수자리를 설치하였으나, 적을 막아 냈다는 말은 듣지 못하고 백성을 해롭히는 것만 보니, 많은 수자리를 혁파하시고 주ㆍ군에서 봉화를 신중히 하며 척후를 엄하게 하여 변고 있을 때에 대비하도록 하는 것만 같지 못할까 하나이다." 하였다.
○ 6월에 어사대에서 비로소 사람들이 흰옷과 흰갓을 쓰는 것을 금하고, 중이 시가로 들어오는 것을 금하였다.
○ 가을 7월에 장사성(張士誠)이 보낸 사신이 왔다.
○ 8월에 왕이 중 보인(普印) 등을 내전에 맞아다가, 날마다 전등록(傳燈錄)을 강독하게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공자의 말에 이르기를, '이단(異端)을 전공하면 해로울 뿐이다' 하였고, 그것을 해석한 선유(先儒)의 말에 '성인의 말씀이 아닌 글은 보지 말라' 하였다. 사방에서 군사가 움직이고 해마다 가뭄이 들어, 전쟁에서 죽은 자의 뼈는 들판에 뒹굴고 주린 사람이 길에 널린 때를 당해서, 왕은 마땅히 두려워하고 근심하여 대신ㆍ석유(碩儒)들과 더불어 선왕(先王 고대의 성왕(聖王))의 도를 강론하고, 당면한 일 중에서 힘써야 할 방도를 물어서 백성과 사직을 보존하기를 도모할 것이거늘, 중의 무리들을 불러 모아 공(空)을 강론하는 데만 힘써서 정신을 잃고 인의를 경멸하여, 마침내는 신돈(辛旽)을 공경해서 정승으로 삼고, 나옹(懶翁)을 존경하여 스승으로 삼으며, 크게 불전을 세워 공주의 명복을 빌고, 심지어 죄 없는 사람을 죽이면서도 목숨을 초개같이 보아 불쌍히 여기지 않았고, 울 안에서 화를 빚어 사방 사람의 웃음을 샀으니, 이단이 국가에 해되는 것이 어찌 소량(蕭梁)뿐이리오" 하였다.
왜가 동래(東萊)와 울주(蔚州)를 불태우고 약탈하여 세미(稅米) 실은 배를 빼앗아 갔다. 또 양주(梁州)ㆍ김해부(金海府)ㆍ사주(泗州)ㆍ밀성군(密城郡)을 침범했다. ○ 9월에 호부상서 주사충(朱思忠)을 원 나라에 보내어, 도로가 다시 통한 것을 하례하게 하였다.
○ 정동성 관리를 다시 두었다.
○ 원 나라에서 우리 나라에 난리가 일어났다 하여 사신을 보내와서 사면령을 반포했다.
○ 독로강 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가 반란을 일으켜 천호 임자부(任自富)와 김천룡(金天龍)을 죽이니, 형부상서 김진(金璡)에게 가서 토벌하라고 명하였다.
○ 겨울 10월 무자일에 지진이 있었다.
○ 김진이 증병을 청하니, 이때 우리 태조(太祖)는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으로서 동북면 상만호였는데, 왕이 김진을 구원하라고 명하였다. 태조가 군사 1천 5백 명을 거느리고 달려가니, 박의는 그 무리들을 거느리고 강계(江界)로 도망해 들어갔는데, 모두 잡아서 죽였다.
○ 정유일에 홍두적(紅頭賊)의 위평장(僞平章) 반성(潘誠)ㆍ사유(沙劉)ㆍ관선생(關先生)ㆍ주원수(朱元帥) 등 10여 만의 무리들이 압록강을 건너서 삭주(朔州)를 침범하니, 추밀원부사 이방실(李芳實)을 서북면 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로 삼고, 동지추밀원사 이여경(李餘慶)을 보내서 절령(?嶺)에 책(柵)을 세웠다.
○ 학성후(鶴城侯) 서(?)를 원 나라에 보내어 신정을 축하하게 하였는데, 길이 중도에서 막혀 가지 못하였다.
○ 사신을 보내어 여러 도의 군사를 점검하고, 국내의 절에 명령하여 전마(戰馬)를 차등 있게 내게 하였다. 서울 사람을 모아서 성문을 수리하였다.
○ 임인에 홍두적이 이성(泥城)을 침범하니, 참지정사(參知政事) 안우(安祐)를 상원수로, 정당문학 김득배(金得培)를 도병마사로, 동지추밀원사 정휘(鄭暉)를 동북면 도지휘사로 삼았다.
○ 모병(募兵)하는 방에, “모집에 응하는 자 중에, 사삿집 노비를 제외하고 선비나 향리에게는 벼슬을 주고, 궁(宮)ㆍ사(司)의 노예는 양민으로 삼든지 돈과 비단을 상주든지 그들의 소원에 따르리라." 하였다.
○ 지숙주사(知肅州事) 강려(康侶)가 민가를 불태우고 도망했다.
○ 11월에 홍두적이 무주(撫州 평북 영변(寧邊))에 둔을 치니, 저 쪽은 수가 많고 우리는 수가 적다 하여 이방실이 군사를 거두어 물러나서, 순(順)ㆍ은(殷)ㆍ성(成) 3주(州)와 양암(陽巖 평남 양덕(陽德))ㆍ수덕(樹德 평남 양덕(陽德))ㆍ강동(江東)ㆍ삼등(三登 평남 강동(江東))ㆍ상원(祥原 평남 중화(中和)) 5현의 백성과 곡식을 절령(?嶺)으로 옮기자고 청하니, 이를 승낙하였다. 이방실이 판사농사(判司農事) 조천주(趙天柱), 좌승(左丞) 유계조(柳繼祖), 대장군 최준(崔準) 등을 박천(博川)으로 보내어 적을 쳐서 이겼다. 이방실은 지휘사(指揮使) 김경제(金景?)와 더불어 개주(价州 평남 개천(价川))에서 적을 쳐 1백 50여 명을 베었다.
○ 염제신(廉悌臣)을 파면하고, 홍언박(洪彦博)을 문하시중으로 삼았다.
○ 을묘일에 안우가 보낸 조천주ㆍ정이(鄭履) 등이 보병과 기병 4백 명을 가지고 박주(博州 평북 박천(博川))에서 적을 쳐서 적 1백여 명을 베었다. 기병 1백 명을 거느린 이방실은 연주(延州)에서 1천여 명을 쳐서 20명을 베었다. 안우는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안주(安州)에 나가 둔을 치고 첩보(捷報)를 올리니, 왕이 명하여 안우를 도원수로 삼았다.
○ 병진일에 적이 안주를 습격하자 우리 군사가 패하여, 상장군 이음(李蔭)과 조천주가 죽었다. 적은 지휘사 김경제를 사로잡아 그들의 원수로 삼고 글을 보내기를, “군사 1백 10만을 거느리고 동으로 갈 테니 속히 나와 항복하라." 하였다.
○ 공(公)ㆍ후(侯) 이하에게 전쟁에 쓸 말을 차등 있게 내놓으라고 명하였다.
○ 참지정사 정세운(鄭世雲)을 서북면 군용체찰사(西北面軍容體察使)로 삼고, 전 밀직제학 정사도(鄭思道)ㆍ김두(金?)를 보내어 절령(?嶺)의 책(柵)을 지키게 하며, 평장사 이공수(李公遂)에게 죽전(竹田)에서 둔을 치게 하였다.
○ 우리 태조가 적의 왕원수(王元帥) 이하 1백여 명을 베고, 한 사람을 사로잡아 바쳤다.
○ 계해에 평장사 김용(金鏞)을 총병관(摠兵官)으로, 전 형부상서 유연(柳淵)을 병마사로 삼았다. 적은 이날 밤에 군사 1만여 명을 절령 책 옆에 매복시켰다가, 닭이 울자 철기(鐵騎) 5천 명으로 책문(柵門)을 공격하여 깨뜨리니, 우리 군사가 크게 무너졌다. 안우와 김득배 등이 단기로 도망해 돌아왔다.
○ 을축일에 안우가 군사를 수습하여 김용 등과 함께 금교역(金郊驛)에서 둔을 친 다음, 김용이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최영을 왕께 보내어 서울 군사를 청하니, 왕이 일이 급함을 알고서 피난을 생각하여 먼저 서울에 사는 부녀들과 늙고 약한 자들을 성 밖으로 나가게 하자, 인심이 흉흉하였다. 이 날, 적의 선봉이 흥의역(興義驛 황해 우봉(牛峯))에 이르렀다.
○ 병인일에 왕과 공주가 태후를 모시고 장차 남쪽으로 파천하려 하는데, 날이 밝기 전에 김용ㆍ안우ㆍ이방실 등이 달려와서 모두 아뢰기를, “경성은 지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최영이 가장 통분하여 크게 부르짖기를, “주상께서는 조금 더 머무르셔서 장정들을 모집하여 종사를 지키소서." 하니, 재신들은 서로 돌아보면서 아무 말도 없었다. 날이 밝자, 왕의 일행은 민천사(旻天寺)로 거둥하였다. 근신들을 각각 거리로 나누어 보내서 큰 소리로 의병을 모집하게 하니, 서울 사람들은 모두 흩어지고 모집에 응한 자는 겨우 몇 사람뿐이었다. 안우 등도 어찌할 수 없어 왕에게 아뢰기를, “신등이 여기 머물러 적을 막을 것이오니, 주상께서는 출행하소서." 하였다. 이에 왕이 숭인문(崇仁門)을 나서니, 늙고 어린 자들은 땅에 넘어지고, 어미는 자식을 버리고, 짓밟히고 깔린 자가 들판에 가득하였으며, 우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왕의 일행이 통제원(通濟院)에 이르자 경성에서 오는 자가 아뢰기를, “적이 이미 가까이 왔습니다." 하니, 임진강을 건넜다. 공주는 연을 버리고 말을 탔으며, 차비(次妃) 이씨가 탄 말은 병들고 약하여 보는 자가 모두 울었다. 왕이 신하를 돌아다보며 원송수(元松壽)ㆍ이색에게 이르기를, “풍경이 이와 같으니, 경 등은 마땅히 연구(聯句)를 지을 만하다." 하였다.
○ 상주 판관(尙州判官) 조진(趙縉)이 군사 1천 4백 명을 데리고 왔으므로, 대장군 김득제(金得齊)가 거느리게 했다. 사평원(沙平院)에 이르니, 개령감무(開寧監務)가 와서 쇄마(刷馬) 1백여 필을 바쳤다. 광주(廣州)에 이르러 유탁(柳濯)을 경상도 도순문 겸 병마사(慶尙道都巡問兼兵馬使)로, 이춘부(李春富)를 전라도 도순문 겸 병마사로, 이성서(李成瑞)를 양광도 도순문 겸 병마사로, 강석(姜碩)을 교주ㆍ강릉도 도순문 겸 병마사로 삼았다. 중랑장 임견미(林堅味)가 재ㆍ추에게 말하기를, “적이 이미 경성에 들어왔으니, 임진강 북쪽은 우리 땅이 아닙니다. 모든 도의 군사를 뽑아 적을 치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재ㆍ추들이 응하지 않으므로 임견미는 눈물을 흘리면서 왕에게 아뢰니, 왕이 이르기를, “지금 창졸간에 어떻게 하겠는가." 하였다.
○ 신미일에 눈이 내리는데 이천현(利川縣)에 다다르니, 왕의 옷이 젖고 얼어서 모닥불을 피워 추위를 녹였다. 이날 적이 경성을 함락시켰는데, 여러 달 동안 둔병하면서 소와 말을 죽여 그 가죽을 벗겨서 성(城)을 만들고 물을 부어 얼음을 얼리니, 사람들이 올라가지 못했다. 또 사람을 잡아서 굽거나 임부(姙婦)의 젖을 구워서 먹는 등 잔학한 짓을 마음대로 하였다.
○ 임신일에 왕이 음죽현(陰竹縣)에 다다르니, 관리와 백성은 모두 도망해 숨었다. 판각문사(判閣門事) 허유(許猷)가 쌀 두 말을 바치니, 왕이 안렴사 안종원(安宗源)과 안무사 허강(許綱)이 음식과 장막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하여 이지태(李之泰)를 안종원의 대임으로 삼았다.
○ 장군 홍선(洪瑄)이 자청해서 유격장군(遊擊將軍)이 되려 하니, 왕이 가상히 여겨 남경윤 양광도관군 상만호(南京尹楊廣道管軍上萬戶)로 발탁하고, 조희고(趙希古)를 광주목사 양광도 부만호로 삼았다.
○ 12월 임진일에 왕이 복주(福州 경북 안동(安東))에 이르렀다. 정세운(鄭世雲)은 성품이 충성스럽고 청백하였다. 왕이 파천한 뒤로 밤낮으로 근심하고 분히 여겨서, 홍두적을 소탕하고 경성을 수복시킬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여겨 여러 번 왕에게 청하기를, “속히 애통교서(哀痛敎書)를 내리시어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사신을 여러 도에 보내시어 징병을 독려시키시옵소서." 하였다. 이에 왕이 정세운을 총병관(摠兵官)으로 삼고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천하가 편안하면 좋은 정승을 임명하는 데에 뜻을 두고, 천하가 위태하면 좋은 장수를 임명하는 데에 뜻을 둔다. 시세의 경중은 오직 사람에게 달려 있는데 어찌 삼가지 않으리오. 공경히 생각건대, 태조께서 국가를 이룩하시고 여러 성왕(聖王)이 서로 계승하여 백성들을 길러 오셨는데, 과인에게 이르러서는 태평시대에 익숙해져서 군사의 일은 폐하고 강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홍두적의 침범을 입어서 파천하여 남쪽으로 내려왔으니, 매양 종사를 생각하면 가슴아프고 쓰라림을 어찌 견디리오. 이제 모든 장수를 나누어 보내니, 군사를 합하여 적을 쳐라. 정세운에게 절월(節鉞)을 주는 명을 내리니, 가서 군사를 감독하며 명령을 듣고 안 듣는 자를 가려 상주고 벌주라." 하였다. 정세운이 도당에 나아가 큰 소리로 말하기를, “나는 심히 한미한 사람인데, 나 같은 사람도 재상이 되었으니 국가가 당연히 어지럽다." 하고, 유숙(柳淑)에게 말하기를, “내일 군사를 출발시킬 터이니 공은 돌아가서 군사를 점검하시오." 하니, 유숙이 말하기를, “군사가 이미 죽령 대원(竹嶺大院)에 이르렀다" 하였다. 정세운이 다시 말하기를, “만일 군사가 기한까지 당도하지 못하면, 공도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오." 하고, 김용(金鏞)에게 말하기를, “지금 두 정승이 적을 구경만 하고 치려 하지 않으니, 누가 이런 행태를 본받지 않으리오. 만일 적을 소탕하지 못하면, 산골짜기에 도망해 숨을지라도 어떻게 살겠으며, 어떻게 나라가 유지되겠는가." 하였다. 시중 이암이 말하기를, “이제 적이 몰래 들어와서 왕과 신하들이 파천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앞장서서 대의를 부르짖은 그대가 절월을 가지고 군사를 거느려 떠나는데, 사직(社稷)이 다시 편안해지는 것은 이번 한 싸움에 있으니, 공은 오직 힘쓰라." 하였다.
○ 왕이 영호루(映湖樓)에 거둥하여 얼마 동안 경치를 바라보더니, 이윽고 누에서 내려와서 배를 타고 놀므로, 구경하는 자들이 줄지어 늘어서고, 혹은 돌아서서 탄식하는 자도 있었다.
○ 정세운을 중서평장사로 삼았다.
○ 염주(鹽州 황해 연백(延白)) 사람 검교중랑장(檢校中郞將) 김장수(金長壽)가 주동이 되어서 고을 사람들을 거느리고 적을 막아, 적 유기(遊騎) 1백 4십여 명을 죽이고, 적의 위방(僞榜)을 그 고을 사람 최영기(崔英起)에게 주어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 보고하게 하니, 김장수를 상장군 겸 만호(上將軍兼萬戶)로, 최영기를 서해도 안무사(西海道安撫使)로 삼았다.
○ 적 3백여 기가 원주(原州)를 함락시키니, 목사 송광언(宋光彦)이 죽었다. 적 29명이 안변부(安邊府)에 이르렀는데, 이때 고을 사람이 항복하는 체하고 술을 대접하여, 세 순배가 돌자 모두 때려 죽였다. ○ 강화부(江華府)도 적에게 거짓 항복하고, 적의 비장(裨將) 왕동첨(王同簽)에게 음식을 주다가 복병을 매복시켜 모두 죽이니, 적이 감히 그 고을 경계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주D-001] :
[주D-002] :
[주D-003] :
[주D-004] :
[주D-005] :
고려사절요 제27권
공민왕 2(恭愍王二)
임인 11년(1362), 원 지정 22년
○ 봄 정월에 구묘(九廟)의 가주(假主)를 복주향교(福州鄕校)에 봉안하였다.
○갑자일에 안우ㆍ이방실ㆍ황상(黃裳)ㆍ한방신(韓方信)ㆍ이여경(李餘慶)ㆍ김득배ㆍ
안우경(安遇慶)ㆍ이귀수(李龜壽)ㆍ최영 등이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동교(東郊) 천수사(天壽寺) 앞에 둔을 쳤다. 총병관 정세운(鄭世雲)이 모든 장수를 독려하고 진군시켜 경성을 포위하게 하고, 정세운은 물러나와 도솔원(兜率院)에 둔을 쳤다. 이때 진눈깨비가 내리는데, 적의 방비가 해이해졌다. 이여경이 숭인문(崇仁門)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의 휘하 호군(護軍) 권희(權僖)가 적을 정탐하여 이것을 알고 말하기를, “적의 정예 군사는 모두 여기에 모여 있으니, 만일 우리가 불시에 공격한다면 가히 이길 것입니다." 하였다. 을축일 동틀 무렵에, 권희가 군사 수십 기를 거느리고 돌입해 들어가면서 떠들썩하게 북을 치며 날쌔게 공격하니, 적의 무리가 깜짝 놀랐다. 이때 우리 태조가 휘하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앞장서서 대파하였는데, 해질 무렵에 적의 괴수 사유(沙劉)ㆍ관선생(關先生) 등을 베니, 적의 무리들이 저희끼리 서로 밟아 쓰러진 시체가 성 안에 가득하였다. 적의 머리를 벤 것이 대개 10여만 명이요, 원 나라 황제의 옥새 2개, 금보(金寶) 1개, 금은ㆍ동인(銅印)과 병기 등의 물건을 노획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궁지에 몰린 도둑을 모두 소탕시킬 수는 없다." 하고, 숭인(崇仁)ㆍ탄현(炭峴) 두 문을 열어 놓으니, 남은 무리 파두반(破頭潘) 등 10여만 명이 도망하여 압록강을 건너 달아나니, 적이 평정되었다. 성을 공격하던 날, 적은 형세가 궁해졌으나 누벽(壘壁)을 쌓고 굳게 지켰는데, 날이 저물자 우리 군사가 진군해 근접해서 포위했다. 태조가 길가 어느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밤중에 적들이 포위를 뚫고 달아나니, 태조가 동문으로 달려갔다. 적과 우리 군사가 문을 고수하느라고 뒤섞여서 나가지 못했는데, 뒤에서 오던적이 창으로 태조의 오른쪽 귀 뒤를 찔러 사세가 심히 급박했다. 이에 태조가 칼을 빼어 앞에 있는 적 7, 8명을 베고, 말을 타고 성을 뛰어 넘었으나 말이 넘어지지 않아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 일찍이 김용은 정세운이 왕의 총애를 받는 것을 시기했고, 안우ㆍ이방실ㆍ김득배 등이 큰 공을 이루어 왕의 신임이 두터워질까 두려워서, 안우 등에게 정세운을 죽이게 하고, 왕에게 참소하여 그들에게 죄를 씌워 모두 죽이려 하였다. 이에 왕의 교지를 위조하여 글을 써서, 자기 조카 전 공부상서 김림(金琳)을 시켜 비밀히 안우 등을 달래서 그들이 정세운을 죽일 것을 도모하게 하고 말하기를, “정세운이 본래 경들을 싫어하니, 적을 물리친 뒤에는 반드시 그대들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인데, 어째서 먼저 그를 죽이지 않는가." 하였다. 안우와 이방실이 김득배의 장막에 나아가 말하기를, “지금 정세운이 적을 두려워하여 진군하지 않고 있으며, 김용이 전하는 글이 이와 같으니, 이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하니, 김득배가 말하기를, “이제 겨우 도적을 평정하였는데, 어찌 우리끼리 스스로 해치리오. 옛날 사마양저(司馬禳?)는 제 마음대로 가(莊賈)를 죽였으나 위청(衛靑)은 소건(蘇建)을 죽이지 않은 것은 고금의 밝은 귀감이니, 가히 신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오. 만일 부득이하면, 그를 대궐 뜰에 잡아다 놓고 주상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옳지 않겠소" 하였다. 이에 안우와 이방실이 물러가 자기들 영(營)으로 돌아가더니, 밤이 되자 다시 와서 말하기를, “정세운을 죽이라는 것은 임금의 명령이니, 우리들이 공을 이루고서 임금의 명령을 받들지 않았다가 후환이 있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였다. 김득배는 굳이 고집하고 반대하였으나, 안우 등은 기어코 행하려 하였다. 술자리를 차리고 사람을 시켜 정세운을 초청하고, 정세운이 도착하자 안우 등이 장사(壯士)들에게 눈짓하여 좌중에서 때려죽였다.
○ 대장군 김한귀(金漢貴)와 중랑장 김경(金景)이 정세운이 보낸 노포(露布)를 가지고 행재소에 이르니, 왕이 기뻐하여 김한귀에게 금 25냥과 비단 2필을 하사하고, 김경에게는 비단 2필을 하사했다. 내첨사(內詹事) 이대두리(李大豆里)를 보내서 정세운에게 옷과 술을 하사하고, 참정 이인복(李仁復)을 보내서 국사(國史)와 비서(?書 국가에서 비장한 도서)를 회수하게 했다.
○ 장군 목충(睦忠)이 군전(軍前)에서 돌아와 아뢰기를, “여러 장수가 정세운을 죽였는데, 이 일을 비밀로 하고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왕이 문하시중 홍언박(洪彦博), 평장 김용(金鏞)ㆍ경천흥(慶千興), 찬성사 유탁(柳濯), 추밀원사 유숙(柳淑)을 불러 의논하여, 직문하(直門下) 김진(金鎭)을 보내어 여러 장수들에게 용서한다는 뜻을 반포하고, 행재소로 오기를 권해서 그들의 마음을 안심시키려 하였다. 복주수(福州守) 박지영(朴之英)이 재추소(宰樞所)에서 말하기를, “이방실이 정세운ㆍ안우 등을 베려다가 해를 입었다." 하였다. 다른 변이 생길까 두려워 인심이 흉흉하니, 김진 등을 불러서 군사를 일으켜 치고자 하였다. 판태의감사(判太醫監事) 김현(金賢), 상장군 홍사우(洪師禹)가 와서, 여러 장수가 정세운을 논한 글을 바치니, 왕이 이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여 김현 등에게 금은과 포목과 비단을 하사했다. 또다시 김진 등을 보내서 여러 장수를 용서한다는 명령을 반포하고, 박지영을 불러 책망하기를, “네 어찌 망녕된 말을 하는가. 내 그대가 늙음을 생각하여 법으로 다스리지는 않겠다." 하고, 벼슬을 파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 지주사(知奏事) 원송수(元松壽)를 여러 장수들에게 보내어 의복과 술을 하사했다.
○ 2월에 조소생(趙小生)이 나하추(納哈出)를 꾀여서 삼살(三撒 함남 북청(北靑))ㆍ홀면(忽面 함남 홍원(洪源)) 지방을 침범하였는데, 동북면 도지휘사가 여러 번 싸웠으나 패하니, 우리 태조(太祖)를 보냈다. 이때 원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나하추가 심양(瀋陽) 땅을 점령하고 행성승상(行省丞相)이라 일컬었다.
○ 고용보(高龍普)를 죽였다.
○ 동경윤(東京尹) 배천경(裵天慶)이 와서 왕에게 잔치를 올리고 동경으로 거둥하기를 청했다.
○ 왜가 진주 악양현(岳陽縣 경남 하동(河東))을 불태웠다.
○ 왕이 복주(福州 경북 안동(安東))에서 상주(尙州)로 거둥하니, 목사 최재(崔宰)가 왕에게는 정성껏 공진(供進)하였으나 좌우 측근에게는 선물을 주지 않았으므로, 측근들이 헐뜯어 파면되었다.
○ 안우ㆍ안우경이 개선하여 행궁으로 나아가 왕을 뵙고자 중문으로 들어가려 하니, 김용이 문지기로 하여금 그의 머리를 몽둥이로 치게 하였는데, 안우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세 번이나 자기가 찬 주머니를 가리키면서 크게 소리치기를, “잠깐 참아라. 주상 앞에 나가서 주머니에 든 글을 바치고 나서 죽음을 받겠다." 하였으나, 몽둥이를 가진 자가 다시 쳐서 죽여 뜰 아래로 끌어내렸다. 왕은 이 일을 미처 알지 못하고 전지를 내려 이르기를, “너희들이 맘대로 정세운을 죽여서 몸과 머리가 따로 떨어지게 하였다. 이제 너희를 베지 않는 것은 큰 공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였다. 안우의 주머니에 있는 글이란, 김용이 안우 등에게 주어, “정세운을 죽이라." 한 글이었다. 김용은 제 조카 김림(金林)이 음모를 누설할까 두려워 먼저 죽였다. 김용이 왕에게 아뢰기를, “안우 등이 제 마음대로 주장을 죽인 것은 전하를 왕으로 여기지 않은 소치이오니, 그 죄를 용서할 수가 없나이다." 하고 품하니, 전지를 내려 방을 붙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안우 등은 불충하여 제 마음대로 정세운을 죽였는데, 안우는 이미 처단되었다. 김득배ㆍ이방실을 잡는 자가 있으면 3급을 건너뛰어 쓰리라" 하고, 대장군 오인택(吳仁澤), 어사중승(御史中丞) 정지상(鄭之祥), 만호(萬戶) 박춘(朴椿)ㆍ김유(金庾) 등을 나누어 보내어 잡게 하였다. 이날 이방실이 용궁현(龍宮縣 경북 예천(醴泉))에 이르렀는데, 박춘이 전지를 전하니 이방실이 뜰에 내려서 꿇어앉았다. 오인택이 칼을 빼어 쳐서 옷을 벗기니, 거꾸러져 기절했다가 한참 만에 다시 살아나서 담을 넘어 달아났다. 박춘이 쫓아가 잡았다. 이방실이 박춘의 칼을 빼려는데, 지상 등이 뒤에서 칼로 쳐 죽였다. 김득배는 기주(基州 경북 영주(榮州))에 이르러 변을 듣고 도망하여 산양현(山陽縣 경남 산청(山淸))에 숨었으나, 김유(金庾)ㆍ정지상(鄭之祥) 등이 찾아서 베고 상주(尙州)에서 효수하니, 보는 이 중에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일찍이 모귀(毛貴)가 의주를 침범할 적에, 안우가 기병 70여 명을 거느리고 싸움터로 나가서 산에 올라 말을 쉬게 하였는데, 마침 적병이 갑자기 쳐들어왔다. 장사(將士)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얼굴빛을 잃었으나, 안우는 태연하게 담소하고, 오줌 누고 세수하고 양치질한 다음, 조용히 말에 올라 군사를 거느리고 앞으로 나가서 적과 시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적병 몇몇 기병이 창을 휘두르면서 용맹을 과시하므로, 우가 진격해서 대패시켜 마침내 홍두적을 섬멸시켰으니, 경성을 수복한 것은 모두 그의 공이었다. 그 뒤에, 나이가 겨우 10여 세인 안우의 아들이 거리에서 놀면 사람들이 다투어 먹을 것을 주면서 말하기를, “지금 우리들이 편안하게 먹고 잘 수 있는 것은 모두 세 원수(元帥)의 공이다." 하고, 심지어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다.
○ 3월에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총병관 정세운이 나를 대신하여 군사를 지휘했는데, 안우 등이 감히 저희들 마음대로 죽였으니, 이는 나를 임금으로 여기지 않은 것이다. 적을 파한 공은 한때에 혹 있을지 모르나, 왕을 왕으로 보지 않은 죄는 만대에 용납할 수 없으니, 이들을 놓아 주고 베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뒷세상에 기강을 보이리오. 그러므로 유사에게 명하여 도원수 안우, 원수 김득배ㆍ이방실 등을 바르게 법대로 처단하였으나, 그래도 전날의 공을 생각하여 죄를 처자까지는 미치지 않게 하노라. 그의 부하였던 대소 관원들은, 모두 유사로 하여금 공을 따져서 등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 평장사 이공수(李公遂), 참정 황상(黃裳), 추밀원사 김희조(金希祖)를 보내어 경성을 지키게 하고, 백관을 분사(分司)시켰는데, 공수가 재주를 헤아려서 관직을 맡기고 방략(方略)을 지시하여 유민들을 편안히 안정시키며, 생도(生徒)를 교양(敎養)하였다.
○ 사령을 내렸다.
○ 큰 잔치를 행궁에서 베풀어, 전쟁에 나갔던 장수와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 갑자일에 지진이 있었다.
○ 관제를 고쳤다.
○ 이암이 사퇴할 것을 청하므로, 유탁(柳濯)을 좌정승으로 삼았다.
○ 여름 4월에 요양행성동지(遼陽行省同知) 고가노(高家奴)가, 패하여 도망가는 홍두적을 공격하여 4천여 명을 베고, 사신을 보내어 적의 괴수 파두반(破頭潘)을 사로잡았음을 사신을 보내 보고해 왔다.
○ 왕이 서문에 나가 활쏘는 것을 사열하고, 잡희(雜?)를 구경하고, 포목 50필을 하사하였다.
○ 복주목(福州牧)을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승격시키고, 안성현(安城縣)을 군(郡)으로 높이고, 수원부(水原府)는 군으로 낮추었다. 왕이 복주에 머물렀을 때 복주 사람들이 성심껏 공궤하고, 마침내 여러 도의 군사를 불러 경성을 수복하였다. 홍두적이 양광도(楊廣道)를 꾀어 항복받을 적에, 수원이 가장 먼저 항복하니 남은 고을들이 감히 적의 예봉을 꺾지 못하였는데, 안성만은 조그만 읍(邑)이면서 계교를 내어 적을 섬멸하니, 적이 감히 남쪽으로 내려가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수원의 4부곡(部曲)을 떼내 안성에 붙였다.
○ 용문창(龍門倉)의 곡식 1만 석을 내어, 경기(京畿)의 주린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 병신일에 지진이 있었다.
○ 밀직부사 이귀수(李龜壽)를 전라도 진변사(全羅道鎭邊使)로, 전리판서(典理判書) 최영을 양광도 진변사로 삼고, 우리 태조를 상호군(上護軍)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았다.
○ 5월에 원 나라에서 보낸 태자첨사원첨동(太子詹事院僉同) 기전룡(奇田龍)이 와서 왕에게 의복과 술을 하사했다.
○ 6월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안우경(安遇慶)을 서북면 도병마사로 삼았다.
○ 신사일에 혜성이 나타났는데 그 후 3일 동안 보였다.
○ 감찰사(監察司)에서 아뢰기를, “큰 난리를 치른 후로 공사(公私)의 재물이 모두 떨어졌사온데, 전하의 행차를 따라갔던 관원들로서 곡식을 타먹는 자들이 한 달에 3천여 석을 소비하고 있사오며, 조정 관리와 위사(衛士)들도 녹봉을 감할 수가 없습니다. 환관의 무리들은 정액이 없어 곡식을 소비하는 것이 너무 많사오니, 직무에 종사하는 자 이외에는 모두 태거(汰去)하소서. 전하께서 일찍이 충용위(忠勇衛)를 두시고, 장사(將士)들의 녹을 팔위(八衛)와 등급을 같이한 것은, 창졸간에 일이 생겼을 때 효력을 보자는 것이었는데, 남쪽으로 거둥하실 때에 한 사람도 행차를 따라간 자가 없었사오니, 진실로 헛되이 설치하여 창고의 곡식만 축낸 것입니다. 이것도 없애시옵소서. 또 듣자오니, 어가가 수원으로 거둥하시려 한다 하온데, 수원은 바닷가여서 왜가 침범할까 걱정되옵고, 홍두적을 맞아 항복한 곳이라 사람들의 마음을 믿기 어렵사옵니다. 청주(淸州)는 3도의 요충지에 있어 곡식을 운반하기 쉽고, 또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행차가 머무르시기에 여기보다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또 국가에 적병의 침입이 해마다 연달아 있사온데, 군사가 단합되지 않아서 항상 위급한 상황을 당했을 때에 농민들 사이에서 군사를 모으는 것은, 백성들을 소란스럽게 할 뿐 아니라, 창졸간에 닥친 일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오니, 지금부터 장정을 뽑아서 훈련시켜 위급한 상황에 대비시키소서." 하였다.
○ 전법판서(典法判書) 이자송(李子松)을 원 나라에 보내어 홍두적을 평정한 일을 고하고, 노획한 옥새와 금보(金寶), 금ㆍ은ㆍ동인(銅印), 금ㆍ은패(銀牌) 등을 바치게 하였다. 도평의사사에서 이자송을 전송하였는데,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목인길(睦仁吉)이 술에 취하여 자송을 욕하니, 감찰사(監察司)에서 탄핵하였으나, 목인길은 자기의 공로만 믿고서 교만하고, 방자하게 도리어 왕에게 호소했다. 대간이 재삼 탄핵하니, 왕이 마지못해서 목인길을 파직시켜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 감찰대부(監察大夫) 김속명(金續命)이 관직을 사퇴했으나, 왕이 승낙하지 않았다.
○ 가을 7월에 나하추(納哈出)가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탁도경(卓都卿)ㆍ조소생(趙小生) 등과 함께 홍원(洪原) 달단동(??洞)에 둔을 치고, 하라만호(哈刺萬戶) 나연첩목아(那延帖木兒)와 동첨(同僉) 백안보하(伯顔甫下)에게 1천여 명의 군사를 지휘시켜 선봉이 되게 하였다. 태조가 덕산동 원평(德山洞院平)에서 이들과 만나 공격하였다. 달아나는 적을 함관(咸關)과 차유(車踰) 두 고개 너머까지 추격하여 거의 섬멸시켰는데, 버려진 투구와 병기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태조는 이날 군사를 답상곡(答相谷)으로 물러나 둔을 쳤더니, 나하추가 노해서 군사를 덕산동으로 옮겼다. 태조가 밤을 타서 습격하여 물리치니, 나하추는 달단동으로 돌아가고, 태조는 다시 사음동(舍音洞)에 둔을 쳤다. 태조가 보낸 척후(斥候)가 차유령에 이르러서 보니, 산에 올라 나무를 하는 적이 매우 많았다. 척후병이 돌아와 아뢰니 태조가 이르기를, “병법에 '마땅히 먼저 약한 자를 공격하라' 하였다." 하고, 드디어 군사들을 시켜서 사로잡아 거의 베었다. 태조 자신이 정기(精騎) 6백 명을 거느리고 계속 고개를 넘어 고개 밑에 이르니, 적들이 기미를 알아채고 맞아서 싸우려 하였다. 태조가 10여 기병을 거느리고 적중에 뛰어들어, 그들의 비장(裨將) 한 사람을 활로 쏘아 죽였다. 처음에 태조가 이곳에 와서 여러 장수들에게 여러 번 패한 까닭을 물으니,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매양 싸움이 한창일 때면, 적장 하나가 철갑에 붉은 모미(?尾)를 장식하고 창을 휘둘러 돌진해 왔는데, 모든 군사가 쓰러져 감히 대적하는 자가 없습니다." 하였다. 태조가 그 사람을 찾아 혼자서 맡아 싸우다가 거짓 패해 달아나니, 그 사람이 과연 앞으로 달려와 창으로 몹시 급히 찌르려 하므로, 태조가 몸을 움직여 말다래에 붙이니, 적장은 창을 헛찌르고 창과 함께 거꾸러졌다. 태조가 곧 안장에 의지하여 활을 쏘아 죽이니, 적들이 허둥지둥 달아났다. 태조가 이들을 추격하여 적병의 둔친 곳에 이르렀으나, 날이 저물었으므로 돌아왔다. 나하추의 아내가 나하추에게 이르기를, “당신이 천하에 횡행한 지 오래되었지만, 이같은 장군이 있었습니까. 피하여 속히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으나, 나하추는 듣지 않았다. 나하추의 누이가 군중에 있다가 태조의 신기한 무술을 보고 마음속으로 탄복하여 역시 말하기를, “이 사람을 대적할 이가 천하에 없다." 하였다. 며칠 후에 태조가 함관령(咸關嶺)을 넘어 바로 달단동에 이르니, 나하추가 진을 펴서 서로 대치하고 10여 기병을 거느리고 진 앞에 나오므로, 태조도 10여 기병을 거느리고 진 앞에 나와 서로 대치하였다. 나하추가 말하기를, “내가 처음에 여기 온 것은 본래 사유(沙劉)ㆍ관선생(關先生)ㆍ반성(潘誠) 등을 쫓아서 온 것이지, 귀국의 국경을 침범하려 함이 아닙니다. 이제 내 여러 번 싸움에 패하여 군사 만여 명을 잃었고 비장 몇 명을 잃어 형세가 심히 궁하게 되었으나, 싸움을 그만두고 그대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이때 적병의 형세가 심히 왕성하였다. 태조는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그들을 항복하게 하려고 나하추의 옆에 서 있는 한 장수를 활로 쏘니, 시위 소리와 함께 땅에 거꾸러졌다. 또 나하추의 말을 쏘아 넘어뜨리니, 말을 바꾸어 탔으나 또 쏘아 거꾸러뜨렸다. 이와 같이 한참 동안 크게 싸웠는데 서로 승부가 나지 않았다. 태조가 급히 나하추를 쫓으니 나하추가 다급하여 말하기를, “이만호(李萬戶)여, 우리 두 장수가 이렇게 서로 핍박할 것이 무엇이오." 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태조가 또 그 말을 쏘아 넘어뜨리니 그의 휘하에 있던 군사 하나가 말에서 내려 그 말을 나하추에게 주어 가까스로 죽음을 면했다. 이때 날이 저물어 태조가 군사를 지휘하여 물러가면서 스스로 전(殿)이 되었다. 산길이 여러 층으로 구불구불한데 환자(宦者) 이파라실(李波羅實)이 제일 밑 층에 있다가 급히 부르기를, “영공은 사람을 구하소서. 영공은 사람을 구하소서." 하였다. 태조가 맨 윗층에 있다가 보니 은갑(銀甲)을 입은 적장 두 사람이 파라실을 뒤쫓아오는데 그 창 끝이 거의 몸에 닿게 되었다. 태조가 말에서 내려 활을 쏘아 두 장수를 모두 거꾸러뜨리고 연이어 20여 명을 죽였다. 그리고 다시 군사를 돌려 공격하여 쫓는데, 한 적장이 태조를 향해 창을 겨누어 찌르려 하므로 태조가 홀연 몸을 기울여 말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모습으로 말에 붙어서 위를 쳐다보면서 그 사람의 겨드랑이를 쏘아 맞추고, 곧 말을 돌려 돌아오려고 하는데 또 한 적장이 내달려 와서 태조를 향해 활을 쏘므로 태조가 곧 일어나서 말등에 서니 화살이 가랑이 사이로 빠져 나갔다. 태조가 말을 달려 활을 쏘아 적장의 무릎을 맞히고 냇가에서 한 적장을 만났는데, 갑옷입고 투구쓰고 면구(面具)를 얼굴에 쓰며 턱 갑옷을 만들어 입을 벌리기에 편하게 하고 온몸을 빈틈 없이 보호하여 심히 견고했기 때문에 화살을 맞출 데가 없었다. 이에 태조가 일부러 그 말을 쏘니 말이 엉겁결에 뛰어 적장이 힘을 주어 말 고삐를 끌어당기느라고 입이 벌어지니 태조가 그 입을 맞혔다. 이렇게 적장 3명을 쓰러뜨리니 적이 크게 패해 달아났다. 태조가 철기(鐵騎)로 적병을 무찌르니 적들은 저희들끼리 서로 밟히고 깔렸다. 매우 많은 적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군사를 돌려 정주(定州)에 둔을 치고 수일 동안 군사를 쉬게 한 다음, 먼저 군사를 요충지에 매복시켰는데, 삼군(三軍)으로 나누어, 좌군은 성관(城串)으로 나가고, 우군은 도련포(都連浦)에서 나가며, 태조 자신은 중군을 거느리고 송원(松原)에 이르러 나하추와 함흥평(咸興平 함북 함흥(咸興))에서 마주쳤다. 태조가 단기로 용감하게 돌진하여 적의 형세를 시험하니 날쌘 적장 3명이 함께 달려 앞으로 나왔다. 태조가 거짓 패해 달아나는 체하면서 말고삐를 잡아 당기고 채찍질을 하여 마치 말에 재갈 물리는 모양을 하니, 세 장수가 다투어 쫓아와 거의 다 근접하였다. 태조가 홀연히 말을 빼어 오른쪽으로 나오니, 세 장수가 말을 멈추지 못하고앞으로 나가는데 태조가 뒤에서 활을 쏘니 시위 소리와 함께 모두 거꾸러졌다. 이에 이리저리 옮겨가면서 싸워서 그들을 요충지로 유인하니 좌우에 매복시켰던 군사가 모두 나와 같이 쳐서 크게 이겼다. 나하추가 대적할 수 없음을 알고 흩어진 군사들을 거두어 달아났다. 노획한 은패(銀牌)와 동인(銅印) 등의 물건을 거두어 왕에게 바쳤다. 이리하여 동북쪽 오랑캐가 모두 평정되었다. 환조(桓祖)가 예전에 원 나라 조정에 들어갔을 때, 길에서 나하추를 만나 태조의 재주를 칭찬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나하추가 패배하고 돌아가서 말하기를, “이(李) 환조(桓祖)의 휘 가 저번에 나를 보고 재주있는 아들이 있다고 하더니 과연 거짓말이 아니더라." 하였다. 뒤에 나하추가 사람을 보내어 통호(通好)하고, 말을 왕에게 바치고 비고(?鼓) 하나와 좋은 말 한 필을 태조에게 보내어 예를 표했는데, 이는 그가 심복했기 때문이었다.
○ 장사성(張士誠)이 보낸 사신이 방물을 바쳤다.
○ 8월에 왕이 양광도 안렴사 이지태(李之泰)에게 명하여 폐인(嬖人)들에게 공주 창고 쌀 50석을 주라고 하였다. 이지태가 생각하기를 왕의 명령은 반드시 양부(兩府)에 명령을 내려서 시행학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고, 군량을 헛되이 보통 사람들에게 줄 수 없다 하여 왕의 명령을 받들어 시행하지 않으니 폐인들이 왕에게 호소하여 왕이 노해서 이지태를 묶어 오게 하였으나 유숙(柳淑)이 힘써 구해서 면했다.
○ 을유일에 왕이 상주(尙州)를 떠나 임진일에 청주(淸州)에 이르렀다.
○ 원 나라에서 집현전 시독학사(集賢殿侍讀學士) 근도(?都)를 보내어 왕에게 의복과 술을 내려 홍두적을 파한 공에 대해 상을 주고, 아울러 고가노(高家奴)와 함께 해주에 있는 홍두적의 잔당을 협공하라 하였다.
○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송경(宋卿)이 파직당하자 송경이 홍언박(洪彦博)에게 말하기를, “창생들이 그대가 다시 정승이 되기를 바란지 오래되었는데, 이제 총재가 되어서 어찌 한 가지 일도 여러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없는가. 신축년에 창졸간에 파천하여 종사가 적에게 함몰되고, 주상께서 몽진(蒙塵)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것은 그대가 일찍 일을 도모하지 않아서이다. 지금 그대가 부병(府兵)을 장악했고 헌사(憲司)의 장이 되어 부귀가 극에 달했는데도, 어찌 국가를 걱정하지 않는가." 하니, 홍언박이 부끄러워했다.
○ 탐라목(耽羅牧) 호고독불화(胡古禿不花)와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 등이 성주(星主) 고복수(高福壽) 등을 끼고 반란을 일으켜 만호 박도손(朴道孫)을 죽였다.
○ 9월에 녹전색(祿轉色)을 두었다. 파천한 이후로 녹전의 출납을 창관(倉官)에게 맡기지 않고 따로 한 관직을 만들어 이것을 녹전색이라 부른 것이다. 용도가 넉넉지 못하므로 백성들에게서 쌀과 콩을 차등있게 더 거두어 이것을 무단미(無端米)라고 명목을 붙이니 백성들이 심히 괴로워했다.
○ 좌정승 유탁(柳濯)을 서북면홍적방어제군도통사(西北面紅賊防禦諸軍都統使)로, 밀직사 이순(李珣)을 도병마사로, 김한귀(金漢貴) 등 12명을 제도병마사로 삼았다. 이때 원 나라에서 협공하라는 명령이 있고, “홍두적이 다시 온다." 는 말이 있으므로 이런 일이 있었으나 얼마 안 되어 적이 무너졌다는 말을 듣고 그만두었다.
○ 왕이 도읍을 강화(江華)로 옮기고자 하여 평리 이인복(李仁復)을 개태사(開泰寺)에 있는 태조의 진영으로 보내어 점치게 하였다. 이에 대비가 홍언박(洪彦博)을 보고 면전에서 책망하기를, “너는 외척으로서 벼슬이 총재에 있어 안팎 인망이 모두 너에게 쏠려 있다. 지금 주상이 도읍을 옮기려는 것을 나라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는데, 너는 어찌해서 간하여 중지시키지 않는가." 하였다. 홍언박이 이 말을 왕에게 고하니 왕이 이르기를, “내 길흉을 알고자 한다." 하였는데, 점쳐본 결과 길하지 못하다 하니 국인들이 크게 기뻐했다.
○ 정당문학 한방신(韓方信)을 서해도 도순찰사(西海道都巡察使)로 삼았다.
○ 첨의상의(僉議商議) 강지연(姜之衍)을 원 나라에 보내어 신정을 축하하고 전리판서(典理判書) 이서룡(李瑞龍)을 원 나라에 보내어 천추절(千秋節)을 축하하게 했다.
○ 겨울 10월 무인일에 지진이 있었고 신사일에 또 있었다.
○ 재변이 있으므로 백관과 수령들에게 명하여 당시 정치의 잘잘못과 백성들의 이해를 말하게 하였다.
○ 감찰대부 김속명(金續命), 우헌납(右獻納) 황근(黃瑾) 등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땅은 신하의 도리에 속하는데 지금 상과 벌이 밝게 시행되지 않기 때문에 대소 신하들이 게을러져서 직무를 유기하며, 전투에서 공로가 있다 해서 백정(白丁)도 갑자기 정승으로 뛰어올라서, 천한 자들이 참람되이 조정 반열에 처하여 신도(臣道)가 흐리고 어지러워 지진이 있게 되었으니, 지금부터는 공이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관직 이외의 상을 주고, 죄가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벌을 주어, 관작을 중히 여기고 아끼시면 전후 좌우에 모두 바른 사람들이 있게 될 것이오니, 전하께서 누구와 더불어 부정한 일을 하겠습니까. 환자(宦者)는 신체가 손상된 음류(陰類)인데, 전하께서 날마다 서로 가까이 하시며 더러운 상말이나 황당무계한 말을 듣기 좋아하시어 밤이 새도록 주무시지 않으시고, 해가 중천에 떠서야 일어나시며, 대신들을 소원하게 하시니, 아름다운 계책과 바른 의논이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지금부터는 세 전(殿 태후ㆍ왕ㆍ왕비의 궁전)의 환자를 각각 10명씩만 두고 나머지는 모두 내보내시며, 바른 사람과 단정한 선비들이 항상 옆에 모시게 하소서.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오로지 경ㆍ사에 있는 것이지 불서를 보고 나라를 다스렸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전하께서는 지나치게 불법을 믿으시어 중의 무리들이 이것을 틈타 청탁하여 사욕을 채우니, 이제부터는 중의 무리가 궁중에 출입하는 것을 금하시고, 다시 경연(經筵)을 열어 날마다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물으시며, 항상 성현의 글을 보시고 이단의 말을 듣지 마시옵소서. 여자의 말은 정치를 하는데 큰 해가 되는데, 지금 바느질하는 낭자(娘子)나 내료(內僚)의 여자들까지 옹주(翁主)나 택주(宅主)로 봉하는 것은 참람됨이 분수를 넘어 높고 낮은 체통을 잃은 것이오니, 부득이한 종실이나 훈구 이외에는 봉작(封爵)을 허락하지 마시옵고, 이미 봉한 자의 작위도 거두시옵소서. 시골 백성들의 슬픈 일이나 잘살고 못사는 것은 수령에게 달린 것이온데, 지금 비록 대성(臺省)에서 보증하여 천거하라는 영이 있으나, 모두 안면이나 인정에 끌렸으니 그들이 천거하는 자들 중에는 심지어는 글자도 모르는 자도 있사옵니다. 이제부터는 수령이 나갈 때에는 직접 불러보아 그 소문과 실상을 살펴서 적당치 못한 사람을 천거하였거든 반드시 천거한 자를 벌 주시옵소서." 하였다. 이에 왕이 대간을 불러 힐책하니 대간이 면대해서 더욱 다투므로, 왕이 매우 노하였다. 유숙(柳淑)이 들어와 아뢰기를, “곧은 말을 구하시고서 그 말한 자를 노여워하심이 옳습니까." 하니, 왕의 노여움이 조금 풀렸다.
○ 박실(朴實)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제주가 원 나라에 예속되기를 청하니, 원 나라에서 부추(副樞) 문아단불화(文阿但不花)를 탐라만호(耽羅萬戶)로 삼았다.
○ 11월 갑인일에 지진이 있었다.
○ 12월에 서북면 만호 정찬(丁贊)이 원 나라에서 덕흥군(德興君) 탑사첩목아(塔思帖木兒 충선왕의 셋째아들)를 국왕으로 세운다고 보고했다.
○ 수춘군(壽春君) 이수산(李壽山)을 동북면 도순문사로 삼아 여진과의 강역을 정했다.
○ 찬성사 유인우(柳仁雨), 평리 황순(黃順)을 원 나라에 보내어 성절을 축하했다.
○ 요양성(遼陽省) 고가노(高家奴)가 보낸 사신이 양을 바치고 처녀를 보내주기를 청하니 전 중랑장 김광철(金光徹)의 딸을 보냈다.
[주D-001] :
[주D-002] :
[주D-003] :
'여행이야기(가정 이곡.목은 이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견한잡록(遣閑雜錄)2 (0) | 2013.05.28 |
---|---|
[스크랩] 부원군 이시언(李時言) 사간원이 아뢰었다.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0) | 2013.05.28 |
[스크랩] 고려사절요 제27권 공민왕2 (0) | 2013.05.28 |
[스크랩] 고려사절요 제28권 공민왕3 (0) | 2013.05.28 |
[스크랩] 고려사절요 제29권 공민왕4 (0) | 2013.0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