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불교)

[스크랩] 중생사지(衆生寺址) 그리고 능지탑(陵只塔)

장안봉(微山) 2013. 5. 14. 12:18

 

 

 

 

                                               중생사터              衆生寺址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낭산(狼山)에 있는 신라시대의 절터이다. '삼국유사'에 중생사에 관한 설화가 기록되어 있으며, 현재 건물로는 법당과 삼성각 요사채 2동이 있다. 유물로는 보물 제665호로 지정되어 있는 낭산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과 팔각원당형불좌대(八角圓堂形佛座臺), 석탑 부재 등이 절터에 산재하고 있으며, 석조관음보살상은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곳 중생사의 대비관음상(大悲觀音像)에 대한 설화는 '삼국유사'의 '삼소관음중생사 (三所觀音衆生寺) '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오(吳)나라의 한 화공(畵公)이 신라로 건너와서 '대비관음상'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보고 기도하여 복을 얻음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특히, 신라 말의 최은함(崔殷緘)은 대비관음상 앞에서 기도하여 아들을 얻었는데,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서라벌을 침범하여 부득이 아이를 대비관음상 앞에 놓아두고 난(亂)을 피하였다가 보름 만에 다시 찾아오니, 아이는 더욱 생기가 짙고 입에서는 젖냄새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 아이가 곧 최승로(崔承老)이다. 또 992년 3월, 이 절의 주지(住持) 성태(性泰)가 시주가 없어 절을 유지할 수 없음을 걱정할 때 대비관음상이 금주(金州 ..지금의 김해) 사람들의 시주를 얻어주었고, 절에 불이 났을 때 대비관음상이 스스로 절 마당으로 옮겨와 화재로부터의 재나늘 막았다고 한다.

 

 

 

 

 

                                          마애삼존상                     磨崖三尊像

 

 

 

 

 

 

 

 

 

 

 

 

 

                                                     보물 제665호

 

 

 

본존 높이 1m, 좌우 협시(脇侍) 높이 0.9m의 크기이다. 중앙은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있는 여래상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 좌우는 신장상(神將像)인 것 같다. 여래상(如來像)은 소발(素髮)에 낮고 넓게 퍼져 거의 보일듯말듯한 육계가 있다. 비교적 원만한 얼굴에 작은 눈은 눈두덩이 불룩하게 튀어나왔고, 코는 마멸되었으며, 입술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다. 표면이 거칠고 균열이 심한 상태이다.   

 

 

 

 

 

 

 

 

 

 

비교적 원만한 얼굴에 작은 눈은 눈두덩이 불룩하게 튀어나왔고, 코는 마멸되었으며, 입술은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다. 두 귀는 보이지 않고 양 볼은 통통한 모습이다. 목은 짧고 왼쪽 어깨 위에 통견(通肩)의 법의를 입고 있으며 의습(衣褶 ... 옷주름)은 두 줄로 복부(腹部) 앞으로 내려와 다시 중앙으로 내려졌다. 왼쪽 팔에도 한 줄의 의습이 보이며, 오른쪽의 의습(衣褶)은 오른쪽 어깨에서 무릎 밑으로 내려와 무릎을 완전히 덮어 발이 가려져 있다.수인(手印)은 법의(法衣)에 가려졌고, 원형의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은 음각(陰刻)되어 있다.

 

 

좌우의 양 협시(脇侍)는 모두 본존(本尊)을 향하고 있으며 갑옷을 입고 있다. 왼쪽의 신장상(신장상)은 고수머리이고 얼굴에는 비교적 높은 코에 역시 크고 긴 귀가 있다. 목에는 옷깃이 보이고 있으며, 왼손은 무릎 위에, 오른손은 검(劍)을 잡고 교각자세(交脚姿勢)를 취하고 있다. 오른쪽 신장상(神將像)은 인도(印度)의 터번 같은 것을 쓰고 있는 듯하며 눈을 부릎뜨고 매우 높은 코를 가지고 있다. 유희좌(遊戱坐)를 하고, 양손은 삼차극(三叉戟)을 잡고 갑옷을 입고 있다.  

 

 

 

 

 

 

 

 

 

 

 

 

 

 

                          십일면관음보살입상                  十一面觀音菩薩立像

 

 

 

 

 

 

관음(觀音)의 원래 이름은 대자대비(大慈大悲)하여 중생이 어렵고 고통받는 위기에 처하였을 때 그 이름을 열심히 외우면 적재적소(適材適所)에서 33응신(應身)으로  나타나서 중생을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구제해 준다..고 하여 ' 대자대비(大慈大悲), 구고구난(救苦救難) 관세음보살 '이고, 그 말이 줄어들어서 '대비관음(大悲觀音)' 또는 관음(觀音)이 되었다.

 

 

 

 

 

                                      십일면관음                    十一面觀音

 

 

 

 

 

이렇듯 수많은 중생의 고통과 염원을 돌보아야 했고, 또한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를 발원한 관음보살은 눈 두 개, 귀 두 개, 손 두 개만으로는 수많은 소망을 다 듣고 보고 풀어줄 수가 없어서, 그 일을 나누어 할 수 있는 눈과 손이 수없이 필요하였는데, 이를 상징화한 불상이 ' 얼굴이 11개인 관음 '이라는 뜻의 '십일면관음보살(十一面觀音菩薩) 또는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는 '천수천안관음보살(千手千眼觀音菩薩)'로 전지전능함을 표현하고 있다. 

 

 

그 외에도 성관음, 마두관음, 백의관음, 수월관음 등 중생들의 근기(根機)에  맞추어 시현(示顯)한 다양한 변화신들의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며, '십일면관음보살'에서의 '십일면(十一面)'은 여러 가지 인간의 재앙에 다양하게 대응하여 나타나는 모습을 상징한 것이며, '천수천안관음보살'에서의 천 개의 손과 천개의 눈은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많는 손과 눈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십일면관음보살입상'은  이곳 중생사(衆生寺) 근처에서 발견되어 반출되었다.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사진을 보면, 현재의 십일면관음보살입상이 삼존(三尊)의 형식을 지니고 있던 석불의 오른쪽 협시보살(脇侍菩薩)의 존재가 확인된다. 본존과 좌협시보살의 행방은 현재 알 수 없다고 한다.  전면에 화려한 장엄(莊嚴)을 나타내고 있는 이 보살상은 8세기 전반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좌대와 광배는 없어지고 불신(佛身)만 남은 보살상의 높이는 2m이며, 왼쪽 어깨부분이 결실되고 없는데, 출토 당시의 상태와 동일하다.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보관의 상부에는 정면과 좌우 그리고 뒷부분에 11구의 화불(化佛)을 나타내었다.

 

 

보관(寶冠) 아래에는 보발(寶髮)이 굴곡을 그리면서 이마와 귀 앞으로 길게 처져 있다. 얼굴은 다소 고전적인 근엄함을 갖추지 못하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었고, 왼손은 결실되어 형태를 알 수 없었으나, 현재는 왼팔을 복원하여 보관 전시하고 있다. 엷은 천의(天衣)는 편견(偏肩)의 형태를 나타내었고, 목에서부터 타고 내린 영락(瓔珞)의 장엄(莊嚴)은 부드럽게 교차되어 두 다리 아래로 길게 U자를 그리면서 드리워져 있고 계속해서 측면으로 연결되는 화려한 장엄(莊嚴)으로 조각되어 있다. 영락 안쪽으로는 부드러운 천의(天衣)가 두 다리 아래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면서 계속 겹쳐 있고 측면으로도 계속 연결되어 있다.  

 

 

 

 

 

 

 

 

 

 

 

 

 

 

 

 

 

 

 

 

 

석가모니의 마음, 즉 불심(佛心)은 대자대비(大慈大悲)이고, 이 대자대비를 형상화한 것이 십일면관음보살이며, 이 '십일면관음보살'은 어머니의 자비심 또는 모성애 같은 것이기에, 관음보살은 여성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보관(寶冠)에 여러 표정의 십일면여래(十一面如來)의 얼굴을 새김으로써 근기(根機)가 다른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十一面' 가운데 이마 위 정면의 세 얼굴은 자비(慈悲)로운 모습의 '자상(慈相)'으로 소박하고 어질고 착한 중생을 대하면서 그들을 격려하고 고양하는 소임을 맡았고, 왼쪽의 얼굴 셋은 분노(憤怒)하고 있는 모습의 '진상(瞋相)'으로 나쁜 일만 골라 저지르는 중생에게 엄한 얼굴을 보게 하여 무서움을 느껴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직무이며, 오른쪽 얼굴 셋은 하얀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멋지게 웃고 있는 '백아상출상(白牙上出相)'으로 정업(淨業)을 닦고 있는 이들을 격려하며 정진의 성과를 얻도록 밀어주는 일을 맡았고, 뒤쪽에 홀로 있는 한 얼굴은 세상에 살고 있는 착한사람과 악한 사람을 따로 가리지 않고 모두 부처의 바다 같은 품 속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즐거움을 큰 웃음으로 나타낸다는 '폭대소상(暴大笑相)'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정수리에 있는 화불(化佛)은 수련을 많이 해서 수준이 높아진 대승(大乘)의 자질을 가진 이들을 더욱 정진시켜 불도를 터득하도록 섭럽하는 임무를 띈 여래상의 모습이어서 '정상불(頂上佛)'이라고 한다.

 

 

 

 

 

 

 

 

 

 

 

 

 

                                            능지탑               陵只塔

 

 

 

 

 

 

경주시 낭산(狼山)에 흐트려져 있던 탑의 재료를 새로 맞추어 놓은 것으로 예로부터 능지탑(陵只塔) 또는 연화탑(蓮華塔)이라 불려왔다고 한다. 원래는 기단 사방에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새긴 돌을 세우고 그 위에 연꽃무늬가 있는 석재를 쌓아올린 5층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은 임종 후 10일 내에 왕궁 밖 뜰에서 검소하게 화장(火葬)하라고 유언하였는데, 탑 주변에서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의 조각이 발견되고, 사천왕사, 선덕여왕릉, 신문왕릉과 이웃한 것으로 보아 문무왕(文武王)의 화장터(火葬地)로도 추정하고 있다.   

 

 

 

 

 

 

 

 

 

 

 

기단부는 한 변의 길이가 12m,  높이가 1m인 석단(石壇)으로, 상부의 낙수면(落水面)은 토층을 덮고 잔디를 심는 방식으로 마감되었으며, 둘레의 중대석에는 12지상 9구를 방위에 맞추어 같은 간격으로 기둥처럼 배치하였다. 12지상 가운데 뱀(남면), 범(동면), 용(동면) 등 3구는 없어졌다. 현존 1지상 중 일부는 낭산 동쪽 황복사(皇福寺) 앞에 있던 유구로서, 목탑터로 알려져 오다가 최근에 왕릉터로 수정된 유적지에서 옮겨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갑석은 연꽃을 새긴 장대석과 정사각형 대석 두 가지인데 후자는 귓돌로 사용되었다. 1층 탑신부는 옥신(屋身)의 한 변이 6m이고, 기단부는 연화석을 얹었는데, 다만 상부에 굄돌 1단을 더 쌓고 토단을 경사지에 쌓아올려 사모지붕처럼 마감하고 중심부에 자연석을 마치 보주(寶珠)처럼 사용하였다. 한편 연화석은 양식적으로 8~9세기에나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여, 석단형 유구가 후대에 조성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낳고 있다. 능지탑은 예로부터 능시탑(陵屍塔) 또는 연화탑으로 불려왔는데, 무너진 채 1층탑신 일부와 기단 약간만이 돌무더기처럼 버려져 있던 것을 조사한 결과 '삼국사기'에 기록된 문무왕의  화장터 유적으로 결론지었다.

 

 

이후 1975년의 해체 발굴 조사로 정사각형 석단 중앙부에 찰주석이 지층 아래까지 세워져 있고, 찰주석(찰주석) 하부에는 공간을 포함한 토석 유구가 있으며, 토석 유구와 주변 지층이 까맣게 그슬려 있는것이 확인되어 화장묘(火葬墓)로 추정되었다. 그러니까 원래 창건 당시에는 목조건물로 된 묘(墓)가 있었으나, 이것이 언제인가 소실(소실)되자 이 화장묘(火葬墓)를 보존하고 예배하기 위하여 외부에 정사각형 석단을 축조한 것으로 추정하고 이를 문무왕의 화장 장소로 비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출처 : 김규봉 ... 사는 이야기
글쓴이 : 非山非野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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