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란사 皐蘭寺
고란사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부소산(扶蘇山)에 있는 사찰로 마곡사의 말사(末寺)이다. 고란사의 창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백제 때 왕들이 노닐기 위하여 건립한 정자(亭子)이었다는 설과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라고 하는 설이 전하고 있으며, 백제의 멸망과 함께 소실(燒失)된 것을 고려시대에 백제의 유민(流民)들이 삼천궁녀(三千宮女)를 위로하기 위하여 중창하여 고란사(高蘭寺)라고 하였다. 그 후 뒷 벼랑에 희귀한 고란초(皐蘭草)가 자생(自生)하기 때문에 고란사(皐蘭寺)로 부르게 되었다. 현종 19년인 1028년에 중창하였고, 1629년과 1797년 각각 중수(重修)하였으며, 1900년에는 은산면에 있던 숭각사(崇角寺)를 옮겨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931년에 지은 것을 1959년에 보수, 단장한 정면 7칸, 측면 5칸의 법당과 종각(鐘閣)인 영종각(靈鐘閣)뿐이다. 절의 뒤뜰 커다란 바위 틈에는 고란초(皐蘭草)가 촘촘히 돋아나 있고, 왕이 마셨다는 고란수의 고란샘터가 있다. 주위에는 낙화암, 조룡대(釣龍臺), 사비성(泗비城) 등이 있다. 고란사 일원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찍이 스러져간 백제(百濟)의 슬픈 역사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고찰(古刹) '고란사'는 햇볕이 잘들지 않고 언제나 그늘져 슬픈 영혼의 느낌을 담고 있다. 고란사의 뒤쪽에는 바위 틈새에 수줍게 피어있는 고란초가 있으며, 앞폭에는 도도히 흐르는 백마강이 언제나 함께 하여 말없이 인간세(人間世)의 흥망(興亡)을 지켜보고 있다. 고란사 앞을 울창하게 가려 나뭇잎 틈새로 조각조각 보이는 백마강의 짙푸른 강물에는 그늘이 묻어나 처연한 느낌을 주는데, 아마도 백마강을 떠도는 백제의 고혼(孤魂)들이 부르는 슬픈영혼의 노래가 바람 불 때마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면서 내는소리에 섞여 우리의 귀에 들리는 듯하다.
부소산 扶蘇山
높이는 106m이다. 백마강(白馬江) 기슭에 있다. 부소산은 산(山)이라기 보다는 평지에 두드러진 잔구(殘丘)로, 예로부터 고도(古都) 부여(扶餘)의 진산(眞山)이 되어 왔다. 산일기 보다는 언덕이라고 할 만큼 낮은 산이다. 산꼭대기를 중심으로 부소산성터, 군창지(軍倉址), 영일대(迎日臺)터, 송월대(送月臺)터 등 백제 때의 유적이 남아 있고, 조선 후기에 건립된 삽루(泗枇樓), 영일루(迎日樓), 반월루(半月樓), 백화정(百花亭) 등이 있다. 백화정(百花亭) 바로 밑에 삼천궁녀가 푸른 강물에 몸을 던졌다는 낙화암이 있고, 강기슭 가까이에 고란초로 이름난 고란사(皐蘭寺)가 있다. 그 밖에 부선산 남쪽 입구에 서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의 3충신을 모시는 삼충사(三忠祠) 그리고 삼천궁녀의 원혼을 위로하는 궁녀사(宮女祠)가 있다.
백마강변의 부쪽 끝자락에 자리한 고란사는 정조(正祖) 21년인 1797년에 중수된 은산의 숭각사(崇角寺) 건물을 1900년에 옮겨 지었으며, 1959년에 개축한 바 있다. 건물은 중앙에 대웅전을 두고 오른쪽에 범종각이 있으며, 대웅전과 연이어 오른쪽에는요사채 겸 종무소가 배치되어 있고, 요사채는다시 계단의 아래쪽에 관관용품 판매소와 연결되어 있다. 워낙 좁은 공간을 사찰로 활용하고 있어서 범종각을 제외하고는 본전(本殿) 법당 건물의 외관을한눈에 바라보기조차 어렵게 되어 있다.
더욱이 모든 전각은 부소산성(扶蘇山城)의 한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햇볕이 잘 들지 않고 언제나 그늘져 있어서 마음이 스산하다. 사찰이 들어 서 있는 방향은 동향(動向)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어서 그다지 좋지 않다. 이처럼 고란사는 그 규모가 작지만 나름대로 백제 멸망의 슬픈 역사를 체험할 수 있고 독특한 느낌을 지닌 매우 아담하고 아름다운 절집이다.
고란초 皐蘭草
부여 부소산 백마강 고란사 뒤의 절벽에서 자라기 때문에 고란초(皐蘭草)라는 이름이 생겼다. 절벽 빝에서 솟아나는 물을 고란정(皐蘭井)이라고 한다. 고란초는 고란사를 찾는 관광객들로 인해 거의 사라지고 지금은 사람들의 손이 미칠 수 없는 곳에만 약간 남아 있다. 전설에 따르면 백제의 궁녀(宮女)들이 임금에게 바칠 물을 고란정(皐蘭井)에서 받아갈 때 고란초 잎을 한두 개씩 물 위에 띄웠다고 한다.
고란초는 전국의 적지에서 가끔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대개 고란사(皐蘭寺)에서만 자란다고 알고 있으나, 공중의 습기를 받을 수 있는 강가 절벽이나 바닷가 숲속에서도 자라고 있다. 따라서 고란정 뒤의 절벽에서 자라는 고란초는 사라져 가고 있으나, 고란사 경내를 벗어난 곳에서는 아직 커다란 고란초가 자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고란사에서 자랐기에 고란초가 아니라, 고란초가 자라고 있기에 고란사이다.
고란초의 발견 ... 옛날 원효대사(元曉大師)가 금강(錦江) 하류에서 강물을 마시고 그 물맛으로 상륭에 진란(眞蘭)과 고란(皐蘭)이 있음을 알고 물맛을 따라 올라 이곳 부소산(扶蘇山)에서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졌는데, 지금은 진란(眞蘭)은 없어지고 고란(皐蘭)만 남아 있으나 고람마저 아깝게도 멸종의 위기에 있다... 세종대왕대향방약성대전의 기록에서 ...
고란정 皐蘭井
고란장에서 샘솟는 고란약수(皐蘭藥水)는 미네랄이 풍부하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약수(藥水)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고란약수는 '어용수(御用水)'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백제의 왕(王)들이 궁녀가 떠다준 고란약수를 매일 마셨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궁녀(宮女)들에게도 매일 아침 험한 산길을 올라 약수를 떠오는 일은 힘든 일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궁녀들은 간혹 고란약수 대신 근방에서 물을 길러 왕에게 바쳤다고 전해지고 있다.
문제는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물의 맛이 고란약수에 비견될 리 만무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백제왕들은 궁녀들이 길어다주는 약수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를 확인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왕의 체면에 궁녀에게 따져 물을 수도 없고, 그들을 감시하자니 그 또한 체통이 서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백제의 왕들은 궁녀들에게 약수 위에 고란초(皐蘭草) 잎을 띄워오게 하였다고 한다. 고란초는 지금도 멸종위기 식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지만, 당시에도 부여지역, 그 중에서도 고란사 인근에서만 목격할 수 있는 희귀식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에는 고란정(皐蘭井)에 가지 않고서는 고란초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현재의 고란사 대웅전 건물은 1900년 은산의 숭각사(崇角寺) 건물을 옮겨 지은 것이다. 1959년 대웅전을 개축(改築)할 당시 대들보에서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이 건물은 정조(正祖) 21년인 1797년에 중건(重建)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 묵서명(墨書銘)이 나왔다고 한다. 대웅전건물에 사용된 주춧돌은 여러 시대의 것들이 섞여 있어서 묘한 느낌을 준다. 가장 오래된 것은 백제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도 있고, 또 고려시대의 것으로 여겨지는 것과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함께 사용되어 있어 시대에 따라 굴곡(屈曲)진 사찰의 역사를 말 없이 대변하고 있다.
위 사진은 법당에 걸려 있는 현판 가운데 ' 진공묘유(眞空妙有) '라고 씌여진 현판이다. 글씨 옆에는 18세의 어린아이 신동호(申東浩)의 글씨라는 의미의 글도 함께 적혀 있다. 진공묘유(眞空妙有)는 공(空)에도 유(有)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진공(眞空)과 묘유(妙有)는 따로따로 의 별개가 아니다. 진공(眞空)이기 때문에 연기(緣起)의 모든 법이 완숙하고 묘유(妙有)이기 때문에 인과(因果)의 만가지 법이 같음을 말하는 것이다.
백마강 백마강
백마강(白馬江)은 일반적으로 금강(錦江)변 부여읍 정동리의 앞 범바위에서부터 우여읍 현북리 파진산 모퉁이까지의 약 16km 구간을 백마강이라고 부른다. 전라북도 장수군 신무산(神舞山)에서 발우너하는 금강(錦江)은 서쪽으로 꺾여 흘러서 공주(公州)에 이르러 웅진(熊津) 또는 금강이 되고 유구천(維鳩川)을 합하여 남쪽으로 곡류(曲流)하면서 부여군에 이르러 고성진(古省津) 또는백마강이 된다. 금강은 백마강을 지나 논산천(論山川)을 합하고 강경을 거쳐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를 이루며 황해(黃海)로 들어간다.
백마강(白馬江)은 당(堂)나라 소정방(蘇定方)이 백마(白馬)의 머리를 미끼로 하여 용(龍)을 낚았다는 바위를 조룡대(釣龍臺)라 하고, 강(江)의 이름도 사하(泗河)에서 백마강(白馬江)으로 바뀌었다고 하나, 백제 말기보다 160여 년이나 앞선 무령왕(武寧王) 시대의 기록에 이미 금강(錦江)을 ' 백강 (白江) '으로 표기하였던 사실이 있고, 역사적으로 ' 말(馬) '을 '크다'는 의미로 써온 것을 감안할 때 백마강은 곧 ' 백제에서 가장 큰 강 '이기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낙화암 落花岩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슬픈 이름 백제(百濟), 그리고 가장 슬픈 땅 부여(扶餘)에도 계절을 피었다 스러진다. 왜 백제를 떠올리면 가슴 한쪽이 시려오라. 1350여 년 전의 일인데도 이렇듯 생생할까. 백제는 이곳 낙화암에서 끝이 났다. 왕국의 멸망에는 여러 사연이 있겠지만 낙화암이 최후(最後)이었다. 슬픔 중의 슬픔이며, 아픔 중의 아픔이다. 일연(一然)스님은 '삼국유사(三國遺史)'에 이렇게 적었다.
백제 고기(古記)에는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강물에 임해 있다. 전설에는 의자왕(義慈王)과 여러 후궁들이 화(禍)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서로 이르기를 ' 차라리 자결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말자 '하고 서로 이끌고 이곳에 이르러 강물에 빠져 죽었으므로 속단에 타사암(墮巳岩)이라고 한다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다만 궁녀(宮女)만 떨어져 죽고 의자왕(義慈王)은 당(唐)나라에 가서 죽었으니, 당사(唐史)에 분명한 글이 있다.
일연(一然)은 이렇게 담담하게 서술하였지만 후세 사람들은 백제의 마지막을 그려보며 상상(想像)을 보탰다. 그리고 궁녀(宮女)들이 떨어져 죽은 바위를 찾아내 낙화암(落花巖)이라 명명하였다. 치마로 얼굴을 가리고 떨어지는 궁녀들을 누가 지는 꽃에 비유했는가. 참으로 처연하다. 그 때 궁녀들은 떨어짐으로 다시 살아났다. 꽃이 진 후 다시 피듯이, 그리고 누군가 떨어진 궁녀들이 삼천 명이었다고 했다. 따져볼수록 황당한 얘기이지만 이제 사실과는 상관없이 '삼천 궁녀'는 고유명사가 되어가고 있다.
이곳 낙화암은 눈물이다. 그 눈물은 절벽 아래 숨어 있는 고란사(皐蘭寺)에 고여 있다. 오늘도 낙화암에서 떨어진 궁녀(宮女)들을 기리고 있다. 고란사는 창건연대를 알 수 없다. 일본(日本) 사서(史書)에 ' 518년 소녀 셋이서 비구니가 되기 위하여 바다를 건너와 백제 고란사에서 정진하였다 '는기록이 있을 뿐이다.
고란사는 1028년(고려 현종 19)에 다시 지었다. 낙화암에서 떨어진 궁녀(宮女)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함이라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낙화암은 백제 멸망의 상징이었으니, 새 시대 세 권력은 백제지역을 끌어안아야 했을 것이다. 낙화암의 한(恨)을 풀어내야 했으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낙화암의 슬픔을 고란사로 끌어들인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강에 던진, 또 강에서 건져 올린 사연을 품을 곳은 고란사(皐蘭寺) 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란초의 독백
양지(陽地)도 그늘도 나는 싫어서 / 낙화암 바위 틈에 끼어 살지만 / 고란사 종소리가 나를 달래고 / 넓은 땅 마다하고 숨어 있어도 / 못잊어 찾아주는 고란초라오 / 이 몸은 실낱같이 갸냘프지만 / 눈서리 거친 바람 이겨 가면서 / 겨레의 흥망성쇠 지켜 봤다오 / 인정과 세태도 역역히 보며 / 잎 뒤에 노랑점을 찍었답니다.
요화들아 누구에게 아첨하느뇨 / 사피스런 꽃송이 부럽잖아요 / 주렁 주렁 열매도 부럽잖아요 / 면면히 홀씨와 향기를 풍겨 / 부소산과 더불어 살아 왔다오 / 사시상청 푸른 절개 천추에 전한 / 삼천궁녀 넋이가 내 맘이라오 /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도 내 맘이라오 / 약수에 네 몸 띄워 님께 바쳐온 / 백제의 그 정신이 내 맘이라오
백화정 百花亭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08호로 지정되었다. 부여 부소산성(扶蘇山城) 북쪽 금강변의 험준한 바위 위에 육각형(六角形)으로 지은 정자이다. 백제 의자왕(義慈王) 20년인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침공으로 함락되자 당시 궁녀(宮女) 3천여 명이 이곳 절벽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백화정(百花亭)은 죽은 궁녀(宮女)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1929년 당시 군수 홍한표(洪漢杓)가 세운 것이다. 바닥을 지반에서 높이 띄우고 남쪽에 나무 계단 하나를 두어 출입할 수있게 하였다. 마루에는 난간을 설치하여 두었으며, 천장에는 여러 가지 연화무늬를 그려 놓았다.
부여(扶餘)에 오면 저절로 부소산(扶蘇山)부터 오르게 된다. 풍경(風景)이 먼저고 역사(歷史)가 뒷전이라서가 아니다. 부소산은 바로 역사(歷史)가 아닌가. 따로 국밥처럼 풍경을 따로 두고 있는 역사는 없는 것이다. 아무튼 산을 오른다. 해발 106m. 크언덕에 지나지 않은 높이이지만 부소산을 언덕에 비유하면 실례이다. 키는 작지만 산다운 면모는 다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사라진 문명을 만나러 가는 길
낙화암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백마강(白馬江), 이편저편의 풍경처럼 삽상하고 근사한 데가 얼마나 있을까. 강줄기와 거너편의 백사장, 남녘 들판, 낙화암 바위 벼랑까지도 계절과 날씨에 따라 모양새를 달리 하는데, 아연 강폭이 넓어지면서 물빛이 달라지고 들판은 더욱 아득하니 넓어진다. 디디고 선 벼랑마저 더욱 가팔라져 주위가 온통 처연한 아름다움에 휩싸이는 광경을 보게 된다.
이 경치를 보며 더러 나는 어린애처럼 부여(扶餘)와 경주(慶州)를 비교하기도 한다. 경주(慶州)에는산(山)은 있지만 강(江)이 없다. 경주를 가리켜 빼어난 풍치를 가진 도읍지라고 하기는 어렵다. 한데 부여(扶餘)는 그림처럼 산수(山水)를 모두 갖추었다. 날마다 부소산에 올라 경치를 바라보던 백제의 임금과 벼슬아치들에게 신라(新羅)와 고구려(高句麗)는 얼마나 멀고 아득했을까. 어쩌면 그들과 국경을 같이 한다는 현실조차 잊었을지도 모른다. 그림 같은 강(江)으로 나당(羅唐)의 군선(軍船)이 밀려들었다는 얘기조차 꿈같은 소리로 들린다. 부소산과 백마강은 그렇듯 짝을 이뤄 어여쁘다.
학자들도 부소산성(扶蘇山城)의 구실에 대하여 유사시에는 군사 방어시설이지만 평상시에는 옹과 귀족들이 유흥(遊興)과 소풍을 즐기는 비원(秘園)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낙화암(낙화암)에 대해서 '삼국유사'는 궁녀들이 빠져 죽었다는 뜻으로 타사암(墮死巖)이라고 적고 있다. 나라를 망친 의자왕(義慈王)은 중국에 끌려가서도 체신 때문에 손에 물을 묻히지 않고 여생을 보냈는데, 불타는 궁궐에서 내쫒긴 궁녀들만 애꿎게 천 길 벼랑에 몸을 던졌다. 망국(亡國)의 역사에서 이런 비장(悲壯), 참혹미를 갖춘 전설이 곁들여지는 법이다. 그리고 자연(自然)은 자연 그대로 그 전설(傳說)을 먹고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과 더 긴밀하게 감정을 교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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