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기도)

[스크랩] 다산 생가(茶山生家)

장안봉(微山) 2013. 4. 11. 00:17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다산 유적지 입구 - 18년간의 장기간에 걸친 유배생활 속에서도 민생을 위한 경세서의 학문인 실학을 연구하여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500여권에 이르는 귀중한 저서를 남긴 다산은 정치.경제.교육.사회전반에 걸친 개혁을 부르짖은 시대의 개혁가 이자 애국.애민의 길만을 걸었던 참 선비였다.

 생가 입구에 있는 삼문 - 실학연수라고 쓰인 편액이 보인다.

 생가 여유당 - 원래 있던 자리가 팔당댐으로 수몰되고 현 다산의 묘 아래로 이전하였다.

 사랑채.

 

 

 안채.

 

 

 

 

 

 

 다산 정약용의 묘 - 능내리의 다산유적지에 있는 정약용의 묘(경기도 기념물 제 7호)는 발치 아래를 감싸고 돌아 흐르는  두물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듯한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묘 앞에는 비석상과 상석, 그리고 자우에 망주석이 배열되어 있다. 봉분은 단분이며 숙부인 풍산 홍씨와의 합장묘이다.

 다산 정약용은 조선후기의 대학자로서 1762년(영조38) 현재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현마을에서 태어났다.  정약용은 어려서부터 이익의 학문을 접하였고, 이벽에세 서양서적을 얻어 읽기도 하여 실학과 서학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 하였다. 1789년(정조 13)에 문과 급제 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으나 천주교인이라 하여  충청도 해미로 귀양갔다가 10일 만에 용서되어 풀려났다. 또한 거중기와 녹로(도르래)를 만들어 수원서을 쌓는 공정을 단축하는데 크게 고헌하였다.  그 후 경기도 암행어사를 거쳐 동부승지·병조참의가 되었으나 주문모 신부의 변복 잠입 사건이 터지자 형 정약전과 함께 이 사건에 관련되어 충청도 금정찰방으로 좌천되기도 했다. 
          

 1801년(준조 1)신유박해 때 경상북도 포항 장기로 유배된 뒤에  황사영백서사건이 일어나  이 해 10월 다시 전라남도 강진으로 옮겨졌다. 이 후 오랜 유배생활에 들어가며 조선사회의 현실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여러 사상과 학문을 검토하여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하였다.  1818(준조 18)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마현마을 고향집으로 돌아와 저술생활로 평생을 보냈으며 1836년(현종 2) 75세로 생을 마쳤다.         

 정약용 사당 - 문도사.

 기념관.

 문화관 - 문화관에서는 다산 정약용의 일대기를 담은 영상물을 상영하고 있으며 다산 관련 강연회와 학술발표회가 열리고 있다.   또한 다산문화제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행사들이 사계절 내내 이곳에서 열리고 있다.

 거중기.

 강진 유배시절 즐겨 찾았던 정자 천일각.

 다산 정약용 선생은 18년의 유배기간 동안 경서학에 전념, 실학의 대가가되어 「목민심서」48권, 「경세유표」49권, 「흠흠신거」30권 등을 쓰면서 정치·경제 등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500여 권의  방대한 책을 저술하였다. 

 

 생가 앞을 흐르는 초천.

한강.

출처 : 바람 통신
글쓴이 : 문화 탐험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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