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기도)

[스크랩] 이여발 묘(李汝發 墓)

장안봉(微山) 2013. 4. 11. 00:26

 

 인천 남동구 운연동 343-2에 있는 이여발의 묘소 입구. 인천에도 이런 동네가 있나 싶을 정도의 시골에 놀라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안보여서 찾아가기가 어려웠다.

 보호 울타리 옆에 걸린 경고문이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조선 숙종때 무관 이여발(1621∼1683) 장군의 묘. 분묘의 형태는 호석이 없는 봉분 앞에 비석과 상석이 배치되어 있으며, 좌우에 망주석이 세워져 있다. 그 앞에 문인석 한 쌍과 10여 미터 아래에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조선의 무관인 이여발(1621∼1683)의 묘이다. 이여발의 자는 군실(君實), 시호는 정익(貞翼)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의배(義培)의 손자로서 조선 효종 2년(1651) 무과에 급제, 비변랑(備邊郞), 도총사를 거쳐 숙천(肅川)부사로 선정을 베풀어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다.

 충청병마절도사를 거쳐 특히 회령(會寧)부사에 보직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위계에 오르고 한흥군(韓興君)에 봉해졌는데, 회령은 북방의 거진(巨鎭)으로서 야인(野人)들과 서로 무역하는 시장이 있어 야인상인들이 오는 정원도 없고 체류하는 기한도 없어서 우리의 피해가 많았다. 이때 이여발이 부임하여 상인의 출입인원을 320명 이내로, 체류일수를 20일 이내로 규정하여 피해를 줄였다.

 현종 때 병·공조참판에 특진했으며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나가 성을 수축하고 군사들에게 사예(射藝)를 연습시키는 한편 병기를 준비하여 북방 수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어영대장, 한성부 좌·우윤을 역임하고 숙종 때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러 사망하였다.

 

 

 

  분묘의 형태는 호석이 없는 봉분 앞에 비석과 상석이 배치되어 있으며, 좌우에 망주석이 세워져 있고 그 앞에 문인석 한 쌍이 세워진 평범한 묘제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분묘 앞 10여미터 아래로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신도비.

 이여발은 효성이 지극하고 매우 청렴결백했다고 하는데, 그가 죽었을 때 집안이 궁핍하여 자손들이 팥죽을 쑤어놓고 장례를 치를 정도였다고 하며, 이를 본 사람들이 장례를 대신 치러주었다고 한다. 이여발은 숙종 9년(1683)에 인천 신현동 문중묘지에 안장되었다가, 숙종 29년(1703)에 현 위치로 이장되었다.

 

 

출처 : 바람 통신
글쓴이 : 문화 탐험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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