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계 성혼선생의 묘와 사당을 알리는 표석.
묘역 입구에 세워진 홍살문.
사당.
이춘문이라고 쓰인 삼문.
성혼 신도비(우)와 성수침의 묘갈(좌).
묘소 입구 오른쪽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있는데 비문은 김상헌(金尙憲)이 짓고 김집(金集)이 썼으며 전액(篆額)은 김상용(金尙容)이 썼다.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향양리에 있는 조선 중기 성리학의 대가인 우계(牛溪) 성혼(1535∼1598) 선생의 묘소로 경기도기념물 제59호이다. 묘역은 사성으로 둘러져 있고 봉분을 중심으로 우측에 묘비가 세워져 있으며 봉분정면에 상석과 향로석이 배치되어 있다. 상석앞에는 장대석으로 계단을 쌓았으며 좌우에 동자석을 배치하였다.
선생은 휴암 백인걸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같은 고을에 사는 이이와 사귀게 되면서 평생의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학문 성향에서는 이황을 지지하여 이이와는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의 덕행이 뛰어나 여러 번 관직이 주어졌으나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이이의 권유로 이조참판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에는 우참판에 이르고 선조 27년(1594)에는 좌참판에 이르렀다. 그가 죽은 뒤 선조 35년(1602)에 사화와 관련하여 관직이 박탈되었다가 인조 11년(1633)에 다시 좌의정의 벼슬이 내려졌다.
묘를 정면으로 하여 오른쪽에는 인조 27년(1649)에 김집이 글을 짓고 윤순거가 글씨를 써서 세운 묘비가 있다.
조선중기(朝鮮中期) 성리학의 대가인 성혼(成渾 1535 ∼ 1598)선생의 자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 또는 묵암(默庵),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파평(坡平) 우계(牛溪) 옆에 살았으므로 학자들이 우계선생이라 불렀다.
성혼은 명종(明宗) 6년(1551) 생원·진사의 초시 (初試)에 모두 합격하였으나 복시(復詩)에는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배우고, 명종 9년에는 같은 고을의 이이(李珥)와 사귀게 되면서 평생지기가 되었다.
이황(李滉)의 학설을 이어 받아 이기호발설(理氣互發設)을 지지하여 이이와 선조(宣祖) 5년(1572)부터 6년간에 걸쳐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논쟁을 벌여 유학계의 큰 화제가 되었다. 선조초부터 여러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다가 이이의 권유에 의해 이조참판(吏曹參判)에 특배되고 임진왜란 중에는 우참판(右參判)에 오르고 선조 27년 좌참판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일본과의 화의를 주장하다 선조의 노여움을 사게되어 고향인 파주로 돌아왔다.
그가 죽은 뒤 선조 35년 기축옥사(己丑獄事)와 관련하여 삭탈관직 되었다가 인조(仁祖)11년(1633) 복관되어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조선 전기의 학자, 문정공 청송 성수침(文貞公 聽松 成守琛 /1493(성종 24)~ 1564(명종 19))의 묘다. 성혼의 부친으로 성혼의 묘 아래에 있다.
본관은 창녕. 자는 중옥(仲玉), 호는 청송(廳松)·죽우당(竹雨堂)·파산청은(坡山淸隱)·우계한민(牛溪閒民). 아버지는 대사헌을 지낸 세순(世純)이다. 아우 수종(守琮)과 함께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519년(중종 14) 현량과에 천거되었으나, 곧 기묘사화가 일어나 스승 조광조가 처형되고 그를 추종하던 많은 유학자들이 유배당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두문불출했다. 이때부터 경서를 두루 읽고 태극도(太極圖)를 깊이 연구했다. 또한 〈통서 通書〉 이하의 성리학 서적을 모두 모아 연구에 전념했다.
1541년 후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52년(명종 7)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를 비롯해서 여러 차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그의 문하에서 아들 혼(渾)을 비롯해서 많은 유학자들이 배출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나 일가를 이루었다. 죽은 후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파주 파산서원(坡山書院), 물계 세덕사(世德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청송집〉이 있으며, 글씨로 〈방참판유녕묘갈 方參判有寧墓碣〉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성수침이 세상을 떠날 때 집안이 하도 가난하여 장례를 치룰 수가 없었다. 사간원의 상소로 국가에서 관곽과 쌀, 콩, 역부, 장례 제구를 제공해주었다. 사헌부집의를 증직하는 은전까지 베풀어 주었다.
조선 초기 조광조의 도학사상은 대의명분과 요순지치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것이었다. 기묘사화로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하게 되자 성수침은 평생을 산간에 묻혀 지냈다. 여기에서 학문탐구와 자기수양으로 자신의 도학사상을 몸소 실천했다. 문하에 아들 성혼을 비롯한 많은 석학들이 이에서 배출되었다.
이이가 행장을, 기대승이 묘지명을, 이황이 묘갈명을, 조익이 묘갈음기를 지었는데, 이것은 조선 중기 학술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어떠했는지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후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청구영언』,『화원악보』에 시조 3수가 전한다.
2011년 11월에 준공된 우계기념관 - 묘역 입구에 있다. 우계의 성품답게 맞배로 지은 단아하고 기품이 넘치는 건축이다.
이 우계기념관은 현대에 지은 건축 중에 백미로 꼽히지 않을까 한다.
기념관 정문 - 동네 골목길을 가듯 자연스럽게 이어진 길에 대문도 없는 뒷집처럼 생겼다.
정문에서 본 기념관 출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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