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불교)

[스크랩] 개화산 약사사(開花山 藥師寺)

장안봉(微山) 2013. 4. 11. 00:11

 

개화산 약사사(開花山 藥師寺)는 서울 강서구 개화동 332-1, 해발 126m 구릉에 위치하며, 조선 후기 겸재(謙齋) 정선(鄭歚, 1676~1759)이 절경에 감탄하여 '개화사(開花寺)'란 제목으로 개화산과 절. 그리고 주변의 풍경을 그림으로 여럿 남겼을 정도다. 개화산은 산세가 수려하고 아름다워 가히 한송이의 연화가 피어나는 형국과 같다 하여 붙여졌다. 

사찰의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삼한 혹은 신라 시대로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 시대의 유물인 석불과 삼층석탑이 남아 있는 점으로 보아 고려 시대에도 법등이 이어져 왔음을 짐작해볼 따름이다. 이후 조선 후기까지는 별다른 역사를 찾아 볼 수 없다가 1737년(영조 13)에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에 의해 크게 중수된 후 송씨 가문의 원찰이 되었다. 송인명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어려서 아주 가난했는데 개화사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면서 공부를 하였고, 1736년에 좌의정에 오르자 그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절을 크게 고쳐지었다. 그리고 후손인 송백인이 1887년 또 한차례 중수하였으며, 광서 12년에 양창선이 회주하여 수선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개화사는 조선 순종 이후 약수암(藥水庵), 약수사(藥水寺), 약사사(藥師寺) 등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는데 아마도 절에서 솟아나는 약수와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과 매우 연관성이 있는 것 같다. 특히 법당에 봉안되어 있는 석불은 영험이 있어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면 병이 치유되고 소원을 성취한다고 전해져 온다.

 

그러나 현재 약사사에는 지난 과거의 건물들은 하나도 찾아 볼 수 없다. 아마 이곳은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산 정상에 봉화대가 있음)로, 임진왜란과 6.25 전쟁을 겪으면서 전화로 건물들이 소실되고 건물들 또한 파손되거나 유실되었다.

지금 현존 건물들은 지난 1986년 당시 주지로 있던 변설호 스님이 중창불사의 원력을 세워 대웅전 건립을 위한 주초와 상량을 하였으나 완공을 하지 못하고 1988년 후임 주지로 장영하 스님이 부임하면서 대웅전 불사를 마무리하고 이어 요사 1동과 범종각을 신축하여 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절마당의 전망이 확 트여 강 건너 덕양산(행주산성)이 한 눈에 들어오고 멀리 인왕산, 백악산, 남산을 비롯한 관악산과 그 사이를 구비 쳐  흐르는 한강이 약사사를 감싸고 흐르고 있어, 예로부터 파릉 8경의 하나로 불리고 있다.

 개화산 약사사 삼층 석탑은 원래부터 약사사의 뜰 한가운데 있던 정중탑이다. 현재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9호로, 단층기단 위에 화강석으로 축조한 4m높이의 3층탑으로 고려 말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이 있는 약사사는 행주산성이 마주 보이는 강안(江岸)에서 동쪽으로 향한 사찰로서 오늘날까지 법등(法燈)을 이어오고 있는 오랜 사찰인데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의하면 이 산의 봉수(烽燧)는 동쪽으로 서울의 목멱산(木覓山:남산) 제5봉, 서쪽으로는 김포현 북성산과 응한다고 하였으며, 또 옛 기록에는 절의 위치를 개화산 봉대하(開花山 熢臺下)라고 말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일찍부터 국방과도 관련된 곳에 이 사찰이 건립되었음을 알 수있다.

 탑은 받침대가 되는 기단을 1층으로 두고, 그 위로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떨어져 나가고 없고 기단은 간략화되어 일반 석탑에서와 같은 기둥조각이 보이지 않는다. 탑신을 이루는 각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은 밑면에 5단 내지 6단의 받침을 두었고, 윗면에는 완만한 경사가 흐르고 있다.

 

비교적 길쭉한 모습을 하고 있는 탑으로, 기단이 간략화되고 지붕돌의 밑면받침을 형식적으로 새겨두고 있어 불교미술이 다소 퇴화되던 고려 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인 양식은 훌륭한 편이 못되나, 고려후기의 시대적 반영을 잘 나타내어 고려중기의 탑파건축(塔婆建築)의 변천과정을 알게 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노반에서 그 위의 상륜부는 유실되었다. 탑의 받침대가 되는 기단(基壇)은 1층으로 지대석 위에 널찍한 판돌을 각 면마다 한 장씩 두고, 그 위에 한 장의 돌로 이루어진 갑석을 올렸다. 기단의 면석에는 일반적인 석탑에서 보이는 우주와 탱주가 생략되었으며, 갑석 중앙의 탑신받침도 간략하게 표현하였다.

 약사사 석불(藥師寺 石佛)은 높이 3m의 석조여래입상으로 원통형의 돌기둥에 얼굴과 신체적 특징을 간략히 새기고 머리 위에는 돌로 만든 보개(寶蓋)를 씌워놓은 매우 이례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보개의 아랫부분에는 수십 자의 명문이 남아 있다고 하나 현재는 읽을 수 없어 아쉽다. 원래 이 석불은 현재 위치의 바로 옆에 있는 목조건물 안에 있었던 것으로 하반신이 땅 속에 묻힌 채 모셔져 있었으나 1974년에 건물이 철거되면서 새로 지은 지금의 법당으로 옮겨온 것이다.

법당 안에는 석불입상 앞에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중심으로 지장보살을 비롯한 보살상이 좌우에 봉안되어 있으나 이 삼존불은 근래에 만들어진 것이다.

 

 

약사사 석불은 금동 삼존불상의 중심에 높게 자리하여 당당히 사찰의 본존불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으나 불상의 일반적인 특징을 제대로 갖추지 않아 마치 무덤을 지키는 석인상(石人像) 혹은 민간신앙의 대상인 장승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얼굴이 몸체에 비해 크게 표현되어 있는 대신에 어깨가 좁고 위축되어 있어 목과 거의 붙어 있다. 얼굴표현에서도 마찬가지로 약간 튀어나온 왕방울 만한 눈과 삼각형의 코, 그리고 일자형(一字形)의 입술 등에서 기괴하면서도 투박하고 거친 듯한 조각기법이 나타나 있다. 또한 어두운 돌에서 잘 드러나지 않은 이목구비를 조금 더 뚜렷하게 보이도록 최근에 조각을 더한 흔적이 보인다.

 

  

법의는 양어깨를 덮고 있는 통견(通肩)으로 걸쳤으며 가슴 위로는 X자로 여미어 입은 내의(內衣)가 표현되었다. 옷 주름은 형식적으로 간략하게 처리되어 있지만 입체감이 떨어진다. 팔목 안쪽으로 소맷부리가 보이며 손목이 많이 드러나 있는 두 손은 가슴 앞으로 모아 연꽃 한 송이를 쥐고 있다.


약사사 석불은 일반적인 불상형태에서는 매우 벗어나 있지만 법당 안에 본존불로 봉안되어 있고 전반적으로 토속적인 경향이 강한 것으로 조선시대 민간신앙에 의해 조성된 불상으로 보인다. 따라서 약사사 석조여래 입상으로 표기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어있다.

 

 

이 불상은 『개화산약사암중건기』에 일장미륵(一丈彌勒)이라고 나온다. 개화사가 약사암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조선 순조 때부터로 약사불을 모셨기 때문이라고 전하나 이를 약사불로 보기는 곤란하다. 오히려 그 모양새를 미루어 관음보살상이라 생각되는데, 예부터 돌부처를 흔히 미륵이라 통칭하던 관습상 미륵불로 보기도 한다.

  

 

출처 : 바람 통신
글쓴이 : 문화 유람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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