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불교)

[스크랩] 흥천사(興天寺)

장안봉(微山) 2013. 4. 11. 00:07

 

 흥천사는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위치한 조계종 사찰로 조계사의 말사이다.

 〈사적기〉에 의하면 1396년(태조 5) 왕실발원으로 170여 칸에 이르는 대가람을 이룩한 뒤 극락보전에 궁중원불인 명국보타락가산(明國寶陀洛伽山) 42수 관음보살상을 봉안하고, 수도와 보국안민을 기도하는 향화(香華)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1399년(정종 1) 신덕왕후강씨(神德王后姜氏)의 원당이 되었다. 1510년(중종 5) 화재로 소실되자 1569년(선조 2) 왕명으로 절을 함취정유지(含翠亭遺址)로 옮겨 지었다. 1794년(정조 18) 성민(聖敏)·경산(慶山)·경신(敬信)의 발원으로 현 위치로 이건한 뒤 절 이름을 신흥사(神興寺)로 바꾸었다. 1846년(헌종 12)에는 칠성각을, 1849년에는 적조암을, 1853년(철종 4)에는 극락보전을, 1855년에는 명부전을, 1865년(고종 2)에는 대방과 요사채를 짓고 절 이름을 원래대로 고쳤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보전·명부전·용화전·칠성각·독성각·만세루·범종각·승방 등이 있다.

 흥선대원군이 쓴 흥천사 현판.

 

 종각 -  원래 흥천사 동종은 현재 경운궁(덕수궁) 광명문 안에 보존되고 있다. 높이 2.82m, 지름 7m, 두께 3㎝로, 흥천사명 동종이라고 한다. 1462년 7월 태조()가 후비 신덕황후를 추모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처음에는 덕수궁 부근에 유폐된 신덕황후의 무덤 근처인 흥천사에 있었으나, 흥천사가 1510년(중종 5)에 화재로 소실되자, 1747년(영조 23)에 광화문으로 옮겼다. 경술국치 이후, 일제에 의해 창경궁으로 옮겨졌고 나중에 덕수궁 안으로 옮겨왔다.

이 종은 규모와 문양, 주조기술이 탁월하며, 종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조성시()의 조직체계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고려 말부터 들어온 중국 종의 요소를 첨가하여 새로운 조선 전기의 종으로 정착되는 과정을 보여주어 이후 만들어지는 조선 전기 범종의 기준이 된다. 2006년 1월 17일 보물 제1460호로 지정되어, 여전히 덕수궁에서 관리하고 있다. 제자리로 돌아와야 하지 않을까?

 

 

 

 

 

 

 

 흥천사 극락보전은 서방 극락세계에서 설법하고 있는 아미타불을 봉안한 법당으로, 조선 철종 4년(1853)에 다시 지어진 건물이다. 흥천사는 창건 당시부터 정토신앙의 사찰로 유지되어 왔기 때문에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모신 극락보전이 중심건물이다.
흥천사는 조선 태조의 왕비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능인 정릉(貞陵)을 수호하는 원찰(願刹)로 태조 6년(1397)에 창건된 절이다. 창건 당시에는 서울 도성 안에 해당하는 지금의 중구 정동에 있었으며, 국가적 행사가 자주 열렸고 건물도 170여 칸이나 되는 대가람이었다고 한다.

왕비의 능과 원찰을 도성 안에 두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대개는 왕의 능이라 하더라도 성 밖에 두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살아 생전에 왕비를 극진히 사랑했던 태조는 왕비의 능을 궁궐에서 가까운 곳에 마련하였고, 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능의 동쪽에 당대의 최대의 가람으로 흥천사를 창건했던 것이다. 흥천사 건립에 참여한 김사행(金師幸), 김주(金湊) 등은 고려말 조선 초의 각종 국가 공사를 시행하였던 대표적인 건축가였다.

 

이처럼 태조가 신덕왕후의 원찰로 창건한 흥천사는 처음부터 조계종의 본사로 번성을 누렸다. 하지만 태조가 죽은 뒤 태종은 신덕왕후의 능을 도성 밖 북한산 기슭으로 옮겼고 오랜 동안 돌보는 사람도 없이 버려져 있었다. 선조(宣祖) 때에 와서야 신덕왕후의 제사를 이 곳 정릉에서 정기적으로 지내게 되었고, 현종 10년(1669)에는 송시열(宋時烈) 등 대신의 청원으로 능을 수리하였다. 이 과정에서 능과 너무 가까이에 있던 작은 암자를 조금 떨어진 곳으로 옮기고 신흥사(新興寺)라는 새로운 이름의 원찰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 후 정조 18년(1794)에 성민(聖敏)·경신(敬信) 등이 다시 한번 새롭게 중창하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그 후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요사를 짓게 되는데, 이때 대원군은 절이름을 '신흥사'에서 원래의 '흥천사'로 복원하도록 하면서 흥천사라는 글씨를 내려 주어 지금도 만세루에 현판으로 남아있다.
흥천사 극락보전은 철종 4년(1853)에 구봉 계장(九峰啓壯) 스님이 중수하였다. 규모는 정면 3칸·측면 3칸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놓인 다포양식 건물이다.  

  돌층계를 정면에 두고 기둥은 창방과 평방으로 결구하고 기둥 사이에도 전ㆍ후면에서는 각 2구, 측면에서는 각 1구의 공간포를 두었다. 정면 3칸에는 꽃살 창호를 달고 좌ㆍ우 뒷면은 판벽이다.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가운데 우물천정을 두었다. 문에는 화려한 꽃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가운데 두 기둥 위에 돌출 되어 있는 용머리 장식이 특징이다.

 극락보전이란 십겁(十劫) 이전에 성불(成佛)하고 서방 극락세계에서 대중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는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이다. 이 부처는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중생이 염불을 하고 일념이라도 지심회향(至心廻向)하면 곧 왕생할 수 있게 해주며, 그 때 서방에서 성중(聖衆)이 와서 그 사람을 맞이해 간다고 한다. 그 세계에 살게 되면 다시는 전생(轉生)하지 않으므로 생사(生死)의 윤회(輪廻)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극락보전에는 현세의 고통에서 벗어나 안락하고 살기 좋은 극락의 정토세계로 이끌어 주는 아미타불상과 그 뒷면 벽에 아미타불화가 배치된다.

 이 극락보전의 구조와 형태는 조선시대 말기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 시대 건축의 모범이 될만하다. 이 건물은 19세기 사찰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화려한 목조 건축으로 뛰어난 건축 기술을 보여 주고 있는데, 서울에서는 희귀한 사찰 건축이므로 매우 귀중하게 평가받고 있다.

 용화전.

 흥천사 명부전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해 주는 지장보살을 모신 법당으로 철종 6년(1855)에 순기(舜麒)가 세웠으며, 고종 31년(1894)에 중수되었다.
조선 태조가 궁궐 가까운 도성 안에 조영한 신덕왕후(神德王后)의 강씨(康氏)의 능인 정릉(貞陵)을 수호하는 원찰로 태조 4년(1395)에 창건한 흥천사는 전각이 무려 170여 칸에 이르는 조계종의 본사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정릉이 북한산 아래로 옮겨간 후에 절의 역할이 그 창건 목적과 멀어지다가 연산군 시절에 화재로 전소되면서 자취를 감추었었다. 흥천사가 다시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선조 9년(1576) 정릉이 복릉(復陵)되면서부터이다. 현종 10년(1669)에는 송시열(宋時烈) 등의 청원으로 능을 수리하였고, 원찰을 신흥사(新興寺)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후 정조 18년(1794)에 성민(聖敏) 등이 절을 새롭게 중창하면서 위치를 조금 옮겨 지금의 자리를 잡았고, 철종 4년(1853)에에 계장(啓壯)이 법당을 중수하였으며, 2년 뒤인 철종 6년(1855)에 이 명부전을 새로 지었다. 10년 후인 고종 2년(1865)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지원으로 절을 중창하였으며, 이 때에 대원군이 원래의 이름으로 복원하여 '興天寺'라는 글을 내렸고 지금도 만세루에 현판으로 남아있다.
흥천사 극락보전을 바라보고 오른쪽에 있는 이 건물은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단층 목조건물로서 좌우에 풍판을 달았으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공포는 외일출목(外一出目), 내이출목(內二出目)으로 주두(柱頭) 위에 앙설(仰舌) 두 개를 놓은 익공계 공포로서 기둥 사이의 도리 밑에는 운공(雲工)을 2구씩 받쳐 놓았다. 내부에는 살미첨차가 판형(版型)으로 운봉(雲峰)을 조각하였다. 기둥 위에는 밖으로 용머리를 모양 있게 장식하였고, 안으로 용꼬리를 새겨 놓아 건물의 격을 높이고 있다.
건물 안에는 지장보살상을 중심으로 무독귀왕·도명존자·시왕·판관·인왕상 등이 모셔져 있으며, 그 뒷면 벽에는 지장보살의 모습이 담긴 불화와 시왕(十王)을 그린 불화가 걸려 있다.
명부전이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해주는 지상보살을 명부, 즉 저승의 주존으로 모신 것이다. 이곳에는 시왕을 거느린 지장보살상이 배치되고 그 뒷면 벽에 지장보살 후불탱화를 중심으로 좌우에 시왕도가 봉안되어 있다. 명부전에 모신 지장보살은 안락한 정토세계로 이끌어 주는 아미타부처를 가까이 모시는 협시보살이기도 하다. 지장신앙은 신라 때 성행하였는데, 조선시대에는 아미타신앙과 함께 유행하여 널리 믿어져 민간신앙이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의 대부분의 사찰에는 명부전이 배치되어 있다.
이 흥천사 명부전은 옛 목조 건물의 전통을 이어 받았으면서도 단순하고 소박하게 장엄된 법당으로, 조선 후기 사찰 건축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북극전.

 독성각.

부도.

출처 : 바람 통신
글쓴이 : 문화 탐험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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