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 수송동 80-7, 수송공원은 보성사가 있던 자리에 만들어진 공원이다.
이 곳은 근현대사에서 빠질 수 없는 여러 기관과 학교가 자리했던 곳이다. 중동학교가 있던 곳.
숙명여학교가 있던 곳.
신흥대학 터.
이종일 동상 - 이종일 선생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성주(星州). 호는 옥파(沃坡), 도호(道號)는 천연자(天然子). 아버지는 교환(敎煥)이다. 15세에 상경하여 한학을 공부했으며, 김윤식(金允植)·이도재(李道宰)·이상재(李商在) 등으로부터 개화사상을 전수받았다. 1873년(고종 10) 문과에 급제한 뒤 1882년 2월 박영효(朴泳孝)를 따라 수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같은 해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임명되었다. 1894년 보성보통학교(普成普通學校) 교장이 되었으며, 이후 경성시내의 7개 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1896년 독립협회가 발족되자 여기에 참가하여 활동했고, 1898년에는 청년애국회에 관여하는 한편, 2월에는 유영석(柳永錫) 등과 함께 대한제국민력회(大韓帝國民力會)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다. 1898년 3월에는 이승만(李承晩) 등과 함께 〈경성신문〉을 창간했으며, 8월에는 순한글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하고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밖에 〈황성신문〉·〈만세보〉와 대한협회의 기관지인 〈대한민보〉 등에도 관여했으며, 필화사건으로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 천도교 직영의 인쇄소인 보성사(普成社)의 사장으로 계몽활동을 계속했으며, 이때에도 순한글로 논설을 썼다. 1919년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배포했으며, 천도교의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을 창간했다. 3·1운동으로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2년 6개월 만에 가출옥했다. 1922년 3월 1일 다시 천도교 단독으로 제2의 3·1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했으나 발각되어 실패했다. 이후 조선국문연구회(朝鮮國文硏究會) 회장으로 한글맞춤법을 연구하는 한편 3년간 〈한국독립비사〉를 집필했으나 일본경찰에게 압수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고희동 화가 활동 터.
안중식 화가 활동 터.
대한 매일신보 사옥 터.
목은 이색 영당 - 이 곳에 모셔진 영정은 고려말 3은(三隱) 중의 한사람인 목은 이색(1328∼1396) 선생의 초상화이다. 이색의 초상화는 원래 관복차림과 평상복차림의 두 종류가 있었으나 현재는 관복차림만 전해진다. 관복차림의 그림도 원본은 전하지 않고 원본을 보고 옮겨 그린 것으로 모두 4본 5점이 전해진다.
1654년 허의와 김명국이 옮겨 그렸다고 전해지는 가로 85.2㎝, 세로 143㎝ 크기의 예산누산영당본(禮山樓山影堂本)은 관리들이 쓰는 사모를 쓰고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사모에는 회색줄을 넣어 입체감을 표현했으며, 얼굴에는 옅게 붉은 기운을 넣어 당시의 화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초상화는 고려말 관복을 충실하게 표현하였고, 옮겨 그린 것이지만 당시 일류화가들이 그린 것으로 회화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목은영당본(牧隱影堂本)은 가로 25㎝, 세로 25.8㎝ 크기의 소본(小本)과 가로 81.6㎝, 세로 149.8㎝ 크기의 대본(大本)이 전해진다. 소본은 누산영당본과 같은 시기인 1654년 그린 것으로 현재는 반신상이지만 잘려나간 곳을 감안하면 전신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본은 누산영당본과 동일한 형태와 크기로 1711년에 옮겨 그려 임강서원에 모셔 두었다.
가로 85.2㎝, 세로 150.7㎝ 크기의 문헌서원본(文獻書院本)은 목은영당본과 동일한 형식으로 1755년에 새로 옮겨 그린 것이다. 목은영당본에 비해 수염처리와 옷의 묘사 등의 표현기법이 떨어지는데 이는 화가의 기량 차이 때문인 것 같다.
가로 78.7㎝, 세로 146.3㎝ 크기의 대전영당본(大田影堂本)은 헌종 10년(1844)에 옮겨 그린 것으로 누산영당본과 동일한 형태와 규모이며, 뛰어난 화가에 의해 옛 그림 화풍이 잘 표현된 초상화이다.
현재 이색영정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시대 일류화가에 의해 새로 옮겨 그려진 4본 5점 모두 수준이 높고 보존 상태 역시 양호하며, 역사상 중요 인물을 그린 것으로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보성사는 보성학교 내에 있던 인쇄소로 당시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곳이다.
이 곳에서 이종일선생의 지시로 3.1독립선언서가 인쇄되었다.
3.1독립선언문의 인쇄 과정을 당시의 재판 판결문에 의거해서 재구성해보면, 최남선은 자신이 직접 경영하는 인쇄소인 신문관 직공에게 활자를 짜게 해서 완성한 활자판을 최린의 집으로 보냈다. 보성사 사장 이종일은 공장 감독 김홍규에게 지시를 내려 그것을 가져오게 했다. 공장 감독 김홍규는 다시 보성사 인쇄 직공 신영구에게 인쇄를 명하여 독립선언서 2만 1천매를 27일 밤 11시 경에 인쇄 완료하였다. 3월 1일 당일 아침에는 천도교월보 편집인인 이종린이 편집한 <독립신문>이 보성사에서 인쇄되어 오후 2시에 파고다공원에서 배포되기도 했다. 이 <독립신문> 인쇄도 이종일이 공장 감독 김홍규에게 지시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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