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불교)

[스크랩] 화계사(華溪寺)

장안봉(微山) 2013. 4. 10. 23:46

 

 삼각산(북한산) 화계사는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있는 사찰로,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1522년(중종 17) 신월(信月)이 창건했고 1618년(광해군 10) 화재로 전소되자 흥덕대군(興德大君)의 시주로 도월(道月)이 중창했다. 그뒤 건물이 많이 퇴락하자 1866년(고종 3) 용선(龍船)과 범운(梵雲)이 흥선대원군의 시주를 받아 중창했으며 이후로도 몇 차례의 중수가 있었다. 현재 당우로는 대웅전·명부전·삼성각·천불오백성전(千佛五百聖殿)·범종각·보화루·학서루(鶴棲樓) 등이 남아 있다. 대웅전은 팔작지붕 다포계(多包系)로 현판은 당대의 명필 신관호(申觀浩)의 필적이며 명부전의 현판과 주련은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다.

 범종각 - 1898년 경상북도 풍기 희방사(喜方寺)에서 옮겨온 대종(大鐘)과 북이 있다.

 

 

 

신관호 글씨.

흥선대원군 글씨.

 대적광전.

 

 대웅전 - 화계사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봉안한 화계사의 중심 건물이다. 화계사는 조선 중기 이후부터 지금의 자리에서 줄곧 명맥이 유지되어 왔기 때문에 화계사가 창건된 때로부터 대웅전은 있었을 것이지만, 현재의 건물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시주로 조선 고종 3년(1866)에 다시 세워진 것이다.
화계사는 조선 중종 17년(1522)에 신월(信月) 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삼각산화계사약지(三角山華溪寺略誌)》에 전해온다. 이 기록에 의하면, 원래는 고려 광종 때 법인(法印) 대사 탄문(坦文)이 지금의 화계사 인근인 부허동(浮虛洞)에 창건한 보덕암(普德庵)이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를 옮겨 지은 것이라고 한다.
즉, 1522년에 보덕암의 신월스님이 서평군(西平君) 이공(李公)과 협의하여 보덕암이 있던 부허동에서 남쪽의 화계동으로 법당와 요사를 옮겨 짓고 화계사라고 이름을 고쳐 불렀다는 것이다. 이후 화계사는 광해군 10년(1618) 9월에 화재로 인하여 불전과 요사가 모두 전소되었으나, 도월(道月) 선사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가문의 시주를 받아 중창불사를 하여 1619년에 복구되었다.

 그로부터 24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비바람에 건물이 퇴락 하여 고종 3년(1866)에는 용선 도해(龍船渡海)와 범운 취견(梵雲就堅)이 흥선대원군의 시주를 받아 불전(佛殿)과 승방건물들을 중수하였던 것이다. 그때에 지어진 것이 현재의 대웅전과 큰방이다. 1870년에 환공 야조(幻空冶兆)가 지은 <화계사대웅보전중건기문>에 의하면 석수(石手) 30명, 목공(木工) 100명이 불과 수개월만에 완성했다고 하였으니, 흥선대원군의 시주가 대단히 큰 힘을 발휘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대웅전은 정면 3칸·측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 건물이다. 화계사 대웅전은 내부 천장의 장식이나 기타 다른 건축부재의 장식들이 모두 조선 후기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목조 건축물이다.
대웅전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이 삼존불상은 근래에 조성된 것이며, 원래 대웅전에 있던 불상은 훼손이 심하여 따로 보관하고 있다. 후불탱화는 1875년(고종 12)에 화산(華山)스님에 의하여 조성된 것이다. 그리고 대웅전의 편액 글씨는 조선 후기의 명필인 몽인(夢人) 정학교(丁學敎)의 필체로 단정하며, 주련(柱聯)의 글씨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수제자인 신관호(申觀浩)가 쓴 것이다.

 1878년 새로 지은 명부전 - 화계사는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던 절로서 왕명으로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옮겨 모시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황해도 배천의 강서사에 있던 지장보살과 시왕상이 선정되어 이곳 화계사로 모시게 되었다. 이때 이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봉안하기 위하여 초암스님이 조대비(趙大妃)의 시주를 받아 명부전을 건립하게 된 것이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2001년에 기와를 바꿔 얹고 벽도 채색해 새 건물 같다. 현판과 주련은 흥선대원군의 친필 그대로이고, 추사 김정희의 제자답게 추사체의 특징을 과시하고 있다. 내부역시 2001년에 새로 꾸며 지장보살상은 물론 각종 시왕상, 동자상등이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다. 하지만 지장보살의 후불탱화는 1878년에 조성된 그대로이다. 최근 개금불사를 위해 지장보살의 복장을 열어보니 1649년(인조27)에 강서사에서 제작했다는 발원문이 나와 조성시기가 밝혀졌다. 발원문과 함께 여러 가지 책의 불경과 불사리도 나왔다.

  

 지장보살상은 전체적으로 강건한 기상이 엿보인다. 얼굴은 둥그렇지만 눈매가 길고 콧마루가 우뚝하며, 굳게 다문 입은 용맹스러움이 배어 있다. 설법인을 짓고 있는 손매도 탐스럽고 탄력이 있으며 어께선도 부드러우며 풍부하다. 무릎은 전후좌우의 길이와 폭이 알맞은 비래를 갖추면서 넉넉한 두께를 유지하여 안정감을 준다. 불의는 상당히 두껍게 표현하여 매우 사실적이다.

  좌우에 시립해 있는 도명존자상과 무독귀왕상은 물론 시왕. 판관. 동자. 사자. 수문장상도 모두 지장보살과 같은 양식기법으로 제작되었다. 판관의 사모나 시왕의 의관 또한 이 시대의 의제(衣制)를 가늠할 수 있을 만큼 사실적이다.  이렇듯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은 당시를 대표할 수 있는 미술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복장 유물까지 온전하게 나와 불교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왕방울 귀걸이를 하고 있는 인왕상. 

 대웅전 앞과 명부전 앞에는 놋 항아리(청동)가 있는데, 이것은 홍대비(1904)가 내린 놋물드므(유수옹) 1벌이다. 전각이 나무로 지어져 불나면 끝장이라 소방용으로 놓아 둔 것이다. 이러한 놋항아리-물드므는 창덕궁의 인정전(仁政殿, 1804), 선정전(宣政殿, 1647), 대조전(大造殿, 1888) 것과 같다. 곧, 궁의 것이 절에도 옮아간 것이다. 창경궁 명정전(昌慶宮 明政殿, 1616)에도 같은 것이 있다. 

 

 

 

 

 

 

화계사동종은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思印) 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광무 2년(1898) 경상북도 영주시 희방사(喜方寺)에서 화계사로 옮겨졌으며, 지금은 범종각 안에 놓여져 있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우선 크기는 비교적 작지만 그의 초기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는 포항 보경사 서운암 동종(보물11-1)은 종신에 보살상이나 명문이 아닌 불경의 내용을 새긴 것이 가장 큰 특징이며, 양산 통도사 동종(보물11-6)은 팔괘(八卦)를 문양으로 새기고 보통 유곽 안에 보통 9개씩의 유두를 새기는 것에서 벗어나 단 한 개만을 중앙에 새겨 넣었다. 또한 가장 전통적인 신라 범종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범종으로는 안성 청룡사 동종(보물11-4)과 강화 동종(보물11-8)이 있다.

 그 밖에 종을 매다는 용뉴 부분에 두 마리 용을 조각해 둔 서울 화계사 동종과 의왕 청계사 동종(보물11-7), 그리고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그만의 독특한 모습으로 표현한 문경 김룡사 동종(보물11-2)과 홍천 수타사 동종(보물11-3) 등이 그가 제작한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우수성을 인정받아 8구 모두가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각기 독창성이 엿보이고 있어 범종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정상부는 음통(音筒) 없이 종을 매다는 고리 부분인 용뉴(龍鈕)만 표현되었는데, 천판(天板) 위에 당당하고 사실적으로 표현된 두 마리의 용을 조각하였다. 그 아래 종의 어깨 부분에 있는 상대(上帶)는 2단으로 처리하여 '六字大明王眞言'과 破地獄眞言'이라 쓴 글자를 새겼다.
상대 아래에는 유곽(遊廓) 4좌가 있는데, 각각 사각형이며 6엽(葉)의 연화좌를 마련하고 여기에 유두(乳頭) 9개씩을 배치하였다. 유곽 사이에는 위패(位牌) 4좌를 새기고 그 안에 '宗面磬石', '王道 隆', '惠日長明', '法周沙界'라는 글씨를 각각 새겼는데, 안성 청룡사동종에도 이와 똑같은 글씨가 있다.

 종신(鐘身)은 어깨에서 곡선을 그리며 둥그스름하게 내려오다 종복(鐘腹) 부분에서 종구(鐘口)에 이르기까지 수직선을 이루며 내려온다. 이처럼 종구 부분이 오므라들지 않고 수직선을 보이는 것은 중국 원(元) 동종의 특징으로, 조선시대에서 17세기 이후에 보편화된 형식이었다. 그리고 종신 아래 하대는 상대와 마찬가지로 화문이 새겨져 있는데, 넝쿨 사이로 활짝 핀 꽃무늬가 어우러져 있어 화사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종신 표면에는 보살상 등 그 밖의 다른 문양 장식은 없고, 명문을 양각으로 새겨 넣었을 뿐이다. 명문은 전부 200자 가까이 되며 동종의 제작 시기, 봉안 사찰, 무게 등과 더불어 동종 제작에 참여했던 시주자와 장인(匠人)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康熙二十二年癸亥四月日 慶尙道豊基地西面小伯山喜方寺大鐘重三百斤鑄成也 供養大施主…緣化秩 通政大夫畵員思印 湛衍 雪玉 淸允 祖信 厚英 別座勝旭 供養主 惠熙 惠海 化主 淸信居士 道善'

출처 : 바람 통신
글쓴이 : 문화 탐험가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