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악산(宰岳山) 상안사(詳安寺)
백두대간 ‘갈령작약지맥’상 작약산(芍藥山:770m) 수정봉(水晶峰) 아래 대찰(大刹)「상안사」가 자리하는데, 이안면 안룡1길61-46이지요.
함창현지(咸昌縣誌)에 재악산은 「일명 작약산이라 하고, 본 현의 진산(鎭山)이라 하였다. 그 근원은 조령에서 서방으로 속리산이 되고, 그 한 줄기가 다시 동방으로 꺾여 내려 황령이 되었고, 다시 수십 리를 뻗어 내려 이 산이 되었다고 한다. 삼봉이 탁립(卓立)하고, 산세가 청고(淸高)하여, 근방의 산은 상대가 없고, 세한(歲旱)에 기우(祈雨)하면 영험이 있다」고 하였다. 또한 상안사는 「군서(郡西) 십오리허 재악산에 있었으니, 일명 사안사(蛇眼寺)라 하고, 읍기(邑基)가 장사형(長蛇形)과 같은 때문이라」 하였다. 이외에도 안룡사(安龍寺), 개원사(開元寺), 보제사(普提寺), 상원사(上元寺) 등은 모두 이름만 전하고, 폐사되었고, 유기(遺基)는 지금의 작약산 기슭 이안면 안룡리 부근이라 전해지고 있다. 2012년 이안면 안룡리(말암실) 마을 뒤 법당크기 108평을 자랑하는 「상안사」를 이곳에 다시 세운 것이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 온 시기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에 전진(前秦)의 승려 순도(順道)에 의하여 불상과 경전이 전래된 후, 백제와 신라에도 각각 4세기 후반과 6세기 전반기에 전파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려시대는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은 반면에 조선왕조는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삼아, 이른바 숭유억불(崇儒抑佛)로 불교는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하여, 지배계층에서는 불교가 배척을 받은 반면에, 민간사회로 뿌리를 내리면서 민중과 함께 발전을 하게 된다. 이 후 임진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 등을 거치면서 그동안 사회적으로 위축되어 온 불교가 서산대사 등의 승병들이, 국난극복에 앞장섬으로 부흥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함창지역에 신라시대의 고찰로 대사(大寺)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현재 함창읍 증촌리 용화사(龍華寺)로, 이곳에 보물 제118호와 120호인 석불입상과 좌상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을 받고 있지요. 이러한 것으로 볼 때 함창을 중심으로 많은 사찰이 있었던 곳으로 함창현지는 밝히고 있지요. 최근에 상안사를 복원 하였으나, 이 절이 언제 없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어 답답한 마음 금 할 길이 없다.
조선왕조실록(1549. 5.13)에 「臣則自少居咸昌 신은 어릴 때부터 함창(咸昌)에서 살았고...丁未年臣避病于凉梵寺, 정미년(1547년)에 신이 양범사(涼梵寺)로 피병(避病)갔었는데... 因移寓祥安寺, 右所書冊, 尙在臣家 그리고 나서 상안사(祥安寺)로 옮겼는데, 앞서의 책은 아직도 신의 집에 있습니다」라 기록하고 있어, 상안사의 존재는 확인이 되지요. 또한 18세기 중엽(1746~1760)에 제작 된 영남지도(상주목, 함창현)를 보면, 오늘날 작약산 정상은 구미산(龜尾山)으로, 시루봉은 도솔봉(兜率峰)으로, 은점봉과 수정봉 부근을 재악산(宰岳山)으로 표기하고, 그 아래 사안사(蛇眼寺)를 그려 놓고 있어, 절이 존재한 사실은 분명하다 하겠습니다.
108평 법당의 상안사를 다시 세우면서, 수미단(須彌壇) 위의 닫집은 3층으로 법계궁(法界宮), 적멸궁(寂滅宮)으로 편액을 걸었고, 보기 드물게 팔상성도(八相成道)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에서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까지 주련(柱聯)을 달았네요. 정면의 현판 ‘大雄寶殿’은 세워서 걸었는데, 이는 재악산의 재(宰) 자(字)의 값이 너무 크기 때문이라 합니다.
창건 시 법당바닥 아래에 포도주 300두(斗,말)와 문서, 도자기 등을 35개의 큰 항아리에 담아 매립(埋立)하고, 그 위에 대웅전을 건립한 것이 특이한 내용이며, 탱화에 삼성의 노트북과 휴대폰을 그린 것은 후일에 시대상을 엿 볼 수 있도록 함이라 합니다. 재악산 상안사가 2012년에 완공 되어 중생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고 있으며, ‘이안전통문화연구원’도 함께 운영하고 있는 상주의 명물로 급부상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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