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시

(88) 상주의 공검지(恭儉池, 공갈못)

장안봉(微山) 2019. 7. 25. 18:40
(88) 상주의 공검지(恭儉池, 공갈못)
번호91작성일2016.08.11조회수599
작성자김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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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검지(恭儉池, 공갈못)
    소 재 지:상주시 공검면 양정리 199-180번지 일원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121호(1997. 9.29)

    백두대간 밤원숭덕지맥이 서북을 감돌아 나아가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양정리 국도변 좌우로 화동리 까지 약 430m정도를 쌓으면 이곳은 거대한 자연 호수를 이룬다. ‘농경문화의 발상지’라는 큰 표지석을 바라보며 우측으로 들어서면 ‘공갈 못 옛터’라는 표지석을 만난다.

    공검지(恭儉池)보다는 공갈못으로 널리 알려진 저수지로 그 연륜만큼이나 많은 기록들이 보이는데,
    상산지에「恭儉池 在州北二十七里高麗明宗時司錄崔正份因舊址築堤長八百六十步周一萬六千六百四十七尺其池實在咸昌而尙民專灌漑之利洪貴達有記 주북27리에 있으니 1171~1197(고려명종) 사이에 사록 최정빈이 옛터에다 제방을 만든 것으로 길이 860보 주위 16,647척이다. 그 토지는 실지 함창이고 관개는 상주에 하고 있으며 홍귀달의 記가 있다」라 적고 있으며,
    함창현지에는 「恭儉池 在郡南十三里 高麗明宗時司錄崔正份築堤云詳見勝覽 舊增洪貴達記曰 ...虛庵鄭希良詩見本集 舊湖全地域農地化今只有舊墟碑」라 적고 있다.

    또한 세종실록(150권, 지리지경상도 상주목)에는 「大堤一, 恭儉池在州北咸昌界中。明宗二十五年乙卯 司錄崔正份因舊址而築之 長八百六十步 廣八百步 灌漑二百六十結 큰 방죽이 1이니, 공검지(恭儉池)로서, 주(州) 북쪽 함창 경계 가운데에 있다. 고려 명종(明宗) 25년 을묘에 사록(司錄) 최정빈(崔正份)이 옛터에 의지하여 쌓았는데, 길이가 8백 60보, 너비가 8백 보이다. 논 8백 60결을 관개한다」가 보이며 그리고,
    정조실록(50권, 정조22년 11.15)에는 「大抵田功之於水利 利且博哉 荷鍤決渠 衣食億萬 古今通然之道 豈使白公專利 觀於碧骨、合德 恭儉等堤 已然之設始 餘可類推 近日籌謨 十之七八 在此一款 另當更加留意 대개 농사의 수확량을 늘리는 데 있어서 관개는 그 성과가 아주 큰 것이다. 땅을 파고 관개수로를 뚫어 만백성을 먹이고 입히는 것은 고금에 있어서 공통되는 도리이다. 그런데 어찌 백공(白公)으로 하여금 그 이익을 독차지하게 해서야 되겠는가. 벽골제(碧骨堤)나 합덕지(合德池)·공검지(恭儉池) 등 이미 만들어져 있는 제방을 처음에 만들 때의 의도를 보면 그 나머지는 미루어서 짐작할 만하다. 요즈음에 계획을 세우는 것 중 열에 일곱, 여덟은 이 한 조항에 있으니, 각별히 관심을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라 기록한 것과

    정조실록(50권, 정조 22년 11월 30일) 유동범(柳東範)의 상소에 아뢰기를 「恭儉池 自古極無之歲 未見其涸 今則旱未數月 水已告竭 예로부터 아무리 흉년이 든 해라도 마르는 것을 보지 못하였는데, 지금은 가문 지 몇 달도 안 되어서 물이 고갈되어 버립니다」등의 기록을 볼 수가 있네요.

    1195년(고려 명종 25) 때 상주사록(尙州司錄) 최정빈(崔正份)이 옛 터를 따라 중수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하니, 그 이전의 옛날 제방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400년 전 삼국시대에 벼농사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공검지는 제천 의림지, 김제 벽골제 등과 함께 조선시대 3대저수지로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고대 수리시설로 꼽힌다. 이 지역에 공갈 못과 관련된 지명으로 못가, 오리실, 무릿가, 지포(池浦), 법구지, 화동나루, 소란나루 등을 보면 공검지의 규모를 대략적으로 알 수가 있다.

    속설에는 제방을 처음 쌓을 때 마을을 찾아다니며 모곡(募穀)을 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어린 아이를 안고 희롱하면서 ‘나는 줄 것이 아무것도 없고 이 공검(兒名)밖에는 없으니 이 아이나 가져가라’ 하였다. 그 후 제역(堤役)이 오래도록 이루어 지지 못하고 막으면 까닭 없이 자꾸 터지니, 마침내는 그 공검아기의 일이 거론(擧論)되어 아기를 제방에 함께 묻어 쌓으니 비로소 터지지 않고 완성하게 되어 이 아명으로 호명(湖名)을 하였다고 하는 ‘매아설화(埋兒說話)와 시주승(施主僧)을 기둥삼아 둑을 쌓았다는 인주설화(人柱說話), 경주의 황룡(암)과 공갈못의 청룡(수)과 투기하는 백룡(암)이 싸웠다는 쌍용전투(雙龍戰鬪) 설화, 백룡을 묻은 국사봉(國祀峰) 설화, 용경(龍耕, 용갈이)설화, 우경(牛耕)설화, 지형설화, 용을 잡은 이여송(李如松) 설화, 소란 거북이 전설 등 많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지난 2005년도에 경상북도 문화재연구원의 시굴조사에 의하면, 총 4차에 걸쳐 제방을 쌓았고, 그 중 제2차 제방은 4회에 걸쳐 보축하였다는 견해이다. 그 중 2차 제방은 일제 때 총신 이채연(李采淵)의 건의에 따라 못둑을 헐고 논을 만들어 겨우 5만여 평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그 3차 제방은 식량자급달성이 국가의 최우선 과제라 1959년 오태저수지로 인하여 기능이 축소되자 2,000평으로 축소되는 시기이며, 1993년 4차 제방은 최근의 역삼각형으로 둘레는 505m, 담수면적은 3,938평이다. 제방은 공히 판축의 형태가 혼합 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둑 모서리에 설치된 수문으로 배수된다고 하였다.
    2005~2011년에 시굴·발굴조사(각2회)에서 목부재 14점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655~695년에 벌채되어 공검지의 수문과 수리시설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며, 고대토목기술을 보여주는 역사적, 학술적, 기술적 가치가 높은 자료라 한다.

    공갈못 노래 일명 채련요(採蓮謠)가 전해오고 있으며, 퇴재(退齋) 권민수(權敏手)를 비롯하여 한국 유학사에 오른 선비 23명의 공갈못 관련 한시(漢詩) 57수(首)와 용경설(龍耕說) 1편 등이 전한다.
    주변에 누정(樓亭) 또한 광신정(曠神亭), 무쌍정(無雙亭), 세심정(洗心亭), 봉정(鳳亭), 소정(素亭), 수월정(水月亭), 기정(岐亭), 지정(池亭) 이 외에도 정사(精舍), 재(齋) 등의 유적이 많았으니 이곳은 자뭇 시인 묵객들의 유상 처였다 한다.

    공검지는 축조방법에 따라 명칭이 공건제(功建堤)・공권제(公券堤)・공골지(空骨池)가 있고, 규모에 따라 검호(儉湖)・검호(劒湖)・검호(劒濠)・경호(鏡湖)・남호(南湖), 사연(蛇淵) 등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실로 웅대하고 장엄한데, 둑 길이가 860보에 둘레가 1만 6천 6백 47척의 웅대한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못이 논으로 변하여 그 모습과 풍광은 찾을 길이 없어 안타까움을 더하는데. 다만 그 자리에는 옛 못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비석(碑石:공갈못옛터:1968.11)만이 외롭게 서 있다. 또한 국도변에 설치한 애잔한 ‘공갈못 노래비(1988.12)’에서는 공검지 전체모습을 볼 수가 있다.

    1993년 상주시에서 공검지 복원을 위해 주변의 농지를 매입하고 14,716m²의 면적에 수심 3∼4m 정도의 연못으로 조성하였다가, 2004년부터 유교문화권 사업으로 문화재 발굴조사와 함께 추가로 다시 매입하여 37,000여 평에 연꽃을 식재해 장관을 이룬다. 공검지 위에 1959년에 설치한 오태저수지는 수면에 국내 최대의 태양광발전시설을 하기도 하였는데, 이 오태지와 연계하여 말똥가리, 수리부엉이와 잿빛개구리매 등 법적보호종을 비롯해 주요 습지식물을 포함, 164종의 생물종이 서식하는 국내 대표적인 논 습지로 보전가치가 높아 2011년 국가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상주의 자랑 공검지는 현재 안내소와 공검지역사관이 있어 이곳을 찾는 내방객을 맞이하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