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주 양진당(養眞堂)
소재지:상주시 낙동면 양진당길27-4 보물 제1568호(2008. 7.10)
상주의 진산(鎭山)인 갑장산 최고봉에서 동으로 한 줄기가 힘차게 뻗어 내려가니 530m峰이다. 이곳에서 북으로 자세를 급히 낮추어 통사동(通士洞)에 이른다. 다시 북으로 더 낮은 자세로 내려가다가 동으로 내려앉으니 요포(繞浦)이다. 지리오결(地理五決)을 모두 고르게 갖춘 곳이라 하는 여기에, 상주 유일의 건축물 보물인 「양진당」이 삼봉산과 복우산을 바라보며 자리하고 있는데 제1568호이다. 지방도903호선을 따라 상주에서 선산으로 향하다보면 승곡리 신기(새터)에서 ‘양진당400m’라는 이정표를 만난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물소 뿔처럼 생긴 자연석에 ‘養眞堂’이라는 표지석이 길손을 반긴다. 이어 ‘養眞堂重建紀念碑’가 보이고, 口字형의 거대한 건물이 턱 버티어 서있다.
상산지에는「養眞堂 在甲長山下言可坊背山臨川黔澗趙靖經龍蛇大訌仁廟戊辰建五架十楹制度宏麗...司藝曹挺融手書扁號並揭刻 」라 적고 있지요. 행랑채는 9칸으로 중앙의 출입문 오른쪽 기둥에 ‘豐壤趙氏硏修院’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들어서니 루(樓)의 형태에 가까운 고상식(高床式)건물로 앞면 9칸, 왼쪽 옆면 4칸, 오른쪽 옆면 6칸이며, 왼쪽에는 창고를 오른쪽은 방을, 앞면의 왼쪽 3칸은 방이고 오른쪽은 마루이다. 정면에 현판을 ‘養眞堂’으로 걸었고, 서예가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의 글씨로 이곳에서는 호(號) 대신에 영가(永嘉)라고 썼네요. 이 건물은 당초 99칸이라 전하는데, 현재는 47칸 정도로 검간(黔澗) 조정(趙靖, 1555∼1636)선생이 그의 처가인 안동시 임하면 천전동(川前洞)에서 옮겨와 이축(移築)하였다 한다. 양진당 오른편에는 사당을 복원해 놓았네요.
1981년 11월 해체과정 중 종도리(宗道理)에서 ‘숭정후(崇禎後) 180년 丁卯 11월 乙卯 상택주(上宅主) 조술겸(趙述謙, 1807, 순조 7)’이란 기록과 상량문(上樑文)이 발견되었다, 상량문에는 ‘천계 6년(天啓六年) 병인(丙寅) 12월 28일 병진(丙辰) 상(上) 감동(監董) 조기원(趙基遠)’이란 기록이 발견되어, 1626년에 착공, 1628년 준공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1980년 이 건물을 해체하고, 1981년 재 복원 하였으며, 조기원은 검간의 맏아들이지요. 양진당은 양오진(養吾眞: 본성을 성실히 지켜 자연의 도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교양하는 집)에서 따왔으며, 건립 이후 존모(尊慕)・강학(講學)・문회(文會) 등의 현장으로 널리 활용되어 왔다. 근래 6.25 동란 때 낙동초등학교가 폭격으로 소실되자 분교장으로 활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건물은 약간 경사진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으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나 口字형으로 연결되는 곳에서는 팔작지붕의 옆모습과 같아 보인다. 양진당은 영남서북부 지방의 사대부집으로, 현재도 고건축을 공부하는 이들이 건축사 비교 연구차 많이 찾고 있는데, 여타의 건물과 다른 점은,
1.口字형의 건물이고 1.툇마루가 높게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한 여름의 열기와 이곳이 장천과 승장천의 범람으로 인한 피해를 예방하기 위함이라 하는데, 실제로 1966년 대홍수 때 사랑채는 쓰러져 버렸다고 합니다. 1.본체 퇴칸 전면에 세운 7개 기둥은 통재를 사용하였는데, 특이하게 하층부분에는 방형(사각)으로 하고 상부는 원형으로 다듬어져 있어 장인정신을 엿 볼 수가 있지요. 1.정침의 툇마루 상부는 건물의 서까래가 4각형이고, 여기에다 또 4각형의 덧서까래를 대어 겹처마를 이루었는데, 아주 특이하며 좌·우익사 건물의 서까래는 모두 원형으로 홑처마 입니다. 1.이 건물에서 굴뚝의 위치가 툇마루 밑에서 안채 뜰 안쪽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삶이 어려운 민초들에게 밥 짓는 연기가 퍼지지 않도록 배려함이라 하네요. 1.방 구조는 田字형 구조로 이는 추위를 막고 열을 빼앗기지 않게 하기 위 함 이라고 하네요. 1.안채의 양 날개격인 부속건물에 도리가 옆으로 상당부분 삐죽이 나온 것이 몇 개 보이는데, 이는 아직도 그 용도를 정확히 모른다고 하네요. 1.난간은 교란난간 중에서 曰字난간으로 하였는데, 아래쪽에는 판으로 처리를 했지요.
검간 선생의 본관은 풍양(豊壤), 자(字)는 안중(安中), 호(號)는 검간(黔澗), 아버지는 광헌(光憲)이며, 어머니는 홍윤최(洪胤崔)의 딸이고, 한강 정구(鄭逑)의 문인이며, 약봉 김극일(金克一)의 사위이다. 또한 개암(開巖) 김우굉(金宇宏)의 이질(姨姪)이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크게 활약하였고, 1624(인조2)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까지 호가(扈駕)하였으며, 그 뒤 벼슬이 봉상시정에 이르렀다. 또한, 경술(經述)과 문장에 뛰어났고,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상주의 장천서원(長川書院)과 의성의 속수서원(涑水書院)에 봉향(奉享)되었지요. 저서로는 검간 문집과 진사일록(辰巳日錄)등이 있으며 선생이 살던 집과 일기는 모두가 귀중한 보물이 되었지요.
매년 8월에, ‘사)상주양진당전통문화수련원’ 에서는 후손들에게 뿌리 찾기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데, 1984년 7월26일 개원을 시작으로 금년 제34회에 이르기까지 무려 1,300여명의 교육생을 배출한 자랑스러운 가문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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