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주 화서 옥연사(玉淵祠)
소 재 지:상주시 화서면 사산길 2-12 지방문화재 문화재자료 제179호(1986.12.11)
화령(팔음)지맥의 천택산 기슭, 상주시 화서면 사산리(사래실 또는 沙谷마을)입구에 소재하는 옥연사(玉淵祠)입니다. 이 사당은 조선 선조조의 명신이고 학자인, 노수신(盧守愼. 1515∼1590)선생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건물이지요, 선생의 호는 소재(穌齋),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과회(寡悔), 시호는 문간(文簡)으로, 정치·경제·철학·교육·예학·문학 등에 일가를 이룬 큰 선비입니다.
선생의 나이 29세인 중종 38년(1543)에 문과(초시, 회시, 전시)에 연달아 장원하여, 삼장연괴(三場連魁)라 불리었으며, 성균관의 전적(典籍)을 거쳐 사서(司書) 등의 벼슬을 하였으나, 1545년 31세 때 을사사화(乙巳士禍)로 파직되어, 19년간 진도 등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곳에 있으면서 퇴계(退溪) 이황(李滉),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와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하고, 1567년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대학장구(大學章句)? 등의 주해(註解)를 달아 사림(士林) 사이에서 명성을 쌓았다. 1567년 53세 때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어, 마침내 벼슬이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585년에는 영의정까지 올랐다. 그는 시・문・서예 등에 뛰어났으며, 양명학(陽明學)을 깊이 공부하였다. 또한, 사명대사의 스승이 되었고, 휴정(休靜)과도 교분을 나눴다고 합니다.
몇 계단을 올라 옥연사 경내에 이르면, 맞배 기와지붕의 외삼문인 ‘경앙문(景仰門)’ 으로 들어서지요. 첨모재(瞻慕齋)라는 현판을 걸고 있는 강당과 사이에는 우물이 있습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5량가 팔작 기와지붕인 이 재(齋)는, 왼쪽 끝은 부엌이고, 중앙에 마루, 양 옆은 방입니다. 마루 벽에는 ‘遺章閣建立 및 廳舍重修事實(瑞九 謹識)’과 ‘五賢影幀閣上樑文(延安 李炳尙 謹撰)’ 등의 편액이 걸려 있네요. 이어 뒤로 돌아가면 높은 단위에 내삼문인 ‘追遠門’을 들어서면, 전면 3칸, 측면 1칸 맞배 기와지붕의 풍판을 달고 있는 오현영각(五賢影閣, 옥연사)과 전면 3칸, 측면 1칸 맞배 기와지붕의 역시 풍판을 달고 있는 불천위사당(不遷位祠堂, 道正祠)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지요. 노수신 선생을 모신 불천위사당은 당시 영주 군수이자 그의 아들인 군수공인 노대해(盧大海)가 세웠다고 하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강당(瞻慕齋)은 봉화 현감이었던 그의 증손자 현감공 노경명(盧景命)이 효종 9년(1658) 오현영각과 함께 세웠다고 전한다. 사당 주변으로는 고목의 느티나무, 소나무, 참나무 등으로 숲을 이루었네요. 옥연사 오른편에 1991년에 유물전시관을 건립하였고, 1992년에는 전시관 앞쪽에 비각과 사주문을 새로 지었지요. 유물전시관의 현판은 ‘遺章閣 大統領 盧泰愚’ 라 걸려 있습니다.
그 아래 기와를 새롭게 한 비각(碑閣)에는, 소재선생이 1581년에 세운 조부와 부친의 신도비로 지방유형문화재 제220호(1986.12.11)입니다. 조부 노후(盧珝)신도비에 두전(頭篆) ‘贈左贊成盧公神道碑銘’은 嘉善大夫吏曹參判金應南篆이고, 通政大夫司諫院司諫知製敎朴承任撰, 韓護(石峰)書라고 되어 있으며, 비신 높이 137㎝, 너비 71㎝, 두께 19㎝, 이수 높이 60㎝, 너비 90㎝, 두께 33㎝, 귀부 길이 165㎝, 너비 45㎝이다. 부친 노홍(盧鴻)신도비에 두전(頭篆) ‘贈領議政盧公神道碑銘’은 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經筵事金應南篆이고, 通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李山海撰,韓護(石峰)書이다. 두 비는 당초 화남면 소곡리 마을 뒤 산록에 있던 것을 1992.11 현재의 자리로 옮겼으며, 두 기의 신도비는 형태가 같은 것으로 이수에는 두 마리 용이 조각되어 있다.
지방유형문화재 제219호(1986.12.11)로 지정된 기영회도(耆英會圖)는, 소재 선생이 고령의 왕과 실직(實職)에 있는 정이품 이상 문신 중 70세 이상 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기로소에서 연회하는 장면을 기념하여 그런 기록화로, 일반적인 계회도 형식을 따르고 있다. 세로로 긴 화면을 2단으로 하여 위에는 기영회 장면을 그렸는데, 가득 차게 그린 건물 안에 노수신(盧守愼). 정유길(鄭惟吉). 원혼(元混). 정종영(鄭宗榮). 심수경(沈守慶). 강혼(姜渾). 임열(任說) 등 7명이 둘러앉고, 가운데는 무녀가 춤을 추고, 건물 밖에서 악사들이 연주를 하는데, 좌우에는 시자(侍者)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고, 아래에는 참여자의 명단을 적었다. 현재 상주박물관에 소장하고 있지요. 문적(文籍)은 『소재집(蘇齋集)』과 판목이 전한다.
선생은 상주 도남서원과 봉산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선생의 묘소(화서면 금산리 584-3)는 봉산서원 뒤편으로, 묘갈명은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盧公之墓 貞敬夫人廣陵李氏祔’이고, 선생의 행장(行狀)은 창석(蒼石) 이준(李埈) 지었다. 봉산서원 입구에 2016. 5 소재선생 탄생 500주년을 맞이하여 세운 穌齋盧守愼先生韻碑에 ‘밤에 앉아서’ 라는 글이 새겨져 있네요. 선생의 학문은 탄수(灘叟), 한훤당(寒喧堂), 점필재(佔畢齋)에 연원을 둔 유학자로, 이기론에서는 퇴계 선생과 관점을 달리 했으나,‘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주해에 대해서는 퇴계 선생도, “우리 동방에 사도(斯道)가 없어지지 않는 한, 이 주서가 반드시 후세에 전하리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주자학과 양명학에도 조예가 깊었고, 불리(佛理)에도 밝았으며, 문장과 서도에도 일가를 이룬 분으로, 특히 시(詩)에서는 조선의 두보(杜甫)로 알려질 만큼 정통했다고 하는 상주의 자랑스러운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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