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시

(65)상주 봉산리의 "취은고택醉隱古宅"

장안봉(微山) 2019. 7. 25. 17:55
(65)상주 봉산리의 "취은고택醉隱古宅"입니다
번호68작성일2016.03.31조회수593
작성자김광희
첨부파일파일받기 크기변환_20160316.취은고택2.jpg
  • 상주 봉산리의 "취은고택醉隱古宅"입니다.

    백두대간이 백학산(615m)을 지나 웅이산(763m)에 오르기 전에
    낮은 산줄기로 이어지는 서쪽 자락 아래로 공성면 골가실길138-7(골가실)에 자리하고 있는데, 지방문화재자료 제582호 입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구연정(龜淵亭)이 길손을 맞고 있는데, 이 亭은 구연 송덕융(龜淵 宋德隆)이 세운 것을 복원해 놓았네요.

    이 亭에서 안길은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데,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고택의 입구가 보이지요. 마을은 대부분 동향으로 기양산(706.8m)을 바라보고 있으며, 마을 서쪽으로는 회룡으로 통하고 마을에 다 닿을 때 까지 밖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곳은 여산 송씨(礪山宋氏) 정가공파(正嘉公派)의 고택으로 500여 m에 달하는 토석담장 안에 안채, 사랑채, 안대문채, 바깥대문채, 우물채, 곳간채 등 6채의 건물이 들어서 있지요.

    파조 휘 서(派祖 諱 瑞)의 5대손인 휘 세휘(諱 洗輝)는 상주 공성의 입향조(入鄕祖)이시고, 그의 손자인 휘 량(諱 亮:1534~1618)의 字는 경명(景明)이요, 號는 우곡(愚谷)으로, 휘 당(諱 璫)의 아들이다.
    우곡의 효행으로 살던 마을 소곡(小谷)이 효곡(孝谷)이라 일컬어졌고, 또한 그의 장자인 이회(以誨)는 학덕이 높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한다.
    임진년(1592년)에 왜란을 당하자 우곡선생의 지시에 의하여, 아우 이필(以弼)과 함께 상주향교로 달려가서 오성위(五聖位)의 위판(位版)을 청결한 곳에 묻고 피난하여, 전란으로 향교건물 전체가 소실(燒失)되었으나 위패(位牌)는 화(禍)를 면(免)하였다고 한다.

    이 고택은 우곡 손자인 취은 송덕부(醉隱 宋德溥:1603~1674)가 골가실에 정착하여 창건한 후 그 후손들이 살면서 계속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고 하며 고택의 명(名)은 송덕부의 호(號)를 취한 것이네요.
    취은 선생은 글이 능한 분으로 전시(殿試)에 피선되었으나, 호란으로 인하여 파방되었다고 합니다. 시골에 살면서 효우(孝友)를 돈독히 하고 후진양성에 힘써서 많은 사람들을 성취케 하여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고 한다.
    취은문집이 전하고 신와(新窩) 이재헌(李在憲)이 행장(行狀)을 짓고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가 갈명(碣銘)을 찬(撰) 하였지요. 백화산 옆으로 흐르는 석천의 청간대(聽澗臺)의 詩가 傳하기도 합니다.

    이 고택은 대지주의 저택으로 마을의 중심부에 있으며, 주위에 50여 가구가 둘러싸고 있다는 것이 아주 특이 하다는 점입니다. 주위는 소작인의 집들로 "지주중심농가형마을"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답니다. 농사일을 하는 마당이 안채 뒤에 있으며 주위를 담장이 두르고, 안채를 중심으로 더 견고하고 잘 쌓은 담장이 이중으로 둘러쳐 있지요.
    19세기 전반에는 현재 남아있는 형태로 중건된 향촌사회를 주도했던 상당한 경제력을 갖춘 양반가옥으로, 당시의 특성을 잘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바깥대문채는 초가이고, 사랑채에는 "春觀齋"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안대문채를 통해 보이는 안채는 정면6칸에 측면이 2칸으로, 좌측 칸은 부엌을 두고 전후 퇴칸을 둔 2칸의 안방과 배면에 퇴칸을 둔 2칸의 대청, 전퇴를 대청마루보다 한 단 높게 마루를 설치한 건넌방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전면 마루에는 한식으로 장식된 샷시로 새로이 문을 달았으며, 동향으로 앉은 팔작기와지붕에 부드러운 처마의 곡선은 양반의 기품이 아직 그대로 살아 있는 듯 하네요.
    정성어린 후손의 손길로 건물은 윤기가 흐르고, 10,000제곱미터의 넓은 대지는 아주 정갈하고 조용하기만 합니다(참고: 상주문화재, 웅주전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