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주 장바위산의 「견훤산성 甄萱山城」
백두대간이 청화산(970m)에서 늘재로 낮아졌다가 다시 경미산(696.2m)을 낳고 이어 밤재로 사뿐히 앉아 문장대를 솟구치기 전에 남남동으로 한 줄기를 이루니 장바위산(541m)입니다.
이 산 정상을 중심으로 석성(石城)이 테뫼식(山頂式)으로 축조 되어 있는데, 이 城이 바로 "견훤산성"으로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53호(화북면 장암리 산42)이지요.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1942년 조선총독부」에 자세한 내용이 나오는데, 궁금한 것은 상산지는 그 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어느 곳의 성이나 축성 시에 아들과 딸의 내기 이야기가 전해 오는데, 이곳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으며, 이 산성의 정확한 축성 년도는 알지 못하나, 그 기법이 인근의 보은의 삼년산성과 비슷하여 이 시대의 것으로 추정을 한다고 하네요. 둘레가 650m, 높이 5~12m, 폭 4~6m로 높은 벽을 이루며 자연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였지요. 北, 西, 東은 가파른 경사면이나 남쪽은 계곡이라 양쪽 산줄기를 아주 두텁게 이어서 축조를 했네요. 군데군데 군락으로 서 있는 성벽 위의 아름드리 소나무가 오랜 세월의 무게를 말없이 대변하고 있지요.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으로 본성(本姓)은 李氏였으나 뒤에는 황간(黃澗) 견씨(甄氏)의 시조가 되었지요. 처음에는 신라에서 신하 노릇을 하다가 완산(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900년에 후백제를 건국하지만, 끝내 고려 왕건에게 밀려 나라를 잃게 되지요, 견훤이 상주 사람이었기 때문에 상주와 문경에 있는 城의 이름이 견훤과 관련된 이름이 다수 있답니다. 이 성은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성으로 견훤이 신라와 고려를 공격과 방어를 위해 東으로 진출할 때 이곳을 거점으로 삼았기에 "견훤산성"으로 되었다고 합니다.
城의 대부분이 외벽은 가파르고 안쪽은 완만한 경사로 축조되어 있으나, 이 성은 안쪽 내벽도 거의 수직이고, 모서리에는 거대한 자연석을 아주 잘 이용하여 망대를 만들었네요, 아직도 안쪽 벽은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많은 부분이 남아있지만 바깥벽은 모서리 부분이나 계곡부(溪谷部) 등 축성 당시 기초부분이 튼튼한 곳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무너져 내려 흐트러진 성돌이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문지(門址)는 북문지와 서문지 2곳이 남아있는데 서문지(西門址)는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남아 금방 알 수가 있지요.
“견훤산성”의 시(春坡 李圭錫)를 옮겨보면 『기묘하게 싼성은 볼수록 탄성나고, 의심컨대 옛날에 귀신이 쌓았구나, 산은 옛 과 같이 천년동안 푸르는데, 영웅은 어디가고 이름만 남았는가. 妙奇石築出驚聲 疑是神人古作城 依舊山峰千歲碧 英雄何去但傳名』이다.
이 성은 천 수백 년의 세월에도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귀중한 사료적 가치로 인정을 받고 있다고 하는데, 상주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임에는 틀림이 없네요. 왼쪽으로는 청화산과 승무산이, 오른쪽에는 문장대와 천왕봉이, 뒤에는 경미산이, 앞에는 도장산등이 빙 둘러 싸여 있어 청주, 진천, 음성으로 통하는 길목인 늘재, 청주로 이어지는 밤재, 상주와 황간으로 연결되는 갈령을, 또한 동쪽으로 빠지는 쌍룡계곡도 협곡이라 이곳에만 대비책을 잘 세우면 그 옛날에 자연적으로 방어가 쉽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이러한 곳을 두고 천연요새라 하지 않았던가, 남으로 화북면 소재지의 넓은 들판이 한 눈에 들어오는 아주 독특한 돌출 지역 입니다(참고: 상주의 문화재, 화동승람). 뉴스상주(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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