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감지지(天感之地)의 감암정(感巖亭) 입니다.
백두대간 상주「갈령작약지맥」의 작약산 시루봉에서 동으로 한 줄기를 뻗어 서봉을 이루고, 다시 대가산으로 한 줄기를 내 보내고 듬재산이 솟는다. 이 산의 남쪽 끝자락으로 지방도 32호선 변에 소박한 정(亭)이 자리하고 있으니, 천감지지의 「감암정」으로 상주시 이안면 무운로 959(아천리521-1)에 소재한다. 이 亭은 홍이해(洪以海)가 윗대 조상들의 지난날을 추모하기 위하여 기도(祈禱)드리던 바위 위에 1652년에 세운 정자이다.
홍이해公의 증조부이신 성균관진사구촌남양홍공 약창(成均館進士龜村南陽洪公約昌)은 상주 낙동에 거주 하였으나 임진왜란 당시 창의하여 외남 안령전투에서 父子가 왜적과 싸우다 함께 전사하니 이때 가족들은 피난중이라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나, 출전시 타고 간 애마(愛馬)가 두부자의 衣冠을 물고와 전사한 줄 알고 백방으로 유해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의관을 대렴(大殮)하여 장례를 지내니 부자가 모두 의관장(衣冠葬)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 말(馬)도 쇠진(衰盡)하여 땅에 묻어주니 바로 마총(馬塚)으로 細谷冷泉에 남아 있다고 전한다.
이때 구촌의 아들 민헌(民獻)의 처 진주류씨부인(晉州柳氏婦人)이 강보삼세(繈保三歲)의 유아를 전대(錢袋)에 싸서 업고 피병(避病)을 하기 위하여 작약산 남록 숲속을 집을 삼고 기거한 곳에 큰 바위가 있어 바위 면을 정결(貞潔)히 쓸고 단(壇)을 마련, 기도를 함에 “남편의 일점혈윤(一点血胤)이 있으니 이 아이가 없으면 조상과 亡夫에 죄를 짓는 것이라 차마 죽지 못하고 오늘에 願하옵건데, 天神은 강림하시와 가련(可憐)한 이 아이를 부지(扶持)토록 하여 주십사“ 하고 기원하기 수년에 하늘이 감동 하여 신이 陰德을 내리시어 고요하고 수연(秀娟)하게 자라서 登科, 贈判決事의 관직에 오르니 이분이 바로 구촌公의 손자이신 洪裕承이다.
裕承은 비록 단명으로 작고하였으나, 節婦 柳氏婦人의 積慶之德으로 23세에 득남을 하니, 이 어찌 천은지지(天恩之志)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분이 바로 이 어려운 중에 대가 끊어질뻔한 집안에 자손을 번창하게 하고 감암정을 창건한 구촌公 증손자로 洪以海이다. 강보에서 조부(約昌)와 부친(民獻)이 일시에 전사하고 천신만고 끝에 살아난 裕承도 일찍 하세(下世)하니 이때 以海는 4세였다고 한다.
만고의 절부 류씨부인이 아니었다면, 또한 감암정의 성지가 아니었다면 이곳 남양홍씨 후예로 오늘에 이어졌겠는가, 절부요, 고귀한 성지요 유적지임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 홍문(洪門)의 혈통을 계승케 해준 류씨부인은 78세에 진명(盡命)을 다 하셨다고 한다.
그 후 민헌(民獻)의 손자 以海 는 훌륭히 자라 通德郞에 贈職으로 正三品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職에 이르렀다. 그는 조상들의 지난날을 추모하기 위하여 天感之地인 기도 드리던 바위 위에 1652년에 정자를 세우니 “感巖亭”이라 한다. 1930년대 지방도가 개설되면서 바위가 묻혀지고 한 칸짜리 閣만 퇴락되어 있던 것을1978년 20여m 도로 안쪽으로 이전 복원한 곳으로 열행의 사표이다. 이 亭 앞에 홍약창의 유적비(遺蹟碑)가 세워져 있으며 최근 함창~농암간 지방도32호선 확·포장으로 바로 앞에 조금 높게 새로운 도로가 개설되어 감암정은 더 한층 아늑하고 조용하게 보인다. (참고: 웅주전고, 남양홍씨 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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