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양새와 성격이 독특한 「상주 천주교 신앙고백비」
백두대간상 백학산에서 동으로 가지를 친 남산소맥이 개운재를 지나 북으로 방향을 돌리기 전에 남으로 뻗은 석단산(石壇山:212.9m) 자락 얕은 골짜기에 비스듬히 누운 자연석 기단 위에 그 모양새와 성격이 희귀한 한 기의 비(碑)가 서 있으니, 「상주 천주교 신앙고백비(尙州 天主敎 信仰告白碑)」로 상주시 청리면 삼괴리 361번지이다.
이 비는 높이 127㎝, 너비 40㎝, 두께 22㎝ 크기의 碑石으로, 비수(碑首)와 비신(碑身)과 기단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비수는 흡사 모자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으며, 비신은 윗부분이 십자가 모양으로 다듬어져 있고 아랫부분은 어깨 내림처럼 아래로 내려올수록 좁아지는 형태로 앞면 상부에는 십자가 속에 세로로 ‘天主’라는 글자가, 그 아래로는 2단으로 ‘天主聖敎會’와 ‘聖號十字嘉’가 각자 되어 있고, 그 밑으로는 세로로 ‘第一天主恐衛咸, 第二敎化皇衛咸, 第三主敎衛咸, 第四神夫衛咸, 第五敎于衛咸’ 등 다섯 가지의 내용과 그 아래에 ‘奉敎人 金道明告 癸卯生 本盆城金’이라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가계(家系)로 盆城金氏 金福云과 네 아들 및 손자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이 비를 세운 金三祿(1843~1935)은 김복운의 둘째 아들인데 천주교에 대한 정부의 공격이 강하던 1860~70년대에 객지생활 후 마을로 돌아와 1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 碑를 수립(竪立)한 것으로 추정된다.
상주의 청리면 삼괴리와 공성면 일대에는 옛날 박해시대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사는 교우촌이 여럿 형성돼 있었다고 하는데, 1785년 을사 추조 적발 사건 당시 문중의 박해로 서울서 낙향한 서광수(徐光修)에 의해 처음 복음이 전파된 후 많은 사람들이 입교해 천주교를 믿어 1801년 신유박해를 비롯해, 1827년 정해박해 등 역대 박해 때마다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특히 신앙 고백비가 서 있는 청리면 삼괴2리 부락에는 1866년 병인박해 전부터 김해(金海)김씨 집안의 김복운(金福云)의 아들 4형제가 열심히 천주교를 믿어 온 것으로 전해지며, 그중 차남인 삼록(三祿, 도미니코) 은 특히 신앙이 돈독해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삼괴리 안 골짝의 신앙 고백비가 공식적인 교회 사적으로 고증된 것은 이제 겨우 20여년을 넘어서고 있는데, 김삼록은 신앙 고백비를 세운 뒤 교난을 피하기 위해 고백비 앞에 포플러나무 등을 많이 심어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도록 가려 두었다. 그 뒤 1945년 해방이 되자 그의 손자인 김순경(당시 79세)이 나무들을 베어 냄으로써 비로소 신앙 고백비 앞이 훤하게 트이게 되었다고 한다. 1982년 당시 상주 서문동 본당 신부가 우연히 김순경의 둘째아들을 만나 신앙 고백비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됨으로써 교회 안에 처음 알려지게 되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984년 신부의 답사와 함께 신앙 고백비에 대한 확실한 고증이 이루어지게 됐다.
당시 비록 공식적인 박해는 끝났다 하나 아직 지방에는 사사로운 박해가 끊이지 않고 있던 시절,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신앙 고백을 이렇듯 감대하게 했다는 점에서 신앙 고백비가 오늘 날 우리에게 시사(示唆)하는 바가 크다 하지 아니할 수 없다. 고백비 뒤로 잘 단장된 광장에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3단의 석조물에 ‘제1처: 예수님께서 사형선고 받으심’을 시작으로 ‘제14처: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 까지 순교(殉敎)에 대한 조형물을 조성해 놓아 예수님에 대한 모든 내용을 한 눈에 볼 수가 있으며, 제일 뒤편 중간에는 십자가를 세워놓았으며, 최근 천주교에 대한 큰 의미가 있는 장소로 알려져 순례투어로 많은 사람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고 있는 이곳은 지방문화재자료 제562호이다.(참고: 상주의 문화재. 뉴스상주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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