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 번째 정좌(正座)한
상주 최고(最古)의 선정비(善政碑)
상주박물관(상주시 사벌면 경천로 684) 광장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하나의 비신(碑身)에 두 목민관(牧民官)의 치적(治積)을 기록해 놓은 특이한 선정비 (善政碑) 한 기가 북향(北向)을 하고 서 있습니다. 비신의 앞면 상단부 중앙에는 자경(字徑) 21㎝의 해서체로 ‘선정비(善政 碑)’라 각자(刻字)하였고, 그 하단에 우측에는 ‘손중돈(孫仲暾) 목사’를, 좌측에는 ‘권기(權祺) 목사’의 비문을 자경(字徑) 4㎝정도로 11열 종 (從) 해서(楷書)로 새겨놓았습니다. 뒷면에는 “'皇明 嘉靖 二十四年 五月 日 立”이라 새겨 놓아 이 비 가 최초로 1545년에 세웠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당초 이비는 상주시 무양동 189에 있었으나 1973년 3월에 상주시 교육청 교육관 앞으로 이건하였다가 2007년 10월에 상주박물관으 로 3번째 옮겨 수립(竪立)한 것입니다. 재질은 화강암으로 전형적인 신도비 형태로서 비신과 이수(螭首)와 귀부(龜趺)를 잘 갖추어졌다고 하며 조각 기법이 아주 뛰어나다고 합니다. 이수의 상단부분은 훼손되었는데, 이는 본래의 모습이 아니나 하단에 조각된 용린(龍鱗)의 사실적인 표현은 주목을 끌고, 중앙에도 액(額)이 마련되어 있으나 명문(銘文)은 없다. 귀부는 두상의 두 눈이 부리부리하고 잇빨과 보발(寶髮)이 사실적이라 아주 생동감이 넘치고, 15∼29㎝의 귀갑문(龜甲紋)은 아주 선명하다. 사족(四足)은 있으나 꼬리는 조각되지 않았다. 수립(竪立)년도가 1545년 이라 이 지역에서 현존하는 목민관의 석비 가운데 가장 오래된 비로 알려지고 있다.
손중돈 목사는 1506년(중종 1)∼1509년(중종 4)까지 상주목사로 재임하였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대발(大發), 호는 우재(愚齋), 시호는 경절(景節)이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 되었고, 이조판서, 한성부판윤, 대사헌을 지냈으며 1592년 4월10일, 67세로 별세 하셨으며, 상주목사로 재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의성군 단밀면에는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었습니다. 그 생사당을 효시로 하여 1703년에 서원으로 승격하고, 지금은 원호(院號)를 속수서원(涑水書院: 의성군 단밀면 주속길 116-6)이라 합니다. 비문은 孫公諱仲暾歲丙寅來牧是邦承昏亂政煩之餘躬節儉鎭靜之治弊衿民安農桑盡業秩未滿擢爲治平陞堂上階赴 召尙去人惜其去也願侍而不得立堂以生祠之 祠在 丹密縣 (손공의 휘는 중돈이니, 병인년에 목사로 이 고을에 부임하여, 혼란하고 번거로운 정사를 이어받은 나머지 몸소 절약하고 검소하여 백성들 마음을 진정시키는 정치를 베풀어 피폐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함으로서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을 힘쓰도록 함에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당상관으로 발탁되어 조정에 불려 가시니 백성들이 애석하여 그 떠남에 다시 모시고자 하나 어찌할 수 없어 생사당을 세우니 사당은 단밀현에 있다)
권기(權祺) 목사는 1537년(중종 32)에 부임하였으나 이임년도는 알 수 없다. 상주목사로 재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었으며, 공정하고 맑은 정치로 백성들이 그의 깨끗하고 근신함에 복종하였다. 경주부윤과 형조참의를 지냈다 비문은 權公諱祺歲丁酉來守此州一以公廉莅政人服其淸謹時有過客題公之座曰商山還直立洛水 更澄流不担詩人之吏如此民之歌袴者亦多矣 (권공의 휘는 기니, 정유년에 태수로 이 고을에 부임하여 한결같이 청렴정직한 정사를 함에 사람들이 그 맑고 삼가는 인품에 승복하였다. 그 때 한 과객이 있어 공의 좌석에 시를 써 놓기를 “상산이 다시 꼿꼿이 서고 낙수가 다시 맑게 흐르도다” 했더라, 시인뿐 아니라 이같이 칭송하는 백성들이 많았다) 이다. (참고문헌: 상주시지, 속수서원지). 뉴스상주2015. 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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