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三間書樓에서 공부,
5형제 모두 대과에 급제!
백두대간 「밤원숭덕지맥」이 공검의 국사봉을 낳고 예주고개에서 잠시 자세를 낮추더니 고녕가야국의 진산 숭덕산(崇德山:232m) 빚 는다. 이어서 토파이 고개로 내려 앉아 동쪽의 오봉산으로 나아가 기전에 북서쪽으로 작은 가지를 치니 이안천으로 인하여 더 나아가 지 못하고 소암들을 바라보며 자리를 잡는다.
이곳에 아담한 정자가 있으니 『모정(茅亭)』이라 하는데, 이안면 이안1길1-18(이안리 464번지)에 소재하며, 함창현지에는 “在郡南利安面利安村後贈參判朴訥 … … 茅亭墟公之手植杏樹至今 鬱蒼後孫重建于玆十二代孫周煥有記”라 적고 있는데, 이 정(亭)은 이안리 마을 뒤 낮은 언덕배기에 있는데 贈 參判 朴訥이 세웠으 며 후손들이 다시 정자를 중건하고 12대 孫주환이 記를 썼다고 하 며 당초 정자 기슭에 심었던 은행나무가 지금은 노거수가 되어 있다. 하여 이 지역 사람들은 “행정(杏亭)"이라고도 부른다.
公은 함양인(咸陽人)이며 호(號)는 행정(杏亭)이다. 소종(紹宗)의 아들로 함창이안의 입향조(入鄕祖)이시고 찰방(察訪)을 지냈으며, 배위는 성종 때 대사헌을 지낸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의 딸이다. 은퇴 후 고향에서 락재임천(樂在林泉)하고 지재교자(志在敎子)하였다.
함창현지에는 「咸陽人號杏亭恥菴忠佐之后中宗朝逸薦察訪以五子貴證吏曹參判遺官致祭享淸巖書院醴泉金谷書院」이라 전하며, 아들 5형제를 교학함에 있어 독특한 방식으로 삼간서루(三間書樓)를 지어 올려놓고 사다리를 치워 못 내려오게 하여 학업에만 열중하도록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러한 노력과 정성으로 5아들 모두 대과에 급제하게 하였다 한다.
장남 거린(巨鱗)은 1504년 급제하여 장령벼슬을, 둘째 형린(亨鱗)은 1516에 이조참의를, 셋째 홍린(洪鱗)은 1522년에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지내고 사헌부 대사헌을, 넷째 붕린(鵬鱗)은 1533년 시강원 설서를, 다섯째 종린(從鱗)은 1532년 이조정랑 벼슬을 역임하였으니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의 사후 5년 뒤에 중종은 병조참판을 추증하고,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사제(賜祭)를 명(命) 하였으며, 상주 청암서원과 예천의 금곡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이러한 일을 두고 예조· 공조판서를 지낸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1491~1570)은 【세지생오자난(世之生五子難): 세상에 아들 다섯 낳기도 어렵고 오자등과난(五子登科難): 다섯 아들이 급제하기도 어렵우며 오자구문난(五子俱文難): 다섯 아들이 문과에 급제하기도 어렵다】 하였으며, 삼난가(三難家), 즉 하기 어려운 일 세 가지를 모두 달성한 집이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공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띠집, 즉 모정(茅亭)을 짓고 여기에 은행나무를 심고 자호를 행정(杏亭)이라 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우헌 채헌징(蔡獻徵`1468~1726)은 ‘적덕(積德)한 군자요 교육을 즐기는 현명한 스승’이라고 했다. 五子登科의 배경에는 아내인 정부인(貞夫人) 김씨의 역할도 컸으리라 짐작된다.
이안면 양범리 대가산 자락 아래에 公의 묘소가 있으며, 양범리( 808-1번지) 검한마을 앞에 박눌 선생 후손들이 1991년 신도비를 竪立 하였으며, 銘文은 전면에 「杏亭朴先生神道碑」라 새겨져 있으며 후면의「咸治之西儉汗山郞朴氏之阡也其北原有 … … 墓所之傍遺風百世水麗山蒼」글은 眞城 李源榮 謹撰 安東 金啓漢 敬書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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