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郡夫人 咸寧金氏」의 향사봉행을 위한 함녕재
백두대간 형제봉에서 동으로 가지를 친 갈령작약지맥이 북으로 방향을 틀어 재악산(작약산)을 펼치고, 은점봉에서 동으로 수정봉을 빗고 이어 태봉산에서 서쪽으로 작은 줄기를 내린 아늑한 곳에 郡夫人 咸寧金氏의 유택이 있으니 상주시 이안면 안룡리 산 9번지(함창현 상서 말음곡)이다. 이 산 끝자락에 郡夫人 咸寧金氏의 향사봉행을 위한 3칸 와가 맞배지붕의 재실이 「함녕재」로 이안면 양범안룡길 180-25이다. 이 재(齋)는 세종 때 문신 시(諡) 문강(文剛) 조말생(趙末生:1370~1447))의 실인(室人) 함녕군부인의 재실이다. 김씨는 함녕김씨 덕양군(德陽君) 휘(諱) 종계(宗繼)의 4代孫 왕보(王輔)의 따님이시고, 문강공과 사이에서 난 따님은 현감 신대홍(辛帶紅)에게 출가 하였다.
이곳에 묘역을 조성하고 재실을 세우게 된 연유 또한 흔치않은 일로서, 문강공과 군부인 사이에는 따님 한분만 계셨고 만년에는 친정인 함창에서 두 분이 사시다가 90세까지 장수하셨다고 한다. 군부인께서 별세하시자 후손들이 문강공의 선영(先塋)인 경기도 양주군 금촌리 소적산에 모시려고 운구(運柩)하던 중 상여가 문경새재에 이르렀을 때 갑작스런 돌풍을 만나 상여(喪輿)의 포장이 날아갔다고 한다. 이에 상주목사의 命으로 온 사방을 수색하던 끝에 당시의 함창현 상서면 말음곡 임좌(말암실)까지 날아 온 상여포장을 발견 했다고 한다. 후손들은 여기가 하늘이 정해준 묘자리라고 믿고 묘소를 마련하고 사당을 짓고 비석을 갖추니 1463년(癸未)이라 전해오고 있다.
군부인 김씨의 향사봉행과 종사를 김씨의 친정가인 함녕김씨 문중이 맡아 봉사를 해오다가 문강공의 후손들에게 이양되고 부터는 양주조씨 경상지역의 죽천공 후손들의 관리로 봉향되고 있던 중 1965년에 군부인 김씨가 살아서도 한양에 계신 문강공과 가까이 하지 못하고 죽어서도 홀로 계신 것을 쓸쓸히 여겨 재사에 문강공의 영정을 모시고 영당에서 함께 제향을 봉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1994년에는 군부인김씨와 문강공 그리고 정경부인 평산신씨의 합적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그 후 양주 조씨 대종회에서는 근년에 재실을 개수하고 문강공과 가까운 몇 분의 신주도 함께 모시고 유래비 등도 세워 오늘에 이르는데 陰 9월20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대개 재실은 한 문중의 남자들을 봉향하기 위한 것이 대부분인데 당시에 군부인을 위한 재실로 세워졌다는 사실이 특이 할 따름이다. 함녕재 에는 비석군(碑石群)이 형성되어 있는데 문강공 조말생· 군부인함녕김씨· 양덕공조이숙거사· 조정철과남양홍씨추념· 조공제비기념물지정사은· 상주목사조병노영세불망· 홍의녀묘비 등이 있다.
이곳에는 1997년 양주 조씨의 결의로 정헌(靜軒) 조정철(趙貞喆)과 측실 홍윤애(洪允愛: ?∼ 1781년. 조선 후기의 의녀(義女)로,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홍랑(洪娘)으로도 불림)도 배향되어 있는데, 홍랑은 1777년(정조1) 제주에 유배된 조정철의 심부름을 하던 의녀였으며 1781년(정조5) 2월 조정철의 딸을 낳았다. 1781년 3월 제주목사(濟州牧使)로 부임한 김시구(金蓍耈)가 조정철의 비행을 말하라며 곤장을 쳤으나 끝내 말하지 않았다. 그해 5월 그녀가 장형으로 인해 죽으니 제주도 천지가 폭풍으로 캄캄하였다고 전 하는데, 1811년(순조11) 27년간의 유배에서 풀려난 조정철이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자원부임하여 제주목사 겸 전라도방어사 조정철의 이름으로 그녀의 묘비 ‘洪義女之墓’를 세웠다고 한다. (참고: 古寧伽倻. 2015. 8.25 뉴스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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