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이삼억 4세 충효각(李三億 四世 忠孝閣)입니다. 상주시 무양동 183-4번지의 도심지로, 동수4길 좁은 길옆에 두 그루의 큰 향나무 아래에 있어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서원에 한 문중의 어른이 함께 배향된 것은 쉽게 볼 수 있으나 한 집안의 충효정려각은 드문 일이지요, 지금은 주택가 한 가운데입니다. 이곳에는 이삼억과 아들 경번(慶蕃), 손자 진흥(震興), 증손 정하(挺夏), 현손 복운(復運), 종질 경대(慶大)등 4世에 걸친 경주인(慶州人) 한 집안의 정려각으로 정면1칸, 측면1칸의 맞배지붕 입니다.
상산지에 보면, 이삼억은 병자호란 때 도백(道伯)을 따라 부전(赴戰) 하다가 주상께서 하성(下城) 하였음을 듣고 통곡하며 남으로 돌아와 동해사 뒤 고수대 일월암하에 대명단(大明壇)을 쌓고 명나라의 태조 신종 의종 3황제의 휘진(諱辰)에 제수를 갖추어 단상에 분향하고 배곡하며 망극의 한을 달랜 무참재(無參齋) 기원(技元)의 증손이시다. 公은 학문과 덕행이 높은 어른으로 무신정변(1728년, 이인좌의 난)때 향리에서 창의(倡義) 기병(起兵)하고 장기(將旗)에다 단지(斷指) 혈서로 「斷斷孤忠 殲賊乃己」라 써서 들고, 토적(討賊)에 나서 적의 괴수(魁首)부자와 도망하는 적을 사로잡아 효수(梟首) 하는 등 큰 공을 세워 충신으로 봉하고, 호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상충사(尙忠祠)에 봉향 하였고 정려(旌閭)가 하명되었다.
아들 경번(慶蕃)은 효자로서 부친상을 지극 정성으로 마치고, 삭망(朔望)에 성묘를 하였는데 아무리 한서(寒暑)라 해도 멈추지를 않았으며 한때 밤에 비가 쏟아져 길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는데 난데없이 독각이졸(獨脚二卒)이 나타나 횃불을 밝히고, '효자께서 가신다'하고 길을 밝히고 또 표범이 나타나 호행(護行)하는 이적(異績)이 있으니 조정에서 이를 기리어 후에 병조참의를 증직하였다 한다.
증손 정하(挺夏)도 효성이 출천(出天)하여 호랑이가 海松子(잣) 한 알을 주었는데, 이것으로 병을 낫게 하였다 하고, 모상(母喪)에 장사할 때 지사(地師)가 혈(穴)을 잡지 못하고 상하를 놓고 주저할 즈음 홀연(忽然)이 신구(神狗)가 나타나 상혈(上穴)에 누우니 이로 인하여 옳게 혈을 찾게 되는 기적(奇績)이 생겼다 하여 '효갑소'라 부르기도 하였다.
현손 복운(復運)도 효행이 탁윌 하고 특이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증직 되었고, 그의 부인 연안차씨(延安車氏)는 나이 20세에 출가하였는데 남편이 죽게 되어 임종 때 남편이 내가 효도를 다하지 못하고 죽게 되었으니 그대는 나로 인하여 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고 시종 잘 봉양하여 달라 하니 순종할 것을 응낙하고, 40여 년간을 혼자 지내면서 한결같이 지순하고 극진히 시부모를 모셨다고 한다. 그의 여리(閭里)에 정표(旌表)하였다고 한다.
종질 경대(慶大)는 순조때 사람으로 뛰어난 효성으로 정려를 받아 모든이들을 감동시켰다 한다.
충신은 효자의 집에서 난다는 말과 같이 한 집안(경주이씨)에서 1忠 4孝의 빛나는 전통을 세운 상주의 자랑이다.(참고;상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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