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복 70주년에 빛나는 만세(萬歲)동산
상주에서 함창으로 가는 소암들 시도변의 만세동산이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는 2015년은 그 의미가 더 크게 보인다. 「갈령작약지맥」의 작약산 시루봉에서 동으로 가지를 친 한줄기가 배모기 고개로 낮아져 다시 솟아 오르니 이안의 명산 대가산(大駕山:325m)이다. 이 산에서 호암을 지나 소암들의 한 중앙에 고고(孤高)하게 앉은 산이 가차산(加次山)으로 이 산을 뒤로 하고 2004년에 만세동산을 조성하였는데 이안면 소암리 251-13이다.
광장에 보면 입구에 “만세동산”이라 한 표지석이 있으며, 한 단 높은 곳의 한 중앙에 銘文에 「殉國抗日義士素夢蔡基中先生追慕碑순국항일의사소몽채기중선생추모비」그 오른쪽에「己未獨立萬歲紀念碑기미독립만세기념비」가 있으며 그 왼쪽에는 「愛國志士后谷蔡暹奐先生追慕碑애국지사후곡채섬환선생추모비」가 竪立되어 있는데 이곳을 만세동산이라 한다. 최근 광장을 아름답게 단장을 해놓아 길손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소몽 채기중선생의 碑 후면에는 「순국선열 항일의사 소몽 채기중 선생의 자는 극오이며 관향은 인천이다..... 광복 반세기가 지난 오늘 태어나 자라고 그의 민족혼이 숨 쉬는 이곳 이안에 그 기상과 위업을 천사에 남기고자 후손과 시민의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우다」2004.11(전)보훈처장, (전)국회의원, 상주시장 김근수 삼가 지음이라 되어 있다.
채기중(1873~1921)선생은 이안면 소암리 출생으로 仁川人이며 호는 소몽(素夢)이시고 조국광복을 위하여 순국한 의사이다. 을사의 굴욕과 경술의 국치를 겪고 1913년 대한광복단을 조직하고 활동 하였으며 1915년 7월15일 달성공원에서 대한광복회로 개편하고 군자모금책을 맡아 성과를 올렸으며, 1917년11월10일 악질 친일부호를 사살하기도 하였다. 1918년 배신자로 인하여 광복회 조직을 밀고함에 따라 7월14일 일경에 잡혀 공주감옥에서 3년간 옥고 후 서대문형무소로 이감 되어 1921년 8월 안타깝게도 처형 되었으며 광복 후 국립현충원 선열묘지에 안장되고 국민훈장이 추서 되었다.
“木浦今日事목포금일사, 痛哭仰看天통곡앙간천, 擊欄還一笑격난환일소,白日復照然백일복조연”(오늘 목포에서 생긴 일은, 하늘을 우러러 통곡할 일이지만, 난간을 탁 치고 크게 웃으니, 한낮의 태양이 다시 밝아 오는 듯) 이것은 그가 목포에서 잡힐 때 남긴 3수의 5언 절구 중의 한 수이며, 소암리 마을에 들어서면 선생의 생가(이안면 소암2길 25-50)가 복원되어 있다.
후곡 채섬환(1874~1944) 선생은 仁川人이며 1895년부터 1907년 까지 참모장 한태섭과 상주, 문경, 예천 등지의 사림과 친인척의 동지를 규합하고 군자금을 모아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고 결사대를 조직하여 소백산에서 의병활동에 참여 하였으며 1928년에는 서당을 인수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며 후진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추모비에 후면에 「韓末한말 나라가 存亡존망의 危機위기에 처했을 때 倡義창의하여 四十餘義兵將사십여의병장과 함께 雲崗李康秊운강이강년 都體察使도체찰사를 都倡義大將도창의대장으로 … … 功勳공훈을 闡揚천양하고 의거를 기념하니 그 崇高숭고한 愛國精神애국정신은 영원히 世人의 귀감이 되리라.2005. 2」金子相 謹撰김자상근찬으로 되어 있으며 1999년 8월 15일 건국포장이 추서 되었다.
또한 만세동산에 가기 전(前) 이안면 이안1리 마을입구에 추모비가 있으니 이는 石傖 蔡忠鎭 抗日義士 追慕碑석창 채충진 항일의사 추모비 이다. 선생은 仁川人이며 號는 석창(石傖:1889~1939)이다. 선생은 19세의 약관(弱冠)으로 이강년장군의 휘하(麾下)에 들어가 황간· 갈평 전투에 참가 활동하였으며 이듬 해 서상업 장군 밑에서 활동하다가 대구 등지에서 청년활동과 시서활동으로 지하활동을 하였으며 渡日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대한광복회 채기중과 군자모금도 함께하였다.
1918년 천안에서 광복회 사건이 탄로나 상주경찰서에 수감되었으나 뒤에 유화정책(宥和政策)으로 풀려났다. 1993년 함창유림이 이안리 245번지 마을입구에 추모비를 세웠는데, 碑 후면에 「이곳을 지나는 길손들이여! 이 碑앞에 경건(敬虔)히 고개 숙일 지어다 … … 디딤돌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글은 咸陽 朴大洙 謹撰함양 박대수 근찬, 安東 金周東 謹書안동 김주동 근서이고 咸昌儒林會員一同 謹竪함창유림회원일동 근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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