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계산 자락 아래
후백제견훤왕묘 (後百濟甄萱王廟)
속리산 천왕봉을 솟구친 백두대간이 형제봉에서 남으로 내달리기 전 갈령으로 내려앉아 동으로 다시 들어 올리니 청계산(877m)이다. 이 산자락 남쪽에 거대하고 정교한 토석성(土石城)으로 이루어진 성산산성(城山山城)이 자리하고 있는데, 지역에서는 견훤성 또는 대궐터라고 부른다. 이 산성 아래 청계마을에 일찍이 상주에서 고녕가야국, 사벌국에 이어 배출된 후백제의 왕인 견훤왕묘(경북민속문화재 제157호)가 자리하고 있으니 화서면 하송리 315-11이다. 이 일대를 지역민들은 병화(兵禍)를 모르고 살 수 있다는 전설적인 이상향 우복동(牛腹洞)이라고도 한다.
견훤(甄萱: 867~936년)은 후백제의 태조(太祖)로 재위기간이 900~935년으로 본래의 성은 이(李)씨였으나 뒤에 견(甄)씨라고 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견훤은 상주 가은현에서 아자개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전하는데, 아버지 아자개는 가은현의 농부 출신으로 뒤에 장군이 되었다. 상주에는 견훤과 관련된 화북면 장암리의 견훤산성과 화서면의 성산산성, 대궐터, 선신당, 궁터, 산성창, 훈련장, 병성동의 병풍산등 여러 곳이 남아 있어 친근감이 들기도 한다. 당초 견훤왕묘는 청계마을에서 그 연유는 정확히 알 수가 없으나 동신(洞神)으로 견훤왕을 모시고 있어 남다르다고 할 수 있는데 이가 바로 선신당(仙神堂)이다. 일 년에 두 차례 정월과 시월에 제(祭)를 지냈으나 지금은 정월에만 지낸다고 한다. 당(堂)은 견훤과 그의 두 부인을 모신 사당으로 마을에서는 산지당 또는 산신당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당 안에는 “후백제대왕신위”라 적은 위패가 있다. 건물 상량문에 도광(道光)23이라 되어 있으니 이는 1843년이다. 최초 건립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 당시 중창을 한 것으로 보여지며, 다른 서까래에는 성화(成化:1465~1487)라는 명문이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500년 이상의 역사를 갖는다고도 말한다. 하여간 언제부터 행하여 왔는지는 기록이 전하지 않아 알 수가 없으나 지역민들이 정성을 다한 탓인지 이 마을에는 흉한 일이 없었고 특히 6.25 전쟁시에도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고 하며 이는 모두 견훤왕의 영험이라고 어른들은 말씀을 하신다.
제를 지내는 절차는 여느 마을과 특이한 점은 없다고 하는데, 2006년도에 전주의 “견훤왕사적연구모임”에서 상주의 견훤사당에 “견훤왕묘”로 현판 부착의 건의가 있어 비록 동신으로 견훤왕을 모시고는 있지만 국내에서는 하나 뿐으로 지역민들이 그 이름을 「후백제견훤왕묘(後百濟甄萱王廟)」로 현판을 걸었으며, 죽포 김연필(竹圃 金演弼)씨의 글씨이다. 견훤왕의 묘소는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 있으며 묘비는 “後百濟王甄萱陵”이다. 행사로는 예전에는 상주의 관할 하에 있었으나, 지금은 문경시 가은읍 갈전리(아차마을)의 “숭위전”에서 매년 제향봉행을 하고 있다. 논산시에서는 영산대제를 올리고 또한 전주의 풍남제에서는 “견훤대왕 행차”를 재현 하기도 한다. 아들 신검이 935년 3월 견훤을 구금한 금산사가 있으며, 원주시 문막면에도 견훤산성이라는 성이 있다. 왕건과 천하의 패권을 다투던 견훤은 후백제의 멸망과 함께 사라졌지만 비록 현 상주의 태생지는 아닐지라도 국내유일의 후백제 견훤왕묘(甄萱王廟)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만큼 견훤과 상주와의 관계가 크다는 사실임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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