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시

㉙ 65년전 연대 전 장병이 일계급 특진!

장안봉(微山) 2019. 7. 25. 16:57
㉙ 65년전 연대 전 장병이 일계급 특진!
번호32작성일2015.07.16조회수1785
작성자김광희
첨부파일파일받기 크기변환_20150713.화령장전적비.jpg
  • 65년 전에 17연대 전 장병이 일 계급 특진하다.

    백두대간이 봉황산에서 화령재로 내려앉기 전에 서쪽 신봉 쪽으로 짧게 가지를 친 낮은 산록에 자리한 6.25 최대의 전승지 상주 화령장지구 전적비가 있습니다. 상주~ 청원간 고속국도 화서 나들목 맞은편으로 화서면 신봉리 산2-8, 상현리 산1-3 일원 입니다.
    이 전적기념비는 오늘날 대한민국이 유구한 역사속에 지리적인 여건과 여러 가지의 복합요소에 의하여 숱한 외침을 겪으면서도 구국의 일념으로 목숨을 바쳐 지켜낸 금수강산이기에 더더욱 뜻이 깊고 자랑스러운 곳이지요. 가장 큰 전쟁인 6.25. 한국전쟁 때 낙동강 방어선 전투 중 다부동 전투 다음으로 치열했던 곳이 우리고장 상주의 「화령장 전투」이다.
    금년은 6.25 전쟁 65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전쟁사는 1950. 7.17~ 25 이곳에서 처절하게 벌어졌던 전투를 생생히 기록하고 있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980.11. 2,177평의 부지에 비(碑) 높이 8.0m로 당시 1억여원의 예산으로 준공하였으며, 비와 동상은 “전상범”씨가 제작 하였다.

    화령장 지구 전적비 비문(碑文)에는
    「소백산맥을 세로 지르는 삼국시대의 고전장, 이곳 화령선 요새지에서 붉은 침략의 무리를 처부수고자 봉황산 언저리의 동관리와 상달리를 지켰던 국군 제 1사단과 제 17연대 그리고 제 1군단 정찰대의 장병들은 기습공격으로 북괴 제 15사단의 주력을 여지없이 섬멸하였으니 그 눈부신 전공을 청사에 길이 남겨 자손만대에 전하고자 이 전적비를 세운다.」 라 적고 있다.

    먼저 화령장 전투의 개요를 보면
    1950. 7.17~21에 국군 제17연대(연대장:김희준 중령)가 이곳 화령장 일대에서 인민군15사단을 괴멸시킴으로서 대구를 조기에 점령하려던 인민군의 기도가 분쇄되고 국군은 최후의 보루인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을 획득하는데 크게 기여하여 연대 전 장병이 일 계급 특진한 대첩입니다.

    화령장 전투의 지형은
    이곳은 속리산(1058m)과 주흘산(1108m)으로 연결하는 소백산맥 지대로 700~800m 고지와 깊은 계곡으로 형성되어 있고, 도로는 상주~보은간 국도25호선과 괴산~갈령~상주간 국지도 49호선이 있으며, 화령장은 2개 도로의 접합점에 있어서 소백산맥 방어의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6.25전쟁 당시 백두대간(소백산맥)을 넘는 도로는 죽령, 이화령, 추풍령과 화령(상주~보은) 통로로 알려져 있으며, 괴산~갈령~상주간 도로는 인근 주민들을 제외 하고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통로였으므로 간접 접근 전략상의 매우 뛰어난 접근로였습니다. 또한 동관리에서 하송 삼거리까지는 좁고 긴 계곡으로 형성되어 있어 계곡 양쪽은 급경사 산악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 때 화령장 전투의 인민군의 기도는
    1950. 6.25.04:00에 기습 남침한 인민군은 서울, 평택을 거쳐 차령산맥을 돌파하고, 7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소백산맥선 공격에 전력을 집중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인민군 2군단은 국군의 대비가 없는 공백지대 괴산~갈령~상주 통로로 인민군 제15사단을 투입하여 국군과 미군을 양분한 후 함창과 김천에서 포위 격멸하고 대구로 신속히 진격하는 작전을 전개했습니다.

    화령장 전투 1차 교전: 상달리
    한편, 국군 17연대 1대대는 진천전투에서 철수하여 7.17 아침 화령장 부근에서 연대의 지시에 따라 함창으로 이동 중 주민으로부터 인민군이 상주로 진출했다는 신고를 받고, 상곡리 일대를 정찰중 이미 상주에 진출한 인민군 선발대대에서 본대로 북상하는 전령1명을 생포하여 본대가 곧 후속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대대장은 이 적을 격멸할 결심을 했습니다. 1대대는 17일 14시경 상달리와 송계초등 서쪽 고지에 병력을 배치하여 매복 대기중 인민군 48연대 본대가 접근하여 하송리와 상달리 일대의 이안천에서 목욕을 하는 등 휴식을 취하다가 19:30경 저녁식사를 위해 집결하여 무방비 상태로 있을 때 17연대 1대대 전화기가 집중사격을 가하자 인민군은 지리멸멸 되었으며 18일까지 소탕작전을 전개한 결과 아군 피해 없이 적 사살 250여명, 포로 30여명, 박격포20문, 대전차포 7문, 소총 1,200여정 등 다수의 전투 장비를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화령장 전투 2차 교전: 동관리
    이어 7.18 17연대 수색대는 갈령 지역에서 정찰 활동 중 인민군15사단에서 48연대로 가는 전령2명을 생포한 결과 15사단 45연대가 후속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자 연대장은 2대대를 투입하여 이를 매복 기습하기로 결심을 하고.
    2대대는 동관리~하송리간 3.0km에 걸쳐 북서쪽에서 부터 7·5·6중대 순으로 진지를 편성하고, 피아식별과 엄격한 사격 통제하에 대기중 7.21 새벽 적이 접근하여 대대의 좌단에서 우단까지 왔을 때 기습 공격을 가하여 적 사살 356명, 생포26명, 박격포16문, 대전차포 2문, 기관총53정, 소총186정 등 다수의 전투장비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에 당시 17연대에 파견되었던 미고문관은 “내가 30년간의 군대생활을 하면서 세계대전을 다 겪었고 서부 활극도 보았지만, 이처럼 통쾌한 전투는 처음 보았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상주 화령장 전투는 6.25전쟁 개전 이래로 계속 후퇴만 거듭하다가 UN군이나 공군의 지원 없이 연대 개인화기와 공용화기로 대승을 거두어 6.25전쟁 최대의 전승지로 알려져 있으며, 7.7 음성전투에서 전 장병이 일 계급 특진한데 이어 7.17 화령장전투에서도 연대 전 장병이 일 계급 특진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 2005년 보병 제17연대 제2대대와 화서면은 자매결연을 맺기도 하였으며, 현재도 이 부대의 이름은 「화령대대」라 이름하고 있다.

    2008~2009년에 화령장지구 전적기념비를 리모델링하여 광장에서 기념비까지 오르는 계단을 재정비 하고 광장에는 6.25때 사용한 탱크와 장갑차를 전시하고 있으며, 2009. 7.21 6.25전쟁 화령장 전투 전승 기념식을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주관으로 송계초등학교에서 1,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개최한 이래 상주시에서는 호국(護國)의 고장에 걸맞게 매년 화령장전투 전승 기념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광장 오른쪽에는 무공수훈자 공적비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는 상주출신으로 대한민국의 무공 및 보훈 수훈자로 250여명이 명각(名刻)되어 있으며, 이 비는 국가보훈처에서 2003.12.8 관리번호 30-2-27로 지정한 현충시설 이기도 하다.(참고: 中化地域의 中心 「忠·孝·情의 고장」 화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