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시

㉜ 의성(義城)의 속수서원(涑水書院)

장안봉(微山) 2019. 7. 25. 17:01
㉜ 의성(義城)의 속수서원(涑水書院)
번호35작성일2015.08.06조회수1252
작성자김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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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성(義城)의 속수서원(涑水書院)

    팔공지맥이 만경산(萬景山: 499m)에서 토봉(兎峰: 284.9m)으로 내달리기 전 동남쪽 낮은 언덕배기 아래로 넓은 안계벌을 바라보며 자리하고 있는 본래 상주목 관할의 "속수서원(涑水書院)"입니다.
    의성군 단밀면 주속길 116-6이지요. 마을 입구에 350년의 연륜을 자랑하는 느티나무가 길손을 반기고 있네요. 이 서원은 상주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은 공적을 추모하여, 선정비(善政碑: 현재 상주박물관에 소재)와 함께 단밀면 면민들이 1509년에 세운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 선생의 생사당(生祠堂)이 그 시작입니다.

    이 생사당은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사당으로 임란 때 소실되어 있던 것을 1656년(효종7년)에 생사당을 복원 하면서 고려 때 안렴사를 지낸 퇴재 신우(退齋 申佑)와 우재 선생을 병향하고 경현사(景賢祠)라 하였다. 1703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속수서원”이라 개칭하고, 1730년에 개암 김우굉(開巖 金宇宏)선생과 검간 조정(黔澗 趙靖)선생을 추배하고, 1826년에 가규 조익(可畦 趙翊)선생을 추배하여 5분을 배향하고 있습니다.

    退齋 선생은 鵝州人으로 고려가 멸망하자 야은 길재와 함께 남하하여 단밀현의 萬景山에 올라 개경을 바라보며 은둔생활을 하였다고 전한다. 조선을 개국한 이태조가 형조판서에 제수하고 누차 불렀으나 不事二君의 절개를 지키며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愚齋 선생은 慶州人으로 1506년 상주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며, 開巖 선생은 義城人으로 요승보우(妖僧普雨)를 죽이라는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려 명종20년 8월에 답을 받았다고 하며, 黔澗 선생은 豊壤人으로 임란이 일어나자 상주의 여러 선비들과 황령사에서 창의하여 항적(抗敵)하였으며 선생이 쓴 임란일기는 보물(100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可畦 선생은 검간 선생의 아우로 호조좌랑, 광주목사, 장령 등을 역임하고 임난시 호남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후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어, 1971년 설단(設壇)하여 단향(壇享)을 하여오다가 1883년에 속수서원 사적비(事蹟碑)를 건립하고 1989년에 서원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건물은 묘우인 3칸 맞배지붕의 숭절사, 6칸의 명륜당, 신문, 전사청, 동재와 서재, 주소등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1974. 3 명륜당 중수기의 일부를 소개하면
    『丹邱一境 山水秀麗 風俗淳厚 先賢遺風尙有存焉 本以尙州舊治 今屬義城而有涑水書院......
    而慕按廉公 罔僕至孝節行 望曠野 而愚齋公 養士治民之善政 見洛江 而慕開巖公 淵源授受之眞的 遇高風 而慕黔澗公 霜淸玉梁之操履對霽月 而慕可畦公 直氣文彩之燦盛 則五先生之遺風餘韻 永不沫於千秋 而可以蔚興於後生矣 凡由來之久遠 事蹟之詳細 昔時之可隱趙公記文 舊堂趙公梁頌 白華黃公祝文更無餘蘊 前人之述己備矣 不敢復謷焉 光復後 初甲寅三月下浣 後學 仁州 張炳達 撰』

    "의성 단밀의 언덕 한 지역은 산수가 수려하고, 사람들의 풍속이 순후하니 이는 선현들의 유훈이 오히려 오늘에도 남아있는 곳이다. 이곳은 본래 상주목의 관할이었으나 지금은 의성군이 되어버린 이곳에 속수서원이 있으니.....

    안렴사 신선생의 끝없는 효성과 절행을 흠모하고,
    넓은 들판을 바라보며 우재 손선생의 선비를 기르고 백성에게 베푸는 선정의 도를 흠모하고, 낙동강을 바라보며 개암 김선생의 연원지학의 참된 고풍과 검간 조선생의 이슬처럼 밝고 옥처럼 깨끗한 조신의 실천을 흠모하고, 밝은 달이 구름에서 나오는 것을 보며 가규 선생의 곧은 기개와 문사의 찬연하고 성함을 흠모하다,

    즉 다섯분 선생의 유풍이 영원히 천추에 없어지지 않고 전해져 후생들이 울흥하리라" 무릇 이 서원의 오래된 유래는 상세하다. 이는 예전에 가은공이 기문을, 구당조공이 상량문을 지으시고, 백화 황공이 축문을 지었으며 이를 바꾸지 않고 예전의 선인들이 지으신 것을 그대로 정리하였을 뿐이며, 어찌 군두더기의 말을 하겠는가.
    광복 후 처음의 갑인년(1974년) 3월 하순에 후학 인주 장병규 짓다. 라고 적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