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시

낙화담(落花潭)

장안봉(微山) 2019. 7. 25. 17:11
㊲ 열매는 맺았다고.... 낙화담(落花潭)
번호40작성일2015.09.10조회수1140
작성자김광희
첨부파일파일받기 크기변환_20150329.낙화담2.jpg
  • ㊲ 꽃은 떨어져도 열매는 맺았다고.... 낙화담(落花潭)
    상주 화령의 봉황산(740.8m)까지 달려온 백두대간이 화령에서 잠시 자세를 낮추어 윤지미산(538m)을 들어올리기 전에 오른쪽으로 가지를 치고 나가니 원통산이다.
    그 사이에 아늑하고 조용한 곳이 바로 화동면 판곡리(板谷里) 이다.

    여말(麗末) 충청도 황간 현감을 지낸 김구정(金九鼎)이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벼슬을 버리고 들어와 터를 잡은 곳이라 한다.
    김 현감은 본관이 청도 김씨로 시조는 영헌공(英憲公) 김지대(金之岱)로 알려지고 있으며, 김구정이 입향한 판곡리는 산이 감싸 안고 앞은 훤히 트여 양지바르며, 땅이 기름져 살기에 적당한 곳으로 公은 시조의 9세손이 된다.

    이곳에 있는 낙화담(落花潭)의 유래는
    풍수지리로 보아 멀리 보이는 백화산의 뾰족한 봉우리가 화기(火氣)를 품고 있어 아무리 단단한 금(金)이라도 녹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김(金)씨들은 그것으로 인하여 오랜 세월에 걸쳐 안녕(安寧)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이 결함을 보충(補充)하기 위하여 시도했던 작업이 마을에 물을 가두어 두는 일이었다.
    公은 마을 한복판에 5,284㎡ 정도의 커다란 못을 파서 주변에 정자를 짓고 노인들의 놀이터로 꾸몄다고 하나 지금은 426㎡정도로 남아 있는데, 이곳이 바로 화동면 판곡리 477번지이다. 실재 이 마을 뒤에는 1988년에 축조한 규모가 큰 판곡지가 있다.

    또 다른 유래는 절곡(節谷) 김준신(金俊臣:1561~1592) 의사가 임란때 상주성에서 왜적을 물리쳐 큰 공을 세웠는데, 상주를 함락한 왜병은 公으로 부터 입은 막대한 피해를 보복하기 위하여 公의 본가가 있는 판곡으로 진출하여 많은 사람들을 해쳤다.
    이러한 참극으로부터 정절(貞節)을 지키기 위해 부녀자들은 마을 앞 연못에 앞 다투어 투신하였다고 한다.
    이후 연못의 중앙에 섬이 생기고 그곳에 노송 한 그루가 성장하니 이 못을 낙화담(落花潭)이라 불렀다한다.

    현재 이 소나무는 수령이 450~500년으로 높이13m, 둘레2m, 수관 20m로 낙화담 안의 작은 섬에 있으며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147호이다. 소나무는 본래 물을 싫어함에도 못 안에 생육이 양호 하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고, 마을 주민들에게 수호목이자 상징물로 소중한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이다.

    못 옆에는 단아한 재각 첨모재(瞻慕齋)와 비각(碑閣)이 있어 눈길을 사로잡는데, 비각 안의 김준신의사제단비(祭壇碑:경상북도기념물 제113호 )는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통훈대부 사헌부 집의에 추증된 절곡(節谷) 김준신(金俊臣`1560~1592)을 기리기 위해 1850년(철종 1)에 세워진 것이다.

    또한 상주 북천의 충신의사단비(忠臣義士壇碑)에 임란북천전투에서 순국한 윤섬, 이경류, 박호 3충신과 상주출신 의병장 김준신과 김일 등 5명의 충절을 포상 하기위해 정조(正祖)가 내린 교서 내용이 비문에 적혀 있기도 하다.

    1973년 연못가에 세운
    ‘낙화담 의적 천양시비(落花潭 義蹟 闡揚詩碑)’ 에는

    『壬辰年 風雨 속에 눈부신 義士 모습
    집은 무너져도 나라는 살아났네
    節士谷 피묻은 歷史야 어느 적에 잊으리,
    설악(雪岳) 높은 峯이 본대로 이르는 말
    꽃은 떨어져도 열매는 맺았다고
    오늘도 落花潭 향기 바람결에 풍기네』
    鷺山 李殷相 作, 一中 金忠顯 書 라 적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