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축(金軸) 부자(父子)! 두 난(亂)에 순절(殉節)하다.
백두대간 「갈령작약지맥」이 작약산 시루봉에서 동으로 가지를 뻗어 이안 중심부에 대가산(大駕山:325m)을 솟구치고, 다시 서쪽으로 가지를 쳐 이안천을 바라보며 감싸 안은 곳에 김축(金軸) 부자(父子)의 충효각(忠孝閣)이 있으니, 상주시 공검면 지평리 산17-1에 소재하는데, 경들 마을 입구로 늘 지나는 길손을 맞고 있네요.
유교(儒敎)의 중요한 덕목이 충효(忠孝)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孝를 忠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忠은 반드시 孝에서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충과 효를 함께 실천한 부자가 우리 지역에 있었으니, 바로 김 축(金 軸)과 그의 아들 영달(永達)이다.
우리 상주지역에 임란시 서재부장(西齋部將) 김신(金紳)과 그의 네 아들이 1592년 외남의 안령전투에서 5부자(五父子)가 순절 하였으며, 또한 구촌(龜村) 홍약창(洪約昌)과 그의 아들(民獻)이 순절하는 등이 있어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하여 눈물겨운 노력을 다한 가문의 역사도 있지만, 대를 이어 부자가 두 난(임진왜란:1592년, 병자호란:1636년)에 순절한 예는 흔치않은 일이다.
함창현지 충절(忠節)편에는 김축(金軸)에 대하여 「郡守應時之子廩質堅確志氣慷慨壬辰亂糾倡義旅從倡義使文烈公金千鎰之陣斬獲甚多殉節於湖南陣叅宣武原從一等功臣官護軍 贈戶曹判書旌表其閭」라 적고 있으며,
효행(孝行)편에는 그의 자(子)영달(永達)에 대하여 「咸寧人軸之子年甫五歲遭壬亂父殉於國是後坐卧不向島夷之國偑服不近島夷之物丙子亂起義旅從本道兵使閔栐殉節於雙嶺陣 贈左承旨旌表其閭」라 적고 있는데,
김축(金軸)은 함창인(咸昌人)으로 임란시 의려(義旅)를 모아 창의(倡義)하고, 호군(護軍)이 되어 이충무공(이순신)의 해전에 참가 하였으며, 전공을 세워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진 하였다, 이어 창의사 문열공(文烈公) 김천일(金千鎰)의 진(陣)에 종군하여 많은 전공을 세우고, 호남진에서 순절(殉節)하였다.
그의 아들 영달(永達)은 다섯 살 때 아버지의 참변을 당하자 어머니 청주한씨는 “너의 아버지는 나라를 위하여 참된 죽음을 당하셨다, 다만 유해를 수습하지 못한 게 한이 된다. 너는 아버지의 거룩한 뜻을 이어받아 뒤를 따르는 것이 충이고 효이라라” 고 아버지의 장한 죽음을 되새겨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교훈을 받으며 자란 영달은 항상 부친의 복수와 보국(報國)에만 전념하다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내가 보국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하고 의려를 일으켜 민영(閔栐)의 진(陣)에서 분전하다가 쌍령에서 순절 하였다. 의관으로 장례하고 충효겸전으로 여리(閭里)에 정표(旌表) 하였는데, 본래 이 각은 고개마루(1883년)에 있었으나, 1978년에 군비와 후손의 부담으로 현재의 자리로 옮겨 재 정화 하였으며,
정면 2칸, 측면 1칸의 와가 맛배지붕으로 현판은 “忠孝閣”이다.. 오른쪽 비신(碑身)의 전면에는 "贈資憲大夫戶曺判書兼知義禁府事行龍驤衛護軍咸寧金公軸之呂 光緖九年十月命旌"라 새겨져 있으며, 그의 아들은 왼쪽에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行掌樂院正咸寧金公永達之閭"이다.
이 비각은 충효절행(忠孝節行)을 표창한 부자(父子)碑로서 흔치 않은 한 가문의 자랑이요 지역의 사표이며, 국민에게는 귀감이 되는 것임에 틀림이 없어 참으로 거룩하다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다(참고: 함창현지, 상주의 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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