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국보훈의 달, 6월 1일은 의병의 날.
6월은 호국보훈(護國報勳)의 달이며 그 첫날은 의병(義兵)의 날이다. 이 날의 제정은 의병의 역사적 가치를 일깨워 애국정신을 계승하고자 2011. 6. 1 제정한 국가기념일로서 금년이 제5회 의병의 날이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고 이들의 애국애족정신을 계승 발전 시켜 국민통합과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한 것으로 6월1일로 정한 것은, 임진왜란시 곽재우가 최초의 의병을 일으킨 1592. 4.22(음력)을 양력으로 환산한 날이라 한다.
임란시 중앙군과 왜적의 최초 격전지가 바로 우리 상주의 “북천전투”이다. 북천 변은 선조(宣祖)의 명을 받은 중앙군의 순변사 이일(李鎰)장군이 관병 60여명과 민병 800여명이 조총으로 무장한 왜병 주력부대(소서행장) 17,000여명과 싸운 곳이다. 이 싸움에서 판관 권길(權吉), 호장 박걸(朴傑), 종사관 윤섬(尹暹)· 이경류(李慶流)· 박호(朴箎), 찰방 김종무(金宗武), 의병장 김준신(金俊臣)· 김일(金鎰)등 민관병 모두가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임진왜란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지역 중의 하나가 상주로서, 이는 중앙군과 최초의 전투지역 이기도 하지만 곡창지대인 상주에서 보급품 준비와 원활한 보급로 확보를 위해 곳곳에서 백성들에게 못된 짓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실제 상주 최초의 임진란 의병(義兵)은 군진(軍陣)의 이름도 없고, 당국에 보고도 하지 않은 채 활동을 하긴 했지만 낙동 화산의 商山人 낙애 김안절이 모집한 100명 남짓한 의병이었다. 이 의진을 이끌고 북천 전장으로 출전한 이는 낙동 화산의 商山人 김일 의사 이시다. 그는 임진년 5월 17일 상주북천으로 나아가 엄청난 무기 성능과 군사 훈련의 수준으로 보아 분명 패전할 것임을 충분히 짐작했을 뿐 아니라 주위의 만류까지 뿌리쳐 가며 출전하여 모두가 전사했다.
그 이후 상주에서는 昌義軍(대장: 이봉. 황령사. 1592, 7,30) · 忠報軍(대장: 김홍민. 속리산. 1592, 8,16) · 尙義軍(대장: 김각. 백화산. 1592, 9.13)을 조직하고, 임진왜란 초기부터 향촌 지역내에서 약탈을 행하는 왜적들을 격퇴하고, 나아가 나라를 구하고자 맹활약을 하였다. 창의군의 선봉장 가악재 이축장군은 상주, 예천 용궁등지에서 기습공격으로 왜병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으며, 충보군도 노대하, 임창원, 조익등이 궁수 10여명을 모아서 속리산에서 창의하자, 청주, 보은, 상주의 사족 70여명이 호응하여 조직되었다고 한다. 상의군은 일찍 5월경에 외남의 안령에서 정경세, 이전, 이준등이 향병을 소모하였으며 9월13일경 김각을 대장으로 정식 창의 하였다고 한다.
상주출신 의병장 淸道人 김준신과 상산인 김일 의사는 충의단에 모셔져 있으며, 안령전투에서 5부자(父子)가 순절한 서재부장 김신은 외남면 소상리에 “현충비”가 서 있기도 하다. 또한 조정 선생이 쓴 “임진란 기록”은 보물 제1003호로, 월간·창석 형제급난도는 유형문화재 제217호로 지정되어 상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기도 하다.
이처럼 한 지역에서 3개의 의병이 조직되어 무록(無祿)의 선비와 백의(百衣)의 민초(民草)들이 스스로 모여 오로지 구국의 일념으로 민족을 구해낸 곳이 어디 그리 흔한 일인가? 이러한 공이 쌓여 선조임금은 상주 전역에 복호(復戶: 조세 및 부역의 면제)를 일년동안 내렸다고 한다.
임란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사단법인「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가 조직 되어 있으며,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경남북분사무소는 상주시 이안면 흑암리 340번지 창의군의 선봉장 가악재 이축장군의 사당 앞에 소재하는 가악재(佳岳齋)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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