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에서 국도3호 4차선 문경방향으로 향하다가 중부내륙고속국도 북상주 나들목을 지나 오른쪽으로 이안·함창방면으로 빠져 나오면 선비의 고장 이안면 이안리 241-2번지에 소박한 단칸 맞배지붕의 동래정씨열녀각(東萊鄭氏烈女閣)이 자리하고 있다.
함창군읍지에 의하면 “校理權達手之妻達手被燕山甲子禍 … … 中廟朝事聞旌閭”라 적고 있는데 열녀 정씨(鄭氏)는 교리 권달수의 妻이며 동래인(東萊人) 감찰(監察) 계전(繼全)의 여식이다.
남편 권달수(權達手:1469~1504년)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통지(通之), 호는 동계(桐溪)이며, 1492년(성종 2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1498년 수찬(修撰)에 올라 부교리를 역임하고, 1504년 연산군의 생모 윤씨를 종묘에 모시려 하자, 그 부당함을 주장하다가 의금부에 하옥되어 장(杖) 60의 처벌을 받고 용궁(龍宮)에 유배되었으며. 그는 기개와 절조가 있는 인물이었다는 평을 받았었다.
정씨는 남편이 갑자사화에 피화되어 죽임을 당하자 남편의 시신이 돌아 올 때까지 60여일을 식음을 전폐하고, 함창의 촌사(村舍)에서 빈소를 차리고 하루 세 차례씩 상식(上食)을 지내며 울다가 남편의 시신이 돌아오자 “내가 지금까지 살아 온 것은 남편의 시체가 고향에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 남편의 시체가 돌아 왔으니 나를 함께 장사 지내라. 그리고 맏 시동생 정랑공의 아들을 남편의 후손으로 이어달라” 이렇게 말하고 울다가 남편의 시체를 문 앞에서 영접한 후 그 자리에서 남편의 뒤를 따라 숨졌다고 한다.
그 후 중종1년(1506년)에 권달수에게 도승지를, 그 부인에게는 숙부인(淑夫人)을 증직(贈職)하고, 이안리에 1738년(영조14년) 정려각(旌閭閣)이 건립 되었으며, 銘文은 “東萊鄭氏節婦碑”로 이용재(李容齋)가 짓고 이기진(李箕鎭)이 썼다라고 전 한다. 현판은 「贈 通政大夫 承政院 都承旨 製敎兼 經筵 參贊官 … … 文學府君 權公之妻 節婦 贈 淑夫人 東萊鄭氏之閣」1997. 3.26. 移建이라 되어 있으며, 남남동향으로 목조와가 맞배지붕 3량으로 1997년 국도 3호선이 4차선 확장으로 인하여 현 위치로 옮겨 이건 했으며, 2012. 5. 권씨 문중에서 수백만원의 문중자금을 들여 정려각의 지붕 기와를 새로이 교체하고 단청을 하는 등 말끔히 단장을 하였으며 주변제초작업도 언제나 깨끗하게 하여 지나는 길손들의 발걸음을 잡아두고 있다. 후세인들은 남편 권달수의 절개와 꿋꿋한 선비정신은 충신(忠臣)으로서, 부인은 열부(烈婦)로서 널리 알려져 의절쌍성(義節雙成)의 부부(夫婦)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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