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스크랩] 『장자』에서의 ‘호접지몽’ 우화 해석에 관한 연구

장안봉(微山) 2016. 6. 4.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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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논집 제42집 2015년 8월
Sogang Journal of Philosophy
Vol.42, Aug. 2015, pp. 391-421
10.17325/sgjp.2015.42..391

 

 

『장자』에서의 ‘호접지몽’ 우화 해석에 관한 연구

 

김권환(경동고)/신정근(성균관대)

 

【주제분류】동양철학, 도가사상, 장자 철학
【주제어】 『장자』, 「제물론」, 호접지몽, 물화
【요약문】본 연구는 『장자』 「제물론」 호접지몽 우화 해석에 관한 연구이다. 지금까지 이 우화의 해석은 학자들 사이에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 우화의 전반부 ‘장자의 꿈’ 부분은 대체로 일치하였지만 중반부 ‘유분’(有分)과 후반부 ‘물화’(物化)에서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필자는 기존의 해석에 의문을 가지고 우화의 원관념에 입각해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다.


전반부는 기존의 해석을 따랐으나,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다르게 해석하였다.
기존에는 장주와 나비와 일체가 되는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했다면, 본고에서는 장주가 꿈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부정적 의미로 해석하였다. 꿈에서 깨어나는 것을 깨달음으로 해석한 것이다.

중반부도 기존의 일반 해석을 따랐으나 그 함의를 다르게 보았다. 기존의 해석들은 이 부분을 전체 맥락과 다른 것으로 의심스러워하면서 작위적으로 부연 설명하였다면, 본고에서는 꿈과 깸, 즉 ‘허상[名]’과 ‘참[實]’ 에는 확실한 구분[分]이 있음을 들어 설명하였다. 종반부는 기존의 것과 완전히 다르게 해석하였다. 기존의 연구가 이것을 ‘물의 변화’로 긍정적으로 해석하였다면, 본고에서는 ‘물에 의해 변화됨’으로 부정적으로 해석한 최근의 연구를 따랐다.

 

투고일: 7월 31일, 심사완료일: 8월 19일, 게재확정일: 8월 20일

 

 

I. 들어가기

 

본 연구는 『장자』 「제물론」 호접지몽 우화 해석에 관한 연구이다. 『장자』에서 장자가 직접 저술한 글은 대체로 내편 7편에 국한된다. 그 중에서 「소요유」, 「제물론」, 「양생주」는 장자의 중심 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편
으로 인정된다. 흥미롭게도 「제물론」은 장자의 인식론적 세계관을 잘 보여 주는 편이기도 하고 편명이기도 하다. 호접지몽 우화는 「제물론」의 마지막에 배치되어 있는 우화로서 이편의 종지부를 찍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추정된다. 그 호접지몽 이야기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해석되고 있다.

 

 

ⓐ옛날에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펄럭펄럭 자유롭게 나는 나비였다.
스스로 기분 좋게 뜻대로 날면서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얼마 후깨어나니 놀랍게도 장주였다. [그렇지만]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가를 알 수 없었다.

ⓑ장주와 나비는 분명한 구별이 있으니, <이처럼 장주가 나비가 되고 나비가 장주가 되는것>

ⓒ이것을 물의 변화[物化]라고 한다.1)

1) 『장자』, 「제물론」,

昔者莊周夢爲胡蝶, 栩栩然胡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 則蘧蘧然周也.. 不知周之夢爲胡蝶, 胡蝶之夢爲周與?

周與胡蝶, 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

본 논문의 『장자』의 원문은 진고응의 『莊子今註今譯』(中華書局(香港), 1991에 따랐으며, 해석은 안병주의 『역주 장자 1』(전통문화연구회,2001)을 위주로 하되 필자의 언어로 윤문을 거쳤다. 이하 인용문은 편명만 밝
힌다.

 

 

널리 알려진 이 구절의 ⓐ 부분은 상황을 묘사하는 부분이라 대체로 해석이 일치한다. 그러나 ⓑ 부분과 ⓒ 부분, 즉 “周與胡蝶, 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에 대해서는 해석이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그 분분한 해석의 중
심에는 ‘유분’(有分)과 ‘물화’(物化)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있다.

특히 이곳의 ‘유분’과 ‘물화’는 그동안 여러 학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지만 주로 다음과 같은 해석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장주와 나비는 분명한 구별이 있으니, 이것을 물의 변화[物化]라고 한다.”2) 장주와 나비 사이에 구별이 있는 것[有分]과 물의 변화[物化]를 장자의 사상과 맥을 같이 하는 긍정적 의미로 해석하는 방향이다.

 

한편, 최근 이 구절에 의문을 가지고 이의를 제기하며 다른 해석을 선보인 연구가 있다.3)

그 연구에서 이택용은 지금까지의 이곳 ‘물화’ 해석이 논리 정합적이지 않고 『장자』 내편 전체의 종지나 「제물론」의 종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정적인 의미의 물화 해석을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
그이가 제출한 ‘물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장주와 나비 사이에 혹 분명한 구분이 있다[고 여긴다]면, 이를 ‘물에 따라 변화함’이라고 한다.”이다. 유분과 물화 모두를 장자의 사상에 배치되는 부정적인 것으로 해석하였다.

 

기존의 해석은 이택용이 지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것은 첫째, ⓐ에서 장주와 나비의 구분 불가를 말하는데, ⓑ에서는 이들 사이에 반드시 구분이 있다고 한 점, 둘째, ⓒ에서 ‘이것[此]’를 앞 구절의 ‘장주와 나비 사이에 구분이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물화’를 긍정하는 것은 ⓐ를 뒤집는 것이라는 점 등이다. 이 지적만으로도 기존의 해석에는 문제점이 있다.

그러나 그가 제출한 새로운 해석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그것은 기존의 해석과 공통적으로 가진 문제로서 ⓐ에 대해 의심 없이 동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존해석과 새 해석이 모두 ⓐ 속의 장자가 꿈에서 깨어 자기가 장자인지 나비인지 구분 못하는 상태를 만물제동 내지는 물아일체의 경지로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꿈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상태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완전히 깨어난 것은 그 우화를 말하는 시점의 화자(話者)의 상태이지 옛날이야기[昔者] 속의 장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우화의 ⓐ, ⓑ, ⓒ 속에는 세 시점의 장주가 있다.

ⓐ 속에서 나비 꿈을 꾸는 장주, 꿈에서 깨어났지만 비몽사몽의 장주, 그리고 ⓑ, ⓒ를 말하는 화자 장주이다. 따라서 ⓐ 부분은 긍정적으로 보면 안 된다고 본다. 기존의 해석과 새 해석 모두가 이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논리를 필두로 ⓐ의 내재적 의미를 다르게 해석할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와 ⓒ를 해석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는 기존의 해석과는 문자적 해석은 같지만 내포하는 의미는 다르게 되고, ⓒ는 이택용의
해석과 같아진다. 사실상 본 논문은 그동안 논란이 되어 왔던 호접지몽 우화 전체를 새롭게 해석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먼저 이 우화의 ⓐ 부분을 바로잡음으로써 ⓑ의 의미를 확정하고 이택용이 밝힌 ⓒ의 ‘물화’ 의미를 확증하도록 할 것이다. 그 이전에 『장자』전체의 종지와 「제물론」에 대한 종지를 검토함으로써 필자의 논증
을 뒷받침하는 명제를 도출할 것이다. 또 필자는 본 연구에서 우화의 바른 해석법을 고수할 때 장자철학의 본의가 드러난다고 전제할 것이다. 우화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원관념을 제대로 찾는 것이 우화해석의 핵심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따라서 보조관념을 사실로 여기고 해석하는 것을 거부할 것이다. 추가로 이택용이 제시한 세 가지 연구 전제도 그대로 본 연구의 전제로 가지고 갈 것이다.4)

 

2) 안병주, 전호근 공역, 『역주 장자 1』, 126; 전현미, 『박세당의 장자, 남화경주해산보 내편』, 191; B. Watson, Chung Tzu: Basic Writing, New York, 1996, 45; 陳鼓應, 『노장신론』, 258 등에서 모두 유사한 해석을 하고 있다.

3) 그 연구는 이택용, 「『장자』 「제물론」 胡蝶之夢 우화의 ‘물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 『동양철학』, 제42집, 한국동양철학회, 2014이다. 그는 이 새로운 해석을 위하여 『장자』 내편 각 편들의 종지에 대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진행하며 기존의 해석적 난점을 해결해 가고 있다.

4) 그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장자』 내편이 장자철학을 가장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둘째, 장자철학은 일관된 종지를 갖고 있다.

셋째, 원문에 대한 다양한 해석 중 장자철학의 종지에 부합하고, 있는 그대로의 원문을 단순하게 반영하는 해석이 가장 바람직하다. 이택용, 「『장자』 「제물론」 胡蝶之夢 우화의 ‘물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 122~123.

 

 

II. 『장자』 「제물론」 호접지몽의 해석의 단초

 

이 장에서는 본 논문의 주된 논지를 전개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 ‘호접지몽’ 우화를 둘러싸고 있는 담론에 대한 기본적 검토를 실시할 것이다. 넓은 영역에서 좁은 영역으로 논의의 범위를 좁혀가며 논구할 것이다.

가장 넓게 『장자』의 종지를, 다음으로 「제물론」의 종지를, 그리고 장자가 사용하는 ‘물’(物)개념으로 좁혀가며 검토하여 논의를 위한 기초적 토대를 확정할 것이다. 꿈 우화의 해석을 돕기 위해 장자의 글쓰기 방식에 대해서도 검토할 것이다.

 

1. 『장자』와 「제물론」의 종지

 

(1) 『장자』의 종지

 

『장자』가 다양한 우화와 상징으로 구성되어있는 만큼 그 종지를 파악하는 주장도 다양하다. 『장자』의 종지에 대한 담론은 크게 세 가지 조합이 서로 해석적 커버리지를 놓고 다투고 있는 형국이다. 그 세 가지는 ‘정신적자유’5), ‘생명의 중시’6) 및 ‘영혼의 발전’7) 등이다.8)

 

‘정신적 자유’를 『장자』의 종지로 보는 학자들은 「소요유」에서 보여주는 자유를 중시하여, 외물의 얽매임으로부터 해방되어 절대 자유의 정신적 경계에서 노니는 삶이야말로 『장자』 전체의 핵심 주제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주로 「소요유」의 무대(無待), 소요(逍遙), 유(遊) 등이나 「대종사」의 현해(縣解) 등의 개념을 중시하여 논의를 전개한다.9) 그들에 따르면 장자는 현 상태를 외물에 구속되어 있어 정신적으로 자유를 잃고 있은 상태로 보고 이에 벗어나 소요하며 노니는 자유 경지에 이르기를 요구한다.

 

‘생명의 존중’을 『장자』의 종지로 보는 학자들은 장자의 철학을 생명의 철학, 전생보신(全生保身)의 철학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주로 「양생주」에서 보여주는 보신(保身), 전생(全生), 양친(養親), 진년(盡年) 등의 개념10)을 중시하여 장자의 주된 관심사로 여긴다. 이들에 따르면 장자는 현 상태의 인간을 외물을 쫓아 치닫다가 평생 고역만 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보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생명을 훼손하는 일체의 대응을 회피하여 하늘이 준 생명력을 최대한 누려 삶을 온전히 할 것[全生]을 요구한다.

 

‘영혼의 발전’을 『장자』의 종지로 보는 학자는 앞에서 말한 ‘정신적 자유’를 ‘영혼의 성장 내지는 완성’으로 보는 관점이다. 정신 자리에 발전, 자유 자리에 성장 또는 완성이라는 개념으로 대체하였을 뿐 그 함의는 크게
다르지는 않다. 다만 성장과 완성의 과정을 부각하는 측면이 보인다. 이들은 오상아, 심재, 좌망 등을 비본래적 자아에서 큰 자아로 되는, 그래서 온전한 자기로 태어나는 의미로 본다.11)

 

그 외에 혹자는 위의 세 가지 중 ‘전생보신’과 ‘정신적 자유의 추구’를 동시에 『장자』의 종지로 보기도 하며 다른 혹자는 ‘만물제동’을 또 다른 혹자는 ‘타자와의 소통’을 『장자』의 종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12)

 

5) 쉬푸꾸안(徐復觀), 리쩌허우(李澤厚), 추이따화(崔大華), 우이(吳怡) 등이 이에 해당한다.
6) 왕보(王博), 리쩐강(李振綱), 덩리안허(鄧聯合), A. C. Graham 등이 있다.
7) 여기에 해당하는 학자는 R. E. Allinson, 우꽝밍(吳光明), 오강남 등이 있다.
8)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이택용의 위 논문, 「『장자』 「제물론」 胡蝶之夢 우화의 ‘물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 136, 참조. 이 이외에도 장자를 변신의 측면에서 파악하여 상상과 소요의 세계를 창조한 측면을 강조하는 논의(신정근, 『신정근교수의 동양고전이 뭐길래?』, 동아시아, 2012 참조.)도 있다.
9) 「소요유」, 若夫乘天地之正, 而御六氣之辯, 以遊无窮者, 彼且惡乎待哉!; 「대종사」: 安時而處順, 哀樂不能入也. 此古之所謂縣解也.
10) 「양생주」, 爲善无近名, 爲惡无近刑, 緣督以爲經, 可以保身, 可以全生, 可以養親, 可以盡年.

11) 「제물론」, 今者吾喪我, 汝知之乎? 이곳 ‘吾喪我’에 대해 오강남은 ‘큰 자아가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오강남, 『장자』, 62.
12) 여기서 혹자는 친구잉(陳鼓應), 리우샤오간(劉笑敢) 등이고, 다른 혹자는 모리미끼 사부로(森三樹三郞)이고, 또 다른 혹자는 강신주가 해당된다. 이택용, 「『장자』 「제물론」 胡蝶之夢 우화의 ‘물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 137.

 

 

이렇게 『장자』의 종지라고 주장하는 것이 다른 이유는 각 학자들이 중요하게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일 터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장자가 다양한 관점에서 자신의 사상을 진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장자』내편 일곱 편을 철저히 분석하여 그 종지를 “도의 체현 즉 ‘제물’(齊物)과 ‘무기’(無己)를 통하여 불우한 운명으로부터 ‘정신적 자유’를 확보하는 것”13)으로 확정짓기도 하지만 기실 ‘정신적 자유’의 자리에 ‘생명을 온전히 함’이나 ‘영혼의 완성’ 등으로 대체해도 되는 것이다. 그 중 어느 하나로 확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우선 이들의 각기 다른 종지를 내세우지만 각 종지들의 논리 구조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모두 <그림>1과 같이 “A라는 현실에 있는 중인(衆人)이 B의 노력 과정을 거쳐 C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벗어나지 않는데,14) ?장자?에서 B와 C 사이에는 그 경계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물, 자유, 전생 등을 과정적 동사로 보면 B에 결과적 명사로 보면 C에 해당할 수 있다는 말이다. 또 그들이 주장하는 종지는 모두 이 논리구조의 C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래적 가치에 해당하기 때문일 것이다. 본래적 가치인 자유, 생명, 소통 사이에는 가치의 위계서열이 없다.

그 중 하나를 종지라고 하면 나머지는 그 하위로 서열화 되면서 주변화 되거나 도구적 가치로 격하될 수도 있다. 비록 일부에서 한두 번밖에 거론되고 있지 않더라도 그 의미가 깊고 가치가 높은 것이라면 그것을 종지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차라리 장자의 ‘같은 관점에서 보면 만물이 다 하나로 보이는’15) 논법을 빌려 각 종지들을 동급으로 보고자 한다. 이들은 서로 충돌하는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포섭할 수 있는 동급의 지향과 가치를
지닌 개념들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장자』의 해석이 정합성을 가지려면 이 모든 종지와 해석상 어긋남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호접지몽의 해석도 최소한 위의 종지의 일부를 설명하면서 다른 모든 종지와 부딪히지 않아야 한다.

 

13) 이택용, 「『장자』 「제물론」 胡蝶之夢 우화의 ‘물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 138.
14) 종지에 따른 A, B, C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5) 「덕충부」, 自其異者視之, 肝膽楚越也., 自其同者視之, 萬物皆一也.

 

 

(2) 「제물론」의 종지

 

「제물론」의 중심 주제를 알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개괄을 통해 큰 줄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제물론」은 7장으로 분류하지만, 좀 더 자세한 분석을 위해 몇 단락으로 잘게 나누어 주요 구절과 핵심어를 중심으로 주제를 찾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표1> 제물론의 주요 구절과 핵심 개념

 

 

「제물론」 내용 요소를 보면 핵심 개념과 주제를 대별하면 ‘참된 자기로 돌아감’, ‘중인의 고달픈 삶’, ‘성심에서 벗어남’, ‘도의 입장에서 봄’, ‘만물과 하나가 되어야 함’, ‘큰 깨달음’ 등이다.

전체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확정하기 위해서는 핵심 개념과 주제를 분류할 필요성이 있다. 이를 <그림1>의 구분 즉, 보통 사람의 현실적 실태(A), 그것에서 벗어나는 길(B),도의 경지에 도달한 모습(C) 등으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표2> 「제물론」의 핵심 개념과 주제의 분류

 

16) 아래 내용의 원문은 차례로 다음과 같다. 「제물론」,

今者吾喪我 ; 咸其自取, 怒者其誰邪. ; 大知閑閑,小知閒閒 ; 若有眞宰, 而特不得其眹. ; 終身役役而不見其成功, 苶然疲役而不知其所歸, 可不哀邪. ; 夫隨其成心而死之, 誰獨且无師乎. ; 欲是其所非而非其所是, 則莫若以明. ; 彼是莫得其偶, 謂之道樞. ; 道統爲一 ; 是以聖人和之以是非, 而休乎天鈞. ; 天地與我竝生,而萬物與我爲一 ; 夫大道不稱, 大辯不言 ; 民濕寢則腰疾偏死, 鰌然乎哉. ; 死生無變於己, 而況利害之端乎. ; 且有大覺而後此其大夢也, 而愚者自以爲覺, 竊竊然知之. [중략] ; 吾所待又有待而然者邪. ; 不知周之夢爲胡蝶, 胡蝶之夢爲周與.
17) 원문의 ‘覺’은 꿈에서 깨어난다는 뜻이지만 그것이 상징하는 것은 ‘성심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보고 여기서는 깨달음이라고 하였다. 이것에 대하여 다음절에서 자세히 논할 것이다.

 

 

여기서 「제물론」의 주된 함의 구조는 <그림1>의 형식 ‘A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B와 같은 방법을 통하여 C의 상태에 이르기’와 같다. 이 구조에서 ‘제물’(齊物)의 위치는 B와 C에 모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제물’을 A에서 벗어나는 방법, 즉 동사적으로 해석하면 B의 의미를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A에서 벗어난 경지, 즉 명사적으로 해석하면 C의 의미를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의미를 최대한 종합하면 「제물론」의 종지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심을 가지고 괴롭게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은, 도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봄으로써 세상 만물을 명석하게 인식하게 되면, 참된 자기를 찾고 만물과 하나가 되어 사해 밖에서 노니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마지막 호접지몽 우화가 「제물론」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생각해보자.

호접지몽 우화[ⓐ꿈 이야기+ⓑ‘유분’(有分)+ⓒ‘물화’(物化)]는 전체적으로 「제물론」의 위 종지와 ‘부합’하는 내용 요소를 가지거나, 부분적으로 이 종지를 ‘부연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또 이것은 앞의 다른 부
분과 내용 요소를 공유하면서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우화가 「제물론」의 제일 마지막에 위치한 것으로 볼 때 각별한 역할이 있을 것이다.

이 우화가 그 역할을 잘 하는 것으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 ⓒ를 <그림 1>과 <표2>의 A, B, C 중에 어디에 배속시켜 어떤 의미를 가지게 할 것인가가 관건으로 보인다. 제 Ⅲ장에서 할 일이다.

 

 

2. 『장자』에서의 물과 만물제동

 

(1) 물의 범주와 그 예외

 

장자에게 ‘물’(物)의 범주는 매우 넓은 편이다. 온 천하, 그 천하에 속해있는 사물, 인간, 그 인간에 포함되어 있는 자기 몸, 그 인간이 만들어내는 일(사건, 사태), 지금까지 거론된 것들의 변화 등을 모두 포함한다.18)

 

우선 물이 천하를 나타내는 경우를 보자.19)

 “만일 천하를 천하에 간직하면 훔쳐서 달아날 데가 없으니 이것이 ‘일정불변하는 만물’[恒物]의 실상이다.”20) 여기서 항물은 상항 일정한 질량이 보존되는, 만물의 총합인 천하를 말한다. 기본적으로 장자는 우주는 물(物)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 물들의 총합으로서의 천하는 영원[恒]하다고 보았다.21)

 

18) 吳光明, 『장자철학』, 김용섭 옮김, 대구한의대출판부, 264.
19) 「소요유」, 世蘄乎亂, 孰弊弊焉以天下爲事. [중략] 是其塵垢粃糠, 將猶陶鑄堯舜者也, 孰肯分分然以物爲事.(세상에서는 난세를 다스려 줄 것을 바라겠지만 누가 쓸데없이 천하를 일삼겠는가? [중략] 이 사람은 그 먼지나 때, 쌀겨나 쭉정이로도 장차 요순과 같은 성인을 빚을 수 있는데, 누가 기꺼이 물로서 일삼겠는가?)

여기서 나중의 ‘物’은 앞의 ‘天下’와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
20) 「대종사」, 若夫藏天下於天下而不得所遯, 是恒物之大情也.
21) 곽상, 『장자주』, 「대종사」, 此乃常存之大情(최진석/정진욱 옮김, 비발간본 번역,153.)

 

 

또 물이 인간과 인간의 신체를 뜻하는 경우를 보면, “또 그대와 나는 모두 ‘물’이니, 어찌하여 서로를 물로 대할 것인가?”22)에서처럼 자신과 타인을 포함한 인간도 물이라고 칭하고 있다. 몸뚱어리를 가지고 있는 인간을 물로 본 것이다. 인간도 물일진댄 신체 일부분은 말할 것도 없다.

“만물을동일한 견지에서 바라보며 발 하나 잃은 것에 얽매이지 않으며 자기 발 하나 잃은 것을 마치 흙덩이 하나 떨어져 나간 것처럼 본다.”23)

신체 일부분인 발도 흙덩이와 같은 물로 보는 시각을 읽을 수 있다. 이런 시각은 동물, 식물, 인물 등을 모두 물이라고 보는 현대의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아가 물은 인간이 맞닥뜨리는 사건이나 사태 등으로도 쓰인다.

 “삶과 죽음, 빈곤과 부귀, 현명함과 어리석음, 명예가 훼손됨과 기림, 배고프고 목마름, 추위와 더위는 모두 일의 변화이며 명의 흐름이다. … 마음으로 하여금 조화롭고 즐겁게 하고 이치에 통하여 기쁨을 잃지 않게 한다면, 낮과 밤이 쉴 새 없이 진행되어도 만물과 더불어 봄의 화기를 갖게 한다.”24)

 여기서 ‘물’은 사생존망(死生存亡)으로부터 시작되는 갖가지 일들과 같은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인간사에서 부딪히는 갖가지 일들이라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장자』에서의 물은 인간 자신을 포함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형의 모든 사물, 인간이 맞닥뜨리는 모든 사태, 또 그것들의 총합인 만물, 만사, 우주 전체 등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장자』에서의 물은 이러한 명사적 용법으로써 뿐만 아니라 동사적으로도 사용된다. 그것은 앞에서 인용된 “또 그대와 나는 모두 ‘물’이니, 어찌하여 서로를 물로 대할 것인가?”에서 뒤에 나오는 ‘물’은 ‘물로 대하다’라는 동사의 용법으로 쓰인다. 사람이 물이기는 하지만 물로 대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인간은 물이면서도 다른 물과는 차별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물로 대하면 안 되는 인간의 또 다른 측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물의 예외, 곧 물과 구분되는 차원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장자』에서 장자가 뚜렷이 구분하고 있는 것 속에 답이 있어 보인다.

 

우선, 장자는 진인․신인․지인을 중인과 구분한다.

전자는 물의 지배를 벗어난 사람이기에 그들의 몸은 물이지만 그들의 정신 경지는 물이 아니다. 진인 등이 물에 속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좌망 심재를 통하여 가짜자기를 버렸기 때문이다.25)

가짜 자기가 무엇인가? 장자는 그것을 소지 또는 성심(成心)이라고 했다.26) 좁은 소견․편견 같은 것에 물든 가짜 자아를 말한다. 가짜 자기가 사라진 곳에 무엇으로 채워지는가? 도 즉 대지로 채워진다.

대지로 채워진 자기를 무엇이라고 부를 것인가? 참된 인간[眞人]이라고 불렀다. 개별적 진인을 참된 자아[眞我]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A에서 벗어나 C상태에 도달한 참된 인간[眞人]의 정신이다. 그
것은 A 상태에 머물러 있는 보통 사람에게는 드러나지는 않지만 마음 깊숙이 감추어져 있을 것이다.27)

요컨대 진인의 정신 경계나 참된 자아[眞我]는 물의 범주에서 벗어나 물과 구분[分]된다. 이것이 호접지몽 우화의 ⓑ‘유분’ 해석의 전제이다.

 

22) 「인간세」, 且也若與予也皆物也, 奈何哉其相物也.
23) 「덕충부」, 物視其所一而不見其所喪, 視喪其足猶遺土也..

24) 「덕충부」, 死生存亡, 窮達貧富, 賢與不肖毁譽, 飢渴寒暑, 是事之變, 命之行也.…使日夜無卻而與物爲春, 是接而生時於心者也. 是之謂才全.
25) 「대종사」, 仲尼蹴然曰, 何謂坐忘?, 顔回曰, 墮肢體, 黜聰明, 離形去知, 同於大通, 此謂坐忘.
26) 장자는 대지와 소지를 나누고 있다. 「소요유」, 小知不及大知; 「제물론」, 大知閑閑, 小知閒閒., 大言炎炎,小言詹詹.

27) 융은 “자아(Ich)”와 “자기(Selbst)”를 구분하고 있다. ‘자아’는 일종의 페르소나의 집합체로서 의식할 수 있는 자신이고, ‘자기’는 정신의 분열을 지양하고 통일케 하는 요소로서 ‘본연의 자기’라고 한다. 이부영, 『분석심리학』, 일조각, 1978; 2012, 74~75.

 

 

(2) 만물제동의 원리

 

본 소절에서는 장자가 「제물론」을 통해 강조하는 만물제동의 인식 원리를 탐구함으로써 만물을 같게 보는 참 의미를 알아보고자 한다. 만물제동은 만물을 같게 본다는 뜻으로, 선입견과 편견[成心]을 가진 보통 사람들이 고달프고 무의미한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벗어나기 위해 장자가 제시한 인식 방법이자 이를 통해 도달한 정신적 경지이기도 하다. 우선 인식 방법으로서의 만물제동을 살펴보자.

장자는 대체로 다음 다섯 가지의 방법으로 만물을 같게 본다.28)

 

첫째, 시간을 무한대로 극대화하여 모든 존재를 그 속에 편입시킴으로써 존재자의 시간 길이를 무화시켜 동등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예컨대, “초나라 남쪽에 명령이라는 것은 오백년을 봄으로, 오백년을 가을로 삼는다. 또 대춘이라는 것은 팔천년을 봄으로, 팔천년을 가을로 삼는다. 그런데 팽조는 오래 산 것으로 소문나 있고, 사람들은 그를 부러워한다.”29)에서는 인간의 시간인 수명을 명령이나 대춘 등의 수명과 비교하면서 인간 수명의 상대적 크기와 그 가치를 무화시키고 있다.

만물은 변하는데 그 변화와 동일한 것이 시간의 흐름이다. 시간을 극대화한다는 것은 변화를 무한대로 가져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컨대 장자의 후학들은 만물을 변화의 흐름 속에 집어넣어 고정된 실체를 없애버림으로써 만물을 동등하게 보는 논리30)를 구사한다.

 

28) 이곳의 논의는 필자의 박사학위논문(김권환, 「『논어』와 『장자』에서의 노년 인식 연구」, 129)에서 간단히 언급한 것을 확장하여 논하였다.
29) 「소요유」, 楚之南有冥靈者, 以五百歲爲春, 五百歲爲秋. 上古有大椿者, 以八千歲爲春, 八千歲爲秋, 此大年也, 而彭祖乃今以久特聞, 衆人匹之, 不亦悲乎.

30) 예컨대, “幾가 수초, 이끼, 질경이가 되고, 계속해서 질경이가 변하여 된 오족은 굼벵이, 나비가 되고, 나비는 곱등이→새→좀→초파리→새벼룩→…→표범 →말→말→인간→기(幾)로 돌아감”

(「지락」 : 種有幾, 得水則爲, 得水土之際, 則爲䵷蠙之衣, 生於陵屯則爲陵舃, 陵舃得鬱棲則爲烏足. 烏足之根爲蠐螬,其葉爲胡蝶. 胡蝶胥也化而爲蟲, 生於竈下, 其狀若脫, 其名爲鴝掇. 鴝掇千日爲鳥, 其名爲乾餘骨. 乾餘骨之沫爲斯彌,斯彌爲食醯. 頤輅生乎食醯.,黃軦生乎九猷, 瞀芮生乎腐蠸. 羊奚比乎不, 久竹生靑寧., 靑寧生程, 程生馬, 馬生人, 人又反入於機.)의 사유속에서 모든 존재자는 동등성을 얻는다.

 

 

둘째, 같음의 관점에서 보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다. 다르게 볼 수도 있지만 그 관점은 버리고 같음의 관점만을 택하여 보면 같은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예컨대 “다름의 관점에서 보면 간과 쓸개는 초나라와 월나라만큼 멀고, 같음의 관점에서 보면 만물이 모두 하나이다.”31)에서 장자는 사물을 같게도 볼 수 있고 다르게도 볼 수 있지만 같음의 관점을 택하여 볼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장자가 같음의 관점을 강조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양극을 조화시키고 모든 것을 고르게 하기 위해서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장자는 이것을 ‘두 길을 걸음’[兩行]이라 했다.32)

따라서 장자가 같음의 관점을 택하는 것은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을 전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장자는 다름을
존중하는 원리도 가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소리는 만 가지가 같지 않고 각기 스스로가 소리를 내는 거야.”33)에서처럼 만물의 제각기 다른 소리를 무화시키지 않는다.

 

31) 「덕충부」, 其異者視之, 肝膽楚越也., 自其同者視之, 萬物皆一也.
32) 「제물론」, 是以聖人和之以是非而休乎天鈞, 是之謂兩行.
33) 「제물론」, 夫吹萬不同, 而使其自己也, 咸其自取, 怒者其誰邪.

 

 

셋째, 대상을 본질적인 요소로 극소화하는 방법으로, 만물을 잘게 나누면 그 최소 구성요소가 같다고 보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그 흐릿하고 어두운 사이에 섞이고 변하여 기가 있게 되었고, 기가 변하여 형체가 있게 되었고, 형체가 변하여 삶이 있게 되었다.”34),

 “기가 모이면 생명이 되고 흩어지면 죽게 된다.”35) 등을 들 수 있다.

장자는 만물을 ‘기’(氣)의 취산으로 본다. 만물은 기의 이합집산의 양상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지만 그 근본 구성 요소가 기임에는 변함이 없다. 따라서 만물의 본질이 기인 점에서 동등성을 확보하게 된다.

 

34) 「지락」, 雜乎芒芴之間, 變而有氣, 氣變而有形, 形變而有生. 이곳 「지락」과 아래의 「지북유」는 비록 내편에 속하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장자철학에서 영향을 받았던 장자후학의 자료로 인정되고 있어 인용하였다.

35) 「지북유」, 人之生, 氣之聚也., 聚則爲生, 散則爲死.

 

 

넷째, 가치 상대주의 관점에서 보는 방법으로 모든 것은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은 동등하다는 논리이다. 예컨대, 장자의 ‘무용지용’ 논리는 쓸모없다고 생각되는 것도 사고를 전환하여 배치를 바꾸
면 나름대로 쓸모가 있다는 것이다. 장자는 도의 경계에 있는 것 이외에는 가치 서열을 두지 않는데 필자는 이를 가치 상대주의라 했다. 장자의 상대주의적 인식에 대해서 필자는 다음과 같이 논한 바가 있다.

 

"장자의 인식 방법은 만물과 인간의 사태를 도라는 절대적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만물을 상대화 시키는 방법이다. 보통 사람[衆人]의 눈으로 만물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것은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하여 이것과 저것을 차별하여 본 것일 뿐이다. 하지만 지인이 절대적인 도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상대적인 것을 상대적인 것’으로, 즉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된다. 그러면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 하여 보는 것’은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상대적인 평가는 그것 자체로, 또는 전체 연관 속에서의 그것으로 판단한 것이 아니라 항상 다른 대상과 비교하여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만나는 상대에 따라, 만나는 상황마다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렇게 상대적인 것은 상대에 따라 판단의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에 어떤 고정된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이것을 인정하고 판단하는 것이 ‘상대적인 것을 상대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36)"

 

이것은 절대적인 도의 관점에서 보면 만물이 지닌 가치적 차이는 없어지고 모두 동등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인식된다는 말이다. 도라는 하나의 큰 흐름에서 보면 만물은 전체 연관 속에서 온 덩어리 하나로 보일 것이며 이
때 만물은 ‘있는 그대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만물제동의 진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만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방법이자 경지이다. 호접지몽 우화의 본의도 ‘만물을 있는 그대로 보도록 요구하는 뜻’을 벗어나지 않는다.

 

36) 김권환, 「『논어』와 『장자』에서의 노년 인식 연구」, 153.

 

 

3. 『장자』 글쓰기 방식과 호접지몽 우화 해석

 

본 소절에서는 『장자』의 글쓰기 방법을 이해함으로써 호접지몽 우화를 바르게 해석하는 기초를 다지고자 한다. 장자는 다른 사상가들의 저술에 비해 독특한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장자 후학들은 「우언」에서 이를 우언(寓言), 중언(重言), 치언(巵言)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우언은 열에 아홉이고 중언은 열에 일곱이다. 치언은 날마다 생겨나서 자연의 도[天倪]로 조화시킨다.”37)

육방호(陸方壺)의 풀이에 의하면 우언은 뜻(본의)이 여기에 있지만 말을 저것에 기탁하는 방식이고, 중언은 옛 사람의 말을 빌려서 자신의 말을 소중하게 하는 어법이다.38)

또 왕목야(王穆夜)의 풀이에 의하면 치언은 가득차면 기울고 비면 오뚝 서는 치기의 속성처럼, 사물을 따라 바꿔서 하나만 잡고서 옛것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사람을 따라 변화를 주며 늘 같이 주장하지 않는 방식이다.39) 『장자』의 글은 주로 이 세 가지 방식이 결합되어 써졌다.

 

우언은 『장자』에서 181개로 가장 많이 쓰이는 방식40)으로 다른 사물 이야기에 비유하여 본의를 전달하는 글쓰기 방식이다. 따라서 본의는 글 뒤에 숨어 보이지 않고 에피소드만 겉으로 드러난다. 장자가 이 방식을 많이 쓴 이유는 형체가 없는 도를 말로 다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논리적인 말로 도를 규정하면 결국 일부분만 말하거나 오해를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에 에피소드 뒤에 숨겨놓고 독자가 스스로 찾도록 열어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독자들이 『장자』를 읽을 때에는 숨겨진 장자의 본의가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우화에 등장하는 것들은 모두 비유와 상징이기 때문에 그것은 보조관념일 뿐이고 원관념은 따로 있다. 종종 보조관념을 사실로 여기고 해석하는 오류를 범한다.

예컨대 포정 우화에서 포정과 소 그리고 칼은 각각 다른 원관념을 가지고 있다.41)

그런데 이 우화를 사실로 보고 ‘누구나 한 가지 기술에 최고의 수준에 도달하면 도에 통할 수 있다.’ 는 식으로 해석하면 장자의 사상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관념은 그 우화 전체 줄거리와도 부합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장자의 전체 사상과 부합하여야 한다. 본 논문의 소재인 호접지몽도 하나의 우화이기 때문에 그 원관념을 정확히 찾는 것은 바른 해석의 관건이 된다.

 

37) 「우언」, 寓言十九, 重言十七, 巵言日出, 和以天倪.
38) 왕카이, 『소요유, 장자의 미학』, 신정근 책임 옮김, 성균관대학교출판부, 322~323 참조.
39) 왕카이, 『소요유, 장자의 미학』, 328. 참조.
40) 천푸칭(陳蒲淸)이 지은 『중국고대우언사』의 통계에 의거하였다. 왕카이, 『소요유, 장자의 미학』, 324.

41) 일반적으로 포정해우에서 포정, 칼, 소의 원관념은 각각 주체, 생명(몸), 物(세계)이라고 할 수 있다.

 

 

중언은 많이 알려진 인물이나 덕망 있는 인물을 내세워 말하는 방식이다. 공자, 노자, 혜자 등의 인물이나 소 잡는 포정, 수레바퀴 깎는 윤편, 혁대 만드는 대장장이 노인, 매미 잡는 꼽추 노인 등의 뛰어난 인물을 등장시
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게 하는 방식이다.

중언을 “장로처럼 고을에서 존경받는 노인의 말”, “옛 사람의 이름을 빌려서 자신의 무게를 더하는 말” 로 풀이한 것42)은 이를 말한다. 그러나 공자나 노자의 입을 통해 말했다고 해서 반드시 그들의 격을 높이는 것만 있지 않다. 때로는 자신의 대리인으로, 때로는 비판의 대상으로 등장시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인물에 기탁하여 그 에피소드의 주제를 중후하게 하는 효과는 같기 때문에 중언이다. 호접지몽은 장주 자신이 직접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중언이라고 할 수 없어 보인다. 그러나 옛날의 자기를 등장시키는 것은 자신을 타자화 하여 그에 의탁하여 하는 말로 볼 수 있는 것이다.

 

42) 이는 각각 성현영과 임희일의 풀이로서 왕카이 저서(왕카이, 『소요유, 장자의 미학』, 326)에서 재인용 함.

 

치언은 글의 내용이나 뜻이 치우치지 않도록 하는 글쓰기 방식이다. 치언은 주로 글의 중간에 산발적으로 불쑥 끼어든 말로, “문장 속의 맥락과 기본적인 단서를 전체 문장에 관통하여 각 부분의 내용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도록 하는 말이다.”43)

예컨대 「양생주」 시작부터 먼저 “중을 따르며 그것을 법칙으로 삼는다.”는 주제를 제시하고 이어 포정 우화에서 “자연의 결을 따른다.”, 못 가의 꿩 우화에서 “열 걸음을 걷고서 모이를 한 번 쪼아 먹고 … 새장 쏙에서 자라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등의 격언과 같은 주제문을 제시하여 미궁으로 빠지지 않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독자들이 진리와 거리가 멀게 무심코 지나치는 것을 막기 위해, 혹은 독자 스스로 그 속에서 의미를 생성하도록 하기 위한 장치로 볼 수도 있다. 특정한 하나의 개념에 고정되지 않으므로 시비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44) 호접지몽 우화의 마지막 부분도 이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제물론」 전체에서 만물
제동을 꾸준히 말했지만 핵심은 그 만물에 의해 참된 자아가 변화되어서는 안 된다며 중심을 잡아준다. 요컨대 호접지몽 이야기 속에는 우화적 요소, 중언의 요소, 치언의 요소가 공존하고 있다. 이런 장자의 글쓰기 방식은 본 논문의 논지를 전개하는 또 다른 전제가 된다.

 

43) 왕카이, 『소요유, 장자의 미학』, 329.

44) 백승도, 「『장자』에서 ‘도’는 어떻게 말해지고 있는가?」, 217~218.

 

 

III. 「제물론」 호접지몽 우화의 재해석

 

본 장에서는 본격적으로 「제물론」에서 호접지몽 우화를 재해석하고자 한다. 논의를 위해 계속해서 이 우화를 ⓐ 장주가 꿈에 나비 꿈을 꾸고, 또 깨어나 누가 누구의 꿈을 꾸는지 모름[호접몽], ⓑ 장주와 나비는 분명한
구별이 있음[有分], ⓒ 이것을 물의 변화라 함[物化]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 분석하고자 한다.

분석은 각각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검토하고 문제점을 제시하여 새로운 해석 방향을 제시하고 최후에 종합하는 방식을 취한다.

 

1. ‘ⓐ 호접몽’에 대한 해석

 

호접몽은 스토리의 그림이 분명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문자적으로는 같은 해석을 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스토리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 가서는 차이가 드러난다.

 

곽상: 세상에 선잠을 자면서 꿈에 백년을 지낸 자가 있다면 지금의 백년도 선잠의 꿈이 아님을 밝힐 수가 없다.45)

 

유신옹: 꿈과 깸이 사람과 사물을 가지런히 하고 작은 것과 큰 것을 가지런히 하고 옳음과 그름을 가지런히 하고 죽음과 삶을 가지런히 하니, 가지런함이 극진하다.46)

 

박세당: 죽음과 삶을 말하면 꿈과 깸이 각각 하나의 흡족함이고, 저것과 이것을 말하면 장주와 나비가 같은 하나의 몸이다.47)

 

안동림: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피상적인 분별․ 차이는 있어도 절대적인 변화는 없다. 장주가 나비이고, 나비가 장주인 경지가 강조되는 세계이다.48)

 

왕보: 사람과 나비가 서로 바뀌는 꿈을 빌려 도의 원초적인 경계를 비유하고, 하늘하늘 나부끼는 나비를 통해 어슴푸레하고 흐릿한 기를 상징하며, ‘도와 통하여 하나가 되는[道通爲一]’ 물화사상을 설명했다.49)

 

오강남: 지금 그 꿈에서 깨어난 상태를 다시 꿈꾸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은 이른바 그 깸에서 다시 한 번 더 깨어났다는 뜻이다. 이렇게 깸에서 깨어나는 것이 큰 깨어남, 대각(大覺)이라는 것이다.50)

 

 

곽상은 이 우화에서 지금 우리가 사는 삶이 꿈일 수 있음을 읽었다. 하지만 그의 해석은 마치 “인생은 한바탕 꿈이다.”라는 허무주의적 뉘앙스를 품고 있다. 장자는 인생을 한바탕 꿈처럼 헛된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삶과
죽음을 같은 급으로 보고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지만 ‘삶을 온전히 살아내는 것’[全生]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유신옹은 꿈과 깸, 사람과 사물, 죽음과 삶의 동일함, 즉 만물제동을 읽어냈다. 박세당도 이런 만물제동의 사고에 기반하여 장주와 나비가 같은 몸이라고 말하고 있다. 안동림도 이런 류의 해석이다.

이런 해석은 대체로 꿈을 죽음에 깸을 삶에 비유하여 죽음과 삶이 같은 것으로 해석하거나 곧바로 꿈꾸는 장주와 꿈속의 나비가 존재론적으로 같은 것으로 해석한다. 모두 제물론의 일차적 의미에 맞추어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이 우화의 뒷부분과 잘 조화되지 않고, 원관념[삶, 죽음]과 보조관념[깸, 꿈]의 짝이 적절하지 못한 점이 있다. 그렇게 해석하면 장자가 꿈을 꾸어 나비가 된 것은 장자가 죽어 나비로 환생한 것으로, 꿈에서 깨어나 누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는 전생과 현생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으로 읽혀, 윤회와 환생을 전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왕보는 예술 철학자답게 이 장면을 주체가 도와 통하여 하나가 된 정신 경계로 설명하고 있다. 많은 예술철학자들이 이 해석을 선호하여 많은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기도 한다. ‘도통위일’이라는 제물론 개념과도 부합
하는 매우 감수성 높은 해석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술적 상상력과 감수성의 영역이라 거부할 수는 없지만, 장자의 본의라기보다는 예술적 직감을 가진 철학자의 직관적 해석으로 보인다.

 

오강남은 깨어남을 깨달음으로 해석하였다. 장자를 한 번 깨어나서 뭐가 뭔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한 번 더 깨어난, 크게 깨달은 자로 보고 있다. 필자는 그의 여기까지 해석에는 동의한다.

깨어남을 깨달음으로 해석하는 데까지 말이다. 그 이유는 이 우화가 같은 「제물론」에 언급된 다른 우화나 사유와 서로 연관성이 있고, 그렇게 해석하면 이 우화의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해석 가능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뒤에 나오는 ⓑ 유분, ⓒ 물화 내용과도 조화되기 때문이다.

 

45) 곽상, 「장자주」, 世有假寐而夢經百年者, 則無以明今之百年非假寐之夢者也. 최진석/정진욱 옮김, 비발간본 번역, 82.
46) 夢覺, 齊人物, 齊小大, 齊是非, 齊死生, 齊, 盡矣. 박세당, 『남화경주해산보』, 전현미 옮김, 182, 재인용.
47) 言死生, 則夢覺各一適也, 言彼是, 則周蝶同一身也. 박세당, 『남화경주해산보』,전현미 옮김, 183.
48) 안동림, 『안동림 역주 장자』, 87.
49) 왕카이, 『소요유, 장자의 미학』, 325.
50) 오강남, 『장자』, 135.

 

 

우선 깸의 원관념이 깨달음이라는 점은 같은 편에 나오는 다른 ‘꿈 관련 우화’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꿈속에서 술을 마시며 즐거워했던 사람이 아침이 되면 슬피 울고, 반대로 꿈속에서 슬피 운 사람이 아침이 되면 신나게 사냥하러 나간다.

막 꿈을 꿀 때는 그것이 꿈임을 알지 못해서 꿈속에서 꿈속의 꿈을 점치다가 꿈에서 깨어난 뒤에 그것이 꿈이었음을 알게 된다.

또한 ‘큰 깨어남’ 있어야 그런 뒤에 이것이 큰 꿈이라는 사실을 알 터인데,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스스로 깨어 있다고 생각해서 똑똑한 체하면서 51)"

51) 「제물론」,

夢飮酒者, 旦而哭泣., 夢哭泣者, 旦而田獵.

方其夢也, 不知其夢也. 夢之中又占其夢焉, 覺而後知其夢也.

且有大覺而後知此其大夢也. 而愚者自以爲覺, 竊竊然知之.

 

이 꿈 우화에서 화자는 밑줄 친 부분에서 ‘큰 깨어남’과 ‘어리석은 사람’ 이라는 표현을 통해 크게 깨어나지 않은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

즉 깨어남은 어리석음을 면할 수 있는 깨달음을 대신하여 사용한 말이다. 깨어남의 원관념이 ‘깨달음’이라면,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그것이 꿈이었음을 알지 못함은 ‘어리석음’에 해당한다.

큰 깨어남을 나타내는 말 ‘大覺’은 큰 깨달음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또 이 말은 「제물론」 2장 “대지(大知)는 한가하고 너그럽지만 소지(小知)는 부산하고 좀스럽고”52)에서 ‘대지’와 상통한다.

큰 깨달음 이후에 갖게 되는 큰 지혜야말로 장자가 제물론에서 요구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호접몽의 보조관념 꿈과 깸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호접몽에서 나비 꿈을 꾼다는 것은 자기를 잃어버리고 타자의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장주가 꿈에서 깨어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는 아직 큰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그렇게 되면 장주가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데 그 럴 수가 있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52) 「제물론」, 大知閑閑, 小知閒閒., 大言炎炎, 小言詹詹.

 

그것은 이렇게 답할 수 있다.

첫째, 호접몽 우화는 장주의 옛날[昔者] 시점의 이야기다. 크게 깨달아 대지에 도달한 장자는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시점의 화자이다. 따라서 이야기 속 시점까지의 장자는 어리석은 사람일 수 있다.

둘째, 『장자』에는 이 외에도 장주의 이름으로 나오는 우화가 세 편더 나온다.53) 후학들의 작품인 외편과 잡편에서 장주가 거론됨에도 불구하고 부정적 이미지로 나오는 경우가 있다.54)

장자는 공자나 노자 등을 등장시켜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이렇게 자기를 등장시켜 반면교사로 만들기도 한다. 이것은 앞에서 논한 일종의 중언(衆言)이라는 글쓰기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 이 우화의 끝 두 부분과 부합하면 된다.

 

53) 그것은 「산목」, 莊周遊於雕陵之樊, 覩一異鵲自南方來者, 翼廣七尺, 目大運寸,感周之顙而集於栗林. [중략]; 「외물」: 莊周家貧, 故往貸粟於監河侯. [중략]; 「천하」, 莊周聞其風而悅之. 등이다.
54) 예컨대, 산목에서 장자는 조롱이라는 밤나무 밭에서 몇 가지 일을 겪고 석 달 동안 불쾌한 모양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나온다.

 

 

2. ‘ⓑ 有分’, ‘ⓒ 物化’에 대한 해석

 

호접지몽 우화의 마지막 두 부분은 대체로 “장주와 나비는 반드시 구별이 있을 것이니, 이것을 물의 변화라 한다.”로 푼다. 이 풀이만으로는 앞의 호접몽에 대한 기존 풀이와 호응이 잘 되지 않아 많은 학자들이 이에 대해
설명을 보태어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그 해석들을 조목조목 비판하며 기존의 해석이 틀렸음을 보여준 연구55)를 앞서 소개한 바가 있다.

본 논문에서 기존 해석에 대한 비판은 그의 연구를 요약함으로써 대신하고자 한다. 비판의 근거가 타당하고 논리적으로 정합적이기 때문이다. 그 후에 그가 새롭게 제시한 해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호접지몽 우화를 다른 각도에서 해석해 보도록 하겠다. 그가 제기한 기존 해석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 有分’을 “장주와 나비는 반드시 구별이 있을 것이니”로 해석하면 우선 장자의 만물제동의 논리와 맞지 않다. 「제물론」 전체가 인식론적 구분으로서의 ‘분’(分)을 지양하는 ‘齊物’을 주장하는데 반해 기존 연구는
구별을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호접몽 해석과도 맞지 않다. 기존의 호접몽 해석에서는 장주와 나비, 꿈과 깸의 일치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 有分’을 원래대로 두고 ‘ⓒ 物化’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호응이 되질 않는다. ‘반드시 구별이 있을 것이니’를 그대로 두려면 ‘물의 변화’ 는 부정적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호응이 되지 않는 것을 해석하려 하니 원
문에 없던 말을 첨가해야 하는 어색함이 생겨난다. 그 예로 적총충(赤塚忠)은 ‘ⓑ 有分’와 ‘ⓒ 物化’ 사이에 “그렇지만 어떻게 하여 그것을 구별할 것인가? 이와 같이 존재하는 것 같으면서도 정함이 없는 것”56)이라는 장황한 말을 첨가하고야 겨우 호응되게 해석한다.

 

셋째, 이미 많은 학자들이 이 부분에 대해 논리적으로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해 왔다. 예컨대, 로버트 앨린슨이 “현재 『장자』가 편집되어 있는 형식대로라면 나비 꿈 이야기 전체가 지극히 불분명하다고 [중략] 그 이야기는 현재의 순서대로라면 논리적으로 비정합적이다.”라고 말한 것을 들 수 있다.57)

 

55) 앞에서 서론에서 소개한 이택용의 논문(이택용, 「『장자』 「제물론」 胡蝶之夢 우화의 ‘물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56) 적총충, 『장자 상․하』, 131~132.

57) 로버트 앨린슨, 『장자, 영혼의 변화를 위한 철학』, 김경희 옮김, 165~166.

 

 

이런 이유를 들어 그는 ‘物化’를 ‘사물의 변화’로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의문을 가지고 다음과 같은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1 옛날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데, 자유롭게 나는 나비였다. 스스로 기분 좋게 뜻대로 날고 있었고, [자신이] 周임을 알지 못했다. 잠시 후 깨어나자, 황황히 周가 되었다. [그렇지만] 周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에 周가 된 것인가를 알 수가 없다.

ⓑ1 장주와 나비 사이에 혹 분명한 구분이 있다면, ⓒ1 이를 ‘物에 따라 변화함’[物化]이라 한다.58)"

 

ⓑ1과 ⓒ1에는 기존의 해석과는 큰 차이가 있다.

ⓑ1은 조건절로 바꾸면서 부정적 의미로 바꾸고 ⓒ1을 물의 변화라는 긍정적 의미에서 ‘물에 따라 변화함’이라는 부정적 의미로 바꾸면서 전체적으로 해석이 자연스러워 졌고 『장자』와 「제물론」의 종지에도 부합된다. ⓑ1을 조건절로 바꾼 근거로 “周與胡蝶則必有分矣”에서 ‘則’을 ‘或’으로 해석한 「소요유」에 나온 용례59)를 제시했다.

그리고 ⓒ1을 부정적 의미로 바꾼 근거로 「산목」과 「지북유」에서 ‘物’과 ‘化’를 모두 긍정과 부정으로 해석할 수 있는 내용을 제시했다. 예컨대, “물을 낳는 근원에서 노닐면서 물을 ‘그 물로 대하되’ 그 물에 의해서 ‘물화되지 않으니’, 어지 화를 입을 수 있겠는가?”60)에서 ‘그 물로 대하되’는 긍정의 의미로, ‘물화되지 않으니’는 부정의 의미로 해석된다.

 

이택용의 이러한 해석에는 본인이 지적했듯이 다음과 같은 장점이 있다.

 

첫째, 제물적 사고를 주장하는 ‘ⓐ 호접몽’ 내용과 분별적 사고를 부정하는 ‘ⓑ 유분’ 및 ‘ⓒ 물화’ 부분을 원문의 내용을 무리하게 보완하지 않으면서도 맥락의 논리적 단절이 없다.

둘째, 「제물론」의 주지에도 어긋나지 않고 ‘제물을 통하여 현해․소요의 경지에 이른다는 장자철학의 종지와도 어긋나지 않는다.61)

 

58) 이택용, 「『장자』 「제물론」 胡蝶之夢 우화의 ‘물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 143.
59) 그는 “時則不至而控於地而已矣”의 則이 “때로 혹 거기에 못 미쳐서 땅바닥에 떨어져 부딪히기도 한다.”로 해석한 용례를 제시하였다.
60) 「산목」, 浮遊乎萬物之祖., 物物而不物於物, 則胡可得而累邪.

61) 이택용, 「『장자』 「제물론」 胡蝶之夢 우화의 ‘물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143~144.

 

그러나 필자는 여기서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

한가지는 ‘ⓑ 유분’에서 ‘則’에 대한 해석 문제이고, 다른 한 가지는 앞 절에서 제기한 ‘ⓐ 호접몽’ 내용의 문제이다.

 

먼저, “周與胡蝶則必有分矣”에서 ‘則’을 ‘或’으로 바꾸어 ‘장주와 나비 사이에 혹 분명한 구분이 있다면’으로 바꾼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그 근거가 「소요유」에서 ‘則’을 ‘或’으로 단 한 번 사용된 것인데, 그 용례도 보편적인 해석이 아니라 王念孫이 한 번 사용한 것이다.62)

또 이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소요유」에서 ‘則’ 또는 ‘或’은 ‘만일 ~이라면’의 의미가 아니라 ‘간혹, 어떤 경우(境遇)에는’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무엇보다도 원문은 ‘矣’라는 종결형 어조사로 끝나고 있어 조건절로 연결시키는 것에 문법적 어색함이 있다. 논자가 원하는 해석이 되려면 ‘則’이 있어야 할 위치는 ‘矣’ 뒤에 위치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부분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다음, 앞의 해석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여전히 필자가 앞 절에서 제기한 기존의 ‘ⓐ 호접몽’ 해석과 부딪히는 면이 있다. 필자는 ‘ⓐ 호접몽’의 문자적 해석에는 변함이 없으나 내포하는 함의를 바꾸어 해석하였다.

그 해석은 우화의 원관념을 바로 찾는 방법을 택했다. 호접몽 이야기는 우화이다. 우화는 보조관념과 원관념으로 이루어져 있다. 꿈, 깸, 장자, 나비 등은 모두 보조관념이다. 옛날 자신의 체험을 사실적으로 말했을지라도 여기서 장자가 전달하고 하는 원래 의미는 따로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해석과 새 해석 모두 원관념을 찾지 못하고 단순히 꿈과 깸, 장자와 나비의 제물적 동일성만 주장한다. 제 2장에서 필자가 논증했듯이 제물은 모든 상대적인 가치 차별을 무화시키는 것으로 물의 범주 내에서만 적용되는 것인데도 말이다.

장자가 추구하는 최고의 정신적 경계는 물의 범주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제물의 대상이 아니다. 꿈은 가상[夢, 假, 成心]이라는 물에 의해 변화됨, 곧 ‘물화’를 비유하고, 깸은 진실[覺, 眞, 以明]이라는 큰 지혜에 도달함, 곧 ‘대지’의 상태를 비유하는 보조관념이다. 여기에 제물의 논리를 적용하면 두 원관념 ‘假’와 ‘眞’, ‘成心’과 ‘以明’을 동등하게 보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62) 안병주/전호근 공역, 『역주 장자 1』, 33. 재인용.

 

 

3. 호접지몽 우화에 대한 ‘또 다른’ 해석

 

앞 두 절에서 논의할 결과를 종합하면 필자가 제시하는 ‘또 다른’ 해석은 다음과 같다.

 

ⓐ2 옛날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데, 자유롭게 나는 나비였다.

스스로 기분 좋게 뜻대로 날고 있었고, [자신이] 周임을 알지 못했다. 잠시 후 깨어나자, 황황히 周가 되었다. [그렇지만] 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에 周가 된 것인가를 알 수가 없다.

ⓑ2 周와 나비 사이에는 반드시 구분이 있다.

ⓒ2 이를 ‘물에 따라 변화함’[物化]이라 한다.

 

기존 해석[ⓐ, ⓑ, ⓒ]이나 새로운 해석[ⓐ1, ⓑ1, ⓒ1]과 비교하여, 필자가 제시한 또 다른 해석[ⓐ2, ⓑ2, ⓒ2]에서 달라진 점을 보자.

 

먼저, ‘호접몽’에 대한 해석을 보자. 필자의 해석 ⓐ2는 기존의 해석 ⓐ,ⓐ1과 문자적 해석은 똑 같지만 그 함의가 완전히 다르다. ⓐ, ⓐ1은 장주와 나비, 깸과 꿈, 나와 물의 齊同을 강조하며 긍정적 상황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2는 ‘깸’과 ‘꿈’을 보조관념으로 ‘깨달음’과 ‘어리석음’을 본 관념으로 해석하면서 부정적인 상황으로 풀이하였다. 언뜻 「제물론」 편명의 중심 주제와 어긋나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필자가 찾은 「제물론」의
종지63)와는 어긋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렇게 해석했을 때 오히려 더 어울린다.

왜냐하면 같은 편에서 소개된 또 다른 꿈 우화에서 꿈에서 깨어남의 원관념이 깨달음, 즉 어리석음에서 벗어남으로 사용된 예64)와 깨달은 큰 지혜를 뜻하는 대지(大知)를 강조한 예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만물 제동’은 ‘도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아 만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에 핵심이 있다. 억지로 같은 것이라고 사고를 개조시키는 것이 아니라, 도의 관점을 얻으면 같게 보이게 되는 것이다. 도의 관점을 얻는 것을 장자는 호접지몽에서 꿈에서 깨어나는 것에 비유하여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63) 제II장 2절 끝자락에 제시되어 있다.

64) 「제물론」, 且有大覺而後知此其大夢也. 而愚者自以爲覺, 竊竊然知之.

 

 

다음으로, ‘ 有分’에 대한 해석을 보자.

필자의 해석 ⓑ2도 문자적으로는 기존의 해석 ⓑ와 같지만 그 함의가 달라졌다. 기존의 해석에서는 ‘구분이
있음’을 ‘자연이 마련한 분수 안에 있음’65)이나, ‘개념의 구별은 남아 있음’66), ‘세속적인 차원에서 말하는 구분’67) 등으로 ‘구분’을 긍정하면서도 단서를 달아 이 구절의 함의를 절하하려는, 만물제동의 의미와는 거리를 두려는 의도가 보였다. 그러나 필자의 ⓑ2는 구분을 긍정하면서도 만물제동과 어긋나지 않게 해석하였다.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핵심 근거가 구분의 대상인 ‘꿈’과 ‘깸’의 원관념이 ‘어리석음[소지]’과 ‘깨달음[대지]’이라는 점이다. 장자의 제물론은 상대적인 물의 경계에 있는 것끼리의 같음을 말한 것이지 결코 소지와 대지 같은 물의 경지와 도의 경지가 같음을 말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장자와 나비도 그 원관념이 참된 자기[眞我]와 거짓 자기[假我]라 본다면 이 둘에는 반드시 구분이 있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2 함의와도 전혀 어긋나지 않고, 다른 해설을 첨가하거나 원문 한자의 위치나 뜻을 바꾸지 않아도 된다. 이어 나오는 ‘물화’의 새로운 해석과도 어울린다.

 

65) 한형조, 『왜 동양철학인가』, 135.
66) 나카지마 다카히로, 조영렬 옮김, 『닭이 되어 때를 알려라』, 210.

 

 

마지막으로, ‘物化’에 대한 해석을 보자.

필자의 해석 ⓒ2는 기존의 해석 ⓒ와는 완전히 다르지만 ⓒ1과는 거의 일치한다. 약간의 차이는 이 문장의
첫 글자 ‘此’가 무엇을 가리키는가에서 발생한다. 필자는 이것[此]을 앞의 ⓐ2에서 ‘장주가 나비 꿈을 꾸는지 나비가 장주의 꿈을 구는지 모르는 상태’, 즉 ‘우매함에서 깨어나지 못한 상태’을 받는 대명사라고 보았다. 나비와 구분되는 참된 자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어리석은 상태를 물화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의 육체는 비록 물이지만 전체적(holistic)으로서의 인간은 결코 물로 되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가 있는 것이다.

 

67) 안병주/전호근 공역, 『역주 장자 1』, 127.

 

 

IV. 결론

 

본 연구에서는 『장자』 「제물론」에 나오는 호접지몽 우화에 대하여 새롭게 해석하였다. 이 우화는 세 부분, 즉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 이야기[胡蝶夢], ‘장주와 나비 사이에 반드시 구분이 있다.’는 구절[有分], ‘이것을 물화라고 한다.’는 구절[物化] 등으로 되어 있다.

기존의 해석들이 이 세 부분을 정합적으로 설득력 있게 해석해 내지 못하고 있어 필자는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였다.

 

우선, 본고에서 우화를 해석할 때 필자는 보조관념과 원관념을 분명히 함으로써 원관념을 중심으로 의미를 구성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우화는 그 자체가 사실이 아니라 그것이 비유하는 원관념이 있는데 이것을 사용하
여 우화의 의미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주로 호접몽 이야기의 진실을 찾는 데 사용되었다. 그 결과 이 이야기는 꿈과 깸, 장주와 나비의 이중구조의 보조관념으로 구성됨을 알았고, 그 원관념이 ‘어리석음’과 ‘깨달음’, ‘참된 나’와 ‘거짓 나’였다.

 

또 본고에는 개념의 범주를 분명히 하는 방법도 사용되었다. 장자가 사용하는 개념인 ‘물’의 범주와 ‘제물’의 범주를 분명히 하는 것은 ‘만물제동’ 원리의 예외를 확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방법으로 ‘꿈’과 ‘깸’ 사이,‘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만물제동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제물은 물들 사이를 동등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를 근거로 호접지몽 우화는 다음과 같은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첫째, 앞의 ‘호접몽’ 이야기는 어리석은 중인들이 꿈을 꾸는 듯이 가짜의 삶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장면이다. 꿈속에서 자기를 나비로 착각한 것이나 꿈을 깨고서도 자기가 나비인지 나비가 자기인지를 구분 못하는 것은 아직 각성이 덜된 상태, 즉 물의 세계에 참된 자기를 뺏긴 상태이다.

 

둘째, 가운데 부분 ‘유분’은 꿈과 깸의 원관념인 ‘헛것[夢]’과 ‘참[覺]’ 사이에는 반드시 구분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제물론」이 만물을 동등하게 보도록 하기 위한 편이지만 그 예외가 있음을 알리는 장치라고 본다. 장자가 구사하는 치언(巵言), 뜻이 치우치지 않도록 중간에 끼어든 말이 여기서 작동한 것으로 본다.

 

셋째, 마지막 부분 ‘물화’는 어리석은 중인이 꿈인지 생신지 모르는 상태는 ‘물에 의해 [참 자아가]변화된 상태’를 말하고 있다. 첫 번째 부분을 받아 개념화한 것이다. 현대의 ‘소외’나 ‘정체성 상실’ 등과 통하는 면이 있다.

 

결국 호접지몽 우화의 참 의미는 「제물론」의 핵심 주제인 ‘만물제동’의 참 의미, “선입견과 편견에 사로잡힌 마음[夢=成心]에서 크게 깨어나 도의 관점에서 있는 그대로 보아야지[覺=以明], 그렇지 않으면 헛것에 의해 사로 잡힌 것이다.[物化]”를 말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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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tson, B., Chung Tzu: Basic Writing, New York, 1996.

 

 

<Abstract>

 

The Study on the Interpretation of ‘The Butterfly Dream Fable’ in Chuang-Tzu

 

Kim Kweon-Hwan(Kyungdong HS)
Shin Jeong-Geun(Sungkyunkwan Univ.)

 

This study is focus on the new interpretation of ‘The Butterfly Dream [胡蝶之夢] fable’ at ‘Chap. Two: Discussion on Making all things Equal’ in the Chuang-tzu. Up to now scholar can not make agreement in the interpretation on this fable. Even though they generally agree on the first part of this fable, they have very different opinion in the middle and latter part. Having question about the existing interpretation, I attempted to try new interpretation.

 

Discussing the first part of this fable, I followed the existing interpretation literally, but I interpreted it differently in meaning they have. At the existing interpretation, they know that this fable have positive meaning of being one body between Chuang-tzu and Butterfly in dream. But in this paper, I read it negatively as not waking out of a dream. In other words, I interpreted ‘the awakening’ as ‘finding enlightenment’.

 

Discussing the middle part of this fable, I also followed the existing interpretation literally, and read it differently in meaning they have. At the existing interpretation, they did unnatural expatiation in this part, doubting the difference with the context of the whole text. But in this paper, I explained it exactly as there are exact division[分] between an illusion[夢] and truth[覺].

 

Discussing the latter part, I interpreted it very differently with the existing’s. They interpreted it as ‘change of things’ positively. But I interpreted it as ‘being changed by the things’ negatively, as is the recent study by a scholar.

 

 

Key words: Chuang-tzu, ‘Discussion on Making all Things Equal’[「齊物論」], The Butterfly Dream[胡蝶之夢], Wuhua[物化]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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