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莊子 >
1. 사상가 장자(莊子)
장자의 생애에 대한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2세기 전한(前漢) 시대의 유명한 역사가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275자로 기록한 간략한 이름이다. 그 기록을 보면 장자는 몽(蒙)이라는 곳의 사람으로, 이름이 장주(莊周)이다. 몽은 현재 하남성(河南省) 상구현(商丘縣)동북 어디쯤일 것이라 하는데, 장자가 살던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송(宋)이라는 조그만한 나라에 속하였다. 젊어서 칠원(漆園)이라는 옻나무 밭에서 일했다는데, 그 일이 무엇인지는 확실치 않다.
장자는 양(梁)의 혜왕(惠王)이나 제(齊)의 선왕(宣王)가 같은 때의 사람이라고 하므로, 서력 기원전 390년에서 359년 사이에 나서 300년에서 270년 사이에 죽었을 것이라 추측하는데 학자들은 보통 그 생존 연대를 대략 기원전 369`286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맹자(孟子,371~289)와 거의 같은 때 사람인 셈이다. 그러나 맹자의 책에 장자에 대한 언급이 없고, 장자의 책에도 맹자에 대해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그 당시에 둘은 서로 알지 못한 것 같다.
아무튼 그 때는 전국시대로 정치적이나 사회적으로 극히 어지러워서 불안정한 시기였다. 이런 환경에서 많은 사상가가 나의 자기들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장자도 이런 시대적 환경에서 태어나 자신의 사상을 피력한 사상가 중의 하나이다.
장자의 도가 사상이 중국 철학사에서 문학, 예술 등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특히 당대(唐代)에 와서 그것은 선(禪)불교를 꽃피우는 직접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선승(禪僧)들, 특히 9세기 임제(臨濟)야말로 장자의 진정한 계승자라 여겨질 정도이다.
2. 장자(莊子)의 사상
장자는 기원전 370년에서 280년 무렵 중국 宋나라에 살았던 인물이다. 전국 시대라는 말이 가리키듯 전쟁과 살육, 권모와 지략으로 뒤범벅되었던 혼란기였다. 또한 宋나라는 약소국인 탓으로 주변 강대국에게 쉴새 없이 유린당했으므로 장자에게 조국의 역사적 현실은 매우 가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부자유하고 뒤죽박죽이었던 현실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하면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하고 고민했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는 장자의 근본 주제였다. 단순히 현실을 부정하거나 피안으로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현실의 구속과 속박에 직면해 지금 여기에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점이 더욱 절박한 과제였던 것이다. 따라서 철저한 현세주의자인 장자의 사상에는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관한 통찰과 직관적 예지가 종횡무진한 비유와 우화, 날카로운 풍자와 역설, 극적인 구성과 예술적 리듬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1)․만물을 끊임없이 유동변화하는 것으로 보고, 그 유동변화를 도(道)라고 하는 만물일원론(萬物一元論)을 주장
․인생관을 사생(死生)을 초월하여 절대무한의 경지에 소요(逍遙)함을 목적으로 하였고, 또한 인생은 모두 천명(天命)이라는 숙명설(宿命說)을 취함
(2) 도(道) 사상
․“이것과 저것의 대립이 사라져 버린 것."
․천지 생성의 원인이며 이끌어 가는 원리
․현상 세계의 유한성과 모순 대립을 초월한 절대적 진리
(3) 「제물론」의 만물제동(萬物齊同) 사상 (《장자(莊子)》의 내편(內篇) 7편)
․‘만물을 제일(齊一, 하나 같이)'하게 보는 이론
․모든 만물은 하나이다(萬物齊同) : 제물(齊物)
․道의 관점에서는 선과 악, 미와 추, 나와 너 등의 차별은 무의미.
․모든 사물을 차별하지 않는 정신적 절대 자유의 경지
(4) 좌망(坐忘)과 심재(心齋)
․정신적 자유를 추구하는 방법
․좌망(坐忘) - 조용히 앉아 우리를 구속하는 일체를 잊어버리는 것. (《장자》의 대종사편(大宗師篇)) → 좌선
․심재(心齋) - 마음을 비워서 깨끗이 하는 것.(《장자(莊子)》의 인간세편(人間世篇))
(5)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
․일체를 잊고 마음을 비울 때 절대 평등의 경지에 있는 도(道)가 마음에 모이게 됨.
․물아일체 : 자연과 내가 하나되는 절대 자유의 경지
․지인(至人), 진인(眞人) - 도를 지녀 물아일체적 경지에 이른 인간
장자는 노자(老子)와 마찬가지로 도(道)를 천지만물의 근본원리라고 본다. 도는 일(一)이며 대전(大全)이므로 그의 대상이 없다. 도는 어떤 대상을 욕구하거나 사유하지 않으므로 무위(無爲)하다. 도는 스스로 자기존재를 성립시키며 절로 움직인다. 그러므로 자연(自然)하다. 도는 있지 않은 곳이 없다. 거미, 기왓장, 똥, 오줌 속에도 있다. 이는 일종의 범신론(汎神論) 1] 이다. 도가 개별적 사물들에 전개된 것을 덕(德)이라고 한다. 도가 천지만물의 공통된 본성이라면 덕은 개별적인 사물들의 본성이다. 인간의 본성도 덕이다. 이러한 덕을 회복하려면 습성에 의하여 물들은 심성(心性)을 닦아야 한다. 이를 성수반덕(性脩反德)이라고 한다. 장자는 그 방법으로 심재(心齋)와 좌망(坐忘)을 들었다. 덕을 회복하게 되면 도와 간격 없이 만날 수 있다. 도와 일체가 되면 도의 관점에서 사물들을 볼 수 있다. 이를 이도관지(以道觀之)라고 한다. 물(物)의 관점에서 사물들을 보면 자기는 귀하고 상대방은 천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도의 관점에서 사물들을 보면 만물을 평등하게 볼 수 있다. 인간은 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자연에 따라 살아갈 수 있으며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러한 자유는 천지만물과 자아사이의 구별이 사라진 지인(至人)이라야 누릴 수 있다. 이 지인은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고 천지만물들과도 사이좋게 살아갈 수 있다. 장자의 사상은 대부분 우언(寓言)으로 풀이되었으며, 그 근본은 노자(老子)의 무위사상(無爲思想)을 계승하는 것이지만, 노자에 비해 탈속한 정신적 절대 자유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고, 현세와의 타협을 배제하는 점에서는 더욱 철저하여, 바로 그와 같은 면에서 장자의 분방한 세계가 펼쳐진다.
(6)문제점
․일체의 사회 규범, 제도를 거부하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적 요소를 지님.
(7) 영향 : 이러한 장자사상은 위진현학(魏晉玄學)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며 남북조 시대에 성행한 반야학(般若學)과 당나라 때 융성한 선종(禪宗)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현종(玄宗)은 그에게 남화진인(南華眞人)이라는 호를 추증하였으므로, 《장자》는 《남화진경(南華眞經)》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읽혔다. 송(宋) ․명(明) 이학(理學)은 유학을 위주로 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장자철학을 수용하였다. 장자의 이러한 초탈사상은 자연주의 경향이 있는 문학 예술에도 영향을 주었다. 한국에서는 조선 전기에 이단(異端)으로 배척받기도 하였으나 산림(山林)의 선비들과 문인들이 그 문장을 애독하였다.
1]신(神)과 전우주(全宇宙)를 동일시하는 종교적․철학적 혹은 예술적인 사상체계.
3. 고전 『장자』
『장자』는 장자라는 사상가의 이름에서 유래한 책을 의미하기도 한다. 장자가 죽은 지 200년 뒤에 사마천이 쓴 『사기』를 보면, 그 당시 “10여 만 자”로 된 『장자』라는 책이 있었다고 하고, 전한(前漢) 말 유향(劉向)의 기록을 인용한 『한서예문지(漢書藝文志)』에는 모두 52편으로 구성한 『장자』라는 책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기원후 4세기 노장사상이 전성기를 맞은 당시 북송(北宋)의 곽상(郭象, 기원후 312년 사망)이라는 사람이 그 때까지 돌아다니던 여러 가지 사본들을 정리하여 65,000여 자, 33편으로 줄여서 편집하고, 거기에다 자기 나름으로 주(注)를 달았다. 이렇게 곽상이 편집한 『장자』가 바로 우리가 지금 보는 『장자』라는 책이다. 곽상은 『장자』를 33편으로 하고 이를 내편(內篇) 7편, 외편(外篇) 15편, 잡편(雜篇) 11편으로 나누었다.
왜 이렇게 나누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이 중 내편 7편은 곽상이 편집하기 전부터 묶여 있었는데, 그것은 이 내편 7편을 대체적으로 장자 자신의 저술로 여겼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데 많은 학자들이 동의한다.
물론 냉철하게 관찰하면, 내편 7편도 모두 장자 자신의 글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일관한 내용이나 심오한 사상, 정연한 문장을 고려하여, 적어도 내편 7편의 기본적인 것은 장자 자신의 생각으로 보는 데 별 무리가 없다. 내편 각 편의 제목들은 모두 『소요유(逍遙遊)』처럼 세 글자로 된 것이 특색이다. 내편에 비해, 외편과 잡편은 거의 모두 장자의 후학들이나 그 사상에 공명한 사람들이 자기들 나름으로 계속 글을 지어서 일종의 ‘장자 시리즈’가 되어 나온 것이라 보는 것이 보통이다.
『장자』의 문학적인 발상(發想)은 우언우화(寓言寓話)로 엮어졌는데, 종횡무진한 상상과 표현으로 우주본체(宇宙本體)․근원(根源), 물화현상(物化現象)을 설명하였고, 현실세계의 약삭빠른 지자(知者)를 경멸하기도 하였다. 그의 심현한 철학사상서이자 우수한 문학서인 이 『장자』는 위(魏)․진(晉) 때에 널리 읽히고 육조시대(六朝時代)까지 그 사상이 유행하였다. 양(梁)나라 도홍경(陶弘景)이 그를 진령(眞靈)이라 하여 제3급에 올렸다.
4. 『장자』
(1) 내편(內篇)
1) 제 1편 소요유 (逍遙遊)
<소요유>는 『장자』33편 가운데 첫 번째 편으로 전체를 체득한 성인(聖體之聖人)을 밝혔다. 이른바 변화가 크게 자유 자재한 이를 성인이라고 일컫는다. 이는 <장자>의 핵심 사상이고 전하고자 하는 중심 내용이기도 하다. <소요유>는 장자 사상의 근본을 이루고 있는데 소요란 뜻은 광대하고 자유 자재하다는 뜻이다.
ㄱ. 北冥有魚 其名爲鯤 鯤之大 不知其幾千里也 化而爲鳥, 其名爲鵬 鵬之背 不知其幾千里也 怒而飛其翼 若垂 天之雲 是鳥也 海運則將徙於南冥 南冥者 天池也.
☞ 북명에 물고기가 있었다. 이름은 곤(鯤)이다. 곤은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이 물고기가 변해 새가 되었는데 새의 이름은 붕(鵬)이다. 붕의 등 넓이도 몇 천리에 달하는지 알 수 없었다. 붕이 힘차게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을 가득 뒤덮은 구름을 연상시킨다.
붕은 바다 기운을 타고 남명으로 옮아가려 한다. 남명은 바다이다.
(풀이) 이 <소요유>의 주요 내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다랗고 변화 자재한 성인(大而化之之謂聖)을 형용함에 있는데, 오직 성인이라야 소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곤과 붕을 지어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다랗고 변화 자재한 존재를 비유적으로 상징한 것이다.
북명은 곧 북해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 세상사람들이 볼 수 없는 곳으로 심원한 경계를 암시한다. 바다에 사는 독은 大道가운데에서 大聖의 싹이 길러지는 것을 상징한다. 이처럼 커다란 곤은 북명만큼 크지 않으면 능히 양육할 수 없는 것이다. 곤이 붕으로 변한 것은 바로 커다랗고 변화 자재한 성인을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다. 힘차게 솟구친다는 것은 붕이 너무 커서 쉽사리 날아오를 수 없다는 뜻이다. 모름지기 온몸의 힘을 다 쏟아야만 날아오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인은 비록 全體를 구유하고 있지만 깊은 고요속에 몰입해 있어서 자신의 大用을 발휘하기 어렵다. 그는 반드시 전체의 道力을 쏟아야만 고요를 떨치고 妙用에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바다 기운을 탄다는 말은 바다 기운을 움직인다는 뜻으로 성인이 대기를 타고 초월 경계에서만 노닐기보다 세상으로 직접 나아감을 상징한다. 옮아가려 한다는 말은 세간으로 거처를 바꾼다는 말이다.
남명(南冥)이란 남명(南明)으로 날씨가 따뜻한 지방을 가리키는데 왕이 남면하는 것을 상징한다. 풀이하면 성인이 세상에 나타나면 성인이 되어 남면하고서 천하를 다스린다는 것이다. <장자>원문에 나오는“大宗師”가 바로 이런 성인이고, 응제왕(應帝王)이란 편명에는 남쪽 바다로 옮아가 세상에 나아간다는 뜻이 담겨 있다. 소위 “말에는 근본이 있고 일에는 중심이 있다” 는 표현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ㄴ. 蜩與鷽鳩 笑之曰
我決起而飛 搶楡枋 時則不至 而控於地而已矣 奚以之九萬里而南爲
適莽蒼者, 三餐而反 腹猶果然
適百里者 宿舂糧 適千里者 三月聚糧 之二蟲 又何知
☞ 매미와 비둘기가 붕을 비웃으면서 말했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해 날아도 박달나무나 느릅나무에 부딪힌다. 게다가 종종 나무에도 이르지 못한 채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기 일쑤지. 그런데 어찌하여 붕은 구만리나 솟구쳐 남쪽으로 가는 것 일가?
교외로 나가는 사람은 세끼 식사만 하고 돌아와도 여전히 배는 부르다.
백리 길을 가려는 사람은 밤새도록 식량을 찧어야 하고, 천리길을 떠나는 나그네는 세 달 동안 식량을 모아야 한다. 이 두 벌레가 어찌 이를 알겠는가!
(풀이) 이는 小知가 大知에 미치지 못함을 비유한 것으로 이를테면 자그마한 지식을 지닌 세상 사람은 성인의 도량을 짐작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즉 세상의 편벽된 지식인은 자기의 입과 몸만을 위할 뿐이므로, 그에게 성인의 道 따위가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장자에 따르면 세상 사람이 협소한 소견머리로 인해 성인을 알지 못하는 것은 일반인의 뜻이 원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행이 두텁지도 깊지도 못해 각각 주어진 양을 따를 뿐이다.
두 벌레는 박달나무와 느릅나무 곁에서 성장해 본래 견문이 좁고 멀리 날아가려는 뜻 또한 없다. 따라서 대붕의 힘찬 비상을 비웃은 것은 당연하고 세상의 편벽된 지식인도 이와 같을 따름이다.
ㄷ. 故夫知效一官 行比一鄕 德合一君 而徵一國者 其自視也 亦若此矣 而宋榮子 猶然笑之 且擧世而譽之而不加勸 擧世而非之 而不加沮 定乎內外之分 辨乎榮辱之境 斯已矣 彼其於世 未數數然也 雖然 猶有未樹也
夫列子 御風而行 冷然善也 旬有五日 而後返 彼於致福者 未數數然也 此雖免乎行 猶有所待者也
若夫乘天地之正 而御六氣之辨 以遊無窮者 彼且惡乎待哉 故曰 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
☞ 무릇 스스로 지닌 지식은 단 한가지 일에만 효험이 있고, 행동거지는 오직 한 마을에 유용하고, 재주는 겨우 한 왕의 눈에만 들 정도이고, 소신은 단지 한 나라에만 쓸모가 있다. 이런 인물은 소견머리 또한 이와 같을 뿐이다. 송영자는 이런 부류의 인물을 싱긋이 비웃었다. 그는 온 세상 사람들이 칭찬해도 더 애쓰는 일이 없고, 모두가 헐뜯어도 실망하지 않는다. 그는 안과 밖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칭찬과 비난에 추호라도 흔들리지 않을 따름이다. 그는 세상일에 조금도 연연해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도 여전히 근본이 수립되지는 못했다.
그런데 열자는 가뿐하게 바람을 타고 다니다가 15일이 지난 뒤에야 되돌아온다. 그는 복을 구하는 일에 집착하지 않는다. 하지만 몸소 걸어다니는 번거로움은 면했으나 여전히 바람에 의지하고 있다.
만일 천지의 근본을 타고 육기를 부려 무궁한 경계에서 노니는 사람이라면 무엇에 의지하려 하겠는가 따라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지인은 자기가 없고, 신인은 공을 세우지 않으며, 성인은 이름을 구하지 않는다.”
(풀이) 예나 지금이나 어느 누구도 소요를 얻지 못한 것은 오로지 육신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이에 자기 한 몸만을 위해 허둥지둥 공을 세우고 명예를 얻으려 발버둥치는 가운데 일생을 소모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단 한순간이라도 참된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또한 육신에 집착할 뿐 그 밖의 것은 돌아보지도 않는데 어찌 道를 알기나 하겠는가! 오직 변화 자재한 성인이라야 나를 지우고 공을 잊고 이름을 버림으로써 생사를 초월해 “大道라는 고향”에서 소요할 수 있는 것이 다 성인은 광대함을 성취하고 자유롭게 소요하므로 즐거움이 다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곤이라는 상식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를 하다가 이 단락에 이르자 핵심 주제를 드러냈다. 이런 서술 방식을 일컬어 “한마디로 맺어버린다” 고 한다. 바로 여기에 문장 구성의 묘미가 있는 것이다. 큰 그릇이 아니라면 이런 기개가 나올 수 없으므로 배우는 이는 반드시 갈고 닦아야 이 묘미를 알게 될 것이다.
2) 제 2편 제물론(齊物論)
<齊物論>의 제물이란 곧 옛날이나 지금이나를 막론하고 온갖 사람들의 다양한 주의 주장을 뜻한다. 세상에 참으로 깨달은 성인이 없는 까닭에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小知와 小見이 옳다고 주장한다.
한결 같이 자신의 견해에만 집착해 자기 주장만이 옳다는 것이다. 이미 한 사람이 자기만 옳다고 하면 나머지 세상 사람들은 전부 틀리게 되고 결국에는 어느 누구도 참으로 옳을 수 없게 된다. 이에 다양한 입장이 어지럽게 횡횅한 지 오래되었는데 모두 도에 스스로 밝지 못한 탓이다.
그런데 장자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해소하려 했다. 온갖 입장들을 가지런하게 하려면, 모름지기 크게 깨달은 眞人이 세상에 나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도 잊고 남도 잊게 하여 참으로 깨닫게 함으로써, 나와 남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하고 대도라는 큰 바다에서 모든 것을 놓아 버리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다양한 입장을 애써 조화시키려 하지 않더라도 시비 다툼이 저절로 사라져 나와 남, 옳고 그름의 분별이 없어지게 된다. 바로 이것이 갖가지 주장들을 화해시키는 핵심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 편에서는 忘我가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만일 “나의 견해”, “나의 옳음”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의 본래 면목을 깨달아 육신이라는 거짓 자기를 벗어버리면 자연스럽게 대도라는 고향으로 들어갈 것이다. 이런 제물 공부가 지극하게 되어 그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예컨대 장자가 꿈속에서 나비로 변한 비유가 곧 제물의 실증인 것이다.
이 편은 세 가지 피리를 이야기의 실마리로 삼고 있다. 피리란 소리를 내는 고동(機)과 같은 것이다. 땅의 피리란 바람이 불면 땅위의 온갖 구멍이 일제히 내는 소리이다. 땅의 피리 소리는 곧 一氣의 機로서 소리는 가지 각색이지만 시비 다툼이 없다. 사람의 피리는 다름 아닌 대나무 피리를 가리킨다. 비록 피리는 사람이 불어서 소리가 나는 것이지만, 그 소리의 높낮이나 청탁은 있더라도 機心이 없으므로 굳이 말한 필요가 없다. 하늘의 피리는 곧 사람의 말인데 이는 본래 天機의 妙에서 나오는 소리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자주 자기의 말, 즉 자신의 견해를 고집해 機心으로 자기 마음을 삼기 때문에 땅의 피리소리와 비교 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하늘의 피리에는 시비 다툼이 있게 되는 것이다. 만일 機心에서 나오는 말을 놓아버린다면 옳음도 옳지 않음도 없어지므로 어찌 이것과 저것의 시비가 있겠는가! 바로 이것이 <제물론>의 핵심이다.
ㄱ. 物無非彼 物無非是 自彼則不見 自知則知之 故曰 彼出於是 是亦因彼.
☞ 사물을 저것 아니 것이 없으며 옳지 않은 것이 없다. 저것으로부터 보면 자기의 허물은 보이지 않고 스스로를 알면 모두를 알게 된다. 그러므로 저것은 이것에서 비롯되고 이것은 저것에서 비롯된다고 한 것이다.
(풀이) 여기서는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를 모르는 데로부터 시시비비가 시작되었다고 지적했다. 사람들은 자기 소견이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옳다고 고집한다. 만일 서로 입장을 바꿔보면 너와 나라는 분별이 사라져 시비가 저절로 해소되고(物我兩忘 是非自泯) 이에 본래 시비 분별이 없음이 드러난다.
ㄴ. 彼是 方生之說也 雖然 方生方死 方死方生 方可方不可 方不可方可 因是因非 因非因是
是以聖人不由 而照之於天 亦因是也.
☞ 저것과 이것은 상대적인 관계에 있다. 하지만 삶이 있으므로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는 곳에서 삶이 있는 것이다. 옳음이 있으므로 옳지 않음이 있으므로 옳음이 있는 것이다. 옳음에 연유해서 틀림이 있고 틀림을 근거로 옳음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인은 상대적인 시시비비를 떠나 홀로 도에 비추어 본다. 이것이야말로 크나큰 긍정이다.
(풀이) 세상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집착하므로 이것과 저것, 옳고 그름을 끝없이 구분한다고 지적했다. 오직 성인이라야 일반인의 知見에 따르는 대신 眞知로써 天然 大道에 조응해 진리의 세계를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다. 이에 “이것이야말로 크나큰 긍정”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 긍정은 다른 것과는 큰 차이가 있으므로 “이것이야말로” (亦)라고 한 것이다.
ㄷ. 以指 喩指之非指 不若以非指 喩指之非指也 以馬 喩馬之非馬 不若以非馬 喩馬之非馬也
天地一指也 萬物一馬也
☞ 내 손가락으로 저 사람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내 손가락이 아닌 것으로 내 손가락이 저 사람의 손가락이 아니라고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저 말을 가지고 나의 말이 저 말이 아니라고 가리키는 것은 나의 말을 가지고 저 말이 나의 말이 아니라고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천지도 하나의 손가락에 불과하고 만물도 하나의 말일 따름이다.
(풀이) 이 단락에서는 성인이 照破함에 시시비비가 끊어지며 천지 만물이 하나로 합일한다고 밝혔다.
ㄹ. 罔兩 問景曰
曩子行 今子止 曩子坐 今子起 何其無特操與
景曰 吾有待而然者邪 吾所待 又有待而然者邪 吾待蛇蚹蜩翼邪 惡識所以然 惡識所以不然
昔者莊周 夢爲蝴蝶 栩栩然蝴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則 蘧蘧然周也
不知周之夢爲蝴蝶 ,蝴蝶之夢爲周
歟周與蝴蝶 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
☞ 바깥 그림자의 그림자가 안쪽 그림자에게 물었다.
"조금 전 그대는 걷더니 이제는 멈추고, 전에는 앉아 있다가 지금은 일어나는구나. 왜 그리도 지조가 없는 게야!"
안쪽 그림자가 대답했다. "의지하는 게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또한 내가 의지하는 것도 기대는게 있어서 그러네. 혹시 나는 뱀의 비늘이나 매미의 날개에 기대고 있는 건 아닐까? 어째서 그런 줄 알며 왜 그렇지 않은 줄 알겠는가.
언젠가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어 인간 장주인지도 몰랐지. 그러다가 문득 잠에서 깨어나 보니 자신이 분명히 누워 있는게 장주였다네.
그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그가 된 것인지 몰랐다네.
장주와 나비는 틀림없이 다른 존재일 것이므로 이를 물화物化라고 일컫는다네."
(풀이) 이는 제물의 궁극 경지이다. 따라서 꿈과 깨어남을 분간하지 않은 채 물화로 극치를 삼았다. 이 <제물론>의 중심 뜻은 만물을 조화시키는데 있으므로 무엇보다 아집을 타파해야 한다.
이에 우선 “나는 나를 잊었다”를 실마리로 삼은 것이다. 앞의 나는 참된 자기이고 뒤의 나는 육신을 가리킨다. 처음에는 忘我를 공부를 말함에 이르러 모름지기 육신을 거짓 자기로 여겨 100여 개의 뼈, 9개의 구멍, 그리고 6가지 내장을 하나하나 부수어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만일 참된 자기를 깨닫는다면 육신을 벗어나게 된다. 몸을 초탈하면 자신을 놓아 버리게 된다. 자신을 잊으면 시비 분별이 저절로 사라진다. 바로 이것이 핵심 요지이다.
본래의 자기를 얻으려면 먼저 忘我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세상을 꿈으로, 시비 논쟁을 꿈속의 일로, 시비를 판가름하려는 사람을 꿈속에서 해몽하려는 자로 보아야만 忘我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인간 세상이 한바탕 꿈놀이임을 안다면 나와 남이란 분별 의식도 사라진다. 그러나 나와 남이란 분별 망상이 슬그머니 사라진다 해도 아직 忘言하지는 못한 것이다. 이에 언어 음성을 메아리로 보면 말이 空해지는데 이렇게 되어야 말이 저절로 놓아진다. 100여 개의 뼈와 9개의 구멍을 낱낱이 觀하는 것은 곧 초심관법(물질을 분석해 空을 드러내는 관법)이다. 이제 육신을 그림자와 같은 허상으로, 뱀의 비늘처럼 빌려 온 것으로 보는 것은 곧 존재에 나아가 空을 밝히는 것이니(卽色明空) 이 밖에 따로 힘들여 공부할 것이 없는 것이다.
자신을 假我로 보더라도 여전히 忘物은 못한 것이다. 이에 장자는 꿈속의 나비 비유를 인용해 나와 만물을 모두 놓아 버린 경지를 묘사한 것이다. 나와 萬有, 모두를 잊으면 시비는 저절로 사라진다. 이것이 변화 자재한 성인이 도달한 경계이다. 따라서 장자는 物化로써 <제물론>을 맺은 것이다.
3) 제 3편 양생주(養生主)
이 편은 본성을 되살려 삶을 온전히 함을 가르쳤는데 본성이 곧 삶의 주인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오로지 자기 한 입과 몸뚱이 하나만을 위해 공명과 이익을 분주히 쫓으면서 삶을 영위한다. 이에 생명을 해치고 본성이 상하게 되어 죽는 그날까지 그칠 줄 모른다.
그러므로 장자는 편안히 상황변화에 따라 순리대로 처신하고(安時處順) 게걸스럽게 구함으로써 겉모양만 그럴듯하게 꾸미지 말고(不必貪求以養形), 오직 마음을 맑고 깨끗이 하여 욕심을 버림으로써 자기의 본래 면목을 되살려야 한다(淸淨離欲以養性)는것을 가르친다. 이것이 바로 道에 들어가는 수양법인 것이다.
4) 제 4편 인간세(人間世)
세속에 처하는 법을 말하였다. 세상일을 유심조작으로 꾀하지 말 것이며 경박하게 처리하지도 말 것이다. 만일 유심 분별로 명예를 구하기 위해 재주를 부린다면, 자기의 생명과 본성을 해치게 될 것이다. 예컨대 안자(顔子)와 섭공(葉公)은 命에 수순하는 대신 스스로를 알지 못한 채 억지로 일을 강행했던 자이다.
모름지기 성인이라야 자기에 집착하지 않고 허심(虛心)으로 세상을 소요하면서 어쩔 수 없는 자연에 순응함으로써 환난을 면할 수 있는 것이다. 섭세(涉世)의 어려움을 간절하게 말하면서 세속에 처하는 데 아무런 환난이 없는 것이 바로 성인의 大用임을 지적하였다.
5) 제 5편 덕충부(德充符)
형상을 잊고 지혜를 버림으로써 體用을 겸비해 무심으로 노닐고 , 道로써 소요하는 성인의 경계가 바로 덕이 내면에 충만한 정표임을 밝혔다.
6) 제 6편 대종사(大宗師)
도가 온전하고(道全), 덕이 갖춰지고(德備), 변화자재하고(渾然大化), 자기를 놓아버리고(忘功), 여섯가지를 총괄적으로 아우르고 있다. 이른바 至人, 神人, 聖人이라 일컫는 인물이라도 이런 경계에 이르러야 만 만세의 본보기가 되고 스승으로 받들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인물을 大宗師라고 칭하는데, 그는 바로 전체를 체득한 성인인 것이다.
다시 말해 內聖의 길은 모름지기 여기에 도달해야 지극하다 할 것이고, 이른바 그 근본을 얻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흐름에 순응하면서 세상에 처할 때 그는 聖帝明王이 되는 것이다.
제 7편 응제왕(應帝王)
앞의 여섯 편에서는 大道의 오묘함을 발휘했는데, 대종사란 곧 도를 체득한 인물로 성인의 전체를 자기 한몸에 얻은 자이다. 본체가 있으면 작용이 없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응제왕> 편을 통해 大道의 묘용을 드러낸 것이다. 성인이 때를 만날 경우 세상에 나아가 부득이한 흐름에 따라 命에 순응하면 곧 성제 명왕(聖帝明王)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무심으로 행할 뿐 사량 분별로써 헤아리지 않는다. 이와 같이 무위의 큰 작용을 드러내는 까닭에 이 편의 명칭을 <응제왕>(應帝王)이라 이름한 것이다.
(2) 외편(外篇)의 구성
8. 변무(騈拇) 9. 마제(馬蹄) 10. 거협(胠篋) 11. 재유(在宥) 12. 천지(天地) 13. 천도(天道) 14. 천운(天運) 15. 각의(刻意) 16. 선성(繕性) 17. 추수(秋水) 18. 지락(至樂) 19. 달생(達生) 20. 산목(山木) 21. 전자방(田子方) 22. 지북유(知北遊)
1) 제8편 騈拇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
彼至正者, 不失其性命之情. 故合者不爲騈, 而枝者不爲岐.
長者不爲有餘, 短者不爲不足. 是故鳧脛雖短, 續之則憂. 鶴脛雖長, 斷之則悲.
故性長非所斷, 性短非所續, 無所去憂也.
☞ 올바른 경지에 이른 사람은 그의 본성과 운명의 진실함을 잃지 않는다. 그러므로 합쳐져 있다 해도 쓸데없이 들러붙지 않고, 갈라져 있다 해도 소용없이 덧붙어 있지 않고,
길다 해도 남는 것이 없고, 짧다 해도 부족하지 않다. 이런 까닭에 물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이를 길게 해주면 고통스러워 할 것이고, 학의 다리가 길다고 이를 짧게 해주면 슬퍼할 것이다.
그러므로 본래부터 긴 것을 잘라서는 안되고 본래부터 짧은 것을 길게 해주어서도 안되며 이에 대해 근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 인간의 마음은 일정한 시대 ․지역 ․교육에 의하여 형성되고 환경에 의해 좌우된다. 이 마음이 외부 사물들과 접촉하여 지식이 생긴다. 이러한 지식은 시대 ․지역, 그리고 사람들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보편타당한 객관성을 보장할 수 없다. 장자는 이러한 지식에 입각한 행위를 인위(人爲)라고 한다. 물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하여 그것을 이어주거나 학의 다리가 길다고 하여 그것을 잘라주면 그들을 해치게 되듯이 인위는 자연을 훼손할 수 있다.
2) 제11편 재유(在宥)
천하는 인위적으로 다스려서는 안 된다.
聞在宥天下, 不聞治天下也. 在之也者, 恐天下之淫其性也. 宥之也者, 恐天下之遷其德也.
天下不淫其性, 不遷其德, 有治天下哉!
☞ 천하를 있는 그대로 두지 않고 다스리려 해서는 안 된다. 천하를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은 사람들이 그들의 본성을 잃게 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천하를 내버려두는 것은 그들이 타고난 덕이 바뀔까 두렵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들의 본성을 잃지 않고 그들의 타고난 덕이 바뀌지 않는데도 천하를 다스려야 한다고 할 사람이 있겠는가!
(3) 잡편(雜篇)의 구성
23. 경상초(庚桑楚) 24. 서무귀(徐无鬼) 25. 칙양(則陽) 26. 외물(外物) 27. 우언(寓言) 28.양와(讓王) 29. 도척(盜跖) 30. 설검(說劍) 31. 어부(漁父) 32. 열어구(列禦寇) 33. 천하(天下) 등 11개의 어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외물(外物)편
장자가 살았던 시기는 바로 전국시대의 초기였다. 전쟁으로 산하는 피폐되고 인간의 목숨이 칼 끝에 맡겨져 있는 상황 앞에서 장자는 아파했다. 인간은 왜 소인배로 전락하는가? 이는 장자가 가장 안타깝게 고민했던 문제에 속한다. 그래서 장자는 인간에게 외물에 사로잡히지 마라고 신신 당부를 한다.
이러한 연유로 <외물>편에서 장자 자신이 인물로 등장하여 우화의 주인공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답지 않게 긴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외물이란 산과 들과 나무와 돌 등등 이런것들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도 외물이며 정치 사회 경제 문화도 외물이다. 나라고 하는 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현상은 외물 아닌 것이 없다. 이러한 외물에 사로잡혀 스스로 구속 당하지 마라. 그
렇다고 외물을 부정하지 말것이며 긍정하지도 마라. 그대로 두고 서로 어울려 살아가라. 무엇은 내 편이고 무엇은 네 편이라면서 서로 밀고 당기지 말 것이고 이것은 좋고 저것은 싫다고 말 것이며 사랑하느니 미워하느니 단서를 달고 외물을 만나지 마라. 외물을 그대로 두면 저절로 나도 그대로 두게 된다. 말하자면 외물을 한 송이 꽃으로 여긴다면 그대로 두고 볼 일이지 꺾지 마라는 당부를 장자는 하고 싶은 것이다.
ㄱ. 相引以名 相結以隱 與其譽堯而非桀 不好兩忘而閉其所譽
☞ 명성 때문에 서로 끌어당기고 은밀한 도움을 받았다고 서로 손을 잡는 것이 일상의 짓이다. 요를 칭찬하고 걸을 비난하는 것은 칭찬이나 비난을 잊고 명예 따위를 잊어버리는 것만 못하다.
* 명성과 불명예를 모르면 명성은 좋고 불명예는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시샘이나 다툼이 없을 것이다. 유리하고 불리하고를 따지려 들지 않는다면 이익을 보았다든지 손해를 보았다든지 설왕설래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네 몫은 크고 내 몫은 작다면서 오기를 부리기 시작하면 세상은 살얼음판처럼 걸핏하면 깨지게 마련이다.
ㄴ. 至人不留行焉
☞ 지인은 행적을 남기지 않는다.
* 지인은 남의 의견을 경청하지만 동의한다거나 반대한다는 생각을 앓는다. 그러니 옳다 그르다는 말이 지인의 입에선 나오지 않는다. 입은 다물고 귀로 들어 주면서 고개만 끄덕거릴뿐 자기와 생각이 같으니 한패가 되자고 하지 않는다.
ㄷ. 天地穿之 日夜無降 人則顧塞其竇
☞ 하늘은 밤낮없이 구멍을 뚫고 사람은 한사코 그 구멍을 막으려 든다.
* 하늘은 단비를 내려 만물이 살도록 적셔 준다. 그러나 이제는 하늘에서 산성비가 내려 만물이 누렇게 뜨고 시들어 죽어간다. 산성비가 하늘에서 내린다고 하늘의 짓은 아니다. 오로지 사람의 짓일 뿐이다. 만물을 촉촉이 적시는 단비는 하늘이 구멍을 뚫는 것이고 산성비를 내리는 것은 사람이 구멍을 막는 꼴이다.
2) 우언(寓言)편
숨도 쉬지 않고 먹지도 않고 살 수 있는 목숨은 없다. 그러나 사람의 목숨은 그 둘에 하나를 더 보태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말을 하지 않고는 살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말을 못하면 속병이 나고 만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고 밤 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며 입 조심을 하라고 하는 것이다. 시비가 달라붙는 말을 피하느라고 장자는 우언(寓言)을 쓴다고 밝힌다. 우언 이란 돌려서 말하는 수법이다. 사물을 빗대거나 인물을 통해서 남의 입을 빌려서 말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아무리 시비를 걸고 싶어도 상대가 없어서 허탕을 칠 수밖에 없음을 장자는 노렸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시비가 일 말을 우언으로 말을 해 그 시비를 피한다. 그래서 장자는 도를 우화로 만들어 이야기하고 유가를 우화로 통렬하게 비판하고 꼬집고 헤집어 틀려먹었음을 알린다.
ㄱ. 與己同則應 不與己同則反 同於己爲是之 異於己爲非之
☞ 제 입장과 같으면 따르고 다르면 등져 버린다. 제 생각과 같으면 옳다 하고 다르면 그르다 한다.
* 나만 옳다는 생각이 가장 무섭다. 무슨 일이든 잘못 되면 남을 탓하고 잘되면 제 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더더욱 무섭다. 한 치의 손해도 볼 수 없다는 무장을 하고 사방을 노려보며 염탐을 하고 상대의 약한 급소가 어딘가를 찾아서 일격에 쓰러뜨릴 궁리만 일삼는 마음은 오뉴월 무서리보다 더 차갑고 매섭다. 사람은 항상 제가 유리한 쪽에다 시를 두고 불리하면 모조리 비로 치부하려는 데서 갖가지 욕심을 부리게 된다.
ㄴ. 言無言 終身言 未嘗不言 終身不言未嘗不言
☞ 말을 해도 말이 없다. 그러면 평생을 말한다 해도 말하지 않는 셈이다. 그러나 시비가 있는 말이라면 평생 말하지 않는다 해도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다.
*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을 말까 하노라. 입을 다문다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귀로 들리는 말만 말이 아니라 속에 담아 둔 말도 말이다. 시비를 걸고 따지려는 마음은 자면서도 꿈으로 말을 하는 편이다.
ㄷ. 彼來則我與之來 彼往則我與之往
☞ 내 상대가 오면 나는 더불어 따라오고 내 상대가 가면 나는 더불어 따라간다.
* 내 상대가 오면 나도 오고 내 상대가 가면 나도 간다. 이것은 철저하게 무엇인가에 의지해 있음을 말한다. 내 상대가 권력이라면 권력 앞에 개가 되라면 개가 되어야 할 것이고 내 상대가 돈이라면 그 돈 앞에 종이 되라면 종이 되어야 한다. 시비의 상대에 의지하면서 자유를 바라지 마라. 자유를 팔아 구속을 산 것임을 잊어버리고 아프다고 탄식할 것은 없다. 아픔을 탄식하느니보다는 아픔이 없는 것에 의지하리라는 것이 장자의 충고이다. 아픔이 없는 상대가 무엇인가? 자연이다. 여기서 자연이란 시비를 떠난 세계를 말한다.
ㄹ. 太白若辱 成德若不足
☞ 참으로 깨끗한 사람은 오히려 더러워 보이고 참으로 덕을 갖춘 사람은 오히려 모자라 보인다.
* 본래 덕이란 따뜻한 둥지 같은 것이다. 몸을 편안히 쉬게 하고 마음을 편안히 잠들게 하는 덕은 수더분하여 모란처럼 화사하지도 못하고 보석처럼 눈부시지도 않다. 항상 사랑할 것을 찾고 미워할 줄을 모르며 항상 따뜻한 손길로 어루만질 줄은 알아도 매서운 손짓으로 때릴 줄은 모른다. 그래서 덕이 있는 사람은 항상 손해를 보는 바보라고 손가락질을 받거나 아니면 못난 바보라고 흉을 잡힌다. 그러나 덕은 그런 꼴을 아랑곳 않는다. 덕은 모든 것을 사랑하는 까닭이다.
5. 장자와 도덕경(道德經) 비교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장자의 사상이 여러 분야에 관계가 있지만 "그 근본은 노자의 설에 귀일한다"고 하였다. 장자의 사상이 노자의 사상과 근본적으로 궤를 같이 한다는 데 이의(異意)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한마디로 "장자는 노자를 주석한 것"이라고 한 명(明)나라의 고승 감산(?山)의 말이나 기타 제임스 레그(James Legge)같은 학자들의 주장과 같이 <장자>가 단순히 노자를 주석한 것에 불과하다고 한 것은 지나친 말이다. 화이트헤드(Alfred N. Whitehead)가 서양 철학사는 플라톤 철학의 각주(脚註)라고 한 것처럼 넓게 해석하면, 장자가 노자의 주석이라는 말도 가능할 수 있겠지만, 장자가 노자를 그대로 받아 주석이나 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여기서 역사적인 문제를 길게 논의할 필요는 없다. 아무튼 처음에는 노자 철학과 장자 철학이 따로 발전해 오다가 기원전 2세기경에 합쳐서 한 학파가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당시에 나온 <회남자(淮南子)>에 처음으로 ‘노장(老莊)’이라고 합쳐서 한 철학 체계로 다루었다.
최근 그래함(A. C. Graham)을 포함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과정에서 장자 사상에 노자 사상을 첨가했다고 보고 그런 의미에서 차라리 장자를 "노장 철학"의 주축으로 봐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사실 <장자> 내편에는 노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노자를 직접 인용하거나 그 사상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 전혀 없다. 그렇다고 노자와 장자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장자는 노자가 제기한 문제를 자신의 처지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표현했다고 보는 것이 무난한 생각이다. 도(道)를 포함하는 몇 가지 중심 사상에서 둘은 보는 눈이 서로 같았겠지만 3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다음 새로운 역사적 배경에서 등장한 장자는 마땅히 자기 나름의 형식으로 접근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 둘 사이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기본적 차이점들은 무엇인가? 가장 두드러지게 차이나는 점을 몇 가지만 들어보자.
첫째, 노자의 <도덕경>이 주로 간략한 어록이나, 시(詩)나 아름다운 산문 형식인데 반하여, <장자>는 주로 이야기 형식이다. 노자가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닙니다." 하는 엄숙한 선언으로 <도덕경> 첫머리를 시작한 데 반해, 장자는“북쪽 깊은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살았는데, 그 이름은 곤(鯤)이라 하였습니다.”하는 이야기로 운을 떼었다. 물론 <장자>도 문단 하나 하나가 시적 형식으로 꾸며지지는 않았지만, <장자>전체가 시적 상상력을 표현하고 있다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아무튼 노자가 자상하면서 근엄한 철인의 풍모를 지녔다면, 장자는 투철한 눈매로, 때로는 크게 껄껄 웃고, 가끔은 험구도 불사하는 재기발랄(才氣潑剌)한 야인의 모습을 지녔다고 하겠다.
둘째, 노자의 <도덕경>은 어느 면에서 정치 지도자를 위한 지침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 참여를 염두에 두었다. 물론 장자도 제4편에서 궁극적으로 마음을 비운 상태에서 정치에 참여하는 문제를 이야기하고, 여기저기 사회에서 처신할 태도를 논의했지만, 장자의 일차적 관심은 무엇보다 개인이 내적으로 성장하고 깨닫기 위해 힘쓸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노자가 도가적 "정치" 실현을 이상으로 삼았다면, 장자는 도가적 ‘삶’의 완성에 초점을 맞춘 셈이다.
셋째, 조금 철학적인 표현을 빌리면, 노자가 (道)를 주로 생성 변화의 ‘근원’으로 파악하고 우리가 본받고 따라야 할 궁극적인 귀착점이라고 강조한 데 반하여, 장자는 도를 무궁한 생성 변화, 그 자체로 파악하고, 근원으로 돌아가기보다는 그냥 그 변화에 몸을 맡겨 함께 흐르거나 그대로 변하기를 더욱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도덕경>은 주로 도의 "생(生)" 하는 측면을 말하였는데, <장자>는 도의 화(化)하는 기능을 부각한다.
넷째, 노자도 그 당시에 많이 알려진 경구나 속담을 가끔 인용하였지만 대체로 자기의 생각을 홀로 개진한 데 반하여, 장자는 그 당시에 유행하던 사상들, 특히 이론학파들과 부단히 대화하고 대결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첨예하게 전개하였다. 따라서 <장자>에는 풍자와 해학과 비유는 물론 여기저기서 예리한 이론의 칼날이 번쩍인다.
6. 맺음말
노자와 장자로 대표되는 도가사상은 우리들에게 삶 속의 모든 변화들을 그저 자연스럽게 받아드릴 수 있도록 영감을 불어넣었다. 오늘날 갖가지 사회 부조리와 병폐 현상이 늘어나고 있는 이유는 대상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장자는 말한다. “만약 천하를 천하 속에 감추어두면 잃어버릴 수가 없다." 구도자의 마음은 계곡과 같아야 한다. 자신을 낮추면 낮출수록 마음이 비워지게 되며 모든 물줄기가 바다에 이르듯 만물이 여기로 돌아와 쉬게 된다. 생활 리듬이 빨라지고, 삶의 여유가 점점 없어지는 요즈음, 장자의 말을 한 번 쯤 되새겨 볼 필요를 느낀다.
- 참고문헌
* <장자> 안동관 현석사
* <장자> 오남강 1999 현암사
* <莊子> 윤재근 1997 도서출판 ‘둥지’
* <감산의 莊子> 오진탁 옮김 1990 서광사
* <난세의 철학> 후쿠나가미쓰지 1991 민족사
20010402 권하나
20010407 장혜정
20110426 양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