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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자백가(諸子百家)

장안봉(微山) 2014. 5. 13. 0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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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백가(諸子百家)

 

 

주(周)가 동으로 천도한 후부터는 종주권(宗主權)이 쇠약해짐에 따라 제후들이 방자하게 되어 약육강식이 잇달아 일어남에 중국 천하는 소란하게 되었다.

 

이 시기를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또는 선진시대(先秦時代)라 부르며, 중국사상의 개화 결실의 시기였다. 이 시대의 사상가들을 제자(諸子)라 하며, 그 학파들을 백가(百家)라 부른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제자백가를 음양가(陰陽家), 유가(儒家), 묵가(墨家), 명가(名家), 법가(法家), 도가(道家)의 6 가지로 분류하고, 『漢書藝文志』에 의하면, 6가 이외에 종횡가(縱橫家), 잡가(雜家), 농가(農家), 시부가(詩賦家), 병가(兵家), 수술가(數術家). 방기가(方技家)의 8가를 추가하고 있다.

그런데 제자백가들은 모두 이 위기를 구출하려는 의도와 목적아래서 일어난 것이며, 철학사상에 특히 기여한 것은 유가, 도가, 묵가, 법가, 명가 등이다.

 

 

1. 유가 儒家

 

유가는 본래 춘추시대(春秋時代)말부터 전국시대(戰國時代)에 걸쳐서 배출된 제자백가(諸子百家) 중의 한 학파에 불과하였으나, 한왕조(漢王朝)의 권력의 안정과 함께 그 통치를 정당화하는 이론으로서 중시되어 중국(中國)의 정치 사상 중에서 정통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국에 왕조 정치체제가 존속한 2천년 동안 유학은 국가의 질서를 뒷받침하는 교학(敎學=儒敎)으로서 종통사상의 지위를 계속 점거(占據)하였던 것이다. 그 오랜 기간 동안에 유학은 각 시대의 정치 상황이나 다른 사상관계에 대응하여 그 내용을 변화, 전개하고 있다.

「유(儒)」라는 명칭의 기원에 대해서는 「유약(柔弱)」을 의미한다든가 「수(須)=턱수염,에 통하여 老人」을 의미한다든가의 말이 있어 일정하지 않으나, 대체로 묵가(墨家)나 법가(法家)와 같은 타학파들이 이하 서술하는 것 같은 성격의 학파를 가리켜서 붙인 명칭인 듯 하다.
유가 사상의 특질을 요약하면 공자의 仁은 인간심정에 고유한 자애의 마음을 확충하는 것 , 즉 극기복례로써 완전한 인격을 이룬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인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서 그 발단은 친자지간의 사랑으로부터 시작하며, 나아가서는 형제, 가정, 사회, 국가, 인류에게 미치는 사람의 길이며, 이것은 사람의 본성에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라 한다.

공자는 인도를 닦아서 천도에까지 이르는 天人合一의 경계를 역설하였다. 공자의 인은 마치 석가의 慈悲나 예수의 博愛와도 비슷한 것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倫理로서 人道이므로 그것은 종교가 아니고 다만 현세인이 삶에 국한 된 것이다. 공자 다음에 자사가 나와 백여년 뒤에 맹자가 나와 공자의 도를 조술하여 성선설을 창도함으로써 4덕과 사단을 역설하여 사람의 막음에 인의예지의 덕이 고유하므로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의 마음이 드러난다 하여 선천적 良知良能設을 주장하였다.

 

전국시대말의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했다. 맹자와 순자는 도덕 뿐만 아니라 경세사상을 부르짖음으로써 왕도 정치에 있어 인민의 경제적 생활기반을 마련해 줄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유가사상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學, 환언하면「자기 자신의 수양에 힘쓰고 천하를 이상적으로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삼는」학문이며, 그것에 향한 실천이라고 도 할 수 있다. 「자기 (己)를 修한다」함은 개개인에 있어서의 도덕을 신뢰하여 그것을 정직하게 신장(伸長)하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孟子의 性善說은 그것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유가에 있어 자기의 도덕성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사람이 君子라 하여 존중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소인이라 하여 배척된다.

 

「德」 의 양성을 위해서 유사는 「배우는」일과 「아는 」일을 중시한다.
그 학습 대상은 궁정(宮廷)같은데 보존돼있는 옛 예악의 관례나 故事를 전한『시경(詩經)』, 『서경(書經)』 등의 고전이다. 그것들의 전통을 배움으로써 그 형식에 포함된 古人의 정신을 획득하려 한다. 따라서 유가는 전통에 대하여 급격한 파괴를 시도하지 않는다. 전통적 형식을 보수(保守)하면서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가해 나가려고 한다. 그 점은 「천(天)」이나 「鬼神」(死後의 靈魂)에 대한 태도에도 一貫되어 있다. 인간의 도덕성을 중시하는 입장에서는 人力을 초월한 「천의 위력」이나 「鬼神」의 재앙 등은 무시해야 할 것이나 유가는 전대 이래의 그것들에 대한 신앙을 완전히 버리지 않는다. 天은 역시 운명을 운명을 지배하는 것이요, 귀신은 공경하여 멀리 해야 하는 것으로 그친다.

 

그렇지만 유가의 이상은 이러나 「나를 닦는다」는 일만으로는 안 된다.

 

『大學』에 있는 것과 같이 「몸을 닦는 일(修身)」로부터 시작하여 「집을 가지런히(齊家) 하고, 나라를 다스리고(治國), 천하를 평(平)하게 하는 데(平天下)」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필경「사람을 다스리는」일이 학문의 궁극의 목표로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학은 어디까지나 「治者」를 위한 學이다. 「치자」라는 것은 위로 황제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관료를 포함한다. 그러한 치자의 자격을 갖는 계층에 대하여 어떻게 백성을 다스릴 것인가, 어떻게 하면 백성이 다스려질 까를 말하는 학문이 바로 유학이다.

 

그 경우 중시된 것이 법률에 의하여 백성을 엄하게 통치하는 것보다는 교화에 의하여 저절로 백성을 치자의 의욕하는 방향으로 인도한다고 하는 방식이었다. 그러한 교화의 측면을 구비한 학설을 자칭할 때 우리들은 대체로「儒學」이라는 말보다는 「儒敎」라고 하는 말을 쓴다.

따라서 「교화의 학」으로서의 유교는 결코 개인의 정신적 구제를 목적으로 삼는 종교와는 다르다. 사람다스리는 것을 구극(究極)의 목표로 삼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치자계급의 일원이 되려고 한다. 정치에 대해서는 용감하게 비판을 가하는 일도 있으며 신구왕조의 교체를 혁명(革命)이론에 의하여 정당화하는 역할도
과감히 한다. 이상과 같은 성격을 갖는 유가사상은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전국시대에 있어서는 당연히 타학파의 맹렬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예컨대 혈연관계를 중시하고 예악 등의 의례를 존중하는 학설은 겸애(兼愛)와 상현(尙賢), 비악(非樂), 절장(節葬) 등을 주장하는 묵가에 의하여 비판되고 인간의 도덕성에의 신뢰에 기초를 두는 학설은 군주권력의 일원적 강화를 지향하는 법가에 의하여 배격되었다. 또 치자의 일원이 되어 이상적 정치 실현에 광분하는 태도는 인위적인 노력의 한계나 허무함을 깨달은 도가로부터 조소를 받았다.

유가사상은 또한 타학파의 비판 공격에 견디기 위하여 타학파의 학설을 장치를 섭취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예컨대 전국말의 순자는 법가나 도가의 이론을 교묘하게 유가의 체계속에 받아들였으며, 한 대의 동중서는 음양오행설이 나 천인상관설을 대폭적으로 채택하여 시대의 요청에 순응하는 이론을 만들어 냈다.

유가의 경전으로는 『대학(大學)』,『중용(中庸)』,『논어(論語)』,『맹자(孟子)』,『예기(禮記) 』,『춘추(春秋)』의 5경이 있다.

 

 

2. 도가 道家

 

도가는 일명「황로학(黃老學)」「노장학(老莊學)」이라고 한다. 도가의 시조 老子는 무위(無爲)자연(自然)을 주장함으로써 유가의 예악(禮樂) 형정(刑政) 형식주의를 반대하고 영아(嬰兒)의 천진으로 복귀하여 무위자연의 사회를 이룰 것을 주장했다.

노자의 이른바 도덕은 보통 말하는 도덕이 아니고, 유가의 이른바 인의(仁義)란 도덕의 상위에 있는 것으로서의 도(道)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자의 도는 형이상학(形而上學)적 본체임과 동시에 인성론(人性論)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다음 전국시대에 莊子가 나와 도가철학의 인식론적 이론을 전개함으로써 만물제관 시비양행론을 고조하여 가치의 전환을 부르짖음으로써 평등.자유.무욕을 강조했다.

 

열자도 노자를 이어 형이상학적으로 기화(氣化)를 상론하, 허무청정(虛無淸淨), 전성보진을 주장함으로써 은둔주의(隱遁主義)로 기울어졌으며, 이 계통을 이은 양주는 위아설을 주장하였다. 이기쾌락주의(利己快樂主義)로써 독선적이 되었다. 유가가 중국 고래의 전통적인 적극적인 면을 계승하여 형성된 것과 반대로 도가는 그 소극적면을 이어 무위자연의 사상체계를 이룬 것이다. 후세의 도교(道敎)는 후한때 노자를 천존으로 받들어 조직한 종교이지만 도가는 종교가 아니다.

도가의 사상은 인간에게 분수를 지켜 체념으로 일관할 것을 가르쳐, 정치의 어지러움에 대해서는 은둔자(隱遁者)의 생활을 하면서. 일견(一見) 소극적인 태도에서도 적극적으로 저항할 것을 가르쳐 절대적인 가치를 생각하게 함으로써 현상세계의 어쩔 수 없는 모순이나 마음에 맺힌 것을 풀어버리는 지혜를 가르쳤다. 그리하여 그 사상은 후대에 있어서 문학자에게 많이 애호되었다. 예컨대 도연명(陶淵明)-서기365~427년-의 시에 보이듯이 훌륭한 인생의 지혜를 말하는 문학작품을 낳았다.

 

장자는 제물론(諸物論)과 양생주론(養生主論), 소요유론(逍遙遊論)이다. 천지는 나와 더불어 생(生)하므로 만물은 나와 일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일체의 이(理)에 어둡기 때문에 사람들은 항상 만물을 차별하여 시비를 벌이고 있다. 그것은 천지만물의 전체를 버리지 않고 한 국부(局部)에만 집착하기 때문이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한 가지여서, 죽는 것은 다만 다른 곳에서 사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세상의 현상은 한편으로는 가한 것이 있으면 한편으로 불가한 것이 존재한다.

제물론에서는 어느 날 장주가 낮잠을 자는데 꿈에 나비가 된다. 그 때에 장주가 나비로 된 것인지 나비가 장주로 된 것인지 구별조차 할 수 없었으나 참으로 유유하여 기분이 매우 좋았다고 하는 말을 하여 제물의 경지를 설명하였다.

 

 

3. 묵가 墨家

 

묵가는 묵자(墨子)-기원전 5세기 전반-를 시조로 겸애(兼愛)를 주장하여 유가의 형식주의 계급제도를 타파하고, 천(天)이 만민을 겸애하는 것과 같이 사람들도 서로 겸애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사리사욕을 타파할 것을 역설하였으며, 절검(節儉)과 근로(勤勞)를 내세웠다.

묵가는 천귀(天貴)-하느님-사상을 신념으로 하는 종교이며, 또 3표(三表)논리로써 경험을 중시하는 실증주의(實證主義)의 입장을 취한다. 이 경향은 후세 별묵(別墨)이라 불리우며, 논리학파와 사공파(事功派)로 분파되었고, 사공파는 다시 전도파, 실행파 및 기타로 나누어졌다. 실행파는 묵자의 역행주의(力行主義)를 이어 허행(許行), 진상(陳相) 등의 철저한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무위 자연사상이 되었다.

묵가는 처음에 유가에 나가서 배웠다고 하지만, 묵가사상은 거의 유가사상에 반대되고 있다. 유가는 혈연관계를 윤리의 기본으로 두는 데 반해, 묵가는 그러한 차별에 관계하지 말고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하였다.(兼愛論) 또 유가에 반하는 농민이건 상공업자건 구애할 것 없이 재능있는 자는 계속해서 등용하라고 하였다.(尙賢論) 유가가 관혼상제나 일상의 의식을 중시하는데 대하여 묵가는 군주의 긴요하지 않은 지출을 덜고 (節用論), 궁중 음악등은 그만두고 (非樂論), 장례의식 등도 간소하게 하라고 하였다. (節葬論).
유가가 인간의 도덕적 실천(실천)을 중히 여기면서도 오히려 인력으로는 어떻게 하기 어려운 천도나 천명을 인정하는 데 반하여, 묵가는 일체 명(命)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非命論), 인간의 행위의 선악은 모두 귀신에게 감시 받으며, 귀신은 정확하게 그에 대응하여 상벌을 내린다고 한다. (冥鬼論)
유가가 개개인의 도덕적 자각을 인정하는데 반하여, 묵가는 하위자(下位者)는 상위자에게 절대 복종해야 하며(尙同論), 인간 중의 최상위인 천자도 천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天志論)

 

 

4. 법가 法家

 

관자(管子)를 시조로 신불해(申不害), 상앙(商椽)을 거쳐 한비자(韓非子)-기원 전 280~233년경- 에 이르러 집대성되었다. 법가는 정치철학과 그 실천으로써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어 천하통일을 도모하려는 학파다. 관자는 공리(功利)와 법치(法治)를 겸한 사상가이며 또, 실행가였다. 신불해는 패도의 술에 밝고, 상앙은 패도의 법에 뛰어났으며, 이 술과 법은 한비자에 이르러 종합되어져 형명법술(刑名法術)의 학으로 완성되었다.

한비자의 학은 유, 도, 법의 종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봉건제에서 군현제로 이행하고 있었던 전국시대에, 씨족제적 봉건국가의 유지를 목적으로 유가의 덕치 사상에 반대하고 새로운 법치사상에 의하여 중앙집권국가를 만들려고 한 사상가가 있었다. 그들은 사상가로서 학파를 형성하였다기보다 실제 정치가로서 활약하였기 때문에 문헌상으로 그 자취를 살핀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전국 시대때 처음으로 법치를 주장한 사람은 이회, 오기, 신불해, 상앙 등이 있다. 그들은 법가의 선구자들이다. 이들 사상을 집대성한 사람이 전국말기에 나타난 韓非였다. 그는 법 권술 권세를 중시하여 중심에 법을 두고 권술과 권세를 유기적으로 결부시켰다. 신불해의 권술에 대한 생각, 상앙의 法에 대한 생각, 신도의 권세에 대한 생각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여 법체계를 만들어 냈다. 그는 원래 유가의 순자에게 사사하여 그 예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한비의 생각은 중앙집권을 도모하려는 군주의 이익과 일치하였으며, 씨족제를 유지하려는 귀족들과는 충돌하였다. 후에 秦始皇이 그를 重用하려고 하였으나 이사에게 시기를 당해 자살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그대로 진의 실제 정책에 취해져서 진제국의 형성에 큰 구실을 하게 되었다.

 

 

5. 명가 名家

 

명가는 논리학파로서 등석, 혜시, 공손룡, 윤문 및 별묵 등이 있다. 명가는 명과 대상인 실의 불일치를 교정하려는데 목적을 두었던 것이다. 등석은 양가의설 즉, 이율배반율(二律背反律)과 무궁의사(無窮)로써 유명하며, 혜시는 변설(?設)로써 만물평등을 주장했으며, 공손룡은 백마비마론(白馬非馬論)으로 유명하다.

 

명가의 출발은 춘추시대의 鄭의 대부 등석(鄧析)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등석은 자산과 함께 정국의 국정에 임하였으나, 자산이 지은 법령의 자구해석을 둘러싸고 일일이 자산과 다투어 마침내 자산에게 살해당했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자산은 우수한 정치가로서 공자로부터 존경받은 사람이었으나 그 자산에게 논리를 구사하여 등석은 저항하였다. 등석의 저라고 전해지는 「등석자」 가 오늘날 남아 있으나, 그것은 후인이 편집한 것이지 등석이 지은 것은 아니다. 등석에 대해서는 「여씨춘추」 이위편에 설명되어 있다.

명실론은 "묵자"의 귀의편에 있어서 명과 취의 문제를 놓고 명은 개념적 지식, 취는 사실에 즉한 구체적인 식으로 , 취야말로 제일의로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가치관이 변동하는 사회에 있어서 실을 먼저 주시해야 할 것을 말한 것이다. 묵가의 이러한 생각은 바로 묵가 후학의 논리학으로 발전하였다.

 

묵가의 논리학을 해설한 것이 묵자중의 묵경편이다. 묵경은 경상, 경하 및 경설상, 경설하, 대위, 소취의 6편으로 되었고 묵가의 추학에 의하여 기록되었다. 그 중에 공손룡의 궤변을 해설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저작된 시대는 혜시, 공손룡보다 후인 것 같다. 궤변적 논리학은 혜시에서 시작되어 공손룡에 의하여 깊어진 것이지만, 공손룡자에서 보이는 공손룡의 이론-백마는 말이 아니다-등은 얼른 보기에는 별 것 아닌 듯하다. 그렇지만 그 논리의 구성이나 발상 방법이 근대 과학의 수학이나 물리학의 논증방식이나 발상에도 견줄 만하다. 다만 중국에서는 이러한 궤변이 단순한 궤변술에 그치고 말았을 뿐이다.

 

 

6. 병가 兵家

 

춘추전국시대 열국간의 전쟁이 계속 됨에 따라 군사에 관한 사상, 지식, 기술에 관련된 서적이 차츰 나타났다. 그런 저술을 한데 묶어 병가라고 칭한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漢書" 예문지에 기재 되어 있는 "오손자"는 춘추시대의 군사 사상가 손무의 저작이라고 하고 "제손자"는 전국시대의 손빈의 저작이라 한다.

 

병가는 본래부터 군사사상, 군사지식, 군사기술을 논하는 것이지만, 그 사고 방식의 기저에는 법가적이 것이 강하게 내재한다. 예컨대 현존의 "손자"에 있어서 전쟁에 승리를 얻기위한 5개 조건을 "5사"로서 기술하고 있는데 그것은 첫째 도의에 부합해야 하는 것, 둘째 천의 시에 좇을 것, 셋째 땅의 이에 좇아야 할 것, 넷째 우수한 장군을 얻는 것, 다섯째 엄정한 조직, 규율을 가질 것이라 하였다. (計篇) 다섯 번째는 법가의 사상에 통하는 것이다.

 

"손자"에 기록되어 있는 것 중에서 다음 말은 유명하다.

 

'저를 알고 나를 알면 백전이 위태하지 않고 저를 모르고 나만 알뿐이면 일승일패 한다.

저를 알지 못하고 나도 알지 못하면 백전이 다 위태롭다.'(謀攻篇)

 

병가의 현존하는 주요한 책에는『육도(六韜)』와 『오자(吳子)』가 있다.

 

 

7. 농가 農家

 

주례,관자,여씨춘추속의 몇 몇 편에 농업 생산 기술에 대하여 말한 기록이 있다. 사회사상가로 저명한 농가는 허행이다. 허행은 춘추시대의 등-현재 산동성-이라는 나라에 살면서 수십인의 문인에게 농업생산에 의한 자급자족의 생활을 주장하였다.허행의 무리들은 農業神이기도 하고 상고 의 전설적인 제왕이기도 한 神農의 교라고 하는 것을 기치로 삼아 국군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자신의 노동으로써 자신의 생활을 유지할 것을 설파하였다.

 

 

8. 종횡가 縱橫家

 

종횡가라는 거은 변설로써 책략을 열국에 말하여 열국의 연합체를 조직시켜 그 힘의 균형을 이용하여 권력의 쟁탈을 도모하고자 하는 사상가들을 말한다. 그 시조는 귀곡선생이라 한다.

 

귀곡선생은 전국시대 사람인 왕후를 가리킨다. 하남성의 귀곡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귀곡선생이라고 한다. 병가인 손빈도 그 문인이었다는 말이 있으나, 귀곡선생의 문인으로서 가장 저명한 활동가는 소진, 장의, 두 사람이다. 오늘날 「귀곡자鬼谷子」12편이 존재하나 그것이 귀곡선생의 저서라고 하는 확증은 없다. 종횡가의 무리는 책모를 다해 지배자 계층간에 권력 투쟁을 야기시켜 놓고, 그 권력 투쟁을 이용하여 정권을 확보하는 일을 목표로 하였다.

 

 

9. 음양가 陰陽家

 

음양 2원(陰陽二元)과 5행(五行)을 조합하여 신비적인 종교철학을 쌓은 것이 음양가이다. 음양과 5행을 조합하여 한 개의 철학 체계로 만든 것은 제의 추연(騶衍)이라고 한다. 그리고 음양가는 이 추연으로 대표된다.

 

추연의 철학으로 유명한 것은『5덕종시설(五德終始說)』과『적현신주설(赤縣神主說)』이다.

 

 

10. 잡가 雜家

 

제자백가의 제설을 절충 해설하여 집대성한 것이 소위 잡가라는 것이다. 잡가의 대표를 이루는 책으로는『呂氏春秋』가 있다. 이것은 진의 시황제의 사실상의 아비 여불위가 많은 학자를 집합하여 춘추 전국시대의 모든 사상을 절충 통합시키고 세밀하게 설명시켜 정령의 참고서로 한 것이 "여씨 춘추"이다.

26권이 있는데 12紀 8覽.6論으로 나누어 진다. 취급한 학설 중에는 도가의 것이 가장 많고 유, 병, 농, 법가의 설도 섞여 있다. 이것을 "여람(呂覽)"이라고도 한다. 예기의 월령편(月令篇)은 이 12기의 요약이라고 한다.

 

 

11. 기타

 

이외에 강병책(强兵策)으로 손무(孫武), 오기(吳起)가 걸출하였고, 손빈(孫臏), 범려(范蠡)도 유명하였으며, 귀곡자(鬼谷子)에게 배운 소진(蘇秦)과 장의(張儀)는 웅변술로써 합종연형(合縱連衡)을 주장했다. 그리고 자가독선(自家獨善)을 고집한 은자(隱者)들로서 신선도를 닦는 신선가(神仙家) 음양 5행을 논하는 음양가(陰陽家), 방기(方技), 술수(術數)등이 있었다.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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