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大同哲學會논문집
제32집 2005.
老子와 莊子의 문화이론과 미학사상
이 진 오
[요 약 문]
이 글은 노자와 장자의 미학사상을 문화이론과의 연계 속에서 그 원리를 구명하고, 나아가 여기에는 인식의 확장이라는 인식론적 원리가 필수적으로 작용함을 밝혔다.
노자와 장자는 문화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것이 아니라 과잉 문화를 비판하고 최소한의 문화를 제시하였다. 노자와 장자가 파악한 문화의 특징은 분화이다. 무한 분화를 거친 문화는 복잡성을 초래한다. 복잡성은 감각에 대한 복잡하고 강렬한 자극을 유도하여 인간의 마음을 교란시키고 욕망을 부추겨서 감각과 의지를 과도하게 사용함으로써 본성에 따른 삶을 상실하게 한다.
최소한의 문화는 無爲의 태도로 영위되는 소박한 문화이다. 소박한 문화가 인간의 본성을 제대로 발휘하도록 도와주는 힘은 和氣에서 나온다. 소박한 문화는 인간뿐만이 아니라, 만물이 각자 다 자기의 본성을 발휘하도록 하여 마침내 그 본성끼리 상생의 작용을 하는 거대한 화기를 형성함으로써 이 세계의 다양하면서도 조화로운 생태가 이루어진다. 이 다양성은 외형적으로는 서로 다르지만 본질은 동일하다. 따라서 차이는 인정하나 차별은 부정하는 다양성의 원리를 노자와 장자는 말한다.
최소한의 문화는 소박함과 무위, 은근함, 은미함을 강조하고, 때로는 텅빔을 추구한다. 이러한 삶의 방식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인식의 확장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인식의 확장은 과잉 문화에 의해 협소해진 감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근원적 세계에 대한 인식을 열어주고, 이러한 인식은 진정한 본성의 발현을 가능하게 해 준다. 나아가, 이러한 인식의 확장은 삶에 최고 수준의 쾌감을 제공하여 인생을 심미적으로 구현시킨다.
※ 주요어 : 노자, 장자, 문화이론, 미학사상, 심미인식.
1. 머리말
노자와 장자는 동아시아 미학 이론의 중심 사상가이다. 인생과 세계에 대한 감성적 인식의 방법과 원리에 관한 탁월한 이론으로 후대인의 삶과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노자와 장자의 미학 이론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들이 있어왔지만, 이들의 미학 사상을 미학 사상 자체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문화 이론과 관련시켜 논의할 필요가 있다. 노장의 미학 사상은 단순한 심미원리를 넘어서서 인생론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인생론으로서의 미학이론은 예술행위와 같은 제한적 범위에만 작용하지 않고 일상의 삶 전반에 적용되는 원리이다.
일상의 삶 전반은 곧 문화에 의해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 노자와 장자는 자연과 문화의 상호 관련성에 가장 주목했던 사상가였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노자와 장자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발달시킨 문화가 자연의 원리를 어떻게 손상시키는가를 밝혀서 문화를 누리면서도 자연의 원리를 해치지 않는 삶의 원리와 가치를 제시한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노자와 장자는 미학이론을 펼치는 데서도 자연과 문화의 상관성이라는 부분이 문제제기의 출발점이 된다. 이런 특징은 이들의 미학사상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화에 대한 이들의 관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먼저 노자와 장자의 문화에 대한 관점을 검토하기로 한다. 문화가 초래하는 병폐는 무엇이며, 그 대안은 무엇이라고 하였는지를 알아본다. 이어서 이러한 문화 이론이 어떠한 인생론으로 발전하는지를 살핀다. 문화에 대한 비판적 관점과, 그것을 극복하는 대안의 길은 결국은 물질적, 혹은 이념적인 가치에 있지 않고 감성적, 심미적 가치로 귀결된다는 점을 논증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심미적 가치는 반드시 인식의 확장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인식론의 문제를 거론하고자 한다.
장자 사상이 심미적 가치로 귀결된다는 점에 관해 劉绍瑾도 강조한 적이 있다.1) 劉绍瑾은 장자의 미학이 忘으로부터 遊로 도달하는 심미적 과정을 거친다고 하였다. 여기서 ‘見獨’이라는 인식론적인 측면은 지적하긴하고, ‘獨’의 개념을 상대적이 아닌 절대적인 어떤 경지를 터득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상대의 세계를 넘어서 절대 세계에 대한 인식이라는 정도의 개념이며, 劉绍瑾은 이를 ‘직각주의’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표현하는 정도에 그쳤다. 감각을 경유하여 대상에 대한 주관적 판단을 형성하는 인식론의 원리를 밝히는 것이 필요하며, ‘직각’이 이루어지는 과정, 직각에 의해 파악하는 확장된 인식의 지평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일이 필요하다.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노자와 장자의 미학사상이 문화이론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 전개되었다는 점과, 인식의 확장이라는 인식론적 원리에 바탕해서 심미적 가치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1) 劉绍瑾, 『莊子與中国美学』, 廣东高等教育出版社, 廣州1989.
2. 노자와 장자의 문화 이론
가. 과잉 문화에 대한 비판
사람들은 보통 현재의 상태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그 부족함을 채우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노자와 장자는 사람들이 현재에 만족할 줄 모르고 자꾸 노력해서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하는 바람에 오히려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을 가지게 되어 문제가 발생한다고 하였다. 모자람이 문제가 아니라 지나침이 문제라는 것이다. 노자와 장자는 단순히 知足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고, 사실은 ‘균형’을 강조하였다.
"균형이 복이 되고, 남으면 해가 된다. 물질이란 다 그런 것이지만, 재물은 더욱 심한 것이다.2)"
2)『莊子』 「盜拓」, “平爲福 有餘爲害者 物莫不然 而財其甚者也.”
여기서 균형이란 곧 적절함이다. 적절함을 넘어서는 ‘과잉’은 도리어 해가 된다는 말이다. 인간에게 적절한 정도는 얼마만큼을 의미할까? 노자와 장자는 생존을 영위할 만큼의 아주 조금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는 입장이
다. 이에 대해서는 다시 논하기로 하고, 우선 여기서는 ‘과잉’에 대해 경계하는 노장의 관점을 일단 확인해 둔다.
노자와 장자는 인간의 문명화를 비판하였으나, 인간이 완전히 동물처럼 야생의 상태에서 살기를 원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지혜를 발휘하여 집을 짓고 옷을 입고 경작하여 먹는 일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노자와 장자의 문화 비판은 문화의 부정이 아니라, 적절함을 넘어서는 과잉 문화에 대한 비판이다. 노자가 생각한 적절한 문화 수준은 어느 정도였을까?
"조그마한 나라에 적은 백성으로 여러 도구들을 쓰지 않고 백성들이 죽음을 중히 여겨 멀리 옮겨다니지 않게 한다.
비록 배나 수레가 있더라도 탈 일이 없고 병기가 있더라도 포진할 일이 없다. 사람들이 다시 새끼를 매어 수를 표시하게 한다.
그 음식을 달게 여기고 그 옷을 아름답게 여기며 그 풍속을 즐겁게 여겨 이웃 나라가 서로 바라보아 닭과 개 울음 소리까지 서로 들릴 정도가 되어도 백성들이 늙어죽도록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3)"
3) 『老子』 제80장,
“小國寡民 使有什佰人之器而不用 使民重死而不遠徙
雖有舟輿 無所乘之 雖有甲兵 無所陳之 使人復結繩而用之
甘其食 美其服 安其居 樂其俗 隣國相望 鷄犬之聲相聞 民至老死不相往來.”
이와 같은 언급은 『장자』에도 그대로 거듭 나온다. 그러면 문화의 과도함은 어떠한 것을 말하며, 과도한 문화는 어떠한 폐해를 낳는가? 먼저, 시대의 타락과 과잉 문화의 출현 과정을 설명한 부분을 보자.
"옛날 사람들은 온통 뒤섞인 속에 있어서 세상과 더불어 무한히 맑았다.
이 시대에는 음과 양이 조화롭고 고요하며, 귀신이 설치지 않고 사계절이 분명하고 만물이 손상되지 않아 모든 생명이 제 수명대로 살았고, 사람은 지식이 있어도 쓸곳이 없었으니, 이를 일러 ‘하나에 이르렀다〔至一〕'고 한다. 이 시대에는 애써 행하지 않아도 항상 자연스레 이루어졌다.
덕이 쇠락하여 수인씨와 복희씨가 천하를 다스리자 순조롭지만 하나가 되지 못하였고,
덕이 다시 쇠락하여 神農氏와 黃帝가 천하를 다스리자 편안하지만 순조롭지 않게 되었고,
덕이 다시 쇠락하여 요순이 천하를 다스리자 정치나 교화와 같은 것을 일으켜 순박함을 흩어버렸고,
선 때문에 도를 떠나고 행실 때문에 덕을 거칠게 하였다.
그런 다음에 性이 사라지고 心을 따르게 되니 心과 心이 서로 알아채어 천하를 안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 뒤로는 무늬를 덧붙이고 잡다한 것을 보태니 무늬는 바탕을 소멸시키고 잡다함은 마음을 빠트리게 하였다. 그 뒤로는 백성들이 미혹하고 혼란하게 되어 그 성정을 돌이켜서 처음의 상태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다.4)"
4) 『莊子』 「繕性」,
“古之人在混芒之中 與一世而得淡漠焉.
當是時也, 陰陽和靜鬼神不擾 四時得節 萬物不傷
群生不夭 人雖有知 無所用之, 此之謂至一. 當是時也 莫之爲而常自然.
逮德下衰 及燧人伏羲始爲天下 是故順而不一,
德又下衰 及神農黃帝始爲天下 是故安而不順,
德又下衰 及唐虞始爲天下 興治化之流 梟淳散朴
離道以善 險德以行.
然後去性而從于心 心與心識知 而不足以定天下.
然後附之以文 益之以博 文滅質 博溺心.
然後民始惑亂 無以反其性情而復其初.”
본성의 자연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임에도 불구하고, 덕이 쇠퇴하여 본성의 원리를 자꾸 어기다 보니 세상을 안정시킬 정치를 고민하게 되고, 그 결과 장식을 더하고[文] 복잡하게[博] 하여 마침내 세상에 더 큰 혼란을 초래하게 되었다고 비판하였다.
하나가 되는 경지를 최고로 보았고, 그 다음은 순조로움, 그 다음은 편안함, 그 다음은 순박함이 이상적인 사회의 요건이라고 보았다. 타락한 사회에서는 만물의 본성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고 들뜬 心의 작용에 휘말리게 되어 잡다한 장식과 지식을 확대재생산하고, 이러한 心은 비슷한 지경에 떨어진 다른 心과 교감, 상승작용하여 복잡하고 혼란한 세상을 초래하고 말았다고 당시의 사회를 비판하였다.
2천 3백 년 전의 사회가 그렇게 비판의 대상이 될 정도로 타락하였다면 지금의 세상을 장자가 보았다면 뭐라고 하였을까?
‘文化’란 바로 문양을 복잡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자연에는 없던 새로운 문양을 끝없이 창조해 온 과정이 문화의 역사이다. 집을 짓고, 성곽을 쌓고, 길을 닦고, 옷을 해 입고 하는 모든 일들이 원래는 없던 새로운 문양을 창조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문화적 행위에 대해 장자는 인간의 본성을 타락시키고 자연의 조화로운 생명 에너지를 손상시키는 길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장자가 본 문화의 폐해는 바로 ‘지나침’이다. 모든 행위를 지나치게 행함으로써 무리하게 되고, 무리함은 사람
의 마음을 과도하게 사용하여 본래의 자기 본성을 도리어 은폐시키어 비본질적인 요소가 본질적인 요소를 압도하는 전도현상이 발생한다고 본 것이다. ‘본성’의 상실은 장자가 가장 힘주어 비판하는 사항이다.
문화를 ‘지나침’의 원리로 보아 비판한 장자는 ‘騈拇論’을 통해 비유적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5)
즉, 엄지발가락과 둘째 발가락 사이에 불필요한 살이 돋아 있어서 두 발가락이 붙어있다든지, 엄지 손가락 곁에 손가락이 하나 더 나와 있다든지 하는 일들은 모두 ‘필요 이상의 지나침’으로서 없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문화적 노력들도 마치 이와같다고 장자는 보았다. 문화의 양식으로 표출되는 필요 이상의 노력은 자연의 삶을 방해하고 타고난 본성을 해치게 된다고 하였다.
‘필요 이상의 지나침’은 감각의 층위에서 시작하여 心를 교란시키고 궁극적으로는 性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장자는 보았다. 성의 손상은 결국은 생명력의 손상을 초래한다.
"性을 상실하게 하는 요인이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다섯 가지 색상이 눈을 어지럽게 하여 눈을 어둡게 한다.
둘째는 다섯 가지 소리가 귀를 어지럽게 하여 귀를 어둡게 한다.
셋째는 다섯 가지 냄새가 코를 찔러 골치가 아프게 한다.
넷째는 다섯 가지 맛이 입을 혼탁하게 한다.
다섯째는 취사선택하는 행위가 마음을 교란시켜 性을 불안정하게 한다.
이 모두가 생명에 해가 되는 것이다.6)"
6) 『莊子』 「天地」,
“且夫失性有五.
一曰五色亂 目使目不明.
二曰五聲亂 耳使耳不聰.
三曰五臭熏 鼻困惾中顙.
四曰五味濁 口使口厲爽.
五曰趣舍滑 心使性飛揚.
此五者皆生之害也.”
지나치게 눈이 밝거나, 지나치게 잘 듣거나 하면 보고 듣는 것이 까다롭게 되고, 그렇게 되면 신경을 많이 쓰고, 따라서 비용도 많이 들게 마련이다. 이러한 이들이 결과적으로 문화를 발달시키기도 하지만 인간의 본성을 상하게 하고, 궁극적으로는 생명력을 손상시킨다고 하였다. 생명에너지의 조화롭고 원만한 발현을 건강한 삶으로 본 장자로서는 생명력의 손상을 초래하는 ‘과잉 노력’ 내지는 ‘과잉 문화’가 인간의 행복을 오히려 저해한다고 본 것이다.
노자와 장자는 감각을 지나치게 사용함으로써 의식에 혼란이 발생하고, 그 결과 타고난 본성대로 살지 못하고 대상의 자극에 이끌려 살게 된다고 거듭 경계하고 있다.
그러면, 여러 감각적 요소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경쟁에 있다고 하였다.
장자는 달팽이 뿔 위에서 두 나라가 처절한 전쟁을 벌인다는 蝸牛角上之爭의 우화를 통해 작은 이익을 두고 처절한 싸움을 벌이는 인간의 행태를 풍자하였고,7) 노자도 다툼 없이 낮은 곳으로만 흘러 온 세상 가지 못하는 곳이 없이 나아가 생명의 힘을 제공하는 물에 비유하여 다툼을 경계하고 있다.8)
7) 『莊子』 「則陽」.
8) 『老子』 제8장,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老子』 제68장, “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 以其善下之 故能爲百谷王. 是以欲上民 必以言下之, 欲先民 必以身後之. 是以聖人處上而民不重 處前而民不害. 是以天下樂推而不厭, 以其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
다투기 때문에 정신과 신체를 과도하게 사용하고, 과도한 사용은 휴식없는 생활을 강요한다.
"영예와 모욕이 형성되면 병든 모습을 보게 되고, 재화가 모이면 다투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제 사람들이 병들게 하는 것을 형성하고 사람들이 다투는 것을 모아 사람의 몸을 곤궁하게 하여 쉴 때가 없게 만든다.9)"
9) 『莊子』 「則陽」,
“榮辱立 然後覩所病. 貨財聚 然後覩所爭.
今立人之所病 聚人之所爭 窮困人之身 使無休時.”
성과에 따라 보상을 차등화하고 금전으로 욕망을 자극하여 경쟁시킴으로써 인간은 휴식할 줄 모르고 노력해야 한다. 평가와 돈이 결합하여 끝없는 경쟁을 낳고, 경쟁은 휴식 없는 고단한 삶을 낳는 과정을 이미 이천년도 더 전에 간파하였다.
나. 과잉 문화에 대한 대안 문화
시비와 우열을 차별하려는 자세는 문화를 정화시키고 관점을 전환함으로써 바로잡을 수 있다. 감각을 부추기고 교란시키는 문화는 소박함으로 되돌림으로써 정화할 수 있다. ‘되돌린다’고 하는 것은 과거에 한때 건강한 문화를 누렸으나 그 이후로 과도함의 길로 내달려왔음을 의미한다. 『노자』나 『장자』에서 상고시대를 이상으로 삼는 표현이 거듭 나온다. 일종의 尙古主義라고 할 수 있다. 인류의 과거는 아름다왔지만 갈수록 타락의
길을 걸어왔다고 보는 것이다.
타락한 시대를 바로잡는 약은 무엇인가? 노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도는 항상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못함이 없다.
임금이 이를 능히 지킨다면 만물이 장차 저절로 변화되리라.
변화하는 것을 애써 이루려 한다면 나는 無名의 순박함으로써 그것을 못하게 하리라.
無名의 순박함으로 하면서도 또한 욕심조차 없으리니, 욕심 없이 고요하면 천하가 저절로 안정되리라.10)"
10) 『老子』제37장,
“道常無爲而無不爲.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無名之樸 夫亦將無欲, 不欲以靜 天下將自定.”
이 글에서 노자는 無爲와 無欲과 소박을 말하였다. 자연의 변화에 맡기지 않고 무리하게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이루려고 애를 쓰는 일이 있다면 ‘無名의 순박함’으로 치료하겠다고 하였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혹은 일을 내세우지 않는 무형의 작용 속에서 치유하겠다고 하였다. 그 무형의 힘은 바로 순박함에서 나온다. 어떤 형식과 명칭과 명분을 앞세우지 않는 어떤 힘을 구사하겠노라는 뜻이다. 여기서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는 노력’은 바로 타락한 문화의 모습이다. 그것을 원시적 생명력인 소박함으로 이겨나겠다는 것이다.
노자와 마찬가지로 장자도 소박을 문화의 이상이자 타락한 문화의 치유책으로 거듭 제시하였다.
"내 생각에 천하를 잘 다스리는 자는 그렇지 않으니,
저 백성들이 일정한 본성을 지녀서 옷을 짜서 입고 밭을 갈아 밥을 먹으니 이를 일러 ‘같은 덕[同德]’이라고 한다.
하나이면서 무리짓지 않으니 ‘하늘을 닯았다[天放]’고 한다.
그래서 덕이 지극한 시대에는 그 행실은 조용하고 그 보는 것은 전일하였다.
이 시대에는 산에는 오솔길이 없고 못에는 배나 다리가 없었다. 만물은 떼를 지어 살고, 마을은 나라의 경계 없이 연이어져 있으며, 금수가 무리를 이루고 초목이 잘 자랐다.
이로 인하여 금수가 서로 얽혀 노닐고, 나무를 타고 올라 새들의 보금자리를 살펴볼 수 있었다.
덕이 지극한 시대에는 금수와 함께 살고 만물과 어울렸으니 어찌 군자니 소인이니 하는 구분을 알겠는가.
다같이 무지하여 그 덕이 떠나지 않았고, 함께 무욕하였으니 이를 일러 소박이라 한다.
소박함으로써 백성이 본성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었다.11)"
11) 『莊子』 「馬蹄」,
“吾意善治天下者不然,
彼民有常性 織而衣 耕而食 是謂同德.
一而不黨 命曰天放.
故至德之世 其行塡塡 其視顚顚.
當是時也 山無蹊隧 澤無舟梁, 萬物群生 連屬其鄕, 禽獸成群 草木遂長.
是故禽獸可係羈而游 鳥鵲之巢 可攀援而闚.
夫至德之世 同與禽獸居 族與萬物幷 惡乎知君子小人哉!
同乎無知 其德不離, 同乎無欲 是謂素朴.
素朴而民性得矣.”
소박함은 세상 만사를 자연의 원리대로 원만하고 조화롭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바탕이 된다. 사람이 타고난 본성의 어그러짐이 없이 진정한 건강성을 얻게 되고, 사람 뿐만 아니라 다른 동식물과 만물이 다 타고난 본성을 발휘하도록 한다. 여기에 생태적 사고가 있다. 노장이 생각하는 생태적 사고는 사람과 만물이 타고난 본성을 제대로 발휘하여 대조화의 세계를 이루는 것이다. 소박에 의해 성취하는 문화는 和氣가 충만한 문화이다.
노장에서 和는 타고난 생명력이며 세상 만물의 원초적 에너지이기도 하다. 각각의 사물이 타고난 생명에너지를 상생의 원리로 발휘할 수 있는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이다. 위에서 ‘백성이 타고난 본성을 제대로 발휘한
다[民性得矣]’는 표현이 바로 이를 말한다.
和는 노장의 철학에서 핵심적인 개념이다. 만물이 살아 숨쉬는 생명으로 존재할 수 있는 원천적인 힘이 和에서 나온다.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을 업고 양을 껴안아 텅빈 기운으로써 和가 된다.12)"
12) 『老子』 제42장,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두터이 머금은 덕은 어린아이와 같다.
전갈이나 독사가 물지 않고 사나운 짐승도 덤비지 않는다.
근골은 유약하나 주먹을 쥐는 것은 단단하고,
남녀의 교합을 알지 못하면서도 생식기가 발기하니 정기의 지극함이다.
종일토록 울어도 목이 쉬지 않으니 和의 지극함이다.13)"
13) 『老子』 제55장,
“含德之厚 比於赤子.
蜂蠆虺蛇不螫 攫鳥猛獸不搏.
骨弱筋柔而握固,
未知牝牡之合而脧作精之至也.
終日號而不嗄和之至也.”
"옛날에 도를 다스리는 자는 고요함으로써 지혜를 길렀다.
지혜가 생기더라도 지혜를 사용하지는 않았으므로 이를 일러 지혜로써 고요함을 기른다고 한다.
지혜와 고요함이 서로를 길러 그 본성으로부터 和의 이치가 나온다.14)"
14)『莊子』 「繕性」,
“古之治道者 以恬養知.
知生而無以知爲也 謂之以知養恬.
知與恬交相養 而和理出其性.”
분화의 길을 걸어온 문화에 대해 구분하고 차별하는 의식을 극복함으로써 근원적이면서도 통괄적인 원리를 알게 되며, 이에 따라 생명의 원리인 和의 원리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和의 원리와 힘은 상호 우열, 모순 관계를 평등하게 보아 상생작용으로 나아갈 때 생겨난다. 만물은 서로 나뉘어져 존재하지만, 시비와 우열에 의한 구분과 차별 의식으로 흐르면 화기를 상실하게 된다.
문화에 있어서 이 관점을 적용하면 문화는 복잡다단하게 분화, 발달해 왔지만 문화의 분화와 차이를 평등하게 볼 줄 알아야 화기를 살릴 수 있다. 여기서 和의 원리가 다양성을 부정하고 하나로 통일, 혹은 통합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차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본질적으로는 하나임을 알아야 하며, 서로 나뉘어져 있으면서 평등한 관계로 상호 작용할 때 생명력이 발휘됨을 알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신명을 수고시켜 하나로 통일시키면서도 그것이 원래 같은 줄은 모른다. 이것을 ‘朝三’이라 한다.
무엇을 ‘조삼’이라 하는가? 원숭이를 키우는 사람이 도토리를 주면서 말하기를,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라고 하니 원숭이들이 모두 화를 내므로, 다시 말하기를, “그렇다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라고 하니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이름과 실제가 어그러짐이 없는데도 기쁨이나 노여움을 사용하니, 또한 대긍정을 따를 뿐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옳고 그름을 조화시켜 天鈞에서 휴식하니, 이를 일러 ‘兩行’이라 한다.15)"
15) 『莊子』 「齊物論」,
“努神明爲一 而不知其同也. 謂之朝三.
何謂朝三? 狙公賦芧曰, 朝三而暮四,衆狙皆怒, 曰, 然則朝四而暮三, 衆狙皆悅.
名實未虧而喜怒爲用 亦因是也.
是以聖人和之以是非 而休乎天鈞, 是之謂兩行.”
朝三暮四라는 고사의 의미는 도토리를 아침에 셋, 저녁에 넷을 주나,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나 결국 하루 일곱을 주기는 마찬가지인데 아침에 셋, 저녁에 넷을 주려고 하니 화를 내고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려고 하니 만족해 했다는 원숭이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였다. 사람들이 시비와 우열에 대해 우왕좌왕 안달을 하지만 알고 보면 별 차이가 없음을 지적하고 사물을 평등하게 대하기를 권유하는 말이다.
천균은 만물을 빚어내는 자연의 창조력을 말한다. 균은 원래 질그릇을 빚을 때 쓰는 물레로서, 여기에 진흙덩이를 올려 다양한 형태의 그릇을 만든다. 수없이 다양한 형태의 그릇은 제각각 구실이 있게 마련이며, 여기에 옳고 그름이 있을 수는 없다. 이처럼 이 세상의 모든 사물도 제각각의 존재의의를 가지므로 시비우열을 가릴 수는 없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장자는 ‘제물론’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사물의 평등함, 내지는 하나임을 거듭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물을 무조건 하나로만 보아서는 안된다. 현상의 세계에서 다양한 분화와 개성은 불가피하지만, 그 본질은 하나이니 우열을 두고 차별을 하며 희노애락에 빠져들 필요가 없음을 강조한 이론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다르면서 같다’는 이론이다. 같다고 해서 다름을 부정하지 않고, 다르다고 해서 같음을 잊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3. 대안문화론의 심미적 의의
가. 대안문화론의 심미적 양상
과잉문화는 인간의 삶을 고단하게 할 뿐 진정한 재미를 느끼지 못하게 한다. 그 문화적 대안으로 소박함으로 和氣의 생명력을 충분히 발휘하게 하고, 동시에 사물과 문화를 시비,우열을 넘어서서 차이와 동일성을 동시
에 인정할 수 있어야 함을 위에서 고찰하였다.
그러면, 화기를 발현하고 차이와 동일성을 동시에 인정함으로써 얻는 궁극적 도달점은 무엇인가?
노자와 장자는 이 궁극적 도달점을 심미적 경지로 설명하였다. 그 심미적 경지란 진정한 즐거움이며, 최고의 즐거움이다. 현실적 욕망에 의해 성취하는 즐거움보다 더 크고 진정한 즐거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심미적이
다.
"남월에 한 고을이 있어 건덕이라고 한다.
그 곳의 백성은 소박하고 이기심이 없으며 욕심이 적다.
경작은 하여도 저장하지 않고, 주고 나면 그 보답을 바라지 않으며,
무엇이 의로운 것인지, 무엇이 예를 행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그저 내키는대로 행동하여도 도에 맞다.
살아서는 인생을 즐기고, 죽어서는 조용히 사라진다.16)"
16) ꡔ莊子ꡕ 「山木」,
“南越有邑焉 名爲建德之國.
其民愚而朴 少私而寡欲.
知作而不知藏, 與而不求其報,
不知義之所適, 不知禮之所將 猖狂妄行 乃蹈乎大方.
其生可樂, 其死可藏.”
소박하고 이기심 없고 욕심 없는 삶 대신에 얻는 반대급부는 무엇인가? 여기서 제시한 대안으로서의 삶은 바로 즐기는 삶이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살아 있는 동안 즐겁게 지내기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한 즐거움은 역시 무위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삶이다.
"지금 세속에서 행하는 것과 즐거워하는 것에 대해 나는 과연 그 즐거움이 과연 진정한 즐거움인지 아닌지를 알지 못하겠다.
내가 세속에서 즐겁다고 하는 것을 보건대, 모두가 무리를 지어 내달리는 것이 마치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듯이 몰두하지만, 나는 모두가 말하는 그 즐거움이란 것이 과연 진정한 즐거움인지 아닌지를 알지 못하겠다. 과연 즐거움이란 존재하지 않는가!
나는 無爲야말로 진정한 즐거움이라 생각하지만, 세속에서는 이것을 큰 고통으로 여긴다.
그래서 말하기를, ‘지극한 즐거움이 즐겁지 않고, 지극한 명예는 명예롭지 않다’라 한다.
천하의 옳고 그름이란 결정할 수가 없는 일이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옳고 그름을 이처럼 결정할 수가 있기도 하다. 지극한 즐거움은 몸을 살아있게 하니, 오직 無爲에 의해 가능할 수 있다.17)"
17) 『莊子』 「至樂」,
“今俗之所爲與其所樂 吾又未知樂之果樂邪果不樂邪.
吾觀夫俗之所樂 擧群趣者誙誙然如將不得已 而皆曰樂者 吾未知之樂也 亦未知之不樂也 果有樂无有哉!
吾以无爲誠樂矣 又俗之所大苦也
故曰, 至樂无樂 至譽无譽
天下是非果未可定也
雖然爲可以定是非 至樂活身 唯无爲幾存.”
세상 사람들이 다투어 달려가서 즐겁게 여기는 곳은 부귀와 장수와 도덕이다. 그러나 장자는 여기에 과연 진정한 즐거움이 있는가 하고 의문을 제시한다. 반면에 몸을 살아있게 할 지극한 즐거움은 바로 무위에 있다고 하였다. 무위에 왜 진정한 즐거움, 최고의 즐거움이 있는가?
"하늘은 무위로써 맑고, 땅은 무위로서 평안하다.
그래서 두 무위가 서로 합하여 만물이 저절로 변화하며 살아간다.
희미하고 어두워서 어디로부터 나오는지도 알 수 없네!
희미하고 어두워서 어떤 형상도 없구나!
만물이 번성하는 것은 모두 無로부터 자라난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천지는 무위이면서도 해 내지 못함이 없다”라고 한다.
사람으로서 누가 과연 무위를 할 수 있을 것인가!18)"
18) 『莊子』 「至樂」,
“天无爲以之淸, 地无爲以之寧.
故兩无爲相合 萬物皆化生.
芒乎芴乎 而无從出乎!
芴乎芒乎 而无有象乎!
萬物職職 皆從无爲殖
故曰 天地无爲也而无不爲也
人也孰能得无爲哉
무위에는 하늘과 땅의 덕을 통합하는 공능이 있어서 만물을 살리는 작용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작용은 분명히 존재하기는 하나 형상이 없어서 그 모습과 과정을 인지할 수는 없다. 인간의 감각 범위 너머의 어떤 작용으로 무궁무진한 생성작용을 하여 삼라만상의 이 복잡한 현상계를 연출해 낸다는 의미이다.
무위는 결과적으로 소박의 문화를 이끌고, 소박의 문화는 더 큰 즐거움, 더 진정한 행복으로 이끈다는 것이 장자의 생각이다. 물질적 욕망, 사회적 욕망은 부추겨진 욕망일 뿐이며, 내재적 본성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고 장자는 보았다. 대신에 장자는 원래부터 타고난 본성으로서의 욕망-생명력-을 무위의 태도로 자연스럽게 발휘하며 사는 것이 건강하고 아름다운 삶이라고 보았다.
"대저 텅빔과 맑음과 적막함과 무위는 만물의 근본이다.
이 이치를 밝혀서 요는 임금이 될 수 있었고, 이 이치를 밝혀서 순은 신하가 될 수 있었다.
이 이치로 윗자리에 있으면 제왕의 덕이 되고, 이 이치로 아랫자리에 있으면 이름 없는 성자의 도가 된다.
이 이치를 가지고 은거를 하면 재야의 여러 인사들이 복종하고, 이 이치를 가지고 나서서 세상을 구제하면 공명이 크게 드러나서 천하가 하나로 된다.
가만히 있으면 성인이 되고 움직이면 왕이 된다.
무위이면서도 존귀하고, 소박하면서도 이 세상에서 그 아름다움을 다툴 이 없다.19)"
19) 『莊子』 「天道」,
“虛靜恬淡寂漠无爲者 萬物之本也.
明此以南鄕 堯之爲君也, 明此以北面,舜之爲臣也.
以此處上 帝王天子之德也, 以此處下 玄聖素王之道也.
以此退居而閒游 則江海山林之士服, 以此進爲而撫世 則功大名顯而天下一也.
靜而聖 動而王.
无爲也而尊, 樸素而天下莫能與之爭美.”
텅빔과 맑음과 적막과 무위의 덕은 어떤 지위, 어떤 상황에서도 거룩한 덕을 발휘하므로 궁극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결론지었다. 텅빔, 맑음, 적막, 무위는 다시 무위와 소박으로 요약된다. 무위와 소박의 문화야말로 장자가 이상으로 생각했던 문화의 모습이며, 최고의 아름다움이었다.
아름다움에도 수준의 차이가 있다. 장자는 요와 순의 대화를 가설하여 최고의 아름다움[大美]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예전에 순이 요에게 물었다.
“임금의 마음씀씀이는 어떠합니까?”
요가 말하였다
“나는 하소연할 데 없는 불쌍한 백성을 업신여기지 않고, 곤궁한 백성을 내버리지 않고, 죽은 자를 애도하고, 어린 아이를 이뻐하고, 부녀자를 어여삐 여긴다.
이것이 내가 마음을 쓰는 방법이다.”
순이 말하였다.
“아름답긴 아름답습니다만, 대단하지는 않습니다.”
요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순이 말하였다.
“하늘의 덕이 있으면 땅이 평안할 것입니다. 해와 달은 비추기만 하여도 사계절이 운행하니, 마치 밤낮이 일정한 법칙대로 바뀌면 구름이 흐르고 비가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요가 말하였다.
“요란하기만 하였도다! 그대는 하늘과 합치하고 나는 사람과 합치했을 뿐이구나.”
대저 천지란 예부터 중대히 여긴 것이어서 黃帝와 요,순이 모두 아름답게 여겼다. 그래서 옛날의 왕들이 어떻게 하였던가? 천지일 따름이었다.20)"
20) 『莊子』 「天道」
“昔者舜問於堯曰, 天王之用心何如?
堯曰, 吾不敖無告 不廢窮民 苦死者 嘉孺子而哀婦人.
此吾所以用心已.
舜曰, 美則美矣而未大也.
堯曰, 然則何如?
舜曰, 天德而土寧 日月照而四時行, 若晝夜之有經 雲行而雨施矣.
堯曰, 膠膠擾擾乎! 子天之合也, 我人之合也.
夫天地者 古之所大也 而黃帝堯舜之所共美也. 故古之王天下者 奚爲哉? 天地而已矣.”
장자의 일관된 논조대로, 장자는 인위적인 정치나 백성에 대한 사랑은 작은 아름다움에 지나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큰 덕은 나서서 챙기거나 조처하지 않아도 절로 이루고 운행시키는 은연 중의 작용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천지라고 하는 큰 범위에서 기본적인 여건이 마련되면 작은 부분에 굳이 신경을 안 써도 된다는 것이다. 큰 바탕의 원리를 중시하는 장자의 생각이 그대로 반영된 이론이다. 근원적인 요소, 전체적인 원리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장자의 심미적 관점이 여기에 나타나 있다.
장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문화는 무위와 소박의 문화이며, 세계를 차별시하지 않고 다양성 속에서 동일한 본질을 느낀다. 무위와 소박에 의해서 최고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며, 그 즐거움은 자기 주변의 좁은 세계에서 발견하는 즐거움이 아니라, 천지라고 하는 큰 세계를 느끼고, 품고,하나되는 그런 경지에서 느끼는 최고의 즐거움이며, 이 즐거움은 최고의 아름다움이라는 심미적 판단과 함께 이루어진다.
나. 대안문화론의 심미적 인식 원리
무위와 소박의 문화는 더 큰 세계, 즉 천지와의 만남을 통해 최고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길을 열어준다는 원리는 세속적 이익을 상당 부분 포기함으로써 더 많은 이익-세속적 이익이 아닌 진정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이치를 말한다. 세속적 이익의 포기는 심미적 인식의 세계를 새롭게 열어주고, 심미적 인식은 진정한, 그리고 무한한 즐거움의 경지로 이어진다는 논리이다.
그러면, 장자의 문화이론에서 심미적 인식의 원리는 무엇인지 알아보자.
"삶은 죽음의 연속이고 죽음은 삶의 시작이다. 누가 그러한 이치를 아랴!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기의 모임이다. 모이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만약 죽음과 삶이 이렇게 연속되는 것이라면 내가 또 무엇을 근심하랴!
그러므로 만물은 하나이다. 아름답게 여기는 것은 神奇한 것이고, 나쁘게 여기는 것은 냄새나고 썩은 것이다. 냄새나고 썩은 것이 다시 바뀌어 신기한 것으로 되고, 신기한 것은 다시 냄새 나고 썩은 것으로 변한다.
그래서 말하기를, “천하를 통털어 하나의 기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성인은 하나를 중시하는 것이다.
21)"
21) 『莊子』 「知北遊」,
“生也死之徒 死也生之始 孰知其紀!
人之生 氣之聚也. 聚則爲生 散則爲死.
若死生爲徒 吾又何患!
故萬物一也. 是其所美者爲神奇, 其所惡者爲臭腐.
臭腐復化爲神奇, 神奇復化爲臭腐.
故曰, 通天下一氣耳. 聖人故貴一.”
세상에서는 神奇함을 미라고 하고 부패함을 추라고 하지만 신기와 부패는 순환의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사실은 하나다. 마치 기일원론과 같은 논리이다. 여기서는 세속적 심미관을 비판하였다. 이분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사이에서 취사선택과 이에 따른 희노애락에 소중한 생의 에너지를 낭비하는 세태를 지적한 내용이다. 그러면, 장자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란 어떤 것인가?
"천지에 큰 아름다움이 있건만 말을 하지 않고, 사철은 분명한 법칙이 있어도 논의하지 않으며, 만물은 이루어지는 이치가 있어도 설명하지 않는다.
성인이란 존재는 천지의 아름다움을 찾아내어 만물의 이치에 통달하는 자이다.
그래서 至人은 함이 없고[無爲], 성인은 조작하지 않으니, 천지를 살핀다는 말이다.22)
22) 『莊子』 「知北遊」,
“天地有大美而不言 四時有明法而不議 萬物有成理而不說.
聖人者 原天地之美而達萬物之理.
是故至人无爲 大聖不作 觀於天地之謂也.”
만물의 근본적인 이치와 순행 법칙은 내세움 없이 묵묵히 그 작용을 다할 뿐이다. 그 모든 작용이야말로 큰 아름다움[大美]이다. 잘나고 위대한 티를 전혀 내지 않으면서도 이 엄청난 작용을 해 내는 자연의 힘과 그 법칙이야말로 진정한, 그리고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장자에게 인식되고 있다. 그러면, 그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치부되는 천지의 존재 방식은 어떠한 내용인가?
"저 신명은 지극히 정미하여 백 가지로 변화한다.
만물은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고, 모나기도 하고, 둥글기도 하여 그 근본을 알 수가 없으나, 두루 만물은 예로
부터 그렇게 존재해 왔다.
천지사방이 거대하나 그 품을 떠날 수 없고, 가을 터럭은 작으나 그것을 만나서야 형체를 이루게 된다.
천하가 부침의 변동을 겪어도 끝내 낡지 않고, 음양과 사계절은 운행하여 각각 그 차례를 얻는다.
어슴프레하여 있는 듯 없는 듯하며, 형체가 없으면서도 신묘한 기운이 넘쳐나니, 만물이 이 힘과 이치에 의해 길러지면서도 알지를 못한다. 이를 일러 근본이라 하니, 이러한 이치를 하늘에서 살필 수 있다.23)"
23) 『莊子』 「知北遊」,
“合彼神明至精 與彼百化.
物已死生方圓 莫知其根也, 扁然而萬物自古以固存.
六合爲巨 未離其內, 秋毫爲小 待之成體.
天下莫不沈浮 終身不故, 陰陽四時運行 各得其序.
惛然若亡而存, 油然不形而神, 萬物畜而不知. 此之謂本根, 可以觀於天矣.”
천지에 충만한 근본의 어떤 기운, 그것은 만물이 존재하고 변화하여 생태를 형성하는 거대한 힘이며 원리이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이 존재하긴 하지만 쉽게 지각되지 않는다. 있는 듯 없는 듯하다. 위대한 인간은 바로 이것을 살펴서 알 수 있는 자이다. 그러면, 그 근본의 세계, 하나의 세계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장자는 감각의 자극과 욕망의 부추겨짐에 의해 살아가는 세속적 삶의 방식으로는 그 세계를 발견할 수 없다고 하였다. 세속적 삶의 방식으로 파악하는 세계는 형과 색을 통해 인식하는 세계이다. 장자는 형과 색을 통해서는 사물의 본질을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세상에서 도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글이지만, 글이란 말에 지나지 않으니 말에 귀함이 있는 셈이다.
말이 귀하게 여기는 것은 뜻이다. 뜻은 따르는 곳이 있는데, 뜻이 따르는 것을 말로 전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세상에서는 말을 귀하게 여겨 글을 전한다.
세상에서 비록 그것을 귀하여 여기더라도 나는 족히 귀하지 않다고 여기니, 그 귀함이 그 귀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아서 보이는 것은 형태와 빛깔이며, 들어서 들리는 것은 이름과 소리이다.
슬프도다! 세상 사람들은 형태와 빛깔과 이름과 소리로 그것의 실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저 형태와 빛깔과 이름과 소리로는 그것의 실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는 것인데, 세상에서 어찌 그것을 알겠는가!24)"
24) 『莊子』 「天道」,
“世之所貴道者書也 書不過語語有貴也.
語之所貴者意也. 意有所隨, 意之所隨者 不可以言傳也,
而世因貴言傳書.
世雖貴之 我猶不足貴也, 爲其貴非其貴也. 故視而可見者 形與色也, 聽而可聞者 名與聲也.
悲夫! 世人以形色名聲爲足以得彼之情.
夫形色名聲果不足以得彼之情 則知者不言 言者不知 而世豈識之哉!”
진리는 말이나 글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감각의 대상인 형태와 빛깔, 이름과 소리로는 사물의 실체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아는대로 보기도 하지만, 보이는 대로 알 수밖에 없는 측면도 있다.
장자는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기만 해서는 사물의 실체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 진리는 완전한 무형의 존재인가? 완전한 무형이라면 그것은 공허한 무일 뿐이다. 진리가 공허한 무일 뿐이라면 진리를 논의할 필요가 없다. 진리는 어떤 존재이며 어떤 작용이 있기 때문에 진리를 논의할 가치가 있다.
노자와 장자는 진리는 완전한 무형이 아니라 어떤 형태를 지닌다고 보았다. 다만 인간의 감각 능력으로는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형태는 있으나 인간의 감각을 벗어나 존재하는 그 존재를 어떻게 알 수 있을 것인가? 노자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보아도 볼 수 없는 것을 평평하다[夷]라고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희미하다[希]고 하며,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 것을 작다[微]고 한다.
이 세 가지는 밝혀 낼 도리가 없다. 그래서 뒤섞여 하나가 된다. 그 위로는 밝지 않고 그 아래는 어둡지 않다. 면면히 계속되지만 이름지을 수 없고, 아무 것도 없는 무의 세계로 복귀한다. 이를 일러 ‘형상 없는 형상’이라 한다.
아무 것도 없는 형상을 일러 ‘황홀’이라 한다. 맞이하여도 그 머리를 볼 수가 없고, 뒤쫓아가도 그 뒷모습을 볼 수가 없다.
옛날의 도를 가지고 지금의 존재를 부린다. 능히 옛날 최초의 그 도리를 아는 것, 이것을 ‘도의 핵심’이라고 한다.25)"
25)『老子』 제14장,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此三者不可致詰. 故混而爲一. 其上不皦 其下不昧.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無物之狀, 是謂恍惚.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
執古之道 以御今之有. 能知古始, 是謂道紀.”
뭔가 존재하여 무한한 작용을 펼치지만 시각·청각·촉각의 범위를 넘어서 있어서 파악할 수가 없다. 그 도의 핵심은 아득한 태고적부터 지금까지 존재하고 작용해 오는 근본의 원리이다.
인간이 지각할 수 없는 그 모습 없는 모습을 노자는 그저 ‘황홀’이라만 표현하였다. 인간이 감각의 작용을 그치고 깊은 명상의 상태에 들었을 때 감각과는 또다른 인식의 능력으로 그 도의 존재와 만날 수 있음을 암시한 표현이다. 노자는 다른 대목에서 도의 모습을 설명하기를, ‘어렴풋한[恍惚] 가운데 형상이 있고, 어렴풋한 가운데 뭔가가 있고, 깊숙하고 어두운 가운데 精微한 작용이 있다’ 고 하였다.26)
장자도 이 문제에 대해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
26) 『老子』제21장, “道之爲物 惟恍惟惚 惚兮恍兮 其中有象 恍兮惚兮 其中有物 窈兮冥兮 其中有精”
"어두운 것에서 보고 소리 없는 데서 듣는다. 어두운 가운데서 홀로 깨달음을 보고, 소리 없는 가운데서 홀로 조화의 기운을 듣는다.27)"
27) 『莊子』 「天地」, “視乎冥冥 聽乎無聲. 冥冥之中 獨見曉焉, 無聲之中 獨聞和焉.”
평범한 사람과는 다른 감각이 열린 사람에게는 진리의 모습이 감각적 판단과는 다른 어떤 인식으로 파악됨을 분명히 밝힌 대목이다. 재미있는 것은 감각이 세상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작고, 어둡고, 숨어있어서 그런 것만이 아니라, 반대로 너무나 크기 때문에 보지 못하기도 하다는 점이다.
"크게 모난 것은 모퉁이가 없고,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지며,
큰 소리는 소리가 나지 않고, 큰 형상은 형태가 없으니, 도는 이름 없음에 숨는다.28)"
28) 『老子』 제41장,
“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道隱無名”
도는 너무 미세해서 지각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너무 크기 때문에 또한 지각할 수 없다는 말이다. 지나치게 크면 큰 줄도 모르게 되고, 지나치게 빠르면 빠른 줄조차 모르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신체적 여건의 한계를 자각하고, 그 너머의 세계를 인정하기를 요청하는 내용이다.
그러면, 인간이 감각 너머의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법론이 필요한가?
心齋나 坐忘과 같은 수행법이 있고, 무위와 소박의 생활이 그런 경지로 이끄는 기본적인 방법이다. 그 원리에 대해서는 장자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육률을 뒤흔들어 혼란시키고, 피리와 비파와 같은 악기를 불태워 없애고, 사광의 귀를 틀어막아야 천하의 사람들이 비로소 그 잘 듣는 능력을 머금게 될 것이다.
무늬 장식을 없애고, 여러 가지 색채를 흩어버리고, 이주의 눈을 풀로 붙여버려야 천하의 사람들이 비로소 그 잘 보는 능력을 머금게 될 것이다.29)"
29) 『莊子』 「胠篋」,
“擢亂六律, 鑠絶竽瑟, 塞師曠之耳 而天下始人含其聰矣.
滅文章 散五采 膠離朱之目 而天下始人含其明矣.”
육률은 음률을 구성하는 법칙이고, 사광은 유명한 음악가이며, 이주는 눈이 아주 밝았던 인물이다. 대상의 자극은 인간의 욕망을 부추겨 들뜬 삶을 살게 할 뿐만 아니라, 대상 그 자체에 마음을 빼앗겨서 진리와 만날 수 없게 한다. 감각을 지나치게 자극하고 유인하는 현란한 장식이나 무늬, 매력적인 음악 등은 모두 감각을 넘어선 세계에 대한 감수성을 약화시킨다.
진리는 바로 이 감각 너머의 감수성을 통해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이 감수성의 계발을 위해서는 감각의 사용을 절제해야 한다. 감각의 절제를 통해 새로운 감수성이 열리고, 마침내 진리와 만날 수 있다. 이러한 감각의 절제를 장자는 ‘머금다[含]’고 표현하였다. 감각이 대상에 이끌리는 것을 경계하되, 감각의 능력을 부정하지 않는 것, 혹은 감각의 능력을 갖기는 하되 사용은 최대한 절제하는 것을 ‘머금다’고 하였다. 머금음을 통해 그 에너지를 새로운 감수성의 계발로 연결시켜 마침내 진리와의 만남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 장자의 이론이다.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의식으로 볼 수 없는 세계는 어둡고 뒤섞여있고 지극히 작은 세계이면서 동시에 지나치게 큰 세계이기도 하다. 이 세계를 보는 자는 분화된 小我로서의 존재를 넘어서서 또다른 세계와 만나 즐기는 행복을 누린다. 그 또다른 세계란 어떤 세계인가? 여기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근본의 세계, 둘째는 전체의 세계, 셋째는 원리의 세계이다.
근본의 세계는 만물의 근원으로서 하나인 세계이고, 전체의 세계는 하늘과 땅을 두루 포괄하는 큰 세계이다. 원리의 세계에는 존재의 원리, 생명의 원리, 씀[用]의 원리이다. 보지 못하는 것을 봄으로써 근본의 세계 내
지는 전체의 큰 세계와 하나되어 노닐고, 존재와 생명의 원리, 씀의 원리를 터득하여 그 원리를 한껏 활용하여 즐기고 누리는 삶이다. 그것이 최고의 즐거움[至樂]이자 최고의 아름다움[大美]이라고 노자와 장자는 말한다.
4. 맺음말
노자와 장자는 문화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며, 최소한의 문화를 인정하고 그 이상의 ‘과잉문화’는 인간을 오히려 타락시킬 뿐이라고 하였다. 타락이란 타고난 본성을 해친다는 의미이다.
노자와 장자가 파악한 문화의 특징은 분화이다. 지나친 분화는 차이를 낳고, 차이는 차별을 낳고 차별은 인간의 의식을 점유해서 피동적인 인간으로 만들어버린다. 인간은 자신의 본성을 자유롭게 발휘하지 못하고 문화가 요구하는 대로 이끌리게 된다.
문화의 발달이란 무한 분화 과정을 의미한다. 무한 분화를 거친 문화는 복잡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복잡성은 감각에 대한 복잡하고 강렬한 자극을 유도하여 인간의 마음을 교란시키고 욕망을 부추겨서 감각과 의지를 과도하게 사용함으로써 자율적인 삶을 상실하게 한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지나친 경쟁을 유발하여 이러한 현상을 더욱 심화시킨다. 노자와 장자는 문화의 이러한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서 최소한의 문화만이 추구되어야 한다고 한다.
최소한의 문화는 무위의 태도로 영위되는 소박한 문화이다. 소박한 문화가 인간의 본성을 제대로 발휘하도록 도와주는 힘은 和氣에서 나온다.
소박한 문화는 인간뿐만이 아니라, 만물이 각자 다 자기의 본성을 발휘하도록 하여 마침내 그 본성끼리 상생의 작용을 하는 거대한 화기를 형성함으로써 이 세계의 생태가 이루어진다. 생태계의 원동력은 화기에서 나오고, 화기는 소박함에서 나온다. 화기의 원리는 만물의 다양성을 인정을 전제로 한다. 만물은 각자 다양한 본성을 발휘하여 상호 작용하는 데서 생태의 대조화가 이루어진다. 이 다양성은 외형적으로는 서로 다르지만 본질은 동일하다. 따라서 차이는 인정하나 차별은 부정하는 다양성의 원리를 노자와 장자는 말한다.
최소한의 문화만을 인정하는 노자와 장자의 사상은 미학적으로 어떤 의의를 갖는가? 최소한의 문화는 소박함과 무위, 은근함, 은미함을 취하고, 때로는 텅빔을 추구한다. 소박함과 은미함, 그리고 텅빔은 그 자체로서 의의를 갖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태도와 삶의 방식에 의해 감각이 열리고, 감각이 열리면 평소에 보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무한한 생명력을 길러서 타고난 본성을 다할 수 있다.
열린 감각에 의해 새롭게 발견되는 세계는 넓고 신나는 세계이다. 분간과 차별이 없이 하나되는 세상이다. 녹아서 하나가 되기도 하고, 별개로 존재하면서도 어울려서 큰 하나를 이루는 경지를 누린다. 이것은 구조적 구성이 아니라, 혼연일체로서의 하나이다. 이것을 장자는 遊의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유의 경지에서 누리는 즐거움은 평소의 물질적,사회적 욕망이나 과잉문화에 의해 얻는 즐거움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그 질과 양이 대단하다. 이것이 가능 한 것은 절욕과 무위에 의한 자연원리의 터득, 이에 따른 ‘감각의 열림, 감각의 열림에 따른 새로운 세계의 발견과 만남, 하나되어 즐김의 과정에 의한다. 여기서 최고의 즐거움은 바로 소박함과 무위, 은미함, 텅빔을 통해 얻는 다른 차원의 심미적 감성에 의해서 가능하다. 노장의 문화이론이 심미적 원리에 의해 완성됨을 확인할 수 있다.
노자가 무욕과 절제, 이에 따른 소박한 삶을 강조하고, 소박한 삶에 의해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음을 제시한 데 비해 장자는 더 구체적이고 진전된 원리와 이상을 제시하였다. 소박한 삶이 심미적 감성에 미치는 영향을 상세히 말하고, 심미적 감성의 열림에 의해 새로운 세계를 만나 하나됨을 누리는 즐거움을 거듭 자세히 말하였다. 이에 따라 노자는 소박함과 무위자연이라는 소극적 방면의 미학을 발달시킨 데 비해, 장자는 주객분리의 해체와 더 큰 세계의 발견과 만남, 그리고 노님을 말함으로써 호방함과 걸림없는 자유의 적극적인 성향의 미학을 발달시켰다.
참 고 문 헌
陳鼓應注譯, 『老子今注今譯』, 商務印書館, 北京2003.
陳鼓應注譯, 『莊子今注今譯』, 中華書局, 北京2001.
조민환, 『중국철학과 예술정신』, 예문서원, 1997.
이상우, 『동양미학론』, 시공사, 1999.
한흥섭, 『莊子의 예술정신』, 서광사, 1999.
정세근, 『노장철학』, 철학과현실사, 2002.
이성희, 『無의 미학』, 새미, 2003.
김갑수, 『장자와 문명』, 논형, 2004.
토마스 먼로, 『東洋美學』, 백기수 역, 열화당, 1984.
李澤厚, 『ꡔ華夏美學』, 권호 옮김, 동문선, 1990.
徐復觀, 『중국예술정신』, 권덕주 역, 동문선, 1990.
李澤厚·劉綱紀主編, 『中國美學史』, 권덕주·김승심 공역,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92.
施昌東, 『중국의 미학사상』, 김예호 등 역, 신지서원, 1994.
리우샤오간(劉笑敢), 『莊子哲學』, 최진석 옮김, 소나무, 1998.
장파(張法),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 유중하 등 옮김, 푸른숲, 1999.
이마미치 노모노부(今道友信), 『동양의 미학』, 조선미 역, 다미디어, 2005.
曾祖蔭, 『中國古代美學範疇』, 丹靑圖書有限公司, 台北1987.
劉绍瑾, 『莊子與中国美学』, 廣东高等教育出版社, 廣州1989.
赵明·薛敏珠编著, 『道家文化及其艺術精神』, 吉林文史出版社, 长春1991.
蕭乓·叶舒宪, 『老子的文化解讀』, 湖北人民出版社, 武漢1994.
张涵, 史鸿文, 『中华美学史』, 西苑出版社, 北京1995.
張智彦, 『老子與中國文化』, 貴州人民出版社, 貴陽1996.
祁志祥, 『中國美學的文化精神』, 上海文艺出版社, 上海1996.
叶舒宪, 『莊子的文化解析』, 湖北人民出版社, 武漢1997.
张文勋, 『儒彿道美学思想探索』, 中国社会科学出版社, 北京1998.
陈望衡, 『中国古典美学史』, 湖南教育出版社, 长沙1998.
Abstract
Chuangtzu and Laotzu's Cultural Theory and Aesthetic Thought
― Lee, Jin-Oh ―
The Aesthetic Thoughts of Chuangtzu and Laotzu are closely related to their cultural theories. For they believed that the real aesthetic ideals are achieved not through simple aesthetic activities, but from making cultural vices correct. Accordingly the study examines Chuangtzu and Laotzu's cultural theories in relation to the elements of aesthetic perception, and also inquires into the ways to connect the cultural theories and aesthetic ideals.
What is meaningful in the thought of Laotze and Chuangtzu acknowledging the minimum culture? The minimum culture emphasizes on simplicity, doing nothing, inwardness andoften pursues vacancy. Simplicity, tastelessness and vacancy are not meaningful itself. The senses open with these attitudes and ways of life, and the invisible world in ordinary situation can be seen as the senses open. The infinite vitality grows to give full play to the innate nature. The world discovered fresh by open senses is wide and interesting. It is the world without distinction and discrimination. Melting to become one or being separately in harmony that the state of great one accomplishes. It is not contractual form, but one as oneness.
※ Key Words : Laotze, Chuangtzu, Cultural Theory, Aesthetic Thought, aesthetic perception
투고 접수 : 2005. 11. 14.
심사 완료 : 2005. 12. 16.
게재 결정 : 2005. 12. 20.
'장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노자의 ‘자연성 회복{復歸於樸)’을 위한 ‘마음치유’ (0) | 2016.06.04 |
---|---|
[스크랩] 『장자』에서의 ‘호접지몽’ 우화 해석에 관한 연구 (0) | 2016.06.04 |
[스크랩] <장자(莊子)> (0) | 2014.05.13 |
[스크랩] 제자백가(諸子百家) (0) | 2014.05.13 |
[스크랩] 순자(荀子)의 생애. 《荀子》는 어떤 책인가? (0) | 2014.05.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