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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순자(荀子)의 생애. 《荀子》는 어떤 책인가?

장안봉(微山) 2014. 5. 13.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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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荀子)

 

1. 순자의 생애

 

순자는 이름이 황(況)이고 손경(孫卿)이라고도 부르는데, 정치적으로 사상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중국 전국시대 조(趙)나라 사람이다. 순자는 제(齊)나라에 유학하여 여러 학파의 학설을 연구하였다.

제나라는 직(稷)이라는 곳에 학궁을 세우고 학자들이 학문을 연구하게 하였다. 이 학궁의 최고 책임자를 좨주라고 불렀는데, 순자는 이곳에서 세 번이나 좨주가 되었다. 그는 한때 그의 조국인 조나라, 그리고 진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다. 만년에는 초나라에서 난릉령을 지냈으며, 그곳에서 책을 쓰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일생동안 학문연구와 교육, 그리고 저술에 종사하였다. 진시황 때 유명한 재상인 이사(李斯)와 법가의 집대성자인 한비(韓非)가 그의 제자이다. 그의 문하에서 진한 이후 학술 사상계의 큰 인물들이 배출되었으니, 모형과 장창과 부구백 등이 그의 학통을 이은 사람들이다.

 

2. 유가에서의 순자의 위치

 

본디 공자의 가르침에는 어짊과 의로움 또는 충성과 믿음 같은 덕을 숭상하는 내면적인 정신주의와 실행과 예의를 존중하는 외면적인 형식주의라는 두 가지 면이 있었다. 정신주의적인 면은 증자를 거쳐 맹자에게서 발전하였는 데 비해, 형식주의적인 면은 자유.자하를 거쳐 순자에게로 계승되었다. 맹자가 주관적이고 이상적이었다면, 순자는 객관적이고 현실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순자는 틀림없이 공자의 사상을 이어받은 유가인데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유학자들 자체에서 이단자로 취급되어 왔다. 그것은 순자가 인간 도덕의 바탕으로 받들어져 온 하늘(天)의 권위를 부정하면서 인간과의 분계선을 그었고, 사람의 본성은 본래 악하다고 주장하며, 예의와 함께 형벌의 올바른 사용을 강조해 법가(法家)에 가까운 견해를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문하에서 한비자(韓非子)와 이사(李斯)같은 법가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순자의 사상은 유가의 정통으로 일컬어지는 맹자의 사상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상충되었다. 이 점은 바로 순자가 유가 이외의 다른 학파의 사상도 널리 공부해, 이들을 유가 사상 속으로 흡수하였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비십이자를 비롯한 정론(正論)․해폐 (解蔽)등의 편에서 순자는 그 시대 다른 학파들에 대해 준엄한 비평을 가하면서 공자의 사상을 드러내려 애쓰고 있다. 순자에 의하면 이러한 제자백가들은 사물의 일부분만을 아는 ‘곡지(曲知)’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부분적인 지식에 의한 판단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고 진리와는 거리가 먼 학문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진리와 거리가 먼 학문은 자연히 어떤 명리(名利)를 뒤쫓게 되므로 순자는 그것에 대해 더욱 분개하면서 이들의 눈을 가리고 마음을 막고 있는 요소들을 제거해 올바른 길을 깨우쳐야 한다고 생각하여 해폐편을 썼다. 이렇게 다른 학파를 비판하기 위해 순자는 그들의 사상을 널리 공부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다른 학파의 현실적인 사상들이 반대로 순자에게 영향을 미쳐 정통적인 유학과는 다른 독특한 사상 체계를 이룩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순자는 단순한 공자의 후계자가 아니라 고대의 중국 철학을 집대성한 사람이라는 영예를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유가에서 크게 평가되어야 할 순자의 공로는 여러 유가 경전에 대한 폭넓은 연구이다. 학문으로서의 유학이 경전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라면, 순자가 유학에 끼친 공로는 위대한 것이다.

 

순자는 성악편(性惡篇)에서 “곧은 나무가 댈나무를 쓰지 않아도 곧은 것은 그 본성이 곧기 때문이다. 굽은 나무가 반드시 댈나무를 대고서 불로 쪄서 바로잡은 다음에야 곧아지는 것은 그 본성이 곧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곧은 나무와 굽은 나무로써 사람의 본성을 비유하고 있다.

이것은 순자가 사람의 악한 면뿐 아니라 선한 면도 인식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순자는 서로 해치고 죽이는 그 시대의 어지러운 정치와 그 밑에서 허덕이는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을 통감한 나머지, 이를 바로잡기 위해 성악설을 비롯해 예의와 형벌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혼란 속에서는 어짊과 의로움 같은 덕이 발붙일 곳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현실에 민감한 순자로서는 불가피한 귀결이라 할 것이다. 순자는 공자의 이상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현실에 적응하려 하였던 것이다.

 

3. 순자의 저서

 

그의 대표 저작은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순자(荀子)>이다. <순자>는 처음에 한(漢)나라 유향(劉向)이 정리 교정하여 <손경신서(孫卿新書)>라고 이름하였는데, 모두 32편이었다.

당나라 중엽에 양경(楊倞)이 32편을 20권으로 나누고 각 편의 순서를 다시 정하여 <순자주(荀子注)>를 지었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순자는 대체로 순자가 지은 그대로이다. 그 가운데 일부는 그의 제자가 기록하고 정리하여 만든 것도 들어 있고, 또 일부는 진나라 한나라 무렵에 씌어진 것도 있는 듯 하다.

초기 철학 서적들은 일화․경구(警句)로 채워진 서술양식을 가지고 있어서 당시의 복잡한 철학적 논의를 더이상 설득력 있게 전달해주지 못했다. 이와는 달리 순자는 유가 철학자 가운데 최초로 스승의 말․대화를 기록한 제자들의 글뿐만 아니라, 자기가 직접 쓴 체계적인 논문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표현했다. 또한 총론적인 설명, 연속적인 논증, 세부적인 상술, 명료성에 중점을 두는 엄격한 서술형태를 취했다.

 

4. 순자의 사상

 

① 자연론(自然論)

 

순자는 하늘에는 지각이 있어 사람들에게 복과 화를 내린다는 일반적인 생각을 부정하였다.

“하늘은 만물을 생성하기는 하지만 만물을 분별하지는 못하며, 땅은 사람들을 그 위에 살게 하기는 하지만 사람들을 다스리지는 못한다.”(禮論편)

다만 하늘(자연)은 일정한 원리에 의해 운행되고 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하늘의 운행에는 일정한 법도가 있다.”(天論편)

따라서 순자는 하늘이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람이 하늘을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늘과 땅은 군자를 낳았고, 군자는 하늘과 땅을 다스린다.”(王制편)

이것은 하늘의 도와 땅의 도와 사람의 도는 모두 일맥상통한다는 유가의 전통 사상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늘이나 땅에 대한 숭앙심을 모두 지워 버린 것은 아니다.

“예에는 세 가지 근본이 있다. 하늘과 땅은 생명의 근본이고, 선조는 종족의 근본이고, 훌륭한 임금은 다스림의 근본이다. 하늘과 땅이 없다면 어떻게 생명이 있겠는가? 선조가 없다면 사람이 어디서 나왔겠는가?

훌륭한 임금이 없다면 어떻게 다스려지겠는가? 세 가지 중에 어느 하나가 없어도 안락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는 위로는 하늘을 섬기고 아래로는 땅을 섬기며 선조를 높이고 임금을 존중해야 한다. 이것이 예의 세 가지 근본이다.” (禮論편)

사람들에게 복이나 재난을 내려 주는 하늘의 권위 때문에 하늘을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이 사람들을 살게 해주는 은덕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② 성악설(性惡說)

 

사람의 타고난 본성은 악하다는 성악설은 여러 면에서 사람들에게 감정적인 비판을 받아 왔다. 또한 맹자의 성선설과 대치시켜 생각해 왔기 때문에 유가들에 의해 무조건 부정되었다. 그러나 순자가 말하는 본성 가운데에는 사람의 욕망 작용만이 있을 뿐 사고 작용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처럼 성악설의 근거가 사람의 욕망에 있다면,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선의 요소가 완전히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순자는 “타고나는 본성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지만 교화 시킬 수는 있다”(儒效편)고 하여, 사람 자신이 선해질 수 있는 능력 곧 선의 요소를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순자는 배우고 노력해서 사람을 선하게 하는 선의 요소를 작위라 하였다. “감정이 그러하여 마음이 그것을 선택하는 것을 생각이라 말하고, 마음이 생각하여 그것을 위해 움직일 수 있는 것을 작위라 말한다.”(正名편) 작위에는 올바른 판단과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는 지려가 전제되어 있다. 그리하여 작위를 통해 생겨나는 예의와 법도로써 사람들을 선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순자의 성악설은 단순히 “사람의 본성은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능력을 개발해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보려는 적극적인 뜻을 지닌 것이다.

 

맹자가 그의 왕도정치사상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성선설을 주장하였듯이, 순자도 당시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제창한 예치설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성악설을 주장하였다. 사람의 성품은 악하지만 군주가 예의법도와 형벌로 사람들을 다스리고 교화하며 금함에 말미암아 사람들이 선에 부합하는 행위를 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순자는 사람들의 성품 속의 이기적 성향에 근거하여 성악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사람의 타고난 성질에만 맡겨두면 인간은 이기적이므로 예의 염치를 돌보지 않는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배고플 때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가 먼저 먹으려 할 수 있다. 그러나 교육을 받고 나면 남을 배려하여 사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교육의 결과가 선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성정은 비록 악하지만 인위에 의한 교정을 거쳐 선하게 될 수 있다. 순자는 인간다움으로서 분변(分辨)능력, 그리고 예의를 들었다. 이처럼 자연상태의 성품을 개조하여 분변과 예의의 기능이 잘 살려지는 인위를 일으키려는 주장이, 순자의 ‘화성기위(化性起僞)설이다.

맹자는 천인합일의 관점에서 출발하여 천부의 성선을 강조하고 성품 속에 있는 선단을 확충하기를 주장하였다. 이에 반하여 순자는 또한 천인상분의 입장에서 인성은 개조되어야 하며 도덕은 후천적으로 학습하고 배양하여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즉, 맹자가 윤리도덕의 측면에서 인성을 논하였다면 순자는 인식론의 측면에서 인성을 논한 것이다.

 

③ 인식론(認識論)

 

순자는 사물의 관찰이나 판단을 정확히 하자면 일정한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마음의 청명함에서 얻어진다. 마음의 욕망이나 잡된 생각을 없애 텅 비우고 한 가지 일에 통일시킨 다음 고요히 사색하는 것을 청명하다고 한다. 청명한 마음에서 제대로 지려(知慮)가 작용해 올바른 인식이 얻어진다. 이러한 정확한 인식의 주장은 그로 하여금 올바른 분별과 논설을 중시하게 하였다. 순자는 또 많은 사람들이 그릇된 주장을 하는 것은 마음 한 구석이 욕망이나 이익 같은 데 가려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가리거나 막고 있는 것을 없애 버려야 세상이 올바르게 된다고 생각하고 해폐편을 썼다.

 

④ 예론(禮論)

 

사람에게는 본디 욕망이라는 악한 본성이 있어서 그대로 버려 두면 서로 충돌해 큰 혼란이 일어난다. 그래서 옛 임금들은 그 혼란을 막기 위해 예의를 제정하였다. 예의는 개인 행동의 규범이 될 뿐만 아니라 사회 질서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

순자가 생각하는 예의를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사회적인 계급 질서이다. 즉 사람들이 사회 생활을 하면서 자기 신분에 알맞게 일하고 행동하며 거기에 따른 보수를 받게 함으로써 통일된 조화 속에 평화롭게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 예의이다. 예의는 덕이 많고 모든 이치에 통달한 이상적인 인간인 성인의 작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작위란 사람의 본성을 교화시키려는 올바른 지려에 의한 행위이다. 이러한 성인의 작위에 의해 예의가 생겨나는 것이므로 그것은 사람의 본성을 올바로 이끌고 사회의 질서를 바로잡는 규범이 될 수 있는 것이다.

 

⑤ 정치론(政治論)

 

순자의 정치론의 바탕은 민본 사상이다. 따라서 백성이 지지하는 나라는 흥하고 백성이 싫어하는 나라는 망할 것이기 때문에 온갖 수단을 다해 백성들을 잘 살게 해야 한다. 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등장하는 것이 경제 정책이다. 그리고 순자는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법을 매우 중요시했다. 나라를 다스림의 기준이 되는 법이 있어야함을 강조하였다. 그러니 “좋은 법이 있어도 어지러워지는 일은 있으나, 군자가 있으면서도 어지러워진다는 말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들어본 일이 없다”(王制편)고 하면서 법을 다스리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여 유가의 테두리를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또 다른 특색 있는 사상은 후왕사상(後王思想)이다. 순자는 유가의 전통을 따라 이상적인 정치를 한 옛 임금의 이상을 받아들이는 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오래 되어 잘 알 수 없는 옛 임금보다는 그 전통을 계승한 후왕, 즉 후세의 임금 또는 근세의 임금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객관적.형식적으로 규정된 예의 제도이다. 그러니 증거가 애매한 옛 임금보다는 근세의 임금을 내세우게 되는 것이다.

순자의 현실적인 성격은 유가의 전통을 따라 덕을 위주로 하는 왕도를 이상으로 받들면서도, 힘으로 다스리는 패도까지도 받아들이고 있다. 전국시대처럼 어지러운 세상이라면 적어도 패도 정치라도 제대로 되어 주길 바라는 현실적인 소망이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무한한 욕망을 가지고 있으나, 그 욕구를 충족시켜줄 물건은 한정이 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각자들이 예를 제정하여 사회가 혼란하지 않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그의 예치설이다. 그러나 예치만으로 좋은 사회를 이룩할 수 없으니, 그것은 사람들의 성품이 불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자는 그러한 문제점을 법치로써 보완하고자 하였다.

 

 

 

 

《荀子》는 어떤 책인가?

 

1. 儒家에서의 荀子의 위치

 

周나라는 크게 서주(西周, B.C. 1050~B.C. 771)와 동주(東周, B.C.770~B.C. 256)로 나뉘고, 東周는 다시 춘추(春秋, B.C. 770~B.C. 403)와 전국(戰國, B.C. 402~B.C. 256)의 시대로 나뉜다. 춘추 시대에 공자(孔子, B.C. 551~ B.C. 479)는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으려고 어짊[仁]과 덕[德]을 바탕으로 한 사상의 체계를 세워 儒敎를 창설하고 그 가르침을 세상에 폈다. 이러한 공자의 이상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전국 시대라 불리는 더욱 어지러운 세상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세상이 혼란할수록 평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강렬해, 공자의 가르침은 여러 후계자들에 의해 더욱 발전하였고, 그 밖에도 자기 나름대로의 경륜으로 세상을 바로잡아 보려는 수많은 사상가들, 이른바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앞을 다투어 나타났다.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혼란을 극한 기원전 350년을 전후해 유가에는 맹자(孟子, B.C. 372~ B.C. 289?)에 뒤이어 순자(荀子, B.C. 323~ B.C. 238?)라는 위대한 사상가가 나타났다. 공자의 사상은 맹자와 순자에 의해 더욱 이론적으로 체계화되어 다른 학파들을 압도하고 오랫동안 중국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본디 공자의 가르침에는 어짊과 의로움 또는 충성과 믿음 같은 덕을 숭상하는 내면적인 정신주의와 실행과 예의를 존중하는 외면적인 형식주의라는 두 가지 면이 있었다. 정신주의적인 면은 증자(曾子)를 거쳐 맹자에게서 발전하였는 데 비해, 형식주의적인 면은 자유(子游)․자하(子夏)를 거쳐 순자에게로 계승되었다. 맹자가 주관적이고 이상적이었다면, 순자는 객관적이고 현실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설명이 정당하다 하더라도 사상의 발전은 선을 긋듯이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순자는 틀림없이 공자의 사상을 이어받은 유가인데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유학자들 자체에서 이단자로 취급되어 왔다. 그것은 순자가 인간 도덕의 바탕으로 받들어져 온 하늘[天]의 권위를 부정하면서 인간과의 분계선(分界線)을 그었고, 사람의 본성은 본래 악하다고 주장하며, 예의와 함께 형벌의 올바른 사용을 강조해 법가(法家)에 가까운 견해를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문하에서 한비자(韓非子, B.C. 280?~B.C. 233?)와 이사(李斯, B.C. 284?~B.C.210) 같은 법가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순자의 사상은 유가의 정통으로 일컬어지는 맹자의 사상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상충되었다. 이 점은 바로 순자가 유가 이외의 다른 학파의 사상도 널리 공부해, 이들을 유가 사상 속으로 흡수하였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비십이자(非十二子)를 비롯한 정론(正論)․해폐(解蔽) 등의 편에서 순자는 그 시대 다른 학파들에 대해 준엄한 비평을 가하면서 공자의 사상을 드러내려 애쓰고 있다. 공격의 대상에는 공자의 정신주의를 계승한 자사(子思)와 맹자까지도 포함되고 있다.

 

순자의 견해에 의하면 이러한 제자백가들은 사물의 일부분만을 아는 ‘곡지(曲知)’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부분적인 지식에 의한 판단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고 진리와는 거리가 먼 학문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진리와 거리가 먼 학문은 자연히 어떤 명리(名利)를 뒤쫓게 되므로 순자는 그것에 대해 더욱 분개하면서 이들의 눈을 가리고 마음을 막고 있는 요소들을 제거해 올바른 길을 깨우쳐야 한다고 생각하여 해폐편을 썼다.

 

이렇게 다른 학파를 비판하기 위해 순자는 그들의 사상을 널리 공부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다른 학파의 현실적인 사상 등이 반대로 순자에게 영향을 미쳐 정통적인 유학과는 다른 독특한 사상 체계를 이룩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순자는 단순한 공자의 후계다가 아니라 고대 중국 철학을 집대성한 사람이라는 영예를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유가에서 크게 평가되어야 할 순자의 공로는 여러 유가 경전에 대한 폭넓은 연구이다. 한대의 유향(劉向, B.C. 77~B.C.6)은 <교수중손경서록(校讎中孫卿書錄)>에서 “순자는 《시경(詩經)》․《예기(禮記)》․《역경(易經)》․《춘추(春秋)》에 조예가 깊었다.”고 말하고 있다. 청대의 학자 왕중(汪中, 1744~1794)의 《순경자통론(荀卿子通論)》에서 고증한 바에 의하면 《詩經》의 《毛詩》를 비롯해 《노시(魯詩)》와 《한시(韓詩)》의 전승이 모두 순자의 손을 직접 간접으로 거치고 있으며, 《춘추》의 좌씨전(左氏傳) , 곡량전(穀梁傳), 대대례(大戴禮), 소대례(小戴禮)의 많은 부분이 순자나 그의 제자들의 힘을 입어 전해진 것이다. 학문으로서의 유학이 경전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라면, 순자가 유학에 끼친 공로는 위대한 것이다.

 

순자는 성악편(性惡篇)에서 “곧은 나무가 댈나무를 쓰지 않아도 곧은 것은 그 본성이 곧기 때문이다. 굽은 나무가 반드시 댈나무를 대고서 불로 쪄서 바로잡은 다음에야 곧아지는 것은 그 본성이 곧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곧은 나무와 굽은 나무로써 사람의 본성을 바유하고 있다. 이것은 청대의 학자 왕선겸(王先謙, 1842~1917)이 그의 《순자집해(荀子集解)》 서문(序文)에서 지적한 것처럼 순자가 사람의 악한 면뿐만 아니라 선한 면도 인식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순자는 서로 해치고 죽이는 그 시대의 어지러운 정치와 그 밑에서 허덕이는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을 통감한 나머지, 이를 바로잡기 위해 성악설을 비롯해 예의와 형벌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혼란 속에서는 어짊과 의로움 같은 덕이 발붙일 곳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현실에 민감한 순자로서는 불가피한 귀결이라 할 것이다. 순자는 공자의 이상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현실에 적을 하려 하였던 것이다.

 

2. 순자의 생애

 

순자의 생애에 대한 기록으로는 사마천(司馬遷, B.C. 145~B.C. 86?)의 《史記》의 列傳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를 근거로 그의 생애를 대략 살펴보기로 한다.

 

순자는 이름이 황(況)이며 순경(荀卿)이라고도 부르는데 경(卿)은 자(字)라는 견해도 있고 존칭이라는 견해도 있다. 한대 이후로는 손경(孫卿)이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한나라 선제(宣帝)의 이름 순(詢)을 휘(諱)하여 손이라 고쳐 부르게 된 것이다. 또한 옛날 순(郇)나라 공손(公孫)씨 집안이라 하여 손경이라 부른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순자는 기원전 323년경 조(趙)나라(지금의 산서성)에서 태어났다. 순자는 고향에서 공부를 해 열다섯 살에는 수재라 일컬어졌다. 이때 제(齊)나라 직하(稷下)에는 위왕(威王)과 선왕(宣王) 때부터 양왕(襄王) 때에 걸쳐서(B.C. 4세기 중엽∼B.C. 3세기 중엽) 임금의 보호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며 연마하고 있었으므로, 제나라 민왕(暋王) 말년에 순자도 그곳으로 가 학문을 닦았다. 직하에는 유가를 비롯해 묵가(墨家), 도가(道家), 법가(法家), 명가(名家) 등에 속하는 전국의 학자들이 모여들어 자유로이 자기 분야의 학문을 연구하고 있었으므로, 한때 이곳을 중심으로 학문이 크게 번창하였다. 순자는 이곳에서 폭넒은 학문의 기틀을 잡았을 것이다.

 

민왕이 죽어 직하의 여러 학자들이 흩어졌으나 양왕(襄王)이 다시 학자들을 모아 문화의 부흥을 꾀했다. 《사기》열전에 의하면 순자는 이 무렵 가장 연장자로서 높은 대우를 받으며 좨주(祭酒)라는 존경받는 벼슬을 세 번이나 지냈다 한다.

 

그러나 순자는 어떤 자의 모함을 받아 제나라를 떠나 초(楚)나라로 갔다. 초나라 재상 춘신군(春申君)은 순자를 맞아 난릉(蘭陵) 땅의 수령에 임며하였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춘신군에게 말하였다.

 

“탕(湯)임금은 칠십 리의 사방의 땅, 문왕(文王)은 백 리 사방의 땅으로 천하를 통일했습니다. 손경도 어진 사람인데 지금 그에게 백 리 사방의 땅을 주었으니 초나라가 위태롭습니다.”

 

이에 춘신군이 순자를 파면하니, 그는 다시 조나라로 돌아갔다. 이것은 대략 기원전 265년경의 일이었다.

 

순자가 조나라 효성왕(孝成王) 앞에서 임무군(臨武君)과 군사에 관한 토론을 한 것은 이 시기였다(議兵편 참조). 또한 이 사이에 이웃 진(秦)나라에도 가서 재상인 응후(應侯)와 대담을 하였다(彊國편 참조).

의병편과 강국편을 보면 임무군에게 용병(用兵)의 근본은 백성들을 따르게 함에 있음을 주장하면서 옛날의 군제(軍制)를 설명하는 태도나, 훌륭한 진나라의 정치를 인정하면서도 유가를 숭상하지 않기 때문에 이상적인 왕자(王者)의 나라는 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진나라를 떠나는 태도에서, 유가로서의 완숙한 면모를 느낄 수 있다.

 

한편 초나라에서는 다시 어떤 사람이 춘신군에게 간하였다.

 

“걸(桀)왕 때 이윤(伊尹)이 하(夏)나라를 떠나 은(殷)나라로 가자 은나라가 천하를 통일해 하나라는 망하였으며, 관중(管仲)이 노(魯)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가자 노나라는 약해지고 제나라는 강해졌습니다. 이처럼 현명한 사람이 있으면 임금은 더욱 존귀해지고 나라는 편안해집니다. 지금 손경은 천하의 현명한 사람이니, 그가 버리고 떠난 나라는 편치 못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춘신군은 사람을 보내어 순자를 다시 초나라로 모셔다 난릉의 수령으로 삼았다.

 

그러나 기원전 238년, 춘신군이 암살을 당하자 순자도 난릉의 수령 벼슬을 내놓았다. 이때 순자는 퍽 늙었던 듯하며, 그대로 난릉에 머물러 살다가 몇 년 뒤에 죽었다. 그의 제자들은 난릉에서 순자를 장사지냈다.

 

이보다 더 자세한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순자는 그다지 높은 벼슬도 하지 못하고 대부분의 생애를 학문과 교육에 바쳤다. 맹자의 글이 열정적이고 격한 데 비해, 순자의 글은 냉정하고 논리적이라는 점도 그의 생활을 통해 얻어진 성격의 차이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냉정하고 논리적인 성격은 유가의 경전들을 정리해 전승시키는 데에 누구보다도 더 큰 업적을 이루게 하였다.

 

그의 제자로는 법가의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는 한비자와 진시황의 재상으로 유명한 이사(李斯)가 있다. 이러한 제자들의 이질적인 행동이 순자를 유가에서 더욱 이단자로 몰리게 하였을 것이다. 한편 노나라에 조용히 숨어살면서 학문에 종사해 유학의 전스에 큰 공로를 세운 부구백(浮邱伯) 같은 제자도 있었다.

 

(以上은 김학주 譯, 『荀子』, 을유문화사, 2001.의 「解題」에서 인용함)

 

 

<天論>

 

天行有常, 不為堯存, 不為桀亡. 應之以治則吉, 應之以亂則凶. 彊本而節用, 則天不能貧, 養備而動時, 則天不能病, 脩道而不貳, 則天不能禍. 故水旱不能使之飢渴, 寒暑不能使之疾, 祅恠不能使之凶. 本荒而用侈, 則天不能使之富, 養略而動罕, 則天不能使之全, 倍道而妄行, 則天不能使之吉. 故水旱未至而飢渴, 寒暑未薄而疾, 祅怪未至而凶. 受時與治世同, 而殃禍與治世異, 不可以怨天, 其道然也. 故明於天人之分, 則可謂至人矣.

 

本, 謂農桑.

貳, 即倍也.

薄, 廹也. 音, 博.

知, 在人不在天, 斯為至人.

 

⇒ 科學的인 天觀이다. 즉 하늘을 절대적 존재로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순자에게 하늘은 사람에게 복을 주는 대상이 아니며, 命을 내리는 존재도 아니기에, 재앙도 내릴 수 없는 자연 그대로의 天이다. 말하자면 합리적인 자연관이다.

 

 

<性惡>

 

凡人之性者, 堯禹之與桀跖也, 其性一也. 君子之與小人, 其性一也. 今將以禮義積偽, 為人之性邪? 然則有曷貴堯禹, 曷貴君子矣哉. 凡所貴堯禹君子者, 能化性, 能起偽. 偽起而生禮義, 然則聖人之於禮義積偽也, 亦陶埏而生之也. 用此觀之, 然則禮義積偽者, 豈人之性也哉? 所賤於桀跖小人者, 從其性, 順其情, 安恣睢, 以出乎貪利争奪. 故人之性惡, 明矣, 其善者, 偽也.

 

恣睢(자휴): 멋대로 성나는 대로 함부로 행동함.

 

⇒ 荀子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한다. 그런데 악하다는 것은 전제조건일 뿐이고, 이것을 개조해 나갈 수 있다고 하였다. 그것이 學이다. 이는 순자가 켤코 인간을 구제할 수 없는 악의 화신 또는 악마가 될 가능성이 있는 존재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學問을 통하여 聖人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출발점을 설정한 것이라는 의미를 지닐 뿐이다.

 

 

<禮論>

 

禮起於何也? 曰: “人生而有欲, 欲而不得, 則不能無求, 求而無度量分界, 則不能不爭, 爭則亂, 亂則窮,

先王惡其亂也. 故制禮義以分之, 以養人之欲, 給人之求, 使欲必不窮乎物, 物必不屈於欲, 兩者相持而長, 是禮之所起也. 故禮者, 養也.

芻豢稻粱, 五味調香, 所以養口也. 椒蘭芬苾, 所以養鼻也. 雕琢刻鏤, 黼黻文章, 所以養目也. 鐘鼓管磬, 琴瑟竽笙, 所以養耳也. 疏房檖狽, 越席牀第几筵, 所以養體也. 故禮者, 養也. 君子既得其養, 又好其别.”

“예의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사람은 나면서부터 욕망을 가지고 태어난다. 욕망이 충족되지 못하면 그것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욕망을 추구함에 있어서 일정한 제한이 없다면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다툼이 일어나면 사회는 혼란하게 되고 혼란하게 되면 사회가 막다른 상황에 처하게 된다.

옛 선왕이 이러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예의를 세워서 분별을 두었다. 사람의 욕구를 기르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되 욕망이 반드시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거나 물(物)이 욕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양자가 균형 있게 발전하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예(禮)의 기원이다. 그러므로 예란 기르는 것이다.”

 

屈, 竭也.

疏, 通也. 疏房, 通明之房也.

狽, 古貌字.

檖狽, 未詳. 或曰: “檖, 讀為䆳, 貌, 廟也. 廟者, 宮室尊嚴之名.” 或曰: “狽, 讀為邈, 言屋宇深䆳綿貌也.”

 

⇒ 禮에 대한 荀子의 獨創的인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은 후대의 禮樂制度를 만들어 시행한 모든 왕조에서 우선적으로 고려하였던 관념이 되었다.

 

 

<樂論>

 

夫樂者, 樂也. 人情之所必不免也. 故人不能無樂,

樂則必發於聲音, 形於動静, 而人之道, 聲音動静性術之變, 盡是矣.

故人不能不樂, 樂則不能無形, 形而不為道, 則不能無亂.

先王惡其亂也. 故制雅頌之聲, 以道之, 使其聲足以樂而不流, 使其文足以辨而不諰, 使其曲直繁省廉肉節奏, 足以感動人之善心, 使夫邪汙之氣, 無由得接焉.

是先王立樂之方也. 而墨子非之, 奈何?

 

故樂在宗廟之中, 君臣上下同聼之, 則莫不和敬, 閨門之内, 父子兄弟同聽之, 則莫不和親, 鄉里族長之中, 長少同聽之, 則莫不和順. 故樂者, 審一以定和者也. 比物以飾節者也, 合奏以成文者也. 足以率一道, 足以治萬變. 是先王立樂之術也, 而墨子非之, 奈何?

 

무릇 음악(樂)이란 즐거운 것이다. 사람의 정으로서는 없을 수 없는 것이니 고로 사람에게는 음악이 없을 수 없다.

즐거우면 반드시 성음에 나타나고 행동으로 드러나 사람의 도인 성음과 행동은 본성의 작용(性術)변화가 여기서 다한 것이다.

고로 사람은 즐김이 없을 수 없으며 즐기면 곧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 없고 겉으로 드러나되 도에 맞지 않으면 어지럽지 않을 수 없다.

선왕께서는 그 어지러움을 싫어하셨다. 고로 아송(雅頌 아는 조정의 모임이나 연회에 사용하던 음악이나 가사이고 송은 종묘에서 제사지낼 때 사용하던 음악이다. 즉, 아송이란 정통적인 아악을 말한다)의 소리를 제정해 이끌어주어 그 소리가 즐거우면서도 나쁜 길로 흐르지 않게 하시고 그 문채가 족히 변별되면서도 끊임이 없게 하시고, 그 가락과 장단으로 하여금 족히 사람의 선한 마음을 감동시켜 저 사악하고 더러운 기운이 가까이 할 수 없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왕께서 음악을 세우신 이유인데 묵자가 부정함은 어찌된 일인가?

 

고로 음악이란 종묘에서 임금과 신하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함께 들으면 곧 화합하고 공경하지 않음이 없고 집안에서 부모 자식과 형제들이 함께 들으면 화합하고 친해지지 않음이 없으며 향리 집안어른들(族長) 중에서 노소가 함께 들으면 화목하고 순종하지 않음이 없다. 고로 음악이란 하나를 살핌으로써 조화를 정한 것이며 사물을 견줌으로써 절도를 수식한 것이며 합주함으로써 문채를 이룬 것이다. 족히 이로써 하나의 도를 따를 수 있고 족히 이로써 온갖 변화를 다스릴 수 있다. 이는 선왕께서 음악을 세우신 근거(術 법칙, 수단)인데 묵자가 이를 부인함은 어찌된 일인가?

 

不諰: 不息의 誤字라는 설이 있다. 그 설을 따르면 없어지지 않는다. 또는 끊임이 없다가 된다.

諰: 두려워할 시. 여기서는 쉴 식(息)의 의미.

曲直: 소리가 굽고 곧은 것, 가락, 멜로디.

繁省: 소리가 복잡하거나 단순한 것.

廉肉: 소리가 한편으로 삐져나오거나 둥글둥글함을 말함.

節奏: 장단, 리듬.

邪汚: 사악하고 더러운 것.

審一: 한 가지 기준, 한 가지 원칙을 살피고 심사하는 것.

一道: 한 가지 표준이 되는 올바른 道.

 

⇒ 음악의 발생과 효용에 대한 견해.

 

 

故聽其雅頌之聲 而志意得廣焉 執其干戚 習其俯仰屈伸 而容貌得莊焉 行其綴兆 要其節奏 而行列得正焉 進退得齊焉.

故樂者 出所以征誅也 入所以揖讓也 征誅揖讓 其義一也.

고로 그 아와 송의 음악을 들으면 마음과 뜻이 넓어지고 방패와 도끼를 잡고 몸을 숙이고 젖히고 구부리고 펴는 동작을 하면 용모가 웅장해진다. 철조를 행하고 장단을 맞추게 되면 행렬이 바르게 되고 나아가고 물러감이 가지런해진다.

고로 음악이란 나아가면 정벌하고 벌주는 것이요 들어와서는 공손히 읍하고 사양하는 것이니 정주와 읍양은 그 의미가 하나이다.

 

出所以征誅 則莫不聽從 入所以讓 則莫不從服 故樂者 天下之大齊也 中和之紀也 人情之所必不免也 是先王立樂之術也 而墨子非之奈何.

나아가 정벌하고 벌주게 되면 곧 명령에 따르지 않는 이가 없게 되고 들어와 사양하면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게 된다. 고로 음악이란 천하를 크게 가지런하게 하는 것으로 중용과 화합의 벼리이며 인정상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선왕께서 음악을 세우신 이유인데 묵자가 이를 부인함은 어찌된 일인가

 

단어) 간척(干戚): 무무(武舞)를 출 때 사용하는 방패와 도끼.

철조(綴兆): 철은 춤추는 대열에서의 위치를 말하고 조는 나아가고 물러나는 자리를 말한다.

정주읍양(征誅揖讓): 각기 정벌하다, 베다, 읍하다, 사양한다는 의미

 

 

且樂者 先王之所以飾喜也 軍旅鈇鉞者 先王之所以飾怒也 先王喜怒皆得其齊焉 是故喜而天下和之 怒而暴亂畏之 先王之道 禮樂正其盛者也 墨子非之.

故曰 墨子之於道也 猶瞽之於白黑也 猶聾之於清濁也 猶欲之楚而北求之也.

또 음악이란 선왕께서 이로써 즐거움을 장식하는 것이요, 군대의 부월은 선왕께서 이로써 노여움을 장식하신 것이다. 선왕께서는 희로가 모두 그 가지런함을 얻었다. 이 때문에 즐거우면 천하가 조화롭고 노여우면 난폭한 자들이 두려워했다. 선왕의 도는 예악이 바로 성대한 것임에도 묵자는 이를 부정했다.

고로 묵자는 도에 대해 장님이 흑백을 모르고 귀머거리가 맑고 탁한 소리를 분별하지 못하며 남쪽에 있는 초나라로 가고자 하면서 북쪽에 가서 구하는 것과 같다.  

 

군려(軍旅): 군사 (군), 군사 (려)

부월(鈇鉞): 도끼를 말하며 특히 군대에서 군법을 어긴 자를 처단할 때는 반드시 임금이 하사한 부월을 사용했다. 군대 지휘권의 상징이다.

 

 

夫聲樂之入人也深 其化人也速 故先王謹為之文. 樂中平則民和而不流 樂肅莊則民齊而不亂 民和齊則兵勁城固 敵國不敢嬰也.

如是則百姓莫不安其處 樂其鄉 以至足其上矣. 然後名聲於是白 光輝於是大 四海之民莫不願得以為師 是王者之始也.

무릇 노래와 음악은 사람에게 들어감이 깊고 그것이 사람을 변화시킴도 빠르다. 고로 선왕께서는 삼가 그 문채(형식)를 만드셨다. 음악이 중정하고 화평하면 백성이 화합하며 빗나가지 않고, 음악이 엄숙하고 장엄하면 백성들이 질서가 있어 어지럽지 않게 된다. 백성들이 화합하고 질서가 있으면 군대는 강하고 성은 튼튼해져서 적국이 감히 침략하지 못한다.

이와 같다면 백성들은 모두 그 거처를 편안히 여기지 않음이 없고 그 고을을 좋아하여 그 상(上 즉 임금)에 대해 아주 만족할 것이다. 그런 후에 명성이 이에 드러나고 빛이 이에 커져 사해의 백성들이 우두머리로 삼고자 원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왕자의 시작이다.

 

樂姚冶以險 則民流僈鄙賤矣 流僈則亂 鄙賤則爭 亂爭則兵弱城犯 敵國危之 如是則百姓不安其處 不樂其鄉 不足其上矣 故禮樂廢而邪音起者 危削侮辱之本也.

음악이 요염함으로써 험하면 곧 백성들은 빗나가고 오만하며 비루하고 천하게 된다. 빗나가고 오만하면 어지럽게 되고 비루하고 천하면 다투게 되니 어지럽고 다투면 군대가 약해지고 성이 침범을 받아 적국이 위태롭게 할 것이다. 이와 같으면 백성들이 그 거처를 불안하게 여기고 그 고을을 좋아하지 않으며 그 임금에게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고로 예와 악이 무너져 사악한 음악이 일어나는 것은 나라가 위태롭고 모욕당하는 근본이다.

 

故先王貴禮樂而賤邪音 其在序官也 曰脩憲命 審詩商 禁淫聲 以時順脩 使夷俗邪音不敢亂雅 太師之事也

墨子曰 樂者聖王之所非也 而儒者為之過也. 君子以為不然 樂者 聖王之所樂也 而可以善民心 其感人深 其移風易俗 故先王導之以禮樂 而民和睦.

고로 선왕께서는 예와 악을 소중히 하고 사악한 음악을 천시하셨다. 관직에 순서를 매김에 있어서도 "법과 명령을 준수하고 시와 문장을 살피고 음란한 소리를 금함으로써 때에 따라 순종하게 하여 오랑캐 풍속과 사악한 음악이 감히 아악을 어지럽히지 못하게 해야 한다."라고 하셨으니 이는 태사의 일이다.

묵자는 "음악이란 성왕께서 부정한 것이고 유자들이 그것 때문에 잘못을 저질렀다"고 말하는데 군자는 이렇게 여기지 않는다. 음악이란 성왕께서 즐기시던 것으로 이로써 민심을 선량하게 할 수 있고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쳐 풍속을 바로잡을 수 있다. 고로 선왕께서 예와 악으로 이끄시니 백성들이 화목했다.

 

흐를 류(流): 빗나간다는 의미.

두를 영(嬰): 여기서는 성을 둘러싸고 공격한다는 의미.

요야(姚冶): 요염하고 지나치게 꾸미는 것

류만비천(流僈鄙賤): 빗나가고, 오만하며, 비루하고 천하다는 의미

위삭모욕(危削侮辱): 위태롭고 영토가 줄어들며 업신여기고 욕보인다는 의미.

상(商): 여기서는 문장을 말한다.

 

 

夫民有好惡之情而無喜怒之應則亂. 先王惡其亂也 故修其行正其樂而天下順焉. 故齊衰之服 哭泣之聲 使人之心悲, 帶甲嬰冑 歌於行伍 使人之心傷,

姚冶之容 鄭衛之音 使人之心淫, 紳端章甫 舞韶歌武 使人之心莊.

故君子耳不聽淫聲 目不視邪色 口不出惡 此三者 君子慎之.

대저 백성들에게 좋아하고 미워하는 감정만 있고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대응이 없다면 곧 어지럽게 된다. 선왕께서는 그 어지러움을 싫어하시어 고로 그 행실을 닦고 그 음악을 바로잡으니 천하가 순조롭게 되었다. 고로 상복을 입고 곡하는 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며 대열을 지어 노래하면 사람들의 마음이 아파진다.

요염한 얼굴로 정나라와 위나라 음악을 연주하면 사람들의 마음이 음란해지고, 단정한 예복을 입고 관을 쓰고 순임금의 소와 무왕의 무를 노래하고 춤추면 사람의 마음이 장중해진다.

고로 군자는 귀로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않고 눈으로는 삿된 색을 보지 않으며 입으로는 악한 말을 하지 않으니 이 세 가지는 군자가 신중히 하는 것이다.

 

凡姦聲感人而逆氣應之 逆氣成象而亂生焉 正聲感人而順氣應之 順氣成象而治生焉 唱和有應 善惡相象 故君子慎其所去就也.

무릇 간사한 소리가 사람을 감동시키면 거스르는 기운(逆氣)이 응하며 거스르는 기운이 형상을 이루면 어지러움이 생겨난다. 바른 소리가 사람을 감동시키면 순응하는 기운이 응하고 순응하는 기운이 형상을 이루면 다스림이 생겨난다. 노래하면 화답함이 응하고 선과 악이 서로 형상을 이뤄 춤이 된다. 고로 군자는 그 거취를 신중히 하는 것이다.

 

君子以鐘鼓道志 以琴瑟樂心 動以干戚 飾以羽旄 從以磬管 故其清明象天 其廣大象地 其俯仰周旋有似於四時

군자는 종과 북으로 (사람들의) 뜻을 인도하고 금과 슬로 마음을 즐겁게 한다. 방패와 도끼로 움직이고 깃털과 소꼬리로 장식하며 경(磬)과 관악기로 따른다. 고로 그 맑고 밝음은 하늘을 상징하고 그 넓고 큼은 땅을 상징하며 그 몸을 앞뒤도 젖히고 빙빙 도는 것은 사시와 흡사한 것이다.

 

故樂行而志清 禮脩而行成 耳目聰明 血氣和平 移風易俗 天下皆寧 美善相樂.

故曰樂者樂也 君子樂得其道 小人樂其欲, 以道制欲則樂而不亂 以欲忘道則惑而不樂

故樂者所以道樂也 金石絲竹 所以道德也 樂行而民鄉方矣 故樂也者 治人之盛者也 而墨子非之

고로 음악이 행해지면 뜻이 맑아지고 예가 닦여지면 행실이 이루어지며 귀와 눈이 총명해지고 혈기가 평화롭게 되며 풍속이 바로 잡혀 천하가 모두 편안해지고 아름답고 선량한 사람들이 서로 즐기게 된다.

고로 가로되 음악이란 즐거운 것이라고 말한다. 군자는 그 도를 얻음을 즐기고 소인은 그 욕망을 즐긴다. 도로써 욕망을 제어하면 즐겁되 어지럽지 않게 되며 욕망으로써 도를 망각하면 미혹되어 즐겁지 않게 된다.

고로 음악이란 이로써 즐거움으로 이끄는 것이다. 금석사죽은 이로써 덕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음악이 행해지면 백성들의 말과 행동이 바른 곳으로 향한다. 고로 음악이라는 것은 사람을 다스리는 성대한 것인데 묵자는 이를 부정했다.

 

재최(齊衰): 제사지낼 때 입는 상복의 일종

갑주(甲冑): 갑옷과 투구

신단장포(紳端章甫): 신은 예복에 매는 큰 띠이고 단은 예복이며 장포는 관이다.

소무(韶武): 소는 순임금 시대의 악무이고 무는 무왕의 악무이다.

창화(唱和): 창은 선창하는 것이고 화는 따라서 화답하는 것을 말한다.

우모(羽旄): 우와 모는 문무를 출 때 사용하는 것으로 우는 깃털, 모는 꼬리털이 긴 소의 일종이다.

향방(鄉方): 말이나 행동이 바른 곳으로 향하다

 

 

且樂也者 和之不可變者也, 禮也者 理之不可易者也, 樂合同 禮別異 禮樂之統 管乎人心矣. 窮本極變 樂之情也 著誠去偽 禮之經也.

墨子非之 幾遇刑也 明王已沒 莫之正也 愚者學之 危其身也.

君子明樂 乃其德也 亂世惡善 不此聽也 於乎哀哉 不得成也 弟子勉學 無所營也

또한 음악이란 것이 화합하는 것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며 예란 바꿀 수 없는 이치이다. 음악은 함께 화합하게 하며 예는 따로 구별한다. 예와 악의 법통은 사람들의 마음을 주관한다. 근본을 궁리하고 변화를 다하는 것은 음악의 정신이고 성실함을 드러내고 거짓을 제거함은 예의 도리이다.

묵자가 이를 부정함은 거의 형벌을 받아야 하나 명철한 왕이 이미 없어 바로잡을 수 없었다. 어리석은 자들은 따라 배워 그 몸을 위태롭게 한다.

군자가 음악을 밝게 함은 바로 그 덕이나 어지러운 세상에 선을 싫어해 이를 듣지 않는다. 오호라 슬프도다, 이룰 수 없구나. 제자들은 열심히 공부해 미혹되지 말아야 한다.

 

聲樂之象 鼓大麗 鐘統實 磬廉制 竽笙簫和 筦籥發猛 塤篪翁博 瑟易良 琴婦好 歌清盡 舞意天道兼.

鼓其樂之君邪 故鼓似天 鐘似地 磬似水 竽笙(簫和)筦籥 似星辰日月 鞀柷拊鞷椌楬似萬物

노래와 음악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북은 소리가 크고 다른 악기들이 따르며, 종은 여러 악기들을 통솔해 충실하게 하며, 경은 소리가 산뜻해 음악을 절제하며, 우(竽 피리의 일종)와 생(笙 생황)은 엄숙하며 조화시키고, 관과 약은 맹렬한 소리가 나며, 훈과 지는 은은해 음악을 부드럽게 하고 슬은 점잖아서 부드러운 소리가 나며 금은 여자처럼 부드럽고 음악을 아름답게 하며 노래는 맑아서 음악의 뜻을 다하고 춤의 뜻은 하늘의 도를 겸한다.

북은 그 음악의 임금이라 고로 북은 하늘과 같고 종은 땅과 같으며 경은 물과 같고 우생과 관약은 일월성신과 같으며 도고와 축, 부액, 강갈은 만물과 같다.

 

曷以知舞之意 曰目不自見 耳不自聞也 然而治俯仰詘信進退遲速 莫不廉制 盡筋骨之力 以要鐘鼓俯會之節 而靡有悖逆者 眾積意謘謘乎

어찌 춤의 뜻을 아는가? 가로되 눈은 자신을 보지 못하고 귀는 자신을 듣지 못하지만 그러나 부앙과 굴신, 진퇴와 지속을 다스림이 산뜻하고 절제되지 않는 것이 없으며 근골의 힘을 다해 종과 북의 소리가 서로 합해지는 절도를 요구하여 거스르고 어긋나는 것이 없고 여러 가지가 쌓여 춤의 뜻이 빈틈없이 잘 표현된다.

 

대려(大麗): 북은 소리가 크고 다른 악기들이 붙어서 따라온다는 의미

통실(統實): 통솔하여 충실하게 한다.

렴제(廉制): 렴은 청렴하다, 바르다는 의미 여기서는 소리가 산뜻해 절제한다는 뜻.

소화(簫和): 원래 소는 퉁소라는 의미이여 여기서는 엄숙할 숙(肅)의 의미.

발맹(發猛): 소리를 발하여 맹렬하게 한다.

옹박(翁博): 소리가 은은해 부드럽게 한다는 의미.

도(鞀): 도고(鞉鼓)의 일종으로 작은 북을 말함.

축(柷): 음악의 시작을 알리는 절구통 모양의 악기.

부액(拊鞷): 악기 이름인데 현재는 미상.

강갈(椌楬): 어(敔). 음악의 끝을 알리는 악기로 호랑이 모양.

갈(曷): 어찌, 언제

굴신(詘信): 굴신(屈伸)과 같은 의미

패역(悖逆): 어그러질 패, 거스를 역.

지지(謘謘): 원래는 말이 느리고 둔하다는 말인데 여기서는 정성을 다해 빈틈이 없는 모양을 의미.

 

吾觀於鄉 而知王道之易易也. 主人親速賓及介 而眾賓皆從之 至於門外 主人拜賓及介 而眾賓皆入 貴賤之義別矣.

공자는 "내가 향음주(鄕飮酒)를 보니 왕도를 실천하는 것이 아주 쉬움을 알겠다." 주인이 친히 주빈과 수행원을 초빙하고 뭇 손님들이 모두 따른다. 문밖에 이르면 주인이 주빈과 수행원에게 절을 하고 뭇 손님들이 모두 들어가니 귀하고 천한 뜻이 구별된다.

 

三揖至於階 三讓以賓升 拜至獻酬 辭讓之節繁 及介省矣 至於眾賓 升受坐祭立飲 不酢而降 隆殺之義辨矣

(주인과 주빈이) 세 번 읍하면서 섬돌까지 오는데 세 번 사양하며 주빈을 모시고 당으로 올라온다. 주인은 주빈에게 절을 하고 술잔을 주빈에게 따라 올리고 주빈이 마신 후 다시 주인에게 술을 따라주는데 사양하는 절차를 번거롭게 한다. 수행원들은 간단히 한다. 뭇 손님들은 당에 올라와 잔을 받고 자리에 앉아 고수레를 하고 서서 마시는데 주인에게 반배하지 않고 내려가니 귀한 사람은 존중하고 아래 사람은 간단히 대하는 융쇄의 뜻이 변별된다.

 

工入 升歌三終 主人獻之 笙入三終 主人獻之 間歌三終 合樂三終 工告樂備 遂出 二人揚觶 乃立司正 焉知其能和樂而不流也

악공이 들어와 당에 올라와 세곡을 다 부르고 나면 주인이 악공에게 술을 준다. 다시 생을 연주하는 사람이 들어와 세곡을 연주하고 나면 주인이 술을 준다. 당위와 당 아래에서 번갈아가면서 세곡을 연주하고 합해서 세곡을 연주한다. 악공이 음악을 다 연주한 것을 고하고는 드디어 나간다. 두 사람이 술잔을 들어 올리고 이에 사정을 세우니 이에 향음주례가 화평하게 잘 진행되어 빗나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賓酬主人 主人酬介 介酬眾賓 少長以齒 終於沃洗者 焉知其能弟長而無遺也.

降說屨升坐 脩爵無數 飲酒之節 朝不廢朝 莫不廢夕 賓出 主人拜送 節文終遂 焉知其能安燕而不亂也

여수(旅酬)에서는 주빈이 주인에게 술잔을 따르고 주인은 수행원에게 반배하며 수행원은 뭇 손님들에게 반배한다. 나이에 따라 잔을 따르는데 잔을 씻는 사람에게서 끝난다. 이에 향음주례가 어른을 공경하면서도 빠짐이 없게함을 알 수 있다.

당에서 내려와 신을 벗은 후 올라가 자리에 앉아 술잔을 주고받는데 수의 제한이 없다. 그러나 음주의 절도는 아침에는 아침 일을 폐하지 않고 저녁에는 저녁 일을 폐하지 않는다. 주빈이 나가면 주인이 절하면 전송하는데 예절과 형식이 끝까지 잘 갖추어져야 한다. 이에 편안하게 잔치를 벌이면서도 어지러워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貴賤明 隆殺辨 和樂而不流 弟長而無遺 安燕而不亂

此五行者 足以正身安國矣 彼國安而天下安 故曰 吾觀於鄉而知王道之易易也.

귀하고 천함이 분명하고 높고 낮은 예우를 분별하며 화합하고 즐기면서도 빗나가지 않고 어른을 공경하면서도 빠짐이 없고 편안하게 잔치를 벌이면서도 어지럽지 않다.

이 다섯가지는 족히 몸을 바로하고 나라를 편안히 할 수 있다. 저 나라가 안정되면 천하가 안정될 것이다. 고로 공자께서는 "내가 향음주(鄕飮酒)를 보니 왕도를 실천하는 것이 아주 쉬움을 알겠다."라고 하신 것이다.

 

속빈(速賓): 주빈을 초청한다는 의미 개(介)는 주빈을 수행하는 사람.

배지헌수(拜至獻酬): 배지는 주인이 빈에게 절을 하는 것이고 헌이란 주인이 손님에게 술잔을 따라 올리는 것이고 수란 손님이 따라준 술을 주인이 마신 후 다시 손님에게 술을 따라 주는 것을 말한다.

제(祭): 고수레 하는 것.

작(酢): 잔을 다시 올리는 것. 반배.

융쇄(隆殺): 융숭할 융과 간단히 줄일 쇄.

간가삼(間歌三): 당 위와 당 아래에서 번갈아가면서 노래하는 것.

사정(司正) : 여수(旅酬 여럿이 술잔을 돌리는 것)의 예에서 주인을 돕는 사람.

옥세(沃洗):잔을 씻는 것.

설구(說屨): 신을 벗다

수작(脩爵): 잔을 주고 받으며 술을 마시는 것.

절문(節文): 향음주례의 예절과 형식

 

亂世之徵 其服組 其容婦 其俗淫 其志利 其行雜 其聲樂險 其文章匿而采 其養生無度 其送死瘠墨 賤禮義而貴勇力 貧則為盜 富則為賊 治世反是也

어지러운 세상의 징후는 다음과 같다. 그 옷이 사치스럽고 그 차림이 여자 같으며 그 풍속이 음란하고 그 뜻이 이익만 추구하며 그 행동이 난잡하고 그 노래와 음악이 바르지 않으며 그 무늬와 장식이 간사하고 화려하며, 그 생활에 법도가 없고 그 죽인 이를 장사지냄에 각박하고 불경하며 예의를 천하게 여기고 용기와 힘을 중하게 여겨 가난한 자는 도둑질을 하고 부유한 자는 남을 해친다. 잘 다스려지는 세상은 이와 반대이다.

 

조(組): 사치하다.

험(險): 바르지 않다

특이채(匿而采): 匿=특(慝)의 의미이며 간사하고 사특한 것. 채는 화려하다.

척묵(瘠墨): 여윌 척은 여기서는 각박하다는 의미이고 묵은 불경의 의미.

 

 

 

<君道>

 

有亂君, 無亂國, 有治人, 無治法. 羿之法, 非亡也, 而羿不世中, 禹之法猶存, 而夏不世王. 故法不能獨立, 類不能自行, 得其人則存, 失其人則亡. 法者, 治之端也, 君子者, 法之原也. 故有君子, 則法雖省, 足以徧矣. 無君子, 則法雖具, 失先後之施矣, 不能應事之變, 足以亂矣. 不知法之義, 而正法之數者, 雖博傳, 臨事必亂. 故明主急得其人, 而闇主急得其勢. 急得其人, 則身佚而國治, 功大而名美, 上可以王, 下可以霸. 不急得其人, 而急得其勢, 則身勞而國亂, 功廢而名辱, 社稷必危. 故君人者, 勞於索之, 而休於使之. 書曰: “惟文王敬忌, 一人以擇.”, 此之謂也.

 

羿: 활을 잘 쏘았던 사람. 요임금 때도 활약하였고, 하나라 때는 有窮이라는 작은 나라의 임금(諸侯)이었는데, 역시 활을 잘 쏘는 한착(寒浞)이 그를 죽였다고 한다.

 

⇒ 荀子의 정치관. 합당한 人才를 우선함. 君子를 이상적인 인간으로 여김.

 

 

 

 

 

 

 

 

 

 

 

출처 :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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