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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논집 제36집 2014년 2월
Sogang Journal of Philosophy
Vol.36, Feb. 2014, pp. 211-237
순자 정명론과 언어 선제성 *
김영건(서강대)
【주제분류】동양철학, 언어철학
【주제어】순자, 정명, 징지, 존재-당위의 규칙, 수행적 의미, 선천성, 선험성
【요약문】나는 순자의 정명론이 갖고 있는 의의를 언어적 관점에서 옹호한다. 즉 언어가 실재를 규정한다. 이 주장은 다음과 같이 정당화될 수 있다.
(i) 순자의 징지는 개념적 능력이며, 그것은 논리적 차원에서 경험적 지식에 선행한다.
(ii) 존재- 당위의 규칙과 행위-당위의 규칙이 구분되어야 한다. 정명론이 확립하고자 하는 규칙은 행위-당위의 규칙이 아니라, 존재-당위의 규칙이다.
(iii) 지시적 차원과 수행적 차원의 구분은 존재-당위의 규칙 혹은 언어적 행동을 무시하고 있다. 언어적 행위나 도덕적 행위는 언어적 행동에 의존해야 한다.
(iv) 사실과 가치의 구분은 존재-당위의 규칙을 무시하고 있으며, 또한 선천성과 후천성의 구분은 발생적 차원과 정당화의 차원을 구분하고 있지 않다.
(v) 존재-당위의 규칙과 행위-당위의 규칙, 또는 언어적 공동체와 사회-정치적 공동체의 구분은 사회-정치적으로 주어진 규칙들을 비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준다.
투고일: 1월 30일, 심사완료일: 2월 16일, 게재확정일: 2월 17일
* 이 논문은 2010년도 정부재원(교육과학기술부 인문사회연구역량강화사업비)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NRF-2010-32A-A00047)
I. 두 가지 가능성
순자는 이름을 바로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이름을 바로 세우는 것이 왜 중요한가? 그것은 사회적 질서를 올바르게 유지하게 위해서 그렇다. 순자에 의하면, 이름을 바로 세운다는 것은 동이(同異)와 귀천
(貴賤)을 올바르게 구분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적 혼란은 동이(同異)와 귀천(貴賤)의 구분이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이다.1)
그러나 적어도 이름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우리는 이미 언어를 알고 있어야 하며, 언어를 올바르게 사용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만 순자는 이미 우리가 선제(先提)하는 언어에 대해 해명하는 대신에 인식론적 고찰을
하고 있다.2) 동이(同異)의 분별과 구분이 가능한 것은 우리 경험적 구조, 즉 천관(天官)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천관을 통해 들어온 자료들을 인지하는 징지(徵知), 혹은 심(心)이나 천군(天君) 때문에 그렇다.
1) 순자는 다음처럼 말한다. “명(名)이 일정치 않으면 각종 형태를 보는 사람마다 멋대로 이해하고 각 사물의 명실(名實)이 서로 얽히며 귀천(貴賤)이 분명치 않고 동이(同異)가 구별되지 않는다. 이와 같다면 정신이 반드시 깨우치지 못할 근심이 있고 일에 있어서 반드시 곤궁해질 화가 있을 것이다.”(『순자』, 「정명」 , 193) 순자에 대한 인용문은 일차적으로 이운구의 번역본을 사용하면서, 김학주의 번역본을 참조하여 풀어쓴 핵심 개념들을 가급적 한자어로 바꾸어 놓았다.
2) “ 「정명」 에서 순자는 우선 인식론적 문제를 제기하였는데 이것은 후기 묵가의 이론과 비슷하다”고 풍우란은 말하고 있다. 풍우란, 『중국철학사』, 정인재 옮김, 형설출판사, 1977, 209.
“심(心)은 징지(徵知)를 갖는다. 징지, 즉 인지 능력은 귀를 거쳐서 소리가 감지되어야 가능하고, 눈을 거쳐서 형체가 감지되어야 가능하다. 그렇더라도 징지(徵知)는 반드시 천관(天官)이 그 이전의 분류 기억과 들어맞은 연후라야 가능한 것이다. 오관(五官)은 이를 기억에 담더라도 알지 못하며, 마음은 이를 인식하더라도 언어로 가리키는 말이 없다면 사람들은 이를 지식이 있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동이(同異)를 구별하는 까닭이다. 동이(同異)를 앞서 구별한 연후에 이를 따라 명명하게 된다.”3)
3)『순자』,「정명」 , 194.
순자가 보여주고 있는 생각은 철학적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이 비판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과 매우 유사하다.4)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갖고 있다.
(i) 천관과 구분되는 징지(徵知), 즉 인지 능력은 개념적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적 능력은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그것은 인간에게 자연적인 것인가? 아니면 천관으로부터 경험론자들이 주장하듯이 추상에 의해 생겨난 것인가?
(ii) 순자는 인지 능력에 의해 파악된 개념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인지 능력이 파악한 개념은 이미 개념적 의미와 언어적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이미 의미가 있는 개념이나 언어적 내용에 소리나 문자기호로 규약한다는 것이다.5)
그러나 내 마음 속에 있는 개념적 의미와 내용에 소리나 문자기호로 규약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바로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생각이 ‘사적 언어’라는 잘못된 생각의 원천이라고 비판한다. 더 나아가, 철학적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다양한 자연 언어로 명명할 수 있는 언어적 기호가 아니라, 우리 인지를 가능하게 하는 그 개념, 혹은 그 언어적 의미와 내용이다.
누가 이름을 올바르게 정하는가? 순자는 과거에 존재했던 성왕(聖王)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성왕들은 무엇에 근거해서 이름을 정하는가? 오히려 순자 이야기의 핵심은 우리가 이미 정해진 언어 사용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왕자가 명(名)을 제정하면 명(名)이 정해져 실(實)이 명확하고 도가 행해져 뜻이 통하면 민(民)을 이끌어 이와 일치되게 하는 것이다.”6)
제정된 명(名)에 의해 실(實)이 분별되고, 그에 따라 올바른 행위 규칙들이 유지된다. 이런 의미에서 논리적으로 올바른 언어 사용, 즉 명(名)이 실(實)에 선행한다.
그런데 이러한 순자의 생각은 분명히 순자의 또 다른 생각, 즉 실(實)이 분별되어 그것에 명(名)을 붙인다는 생각에 대립된다. 유희성은 실(實)이 분별되어 그것에 명(名)을 붙인다는 생각을 순자의 주장으로 간주한다.7)
4) 아우구스티누스의 언어관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비판은 다음 책을 참조할 수 있다. M. Morris, An Introduction to the Philosophy of Langua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5) “명(名)은 정해진 실(實)이 없고 약속함으로써 이름 붙여지며, 약속이 정착하여 풍속화 되면 이를 일컬어 실명(實名)이라고 한다.”(『순자』,「정명」 , 195)라는 순자의 주장은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 소리기호나 문자기호로 규약한다는 의미이다. 가령 풍우란은 다음처럼 이야기한다. “모든 명칭은 사람이 짖는 것이므로 명칭이 규정되는 과정에 있을 때, 어느 한 사물을 어떤 특정한 명칭으로 꼭 그렇게 부를 이유는 없다. 예를 들면 ‘개’를 ‘개’라고 부르지 않고 ‘고양이’라고 불러도 상관없다.”(풍우란, 『중국철학사』, 210) 풍우란의 해명에서 볼 수 있듯이, 여기서 명(名)이란 소리기호이거나 문자기호이다.
6)『순자』,「정명」 , 193.
7) 채인후도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채인후, 『순자의 철학』, 천병돈 옮김, 예문서원, 2000, 133.
“이름을 제정하는 것, 또는 이름을 바로 잡는 것의 관건은 마음이 객관적 인식을 잘 발휘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즉 마음이 그 작용을 잘발휘하느냐 혹은 발휘하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질서 실현의 필요조건인 정명(正名)이 만족되어야 이상사회의 실현가능성도 성립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순자는 마음에 대한 ‘허일이정(虛壹以靜)’의 수양공부에 힘써서 ‘대청명(大凊明)’의 경지에 도달할 것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순자철학에 있어서 마음이 ‘대청명’의 경지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사회질서의 실현가능성은 닫혀 있다고 할 수 있다.”8)
8) 유희성, 순자는 왜 이름을 중시하는가? , 『범한철학』, 제40집, 2006. 199.
이런 해석에 의하면 순자에 있어서 정명(正名)은 중요하지만, 그것의 중요성은 결국 올바른 인식, 대청명이라는 마음의 경지에 의존한다. 따라서 언어는 마음에 비해 부차적 위치에 놓인다. 이러한 주장은 마음이나 마음의 수양을 강조하고, 언어나 개념적 분석에 대해서 그렇게 치중하지 않았던 전통적 생각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인다.9)
그러나 남경희는 순자의 정명론을 반대로 이해하고 있다.
“이름의 바름,또는 이름의 제정을 위한 순자의 기준은 통념의 것과는 다른 것으로 이해된다. 그에 따르면 이름이란 사람들 사이의 신표의 역할을 하며, 사물의 모습과 사람의 생각, 느낌을 재는 도량형의 역할을 한다.”10)
순자의 이러한 생각은 전통적 입장과는 다르다. 즉 “전통의 입장에서는 우리 삶과 행위의 준거, 도량형, 저울이 되는 바는 언어가 아니라, 세계와 그에 대한 인식이었다. 순자는 이런 통상적인 믿음과는 전혀 다른 견해를 취하고 있다. 그는 인식이나 존재가 바른 이름의 기준이 아니라, 역으로 이름에 의해 사물들이 구분됨은 물론, 마땅함, 의미 있는 모습을 지닌다고 보고 있다.”11)
남경희에 의하면, 순자철학은 존재, 사물, 실재에 대한 언어 우선성의 논제를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순자의 철학은 언어적 전환을 주장하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통해 충분하게 옹호될 수 있고 그렇게 옹호되어야 한다고 남경희는 주장한다.12)
그 입장이란 언어가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사회적 인간존재의 집”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13)
순자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의 가능성은 이미 순자의 사유 자체에 내재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순자는 명과 실, 또는 언어와 실재에 대해서 사유 불일치를 보여주고 있다. 유희성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정명
의 기초에 인식론적 고찰이 자리 잡고 있다면, 정명의 의미는 마음에 비해 부차적이다. 반면에 남경희가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정명이나 언어가 우리 사유와 행동의 기초라면, 정명은 일차적이며 근원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남경희가 주장하듯이 실재나 사물에 대한 구성설을 함축하고 있고14), 이런 생각은 전통적 동양철학에 낯선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9) 정재현은 이 점에 대해서 다음처럼 말한다. “경험지식과 관련하여 또 특기할 점은 이 지식이 언어와 무관하게 파악되는 지식이라는 점이다. 언어를 사용해서 가리키기 이전에 우리에게는 공통의 분류, 구별 능력이 있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 경험적 지식이 인간에게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것과 경험적 지식이 오관(五官)뿐만 아니라 지성의 작용을 거친 것이라는 점은 뒤의 사상가 순자에 의해서 긍정된다. 물론 순자는 지(知) 대신에 심(心)을 사용하지만, 사실 묵가의 지(知)와 순자의 심(心)은 같은 기능을 하는 기관이다. 이런 두가지 특성 때문에 묵가는 경험지식을 항상 우선순위의 지식으로 말하였다.”
(정재현, 『고대 중국의 명학』, 서강대 출판부, 2012, 67~68.) 마찬가지로 박원재도 명은 실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순자의 주장으로 간주하고 있다. 박원재, 명변(明辯) 논쟁을 통해 본 제자(諸子)의 사상적 갈래 , 『중국철학』, 제4 집, 1994, 88~89.
10) 남경희, 「순자(荀子) 정명론(正名論)의 비트겐슈타인적 이해」 , 『철학』, 제102집, 2010, 9.
11) 남경희, 「순자(荀子) 정명론(正名論)의 비트겐슈타인적 이해」 , 10.
12) 남경희는 다음처럼 말한다. “필자는 본 논문을 통해 순자 정명론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하나의 올바른’ 해석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지만, 더 일반적으로 고전은 과거에 갇혀 있기 보다는 다양한 시각에서 재해석되어 현대에도 의미를 지닐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의 의도는 순자 이해를 위한 하나의 시각, 서구 철학과의 접속이 가능한 하나의 시각을 제안하고자 하는 것이다.”(남경희,「순자(荀子) 정명론(正名論)의 비트겐슈타인적 이해」 , 3.) 남경희의 주장처럼 ‘올바른 해석’으로 간주되는 것이 철학적으로 더 많은 문제점을 보여줄 때, 그와는 다른 해석이 그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철학적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다.
13) 남경희에 의하면, “전통적 입장에서 언어는 철학의 중심을 차지하지 못했다. 언어는 단지 사고나 인식을 담기 위한 그릇이거나 전달 매체에 불과한 것, 이성이나 사유의 도구요 수단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후기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인간 삶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 언어로서, 언어는 일종의 행위이고, 문화는 물론 인간의 삶 전체가 일종의 언어놀이의 양식으로 전개된다. 인간 삶과 행위, 그리고 사고나 인식 활동은 언어에 의존되어 있으며, 인간은 언어의 바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남경희, 「순자(荀子) 정명론(正名論)의 비트겐슈타인적 이해」, 5.
14) 남경희는 다음처럼 주장한다. “저기 저 밖에 인식주관과 독립하여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세계’라 하는 것은 언어활동의 과정에서 구성되는 것이며, 인식 활동 역시 인간이나 언어의 밖에 존재하는 어떤 것, 물자체, 진상 자체를 파악하는 활동이라기보다는 무규정적이고 무형적인 외계를 인간의 척도로 재어 자신이 이해랄 수 있는 방식으로 규정해 가는 과정이다.” 남경희, 「순자(荀子) 정명론(正名論)의 비트겐슈타인적 이해」 , 6.
이런 구성설은 다음처럼 표현되기도 한다. “순자는 인간의 본성만이 아니라 세계 내의 사물도 이름을 갖게 됨으로써 비로소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사물이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그것이 인간적 관심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 인간에게 의미 있는 것이라는 것이 순자의 탁월한 통찰이다.” 또는 “언어는 윤리적 인간을 양육할 뿐만 아니라, 의미 있는 존재계를 구축해 낸다.”(같은 책 11)
II. 경험과 개념
우리의 감각은 사물들을 이미 분별한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칸트에 의하면 잡다한 감각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지성과 개념의 역할이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지성과 개념의 역할이 감각과 감성
에 앞서서 선제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천관의 동일성을 보장하는 것은 바로 천군이나 징지의 개념적 동일성이다.
“인식은 우선 감각기관이 인식대상을 종류에 맞춰 적합하게 기록하고, 이후에 마음의 징지작용이 발휘되어야 성립된다. 제 아무리 감관이 수용한 감각자료가 많다 할지라도, 그것을 개념화하는 사유작용(徵知)이 없으면 인식이 성립하지 않는다. 반면에 사유작용만 있다면 그것에 의해 개념화할 자료가 없기 때문에 역시 인식이 성립하지 않는다. 이러한 주장은 마치 칸트의 인식이론을 연상케 하는데, 인식이 형성되려면 감관이 수용한 감각자료와 마음의 이성작용이 동시에 작용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순자는 인식주체로서 감각기관과 마음을 동시에 인정한다는 점에서 맹자가 감각기관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고, 오직 마음만 인정한 것과 매우 다르다. 그러나 순자도 무조건 감관의 감각작용을 긍정하는 것만은 아니다. 비록 인식이 성립되려면, 반드시 감각지각이 선행해야 되지만, 그렇다고 모든 인식이 꼭 감각지각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순자는 만약 인식이 오로지 감각기관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면, 잘못된 지각적 앎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 이러한 이유 때문에 순자는 감각기관 이외에 마음의 이성작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순자의 주장은 지각은 개념 의존적이며,인식은 체계적인 개념의 전제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있다.”15)
유희성은 순자의 인식론을 칸트의 그것과 유사하게 이해하고 있다. 그 유사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순자나 칸트 모두 우리 지식이 성립하기 위한 두 가지 요소, 즉 감각과 사유, 감관과 이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둘째, 감각이 제공하는 것은 인식의 재료이며, 이성이나 마음은 그러한 재료를 개념화한다. 따라서 인식이 성립되면 감각지각이 선행해야 한다.
셋째, 지각은 개념의존적이며 인식은 개념적 전제하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유사성 중에서 분명하지 않은 것이 둘째 명제이다.
그것은 맥도웰이 지적한 ‘곁눈질하는 관점’(sideways-on view)을 가정하고 있다. 맥도웰에 의하면 “우리의 경험에서 자발성은 이미 수용성의 작용 속에 복합적으로 엉켜있다.”16) 달리 이야기하자면 감성의 수용성은 개념의 자발성과 분리된 어떤 공헌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감성의 수용성은 이미 개념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감각이나 감성은 개념화되지 않은, 따라서 개념화되기를 기다리는 지식의 재료를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니며, 감각지각이 개념에 선행하는 것도 아니다.
15) 유희성, 「순자의 인식론」 , 『동양철학연구』, 제58집, 2009, 122~123.
16) J. McDowell, Mind and World, Harvard University Press, 2004, 40~41.
맥도웰이 주장하는 이런 생각은 ‘심리적 유명론’을 주장하는 셀라스(W. Sellars)의 생각에 잘 나타난다. 셀라스는 다음처럼 주장한다.
“내적 에피소드라는 개념에 대해서 미심쩍어하는 철학자조차도 쉽게 빠져드는 소여의 신화에 대한 원천이 있다. 우리가 어린아이에게 그의 첫 언어를 가르칠 때, 이미 우리에게 친숙한 논리적 공간의 구조 속에 그 언어 학습자를 위치시키곤 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 어린아이를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색깔을 갖고 있고 소리를 일으키는 물리적 대상의 세계 속에 있는 인간으로서 간주한다. 비록 우리가 이 논리적 공간에 친숙하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그 언어 학습자가 태초부터 이 동일한 논리적 공간에 대한 어떤 의식적 인지를 갖고 있다는 그림을 생각하는 위험에 빠진다.
...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어린아이에게 언어 사용을 가르치는 과정이 개별자, 보편자, 사실 등등의 논리적 공간 안에 있는 요소들을 분별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처럼 인정하게 된다. 즉 언어 사용을 가르치는 과정이 그 어린아이는 논리적 공간 안에 있는 요소들을 이미 비분별적으로 막연하게 인지하고 있지만, 이 분별적 요소들을 언어적 의미기호와 연결시키는 과정이라고 여기게 된다.”17)
17) W. Sellars, “Empiricism and the Philosophy of Mind”, Science, Perception and Reality, Ridgeview Publishing Company, 1991, 161~162.
셀라스가 ‘소여의 신화’라고 부르는 실책은 바로 언어 이전에 이미 경험적으로 대상에 대해서 분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화의 흔적은 비록 이러한 분별을 지식이라고 여기지는 않지만, 이미 이러한 분별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순자에 나타나 있다. 나아가 이러한 생각은 순자와 칸트의 유사성이라고 유희성이 지적한 세 번째 논제와 충돌을 일으킨다. 우리의 모든 지식이 개념 의존적이며 개념 선제적이라면, 그리고 셀라스가 지적하는 것처럼 비개념적이며 전개념적인 분별 작용을 상정하는 것이 ‘소여의 신화’ 라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인지나 경험적 내용은 이미 개념적이어야 한다. 이것을 부정할 때, 순자나 아우구스티누스가 생각하듯이 감각적으로 분별된 것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심리적 유명론(psychological nominalism)을 주장하는 셀라스에 의하면, “종류, 유사성, 사실 등에 대한 모든 인지는, 즉 추상체에 대한 모든 인지는 – 나아가 개별자에 대한 인지조차 언어적 일이다. 따라서 그러한 종류, 유사성뿐만 아니라, 소위 즉각적 경험 대상인 사실에 대한 인지조차도 언어 사용을 습득하는 과정에 앞서 선제되는(presuppose) 것이 아니다.”18)
징지(徵知)가 개념적이며 언어적 능력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순자에 의하면 자연적이거나 본성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인위적인 것이며 사회적인 것이다. 한센은 이 점을 다음처럼 표시한다.
“실재가 언어의 올바름의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에, 표준적 기준은 규약이어야 한다.”19)
그러나 비록 자연이나 실재와 구분되는 의미에서 순자가 언어를 규약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해도, 오히려 그 초점은 규약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에 맞추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규약성은 우리가 반드시 그것을 준수해야 하는 규범성을 정당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가 규약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우리가 이미 선제하는 개념틀이나 언어틀에 의해 마련된다.
칸트의 인식 구성설을 언어적 전환의 관점에서 잘 보여주고 있는 셀라스나 맥도웰이 주장하듯이 우리의 경험적 내용은 이미 개념적이며 언어적이다. 이런 문맥에서 한센이 지적하듯이 언어의 기준은 실재가 아니라 바로
명이 된다. 이런 생각은 다음과 같은 이광세의 주장에서 명백하게 발견된다.
18) W. Sellars, “Empiricism and the Philosophy of Mind”, 160.
19) C. Hansen, “Philosophy of Language”, A.S. Cua, ed., Encyclopedia of Chinese Philosophy, Routledge, 2003, 574.
“‘선택’을 한다는 것은 판단력을 행사한다는 것인데, 판단력을 행세한다는것은 개념적 움직임(conceptual move)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개념적 움직임을 가능케 하는 것은 어떠한 개념체계의 배경이다. 따라서 자율적 개인이 개념적 공백 속에서 절대적인 선택을 한다는 공론(空論)은 지각적 판단을 백지 상태의 마음(tabula rasa)이 한다는 고전적 개념경험주의의 조리가 맞지 않은 입장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개념적 경험주의의 부조리함은 비트겐슈타인, 셀라스, 기치 등에 의해서 비판받았다. 지각적이건 도덕적이건 판단을 한다는 것은 어떤 개념체계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특히 도덕적 판단을 할 때 전제되는 개념체계의 중요한 부분이 사회적 관습과 실행이라는 것이 핑가레트(H. Fingarette)의 근본적 입장이다. 이것이 바로 유교에서 말하는 예(禮)이다.”20)
20) 이광세, 유교를 다시 생각한다 , 『동서문화와 철학』, 철학과현실사, 1996, 15~16.
이광세는 셀라스를 쫓아서 판단을 한다는 것이 개념적 움직임이며, 그것은 개념체계, 혹은 언어체계를 선제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백지 상태에서 수동적으로 자연적 사물들을 감각을 통해 분별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셀라스가 주장하듯이 그러한 분별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미 특정한 개념틀이나 언어틀을 선제해야 한다.
그러나 순자의 인식론을 이런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동이의 구분을 마련해 줄 수 있지만, 귀천의 구분을 직접적으로 마련해 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분명히 이광세가 핑가레트를 통해 지적하는 것처럼 예(禮), 즉 사회적, 도덕적 관습과 실행이 우리가 도덕적 판단을 할 때 선제하는 개념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런 도덕적 판단과 지각적 판단은 구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중명(謝仲明)은 순자의 마음이 도덕적 마음이 아니라 인식적 마음, 즉 도덕적 인심(仁心)이 아니라 식심(識心)이라고 주장한다. 순자의 마음은 “심의 지각 능력 및 인식 능력”이며, “정서 및 의욕까지도 심 개념 밖에 둘” 정도로 “매우 협소하다.”21) 따라서 이러한 심이 비록 “신체의 지배자이고 정신의 주관자”22)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도덕적 마음이 아니다. 그러한 마음이 자주적인 의지와 의욕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도덕 의지의 자주와 자율적 의미가 아니다.
21) 사중명, 『유학과 현대세계』, 김기현 옮김, 서광사, 1998, 73.
22) 『순자』, 「해폐」 , 176.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도덕 자유의지란 하나의 절대선의 의지이다. 그것이 ‘자유’라고 불리는 근거는 다음 두 가지이다.
(가) 그것은 그 대상이 되는 것의 영향이나 결정으로부터 완전 독립되어 있다.
(나) 그것은 그 자신에 대해서 입법한다.
바꿔 말하면 도덕적 자유 의지는 필연적으로 선(善)이요, 그것이 세운 법은 무불선(無不善)이므로 (그것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추구하는 법이 없다) 그것이 세운 법은 곧 무조건적이다. (즉 잘라 말해서 자유 의지에 의한 입법은 그 어떠한 다른 원인이나 목적 또는 영향과도 관계하지 않는다.) 그러나 순자가 거론하는 심의 의지 능력은 이런 도덕적 자유의지가 아니다.”23)"
사중명은 칸트의 생각에 쫓아서 도덕적 자유의지는 절대 선의지이며, 그것은 인과적 혹은 외부적 영향력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어야 하며, 나아가 무조건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분명히 지각과 인지 능력을 의미하는 순자의 마음은 이런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순자의 마음이 사중명이 지적하는 것처럼 도덕적 마음, 인심(仁心), 양심(良心), 적자지심(赤子之心), 덕성심(德性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러한 마음이 도덕의 근거를 제공해 줄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 오히려 핑가레트나 이광세가 보여주듯이 그러한 마음을 기초로 해서 도덕적 마음을 재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오직 도덕적 마음은 사중명이 지적하듯이 초월층의 질서에 놓여 있어야 하며, 모든 인과적 조건으로부터 절대적으로 독립된 것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자연과 인간을 구분하는 순자에 의하면 바로 이러한 주장 자체가 정당화될 수 없는 주장이다.24)
23) 사중명, 『유학과 현대세계』, 76.
24) 인심(仁心)과 식심(識心), 즉 도덕적 마음과 인식적 마음을 구분하면서 사중명은 다음처럼 이야기한다. “‘이지식심(以智識心)’ 계통에서의 심은 반드시 자연층의 질서(natural order) 가운데 놓인다. ... 반면에 ‘이인식심(以仁識心)’ 계통에서의 심은 초월층의 질서(transcendental oder) 가운데에 놓인다. 우리는 그것을 ‘초자연적(supernatural) 심’ 또는 ‘본체계의 심’ 또는 ‘형이상의 심’이라 부를 수 있겠다. 이른바 ‘자연층’이란 자연 인과(natural causality)에 의해서 완전히 통제되고 설명되는 존재 범주를 가리킨다. 이 범주 내에서는 어떠한 사건이 되었든 또 어떠한 사물이 되었든 모두 그것의 원인이 되는 ‘경험적’ 전건을 갖는다.
반면에 초자연적, 즉 초월층이란 자연층 밖에 있는 것, 자연층 위의 것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자연 인과율이 통제하는 범위에 속하지 않는다. 초자연층은 자연계의 인과 체계와 관계없이 그 자체의 독자적인 인과 체계를 갖는다.”(사중명, 유학과 현대세계, 64.) 사중명이 주장하는 초자연적 질서, 혹은 초월적 질서는 선험적인(transcendental)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초월적(transcendent)이다. 이러한 초월층의 존재를 부정하면 도덕적 마음이 해명되지 않는가? 하늘과 인간을 구분하려는 순자의 의도는 바로 이러한 생각을 부정하면서 인간의 도덕을 해명하려는 시도이다.
III. 존재-당위의 규칙과 행위-당위의 규칙
김철신은 혜시의 평등주의에 대한 순자의 논증을 해명하면서 다음처럼 말하고 있다.
“순자는 귀한 것과 천한 것이 분명히 밝혀지지 않아 등급 질서가 붕괴되는 사회적 혼란을 막기 위한 실천적 요구에서 명학 또는 정명의 필요성을 제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주지하듯이, 순자에게 개인 생활의 지도원리이면
서 동시에 국가조직을 운영하는 기준은 ‘예(禮)’이다. 그런데 이 예의 밑바탕에는 ‘분(分)’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이 ‘분’을 확정하는 것이 ‘명’이다.
기본적으로 혜시와 더불어 명가의 대표적 인물인 공손룡이 ‘무릇 명은 실에 대한 칭위이다’라고 지적하듯이, 명의 일차적 역할은 실을 지시하는 것이다. 순자에게서도 예외는 아니다. 이렇게 명이 어떤 실을 지시함으로써
그 명에 의해 지시되는 ‘이 실(實)’과 그 명에 의해 지시되지 않는 ‘저 실(實)’이 구분되는 효과가 생겨난다. 그러므로 마땅한 방식으로 차등의 질서를 구성하고 실현하기 위해서는 명에 의한 구분을 밑거름 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25)
김철신에 의하면, 명(名)에 의해서 실(實)이 지시된다. 따라서 명은 실을 구분 짓는 근거가 되며, 그럼으로써 차등의 질서를 구성한다. 그러나 그는 혜시의 명실론에 대한 순자의 비판을 소개하면서 다음처럼 말하고 있다.
“순자가 제명의 추요(樞要)로 제시한 계실정수(稽實定數)란 제명할 때 기준은 명이 아니라 실이며, 명과 실 가운데 실이 일차적이고 명은 이차적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혜시가 역물십사에서 보여준 실이 아닌 명을 기준으로 한 명실관계는 순자에게 있어서 전복된 명실 관계를 올바른 관계라고 주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26)
여기에서는 명(名)은 실(實)에 의해서, 즉 이름은 실재에 의해서 결정된다. 만약 순자가 이야기하는 명(名)이 단지 언어기호, 즉 규약된 음성기호나 문자표시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러한 기호는 실재에 의해서 결정된다. 가령 “개”라는 언어기호는 개라는 실재 대상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이미 우리가 언어기호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또한 우리가 개라는 실재 대상을 개념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명(名)이 실(實)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은 언어기호가 우리의 개념적 사용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순자에게서 나타나는 불일치는 없다.
모든 이름, 혹은 언어기호는 우리의 사용, 즉 실재를 지시하는 우리의 실제적인 개념적이며 언어적 사용에 의해 결정된다.
25) 김철신, 순자의 혜시 비판 고찰, 철학논집, 제24집, 2001, 18.
26) 김철신, 순자의 혜시 비판 고찰, 15.
그렇지만 명(名)이 단지 언어기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이며 개념적 내용을 의미한다면, 여전히 언어와 실재, 사유와 실재의 문제가 남아 있다. 우리의 언어, 개념, 사유는 실재에 의해 제약되는가? 아니면 감각
적이며 경험적인 실재는 우리의 언어, 개념, 사유에 의해 제약되는가? 남경희는 다음처럼 후자를 주장하고 있다.
“순자에 따르면, 이름이란 이미 존재하는 사물의 라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실질을 구성하는 힘이 있다. 통념상으로 이름이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은 사실이나 대상을 지칭 기술함으로써이다. 순자는 이러한 통념을 뒤집고 명칭을 통해 사실들이 의미를 지니게 되며, 이름의 제정을 통해서 비로소 사실을 지칭할 수 있다고 논한다. ... 이름이 규범력이나 규제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바로 이름의 기초성, 존재의 언어의존성, 세계와 사물에 대한 언어의 선재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27)
남경희는 순자의 정명론에서 “존재의 언어의존성” 논제를 발견하고 있다.
그러나 순자의 인식론에 의하면 존재가 언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가 존재에 의존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남경희가 주장하는 “존재의 언어의존성”이라는 논제가 순자의 진정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는지 그렇게 분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자가 주장하듯이 정명론이 사회적 질서를 구성하는데 일차적이고 기본적이라면, 순자의 주장은 남경희가 시도하고 있는 것과 같은 방식을 통해 정당화될 수 있다.
27) 남경희, 순자(荀子) 정명론(正名論)의 비트겐슈타인적 이해 , 11.
김철신의 분석에 의하면, 순자는 명실론에서 실의 우선성을 주장한다. 반면에 평등주의라는 “정치적 견해”에서 순자는 명의 우선성을 주장한다. 명실론에서 이야기하는 실(實)은 실재, 대상이라는 의미이며, 그것은 우리 인간의 감각기관과 사유기관에 의해서 파악되는 것이다. 반면에 평등주의에 대한 논의에서 이야기되는 실(實)은 현실, 사회적 현실 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적어도 이러한 맥락에서 실에 대해 두 가지 의미를 구분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자연적, 경험적 의미에서 실재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적 의미에서 실재이다.
자연적, 경험적 의미에서 실재는 우리가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다고 간주되는 자연적 대상을 의미하며, 사회적 의미의 실재는 인간의 인위적 활동을 통해 구성되거나 규약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전자의 경우, 우리가 사용하는 이름은 자연적 이름이 될 것이며, 후자의 경우에는 우리가 사용하거나 제명하는 이름은 비자연적, 인공적, 사회적, 제도적 이름이 될 것이다.
남경희가 주장하는 “존재의 언어의존성” 논제가 일차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곳은 평등주의를 비판하는 순자의 생각이 이루어지는 곳, 즉 사회적이며 제도적 영역이다. 비록 발생적으로 성왕(聖王)이 이름을 제정하였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제정된 이름은 논리적이고 실질적 차원에서 구속력이나 규범력을 갖는다. 분명히 이 제도적 현실에서 우리가 그 규약을 만든 것이라고 해도, 우리는 그 만들어진 규약들의 규범적 제약을 받고 있다. 나아가 이 사회적이며 제도적 현실에서 우리가 하나의 인간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규범적 규칙들을 배우고 실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순자가 주장하듯이 바른 이름의 사용은 중요하며, 그럼으로써 사회적 질서가 흔들지 않은 채 유지될 수 있다. 나아가 올바른 이름의 사용을 배운다는 것은 이미 이루어진 사회적 질서에서 그 이름이 담당하는 기능을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군주”라는 이름을 올바르게 배우고 사용한다는 것은 단지 ‘군주임’이라는 서술적 개념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군주다움’이라는 평가적이며 당위적 개념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셀라스는 두 가지 규범적 규칙을 구분한다. 그 하나가 존재-당위의 규칙이며, 다른 하나가 행위-당위의 규칙이다.28) 이런 셀라스의 구분에서 본다면, 순자의 정명론, 혹은 명분론이 의미하는 규칙은 존재-당위의 규
칙이 아니라, 행위-당위의 규칙이다. 그것은 순자가 표현하는 것처럼 귀천(貴賤)의 구분에 대한 규칙이다. 그렇지만 셀라스는 우리가 언어를 배울 때 일차적으로 배우는 규칙이 존재-당위의 규칙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형식적인 논리적 규칙이며, 또한 내용을 갖고 있는 질료적 규칙들이다.
셀라스가 이렇게 두 가지 규칙들을 구분하는 이유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이미 규범적임을 보여주는 동시에 행위-당위의 규칙이 전제하는 인간의 의도, 그 심적인 것을 언어적이며 개념적인 것에 의존하는 것으로 주장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가지 규칙의 구분에 따르면, 정명(正名), 즉 ‘군주’라는 개념을 배우는 것은 군주다음이라는 어떤 당위적 특성을 인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군주’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올바르게 사용되는지 그 기능적 의미를 배우는 것이다. 언어 제도적 의미에서 군주가 아닌 자를 군주라고 부르는 것은 언어적 실책이 될 것이며, 이름을 올바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점에 있어서 ‘군주’라는 개념의 기능적 의미와 자연 사물에 대한 서술적 의미는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 군주가 아닌 자를 ‘군주’라고 부르는 것이 언어적 실책이듯이, 마찬가지로 빨간색이 아닌 사물을 ‘빨간색’으로 부르는 것도 언어적 실책이 될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빨간색 사물을 인지하기 위해서 이미 개념적이며 언어적 범주를 선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우리가 선제해야 하는 개념적이며 언어적인 범주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순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규약적이고 인위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비자연적인 동시에 비규약적이며 비인위적인 것이다. 이것을 맥도웰은 ‘제2의 자연’이라고 부르고 있다.
즉 우리 인간이 감성적 능력과 개념적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자연적이다.29) 맥도웰이 그것을 ‘제2의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그것은 제1의 자연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비자연적이라는 의미에서 인위적이고 인간적인 것이지만, 우리의 자의성이나 관례성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또는 우리의 자의성이나 관례성이 그것을 선제한다는 의미에서 자연적이다. 그것은 마치 자연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처럼, 우리 인간의 감성과 사유에 주어져 있다. 이런 방식으로 주어진 규칙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바로 언어를 바르게 사용하는 것인 동시에 올바르게 사유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정명(正名)이 사물의 동이의 기준을 바로 세운다는 순자의 주장은 이것을 의미한다.
셀라스에 의하면 행위-당위의 규칙은 존재-당위의 규칙에 유비적 확장이다. 따라서 이미 규범적인 기능을 하고 있는 서술적 개념에 의존해서 그 개념을 평가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군주’란 개념은 단지 언어 제도 속에 기능적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정치적 제도 차원에서 그 개념이나 이름이 적용되는 사람이 그에 상응하는 기능과 행위를 적절하고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는지를 평가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28) W. Sellars, “Language as Thought and Language as Communication”, In The Logical Space of Reasons, Harvard University Press, 2007, 59~61.
29) J. McDowell, Mind and World, 87~88.
IV. 서술과 수행
정재현은 정명론을 명실론과 명분론으로 구분하면서, 공자의 정명론은 명분론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다음처럼 말한다.
“공자는 명(名)을 단순히 이름으로 이해한 자로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듯 하다. 명을 바로 잡는 것이 정치의 첩경이라는 것은 명의 발화가 ‘수행적(performative)’ 기능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언어행위라는 가정 아래서만 손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명(名)은 이름, 실(實)은 그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사물로만 이해한다면, 명(名)이 가진 규범적 혹은 수행적인 측면이 단번에 무너진다.
정명(正名)을, 실재를 정확하게 드러내는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으로만 이해하면, 이러한 정명의 방식으로 정치적 안정을 가져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의 정명은 기껏해야 개념적 명료성을 의미하므로,
우리는 당연히 공자의 제자 자로처럼 공자의 정명이 가져올 정치적 효과에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공자는 정치의 선제조건으로 개념적 명료성을 말하지 않았다.”30)
30) 정재현, 고대 중국의 명학, 30.
정재현은 오스틴(J.L. Austin)에 따라서 서술적, 지칭적 의미와 수행적 의미를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명실론을 지칭적, 서술적 의미에, 명분론을 수행적 의미에 놓고 있다. 그러나 셀라스는 우리가 존재-당위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언어적 행동(linguistic act)’라고 규정하면서, 그것을 ‘언어적 행위(linguistic action)’과 구분한다.31) 오스틴이나 언어행위론에서 주장하는 수행적 행위는 셀라스에 의하면 심적인 의도를 갖고 그에 따라 언어를 사용하는 수행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적 행위가 가능하기 위해서 언어적 행동이 선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보여주듯이 언어적 규칙에 대한 정당화가 무한 후퇴된다.
비록 공자가 말하는 정명이 정재현이 지적하는 것처럼 수행적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셀라스가 말하는 언어적 행동이나 그 존재-당위의 규칙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명실론과 명분론이 단지사실과 가치, 또는 논리와 윤리라는 두 의미32)로 구분된다면, 사실이나 가치를 인식하기 위해 선제되어야 하는 존재-당위의 규칙이나 이러한 규칙이 작용하는 개념적이거나 언어적 공간이 무시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언어 혹은 이름을 바로 세우는 이유는 이름에 걸맞는 명분을 바로 세우는 것을 의미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우리 사유와 행위가 가능할 수 있는 올바른 선제조건들을 해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령 핑가레트는 다음처럼 말한다.
“예식에 맞는 올바른 언어 사용은 물리적 몸동작과 마찬가지로 효율적인 행위를 구성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우리는, 공자의 유명한 정명론(正名論)이 단순히 낱말-묘술(word-magic)에 대한 잘못된 믿음이라거나 전통을 가르치려는 관심에서 나온 공자의 현학적인 노력의 표현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또한 실체(essence)론 - 또는 플라톤의 이데아, 혹은 그와 유사한 신유학(新儒學)적 개념 - 을 읽어야 할 어떤 이유도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논어는 그런 원리에 대한 어떤 암시도 제공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33)
31) W. Sellars, “Language as Thought and Language as Communication”, 61~62.
32) 풍우란은 공자와 맹자의 정명론이 “순전히 윤리적 방면”이었다고 지적하면서,순자의 정명론은 “윤리적 관심과 아울러 논리적인 관심도 지니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풍우란, 중국철학사, 208. 채인후는 그것을 ‘지식’과 ‘정치’ 혹은 ‘지식’과 ‘가치’라는 두 가지로 구분한다. 채인후, 순자의 철학, 127~129.
핑거레트는 올바른 언어 사용이 효율적인 행위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올바른 언어 사용이 없다면, 우리의 효율적 행위란 불가능하다. 핑가레트는 이런 생각을 공자의 정명론이 단어와 대상의 지시
적 의미에 대한 고찰이거나 단어가 어떤 본질, 이데아, 또는 보편자를 지시한다는 생각과 대립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핑가레트에 의하면, 올바른 언어 사용은 예식에 맞아야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올바른 언어 사용의 선제 조건은 예식이라는 규범이나 관례의 체계이다. 따라서 명(名)은 행위를 구성하지만, 그러한 명(名)은 사회적 규범이나 관례, 즉 예(禮)를 선제한다. 그러나 이광세는 흥미롭게 핑가레트의 주장을 다음처럼 재구성한다.
“핑가레트의 일반적인 방향을 (칸트의 표현을 빌려) ‘인도하는 실’로 그것에 따라 유교의 어휘를 메타 철학적 이론으로 해석한다면, 다음과 같이 유교의 입장을 개념적으로 재건할 수 있다.
유교적 입장은 사람들이 어떤 의미에서 선택할 수 있다는 견해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점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개념적인 움직임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더 특수하게 말해 사람들이 의미 있게 도덕적으로 처신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도덕적으로 처신한다는 것은 현대적인 표현을 빌려 어떤 의미에서 개념적 유희를 한다는 것, 즉 어떤 종류의 언어유희(playing a language-game)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교적 개념인 예(禮)를 이런 테두리에 적용하면, 사람이 예의를 지킨다는 것은, 적절한 도덕언어를 이해하고 이에 상응하게 처신한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예의롭게’ 행동하는 것이 ‘자연스럽게’(spontaneously) 행동하는 것과 같다는 뜻은 적절한 도덕적 언어체계에 맞게 개념적 움직임을 한다는 의미이며, 이것이 이런
의미에서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뜻이다.”34)
33) 핑가레트, 공자의 철학, 39.
34) 이광세, 유교를 다시 생각한다 , 17.
이광세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개념적 움직임을 한다는 것과 특수한 의미에서 도덕적 언어를 이해하는 것, 즉 도덕적 개념적 움직임을 한다는 것을 구분한다. 따라서 언어가 행동을 구성한다는 핑가레트의 주장은 일반적 의미에서 성립된다. 그것은 존재-당위의 규칙 차원에서 성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특수한 의미, 즉 도덕적이거나 사회, 정치적 의미에서 도덕적 행위를 구성하는 언어적이며 개념적 규칙은 단지 존재-당위의 규칙이아니라, 행위-당위의 규칙이다. 이러한 규칙은 우리의 언어적 행위를 구성하는 규칙이 아니라, 도덕적 행위를 구성하는 규칙이다. 이런 의미에서 언어가 행동을 구성하지만, 그러한 언어가 도덕적 규칙이나 관례들을 선제한 다는 주장은 도출되지 않는다. 이 점을 남경희는 다음처럼 명백하게 지적한다.
“인간의 삶이 언어놀이적이며, 포괄적이고, 근원적으로 언어에 의존되어 있다고 한다면, 자연언어의 어휘들은 법과 제도, 관습, 관례, 예의, 에티켓 등의 2차적이고 명시적인 규범들의 기초가 되는 가장 기본적인 원규범 또
는 선험적 규범으로서, 명시적 규범들의 내용에 제약을 가한다. 나아가 인간 삶의 다양한 활동과 방식은 어휘들의 힘과 이들과 관련된 법칙(문법)에 기초한다. 이들 어휘들이 선험적 규범이라 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경험 자체가 이들 어휘들이 인도하는 회로를 따라 이루어지며, 우리의 삶과 사고와 행위가 이들 어휘들이 인도하는 행로를 따라 수행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35)
35) 남경희, 순자(荀子) 정명론(正名論)의 비트겐슈타인적 이해 , 23~24.
남경희가 선험적 규범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언어적 행위를 구성하는 존재-당위의 규칙이다. 그것은 우리의 행위-당위 규칙, 즉 이차적이고 명시적인 규범적 규칙들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언어는 정치사회적 규범이나 윤리성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남경희는 이런 주장과 함께 데이빗슨의 생각을 빌려 다음처럼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데이빗슨 역시 믿음(belief)의 요소가 원초적이라 지적하지만, 그가 말하는 것은 어떤 명제적 내용을 지닌 인식적 태도로서의 믿음인데 비해, 우리가 제안하는 것은 보다 기초적인 것으로, 언어기호에 대한 믿음, 그리고 화제에 대한 신뢰(trust)를 말한다. ... 의사소통의 기초인, 화자에 대한 신뢰는 윤리적 태도로서,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언어의 규범적 힘이나 언어적 공간의 기초적 윤리성을 찾을 수 있다. 위에서 우리는 언어가 동물의 통신법과는 달리 인위적인 매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제 이 인위성의 의미와 중요성이 드러난다. 그 인위성이란 바로 믿음과 신뢰가 동반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믿음과 신뢰란 생득적인 것, 본능적인 것,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의사소통의 당사들의 주체적이고 적극적이며 의식인 노력에 의해서만 구비될 수 있는 태도이다.”36)
36) 남경희, 순자(荀子) 정명론(正名論)의 비트겐슈타인적 이해 , 19.
남경희의 이런 주장은 어떤 의미에서 언어, 혹은 의사소통을 사회적 인간의 기본적 윤리성에 의해 기초지우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사회적 행위가 가능하기 위해 명(名)을 선제해야 하며, 명(名)은 다시 우리의 기본적 윤리
적 태도에 의해 가능하다. 그러나 데이빗슨의 ‘자비의 원리’나 남경희가 주장하는 기초적 윤리성은 분명히 타인과의 의사소통, 혹은 정상적인 대화 가능성의 조건이다. 따라서 이러한 조건은 언어적 행동(act)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언어적 행위(action)에 필요한 조건이다. 즉 이러한 조건은 언어적 대화라는 수행 문맥에서 필요한 조건이다. 따라서 언어의 가능성에 대한 선험적 역할을 하고 있는 존재-당위의 규칙은 그런 기초적 윤리적 태도를 함축할 필요는 없다.
V. 자연의 선천성과 인위의 후천성
서술적 용법과 수행적 용법의 이분법과 마찬가지로 자연과 인간, 사실과 가치, 선천성과 후천성 등의 이분법이 순자의 사유를 해명하는데 빈번하게 나타난다. 가령 유희성은 맹자와 순자를 대조시키면서 다음처럼 말한다.
“순자는 맹자처럼 인간의 도덕을 하늘에 근거하는 형이상학인 도덕본체를 부정하며, 인간적 가치는 모두 인간 스스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다만, 인간은 하늘의 규칙적 변화에 대응하여 그것을 잘 이용하여 가치를 창조하
는 존재라고 한다. 이와 같이, 순자는 자연적인 것(natural)은 자연스럽게 ‘저절로 그러하게(自然而然)’ 존재하며 타고나면서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을 의미하고, 인위적인 것(artificial)은 인간의 의식과 노력이 가미되어 후천적으로 얻어진 것이라며, 하늘과 인간을 자연(Nature)와 문화(Culture)를 구분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만물을 낳는 역할을 하는 하늘(天性)과 하늘이 낳은 것을 완성하는 인간의 역할(人性)은 분명히 차원이 다르다는 점에서 하늘과 인간을 이분화(天人之分)한다.”37)
37) 유희성, 순자의 인식론 , 115~116.
어떤 의미에서 유희성의 이러한 지적은 순자에 대한 전형적인 견해이다.
즉 순자는 자연과 인간을 이분화시킨다. 자연은 선천적이며, 반면에 인간적인 것, 혹은 인위적인 것은 후천적이다. 이러한 이분법은 각기 자연과 문화에 대응한다. 이러한 이분법을 전제할 때, 김철신이 보여준 것처럼 자연의 영역에서 실(實)이 명(名)을 규정하지만, 문화의 영역에서는 명(名)이 실(實)을 결정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순자의 정명론이 철학적으로 정당화되기 위해 남경희가 주장하는 것처럼 실(實)에 대한 명(名)의 우선성, 즉 실(實)은 명(名)에 의존하고, 명(名)을 선재한다는 주장이 성립해야 한다. 나아가 이때 명(名)은 셀라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행위-당위의 규칙이 아니라, 존재-당위의 규칙이다. 따라서 사실과 가치의 이분법은 오히려 사실과 규범의 이분법으로 대체된다.
이런 언어 선제성의 논제는 사실적이고 자연적인 것조차 언어적이며 개념적인 규범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비록 규범적인 개념적 틀로부터 벗어나 있는 물자체의 존재를 주장하고 있지만, 칸트가 이야기하는 선험적 관념론이나 앤스컴이 이야기하는 언어적 관념론38)은 바로 이런 생각의 표현이다.
칸트가 경험적 세계가 단지 표상이나 현상이라고 말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경험적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언어틀이나 개념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언어틀이나 개념틀에 의
해서 우리는 비로소 대상에 대해서 지시할 수 있고, 그것에 대한 경험적 내용을 갖는다.
이런 언어 선제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실과 가치의 이분법처럼 자연과 인간의 이분법도 단지 주어진 것과 구성하는 것, 혹은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가령 순자가 말하는 성(性)은
인간의 자연적 본성이다. 그러나 순자가 말하는 심(心)이나 징지(徵知), 따라서 지식심(智識心)은 단순히 그것이 성(性)이 아니라는 근거에서 우리에 의해 구성된 것이며, 후천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사중명은 순자의 철학사상이 체계적이라고 지적하면서 그 성격에 대해 다음처럼 말한다.
38) Anscombe, “The question of Linguistic Idealism”, From Parmenides to Wittgenstein, Basil Blackwell, 1981.
“이 체계의 성격을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나아가 말한다면, 순자는 자연주의자(Naturalist)이다. 순자의 체계 내에서는 초자연적(supernatural) 관념(즉 실체)이 설정되는 법이 없다. 형이상학의 자연주의자들이 거의 다 그러하듯이 순자도 지식론상으로는 경험주의자이다. 그가 말하는 심에는 선험적 원리 같은 것이 전혀 포함되지 않는다. 사물과 예의 법도에 대한 지식은 모두 후천적 학습과 경험을 통하여 획득된다.
순자의 도덕철학 역시 자연주의와 경험주의를 벗어나지 않는다. 도덕의 기반 또는 근원을 놓고 볼 때 순자는 도덕을 그 어떠한 초자연적인 것의 전제 없이 건립한다. 즉 도덕법칙은 내재적이거나 본유적(innate)인 것들이 아니다. 순자는 시종 일관하여 도덕 법칙의 근원을 성왕(聖王)이나 경험과 같은 ‘나’ 바깥 것에 두면서 외재적이고 타율적 권위에 의존하는 도덕이론을 세운다.”39)
39) 사중명, 유학과 현대세계, 88.
사중명은 순자에게서 “선험적 원리 같은 것은 전혀 포함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선험적 원리가 선천적이거나 후천적인 것이라는 발생의 관점과 상관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험적 내용이 가능하기 위해서 우리가 선제해야 하는 개념적이며 언어적인 원리나 규칙들은 적어도 칸트가 주장하는 것처럼 경험 독립적(a priori)이며, 동시에 그것이 가능한 경험을 구성한다는 의미에서 선험적(transcendental)이다. 한 개념이나 명제가 경험 독립적이라는 것은 그 개념의 발생 원천과 상관없이 그 개념이나 명제가 경험에 의해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칸트가 말하는 선험적 인식이란 대상과의 연관을 맺는 경험 독립적 개념이나 원리를 의미한다. 그것은 지식의 발생적 기원이나 원천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정당성, 즉 그 권리 근거를 해명하는 것이다.40)
따라서 이러한 개념이나 원리가 선천적인지, 아니면 후천적인지 하는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서술적 의미와 수행적 의미의 이분법이 언어적 행동(act)을 무시하는 것처럼, 그리고 사실과 가치의 이분법이 존재-당위의 규칙을 무시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천성과 후천성의 구분은 바로 이러한 선험성을 무시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그러한 이분법은 우리 사유와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그것을 제약하는 선험적 규칙들을 무시하고 있다. 이런 한에 있어서 정명(正名)의 가치는 단지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40) 칸트는 다음처럼 말한다. “대상들이 아니라 대상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 방식을, 이것이 경험 독립적으로 가능하다고 하는 한에서 일반적으로 다루는 모든 인식은 선험적이다. 그러한 개념들의 체계는 선험철학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Immanuel Kant’s Critique of Pure Reason, Macmillan, B25) 선험적 인식은 대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대상들에 대한 우리 인식 방식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인식 방식은 경험 독립적인 것이다.
“공간도, 공간의 어떤 경험 독립적 규정도 선험적 표상이 아니다. 이런 표상들은 전혀 경험에 근원을 두고 있지 않다는 인식과, 그러면서도 이 표상들은 경험 대상들과 경험 독립적으로 관계 맺을 수 있다는 가능성만이 선험적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다.”(B80)
칸트는 경험 독립적인 것을 “전혀 경험에 근원을 두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때 근원은 발생적 근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인식 내용이 경험에 의해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나아가 선험적 인식은 경험 독립적이지만, 경험 대상과 관계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선험적 인식은 경험적 대상과 경험 독립적으로 관계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점은 순자가 말하는 심(心)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분명히 심(心)은 성(性), 인간의 자연적 본성이 아니다. 그럼에도 심(心)은 인간과 다른 존재자들을 구분하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이다. 이러한 심(心)은 발생적 차원에서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논리적 차원에서 이러한 심(心)은 언어적이며 개념적 내용과 마찬가지로 우리 경험적 내용을 구성하게 하는 근거이다.
“심(心)이 생기면 지(知)가 있고, 지(知)와 함께 분별력이 있다.분별이라는 것은 많은 것을 동시에 아울러 다 안다는 것이다. 동시에 아울러 다 안다는 것은 여러 갈래로 나누어 본다는 것이다.”41)
41) 순자, 해폐 , 173~174.
순자의 이러한 주장을 발생적 차원이 아니라 논리적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우리 마음이나 행위의 발생 원천이 비록 비자연적인 인위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심(心)은 모든 인위적인 인간적 활동의 근거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미 개념적이고 능동적인 심(心)이 왜 우리가 언어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한지를 정당화해 주는 역할을 한다.
VI. 언어의 질서와 정치의 질서
김철신은 혜시와 순자의 차이를 다음처럼 지적하고 있다.
“주례를 통해 유지되던 기존의 등급 질서가 급격히 해체되어 나가는 것을 똑같이 목도한 혜시와 순자는 전혀 다른 처방을 내놓았다. 혜시는 천지와 천인 관계가 수직적이고 종속적인 관계에서 수평적이고 횡적으로 변모되어 나가는 것에 발맞추어 인인(人人) 관계마저도 수직적 관계에서 수평적관계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차등적 등급 질서에 반하는 평등주의를 혜시는 표방하였다.
반면에 순자는 귀한 것과 천한 것에 대한 구분, 즉 등급 질서의 체계적 구축과 확정만이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는 길이라고 보았다. 그렇다 보니 혜시 식의 평등주의는 현실과 유리된 이상주의적 처방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무질서화를 획책할 무책임한 역사 실험이라 간주하고 이를 거부하고 나아가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42)
42) 김철신, 순자의 혜시 비판 고찰, 19.
정명에 대한 순자 주장에서 볼 수 있듯이 정명은 동이와 귀천에 대한 구분이다. 이 두 가지 구분에 따른 혜시의 주장은 동이나 귀천에 대한 언어적이며 개념적 구분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에 근거하고 있는
사회적 구분은 실재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귀천이 아닌 동이(同異)에 대한 언어적이며 개념적 구분을 거부할 때, 우리의 개념적 사유는 불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혜시의 주장은 매우 강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그 주장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비개념적이며 비언어적인 지식을 가정해만 하며, 따라서 장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런 주장 자체가 정당화되지 않는다.
반면에 혜시의 주장이 귀천에 대한 구분에 대한 것이라면, 따라서 혜시의 주장이 귀천에 대한 구분이 임의적이며 자의적이거나 기껏해야 사회적 규약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분명히 사회적 등급 질서는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분명히 순자는 비록 동이와 귀천의 질서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그 두 가지 질서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질서를 구분할 때, 동이의 질서가 주는 규범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이미 주어진 사회적 귀천의 질서를 반드시 인정할 필요는 없다. 만약 이 두 가지 질서의 구분이 없다면, 기존 사회적 질서를 비판하고 대체하는 일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주어진 사회적 질서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바로 이
점이 이택후의 다음과 같은 평가를 가능하게 해준다.
“순자는 씨족 전통의 민주주의와 인도적인 기미를 던져버리고 계급통치에 대한 현실적 논증을 하는데 성공했으나, 실제로는 후세의 엄격한 등급적 차별을 통치질서로 하는 전제국가의 사상적 기초를 새로이 만드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43)
43) 이택후, 중국고대사상사론, 정병석 옮김, 한길사, 2005, 242.
그러나 셀라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행위-당위의 규칙이 존재-당위의 규칙에 의존하는 것이라면, 주어진 사회적 질서를 비판하기 위해서라도 존재-당위의 규칙에 의해 가능할 수 있는 언어적, 개념적, 논리적 사유가 요구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정명(正名)이 공자가 말한 것처럼 모든 것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언어적, 개념적, 논리적 사유의 선행성에 대한 주장으로 이해할 때, 비로소 정당화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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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Xunzi’s view on rectifying names and the linguistic presupposition
Kim Young-Kun (Sogang Univ.)
I argue that Xunzi’s view on rectifying names should be understood in terms of the linguistic thesis; the language is presupposed in order to understand the reality or actuality and human action. The reasons for my claim are as follows; (i) Xunzi’s cheng-chih or the confirmatory function of the mind is the conceptual activity. In the logical or de jure order, this activity is prior to the sensation. (ii) The ought-to-be rules must be distinguished form the ought-to-do rules. The rules which must be elucidated by doctrine of rectifying names are the ought-to-be rules. (iii) By descriptive-performative dichotomy, the ought-to-be rules or the linguistic acts are neglected. Rather, the linguistic actions and the moral actions are dependent on the linguistic acts. (iv) By fact-value dichotomy, the ought-to-be rules or the linguistic acts are neglected. (v) The distinction between the a priori and the acquired must be understood in the genetic order. In the de jure order, the conceptual or linguistic knowledges are the transcendental rules. (vi) It must be distinguished between the linguistic community and the socio-political community. It is possible to criticize the socially given rules or conventions by this distinction.
Key words: Xunzi, rectifying names, cheng-chih, ought-to-be rule, the performative, apriority, the transcenden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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