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20일 궂은 날씨 속에서 대전을 출발한 버스가 호남고속도로를 벗어나 정읍 내장산의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 화개산(華蓋山) 기슭에 자리 잡은 울산김씨 김창하공의 묘소를 향하여 달리고 있었다. 궂은 날씨로 차창에 성에가 끼어 남녘의 봄 풍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어 아쉬웠다. 버스가 멈춘 곳은 자포리라는 표지석이 있는 마을 입구였다. 행정구역상 순창군 복흥면 반월리 였다.
마을 뒤의 산기슭을 향한지 한참 만에 저수지와 울산김씨 제실이 나타났고 제실 뒤로 제법 큰 산이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으로 양팔을 벌려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산기슭에는 서너 개의 묘가 상하로 드리워 있었다. 묘소를 향하여 다가서는 동안 진입로가 다소 음습한 토질로 보였다. 묘소에 이르러 보니 우리 일행이 보고자 했던 김창하선생의 묘가 가파른 혈장의 제일 위에 붙어 있었고 그 아래로 3기의 묘가 더 매달려 있었다.
묵례를 올리고 전후좌우를 둘러보고 혈장(穴場)을 살펴보았는데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는 옛 속담이 떠올랐다. 이곳이 어떤 곳인가! 속칭 옥룡자 유산록에 있다는 자봉포란형(雌鳳抱卵形)으로 인촌 김성수선생의 9대조 묘로 많은 발복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이 아닌가. 형태상으로 산이 묘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은 생각지도 않고 무심하게 있는데 묘가 산을 짝사랑하여 산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산과 묘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겉돌고 있는 것이다.
혈정(穴情)을 보기위해 내맥(來脈)을 살피며 뒤로 올라가나 가파른 비탈로 결지(結地)에 필요한 탈살(脫殺)을 위한 기복과 굴곡 그리고 속기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숨이 차서 더 오르기를 포기하고 다시 내려왔다. 혈장 주변을 보니 백호 쪽으로 작은 줄기가 혈장을 보호하려는 듯 짧게 내려갔고 청룡 쪽으로도 약간 거리를 두고 낮고 길게 내려 간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겠다.
대개 혈장에는 혈을 맺고 남은 기운이 앞에 뭉쳐 순전(脣氈)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곳은 순전이 빈약하여 가파른 혈장에 평탄한 지형을 만들지 못하였다. 즉 음래양수(陰來陽受)가 안 된 것이다. 높은 산의 결혈(結穴)과 마찬가지로 가파른 곳에서는 와(窩)의 형태가 있거나 순전이 발달하여 평(平)을 이루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렇다 할 혈증(穴證)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좀 더 멀리 시야를 돌려 앞을 보니 청룡 백호가 환포하고 용호(龍虎)의 끝이 둥글게 솟아 마주한 곳에 저수지가 있고 외백호(外白虎)가 끝이 둥글게 솟아 청룡과 백호 끝의 틈을 막고 안산(案山)의 역할을 하고 수구를 관쇄(關鎖)하여 보기 좋았다. 마치 삼태성처럼 세봉우리가 모여 수구를 지키고 있는데 청룡 끝과 안산의 두 봉우리 형태가 알(卵)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현무(玄武)의 정상이 뾰족하고 양쪽으로 줄기가 감싸니 이를 보고 자봉포란형(雌鳳抱卵形)이라 한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청룡이 낮아서 장풍(藏風)을 못하고 청룡 줄기 너머로 바깥 들판인 외명당(外明堂)이 내려다 보이니 아쉬웠다. 산을 내려오면서 다음에 시간을 내서 진혈(眞穴)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찾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버스에 올라 복흥면 소재지에 있는 식당에 들러 점심을 먹고 대방리로 이동하여 금방동 뒷산 고개에 올라가니 크고 멋진 나무 한그루가 우리를 반겼다. 나무를 카메라에 담고 고개 너머 왼쪽으로 조금 내려가니 노사 기정진 선생의 조모 묘가 나타났다. 비석이 없어 확인할 길은 없으나 이곳이 황앵탁목형(黃鶯啄木形)이 맞다 하였다.
먼저 일동 묵례를 올리려고 묘 앞에 도열하였는데 너무 좁고 가파르니 뒤로 굴러 떨어질 것 같아 불안하였다.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하였으나 주변 봉우리들에 둘러싸여 장풍에는 문제가 없었으며 명당(明堂)과 물은 볼 수 없었다. 뒤로 내려온 맥도 뚜렷하였다. 그러나 이곳도 오전에 본 곳과 마찬가지로 가파르게 비탈진 곳으로 좁은 공간에 묘를 써서 이해할 수 없었다. 현재의 곳보다 다소 평탄한 곳이 위에도 있고 아래에도 있는데 왜 이곳에 점혈(點穴)하였을까. 혹시 당시에 지관을 서운하게 하여 일부러 비탈진 살기(殺氣)에 점혈하지 않았나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이 생각 저 생각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산을 내려와 다음 행선지를 향하였다. 그곳은 복흥면 상송리에 있는 서정마을의 자연당 김시서 선생 묘소다. 마을 골목을 지나 뒷산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니 재실이 나타났고 재실 마당을 통하여 묘소에 올랐다. 앞에서 본 두 군데의 가파른 혈장에 비하여 평탄하고 넓은 혈장이 대조적이었다.
묵례를 올리고 입수룡을 보기 위해 뒤로 내려온 줄기를 따라 올라갔다. 입수룡은 높낮이의 차(起伏)가 별로 없고 굴곡도 없이 곧게 뻗어왔다. 다시 혈장에 내려와 주변을 살펴보니 너무 넓어 기운이 흩어진 형태였다. 그리고 특별하게 기운이 뭉친 곳을 볼 수 없었다. 분합(分合)과 계수(界水)의 흔적이 없이 평탄하여 기운이 흩어졌으니 결지(結地)할 마음이 없는 형태였다.
그리고 혈장 아래로 양쪽에 두 줄기가 내려갔는데 혈장보다 낮았다. 아래의 두 줄기기 감싼 곳으로 내려가면 장풍도 뒤고 보다 아늑하여 이곳보다는 밑에 있는 재실 쪽을 주목해야 할 형태였다. 현재의 곳은 전후좌우로 봉우리가 있으나 이곳을 향하여 유정(有情)한 형태라고 보기 어렵고 장풍에도 문제가 있었다.
뒤의 현무(玄武)는 말 등 같고 앞쪽 아래로는 오목하여 마구간 같아서 이곳을 천마입구(天馬入廐)형이라 한 것 같다. 다라서 현재의 곳에서 아래로 내려가 오목한 곳을 살펴보아야 할 곳이다. 만약 제실 뒤로 내려온 맥이 있으면 그 곳을 찾아보아야 하고 가운데로 내려온 맥이 없다면 제실 터를 살펴보아야 하겠다.
어쨌든 현재의 곳은 혈을 맺을 혈장이 아니고 평탄한 혈성(穴星) 머리에 작혈(作穴)하여 마치 와형(窩形)의 혈(穴)에서 뒤의 현릉(弦稜; 테두리)에 묘를 올려놓은 꼴이 되었으니 묘와 혈장이 겉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도 앞서의 두 곳과 마찬가지로 진혈(眞穴)을 찾지 못하였거나 점혈(點穴)에 실패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행선지로 이곳과 같은 상송리의 가까운 곳에 있는 울산 김씨 선영을 향하여 갔다. 작은 저수지를 끼고 돌아가니 낙덕정(樂德亭)이라는 정자가 보였다. 정자를 뒤로 하고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동안 바위절벽이 보였고 그 위로 평탄한 곳에 이르니 네 개의 묘가 상하로 거리를 두고 있었다.
혈장이 상하로 길고 약간 굴곡 되어 있었다. 맨 위에는 성산 이씨 묘가 있고 아래로 월담선생과 운곡선생 그리고 끝에 김요일 공의 묘가 차례로 있었다. 이곳은 오늘 답산 중 네 번째 장소인데 앞서 본 곳과 비교하자면, 김창하공과 기정진공의 혈장은 가파른 비탈이었고 김시서공의 혈장은 너무 넓어 기운이 모이지 못한 것에 비하면 이곳은 높은 곳인데도 비교적 평탄한 혈장에 내맥(來脈)도 살아있었다.
뒤의 현무(玄武)를 올려다보니 맥은 잘 내려왔으나 양쪽으로 날개를 벌리지 못하여 혈장을 품어 보호하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전쟁터에 병사를 보내놓고 자력으로 살아서 돌아오라 하고 끝까지 감싸 보호하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앞쪽으로 펼쳐진 들판인 명당은 넓었고 그 건너로 보이는 주작(朱雀)은 아름다운 형상으로 응대(應對)하고 있었다. 모든 묘의 좌향은 그 봉우리를 향하고 있었다.
상하로 드리운 네 개의 묘 중에 어느 것이 점혈법(點穴法)상으로 합당한지 분석해 보자면, 먼저 맨 위에 있는 성산이씨 묘는 내맥의 기운을 제일 먼저 받고 또 양쪽으로 거리를 두고 선익(蟬翼)처럼 뻗어 내렸으나 모든 기운이 여기서 멈추지 못하고 아래로 움직여 도망가고 있었다. 맥이 구불거린다는 것은 살아 움직인다는 의미인데 묘소 앞으로 멈추지 않고 구불거리며 살아서 움직여 나가고 있었다.
위에서 두 번째인 월담(月潭)선생 묘는 움직이고 있는 맥 위에 있었다. 따라서 한쪽은 둥글게 살쪄있으나 반대편으로는 오목하게 요결(凹缺)되어 맥의 구부러진 곳에 있어 정이부동(靜而不動)의 혈장 조건에 위배되었다. 따라서 이곳도 기운이 지나가는 자리로 멈추어 응결된 곳이 아니었다.
위에서 세 번째인 운곡(雲谷)선생 묘는 양쪽이 모두 둥글게 부풀어 살찌고 앞으로 움직여 나간 맥도 없어 모든 기운이 이곳에 모이고 정이부동(靜而不動)하며 위의 묘들과 함께 높은 지형의 최대 장점인 평탄(平坦)함을 이루었으니 혈장의 점혈법 상으로는 바로 운곡선생 묘 가까운 곳을 주목해야겠다.
끝으로 김요일공 묘는 순전(脣氈)이 시작되는 지점에 위치하여 정혈처에서 아래로 벗어나 혈을 맺고 남은 기운을 받는데 불과 하였다. 이와 같이 혈의 진가(眞假)를 떠나서 이러한 형태의 혈장(穴場)에서 점혈법(點穴法)을 공부할 수 있는 곳으로 초학자분들이 꼭 둘러보고 연구해야 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산을 보는 법은 산과 대화를 해야 하는데 산과의 대화는 그 형(形)을 읽는 것으로 산의 의도를 알아내야 한다. 산의 의도는 형태상으로 보아 산의 몸동작 하나하나를 관찰해야 한다. 여기에서 어떠한 선입관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선입관을 버리려면 때로는 가끔 나경을 소지하지 않고 산에 올라 오직 형세만으로 보아, 말을 못하는 산이 몸동작으로 자기의 뜻을 표현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산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를 알아내야 하며, 평상심을 유지하여 좋게만 보이거나 나쁘게만 보이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된다.
산을 보는 안목을 높이려면 개안(開眼)이 되어야 하는데 개안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형세의 기본 이론을 숙지하고 그에 따른 길흉(吉凶)을 알고 어떤 형태는 무엇을 뜻하며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그 산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초학자 회원님들은 유념하시길 바란다.
어느덧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오전에 내리던 비는 개었으나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다음 행선지인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선생 생가 근처에서 버스가 섰는데 필자는 총무님이 준비해온 족발과 소주 한 잔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일행들과 떨어져 일부회원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술은 참으로 좋은 마음의 보약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위도 녹여주고 근심걱정도 일시적이나마 덜어주고 스트레스도 해소해주며 특히 장거리 여행의 차멀미도 없애주니 가까이할 벗으로 손색이 없는데, 필자는 체질상 술을 많이 못 먹기 때문에 그것이 늘 불만이었다.
버스에 올라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벌써 대전이었다. 오늘 고생한 회원님들께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침 일찍부터 황사비가 계속되어 평소의 절반정도(32명) 참석한 답산이었는데 이러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참석한 회원님들은 풍수지리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고 생각되어 존경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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